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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

대구특강20091121-칼 바르트 신학의 모순b자유게시판[신학]

대구특강20091121-칼 바르트 신학의 모순b

이름 : 한윤범(IP:119.192.174.148)

대구특강20091121-칼 바르트 신학의 모순b

(강의:이근호 목사)

시작합시다.

하나님의 계시가 뭐로 축소가 되느냐 하면, 축약, 축소, 환축, 언약으로 축약이 됩니다. 언약으로 축약이 되는 이유는, 언약 안에 예수 그리스도가 들어있는 정도가 아니고 언약 안에 들어있는 예수가 언약도 만들어내고 계시도 만들어낸다.

그렇다면 우리가 쳐다보죠. 우리가 아는 것은 신의 계시죠. 앞에 뭘 넣읍시다. 그냥 계시라 하면 뭐하니까. 살아계신 하나님의 계시를 우리가 아니까 그 계시가 어떻게 미끄러져 가는가를 보자. 언약적으로 가는구먼. 그러면 우리의 눈총을 언약에 가자, 고! 그 다음에 언약 속에는 예수님이 계시거든요. ‘가자.’라고 생각하는 우리가 예수로부터 출발한 언약과 계시로서 우리에게 온 것 하고 방향이 서로 맞지 않을뿐더러 여기서 충돌이 일어나는 거예요. ‘신의 계시는 언약이래. 쉽다. 언약 안에 예수 그리스도가 들어있대. 예수 믿으면 되겠다.’라고 생각하는 그 생각이, ‘너 맞을래?’ 그게 잘못이라고 치고 들어온 거예요.

그 치고 들어와서 우리 가슴에 세 가지 종류의 계시가 성립되는 거예요. 하나는 바로 계시 그 자체이신 예수 그리스도, 하나는 말씀, 또 하나는 선포된 쉽게 말해서 설교. 이 세 가지가 우리 가슴에 와 닿아서 이 노선, 우리가 추종하는 이 노선과 예수님이 내세우는 이 노선과의 마찰을 우리 마음 판에 도달하는 세 가지의 계시 유형으로 우리에게 충돌하고 공격하는 식으로 계시가 주어진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이 말은 뭐냐 하면, ‘네가 감히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부정하지 마. 너는 감히 성경말씀에 대해서 자유비평가들이 막 파헤치는데 J, P문서하면서. 너, 그럴 자격 없어. 네가 감히 복음적인 설교에 대해서 비판하지 마.’라는 절대적 권위로 공격하죠. 왜냐하면 우리는 여기서 반발이 나오기 때문에. ‘예수님, 우리가 알아서 믿겠습니다.’ 이런 반발. 말씀? 성경이야 옛날 과거에 편집된 것, 조립한 건데. 설교? 개나 소나 다하는 게 설교인데. 이런 식의 반발에 대해서 절대적인 권위로 충돌을 일으킬 때 여기서 비로소 구원에 합당한 회개가 나오죠. 회개만 나오는 것이 아니고 믿음도 나오고 소망, 사랑도 나오는 겁니다.

그러면 그전에 캘빈은 뭐라고 했느냐? 캘빈신학은 이런 충돌과 마찰에서 회개, 믿음, 소망, 사랑, 칭의라든지 영화로움 이런 게 나오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성령이 임하면 믿음을 주게 되면 인간내부에서 믿음이 자생하고, 소망 생기고, 사랑이 생겨서 갖고 있는 믿음으로 이제 성경을 볼까나? 하고 믿음으로 성경해석하면 괜찮은 해석이 되고, 소망과 사랑으로 사도 바울의 권면을 행동하면 이게 뭐가 되겠어요? 그들은 성화론이 되죠.

칼 바르트는 믿음이라 하는 것은 인간에게 나올 수 없고 하나님의 계시가 부딪치는 그 틈새에서 사건으로 발생되는데 비해서 기존의 캘빈신학은 내 믿음 내가 늘 갖고 있는 거예요. 한번 성령이 오게 되면 믿음, 소망, 사랑이 늘 갖고 있어서 가진 믿음으로 믿음을 잘 활용할 것이냐, 말거냐는 누구 결정입니까? 내 결정이죠.

내가 정신 바짝 차려서 ‘한번 믿어보자’ 하면 믿게 되고, ‘세상에 나가 돈 좀 벌까? 믿음 생활 한 오년 좀 미루겠습니다. 난 돈 좀 벌어서 교회 오겠습니다.’라고 믿을 수 있는 여유도 인간에게는 있다고 개혁주의신학에서는 그렇게 주장하는 거예요. 그러면 목사가 뭐라고 하느냐 하면, 여러분 캘빈신학에 의하면 여러분의 믿음을 썩히지 마시고 활용하시면 성경에서 약속한 모든 보너스를 하늘의 모든 축복을 믿음을 활용하면 주고 만약에 믿음을 나태하게 방치하면 그런 보너스가 없습니다. 그러니까 열심을 내서 주를 섬기자고 나온다 말이죠.

그러면 그 다음에 궁금한 게 뭐겠어요? ‘그럼 목사님. 열심을 내서 주를 섬기는 모델 되는 분을 제시해주시면 우리가 따라 하겠는데, 누가 믿음대로 사는 모델입니까?’ 하면 교회에서 누굴 제시하겠습니까? 역시 목사 본인. ‘여러분, 나를 본 받으세요. 나처럼 하면 복 받습니다.’ 하든지 그게 너무 경솔하든지 너무 속 보인다 싶으면 그 교회 부자, 돈 많은 사람, 기도 많이 하는 권사, 예언, 투시하는 능력을 가진 권사님해서

‘저분이 능력이 있는 것은 이번에 기도원에 가서 동굴 속에서 쑥과 마늘 먹고 40일 금식해서 얻은 능력인데, 여러분들도 다 때려치웁시다. 이번에 집단적으로 기도원에 기도해서 은혜 받아 회개해서 우리도 성경에서 약속한 하늘의 복을 듬뿍 받아서 세상적 복과 하늘의 복을 받읍시다.’라고 나오는 것이 캘빈신학이었단 말이죠. 그 신학에 대해서 칼 바르트가 그게 바로 비 언약적인 이방종교라는 거죠.

그렇다면 칼 바르트의 모든 예수 그리스도의 언약은 그걸 문자로 성경을 해독하거나 풀이할 문제가 아니고 사건화 되죠. 그래서 칼 바르트는 하이데거의 철학을 신학화 시켰다는 평을 받는 겁니다. 사건이 주어지게 되면 사건의 대상이 있어요. 사건을 칼 바르트는 말씀 사건이라 해요. 말씀 사건이 터지게 되면 대상이 있는데, 그 대상을 바로 ‘실존’이라 해요. 이거는 칼 바르트뿐만 아니고 불트만도 그렇게 했는데.

하나님의 말씀이 사건화 되어서 공격을 치게 되면, 여기서 그 실존은 깨어지고 새로운 실존이 나오는데 이걸 새로운 피조물이라 봅니다. 그러니까 캘빈신학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뭡니까? 자기 속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 캘빈신학에서 하나님 형상이라는 것은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공통적으로 갖고 있는 속성을 두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그걸 공유적 속성이라 하죠. 그게 뭐냐 하면, 아무리 죄 지어도 여전히 남아있는 게 있다는 거예요.

그게 뭐냐? 선이 좋은 줄 알고, 거룩이 좋은 줄 알고, 양심대로 사는 것, 남을 보면 불쌍히 여기고 측은지심 이런 것. 인간 속에 아직도 남아있는 하나님의 형상, 비록 죽어있지만 말씀이 와서 치면 그게 되살아날 수 있는 어떤 잠재적인 그런 여지, 그걸 하나님의 형상이라 해서 말씀을 보고 성경공부하면 죽었던 형상이 되살아나는 걸 캘빈신학에서는 에베소서 5장을 가지고 하나님 형상을 본받자는 거기에 해당되는 거예요.

우리는 예수 믿는 걸 십자가 믿고 용서 받고 그 다음에 성령을 받아서 신의 형상을 본받고 예수님에까지 자라난다고 이렇게 이야기하죠. 에베소서 4장에 의해서. 그게 공유적 속성을 이야기해요. 같은 속성을 개발해서 하는 겁니다.

제가 첫째 시간에 그걸 뭐라고 합니까? 자기 수양. 잠재돼있는 신성을 개발해서 ‘내가 이렇게 착할 수가 있어?’ 자기 감탄에 빠지는 것, 자기 수양. 그래서 자기 수양을 하기 위해서 인간은 성령께서 선물로 준 믿음, 소망, 사랑으로 활용을 하는 거예요. 말씀을 보고 기도를 하게 되면 활용이 되면서 신의 형상을 더욱더 본받을 수가 있다고 본 반면에

이게 사건이 되서 새로운 피조물이 되면 어떻게 되느냐 하면, 여기서 교체작업이 일어나요. 그 교체작업을 하면서 나타나는 게 뭐냐? 인간 속에 숨어있던 죄가 하나, 둘씩 발각이 되는 사태가 벌어져요. 칼 바르트에 의하면. 그렇게 하는 작업까지도 포함시켜서 그게 언약사건, 다른 말로 하면 말씀사건, 다른 말로 하면 말씀사건인 동시에 언약사건 결국 그게 예수 그리스도의 사건이 되는 거예요. 예수님의 사건이 되는 겁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사건이 된다고 한다면, 그 다음에 파헤칠 것은 예수님이 누구냐 하는 문제입니다. 그게 칼 바르트에서 제일 어려운 대목이에요. 예수님이 누구냐 하는 겁니다. 예수님이 누구냐를 알아야 예수님의 사건이 터질 것 아닙니까. 그 다음에 그 사건이 언약사건 되고, 언약사건이 와야 말씀사건이 되서 새로운 피조물 되고 우리 안에 그리스도가 살아있으니까.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냐는 이 문제에 대해서 칼 바르트는 어떻게 전개하느냐 하면, 예수님마저도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사건이 돼버려요. 그러니까 하나님 아버지 앞에 있는 예수님이 자신이 말씀사건화 됨으로 말미암아 이 사건이 모델이 되어서 앞으로 구원받아야 될 모든 피조물에게 예수님에게 일어난 모든 사건이 같이 병행해서 예수님 주도하에 일어나는 일이 있을 때 그것이 새로운 피조물이라 보는 겁니다.

그렇다면 우리 이야기의 초점이 갑자기 어디로 모아졌지요? 이제는 모든 곁가지는 다 떨어져나가고 남는 건 성부 하나님 앞에서 성자는 어떤 분이냐? 거기에 초점이 모이겠죠. 이러한 예수님 관점 때문에 거의 모든 신학자들이 예수님을 반대하는 겁니다. 왜? 하나님 앞과 예수님 앞에 사건을 일으키면 방금 뭐가 떨어져나간다 했습니까? 모든 인간들이 떨어져나가죠.

떨어져나간 인간 속에 바로 신학자, 본인들이 있기 때문에. 그리고 사랑하는 내 자식, 내 아내 구원받아야 될 우리 아버지, 우리 엄마 이런 사람들이 다 떨어져나가겠지요. 그럼 어떻게 됩니까? 교회 가서 기도해서 ‘내 아들 구원해주세요, 내 아버지 구원해주세요, 내 엄마 구원해주세요.’ 하는 기도가 소용 있습니까, 없습니까? 다 떨어져나가야 되죠. 소용이 없는 거예요.

결국 인간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떨쳐내는 그런 신학이라면 그 칼 바르트 신학을 받아들이는 교회 같으면 사람이 오겠습니까, 안 오겠습니까? 사람이 오질 못해요. 일년 250만 온다는 갓바위에 ‘여기는 어떤 효험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간판 걸어버리면 누가 오겠어요? 아무도 안 오죠. 만약에 우리교회에 ‘구원받지 못하는 교회’ 이런 간판 걸면 아무도 안 오겠지요.

바로 칼 바르트가 이렇게 그야말로 오직 예수 그리스도 일변도로 나가니까 여기에 대한 반발이 이거는 엄청난 거예요. 칼 바르트 주장이 성경적으로 맞고, 안 맞고, 논리가 맞고, 안 맞고를 떠나서 목회에 쓸모 짝이 없는 신학이 돼버려요.

목회가 뭡니까? 사람 끌어 모으는 것 아닙니까. 교회에서 사람 끌어 모아서 그게 돈 되고 목사 노후대책이 되어야 되는데 사람을 끌어당기는 유인책이 없는, 다른 말로 해서 자본주의 하에서 상품화되지 않는, 시장에 내놔도 사람들이 찾지 않는 상품은 아무리 노동시간 집어넣어도 팔리지 않는 상품은 모든 가치는 다 날아가 버린다는 게 마르크스의 주장입니다.

팔리지 않는 상품은 상품이 아니지요. 사람에게 인기 없는 복음은 복음이다, 아니다? 복음이 아닌 거예요. ‘사람에게 인기를 끊어놓고 우리 시작하자’라고 칼 바르트가 이야기했을 때 사람들을 끊어놓자는 그것 때문에 칼 바르트가 싫어하는 거예요. 칼 바르트가 옳고 그름을 떠나서 교회 장사가 안 된다는 거예요.

지금도 칼 바르트신학을 거론하는 사람들이 그게 칼 바르트의 중심적 정신, 사상을 거론하는 게 아니고 칼 바르트의 유명세, 칼 바르트가 상품화 가치가 있다고 여기고 그 대단한 신학적 권위를 편집해서 왜곡시켜서 뭔가 민중의 아픔과 같이 할 수 있는 그런 칼 바르트? 대중의 한 맺힌 걸 풀어주는 그런 칼 바르트 쪽으로 변개시켜서 그렇게 주장하죠. 그래야 한 맺힌 사람들에게 상품으로 과시가 되죠.

제가 아까 첫째 시간에 이야기했지요. 우리나라 민중의 밑바탕에 뭐가 있다? 무교에요. 무교란 뜻이 뭐예요? 잘 살든 못 살든 전부다 하나 되자. 우리는 모두가 하나다 말이죠. 그것에 부합되지 않는 복음은 복음이 아니라고 본다고. 하나 되게 만들면 그건 교회 장사되고.

그 다음에 진도 나가봅시다. 그러면 하나님 앞에서 예수님은 어떤 존재냐? 칼 바르트는 내세우는 성경구절 들어봅시다. 마태복음 3장 17절. “하늘로서 소리가 있어 말씀하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칼 바르트는 해석을 할 때 언약으로 해석하죠. 여기서 유명한 칼 바르트 개념, 아들 개념은 택한 개념.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은 택하지 않으면 아들이 될 수 없는 거예요. 이런 게 칼 바르트 신학에서 사람들이 이해하기 어렵다는 대목인데요.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택할 때 우리가 보통 택한다 하면 여러 명 있는 중에서 하나를 택한다고 그렇게 생각하잖아요. ‘너 아니고, 너 말이야.’ 너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했을 때 이 말씀이 사건화 되면 예수님만 택했다 할 때 예수님에 속해 있는 예수님의 사람, 아담이죠. 아담이 속한 모든 것이 함께 선택이란 이름으로 아들이 되는 겁니다.

그러면 불쑥 튀어나온다 말이죠. 모든 인간을 대표한 분 앞에서의 아들이 되는 택함이 되는 거예요. 그러면 이 선택은 예수님에게만 주어지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이 포함된 모든 자에게 전부다 같이 쏟아지게 되는 겁니다. 왜 그러냐 하면, 처음에 전제가 뭐냐 하면, 모든 사람을 다 제쳐 놔버리거든요. 하나님하고 아들밖에 없었다는 거예요. 창세전에. 창조를 해도 하나님과 아들의 의논 따라서 창조되기 때문에 창조는 뒷전이죠.

뭐부터 정립돼야 돼요? 하나님과 아들 관계부터 먼저 정립이 되고 그 관계를 증거하고 그걸 증명하는 한해서 창조라는 대자연이라는 뒤 배경이 그 다음에 여기서 만들어져야 돼요. 그렇다면 이 자연세계라 하는 것은 그냥 자연세계가 아니고 누구를 증거하는 자연세계가 되겠습니까? 우리가 알기는 예수님이라 하잖아요. 예수님이 아니고 하나님하고 예수님과의 관계를 보여주는 대자연이 되는 겁니다.

그런데 여기서 칼 바르트가 본인이 헷갈려서 그런지 모자라서 그런지 무엇 때문에 그런지 하나님과 아들의 관계를 보여주기 위해서 대자연이 있고 피조물이 있다고 주장하는 대목도 있고, 예수님을 증거하기 위해서 대자연이 있다는 대목도 다 있어요. 그래서 뒤에 사람들에게 비판에 여지가 생겨버린 겁니다.

어떤 비판의 여지냐 하면, 만약에 예수님을 증거하기 위해서 대자연이 있다면, 예수님이 하나님에게 선택받아서 선택된 자로서 버림받고, 선택된 자로서 버림받은 데서 다시 구원이 돼버리면 누구도 구원받아요? 예수님과 더불어 있는 모든 피조세계, 자연세계도 구원받은 것이 되어서 모든 인간은 구원받는다는 만인구원설이 돼버리죠. 지옥 가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게 돼버리죠. 왜냐하면 대표한 사람이 버림받았다가 건짐 받았기 때문에 모든 사람이 구원받는 겁니다.

그런데 만약에 하나님과 아들의 관계를 보여주기 위해서 이 자연세계가 있다면, 하나님과 아들 관계에서는 버렸다가 다시 되찾는 관계 아닙니까. 그렇다면 이 세상 주변은 뭐가 있어야 되느냐 하면, 버려야 될 사람이 있고, 버림받은 데서 탕자처럼 되찾음 받는 사람 따로 있어야 되겠죠. 그렇다면 지옥 갈 사람도 있고 천국 갈 사람도 있어야 되는 거예요.

그걸 제가 이야기하잖아요. 그건 바로 세상은 예수님의 속성을 보여주는 것이다. 하나님과 예수님 사이의 속성이 뭐냐? 공의로운 속성과 사랑의 속성이 있다. 은혜 줄 자에게 은혜를 주신다는 것은 전제에 뭘 깔고 하느냐 하면, 하나님의 공의하심과 거룩하심과 하나님의 무서움을 배제하는 것이 아니고 그런 어두운 배경을 깔고 난 뒤에 사랑이 그 안에 있는 거예요.

그리고 반대로 해야 돼요. 지옥이 있는 것은 천국의 가치를 말하기 위해서, 천국이 얼마나 좋다는 걸 말하기 위해서. 반대로 이야기해야 돼요. 천국이 있다는 것은 얼마나 하나님이 죄에 대해서 싫어하고 있는지를 보여주기 위해서 지옥이 있고 동시에 천국이 있고. 천국은 그냥 살기 좋은 곳이 아니고 ‘참 죄에서 죽을 뻔 한 인간들, 내 사랑 아니면 너는 지옥 갔어야 돼.’라는 것을 마음껏 보여주는 장소가 뭡니까? 그게 천국이다. 그게 사랑 아닙니까.

그렇게 해야 되는데 칼 바르트가 무슨 생각했는지 아마 자기 논리상 편해서 그런데 이 관계를 보여주기 위해서 피조세계가 있는 게 아니고 예수 그리스도를 보여주기 위해서 피조세계가 있다는 쪽으로 비중을 두고 논리를 전개해버리죠.

그러니까 [칼 바르트와의 대화]란 책에 보면 나와요. 어떤 대학원 학생이 질문을 해요. ‘교수님은 만인보편구원설을 주장하십니까?’ 칼 바르트는 이렇게 답변합니다. ‘내가 너한테 강조하는 것은 어떤 사람이 구원받느냐, 안 받느냐에 강조점이 있는 게 아니고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통해서 어떤 하나님의 뜻을 드러내는가를 보여준다. 다시 말해서 잃어버렸다가 다시 찾는 그 사랑을 보여주기 위해서 예수님이 있는 것이지 어떤 사람이 구원 되고, 안 되고는 우리가 신경 쓸 문제가 아니다.’라고 나와요. 그것이 이 책에도 일부 그 이론이 나옵니다. 그러나 그것은 대학원 학생의 질문에 해답이 될 수 없고 문제를 회피하는 식이 돼버렸어요.

여기서 칼 바르트의 선택이 나오는데 교재가 있으니까 봅시다. 교재 5페이지 봅시다. “하나님의 선택에는 하나님의 자유와 하나님의 신비와 하나님의 의(義)가 명시되어 있다.” 이미 의가 명시되었다고 해서 캘빈신학에서 하나님의 의가 어디 있습니까? 성도의 결단력에 있지요. 내가 믿음으로 행함이 아니고 믿으면 나는 뭐가 된다? 의가 되죠.

캘빈신학에서 의는 누구 손에 달렸습니까? 자기가 믿으면 의가 되고, 안 믿으면 의가 없지요. 의를 놓치게 되죠. 캘빈신학에서 늘 믿음을 유지하지 해야 의인이 되기 때문에 계속 믿음을 유지해야 되죠. 문제는 캘빈신학에서 믿음을 유지할 방법이 없다는 거예요. 어떤 식으로 유지를 해야 될지. 어떤 식으로 믿음을 하면 됩니까? 해결책이 없지요.

결국은 캘빈신학에서 말하는 믿음이라 하는 것은 열심히 믿고자 하는 본인을 믿어야 되죠. 본인의 결심과 각오를 믿어야 되지 예수님의 하신 일을 믿는 게 아니죠. 개혁주의신학에서 믿음이라 하는 것은 예수님을 믿는 게 아니고 예수를 믿고자 애쓰고 있는 나 자신의 의지에 대해서 기대하자 이 말이죠. ‘하면 돼, 하면 돼. 나는 할 수 있어.’ 이걸 믿으란 말이죠. ‘여러분 용기를 가지세요. 할 수 있습니다.’ 그걸 계속해서 목사가 이야기해야 되는 거예요.

‘그래 나는 할 수 있어. 할 수 있는 거야.’ 이건 믿음이 아니고 자기 최면이죠. ‘문제없어, 문제없어. 할 수 있어. 나는 할 수 있단 말이야.’ 이런 식으로. 그런데 나중에 치매 걸리면 어떻게 하죠? 그게 문제에요. 치매 걸리면 칠십 년, 팔십 년 믿은 것 어떻게 돼요? 말짱 도루묵, 다 날아가 버려요.

그래서 칼 바르트는 언약의 일관성, 아까 언약이라는 것은 언약의 일관성인데 그 안에 뭐가 들어있습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언약의 일관성인데 뭘 믿느냐? 우리는 언약을 믿는다 하지만 칼 바르트는 언약사건이 주어지는 것을 믿는다. 그걸 다른 말로 하면 예수 그리스도가 사건이 주어지는 걸 믿는다. 그걸 다른 말로 하면 아버지 앞에서 예수님이 가졌던 그 관계, 예수님이 받았던 모든 것이 사건화 되어서 예수님이 자기 일을 계속 벌이고 있음을 우리가 믿나이다.

그렇게 되면 그 믿음은 내 결심이 아니고 그렇게 ‘믿나이다’ 할 때 그것은 사건이 터졌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어떤 사건을 일으켰기 때문에 생긴 표면효과? 결과죠. 그래서 ‘내가 믿나이다’ 한 것은 사실은 내가 믿는 게 아니고 누가 믿는 겁니까? 예수님이 아버지 앞에 ‘믿습니다’ 하는 그 믿음이 그대로 우리에게 성령을 통해서 사건화 되면 우리는 어디에 포함됩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사건 안에 포함이 되면서 예수님과 아버지에 있던 사건은 역사, 창조 이전에 있는 거죠. 창조 이전의 사건을 묵시라 합니다.

그 묵시사건 안에 역사적으로 우리가 거기에 가담이 되는 셈이 되죠. 그럼 이 세상에 역사 있고, 따로 묵시세계 따로 있고. 그래서 칼 바르트의 모든 성경해석은 언약이 묵시적인 사건화 되어서 새 양식의 말씀이 계시로서 우리에게 사건화 되어서 다가오는 겁니다. 따라서 그 해석할 때는 역사로 해석해서는 안 되고 묵시로 해석해야 되죠. 그게 아까 그 이야기가 3번에 나오는데 4번 하고 난 뒤에 3번 잠깐 봅시다.

그러면 묵시라고 했을 때 역사는 다른 거죠. 역사는 인간이 만들죠. 인간은 자기가 행한 것 중에서 기억할 만한 것만 기억하잖아요. 역사라 하는 것은 두 자로 다른 말로 기억이죠. 미아 씨 어릴 때 기억납니까? 기억 안 나는 것은 미아 씨 역사 속에 포함 될까요, 안 될까요? 안 되죠. 왜? 기억이 안 되니까 역사가 안 되는 되죠. 그래서 역사라 하는 것은 자기가 기억하고 싶은 것만 골라서 사슬 이어놓은 것이 그게 역사가 되는 거예요. 역사 속에는 반드시 인간의 자유가 있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묵시 안에 뭐가 있겠어요? 역사가 인간의 자유라면, 묵시는 누구의 자유입니까? 여기 5페이지에 하나님의 자유가 나오죠. 하나님의 자유와 인간 자유를 하나로 다 해결하신 분이 예수 그리스도죠. 사실은 인간의 자유보다도 하나님의 자유 편에 서서 하지요.

그 다음에 5페이지 [하나님의 선택] 보면, “예수 그리스도는 선택하시는 하나님인 동시에 선택받는 인간이시다.” 선택하시는 하나님이니까 여기선 뭐가 작용합니까? 하나님의 자유를 그대로 적용시키죠. 하나님의 자유라 하는 것은, 아까 이야기한 은혜 줄 자에게 은혜를 주고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긴다는 누구 마음대로? 그거는 하나님 마음대로인데 예수님 중심이 되니까 하나님 마음대로가 아니고 예수님 마음대로.

그러니까 묵시세계에서는 하나님이 주가 되지만 역사 속에서는 누가 주가 됩니까? 예수 그리스도가 인간의 몸을 입고 왔기 때문에 역사 속에서 예수님이 주가 되셔서 예수님의 행동 하나하나가 묵시적인 사건이 되고, 그것이 새로운 역사를 만들어내요.

그런 식으로 해석을 해야 돼요. 그러면 성경의 어떤 해석도 그 배후에 있는 예수 그리스도의 자유가 있으니까 성경 어느 구절을 해석을 해도 반드시 결론은 예수 그리스도의 자유라는 쪽으로 결론을 내려줘야 설교 잘 한 게 되죠. 그걸 가지고 칼 바르트는 복음이라 해요.

그렇다면 여기서 문제되는 것은 칼 바르트가 자꾸 우려하는 것은 이렇게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를 구원했다.’라는 것은 강조점이 돼야 되는데 사람들은 아무리 칼 바르트 말을 들어도 ‘내가 구원받았다’에 관심이 가는 거예요. 그러면 칼 바르트의 이야기가 복잡해지고 어려워질 수밖에 없는 거예요. 그걸 바꾸기 위해서 ‘예수님이 구원했다’를 믿어야 될 건데 사람들은 예수님이 구원하셔서 ‘내가 구원받았다’에 자꾸 관심이 가 있고 마음이 거기 가 있으니까 칼 바르트는 그걸 깨내기 위해서 무척 노력을 많이 하고 있어요.

그러면 예수님이 구원하셨다고 강조점을 해도 예수님이 구원하셔서 내가 구원받았다고 해도 마찬가지 아니냐? 하는 것이 칼 바르트는 마찬가지가 아니라는 거예요. 왜 마찬가지가 아니냐 하면, 나중에 나옵니다. 예수님이 구원했다고 하면 마음이 낮아지고 성령의 열매가 맺히는데 예수님이 구원하셔서 내가 구원받았다 해버리면 이거는 예수님의 십자가에 낮아지는 마음이 아니고 우쭐대는 마음, 쫄랑대는 마음, 거만한 마음이 생겨버리니까 이것은 그리스도가 원하는 성령의 열매가 아니게 된다 이 말이에요.

뒤에 성도의 삶에 대해서 이야기 안 하니까 사람들은 ‘예수님 구원하셨다’는 말이나 ‘예수님 구원해서 내가 구원받았다’는 말이나 같은 말이잖아. 그냥 넘어갑시다. 되겠지만 나중에 성도의 삶과 생활에 연관시켜버리면 절대로 같은 말이 될 수 없다는 겁니다. 그것까지 생각하는 거예요.

이렇게 되면 아까 이야기한 캘빈신학의 성도의 삶이라는 것은 완전히 다 깨져버리죠. 예수 믿는 것도 내가 믿었고, 그 다음부터 예수님 말씀대로 사는 것도 내가 사니까 얼마나 내가 잘난 존재냐? 이래 되는 겁니다. 이건 칼 바르트하고 완전히 딴판이죠.

중간에 대충 갑니다. “이는 예수님에 의하여 그리고 말미암아 수행된 선택이며 이 선택이 바로 당사자인 예수 그리스도한테 일어난 선택이기도 하다. 캘빈의 오류는 예수님을 지나쳐서 하나님 선택과 바로 인간 선택을 연결했기 때문에 선택론에 있어 하나님과 예수님을 분리시켜 버린 것에 있다.”라고 했어요.

이것은 바로 에베소서 1장 4절에서 칼 바르트는 뭘 강조하느냐 하면, “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나오잖아요. 근데 캘빈은 뭘 빼뜨리느냐 하면, “창세전에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리스도 안에서’를 빼먹진 않았지만 빼먹는 식으로 해석을 해버린 거예요. 하나님이 우리를 택하사, 그냥 구원하신 것이 아니고 창세전부터 택해서 구원했다는 겁니까? 맞습니까? 칼 바르트는 그걸 용납을 못하겠다는 거예요.

하나님 있고 인간 있는데 하나님도 괜찮은 하나님이고 인간도 괜찮은 인간인데 우리가 모르는 것이 어떻게 구원되는가를 모른다 이 말이죠. 그때 에베소서 1장 4절에 보니까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할 때 우리 행함이 아니고 창세전부터 우리를 택하사 구원했다는 거예요. 그러면 관심사가 뭡니까? 이 괜찮은 나를 하나님이 어떤 식으로 구원했느냐 하면 창세전부터 선택해서 구원했다는 겁니다. 중간에 뭐가 날아가 버렸어요? ‘예수 안에서’가 날아가 버렸잖아요.

그러면 캘빈신학 하는 사람, 개혁주의는 뭐라 합니까? 그건 집어넣느냐, 않느냐 우리 다 아는 이야기잖아. 그냥 넘어가자. 칼 바르트는 그냥 넘어가면 안 된다는 거예요. 그냥 넘어가버리면 예수님이 우리는 선택했다는 걸 빼먹는 식이 돼버려요. 그러면 개혁주의나 캘빈신학에 있는 사람들은 화를 벌컥 내면서 하나님이 우리를 선택했지 언제 예수님이 우릴 선택했느냐? 그런 구절 있으면 대봐라 하잖아요.

대봅시다. 요한복음 5장 21절. “아버지께서 죽은 자들을 일으켜 살리심같이 아들도 자기의 원하는 자들을 살리느니라” 아들이 뭡니까? 독자적인 선택권이 있다, 없다? 있지요. 아버지 원하는 자 말고 자신이 원하는 자를 살린다. 그럴 때 캘빈신학에서는 왜 하나님께서 예수님에게 선택권을 따로 주는 이유에 대해서 해명을 못하는 거예요.

해명을 못하면 제가 오늘 강의 첫 번째 이야기한 게 뭡니까? 어떤 신학을 할 때 성경의 중요한 대목이 누락되고 빠져버린 채로 대충 정답이라 하게 되면 칼 바르트에 당하게 돼있다 했지요. 예수님께 왜 선택권을 주느냐에 대해서 캘빈과 루터와 개혁주의신학은 뭔가 답변을 내놓아야 돼요. 왜 폭포가 두 번 떨어지느냐 말이죠. 하나님이 선택하면 가면 되지 왜 또 예수님의 선택이 주어지느냐 이 말이죠.

그 이유가 뭐냐? 그 이유는 하나밖에 없다는 거예요. 칼 바르트는. 하나님은 사람을 사람으로 취급을 안 한다는 겁니다. 사람을 언약 대상으로 보지 않고, 하나님의 언약 대상은 오직 예수님하고만 의논한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인간은 왜 있는가? 인간은 바로 하나님과 예수님이 의논한 것을 받쳐주기 위해서 그것이 과연 사실인 것을 알기 위해서 이 땅에서 한 사람, 두 사람(사실은 한 놈, 두 놈) 이 세상에 벌레, 구더기처럼 태어나게 해서 예수님이 선택권이 있음을 이 세상에 새로운 피조물들이 계속해서 생산되고 만들어져야 된다는 거예요.

그걸 보고 사람들은 칼 바르트를 비판하는데 칼 바르트는 예수님밖에 없잖아요. 예수 그리스도 일변도라고 공격해요. 칼 바르트는 말합니다. 내가 주장하는 예수님 중심이 비성경적이냐고 묻지요. 그럼 그쪽에서 뭐라고 대답합니까? 성경에서 예수 중심도 맞지만 성경은 예수님 중심이 아니고 삼위일체 중심이라는 거예요. 그러면 칼 바르트는 뭐라고 합니까? 성경에서 삼위일체 하나님이라고 주장하던가? 묻는 거예요. 재미있지 않습니까?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삼위일체 중심이라고 말하던가 아니면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예수님 중심이래. 어느 쪽이냐고 묻는 거예요. 칼 바르트는. 삼위일체란 신학은 어디서 나왔습니까? 인간 구원 위주. 그래서 자연신학이란 책에서 부르너하고 논쟁할 때 나오죠. 칼 바르트는 신랄하게 비판합니다. ‘캘빈주의자들이 사람을 구원해내려고 환장을 하는구나.’

어쨌든 간에 한 사람 건지려고 환장해서 자꾸 그 사람에게 접촉점을 제시하려고 그렇게 애를 쓰는. 칼 바르트는 말하기를 그게 이단이다. 그게 아니야. 예수님께서 일하시는데 그걸 못 미더워하니까 자꾸 접촉점을 해서 ‘납득되면 믿을게요.’라는 식에 왜 자꾸 신학자들이 호응을 해주느냐, 왜 교회가 호응을 해주느냐 이 말이죠.

그 다음에 봅시다. “이 선택으로 인해 악과 악마는 그냥 극복되어버린 힘일 뿐이고 결코 하나님께 대항해서 장난치는 최후의, 실재적 대항자가 못된다.” 그렇다면 모든 것이 예수님 중심이라면 인간도 별 볼 일 없는 정도지만 인간뿐만 아니고 인간이 그렇게 무서워하는 악마, 마귀, 사탄도 별 볼 일 없는 거예요.

그럼 사탄은 누굴 증명하기 위해서 이 세상에 피조물로 태어나야 합니까? 칼 바르트의 주장에 의하면 예수 그리스도 밑에 눌린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천사가 있어야 돼요. 그 대목이 어디 나오느냐 하면, 히브리서 1장에 나오죠. 천사들도 예수님을 받들어 모시죠. 그런데 히브리서 1장과 2장에 보면, 천사들도 예수님을 받들어 모시면서 도리어 예수님이 그 천사보다 더 못한 신분으로 떨어진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뜻이니까 그것을 주목하라 이 말입니다. 그게 성경의 핵심이라는 겁니다. 칼 바르트는. 천사한테 봉사 받아도 마땅함에도 불구하고 도리어 천사보다 더 못하고 내려온 것은 바로 그것이 너희들이 그렇게 궁금해 하는 하나님 뜻이 뭐냐? 그게 뜻이라는 거예요.

그러니까 하나님 뜻은 뭐냐 하면, 기계에 보면 음성 높일 때 조정하는 것, 뭐라 합니까? 올리고 볼륨 조절하는 것 있잖아요. 이처럼 이 세상은 예수 그리스도를 주께서 낮추시고 다시 볼륨을 당겨서 높이시고 그 노선에 모든 피조물은 다 걸쳐 있고 연관성이 있다. 예수 그리스도가 어떻게 낮아졌고 어떻게 높아졌고. 그리고 우리의 구원도 예수님이 가는 높낮이에 따라서 우리가 버림받아 마땅한데 누구의 공로로? 예수님의 공로로 예수님의 의로 말미암아 우리가 의의 나라, 천국에 들어간다. 이 과정이다. 거기에 인간이 왜 끼어들며 천사가 왜 끼어드느냐. 그건 개뿔도 아무것도 아닌데.

그래서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칼 바르트신학은 아주 긍정적이고 낙관적이다.

그리고 이러한 선택이 교회가 되었다고 하면서 이 선택은 이 세상에서 구약을 통해서 예수님의 선택이 어떤 효과를 주느냐 하면, 바로 이스라엘과 이방인에게 구분돼있는 이 주장이 중요합니다. 왜 칼 바르트가 지옥이 없다는 식으로 가는 이유가 뭐냐 하면, 이스라엘은 축복이고, 개 같은 이방인은 저주죠. 과연 이방인들이 저주받는, 축복받는 이것이 담이 예수님의 십자가로 인하여 가로막힌 담이 허물어졌으니까 이 이스라엘과 이방인 사이의 담이 무너지는 것은 바로 무서운 하나님과 죄인인 우리 사이의 담도 허물어진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라고 보는 겁니다.

이방인과 이스라엘 담이 허물어진 것은 그것이 단지 이방인과 이스라엘뿐만 아니고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있던 담이 무너진 거예요. 무너진 그걸 화목제물이다. 그러니까 기존의 캘빈신학의 화목제물은 뭡니까? 이스라엘과 이방인이 아니고 사적인 것. 내가 주님 앞에 죄 지었는데 어떻게 하면 구원받아요? 십자가로. 감사합니다.

이건 사적인 화목인데 칼 바르트는 집단적인 화목이죠. 그 집단도 더 넓어져서 아예 인간이란 모든 집단과 하나님 사이에 막혔던 담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다 소통이 되는 원활하게 모든 게 평화가 주어지는 그런 능력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있다는 겁니다. 칼 바르트가 이걸 믿으라 이 말이죠.

그러면 칼 바르트 책을 믿어버리면 우리는 뭘 믿는 게 돼요? 예수님 안에서 모든 것이 ‘아니요’가 없고, 모든 것이 ‘예’가 됨을 믿는 게 돼요. 그러면 사탄도 지옥도 없고, 불신자도 없고. 불신자가 없으면 신자의 의미가 없잖아요. 구원받은 인간들만 있지 신자, 불신자 구분도 없지요. 그렇게 되면 어떻게 됩니까? 신자가 없다는 말은 믿을 필요가 있다, 없다? 믿을 필요가 없지요. 믿을 필요가 없으니까 이것은 아까 처음에 이야기한 단군의 신화와 똑같지요. 홍익인간, 모든 차등이 없어지고.

칼 바르트가 계시, 예수 그리스도로 나가다가 그 내용을 보니까 갑자기 단군신화가 등장하게 됐어요. 인도의 신은 브라만이죠. 브라만이라는 창조신이 아트만이라는 개체 또는 개별자 또는 자아 속에 브라만이 들어와 버린 거예요. 그래서 인도의 신은 인간 속에 신이 있다는 겁니다. 이게 바로 13,4세기에 살았던 독일의 신비주의자 에크하르트의 이론이에요. 신이 천지를 창조한 것이 아니고 신이 신을 만들었다고 보는 겁니다. 그렇게 돼버리면 세상은 곧 신이 되는 거예요. 세상 전체가.

무슨 말인지 모르겠습니까? 처음에 플라톤 철학은 이 세상에 물질은 영원하고 하늘에 있는 이데아인데 신의 형상도 영원한데, 물질이란 말은 개체를 말하는 것이 아니고 그냥 질료, 물질의 재료를 말해요. 여기서 코끼리, 코스모스 생기는 것은 신이 있어요. 창조신이 신의 이데아를 가지고 물질을 가지고 만들어버리면 생긴 거예요. 물질은 영원한 겁니다.

그런데 어거스틴이 와서 그건 플라톤이 잘못 된 것이다. 물질은 신이 없는데서 만들었다고 본 거예요. 그게 아리스토텔레스하고 충돌되는 겁니다. 현재 있는 물질이 없는데서 만들었느냐 아니면 있는데 다만 있는 재료로 다듬어서 현재 있는 피조물 생겼느냐 그 문제입니다. 그런데 어거스틴은 없는데서 만들었다고 보는 겁니다.

그런데 없는데서 어떻게 만들었느냐에 대해서 이야기해봐라 할 때 어거스틴은 답변을 못했어요. 없는데서 뭘 만들어? 그래서 없는데서 만든 게 아니고 없는데서 만들었다도 맞고, 그 다음에 있는데서 만들었다도 맞고 다 하려면 없는 것을 아무것도 없다고 하지 말고 그걸 카오스, 혼돈으로 집어넣자는 거예요. 그게 창세기 1장 2절에 혼돈이 있었고 혼돈에서 주님께서 여호와께서 작용해서 혼돈에서 만들어내자. 흙이 먼저 있고 그 다음에 흙에서 주물락 해서 사람을 만들고. 이렇게 하는 것이 성경적이라고 타협책을 제시한 거예요.

그런데 타협책에서 더 나가버렸어요. 에크하르트는 그게 아니고 하나님이 하나님을 만들었다고 보는 겁니다. 그 하나님이 세상을 만들었으니까 결국 세상 속에는 하나님이 다 들어있다는 겁니다. 그걸 창조설이라 하지 않고 유출설. 유출설은 하나님의 심성이 모든 사람에게 들어있는 거예요. 마치 성령의 은사론 같지요. 복잡하지요.

그런데 칼 바르트신학을 보게 되면 모든 것이 긍정적이고 모든 것이 예가 되기 때문에 더 이상 뭐뭐 하라 하는 것이 인간에게는 아무런 의미가 없어요. 하라 하면, ‘안 할래요. 나 하기 싫어요. 안 해도 되는데 왜 해야 됩니까?’ 그러면 하나님께서 ‘아이고, 그놈 참 착해요.’ 그런 식이 되지요. 부모가 이것 해라. 싫어요. 안 해도 엄마가 다 해주는 걸. 숙제해라. 숙제 안 해도 엄마가 다 하는 걸. 네가 엄마를 믿는구나. 네 믿음이 나한테 영광이다. 아이고, 착한 놈. 이렇게 되는 셈이 된다 이 말이죠. 과연 그게 맞는지 10분 쉬고 합시다.

‘데미우르고스’다. 여기 아까 신 이름이 데미우르고스, 이 신이 플라톤에서

첨부파일 : 대구특강20091121b.hwp (54.0K), Down: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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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 21,142건 중 509 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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