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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

대구특강20091121-칼 바르트 신학의 모순a자유게시판[신학]

대구특강20091121-칼 바르트 신학의 모순a

이름 : 한윤범(IP:119.192.174.148)

대구특강20091121-칼 바르트 신학의 모순a

(강의:이근호 목사)

시작합니다.

제가 부여받은 주제가 칼 바르트의 성경해석에 관한 겁니다. 칼 바르트의 교회 해석학입니다. 칼 바르트란 사람이 누군지? 칼 바르트란 사람은 우리가 왜 신경 써야 하는지? 이 세상에 많은 사람이 있는데 칼 바르트에 대해서 우리가 관심을 둬야 하는지 생각해야 되고요. 둘째는 이 칼 바르트란 분이 신학자인데 제가 서평한 책은 칼 바르트 [교회교의학] 책입니다. 1983년도에 나온 오랜 책인데. 칼 바르트란 분이 성경을 해석한 것이 다른 사람보다 탁월하게 성경을 해석했다.

성경이 있는데 이 성경에 대해서 수많은 사람이 여기에 대해서 나름대로 정리를 했다 이 말이죠. ‘나는 이렇게 본다, 나는 이렇게 본다.’ 했는데, 그 많은 사람 가운데서 칼 바르트란 사람이 성경을 해석한 그것이 다른 사람의 성경해석보다도 더 잘 체계 있게 정리를 했다. 그러니까 너희들은 입 다물라. 적어도 칼 바르트의 성경해석보다 더 뛰어나지 않거든 칼 바르트한테 기어라, 배워라 이 말입니다.

그러면 칼 바르트의 성경해석을 알려고 한다면 칼 바르트 그전에 뛰어나게 성경을 해석했던 많은 신학자들이 있단 말이죠. 그 중에 한 사람 튀어나온 사람이 캘빈이라는 사람입니다. 캘빈이라는 사람이 성경해석을 잘했다고 소문이 났는데 한 오백년 후에 칼 바르트가 캘빈의 성경해석에 문제가 있다. 나처럼 해석해야지 캘빈처럼 해석하게 되면 성경해석에는 전체를 담을 수 없다고 되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가 칼 바르트의 해석학을 알 필요가 있을까? ‘동네 아저씨인데 남의 아저씨 이야기를 우리가 왜 들어야 돼?’라고 ‘성경공부하기도 바쁜데 칼 바르트를 왜 해?’라고 제쳐 놔버리면 어떤 경우가 생기느냐 하면, 성경을 자기 나름대로 정리를 잘했는데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당신, 칼 바르트의 성경해석을 알아?’ ‘나는 그것 모르고 알 필요 없다고 여겨.’라고 했을 때 ‘당신의 성경해석은 칼 바르트에 의하면 성경의 이런 대목하고는 모순되고, 이런 대목하고는 담아내질 못했고, 이런 것을 누락시키고 빠뜨리면서 당신 일방적으로 성경해석을 한 게 돼.’라고 했을 때 누가 그렇게 이야기했습니까? 칼 바르트의 책에 보면 그렇게 나와 있어요.

그러면 칼 바르트는 내가 빠뜨린 것까지 포함해서 성경해석을 일괄적으로 했단 말인가? 그렇지. 그렇다면 칼 바르트, 이 사람이 성경해석을 어떻게 했기에 내가 미처 알지 못한 것까지다 포용이 됐을까? 이렇게 될 때 칼 바르트 성경해석은 그 사람에게 추종하라든지, 그 사람한테 복종하고, 경배하고 찬양하라는 것이 아니고 참고로써 칼 바르트의 성경 해석한 것을 분석함으로 말미암아 우리가가 성경 해석한 것에 대해서 미진한 것, 모자란 것, 모자라기 때문에 곡해할 수 있는 것, 성경 중요한 대목을 빼놓기 때문에 나는 예수님을 이렇게 생각한다, 나는 하나님을 이렇게 본다고 일방적인 주장을 될 가능성이 있거든요.

칼 바르트의 생각을 다 알지 못하고, 나는 기도원에 가서 기도하니까 이런 계시 받았다고 생각했는데 칼 바르트에 의하면, 그 계시는 성경의 다른 계시에 의해서 충돌이 일어나며 이건 엉터리로 드러났다고 칼 바르트가 이야기해버리면, ‘기도원에 가서 은혜 받은 것도 엉터리일 수 있구나’ 하는 새삼 느끼게 되는 거예요. 그래서 칼 바르트, 신학자들 그 이름에 권위에 복종하라는 말이 절대로 아닙니다. 그저 하나의 종이다, 머슴이라고 생각하시면 돼요.

노래를 하다보면 팝송 좋아하는 사람 있고, 재즈를 좋아하는 사람이 있는데 그건 자기 취향이죠. 여기서 하나 주의할 것은, 성경해석이 하나에 그건 칼 바르트 취미고 나는 내 식으로 성경 보겠다고 취향으로 정린 할 수 있습니다. 나중에 결론 부분에 그걸 이야기하겠어요. 칼 바르트를 공부하면서. 그렇게 보는 것도 한 견해가 될 수 있고, 내가 지금까지 본 것도 한 견해일 수 있다.

그걸 ‘차이’라고 하는데, 이 사람 보는 것과 이 사람 보는 것이 차이가 되려면 두 사람 사이에 공통점이 있을 거란 말이죠. ‘이 점에 대해서 동의한다. 하지만 나머지 부분은 내가 동의 못한다.’라고 했을 때 나머지 부분의 차이가 계속 차이로 남아버리면 여기서 뭐가 되느냐 하면, 이거는 불확실성이 됩니다.

그래서 불확실성을 없애려면 차이를 좁히든지 없애든지 해야 돼요. 그렇게 되려면 삐져나온 이것, 이것의 처리에 대해서, 칼 바르트니까 ‘K’라 합시다. ‘칼 바르트는 이런 점이 잘못됐어.’라고 공격을 해줘야 이 칼 바르트의 미진한 부분은 칼 바르트가 실력이 모자라서 미진한 걸로 없어질 수가 있어요.

그냥 차이로 너는 네 취향으로, 나는 내 취향으로 이렇게 남아버리면 이것은 계속해서 불확실성이 남기 때문에 복음을 전하면서 ‘그 사람 견해에는 이럴 수도 있는데 내 견해는 이렇습니다.’ 해버리면 사도 바울은 그런 적이 없단 말이죠. 이거는 못 먹어도 고라는 말대로 그냥 ‘이겁니다’라고 해야지, 이거는 다른 사람 견해는 그럴 수도 있고, 누구 견해는 이럴 수도 있고, 나는 모르겠습니다. ‘나는 모르겠습니다.’ 하면 아예 입을 다물어야 되죠. 거기서 한가락 끼어서 자신의 가치나 인정받으려 할 필요는 없다.

그래서 여기서 칼 바르트는 먼저 K가 지금까지 있던 모든 것을 다 공격해서 칼 바르트만 남기고 나머지는 지워버렸어요. 우리가 칼 바르트를 공부한다는 것은, 이 전체가 성경의 생각과 일치되느냐 하는 그걸 탐색해 보는 거죠. 탐색해서 미진한 게 있으면 보충하면 되고, 칼 바르트가 뭐가 잘못된 게 있으면 그건 잘못됐다고 파악하면 되고, 다음에 우리가 복음 전할 때 그런 것을 주의해서 전하면 된다 이 말이죠.

어쨌든 간에 칼 바르트란 사람이 중도 아니고 일반인도 아니고 우리가 보고 있는 권위를 갖고 있는 성경에 대해서 해석을 어쨌든 내놨다는 그 점에 대해서는 공부할 만한 가치가 있다고 저는 그렇게 보는 겁니다.

제일 먼저 칼 바르트가, 항상 그렇지만 교재가 이만큼 있는데 이것 읽어도 세 시간 넘어가요. 교재는 여러분 읽었다 치고 중요한 것만 해드리겠습니다. 부제가 뭐냐? [칼 바르트의 신학과 그 내부적 모순]이라고 했는데 칼 바르트란 사람이 제일 먼저 한 것은, 하나님의 계시와 말씀의 관계에 대해서 언급을 했어요. 계시와 말씀에 대해서 언급했다는 이 점에 대해서 제가 지금부터 설명을 해드리겠습니다.

우리가 알다시피 K란 사람, 칼 바르트입니다. 칼 바르트가 인간이지요. 징기스칸도 인간이고, 아브라함도 인간이고, 에스겔도 인간이고, 플라톤도 인간이고 다 같은 여러 가지 인간이 있었단 말이죠. 칼 바르트는 인간이 아니고 나머지는 죄인이고 그렇진 않으니까. 다 같은 인간이니까.

칼 바르트가 여기서 뭐라고 했느냐 하면, 하나님의 계시라고 계시론은 제시했을 때 다른 인간들은 칼 바르트가 성경은 하나님의 계시입니다. 또는 하나님의 계시 있어야 하나님을 알 수 있습니다. ‘사람은 그냥 알 수 없고 하나님의 계시가 임해야 알 수 있습니다.’라는 말을 칼 바르트만 했겠습니까, 다른 사람도 했겠습니까? 다른 사람도 했다 이 말이죠. 하나님이 말씀을 해 줄 때 그 인간은 응답해서 하나님을 안다는 걸 유독 칼 바르트만 주장했다고 말할 수 없거든요. 다른 사람들이 똑같은 생각한 걸 놓치면 안 된다. 그걸 우리가 모른 척하면 안 돼요.

그리고 하나님의 계시가 칼 바르트가 했다 하지만, K라 합시다. K가 개인적으로 이야기했지만 옛날부터 하나님의 계시는 개인적이 아니고 집단적이었어요. 이거는 이스라엘뿐만 아니고 모든 민족이 다 그래요. B.C.2333년경에 고조선이 단군이란 사람에게 생겼다. 제가 집단적인 계시를 설명하기 위해서 옛날 단군의 이야기를 끄집어내고 싶어요.

단군이라는 것은 하늘의 신, 환인이 있고 그 환인의 아들이 있어요. 이 사람 이름이 환웅이란 사람입니다. 이 사람은 역시 신이에요. 환웅이란 사람이 아들이 됨으로 말미암아 신이 사람으로 변해서 이 땅에 오는 겁니다. 요한복음 1장과 유사하지 않습니까?

환웅이란 사람이 아버지(환인) 신에 따라서 이 세상에서 아버지의 뜻을 펼치기 위해서,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같이 땅에서 이뤄지기 위해서 환웅이란 아들을 보낼 때 환웅이 뜻을 어떤 식으로 펼칠까 할 때 여기 곰하고 호랑이한테 쑥 한 다발하고 마늘 21개인가 줘서 백일 동안 견뎌봐라. 동굴 속에서 백일 동안 견디면 네가 사람의 형상을 입을 것이다. 그래서 호랑이는 탈락하고 곰은 버텨서 웅녀가 돼요. 이 웅녀하고 환웅하고 결혼해서 낳은 아들이 단군이란 사람이거든요.

이러한 단군신화가 우리나라뿐만 아니고 이전에 이미 중국에도 신화가 있다 이 말이죠. 있을 때 지금 제가 집단계시라 해요. 어떤 씨족사회나 부족사회가 옛날 신석기시대 이후에 국가가 부족국가가 돼요. 그전까지는 국가가 없어요. 신석기 벗어나면 청동기 들어가면서 있는데. 그 시대에 어떤 사람이 우리나라는 신이 인정하는 하나님의 뜻을 받들어서 나라가 될 때 이 나라가 무궁무진하다. 오래간다는 것을 어느 민족도 마찬가지인데 단군만 소개하지만 모든 민족이 마찬가지에요.

거기에 반드시 신의 계시가 필요하고 신의 계시는 집단적으로 수용이 돼야 됩니다. 집단적으로 수용이 될 때 특정한 인간에게 신의 계시가 온다 할지라도 그 특정한 인간은 단군에게 신의 계시가 올지라도 단군의 후손들은 집단을 이루면서 단군이 받은 신의 계시에 종속된 채로 나라가 이뤄지게 되죠.

제가 어렵게 이야기하는 것은 뭐냐 하면, 반드시 집단계시에서는 이게 법이 된다는 것을 설명하기 위해서 하는 겁니다. 법이 된다는 것은 문자화되는 거예요. 문자로 적어놔야 돼요. 그리고 문자를 해독할 수 있는 권력층에 의해서 이 법은 시행토록 돼있어요. 법이 뭡니까? 법은 이거야. 조상들은? 이런 뜻이었어. 옛날부터 내려오는 법은 어떻습니까? 이거야. 뭔가 이야기하려면 확정된 게 있어야 되는데 그게 성문화, 문자화 돼야 된다 이 말이죠.

그런데 환웅에서 아들이 되어서 이렇게 될 때 여기에서 땅과 인간, 신과 지 그러니까 환인과 환웅 사이는 하늘의 뜻이 땅에서 이뤄지지만 구체화 될 때는 인간으로 구체화되는데, 그 인간은 바로 어두운 동굴에서 외로움과 어두움 속에서 스스로 자기 자신을 인간이 되고자 하는 그 능력을 키울 때에 환웅과 결혼해서 단군이 되거든요. 그럼 이 문제라는 것은 결국은 인간내부에 신이 있다는 겁니다. 하늘의 신이 내려오는 초월적인 계시도 있지만 인간자체가 곧 신이 되는 거예요. 인간자체가 하나님의 뜻을 품고 있는 겁니다.

이렇게 돼버리면 이 집단이라는 것은 신들의 집단이 돼요. 신들의 집단이 각각 갖고 있는 자기 안에 있는 신성을 규합시키면 그것이 질서를 위한 법이 되고, 그게 신의 계시와 일치되는 겁니다. 쉽게 말해서 어떤 사람이 산 위에서 계시 받았다고 내려오면, ‘신께서 뭐라고 이야기하던가?’ 이렇게 이야기 하더라. 들어보자. 동의한다. 동의하면 계시가 되는 거예요. 동의 안 하면 그건 나쁜 놈이 되는 겁니다.

신명기에 보면 신접한 사람들 죽이라고 합니다. 왜 죽입니까? 단군도 무당이고 이쪽도 무당이고 다 계시인데. 이런 계시에 의하면 인간의 모든 종교라 하는 것은 내부 수양이에요. 내부 수양하니까 얼른 떠오르는 게 ‘새생명운동’이에요. 모든 종교는 자기 자신을 내부적으로 동굴에다 비워놓고 그 안에 하나님 뜻으로 채워서 내가 신임을 확인하는 그게 자기한테 계시가 되는 겁니다.

그래서 초월적인 것이 초월적으로 그냥 하늘에 남아 있으면 사람들이 싫어해요. 그 초월적인 것이 여자 임신하듯이 내 안에 가득 담겨야 비로소 사람은 흐뭇해하는 겁니다. ‘내 안에 계시 많다. 날 건드리면 죽는다, 너거들. 나, 계시 받았거든.’ 이것은 칼 바르트가 언급을 하기 이전에 모든 민족과 종교에 일반화돼있고 보편화 돼있어요. 자기 수양이에요. 자기 안에 잠재돼있는 신을 깨워서 자기가 신성을 발휘하는 것, 그게 종교고, 신앙이란 이름으로 종교란 이름으로 계시란 이름으로 구체화시키면 말씀이 되죠.

단군이 우리나라 선조라 하잖아요. 웅녀란 이 사람도 불가능이 자기 내부 속에 신성을 깨우니까 인간된다는 것이 불가능하지만 용을 쓰고 애를 쓰면 쑥과 마늘을 먹는다는 것은 세상에 있는 모든 분별심, 세상의 모든 부귀영화를 다 끊은 거예요. 동굴이라 하는 것은 어두움과 외로움입니다. 어두움과 외로움 속에서 여기서 잠자는 게 아니고 깨어있음, 어디서 많이 듣던 이야기에요. 스스로 깨어있는 거예요. 깨어있을 때 인간은 신으로 거듭 태어나는 불가능이 가능으로 되는 거예요. 그렇다면 이러한 자기 경험이 신의 계시에 합류가 되는 거예요.

칼 바르트의 계시론을 주목하면서 칼 바르트가 하나님으로부터 시작했다 할 때 우리는 그 다음에 뭘 주목하느냐 하면, 하늘에서 내려온 계시가 어떤 경로를 통해서 성도라는 인간내부에 어떻게 담기는가? 그 경로를 주목해보자. 그 절차를 주목해보자 이 말입니다. 그러면 하늘에서 뭔가 내려왔는데 줄줄이 타고 내려와서 결국 남아있을 때 우리는 묻는 거예요. ‘칼 바르트 아저씨, 진짜 거듭난 사람과 안 난 사람과 차이가 뭡니까?’ 결국은 신에서 내려왔다는 것은 다같이 인정하니까. 계시는 위에서 내려온 걸로 다 인정하니까.

그 다음 문제가 뭐냐 하면, 그러면 어떤 식으로 사는 것이 거듭난 사람이며 그리고 그것만 필요한 것이 아니고, 어떤 식으로 살지 않으면 거듭나지 않은 사람입니까? 그 기준을 제시하라는 거예요. 그 기준을 따르고자 함이 아닙니다. 그 기준이 현재 내가 갖고 있는 내 속에 있는 잠재돼있는 내가 신이 되고 싶은 욕망과 일치되는가를 견주어서 만약에 삐거덕하고 안 맞으면 ‘신의 계시 아니야. 칼 바르트 저리 가. 난 캘빈을 믿겠어.’라고 할 수가 있는 거예요.

인간이라 하는 것은 외부가 칼 바르트가 있던 캘빈이 있던 관계없어요. 그런 것을 하나의 계기로 해서 내 안에 뭐가 있는가를 점검해보는 겁니다. 결국은 계시라 하는 것은, ‘여기서 여기까지 신의 계시야.’ 다듬고, 어떻게 해서 내 것으로 만드느냐? 여기에 지금 열중하고 있다고 인간은.

지금까지 설명한 걸 다시 정리하면, 아무리 신의 계시라 할지라도 인간 내부에 오게 되면 이 계시는 인간 내부의 나의 검열을 받아야 되고, 점검해서 내게 맞는 그것만 나의 것의 계시, 이걸 줄이면 ‘내 계시’죠. 결국 하나님 계시가 내 안에 들어오면 내 계시가 돼요. 왜? 누구의 검열을 받았습니까? 나의 검열을 거치죠. 나의 해석과 이해와 나의 점검을 통과했기 때문에 이게 나의 계시가 돼버리죠.

그러면 하나님의 계시를 알기 위해서 칼 바르트에 갈 것이 아니고 신의 계시를 만들어내는 메커니즘, 이 과정에 대해서 분석하면 그게 계시가 되죠. 그렇지 않습니까? 바깥에 성경이 되던, 불경이 되던 관계없어요. 어떤 계시가 됐던 신의 계시가 왔던 나한테 왔을 때 내가 어떻게 그걸 조립하고 재구성해서 나만의 독특한 개성 있는 계시로 들어내는가? 계시를 만드는 그 절차를 분석해보면 그게 바로 계시가 우리 안에 장착되는 하나의 모습이 되고, 그 안에서 하나님의 신의 계시가 이렇다고 정립이 될 수 있다 이 말이죠. 그렇게 되면 성경이라는 바깥의 계시도 소용이 없어요.

다시 해봐요. 내 안에 계시 만들기 기계가 있는 이상은 성경의 어느 말씀이든지, 눈 감고 아무 말씀, 오바댜의 말씀이라도 이것이 만드는 기계 속에 들어가면 신의 계시가 들어가서 나의 계시로 상품화 되어서 바깥에 나온다 이 말이죠. 그리고 나의 계시가 없으면 인간은 자기 주체가 정립이 안 돼요. 나라고 할 게 없어요. 나는 나의 것이지 남의 것이 아니거든요.

아무리 바깥에서 예수님이 문을 열라고 해도 요한계시록 3장 20절 말씀처럼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아무리 두드리더라도 일단 문 열고 들어왔으면 빼먹을 건 빼먹고 예수님 밀어내버리고 그 다음부터는 예수님의 계시가 나만의 계시로 정착되는 겁니다.

그러한 기계와 장치가 인간한테 어떻게 작동하고 있느냐를 과연 칼 바르트란 신학자가 그 당시 철학으로 그걸 분석해낼 수 있느냐 하는 겁니다. 칼 바르트는 캘빈 계시론 치고, 루터 계시론 치고 바깥에 자유주의라는 예수님은 신이 아니고 인간이라고 하는 실증적 역사론적 계시 치기 바빠서 정작 본인은 신의 계시가 어떻게 내 안에서 변동을 일으키느냐는 자기 자신에 대해서는 소홀이 해버린 거예요.

계시론도 인간의 주체론, 인간의 자아론에 삼킴을 당하는 겁니다. 이것을 제가 이야기한 이 이야기가 전에 있던 어거스틴이나 토마스 아퀴나스나 캘빈이나 루터나 이런 사람들이 이 이야기를 안 했는가? 했지요. 그걸 가지고 ‘인식론’이라 하는 거예요. 어떤 것을 인식할 때 어떻게 인식할 수 있느냐?

앞에 누가 있지요. 인식론 앞에 반드시 들어가는 것은 남의 인생 소용없어요. 누가요? 내가. 성경에 예를 들면 아무데나 누가복음에 만약에 세례요한이 선지지다 할 때, 누가복음 7장에 이야기인데, ‘세례요한이 선지자라는 말이 최 집사님은 무슨 뜻입니까?’ 물으면 ‘나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아, 최 집사님 틀렸어요.’ 김 집사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이 목사는 이렇게 생각하고, 칼 바르트는 이렇게 생각하는 거예요. 성경에 누가복음 7장에 세례요한이 선지자란 그 의미가 사람마다 다 달라요. 다를 때 왜 다르냐 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다를 때 왜 달라지느냐?

방금 제가 그런 질문을 던졌는데 인식론 답변을 해봅시다. 단군신화에서는 이렇게 봅니다. 인간은 차이가 있다는 거예요. 개체의 차이라 하는데 쉽게 말해서 A라는 사람이 있고, B라는 사람, C, D라는 사람이 차이가 있는데 이 차이라도 모든 인간은 안에 신성이 들어있어요.

아까 환웅 같은, 환인 같은 신성이 들어있으면 여기서 조명을 쏘아서 비록 그 차이가 무지개 색깔로 나오더라도 같은 햇빛은 하나다. 이것은 단군할 때 ‘단’이 박달나무 단(檀) 자거든요. 밝다. ‘밝다’라는 것은 빛이라는 뜻이에요. 이걸 홍익인간, 모든 사람을 이롭게 한다. 그러니까 우리 단군신화의 기본적인 바탕은 인간 내부에 내재돼있는 빛이 그 차이를 뭐로 바꾸느냐? 중요합니다. 대동(大同)이죠. 대동단결.

모든 차이 속에서 하나로 만드는 빛이 있다는 겁니다. 이 빛을 인정하고 믿음으로 말미암아 어떤 사람, 남녀노소, 직업과 관계없어도 우리는 하나의 형제가 될 수 있다는 겁니다. 이게 바로 우리나라 단군신화의 인식론이에요.

그러니까 방금 제가 지금까지 한 것은 칼 바르트 다르고, 캘빈 다르다 하지요. 그 다름, 다른 것조차도 하나로 엮어내고 만들어낼 수 있는 그 깊이 있는 빛, 신성을 믿는 것이 진정한 일자, 하나, 하늘, 하나님, 환국 이런 뜻이에요. 사실은 우리나라가 한국이 아니고 환국이라 하죠. 환국이란 뜻은 하나란 뜻에서 ‘크다’와 ‘하나 됐다’를 합쳐놓은 거예요.

그래서 모든 기독교를 모르는 대한민국도 이방 다른 민족도 뜻은 뭐냐? 크다, 하나다. 대동단결. 장애자나 멀쩡한 사람 관계없이 모두 우리는 하나다 이 말이죠. 이 정신 위에 기독교가 들어오던, 불교가 들어오던, 유교가 들어오던 한국은 이걸 무교, 무당으로 엮어낸 거예요. 그걸 구체화된 게 무당인데 무당과 계시가 연관 있어서 이야기하는데

무당은 두 가지의 무당이 있어요. 하나는 ‘빙의’라 하는데 그 다음에 엑스타시, ‘탈혼’합니다. 빙의라 하는 것은 신이 나한테 들어붙은 거고, 탈혼은 신을 만나서 혼이 나가버린 거예요. 혼이 나가는 것은 북아프리카, 남아시아 계통이고, 우리나라나 북아시아 계통은 빙의, 뭔가 신병이 와서 결합돼있는 거예요. 결합될 때 착한 신은 조상신이 있고, 나쁜 신들은 염귀라 하죠. 원한이 있고 이런 것 있는데.

무당은 무당 안에 결국 신이 함께 있는 겁니다. 근데 무당이라 게 단군이고, 단군이 임금이에요. 백성들은 신과 인간이 함께 있는 임금을 섬기면서 동시에 본인들이 무당 속에 있어서 하나의 무당처럼 되는 겁니다. 그럼 이들의 목적은 차이가 나더라도 인생에 어떤 차이가 나고 영적으로 어떤 일이 있더라도 우리는 모두가 하나님 안에서 하나라는 이 생각이, 자기 내부 수양이죠. 이 생각이 결국 어떤 종교가 와도 수용이 되는 하나의 한 계시 안에 전부다 담아버리는 겁니다. 이게 모든 이방종교의 계시에요. 계시란 말은 어떤 종교, 어떤 차이가 오더라도 전부다 하나로 용해해버리고 녹여버리는 겁니다.

인식론이라 하는 것도 하나만 믿으면 인식론 논쟁할 이유가 없어요. 어떤 둘, 셋, 넷이 되더라도 하나 속에 전부다 집어넣으면 되니까.

그러면 이렇게 되면 인간이 자기가 수양할 목적이 생겼는데 뭡니까? 모든 변화도 하나로 녹아집니다. 이게 동학교에선 하늘님입니다. 그래서 동학교에서는 자식이 부모한테 절하는 게 아니고 부모가 자식에게 절하고, 남편이 여자한테 절하는 겁니다. 왜? 하늘님이니까. 당신은 하늘님을 믿으라가 아니라 당신 안에 하늘님이 들어있는 거예요. 어린애가 곧 신이 되는 겁니다. 만나는 사람마다 이웃으로 보지 말고 만나는 사람을 하나님으로 보자 이 말이죠.

그게 잘 안 되니까 동학당에 와서 수양을 하는 거예요. 세상에 이것보다 더 뛰어난 새생명운동 없습니다. 최고 아닙니까. 계속 교회 와서 수양하는 거예요. 하나다. 변화 때문에 좌절하지 말자. 내가 돈 없다고 가난하다고 출세 못한다고 그런 것 때문에 내가 기 죽지 말자. 결국 모두 가난해도 하나다. 전부다 불쌍히 여겨라. 긍휼히 여겨라. 유교도 마찬가지에요.

그런데 수양이 잘 될 땐 동굴 속에 가야 됩니다. 어둠 속에 금식해가면서 마늘과 썩은 것을 먹으면서 자기를 절제하면서 불교에서 분별심, 경계심. 세상에 차이를 말합니다. 차이 때문에 좌절하고 화나고 신경질 나는 것, 자기 혼자 스스로 자기에게 참선해나감으로써 모든 경계나 분별심에서 뛰어나서 ‘그래 하나야. 인간은 다 하나일 뿐이야.’라고 수양하니까 이것이 종교를 떠나서 인간이라면 누구나 나올 수 있는 계시다 이 말입니다. 이것 설명하는데 이렇게 오래 걸렸네.

절차야 위에서부터 오지요. 어느 민족이든 인간의 유한성, 인간은 부족하다는 걸 모르는 인간 누가 있습니까? 어느 민족이든 인간은 부족하죠. 부족하니까 무한을 향하여 신을 향하여 빌잖아요. 백날 빌어도 신이 우리에게 계시 줬다는 게 중요하지 않고 신이 진짜 내 안에 온다면 나는 어떤 인간으로 달라져 있을 것인가? 그걸 누가 확인하고 싶다? 내가 확인하고 싶어. 나는 이래서 과연 구원받을까, 내가 죽고 난 뒤에 영원히 신과 합일될까? 궁금한 것은 내가 궁금해요. 남이 궁금한 게 아니고.

그러면 그걸 미리 알았으면 욕심도 줄이고, 마음도 절제해서, 온유와 절제와 양선해서 자기 안에 모든 변화를 녹여버리는 하나 됨이 안에 간직하고 있으면 이제는 기독교가 오든, 불교가 오든, 여호와증인이 오든, 안식교가 오든, 통일교가 오든 나는 그런 것 다 초월했습니다. 새생명운동의 마지막 목표점이에요.

그런데 칼 바르트가 그 점을 알고 제대로 지적한 게 있어요. 그게 뭐냐 하면, 그런데 여호와 하나님은 이러한 올라오는 계시, 무당들을 죽여 버리라고 했을까요? 거기서부터 계시가 시작됩니다. 이걸 계시라 하지 않고 언약이라 해요.

나는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이 여기고 나는 은혜 줄 자에게 은혜 준다는 이것은 모든 인간에 보편성과 일반적으로 들어있는 인간은 신이라는 그런 개념이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 입장에서는 ‘신 같은 소리하고 있네. 다 신 아니야. 하지만 내가 구원할 자는 알아서 은혜 줄 자에게만 뽑혀서 선택받아서 간택되어서 택함 받아서 그래서 구원되고, 내가 긍휼을 주는 자에게만 구원돼.’라고 새롭게 등장한 신이 누구냐 하면, 여호와 하나님이에요.

방금 한 40분 강의한 모든 것은 전부다 어떻게 합니까? 지워버려라. 우리는 안 지웁니다. 왜? 남이 구원받은 것이 아니고 내가 구원받는 걸 원하고, 앞에 예수가, 여호와가, 십자가 백날해도 우리 안에 뭐가 장치돼있다? 그것을 나의 계시로 전환하기 위해서 나의 인식론, 나의 인식론을 뭐라 했습니까? 모든 것을 하나로 녹여버리는 장치가 있기 때문에 아무리 여호와께서 이야기해도 우리는 일방적으로 내 구원되는 쪽으로 해석을 해버려요.

그런데 우리는 불가능합니다. 이 모든 것을 다 잊고 부정하기가 불가능해요. 그런데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직접 나타나셔서 방금 강의한 이 모든 인간론에 위주 한 계시론을 주님께서는 저주하죠. 이걸 정죄해버립니다. 그 정죄하는데 그 이름이 아까 이야기한 언약을 통해서 하나님의 언약, 신약에서는 새 언약, 구약에서는 그냥 언약. 신약에서 봤을 때 옛날 언약, 구약에선 그냥 언약, 신약에서 새 언약.

이 언약을 통해서 갖고 있는 숨어있는 계시 만드는 장치를 다이너마이트로 폭파하든지 그걸 박살을 내버리죠. 그걸 우리 안에 내 위주의 계시 만들기 기계가 고장나버리면 우리는 뭐라고 이야기하느냐 하면, 그때는 구원 불가능성이라 합니다. 내가 사색하고, 도 닦고, 동굴 속에 들어가고, 금식해서 천국에는 못 들어가는구나. 그렇다면 내가 하나 되어서 하늘님 하는 천국은 아니야. 환국이 천국이니까. 이 천국은 사실은 천국이 아니었지요.

그리고 인간은 천국에 들어가지도 못하는 주제에 만날 뭘 생각하느냐? 천국 들어가기를 천국을 염두에 두고 내가 들어가는 사람답게 되려고 자기 수양을 한 거예요. 일방적으로. 계시 만들어서 그 계시 따라 들어갈 수 있다고 생각한 겁니다. 그러나 천국은 아무도 며느리도 몰라요. 천국은 오직 예수님이 우리에게 줄 때만 천국 갈 수 있습니다.

신약에서는 방금 이야기한 전체를 육이라 하고 육으로 난 것은 육이죠. 네가 성령으로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자가 없느니라. 바리새인들이 예수님과 마찰을 일으킬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어요. 바리새인들은 내부 수양에 세계 최고 레벨에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렇다면 칼 바르트의 계시론에 들어가면, 방금 이야기한 이 계시를 이야기하면서 그 다음에 칼 바르트는 언약을 뽑아냅니다. 계시에서 언약을 뽑아낼 누가 반대하겠습니까? 소위 고등비평, 성경비평학자들이 반대합니다. 왜 반대하느냐 하면, 계시에서 언약을 끄집어내면 이 언약은 비평학자들에 의하면 구약의 여러 주제 가운데 극히 일부에 해당되기 때문에 칼 바르트, 당신은 범하고 있다는 거예요. 왜? 언약이란 주제가 구약 중에 하나에 일부에 지나지 않는데 마치 성경을 관통하는 중심주체로 뽑아냈을 때 당신은 무슨 근거로 뽑아냈느냐고 묻지요.

‘우리는 아무리 봐도 언약이라는 것이 성경에 나오는 하늘, 땅, 율법, 인간 여러 가지 주제가 있는데 그 중에서 하나가 언약인데 당신은 무슨 통뼈로 무슨 초월적 권위를 가지고 성경은 언약에서 나와야 된다고 그렇게 불쑥 주장하는데 성경에서 언약을 주장한다고 하는 그 근거를 대보세요.’라고 나올 때 칼 바르트는 뭐라고 답변합니까? 이렇게 답변해요.

계시에서 언약을 낼 때 성경을 제대로 해석할 분을 인간을 제쳐두고 따로 하나 설정해요. 그게 누구냐? 칼 바르트는 예수 그리스도로 본 겁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구약을 언약으로 봤기 때문에 우리도 예수 그리스도의 뜻에 따라야 한다는 겁니다. 그런데 칼 바르트의 이러한 주장은 그전에 어떤 학자도 주장한 적이 없어요. 오히려 그 점이 이상해요. 방금 제가 이 말 하면, 요즘 다 그렇게 알고 있는데 하잖아요.

캘빈도 루터도 이런 주장을 노골적으로 한 적이 없었습니다. 왜 그러냐 하면, 그 이유를 설명해드릴게요. 그전에 지금도 개혁주의가 그렇게 주장하는데. 기독교 신학 역사를 보면 예수 그리스도가 중심인물이 아닙니다. 누가 중심인물이냐 하면, 처음에는 하나님이었고 나중에 발달해서 삼위일체 되면 삼위일체로 바뀌고 삼위일체 대표자가 누구냐 하면, 성자가 아니에요. 성부 하나님입니다. 성부 하나님이기 때문에 성경을 볼 때 성부 하나님 관점에서 봐야 돼요. 성부 하나님 관점에서 보면 예수님은 독특한 분이 아니고 우리 인간들 속에 한 분이에요. 그리고 모든 일은 아버지가 다 해요.

그럼 예수님은 어떤 역할에 들어가느냐? 하나님 아버지하고, 삼위일체 대표자가 성부니까. 성부하고 그 다음에 성부가 인간을 만들지요. 인간과 성부 사이에 예수님은 어떤 필요한 분이냐 이렇게 나오는 겁니다. 지금 제 말 들으면 그것도 맞잖아 한다고. 방금 예수 그리스도 중심이라 하니까 그것도 맞잖아요. 방금 이 이야기하니까 그것도 맞네요. 하거든요.

반대입니다. 여기서는 삼위일체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서 성경이 들어갔기 때문에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서 성경을 줬다 이 말이죠. 그런데 그 성경의 중심이름은 예수님이라 이렇게 되잖아요. 이게 칼 바르트 이전의 모든 신학이 다 그렇다 이 말이죠. 방금 이야기하니까 목사님 그 말이 맞네요. 방금 이것이 바로 칼 바르트에 의하면 이단이라는 거예요.

왜 그러냐 하면, 칼 바르트가 계시론을 이야기할 때 이제 칼 바르트 계시론의 취지가 나타나는데요. 계시론 할 때 여기 인간 위에 하나님 계시고 하나님이 우리에게 계시를 해주면 계시를 내려준 안에서만 하나님을 알 수 있다는 말, 칼 바르트에 의하면 이 주장이 틀렸다는 겁니다.

이 주장이 왜 틀렸느냐 하면, 동그라미 이렇게 하면 맞는 것 같지요. 여기다 동그라미 몇 개를 해서 사람을 그려보세요. 하나님이 인간에게 신의 계시를 안다는 것을 누가 생각하죠? 바로 인간이 상상하니까 결국 계시가 우선이 아니고 이런 계시를 창안하고 상상하는 인간이 우선되니까 이 자체가 이렇게 되면 결국 이런 계시론도 인간 중심이죠.

그러면 예수님 중심의 계시론으로 바꾸려면 그냥 바꿔지는 것이 아니고 현재 인간들이 어떤 계시론을 갖고 있는가? 이걸 치면서 바꿔져야 돼요. 그게 바로 언약을 주신 여호와 하나님의 특징이고 계시가 돼요. 그렇게 해야 그 다음에 은혜 줄 자에게 은혜 주시고 긍휼히 여길 자에게 긍휼히 여겨서 구원하는 것이 성립이 됩니다. 만약에 제가 ‘여러분 가운데 구원하기 위해서 은혜 주겠습니다.’ 하면 ‘저요, 저요.’ 하잖아요. ‘제가 은혜 받겠습니다.’ 나온다면 전부다 내 말을 오해한 거예요.

칼 바르트는 은혜 줄 자에게 은혜 준다는 것은 사람보고 한 것이 아니고 그 안에 들어있는 자기 아들 예수님한테만 하는 이야기에요. 다른 사람들이 은혜 줄 자에게 은혜 준다는 말 들은 것은 자기가 구원받으려고 하는 곡해와 오해의 산물이기 때문에 주님께서는 듣지도 않습니다. 은혜 줄 자에게 은혜를 주고 긍휼히 여길 자에게 긍휼을 베풀 자는 예수님밖에 없어요. 다른 사람은 안 된다.

그런데 기존에 캘빈부터 모든 신학은 하나님 상대하고, 인간 상대해서 하나님과 인간은 문제 없다는 거예요. 문제는 뭐냐? 하나님이 적절한 계시 주는 것을 몰랐고, 계시를 줘도 계시내용을 몰라서 문제였다는 거예요. 그런데 계시내용이 뭐냐? 예수님 중심이었다. 따라서 ‘예수님 중심으로 살면 우린 구원받는다.’라는 칼 바르트 이전에 천구백 년 동안에 기독교 신학의 오류다. 이런 생각이 오류였다는 겁니다.

하나님 괜찮고, 우리 괜찮고 문제는 하나님의 뜻을 몰라서 계시가 궁금했는데 이제 하나님이 계시를 줬기 때문에 그 계시를 받으면 되는데, ‘그 계시 중심에 바로 예수님이구나. 예수 믿으면 되겠네.’라고 생각한 것이 바로 전혀 하나님 뜻하고는 상관없는 자기 일방적인 자기 사적인 구원을 주장한 것밖에 안 된다는 거죠.

물론 그 당시의 칼 바르트는 단군신화를 모르고 기존의 문화에 대해서 전공이 아니기 때문에 다른 민족에서도 똑같은 이런 계시가 있다는 걸 몰랐지요. 다만 상식선에서 알았지만. 칼 바르트는 몰랐어도 짐작은 했지요. 왜 성경에서 이방종교의 무당을 죽였는가?

그 무당이 뭡니까? 무당은 신과 인간이 하나 되어서 자기 수양, 인간이 추구할 수 있는 최고의 경지. 자기의 내부를 늘 비우고 그 내부에 신의 계시로 채우는 것. 이러한 인간의 모든 그것을 최고로 구현한 사람이 무당인데 제사장이죠. 제사장이고 임금인데 그 사람을 구약에서 죽여라. 인간이 할 수 있는 가능성의 한계를 죽이면 남는 것은 불가능인데 지금 이렇게 되면 불가능이 아니고 가능이 되죠.

그러면 칼 바르트는 뭐냐 하면, 인간이 아무리 가능하지 않은 불가능한 영역을 따로 만들어야 된다는 거예요. 그 영역이 뭐냐? 예수님부터 출발한 계시론이 될 때 그 불가능은 계속해서 인간이 할 수 있다는 가능성과 이렇게 따로 차별 나는 독특한 자리가 마련된다 이 말입니다.

10분 쉽시다.

첨부파일 : 대구특강20091121a.hwp (52.0K), Down: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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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 21,142건 중 509 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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