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하 5: 1- 3 (이스라엘의 왕)
삼하 5: 1- 3 (이스라엘의 왕)
이름 : 우리교회(IP:220.81.41.193)
본문 : 사무엘하 5장 1- 3절
제목 : 이스라엘의 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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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교회
09-11-22 11:25
http://media.woorich.net/성경강해/사무엘하-2009/06강-삼하5장1-3(이스라엘의왕)-2sa091122.hwp
이근호
09-11-22 15:39
이스라엘의 왕
2009년 11월 22일 본문 말씀: 사무엘하 5;1-3
(삼하 5:1, 개정) 『이스라엘 모든 지파가 헤브론에 이르러 다윗에게 나아와 이르되 보소서 우리는 왕의 한 골육이니이다』
(삼하 5:2, 개정) 『전에 곧 사울이 우리의 왕이 되었을 때에도 이스라엘을 거느려 출입하게 하신 분은 왕이시었고 여호와께서도 왕에게 말씀하시기를 네가 내 백성 이스라엘의 목자가 되며 네가 이스라엘의 주권자가 되리라 하셨나이다 하니라』
(삼하 5:3, 개정) 『이에 이스라엘 모든 장로가 헤브론에 이르러 왕에게 나아오매 다윗 왕이 헤브론에서 여호와 앞에 그들과 언약을 맺으매 그들이 다윗에게 기름을 부어 이스라엘 왕으로 삼으니라』
예수님을 흔히 ‘사랑의 구세주’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그 예수님 하시는 일 속에 전혀 사랑을 베풀지 않고 도리어 심하고 철저하게 저주하시는 속성을 들어있다는 것을 어떻게 우리는 남들에게 소개할 수 있겠습니까? 쉽게 말해서 우리를 사랑하는 그 구세주의 사랑을 지옥가 있는 사람에게도 나누어 줄 수가 없느냐 하는 말입니다.
우리가 미워하는 자가 지옥간다면 우리는 속으로 얼시구나 좋아하겠지만, 그게 아니라 우리가 사랑하는 자식이 예수님을 안 믿는다고 한다면, 여기서 우리는 예수님과의 관계가 틀어질 수가 있습니다. 나는 죽도록 내 자식을 사랑함에도 불구하고 내가 사랑하는 예수님은 내가 사랑하는 내 자식을 사랑해주지 않는다면 우리가 그런 예수님을 사랑하는 것이 진심이 아닐 수 있다는 결과가 나올 수 있기 때문입니다. 결국 여기서 우리는 혈육적인 사랑에서 나온 왕과 영적인 세계의 왕이 다르다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백성들이 다윗의 대해서 단단히 오해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다윗의 혈육이라는 것을 근거로 자신의 왕이 되어달라고 요청하고 있는 겁니다. 그런데 그들이 무엇을 주장하느냐 하며는 ‘이스라엘’을 내세웁니다. 그들은 이스라엘이 뭔지도 모릅니다. 단지 그들은 혈육적인 이스라엘만 생각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생각하는 왕이란 혈육적인 왕입니다. 쉽게 말해서 같은 가족일 경우에만 그 가족의 왕이 될 권한이 있다고 여기는 겁니다. 어떤 식으로 혈육적으로 연결점이 성립되어야 왕 값을 한다는 겁니다. 우리는 혈육이라는 것도 하나의 ‘구조’를 이룬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사람이란 자기 신체만 ‘나’가 아니라 혈육적으로 가까운 사람은 모두다 다 ‘나’의 구조 속에, 집어넣고 생각합니다. 왕이란 바로 그 속에서 돌출되는 겁니다. 같이 집안 사람을 특출한 분으로 삼아서 그분을 구심점으로 하여 자신들의 ‘나’를 확대시켜 나가겠다는 겁니다. 그런데 이러한 혈육 중심이 되어버리면 하나님은 완전히 제켜 놓는 셈이 됩니다. 하나님은 있으나 마나하는 셈이 됩니다.
예수님은 다른 혈육을 말씀하십니다. 마태복음 12:46-50에 보면, “예수께서 무리에게 말씀하실 때에 그 모친과 동생들이 예수께 말하려고 밖에 섰더니 한사람이 예수께 여짜오되 보소서 당신의 모친과 동생들이 당신께 말하려고 밖에 섰나이다 하니 말하던 사람에게 대답하여 가라사대 누가 내 모친이며 내 동생들이냐 하시고 손을 내밀어 제자들을 가리켜 가라사대 나의 모친과 나의 동생들을 보라 누구든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모친이니라 하시더라”고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과 베드로는 몇 촌 관계입니까? 사도 바울과 예수님은 촌수가 어떻게 됩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사도 바울이나 베드로를 한 가족으로 보십니다. 왜냐하면 요한복음 1:13에 보면,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권세는 혈통이나 육정이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 난 자들에게만 해당되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에게 있어 물론 혈육이 있었습니다. 그 사람은 이스마엘입니다. 하지만 그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약속의 자식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구조가 틀리기 때문입니다. 즉 하나님의 가족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나’라는 구조와 다른 구조로 형성되어 있습니다. 그 구조를 이루는 기준에 대해서 잠시 소개해드리겠습니다.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투기하는 자가 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무례히 행치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지 아니하며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
이 말씀은 고린도전서 13:4-7의 말씀입니다. 아무리 교회가 크고, 아무리 대가족을 이루는 집안이라고 할지라도 이 천국의 기준, 즉 ‘자기 유익을 구하지 않는 자’라는 기준을 내세우면 결국에는 그 혈육적인 구조도 산산조각납니다. 오로지 성도만이 따로 분류될 수 밖에 없습니다.
출애굽기 33:19에 보면,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내가 나의 모든 선한 형상을 네 앞으로 지나게 하고 여호와의 이름을 네 앞에 반포하리라 나는 은혜 줄 자에게 은혜를 주고 긍휼히 여길 자에게 긍휼을 베푸느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하나님은 인간의 혈육을 전혀 고려하지 않고 따로 실시하게 됩니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의 가족의 구조가 우리의 행함과 무관하게 진행됨을 알 수가 있습니다. 뿐만아니라 우리의 의도와는 빗나가는 식으로 이루어짐을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 유익을 구하지 않는 식’으로 진행됩니다. 그것이 섬김입니다. 세상의 왕과 예수님의 왕심과의 차이는, 폭력과 그리고 희생의 차이입니다.
세상사람들의 질서잡기란 지배하는 힘, 곧 폭력이 수반되는 힘입니다. 하지만 하늘 나라의 왕은 힘을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의를 희생으로 제공하는데 있습니다. 빌립보서 2:5-8에 보면,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제 길 밖에 모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가시는 길을 모르고 안다 할지라도 갈 의사가 전혀없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우리 멋대로 간 우리의 죄를 그분에게 대신 댐터기를 씌어서 모든 저주를 그분에게 돌리고 말았습니다. 어떤 백부장은 예수님의 죽으심을 쳐다보면서, “진정 이스라엘의 왕이시다”고 했습니다.
이로서 자신의 가족이 되고 말고는 그야말로‘ 은혜줄 자에게만 은혜를 주시는’ 그 원칙에 따라서 일방적인 호출이 이루어지는데 이 호명과 호출의 관계가 곧 왕과 참 백성의 관계입니다. 이 관계를 ‘다윗의 자리’라고 말합니다. 다윗이 보여줄 다윗의 자리란, 대단한 능력을 발휘하는 자리가 아니라 죄인됨의 기능을 보여주는 자리입니다.
아무리 큰 죄인이라도 왕의 용서하심을 무효로 돌릴 수 있는 죄는 없다는 것이 하나님의, 은혜의 능력이요 이스라엘 왕의 능력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혈육 중심으로 하나님을 섬기지 말게 하시고, 예수님의 왕되심을 증거하는 하나님의 가족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우리교회
10-12-19 21:10
006강-삼하5장1-3(이스라엘의왕)-2sa091122-(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 사무엘하 5장 1절에서 3절까지입니다. 구약성경 470페이지입니다.
사무엘하 5:1-3
“이스라엘 모든 지파가 헤브론에 이르러 다윗에게 나아와 말하여 가로되 보소서 우리는 왕의 골육이니이다 전일 곧 사울이 우리의 왕이 되었을 때에도 이스라엘을 거느려 출입하게 한 자는 왕이시었고 여호와께서도 왕에게 말씀하시기를 네가 내 백성 이스라엘의 목자가 되며 이스라엘의 주권자가 되리라 하셨나이다 하니라 이에 이스라엘 모든 장로가 헤브론에 이르러 왕에게 나아오매 다윗왕이 헤브론에서 여호와 앞에서 저희와 언약을 세우매 저희가 다윗에게 기름을 부어 이스라엘 왕을 삼으니라”
오늘 이 말씀은 다윗이 이스라엘 왕이 되었다는 그 대목입니다. 왕이 되었다는 말이 아닙니다. 이스라엘의 왕이 된 겁니다. 예수님은 모든 사람의 구주가 아닙니다. 예수님은 믿는 사람, 천국 갈사람, 택한 사람, 천국에서 영원히 살 사람의 구주가 되는 겁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는 어떤 사람한테는 구세주가 안 되느냐 하면, 지옥 갈 사람한테는 절대로 구원해 주지 않는 구세주가 되는 겁니다. 지옥 갈 사람한테는 구세주가 아니고, 천국 갈 사람에게는 예수님이 구세주입니다.
그렇다면 방금 제가 이 말씀 여러분이 들었다면, 예수님은 모든 사람의 구세주가 아니라 오직 자기를 믿는 사람에게만 구세주 된다는 그 증거, 그 근거를 우리가 예수님 안에서 찾을 수가 있습니까? 예를 들면 어떤 사람이 ‘어이, 이 목사 당신 나한테 설명해 봐라.’ ‘무슨 설명?’‘어떤 사람만 지옥 보내고 어떤 사람은 천국 보내는 그런 예수님인 것을 증명해 봐라.’예수님의 어떤 일이 어떤 속성이 ‘왜, 한쪽은 지옥으로 보내야 하느냐? 그걸 설명 해 봐.’그 질문은 뭔 뜻이냐 하면, 우리는 상식적으로 예수님은 사랑이 많다고 알고 있죠? 권사님, 그렇죠? 사랑이 많으면 지옥 갈 사람한테 나눠주란 말이죠. ‘사랑이 많다며?? 그 많은 사랑 그거 어디다 써먹을 건데, 지옥 갈 사람한테 나눠 줘가지고 지옥 갈 사람을 모두 보내고 지옥 갈 사람을 몽땅 천국으로 보내주는 그 사랑을 주님은 왜 발휘를 안 하는지, 왜 그 이유가 들어있는 예수님을 설명해 봐라.‘ 이 말입니다. 할 수 있습니까? ㅎ
이게 남의 이야기가 아니고 우리 가족 가운데서도, 동생이 교회 안 나오고 있잖아요. 동생이 교회 안 나온다는 말은 어패가 있어요. 뭐냐 하면, 동생이 교회 나오는 게 이상해요.ㅎ 왜냐 하면, 모든 인간은 저주 받아 마땅한데, 교회 안 나오는 게 정상이고, 교회 나오는 게 이상해요. 그럴 때, 하나님이, 예수님이 만약에 내가 동생을 미워한다면 아무 문제없습니다. ‘에이 시, 미워하는 놈 지옥이나 가거라.’이러면 아무 문제없는데, 동생을 되게 사랑한다 합시다. 나는 동생을 사랑하는데, 주님은 동생을 미워했다. 그러면 누구 하고 누구하고 원수지간이 되느냐 하면, 내가 믿는 예수님하고 나하고 원수지간 돼 버립니다. 원래 삼각관계가 그렇게 돼 있습니다.ㅎ
나는 내 남편을...(원래 남편은 원수니까 치우고ㅎㅎ) 나는 내 자식을 되게 사랑하는데, 자식이 교회를 안 나오네?? 나는 자식을 사랑하는데 주님이 자식을 사랑 안 해서 지옥 보내겠다는데, 그러면 자연적으로 누가 틀어지느냐 하면, 주님과 나 사이의 관계가 삐걱거릴 수가 있어요. 그럴 때 우리가 제대로 내가 예수님을 제대로 안다고 할 수 있느냐. 그것까지 설명할 수 있는 성경적 바탕이 있어야 되는 겁니다..
그러면 이 문제가 어디서 틀어지느냐 하면, 우리가 내뱉은 사랑이라는 게 그냥 나온 게 아니고, 사랑이 나올 때는 구조가 있어요. 구조란 말을 하면 여러분, 또 어렵다고 짜증내겠는데, 이야기해야 되겠어요. 우리는 하나의 구조 속에 ‘나’입니다. 구조 속에서 올라오게 돼 있습니다. 그 구조원을 뭐라고 하느냐 하면, 여러 가지 말로 하는데, 쉬운 말로 가족, family, 가문, 또는 씨족, 일가친척, 일가친척이 제일 쉽네요. 일가친척은 똘똘 뭉칩니다. ‘이번에 애 수능 쳤는데 어딜 보낼 겁니까?’‘서울대학교’이게 남의 이야기가 아니고 내가 아는 아이거든요. 남의 애가 서울대학교 가면 기분 나빠요. 내가 아는 애가 서울대학교 가면 기분 좋아요. 이게 뭐냐 하면, 요게 구조입니다. 이게 육적인 구조, 나와 육적으로 관계 돼 있는, 사돈에 팔촌이고 뭐 걸리는 게 있다는 거, 그걸 가지고 남이 아니라 합니다.
어떤 정치가가 그런 이야기 했죠. ‘우리가 남이가?’그래서 유명해졌죠. 우리는 남이 아니면 무조건 사랑합니다. 그래서 옛날에 왕 이야기 나올 때, 오늘 본문에도 나오잖아요. 1절에 보면, “이스라엘 모든 지파가 헤브론에 이르러 다윗에게 나아와 말하여 가로되 보소서 우리는 왕의 골육이니이다.” 왕과 같은 핏줄입니다. 라는 말을 한 거예요. ‘그러니까 당신이 하나님과 함께 있으니까 하나님의 덕을 좀 봅시다.‘하는 식으로 한 거예요.
제가 여러분에게 속으로 묻습니다. 베드로하고 예수님하고 몇 촌 관계입니까? 1촌 텄습니까?ㅎ베드로하고, 사도요한하고, 사도바울하고, 예수님하고 몇 촌 관계죠? 진 경자선생님, 촌수가 어이됩니까? 촌수가 없죠. 이걸 가지고 요한복음 1장에 뭐라 그러느냐 하면, ‘우리가 하나님 아들 된 것은 촌수로 된 것이 아니다. 혈육으로 된 것이 아닌데, 지금 우리는 무엇이 우선이냐 하면, 예수를 믿어도 우리 집안이 먼저 예수를 믿어야 되고, 장로가 되도 우리 집안의 성씨가 장로가 돼야 되고, 저쪽 교회에서는 우 씨 집안하고 정씨 집안하고..., 성씨 별로 장로 투표가 딱딱 갈라진다 말이죠.’우리가 남이가?‘ 이렇게 하거든요. 나니까, 누구냐 하면 나거든요. 아무리 우리가 사돈 팔촌해도 남이 아니고 우리 같으면 내 몸이 되는 거예요.
형제간에 애 많이 낳으면 다른 형제들이 싫어해요. 왜 싫어하느냐, 지 애도 아닌데 왜 싫어하느냐? 만약 어느 집에서 애를 넷 낳았다 하면, 그 형제들이 다 싫어하는 이유가 분명히 4명이니까 못 살 거고, 대학 갈 때 공납금을 체면 봐서라도 한번 들어줘야 하는데, 그 공납금 대 주면 괌에 놀러갈 돈이 없다 말이죠. 자기 제주도 놀러 갈 돈 꼬부칠 돈이 비잖아요. 그러니까 지는 내 애라 하지만, ‘우리가 남이가?’ 남이 아닌 이상은 언제나 조카뻘 되는 애들 건사해야 되고 나중에 어려우면 취직도 시켜줘야 되고, 신경 써줘야 되고 한다 말이죠. 그래서 혈육을 돈독히 하기 위해서 옛날부터 우리 조선민족은 제사 제도를 도입해서 정기적으로 단합대회를 했습니다. 낮에 팔공산 올라가도 일찍 내려와야 돼요.‘오늘 일찍 내려가야 한다. 오늘 저녁에 제사다,’그런 대화를 차타면서 많이 들었어요.
제사를 통해서 우리는 남이 아니고 한 식구고 서로서로 우리가 우리 안 도와주면 누가 도와주겠느냐.‘ 그래서 동남아 가서 한 집안 다 날아가는 수가 있고, 때로는 동서가 같이 낚시 갔다가 다 죽어가지고 동시에 과부가 여러 명 생길 수가 있고..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우리하고(아까 이야기 했잖아요. 사도바울하고 예수님과 촌수가 어이 되느냐?)촌수가 없는데, 어떻게 우리가 예수님하고 남이 아니냐 하는 문제입니다. 이게 어려워요. 왜 예수님하고 남이 될 수 없느냐 하면, 그 구조가 예수님하고 우리는 한 형제간입니다. 제가 이야기 하면 무서운 이야기지만 예수님이 이야기 했어요. ‘누가 내 형제며 누가 내 모친이고, 동생들이냐.’ 여기 같은 하나님 믿는 사람이 내 형제라 했습니다. 그런데 같은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 하면, 예수님을 믿어야 같은 하나님이 돼요. 하나님 알고 그 다음에 예수님 만나면 같은 하나님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인 것을 인정할 때, 거기서 촌수가 같은 집안사람이 되는 겁니다. 같은 예씨 집안이 돼요. 그런데 예수님하고 우리하고 진짜 같은 영적인 혈육이 되려면, 구조가 있어요. 그 구조는 어떤 구조냐 하면, 제가 지금까지 이야기한 육적인 구조, 피로, 혈육으로 된 구조와 다른 구조를 가져야 됩니다.
아브람이 이스마엘을 낳았거든요. 그 구조는 아브람 구조는 맞는데, 아브라함 구조는 안 맞아요. 그래서 아브람에 맞는 것은 이스마엘이지만, 아브라함에 맞는 자식은 놀랍게도 아브라함 배에서는 안 나와야 됩니다. 이것을 숨어있는 사람이라고 합니다. 아브라함 속에 하나님이 계셔서(선지자니까) 아브라함이 축복하는 것이 아니고, 아브라함 속에 있는 하나님이 축복하면 축복받고 아브라함이 저주하는 것이 아니라 아브라함 속의 하나님이 저주하면 저주 받게 돼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 안 믿으면 지옥 가느냐 하면, 그건 우리가 결정할 문제가 아니고, 우리 속에 계신 예수님이, 예수님에게는 다른 가족이 있어요. 예수님의 다른 가족이 마귀에 속한 자들인데, 마귀에 속한 자들은 지옥에 보내야만 천국 가는 자들이 빛이 나게 돼 있어요. 주님의 사랑의 빛이 나게 돼 있어요. 그럼 그 구조에 대해서 설명할 때, 어렵게 설명하면 안 되니까, 제가 쉽게 설명을 할게요. 구조에서 예수님과 한 식구가 됐을 때, 기준이 뭔가를 제가 한번 읽어 볼 테니까 한번 들어보세요. ‘아하, 이런 기준도 있었구나.~!’하고 생각날 겁니다.“사랑은 무례히 행치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지 아니하며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고린도전서 13장 이야기입니다.
자 예를 들어서 지묘동에 교회가 있습니다. 사람들은 그때서 보고 교회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만든 간판은 아니지만 여기 간판 커다란 거, 우리 같으면 간판 크게 안 만듭니다만, 고맙게도 여기 남산교회에서 크게 만들어서 ‘우리교회’라고 붙여놨죠. 남들이 보면 우리교회라고 알고 있습니다. ‘저 사람들은 구원 받겠지?’라고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주님의 기준을 간판이 크냐를 보는 게 아닙니다. 간판 색깔이 파란지 하얀지 보는 게 아니고, 그 주님이 식구가 되는 기준이 따로 있어요. 뭐냐 하면,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투기하는 자가 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무례히 행치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지 아니하며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라는 이 기준을 오늘날 우리 경주 이씨 집안, 안동 권씨 집안에 적용시켜 보세요. 그게 가족인가?? 안 되죠. 심지어 교회에 적용해도 교회가 깨질 판인데. 여기에 특별히 “자기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며“ 이걸 우리교회에 적용시켜 보세요. 다들 보따리 싸서 도망가기 바쁠 거예요.
개그 콘서트라는 프로에 제가 흥미 있는 코너가 있는데, ‘내비 둬’라는 코너인데, 눈 마주치는 대목이 나옵니다. 실컷 뚱뚱하다고 되게 욕 해놓고 나중에는 ‘나 가야 돼, ’왜?’‘나 뚱뚱보하고 눈 마주쳤어.’대사가 그렇게 돼요. 눈 마주칠 때, 뚱뚱한 여자를 욕했다고 도망치려 하는데, 주님께서 뭐라 하시느냐 하면, ‘이 근호 목사 이리와, ’예‘ ’니는 자기 유익을 구치 안했어? 눈을 딱 맞추면, ‘나 갈래, 갈래요. 주님과 눈 마주쳤어. 갈래.’주님의 기준은 교회 몇 명이냐, 헌금 얼마 나오느냐, 교회 역사가 몇 년이냐가 아닙니다. 그 기준이 따로 있어요.‘니 내 식구 맞아? 니 남이야 같은 식구냐 하는 기준은 따로 있습니다. 그 기준이 뭐냐? 사랑입니다. 믿음, 소망, 그중에 제일은 사랑이라.
이걸 어제 강의할 때는 뭐라 했습니까? ‘소망도 영원하고 믿음도 영원한 이유는 사랑이 영원하기 때문에 그 셋이 다 영원하다’라고 칼바트가 그렇게 해석했다고 하죠. 믿음, 소망, 그중에 제일은 사랑이라. 그런데 그 사랑이 뭐냐 할 때에 한 가지 끄집어내려면, ‘자기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고, 자기의 이익을 위해 살지 아니한 거죠.
그러면 어떤 사람이 세금 10억씩 포탈해 먹고 떵떵거리면서 해외로 골프 다니는 그런 부자를 찾아다니는 세금을 뜯어내려는 사람이 왔을 때, ‘실례합니다. 세금 냈죠?’ ‘내가 세금 왜 내는데?’‘성경에 보니까 고린도전서 13장에 ’자기 유익을 구치 아니하고‘ 들이대면 그 사람이 뭐라 하겠습니까? ’이게 미쳤나? 갑자기 세금은..‘ 바로 그 세금 안 낸 그 사람이 만약에 우리 삼촌이라면, 그리고 나를 취직시켜 준 사람이라면, 더 나아가서 우리 교회에 한 달에 헌금을 제일 많이 하는 사람이라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아! 문제 크죠.
얼마 전에 어떤 사람이 해외도피 하다가 체포 된 사람이 있는데, 나라 돈 수백억 해 먹고 들어온 사람이 있어요. 무기 중개업인데 그 수십억 돈을 어디에 썼느냐 했더니 교회 헌금을 했다고 합니다. 체포됐어요. 아마 그 현금 회수 돼야 할 겁니다.
오늘 본문에서 사람들이 혼동하고 있어요. ‘다윗 임금님,’‘왜?’‘우리하고 같은 핏줄이죠?’그러니까 우리 왕이 돼 달라 하는 거예요. 참 다윗이 기가 찰 겁니다. ‘아이 이 인간들아, 아직도 하나님에 대해서 그리 모르나?’ 이 사람들이 뭐라 그러느냐 하면, ‘당신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라고 하는 거예요. 다윗이 임금 맞습니다. 맞는데, 사람들의 혈육의 임금이 아니고, 누구의 임금이냐 하면, 이스라엘의 임금님 이예요. 이스라엘의 임금님은 장차 오실 우리의 지옥 보낼 사람을 지옥 보내는 그 임금님 이예요.
그러면 목사님, 우리는 왜 천국 갑니까? 이제부터 본론 들어가니까 잘 들어보세요. 이스라엘의 임금의 특징은 뭐냐 하면 출애굽기 33장 말씀처럼 “내가 은혜 줄자에게 은혜를 주고 긍휼히 여길 자에게만 긍휼히 여기는 자입니다.‘ 지나 개나 다 구원하는 것이 아니고, 은혜 줄자에게만 은혜를 줘서 남(마귀)의 사람을 내 사람, 마귀에서 벗어나서, 마귀의 종, 율법의 종, 죄의 종에서 자유케 해서 내 사람을 만드는 거예요. 그래서 오늘 중고등부 그런 설교 했습니다만, (오늘 1명 왔어요ㅎ) 심판 주되시는 분이 죄를 죄 없다 해버리면, 더 이상 우리를 심판할 분이 없어요.
이스라엘 왕은 이 세상을 심판하실 분입니다. 심판하실 분이 그 사람을 그냥‘니 내 백성해라.’이래 하는 것이 아니고, 은혜 줄자에게 은혜를 줘서, 다른 말로 하면 그 사람이 죄가 있더라도 ‘내가 심판 주, 내가 담당자거든, 담당자 내가 너 보고 ’죄 없다‘ 해서 이끌어 낸 사람만의 이스라엘 왕이 되는 겁니다.
그걸 가지고 구약에서는 어려운 말로 ’다윗의 자리‘라고 합니다. 오늘 오전에는 그것을 설명 안 했는데, 다윗의 자리가 뭐냐 하면, 다윗이 차지하는 자리가 아니고, 다윗 같은 분이 오실 자리가 다윗의 자리예요. 다윗은 간음했고 살인 했지만, 다윗이 그것만 보여주는 것이 아니고, 이 같은 죄인도 주께서 은혜가 임하니까 그야말로 하늘나라로 들어갈 수 있었음을 육적인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대표적으로 보여주는 기능을 했던 왕, 기능 왕!! 죄의 씻음과 용서가 어떻다는 것을 보여주는 그런 기능을 발휘했던 왕이 다윗 왕이었습니다. 다윗이 전쟁을 하는 것은 육적인 전쟁이 아니에요. 지금까지 이야기한 것을 쉽게 이야기하면 이렇습니다.
세상의 왕과 영적인 왕(이스라엘 왕)의 특징이 뭐냐 하면, 세상 왕은 폭력적입니다. 폭력적인 왕의 대표적인 경우가 그걸 ‘가부장제도’라 합니다. 가부장제도가 뭔 뜻이냐 하면, 투사부일체, 스승과 임금과 부모는 그림자도 밟지 마라. 이거는 완전히 오야봉. 가장이라는 것이 독보적인 존재라는 거죠. 그래서 가부장제도가 가장 날카로운 게 뭐냐 하면, 제사 지낼 때, 아무리 아내가 잔소리를 많이 하고 아무리 아내가 남편보다 돈을 더 많이 벌어도, 제사 드리는 그 제사장 역할을 하는 가장 앞에서는 끽 소리 못하고, 남편 앞에서는‘대추 갖다 놨나?’‘예’고분고분해서 밤 10시에 제사 드리게 되죠.‘둘째 왔나 전화 해봐라.’예, 왔답니다.‘.’정종하고, 음복해야지, 여자들은 저리 가, 제사에 절하지 마.‘ 철없는 2살 딸내미 ’나도 할래.‘ 하니까, 저리 가. 아들 와.’
이걸 가지고 가부장제도라 하는 겁니다. 왜냐 하면 가정에는 질서가 있어야 되고 질서의 정점은 하나가 돼야지 둘되면 권력이 분산되면 안 돼요. 그때는 아무리 남자가 백수고 여자가 돈 벌어도 소용없어요.ㅎ 제사 지낼 때는 일시적으로 오야봉이 되는 겁니다. 폭력적입니다.
그런데 빌립보서 2장 5절~10절에 보면, 우리의 왕은 폭력이 아니고, ‘오히려 십자가에 죽기까지 복종하시니라.’‘내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고, 오히려 ’내가 죽을게.’‘니 죽기 싫나? ’죽기 싫습니다.‘’그래 내가 죽을게.‘니 죄인이지?’‘죄인은 죽어야지.’‘죄는 죄대로 져도 죽기는 싫습니다.’‘알았어, 내가 죽을게.’
이게 뭐냐 하면, 심판 주로 오신 분이 은혜 줄자에게 은혜를 주는 과정(절차)입니다. 그냥 은혜 받았다고 좋아하지만 말고, 그 절차까지 알아야 돼요. 어떻게, 어떻게 해서 죄는 죄대로 지은 나에게 왜 죄가 날아가 버렸나? 죄가 없느냐? 그 절차를 들여다보니까, 그 죄의 길을 주께서 대신 십자가의 섬김으로써 하나의 순한 어린양이죠. 그야말로 이사야 53장에 보면, ‘우리는 다 제갈 길로 갔거늘 우리 무리의 죄를 그에게 담당시켰다.’ 이게 복음입니다. 이게 기쁜 소식 이예요. 우리는 도망쳐 있었고 도망친 우리를 위해서 죄를 그에게 담당시켜서 아무리 요나처럼 도망쳐도 담당한 사건이 벌어졌으면, 그 도망친 것은 소급해서 용서가 된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내가 죄가 뭐냐 할 때는 주께서 가져간 죄를 보고 ‘아, 우리 죄가 이게 죄였구나.’새롭게 아는 거예요. 예수님께서 말씀을 통해서 ‘이것이 죄다. 이것이 죄다. 죄 지면 내가 용서했다. 용서했다. 죄 있다 용서했다. 죄 있다. 용서했다.’ 이것을 통해서 ‘아! 평소에 우리 모든 것이 죄였구나.‘ 이것은 폭력이 아니고, ’니 교회 안 나올래? 니 맞는다.' 이런 식이 아니라 또는 돈으로 폭력 하는 것 있죠. ‘한번 나오면 5만원 드릴게요.’ 이것도 폭력이거든요. 강제성. 그게 아니고 ‘너 같은 말도 안 듣는 너를 위해서 내가 대신 죽어서 이 값을 치렀다는 그 사실을 은혜로 주는 거예요.
그래서 예수님 십자가 죽을 때, 어떤 백부장이 이야기 했습니다. ‘저 분은 진정한 왕이다.' 그걸 어떻게 알았느냐, 십자가 죽어서 부활하기 이전인데, 십자가 매달려 죽으신 모습을 보고, ’여러분, 저 분은 진정한 왕입니다. 왕은 저래야 돼요.‘ 왕이 폭력하고 명령하고 지시하는 것이 아니라, 정말 말 안 듣는 우리를 위해서, 우리는 양 같아서 말을 안 들어요. 정말 우리는 말 안 듣습니다. 김양, 최양, 박양,..우리는 말을 듣는 양이 아닙니다.ㅎ
우리는 말도 안 듣는데,(전화 벨 소리) 휴대폰 끄라고 해도 말을 듣겠습니까? ㅎ 아무도 말을 안 듣지만 그것을 십자가를 바라보는 순간, 우리가 말 안 듣는 양임을 안다는 것, 그때 그 관계, 그 구조, 그 구조가 뭐냐, “ 나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고, 믿음, 소망, 주의 사랑을 아는 거죠. ’”온유하며 투기하지........,“ 남편 자랑하세요. 우리 아이 서울대학교 갔다고 자랑하세요. 우리 교회는 없지만, 자랑하세요. 하지만 주님 십자가 앞에서는 ‘주님 우리 애 서울대학교 갔습니다.’이런 사랑은 구조를 몰라서 그래요. 서울대학교는 힘의 구조거든요. 힘의 구조가 아니고 힘이 없어도 구원되는 구조. 주님이 대신 죽으심으로 구원되는 구조. 그게 이스라엘의 왕입니다. 자기 택한 백성만 은혜와 긍휼로 불러냄으로써 비로소 내가 왕임을 이야기해주는, 내가 너 대신 죽었던 왕, 펄펄 폭력적인 왕이 아니라, 대신 죽었던 왕이 우리의 왕이 되시는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사람들이 몰랐습니다. 같은 핏줄이면 왕 되는 줄 알았습니다. 칼싸움 잘하면 영웅인 줄 알았습니다. 하지만 진정한 숨어있는 왕은 이러한 철딱서니 없는 우릴 위해서 하나님이 저주를 대신 받으시고, 우리에게 은혜와 긍휼로 용서를 해주신, 우리의 모든 죄를 다 남김없이 없애주신, 그 왕을 왕으로 섬기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