눅 1:26-38 (마리아의 임신)
눅 1:26-38 (마리아의 임신)
이름 : 우리교회(IP:220.81.41.193)
본문 : 누가복음 1장 26-38절
제목 : 마리아의 임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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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교회
09-11-22 11:25
http://media.woorich.net/성경강해/누가복음-2009/003강-눅1장26-38(마리아의임신)-luk091122.hwp
이근호
09-11-22 13:37
마리아의 임신
2009년 11월 22일 본문 말씀: 누가복음 1:26-38
(눅 1:26, 개역) 『여섯째 달에 천사 가브리엘이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들어 갈릴리 나사렛이란 동네에 가서』
(눅 1:27, 개역) 『다윗의 자손 요셉이라 하는 사람과 정혼한 처녀에게 이르니 그 처녀의 이름은 마리아라』
(눅 1:28, 개역) 『그에게 들어가 가로되 은혜를 받은 자여 평안할지어다 주께서 너와 함께 하시도다 하니』
(눅 1:29, 개역) 『처녀가 그 말을 듣고 놀라 이런 인사가 어찌함인고 생각하매』
(눅 1:30, 개역) 『천사가 일러 가로되 마리아여 무서워 말라 네가 하나님께 은혜를 얻었느니라』
(눅 1:31, 개역) 『보라 네가 수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라』
(눅 1:32, 개역) 『저가 큰 자가 되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이라 일컬을 것이요 주 하나님께서 그 조상 다윗의 위를 저에게 주시리니』
(눅 1:33, 개역) 『영원히 야곱의 집에 왕노릇하실 것이며 그 나라가 무궁하리라』
(눅 1:34, 개역) 『마리아가 천사에게 말하되 나는 사내를 알지 못하니 어찌 이 일이 있으리이까』
(눅 1:35, 개역) 『천사가 대답하여 가로되 성령이 네게 임하시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능력이 너를 덮으시리니 이러므로 나실 바 거룩한 자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으리라』
(눅 1:36, 개역) 『보라 네 친족 엘리사벳도 늙어서 아들을 배었느니라 본래 수태하지 못한다 하던 이가 이미 여섯 달이 되었나니』
(눅 1:37, 개역) 『대저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능치 못하심이 없느니라』
(눅 1:38, 개역) 『마리아가 가로되 주의 계집종이오니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 하매 천사가 떠나가니라』
우리의 우리가 그동안 구축해놓은 세계가 따로 있습니다. 신문과 방송에서 매일같이 이야기하고 있고, 또한 우리네 직장에서 매일같이 대화하는 그런 단어들, 그런 용어들이 따로 있습니다. 바로 그런 것들로 인하여 오늘날 우리 자신이 구축되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보면, 낯선 세계가 쳐들어옵니다.
그 낯선 세계는 다른 용어와 개념들도 쳐들어옵니다. 우리들이 전혀 관심없고 신경 안쓰는 그런 단어들이 쳐들어옵니다. 예수, 다윗의 위, 야곱, 지극히 높으신 분의 아들, 등등의 용어들은 우리네 평상시 생활에서 전혀 상관없어 보이는 단어들이며 이런 말들을 하지 않더라도 우리 일상에는 전혀 상관없이 보일성 싶습니다.
그런데 가브리엘 천사는 마리아에게 바로 이런 용어를 사용해야만 하는 세계를 전합니다. 여기에 대해서 마리아는 강력하게 저지합니다. 34절에 보면, “나는 사내를 알지 못하는데 어찌 제게 그런 일이 일이 일어날 수 있습니까?”라고 합니다. 즉 나하고는 상관없는 세계라는 겁니다.
이 말은 곧, “나는 그동안 내가 지켜온 세계나 꾸준히 유지하겠다”는 의지를 드러냅니다. 이처럼 사람이 하나님과 만난다는 것은 곧 인간들의 강력한 반대에 부딪힐 일들입니다. 인간은 쉽게 자신의 전부를 하나님께 내놓을 위인들이 아닙니다. 사람들은 오로지 자신의 자존심과 위신을 고려하면서 평생을 살아오고 있습니다.
이러한 자존심 속에는, 자기가 이해될만한 것을 골라서 자기 안에 차곡차곡 쌓아두어서 괜찮은 자아로 만들어낸 것입니다. 처녀인 자신이 아기를 가진다는 것을 그동안의 상식에 의하면 상상도 못할 일이며 더나아가서 결코 자신의 위신과 체면이 다 망가지는 그런 일은 절대로 본인에게 일어나서는 안될 일이라고 여겼던 것입니다.
즉 마리아를 비롯해서 인간들의 관심사는 결코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는 관심이 없다는 말입니다. 독자적으로 딴 세계를 꾸미면서 그동안 살아온 것입니다. 그런데 바로 이런 인간에게 하나님께서는 말씀을 가지고 들이닥치신 것입니다. 그리고 인간이 수립할 수 있는 모든 인생을 통째로 들어내다 버립니다.
위신이고 체면이고 그런 것을 고려하지 않고 말씀을 앞장세워서 들이닥치십니다. 이것이 바로 육의 세계와 영의 세계의 만남에서의 특징입니다. 곱게 만나지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들은 바깥 세계를 겁냅니다. 자기만의 막을 쳐놓고 그 안에 들어살면서 행여 밖에서 일어나 무슨 사태가 자신이 곱게 살아온 인생을 와장창 다 뭉개버리지 않을까 늘 ‘알 수 없는 두려움’에 휩싸여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바깥 세계가 마리아의 허락없이 그냥 들이닥친 것입니다. 이것은 본디 하나님께서 원래 계획하신대로 추진된 결과입니다. 옛적에 하나님은 장막 안에 숨어계시면서 전 세계를 통솔하고 지배했습니다. 모세 때의 이야기입니다. 다른 민족들에게 있어 하나님은 저 하늘 높이 멀리 따로 떨어져계신 신이었습니다.
하지만 모세를 앞장 세우신 하나님은 그런 하나님이 아니십니다. 사림들 속에 함께 기거하시겠다고 모세에게 장막을 만들기를 지시하신 하나님이십니다. 그 하나님께서 이제는 그 장막을 벗어버리고 직접 사람 몸 안에까지 들이닥치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리를 사람 몸 안으로 잡은 것입니다.
왜 이렇게 하시는 걸까요? 그것은 자기 백성들이 어떤 인간들인지를 본인들이 모르는 상태에서 하나님의 법을 숙제하듯이 지키면서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여기고 있기 때문입니다. 구원이란 학원에서 기술 배워서 그것으로 천국문을 따내는 것이 아닙니다. 천국보내주는 학원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직접 육 속에 자신의 거주지를 삼지 아니하면 구원은 없습니다.
그런데 이 육과 영의 만남에서 육은 자신의 육됨을 강력하게 부인하고 나서는 겁니다. 호세아 선지자의 경우를 보면, 그는 의도적으로 행실 나쁜 여인과 결혼했어 아기를 가지게 됩니다. 그 여인 사이에는 세 자녀가 태어납니다. 맏아들이 이름은 ‘이스르엘’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이 이른다는 뜻입니다. 둘째는 딸을 얻게 되었는데 이름이 로루하마입니다. 뜻은 ‘긍휼을 입지 못한 자’입니다.
셋째는 아들입니다. 이름은 ‘로암미’입니다. 뜻은 ‘내 백성이 아니다’입니다. 결국 세 자녀 모두다 하나님으로부터 저주받아 당연함을 보여주는 자녀들입니다. 이는 곧 모든 인간의 육이란 하나님으로부터 저주의 대상에 불과하다는 겁니다. 소위 말해서 ‘쓰레기’입니다. 하나님께서 전 세계를 불로 싸질러버리는 이유는 쓰레기이기 때문입니다. 저주받아도 할 말이 없는 자들입니다.
바로 이러한 더러운 자리에다 하나님께서 자기 자리를 잡습니다. 그 육안까지 들어오십니다. 인간들의 강력한 저항을 받게 됩니다. 육다운 태도와 마주치게 됩니다. 즉 자신의 깨끗한데 왜 이 께끗한 나만의 소박한 인생을 하나님께서 망치려드느냐고 반발을 받게 됩니다. 17,8세 되는 나의 소녀는 매사가 조심스럽게 자기만의 비밀을 간직하고 있습니다.
여자의 자궁이란 가장 비밀스러운 공간입니다. 그 자리만큼은 거룩하고 아름답고 깨끗하기를 원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에게는 통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그 깨끗하다고 자부하다고 여기는 그 더러운 자리마저 말씀으로 점령하지 아니하면 그 인간은 저주스러운 존재로 그냥 사는 것이 됩니다. 육 자체가 영으로 변화되지 아니하면 결코 하나님 나라를 볼 수가 없습니다.
이 세상에는 두 종류의 사람뿐입니다. 한 종류는 하나님의 약속이 담겨있는 계열에 속한 사람들입니다. 이들 안에는 마리아의 경우처럼 하나님께서 찾아오셔서 약속의 말씀이 그 안에서 퍼지고 있는 사람입니다. 반면에 다른 한 종류의 사람이 있습니다. 이 사람들은 그냥 육 그대로 유지하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법에 의해서 저주받으면서 결국에는 저주가 기다리는 곳으로 들어가야만 하는 자들입니다.
사람들은 말합니다. “성경이 과연 현실 그대로 맞냐”고! 그럴 때 “너희 자식들을 보아라. 하나님을 사랑하고 있느냐”고 말입니다. 더러운 자식, 하나님에 관심이 없는 자식을 낳은 그 부모도 역시 육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런 자들이 살 수 있는 것은 오직 말씀으로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사는 수 밖에 없습니다. 저항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마리아는 은혜를 임은 사람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자신이 쓰레기 임을 인정하고 말씀의 세계에 덮힌 것을 하나님의 은혜로 여기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우리교회
09-11-24 17:26
20091122 우리교회주일설교녹취(눅 1:26-38/마리아의 임신)
2009-11-23 15:15:17 녹취 : 오용익
20091122 우리교회 주일설교/누가복음 1장 26-38절/마리아의 임신(이 근호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누가복음 1장 26-38절까지입니다. 신약성경 87페이지입니다.
누가복음 1:26-38
“여섯째 달에 천사 가브리엘이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들어 갈릴리 나사렛이란 동네에 가서 다윗의 자손 요셉이라 하는 사람과 정혼한 처녀에게 이르니 그 처녀의 이름은 마리아라 그에게 들어가 가로되 은혜를 받은 자여 평안할찌어다 주께서 너와 함께 하시는도다 하니 처녀가 그 말을 듣고 놀라 이런 인사가 어찌함인고 생각하매 천사가 일러 가로되 마리아여 무서워 말라 네가 하나님께 은혜를 얻었느니라 보라 네가 수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라 저가 큰 자가 되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이라 일컬을 것이요 주 하나님께서 그 조상 다윗의 위를 저에게 주시리니 영원히 야곱의 집에 왕노릇 하실 것이며 그 나라가 무궁하리라 마리아가 천사에게 말하되 나는 사내를 알지 못하니 어찌 이 일이 있으리이까 천사가 대답하여 가로되 성령이 네게 임하시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능력이 너를 덮으시리니 이러므로 나실 바 거룩한 자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으리라 보라 네 친족 엘리사벳도 늙어서 아들을 배었느니라 본래 수태하지 못한다 하던 이가 이미 여섯달이 되었나니 대저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능치 못하심이 없느니라 마리아가 가로되 주의 계집종이오니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 하매 천사가 떠나가니라.”
성경을 보면 두 개의 세계가 서로 마주치고 있습니다. 한쪽 세계는 우리가 익히 아는 이 세상, 눈에 보이는 이 세상, 우리가 사는 세상입니다. 여기는 자동차도 있고, 냉장고도 있고, 민주주의라는 것도 있고, 북한의 핵문제도 있고, 세종시 건설하는 문제도 있고, 국민소득이 몇 달라며, 기름 값이 얼마나 올랐는지…, 그런 세계가 있지요.
우리가 아침에 조간신문을 보고 있는데, 골프가 어쩌니 축구가 어쩌니…, 또 텔레비전 뉴스 보고 있는 우리에게 갑자기 천사가 들이닥쳐서 하는 말이, ‘아무개야, 놀라지 마라. 하나님이 너와 함께 있느니라. 다윗의 자손의 위에 앉을 것이고 야곱의 집이 어떨 것이고 그 나라는 무궁하리라.’라고 나온다면 우리는 본능적으로 나의 세계를 포기할 의사가 없습니다.
현재까지 살아오면서 꾸려온, 사회교육 받고 학교교육 받고 가정교육 받아가면서 그리고 직장생활 해 가면서 ‘이만큼 이것은 내 것이다.’라고 축적된 게 있습니다. 가득 찬 게 있어요. 있다면 그것은 나의 자존심이 되는 겁니다. 그동안 내가 쌓아온 모든 것은 다 나를 위해서 축적한 것이기 때문에 만약에 외부에서 누가 내 허락 없이 들어온다면 그것이 내 것이 될 것인지, 안 될 것인지 그 판단은 내가 결정하는 겁니다.
요즘 사람들이 ‘교회 갈 것이냐, 말거냐? 예수 믿을 것이냐, 말 것이냐?’ 하는 결정을 자기가 내리듯이 모든 것이 내가 결정지을 때 이게 나의 것이 되고 나를 살리는 것이 되는데, 갑자기 허락도 없이 불쑥 천사가 들이닥쳐 버리면 우리가 무엇이 아쉬운가 하면 그동안 쌓아오고 누적하고 축적했던 이 ‘나의 것’ 이라는 것이 몽땅 다 날려가 버리는 겁니다.
예를 들면 어떤 청년이 교회에 왔다. 그 청년이 교회에 와서 아가씨를 만나서 결혼도 하고 직장생활도 했다. 그래서 그 교회에서 집사 되고 더 승진해서 장로도 되고 그 교회에서 한 20년을 생활했다 봅시다. 그 동안 그 교회에서 가만있었던 것이 아니었겠지요. 목사하고 잘 협조해서 교회가 오늘까지 성장하는데 봉사활동하고 재정도 봐주면서 교회가 튼튼하게 자립하도록 했는데 갑자기 어느 날 밤에 천사가 들이닥쳐서 ‘아무개야, 하나님께서 너와 함께 계시다. 하나님의 말씀이 너에게 이루어지리라.’
이렇게 되면 그 장로 된 사람이 하는 말이, ‘저 천사님, 저 이교회 장로입니다. 지금 교회 하는 일이 있는데 이 하는 일에 대해서 좀 가치를 두고 의미를 줘야 되지 않습니까?’ 이래 나온다면 천사가 하는 말이, ‘그게 하나님이 하시는 일하고 무슨 상관이 있느냐?’라고 이야기 한다 이 말이죠.
‘목사하고 안정되게 교회를 잘 꾸리고 하는 이 모든 것이 어디까지나 너의 자존심에 관한 문제지 하나님 일이 아니다.’ 이 말이지요. 그동안 목사하고 협조하면서 그 교회에서 20년, 30년 잘 봉사한 것은 하나님의 일이 아니고 자기자존심의 일이지요. 자기자존심을 챙기기 위한 일이었다 이 말입니다. 나도 신앙생활 2, 30년 했다, 라고 버티는 것.
그동안 그렇게 버티기 위해서 자기는 얼마나 생각을 많이 했고 ‘이게 과연 하나님의 뜻인가 아닌가?’를 얼마나 저울질해가면서, 나쁜 것은 뱉어내고 착한 것, 선한 것, 거룩한 것, 그런 것만 골라서 자기인생을 아주 거룩한 인생으로 고이고이 성화시키면서 얼마나 다져왔느냐 이 말이지요. 그런데 갑자기 천사가 와서 ‘그것은 어디까지나 네 일이고….’ 하면서 아주 깡그리 드러내서 가져다가 버린다면 거기에 반항 안할 위인이 있겠습니까?
오늘 본문도 마찬가지입니다. 마리아에게 천사가 나타났을 때 34절에 보니까, “마리아가 천사에게 말하되 나는 사내를 알지 못하니….” 합니다. ‘나는 남자와 동침한 적 없습니다.’ 이 말이거든요. 그런데 34절 그 말씀 앞에 뭐가 나오느냐 하면 ‘네가 수태해서 아들을 낳을 것이다.’라는 아들 이야기가 나오고, ‘그 아들 이름을 예수라 지으라.’고 나오고 32절부터 보면 ‘그자는 큰 자가 되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이 되고, 하나님이 그 조상 다윗의 위를 주신다.’는데 그 다음에 33절에 보면 ‘영원히 왕 노릇 하실 것이다.’ 하지요.
여기에 야곱의 집, 다윗의 왕 노릇, 하나님의 아들 큰 자, 지극히 높으신 자의 아들, 이러한 생뚱맞은 새로운 용어들이 등장했을 때, 마리아는 그런 것이 귀에 들어온 것이 아니고 ‘나는 사내를 알지 못합니다.’라고 강력하게 자기의 지금까지 유지해온 자기의 체면과 가치관과 자기의 자존심을 가지고 버티는 겁니다.
하나님의 일이라는 것이 우리가 알고 있는 북핵문제, 기름 값 문제, 자동차 할부 문제, 애들 교육문제, ‘이민 갈까, 말까?’ 하는 그 문제, ‘교회 어디 세우지? 교회 몇 평 넓히지?’ 이런 문제, ‘집사를 누구 세우고 장로를 누구 세우지?’ 이런 문제하고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하나님이 오시면 그런 것을 육이라고 하고 그것을 영으로 바꾸는 작업에 나서게 되는 겁니다. 그런 육을 가지고 영으로 바꾸는 거예요.
학교에서 선생님이 수학을 가르칠 때 칠판에다 수학공식을 쓰면 그냥 노트 펴놓고 그 공식을 베껴 쓰면서 ‘이것이 수능시험에 나옵니까?’ 라는 식으로 그것을 내 지식으로 익히면 되지요. 그런데 그 수학선생님이 우리 집에 살고 심지어 내 방에 같이 산다면 그것은 보통 문제가 아니잖아요.
하나님의 일은 그냥 우리 바깥에서 한 수 가르치고 ‘이것 배워라.’ 이런 식으로 하는 하나님의 일은 없습니다. 우리가 고이고이 간직하고 있는 우리 일을 일방적으로 쳐들어와서 그걸 깡그리 창문 열어 놓고 다 집어 던져버려요. 지금까지 내가 축적해온 모든 것을 다 집어 던진다고요. 정서적으로 항상 예민한 열일곱이나 열여덟 살 된 아가씨 방에 낯선 머슴애가 들어가면 기겁을 하지요.
그 방은 자기만의 공간이잖아요. 침대 놓고 아름답게 꾸며놓고 사진 찍어서 걸어놓고, 이런 자기만의 공간에 누가 예의 없이 문 함부로 덜컥 열고 들어와 버리면 그 소녀는 기겁합니다. 심지어 가족이라도 엄마나 아빠라도 노크하고 들어가야 되지요. 항상 소박하고 자기만의 비밀이 많은 그 시기에 누가 문 덜컥 열고 들어와 버리면 원수지간 됩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믿고 구원받기 위해서 하나의 소녀처럼 예민하게 그냥 예쁘게 살고 착하게 살고 바르게 살고 반듯하게 살고 목사가 시키는 대로 다 하고 교회 충성하고 헌금 내라면 십일조를 비롯해서 다 내고 전도하라고 하면 그것도 하고 또 일 년에 한 번씩 전도대회 하면 다 참석해서 해주고 절기 지키라면 다 지키면서 착한 소녀처럼 순진한 소녀처럼 이렇게 살고 싶은데 세상에 그 순진한 소녀의 자궁에다가 애를 넣어놓을지 누가 알았겠습니까?
하나님의 애가 들어설지 어떻게 알았겠어요. ‘처녀가 애를 낳아도 할 말이 있다.’ 하는 식으로. 자궁이라 하는 것은 가장 은밀한 구석 아닙니까? 일생을 걸고 허락하는 것이 자궁이네 거기에 하나님께서 일방적으로 자리를 턱 하니 잡고 ‘놀랬지?’ ‘놀랬습니다.’ ‘놀라지 마라. 하나님의 말씀이 너와 함께 있을 것이다.’
이게 바로 육에서 영으로 바뀌는 과정입니다. 다른 방법 생각하지 마세요. 다른 방법 없습니다. 우리의 가장 은밀한 부분을 수술해서 도려내고 이제부터는 나의 자리는 사라지고 그 자리를 주님의 자리로 바뀌면서 우리는 육에서 영으로 바뀝니다. 영으로 바뀌지 아니하면 죄송합니다만 하늘나라를 볼 자가 없습니다.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영으로 난 것은 영이니 네가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늘나라 어림도 없다.’(요 3:5-8) 했습니다. 이것은 쉽게 말해서 교회가 구원을 방해하는 곳입니다. 교회가 하늘나라를 방해하는 곳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내가 하나님의 일을 방해해요. 우리는 전력을 다하여 하나님의 새로운 개념이 들어오는 것을 전적으로 밀어내고 있습니다.
새로운 개념이 뭐냐? 다시 읽어보겠습니다. “네가 수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라.”는 새로운 개념, “저가 큰 자가 되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이라 일컬을 것이요.”라는 개념, “조상 다윗의 위”라는 개념, “영원히 야곱의 집에 왕 노릇 하실 것이며….”
이러한 성경에 나오는 용어들, 성경에 나오는 이 문자들이 그저 아침에 출근해서 돈이나 벌고 퇴근해서 연속극, <천사의 유혹>이나 바라보다가 잠이나 자는, 그러한 우리밖에 모르는 일상의 우리의 개념들, 내가 익히 아는 개념들, 옆집 사람도 알고 다 같이 아는 9시 뉴스에 등장하는 박 태환이나 김 연아 이야기, 그런 개념밖에 모르는 여기에 야곱의 집이 어떠니, 다윗의 자리가 어떠니, 예수가 어떠니, 가브리엘이 어떠니, 새로운 개념이 침투가 되었다 이 말이지요.
그게 만약에 침투가 되어서 내가 알고 있던, 그냥 나는 아침에 눈뜨면 직장 나가서 돈 벌다가 집에 와서 ‘밥도, 아는, 자자.’ 이것 밖에 모르는 나의 일생에 그러한 성경의 용어가 들어온다면 그 때부터 ‘우리’라는 이 자리는 나의 자리가 아니고 하나님이 함께 계시는, 하나님이 기거하시는 하나님의 자리가 되는 겁니다. 그걸 영이라고 합니다.
박수치고 짜릿한 것, 전율 느끼는 것, 방언하는 것, 이게 영이 아니에요. 영이라는 말은 ‘내 것은 거덜 났다.’는 겁니다. 이제는 ‘내 것을 포기하자.’는 겁니다. 18세 소녀처럼 소박한 나만의 공간, 나만의 역사, 나만의 추억, 나만의 아름다운 과거, 예쁘고 참하고 탐스럽기도 하고, 그렇게 착하게 살아가고자 하는 자신의 기대, 흔히 영어로 말하는 비전, 'Boys be ambitious.' 이런 나만의 소망과 기대, 그거 거덜 나야 됩니다.
저는 지금까지 어떤 점이 자꾸 의문점이 되느냐 하면 왜 하나님께서 마지막 심판을 할 때 불로 심판을 하는지, 전처럼 그냥 물로 심판하면 될 터인데 왜 불로 심판하는지가 굉장히 궁금했었는데 이번 가을에 그걸 알았어요. 어느 집에 가니까 낙엽을 태우는데 불 질러서 태워버려요. ‘저거다! 다시 말해서 쓰레기다!’ 하는 사실. ‘아, 쓰레기구나.’ 쓰레기에는 불이 최고입니다.
중국산 라이터가 최고입니다. 그냥 불 질러서 태워버리면 끝! 끝나는 겁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모든 것, 그 가운데 교회도 포함되는데 교회도 쓰레기에요. 기독교도 쓰레기고 합동측도 쓰레기고 목사도 쓰레기고 모든 것이 쓰레기입니다. 그냥 불로 싸지르면 돼요. 우리 몸도 쓰레기입니다. ‘그래서 불로서 심판하는구나. 쓰레기라고.’
그게 고린도전서에 나오는데 우리는 마지막 때에 쓰레기처럼 간주된다는 것, 우리 몸은 후패한다는 것. 쓰레기더미 속에서 목사 되었다고 자랑하고, 목사 위임식 한다고 목사는 양복 한 벌, 사모님은 한 복 한 벌 해주고, 쓰레기 같은 교육관 짓는다고, 주차장 넓힌다고 그거 다 쓰레기입니다. 그거 부동산이거든요. 아무 의미 없는 겁니다.
진짜 의미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 속에, 쓰레기 같은 이 몸 전체를, 우리를 자궁삼아 여기에 하나님 본인이 들어앉아 계시는 겁니다. 들어앉아서 가만있는 것이 아니고 뭘 뱉어내느냐 하면 ‘다윗의 자리가 어떠니, 야곱의 집이 어떠니…’ 우리로서는 낯설고 생소한, 우리가 듣고 싶지도 않은, 평소에 들으면 잠만 오는, 설교 들어도 만 날 잠만 자는 그러한 개념들을 들고 주께서는 ‘예수가 어떠니, 그리스도가 어떠니, 성령으로 잉태해야 된다느니….’ 하십니다.
성령으로 잉태해야 된다는 말이 여기 어디 나오느냐 하면 35절에 나오지요. “천사가 대답하여 가로되 성령이 네게 임하시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능력이 너를 덮으시리니….” 36절에 “보라 네 친족 엘리사벳도 늙어서 아들을 배었느니라 본래 수태하지 못한다 하던 이가 이미 여섯 달이 되었나니.” 이런 것들이 들어와야 되는 겁니다.
세례요한의 엄마가 이름이 엘리사벳인데, ‘엘리사벳’ 하니까 꼭 비슷한 영화배우 이름이 있어서 영화배우 같은 느낌이 나는데, 그 엘리사벳이 늙었는데 임신 못하는데, 벌써 임신한 지 6개월이 되었다는 거예요. 이게 성경 누가복음 1장 36절에 나옵니다. 그런데 ‘옛날 어떤 엘리사벳 아줌마가 애 못 낳는 여자가 임신해서 6개월 되었다.’는 그것하고 동계올림픽하고 무슨 관계있습니까?
지금 21세기에 사는 나하고 무슨 상관있어요. 그게 돈을 벌어줍니까? 아니면 휴가를 보내줍니까? 그게 우리 애 성적을 올려줍니까? 수능에 나옵니까? ‘다음 중 수태하지 못한 여자가 임신해서 애가 6개월 되었다는 그 여자는 누구입니까?’ 1) 염정아 2) 비 3) 이 명박 4) 엘리사벳. 그거 수능에 나옵니까?
우리는 수능에 안 나오고 돈 안 되면 우리하고 일절 상관없는 식으로 우리는 살아 왔어요. 그런데 ‘수태하지 못한 늙은 여인 엘리사벳이 벌써 임신해서 그 애가 6개월째가 되었다.’ 그러면 우리는 이야기하지요. ‘하나님, 저는 이스라엘 사람이 아니고 저는 단군의 후손입니다. 한반도에 살아요. 북위 38도선 밑에 삽니다. 동네가 다른 동네인데 그 옛날이야기하고 현재 21세기에 직장을 다니고 있는 착실한 나하고 무슨 관계가 있습니까?’ 그 이야기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이야기 하지요. ‘이게 너하고 관계없으면 너는 죽어.’ 그 말입니다. 성경에 나와 있는 이 말씀, ‘엘리사벳이 임신 못했는데 임신해서 6개월 되었다.’ 하는 이 사실과 오늘날 우리하고 관계가 없다면, 관심이 없다면 너는 육적인 인간이고 그런 인간은 하늘나라 들어갈 수 없는 육적인 인간에 불과하다는 겁니다.
‘수태하지 못하던 여인이 애를 임신했다.’는 이 말은 ‘네가 현재 임신해서 애 둘 셋 낳아놓은 그 애는 너의 구원에 아무 보탬이 되지 않는 아무 상관없는 그런 애에 불과하다.’는 겁니다. 자식 백날 잘 키워서 서울대학 보내도 소용없다는 거예요. 자식 잘 키워서 목사 만들어도 소용없다는 겁니다.
엘리사벳이라는 아줌마 속에 세례요한이라는 아기가 태어난다는 것은, 그 엘리사벳과 그 남편 되는 사가랴는 육적인 인간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함께 있는 영적인 사람으로 돌변했다는 말입니다. 그처럼 ‘너도 네 안에 말씀이 자리 잡지 못한다면 너는 계속해서 지옥 갈사람 되고 쓰레기가 되어서 라이터 불에 불 태워진다. 죽어도 마땅하다.’ 그 말입니다.
이런 관점은 학교에서 가르쳐주지 않습니다. 심지어 교회에서도 안 가르쳐줘요. 이런 관점은 성령이 와서 성령이 여러분들에게 가르쳐 줍니다. 왜 교회에서 누가복음을 펼쳐놓고서도 이것을 안 가르쳐주느냐 하면, 교회에서 만약 이 사실을 알려줘서 누가복음의 말씀을 곧이 들어버리면 교인들은 그 때부터 교회에 관심이 있는 것이 아니고 누구에게 관심이 있느냐 하면 예수님한테 관심이 있습니다.
그러면 교회가 장사가 안돼요. 교회가 장사하려면, 교회 문 열고 오는 고객들 마음속에 야심이 있어요, ‘우리 애 좋은 대학 보내고 우리 남편 사업 잘되고 자기는 부유한 사모님아줌마 되는 것’ 그런 야망을 ‘하나님께 기도하면 복줍니다.’ 해서 그들의 요구사항을 들어줘야, ‘취직 안 되는 사람 취직하고, 장가 못가는 사람 장가가고, 시집 못가는 사람 시집가고, 아픈 사람 병 낫고’ 하는 이런 야망을 들어줘야 교회가 장사가 돼요.
그리고 요새는 노인들 밥해주고, 같이 윷놀이도 해주고 화투치면서 노는 모임도 만들어서 해줘야 교회가 장사가 된다 이 말이지요. 그런데 ‘교회 일은 하나님의 일이 아니고 교회 일은 육적인 일입니다.’ 라는 것이 발각이 되어 버리면 어떻게 돼요? 교회는 부흥하지요. 왜? 육적인 사람은 다 달려드니까. 영적인 사람은 안 달려들 것이고.
교회는 놀이터고 노인들 노인정이니까. 우리가 생각하는 하나님은 구름 위에 계시잖아요. 구름위에 계신 하나님이 아니라 여자 자궁 속에 자리 잡는 하나님이라는 이런 인식, 이런 사고방식, 여기에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말은 다른 게 아니에요. ‘네 배안에 하나님 있다.’ 그 말입니다. ‘하나님이 저 하늘 구름위에 있는 것이 아니고 네 뱃속에 있다.’는 겁니다.
그걸 다른 말로 하면 하나님의 말씀 안에 있다, 약속 안에 있다, 이래 되는 겁니다. 하나님의 약속과 하나님의 말씀 안에 있는 하나님이기 때문에 육적으로 하늘을 아무리 쳐다봐도 하늘에서 별똥별이나 떨어지지 하나님이 안 떨어져요.
말씀이 우리를 새롭게 변화시킬 때 비로소, ‘아, 하나님이 나와 함께 계시는구나. 다윗의 자리가 어떠니, 야곱의 집이 어떠니, 이런 예수님의 이야기가 이제는 남의 이야기가 아니고 그게 현실이구나. 그 야곱의 이야기가, 그 약속이 그게 현실이고 지금 내가 하는 것은 내 육 중심의 작게 생각한, 지금까지 내가 학교에서 교육받고 교회에서 교육받고 내 나름대로 가정에서 교육받은 것은 이것은 나 밖에 모르는, 이 세상 전부가 아니라 나 밖에 모르는, 그저 좁은 식견으로 나만 챙기다가 어디서 와서 어디서 죽는지도 모른 채 자기 배만 부르고 자기 몸만 편하면 최고다, 하는 너무나 잘못된 비현실적인 것에 그냥 살아 왔구나.’가 되는 겁니다.
다시 이야기합니다. 34절의 이 말씀은 대단히 중요한 말씀입니다. 제가 이 대목에서 얼마나 은혜를 받았는지, 뭐에 은혜를 받았느냐 하면, “마리아가 천사에게 말하되 나는 사내를 알지 못하니 어찌 이 일이 있으리이까.” 에서 ‘나는 사내를 알지 못한다.’
무슨 말이냐 하면 ‘나는 어떤 남자와도 동침한 적 없다.’ 무슨 말이냐 하면 ‘나는 깨끗합니다. 나는 순전합니다. 나는 그런 흉악한 죄를 지은 적 없습니다. 네기 외간남자하고 모텔에 들어가서 잠자리하고 그런 일은 없습니다.’ 하고 강력하게 버티는 이 버팀, ‘하나님이든 누구든 현재 나의 것을 걷어내려고 하면 나는 가만있지 않겠습니다. 나는 한발자국도 지금까지 살아온 내 인생의 방식을 나는 양보하거나 포기할 생각이 전혀 없습니다.’ 하고 버티는 것, 이 버티는 모습이 어쩌면 오늘날 우리의 모습과 똑 같아요.
‘주여, 제가 무슨 죄를 지어서 하나님이 내 안에 들어오는 이런 불상사가 일어나야 됩니까? 그동안 내가 차곡차곡 쌓아놓고 이대로 착하게 살려고 버텼는데 왜 그걸 다 도려내고 세상에, 이 깨끗한 자궁 속에 애가 들어와서 나가면 옆집 사는 아저씨가 뭐라고 하겠습니까?’ ‘점잖은 고양이가 부뚜막이 먼저 올라갔다.’ 하겠지요.
얼마나 씹어대겠습니까? ‘여자 참한 줄 알았더니만 와, 진짜 사람 모르겠대. 202동에 애 낳았단다. 가보니 미쳤어. 천사가 와서 말했대. 임신한다고 했대. 예수라는 이름까지 지어줬대. 그래서 하나님이 자기 안에 있대. 세상에, 무슨 하나님이 인간 뱃속에 들어가.’ 여러분, 하나님이 인간 뱃속에 안 들어가면 그 사람 구원 못 받습니다.
그동안 우리는 교회 와서 뭘 했는냐 하면 교회가 학원이에요. 목사가 하는 설교를 적었어요. 그거 배워서 하늘나라 수능에 통과하려고 배웠다고요. ‘교회 가서 충성, 봉사, 헌금, 전도 다 할 테니까 제발 하나님이 내 안에는 들어오지 마세요.’ 왜? 내 안에는 나만의 인생설계가 있기 때문에 제발 내안에는 들어오지 말라는 거예요.
‘나는 엄마로서 자식만 잘 키우면 되니까 제발 하나님이 내 자식이나 잘 키워주고 만약에 하나님이 내 자식을 못 키우고 공부 못하게 한다면 나는 이제 교회도 안 나갈 거야.’ 아주 강력하게 버텨요. ‘나 같이 착한 사람을 왜 인생쓰레기로 만들어놓았느냐? 왜 난데없이 임신을 시켜가지고 고이고이 길러온 내 인생, 내 청춘, 내 젊음을 하나님이 뭔데 이렇게 호작질하고 엉망진창으로 짓밟아놓고….’
집에 멧돼지 들어와 보세요. 화장대 다 박살나지요. 멧돼지까지 갈 것도 없이 노는 강아지만 뛰어다녀도 다 망가집니다. 주님께서 야곱의 이름으로 다윗의 이름으로 예수의 이름으로 온데 구멍을 다 내요. 소박하고 그냥 평범한 가장이고 평범한 가정주부를 구멍을 다 내요. 교회 가면 착실한 집사님이요 훌륭한 장로님인데 구멍을 다 내놔요.
어디를 가도 이단소리 들어요. 하나님께서 사람 몸속에 들어오는 이유가 있어요. 모세 당시에는 하나님께서 장막이라는 천막 안에 숨어 있으면서 온 세계를 지배했습니다. 장막 안에 있는 하나님입니다. 그 전에 하나님은 어디에 가 있느냐 하면 시내산 위에 있었지요. 시내산 위에 계신 하나님이 모세를 불러올리는데, 그 때 엘리베이터가 없어서 모세가 애 먹었습니다.
올라가서 40일 동안 물도 안마시고 하나님과 독대하는데 하나님께서 하는 말이 ‘어이, 모세야! 만들어라.’ ‘뭘요?’ ‘장막 만들어라.’ ‘왜요?’ ‘나 내려가련다.’ ‘누구에게요?’ ‘내 백성과 함께 있으련다.’ 장막 만들고 난 뒤에 그 다음에 거기에 하나님이 함께 계셨습니다. 백성들은 몸서리 쳤습니다. 하나님이 사람과 함께 있다는 것은 이것은 다른 민족에게는 없는 이야기입니다.
다른 민족은 신이 저 위에 있어요. 그 신은 그냥 인간들의 경배와 찬송과 예물을 받으면 돼요. 사람 속에 섞여서 직접 같이 살아가는 하나님은 생전 처음이에요. 세상에 그런 일은 없습니다.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이 사람과 섞여 산다는 것은 있을 수 없어요. 못 견딥니다. 힘들어서. 서울에서 결혼해서 신랑신부가 오순도순 사는데 오랜 만에 촌에서 시어미가 바리바리, 강냉이, 팥, 콩 싸들고 와서 ‘야야, 나 왔다. 한 달간 같이 살게.’ 며느리 우울증 걸립니다.
아마 이사 가는 수도 있을 거예요. 이사 가서 못 찾게 만들든지 무슨 수를 낼 겁니다. 사람이 자기가 허락하지 않은 내가 선택하지 않은 다른 이물질이 들어오면 사람은 그걸 거부하게 되어 있어요. 왜 하나님이 하늘에 살지 인간 속에 끼어들어옵니까? 모세가 시내산 올라가기 이 전에 하나님은 어디가 계셨는가? 방주를 만들어서 방주 안에서 노아와 함께 심판을 견뎌내었습니다.
하나님 덕분에 노아는 물 심판을 견뎌냈어요. 그리고 난 뒤에 방주에서 나와서 그 때부터 하나님은 장막 속에 계시다가 무리 속에 집단속에 직접 들어가게 되었어요. 왜 하나님이 직접 사람 속에 들어가느냐 하면 그래야 육에서 영으로 바뀔 수 있습니다. 직접 들어간 예가 호세아에 나옵니다. 호세아, 요새 말로 목사님이죠.
호세아라는 이 선지자, 마누라가 있습니다. 이름이 고멜인데 이 여자는 좀 놀던 여자였어요. 강남나이트에서 좀 놀던 여자입니다. 관리하는 남자가 한 백 명쯤 될 거예요. 휴대폰에 백 명 쯤 찍혀 있어요. 이 호세아 목사님은 그런 여자를 골라서 의도적으로 혼인을 했습니다. ‘아내가 결혼했다.’는 말이 있어요. 말이 좀 이상하지요.
아내가 자기하고 결혼하고 또 결혼하는 거예요. 이유가 뭐냐? 사랑하니까. 이 고멜같은 여자가 바로 그 여자에요. 자기 본 남편이 있어도 육체가 가만있지를 못해요. 그런데 애를 셋 낳았습니다. 아들 둘 낳고 딸 하나 낳았어요. 큰 아들 이름이 이스르엘이에요. 그 이름은 누가 짓는가? 아버지 호세아목사님이 짓습니다. ‘하나님이 심판하실 것이다.’
이름은 그 사람의 운명이 되거든요. 그런데 세상에 자식이름을 지어도, 큰 아들 이름을 ‘하나님이 너를 심판하실 것이다.’ 이렇게 지었어요. 기독교 가정에서 그런 이름 짓는 것 봤습니까? 기도하라고 하나, 훌륭하다고 사무엘, 크게 되라고 요셉, 골리앗 이기라고 다윗, 바울(폴), 베드로(펫), 패트병 아닙니다, 마리아(매리), 카펜터스, 예수님이 목수니까, 예수님 이름만 피해서 전부 다 기독교식으로 짓지요.
그런데 이스르엘, ‘하나님은 너를 저주할 것이다.’ 이런 이름을 아들에게 지어 주었습니다. ‘어이, 하나님의 저주! 이리 온나. 냉장고에서 물 좀 가져와라. 저주야!’ 이렇게 부를수 있습니까? ‘학교 안가나? 이 저주받을 놈아!’ 이렇게 짓습니까? 이름을 그렇게 지었어요. 두 번째 딸 이름이 로루하마. 이름도 어려워요.
이것은 무슨 뜻이냐 하면, ‘하나님의 사랑을 받지 못할 여자.’ 오빠 이름하고 똑같아요. 하나님의 사랑을 받지 못할 딸, ‘너는 어디가도 저주를 받아라.’ 하여튼 직업을 구했다 하면 나쁜 직업을 구하고 남자만 만났다 하면 만나는 남자한테서 다 차이기를 바라고 시집가도 몸 아프고 하여튼 들어가도 저주 받고 나가도 저주받는 딸을 낳아요.
세 번째 딸을 낳았는데 로암미, ‘이는 내 백성이 아니다.’ 2남 1녀 모조리 저주의 운명을 쥐고 아이들 이름을 짓습니다. 그것은 뭐냐 하면 인간의 몸에서 나온 모든 자식은 아무리 그 이름을 은혜롭게, 자비와 긍휼로 도배를 해도 그 본색은 저주 받을 수밖에 없고 지옥갈 수밖에 없는 육적인 자식일 뿐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겁니다.
하나님을 통해서 온 호세아라는 그 선지자가 고멜이라는 여자와 결혼해서 보여주고자 하는 것은 뭐냐 하면, ‘인간은 자기의 주제파악을 못한다.’는 거예요. 자기 육이 근본적으로 하나님한테 저주 받아야 된다는 사실을 모르는 겁니다. 자기자식을 싸고돌고, 자기자식을 싸고돈다는 것은 자기자식을 관대하게 본다는 겁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성경을 덮을 때나 하는 소리에요. 성경을 덮고 성경을 안 본 척 하면 ‘아, 나는 원래 괜찮은 놈이야.’ 이래 되지만 성경을 펼쳐버리면 인간의 육에서 나온 것은 죄고 죄의 삯은 저주고 사망입니다. 이게 육의 마지막 갈 길입니다. 우리의 갈 길은 저주밖에 없고 지옥밖에 없어요.
그것도 모르고 우리는 여기 뜯어고치고 쌍 커플 수술하고 뱃살 빼고 온갖 자기관리, 자기꾸미기 한다고 박사학위 걸치고 뭘 어떻게 하고, 또 애들 유학 보내고…, 아이고, 브레이크 걸지 않고 말 막 나가면 또 상처받을 사람들 있는데…, 조기유학에 음악 시킨다고 독일유학 보내고. 노동시장에서 상품가치를 높이기 위해서, 성공이라는 이름으로, 그리고 그 성공이라는 이름이 교회에 들어오면 축복이라는 이름으로 되는 겁니다.
그것은 여자들이 귀찮게 화장하는 것과 똑같은 거예요. 여자들의 얼굴에 화학물질이 오백열다섯 가지가 발려져 있다고 합니다. 얼마나 쳐 발랐는데 오백열다섯 가지 화학물질이 발려져 있대요. 생 얼굴을 보는 것은 언제냐 하면 아침에 침대에서 일어날 때 옆에서 자는 남편만 알지 다른 사람은 아무도 몰라요. 교회는 위선자들이에요. 전부 다.
마리아는 자기 자신이 괜찮은 여자인줄 알고 뭐라고 하느냐 하면, 참, 읽어볼수록 은혜 되네요. 34절. “마리아가 천사에게 말하되 나는 사내를 알지 못하니….” ‘나는 사내를 알지 못합니다. 나는 정결한 처녀입니다.’ ‘에이, 잘났다. 이 처녀야! 이 더러운 게 어디서 천사 앞에서.’ 자기 주제파악을 못해요. 세상에 정결한 처녀가 어디 있습니까? 정결한 처녀가.
마음속으로 미워해도 간음자인데, 마음속으로 미워해도 살인자인데 이 세상에 무슨 정결한 게 어디에 있습니까? 다 육인데.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호세아를 통해서 인간에게서 나오는 것은…, 남의 자식은 미워도 자기자식은 곱다고 하잖아요, 아무리 고운체 해도 그 자식 죽을 자식입니다. 인간의 육적 본능이라 하는 것은 생물학적으로 봐서 자식을 살릴 때까지 부모는 살아 있어요.
부모가 있는 이유는 자식 하나 살리기 위해서 부모가 있는 겁니다. 자식 낳으면 부모는 죽은 존재에요. 이제는 그 자식은 부모를 떠나야 됩니다. 이게 모든 생물학의 원칙입니다. 영원히…, 원리입니다. 그런데 갈라디아서 4장에 보면 하나님께서는 언약을 가지고 이 세상을 두 노선으로 갈라놔서 하나는 육체에 속한 노선이 있는 반면에 하나는 그 안에 약속이 있어서 약속으로 죽을 육도 영으로 살려내는 약속의 말씀의 능력이 있는 사람, 이 두노선의 계열밖에 없다는 겁니다. 인간의 모든 인생에서.
갈라디아서 4장에 보면 나와요. 그게 두 언약으로 나오는 겁니다. 한 언약은 지옥으로 빠지는 언약인데 그것은 육으로 태어나서 육으로 살다가 율법의 저주를 받고, 율법의 저주라고 하니까 어렵게 생각이 들어갈 수 있는데 그냥 저주라고 하세요, 하나님의 저주를 받고 그냥 지옥으로 빠지는 그런 한 계열이 있다면 다른 계열을 하나님의 약속으로 태어나서 약속이 담겨서 그 약속에 의해서 살아가는 거예요.
그 약속이 뭐냐? 예수님이 죽었다가 사흘 만에 부활하는 것처럼, 죽은 예수를 사흘 만에 부활하게 하신 그 성령이 임하면 그 성령으로 말미암아 죽을 너희 육도 살리라, 하는 그 약속 말입니다. 어제 토요일에 강의가 있었어요. 거기서 강의한 것이 뭐냐 하면 ‘사람에게는 알 수 없는 공포가 있다.’는 거예요.
알 수 없는 공포가 왜 생기느냐 하면, 아무리 부자가 되어도, 성공해도 알 수 없는 공포가 주어지는데 그것은 인간 육이 막이 되어서 그 바깥이 있기 때문에 그 바깥이 있는 이상은 그 바깥이 언제든지 내 안의 것을 공격하고 찌그려놓을 수 있는 여지가 있기 때문에 불안한 거예요. 내 몸 바깥에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를 다 종잡을 수 없으니 행여나 어떤 사태가 일어나면 지금까지 내가 쌓아온 모든 공든 탑이 무너지면 나는 어떻게 하는가, 라는 그 불안 한 것.
그러니까 남녀가 아무리 연애하고 백일 되었다고 기념 꽃 보내고, 하루에 휴대폰 열통씩 보내고 이름에다 하트 팡팡 날리고 ‘아무개 좋아해.’ 백날 해도 혹시 ‘우리 찢어지자.’ 할 수가 있다는 그 불안감, 극렬한 애정과 사랑을 투자하면 할수록 이러한 투자도 허무하게 끝날 수 있는 여지가 있는 것, 알 수 없는 불안감, 그것은 내 외부에서 일어나는 거예요.
그래서 제가 이야기했습니다. 그럴 것 같으면 아예 나 내부의 나만의 공간을 차지하지 말고 아예 이 막, 내부에서 외부로 나가버려라. 나가버리면 거기는 뭐냐? 죽은 자도 부활된다는 그런 세계, 약속의 세계가 있는 거예요. 마리아에게 예수님이 잉태한 것은 바로 마리아의 외부세계가 내부세계로 침투한 겁니다.
그 마리아의 내부세계가 뭐냐 하면 ‘나는 아직도 사내를 알지 못하기 때문에 나는 아직도 정결한 처녀다.’ 이것 유지하고 이것 간직하고 있었던 거예요. ‘누가 뭐래도 나는 죄지은 것 없다. 누가 뭐래도 나는 죄야 짓겠지만 내가 죄인으로 규정받을 만한 죄는 지은 적 없다. 나는 이만하면 내가 봐도 내신 성적 괜찮게 나온다.’
이런 내부세계, 이런 내부세계에 머물러 있지 말고 아예 가위로 찢든지 칼로 찢든지 해서 외부와 내부를 차단시키는 그 막을 밑에서부터 찢어버리라는 말이지요. 찢어버린다는 것은 내 힘으로 찢는 게 아니고 하나님의 말씀이, 약속이 와서 찢어 버리면, 내 안에 있는 것이 고상한 내가 아니고 이스르엘이고 로루하마고 로암미고, 다시 말해서 ‘나는 저주 받아야 되고 긍휼을 받을 자격도 못되고 나는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고 마귀 백성이다.’라는 이것을 노출하는 삶을 사신다는 것, 이미 그것이 외부가 여러분들을 장악한 영적 사람인 것입니다.
이러한 영적 사람이 되어 버리면 교회에서 빗자루를 가지고 예배당을 쓸어도 ‘아이고, 집사님! 청소 참 열심히 합니다.’ ‘뭐, 죄인보고 그런 소리 하지 마세요.’ 어떤 사람이 교회 헌금을 듬뿍 해도, 우리교회는 그런 일이 전혀 없습니다만, ‘하이고, 집사님! 믿음 좋으니 이렇게 하시네요.’ 하면 ‘아닙니다. 이거 제 돈 아닙니다. 저는 죄인에 불과합니다. 저는 이 헌금 하면서도 돈 좋아하는 사람이에요. 뭘 해도 나는 육에 불과하고 이거 했다고 해서 구원받지 않습니다. 내가 이 봉사한다고 복 받지도 않고 봉사한다고 구원받지도 않습니다. 누가 나보고 저주한다고 하면 저주받아야 마땅하기 때문에, 저주여 오라!’
용감하게 저주받을 수 있는 사람이 영적인 사람이에요. 그리고 우리는 살아간다는 게 저주입니다. 천국에 비하면 살아간다는 게 저주에요. 지금도 저주받고 있는데 여기서 저주를 뭘 더 받아요. 받을 저주가 따로 더 없는데 여기서 사는 이것이 저주인데. 아무리 부자가 되어도 알 수 없는 공포, 내 외부의 세계가 따로 있다는 그 자체, 그리고 그 외부세계와 내가 막이 있어서 갈라져 있으면 불안해서 못 견딥니다.
우울증 걸려요. 자살해야 돼요. 한 15층짜리 아파트 사서 거기서 뛰어 내려야 됩니다. 1층짜리는 안돼요. 뛰어내려봐야 면상만 갈지 안 죽어요. 높은데서 뛰어 내려야 돼요. 독일에서 두 번째로 높은 죽음의 사유가 우울증입니다. 첫 번째는 암, 두 번째가 우울증입니다. 앞으로 우리나라도 그렇게 됩니다. 그게 알 수 없는 공포 때문에 그래요.
왜? 알 수 없는 공포냐? 바깥에 나가면 주님의 약속대로 이미 우리는 육이고 마땅히 저주받아야 될 자인데 다만 예수라는 분이 말씀으로 우리 속에 들어오시면 그 예수님께서 죽었다가 사신 능력이 고스란히, 우리 몸이 자기 집이니까, 우리가 자궁이니까, 예수님이 살고 있는 몸이 되니까, 예수님의 죽었다가 살아난 그 능력이 그대로 우리에게 전달되어서 죽을 우리 몸도 살리시리라.
그게 바로 말씀이 보여주는 현실입니다. 끝으로 이 말씀 드리겠습니다. ‘성경말씀이 실제로 맞다는 증거를 대라.’라고 한다면 ‘당신은 성경이 신화도 아니고 거짓말도 아니고 실제로 현실이라는 증거를 대라.’고 하신다면 저는 ‘당신의 자식을 보세요. 당신 자식이 내가 보기에는 마귀자식이에요. 물론 당신도 마귀자식이지만. 당신들 자식을 보세요. 이게 하나님 섬기는 모습인가?’
부모도 안 섬기는데 자식이 섬기겠습니까? 생각해 보세요. 여러분 자식 가운데서 진짜 타고나서 하나님 섬기는 사람 없습니다. 전부 다 자기 마음대로 갑니다. 그 자식이나 나나 똑같아요. 다 같이 저주받아도 할 말이 없다는 그 현실, 그 현실보다 더 확실하게 성경이 맞다는 현실 없어요.
바로 그러한 죄 속에, 저주 속에 주께서 자신의 생명을 살과 피에 담아서 우리에게 죄 씻어준다는 식으로 쳐들어 와서 이제부터 우리의 마당이 예수의 피가 흥건하게 묻어 있는, 우리 속에서 말씀이 들어와서 우리 속에서 십자가 터뜨리고 죽어버렸으니까, 온몸이 그리스도의 피로 용서를 받는 그러한 공간으로서 우리는 예수님의 피를 담고 예수님의 십자가의 공로, 예수님의 피를 증거 하는 그런 몸으로 살아가는 겁니다.
그걸 오늘 본문에서는 뭐라고 하느냐 하면 ‘마리아야, 네가 은혜를 입었구나. 마리아야, 네가 은혜를 입었다.’ 외부가 너를 장악했다, 이 말입니다. 하나님의 용서가 너를 장악했다, 이 말입니다. 그 때, 오늘 본문 마지막 38절에 보면 “마리아가 가로되 주의 계집종이오니….” 드디어 마리아가 본인의 독단적인 자기의 아름다움, 그런 자기는 이제 없습니다.
“대저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능치 못하심이 없느니라. 마리아가 가로되 주의 계집종이오니…” 그 다음에 뭐라고 하느냐 하면, “…그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주옵소서.” 신문 보고 방송을 보시더라도 신문 보고 방송 보면서 드라마 연속극 보면서 이거 잊지 마세요. ‘아이고, 인간들아! 내가 옛날 너희들하고 똑같았다. 주여, 주의 말씀이, 새로운 낯선 세계가 저를 장악해서 말씀대로 이루어주옵소서.’ 그렇게 일상사는 것, 그게 바로 영적인 사람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속이 거듭나게 하옵소서. 깡그리 다 빼앗아 가 주옵소서. 저주스럽고 죄 많은 것, 그 속에 주님께서 들어오셔서 군데군데마다 샅샅이 예수님의 피로 그 죄를 씻어 내시고 예수님의 의로 채워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