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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

대구특강 11월 21일 칼바르트 신학의 내부적 모순강의[신학]

대구특강 11월 21일 칼바르트 신학의 내부적 모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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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특강 091121 칼바르트 신학의 내부적 모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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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11-21 20: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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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11-24 17:33

대구특강091121칼바르트신학의모순a

대구특강20091121-칼 바르트 신학의 모순a
(강의:이근호 목사)

시작합니다.
제가 부여받은 주제가 칼 바르트의 성경해석에 관한 겁니다. 칼 바르트의 교회 해석학입니다. 칼 바르트란 사람이 누군지? 칼 바르트란 사람은 우리가 왜 신경 써야 하는지? 이 세상에 많은 사람이 있는데 칼 바르트에 대해서 우리가 관심을 둬야 하는지 생각해야 되고요. 둘째는 이 칼 바르트란 분이 신학자인데 제가 서평한 책은 칼 바르트 [교회교의학] 책입니다. 1983년도에 나온 오랜 책인데. 칼 바르트란 분이 성경을 해석한 것이 다른 사람보다 탁월하게 성경을 해석했다.

성경이 있는데 이 성경에 대해서 수많은 사람이 여기에 대해서 나름대로 정리를 했다 이 말이죠. ‘나는 이렇게 본다, 나는 이렇게 본다.’ 했는데, 그 많은 사람 가운데서 칼 바르트란 사람이 성경을 해석한 그것이 다른 사람의 성경해석보다도 더 잘 체계 있게 정리를 했다. 그러니까 너희들은 입 다물라. 적어도 칼 바르트의 성경해석보다 더 뛰어나지 않거든 칼 바르트한테 기어라, 배워라 이 말입니다.

그러면 칼 바르트의 성경해석을 알려고 한다면 칼 바르트 그전에 뛰어나게 성경을 해석했던 많은 신학자들이 있단 말이죠. 그 중에 한 사람 튀어나온 사람이 캘빈이라는 사람입니다. 캘빈이라는 사람이 성경해석을 잘했다고 소문이 났는데 한 오백년 후에 칼 바르트가 캘빈의 성경해석에 문제가 있다. 나처럼 해석해야지 캘빈처럼 해석하게 되면 성경해석에는 전체를 담을 수 없다고 되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가 칼 바르트의 해석학을 알 필요가 있을까? ‘동네 아저씨인데 남의 아저씨 이야기를 우리가 왜 들어야 돼?’라고 ‘성경공부하기도 바쁜데 칼 바르트를 왜 해?’라고 제쳐 놔버리면 어떤 경우가 생기느냐 하면, 성경을 자기 나름대로 정리를 잘했는데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당신, 칼 바르트의 성경해석을 알아?’ ‘나는 그것 모르고 알 필요 없다고 여겨.’라고 했을 때 ‘당신의 성경해석은 칼 바르트에 의하면 성경의 이런 대목하고는 모순되고, 이런 대목하고는 담아내질 못했고, 이런 것을 누락시키고 빠뜨리면서 당신 일방적으로 성경해석을 한 게 돼.’라고 했을 때 누가 그렇게 이야기했습니까? 칼 바르트의 책에 보면 그렇게 나와 있어요.

그러면 칼 바르트는 내가 빠뜨린 것까지 포함해서 성경해석을 일괄적으로 했단 말인가? 그렇지. 그렇다면 칼 바르트, 이 사람이 성경해석을 어떻게 했기에 내가 미처 알지 못한 것까지다 포용이 됐을까? 이렇게 될 때 칼 바르트 성경해석은 그 사람에게 추종하라든지, 그 사람한테 복종하고, 경배하고 찬양하라는 것이 아니고 참고로써 칼 바르트의 성경 해석한 것을 분석함으로 말미암아 우리가가 성경 해석한 것에 대해서 미진한 것, 모자란 것, 모자라기 때문에 곡해할 수 있는 것, 성경 중요한 대목을 빼놓기 때문에 나는 예수님을 이렇게 생각한다, 나는 하나님을 이렇게 본다고 일방적인 주장을 될 가능성이 있거든요.

칼 바르트의 생각을 다 알지 못하고, 나는 기도원에 가서 기도하니까 이런 계시 받았다고 생각했는데 칼 바르트에 의하면, 그 계시는 성경의 다른 계시에 의해서 충돌이 일어나며 이건 엉터리로 드러났다고 칼 바르트가 이야기해버리면, ‘기도원에 가서 은혜 받은 것도 엉터리일 수 있구나’ 하는 새삼 느끼게 되는 거예요. 그래서 칼 바르트, 신학자들 그 이름에 권위에 복종하라는 말이 절대로 아닙니다. 그저 하나의 종이다, 머슴이라고 생각하시면 돼요.

노래를 하다보면 팝송 좋아하는 사람 있고, 재즈를 좋아하는 사람이 있는데 그건 자기 취향이죠. 여기서 하나 주의할 것은, 성경해석이 하나에 그건 칼 바르트 취미고 나는 내 식으로 성경 보겠다고 취향으로 정린 할 수 있습니다. 나중에 결론 부분에 그걸 이야기하겠어요. 칼 바르트를 공부하면서. 그렇게 보는 것도 한 견해가 될 수 있고, 내가 지금까지 본 것도 한 견해일 수 있다.

그걸 ‘차이’라고 하는데, 이 사람 보는 것과 이 사람 보는 것이 차이가 되려면 두 사람 사이에 공통점이 있을 거란 말이죠. ‘이 점에 대해서 동의한다. 하지만 나머지 부분은 내가 동의 못한다.’라고 했을 때 나머지 부분의 차이가 계속 차이로 남아버리면 여기서 뭐가 되느냐 하면, 이거는 불확실성이 됩니다.

그래서 불확실성을 없애려면 차이를 좁히든지 없애든지 해야 돼요. 그렇게 되려면 삐져나온 이것, 이것의 처리에 대해서, 칼 바르트니까 ‘K’라 합시다. ‘칼 바르트는 이런 점이 잘못됐어.’라고 공격을 해줘야 이 칼 바르트의 미진한 부분은 칼 바르트가 실력이 모자라서 미진한 걸로 없어질 수가 있어요.

그냥 차이로 너는 네 취향으로, 나는 내 취향으로 이렇게 남아버리면 이것은 계속해서 불확실성이 남기 때문에 복음을 전하면서 ‘그 사람 견해에는 이럴 수도 있는데 내 견해는 이렇습니다.’ 해버리면 사도 바울은 그런 적이 없단 말이죠. 이거는 못 먹어도 고라는 말대로 그냥 ‘이겁니다’라고 해야지, 이거는 다른 사람 견해는 그럴 수도 있고, 누구 견해는 이럴 수도 있고, 나는 모르겠습니다. ‘나는 모르겠습니다.’ 하면 아예 입을 다물어야 되죠. 거기서 한가락 끼어서 자신의 가치나 인정받으려 할 필요는 없다.

그래서 여기서 칼 바르트는 먼저 K가 지금까지 있던 모든 것을 다 공격해서 칼 바르트만 남기고 나머지는 지워버렸어요. 우리가 칼 바르트를 공부한다는 것은, 이 전체가 성경의 생각과 일치되느냐 하는 그걸 탐색해 보는 거죠. 탐색해서 미진한 게 있으면 보충하면 되고, 칼 바르트가 뭐가 잘못된 게 있으면 그건 잘못됐다고 파악하면 되고, 다음에 우리가 복음 전할 때 그런 것을 주의해서 전하면 된다 이 말이죠.

어쨌든 간에 칼 바르트란 사람이 중도 아니고 일반인도 아니고 우리가 보고 있는 권위를 갖고 있는 성경에 대해서 해석을 어쨌든 내놨다는 그 점에 대해서는 공부할 만한 가치가 있다고 저는 그렇게 보는 겁니다.

제일 먼저 칼 바르트가, 항상 그렇지만 교재가 이만큼 있는데 이것 읽어도 세 시간 넘어가요. 교재는 여러분 읽었다 치고 중요한 것만 해드리겠습니다. 부제가 뭐냐? [칼 바르트의 신학과 그 내부적 모순]이라고 했는데 칼 바르트란 사람이 제일 먼저 한 것은, 하나님의 계시와 말씀의 관계에 대해서 언급을 했어요. 계시와 말씀에 대해서 언급했다는 이 점에 대해서 제가 지금부터 설명을 해드리겠습니다.

우리가 알다시피 K란 사람, 칼 바르트입니다. 칼 바르트가 인간이지요. 징기스칸도 인간이고, 아브라함도 인간이고, 에스겔도 인간이고, 플라톤도 인간이고 다 같은 여러 가지 인간이 있었단 말이죠. 칼 바르트는 인간이 아니고 나머지는 죄인이고 그렇진 않으니까. 다 같은 인간이니까.

칼 바르트가 여기서 뭐라고 했느냐 하면, 하나님의 계시라고 계시론은 제시했을 때 다른 인간들은 칼 바르트가 성경은 하나님의 계시입니다. 또는 하나님의 계시 있어야 하나님을 알 수 있습니다. ‘사람은 그냥 알 수 없고 하나님의 계시가 임해야 알 수 있습니다.’라는 말을 칼 바르트만 했겠습니까, 다른 사람도 했겠습니까? 다른 사람도 했다 이 말이죠. 하나님이 말씀을 해 줄 때 그 인간은 응답해서 하나님을 안다는 걸 유독 칼 바르트만 주장했다고 말할 수 없거든요. 다른 사람들이 똑같은 생각한 걸 놓치면 안 된다. 그걸 우리가 모른 척하면 안 돼요.

그리고 하나님의 계시가 칼 바르트가 했다 하지만, K라 합시다. K가 개인적으로 이야기했지만 옛날부터 하나님의 계시는 개인적이 아니고 집단적이었어요. 이거는 이스라엘뿐만 아니고 모든 민족이 다 그래요. B.C.2333년경에 고조선이 단군이란 사람에게 생겼다. 제가 집단적인 계시를 설명하기 위해서 옛날 단군의 이야기를 끄집어내고 싶어요.

단군이라는 것은 하늘의 신, 환인이 있고 그 환인의 아들이 있어요. 이 사람 이름이 환웅이란 사람입니다. 이 사람은 역시 신이에요. 환웅이란 사람이 아들이 됨으로 말미암아 신이 사람으로 변해서 이 땅에 오는 겁니다. 요한복음 1장과 유사하지 않습니까?

환웅이란 사람이 아버지(환인) 신에 따라서 이 세상에서 아버지의 뜻을 펼치기 위해서,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같이 땅에서 이뤄지기 위해서 환웅이란 아들을 보낼 때 환웅이 뜻을 어떤 식으로 펼칠까 할 때 여기 곰하고 호랑이한테 쑥 한 다발하고 마늘 21개인가 줘서 백일 동안 견뎌봐라. 동굴 속에서 백일 동안 견디면 네가 사람의 형상을 입을 것이다. 그래서 호랑이는 탈락하고 곰은 버텨서 웅녀가 돼요. 이 웅녀하고 환웅하고 결혼해서 낳은 아들이 단군이란 사람이거든요.

이러한 단군신화가 우리나라뿐만 아니고 이전에 이미 중국에도 신화가 있다 이 말이죠. 있을 때 지금 제가 집단계시라 해요. 어떤 씨족사회나 부족사회가 옛날 신석기시대 이후에 국가가 부족국가가 돼요. 그전까지는 국가가 없어요. 신석기 벗어나면 청동기 들어가면서 있는데. 그 시대에 어떤 사람이 우리나라는 신이 인정하는 하나님의 뜻을 받들어서 나라가 될 때 이 나라가 무궁무진하다. 오래간다는 것을 어느 민족도 마찬가지인데 단군만 소개하지만 모든 민족이 마찬가지에요.

거기에 반드시 신의 계시가 필요하고 신의 계시는 집단적으로 수용이 돼야 됩니다. 집단적으로 수용이 될 때 특정한 인간에게 신의 계시가 온다 할지라도 그 특정한 인간은 단군에게 신의 계시가 올지라도 단군의 후손들은 집단을 이루면서 단군이 받은 신의 계시에 종속된 채로 나라가 이뤄지게 되죠.

제가 어렵게 이야기하는 것은 뭐냐 하면, 반드시 집단계시에서는 이게 법이 된다는 것을 설명하기 위해서 하는 겁니다. 법이 된다는 것은 문자화되는 거예요. 문자로 적어놔야 돼요. 그리고 문자를 해독할 수 있는 권력층에 의해서 이 법은 시행토록 돼있어요. 법이 뭡니까? 법은 이거야. 조상들은? 이런 뜻이었어. 옛날부터 내려오는 법은 어떻습니까? 이거야. 뭔가 이야기하려면 확정된 게 있어야 되는데 그게 성문화, 문자화 돼야 된다 이 말이죠.

그런데 환웅에서 아들이 되어서 이렇게 될 때 여기에서 땅과 인간, 신과 지 그러니까 환인과 환웅 사이는 하늘의 뜻이 땅에서 이뤄지지만 구체화 될 때는 인간으로 구체화되는데, 그 인간은 바로 어두운 동굴에서 외로움과 어두움 속에서 스스로 자기 자신을 인간이 되고자 하는 그 능력을 키울 때에 환웅과 결혼해서 단군이 되거든요. 그럼 이 문제라는 것은 결국은 인간내부에 신이 있다는 겁니다. 하늘의 신이 내려오는 초월적인 계시도 있지만 인간자체가 곧 신이 되는 거예요. 인간자체가 하나님의 뜻을 품고 있는 겁니다.

이렇게 돼버리면 이 집단이라는 것은 신들의 집단이 돼요. 신들의 집단이 각각 갖고 있는 자기 안에 있는 신성을 규합시키면 그것이 질서를 위한 법이 되고, 그게 신의 계시와 일치되는 겁니다. 쉽게 말해서 어떤 사람이 산 위에서 계시 받았다고 내려오면, ‘신께서 뭐라고 이야기하던가?’ 이렇게 이야기 하더라. 들어보자. 동의한다. 동의하면 계시가 되는 거예요. 동의 안 하면 그건 나쁜 놈이 되는 겁니다.

신명기에 보면 신접한 사람들 죽이라고 합니다. 왜 죽입니까? 단군도 무당이고 이쪽도 무당이고 다 계시인데. 이런 계시에 의하면 인간의 모든 종교라 하는 것은 내부 수양이에요. 내부 수양하니까 얼른 떠오르는 게 ‘새생명운동’이에요. 모든 종교는 자기 자신을 내부적으로 동굴에다 비워놓고 그 안에 하나님 뜻으로 채워서 내가 신임을 확인하는 그게 자기한테 계시가 되는 겁니다.

그래서 초월적인 것이 초월적으로 그냥 하늘에 남아 있으면 사람들이 싫어해요. 그 초월적인 것이 여자 임신하듯이 내 안에 가득 담겨야 비로소 사람은 흐뭇해하는 겁니다. ‘내 안에 계시 많다. 날 건드리면 죽는다, 너거들. 나, 계시 받았거든.’ 이것은 칼 바르트가 언급을 하기 이전에 모든 민족과 종교에 일반화돼있고 보편화 돼있어요. 자기 수양이에요. 자기 안에 잠재돼있는 신을 깨워서 자기가 신성을 발휘하는 것, 그게 종교고, 신앙이란 이름으로 종교란 이름으로 계시란 이름으로 구체화시키면 말씀이 되죠.

단군이 우리나라 선조라 하잖아요. 웅녀란 이 사람도 불가능이 자기 내부 속에 신성을 깨우니까 인간된다는 것이 불가능하지만 용을 쓰고 애를 쓰면 쑥과 마늘을 먹는다는 것은 세상에 있는 모든 분별심, 세상의 모든 부귀영화를 다 끊은 거예요. 동굴이라 하는 것은 어두움과 외로움입니다. 어두움과 외로움 속에서 여기서 잠자는 게 아니고 깨어있음, 어디서 많이 듣던 이야기에요. 스스로 깨어있는 거예요. 깨어있을 때 인간은 신으로 거듭 태어나는 불가능이 가능으로 되는 거예요. 그렇다면 이러한 자기 경험이 신의 계시에 합류가 되는 거예요.

칼 바르트의 계시론을 주목하면서 칼 바르트가 하나님으로부터 시작했다 할 때 우리는 그 다음에 뭘 주목하느냐 하면, 하늘에서 내려온 계시가 어떤 경로를 통해서 성도라는 인간내부에 어떻게 담기는가? 그 경로를 주목해보자. 그 절차를 주목해보자 이 말입니다. 그러면 하늘에서 뭔가 내려왔는데 줄줄이 타고 내려와서 결국 남아있을 때 우리는 묻는 거예요. ‘칼 바르트 아저씨, 진짜 거듭난 사람과 안 난 사람과 차이가 뭡니까?’ 결국은 신에서 내려왔다는 것은 다같이 인정하니까. 계시는 위에서 내려온 걸로 다 인정하니까.

그 다음 문제가 뭐냐 하면, 그러면 어떤 식으로 사는 것이 거듭난 사람이며 그리고 그것만 필요한 것이 아니고, 어떤 식으로 살지 않으면 거듭나지 않은 사람입니까? 그 기준을 제시하라는 거예요. 그 기준을 따르고자 함이 아닙니다. 그 기준이 현재 내가 갖고 있는 내 속에 있는 잠재돼있는 내가 신이 되고 싶은 욕망과 일치되는가를 견주어서 만약에 삐거덕하고 안 맞으면 ‘신의 계시 아니야. 칼 바르트 저리 가. 난 캘빈을 믿겠어.’라고 할 수가 있는 거예요.

인간이라 하는 것은 외부가 칼 바르트가 있던 캘빈이 있던 관계없어요. 그런 것을 하나의 계기로 해서 내 안에 뭐가 있는가를 점검해보는 겁니다. 결국은 계시라 하는 것은, ‘여기서 여기까지 신의 계시야.’ 다듬고, 어떻게 해서 내 것으로 만드느냐? 여기에 지금 열중하고 있다고 인간은.

지금까지 설명한 걸 다시 정리하면, 아무리 신의 계시라 할지라도 인간 내부에 오게 되면 이 계시는 인간 내부의 나의 검열을 받아야 되고, 점검해서 내게 맞는 그것만 나의 것의 계시, 이걸 줄이면 ‘내 계시’죠. 결국 하나님 계시가 내 안에 들어오면 내 계시가 돼요. 왜? 누구의 검열을 받았습니까? 나의 검열을 거치죠. 나의 해석과 이해와 나의 점검을 통과했기 때문에 이게 나의 계시가 돼버리죠.

그러면 하나님의 계시를 알기 위해서 칼 바르트에 갈 것이 아니고 신의 계시를 만들어내는 메커니즘, 이 과정에 대해서 분석하면 그게 계시가 되죠. 그렇지 않습니까? 바깥에 성경이 되던, 불경이 되던 관계없어요. 어떤 계시가 됐던 신의 계시가 왔던 나한테 왔을 때 내가 어떻게 그걸 조립하고 재구성해서 나만의 독특한 개성 있는 계시로 들어내는가? 계시를 만드는 그 절차를 분석해보면 그게 바로 계시가 우리 안에 장착되는 하나의 모습이 되고, 그 안에서 하나님의 신의 계시가 이렇다고 정립이 될 수 있다 이 말이죠. 그렇게 되면 성경이라는 바깥의 계시도 소용이 없어요.

다시 해봐요. 내 안에 계시 만들기 기계가 있는 이상은 성경의 어느 말씀이든지, 눈 감고 아무 말씀, 오바댜의 말씀이라도 이것이 만드는 기계 속에 들어가면 신의 계시가 들어가서 나의 계시로 상품화 되어서 바깥에 나온다 이 말이죠. 그리고 나의 계시가 없으면 인간은 자기 주체가 정립이 안 돼요. 나라고 할 게 없어요. 나는 나의 것이지 남의 것이 아니거든요.

아무리 바깥에서 예수님이 문을 열라고 해도 요한계시록 3장 20절 말씀처럼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아무리 두드리더라도 일단 문 열고 들어왔으면 빼먹을 건 빼먹고 예수님 밀어내버리고 그 다음부터는 예수님의 계시가 나만의 계시로 정착되는 겁니다.

그러한 기계와 장치가 인간한테 어떻게 작동하고 있느냐를 과연 칼 바르트란 신학자가 그 당시 철학으로 그걸 분석해낼 수 있느냐 하는 겁니다. 칼 바르트는 캘빈 계시론 치고, 루터 계시론 치고 바깥에 자유주의라는 예수님은 신이 아니고 인간이라고 하는 실증적 역사론적 계시 치기 바빠서 정작 본인은 신의 계시가 어떻게 내 안에서 변동을 일으키느냐는 자기 자신에 대해서는 소홀이 해버린 거예요.

계시론도 인간의 주체론, 인간의 자아론에 삼킴을 당하는 겁니다. 이것을 제가 이야기한 이 이야기가 전에 있던 어거스틴이나 토마스 아퀴나스나 캘빈이나 루터나 이런 사람들이 이 이야기를 안 했는가? 했지요. 그걸 가지고 ‘인식론’이라 하는 거예요. 어떤 것을 인식할 때 어떻게 인식할 수 있느냐?

앞에 누가 있지요. 인식론 앞에 반드시 들어가는 것은 남의 인생 소용없어요. 누가요? 내가. 성경에 예를 들면 아무데나 누가복음에 만약에 세례요한이 선지지다 할 때, 누가복음 7장에 이야기인데, ‘세례요한이 선지자라는 말이 최 집사님은 무슨 뜻입니까?’ 물으면 ‘나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아, 최 집사님 틀렸어요.’ 김 집사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이 목사는 이렇게 생각하고, 칼 바르트는 이렇게 생각하는 거예요. 성경에 누가복음 7장에 세례요한이 선지자란 그 의미가 사람마다 다 달라요. 다를 때 왜 다르냐 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다를 때 왜 달라지느냐?

방금 제가 그런 질문을 던졌는데 인식론 답변을 해봅시다. 단군신화에서는 이렇게 봅니다. 인간은 차이가 있다는 거예요. 개체의 차이라 하는데 쉽게 말해서 A라는 사람이 있고, B라는 사람, C, D라는 사람이 차이가 있는데 이 차이라도 모든 인간은 안에 신성이 들어있어요.

아까 환웅 같은, 환인 같은 신성이 들어있으면 여기서 조명을 쏘아서 비록 그 차이가 무지개 색깔로 나오더라도 같은 햇빛은 하나다. 이것은 단군할 때 ‘단’이 박달나무 단(檀) 자거든요. 밝다. ‘밝다’라는 것은 빛이라는 뜻이에요. 이걸 홍익인간, 모든 사람을 이롭게 한다. 그러니까 우리 단군신화의 기본적인 바탕은 인간 내부에 내재돼있는 빛이 그 차이를 뭐로 바꾸느냐? 중요합니다. 대동(大同)이죠. 대동단결.

모든 차이 속에서 하나로 만드는 빛이 있다는 겁니다. 이 빛을 인정하고 믿음으로 말미암아 어떤 사람, 남녀노소, 직업과 관계없어도 우리는 하나의 형제가 될 수 있다는 겁니다. 이게 바로 우리나라 단군신화의 인식론이에요.

그러니까 방금 제가 지금까지 한 것은 칼 바르트 다르고, 캘빈 다르다 하지요. 그 다름, 다른 것조차도 하나로 엮어내고 만들어낼 수 있는 그 깊이 있는 빛, 신성을 믿는 것이 진정한 일자, 하나, 하늘, 하나님, 환국 이런 뜻이에요. 사실은 우리나라가 한국이 아니고 환국이라 하죠. 환국이란 뜻은 하나란 뜻에서 ‘크다’와 ‘하나 됐다’를 합쳐놓은 거예요.

그래서 모든 기독교를 모르는 대한민국도 이방 다른 민족도 뜻은 뭐냐? 크다, 하나다. 대동단결. 장애자나 멀쩡한 사람 관계없이 모두 우리는 하나다 이 말이죠. 이 정신 위에 기독교가 들어오던, 불교가 들어오던, 유교가 들어오던 한국은 이걸 무교, 무당으로 엮어낸 거예요. 그걸 구체화된 게 무당인데 무당과 계시가 연관 있어서 이야기하는데

무당은 두 가지의 무당이 있어요. 하나는 ‘빙의’라 하는데 그 다음에 엑스타시, ‘탈혼’합니다. 빙의라 하는 것은 신이 나한테 들어붙은 거고, 탈혼은 신을 만나서 혼이 나가버린 거예요. 혼이 나가는 것은 북아프리카, 남아시아 계통이고, 우리나라나 북아시아 계통은 빙의, 뭔가 신병이 와서 결합돼있는 거예요. 결합될 때 착한 신은 조상신이 있고, 나쁜 신들은 염귀라 하죠. 원한이 있고 이런 것 있는데.

무당은 무당 안에 결국 신이 함께 있는 겁니다. 근데 무당이라 게 단군이고, 단군이 임금이에요. 백성들은 신과 인간이 함께 있는 임금을 섬기면서 동시에 본인들이 무당 속에 있어서 하나의 무당처럼 되는 겁니다. 그럼 이들의 목적은 차이가 나더라도 인생에 어떤 차이가 나고 영적으로 어떤 일이 있더라도 우리는 모두가 하나님 안에서 하나라는 이 생각이, 자기 내부 수양이죠. 이 생각이 결국 어떤 종교가 와도 수용이 되는 하나의 한 계시 안에 전부다 담아버리는 겁니다. 이게 모든 이방종교의 계시에요. 계시란 말은 어떤 종교, 어떤 차이가 오더라도 전부다 하나로 용해해버리고 녹여버리는 겁니다.

인식론이라 하는 것도 하나만 믿으면 인식론 논쟁할 이유가 없어요. 어떤 둘, 셋, 넷이 되더라도 하나 속에 전부다 집어넣으면 되니까.

그러면 이렇게 되면 인간이 자기가 수양할 목적이 생겼는데 뭡니까? 모든 변화도 하나로 녹아집니다. 이게 동학교에선 하늘님입니다. 그래서 동학교에서는 자식이 부모한테 절하는 게 아니고 부모가 자식에게 절하고, 남편이 여자한테 절하는 겁니다. 왜? 하늘님이니까. 당신은 하늘님을 믿으라가 아니라 당신 안에 하늘님이 들어있는 거예요. 어린애가 곧 신이 되는 겁니다. 만나는 사람마다 이웃으로 보지 말고 만나는 사람을 하나님으로 보자 이 말이죠.

그게 잘 안 되니까 동학당에 와서 수양을 하는 거예요. 세상에 이것보다 더 뛰어난 새생명운동 없습니다. 최고 아닙니까. 계속 교회 와서 수양하는 거예요. 하나다. 변화 때문에 좌절하지 말자. 내가 돈 없다고 가난하다고 출세 못한다고 그런 것 때문에 내가 기 죽지 말자. 결국 모두 가난해도 하나다. 전부다 불쌍히 여겨라. 긍휼히 여겨라. 유교도 마찬가지에요.

그런데 수양이 잘 될 땐 동굴 속에 가야 됩니다. 어둠 속에 금식해가면서 마늘과 썩은 것을 먹으면서 자기를 절제하면서 불교에서 분별심, 경계심. 세상에 차이를 말합니다. 차이 때문에 좌절하고 화나고 신경질 나는 것, 자기 혼자 스스로 자기에게 참선해나감으로써 모든 경계나 분별심에서 뛰어나서 ‘그래 하나야. 인간은 다 하나일 뿐이야.’라고 수양하니까 이것이 종교를 떠나서 인간이라면 누구나 나올 수 있는 계시다 이 말입니다. 이것 설명하는데 이렇게 오래 걸렸네.

절차야 위에서부터 오지요. 어느 민족이든 인간의 유한성, 인간은 부족하다는 걸 모르는 인간 누가 있습니까? 어느 민족이든 인간은 부족하죠. 부족하니까 무한을 향하여 신을 향하여 빌잖아요. 백날 빌어도 신이 우리에게 계시 줬다는 게 중요하지 않고 신이 진짜 내 안에 온다면 나는 어떤 인간으로 달라져 있을 것인가? 그걸 누가 확인하고 싶다? 내가 확인하고 싶어. 나는 이래서 과연 구원받을까, 내가 죽고 난 뒤에 영원히 신과 합일될까? 궁금한 것은 내가 궁금해요. 남이 궁금한 게 아니고.

그러면 그걸 미리 알았으면 욕심도 줄이고, 마음도 절제해서, 온유와 절제와 양선해서 자기 안에 모든 변화를 녹여버리는 하나 됨이 안에 간직하고 있으면 이제는 기독교가 오든, 불교가 오든, 여호와증인이 오든, 안식교가 오든, 통일교가 오든 나는 그런 것 다 초월했습니다. 새생명운동의 마지막 목표점이에요.

그런데 칼 바르트가 그 점을 알고 제대로 지적한 게 있어요. 그게 뭐냐 하면, 그런데 여호와 하나님은 이러한 올라오는 계시, 무당들을 죽여 버리라고 했을까요? 거기서부터 계시가 시작됩니다. 이걸 계시라 하지 않고 언약이라 해요.

나는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이 여기고 나는 은혜 줄 자에게 은혜 준다는 이것은 모든 인간에 보편성과 일반적으로 들어있는 인간은 신이라는 그런 개념이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 입장에서는 ‘신 같은 소리하고 있네. 다 신 아니야. 하지만 내가 구원할 자는 알아서 은혜 줄 자에게만 뽑혀서 선택받아서 간택되어서 택함 받아서 그래서 구원되고, 내가 긍휼을 주는 자에게만 구원돼.’라고 새롭게 등장한 신이 누구냐 하면, 여호와 하나님이에요.

방금 한 40분 강의한 모든 것은 전부다 어떻게 합니까? 지워버려라. 우리는 안 지웁니다. 왜? 남이 구원받은 것이 아니고 내가 구원받는 걸 원하고, 앞에 예수가, 여호와가, 십자가 백날해도 우리 안에 뭐가 장치돼있다? 그것을 나의 계시로 전환하기 위해서 나의 인식론, 나의 인식론을 뭐라 했습니까? 모든 것을 하나로 녹여버리는 장치가 있기 때문에 아무리 여호와께서 이야기해도 우리는 일방적으로 내 구원되는 쪽으로 해석을 해버려요.

그런데 우리는 불가능합니다. 이 모든 것을 다 잊고 부정하기가 불가능해요. 그런데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직접 나타나셔서 방금 강의한 이 모든 인간론에 위주 한 계시론을 주님께서는 저주하죠. 이걸 정죄해버립니다. 그 정죄하는데 그 이름이 아까 이야기한 언약을 통해서 하나님의 언약, 신약에서는 새 언약, 구약에서는 그냥 언약. 신약에서 봤을 때 옛날 언약, 구약에선 그냥 언약, 신약에서 새 언약.

이 언약을 통해서 갖고 있는 숨어있는 계시 만드는 장치를 다이너마이트로 폭파하든지 그걸 박살을 내버리죠. 그걸 우리 안에 내 위주의 계시 만들기 기계가 고장나버리면 우리는 뭐라고 이야기하느냐 하면, 그때는 구원 불가능성이라 합니다. 내가 사색하고, 도 닦고, 동굴 속에 들어가고, 금식해서 천국에는 못 들어가는구나. 그렇다면 내가 하나 되어서 하늘님 하는 천국은 아니야. 환국이 천국이니까. 이 천국은 사실은 천국이 아니었지요.

그리고 인간은 천국에 들어가지도 못하는 주제에 만날 뭘 생각하느냐? 천국 들어가기를 천국을 염두에 두고 내가 들어가는 사람답게 되려고 자기 수양을 한 거예요. 일방적으로. 계시 만들어서 그 계시 따라 들어갈 수 있다고 생각한 겁니다. 그러나 천국은 아무도 며느리도 몰라요. 천국은 오직 예수님이 우리에게 줄 때만 천국 갈 수 있습니다.

신약에서는 방금 이야기한 전체를 육이라 하고 육으로 난 것은 육이죠. 네가 성령으로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자가 없느니라. 바리새인들이 예수님과 마찰을 일으킬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어요. 바리새인들은 내부 수양에 세계 최고 레벨에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렇다면 칼 바르트의 계시론에 들어가면, 방금 이야기한 이 계시를 이야기하면서 그 다음에 칼 바르트는 언약을 뽑아냅니다. 계시에서 언약을 뽑아낼 누가 반대하겠습니까? 소위 고등비평, 성경비평학자들이 반대합니다. 왜 반대하느냐 하면, 계시에서 언약을 끄집어내면 이 언약은 비평학자들에 의하면 구약의 여러 주제 가운데 극히 일부에 해당되기 때문에 칼 바르트, 당신은 범하고 있다는 거예요. 왜? 언약이란 주제가 구약 중에 하나에 일부에 지나지 않는데 마치 성경을 관통하는 중심주체로 뽑아냈을 때 당신은 무슨 근거로 뽑아냈느냐고 묻지요.

‘우리는 아무리 봐도 언약이라는 것이 성경에 나오는 하늘, 땅, 율법, 인간 여러 가지 주제가 있는데 그 중에서 하나가 언약인데 당신은 무슨 통뼈로 무슨 초월적 권위를 가지고 성경은 언약에서 나와야 된다고 그렇게 불쑥 주장하는데 성경에서 언약을 주장한다고 하는 그 근거를 대보세요.’라고 나올 때 칼 바르트는 뭐라고 답변합니까? 이렇게 답변해요.

계시에서 언약을 낼 때 성경을 제대로 해석할 분을 인간을 제쳐두고 따로 하나 설정해요. 그게 누구냐? 칼 바르트는 예수 그리스도로 본 겁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구약을 언약으로 봤기 때문에 우리도 예수 그리스도의 뜻에 따라야 한다는 겁니다. 그런데 칼 바르트의 이러한 주장은 그전에 어떤 학자도 주장한 적이 없어요. 오히려 그 점이 이상해요. 방금 제가 이 말 하면, 요즘 다 그렇게 알고 있는데 하잖아요.

캘빈도 루터도 이런 주장을 노골적으로 한 적이 없었습니다. 왜 그러냐 하면, 그 이유를 설명해드릴게요. 그전에 지금도 개혁주의가 그렇게 주장하는데. 기독교 신학 역사를 보면 예수 그리스도가 중심인물이 아닙니다. 누가 중심인물이냐 하면, 처음에는 하나님이었고 나중에 발달해서 삼위일체 되면 삼위일체로 바뀌고 삼위일체 대표자가 누구냐 하면, 성자가 아니에요. 성부 하나님입니다. 성부 하나님이기 때문에 성경을 볼 때 성부 하나님 관점에서 봐야 돼요. 성부 하나님 관점에서 보면 예수님은 독특한 분이 아니고 우리 인간들 속에 한 분이에요. 그리고 모든 일은 아버지가 다 해요.

그럼 예수님은 어떤 역할에 들어가느냐? 하나님 아버지하고, 삼위일체 대표자가 성부니까. 성부하고 그 다음에 성부가 인간을 만들지요. 인간과 성부 사이에 예수님은 어떤 필요한 분이냐 이렇게 나오는 겁니다. 지금 제 말 들으면 그것도 맞잖아 한다고. 방금 예수 그리스도 중심이라 하니까 그것도 맞잖아요. 방금 이 이야기하니까 그것도 맞네요. 하거든요.

반대입니다. 여기서는 삼위일체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서 성경이 들어갔기 때문에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서 성경을 줬다 이 말이죠. 그런데 그 성경의 중심이름은 예수님이라 이렇게 되잖아요. 이게 칼 바르트 이전의 모든 신학이 다 그렇다 이 말이죠. 방금 이야기하니까 목사님 그 말이 맞네요. 방금 이것이 바로 칼 바르트에 의하면 이단이라는 거예요.

왜 그러냐 하면, 칼 바르트가 계시론을 이야기할 때 이제 칼 바르트 계시론의 취지가 나타나는데요. 계시론 할 때 여기 인간 위에 하나님 계시고 하나님이 우리에게 계시를 해주면 계시를 내려준 안에서만 하나님을 알 수 있다는 말, 칼 바르트에 의하면 이 주장이 틀렸다는 겁니다.

이 주장이 왜 틀렸느냐 하면, 동그라미 이렇게 하면 맞는 것 같지요. 여기다 동그라미 몇 개를 해서 사람을 그려보세요. 하나님이 인간에게 신의 계시를 안다는 것을 누가 생각하죠? 바로 인간이 상상하니까 결국 계시가 우선이 아니고 이런 계시를 창안하고 상상하는 인간이 우선되니까 이 자체가 이렇게 되면 결국 이런 계시론도 인간 중심이죠.

그러면 예수님 중심의 계시론으로 바꾸려면 그냥 바꿔지는 것이 아니고 현재 인간들이 어떤 계시론을 갖고 있는가? 이걸 치면서 바꿔져야 돼요. 그게 바로 언약을 주신 여호와 하나님의 특징이고 계시가 돼요. 그렇게 해야 그 다음에 은혜 줄 자에게 은혜 주시고 긍휼히 여길 자에게 긍휼히 여겨서 구원하는 것이 성립이 됩니다. 만약에 제가 ‘여러분 가운데 구원하기 위해서 은혜 주겠습니다.’ 하면 ‘저요, 저요.’ 하잖아요. ‘제가 은혜 받겠습니다.’ 나온다면 전부다 내 말을 오해한 거예요.

칼 바르트는 은혜 줄 자에게 은혜 준다는 것은 사람보고 한 것이 아니고 그 안에 들어있는 자기 아들 예수님한테만 하는 이야기에요. 다른 사람들이 은혜 줄 자에게 은혜 준다는 말 들은 것은 자기가 구원받으려고 하는 곡해와 오해의 산물이기 때문에 주님께서는 듣지도 않습니다. 은혜 줄 자에게 은혜를 주고 긍휼히 여길 자에게 긍휼을 베풀 자는 예수님밖에 없어요. 다른 사람은 안 된다.

그런데 기존에 캘빈부터 모든 신학은 하나님 상대하고, 인간 상대해서 하나님과 인간은 문제 없다는 거예요. 문제는 뭐냐? 하나님이 적절한 계시 주는 것을 몰랐고, 계시를 줘도 계시내용을 몰라서 문제였다는 거예요. 그런데 계시내용이 뭐냐? 예수님 중심이었다. 따라서 ‘예수님 중심으로 살면 우린 구원받는다.’라는 칼 바르트 이전에 천구백 년 동안에 기독교 신학의 오류다. 이런 생각이 오류였다는 겁니다.

하나님 괜찮고, 우리 괜찮고 문제는 하나님의 뜻을 몰라서 계시가 궁금했는데 이제 하나님이 계시를 줬기 때문에 그 계시를 받으면 되는데, ‘그 계시 중심에 바로 예수님이구나. 예수 믿으면 되겠네.’라고 생각한 것이 바로 전혀 하나님 뜻하고는 상관없는 자기 일방적인 자기 사적인 구원을 주장한 것밖에 안 된다는 거죠.

물론 그 당시의 칼 바르트는 단군신화를 모르고 기존의 문화에 대해서 전공이 아니기 때문에 다른 민족에서도 똑같은 이런 계시가 있다는 걸 몰랐지요. 다만 상식선에서 알았지만. 칼 바르트는 몰랐어도 짐작은 했지요. 왜 성경에서 이방종교의 무당을 죽였는가?

그 무당이 뭡니까? 무당은 신과 인간이 하나 되어서 자기 수양, 인간이 추구할 수 있는 최고의 경지. 자기의 내부를 늘 비우고 그 내부에 신의 계시로 채우는 것. 이러한 인간의 모든 그것을 최고로 구현한 사람이 무당인데 제사장이죠. 제사장이고 임금인데 그 사람을 구약에서 죽여라. 인간이 할 수 있는 가능성의 한계를 죽이면 남는 것은 불가능인데 지금 이렇게 되면 불가능이 아니고 가능이 되죠.

그러면 칼 바르트는 뭐냐 하면, 인간이 아무리 가능하지 않은 불가능한 영역을 따로 만들어야 된다는 거예요. 그 영역이 뭐냐? 예수님부터 출발한 계시론이 될 때 그 불가능은 계속해서 인간이 할 수 있다는 가능성과 이렇게 따로 차별 나는 독특한 자리가 마련된다 이 말입니다.

10분 쉽시다.

관리자(IP:124.♡.86.6)

09-11-24 17:36

대구특강091121칼바르트신학의모순b

대구특강20091121-칼 바르트 신학의 모순b
(강의:이근호 목사)

시작합시다.
하나님의 계시가 뭐로 축소가 되느냐 하면, 축약, 축소, 환축, 언약으로 축약이 됩니다. 언약으로 축약이 되는 이유는, 언약 안에 예수 그리스도가 들어있는 정도가 아니고 언약 안에 들어있는 예수가 언약도 만들어내고 계시도 만들어낸다.

그렇다면 우리가 쳐다보죠. 우리가 아는 것은 신의 계시죠. 앞에 뭘 넣읍시다. 그냥 계시라 하면 뭐하니까. 살아계신 하나님의 계시를 우리가 아니까 그 계시가 어떻게 미끄러져 가는가를 보자. 언약적으로 가는구먼. 그러면 우리의 눈총을 언약에 가자, 고! 그 다음에 언약 속에는 예수님이 계시거든요. ‘가자.’라고 생각하는 우리가 예수로부터 출발한 언약과 계시로서 우리에게 온 것 하고 방향이 서로 맞지 않을뿐더러 여기서 충돌이 일어나는 거예요. ‘신의 계시는 언약이래. 쉽다. 언약 안에 예수 그리스도가 들어있대. 예수 믿으면 되겠다.’라고 생각하는 그 생각이, ‘너 맞을래?’ 그게 잘못이라고 치고 들어온 거예요.

그 치고 들어와서 우리 가슴에 세 가지 종류의 계시가 성립되는 거예요. 하나는 바로 계시 그 자체이신 예수 그리스도, 하나는 말씀, 또 하나는 선포된 쉽게 말해서 설교. 이 세 가지가 우리 가슴에 와 닿아서 이 노선, 우리가 추종하는 이 노선과 예수님이 내세우는 이 노선과의 마찰을 우리 마음 판에 도달하는 세 가지의 계시 유형으로 우리에게 충돌하고 공격하는 식으로 계시가 주어진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이 말은 뭐냐 하면, ‘네가 감히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부정하지 마. 너는 감히 성경말씀에 대해서 자유비평가들이 막 파헤치는데 J, P문서하면서. 너, 그럴 자격 없어. 네가 감히 복음적인 설교에 대해서 비판하지 마.’라는 절대적 권위로 공격하죠. 왜냐하면 우리는 여기서 반발이 나오기 때문에. ‘예수님, 우리가 알아서 믿겠습니다.’ 이런 반발. 말씀? 성경이야 옛날 과거에 편집된 것, 조립한 건데. 설교? 개나 소나 다하는 게 설교인데. 이런 식의 반발에 대해서 절대적인 권위로 충돌을 일으킬 때 여기서 비로소 구원에 합당한 회개가 나오죠. 회개만 나오는 것이 아니고 믿음도 나오고 소망, 사랑도 나오는 겁니다.

그러면 그전에 캘빈은 뭐라고 했느냐? 캘빈신학은 이런 충돌과 마찰에서 회개, 믿음, 소망, 사랑, 칭의라든지 영화로움 이런 게 나오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성령이 임하면 믿음을 주게 되면 인간내부에서 믿음이 자생하고, 소망 생기고, 사랑이 생겨서 갖고 있는 믿음으로 이제 성경을 볼까나? 하고 믿음으로 성경해석하면 괜찮은 해석이 되고, 소망과 사랑으로 사도 바울의 권면을 행동하면 이게 뭐가 되겠어요? 그들은 성화론이 되죠.

칼 바르트는 믿음이라 하는 것은 인간에게 나올 수 없고 하나님의 계시가 부딪치는 그 틈새에서 사건으로 발생되는데 비해서 기존의 캘빈신학은 내 믿음 내가 늘 갖고 있는 거예요. 한번 성령이 오게 되면 믿음, 소망, 사랑이 늘 갖고 있어서 가진 믿음으로 믿음을 잘 활용할 것이냐, 말거냐는 누구 결정입니까? 내 결정이죠.

내가 정신 바짝 차려서 ‘한번 믿어보자’ 하면 믿게 되고, ‘세상에 나가 돈 좀 벌까? 믿음 생활 한 오년 좀 미루겠습니다. 난 돈 좀 벌어서 교회 오겠습니다.’라고 믿을 수 있는 여유도 인간에게는 있다고 개혁주의신학에서는 그렇게 주장하는 거예요. 그러면 목사가 뭐라고 하느냐 하면, 여러분 캘빈신학에 의하면 여러분의 믿음을 썩히지 마시고 활용하시면 성경에서 약속한 모든 보너스를 하늘의 모든 축복을 믿음을 활용하면 주고 만약에 믿음을 나태하게 방치하면 그런 보너스가 없습니다. 그러니까 열심을 내서 주를 섬기자고 나온다 말이죠.

그러면 그 다음에 궁금한 게 뭐겠어요? ‘그럼 목사님. 열심을 내서 주를 섬기는 모델 되는 분을 제시해주시면 우리가 따라 하겠는데, 누가 믿음대로 사는 모델입니까?’ 하면 교회에서 누굴 제시하겠습니까? 역시 목사 본인. ‘여러분, 나를 본 받으세요. 나처럼 하면 복 받습니다.’ 하든지 그게 너무 경솔하든지 너무 속 보인다 싶으면 그 교회 부자, 돈 많은 사람, 기도 많이 하는 권사, 예언, 투시하는 능력을 가진 권사님해서

‘저분이 능력이 있는 것은 이번에 기도원에 가서 동굴 속에서 쑥과 마늘 먹고 40일 금식해서 얻은 능력인데, 여러분들도 다 때려치웁시다. 이번에 집단적으로 기도원에 기도해서 은혜 받아 회개해서 우리도 성경에서 약속한 하늘의 복을 듬뿍 받아서 세상적 복과 하늘의 복을 받읍시다.’라고 나오는 것이 캘빈신학이었단 말이죠. 그 신학에 대해서 칼 바르트가 그게 바로 비 언약적인 이방종교라는 거죠.

그렇다면 칼 바르트의 모든 예수 그리스도의 언약은 그걸 문자로 성경을 해독하거나 풀이할 문제가 아니고 사건화 되죠. 그래서 칼 바르트는 하이데거의 철학을 신학화 시켰다는 평을 받는 겁니다. 사건이 주어지게 되면 사건의 대상이 있어요. 사건을 칼 바르트는 말씀 사건이라 해요. 말씀 사건이 터지게 되면 대상이 있는데, 그 대상을 바로 ‘실존’이라 해요. 이거는 칼 바르트뿐만 아니고 불트만도 그렇게 했는데.

하나님의 말씀이 사건화 되어서 공격을 치게 되면, 여기서 그 실존은 깨어지고 새로운 실존이 나오는데 이걸 새로운 피조물이라 봅니다. 그러니까 캘빈신학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뭡니까? 자기 속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 캘빈신학에서 하나님 형상이라는 것은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공통적으로 갖고 있는 속성을 두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그걸 공유적 속성이라 하죠. 그게 뭐냐 하면, 아무리 죄 지어도 여전히 남아있는 게 있다는 거예요.

그게 뭐냐? 선이 좋은 줄 알고, 거룩이 좋은 줄 알고, 양심대로 사는 것, 남을 보면 불쌍히 여기고 측은지심 이런 것. 인간 속에 아직도 남아있는 하나님의 형상, 비록 죽어있지만 말씀이 와서 치면 그게 되살아날 수 있는 어떤 잠재적인 그런 여지, 그걸 하나님의 형상이라 해서 말씀을 보고 성경공부하면 죽었던 형상이 되살아나는 걸 캘빈신학에서는 에베소서 5장을 가지고 하나님 형상을 본받자는 거기에 해당되는 거예요.

우리는 예수 믿는 걸 십자가 믿고 용서 받고 그 다음에 성령을 받아서 신의 형상을 본받고 예수님에까지 자라난다고 이렇게 이야기하죠. 에베소서 4장에 의해서. 그게 공유적 속성을 이야기해요. 같은 속성을 개발해서 하는 겁니다.

제가 첫째 시간에 그걸 뭐라고 합니까? 자기 수양. 잠재돼있는 신성을 개발해서 ‘내가 이렇게 착할 수가 있어?’ 자기 감탄에 빠지는 것, 자기 수양. 그래서 자기 수양을 하기 위해서 인간은 성령께서 선물로 준 믿음, 소망, 사랑으로 활용을 하는 거예요. 말씀을 보고 기도를 하게 되면 활용이 되면서 신의 형상을 더욱더 본받을 수가 있다고 본 반면에

이게 사건이 되서 새로운 피조물이 되면 어떻게 되느냐 하면, 여기서 교체작업이 일어나요. 그 교체작업을 하면서 나타나는 게 뭐냐? 인간 속에 숨어있던 죄가 하나, 둘씩 발각이 되는 사태가 벌어져요. 칼 바르트에 의하면. 그렇게 하는 작업까지도 포함시켜서 그게 언약사건, 다른 말로 하면 말씀사건, 다른 말로 하면 말씀사건인 동시에 언약사건 결국 그게 예수 그리스도의 사건이 되는 거예요. 예수님의 사건이 되는 겁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사건이 된다고 한다면, 그 다음에 파헤칠 것은 예수님이 누구냐 하는 문제입니다. 그게 칼 바르트에서 제일 어려운 대목이에요. 예수님이 누구냐 하는 겁니다. 예수님이 누구냐를 알아야 예수님의 사건이 터질 것 아닙니까. 그 다음에 그 사건이 언약사건 되고, 언약사건이 와야 말씀사건이 되서 새로운 피조물 되고 우리 안에 그리스도가 살아있으니까.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냐는 이 문제에 대해서 칼 바르트는 어떻게 전개하느냐 하면, 예수님마저도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사건이 돼버려요. 그러니까 하나님 아버지 앞에 있는 예수님이 자신이 말씀사건화 됨으로 말미암아 이 사건이 모델이 되어서 앞으로 구원받아야 될 모든 피조물에게 예수님에게 일어난 모든 사건이 같이 병행해서 예수님 주도하에 일어나는 일이 있을 때 그것이 새로운 피조물이라 보는 겁니다.

그렇다면 우리 이야기의 초점이 갑자기 어디로 모아졌지요? 이제는 모든 곁가지는 다 떨어져나가고 남는 건 성부 하나님 앞에서 성자는 어떤 분이냐? 거기에 초점이 모이겠죠. 이러한 예수님 관점 때문에 거의 모든 신학자들이 예수님을 반대하는 겁니다. 왜? 하나님 앞과 예수님 앞에 사건을 일으키면 방금 뭐가 떨어져나간다 했습니까? 모든 인간들이 떨어져나가죠.

떨어져나간 인간 속에 바로 신학자, 본인들이 있기 때문에. 그리고 사랑하는 내 자식, 내 아내 구원받아야 될 우리 아버지, 우리 엄마 이런 사람들이 다 떨어져나가겠지요. 그럼 어떻게 됩니까? 교회 가서 기도해서 ‘내 아들 구원해주세요, 내 아버지 구원해주세요, 내 엄마 구원해주세요.’ 하는 기도가 소용 있습니까, 없습니까? 다 떨어져나가야 되죠. 소용이 없는 거예요.

결국 인간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떨쳐내는 그런 신학이라면 그 칼 바르트 신학을 받아들이는 교회 같으면 사람이 오겠습니까, 안 오겠습니까? 사람이 오질 못해요. 일년 250만 온다는 갓바위에 ‘여기는 어떤 효험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간판 걸어버리면 누가 오겠어요? 아무도 안 오죠. 만약에 우리교회에 ‘구원받지 못하는 교회’ 이런 간판 걸면 아무도 안 오겠지요.

바로 칼 바르트가 이렇게 그야말로 오직 예수 그리스도 일변도로 나가니까 여기에 대한 반발이 이거는 엄청난 거예요. 칼 바르트 주장이 성경적으로 맞고, 안 맞고, 논리가 맞고, 안 맞고를 떠나서 목회에 쓸모 짝이 없는 신학이 돼버려요.

목회가 뭡니까? 사람 끌어 모으는 것 아닙니까. 교회에서 사람 끌어 모아서 그게 돈 되고 목사 노후대책이 되어야 되는데 사람을 끌어당기는 유인책이 없는, 다른 말로 해서 자본주의 하에서 상품화되지 않는, 시장에 내놔도 사람들이 찾지 않는 상품은 아무리 노동시간 집어넣어도 팔리지 않는 상품은 모든 가치는 다 날아가 버린다는 게 마르크스의 주장입니다.

팔리지 않는 상품은 상품이 아니지요. 사람에게 인기 없는 복음은 복음이다, 아니다? 복음이 아닌 거예요. ‘사람에게 인기를 끊어놓고 우리 시작하자’라고 칼 바르트가 이야기했을 때 사람들을 끊어놓자는 그것 때문에 칼 바르트가 싫어하는 거예요. 칼 바르트가 옳고 그름을 떠나서 교회 장사가 안 된다는 거예요.

지금도 칼 바르트신학을 거론하는 사람들이 그게 칼 바르트의 중심적 정신, 사상을 거론하는 게 아니고 칼 바르트의 유명세, 칼 바르트가 상품화 가치가 있다고 여기고 그 대단한 신학적 권위를 편집해서 왜곡시켜서 뭔가 민중의 아픔과 같이 할 수 있는 그런 칼 바르트? 대중의 한 맺힌 걸 풀어주는 그런 칼 바르트 쪽으로 변개시켜서 그렇게 주장하죠. 그래야 한 맺힌 사람들에게 상품으로 과시가 되죠.

제가 아까 첫째 시간에 이야기했지요. 우리나라 민중의 밑바탕에 뭐가 있다? 무교에요. 무교란 뜻이 뭐예요? 잘 살든 못 살든 전부다 하나 되자. 우리는 모두가 하나다 말이죠. 그것에 부합되지 않는 복음은 복음이 아니라고 본다고. 하나 되게 만들면 그건 교회 장사되고.

그 다음에 진도 나가봅시다. 그러면 하나님 앞에서 예수님은 어떤 존재냐? 칼 바르트는 내세우는 성경구절 들어봅시다. 마태복음 3장 17절. “하늘로서 소리가 있어 말씀하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칼 바르트는 해석을 할 때 언약으로 해석하죠. 여기서 유명한 칼 바르트 개념, 아들 개념은 택한 개념.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은 택하지 않으면 아들이 될 수 없는 거예요. 이런 게 칼 바르트 신학에서 사람들이 이해하기 어렵다는 대목인데요.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택할 때 우리가 보통 택한다 하면 여러 명 있는 중에서 하나를 택한다고 그렇게 생각하잖아요. ‘너 아니고, 너 말이야.’ 너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했을 때 이 말씀이 사건화 되면 예수님만 택했다 할 때 예수님에 속해 있는 예수님의 사람, 아담이죠. 아담이 속한 모든 것이 함께 선택이란 이름으로 아들이 되는 겁니다.

그러면 불쑥 튀어나온다 말이죠. 모든 인간을 대표한 분 앞에서의 아들이 되는 택함이 되는 거예요. 그러면 이 선택은 예수님에게만 주어지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이 포함된 모든 자에게 전부다 같이 쏟아지게 되는 겁니다. 왜 그러냐 하면, 처음에 전제가 뭐냐 하면, 모든 사람을 다 제쳐 놔버리거든요. 하나님하고 아들밖에 없었다는 거예요. 창세전에. 창조를 해도 하나님과 아들의 의논 따라서 창조되기 때문에 창조는 뒷전이죠.

뭐부터 정립돼야 돼요? 하나님과 아들 관계부터 먼저 정립이 되고 그 관계를 증거하고 그걸 증명하는 한해서 창조라는 대자연이라는 뒤 배경이 그 다음에 여기서 만들어져야 돼요. 그렇다면 이 자연세계라 하는 것은 그냥 자연세계가 아니고 누구를 증거하는 자연세계가 되겠습니까? 우리가 알기는 예수님이라 하잖아요. 예수님이 아니고 하나님하고 예수님과의 관계를 보여주는 대자연이 되는 겁니다.

그런데 여기서 칼 바르트가 본인이 헷갈려서 그런지 모자라서 그런지 무엇 때문에 그런지 하나님과 아들의 관계를 보여주기 위해서 대자연이 있고 피조물이 있다고 주장하는 대목도 있고, 예수님을 증거하기 위해서 대자연이 있다는 대목도 다 있어요. 그래서 뒤에 사람들에게 비판에 여지가 생겨버린 겁니다.

어떤 비판의 여지냐 하면, 만약에 예수님을 증거하기 위해서 대자연이 있다면, 예수님이 하나님에게 선택받아서 선택된 자로서 버림받고, 선택된 자로서 버림받은 데서 다시 구원이 돼버리면 누구도 구원받아요? 예수님과 더불어 있는 모든 피조세계, 자연세계도 구원받은 것이 되어서 모든 인간은 구원받는다는 만인구원설이 돼버리죠. 지옥 가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게 돼버리죠. 왜냐하면 대표한 사람이 버림받았다가 건짐 받았기 때문에 모든 사람이 구원받는 겁니다.

그런데 만약에 하나님과 아들의 관계를 보여주기 위해서 이 자연세계가 있다면, 하나님과 아들 관계에서는 버렸다가 다시 되찾는 관계 아닙니까. 그렇다면 이 세상 주변은 뭐가 있어야 되느냐 하면, 버려야 될 사람이 있고, 버림받은 데서 탕자처럼 되찾음 받는 사람 따로 있어야 되겠죠. 그렇다면 지옥 갈 사람도 있고 천국 갈 사람도 있어야 되는 거예요.

그걸 제가 이야기하잖아요. 그건 바로 세상은 예수님의 속성을 보여주는 것이다. 하나님과 예수님 사이의 속성이 뭐냐? 공의로운 속성과 사랑의 속성이 있다. 은혜 줄 자에게 은혜를 주신다는 것은 전제에 뭘 깔고 하느냐 하면, 하나님의 공의하심과 거룩하심과 하나님의 무서움을 배제하는 것이 아니고 그런 어두운 배경을 깔고 난 뒤에 사랑이 그 안에 있는 거예요.

그리고 반대로 해야 돼요. 지옥이 있는 것은 천국의 가치를 말하기 위해서, 천국이 얼마나 좋다는 걸 말하기 위해서. 반대로 이야기해야 돼요. 천국이 있다는 것은 얼마나 하나님이 죄에 대해서 싫어하고 있는지를 보여주기 위해서 지옥이 있고 동시에 천국이 있고. 천국은 그냥 살기 좋은 곳이 아니고 ‘참 죄에서 죽을 뻔 한 인간들, 내 사랑 아니면 너는 지옥 갔어야 돼.’라는 것을 마음껏 보여주는 장소가 뭡니까? 그게 천국이다. 그게 사랑 아닙니까.

그렇게 해야 되는데 칼 바르트가 무슨 생각했는지 아마 자기 논리상 편해서 그런데 이 관계를 보여주기 위해서 피조세계가 있는 게 아니고 예수 그리스도를 보여주기 위해서 피조세계가 있다는 쪽으로 비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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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 21,142건 중 510 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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