렘 10:19-25 (선지자의 고난과 주님)
렘 10:19-25 (선지자의 고난과 주님)
이름 : 우리교회(IP:220.81.41.193)
본문 : 예레미야 10장19-25절
제목 : 선지자의 고난과 주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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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09-11-18 21:09
선지자의 고난과 주님
2009년 11월 18일 본문 말씀: 예레미야 10:19-25
(렘 10:19, 개정) 『슬프다 내 상처여 내가 중상을 당하였도다 그러나 내가 말하노라 이는 참으로 고난이라 내가 참아야 하리로다』
(렘 10:20, 개정) 『내 장막이 무너지고 나의 모든 줄이 끊어졌으며 내 자녀가 나를 떠나가고 있지 아니하니 내 장막을 세울 자와 내 휘장을 칠 자가 다시 없도다』
(렘 10:21, 개정) 『목자들은 어리석어 여호와를 찾지 아니하므로 형통하지 못하며 그 모든 양 떼는 흩어졌도다』
(렘 10:22, 개정) 『들을지어다 북방에서부터 크게 떠드는 소리가 들리니 유다 성읍들을 황폐하게 하여 승냥이의 거처가 되게 하리로다』
(렘 10:23, 개정) 『여호와여 내가 알거니와 사람의 길이 자신에게 있지 아니하니 걸음을 지도함이 걷는 자에게 있지 아니하니이다』
(렘 10:24, 개정) 『여호와여 나를 징계하옵시되 너그러이 하시고 진노로 하지 마옵소서 주께서 내가 없어지게 하실까 두려워하나이다』
(렘 10:25, 개정) 『주를 알지 못하는 이방 사람들과 주의 이름으로 기도하지 아니하는 족속들에게 주의 분노를 부으소서 그들은 야곱을 씹어 삼켜 멸하고 그의 거처를 황폐하게 하였나이다 하니라』
오늘 본문의 전반부 내용은, 하나님께서 유다 나라를 징벌하는 내용입니다. 그리고 후반부 내용은, 이방나라를 저주하는 내용입니다. 그런데 이 이방민족은 하나님의 뜻에 따라 유다나라를 징벌하는데 참여 했던 민족입니다. 이 참여한 민족을 저주한다는 것은 곧 유다 나라를 치지 말아야 할 나라가 친 경우에나 해당될 사항입니다.
이렇게 되니 이방 민족들은 유다 나라를 안 쳐도 저주받고 쳐도 저주받는 나라가 되고 마는 겁니다. 이런 면에 대해서 인간으로서 이해하기 힘듭니다. 물론 선지자는 하나님의 이런 활동을 이해합니다. 그렇다면 선지자는 어떤 통로를 거쳐서 모순되어 보이는 하나님의 활동이 모순없이 정립이 된 겁니까?
우선 우리가 알아야 할 사항은 여호와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는 신비로운 분이라는 점입니다. 보통 인간들 생각에는 한 가족으로 같이 살면, 그만큼 남들보다 더 잘 아는 관계라고 여길 것입니다. 자식으로서 자신의 아버지를 어느 누구보다 더 잘 아는 것이 지극히 당연한 것이고 상식입니다.
하지만 이스라엘에게 있어 여호와 하나님은 그렇지 않습니다. 알면 알수록 그 깊이와 넓이가 더 확대됩니다. 이방인들의 신들은 인간들의 아이디어에서 나왔기 때문에 처음에는 거창하게 신을 신봉하다가 시간이 좀 지나면 자진해서 우습게 취급하게 됩니다. 전혀 신비롭지가 않은 겁니다.
그런데 여호와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있어 갈수록 알 수 없는 하나님 됩니다. 하지만 이방민족들은 여호와 하나님에 대해서 나름대로 쉽게 이해합니다. 이스라엘의 역사를 통해서 여호와 하나님이 어떤 신이라는 것을 대충은 압니다. 물론 믿지는 않지요. 왜냐하면 안다고 여기기 때문에 알기만 하면 됐지 구태여 믿을 것까지는 없다고 여기는 겁니다.
오늘날 교회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직접 예수님을 만난 적이 없기에 성경을 통해서 대략 윤곽을 잡아나가면서 하나님이나 예수님에 대해서 본인들이 알고 있다고 주장합니다. 하지만 믿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이미 익히 안다고 여기기 때문에 관계 조율만 적당히 하면 된다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런 식으로 여호와 하나님을 알게 되면, 오늘 본문 같이 하나님이 벌리시는 유다나라 징벌에 참여한 이방민족에게 대놓고 저주해야만 하는 사명과 쉽게 연결지을 수가 없게 됩니다. 여기서 우리는 여호와 하나님의 신비가 어디서 도출되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종말을 저 역사의 끝에 있다고 봅니다.
하지만 선지자에게 있어 종말은 역사의 끝에 새삼 등장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처음부터 이스라엘 밑에 깔려 있다고 봅니다. 그 이유는, 이스라엘은 ‘주’요 ‘심판주’이시기 때문에 그러합니다. 그러니까 여호와 하나님에게 있어 종말이란 이스라엘의 처음 자리를 찾아가는 겁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세상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종말이라는 것이 기차 레일같은 수평적 직선의 끝자락에 둘 것이 아니라 수직적으로 파고 들어가야 합니다. 예를 들면, 창세기 다음에 출애굽기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출애굽기 쯤 되면 창세기 시절은 지나간 것으로 여깁니다. 하지만 모세에게 있어 출애굽이란 곧 이스라엘의 바탕이 되는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언약을 통해서 그들이 뵙던 그 하나님께서 친히 동행함을 통보해주는데 있습니다. 즉 출애굽 밑에 창세기가 영원히 깔려있어서 같이 나란히 이동하고 있는 겁니다. 출애굽은 결코 창세기 틀을 벗어날 수가 없는 겁니다.
쉽게 말해서 하나님과 동행하는 사람에게 있어 신비란, ‘주님’이 품고 계시는 그 신비의 토대 위에서 자신이 만들어져서 그 신비의 힘으로 움직이고 있음을 인정하는 신비를 뜻합니다. 이렇게 되면 하나님만 신비로운 것이 아니라 그 하나님에 의해 만들어져 말씀으로만 움직여지는 본인도 신비로운 것입니다. 성령이 임했다는 말이 이런 현상을 말합니다.
마지막 때에 결국 천국 아니면 지옥에 들어갑니다. 바로 이 사실이 창세기를 시작할 때부터 계셨던 그 ‘주님’이 품고 있던 신비였고 그 신비에 준해서 이 땅에 태어나야만 하는 자들이 있었으니 그들이 바로 천국가야만 하는 성도들입니다. 따라서 성도에게 있어 종말이란 현재 자신을 신비롭게 만드시는 그 원천지를 알게 하시는 신비로운 힘이 작용하는 시간적 층을 말합니다.
그렇다면 성도는 무엇으로 영생을 얻게 되나요? 바로 ‘하나님의 죽으심’입니다. 이스라엘이 겪어야 하는 고난이나 오늘 본문 19절의 말씀처럼 예레미야 선지자가 겪는 고난이며 모두 하나님이 겪는 죽음의 고난의 자리에서 분출되는 같은 신비로운 능력의 결과입니다. 19절은 이런 내용입니다. “슬프다 내 상처여 내가 중상을 당하였도다 그러나 내가 말하노라 이는 참으로 고난이라 내가 참아야 하리로다”
이 고난에 참여한 참 이스라엘은 이 신비를 압니다. 자신들이 당하는 고난은 곧 메시아의 고난에 동참하는 차원인 것을 말입니다. 이로서 하나님의 신비에 그들도 신비로운 백성으로서 다루어지고 있는 겁니다. 하지만 이방민족들은 그렇지 않습니다. 그들은 그 어떤 신비라도 자신들이 납득이 되는 것으로 전환시켜서 믿을려고 합니다.
그러니 그들에게 있어 신비란 항상 정복과 극복의 대상일 뿐입니다. 신비 속에 점점 빠져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신비를 해결하려고 합니다. 그래야 신의 신비마저 자신들의 손아귀에 쥐려고 합니다. 그렇다면 그들이 믿는 것은 신이 아니라 곧 자기 자신들의 의지요 이성이요 감정입니다.
예수님의 빈무덤과 부활을 과학적으로 증명해서 사람들을 납득을 시키려고 한다면 이는 곧 본인들부터가 전혀 믿음 없는 사람이 되는 겁니다. 즉 본인들부터 자신들에게 하나님의 모든 것이 납득이 안되니 납득되는 식으로 해명해보려는 겁니다. 아브라함이나 이삭에게 있어 하나님의 일은 그야말로 신비였습니다.
아브라함에게 있어 아내 사라가 임신한 것도 참으로 신비로운 사실이었고 이를 통해서 본인의 운명은 본인이 감당할 문제가 아니라 언약대로 진행되어야 하나님의 피조물인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방인들은 주를 모르기에 마치 자신이 모든 것을 새로이 판단하고 결정하는 것처럼 여깁니다. 언약에 의해서 이들은 비언약적인 존재가 되었기에 저주받아야만 하는 운명입니다. 반면에 성도가 참으로 신비로운 자가 되어 있다는 말은, 이미 그 속에 ‘하나님의 죽으심’이 담겨 있다는 말이 됩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죽으심을 증거한 그릇을 따로 만들어내십니다. 이것이 바로 성도의 신비로움입니다. 더 이상 자신이 사는 것이 아니라 자기 안에 그리스도가 사신다는 겁니다. 이 신비를 유지하기 위해 하나님께서 말씀을 가지고 성도를 매일같이 난도질합니다. 가끔 사람들이 말하기를, “하나님께서 나를 금방 데려가면 좋겠다”고 합니다.
그렇게 염려할 필요없습니다. 이미 하나님께서는 성도를 늘 죽이고 계십니다. 벌써 죽은 자로서 살아가도록 하신 것입니다. 말씀이 성도 안에서만 활동하기에 성도는 이방민족들처럼 더 이상 자신의 판단으로 하나님이 하시는 모든 것을 판단하거나 실천할 이유가 없습니다. 성도 안에 말씀을 살아서 활동 자체가 말씀의 실천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하나님의 죽으심을 증거하기 위해 그릇으로 만드신 그 신비를 신비로서 드러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우리교회
09-11-24 16:48
http://media.woorich.net/성경강해/예레미야-2009/037강-렘10장19-25(선지자의고난과주님)-jer091118.hwp
우리교회
09-11-24 16:50
20091118우리교회수요설교녹취(렘 10:19-25/선지자의 고난과 주님)
2009-11-19 15:41:34 녹취 : 오용익
20091118우리교회수요설교/예레미야 10장 19-25절/선지자의 고난과 주님
(기도)
이 시간 한 마음으로 기도하겠습니다. 사람들이 원하고 있는 인기라는 것이 죄인의 가치의 불과합니다. 그런데 천국에는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 가치가 따로 있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 살면서 천국에서 알아주지 않는 그 인간들의 가치에 매료되거나 그것 때문에 우리가 좌절하거나 시기하거나 그것 때문에 낙심하지 않고 천국의 가치가 세상의 가치와 다르다는 것을 늘 인식할 수 있도록 다 같이 기도합시다.
………………
하나님 아버지, 사람들이 추구하는 것이 우리들에게도 얼마나 매력거리가 되고 매혹거리가 되는지 우리가 매일 같이 낙담하고 자신에게 시련당하고 세상적인 인기가 없다고 외로워하고 쓸쓸해하고 마음 적으로 좌절할 때가 빈번합니다. 하지만 사도바울이 간, 스데반 집사가 간, 예수님께서 가신, 선지자들이 순교자들이 갔던 그 길을 생각해 볼 때, 그러한 것들이 우리에게 하나의 유혹으로서 좌우한다는 것, 우리가 잊지 않게 하여 주옵소서. 날마다 우리가 가야될 그곳이 세상의 어떤 곳보다 더 고귀한 곳이고 귀한 가치가 있는 것을 저희가 한시도 잊지 않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하나님의 말씀, 예레미야 10장 19절에서 25절까지입니다. 구약성경 1068페이지입니다.
예레미야 10:19-25
“슬프다 내 상처여 내가 중상을 당하였도다 그러나 내가 말하노라 이는 참으로 나의 고난이라 내가 참아야 하리로다 내 장막이 훼파되고 나의 모든 줄이 끊어졌으며 내 자녀가 나를 떠나가고 있지 아니하니 내 장막을 세울 자와 내 장을 칠 자가 다시 없도다 목자들은 우준하여 여호와를 찾지 아니하므로 형통치 못하며 그 모든 양 떼는 흩어졌도다 들을찌어다 북방에서부터 크게 떠드는 풍성이 오니 유다 성읍들로 황폐케 하여 시랑의 거처가 되게 하리로다 여호와여 내가 알거니와 인생의 길이 자기에게 있지 아니하니 걸음을 지도함이 걷는 자에게 있지 아니하니이다 여호와여 나를 징계하옵시되 너그러이 하시고 진노로 하지 마옵소서 주께서 나로 없어지게 하실까 두려워하나이다 주를 알지 못하는 열방과 주의 이름으로 기도하지 아니하는 족속들에게 주의 분노를 부으소서 그들은 야곱을 씹어 삼켜 멸하고 그 거처를 황폐케 하였나이다.”
오늘 본문의 앞뒤가 서로 안 맞다는, 서로 일관된 내용이 아니라는 것을 방금 보면서 느낌으로 오게 되어 있지요. 앞에 있는 대목은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범죄 해서 벌 받고 징계를 받으니까 우리가 징계 받는 것은 당연하다, 라고 생각하는 것이 19절에서 22절까지의 이야기라면 23절부터 25절까지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백성을 징계하기 위해서 동원시킨 그 이방민족을 하나님이여 용서하지 마옵소서. 분노를 퍼부으소서. 저주하소서.’ 라고 되어 있지요.
이게 연결이 잘 안되지요.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치기 위해서 동원시켜 놓았는데 동원시킨 그 민족을 ‘하나님이여, 저주하소서.’라고 한다면 그러면 이방민족들은 뭡니까? 하나님이 시키는 대로 했는데 시키는 대로 했다는 것 때문에 저주받고. 그런 예는 신약에서 가룟유다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가룟유다가 없으면 예수님을 팔 자가 없고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을 수가 없는데 그 일에 참여했던 가룟유다는 ‘너는 차라리 태어나지 말았으면 좋을 뻔한 사람이다.’라고 영원한 저주를 받고 사탄의 종이 되어서 일했습니다. 저주가 주어졌지요. 그럴 때 하나님이 하는 일에 관여한 공로자를 하나님께서 저주한다면 하나님의 일에 참여한 그것으로 구원이 안 된다는 이야기가 되는 겁니다.
이게 인간들의 세계하고 하나님이 움직이는 세계의 구조, 인식이 달라서 그렇습니다. 오늘 본 내용을 통해서 어떻게 다른지를 알아야 되겠지요. 이게 다르다는 것, 어떤 차이점이 있다는 것도 모르고 그냥 뒤섞어 놓아 버리면 결국 우리가 예수 한 10년 믿고 난 뒤에 ‘하나님도 내 기도 들어주지도 않는데 나도 하나님에 대해서 삐졌다. 나도 하나님 안 믿을래.’ 그렇게 삐져버리는 거예요.
‘하나님 믿으려고 애를 썼는데 하나님이 협조를 안 해주니 제가 천국에 갈 수 있습니까?’ 이렇게 삐져서 나오는 말이 ‘나는 정당했다. 나는 열심을 냈는데 하나님 쪽에서 믿음을 안주니까 나를 지옥 보낸다면 이것은 하나님이 실수한 것이다.’ 이런 식으로 나올 수가 있는 거예요. 그 마음가짐이 이방인들의 마음가짐인데 그게 왜 틀렸는가를, 왜 그게 잘못인가를 우리가 이제 알아야 됩니다.
이스라엘에게 있어서의 여호와하나님은 비밀입니다. 이 말은 상당히 중요한 말인데요. 우리가 알다시피 우리 집안에 대해서 친구가 말하기를 ‘어이, 자네 아버지는 자네가 잘 알지?’ ‘우리 아버지인데 내가 잘 알지.’ ‘나는 자네 아버지를 잘 모르겠어.’ ‘모르지. 너는 우리 아버지의 자식이 아니고 내가 우리 아버지 자식이니까 나는 잘 알고 너는 모르지. 우리 아버지는 너에게 비밀이야.’
우리 인간성에 대해서는 그 집안 식구가 아닌 사람은 그 집안의 어른을 잘 모르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하늘나라는 반대에요. 하늘나라는 이스라엘이 여호와에 대해서 비밀이고 다른 민족은 여호와에 대해서 잘 알아요. 반대가 됩니다. 이스라엘은 여호와에 대해서 ‘난 아무리 해도 하나님에 대해서 모르겠어.’ 이게 이스라엘이고 ‘여호와? 그거 이스라엘 하나님 아닌가? 다 알지. 애굽에서 나오고 홍해 건너온 이야기도 들었고 그래서 잘 알지.’ 그래 되는 겁니다.
그것이 기본적으로 근본적으로 사람이 만든 하나님과 진짜 하나님하고 차이점입니다. 진짜 하나님은 진짜 하나님에게 부름 받은 사람에게는 점점 더 하나님은 비밀스러워요. 그걸 ‘경외(두려워함)’라 하는데 점점 더 경외스러워서 함부로 할 수 없는 반면에 꼭 예수 안 믿는 인간들이 예수 함부로 욕하고, 예수 안 믿는 작가들이 예수에 대해서 자기 맘대로 그려내고, 예수는 안 믿으면서 예수에 대해서 연구는 무지무지 많이 하고.
그만큼 모르기 때문에 그런 현상이 일어나는 겁니다. 이 문제를 이런 차이점을 가지고 봐야 오늘 본문이 풀립니다. 왜 이방인들을 동원시켜서 이스라엘백성을 쳐놓고는 그 이스라엘을 쳤다는 이유 때문에 이방나라를 저주해버리면, 이방나라는 이스라엘을 치지도 못해요. 쳐놓으면 저주받고 안치면 또 말 안 듣는다고 저주할 거니까, 이래도 저래도 저주받을 거니까 이방나라는 이러나저러나 저주받을 것이라면 어쩌란 말인가?
아주 난처한 지경에 빠지지요. 이스라엘에 있어서 바로 그러한 어려운 점을, 이스라엘에게는 하나님이 비밀이지만 이방나라는 여호와를 비밀로 보지 않는다는 그 차이점, 그 사이에 누가 있느냐 하면 선지자 예레미야가 있어요. 예레미야는 이 둘 사이에,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일 시켜 놓고 일 시킨 자를 저주하는….
‘여기가 우리 교회인데 가스 배달되지요?’ ‘여기 가스 두 통이요.’ ‘예, 감사합니다. 지옥가세요.’ 이게 우리 인간으로서는 잘 안돼요. ‘아이고, 아저씨 이렇게 추운데 수고했습니다. 가스까지 배달해주시고. 교회는 안다니지만 수고했으니까 복 받을 거야.’ 이게 우리네 상식인데 ‘가스 두통이요.’ ‘감사합니다. 지옥가세요. 주의 저주가 있을 겁니다.’
이게 다른 사람은 안 되는데 선지자한테는 이것이 하나로 매치가 돼요. 연결이 된다고요. 그게 어떻게 연결되는가? 잘 한번 들어보세요. 보통사람들은 창세기부터 역사가 시작해서 종말이 어디에 있느냐 하면 요한계시록에 종말이 있다, 그렇게 보는 겁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성령을 받은 선지자입장에서는 뭐냐 하면 종말은 끝으로 가는 것이 아니고 처음으로 돌아가는 것이 종말이에요.
역사를 기다란 철로처럼 수평으로 깔아놓으면 이게 잘 설명이 안돼요. 수평으로 깔아놓으면 한번 창세기에서 떠난 기차가 마지막 종착점을 향해서 열심히 달리게 되어 있지 갑자기 그 기차가 거꾸로 돌아가지는 않는다 이 말이지요. 세상의 모든 역사들은 시작을 했으면 끝을 향해서 달려간다, 이래 되어 있지만 이스라엘의 기차는 달려가는 것이 아니고 자기자리의 깊이를 향하여 더 깊숙하게 빠져들어 가는 겁니다.
우리는 보통 창세기를 떠났으면 그 다음은 출애굽기시대에는 창세기가 없다, 하잖아요. 이스라엘은, 모세는 그렇게 보지 않고 이스라엘 밑에 창세기가 받쳐 있다고 보는 겁니다. 창세기에 있는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언약대로 출애굽기의 역사가 진행되는 거예요. 그래서 출애굽기의 역사를 알려면, ‘이제 우리는 출애굽기다. BC 1400여년경이다. 자, 우리 시대는 어떠한지?’ 이렇게 하면 자기시대를 몰라요.
파고 들어가야 됩니다. 파고 들어가면 출애굽기에 나타난 모든 현상들이 이미 창세기 안에 처음부터 끝까지, ‘처음이요 나중이니’ 하고 계시는 그 주님이 그 안에 들어 있어요. 오늘 본문을 봅시다. 25절에 “주를 알지 못하는 열방과 주의 이름으로 기도하지 아니하는 족속들에게 주의 분노를 부으소서.”
‘주를 알지 못하는 열방과 주의 이름으로 기도하지 아니하는 족속들에게 주의 분노를 부으소서.’ 여기에 괄호를 쳐놓고 여러분들의 고등학교동창생이나 친척들 중에서 교회 안가는 사람들을 다 대입해 보세요. 심지어 교회는 안 나가는데 자기애인, 집어넣어 보세요. 결국은 뭐냐 하면 선지자라면 교회 안다니는 자기애인하고 사귀면서 무슨 마음을 품고 있어야 되느냐 하면, ‘주여, 제 여자 친구 저주받게 하옵소서.’라고 해야 됩니다.
왜? 자기 여자 친구는 주의 이름을 부르지도 않고, 주를 알지도 못하고, 또 예레미야 다른 곳에 보면 ‘그들은 주의 언약을 모릅니다.’ 라고 하니까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언약을 모르는 자에게 저주를 퍼부우소서.’라고 해야 합니다. ‘주여, 제 여자 친구를 제가 너무 너무 사랑합니다. 도움도 많이 받습니다. 늘 만두며 떡볶이를 사주고 참 좋은데 한 가지, 주의 이름을 모릅니다. 주여, 지옥가게 해 주옵소서.’
세상에 이런 남자친구가! 이게 이중성 아닙니까? 그런데 선지자에게는 이중성이 아니라는 말이지요. 왜냐하면 그 여자 친구는 ‘이제 자기하고 나하고는 두 달 뒤에 결혼식을 해서 그 다음에 내년 이 맘 때쯤에 애도 낳고, 그 다음에 아파트 전세에서 새로 장만해서 들어가고….’ 죽 계획이 있는데, 그 선은 과거로부터 미래로 이렇게 흘러갑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아는 그 남자친구는 5층, 6층, 지하 10층, 점점 더 밑으로 파고 들어가지요. 그러면 거기서 뭐가 나오느냐 하면, ‘하나님, 왜 예수 믿지 않는 여자를 저와 사귀게 했습니까?’라는 이유가 나오는 거예요.
‘왜 내 자식가운데서 예수 안 믿는 자식이 태어났는가?’라는 그 이유가 나와 있어요. ‘왜 새벽마다 나에게 도시락을 싸주면서 나를 공부시킨 그 착한 어머니는 왜 예수 믿으라는 말만 나오면 얼굴을 돌립니까?’라는 그 이유를 생각하면서 깊이 있게 파고 들어가면 거기에 종말이 나와요. 종말이 나온다는 말은 뭐냐 하면 천국과 지옥이 나온다는 말입니다.
아, 이제 쉽네. 종말이 나온다는 말은 어떤 사람은 지옥가고 어떤 사람은 천국 가는 것이 이미 확정된 채 그 비밀이 담겨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이스라엘한테는 여호와가 가면 갈수록 비밀스러워요. 다른 이방민족의 신들은 사람이 만들어 놓았기 때문에 이미 만들 때부터 사람들이 다 알아요. 자기들이 만들었기 때문에 다 알아요.
기껏해야 신이라는 것은 자기하고 교제하기 위해서 만들어 놓았기 때문에 내 품성이나 신의 품성이나 갓바위 품성이나 똑같은 거예요. 부처나 나나 둘 다 똑같은 인간이기 때문에 부처를 섬긴다는 것은 ‘나’숭배에요. 내가 나한테 숭배하는 겁니다. 그런데 세상의 모든 사람들은 자기가 만든 신을 섬기지만 진짜 예수 믿는 사람은 예수님을 연구하는 사람이 아니고 진짜 예수를 만난 사람이에요.
예수님을 만나게 되면 뭐를 포기하느냐하면, 예수 연구하기를 포기해 버립니다. 포기해버리고 그때부터 본인이 예수님에게 연구대상으로, 하나의 실험개구리로, 생물시간에 개구리 해부하듯이, 하나님이 나를 본격적으로 해부해서 ‘이놈이 천국을 갈 놈이야, 이놈이 지옥을 갈 놈이야? 한 번 보자.’ 하고 주께서 나를 평생을 가지고 실험도구로, 실험재료로 사용합니다.
그런 재료로 사용한다는 것을 반기면서 받아들이게 됩니다. 이게 뭐냐 하면 보통 정육점에 가면 날카로운 톱이나 칼로 고기를 썰 듯이, 말씀으로 0.1센티 간격으로 우리 몸을 산산이 난도질 쳐버려요. 예를 들어서 고기다질 때 도마 위에 고기 놓고 난도질 치잖아요. 아예 죽이 되라고 다다닥, 난도질 칩니다. 옛날 여자들 빨래터에서 조를 짜서 빨래 두드리듯이 말씀으로 매일같이 우리를 두드려대면 우리는 도대체 ‘나’라는 것이 남지를 않아요.
그런데 내가 이렇게 피가 튀고 살이 찢어지면서 껍데기가 날아가면 그 안에 뭐가 들어 있냐 하면 하나님의 언약이 들어 있어요. 다시 말해서 25절에 “주를 알지 못하는 열방” 이라고 했는데 주님이 누군지가 나와요. 주님이 내 안에 차지하고 있어서 주님이 어떤 분이라는 것이 나오는 겁니다. 그러면 주님이 어떤 분입니까?
주님은 삶의 자리에서 언약을 내 놓는 분이 아니고, 우리 예수님은 자신의 죽음자리에서 비로소 생명이라는 새 언약을 내놓으신 분이 바로 주님이십니다. 제가 진도를 너무 빨리 나가버렸습니다. 그러니까 말씀으로 난도질 치는 이유가 뭐냐 하면, 우리 자리를 예수님이 죽었던 자리로 만들어내기 위해서 우리를 아예 도마 위에 놓고 칼질을 하시는 거예요.
갈라디아서 2장 20절, ‘이제 내가 사는 것이 아니고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산다.’라는 이 말씀이 이게 진정 현실이며 이게 실제 사건이라는 것. 사람들이 십자가 지고 갑시다, 할 때에 ‘이제 그만 죽었으면 좋겠다. 하나님 저를 데려 가이소.’ 이렇게 이야기 하는데 제가 보기에는 그 말이 맘에 안 들어요. 왜냐하면 지금 죽이고 있거든요.
지금 죽이고 있는데 본인은 그것이 실감이 안 나고, 자기 목숨이 떨어져야 그것을 죽은 것으로 보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지금 매일같이 주께서 말씀으로 때려주는데 우리는 그것도 모르고 생글생글 웃고 있다고요. 말씀이 들어오게 되면 들어올 때 마다 우리는 뭐를 느끼느냐 하면 나, 자아라는 것은 하나의 허상, 허구에 불과하고 실제로는 다른 힘에 의해서 내가 그때그때마다 말씀에 의해서 조립된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모든 것은 풀의 꽃같이 사라져도 말씀은 영원하다는 것을, 그 영원한 하나님의 언약이, 쉽게 말해서 주님의 죽음의 자리에서 올라오는 은혜가 우리를 현재 우리로 만들어내는 겁니다. 그것이 언제 실감나느냐 하면 우리가 말씀이 믿어질 때 그게 실감이 나요. 실제로 예를 한번 들어봅시다. ‘술 취하지 말라’라는 말씀이 나올 때 술을 끊은 사람에게는 그게 별로 실감나지 않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술 취하지 말라.’라는 것이 내 속에 주님의 음성으로 들려올 때 ‘아, 주님의 술 취하지 말라, 라는 명령에 의해서 지금까지 내가 별로 술을 안 좋아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는 겁니다. 그 순간 나는 뭐냐? 죽은 놈이 되어 버려요. 왜냐하면 나는 살아 있는 것이 아니라 죽어 있고 정작 살아 있는 것은 ‘술 취하지 말라.’가 나를 장악하고 있었던 겁니다.
또 ‘돈을 사랑하는 것이 일만 악의 뿌리다.’ 그것을 실천하면 안 됩니다. 그것을 실천한다는 자체, 이것은 오류에요. 그것은 큰 실수를 하고 있는 겁니다. 이런 말이 있어요. ‘거짓말 하지 않는 사람은 항상 오류를 범한다.’ 그런 아주 어려운 말이 있는데 완벽을 기하는 사람은 그만큼 오류를 범하는 거예요. 왜냐하면 ‘저게 진리다.’ 하는 그 순간부터 우리는 진리한테 욕 얻어먹게 되어 있어요.
‘저게 진리다.’ ‘아이고, 웃기고 있네. 그것은 진리 아니야.’ ‘아, 이쯤 하면 이제 진리다.’ 라고 하면 ‘응, 그것은 진리 아니야.’ 무슨 말이냐 하면 ‘나는 진리를 갖고 있습니다.’ 하거든요. 우리가 갖고 있으면 그것은 진리가 아니에요. 왜냐하면 우리는 진리를 가질 필요가 없습니다.
왜? 우리 자체가 이미 주님이 갖고 있기 때문에 주님 갖고 있는 이 몸으로 되었지 우리가 따로 또 진리를 갖고 있으면 우리는 ‘내가 갖고 있는 진리가 안 맞다.’고 우리는 실망하게 됩니다. 오늘 말이 왜 이렇게 어려운지 모르겠다! 쉽게 갑시다. 자, 홍해가 갈라진 것을 과학기재와 레이저광선과 여러 가지 기계를 동원해서 그걸 정리하면 그건 실수하는 거예요.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었다가 사흘 만에 부활한 것을 온갖 과학 기재를 동원해서 그걸 고고학적으로 증명해 내면 그 사람은 너무나 큰 실수를 하는 겁니다. 사람이 뭔가 지식으로 증명하고 과학으로 증명하겠다는 이 말은 ‘나는 아무것도 믿지 않고 있습니다.’ 하는 그 뜻이에요. 믿지 않고 있는 상태에서 믿어보려고, 뭐 하나 꼬투리 잡아서 믿어보려고 애를 쓰는 거예요.
그러니 그것이 얼마나 믿음이 없는 겁니까? 믿음은 믿음증거도 주께서 주시는데 구태여 내가 믿음증거를 손으로 잡고 장악해서 ‘믿을 것 없나? 아, 이러니까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은 것이 맞아.’라고 잡아야 될 정도로 그 사람은 그만큼 허접합니다. 그 사람은 아무것도 믿는 게 없다는 거예요. 사람이 믿는 게 없으면 꼭 자기를 믿게 되어 있어요.
자기가 믿음의 대상이에요. 다시 이야기할게요. 이방인들은 하나님에 대해서 예수에 대해서 연구해서 믿으려고 합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의 십자가가 비밀스럽지 않아요. 신비롭지 않아요. ‘그까짓 거 뭐, 나중에 갈릴리 가서 파내면 십자가 나오겠지.’ 방사성 동위원소로 측정해서 ‘이게 예수님 당시의 십자가다.’ ‘아, 그렇구나. 예수님의 십자가 맞구나. 그게 뭐가 어렵나?’ 이러거든요.
그러니까 그 사람들은 전혀 신자가 아닌 거예요. 창조과학회에 속한 사람들을 신자라고 볼 수가 없습니다. 성경을 믿으면 되는데 왜 그것을 과학적인 증거로 바꾸어서 그래서 사람들에게 납득을 시키려고 애를 쓰느냐, 이 말이지요. 그런 짓을 하는 자체가 본인이 신비롭게 여기는 것이 없기 때문에.
쉽게 갑시다. 자기가 살아 있다는 것을 예수님이 부활한 만큼이나, ‘지금 내가 살아 있다니! 내가 예수를 믿다니!’ 이 자체를 신비로운 하나님의 선물로 왜 못 믿느냐, 이 말입니다. 아브라함은 자기 아내가 애 낳는 것도 신비로웠어요.
사라가 애 낳은 것만 신비로운 것이 아니라 자기 이름이 아브람에서 아브라함으로 옮겨진 것도 신비롭고 더 나아가서 자기가 이삭을 바치는 것도 신비롭고 더 나아가서 내가 여기 존재한다는 것 자체가 하나님의 작품인 것을 비로소 알고 자기 자신에 대해서 신비롭게 여겼어요. 이것을 신약에서는 ‘네 몸은 이미 네 것이 아니고 예수님의 것이다.’ 합니다. 그래서 ‘창기하고 놀아나지 말라.’ 왜? ‘네 몸은 그리스도의 몸이지 창기의 몸이 아니다.’ 이렇게 되는 겁니다.
그럴 때 ‘아, 창기와 합하면 창기와 한 몸 되는구나.’ 하는 말씀이 온몸으로 전율과 함께 느껴지는 거예요. 그런데 그걸 모르면 ‘저, 예수님! 저는 창녀촌에 한 번도 안 갔습니다.’ 하는데 그렇게 말씀을 지키라는 말이 아니고 이미 말씀이 우리를 지켜버렸어요. 내가 지키는 것이 아니고 말씀이 내 몸을 창기와 하나 될 수 없는 몸으로, 말씀이 이미 와서 턱 하니 ‘너는 이미 말씀 지킨 자’로 작품을 만들어 놓은 거예요.
어렵게 할 것이 없이 이 말 하면 제일 쉽습니다. 조각가가 자기 조각품을 만들어놓고는 ‘어이, 똑바로 서있어라. 다른 사람 보기에 똑바로 서 있어라. 너 오줌 누러 가도 안 된다.’ 이런 소리 하는 조각가 봤습니까? 자기가 만들어 놓았으면 어떤 관람객이 와서 ‘야, 이놈 참 잘생겼다.’ 하면 그 옆에 있던 조각가가 ‘제가 조각했습니다.’ 이래 되어야 되지요.
그런데 조각이 ‘제제 제가 만, 만드르, 만들었습니다.’ 이런 조각품은 없잖아요. 왜 사람은 자기가 안 만들었는데도 왜 24시간 자기자랑밖에 모르고 자기의, 자기공로, 자기잘난 것밖에 모르는지 마네킹 보다 더 못해요. 마네킹은 입혀 주는 대로 곱게 입기나 하지요. 이것은 만 날 자기 인생을 씹어요. ‘하나님, 왜 나는 부잣집에서 안 태어나게 하시고, 나는 왜 태어날 때 쌍 커플도 안주시고, 나는 키가 작아서 루즈한 인간이 되고 또 어쩌고….’
그러니까 전혀 자기가 신비롭지 않아요. 그러니까 부엉이 바위에서 뛰어내려서 죽고 그렇게 하지요. 인간은 얼마나 어리석은지…, 인간의 선택은 없습니다. 인간은 선택받은 것만 선택하게 되어 있어요. 그게 무슨 선택입니까? 인간은 선택받은 채로 선택하게 되기 때문에 그것은 선택이 아니지요. 평생을 살고 죽을 때 되어 보세요. 정말 우리가 신비롭다는 것.
그래서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와 이 열두제자들은 자기 자신을 통해서 자기신분을 정리한 것이 아니고 ‘내가 이렇게 복음을 전하다니.’라는 것을 통해서 예수님의 신비를 세상에 복음이라는 이름으로 전했습니다. 돌에 맞는 것은 아무 문제 안돼요. 돌 던진다고 그 돌에 깨지는 신비는 신비도 아닙니다. 성령의 충만을 받아버리면 돌에 맞아 죽는 것은 아무것도 아니에요.
‘예수님이 부활해서 살아계시고 하늘나라에 계시고 다시 오십니다.’라는 이 사실이 이 몸을 가지고 왕왕, 메아리치면서 확성기처럼 외부에 퍼진다는 그 사실에 본인이 본인한테 놀라는 거예요. 어떻게 내가 복음을 믿게 되었느냐, 이 말이지요. 지금 선지자가 자기 개인의 의견을 말하는 게 아닙니다. 선지자는 이런 이방인들에 대한 저주와 그러면서도 자기백성에게 징벌하는 그 두 가지 안 맞는 이야기가 어떻게 하나로 이어지는가?
선지자, 특히 예레미야 같은 경우는 어디서 만나느냐 하면 하나님 본인이 죽는다는 겁니다. 이것도 참 신비롭지요. 죽는 것은 사람이나 죽지 신이 왜 죽습니까? 그런데 하나님 자신이 죽는 자리에 있어요. 하나님이 안 죽으면 사람이 못삽니다. 사람이 살수가 없어요. 이삭이 안 죽으면 아브라함이 구원을 못 받습니다.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오직 진리는 하나밖에 없습니다.
뭐냐 하면 ‘하나님이 죽는다는 것’ 하나님이 죽는다는 것을 그릇에 담는 사람만 영원히 영생 얻는다는 것, 그것 외에는 성경에 아무것도 없습니다. 하나님이 죽어야 비로소 생명이 나오고 그 하나님의 죽으심만을 담는 그릇되는 사람만 영원히 사는 것, 이것 전해서 교인 다 나가고 목사 자기 부인하고 이혼해도 할 수 없어요. 이것 밖에 없습니다.
남편이 교회 못 나와서 복음 못 듣겠다, 그런 핑계도 통하지 않아요. 남편이 교회 나오면 교회 나오겠다는 것은 또 자기 눈으로 확인하려고 하는 거예요. 이것은 자기 선택을 또 하는 겁니다. 이것은 자기 자신이 신비롭다는 생각을 못하고 내가 주인공이 되어서 뭔가 자기가 신비를 캐내고자 하는 그런 시도밖에 안됩니다. 그것은 자기가 산산조각 깨지지를 않아서 그래요.
말씀에 의해서 깨져버리면 자기 안이 하나님이 죽으신 빈 무덤이 돼야 돼요. 빈 무덤에서 왕왕 울려야 돼요. 이 몸통 자체가 예수님이 누웠던 그 빈 무덤이 돼야 돼요. 우리가 어디에 가는 것은 예수님의 빈 무덤이 돌아다니는 거예요. 그러면서 성령으로 이야기하기를 ‘이 몸이 사는 것은 내가 사는 것이 아니고 이 무덤 자체가 주님의 무덤이기 때문에 나는 살고 있습니다.’라는 말을 외쳐야 된다 이 말이지요.
몸통 자체가 왕왕왕, 울리는 저 울진 석류 굴 돼야 돼요. 분명히 있는데 그 안은 공백, 텅텅 비어 있는 거예요. 그 공백은 비어 있어야 돼요. 왜? 비어 있어야 그 껍데기가 신비가 되거든요. 만약에 내 것을 채워놔 버리면 그 때부터 신비가 사라지고 ‘이것은 내가 아는 것’이 되기에 그 아는 것부터 해서 구원을 받으려고 시도를 하게 돼요.
‘하나님 그 다음에 무슨 말씀 지키면 구원받습니까? 어떤 행함을 하면 구원받습니까?’ 하나님은 이미 구원해놓고 그 안에 예수님의 것을 담는데 우리는 한 걸음 두 걸음 성화 하겠다고, 거룩해 지겠다고, 새 생명 주님을 본받겠다고, ‘여기까지는 내가 아는 것이고 그 다음에 신비로운 것을 한 번 도전해 봐?’ 만 날 이렇게 자기가 자기 관리하고 있습니다.
그게 바로 주님의 죽으심이 없는, 그러니까 주를 알지 못하는, 그리고 주의 이름으로 기도할 수도 없는, 기껏 주의 이름으로 달아는 놓았지만 사실은 자기이름으로 기도하는, 자기 행함으로 기도하는 사람의 특징입니다. 거리의 빈 드럼통이 굴러갈 때 모든 사람들이 그 빈 드럼통을 보지요. 이 빈 드럼통 같은 사람이 바로 예레미야입니다.
19절, “슬프다 내 상처여 내가 중상을 당하였도다.” 예레미야가 이런 소리를 합니다. 자기는 죄 지은 것도 없는데 백성들의 아픔에 같이 하고 백성들의 아픔을 더 파보니까 백성들과 함께 있는 하나님의 아픔이에요. 하나님의 아픔이 곧 백성의 아픔이 되고 하나님의 죽음이 곧 백성들의 죽음이 되고 백성의 아픔과 죽음이 곧 예레미야 자신의 중상이 되고 상처가 되는 겁니다.
예레미야의 상처가 장차오실 예수님의 십자가상처와 맥락이 같아요. 왜냐하면 같은 자리에 서 있기 때문에. 그 자리 바깥으로 안 나갔습니다. 같이 예수의 자리에 있기 때문에. 장차 오실 메시아의 아픔에 예레미야가 함께 있습니다. 그러니까 남들 보기에는 하나의 빈 드럼통이에요. 하지만 예레미야 드럼통 속에는 예수님의 아픔과 죽으심, 십자가가 그 안에 들어 있습니다.
그래서 말합니다. ‘하나님의 아픔에 근거해서 우리 백성을 잘 인도해 주옵소서.’ 그게 23절에 나오지요. “여호와여 내가 알거니와 인생의 길은 자기에게 있지 아니하나니 걸음을 지도함이 걷는 자에게 있지 아니하나이다.” 잠언서 16장 9절에 나오는 말씀이거든요. ‘사람이 아무리 자기 길을 계획할지라도 일을 성취하시는 분은 여호와’라고 했습니다.
잠언 16:9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 걸음을 인도하는 자는 여호와시니라.”
그 여호와가 누구겠습니까? 바로 예수님이 그 사람 속에 들어가서 그 사람으로 하여금 예수님을 증거 하는 그 길로 인도하는 겁니다. 심방 가서 이 대목 끄집어 내놓고 ‘일단 기도해 놓으면 주께서 알아서 소원성취 해 주신다.’는 이런 식의 성취는 성경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종말은 이미 우리 안에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죽으심이 이미 종말입니다. 우리는 이미 하나님의 죽으심 그 바탕위에 영생을 갖고 있는 빈 드럼통 같이 살아가고 있는데 세상 것, 부귀영화 그게 무슨 축복입니까? 주와 함께 영생을 얻는 것이 바로 영원한 축복입니다.
그러고 난 뒤에 ‘그런 징계 가운데서 오직 이스라엘만이 여호와를 아니까 드럼통 바깥에 이제는 주를 알지 못하는 자에게 저주를 퍼부어서 진짜 이스라엘만이 여호와를 아는 백성인 것을 세상이 알게 하옵소서.’ 이게 오늘 본문의 내용입니다.
기도 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안에 예수님의 십자가가 과연 있습니까? 있다면 그 십자가에서 품어져 나오는 구원의 능력이 우리 자체를 신비롭게 복음을 증거 하는 사람으로 만들었음을 저희들이 믿게 하여 주시옵소서. 이제는 말씀을 믿게 해주시고 우리가 확인한 것, 우리가 검증한 것 믿지 않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