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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

20091110b 부산강의 : 침멀리[구약신학]01-머리말자유게시판미가

20091110b 부산강의 : 침멀리[구약신학]01-머리말

이름 : 한윤범(IP:119.192.174.148)

20091110b 부산강의 : 침멀리[구약신학]01-머리말

(강의:이근호 목사)

시작합니다.

신명을 거론할 때 하나님의 이름이 있다는 개념에 대해서 한국교회나 신학계에 있어서 도대체 그래서 어쨌단 말인가? 사람들은 이런 약점이 있어요. 이름으로 구원한다 하니까 예수의 존재를 인정하면 이름 부르는 것하고 대체된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참 어렵다, 정말.

예를 들어서 어떤 남자가 있다면, 어떤 여자가 아무개 씨라고 이름을 부르잖아요. 부를 때 이 여자는 이름을 부르는 게 아니고 그 사람을 불렀다고. 그 사람의 존재를 불렀죠. 그런데 하나님의 구원은 그게 아니에요. 이름을 불러야 된다고. 이름을 부른다는 말은, 이렇게 이스라엘이 없으면 이름이 안 돼요. 이름을 불러야 될 백성이 없으면 이름이 없습니다.

이건 뭐냐 하면, 존재가 있고 그걸 관계라 해요. [피]라는 책에 있죠. 어떤 집에 자기 형이 결혼했는데 가보니까 형수가 있더란 말이죠. 시동생 입장에서. 형수란 관계가 처음 생기죠. 형이 결혼했는데 형수가 생긴 거예요. 형수 생기기 위해서 형이 결혼한 건 아닌데 가다보니까 형수가 생긴 겁니다.

그래서 이름을 이야기할 때 제일 좋은 게 뭐냐 하면, 사람은 이름을 부를 때 하나의 개별체, 개체라 하는데 개별자로 보는데 그게 아니고 이름은 하나의 관계의 수건으로 덮어버린다고. 먹구름처럼 덮어버리죠.

귤 4개 있는데 수건을 덮어버리면 수건 안에 뭐가 있습니까? 귤 4개 들어있는 게 아니고 귤이 들어있어요. 갑자기 4개가 뭐로 변했습니까? 육적 본질이라 하는데 귤이라는 하나의 성질로 변했어요. 그러면 수건은 뭘 드러내기 위해서? 하나, 하나를 집합으로 만들기 위해서 귤이라는 한 덩어리를 만들기 위해서 이름이 와버린 거예요.

보통 인간 이름은 한 사람이, 이장우 목사님 하나만 부르면 되잖아요. 그런데 이스라엘 이름이 등장한 것이 언제냐 하면, 집단을 이룰 때 이름이 등장해요. 그러면 이 이름은 사적으로 부를 수 있다, 없다? 못 불러요. 그러면 집단이 부를 수 있느냐? 그것도 안 돼요. 그럼 뭐냐? 이름은 이름을 부를 수 있는 관계, 하나님이 제시한 수건 같은 관계가 임해야 비로소 이름을 압니다.

이것 믿을까, 어느 것 믿을까? 이런 법은 없어요. 부처 믿지 말고 나는 예수 믿을래. 이런 이름 없습니다. 이름을 부르려면 내 자체가 이름에 이미 종속된 그 이후에야 이름을 부를 수 있어요. 예수 그리스도에게 종속되고 예속된 그 이후에나 제대로 파악해서 이름을 부를 수 있습니다. 내가 주의 이름을 부르기 위해서 주의 성령이 임했도다. 다른 이름으로 구원받을 이름을 준 적이 없다는 것을 알기 위해서 이름을 주셨군요. 이렇게 되는 겁니다.

그렇지 않고 길에 가는 사람 부르면 내가 불렀어요. 전부다 내가 주체가 되어서 부르잖아요. 그런데 이름을 부를 수 있는 주체는 우리가 아니고 우리를 부정하고 따로 주의 이름 따로 주시는데 그 이유가 뭐냐? 네가 나와 붙인 관계는 네가 만든 관계가 아니고 내가 이름과 더불어 너에게 덮쳐버린 새로운 관계 속에 놓여있음을 알려주기 위한 총괄적 의미가 이름이라는 겁니다. 그래서 옛날이나 지금이나 주의 이름으로 구원받아요.

‘주’라는 것은 없던 백성도 만들어내 가면서 주를 믿게 하는 거예요. 그냥 우리가 주를 믿으면 이 주는 이방신입니다. 그러나 주께서 만들어주신 사람에 의해서 주어진 주의 이름은 새로운 관계가 있는데 그건 뭐냐 하면, 나는 주님께 소속된 주님에게 예속된 그러한 백성이라는 겁니다.

예를 봅시다. 출애굽기 13장 1절, 2절 누가 읽어보세요.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일러 가라사대 이스라엘 자손 중에 사람이나 짐승이나 무론하고 초태생은 다 거룩히 구별하여 내게 돌리라 이는 내 것이니라 하시니라”

‘이는 내 것이니라’ 교회 다니는 사람 중에서 이것 아는 사람, 참. 사람이 이러한 하나님의 덮치심 없이 그냥 예수를 믿어버리면 예수가 내 것 돼요. 그리고 다 써먹었다 싶으면 갖다버리면 돼요. 한 십년 간 당분간 교회 안 나오면 알아 두세요. 끊고 뭐고 자기한테 선택권이 있어요. 그걸 자유의지라고 해요. 그냥 쉽게 말해서 자유. 그렇게 이야기합니다. 신을 믿든 내가 믿든 간에.

자유의지 안에 선택권이 들어있고 이미 선택하면서 선택 안 하고 싶은 것과 선택하고 싶은 것이 구분 지어서 선택하게 돼있고 그렇다면 선택하는 그 순간, 저것은 왜 선택을 안 해야 될 이유가 나름대로 이미 구조화돼있죠. 내 안에 정신적으로 짜여 있죠. 서랍 있죠. 이건 손수건 넣는 서랍, 이건 양말 넣는 서랍 있죠. 이미 인간 내부에 주체가 구조화돼있다 하는 겁니다.

그걸 라캉은 언어라 합니다. 인간은 말을 내뱉을 때에는 자기 내부에 있는 정신적인 구조를 남에게 강요, 명령하게 된다. 모든 인간 언어는 명령인데 왜냐하면 너는 무조건 내 구조에 무릎 꿇어야 돼. 너는 무조건 내 주체의 구조에 편성돼야 돼. ‘주여’라고 부르는 무슨 말이냐? 하나님이건, 예수님이건 간에 내가 생각한 내가 기대한 내가 예상한 내 인생 틀에 당신도 무릎 꿇어 이런 뜻이에요.

그러니까 세 번씩이나 부른다는 것은 강제성을 띠고 있죠. 더욱더. 무조건 복 줘. 그런데 ‘복 줘’ 할 땐 뭘 계산했다? 이미 ‘이런 것은 저주입니다.’라고 계산했죠. 그래서 복 줘 할 때는 저주는 주지 말라는 뜻이에요. 그전에 이미 뭐가 복이고, 뭐가 저주고 이미 구분돼있죠. 뭐가 저주입니까? 나를 불편하게 하면 저주고, 나를 편하게 하면 축복이 되죠. 예를 들어서 내 애가 수능 점수를 많이 받으면 축복이 되고, 옆집 애가 수능 많이 받으면 저주가 되죠. 이게 인간들이 교회 오는 이유가 거기 있습니다. 그래 놓고 주의 이름을 부르죠.

그런데 출애굽기 13장 2절에 보면, 이미 너는 내 것이라 했습니다. 내 것인데 근거가 있죠. 무슨 근거입니까? 그 근거를 사건이라 하죠. 무슨 사건이죠? 출애굽 사건. 첫 번째 유월절 사건을 일으키면, 정리해봅시다. 유월절 사건을 누가 일으켰다? 주의 이름으로 일으키면 거기서 주의 백성이 나오는데 주의 백성은 단독적으로 존재할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못하고 주의 백성은 누구 소속이다? 누구 것이다? 주의 것이 되죠. 왜? 장남들이 다 주의 것이면 밑엔 다 주의 것 아닙니까.

그렇다면 앞으로 이것이 이 유월절 사건으로 해서 주의 백성 생기면 이 하나가 뭐가 되느냐 하면, 다음에 이스라엘 밀어주는 하나의 보다 범위가 넓어진, 심화된, 더 깊이 있는 사건이 됩니다. 이 사건에 기준해서 그 다음에 주께서 또 일을 나서시면 이 사건에 해당되지 않는 것은 추방이 되죠. 그래서 주님은 뭘 하느냐? 약속으로 자기 백성이라도 계속해서 발길로 차고 그리고 기생 라합은 이방인임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됩니까? 이 사건에 의해서 이방인이 이스라엘에 편입되죠.

이스라엘 중에서 발길로 찰 사람은 차고, 들어오는 사람은 들어오고, 발길로 차고 들어오고 계속 그 작업이 일어나는 이유가 뭐냐 하면, 주의 일은 사건인데 이 사건은 그 사건에 해당되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늘 새롭게 정립이 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렇게 정립해나가면 결국 무슨 정립입니까? 주의 이름이 점차로 구체화되겠죠. 결국은 구약은 주님의 이름이 주로 구체화되는 여정을 말해줍니다. 주께서 주에게 주로 말미암아. 남는 것은 주님밖에 남지 않고 그리스도 몸밖에 남지 않죠. 이게 신약에만 있는 것이 아니고 구약 때부터 주의 이름으로 해왔다는 거예요.

이러한 주님의 사건을 인간이란 이름은 누구 입장에서 자꾸 오해를 합니까? 인간 입장, 내 입장에서. ‘아이고, 주님께서 우리 큰아들 살렸구나.’라고 찬양했던 그들이 광야에서 데모하잖아요. 이게 왜 그래요? 자꾸 오해하는 거예요. 애굽에 있을 때가 좋았다 하면서. 결국은 주의 이름을 부르면서 너는 내 것이라고 규정한 일방적인 사건 있잖아요. 그 사건에 우리의 신체가 우리 힘으로 부합될까요, 안 될까요? 우리 힘으로 부합 안 됩니다.

왜냐하면 우리 신체는 아무리 용을 써도 결국 주의 이름을 빙자해서 내 이름 굳히기에 내가 얼마나 하나님인 것을 방향을 그리고 틀어버려요. 아브라함도 마찬가지, 이삭도 마찬가지, 어떤 인간도 마찬가지입니다. 끊임없이 주의 이름이 새로운 사건으로 간섭하고, 간섭하지 아니하면 어떤 인간도 주의 양으로써 목자가 인도하지 않으면 주의 나라에 갈 수 없어요.

아까 한 것 다시 해봅시다. 계란이 껍질이 있지요. 껍질은 어디서 만들어내요? 속에서 만들어내지요. 그럼 껍질이 이뤄지지요. 그 껍질은 누가 공격한다? 주님이 공격하면 껍질은 계속 깨져야 되죠. 왜 자꾸 깨집니까? 나는 복음 아는데. 나 십자가 알고 언약도 아는데. 이만하면 구원받았는데 이만큼 아는데 왜 깨져야 돼요? 앞에 이게 주체가 되고 주체는 고정화 돼요. 고정화 되면 이름이 붙는다고. 예수를 믿는 게 아니고 예수 믿는 나를 믿는다니까요.

그리고 아까 이야기했잖아요. 감사할 때는 감사하는 나도 쳐버려라. 내 딸이 신종플루 그것도 쳐버려라. 그게 은혜가 올 때 주의 이름이 올 때 주님만 있으면 주의 은혜만 있으면 저는 그 긍휼과 자비만 있다면 우리는 자비와 긍휼의 속성이 보여주는 하나의 액체가 되는 겁니다. 껍데기가 딱딱한 고체인데 액체는 기울이면 저쪽으로 흘러내려가는 거죠. 어제도 액체였고 오늘도 액체인데 이 건방떠는 우리들은 그 액체를 매일같이 딱딱한 고체로 만들어서, ‘주여 이만하면 됐습니다. 오늘밤에 죽으면 좋겠는데.’ 앞으로 너 할 것 많아. 또 내일 되면 흘러가야 돼요. 또 해야 돼요. 이만하면 나는 구원됐는데 왜 자꾸 고생시킵니다. 너는 스데반 집사처럼 돼야 돼. 되기 싫은데요. 안돼. 해야 돼. 흘러가는 속성이다.

그래서 이걸 정리하면, 주의 이름은 우리에게 나타날 때는 반드시 우리의 이름과 병행해서 나타납니다. 우리 이름은 만날 깨져야 되고 깨지게 하는 그 능력을 따라가 보면 거기에 주의 이름이 조금 전보다 더 구체화되고. 지난 사건보다 좀 구체화되고.

지금까지 쉬웠는데 어렵게 해보겠습니다. 구약에서 하나님 나라는 뭡니까? 참 이 주제는 신약, 구약학자들 얼마나 달려들었습니까? 구약에서 하나님 나라라는 것은 안에 뭐가 삽입되는데 일단 점선으로 봅시다. 신약의 하나님 나라는 실선이니까. 점선으로 보게 되면 점선 안에 뭔가 계란의 껍질이죠. 속에서 밀어 올라오잖아요. 그럼 여기 율법이 주어지죠. 바깥의 점선이 점점 언약공동체, 율법적인 나라가 되죠.

그런데 율법적인 나라가 모세 이후에 다윗 때는 하나의 인격으로 바뀌죠. 다윗은 왕이니까. 율법을 왕이 거두죠. 왕 하나가 율법을 완전하게 지키면 다윗의 자리, 그 의미를 아는 사람만의 다윗의 나라의 통치의 혜택을 입게 돼있어요. 그게 성전이고. 이럴 때 구약에서 하나님 나라라는 것은 뭐로 결정하느냐 하면, 이러한 인간적인 형태에 보통 나라에 안에 어떤 내용이 삽입되느냐에 따라서 구약의 형태가 주어지게 되겠죠.

그러면 신약에 와서 예수님이 메시아다, 다윗의 자손으로 왔다는 이 말은 결국 율법도 완성한 어떤 분, 임금님으로써 점선으로 돼있는 이 부분이 하나님 나라 실선으로 바뀌겠죠. 그 다음에 이 율법이 들어올 때 그냥 들어온 게 아니고 율법을 지키면 축복을 받고, 만약에 일점일획이라도 율법을 안 지키면 저주를 받는 이 기능이 다윗을 거쳐서 예수 그리스도에게 와버리면 예수 그리스도의 하신 일을 인정 안 하면 저주를 받고, 안에서 개인적으로 어떤 짓을 하든지 간에, 왜냐하면 하나님 나라는 다윗이라는 개인으로 몰리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의 하신 그 공로를 믿으면 축복을 받는 그러한 작용이 완료된 상태에서 이뤄진다면 그것이 이미 하나님 나라가 왔다는 거예요.

이걸 줄여버리면 심판 기준이 확정되어서 실시될 때 하나님 나라가 왔다. 무엇이 나쁜 것이고, 무엇이 좋은 것인지 그 기준이 이미 완전히 결정나버리면 그걸로 심판이 감행될 기준자체가 결정됐기 때문에 그 다음부터는 축복 받을 거냐 저주받을 거냐 하는 건 누구 소관이냐, 주체가 누구냐 하면 다윗이니까 다윗 자손이니까 그분이 이미 일을 실시하게 되면 하나님 나라가 지금 실시되고 있는 거예요.

그래서 하나님 나라는 뭐냐 하면, 주체 확정이에요. 그 주체 되는 분이 확정되었으면 이미 하나님 나라가 온 겁니다. 그렇다면 주체가 있다는 말은 어떤 분이 있기 때문에 이름이 있죠. 그래서 주의 이름을 부른다는 것은 ‘심판을 하실 심판주는 이미 나사렛 예수라는 분으로 하나님께서 확정, 결정 났습니다.’라는 것을 인정하는 그 사람이 주님의 하신 일의 혜택을 공로를 은혜를 입고 있는 주의 백성 안에 포함이 된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이 자기의 행위라든지 세상 돌아가는 것에 대해서 두려워하거나 자기를 부끄러워하거나 염려할 이유는 하등에 없습니다. 그냥 자기 주체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선포하고 복음을 전파할 뿐이죠. 신종플루나 세상사는 것 하고 걱정할 필요가 아무것도 없지요.

왜냐하면 세상이 누구 세상이에요? 지금 하늘나라 세상이기 때문에 거기에 백성으로 합당하게 살면 될 뿐이에요. 따로 떼어내서 내 세상 만들 이유가 없다니까. 내 인생 만들 이유 없고, 내 프로젝트를 할 이유 없다니까. 이미 벌어지고 있는 일에 대해서 그냥 세상이 이렇습니다, 현실이 이렇습니다 하고 이야기하면 그것이 하늘나라 백성으로서 할 일이 된다 이 말이죠.

하늘나라를 찾으려고 할 필요 없이, 찾는다는 자체가 수상해요. 내가 있는 그대로 하늘나라 때문에 여기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익히 알면 앞으로 우리가 어떻게 살 것이냐는 것은 이야기 안 해도 쉽지요. 예수님께서 심판하고 계시는구나.

‘김 과장, 바이어 만나는 것 서류 준비됐어요?’ ‘서류 준비 되나 안 되나 주께서 심판하십니다.’ ‘아줌마, 간재미 두 개 얼마입니까?’ ‘두 개에 삼십이 되던 오십이 되던 주께서 심판하십니다.’ 이게 현실을 보는 사람, 참 살기 쉽죠. 현실을 알았으니까.

그것도 요만큼 아는 게 아니고 다 알아버렸으니까. 그 현실을 내가 알았다고 한다면 따로 떨어져 나오기 때문에 골치 아파요. 내가 알 때와 안 알 때 오후 2시는 알았는데 오후 3시 안 알면 고민이 돼요. 자기 자신을 빗금 쳐버리면 내가 아나, 모르나 상관없이 모든 게 다 돼버렸으니까.

제가 왜 이런 이야기하느냐 하면, 그런 관점에서 구약을 보면 구약이 다 보인다 이 말이에요. 구약전체가 다 보여요. 결국 모세가 느꼈던 것 하고 모세를 원망했던 백성들하고 차이점이 뭐였습니까? 모세는 하나님과 함께 있는 것이 하나의 현실이었는데 광야에서 모세를 따르는 백성들은 자꾸 모세의 현실을 따내려고 그걸 알아차리려고 애썼다에요. 그러면서도 기본은 뭡니까? 애굽의 현실도 현실인데. 이래 보는 거예요. 그러나 모세는 애굽의 현실까지 지금 광야에 있는 현실 안에 이미 애굽에서 탈출한 현실도 다 포함돼있기 때문에 지금이 현실답다 이 말입니다.

지금 왜 만나가 주어지느냐? 만나가 주어지는 것이 옛날 애굽과 무관한 게 아니고 옛날에는 내 노동의 힘으로 살았는데 지금은 현실이 바뀌어서 그냥 거저 주시는 만나로 산다. 과거와 다 연계돼있는데 백성들은 뭐로 봅니까? 역시 애굽에 있을 때는 부추도 있었고, 수박도 있었고, 파도 있었고, 정력에 좋은 것도 있었고. 자꾸 분리해서 보는 거예요. 옛날 주체에서 느꼈던 계란 껍질에서 올라왔던 그 현실 그대로 유지하고 있고 또 모세가 이야기하니까 긴가민가 한번 믿어볼까 하다가 나중에 복 주면 믿지. 만날 따지는 거예요.

다시 말해서 모세 현실하고 자기 현실을 잡아당겨서 모세 현실에다 접촉을 해보려고 한단 말이죠. 대표적인 사람이 미리암 아닙니까. 모세가 구스 여인을 아내로 삼았다고 비방을 하니까 하나님께서 미리암을 문둥병 걸리게 했죠. 이게 바로 문둥병 됐는데 모세 때문에 지금 멀쩡하잖아. 현실 속에 집어넣었는데 미리암은 그게 아니고 현실을 모세 너만 돗대가? 하고 모세하고 자기 현실하고 자꾸 따로따로해서 그냥 모세를 이해하려고 애쓰고 있다고. 백날 해봐도 이해 안 돼요. 덮쳐야 돼요.

그런데 모든 사태는 모세가 이야기한 대로 문둥병도 걸리고 모세가 이야기한 대로 세상이 그렇게 돌아갈 때 그들은 결국 광야에서 만나를 통해서 자기를 낮추어야 되죠. 그게 만나를 주신 의미가 마음을 낮추어서 말씀에 약속에 입각해서 살라는 거예요. 누가 그렇게 되느냐, 안 되느냐가 문제가 아니고 그게 구약에서의 하늘나라 현실이 그런 식으로 모든 사건을 몰고 가고 끌고 가고 있다는 그걸 제가 이야기하는 겁니다.

여기 20페이지에 보면, “그 이유는 비 이스라엘인이 함께 대화하고 있기 때문이다.” 침멀리 책이 중요한 책이란 이유가 또 나와요. 뭐냐 하면 하나님께서 이름을 주신 것은 대화, 요새 말로 소통. 대화하기 위함인데 욥기 같은 경우는 ‘엘로아’, ‘솨다이’라고 한 것은 욥이 비 이스라엘인이기 때문에 이방인들이 하는 이름으로 했다고 보는 거예요.

그런데 제가 하는 것은 20페이지 밑에서 여섯 번째. “구약인들에게 있어서 ‘이름’은 마음대로 바꿀 수 있는 상표 이상의 중요성을 가지고 있었다. 이름을 통하여 그 이름을 가진 자와 교제를 하고 간청할 수도 있었다. 여기에서 두 가지 문제가 제기된다. 구약 신앙은 어디서 그들의 하나님의 이름을 알게 되었을까?”

여기서 침멀리가 상당히 중요한 이슈를 제시했어요. 이름이 없이는 뭐가 안 된다? 교제가 안 된다는 말을 이렇게 함부로 할 수 있느냐 하는 겁니다. 왜냐하면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일 때는 그들이 전능하신 하나님이었지만 여호와 이름을 몰랐음에도 불구하고 교제가 됐잖아요. 그런데 이름을 준 것이 대화하고 소통하기 위해서 이름을 줬다는 말은 결국 침멀리가 뭘 이야기하느냐 하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일방적으로 이해하는 시대가 끝나고 하나님도 이스라엘을 다루지만 이스라엘이 필요할 때마다 하나님 이름을 불러내서 하나님의 뜻을 묻고 할 수 있는 그러한 관계를 형성했다 이래 보는 거예요.

그 말은 맞아요. 왜냐하면 이름을 가지면 안 되고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 둘 다 하나의 어디에 속해 있다? 주의 이름에 종속이 되는 겁니다. 주의 이름은 바로 사건을 만들어내요. 침멀리는 말을 이렇게 하면 안 되고, 하나님이 날마다 사건을 주시는데 그 사건이 일어날 때만 이스라엘은 비로소 여호와 이름을 불러내는 거예요. 그렇지 않고 사건 없이 부르는 것은 그냥 망령되이 부르는 것이고.

반드시 이스라엘이 요청하는 것이 의미가 있으려면 그전에 사건이 일어나야 됩니다. 그 사건 중의 하나가 압박을 가합니다. 애굽인을 통해서 히브리인들을 압박을 가할 때 그때 애굽에 있던 히브리인들은 누구 이름을 부릅니까? 옛날 조상 때 불렀던 그 신을 아브라함과 이삭의 하나님을 부르면서 도움을 요청하잖아요.

도움을 요청하는 그 내용은 애굽에서 탈출은 아닙니다. 그냥 자기 주체가 힘들게 되었다고 요청할 뿐이잖아요. 뿐인데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자기 생각밖에 없는 그것을 주님의 이름이 만드는 사건 속에 그걸 포섭을 시켰다는 사실이 중요합니다. 철딱서니 없는 것들을 불러서 정작 하나님이 하시고자 하는 자기 이름의 실체를 드러내는 하나의 장으로써 환경을 마련해나가는 겁니다.

그런데 아까 주의 이름을 뭐로 보자? 수건으로 보자. 처음에 수건으로 보면 물병 덮이죠. 물병시대 끝나고 그 다음에 녹음기 덮이죠. 그 다음에 마이크 덮이죠. 마지막에 신약시대 성경 아닙니까. 그런데 제가 비유가 잘못된 것은 물병했죠. 그 다음에 녹음기 거치잖아요. 그런데 실제는 물병도, 녹음기까지도 다 포함시키고. 신약 오면 구약전체, 창세기까지 끄집어서 창세기 1장부터 다 끄집어내서 신약에 요한복음 같은 경우에 1장 1절부터 한다 이 말이죠.

손수건이 뭐라고요? 이게 이름인데 이름이 뭘 일으킨다? 지상에 먹구름이 비를 내리듯이 사건, 사건을 일으키게 되면 인간들은 멋도 모르고 주의 이름을 부르면서 요청한다 이 말이죠. 그런데 그 요청하는 중에서 새로운 주의 이름의 관계가 구체화되죠. 점점 더 구체화돼요. 주의 이름이.

그 다음에 21페이지 봅시다. 그래서 주의 이름이라 하는 것은 인간이 부르는 이름과 하나님이 인간을 부르는 이름을 통해서 점점 자기를 나타내는 이름이 따로 있다. 사람들은 주의 이름을 부를 때 ‘주의 이름은 여호와죠’라고 부르는데 여호와를 나중에 불러도 여호와께서 요청을 안 하고 다른 사건을 보니까 같은 이름을 불러도 포함되는 내용은 인간들은 자꾸 스스로 부정해요. 내가 지금까지 알았던 주의 이름이 그게 다가 아니고 자꾸 새로운 주의 이름이 주어지는 겁니다.

오늘날 성도도 마찬가지에요. 성도가 십자가를 알지만 십자가 내용을 몰라요. 2009년도 십자가 하고 2010년도 달라요. 하지만 십자가, 십자가 부르면 십자가 사건이 자꾸 덮치면서 내가 그만큼 주의 피의 공로가 이렇게 깊고 넓다는 것을 살아가면서 새로운 면을 자꾸 알게 되지요. 그래서 성도는 증인이죠. 십자가의 복음의 증인.

그런데 그런 사건을 누가 유발시켰다? 우리가 모르는 주께서 유발시켰죠. 우리는 오해해서 이만큼 아는 걸 가지고 주님의 전부라고 생각하고 착각하면서 이만큼 알면 다 아는 줄 알고 이렇게 생각하죠.

21페이지 보면 여러 가지 P문서, E문서 나오는데 그건 넘어갑시다. 이것은 바로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오해했던 오해를 오늘날 구약학자들이 오해해서 하나님을 쪼개는 거예요. 그런데 21페이지 제일 마지막에 봅시다. “E에서와는 달리 인간의 질문을 받지 않고 하나님 스스로 자기 이름을 가르쳐준다.” 하여튼 중요한 대목은 꼭 침멀리가 안 놓쳐요. P문서에서 제사장 문서라 하지요. 제사장 문서에서 이름이 여러 가지 나오는데, 인간의 질문을 받지 않고 하나님 스스로 자기 이름을 가르쳐준다. 자기 백성에게. 이게 무슨 뜻인가 설명해야 되죠.

아까 이야기했는데 제가 그림으로 그리겠습니다. 힘듭니다. 굉장히 살기 힘들어요. 이스라엘이. 그래서 이름을 부릅니다. ‘주여, 여호와여 도와주소서.’ 처음에는 이름을 부르면 하나님이 응답을 해줬습니다. 실로암 물가에서 회개하면 응답해줬습니다. 그런데 사울 같은 경우에 백날 기도해도 응답이 안 되고, 그 다음에 비느하스 같은 경우에 언약궤 들이대도 소용없어요.

이름을 불러줄 때 요청을 하면서 여기에 플러스알파, 새로운 요소가 가미됩니다. 이름을 부를 때 여호와의 인식이 새로운 자기가 요청한 대로 안 이뤄짐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하시고자 하는 일에 더 깊숙이 그 백성들이 개입을 하게 돼있어요. 그러면 이 사람들이 어떤 전쟁, 예를 들어서 구약에선 전쟁이 많으니까 전쟁에 들어갈 때 새로운 하나님 이름으로 벌이는 전쟁할 때 옛날에는 전쟁할 때 하나님 이름 부릅니다. 승리케 해요. 누구의 승리? 이스라엘의 승리잖아요.

그런데 막상 사무엘상과 하를 거치고 보면 이스라엘의 승리가 아니고 누구 승리냐 하면, 주의 이름의 승리가 되고, 옛날에는 주의 이름의 승리가 곧 이스라엘의 승리였습니다. 그런데 점점 주님은 승리하는데 이스라엘은 패배해요. 이스라엘이 패배함으로써 보다 더 주님을 아는 계기가 되는 겁니다.

교회 안 나오다가 사업 망하고 난 뒤에 주님 알았다 하는 것과 똑같은 거예요. 목회는 안 되는데 복음은 더욱더 감사해지고. 똑같습니다. 그게 뭐냐 하면, 바로 우리는 하나님 이름을 부르지만 주님께서는 그 부름을 통해서, 이게 어려워요. 부르게 할 만한 어려운 상태를 만들어서 하나님의 새로운 속성을 그걸 다 담는 거예요. ‘이건 몰랐지롱. 하나님이 이런 분인 줄 미처 몰랐지롱.’ ‘미처 몰랐습니다. 감사합니다.’ 이렇게 하도록 담는 거예요.

담게 되면 그게 새로운 주의 이름으로 뭉쳐진 새로운 이스라엘로 쇄신, 바꿔지죠. 개혁된다고 할까요. 새롭게 바꿔집니다. 바꿔지면서 이게 또 껍질이 돼요. 또 주체가 되니까 나중에 깨져야 돼요. 그처럼 하나님은 자기를 나타날 때는 요청을 들은 것 같지만 요청대로 안 해주고 새로운 것을 가미해서 주님이 어떤 분인가를 더욱 더 뚜렷하게 드러내는 하나의 계기로 삼는 거예요.

이렇게 나올 때 새로운 플러스알파가 돼야 되는 알파 안에 새로운 언약이 담기겠죠. 그래서 구약에 여러 가지 언약이 있잖아요. 노아언약부터 새로운 언약이 계속 되니까. 구약의 언약 계산할 때는 하나의 언약이 나오면, 이런 것 참 어렵다. 노아언약 다음에 아브라함언약이죠. 노아언약에서 아브라함언약 갈 때는 이렇게 가면 안 되고, 이건 [계약신학과 그리스도]의 팔머 로벗슨, 그 사람이 오류난 거예요. 그 책 내용 잘못된 거예요.

노아언약을 깔고 위층에 아브라함을 어긋맞게 깔아서 노아언약이 되면 여기서 이미-아직 생기고, 이 위에 올라가면 또 나름대로의 이미-아직 또 생기는 거예요. 이걸 설명 다 해줘야 돼요. 노아언약 쪽으로 계속 가버리면 이건 노아언약의 혜택은 입는데 아브라함언약 층에서 보면 이방인 돼요. 아브라함언약은 맞는데 나중에 예수님 오게 되면 아브라함의 본 자손은 지옥 불에 가죠.

자꾸 층을 이야기해줘야 되는데 유대인들은 역사를 이야기하니 층을 안 보고 직선으로 그어버리니까 우리는 과거가 오늘날 우리가 있다. 또 하나의 주체가 돼버렸죠. 그 주체를 예수님이 십자가에 깨버렸다.

노아 입장에서는 아브라함이 묵시가 되고, 노아는 역사가 되고, 이렇게 된 아브라함은 또 묵시가 역사로 변하고, 아브라함 후에 이삭언약은 또 하나의 묵시가 되고, 그건 또다시 역사로 변하고 또 묵시가 되고. 그럴 때마다 주의 이름이 점점 더 구체화되죠.

결국은 나중에 보면 다니엘서처럼 느부갓네살이란 하나의 덩치가 느부갓네살은 죽어도 그동안 남긴 느부갓네살의 바벨론 제국은 요한계시록에 보면 어떻게 돼요? 세상 끝 날까지 제국은 두 개, 세 개 아니에요. 하나밖에 없어요. 바벨론 제국 하나밖에 없는 것처럼 똑같이 인자의 나라도 결국은 주님의 몸 덩어리밖에 없어요. 전체가.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주의 몸밖에 없어요. 형형색깔 언약의 색깔로 짜여 있어요. 원피스, 투피스까지 색깔로. 아랫단부터 새로운 색깔로. 위에서 피가 흘러오죠. 어린양의 보좌로부터 흘러내려오는.

그 다음에 22페이지에 드라이버란 사람이 중간에 보면 나와요. 글자 작은데. 여호와가 어디서 나왔느냐? 여호와란 이름을 사람이 가나안 땅에서 불렀는데 너무 흠모할 때 외치는 소리, ‘야(Jah)’가 변해서 여호와 된 거예요. 야웨 또는 여호와. 너무 경악스러워서 숨도 제대로 못 쉬고 헉.

결국 ‘야’하는 것은 자음은 없고 모음만 있는 거예요. 아, 에, 이, 오, 우가 우리의 기본이고 자음은 혓바닥 놀림에 따라서 생기는 겁니다. 숨은 어디서 관장합니까? 혓바닥에서 관장하는 게 아니고 모음에서 관장하죠. ‘헉’ 할 때 실제는 ‘ㅎ’이라는 자음과 ‘ㅓ’라는 모음으로 돼 있잖아요.

근데 이거는 우리가 구분하기 위함이고 실제는 자음은 있으나마나잖아요. 이게 히브리어잖아요. 안에 모음이 관장하는 거예요. 자음만 되지요. 그러니까 히브리어 같은 경우에 언어는 들리는 소리도 없고 언어도 없는 거예요. 보이지 않는 소리를 들어라.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 하고 똑같은 거예요.

이거는 현대철학자들이 이야기해요. 사람의 언어라는 것은 무의식이죠. 자기 주체의 발언뿐이죠. 언어는 의미 없다는 거예요. 내가 그냥 내 속에 내지르는 소리에 불과하다. 욕망 그대로죠. 똑같은 소리를 해도 ‘밥 줘↗’ 하고 ‘밥 줘→’, ‘밥 줘↘’ 열 가지 뉘앙스가 다르죠.

왜 이런 소리를 하느냐 하면, 침멀리가 여기서 반대하는 게 뭐냐 하면, 22페이지 위에 나오죠. 이름을 통해서 하나님의 본성과 본질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겁니다. 이스라엘은. 침멀리가 잘 본 게 뭡니까? 이름은 어떻게 명칭이 뭐냐가 중요한 게 아니고 본성과 본질을 이름에 담겨서 듣는다 하는 그 점이 맞는다는 겁니다.

그러면 여기서 그 이름 속에 어떻게 본성과 본질을 담느냐? 그게 어려운 거 아닙니까. 다시 한번 할까요? 어떻게 이름이라든지 여호와 또는 야웨라는 이름에 본성과 본질을 담깁니까? 그 본성과 본질은 누가 담아줘야 돼요? 여호와 이름을 부르는 인간의 본성과 본질을 이야기해줘야 되고, 인간의 본성과 본질을 그게 아니라고 신의 본성과 본질은 누구 본성과 본질이다? 여호와의 본성과 본질이 되는 겁니다. 참 어렵다. 그죠?

하나님은 자꾸 본인이 나타나는 게 아니고 어설프기 짝이 없는 자기 백성을, 진짜 말이 백성이지 인간도 아닌 괴물 같은 사람을 자기 백성 삼아놓고 자기 백성이 엉뚱한 일 할 때마다 치면서 뭘 나타낸다? ‘사실은 나는 이런 분이거든.’ 하고 나타나는 방식이다. 오늘날 우리를 사용하는 것과 똑같은 거예요.

그래도 우리는 내 마음대로 살아. 성질 자기 마음대로 살고 뒤통수를 때려 치는 그게 누구 본성이다? 사랑하시는 주님의 은총. ‘임마, 그건 축복이 아니야. 그건 네 생각이야.’ 때려 치고, ‘저주받았다고? 그건 저주가 아니야. 복이야.’ 하고 치시는 그걸 통해서 숨어있는 하나님이 예수의 피의 속성을 드러내는 것. ‘너 같은 인간도 내 피 때문에 구원받아.’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알아야 될 것은 하나님만 그런 게 아닙니다. 악마도 그래요. 그래서 요한계시록에 희한한 이야기합니다. 이마에 뭐가 있다? 이마에 한 사람은 주의 이름이 있고, 하나 사람은 짐승의 이름이 있다는 겁니다. 전두환 대통령 아무리 봐도 없잖아요. 고소영하고 장동건 아무리 봐도 없다고. 그런데 있다는 거예요. 그걸 제가 뭐냐 하면, 반드시 주체가 깨어지는 것을 영적으로 다뤄야 할 텐데 하나님도 마찬가지고. 반드시 인간의 자기 행위 있잖아요.

인간의 행함을 의로 격상시키는 작업은 누가 한다? 마귀가 해야 돼요. 왜? 마귀는 항상 십자가 공로로만 의롭다는 것을 이 복음을 항상 의식하기 때문에 그걸 대비되는 식으로 자기 사람에게 뭘 부추깁니까? 네 행함으로 의롭다함을 자꾸 그런 인식을 부추겨주는 식으로 할 때 그 사람 이마에 뭐가 있다? 짐승의 이름이. 그렇게 있는 사람은 결국 뭘 주장합니까? 사람은 예수의 피로 구원받는 것이 아니고 인간은 행함이 붙여져야 구원받는다. 이마에 짐승 이름이 돼요. 짐승이 어디 있나, 마귀가 어디 있나 하죠. 네가 바로 괴물이다.

다시 할게요.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어떻게 나타난다고요? 어설픈 마귀 같은 인간들을 때려 치는 가운데서 하나님의 자기 이름의 본성을 드러내는 방식으로 구원하죠. 그렇게 자기 본성을 드러내요. 침멀리가 그런 의도로 했는데 이렇게 상세하지는 못했지요.

23페이지 봅시다. 하나님의 이름을 어떻게 드러내느냐? 침멀리는 중간에 “나는 은혜 줄 자에게 은혜를 주고 긍휼히 여길 자에게 긍휼을 베푸느니라”(출33:19) 진짜 엑기스를 이야기했어요. 액션으로 이름 써라, 받아 적어라 이게 아니고 하나님의 이름은 반드시 자신의 액션, 행위죠. 어떤 행위? 은혜 줄 자에게 은혜를 주고 긍휼히 여길 자에게 긍휼히 여긴다면 뭐가 있어야 돼요? 같은 행동을 해도 은혜를 안 받을 사람, 긍휼을 안 받을 사람과의 구분하는 작업이 이뤄지면서 주님은 자신의 본질을 드러내죠.

십자가 백날 이야기해도 안 믿는 사람 따로 있고 믿는 사람 따로 있는 것이 누구의 본질이다? 우리 주님이 하신 일이에요. 그러니 십자가 믿는 사람은 얼마나 감사합니까? 왜? 나도 안 믿어도 되는데 내가 천국 안 가도 되는데 가게 한다니까. 그게 누구 몫입니까? 주의 이름의 몫이죠. 그걸 이야기하죠.

다시 말해서 침멀리는 말하기를 이름이란 기능으로 나타난다는 거예요. 어떤 기능? 은혜 줄 자에게 은혜 주고 긍휼히 입을 자에게 긍휼을 입혀주는. 그래서 은혜와 긍휼이라 하는 것은 인간의 행위는 배제되죠. 이게 로마서 9장에 나오죠. 에서, 야곱할 때. 야곱 이야기하고 그 뒤에 바로 이야기하면서 긍휼 이야기 이 대목 나오잖아요.

하나님의 기능은 자로 은혜 안 줄 자에는 달라 해도 절대 안 준다. 이게 전제되어야 돼요. 그래야 우리가 천국 백성입니다. 그래야 주체가 우리가 아니고 주체가 주님한테만 있습니다. 박윤진 씨 이야기하는 게 그겁니다. 주체 싸움이라. 주체는 항상 주님이 주체지 우리가 주체가 아닌데 주님의 주체라고 하면서 또 주님의 주체를 아는 우리를 하나의 주체로 만들면 안 된다는 거예요.

조금만 하고 마치겠습니다. 창세기 32장 20절에 보면, “어찌 내 이름을 묻느냐?” 여기서 “하나님의 이름을 묻는 질문을 회피한 것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침멀리가 이야기하죠. 질문하는 것조차 주께서 회피한다는 겁니다. 왜 회피합니까? 정답은, ‘내가 은혜 줄 자, 은혜 안 줄 자를 네가 결정하는 것이 아니고 네가 스스로 달라하는 것이 아니고 결정권은 내게 있다.’

결국은 주의 이름은 인간의 이름과 경쟁해서 주도권을 인간 주체에게 빼앗기지 않고 하나님 스스로 주도권을 쥘 때 주도권을 가진 이름이 주의 이름이다. 야웨냐, 여호와냐 용어가 문제가 아닙니다. 나의 주도권을 누가 쥐고 있느냐?

그 주도권을 알자가 아닙니다. 알면 우리가 주체가 활용되니까 알자가 아니라 ‘세상에 주도권이 나한테 없네.’라고 이게 믿어질 때 결과적으로 느껴질 때 이상하게 쉽게, 쉽게 감사가 되면서 그게 자연스럽게 온 몸으로 전율이 일어나면서 ‘맞잖아, 내가 주체가 아니잖아. 나는 만들어진 거잖아.’라고 받아들여질 때 그게 바로 주의 이름에 의해서 다뤄지는 주의 백성이다 이 말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주의 이름 생각해보았습니다. 지금도 주께서 이름 앞장세워서 누구든지 내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는다 했는데 주께서 능력 주셔서 긍휼 입어서 불렀지 우리가 알아서 부른 건 아닙니다. 앞으로 남은 여생이 이미 주님 안에서 주님 속성 증거하라고 주신 인생이오니 주님의 약속을 그냥 보여주는 걸로 우리 인생 마감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첨부파일 : 20091110b 부산강의.hwp (54.5K), Down:20

정원(IP:116.♡.98.68)

09-11-18 12:30

감사합니다.옮겨 써 주시니 편안하게 읽어보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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