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자 크기
화면

이근호 목사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

20091110a 부산강의 : 침멀리[구약신학]01-머리말자유게시판[신학]

20091110a 부산강의 : 침멀리[구약신학]01-머리말

이름 : 한윤범(IP:119.192.174.148)

20091110a 부산강의 : 침멀리[구약신학]01-머리말

(강의:이근호 목사)

어려운 책을 구약신학을 대면하는 것으로 하자는 이유는, 이 내용이 어렵다기보다도 많은 내용이 담겨있어요. 같은 돈을 주고 책값 여기선 삼천오백 원 찍혔는데 같은 돈을 주고 책을 사더라도 볼 게 많으면 두고두고 보고 참고로 할 게 많은 책이 있어요. 이 책이 볼 게 많은 건 들어있으면서 함축 돼있기 때문에 그냥 책을 쉽게 소화시키려 하는 사람은 어렵게 들리죠. 혹시 나 아는 건 다 빼고 모르는 것만 하자고 덤벼들다가는 이 책의 진도가 잘 안 나가니까 나중에 실증을 낼 수가 있습니다.

전에 [신약신학] 때 래드 책을 한 이유가, 래드 책은 기존에 있는 모든 현대 신학신약을 다 집어넣었습니다. 그걸 쭉 하게 되면 그 책을 만약 하고 나면 더 이상 기발하고 새로운 것은 안 나오잖아요. 사람이 새로운 것이 안 나오면 두려움이 없어져요. 겁이 없어지고. 그런데 새로운 것이 자꾸 나오면 그만큼 무식한 것처럼 느껴져서 자신감을 상실하죠. 혹시 이 주장을 하는데 이 주장에 반대되는 주장이 나오면 어떡하나 그런 생각이 들지요.

이번에 십자가마을에 김성환 그분과 박윤진 그분이 주고받은 걸 보면서 뭘 느끼느냐 하면 김성환 그분은 기존의 신학을 하신 분이잖아요. 박윤진은 신학을 안 했잖아요. 그런데 김성환 그분 입장에서는 겁이 나는 것이 자기가 알고 있는 신학의 테두리에서 전혀 낯선 소리할 때 이걸 틀렸다고 해야 할지, 무식해서 오바하고 있다고 해야 될지 아니면 기존의 것을 다 알고 그 허점을 지적하는 것인지 그게 일종의 약간의 망설임, 두려움으로 다가오는 거예요.

박윤진 성도님의 글은 뭘 문제 삼느냐 하면, 인식론을 문제 삼고 들어가요. 그런데 기존의 신학을 한 사람은 인식론이 그 뒤에 계속해서 인식론이 작용한다고 생각 안 하고, 과연 이것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 그걸 인식론이라 합니다. 하나님은 삼위일체다. 이게 인식론이 아니고 삼위일체를 우리가 어떤 식으로 알 수 있는가? 그게 인식론이죠.

인식론을 일단 알고 나면 그 다음부터 본격적으로 인식론을 버리고 기존의 내용에 들어갈 수 있다는 식으로 신학이 전개되고 우리는 그렇게 배웠는데, 인식론을 그 다음 내용에 계속 적용시켜버린다면 어떻게 될 건가? 인식론은 그 다음에 계속 적용을 시켜버린다면?

인식론은 여기까지는 일단 알고, 김성환 목사 하는 게 기본적으로 ‘성령이 와야 하나님의 십자가 복음을 안다하는 것을 일단 저는 압니다.’라고 나오거든요. ‘성령이 임해야 인간의 육으로는 안 되고, 인간의 육은 모든 걸 왜곡시키기 때문에 성령이 임해야 성경을 이야기할 수 있다는 말은 박윤진 성도님과 저는 생각이 같습니다.’ 일단 하고 그 다음에 본 내용에 들어가서 성경에 있는 내용과 당신이 이야기하는 내용과 마찰이 일어나는데 도대체 이게 나로선 납득이 안 된다. 좋게 해서 납득이 안 되는 것이지 쉽게 이야기해서 틀렸다 이 말이거든요. 성경내용과 반대다. 그런데 그 말은 안 하죠. 조심스럽기 때문에. 새로운 이야기를 했기 때문에.

그런데 이야기에 들어갈 경우에 인식론에서 거론되는 문제가 내용 안에 결부되어 있다면 그 내용에 대해서 기존의 신학 내용 전체가 다 뒤집어져야 되지 않겠느냐 하는 것이 박윤진 성도의 생각입니다. 모든 것을 뒤집어 생각하는. 그 이야기에요.

그러한 이야기가 구약신학을, 구약신학 책 있습니까? 옛날 책이네. 삼천오백 원짜리. 이 구약신학을 시작하는데도 마찬가지에요. 구약신학이란 내용을 머리말부터 여기 11페이지로 돼있는데 김정준 씨가 번역을 했다 하니까 제 것과 같을 거예요. 쭉 나오는 이야기 속에서 구약성경이 있다면, 구약성경을 열 명이 본다고 합시다. 열 명이 본다면 자기가 궁금한 것, 호기심 갖는 것 그리고 자기가 보고 싶은 것만 골라서 중점적으로 보겠지요. 어떤 것을 중점적으로 보게 되면 자연적으로 다른 주제, 다른 요소를 뒷전으로 밀리지 않습니까?

어떤 사람이 구약성경을 볼 때 자기가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나머지는 서열상 뒤로 밀릴 때 A라는 사람과 B라는 사람, C라는 사람 각자 구약성경의 체계를 잡는다 하지만 그 체계가 열 명이면 열 다 다르겠지요.

여기 11페이지 머리말에 보면, 중간에 “구약에 관한 확정적인 전체이해를-각각을 분리하지 않고-절대적인 전체조건으로 한다.”라고 돼있어요. 전체를 조명하는, 조망하는 전체이해를 각각으로 분리하지 않고 통합시킬 수 있는 그러한 능력을 우리가 구약학에서 구약성경을 이런 식으로 공부하자고 머리말에 나와요. 적어도 구약성경을 공부하면 성경에 전문가가 되는데 전문가라면 구약성경을 떨어지지 말고 하나의 전체이해를 갖는데 도움되라고 이 책을 썼다고 돼있어요.

그 다음에 13페이지 봅시다. [목적과 원칙]이라고 돼있는데 ‘목적’이라고 해놓고 목적에 대해서 안 나와 있어요. 번역이 잘못되었는지 이 사람이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 그래서 저는 이 사람의 앞에 있는 머리말에 나오는 그러한 뜻에 의하면, 구약신학을 쓴 목적은 바로 하나님을 아는 것. 앞에 전제가 있어요. 무슨 하나님이냐 하면,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아는 것이 구약성경의 목적이 된다. 이 책이 그렇게 주장하죠.

그렇다면 인식론으로 봤을 때 이 말이 맞느냐 하는 겁니다. 대번 틀리죠.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우리가 안다 할 때 처음에 성경도 그렇고 다른 것도 마찬가지지만 우리는 이스라엘 하나님을 어떻게 아느냐 할 때 반드시 포함되는 것은 뭐냐 하면, 이스라엘 하나님을 알고자 하면 알수록 누구에 대해서 몰랐던 것이 밝혀지느냐 하면, 이스라엘 하나님을 알고자 하는 나 자신이 누구냐가 이스라엘 하나님을 통해서 점차점차 알아져가는 거예요.

알아져가면서 그 다음에 더 중요한 게 있어요. 이스라엘 하나님을 연구하면 할수록 나 자신에 대해서 아는데 나 자신에 대해서 안다는 것이 과연 그것이 진리냐 하는 겁니다. 그렇게 생각했던 ‘나’가 정말 제대로 된 나일 수 있는 확정을 어디서 얻을 것이냐 하는 문제입니다. ‘하나님을 내가 알면 하나님뿐만 아니고 내 자신을 안다.’라고 주장할 때 그것을 알았다고 판정내릴 나는 어디서 구하느냐 하는 문제가 있어요.

그래서 이 문제는 구약신학 이 책에서 다루질 않죠. 그것까지 다뤄버리면 이 사람이 전문가도 아니고 거기에 대해서 내가 보기에 아는 것 같지도 않고. 그래서 제가 첫째 시간이 그걸 여기다 첨가해드리겠습니다.

계란이 있는데 계란 먹을 때 껍데기 안 먹잖아요. 계란을 삶고 벗겨버리죠. 계란을 삶아버리면 먹는 부분과 먹지 않는 부분이 구분이 되죠. 먹지 못하는 이건 껍질이죠. 안에는 고체로 돼있어서 먹을 수 있잖아요. 계란 속. 그렇다면 먹을 때는 계란 속만 먹지만 껍질을 벗기고 먹는데 그러면 껍질이 없으면 계란입니까, 계란 아닙니까? 계란일 수 없지요. 껍질은 먹지는 않지만 껍질 없으면 안이 보호가 안 되니까.

그러면 문제는 귀찮은 껍질, 먹지도 못하는 껍질 벗겨버리자. 아예 삶기 전부터 없으면 좋겠다. 하지만 껍질은 속에서 밀어붙여서 뭐가 됐든 껍질은 있게 마련이죠.

제가 이 예를 드는 것이 워낙 주체에 관한 문제가 어렵기 때문에 이런 예를 드는 겁니다. 인간의 주체라 하는 것은 자꾸 속에서 뭔가 밀어 올리는 게 있는데 하여튼 밀어 올려서 ‘나는 이렇다’고 뭘 형성하느냐? 껍질을 형성하는 거예요. 껍질은 과연 믿을 만 합니까? 이것도 하루 지나면 ‘내가 또 오해했네.’ 내가 나를 오해하는 거예요. 기분 좋다 하면 자기가 인간 좋은 줄 알고. 기분 나쁘면 천하에 악마가 돼있고.

그러면 ‘나라 하는 것은 껍질이 내가 아니고 알맹이가 나다.’라고 생각해도 문제가 남아요. 왜냐하면, 알맹이가 나라 해도 껍질은 계속해서 어디서 밀어 오릅니까? 속에서 밀어 올린 것이 껍데기가 되거든요. 껍데기가 엉터리라고 벗겨도 나중에 껍질이 또 생기죠.

그걸 어느 글에서 썼지요. 이번에 새로운 논문에 썼어요. 주체가 뭐냐 하면, 주체는 발꿈치의 각질이라 했습니다. 계속 뜯어내도 또 올라오고, 뜯어내면 또 올라오고. 그러다 평생을 다 보냅니다. 내가 누구인지도 모르면서. 왜? 과거에 열아홉 살 때 나는 인간이라고 생각했던, 나는 이런 인간이라는 것, 한 서른만 되도 ‘아이고, 시건 없는 그때. 왜 그렇게 시건 없는 줄 몰라.’ 그때 열세 살 때 동네 형뻘 되는 사람이 그렇게 부러웠지요. 그런데 지금 만나보세요. 두 번 다시 전화하기 싫지요. 그런데 열세 살 때 같은 골목의 형뻘이 왜 그렇게 영웅시 되고, 그렇게 부럽고. 난 나중에 형처럼 될 거라고 그러죠. 지금 나이 많아서 그때 형 보면 ‘열세 살 때 참 시건 어지간히 없었다. 기껏 희망할 게 없어서 저 인간처럼 된다 하겠나.’

이건 신학교 졸업해도 마찬가지입니다. 졸업할 때 어느 큰 교회 목사, 존경스럽고 나도 나중에 목회 한 이십 년 하면 저 목사처럼 되겠지. 얼마나 존경스럽고 훌륭하노. 나중에 그 사람 만나보세요. ‘아이고, 이단아.’ 하지요.

그렇다면 그 사람이 나쁜 게 아니에요. 그 사람은 그대로 인생 살아왔는데 뭐가 늘 수정돼야 됩니까? 사물을 보고 세상을 보고 사람을 평가하는 내 자체가 수정되어 왔지요. 수정되었다고 여기는 나는 내년 되면 어떻게 수정될지. 뻔할 뻔자, 뻔한 것 수정할 것 아닙니까.

2009년도 세상 본 것 하고, 2010년 세상보기가 다릅니다. 그래서 지난 주일오후에 그런 설교했지요. 2010년 돼봤자 2010년도에 비로소 알 수 있는 죄는 그때 가서 안다고. 지금은 어지간한 죄는 다 처리했다고 생각하지만 2010년 돼보세요. 2010년도에 나타나야 될 죄가 2010년도에 나타나요. 그게 인간이 어떻게 완료고, 인간이 어떻게 성화됐단 말입니까? 아직 자기 죄도 제대로 모르는데. 그걸 주체라고 합니다. 이건 각질이에요.

이 주체로 구약성경을 모른다고요. 구약성경을 보게 되면 결국은 내가 하나의 주체로 아무리 흐름이라도 껍질처럼 한 순간에 고정돼있어요. 주체가 고정되면 놀랍게도 내가 알고자 하는 이스라엘 하나님도 그 순간 스톱, 고정돼버린다고. 양쪽 다 내가 보고자 하는 나도 고정되고 내가 살펴야 될 그것도 고정되죠. 세포를 볼 때 문제점이 뭐냐 하면, 세포를 죽여 놓고 본다는 거예요. 옛날에. 지금은 기술이 발달해서 살아있는 보기 때문에. 죽었을 때 세포와 살았을 때 세포가 성분이 다르다는 것을 밝혀졌지만 옛날에는 죽여 놓고 봤다고.

그걸 하이젠베르크의 [불확정성 원리]라고 합니다. 물리학에서. 어떤 존재를 보려고 하면 거기에 힘이 없어지고 힘을 파악 못하고 힘을 알려고 하면 운동을 보려고 하면 존재가 어디 있는지 존재를 알 수 없다 했습니다. 그게 인간의 딜레마에요. 그럼 과학하지 말지. 과학은 진리를 얻는 게 아니고 유용성입니다. 얼마나 이용해 먹을까에요.

그 점은 교인들이 교회 올 때도 마찬가지에요. 이스라엘 하나님을 안다? 아니에요. 이스라엘 하나님을 아예 뭐로 보느냐 하면, 한 마디로 파워, 힘이에요. 사람이 신을 대한다는 말은 뭐냐? 말이 신이지 내용을 보면 힘이에요. 힘이고 그 힘을 찾는 이유는 내가 되고 싶은 힘은 지금 나한테 있다, 없다? 힘이 없다는 거예요. 내일, 모레 되면 수능 치는데 지금 뭐가 필요합니까? 고3 학부모로서는 힘이 필요해요. 일 년에 이백오십 만 다녀간다는 갓바위, 요새는 비좁습니다. 그 피해가 우리교회도 피해입죠. 차 밀려서 만날 늦는 거예요.

사람은 힘을 원해요. ‘신’이라는 한 자를 무슨 말인지 어렵습니까? ‘힘’으로 바꾸면 돼요. 그래서 힘을 원하는 사람이 구약성경을 보면 구약성경을 필사를 하고 백독을 해도 거기서 뭘 얻고자 합니까? 힘을 얻고자 합니다. 그런데 그 힘을 얻고자 하는 방법이 뭐냐? ‘성경을 보게 되면 큐티하게 되면 이걸 공로로 해서 내게 필요한 힘을 하나님께서 주시겠지.’라고 대상을 일방적으로 규정짓죠.

그런데 일방적으로 규정하는 그 틀은 어디서 가져왔습니까? 나라는 것이 속에서 올라와서 껍데기를 형성한 일시적인 주체가 그렇게 해요. 그런데 어느 정도 힘이 차있다 싶으면 교회를 안 나오죠. 힘을 즐겨야 되니까. 즐기려면 일요일에 등산가야 되고 놀려가고 골프 쳐야 되니까. 그때는 이쪽 힘이 사회적으로 힘으로 바꾸고 교회는 빠이빠이가 되겠죠.

그렇다면 구약성경의 이스라엘 하나님은 알고자 원치도 않겠죠. 알고 싶지도 않지요. 내가 원하는 것은 힘인데 그 힘을 욕심을 낼 필요 없기 때문에. 그런데 사회 생활하다가 부도나버렸다. 어디 옵니까? 천부여 의지 없어서 손들고 옵니다. 다시 교회 오겠지요. 여기서 우리가 알 것은 여기서 구약성경이 시작돼요. 왜 힘을 원하느냐? 왜 신을 곧 힘, 왜 인간은 그걸 원하느냐 하는 문제입니다.

힘 앞에 뭐가 달리느냐? 앞에 뭔가 붙어야 돼요. 그냥 힘이 아니고 힘에는 무슨 목적이 갖고 있는데 두 자로, ‘사는’ 힘이죠. 그래서 박윤진 씨는 김성환 목사와 이야기하면서 히브리서 2장 15절인가 거론했죠. 뭐라고 했습니까? 거기에 보면 죽기를 무서워하여 평생을 마귀한테 종노릇했죠.

죽기를 무서워 마귀한테 종노릇한 사람이 유대교고 기독교 신자라면 결국은 그들이 믿는 이스라엘 하나님은 결국 뭐라고 말합니까? 뭘 신봉했어요? 마귀를 신봉했어요. 마귀라고 해서 마귀를 신봉하는 그런 사람 없잖아요. 다 자비하신 하나님, 은혜로운 하나님 하면서도 왜 그게 마귀가 되는 이유는, 본인이 힘을 원하는데 그 힘은 뭡니까? 사는 힘을 원하고, 사는 힘이 있다는 것은 뭐가 무섭다는 겁니까? 죽기를 무서워한다는 거예요. 결국 죽기를 무서워해서 예수를 찾든, 성령을 찾든, 삼위일체를 찾든 전부다 귀신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박윤진 씨는 그걸 어떻게 전복시킬 수 있는 방법이 없는가? 성경을 통해서. ‘우리가 하는 것은 마귀다.’라고 그걸 전복, 뒤집어서 제대로 이야기할 수 있는 방식으로 성경을 해석할 수 없는가를 시도하는 거예요. 그렇다면 어디에 머물러있어야 되느냐 하면, 신학 안에 머물러있어서는 안 되는 겁니다.

그럼 여기서 오늘 강의에 제일 중요한 대목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신학과 성경의 차이는 뭐냐 하면, 신학은 인간을 둘로 나누질 않아요. 모든 인간을 아우르고, 인간을 포섭하고, 인간을 설득시키려고 하고 납득시키려고 일단 인간을 인간으로 보는 거예요. 인간으로 보고 시작하는 게 신학입니다.

만약에 다음, 다음주에 칼 바르트를 한다면 칼 바르트 신학을, 제가 했잖아요. 왜 성경을 하지 않고 칼 바르트 신학을 하려고 하느냐? 신학을 하는 그 이유가 뭐냐 하면, 일단 신학은 사람을 사람으로 보자는 거예요. 사람을 무시하지 말고 사람을 그냥 사람으로 받아들이자는 거예요. 그런데 성경은 뭐냐 하면, 성경자체가 인식론으로 작용하기 때문에 성경은 인간을 사람으로 안 보고 저주받은 인간으로 보는 거예요. 왜? 어느 인간도 태어날 때부터 죽는 게 안 무서운 인간이 아무도 없으니까.

성경은 사람을 사람으로 보는 게 아니고 괴물로 보기 시작하는 거예요. 그러면 인간을 괴물로 보면 분명히 삐지고 안 나올 사람 안 많습니까? 그러니까 성경을 이야기해버리면 사람들 포섭이 안 되잖아요. 신학은 울타리를 쳐주잖아요. ‘일단 여러분들은 인간입니다. 인간 중에서 이걸 깨달은 인간과 덜 깨달은 인간, 인간은 인간인데 약간 수준 높은 인간과 덜 높은 인간인데 이걸 배우시면 수준 높아집니다.’라고 해줘야 추방시키지 않고 아우르고 포섭할 수 있는 울타리를 만들어준다 말이에요. 신학이.

하나님이 궁금하십니까? 그럼 삼위일체를 배우세요. 삼위일체에 보면 참된 하나님이 거기 있습니다. 자기가 누군지를 몰라도 그 삼위일체를 배우면 졸지에 참된 하나님을 습득한 게 되지요. 그래서 신학자체가 죄가 되는 이유가 거기 있어요. 어떤 신학이든. 심지어 루터의 십자가신학이든 어떤 신학이든.

왜 그러냐 하면, 계란 이야기 다시 할게요. 계란이 껍질을 형성하지요. 먹을 때는 껍질을 벗기고 먹는다 했지요. 그런데 그 껍질이 어디서 왔습니까? 하늘에서 떨어진 게 아니잖아요. 속에서 밀려왔잖아요. 속에서 밀어낸 것이 껍질을 구성하면 계속해서 껍질이 교회사적으로 뭘 형성하겠어요? 껍데기에요. 캘빈신학, 루터신학, 칼 바르트신학, 이근호신학. 신학을 껍데기를 형성한다고.

결국 껍데기가 있다는 말은 좋게 말해서 안에 것을 보호하지만 사실은 안에 것을 감추는 기능밖에 안 하잖아요. 그런데 십자가라는 뭘 이야기합니까? 올라오는 이 껍데기가 가만있는 껍데기가 아니고 여기에 있는 육을 치지요. 그러니까 우리의 껍데기는 만날 벗겨져야 되고, 침을 당해야 되고, 공격받아야 되고, 자기를 부인하고 만날 부정당해야 되는 거예요. 그렇게 하는 것은 결국 뭐냐 하면, 지금도 숨어있는 하나님께서 일을 하시는 거예요.

그래서 이렇게 하면 어려운 것이 간단히 정리돼요. 지금도 주님은 부활하셔서 계십니다. 묻습니다. 목사님 어디 계십니까? 계시다며? 주님 어디 계십니까? 어느 교회 계십니까? 어느 집에 있습니까? 어느 동네 삽니까? 복잡하게 하지 말고 딱 깨놓고 이야기하자. 주님 어디 계십니까? 물으면 정답은 뭐냐 하면, 지금도 약속 안에 계셔요. 이게 새 언약 안에 있다고 보는 시각이에요. 지금도 주님은 약속 안에 있는 거예요. 그러면 그쪽에서 ‘눈에 보이는데 그러네.’ 만약에 눈에 있는 걸 봐버리면 그거는 껍질이 된다니까.

문둥병자 열 명이 예수님한테 문둥병 나음을 입었죠. 분명히 문둥병 나았어요. 옆에 사람 일가친척 다 봐도 분명히 병이 나았다니까요. 눈에 보이는 대로 봤어요. 그런데 아홉 명이 예수님께 왔습니까, 안 왔습니까? 안 왔잖아요. 그러니까 병 낫고 싶은데 병 나았다. 안 왔다. 이게 정상이잖아요. 주체가 뭡니까? 병 낫고 싶은 예수란 분이 병 낫게 했잖아요. 그러면 자기가 원하는 것, 기대한 걸 다 얻었잖아요. 그러면 안 오는 게 정상이잖아요.

그런데 한 사람, 사마리아 사람은 갔단 말이에요. 그 사람 똑같이 눈이 두 개 있는데 같은 예수를 보면서도 왜 그 사람은 예수님을 찾아와서 경배했습니까? 아홉 명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보고 있잖아요. 아홉 명은 만날 하는 게 ‘하나님 보여줘. 하나님 어디 있느냐?’ 할 거예요. 그러나 돌아온 한 사람은 자기의 병 고침을 통해서 뭘 보느냐 하면, 하나님의 약속은 우리가 원하고 눈에 보이는 걸 원하는 병 고침이 약속이 아님을 안 거예요. 실로암에서 눈 뜨는 것도 마찬가지고. 그게 아니다 이 말이죠.

그렇다면 하나님을 규정할 때 어떻게 해야 됩니까? 여기 있다, 저기 있다 규정하면 안 되죠. 분명히 우리 안에 있는데 그 우리 안에 있다는 게 뭐냐 하면, 약속 안에 가만있는 것이 아니고 약속 안에 있으면서 외부적으로 뭔가 일을 하죠. 무슨 일을 합니까? 너희들은 비 약속이다. 너희들은 죄인이다. 왜 그러냐 하면 약속이 새 언약이기 때문에. 예수의 피와 살 아닙니까. 누구로 인하여 죽음이 들어있다. 그 안에 예수님의 죽음이 들어있죠. 예수님의 죽음이 들어있다는 말은 예수님을 죽게 한 가해자도 약속 안에 포함돼있다 이 말이죠.

그렇다면 교회 안에서 설교할 때 교인들은 계란 껍데기를 가지고 왔잖아요. 목사는 새 언약의 십자가, 약속을 설교하죠. 그러나 교인들은 실적을 원합니다. 교회 왔기 때문에 이번 주에 하나님께서 복 받을 실적을 원하죠. 그런데 주님께서는 자신의 피를 묻히기를 원합니다. 피를 묻히려면 우리는 하나님은 이렇게 해줬으면 좋겠습니다하고 기대하는 자체가 피 앞에서 죄로 드러나야 되죠.

목사가 설교하면서 은근히 교회 부흥되길 원할 때 그때 그 설교는 결국은 그 교회에서 예수님이 없다는 것을 설교한 셈이 돼버리죠. 왜냐하면 반드시 예수님이 살아계시면 약속만 드러나는데 약속이 아닌 어떤 탐심을 가지고 설교해버리면 아예 그 교회는 백날 집회해도 예수님이 안 계셔요. 그러면 진짜 성도가 그 교회에 예수님 교제하러 왔다가 예수님이 없는 교회라고 느끼지 시작합니다. 이 교회는 인간들만 있구나. 인간의 주체들, 계란들만 있구나.

정리하면 신학이라 하는 것은 바로 인간을 아울러서 인간을 정죄하는 것이 아니고 인간을 애정으로 사랑으로 품어주려고 하는 반면에 성경은 진짜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여기 나옵니다. 진짜 하나님은 은혜 줄 자에게 은혜를 주시고. 침멀리가 본인은 복음을 모르는데 한 마디, 한 마디가 복음적이에요. 하나님은 은혜 줄 자에게 은혜를 주고 긍휼을 입을 자에게 긍휼을 준다고 핵심 된 부분을 끄집어내요. 그 부분이 그 뒤에 나오는 모든 하나님의 계명의 이름을 결정한다고 봅니다.

그런데 침멀리는 이런 걸 몰라요. 그 은혜가 그냥 주면 그게 은혜인 줄 알고 있어요. 정죄하는 게 은혜인 줄 모르고. 우리는 저주받아야 마땅하다고 이야기해주는 그게 긍휼이고 자비인 걸 모르고 우리가 원하는 은혜 있잖아요. ‘나, 죄 졌어요. 용서해주세요.’ ‘용서해줄게.’ 이런 걸 긍휼이라고 보는 거예요. 내 안에 섞은 것이 올라오는 주체를 하나님께서는 무가치하게 보지 말아달라고. 인간의 기본적인 것. 껍질을 깨는 게 아니고 껍질을 하나님이 보호해주셔서 나로 하여금 ....

아까 힘 앞에 뭐가 있다 했습니까? 사는 힘. 왜 사는 힘이냐? 죽는 것이 두려워서 사는 힘이다. 살려면 뭐가 있어야 되느냐? 인간이 선악과를 따먹었기 때문에 인간은 반드시 하나님 앞에 의롭고 거룩하고 착해야 더욱더 살 수 있는 존재의 살만한 가치가 있다고 사람들은 선악과 관습에서 그렇게 이해되는 거예요.

죽는다는 말은 저주받아서 죽는다는 겁니다. 실로암 소경된 자를 할 때 제자들이 뭐라고 합니까? 저 사람은 무슨 죄를 지어서 볼 수 있는 힘도 없느냐? 주님께서 하시는 말이, 보지 못하기 때문에 힘이 나온다. 보는 걸 가지고 힘이라고 한다면 그거는 힘이 아니고 너를 망치게 한다. 그게 소경이라 했어요.

남들이 보지 못하는 걸 볼 수 있어야 그게 진정한 힘이다. 그 힘이 될 때 그 사람은 나를 보지 않고 내가 원하는 하나님을 보지 않고 뭐만 보이느냐 하면, 하나님께서 어떻게 일하시는가? 어떻게 약속을 지상에 새로운 창조로서 일하느냐?

이 서론 대목에서 약간만 더하고 본론 들어갑시다. 방금 제가 뭐라고 했느냐 하면, ‘창조의 힘’이라 하죠. 정말 어려운 이야기입니다. 힘인데 앞에 뭐가 붙느냐 하면, ‘창조’가 붙어요. 창조의 힘이라면 물어봅시다. 어렵기 때문에 질문형식으로 해보겠습니다. 무에서 유의 창조입니까? 아니면 두 번째, 변화를 주는 힘이에요? 둘 중에 어느 겁니까?

제가 질문자체가 잘못됐어요. 왜냐하면 무라는 개념이 없다는 개념이 뭐냐 하면, 현재 우리가 있다는 것을 없다는 것으로 바꾸어놓고 변화를 주되 유로 변화되는 겁니다. 우리 인간들은 없는 것과 있는 것을 구분하잖아요. 그러나 하나님은 있어도 없어요. 왜 없어야 되느냐 하면, 계속 없어져야 창조의 힘이 거기서 뽑아낼 수 있기 때문에 그래요. 창조의 힘이 주시는 것과 뽑아내는 거

그걸 이번에 논문을 고치면서 집어넣었어요. 공백인데 주체가 찢어지면서 여기서 틈이 발생하고 이 틈에서 묵시의 힘이 올라와서 새로운 주체를 또 만들어요. 물론 이 주체는 나중에 또 깨집니다. 화산이 있으면 화산이 폭발 한 번 있는 게 아니에요. 계속 일어나면 계속 마그마가 쌓이고 쌓인 것이 또 산을 이루고 산이 찢어지면서 또 마그마 올라와서 산이 쌓이고. 칼데라인가 그렇죠. 여기 호수 생기고. 화산 발생하면 퇴적층이 계속 쌓이잖아요.

그처럼 우리 주체라 하는 것은 퇴적층으로 되어있죠. 세 살 때, 일곱 살 때, 아홉 살 때 사고방식, 열두 살 때 사고방식 하다가 나중에 어른 되면 도로 일곱 살 때로 도로 내려가고. 층을 계속 찢어내는 힘, 이것이 공백에서 올라오는 힘, 주체가 찢어지면서 그 안에서 공백에서 지금 이 우주를 다스리는 하나님의 창조의 힘이 올라오는데 그걸 제가 아까 예수님의 약속의 힘이라고 봤습니다. 다른 말로 십자가의 죽으신 힘이 나온다.

그렇다면 이게 만약에 맞다면 기존의 신약, 구약성경 해석자체에 큰 오류가 생겨버려요. 어떤 오류가 생기느냐 하면, 가룟 유다 이야기입니다. 축복과 저주가 어디서 나오느냐 하면, 보통은 우리는 죄인이다. 저주받아야 돼. 만약에 아브라함이다. 아브라함은 하나님 언약백성이기 때문에 복 받아야 돼. 이렇게 너는 복 받아야 되고 너는 저주받아야 되고. 에서는 저주받아야 되고 야곱은 복 받아야 되고, 이게 우리 상식이잖아요. 로마서 9장에 나오잖아요. 에서는 미움 받고, 상식인데

이렇게 만약에 앞의 이야기를 거쳐버리면 에서, 야곱이 어디에 포함돼버리느냐 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본인에서 저주가 나오고, 복이 두 개 다 나오는 거예요. 우리가 아는 상식은 예수님은 복 받은 분이죠. 저주와 상관없는데 십자가 사건을 통해서 아는 것은 뭐냐? 저주가 예수님을 통해서 나온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예수님은 저주맨이에요. 저주받아야 될 분이 아니고 아예 저주를 내뱉을 수 있는 그런 능력이, 자격이 되신 분입니다. 버릴 자를 버리고 구원할 자를 구원하는데 이거는 버릴 자가 아니라 아예 버릴 자를 만들어내는 게 누구 소관이냐 하면 예수님이 만들어내는 게 돼요. 저주받을 자까지. 그야말로 골로새서 1장 16절.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이걸 요새 CF에 ‘때문에~ 때문에~’ 나오죠. 예수님 때문에.

그렇다면 예수님이 지금 약속 안에서 살아있다고 느끼는 사람은 예수를 믿는 게 딴 게 아니고 예수님은 나를 어떻게 사용하시는가? 예수님은 오늘도 어떤 속성을 주시렵니까? 예수님을 쳐다보는 식으로 교제를 하게 돼있어요. ‘예수님 때문에~’니까. 오늘 하루 살아가는 동안 누구 때문에? 예수님 때문에.

이게 예수님이라면 하나님은 존재의 하나님이 아니고 거기서 뭐가 나온다? 축복과 저주의 속성이 나를 반죽에서 수제비를 길게 쭉 잡아당기면 작은 수제비 떼게 되잖아요. 그처럼 길게 늘여서 툭 떼면 하나 떨어지는 것처럼 하나님께서 나를 오늘도 어떻게 사용하느냐? 이미 그리스도의 몸의 사지. 사지라 하는 것은 몸체에서 삐져나온 걸 사지라 하죠. 이게 붙은 게 아니고. 몸체를 길게 늘인 게 사지 되죠. 지체라 하는 게 이미 한 몸이 늘어진 것이지 외부에서 갖다 붙여서 한 몸 만든 건 아니다 이 말이죠. 그런 걸 하려면 우리가 약속에 의해서 나온, 구약의 이스라엘은 뭐냐?

결국 침멀리에 보면 무지무지하게 오해한 게 많아요. 진짜 복음을 모른다는 증거가 해석하는데 있어서. 그런 것은 래드도 마찬가지고. 하나하나 제가 지적해 드리겠습니다. 침멀리가 복음을 모르기 때문에 십자가를 모르기 때문에 어떤 점에서 구약성경을 왜곡되게 해석하는가? 그러면서도 침멀리가 뽑아내는 성경구절은 유명한 것은 안 빼뜨리고 뽑아내는지 정말 중요한 대목. 공부를 많이 했기 때문에 중요한 대목과 중요하지 않은 대목을 제대로 탁탁 끄집어낼 수 있는 그런 눈들이 있거든요. 그래서 이 책이 좋은 책이에요.

그럼 이스라엘은 뭐죠? 이 책의 서론부분 20페이지 보면 그 내용이 이스라엘의 도전과 응전에 대해서. 참 많이 들었어요. 제가 구약 공부할 때 구약 책들 보게 되면 안 빠지고 등장하는 게 도전과 응전. 이스라엘은 희망을 갖고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환란 가운데서도 도전과 응전으로써 묵시문학을 만들어내고, 이렇게 나오죠. 도전과 응전하는 인간들 멸망해야 됩니다. 그걸 침멀리는 모르는 거예요.

구약의 역사라 하는 것은 그냥 역사가 아니고 하나님이 그들 백성과 함께 있어서 어떠한 어려움과 역경 속에서도 환란을 이겨내는 그들의 역사적 흔적이었다. 그게 바로 계시였다고 보는 겁니다. 제가 보기에 이런 의식 자체가 저주받은 의식이에요.

그러면서도 여기 20페이지 보면 딴 소리 하는 게 뭐냐 하면, 이스라엘과 다른 이방민족의 차이점이 역사성을 갖느냐, 안 갖느냐 차이라고 했던 이론은 그것은 잘못됐다. 왜냐? 앗수르 같은 데도 그들의 신을 섬길 때 그거는 역사성을 갖고 있다. 그전까지 이론은 뭐냐 하면, 이방인은 역사가 없는 자연신이다. 그냥 자연과 현재 교류하는 신이라고 그동안 주장해왔어요. 구약신학에서. 그런데 더 연구해보니까 이방신이라고 무시했던 그들도 나름대로의 역사가 있다는 말은 다른 말로 도전과 응전, 도전과 응전이 있다는 말은 그들 나름대로의 약속을 갖고 있었다.

약속이 뭐예요? 지금 이뤄지면 약속이 아닙니다. ‘해줄게. 기다려 봐. 시도해봐. 얻을 수 있어.’ 미래에 대한 소망의 내용이 약속이잖아요. 지금 이뤄진 건 약속이 아니잖아요. 계속해서 역사를 끌고 가는 추진력을 제공할 수 있어야 그게 역사(?) 된다고.

그래서 제가 보기에는 이스라엘이라는 것은 결국 침멀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빼버리고 구약을 보니까 그저 그들은 용 썼다, 애썼다, 참 고생 되게 많이 했다고 하는 거예요. 이렇게 이야기하는 이유가 현재 우리가 기독교 신자로서 이것 자체로도 하나의 계시적인 의미가 있으니까 여러분은 존재할 가치가 있다고 아우를 수 있는, 신학이죠. 성경이 아니고. 분리가 아니고 그저 아울러주는 거예요. 하나님은 우리 편입니다. 계속해서 포섭하고 얼싸안아주고 그러한 의도가 많이 비치죠.

하나만 더 하고 본론 들어갑시다. 20페이지 들어갑시다.

성경과 신학의 차이에서 신학은 사람을 안아주려고 하는 반면에 성경은 배타시 하는데 그러면 배타시하는 기준이 뭡니까 물으신다면, 그것은 제가 아까 계란을 이야기했지만 어떤 점에서 배타시하고 나가라 하는 그 기준은 우리가 관여를 못해요. 십 년 믿어도 그 다음에 또 잘려 나옵니다. 성경에서 그 내용이 나와요. 나중에서 화딱지 나서 성경자체를 안 보죠. 마치 가룟 유다같이. 귀신을 쫓아내고 권능을 행해도 소용없었어요.

약속자체는 계속해서 뭐가 나오죠. 성경자체가 약속이니까. 성경에서 계속해서 끊임없이 나오죠. 신학은 어느 정도 해버리면 더 할 게 없어요. 새로운 게 안 나와요. 그런데 성경은 성령과 함께 있기 때문에 계속해서 사람들을 분류할 수 있는 기준들이 계속해서 나오죠. 심지어 옛날에 알았다고 하는 기준이 새롭게 다가오죠. ‘이십 년 전에 다 아는 겁니다.’ 그런데 어느 날 보니까 세상에 은혜로

은혜롭다는 말은 무슨 뜻이냐 하면, 내 생각을 괄호 친다. 중지시킨다. 쉽게 말하면 잊어버린다. ‘내가 지금 뭐하면 되지?’를 빗금 쳐버리는 거예요. 앞에 뭐가 있다? 나. 이걸 빗금이라 하는데 내가 뭐하면 되지를 빗금 쳤다는 말은, 내가 뭘 행할 것인지 생각 안 하더라도 저는 감사해요, 고마워요.

그러니까 만약에 어떤 사람이 죽는다면 보통 사람은 누가 죽어요? 내가 죽잖아요. ‘아이고, 내가 죽다니. 아이고, 내 딸이 신종플루 걸리다니.’ 하잖아요. 그런데 은혜가 임하면 어떻게 됩니까? 이걸 제거해버리면 감사해요. 뭐? 그냥 감사해요. 감사할 때만 별을 감사하고 달 보고 감사하고.

감사거리를 찾으면 감사가 안 됩니다. 감사거리를 찾으면 그거는 감사가 2초 뒤에는 두려움으로 변해요. 내가 감사할 것을 언제까지 감사할지 무슨 사태가 벌어져 감사거리가 깨지면 나는 다시 한번 감사를 놓쳐버리면 나는 무슨 재미로 사나, 무슨 낙으로 사나? 또다시 두려움이 온다니까요. 그래서 더 나아가서 감사하는 자기 자신을 빗금 쳐버려야 돼요. 그냥 고마워요. 그걸 은혜의 힘이라고 하고.

20페이지 봅시다. [계시로서의 신명] 제목자체가 잘못됐지요. 계시가 아니고 성경에서의 신명(神名)이 돼야 되는데 계시 쓰는 것 봐서는 역시 칼 바르트의 영향을 입었다고 볼 수 있어요. 계시라는 말을 전부다 아울러주는 거예요.

성경이 돼버리면 성경을 주장해버리면 번역이 안 되서 성경 모르는 사람은 자동적으로 지옥 가죠. 그러면 신학자로서의 임무를 소홀히 한 게 되잖아요. 그렇다면 성경 말고 계시로 해버리면 번역된 성경 구경도 못했지만 아프리카 원주민도 자연계시를 받죠.

칼 바르트는 자연계시와 특별계시를 나누어서 자연계시는 없다고 하면서 특별계시를 주장했습니다. 그런데 이 말자체가 본인이 모순돼버려요. 자연계시를 없앨 것 같으면 계시도 없애버려야 돼요. 그냥 성경이라고 하면 돼요. 특별계시를 셋으로 나눈다니까. 그냥 계시, 예수 그리스도. 그 다음에 전하는 계시, 설교. 그 다음에 기록된 계시, 성경. 이 셋으로 나눠버렸다고. 이렇게 나눈다는 것은 계시를 인간의 계시가 아니고 계시의 주체를 신에 두기 위해서 이렇게 한 거예요.

그런데 생각해보세요. 이것도 모순되죠. 인간을 생각할 때 앞에 신을 두어서 인간은 모자라고 인간은 유한하고 죄인으로 규정하는 이것 누구 아이디어에요? 인간에서 나온 아이디어입니다. 그렇다면 이런 아이디어도 제거해버리고, 기존에 나와 있는 자연계시도 제거해버리면 우린 할 게 아무것도 없네. 이것 잘라내고 저것 잘라내고 서로 반대되는 중에 어느 하나는 맞아야 되는데 둘 다 반대되는 양쪽 다 차버리면 잘라내는 그건 또 어디서 나왔느냐 하는 문제 될 게 아닙니까.

그게 바로 여기에 ‘신명’에서 나와요. 이름이라 것은 한 마디로 말해서 누군가 있다는 거예요. 반드시 누군가가 꿈틀거리고 보이진 않지만 숨소리 들리는 것 같고 뭔가 움직이고 있을 때 그때야 우리는 이름을 붙일 수 있습니다. 그런데 방금 제가 뭐라 했습니까? 이름을 붙인다 했지요. 만약에 신에다 이름을 붙여버리면 누가 신입니까? 내가 신이죠. ‘어이, 수풀 속에 있는 하나님 있는 것 안다. 하나님 빨리 나와. 이름 붙여줄게. 책상 뒤에 빨리 나와. 이름 붙여줄게.’ 이래 된다 말이죠.

그럼 뭡니까? 내가 보기에 너는 있음이 되지요. 내가 보기에 있음이 되니까 누구 있음이 먼저에요? 나 있음이 먼저고 그 다음에 너는 나한테 들켜야 비로소 너는 이름이 되고. 내가 이름을 불러줄 때 너는 나한테 와서 하나의 의미가 되는 거예요.

그래서 이 신명이란 말을, 하나님 이름이란 말을 규정하는데 있어 상당히 인식론과 결부해서 굉장히 복잡합니다. 복잡하지만 간단하게 이야기하면 이렇습니다. 이름이라 하는 것은 필히 누군가 있다는 것. 그런데 이스라엘 사람들이 하나님이 있다는 걸 어떻게 알았을까요? 그것은 다음 시간에.

첨부파일 : 20091110a 부산강의.hwp (55.0K), Down:17

목록으로

이근호 목사 · 21,142건 중 510 페이지

번호 구분 제목 분류 날짜
8,417 우리교회 눅 1:26-38 (마리아의 임신) 누가복음 최고관리자 09-11-22
8,416 우리교회 [일반] 음성실시간방송 [방송] 최고관리자 09-11-22
8,415 강의 대구특강 11월 21일 칼바르트 신학의 내부적 모순 [신학] 최고관리자 09-11-21
8,414 자유게시판 특강 실시간 동영상 방송 합니다. [방송] 최고관리자 09-11-21
8,413 우리교회 [일반] 요즈음 교인들의 배짱 [일반] 최고관리자 09-11-20
8,412 묻고답하기 요즈음 교인들의 배짱 [신학] 최고관리자 09-11-20
8,411 자유게시판 20091009 안산강의 : 요한일서 제 1강 요한일서 최고관리자 09-11-19
8,410 자유게시판 20091118우리교회수요설교녹취(렘 10:19-25/선지자의 고난과 주님) 예레미야 최고관리자 09-11-19
8,409 자유게시판 20091113 서울강의녹취 : 빌립보서 제 7강 빌립보서 최고관리자 09-11-19
8,408 자유게시판 이근호 목사 복음사역 후원회(도서출판 후원회) 회원 명단 재작성 이사야 최고관리자 09-11-19
8,407 자유게시판 정낙원 목사님 서울 세미나 안내 안내 최고관리자 09-11-19
8,406 우리교회 [일반] 21일 칼 바르트 특강 교재 [일반] 최고관리자 09-11-18
8,405 자유게시판 21일 칼 바르트 특강 교재 [신학] 최고관리자 09-11-18
8,404 우리교회 렘 10:19-25 (선지자의 고난과 주님) 예레미야 최고관리자 09-11-18
8,403 자유게시판 12월 특강일자에 관하여.. - 최고관리자 09-11-17
8,402 자유게시판 결혼? 창세기 최고관리자 09-11-17
8,401 자유게시판 20091110b 부산강의 : 침멀리[구약신학]01-머리말 미가 최고관리자 09-11-17
열람 ➜ 자유게시판 20091110a 부산강의 : 침멀리[구약신학]01-머리말 [신학] 최고관리자 09-11-17
8,399 우리교회 [일반] 영화평 [2012] [일반] 최고관리자 09-11-17
8,398 자유게시판 09대구강의(피)12-괴물 미가 최고관리자 09-11-16
8,397 자유게시판 영화 [2012] 관람평 - 최고관리자 09-11-16
8,396 자유게시판 신뢰 약해진 교회"사회를 섬기자"를 읽고 - 최고관리자 09-11-16
8,395 자유게시판 20091115우리교회주일설교(누가복음 1:8-20/엘리야의 심령) 누가복음 최고관리자 09-11-16
8,394 강의 대구 11월 16일 강의 피14강 세상에 속하지 않은 나라 [피] 최고관리자 09-11-16
8,393 자유게시판 약속안에서 타협과 양보가 가능한가? - 최고관리자 09-11-16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