눅 1: 8-20 (엘리야의 심령)
눅 1: 8-20 (엘리야의 심령)
이름 : 우리교회(IP:220.81.41.193)
본문 : 누가복음 1장 8-20절
제목 : 엘리야의 심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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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교회
09-11-15 10:28
http://media.woorich.net/성경강해/누가복음-2009/002강-눅1장1-4(엘리야의심령)-luk091115.hwp
이근호
09-11-15 13:27
엘리야의 심령
2009년 11월 15일 본문 말씀: 누가복음 1:8-20
(눅 1:8, 개역) 『마침 사가랴가 그 반열의 차례대로 제사장의 직무를 하나님 앞에 행할새』
(눅 1:9, 개역) 『제사장의 전례를 따라 제비를 뽑아 주의 성소에 들어가 분향하고』
(눅 1:10, 개역) 『모든 백성은 그 분향하는 시간에 밖에서 기도하더니』
(눅 1:11, 개역) 『주의 사자가 저에게 나타나 향단 우편에 선지라』
(눅 1:12, 개역) 『사가랴가 보고 놀라며 무서워하니』
(눅 1:13, 개역) 『천사가 일러 가로되 사가랴여 무서워 말라 너의 간구함이 들린지라 네 아내 엘리사벳이 네게 아들을 낳아 주리니 그 이름을 요한이라 하라』
(눅 1:14, 개역) 『너도 기뻐하고 즐거워할 것이요 많은 사람도 그의 남을 기뻐하리니』
(눅 1:15, 개역) 『이는 저가 주 앞에 큰 자가 되며 포도주나 소주를 마시지 아니하며 모태로부터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
(눅 1:16, 개역) 『이스라엘 자손을 주 곧 저희 하나님께로 많이 돌아오게 하겠음이니라』
(눅 1:17, 개역) 『저가 또 엘리야의 심령과 능력으로 주 앞에 앞서 가서 아비의 마음을 자식에게, 거스리는 자를 의인의 슬기에 돌아오게 하고 주를 위하여 세운 백성을 예비하리라』
(눅 1:18, 개역) 『사가랴가 천사에게 이르되 내가 이것을 어떻게 알리요 내가 늙고 아내도 나이 많으니이다』
(눅 1:19, 개역) 『천사가 대답하여 가로되 나는 하나님 앞에 섰는 가브리엘이라 이 좋은 소식을 전하여 네게 말하라고 보내심을 입었노라』
(눅 1:20, 개역) 『보라 이 일의 되는 날까지 네가 벙어리가 되어 능히 말을 못하리니 이는 내 말을 네가 믿지 아니함이어니와 때가 이르면 내 말이 이루리라 하더라』
인간은 말씀에 휩쓸릴 때만 영적 세계에 눈이 뜨입니다. 그렇지 않고 스스로 판단해서 영적 세계를 알고자 하는 것은 도리어 자기 자신을 영적 세계에 대해서 더욱더 장애자로 만들어버리게 됩니다.
인간에게는 귀가 있지만 하나님의 비밀을 들을 수는 없고 그냥 소리만 들을 뿐입니다. 사람에게는 눈이 있어도 제대로 영적 세계를 볼 수 있는 눈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실제로 이 땅에 오셨지만 사람들은 그 분이 하늘에서 온 사람인 것을 알지 못했습니다. 자신이 가진 두 눈과 두 귀는 기껏 자신이 정상적인이라는 점을 부각시키고 증명하는 도구로만 쓰여졌을 뿐입니다.
사람이란 눈을 통해서 눈이 보는 것이 아니라 자아가 보고, 귀를 통해서 들을 때 귀가 듣는 것이 아니라 자아가 듣게 되어 있는데 이 자아라는 것이 영적 세계와는 단절된 처지에 놓여 있기 때문에 이런 현상이 일어나는 겁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장차 세례요한의 아버지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는 영적 장애인이었습니다.
비록 자신은 남들처럼 정상적이고 훌륭한 자아상을 갖고 있을 것이라고 짐작하지만 막상 하나님의 계시가 임하니 전혀 사정이 딴 판이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계시에 휩싸인 사람들의 특징은 바로 그가 하는 모든 것이 독백처럼 들린다는 겁니다. 하지만 본인은 압니다. 더 이상 자기 몸을 자신이 사용할 수 없는 계시의 반응체로 달라져 있다는 것을 말입니다.
사람들이 자신을 정상인으로 보는 것은 자신이 누리고 있는 은혜가 어떤 분출구에서 나오는지를 알지 못해서 그러합니다. 창세기 9장에 보면, 무지개가 하늘에 떱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것을 ‘은혜의 언약’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그 무지개는 지상에서 이루어져야 할 일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지상에 벌어진 일을 근거에 두고 은혜를 베풀게 됩니다.
그것이 바로 ‘피 값’이라는 겁니다. 창세기 4장에서 가인인 동생 아벨을 죽인 사건이 일어납니다. 그런데 그 사건으로 인해 땅을 피를 머금게 되었고 그 억울한 피는 하늘에 하소연하게 되었습니다. 사람들은 이러한 피의 사건을 놓쳐버리고 자신을 정상적인 인간으로 자처하고자 합니다.
고린도전서 11장에 보면, 초대교회에는 모일 때 마저 예수님의 피와 살을 기념하는 성만찬을 되풀이했습니다. 그렇게 한 이유가 바로 “예수님의 죽으심을 오실 때까지 기억하기 위함”이라는 겁니다. 왜 예수님의 죽으심을 지속적으로 되풀이해야 합니다. 고린도전서 11:32에 보면, “세상과 함께 정죄받지 않게 하기 위한 조치”라는 겁니다.
결국 하나님께서 세상을 대하면서 그 대하는 기준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이 땅에서 하나님이 피흘리게 되는 억울한 일이 벌어진 것으로 이 세상의 본질을 전부다 보여지게 되었다는 겁니다. 바로 하나님의 은혜는 이 ‘주님의 죽으심’에 근원을 두고 주어지고, 세상에 대한 정죄도 또한 ‘주님의 죽으심’을 근원을 두고 주어지게 됩니다.
창세기 18장에 보면, 일관된 하나님의 뜻이 나타납니다. 하나님께서 소돔과 고모라에서 불로 심판하시겠다고 나서니 아브라함은 그 낌새를 채리고 정면으로 말리게 됩니다. 말리는 기준이 바로 이것입니다. 소돔과 고모라 성에 의인이 있다면 어떻게 그 의인을 악인과 더불어 멸망당할 수 있습니까? 이것은 하나님의 의로움과 충돌을 일이키는 모순된 일이라는 겁니다.
여기에 대해서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소돔과 고모라 성에 의인이 없다는 겁니다. 결국 하나님의 이 말씀은, 하나님의 심판은 인간의 죄 이전에 다른 근거가 따로 있다는 겁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께서 세상을 유지하기 위해 은혜를 주시는 그 근원을 인간들이 틀어막고 있다는 그점입니다.
이 세상이 여태 보존되는 것은 결코 인간의 선행이나 착함이 아니라 예수님의 피 흘리심의 취지를 알리기 위해 보존되어왔던 것입니다. 하지만 인간들은 자신들이 예수님의 의를 배척하고 있으면서 하나님의 은혜 주심에 대해서 영적 장애자가 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그들은 자신의 의를 자기 삶의 자리로 다듬어가지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만약에 ‘주님의 죽으심’이 세상 유지의 힘이 된다면 자신들은 늘 그 십자가 앞에서 죄인이 되어버리기 때문에 이것은 본인들의 위신이 서지 않는 식이 된다고 여깁니다. 십자가 죽으심을 잊고 살아야지만 자신들의 노동의 가치가 빛이 나고 의미가 있다고 여기는 겁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심판 조치를 말리고 나섭니다.
그러나 이 세상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의인은 없습니다. 한 명도 없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생각하사 소돔과 고모라성에 있는 조카 롯을 심판의 자리에서 빠져나가도록 천사를 통해서 복음을 전합니다. 이때 비로소 롯은 영적 장애인이 되지를 않습니다. 하지만 한 집에 같이 살았던 아내나 그리고 그 두 딸의 사위는 이런 천사가 전하는 복음 소식을 ‘농담’으로 간주했습니다. 쉽게 말해서 장난으로 여겼습니다. 그것은 자신이 정상인이라고 간주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닥치게 되면 우리 주체에 분열이 되면서 우리의 자리는 예수님의 죽으심의 자리에서 다시 본모습이 발각당하게 됩니다. 우리는, 우리의 가치를 잃기 싫어서 우리보고 죄인이라고 규정하는 그 은혜의 자리를 죽음으로서 되갚는 범행을 매일같이 행하고 있습니다. 심지어 교회 출석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휩싸이게 되면 그동안의 자기를 형성한 모든 관계는 다 끊어지게 됩니다.
그러면 더 이상 자신만의 자리를 성립될 수가 없고 오로지 하나님의 뜻에 의해서 휩싸이는 자리로만 갖게 됩니다. 그 자리는 곧 예수님의 피만 솟구쳐 올라오는 자리입니다. 그만큰 우리 인간은 결코 정상인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우리는 나 자신을 그동안 지탱해준 주변의 관계가 끊어지는 사태를 거부하고 싶어합니다. 그 관계 안에서 우리는 우리 자신을 정상인으로 스스로 판단해 왔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십자가 피의 자리에서의 우리는 더 이상 우리 자신이 재판하거나 용서할 입장이 못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세상을 정죄하고 심판하시겠다는 주님의 의지에 준해서 우리는 하나님의 용서를 위하여 세상을 용서하면 안되고, 하나님의 사랑을 위하여 세상을 사랑하면 됩니다. 오로지 하나님의 용서와 하나님의 사랑만을 증거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사가랴나 그의 아들 세례요한를 통해서 세상 분리작업에 나서십니다. 사가랴는 그동안 자신의 기준에 의해서 말씀을 해석하기를, 자신과 아내를 늙었기에 자식이 생길 수 없다고 말합니다. 이것이 바로 본인이 영적 장애자인 것을 나타내보이는 표현입니다. 바로 이것이 곧 세상 분류작업입니다. 엘리야의 심령이 이런 분류작업의 기준으로 등장하게 됩니다. 곧 영적 장애인을 영적 정상인으로 바꾸는 작업을 합니다.
이것은 죄인을 의인으로 바꾸어주는 그 복음 속에 하나님의 죽으심이 개입하셔서 작업하신다는 사실을 아는 자가 바로 영적으로 정상인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의 자리를 피에서 출발함을 알고 항상 십자가 피와 자신을 견주어보는 사람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우리교회
09-11-24 16:23
20091115우리교회주일설교(누가복음 1:8-20/엘리야의 심령)
2009-11-16 14:48:46 녹취 : 오용익
20091115 우리교회 주일설교/누가복음 1장 8-20절/엘리야의 심령(이 근호목사)
(기도)
“하나님이 가라사대 저가 나를 사랑한즉 내가 저를 건지리라 저가 내 이름을 안즉 내가 저를 높이리라 저가 내게 간구하리니 내가 응답하리라 저가 환란 때에 내가 저와 함께 있어 저를 영화롭게 하리라.”
하나님 아버지, 우리 힘으로 살아갈 수 없음을 저희들이 믿습니다. 하나님께서 건져줘야 우리가 건짐을 받고, 하나님께서 용서해 주셔야 우리가 용서를 받고, 하나님이 살려주셔야 우리가 하루하루 살아간다는 사실을 이 시간 말씀을 통해서 확실하게 다가올 수 있도록 도와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지금부터 입교, 세례식을 시작하겠습니다. 호명된 분들은 그 자리에서 일어서 주시기 바랍니다. 박 준모, 임 재원, 임 재하, 이 채윤. 입교예식이라는 것은 출생한 자녀로 이미 유아세례를 받은 아이로써 부모의 믿음 때문에 받았던 그 세례가 이제 본인이 성인이 되어서 그 세례가 효과를 드러내고 유효하기 위해서 이제 본인의 입으로, 본인의 본심으로서 예수님을 영접한다고 하나님 앞에 선언하는 의식이 입교예식입니다. 그래서 세례는 이미 받았기 때문에 세례는 없지만 이제 부모믿음이 아니라 자기믿음으로써 하나님 앞에 서약하는 겁니다.
제가 물을 때 진심으로 답변해주시기 바랍니다.
1. 그대들이 유아 때에 부모님들의 신앙고백과 서약으로 세례를 받았는데 이제는 그 고백과 서약을 여러분 자신의 것으로 삼고 성실히 지키기로 맹세하십니까?
무슨 뜻인지 잘 알고 답변해야 돼요.
2. 그대들이 하나님 앞에 죄인인줄 알고 당연히 그 진노를 받을 만하고 그의 크신 자비하심에 의해서 구원 얻을 것밖에 없음을 믿습니까?
3. 그대들이 주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이시고 죄인을 구원하시는 구세주요 복음에서 말하는 그 예수임을 믿습니까?
본인의 믿음으로 이야기하는 겁니다.
4. 그대들이 성령의 은혜만 의지하고 그리스도만 좆으며 예수님의 가르치심을 따라 살기로 작정하십니까?
다 같이 기도합시다. 하나님아버지, 이 네 명의 청소년이 자신의 본심으로써 하나님 앞에 서약을 했습니다. 지금까지 하나님께서 키워오셨고 부모를 통해서 양육 받았는데, 이제는 그들의 속마음이 예수님의 성령에 의해서 천국에 이를 수 있도록 자신의 입으로 찬양하고 이제는 하나님이 부모님의 하나님이 아니라 자신의 하나님이 되어서 예수님이 자신의 구세주가 되어서 어디가도 주께서 함께 지켜주기를 바랍니다. 그들의 믿음이 없어지지 아니하고 주께서 선물로 주신 믿음이 날로 더 빛을 발하여 이 땅에 빛과 소금으로 살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박 준모, 임 재원, 임 재하, 이 채윤, 이 네 사람은 대한 예수교 장로회 우리교회 입교인 된 것을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공포하노라 아멘.
이제 세례식이 있겠습니다. 세례 받을 분은 자리에서 일어서 주시기 바랍니다. 백 한결. 제가 묻습니다.
1. 그대 백 한결 군은 하나님 앞에 죄인인줄 알고 당연히 그 진노를 받을 만하고 그의 크신 자비하심에 의해서 구원 얻을 것밖에 소망 없는 줄을 믿습니까?
하나님의 자비하심으로만 구원받는다, 이 말입니다.
2. 그대 백 한결 군은 주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이신 것과 오직 그분만이 죄인을 구원하시는 구세주며 복음이 말한 대로 구원하실 이는 그 예수님뿐인 줄 믿습니까?
3. 그대 백 한결 군은 성령이 주신 사죄의 은혜를 의지하고 그리스도를 좇아가며 모든 죄를 버리고 그 가르침을 따라 살기로 작정하십니까?
되었습니다. 예수 믿는 이, 백 한결, 내가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노라. 아멘.
다 같이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그동안 마귀에 속했고 죄에 속했고 율법에 속했고 죽음에 속했던 하나님의 자녀가 하나님의 예정하신 택한 자 인 것을 드러내면서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그 피의 공로로 말미암아 지금까지 지은 죄와 지금의 죄와 앞으로 지을 모든 죄까지 용서해주시고 구원해주시니 감사합니다. 백 한결, 그 이름이 이미 생명책에 있기에 죄용서의 예식을 통해서 예수님의 피의 공로를 드러내라고 이런 자리를 하나님께서 친히 마련해 주시니 감사합니다. 이런 기회를 통해서 사람의 행위로 구원받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의피의 공로로만 구원받는다는 것을 우리 모두가 전파할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성령으로 도와주시옵소서. 백 한결의 천국 갈 때까지의 모든 여정을 예수님의 피의 용서가 함께 동행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백 한결 군은 대한 예수교 장로회 우리교회 교인된 것을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공포하노라. 아멘.
하나님말씀 누가복음 1장 8절에서 20절까지 봅시다. 신약성경 86페이지입니다.
누가복음 1:8-20
“마침 사가랴가 그 반열의 차례대로 제사장의 직무를 하나님 앞에 행할쌔 제사장의 전례를 따라 제비를 뽑아 주의 성소에 들어가 분향하고 모든 백성은 그 분향하는 시간에 밖에서 기도하더니 모든 백성은 그 분향하는 시간에 밖에서 기도하더니 주의 사자가 저에게 나타나 향단 우편에 선지라 사가랴가 보고 놀라며 무서워하니 천사가 일러 가로되 사가랴여 무서워말라 너의 간구함이 들린지라 네 아내 엘리사벳이 네게 아들을 낳아 주리니 그 이름을 요한이라 하라 너도 기뻐하고 즐거워할 것이요 많은 사람도 그의 남을 기뻐하리니 이는 저가 주 앞에 큰 자가 되며 포도주나 소주를 마시지 아니하며 모태로부터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 이스라엘 자손을 주 곧 저희 하나님께로 많이 돌아오게 하겠음이니라 저가 또 엘리야의 심령과 능력으로 주 앞에 앞서 가서 아비의 마음을 자식에게 거스리는 자를 의인의 슬기에 돌아오게 하고 주를 위하여 세운 백성을 예비하리라 사가랴가 천사에게 이르되 내가 이것을 어떻게 알리요 내가 늙고 아내도 나이 많으니이다 천사가 대답하여 가로되 나는 하나님앞에 섰는 가브리엘이라 이 좋은 소식을 전하여 네게 말하라고 보내심을 입었노라 보라 이 일의 되는 날까지 네가 벙어리가 되어 능히 말을 못하리니 이는 내 말을 네가 믿지 아니함이어니와 때가 이르면 내 말이 이루리라 하더라.”
길게 읽었습니다만 내용은 사가랴, 세례요한이 태어나기 전의 그 아버지에게 천사가 나타났습니다. 이 사가랴라는 사람은 제사장이었는데 제비 뽑힌 대로 자기순서가 되어서 성전에서 집례를 하고 있을 동안에 가브리엘 천사가 나타나서 새로운 하나님의 일에 대해서 알려 주고 있는 그 장면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러한 일에 대해서 사가랴가 믿지를 않으니까 졸지에 사가랴가 벙어리가 되었다는 그런 이야기가 오늘 본문의 내용입니다. 우리가 눈이 있고 귀가 있을 때 보통 우리 눈이 사물을 본다, 이렇게 이야기를 하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는 눈을 통해서 내가 보고, 귀를 통해서 자아, 내가 듣습니다.
그런데 막상 천사라든지 하나님의 약속에 대해서 우리가 아무리 귀가 들려도 하나님이 있는 것을 인정하지 않고 예수님께서 실제로 이 땅에 나타나도, 예수님을 보기도 하고 만지기도 하고 소식을 듣기도 해도 그분이 하나님에게서 오신 것을 우리 자아가 믿지를 않아요. 그래서 사람에게 눈과 귀가 있다는 것이 사람에게 도리어 방해가 될 수가 있습니다.
오늘 똑같은 일이 벌어졌습니다. 이 사가랴라는 사람은 제사장, 요새 같으면 목사 아닙니까? 그러면 그 사람의 눈과 귀라 하는 것은 무엇 때문에 달려 있는가? 하나님이 주신 하나님의 일과 그 약속을 드러내라고, 증거 하라고 눈과 귀와 신체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 사가랴는 전혀 하나님의 약속을 믿지를 못했습니다.
이와 같은 이 사가랴의 모습은 심지어 그 사람이 제사장이라 할지라도 인간이 이미 영적 장애인이라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영적장애를 알 수 있다는 것, 사가랴가 벙어리가 되었다는 것, 남들 보기에는 상당히 딱하게 여겼지만 본인이나 하나님 보시기에는 이거 큰 행운입니다. 내가 귀가 있어도 다 쓸모 짝 없는 것이고 내가 눈이 있어도 오히려 나를 지옥 보내는, 나를 저주케 하는 눈알에 불과하다는 것을 우리가 언제 깨닫겠습니까?
하나님의 특별한 은총을 받아서 그래서 자신의 눈과 귀에 하자가 있고 문제가 있음을 실제적으로 깨우쳐 주는 사건이 스가랴라는 사람에게 일어났습니다. 하나님의 이 말씀이라는 것은 사람들이 미처 예상 못한 그러한 말씀이기 때문에 인간이 갖고 있던 것과 부딪히게 되면 여기서 틈이 벌어지고 차이가 벌어지죠.
사가랴가 천사가 전해주는 말씀을 왜 못 믿었겠습니까? 18절에 보면 “사가랴가 천사에게 이르되 내가 이것을 어떻게 알리요 내가 늙고 아내도 나이 많으니이다.” ‘내가 이 늙은 나이에 어떻게 자식을 낳겠습니까? 나도 늙었고 아내도 늙었기 때문에 자식을 낳을 수 없습니다’라고 이렇게 버틴다는 것, 이게 오늘날 우리가 매일같이 운동하면서 밥을 입에다 쳐 넣으면서 그렇게 지키려고 하던 우리의 신체가 사실은 영적세계 앞에서 우리는 하나의 장애자로서 그냥 버텨오고 있는 거예요.
자식을 교회 안보내고 자식을 복음 못 듣게 하는 것은 자식을 계속 장애자로 부모가 만드는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새로운 좋은 소식은, “네가 장애자 신세에서 주님의 그 영적세계를 볼 수 있고 들을 수 있는 인간으로 전환되기 위해서는 현재 우리가 고집하고 있는, ‘나는 정상인이다. 나는 장애자가 아니다. 내가 보기에도 그렇고 남들 보기에도 그렇고 누구도 나에게 장애자라고 이야기해주는 사람이 없어. 나는 정상이야.’ 라고 여기는 이것 자체부터 뭉개져야 된다”는 겁니다.
이걸 파괴해야 되지요. ‘나는 그동안 뭔가 아무것도 모르고 깨춤 추고 살아왔다.’는 것을 지적해주는 그 작업도 하나님이 하시고자 하는 그 작업에 일부로서 포함이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고 말씀이 그냥 밀려왔다고 보면 돼요. 내가 지금까지 살아온 것도 그냥 말씀이 쳐들어 온 겁니다.
쳐들어와서 그냥 우리한테 호소를 하는 것이 아니고 우리를 아예 장악해버리고 덮쳐버리지요. 탁류가 밀려와서 우리 집이고 우리 가정이고 전부 다 싸그리 몰수해 가 버리고 우리는 우리의 의지와 상관없이 홍수 물에 밀려 떠내려가듯이 하나님의 말씀의 파도가 밀려와 버리면 우리 자체가 파도에 휩쓸리게 되는 겁니다.
에스겔 3장에 보면 하나님께서 에스겔에게 이렇게 이야기해요. ‘에스겔아!’ ‘예’ ‘말씀이 너에게 오면 너는 가차 없이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는, 진리의 말씀을 전하는 선지자노릇을 해야 한다. 만약에 그걸 알면서도 전하지 않는다면 그들이 지옥 가는 그 피 값을 내가 너에게서 찾겠다. 네가 만약에 그걸 전했는데 다른 사람들이 너를 핍박을 한다면 내가 그 사람에게 하나님의 저주의 피 값을 찾겠다.’ 이렇게 했어요.
그러니까 이 에스겔 선지자는 본인이 사명을 가지고 말고 할 것도 없어요. 그냥 하나님의 말씀이 덮쳐버리면, 뭔가 때리면, 뭔가 말씀의 능력이 와서 부딪히면, 꽝 하고 부딪히면서 그 말씀의 물결에 그 무게에 그냥 휩쓸려가서 나중에 도착해보니까 천국이라. 평생 동안 말씀에 묻혀서 살다보니까 도착해 보니까 천국이에요.
새우튀김하고 고추튀김하고 잘 구분 안 됩니다. 둘 다 노란 밀가루를 뒤집어쓰고 있는데 먹어보니 안에 새우가 들어 있으면 새우튀김이고 고추 들어 있으면 고추튀김이지요. 사람이 어떻게 구원되느냐 하는 것은 주께서 완전히 나를 장악한 것이 뭐냐? 장악한 것이 있어야 돼요.
벙어리 되어도 좋고, 이 사가랴처럼, 마리아처럼 예상 밖의 배가 불러오는, 처녀가 임신했다는 그런 황당무계한 사태가 일어나도 좋습니다. 중요한 것은 무엇이 내 인생을 밀어붙이느냐? 끝까지 인생을 몰고 가느냐가 중요합니다. 사가랴는 복 받은 사람이에요.
막상 말씀이 와 보니까 자기는 정상인이고 괜찮은 놈인 줄 알았는데 와보니까 자기는 벙어리 되어야 마땅한, 그야말로 그동안 개뿔도 아무것도 모르면서, ‘나도 나이 많고 우리 마누라도 나이 많은데 어떻게 내가 자식을 낳겠습니까?’라는 자기가 알고 있는 좁은 생각, 그것이 자신의 전부였던 겁니다.
그런데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영적 세계에 대해서 완전무지, 갇혀버리게 만든 하나의 원인이 되었어요. 나 자체가, 내가 문제가 있어서 주의 영적세계가 바깥에서 우리를 인도해도 그것을 우리는 믿지를 못하고 있는 거예요. 그러면 여기에 하나님께서 사가랴를 일부러 찾아온 그 내력이 뭐냐?
사가랴, 이 사람이 제사장입니다. 제사장이 하는 것이 이겁니다. 더러운 것을 거룩하게 전환시키는 일을 합니다. 세상의 모든 인간들의 종교라 하는 것은, 아까도 세례문답 할 때 그런 이야기를 했습니다만, 자기가 자기를 용서하는 것이 세상 인간이에요. 그런데 하나님한테는 그게 없어요. 우리가 우리 자신을 용서하거나 또 우리가 우리 자신을 심판하거나 하는 것을 허락한 적이 없습니다.
용서를 해도 우리를 만드신 분이 용서할 때 용서가 되고 심판을 해도 우리를 어떻게 보느냐 하는 것은 우리를 만드신 그 분의 몫입니다. 우리가 건방지게 나를 심판하거나 날 정죄하거나 하지 마세요. 하나님께서는 죄를 용서하시기 위해서 특별한 장치를 주셨는데 그게 뭐냐 하면 죄에서 의로 바꾸는 장치를 이스라엘 속에 남겨두었고 그 일을 한 사람이 오늘 보는 제사장 사가랴였던 것입니다.
그랬는데 이 사가랴라는 사람은 그것을 일상적으로 늘 상 했던 것이 되고 종교적인 의식, 관례가 되어서 그냥 무심코 들어가서 한 거예요. ‘나는 정상이다. 나는 정상적인 예배를 지금 드리고 있는 거야. 그래, 나는 문제없어. 나는 하자 없는 거야. 그래, 누가 나보고 욕할 사람이 없어.’라고 그렇게 했는데 정작 본인이 제사를 드리는 그것으로 구원받는다든지 죄인이 의인으로 되는 것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숨어 있는 다른 분에 의해서 우리가 용서가 될 때 우리가 용서가 되는 거예요. 그 숨어 있는 분이 마지막 때에 실체로 실제모습으로 등장하는 그 찰나에 하나님께서는 사가랴를 통해서 먼저 천사를 보내신 겁니다. 창세기 18장에 보면 하나님의 뜻이 나와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은 아브라함에게 나타났는데 ‘이 소돔과 고모라가 죄가 많기 때문에 내가 심판하겠다.’고 뜻을 나타냈어요.
그러니까 아브라함이 여기서 말리고 나섭니다. ‘의인 50명이 있으면 안 되잖아요.’ 이런 뜻이에요. ‘의인 50명이 있는데 그 소돔과 고모라에 일괄적으로 심판을 해버리면 세상의 의인이 악인과 함께 멸망하는 꼴이 되기 때문에 이것은 모순되고 하나님의 일관된 체제와 맞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의인 50명이 있어도 심판하렵니까?’ 하니까 ‘의인 50명이 있다면 내가 심판 안할게. 그런데 없다.’ 없다는 거예요.
하나님이 없다고 한 것은 뭐냐 하면 계속 심판하겠다는 것이 하나님의 일관된 뜻이라는 겁니다. 그러니까 아브라함이 운짐 달았어요. 운짐, 이거 서울사람들은 못 알아듣습니다. 속이 탔지요. 자기 조카 롯이 소돔과 고모라에서 살고 있으니까. 그래서 의인 45명? 없다는 겁니다. 그러면 40명만 있어도 심판하면 안 되잖아요. 악인과 의인이 같이 몰살당하니까 있을 수 없잖아요.
‘그런데 40명이 없거든.’ ‘그러면 30명이 있어도 심판하시렵니까?’ ‘글쎄, 30명이 없다니까.’ 그러면 20명이요. ‘글쎄 20명이 없어요.’ 무슨 뜻입니까? 주님께서 심판하겠다는 것이 일관된 뜻이라는 거예요. 아브라함이 혼자 나가서 교통순경 하듯이 ‘이러시면 안 됩니다.’ 하면서 막아도 소용없어요.
아브라함이 마지막으로 기도합니다. ‘하나님, 10명만 있어도 심판하지 마세요.’ ‘글쎄 열 명이 없다니까.’ 열 명이 없어요. 결국 없었습니다. 아무도 없었어요. 그래서 죄인을 향하여불 심판 내리는 하나님의 행위는 정당한 겁니다. 죄지은 자에게 저주를 퍼붓는 그 일을,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필히, 양보 없이, 앞뒤 사정보지 않고 해야 되는 것이 하나님의 거룩하심이에요. 하나님의 공의로우심이고.
그거 아니면 하나님이 아닙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이 하나 몰랐던 것이 있어요. 그것은 뭐냐 하면, 롯을 아브라함을 생각해서 미리 빼돌려놓고, 그래서 한명도 의인 없는 상태를 만들어놓고 나머지에 대해서 속 시원하게 유황불 때리신다는 것을 아브라함은 몰랐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생각하사 천사를 보내서 아브라함과 조카 롯에게 복음을 전합니다.
바로 이 과정, 천사를 보내서 복음 전해서 롯으로 하여금 믿게 해서 그래서 롯은 죄인이지만 아브라함을 생각해서 의인으로 전환된 상태에서 빠져나가 버리고 그 빠져나간 상태에서 죄인들만 있는 자리에 하나님께서 주저 없이 저주를 퍼붓는 이 전략, 이 작전, 그것이 오늘날 이 시대에도 똑같이 적용된다는 겁니다. 이 사가랴 시대에도 똑같이 적용되는 거예요.
그렇다면 롯에게 하나님이 천사를 보내서 뭐라고 이야기했습니까? 이 세상은 심판받으니까 너는 앞뒤 살피지 말고 빨리 빠져나가라는 거예요. ‘빨리 여기서 떠나라 네가 있는 자리가 죄가 품어져 나오는 죄가 분출하는 자리다. 거기 있으면 네 엉덩이만 데니까 빨리 빠져나가라. 빠져나가서 한번 지켜봐라. 너의 옛날 자리가 어떤 자리였던가?’
그전까지 롯은 자기를 정상인으로 봤지요. 그리고 자기뿐만 아니라 자기 아내도 정상인으로 봤고 시집가려고 준비하고 있는 자기 두 딸도 자기 눈으로 보기에 정상인이죠. 누가 뭐라고 해도 부모가 보기에는 자기 자식이 세상에서 제일 정상입니다. 서울대학 못가고 자기애가 제일 똑똑한 애고, 남에게 해코지를 해도 ‘우리 애는 그런 애가 아닙니다. 우리 애가 얼마나 착한데’ 라고 자기애에게는 관대해요.
그런데 막상 천사가 전해준 복음을 자식에게, 아내에게 전했더니만 이게 정상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심판받기로 작정된 사람들이었습니다. 아내가 남편 따라 나오는 척 했습니다. 그런데 복음에서는 뒤돌아보지 말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아내가 아쉬운 것이 있는지 뭔가 미련이 있는지 그만 뒤돌아 봤어요. 뒤돌아보는 그 때 소금기둥이 되었습니다.
그 때 소금 값이 팍 내려갔습니다. 딸 둘은 정상이었지만 그 딸과 정혼한 사위들은 농담으로 여겼습니다. 그 딸들은 시집도 못가고 그냥 나와야 했던 거예요. 지금 결혼식이 중요한 것 아닙니다. 본인이 정상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돼요. 내게 박힌 눈, 내게 달린 귀가 나를 점점 더 영적세계로부터 멀어지게 하고 나로 하여금 더욱더 저주스럽게 진노에 합당한 인간으로 만들어 가는데 그 공로와 기여가 보통이 아니라는 거지요.
내가 남들 보고 싶은 것을 보고 듣고 싶은 것을 듣는 그러한 행위자체가 나로 하여금 영적인 장애자로 점점 더 만들어가는 겁니다. 참 목사들 가운데 영적장애인들 많아요. 도리어 목사치고 영적장애인 아닌 사람들이 드물어요. 이러한 하나님의 새로운 복음이 들어와 버리면 그동안 ‘주체로서 나는 모든 것이 정상이다. 제대로다.’ 한 그 자리에 그 주체가 찢어지면서 틈이 나와요.
그러니까 하나님의 새로운 계시는 우리에게 틈을 만들어 내는 겁니다. 틈을 만들어내면 나는 졸지에 정상이라고 여기는 것이 새롭게 올라오는 하나님의 계시에 비하면 나는 저주받아 마땅하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겁니다. 고린도전서 11장에 보면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예수님의 죽으심을 기념해서 고린도교회에서 성찬식을 했는데, 예수님의 떡과 예수님의 피를 나누면서 사도바울이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너희가 이 떡을 먹으며 이 잔을 마실 때 마다 주님의 죽으심을 오실 때까지 전하는 것이라.’ ‘주님의 죽으심을 오실 때까지 전하는 것이라.’라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이 말은 멀쩡하다는 우리를 죽을 죄인으로 저주받을 죄인으로 만드는 것은 새로운 자리가 형성되어 올라와야 돼요.
그 새로운 자리가 뭐냐? ‘주님께서 누구 때문에 죽었느냐? 주님께서 누구 때문에 살점이 찢어졌느냐? 네가 예수님과 그 십자가 찢어짐 위에서 진정 네가 정상인인지 비정상인지를 파악해 본적이 있느냐?’ 그리 되는 겁니다.
예수님의 죽으심의 자리를 날마다 기념하고 되새김으로 말미암아 나라는 것은 나 단독적으로 내가 누구냐, 하는 것을 비판하고 평가할 것이 아니라 나로 하여금 나를 살게 하는 예수님의 죽으신 자리, 그 자리에서 날마다 다시 한 번 내가 어떠한 존재인가를 재삼 확인하는 것, 그것이 매일같이 우리 자신이 새로운 피조물인 것을 부각시키는 자리가 되는 겁니다.
그 십자가 자리를 영적인 목사들이 막아버린 거예요. 소위 영적이라고 자처하는 목사들이. 사실은 그들이 장애자인데. 그 십자가를 막아버리고 ‘예수님의 죽으심? 이제 그만해라. 많이 들었다.’ 이렇게 하고 있어요. ‘예수님의 십자가 죽으심, 이제는 입을 다물자. 더 이상 이야기하지 말자’는 거예요. 왜? 자기가 정상이고 싶어서.
‘나는 목사인데 정상이거든.’ 이렇게 목사 자기가 정상인 것을 교인들에게 압력을 주기 위해서 그 짓을 하고 있어요. 그래서 고린도전서 11장 32절에 보면, “우리가 판단을 받는 것은 주께 징계를 받는 것이니 이는 우리로…” 여기 중요합니다. “…우리로 세상과 함께 죄 정함을 받지 않게 하려 하심이라.” 무슨 뜻입니까? 예수님의 죽으심을 날마다 확인하는 사람만이 세상과 함께 저주받지 않는 상태에서 롯처럼 빠져나오고 있는 중이다, 그 말이지요.
그냥 가만히 있으면 세상과 더불어 정죄 받는 거예요. 그러니까 하나님의 일관된 뜻은 변함이 없습니다. 세상을 몽땅 정죄하는 거예요. 세상을 미워하는 겁니다. 우리는 주님을 사랑하기 위해서 세상을 사랑하면 안돼요. 우리는 주님의 용서하심 때문에 세상을 용서하면 안돼요. 세상을 용서하면 안 된다고요. 왜? 주님의 용서를 드러내기 위해서.
그런데 우리는 남들을 정상인으로 간주함으로써 자꾸 자기를 스스로 정상인으로써 자꾸 엮을려고 합니다. 우리는 십자가의 예수님의 죽으심을 보고 ‘내가 정상인이 아니구나.’ 라는 것을 안다면 ‘저분도 정상이 아니야.’ 이래 되어야 할 것인데 ‘누구 나 사랑해 줄 사람 없소? 그러면 나도 당신을 정상인이라고 인정해 줄 테니까 당신도 나를 정상적인 사람이라고 인정해주소.’
저희끼리 정으로 오고 가고 난리 났어요. ‘우리는 사랑하는 형제니 한 몸이다.’ 라고 하면서 뭐하는 짓인지 몰라! ‘세상과 함께 죄 정함을 받지 않는다’는 말이 무슨 뜻이냐 하면, 내가 좋아하는 박 찬호, 내가 좋아하는 박 지성, 내가 좋아하는 추 신수와 함께 정죄함을 받지 않는다, 그 말입니다. 내가 만약 조 용필을 좋아한다면 내가 그렇게 좋아하는 조 용필과 함께 지옥가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주께서 죽었다, 이 말입니다.
내가 만약 자식을 좋아한다면 내가 좋아하는 자식과 함께 지옥가지 않게 하기 위해서 주께서 따로 복음으로 분리시켜 놓았다, 그 말입니다. 이게 얼마나 단호한 계시덩어리, 말씀덩어리입니까? 그래서 사가랴에게 말씀이 임했다는 말은, 그 순간만큼은 모든 세상관계에서 다 끊어졌다, 이 말입니다. 이 끊어진 상태가 하나님의 계시의 말씀의 능력에 휩쓸린 상태에요.
계모임, 동창회 25회, 사물놀이 이 모든 관계. 교인이 교회 오는 것은 교회밖에 나가면 또 딴생각하니까 그것 말고요, 성도가 교회 온다는 것은 죽으려고 오는 거예요. 모든 관계가 끊어져서 벙어리 되려고. 벙어리 삼년, 귀머거리 삼년이 아닙니다. 평생가야 돼요. 평생 벙어리, 평생 귀머거리 돼야 돼요.
그렇다면 이처럼 왜 주님께서는 세상을 자기가 만들어놓고 자기가 심판하시려고 하는가? 그것은 다 같이 정죄 받아야 되는데, 정죄 받지 않고 따로 뽑아져 나오는 사람들은 무슨 효과 때문에 빠져나왔느냐를 알아야 돼요. 그것을 가지고 언약의 효과라고 합니다. 언약 안에서 새로운 자아를 만들어 내기 때문입니다. 그 언약이 창세기 4장에 뭐라고 되어 있느냐 하면 ‘핏 소리가 땅에서 올라온다.’ 고 되어 있습니다.
지금부터 제가 약간 어려운 이야기를 할 테니까 정신을 바짝 차려야 됩니다. 창세기 9장에 보면 하늘에 비행접시처럼 무지개가 떠 있어요. 그 무지개가 떠 있으면서 뭐라고 되어 있느냐 하면 ‘내가 다시는 물로서 정죄하지 않겠다. 왜, 날 때부터 악하기 때문에. 하지만 너희에게 햇빛과 공기를 주시는 이 은혜가 위에 있는 무지개 때문이 아니고 위와 땅에 있는 무엇과 관련되어 있기에, 땅에 관련된 사항 때문에 내가 물로서는 두 번 다시 심판하지 않겠다,’고 되어 있어요.
그 땅에 관련된 사항이 뭐냐? 바로 ‘피’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땅에 억울한 피를 생산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흘렸던 억울한 피가 세상 사람들과 똑같이, 일 년에 250만이 다녀간다는 그 갓 바위에 다녀가는 그 사람들과 똑같이 지옥가야 되는 우리를, 그 하나님의 흠 없는 억울한 피가 우리 마음, 영혼을 적시게 되면, 그 예수님의 죽으심이 우리 저주를 대신하기 때문에 우리는 따로 분류되어서 뽑아 나오는 하나의 복음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무지개언약 밑에 뭐냐? 피 이야기가 있어요. 그것을 피 값이라고 합니다. ‘내가 피 값을 찾으리라.’ 성경에서 제일중요하고 어려운 이야기인데 ‘내가 피 값을 찾으리라’ 하는 말은 뭐냐 하면 하나님께서 자기 아들을 이 땅에 보내셔서 악마의 조종을 받는 모든 인간들로 하여금 몰매를 맞아서 하나님이 사람에게 피살을 당했다는 그것을 근거로 해서 ‘그 피 값을 내가 찾겠다.’는 식으로 이 세상을 정죄하고 저주해버립니다.
그런데 이 피 값은 동시에 뭐냐?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구원하기로 하고 준 게 있는데 그게 제사입니다. 흠 없는 어린양을 매일같이 잡음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마땅히 죄인이며 저 어린양의 피가 우리를 용서한다.’는 것을 인정하는, 그래서 죄가 의로 전환되는 장치가 하나님의 피에 있다는 것을 믿는 사람한테는 죄인이지만 세상과 함께 정죄 받지 않는 조치를 한 거예요.
어렵게 했지만 쉽게 하면 이렇습니다. 주님의 피는 낭비하거나 허비하지 않는다는 말이지요. 공연히 죽고 난 뒤에 본전도 못 찾는 그런 법은 하나님의 피 한테는 없다는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피를 쏟았으면, 사람들에게 타살을 당했으면 반드시 보복이 있기 마련이지 그냥 무마해서 지나가는 법은 없다, 이 말입니다.
그 피는 예수님의 사랑의 피요, 그리고 사람들의 죄가 등장하는 피 이기 때문에 오직 예수님의 사랑의 피는 구원받을 자기 백성에게만 의인될 사람에게만 죄인을 의인으로 바꾸는 효력으로만 그 사랑의 피가 전달되는 겁니다.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소위 ‘나는 정상이다. 나는 피 없어도 된다.’라고 하는 인간을 아예 영적인 벙어리로 만들어버려요.
사가랴 같은 경우는 진짜 벙어리 만들어버렸어요. 예수님의 용서의 자리가 왜 우리에게 평소에 감으로 느낌이 오지를 못하느냐 하면 이 영적인 장애자인 주제에 자꾸 ‘나는 정상인이다. 나는 내 힘으로 자식 다 키웠다. 시장바닥에 노점상해가면서 자식 네 명 대학 다 보냈다. 그런데 하나님이여, 이런 부모, 이렇게 훌륭한 어머니 있으면 나와 보라고 하세요.’라고 자기모델에 대해서 자꾸 정당성을 갖고 있어요.
그러니까 자기 눈과 귀로는 영적인 세계에 대해서 보지 못하고, 남보다 내가 더 훌륭하고 더 부지런하고 더 착하다는 자기 자신의 주체를 드높이는데 그걸 사용한 거예요. 그런 인간 앞에 주님께서 나타나버리니까 그 주님조차 떠밀어버렸어요. ‘나는 의인인데 왜 당신이 나보고 죄인이라고 그래?’ “‘너는 죄인이거든 너는 내 피가 아니면 용서 못 받거든.’ 라는 말을 왜 건방지게 이렇게 잘나고 훌륭하고 열심히 살아가는 나에게 하느냐?” 이 말입니다.
그때 예수님은 말합니다. ‘네가 어떤 인간이냐 하는 것은 너의 주체의 자리는 찢어져야 되고 하나님이 이 땅에서 희생당했다는 그 피의 자리에서 다시 한 번 너의 모습이 어떠냐? 네가 어떤 존재냐? 심판을 누가 하며, 정죄를 누가 하며, 또 용서를 누가 하는지 네가 아느냐?’ 이 말입니다.
하나님이 말씀했습니다. ‘나는 은혜 줄자에게 은혜를 주고 긍휼을 입을 자에게 긍휼을 준다.’ 이렇게 이야기했는데, 인간은 자기가 용쓰고 애쓰고 수고한 그것 가지고 자기를 용서 다 해버려요. ‘하나님, 나쁜 짓은 했지만 그래도 그 뒤에 개과천선해서 착한 일도 많이 하잖아요. 그러니까 그 착한 일을 봐가지고 나쁜 짓 과거에 많이 한 것 그만 덮어 주이소.’
만날 이래 나오더라는 말이지요. 바로 그 짓이, ‘과거에 나쁜 짓 많이 했다가 착한일로 전환된 나는 얼마나 훌륭하고 정상적이고 대견한 인간인가?’를 또 주장하고 있는 거예요. 사람들, 특히 목사들은 그것을 뭐라고 하는 줄 압니까? 그걸 새 생명이라고 합니다. 영적장애자에요, 영적장애자! 아무것도 몰라! 그런 식으로 의인될 것 같으면 소돔과 고모라 심판 안 받습니다.
아무리 사회가 썩어도 훌륭한 사람이 있게 마련이고 훌륭하고 착한 DNA가 있으면 그대로 인수받아서 그대로 착하게 살아가는 사람 많습니다. 그리고 나쁜 짓을 해도 또 사랑하는 사람 만나면 마약도 끊고 새사람 되어서 부활된 사람들 많아요. 두 번씩이나 서대문 갖다 와도 부활되어가지고 돈벌이 잘하는 사람들 있습니다. 김 태○이라는 가수가 그래요.
그러니까 개과천선한 그 인간이 자기가 보기에 얼마나 흐뭇하겠습니까? ‘나같이 이렇게 반성 잘하고 나 같이 인간성 잘되려고 애쓴 사람 있으면 나와 보라고 그래.’ 얼마나 자기를 대견하게 보고 긍휼히 보겠습니까? 그런데 그것 자체가 뭐냐 하면 본인의 자리가 영적 장애자라는 것을 감추고 있는 거예요. 예수님이 왜 죽었습니까? 주의 죽으심을 왜 자꾸 되풀이 해야 되는 겁니까?
그게 바로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와 용서를 인간적인 것으로 때우기 하는 식으로 그냥 넘어가는 것은 거룩한 하나님의 입장에서는 용서가 안 됩니다. 이제 말씀을 맺고자 합니다. 사가랴, 얼마나 훌륭합니까? 이 사람 나쁜 짓 한 사람 아니에요. 하지만 막상 그 착하디착한 사람도 막상 진짜 하나님의 계시와 말씀을 들고 나온 가브리엘 앞에서 벙어리 될 수 밖에 없는 영적 장애자였습니다.
벙어리 되고 난 뒤에 아무소리 못하고 기껏 내가 아는 것은 ‘쫌생이, 정말 쫌생이, 정말 기껏 아는 것이 요것밖에는 모르는, 아무것도 모르면서 감히 하나님께서 아시는 이 큰 흐름을, 주께서 그 죽으신 대가로 말미암아 용서받는다는 이 흐름을 감히 내가 반대를 했다, 믿지를 못했다. 나중에 세례요한, 아기가 나오는데 그 아기는 엘리야의 심령으로 나올 것이다.’
그 엘리야의 심령이라는 것은 또다시 마찬가지에요. 이 세상은 정죄 당해야 되고 오직 예수님의 피로만 구원받는다는 그 엘리야의 심령이 또 다시 나올 거예요. 그 엘리야의 심령을 아버지부터 먼저 받는 겁니다. 거꾸로 자식이 엘리야 같으면 이제는 아버지가 그런 것을 호되게 한 번 당해야 되는 거예요. 우리의 자리로 주께서 오심을 잊지 마시고, 세상의 모든 그 원천이 있다는 것, 모든 세상의 운명이 결정되는 그 분출구는 ‘하나님의 의’라는 ‘의’입니다.
우리가 스스로 챙기는 의 말고, ‘자기의’ 말고. 그야말로 의인 10명, 할 때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의인데 그 의는 오직 예수님의 의만이 오직 하나님나라에서 진품으로 받아준다는 겁니다. 그게 피 값입니다. 자신의 선행은 그것은 가짜고 그것은 중국산입니다. 그것은 베트남 산이고 그것은 얼마 쓰지도 못해요. 진짜 천국의 상품은 인간이 만들어내지 못하고 하나님의 아들, 예수의 살과 피에서 나온 그 정품이 우리를 살립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교회 나오면서 자신의 모든 관계를 끊지 않고 자기 잘남을 위하여 사적인 생각을 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하나님, 그 피의 용서에 휩쓸리면, 주님의 무서운 정죄에 휩쓸리면 이 땅 모든 것이 바로 영적장애인이나 할 짓인 것을 이제 알게 되었습니다. 우리의 자녀들, 우리 식구들을 영적 장애인으로 만들지 말고 우리의 가진 천하의 모든 것, 우리가 가진 돈 보다도 예수님이 흘리신 그 피가 더 귀하고 정품인 것을 저희들이 깨닫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