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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

20091106b울산강의-출애굽기6장자유게시판출애굽기

20091106b울산강의-출애굽기6장

이름 : 한윤범(IP:119.192.174.148)

20091106b울산강의-출애굽기6장

(강의:이근호 목사)

하나님의 나라에 백성이 있어야 된다는 아이디어가 우리 인간들 아이디어가 아닙니다. 왜냐하면 인간들은 하나님에 관심이 없어요. 인간들의 관심사는 자기가 가치 있고, 복 받고 그게 인간들의 관심사죠. ‘나 복 주세요.’라고 관심이 있어요. ‘우리 교회 합시다.’ 이것도 관심 없어요. 각자 내가 교회 했다는 걸 통해서 나 복 받으면 그만 이에요.

그러나 하나님은 그걸 가지고 그러니까 너는 저주 받아 마땅하다 이 말이죠. 왜? 관심사가 하나님이 어떤 관심을 갖고 있느냐는 없고, 사람은 태어날 때부터 저주 받아야 마땅한 존재의 티를 내는 것처럼 관심사가 자기한테 있단 말이에요.

그러니까 자기가 말하는 축복이란 것은 축복과 저주를 누가 만드느냐 하면, 내가 원하는 식의 축복과 저주를 생각하는 거예요. 그런데 이게 뭐냐 하면, 내가 뭘 갖고 있습니까? 이름을 갖고 있는 거예요. 이 이름이 무슨 이름이냐? 우리 이름은 저주 받아야 될 이름이거든요. 저주 받아야 될 이름이 축복과 저주를 내세울 때 이 축복과 저주도 저주 받아야 마땅한 거다.

이름 자리에 이러한 사고방식에 변화가 일어나요. 제일 먼저 변화가 일어난 사람이 아브라함이었고, 그 다음에 이삭이었고, 그 다음 야곱이었잖아요. 그때에는 아브람이 아브라함으로 바뀌었고, 사래가 사라로 바뀌었죠. 사래가 사라로 바뀔 때, 아브람이 아브라함으로 바뀔 때 그 사람들은 뭘 생각했습니까? 하나님의 나라가 이뤄져야 되는데? 그 생각했습니까? 아닙니다. 어쨌든 간에 아들 하나 낳아야 되겠다. 어쨌든 간에 우리 가정 복 받아야 되겠다. 그 생각한 거예요.

그리고 특히 사래라는 여자는 자기가 본처면서도 여종 하갈이 아들 낳으니까 어떻게 했습니까? 얼마나 미워하고 구박했어요. 막장 드라마 아닙니까. 그러니까 너무나 학대에 못 이겨서 불쌍하디 불쌍한 엄마 하갈은 자기 자식 안고 가출하잖아요. 왜 사라가 미워했겠습니까? 주체가 누구에요? 사래 자기잖아요. 사래란 말은 누구 이름? 나를 위한 내 이름이란 말이에요.

우리는 구원받아야 될 성도라 하면서도 실제 살아가는 것은 여호와 이름이 아니고 누구 이름? 나를 위한 내 이름의 영화, 나 잘되기 위한 그 모든 욕망의 핵심 부분을 뭐라고 하느냐? 그걸 ‘이름’이라 하자. 그들이 바벨탑 지을 때 누구 이름 내려고 했습니까? 우리 이름을 어디까지? 하늘까지 내보자. 그들이 열심히 땀 흘려 한 것이 전부다 자기들 이름 하는 거예요.

이름이라 하는 것은 자아 또는 주체의 결집을 바깥으로 표현한 그 자리가 그게 쉽게 말하면 아까 말한 내 이름 자리, 내 자리. 그 내 자리가 이제는 진짜 축복 주시는 그분이 와서 이걸 여호와 이름으로 바꿔버리면, 내가 전에 개인적으로 생각했던 축복과 저주도 바뀌어야 되겠죠.

바뀌어야 되는데 인간의 자기 능력으로 바뀌겠습니까, 안 바뀌겠습니까? 바뀔 턱이 없죠. 바뀌지 않으니까 언약의 능력으로 조지는 거예요. 압박을 가하는 거예요. ‘너희들이 생각하는 축복은 사실은 저주고, 너희들이 생각하는 저주가 사실은 축복이다.’라고 아브라함 바뀌듯이, 이삭 바뀌듯이, 야곱이 이스라엘로 바뀌듯이 바뀌어야 되는 거예요. 우리 창세기 공부하면서 야곱이 바뀌는 것 공부했잖아요. 야곱이 이스라엘로 바뀌었지요. 완전히 얻어맞지 않습니까? 깨지고 얻어맞고.

그런데 이걸 집단적으로 바뀌는 겁니다. 그 바뀔 때 야곱의 아들, 요셉 가정에 바뀌게 되는데 요셉 가정에 야곱에게 주신 하나님의 언약이 요셉 가정에서 세 식구, 네 식구가 아니고 몇 식구였습니까? 70명. 많이 불었지요. 엄청나게. 많이 분 것은 누구 덕분입니까? 그전까지는 여호와 이름으로 주체가 안 나타나고 그냥 전능하신 하나님으로 나타난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그 전능하신, 그냥 약속만 주신 하나님의 약속 속에 너희들이 이방인의 객이 되어서, 아까 창세기 14장이죠.

창세기 15장 13절에 이방에서 객이 되어서 사대 만에 돌아온다는 숨겨진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이야기했잖아요. 사대 만에 돌아왔을 때 소 식구가 아니고 많아졌으니까 이게 하나의 나라가 돼요. 그때부터 오늘 본문 출애굽기 6장 7절에 보면 그걸 ‘내 백성’이라 해요. 백성이란 말은 뭔 뜻입니까? 이미 하나의 나라로서 형성되는 거예요. 그 시점에 주님께서 그동안 안 나타낸 ‘내가 바로 언약의 주체가가 맞다’고 자기 이름을 드러내죠. 이 이름은 특정 가정을 구원하는 게 아니고 하나의 나라를 형성하기 위한 이름으로써 등장하는 거예요.

그러면 하나님이 직접 임금님 돼버리면 무엇과 차별화 되느냐 하면, 다른 나라들에게 신들의 이름이 있어요. 왕은 그 신의 이름을 대행해서 왕이 되는 거예요. 모든 민족이 다 그래요. 왜 그러냐고 물어보시면, 여러 백성들이 있을 때 백성들을 하나로 묶으려면 너나 나나 관계없이 하나의 신처럼 군림한 이름을 불러줘야 이게 단결이 돼요. 하나의 결집력이 형성된다고. 왕이 두 명 되면 곤란하잖아요.

그러면 이 왕은 뭐라고 하느냐 하면, 내가 여러분 왕이 된 것은 하나님의 역사였습니다. 대구강의에서 그런 이야기했는가요? 하나의 역사를 바꿀 때는 반드시 역사의 끝을 무엇과 연결시킨다? 묵시와 연결시킨다고 했어요. 그걸 ‘연호’라 하지요. 임금이 바뀌면 그 다음부터는 세종 몇 년 하지요. 왜 갑자기 지나온 역사를 없애버립니까? 내가 나 된 것은 하늘의 뜻이다. 그래서 지나간 역사는 지나간 것으로 청산하고 새로운 역사가 개시된다. 항상 모든 옛날의 왕들은 신의 이름과 관련돼있습니다.

이러한 민족 가운데서 주님께서 새로운 나라로 등장하면서 그 임금님으로 여호와라는 신을 등장시키면 그때부터는 이 이스라엘 나라는 자기들끼리 구원받는 곳이 아니라 이쪽이 축복이 돼버리면 자동적으로 이쪽은 저주가 되는데, 저주가 된다고 이 사람들이 섭섭해 할 이유는 전혀 없는 거예요. 왜냐하면 로마서 5장 9절에 의하면 모든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당연히 저주받아, 진노 받아 마땅하기 때문에.

그런데 저주받아 마땅함을 알면 되는 거예요. 인간들이 저주 값을 한다고 뭐라고 하느냐 하면, 저주 받을 생각은 안 하고 자기는 마땅히 축복받아야 될 거라고 생각하는 거예요. 그들의 축복을 뭐라고 하느냐? 사람들은 그걸 ‘영원성’이라. 우리나라는 영원히. 저주는 소멸하고, 축복은 영원히 계속 가거든요. 번창하고. 그런데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축복함으로 말미암아 이스라엘만 영원히 가는 거예요.

전에 가야산에서 했지요. 인자의 나라는 어떤 나라다? 영원히. 그런데 거기에 비해서 기존의 세상의 모든 나라는 바벨론 짐승처럼 되어서 나중에 바벨론에 있는데 느부갓네살 금신상 있으면 뒤에서 떠미는 힘에 의해서 넘어지고 조그마한 돌멩이 하나 와서 철과 진흙으로 섞여 있는 걸 때려 부수면 거기서 뭘 이룬다? 태산을 이루죠. 그 인자의 나라는 영원하죠. 영원하다는 말은 이게 축복이다.

영원한 축복의 나라를 위하여 이 세상 나라는 영원한 축복의 나라에게 모든 것을 내주고 저들은 저주받아야 될 나라. 이 나라는 언약이 없는 비 언약적 나라고 이스라엘은 언약의 나라다. 그래서 비 언약 나라는 개 같은 나라, 저주받아 마땅한 나라고 이쪽 나라는 언약이 있는 나라는 복 받은 나라라고 생각하는 겁니다.

이게 마태복음 8장에 보면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자손에게 이게 주어진다고 누가 생각했어요?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이 주장했는데 예수님께서는 백부장한테 들으셔서 나라의 본 자손은 다 쫓겨날 것이고 이방인 같은 사람들이 그 천국을 나라의 본 자손을 차지할 것이라고 해서 새로운 주의 이름이....

결국 인간은, 참 이게 어렵지요. 인간은 분명히 이스라엘 언약을 받고 했지만 언약을 받고 해석하는 누구 위주로? 우리는 아브라함 자손 위주로 생각하는 그것이 바로 곧 숨겨져 있는 저주성이 성경 해석하는 이름으로 바깥으로 튀어나는 거예요. 우리의 숨겨진 저주성이 성경 해석이라는 이름으로 이걸 축복으로 전환시켜놨다가 마지막에 심판주 되시는 예수님 오니까 들통나버리는 겁니다.

‘너 해석 잘못했다.’ 왜요? 너는 진노 받아야 마땅하다. 할례 하라 해서 할례 했잖아요. 표면적 할례가 할례가 아닌데. 할례 하라며? 아니야. 할례는 이면적, 마음에 할례 해야 돼. 완전히 예수님 오셔서 그러니까 우리한테 율법을 주어졌잖아요. 너, 몰랐나? 율법을 준 것은 너의 모든 것을 죄 되게 하기 위해서 율법 준 거야.

로마서 4장에 나오잖아요. 인간은 모든 것이 거짓 되돼 하나님은 참되시다. 인간은 모든 것이 거짓됨을 이야기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누굴 모델로 사용했어요? 이스라엘 나라를 모델로 사용합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그걸 몰랐지요. 자기 딴에 제대로 해석했으니까 복 받은 줄 알았죠.

그래서 결론 뭡니까? 결국은 피. 피로 구원되지 해석 잘해서 구원되지 않습니다. 인간이 성경 공부해서 구원되지 않고 오직 예수님의 피로 구원되는 이유가, 우리는 해석을 하든, 교회를 다니든 그것은 우리 내부에 있는 저주받아 합당한 속성들이 나와서 교회 다니고, 그런 저주받아 마땅한 그런 성질로 헌금했고, 그런 걸로 성경 공부했고, 우리는 다 저주받아 마땅한 것이 노출되죠. 그래서 예수의 피 앞에서 우리는 저주받아 마땅함 이 드러나는 그 관계를 가지고 ‘의’라고 합니다. 하나님 의 앞에는 것은 자기 의를 내세울 수가 없는 겁니다.

제가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이렇습니다. 그러면 저주가 오는 것이 합당한데 과연 우리에게 저주가 왔습니까? 저주가 오는 것이 아니고 성도한테는 은혜가 오죠. 은혜가 와서 뜯어보니까 그 안에 저주도 있고 축복도 있어요. 저주받아야 마땅하고 은혜가 주어지면 저주도 오고 축복도 와야 되는데 왜 저주는 안 오느냐? 은혜 안에 뭐가 들어 있느냐 하면, 이 축복이 이 저주를 제거하는 모든 저주를 대신 감당한 축복이 우리에게 주어지잖아요. 이게 긍휼이에요.

그 작업을 이제 열 가지 재앙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하시는 거예요. 주의 이름으로. 열 가지 재앙의 특징이 뭐냐 하면, 일 번부터 사 번까지는 이스라엘과 애굽 양쪽 다 재앙을 얻어맞아요. 그 다음에 다섯 번째, 여섯 번째부터는 애굽의 술객들은 못하고 모세를 통해서 나타난 하나님만 하실 수 있는 것이고, 다섯 번째부터 아홉 번째까지는 이스라엘 사는 땅에는 그런 재앙이 안 오고 저쪽에 애굽 사람에게만 재앙이 오게 돼있어요.

마지막 열 번째 재앙은 양쪽 다 와요. 그때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장자가 안 죽는 것은 그동안 나타나지 않았던 주체가 나옵니다. 어린양이 등장해요. 그때부터 이스라엘 백성의 장자는 영원히 이스라엘 소유에서 벗어나서 하나님 소유가 됩니다. 그 과정이 나라는 주체에서, 내 이름이라는 주체에서 여호와라는 이스라엘 임금의 주체로 달라지는, 변동하는 경유, 경과되는 모든 과정을 그런 식으로 열 가지 재앙을 통해서 설명을 해주고 있죠.

처음에는 뭐냐? 야, 우리는 언제 애굽 떠나노? 첫 번째부터 네 번째 들어가면 애굽 땅이 좋다, 좋다고 했더니만 살만한 곳이 못 되네. 물이 피가 안 되나. 개구리가 밥상에 다 올라오고. 아이고, 모기, 파리. 또 뭡니까? 모기 그 다음에 파리. 정나미가 뚝 떨어져. 갑시다, 갑시다. 도저히 못 살겠다. 이런 동네인 줄 몰랐네. 아직까지는 이스라엘 백성은 자기가 저주받아야 합당한 걸 몰라요. 다만 이곳에 못살겠다고 나와요.

다섯 번째부터 아홉 번째까지는 특별 대우해주시네. 세상에 고맙게도. 죽어라 애굽. 그러나 마지막 열 번째 재앙이 오니까 그렇게 우리가 좋아할 수가 없어요. 왜냐하면 ‘하나님이여, 날 구원하소서.’라고 했던 이제는 그 주체마저 새로운 어린양으로 등장하는 주체에 우리가 오히려 종속되어야 되고 예속되어야 된다는 거예요.

캥거루 새끼들 보세요. 캥거루 새끼는 엄마 품에 모여들어서 엄마가 데리고 나가는 식입니다. 언약의 주체자가 언약의 백성을 모아야 무엇의 공격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느냐 하면, 비 언약에게 주어지는 저주로부터 무사히 벗어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호와라는 주체 없이 맨 몸으로 이 저주를 통과하려면 그 사람이 저주받습니다. 히브리인들이라고 저주 안 받는 게 아니에요. 아무리 히브리인이라도 문설주에 피 없으면 그대로 그 집도 애굽인과 똑같아요.

혈통이 문제가 아니고 언약이 문제입니다. 언약이 우리를 살려요. 언약이 살리지 내 육과 혈이 날 살리는 게 아니에요. 내 열심이 날 살리게 아닙니다. 하나님의 약속에 의해서 약속된 사람이 되면 우리를 약속의 사람으로 해줬던 그 약속의 주체자 되신 주님에 의해서 우리가 구원받는 겁니다. 그것이 예수님의 피로 된 거예요.

그러면 성도가 하루하루 살아가는 것은 일기장이 있다면, 일기장에다 10월 31일 화요일. 오늘은 시월의 마지막 밤. 11월 1일, 쭉 나온다면 일기 내용은 하나밖에 없어요. 피, 피, 피. 왜냐하면 모든 것이 피로만 구원된다는 여러 가지 일들이죠. 그러면 피라는 것은 핵심이기 때문에 ‘10월 28일, 오늘은 맑음. 아침에 아내가 설거지하다가 그릇을 깼다. 해놓고 남편 탓한다. 남편이 돈 못 벌어줘서 성질나서 깼다. 어쩌면 좋아.’ 썼다고 합시다. 이 내용이 뭡니까? 한 자로 하면 ‘피’로 구원이죠. 피 아닙니까.

이게 텍스트라면, 성경이라면 성경해석은 뭐 해야 돼요? 아침에 맑음. 아침에 왜 맑을까요? 피 생각하며 맑음. 그릇은 왜 깼을까요? 새삼 남편하고 아내하고 다투었을까요? 더 이상 아내 신경 쓰지 말라고. 좋은 아내라고해서 구원받는 게 아니라고. 그릇은 왜 깼을까요? 그릇 안 깨진다고 복이 아니라고. 모든 것이 결국은 피로 되지요.

10월 3일. ‘학교 갔는데 학생이 말을 안 듣는다. 학부모 와서 따지고 있다. 사표 내버렸다.’ 일어났습니다. 이것 핵심은 뭡니까? 한 자로? ‘피’죠. 못된 애가 학교 있든 간에 피로 구원받죠. 착한 애 있다고 구원받는 게 아니고.

결국 우리는 이런 일기장을 쓴다는 것은 누구 중심입니까? 나라는 이름의 내가 생각했던 축복을 기대대로 안 되니까 내가 내 유리한 대로 축복을 생각했는데 아침 뉴스 보면 잘 안 되니까 우리는 거기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자기 주제파악을 못하고 은혜를 생각하지 못하고 하나님께 원망하죠. 원망하는데 가만 생각해보니까 그러한 저주받아 마땅한 나를 피로 말미암아 우리로 하여금 언약이 그런 못난 우리를 구원으로 인도함을 보여주기 위해서 오늘도 이런 사태들이 벌어진다는 겁니다. 그게 바로 열 가지 재앙이에요.

열 가지 재앙은 그대로 오늘날 이뤄지는 걸 보여주는 책이 바로 요한계시록입니다. 요한계시록에 그 어린양의 피가 출애굽기에는 마지막에 나오잖아요. 그런데 요한계시록은 1장부터 나와요. 피부터 나옵니다. 끝까지 나와요. 처음 1장 7절에 어린양을 찌른 자도 볼 것이요 해서 요한계시록 마지막에 어린양의 보좌가 나와요. 그래서 생명수가 나오죠.

그래서 요한계시록은 이미 열 가지 재앙이 하나의 묵시 밑에서 같은 공간에서 일어나는 아무리 시간이 흐르고 이천 년 되든 말든 간에 그 역사의 흐름 관계없이 같은 장소에서 일어나는 언약과 비 언약 된 사람의 분리작업, 주의 이름이 있는 사람과 짐승의 이름이 있는 사람과의 분리작업을 요한계시록이 보여주는 겁니다.

그래서 여기서 정리해보면 이렇습니다. 여호와란 이름이 등장한 이상은 시간은 없어요. 여호와 이름 밑에는 시간은 별 의미 없습니다. 애굽에서 몇 킬로 떨어졌는가도 별 의미가 없어요. 그걸 ‘동행’이라 해요. 애굽에 있든, 홍해 안에 있든, 광야에 있든, 약속의 땅에 있든 주의 이름에서 나오는 것은 한결같이 그 백성들을 언약으로 인도하는 하나님의 은혜가 있는 이상은 주위에서 어떤 사태가 일어나도 구원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작업을 이제는 모세가 그 속에 끼어서 이 일을 해야 되는 겁니다. 모세, 파이팅! 모세가 이 일을 할 수 있을까요? 13절 봅시다. “여호와께서 모세와 아론에게 말씀하사 그들로 이스라엘 자손과 애굽 왕 바로에게 명을 전하고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게 하시니라” 이야기해놓고 후손들을 이야기하죠.

30절 봅시다. “모세가 여호와 앞에서 고하되 나는 입이 둔한 자이오니 바로가 어찌 나를 들으리이까” 7장에 들어가면,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볼지어다 내가 너로 바로에게 신이 되게 하였은즉 네 형 아론은 네 대언자가 되리니 내가 네게 명한 바를 너는 네 형 아론에게 말하고 그는 바로에게 말하여 그로 이스라엘 자손을 그 땅에서 보내게 할지니라”

한번 물어봅시다. 수도관에서 직접 물 받으면 수돗물 되죠. 그러면 여기서 빨간 호스를 꽂아서 한 5미터 떨어진 화장실에서 그 물을 받으면 호스물입니까, 수돗물입니까? 수돗물이죠. 이게 요한계시록에 나옵니다. 사도 바울이 나는 그리스도의 종이라 할 때 참 재미있는 것은 사람은 누굴 공격합니까? 예수 이름을 빙자해서 누굴 공격하느냐 하면, 사도 바울을 이단이라고 공격합니다. 그것도 예수 이름을 빙자해서.

다시 말해서 너는 예수의 종이 아니라고 겁니다. 그 당시에 사탄의 일꾼들이. 고린도후서 11장에 나오는. 사탄의 일꾼들이 하는 말이, 사도 바울은 사도도 아니라고 그 교인들을 선동시켜서 고린도교회 교인들이 전부다 사도가 아닌 줄 알았어요. 그러니까 사도 바울이 편지 쓰기를 그리스도의 종 된 나 사울은 너희에게 문안하노라. 이렇게 나오죠.

그걸 오늘날 샌더스부터 많은 신학자들은 그 당시 사도 바울을 욕했던 것과 똑같이 욕합니다. 사도 바울의 인간성에 대해서 연구하고 있어요. 사도 바울의 인간성이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호스 꽂았다고 호스물입니까? 역시 수돗물이에요. 야고보가 이야기했다고 해서 야고보 개인의 의견이 아닙니다. 주의 말씀입니다.

심지어 사도 바울이 이건 사기니 하는 것도 누구 말씀이다? 주의 말씀이에요. 성령의 말씀이에요. 사도 요한이 적었다? 누구 말씀입니까? 주님의 말씀이고, 마가복음에 나오는 것도 복음입니다. 누가복음이라고 누가의 복음이 아니고 예수님의 복음이에요. 누가복음에 나와요. 마가복음에 나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이라”

그러면 이 대목을 통해서 다시 한번 정리해봅시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실 때 첫 번째, ‘선지자를 통해서’, ‘선지자를 사용해서’ 어느 것이 맞습니까? 선지자를 사용해서, 선지자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일하셨다. 그렇게 할 때 ‘통해서’ 하니까 이것은 무슨 관처럼 되지요. 제가 아까 수도 이야기한 것처럼 하나님의 말씀이 통이라는 걸 통해서 그냥 전달해서 그냥 나오죠.

그런데 선지자를 사용하셔서 또는 선지자 의해서 이렇게 돼버리면 하나님의 계시가 선지자를 통과하면서 누구한테 변동을 준다? 여기에 선지자에게 어떤 변화가 일어나서 그러면 같은 선지자인데 A 선지자, 변화된 B 선지자. A에서 B로 전달된 내용이 하나님 계시로 전달 될 것인가? 그런 문제가 있어요.

왜 이 문제가 이렇게 복잡하냐 하면, 오늘날 하나님이 ‘성도를 통해서’ 하느냐, ‘성도를 사용해서’ 하느냐 하는 겁니다. 만약에 성도를 통해서가 아니라 사용해서가 돼버리면 성도가 하는 모든 어떤 변화가 뭐가 되느냐 하면, 이것이 하나님의 계시가 돼요. 계시라 하면 요한계시록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고 추가적으로 하나의 계시적 의미, 남을 구원하는 의미로 추가가 되는 거예요.

그렇게 돼버리면 소위 간증집회라 하는 것, 간증하는 것도 사람을 변화할 수 있는 수단으로 개입이 돼버리죠. 간증뿐만 아닙니다. 찬양도 마찬가지죠. 찬양, 음악뿐만 아니죠. 건축도, 파이프오르간도, 샹들리에도 모든 것이 인간에 감동을 줌으로 말미암아 인간들로 하여금 하나님이 인간들을 구원하기 위한 수단으로써 적법하게 사용될 수 있다 이 말입니다.

문제는 거기서 끝나지 않아요. 성도가 운영하는 신문사, 성도가 지배하는 통일벼, 성도가 경영하는 카페, 성도가 하는 과외. 그것도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는 현장이 되겠습니까? 된다고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누구냐? 캘빈입니다. 캘빈은 소위 소명론을 통해서 성도에 있는 모든 직업과 모든 것에 대해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야 된다. 이렇게 했습니다. 그러면 백수는? 그러면 교도소 가 있는 사람들은? 직업 없는 사람은 영광을 못 돌려요.

그렇다면 둘 다 기독교 나라라 둘 다 축복을 했는데 1:1 되었을 때 이쪽에 한 골 넣을 때 기도했고, 이쪽에 한 골 넣을 때 기도했고 둘 중에 하나는 8강에 올라가야 하는데 페널티킥을 하는데 5:3으로 한국이 멕시코를 이겼다. 그러면 멕시코는 페널티킥 차는데 보니까 멕시코 선수는 첫 번째 키커가 못 찼어요. 못 차고 난 뒤에 성호를 그었어요. 그런데 한국 선수는 넣고도 기도하는 사람 없었어요. 그런데 축구협회 회장이 기독교 신자다 그러면 통째로 일괄해서 영광을 돌려요. 사회문제가 이렇게 되면 계시가 엄청나게 확대가 되겠지요.

그래서 여기에 이 대목에 있어서 어떻게 해야 옳을까? 모세가 ‘나는 말이 둔하니 형을 내세우면 안 되지 않겠습니까?’라고 모세가 제안을 했습니까, 안 했습니까? 안 했지요. 그러면 하나님의 언약 작용에 있어서 방금 두 가지 이론이 둘 다 잘못 됐어요. 잘못된 이유가 반드시 하나님의 언약은 뭐가 나와야 되느냐 하면, 하나님의 축복과 하나님의 저주가 나오게 돼있습니다. 반드시 그래요.

예수님의 새 언약도 마찬가지. 새 언약이 예수님의 피는 반드시 예수님을 죽게 한 인간을 죄인으로 보고, 피 흘리신 분을 의인으로 보는 이 두 가지가 항상 나오게 돼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언약이 임하면 반드시 여기서 자기 부인이 돼야 돼요. 이게 하나님의 계시로 사는 사람의 특징입니다. 자기 부인이 돼요.

예를 들어서 내가 아론이다. ‘아론, 참 말도 잘하고 아론은 진짜 하나님의 대언자네.’ 하면 뭐라고 해야 됩니까? ‘제가 하는 게 아닙니다. 주께서 은혜 주실 때만 할 수 있습니다.’라고 반드시 뭘 해야 된다? 인위적으로 멘트를 붙이는 게 아니고 필히 자기 부인이 되는 식으로 하는 거예요.

그러면 교사가 되어서 하나님 영광 돌리는 방법은 뭡니까? “선생님은 너무 잘 가르치고.” “내 실력이 아니고 주의 은혜입니다.” “거기다가 겸손하기도 하고.” “겸손한 게 아니고 사실이라니까. 저는 그런 실력 없습니다. 요새 머리 띵해서 영어단어 생각도 안 나는데 이게 다 하나님 은혜입니다.”라는 말이 본인부터 진심으로 우러나올 때가 있을 거예요. 그럴 때가.

저주받아 마땅한데 이런 일은 시키는 것은 하나님께서 피를 증거하라고 하신 것이다. 피 증거가 뭐냐 하면, 돌아다니면서 예수 피 증거하는 게 아니고 반드시 ‘나는 죄인이다’ 그걸 살아가면서 그걸 느끼는 거예요. 항상 나는 나 잘되는 것, 내 축복밖에 생각하는 것밖에 못할 정도로 나는 저주받아 마땅하다.

바로 이런 게 나오기 때문에 나중에 모세의 누나 미리암이 누굴 비방했죠? 왜 이방 여자와 사귀냐고 잔소리했겠지요. 그런데 누나가 어떻게 됐습니까? 격리 조치됐잖아요. 졸지에 문둥병자 되지 않았습니까. 이게 뭐냐 하면, 하나님이 모세한테 맡겼다고 모세가 일임할 수 있는 게 아닙니다.

출애굽기나 민수기, 신명기에 보면 누구나 봐서 특징이 뭐냐 하면, 항상 일이 벌어지면 항상 누구한테 묻습니까? 하나님께 묻는 거예요. 왜 물어요? 모세는 늘 이렇습니다. 주여, 난 감당 못합니다.’ 그게 언약이라니까. 왜 마음이 굳은 목이 굳은 백성을 저한테 맡겨놓고. 제가 하자 했습니까? 하나님, 저 못합니다. 다른 말로 하면, 인생 제 힘으로 내일도 못 살겠습니다. 오늘 죽여 주이소. 하루하루가 못 살겠습니다. 내 힘으로 살 이유도 없고, 목적도 없고 못 살겠습니다. 그런 마음이 늘 들도록 하시는 겁니다.

예를 들어서 어떤 가정주부가, ‘하나님 이런 집구석에서 못 삽니다. 저를 데려가 낙원에 가면 좋겠습니다.’라고 한다면 하나님께서 뭐라고 하겠습니까? 이제야 그동안 살아온 것도 네 힘이 아니고 은혜인 걸 아는구나. 저주받아 마땅한 것을 이만큼 끌어온 것도 다 하나님 은혜였다. 그러니까 너는 내일 염려는 내일 하라. 왜? 내일은 또 무슨 작업의 숙제가 나한테 주어질 테니까. 그러니까 내일 염려는 내일 하고 오늘 숙제는 이것으로 끝이라고 하시는 겁니다.

그럴 때 그 사람은 뭘 느끼느냐 하면, 하나님 말씀대로 내가 말씀 안에 놓여있는 걸 마태복음 6장 안에 아직도 놓여있다는 걸 알아요. 바로 그것이 하나님께서 동행할 때 언약적으로 축복과 저주를 내뱉어가면서 한다는 겁니다.

그 다음에 더 봅시다. “바로가 너희를 듣지 아니할 터인즉 내가 내 손을 애굽에 더하여 여러 큰 재앙을 내리고 내 군대, 내 백성 이스라엘 자손을 그 땅에서 인도하여 낼지라”(4절) 여기 군대란 전쟁인데, 힘들어도 참아주세요. 조금만 하고 마치겠습니다.

전쟁을 하는데 무슨 전쟁이냐 하면, 축복을 저주로 바꾸고, 저주를 축복으로 바꾸는 전쟁을 하고 있는 겁니다. 왜냐하면 우리 인간들은 항상 뭘 생각하느냐 하면, 하루도 축복과 저주를 생각 안 하고 넘어갈 때가 없어요. 축복은 좋은 것이고, 저주는 나쁜 거니까. 우리의 자리가 무슨 자리라 했습니까? 비 언약 자리죠. 비 언약 자리기 때문에 자기를 진노의 자리로 보지 않고, 자기를 마땅히 복 받을 자리로 보는 그런 경향이 있거든요.

그러면 이 자리를 하나님께서 바꾸어주는 것이 이스라엘이라는 거예요. 바꾸어주면서 전쟁이 벌어집니다. 이 전쟁은 두 종류가 있습니다. 하나는 외부 전쟁이 있고, 두 번째는 내부 전쟁이 있어요. 이스라엘이 처음에는 외부 전쟁이었어요. 그러다가 이스라엘이 약속의 땅에 안정되고 난 뒤에서는 외부 전쟁이 내부 전쟁으로 바뀌어서 이스라엘 내부의 언약과 비 언약이 싸우고 있습니다. 나중에는 이스라엘 자체가 홀라당 다 날아가 버려요.

그렇다면 반드시 이 전쟁을 할 때는 축복과 저주가 뒤바뀌게 되는데 바뀔 때 사람의 자리에서는 축복과 저주의 기준이 있을 것 아닙니까? 하나님 전쟁에서는 이 기준을 바꾸어요. 이 기준을 어떻게 바꾸느냐 하면, 새로운 기준의 도입. 새로운 기준이 도입되면 여기서 전쟁이 일어나는 겁니다. 이 기준에 준해서 축복받겠다는 자는 저주를 받고, 저주받는 자는 축복이 되는 새로운 기준이 되는 겁니다.

그러면 새로운 기준이 바뀌려면 새로운 기준에 안에 뭐가 들어 있느냐 하면, 저주를 축복으로 바꾸어주는 엔진이 가동돼야 되겠죠. 그러면 이스라엘 사람들은 무슨 엔진만 붙들면 승리하겠습니까? 이쪽에서는 모든 저주가 축복으로 바뀌고, 기계가 없는 저쪽에선 축복을 원해도 저주를 받고. 저주에서 축복으로 바뀌는 이 기계를 가지고 적들 속에 들어가게 되면 적들은 이 기계의 영향 때문에 저주를 받아야 되겠죠. 그 전쟁을 시작하게 되는 겁니다.

이 전쟁이 나중에 홍해 건너가고 요단강 건너갈 때 이 기계를 언약궤라 하죠. 축복과 저주로 바뀔 근거가 뭐냐? 축복은 하나님의 거룩이 있을 때 축복이 오고, 저주는 하나님의 더러움, 불경 또는 세속, 비거룩. 더러울 때는 저주가 오게 됩니다. 그렇다면 이스라엘 내부에 엔진, 기계가 있는데 축복이 저주로 바뀌고, 저주가 축복으로 바뀔 때 그 안에서는 뭐가 생산 됩니까? 하나님의 거룩이 계속 나오게 되면 그 거룩으로 인하여 이스라엘 백성은 거룩한 백성이요 나의 참 백성이 되겠죠. 그 거룩한 걸 그들은 언약이라 하죠.

언약을 담는 상자를 언약상자, 언약궤. 언약상자에 보면 안에 뭐가 들어 있느냐 하면, 여기에 말씀이 들어가요. 깨진 말씀. 백성들이 말씀을 거부해서 깨진, 백성들은 저주받아야 되죠. 하나님의 언약을 깼으니까. 깨진 언약을 피를 덮어서 하나님의 거룩한 피가 하나님의 무서운 저주를 용서함으로 말미암아 여기서 거룩이 나오고, 긍휼이 나오고, 용서가 나오고, 사랑이 나오고, 하나님 의가 나와서 이런 언약백성만 저쪽에 있는 모든 저주받은 백성을 승리할 수 있게 돼있습니다.

저주를 피로써 바꿔준다 했는데 어떤 방식으로 바꿔주느냐 하면, 저주를 대신 받는 피가 되겠죠. 그래서 십자가에 예수님의 피 흘림이라는 것은 결국 인간은 진노 받아야 마땅한 하나님의 진노의 대상인 것이 새겨져 있지 않습니까? 십자가가 우리 안에 있다는 말은 우리는 항상 하나님의 진노의 자식이고 저주받아 마땅한 걸 항상 느끼죠. 이걸 마음을 낮춘다는 거예요. ‘나는 지금이라도 저주받아야 마땅하고 진노 받아야 마땅한데 우리 예수님의 피 때문에 진노에서 오늘도, 오늘도 구원받고 있군요. 오늘도 사랑받고 있군요.’라고 생각하는 겁니다.

그렇데 되려면 이게 축복이기 때문에 우리는 이렇게 생각하는 2초 내지, 3초 사이에 뭘 생각하겠습니까? 내 이름 위주에 축복을 따로 생각하겠습니까, 생각 안 하겠습니까? 생각을 안 하지요. 안 하니까 내 주위에 있는 모든 일어난 일이 하나님의 사랑이요, 자비요 범사에 감사가 나오죠.

사도 바울이 몸이 아파서 세 번씩이나 기도했죠. ‘하나님이여, 저한테 은혜 주셔서 몸 안 아프게 좀 해 달라.’ 할 때 하나님 하신 말, ‘네 은혜가 네게 충분하다’고 했습니다. 그때 사도 바울이 뭘 알았느냐 하면, 내가 몸이 약하니까 내가 몸이 안 약했으면 주님의 은혜를 알았겠는가? 몸이 약했으니까 나의 축복을 스스로 내가 만든 축복을 내가 기꺼이 즐거이 포기할 수 있는 사람이 되었다는 겁니다. 내 안에 그리스도가 내가 원하는 축복보다 더 큰 축복이라는 것을 알게 된 거죠.

이제 그 과정을 밟아갑니다. 조금만 하고 마치겠습니다. 그 전쟁을 지금 하게 됩니다.

7절에 보면, 모세가 팔십이었고, 아론이 팔십삼 세니까 아론이 세 살 형 맞지요. 7장 8절에 시작합니다.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이르기를 너희는 이적을 보이라 하거든 너는 아론에게 명하기를 너의 지팡이를 가져 바로 앞에 던지라 하라” 이적, 표적이라 했는데 표적과 기적의 차이점이 뭐냐 하면, 표적이라 하는 것은 기적을 행함으로 말미암아 기적을 행한 주체자가 누구냐를 보여주는 게 표적이라면, 기적은 이거는 내 것 되는 것.

예를 들면 누가복음에 나오는데 문둥병자 열 사람이 왔잖아요. 열 사람 다 나음을 얻었어요. 아홉 명은 예수님이 문둥병 낫게 한 것을 ‘나는 문둥병 나았다’라고 기적으로 받는 반면에 돌아온 한 명의 사마리아 사람은 그걸 기적으로 보는 게 아니고 ‘주여, 저 죄인 맞습니다.’ 하고 주님이 내 죄를 용서했다는 표적으로 받는 거예요.

아홉 명은 기적으로 받아서 지옥 가고, 그런데 이걸 기적이 아니고 내가 누구냐, 내 자리가 진노의 자리인 것을 안 사람은 그동안 내가 문둥병 된 것을 어지간히 원망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까 문둥병 되도 합당하다고 그걸 자기 자신의 주체파악을 했을 때 그게 표적이 되는 겁니다. 모세가 품에 넣었다가 나올 때는 문둥병이고 빼니까 멀쩡하게 됐지요. 이게 표적이란 말이죠. 하나님이 함께 있을 때 문둥병 같은 너희들을 멀쩡하게 해주는 겁니다.

그러니까 이 표적을 행하는 겁니다. 첫 번째 표적하고 마치겠습니다. 이거는 들어가는 것 아니에요. 심판을 그냥 보여주는 거예요. 던지라 하니까 뱀이 되었습니다. 바로의 박사와 박수들도 술법으로 해서 뱀이 되었지요. 왜 초장부터 이렇게 꽉 잡고 나가야 될 텐데 애굽 술객들이 따라 하도록 했을까요? 강퍅케 하기 위해서 하는 거잖아요. 왜 강퍅케 했을까요?

하나님 언약은 반드시 뭐가 들어가야 됩니까? 축복과 저주가 들어가야 돼요. 그러니까 순종이 나오면 안 돼요. 세상에 순종해서 구원받으면 안 됩니다. 우리는 뭐 해야 돼요? 계속해서 강퍅해줘야 이 축복에 오직 피로 말미암아 구원됨이 성립되는 거예요. 우리도 훌륭하면 안 돼요. 오늘 강의에 하이라이트다. 절대로 우리가 훌륭하면 안 됩니다. 우리가 훌륭하면 우리가 훌륭해서 구원받아야 돼요. 절대로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 훌륭한 것을 용납하지 않습니다.

아무리 훌륭하더라도 성경 보세요. 결국은 우리는 훌륭 못함을 볼 수밖에 없습니다. 어느 구석을 보면 역시 이 말씀 비춰보면 우리가 훌륭할 수가 없습니다. 천하 자식이나 주님보다 더 사랑할 수밖에 없는 그런 훌륭하지 않는 인간들입니다. 사람은 자기 훌륭함이 있으면 훌륭함으로 구원받으려 하는 것이 인간입니다. 이게 행함이 되기 때문에 그래요.

그래서 하나님 언약은 더욱더 저주로 하여금 저주가 깊어줘야 그 다음에 축복이 오직 하나님에 의해서만 구원되게 하죠. 어떤 목사 때문에 구원되고, 장로 때문에 구원받고 하지 말고. 우리 의존교회나 우리교회나 사정이 비슷한데 헌금이라든지 모든 것이 아슬아슬하죠. 아슬한 정도가 아니죠.

목사 같은 입장은 그래요. 어디서 돈 많은 사람 오든지, 기존 교인이 로또해서 40억 타서 헌금하든지. 그런데 사실 로또해서 40억 타도 헌금 안 합니다. 그건 알아둬야 돼요. 십일조 안 합니다. 4등 되면 되는데 그것도 안 하고 기껏 몇 백만 원 낼지 모르죠. 하여튼 그런 식으로 해서 교회가 재정적으로 안정이 되고 큰 교회 지어지면 복음 들으려고 많이 올 것 아니냐 이 말이거든요. 우리가 매일같이 그리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어요. 왜? 그게 우리가 만들어낸 축복이고. 만약에 교인 떠나버리고 헌금 안 나오면 그걸 우리가 만든 저주로 생각하지요.

그런데 바로 그러한 경우, 그런 생각을 자꾸 떠올리도록 주께서 그런 사태로 몰아가요. 왜? 우리가 바로 바로기 때문에. 우리가 바로 그런 식으로 나도 모르는 강퍅함이 내 안에 솟구쳐 올라온다는 그것.

다시 이야기합니다. 마지막으로. 내 자리가 영락없이 올라와야 돼요. 내 자리가 뭔 자리입니까? 누구는 다 저주받아도 누구는 복 받아야 된다? 나만은 복 받아야 된다는 자리가 올라와줘야 이 자리가 뭐로 바꿔지게 합니까? 예수님의 피의 자리, 용서의 자리로 바꿔치기가 되서 그렇습니다.

그래서 모세가 이렇게 따라할 때 모세는 그걸 보고 당황합니다. 하나님이여, 저들도 따라하는데 나보고 어쩌란 말입니까? 자기는 한꺼번에 조지고 한꺼번에 끝낼 줄 알았는데 계속해서 따라오니까 모세와 아론도 당황스럽기 짝이 없어요. 하나님께 또 묻지요. 그러니까 하나님은 우리 인생을 당황스럽게 만들어서 날마다, 날마다 묻고 또 물어서 우리가 몰랐던 우리 문제점을 들추어내어서 방식으로 주께서 언약에 발통 달아서 지금도 구원하시는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저희들의 감추고 은밀한 것들 주께서는 낱낱이 드러내시면서 그런 저주스럼도 예수님의 피로써 다 감당해주시고 대신 저주받으심으로 말미암아 다시는 저주가 없게 정죄함이 없도록 뭘 해도 축복이 되도록 인도해주심을 감사합니다. 이 언약을 잊지 말고 믿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첨부파일 : 20091106b 울산강의.hwp (54.0K), Down: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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