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1106a 울산강의-출애굽기6장
20091106a 울산강의-출애굽기6장
이름 : 한윤범(IP:119.192.174.148)
20091106a 울산강의-출애굽기6장
(강의:이근호 목사)
출애굽기 6장 초반에 하나님하고 모세하고 대화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거기에서 하나님께서 뭐라고 이야기하시느냐 하면 6절에 보면, “바로가 그들을 보내리라” 이렇게 돼있습니다. 그러면 바로 왕의 본래 뜻은 안 보내겠다. 또는 못 보낸다. 그리고 6장 1절에 보면, 여호와 하나님이 바로가 너희들을 보낸다.
바로는 죽어도 나는 너희들을 애굽에서 히브리인들을 보내지 않겠다. 바로는 명확하게 분명하게 이야기했죠. 안 보낸다, 못 보낸다. 6장 1절에서는 하나님께선 바로가 보낼 것이다. 그 틈 사이에 누가 있느냐? 모세가 있습니다. 그리고 모세가 있다는 이 말은, 모세가 틈 사이에 있을 때 이제 공부하게 됩니다만 이걸 다른 말로 하면, 모세는 언약이라는 발판 위에 서있다고 보시면 됩니다. 만약에 모세가 발판이라는 자기 언약이라는 자리를 없애버리고 그냥 모세가 서있으면 좌절합니다. 중간에 낀 내가 어떡하란 말입니까?
공장에서 무거운, 아주 덩치 큰 쇠 구조물 같은 걸 운반할 때 밑에 바퀴 달린 것을 깔지요. 이게 먼저 와서 줄로써 잡아당기면 이 위에 있는 무거운 물체도 실려서 가지 않습니까? 구원받는다, 신앙생활한다는 게 이렇게 보면 돼요. 신앙생활하는 성도 존재 밑에 언약이라는 바퀴 달린 판이 있다고 보시면 돼요. 참 쉽지요. 우리 발밑에, 우리 자리 밑에 언약인데 그게 발통이 달렸는데 그게 왜 달렸느냐 하면, 우리가 그걸 밀고 가는 게 아니고 언약을 주신 분이 솔솔솔솔 잡아당기면 우리는 그 위에 실려서 가게 되는 겁니다.
가면서 우리는 어떤 풍경의 차이를 보느냐 하면, 어떤 경우에라도 못 보낸다, 안 보낸다. 네가 천당을 가면 손에 장을 지진다. 이러한 천국 가는 모든 것이, 구원받는 게 전부다 불가능하다, 안 된다. 라고 장담하는. 쉽게 말하면 ‘너 같이 죄 많은 인간, 너 같이 하루 열두 번도 더 바뀌는 인간이 구원을 받으면 손에 장을 지질게’ 하는 그러한 내가 생각해도 바로의 지적이 맞고, 그 말이 일리가 있어 보이는 불가능성과 그리고 또 ‘네가 안 되는 걸 나는 할게. 해 낸다.’라는 하나님의 언약 틈바구니에 모세처럼 끼어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이런 이야기를 해요. 교회를 다니고 신앙생활하고 하지만 언약을 놓쳐버리면 결국 자기 용 써서 구원받으려는 그런 것 밖에 안 돼요. 언약을 놓쳐버리면 언약이라는 걸 모르게 되면 어떻게 사람이 구원받으려고 하느냐 하면, 그냥 하나님이 시키는 대로 용 써서 열심을 내서 최선을 다하여 노력하면 그것이 나를 구원해 주리라. 이렇게 오해를 하죠. 그런 식의. 오늘 아슬아슬하다. 오늘 툭툭 소리 나는데.
언약을 모르면, 하나님의 약속을 모르면, 십자가라 하는 것은 십자가는 세 자지만 그걸 다른 말로 하면 새 언약이잖아요. 내 살과 내 피로 새 언약을 세우리니. 그게 십자가잖아요. 언약을 모르게 되면 사람들은 항상 내가 어떻게 지금 행동하고 있는가를 자기 행동에 자기가 주시해서 그 행동이 마음에 들어야 만족해야 신앙생활 잘 한 것 같고, 자기 행동이 자기 마음에 안 들면 좌절하고 낙담하기 일쑤입니다. 그리고 마귀가 그걸 부추기고요. ‘치워라. 그만. 그 동안 신앙생활 많이 했다. 이십 년 다니면 됐지, 이제는 띄엄띄엄 다녀도 괜찮다.’ 이런 식으로 마귀는 계속해서 우리에게 행위에 대해서 강조하고 있습니다.
처음에 어떤 대중가요 가수가 예수 믿고 난 뒤에 난 이제부터 가스펠송과 찬송가 외에는 일체 부르지 않겠노라. 해놓고 얼레 한 삼 년만 지나면, 삼 년 이면 오래 가는 겁니다. 한 일 년만 지나면 판 내고 옛날 히트곡 다시 하고. 별이 빛나는 밤에. 분홍빛 스카프. 목사들 다 알면서도 그런 것 불러대지요.
그럴 때 그 사람이 자기 행위에 대해서 만약에 신경을 쓴다면 여전히 그 사람은 법에 안 매이고 자유로운 행동을 해서 그것으로 구원받고자 하는 시도밖에 안 됩니다. 역시 오류에요. 그것도 하나 오류가 되는 겁니다. ‘전에는 맹세했으면 지켰는데 이제는 복음을 알고 맹세 같은 것 안 해도 된다. 나는 이제 내 마음대로 살래.’라는 식으로 구원받고자 하는 것도 역시 문제가 돼요.
성도는 어디에 끼어있어야 돼요. 어디에? 이렇게 세상에서 내가 자유로우냐, 이런 식으로 행위에 대해서 주목하는 세계와 우리 밑에 발통 달려서 주께서 살살살 잡아당기면 그러한 언약판이라는 언약 위에 놓여있는 언약에, 오늘 본문 3절에 나오죠. 나는 전능하신 하나님이다. 전능하신 하나님이 전능하신 하나님으로서 행세하는 언약의 사이에 우리가 놓여있을 때 ‘이 목사님, 어떻게 행동할까요?’라고 묻지 말고, ‘우리는 뭘 믿으면 됩니까?’라고 물으면 돼요.
처음도 그렇고 마지막도 그렇고. 우리는 무엇을 믿으면 됩니까? 언약을 믿어야 돼요. 어떻게 행동할까요가 아니라 무엇을 믿으면 되는 겁니다. 어떻게 행동할까를 아무리 자유롭게 행동해도 역시 행위는 행위에요. 이래나 저래나 행위는 행위라고.
우리 박윤진 성도님이 야고보서를 거론하면서 ‘믿음이냐, 행위냐?’ 누가 질문했을 때 답변을 참 잘했어요. 믿음이냐, 행위냐 문제를 ‘주체가 누구냐’ 하는 주체 문제로 돌려버렸어요. 행할 것이냐, 믿을 것이냐 이 문제에서 이러면 주체는 누굽니까? 어디까지나 나한테 그저 매여 있잖아요. 그걸 무슨 문제로 돌리느냐 하면, 주체가 나냐, 아니면 하나님이냐? 이것은 야고보서뿐만 아니고 모든 성경이 동일합니다.
항상 언약의 주체자는 누굽니까? 하나님이잖아요. 만약에 우리가 행위로 나가면 주체자는 누굽니까? 우리잖아요. 그 싸움이란 말이죠. 그래서 출애굽기 6장이 이해되죠. 6장에 보면 하나님께서 모세를 불러놓고 하는 말이 반드시 바로가 너희들을 그 땅에서 쫓아내리라. 처음부터 주체 문제를 하나님은 모세로 하여금, ‘모세야. 이번 일에 바로가 주체가 아니고 언약의 하나님이 주체가 된다.’라고 먼저 언질을 주시고 그 다음에 모세를 바로 앞에 세우게 됩니다.
그러면 모세는 바로 앞에 만나도 바로 배후에 있는 누구를 봐야 됩니까? 우리의 만남은 우연이 아니요. 속으로 그랬어요. ‘바로야, 너하고 나하고 만난 것도 네가 좋아서 날 부른 것도 아니고 내가 좋아서 널 부른 것도 아니고 우리의 만남은 우연이 아니다.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만나게 해줬다.’라는 것은 염두에 두었기 때문에 모세는 겁 없이, 두려움 없이 바로에게 할 소리 다 해야 돼요. 그게 오늘날 우리의 신앙생활입니다.
“범사의 감사하라”고 나오죠. 모든 일의 주체는 하나님이십니다. 이것이 먼저 우리가 정리가 돼있어야 그 다음에 나오는 강의가 약간 선이해가 될 거예요. 무슨 말이냐 하면, 바퀴 달린 언약 발판 위에 모세가 놓여있으면서 모세는 바로가 하는 일과 하나님이 하시는 그 두 개를 다 같이 보는 것처럼, 언약이라는 것이 무엇이냐 하면, 이것 좀 어려워요.
우선 성경을 보시면 여기에 4절에 보면, “가나안 땅 곧 그들의 우거하는 땅을 주기로 그들과 언약하였더니” 여기에 언약 내용이 뭐냐 하면, 땅으로 돼있습니다. 가나안 땅 얻어 잡수시면 되지 뭐가 어려우냐 하는데 이게 어려워요. 왜 어려우냐 하면, 보통 땅을 받으면 땅을 소유한 게 되잖아요. 이건 어디까지나 애굽식 사고방식이고, 앞으로 이스라엘이 땅을 얻게 되면 땅을 소유하는 것이 아니고 그 땅이 이스라엘을 소유하게 됩니다.
이 땅을 저는 여기서 뭐냐? 자리에요. 나의 자리. 옛날에 애굽에 있을 때는 애굽 땅이 우리의 자리가 아니에요. 그때는 나그네였고, 객이었습니다. 그때는 나의 자리가 없으면서 내가 영원히 거할 자리가 없는 채로 그냥 우리 자체만 우리 몸만 있었어요.
그런데 가나안 땅은 남들 보기에는 보통 애굽 땅하고 다를 바 없어요. 역시 돌멩이 있고, 밭 있고, 흙 있고 똑같아요. 하지만 가나안 땅의 특징이 뭐냐? 가나안 땅이 약속의 땅으로 바뀝니다. 다른 말로 언약의 땅이죠. 이 언약의 땅에서 무엇이 솟아오르느냐 하면,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약속했던 그것이 땅을 통해서 솟구쳐 올라와요.
이 약속의 땅은 무슨 땅이 되느냐 하면,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다른 말로 하면 여기서 하는 마로 내 백성, 이스라엘을 이스라엘답게 하는 삶의 자리가 됩니다. 이 이스라엘 자리가 부합하지 않거나 합당하지 아니하면 이스라엘 사람들은 여기서 저주를 받게 돼있어요. 땅이 사람을 만든다고요. 우리는 그게 아니고 땅은 중립이라 여기고 내가 여기 있으면 부동산은 내가 소유하면 그만이다. 나는 그 땅 위에 집 짓고 살면 된다고 하지만.
약속의 땅은 그런 땅이 아니고 우리가 그냥 나, 여기 있소. 나, 이 땅에 살래. 용납하는 것이 아니고 가시방석이 되어서 만약에 이 땅에서 뿜어 올라오는 언약과 부합되지 아니하면 그 땅에서 추방되게 돼있는 희한한 땅, 그 땅을 히브리서 11장에서 천국이라 하지요. 그걸 다른 말로 약속의 땅이죠. 하나님의 언약의 땅.
옛날 땅은 가나안 땅이라면, 언약 속에 땅이라는 요소가 있다고 한다면, 새 언약에 합한 땅은 무슨 땅이겠습니까? 새 하늘과 새 땅이죠. 그런데 새 하늘과 새 땅이 되려면 새로운 인간이 돼야 됩니다. 그냥 헌 인간에다가 새 하늘과 새 땅? 죄송합니다. 못 들어갑니다. 들어갈 수가 없어요. 인간이 바뀌어져야 됩니다.
어떻게 바뀌는가? 자리를 통해서 바꿔요. 자리가 바뀌면 거기에 자리에 합당한 인간이 되는 겁니다. 자리가 인간을 만들어내요. 그러면 그 자리는 어떤 자리냐? 그건 제가 아까 언급했습니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주신 그 약속이 뿜어져 올라오는 자리.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맹세하신 그 땅을 올라오게 하죠.
그렇다면 문제가 어렵기 때문에 질문 형식으로 해보겠습니다. 여기 가나안 땅, 약속의 땅이 있다. 여기에 애굽 있습니다. 현재 성경 본문은 애굽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애굽 사람들 끄집어내어서 약속의 땅에 들어가면 그러면 약속이 이루어진 겁니까? 아니죠. 그렇다면 애굽 땅에서 약속의 땅에 가는 여정 속에서 무엇이 바뀌어야 됩니까? 약속의 땅에 합당한 어떤 인간들이 있어야겠죠.
그렇다면 애굽 땅에서 일어나는 모든 사태, 모든 사건들은 결국은 애굽에서 이스라엘 백성을 끄집어내는 것뿐만 아니고 여기 애굽에 압박을 가하는 모든 사건과 사태들은 어디서 나온 겁니까? 결국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언약에서 나오는 그러한 능력이 애굽을 조져버려야 여기서 언약에 합당한 인간이 톡 튀어나오겠죠. 눌러줘야.
‘이래도 안 나가?’ 눌러줄 때 이 눌러주는 방식, 그 내용이 어디에 합당하냐 하면, 하나님의 언약에 합당한 방식으로 애굽을 꽉꽉 눌러주면 기어이 애굽의 바로 왕은 토하듯이 누굴 토해내야 됩니까? 애굽 안에 있는 하나님의 이스라엘 백성을 토해내야 되겠죠. 그러니까 이스라엘 사람들은 자기 구원에 대해서 본인들이 염려할 필요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염려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는 왜 구원에 그렇게 염려가 많습니까?
저는 아기 안 낳아서 모르겠습니다만 산모가 아기 낳을 때 남자들은 생각하기를 때 되면 나오겠지 왜 그렇게 용을 쓰느냐 하는데, 눌러줘야 되겠죠. 그처럼 이 세상에 우리가 보통 살아가지만 우리 성도가 만나는 모든 사태와 거기에 대한 해석과 이 세상을 보는 이해는 뭘 압박으로 보느냐 하면, 하나님의 언약이 우리로 하여금 이 죽음의 지옥 같은 세상이 더 이상 우리를 가두지 못하도록 우리를 빠져나오도록 압박을 하고 밀어주는 그런 힘으로 이 세상에 작용하고 있습니다. 지금도 한국이나 미국뿐만 아니고 모든 것에 그런 식으로 꽉꽉 눌러주지요.
눌러주면 우리는 싫든, 좋든 이런 문제가 아니라 이거는 하나님의 언약의 능력으로 말미암아 기어이 우리는 이 세상에서 점점 더 나그네가 될 수밖에 없고, 우리는 이 세상에서 구원될 수밖에 없는 겁니다. 그렇게 되면 우리는 이 세상에 미련을 갖고 싶어도 못 갖도록 자꾸 조치가 사건이 벌어져요.
목사가 교인들에게 교회에 관심을 두지만 하나님께서 새 언약으로 밀어붙이면 목사는 교회를 포기해야 돼요. 교회는 주님 손에 맡기자. 이건 한 사람 왔다갔다 신경 쓰려고 하니 스트레스 받아서. 안 그래도 신종플루 유행인데. 하여튼 저를 죽여 버리세요. 이제는 교회란 말만 들어도 신경 쓰기도 싫어요. 뿐만 아니고 가정도 마찬가지고 그렇습니다. 눌러주니까 이건 안 튀어나오려야 배길 수가 없어요.
그렇다면 6장부터 지금 12장까지 하려고 하는 게 열 가지 재앙입니다. 열 재앙 내용들이 결국은 뭐에 대한 압박이다?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압박시켜서 언약대로 끄집어내서 언약적인 능력을 보여주는 게 열 가지 재앙이죠.
열 가지 재앙은 삼등분으로 나뉩니다. 1부터 4까지, 5부터 6까지, 그 다음에 7부터 10까지. 열 가지 재앙이 삼등분으로 나눠져요. 첫 번, 1부터 4까지는 생활에 불편을 주는 재앙. 그리고 다섯 번째, 여섯 번째 재앙은 직접 신체를 공격하는 것. 하지만 1부터 6까지는 일시적이에요. 7부터 10까지는 장기적으로 고통을 안겨주는 재앙이죠.
첫 번째가 나일강의 강물이 피로 변하는, 두 번째가 개구리, 세 번째가 이 또는 모기, 네 번째가 파리 이렇게 해서 생활에 불편을 주는. 다섯 번째가 독종이라 해서 가축을 공격하는 거고, 그 다음에 악질이라 해서 가축뿐만 아니고 사람 신체까지 공격하는 거예요. 그 다음 여기서부터는 장기적으로 환경을 농경시대에 농사한 것을 작살내버려요. 제일 먼저 작살내는 게 그 유명한 메뚜기로 싹 쓸어버려요. 그 다음에는 우박. 그 다음에 해가 안 비쳐요. 이거는 흑암이죠. 그 다음에 마지막에 직접 아예 그 집안의 족보를 잘라버려요. 영구적으로. 장자의 죽음.
여기에 관여하는 모든 능력들이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언약적인 능력에서 야기된 상황이 주어집니다. 결국 이것은 한 마디로 간단하게 이야기하면 뭐냐 하면, 야곱과 에서를 달리 구분하는데 좀더 자세히 이야기하면, 야곱은 축복을 받고 에서는 저주 받는 거예요. 제가 이렇게 이야기하면 ‘목사님, 여기 에서가 어디 있습니까?’ 이러거든요. 축복이라는 게 나오면 반드시 축복 받지 않는 그 여분의 모든 것은 저주가 됩니다.
여기서 여기까지 여러분들이 아신다 하고 이제부터 어렵게 해보겠습니다. 원래 우리의 자리가 뭐냐 하면, 저주의 자리입니다. 성경 한번 찾아봅시다. 로마서 5장 9절을 제가 읽어보겠습니다. “그러면 이제 우리가 그 피를 인하여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더욱 그로 말미암아 진노하심에서 구원을 얻을 것이니”
철학자들이 기독교를 연구하고 성경을 아무리 연구해도 뭘 자꾸 빠뜨리느냐 하면, ‘진노하심’에 대해서 난색을 표해요. 하나님이 인간을 만든다는 자체가 사랑이 아닌가? 그럼 하나님이 나타나는 건 사랑의 하나님이구나. 우리가 죄를 지었구나. 그러니까 빨리 우리가 죄를 회개해서 사랑을 회복해야지. 출발점이 다 사랑이에요. 그런데 로마서 5장 9절은 진노하심입니다.
그런데 왜 철학자들이나 신학자들이 진노하심에서 출발 못 하느냐 하면, 진노하심에서 출발하려면 자기 자신의 자리를 뭐로 봐야 됩니까? 저주의 자리로 봐줘야, 저주가 있어줘야 하나님 진노가 있는 것 아닙니까. 그렇지 않아요? 그러니까 우리가 저주 받아야 합당할 때 진노가 하나님께 합당하다 이 말입니다.
우리는 보통 자식 낳으면 귀엽게 보잖아요. 하나님은 그걸 진노의 대상으로 본다 이 말이죠. 그런데 부모의 아이디어에서는 머리에서는 자기 자식 놓고 ‘진노 받아 마땅해.’라는 생각이 아무리해도 나오질 않는다 말이죠. 안 나오니까 그때부터 생각하는 모든 하나님이라는 것은 이미 자기 자리를 진노와 저주의 자리로부터 출발해야 될 걸 복 받을 수 있는 자리로 여기기 때문에 성경 66권 전부다 잘못 해석할 수밖에 없는 거예요. 어떤 성경구절을 대도 전부다 잘못 해석하고 있는 거예요.
쉽게 말해서 자기가 자기를 진노의 대상으로 볼 그런 눈이 없다니까. 그런 안목이 없어요. 사람이 자기를 거울을 보면서 ‘아이고, 저주 받을 놈아.’ 이렇게 거울 보는 사람 없습니다. 사진 찍어놓고 사진 보면서 ‘아이고, 이 저주 받을 놈.’ 이렇게 볼 수 없어요. 나중에 나이 육십 넘어서 사진 찍으면 ‘아이고, 영감아. 안 죽고 이게 뭐고. 얼굴 봐라. 누가 사진 찍었노?’ 이렇게 자기 사진보고 놀라지만.
젊은 사람, 조금만 예쁜 것 있으면 자기 홈피에 올려서 이래 찍고, 요래 찍고, 저래 찌고, 잠옷 바람으로 찍고, 짜장면 먹으면서 찍고 이러는데. 자기 저주받고 진노 받은 것을 홈피에 올리겠습니까? 안 올리잖아요. 지금 소통이 안 되네.
지금 뭐냐 하면, 이 자리가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을 죄 지어서 저주받으라가 아닙니다. 저주의 자리에서 인간을 만들었다 제가 그 이야기하고 있는 거예요. 하나님의 진노하심, 저주의 자리에서 인간을 만들어놨는데 인간은 자기 자리가 저주의 자리, 진노의 자리라고 인정하지 않고 중립의 자리라고 보는 거예요.
그러니까 죄도 아니고, 의도 아니고. 앞으로 자기가 어떻게 행하느냐에 따라서 잘못 행하면 벌 받고, 잘하면 복 받는. 특히 잘하는 것 중에서 예수를 믿는 잘하는 일 하면 나라는 인간이 구원받을 수 있다 하는 거예요. 이것은 근본적으로 복음이 아닙니다. 내가 예수 믿는 잘한 일을 하면 구원받는다는 것은 이거는 복음도 아니에요. 그야말로 기독교죠. 사람들을 지옥 가게 만드는 기독교가 되는 거예요. 복음이 아니에요.
복음은 저주의 자리에서 자기가 태어난 것을 감사하는 거예요. 왜냐하면 저주의 자리에서 구원하는 것은 저주의 자리에서 인간이 아무리 용을 써도 저주뿐이에요. 진노에서 못 벗어납니다. 오직 진노의 자리, 저주의 자리에서 구원되는 것은 로마서 5장 9절에 피 밖에 없어요. 결국 하나님은 자기 피를 드러내기 위해서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진노의 자리에서 인간을 만들어놨습니다.
사람들이 자기 자리가 저주의 자리, 이거는 전에 그리심산, 에발산 이야기했죠. 산이 두 개 있는데 어느 산에 가야 복 받는다고요? 저주 산에 가야 복 받는다 이 말입니다. 같은 원리인데. 사람들이 저주의 자리에서 올라온 것을 모르는 증거가 뭐냐 하면, 사람이 뭘 기대하느냐 하면, 항상 뭘 염두에 두고 신을 부르느냐 하면, ‘나를 축복하세요. 나를 사랑해주세요.’라는 말을 하는 거예요.
그래서 교인들이 교회 올 때 뭐하려고 옵니까? 저주 받으러 옵니까, 복 받으러 옵니까? 복 받으러 오잖아요. 이것 자체가 잘못 됐다니까. 내 자리가 무엇이냐 알고 와야 되는데 그게 아니고 의당 복 줘야 좋은 하나님인 줄 알고 있어요. 그런데 진짜 복은 뭐냐 하면, 자기 자리가 자기가 태어날 때부터 진노의 자리, 저주에서 내가 태어났다는 걸 눈치 채는 것, 그게 복입니다. 그 복 외에 다른 복은 없어요. 자기 자리를 처음 아는 것, 생전 처음으로 내 자리가 진노의 자리라는 걸 처음 알고 차릴 때 이게 로마서 5장 9절 말씀이 그대로 우리 속에 들어왔을 때 생기는 현상입니다.
그런 자리에서만 뭐가 좋겠어요? 자기가 교회 다니는 걸 좋겠습니까, 자기 신앙생활하는 걸 좋아 하겠습니까 안 그러면 뭘 좋아 하겠습니까? 피. 내가 안 되는 걸 되게 하셨군요. 내가 도저히 할 수 없는 걸 되게 하셨군요. 그 피를 아까 세 자로 뭐라 했습니까? 새 언약. 그게 새 언약이에요.
교회를 그렇게 다녀도 가장 기본적인 것, 자기 자리가 무엇인 줄을 모르는 체 계속 교회 다니고 있는 거예요. 그럼 남는 건 무엇이겠습니까? 내가 처음 와서 삼 년 만에 건축헌금 냈고, 오 년, 십 년 만에 교회 주차장 넓히는데 내가 한 몫 했고, 십오 년에는 목사 쫓아내는데 내가 앞장섰고, 그 뒤에 괜찮은 목사 왔는데 내가 힘 좀 썼고. 사실은 본인은 잊었다, 그런 것 주장할 사람 아니다. 나는 하나님 은혜로 다니지 내가 한 것 뭐 있노. 말이야 줄줄 달지만 껍데기만 싹 벗기면 그 안에는 자기 과거 일이 들어있어요. 누구든지 마찬가지로 들어있어요.
그런데 그것 들어있는 걸 잊을 생각하지 마세요. 잊지를 못합니다. 다만 그것이 무엇을 야기했다? 하나님의 진노와 이래서 나는 저주 받아 합당한 존재인 것을 확인해주는 증거물입니다. 내가 이래서 저주 받아 마땅하구나.
진짜 성도라면 저주 오는 것은 반가워해야 됩니다. ‘반갑다. 저주야.’ 왜? 자기한테 오는 게 합당하기 때문에. ‘주여, 오늘도 기도하오니 저주해 주옵소서.’ 세상에 이런 기도하는 사람 못 들어왔어요. ‘주여, 저에 합당한 것은 저주가 합당하오니 저주해 주옵소서.’ 이것 아마 주일날 대표기도하면 기절초풍할 거예요.
제가 어느 날 주일 아침에 그런 설교했지요. 서울 가니까 미장원 간판에 [머리 못하는 집] 세상에. 그 이야기를 했더니만 그날 오후에 쉬는 시간에 강구만 장로님이 우리교회 이름 바꿉시다. [구원 안 되는 교회] 장난도 너무 심했다.
사실은 다른 교회들한테 제가 이름을 붙이면 구원이 안 되는 교회. 왜? 축복을 이야기하기 때문에. 저주를 이야기하고, 진노를 이야기해줘야 예수님의 새 언약, 피가 나오는데 축복이 나오니까 사람들이 피 이야기 나오면 ‘피~익’ 나는 피 그것 말고 복 달라고. 하나님이 복 주는 하나님이고, 여기 보니까 전능하신 하나님이고, 자비하신 하나님이고 그런 하나님인데.
사람들이 복 달라는 말은 뭡니까? 이미 복이란 개념을 누가 만들었다? 자기가 이미 밑에서 만들지요. 집에 가서 오늘은 어떤 걸 복이라고 만들어서 달라고 할까. 자기가 복을 만들어요. 어떤 것이 복인지, 어떤 것이 기도할 내용인지 만든다는 말은 그 기본자세가 나는 이런 복을 달라 할 수 있는 권한도 있고, 자격도 있다고 주장하잖아요.
그런 사람들이 교회 왔기 때문에 여기다 피 이야기하니까 전부다 ‘픽~’하면서 도망하면서 다른 교회 가버렸더라고. 우리교회도 우르르 다 가버렸어요. ‘나는 교회 오는 것은 교회 안 가는 사람보다 많이 받기 위해서 교회 갔는데 왜 부정적으로 이야기하느냐?’ 이래 나오는 거예요. 그렇게 돼버리면 언약을 잊어버려요.
지금 애굽에서 이스라엘 백성을 빼내가는 것은 히브리인들의 요구사항입니까, 하나님의 요구사항입니까? 하나님의 요구사항이잖아요. 그런데 애굽에 있는 히브리인들은 나갈 생각이 없어요. 여기 12절 봅시다. “모세가 여호와 앞에 고하여 가로되 이스라엘 자손도 나를 듣지 아니하였거든 바로가 어찌 들으리이까” 제가 아까 했지요. 모세는 어디와 어디 사이에 끼어있다? 주체가 하나님 되신 하나님 일과 또 다른 주체, 바로 바로라는 주체 그리고 구원해야 될 히브리인들이라는 주체의 중간에 끼어있는 거예요. 어쩌란 말인가?
하나님의 주체는 반드시 바로가 너희를 쫓아내리라 했지만 막상 현실 속에서 실제 보니까 이제는 바로뿐만 아니고 심지어 같이 나갈 백성들까지 내 말을 믿지 않을 때. 오늘날 교회 하고 똑같아요. 목사가 복음 전하니까 전부다 픽, 픽 하듯이 도대체.... 분명히 성경은 예수님의 피로 구원받는다 하고 성경은 우리가 진노 받아 마땅하다고 이야기하니까 막상 그 이야기를 퍼 담아서 이야기해주니까 교인들은 안 믿고, 다른 교회 가겠다하고. 정말 모세가 환장할 지경이죠.
왜 그렇게 해야 되느냐 하면 달라짐, 달라짐이 사람보고 ‘너, 달라져라’ 해도 소용없다는 겁니다. 달라짐은 뭐부터 달라져야 하느냐 하면, 자리가 그 사람을 달라지게 할 때만 그 사람은 달라집니다.
보통 예수님이 부활했잖아요. 맞지요. 예수님 지금 어디 계십니까? 얼굴 어떻게 생겼어요.? 누가 봤습니까? 예수님의 부활하심을 할 때 이런 걸 설명할 때 목사로서 너무너무 어려운 거예요. 부활이란 의미가 보겠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예수님 살아났다면서? 보자.’ 막상 부활 본 사람들은 알아먹었어요, 못 알아먹었어요? 못 알아먹었어요. 엠마오로 내려가는 제자하고 예수님하고 같이 이야기하면서도 못 알아먹었어요.
그걸 제가 이렇게 설명한다고. 부활 안에는 예수님의 십자가가 들어있기 때문에 십자가가 뭡니까? 십자가라 하는 것은 인간들이 예수님이 메시아인 것을 못 알아먹죠. 못 알아먹기 때문에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잖아요. 그러니까 부활은 못 알아먹는 것이 그게 안고 핵심이 들어가 있는 거예요. 그래서 부활해도 안에 십자가가 들어있는 이상은 부활체가 되어도 못 알아먹게 돼있어요. 그걸 설명하는 게 참 어렵다니까. 부활했거든요? 못 알아먹습니다.
사도 바울이 처음 예수님 부활해서 만났을 때 뭐라 했습니까? ‘예수님이시군요.’ 이랬습니까? ‘주여 누구십니까?’ 진짜 부활하신 분을 만날 때는 부활체를 만나는 게 아니고 십자가 졌다는, 요한복음 20장에 보면 나오죠. 도마한테 뭘 보여줍니까? 도마한테는 나중에 따로 보여줬고. 그전에 제자들에게 다 창자국, 못자국 공히 같이 보여줬어요. 성경에 그렇게 돼있어요. 십자가입니다. 그래서 갈라디아서 3장에 보면, 십자가가 너희들 눈앞에 보이는데 누가 꾀더냐?
부활했다는 것은 십자가가 취소되는 게 아니고, 날아가는 게 아니고 십자가가 그대로 안에 전 부활의 내용을 차지하면서 그 십자가가 살아있는 형태로 나온 게 부활의 능력이에요.
이것도 마찬가지죠. 하나님이 살아계시다. 여기 하나님이 살아계시는가 봅시다. 아까 부활이라 하는 것은 예수님의 “십자가가 눈앞에 보이거늘” 그 이야기할 때 다른 사람들은 사도 바울 미쳤다. 왜? 십자가는 이미 이십오 년 전에 끝난 사건이다. 사도 바울은 끝난 사건을 지금 사건으로 만드는 게 부활이라는 겁니다. 그게 성령 안에서 부활의 의미에요. 십자가가 과거 한 번 사건이 아니고 계속 지금 있는 사건으로 확대시키는 것이 부활의 능력이고 성령의 능력이라 이 말이죠.
그렇다면 그것이 신약에서 주의 이름으로 가능하다면 오늘 본문에서 모세와 함께 있는 하나님은 어떤 모습으로 나타나느냐 말이죠. 키가 몇 센티고 몸무게 몇 킬로냐 할 때 거기에 대해서 뭐라고 돼 있느냐 하면, 여기에 6장 3절, “내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전능의 하나님으로 나타났으나 나의 이름을 여호와로는 그들에게 알리지 아니하였고”로 돼있어요.
하나님께서 지금 살아계셔요. 과거 하나님 말고 지금 하늘에 계신 분 말고, 지금 모세와 함께 있다는 걸 뭐로 보여주느냐 하면, 키가 몇 센티, 아이덴티티가 붙어 있는 게 아니고 바로 여호와라는 이름으로 너와 함께 하겠다. 이것 또 설명해야 됩니다. 어떻게 여호와라는 이름이, 그전에는 이름이 없었어요. 여호와라는 이름으로 안 했어요. 그냥 전능하신 하나님으로 나타났다고.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한데는.
그런데 전능하신 하나님으로 계시든, 여호와 이름으로 계시든 우리 인간들 보기는 별 차이 없어요. 이름이 여호와란 것뿐이지 그 방식이나 이 방식이나 똑같은 방식인데 뭐 그게 특별났다고 그렇게 주장하느냐? 도대체 이해가 안 된다. 이름 하나 첨가한 게 큰 살아있는 것으로 되는 것처럼 어떻게 그렇게 설명될 수 있느냐? 이런 의문점을 가질 겁니다. 그걸 설명해드리겠습니다.
그걸 설명하기 전에 다시 할게요. 부활이라는 것은 눈으로 본다고 부활이 아니라 십자가의 사건이 십자가의 변화가 일어나는 그 현장을 부활이 능력이 있는 곳이다. 예를 들면 바로 사도 바울이 예수님을 만났을 때 십자가에 못 박힌 나사렛 예수 사건이 지금 본격적인 과거의 흘러가버린 한 사건이 아니고 제대로 지금 일을 벌이시려는 그 사건으로 다가왔을 때 그걸 부활의 능력으로 본 겁니다.
그러면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사적인, 가정의 문제거든요. 그런데 가정의 문제에서 여기 여호와라는 이름으로 왔다는 말은 이건 뭐냐 하면, 기존에 있는 모든 종족들에게 뭐가 있느냐 하면, 신의 이름이 있어요. 그러니까 이 이름이라는 것은 가정에 들어온 것이 아니고 집단, 단체, 공동체의 하나님으로 했을 때 그 신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한 국가로 형성이 되는 그러한 계기가 이름으로 나타납니다. 그 이유는 뭐냐 하면, 기존의 모든 국가들은 바로 신의 이름이 있기 때문에 그래요. 결국 신의 이름으로 한 국가가 형성돼있어요.
여기에 여호와라는 이름과 이름이 만나는 장터에 누가 끼어드느냐 하면, 여호와께서 자기 이름을 걸고 끼어들게 되는 겁니다. 그럼 어떤 현상이 벌어지느냐 하면, 기존에 고만고만한 이름들, 고만고만한 국가들의 바다, 다른 말로 신들의 바다에서 여호와께서 그 국가들 중에 국가, 그 국가들과 차별하는 국가, 그 국가들이 엄두가 안 나는, 그 국가들의 더러운 것과 세속 됨을 공격하는 그런 유일한 하나님이 인정하는 국가로써 여호와란 이름을 앞장세워서 건설되는 거예요.
지금 아브라함에게 뭐라 했느냐 하면, 네 후손이 하늘의 별 같이 될 것이다. 그리고 아브라함의 이름이 한 사람의 아버지가 아니에요. 많은 사람의 아버지가 되는 거예요. 네 자손이 하늘의 별같이, 바다의 모래같이 많아질 것이라고 약속을 했습니다. 그런데 그 약속에 의하면 그 많은 사람이 이루는 장소가 어디냐 하면, 그들 후손이 애굽에 갔다가 사대 만에 되돌아오는 여정을 통해서 아브라함 자손과 땅과 나라가 큰 민족을 이룰 것이다.
그냥 아브라함한테는 전능하신 하나님이 이룬다는 전능하신 하나님으로 돼있어요. 그럴 때 누가 나라의 주체가 될 수 있는 신의 이름, 어떤 신이 그렇게 했느냐고 이름이 등장해버리면 이렇게 형성된 나라는 누구의 소유가 되느냐 하면, 더 이상 인간의 이름에 소유가 안 됩니다. 아브라함의 소유가 안 되고, 이삭의 소유가 안 되고 누구 소유가 되느냐 하면, 여호와 하나님의 소유된 백성이 되는 겁니다.
이게 바로 애굽에 있을 때 하나님이 모세에게 찾아와서 하는 말이 7절에 나오죠. 너희들은 내 백성이 되고,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되리라. 여기서 인류 최초로 생긴 게 뭐냐 하면, 하나님을 임금으로 삼는 유일무이한 하나밖에 없고, 둘이 안 되는 하나님의 나라가 처음 생기는 거예요.
그러면 다른 나라는 어떻게 됩니까? 가만있다가 졸지에 저주 받아야 돼요. 저주 받아야 되고 진노 돼야 되고 누가 갑자기 뜹니까? 축복 받고 번창하고 하나님의 복을 듬뿍 받아야 될 나라가 솟구쳐 올라옴으로 말미암아 지진이 일어나듯이 모든 세상이 고만고만한 나라인데 갑자기 구멍을 뚫고 하나님의 백성의 나라가 올라옴으로 말미암아 다른 나라는 가만있는데 가만있다가 저주의 나라로 돼야 되는 겁니다.
지금 울산에서 새순교회가 하나님 나라라면 다른 교회 있잖아요. 가만있다가 지옥 가야 돼요. 그리고 그게 이론이 아니고 하나의 상상이 아니고 실제상황이라는 거예요. 그런데 그렇게 되려면 우두머리, 지도자가 있어야 돼요. 그 지도자 이름을 내 이름이라 하는 거예요. 여호와 이름이란 말은, 여호와가 직접 약속한 걸 내가 주체가 되어서 내가 반드시 이루리라.
그러니까 너희들은 누굴 믿어야 된다? 그걸 이루는 주체가 누구라고? 사람이라고요? 아니죠. 모세라고요? 아니에요. 모세 이름이 아니고 누굽니까? 여호와 이름이라고요. 아브라함 때는 아브라함 이름이에요. 아브라함을 축복하면 복 받고, 아브라함을 저주하면 저주 받지요. 이삭도 마찬가지고. 야곱도 마찬가지.
그때는 이름을 누가 지으셨느냐 하면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이 숨어있는 여호와 이름을 대신했는데 이제 모세부터는 모세 이름이 아니고 누구 이름말입니까? 모세가 이야기한 여호와 이름으로 말미암아 모세는 누구 쫄다구? 여호와의 쫄다구가 되는 겁니다. 신약에 와서는 사도 바울의 이름이 아니고, 베드로의 이름이 아니고, 요한의 이름이 아니고 누구 이름입니까?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 구원을 얻으리라.
그런데 사람은 누굴 핍박해요? 나사렛 예수의 이름을 핍박하면서 누굴 핍박합니까? 스데반 집사 죽이죠, 베드로 압박하죠, 야고보 순교했죠, 사도 바울 욕 얻어먹었죠. 그래 된다는 거예요. 결국은, 정리하고 쉽시다.
결국 여호와 이름이란 말은, 목사님 여호와 이름을 갑자기 왜 합니까? 사람이 한 게 아니고 주체가 누가 한다? 여호와가 직접 나서서 한다는 뜻에서 나도 너희들이 이름이 있는 것처럼 나도 이름이 있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인간의 이름과 여호와의 이름과 비교해봐라. 누가 이번 일의 주체냐? 사람이냐, 여호와입니까? 그러니까 다른 이름으로 구원받을 이름을 준 적이 없다고 되지요. 사람 믿지 말라는 거예요.
10분 쉽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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