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1111 우리교회수요설교녹취(예레미야10:12-16)
20091111 우리교회수요설교녹취(예레미야10:12-16)
이름 : 오용익(IP:59.3.201.250)
20091111우리교회수요설교/예레미야 10장 12-16절/이스라엘의 하나님(이 근호목사)
(기도)
이 시간 우리 한마음으로 기도합시다. 변하지 않는 것이 성경에 나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을 천국에 데려가심에 있어서 날이면 날마다 변하는 것 가지고 우리를 구원하시는 것이 아니고 변하지 않는 진리가지고 구원하십니다. 그런데 우리는 맨 날 변하는 것에 대해서 마음 빼앗겨서 괴로워하고 슬퍼하고 낙담하고 때로는 좋아하고 교만하고, 그렇게 합니다. 이 시간 우리가 기도할 것은 변하지 않는 것이 우리의 중심을 차지할 수 있도록 기도합시다.
…………………………
하나님 아버지, 수시로 변하는 것이 사람마음이요 교회인심이요, 그리고 우리가 살고 있는 모든 것이 다 한시라도 머무르지 않고 달라지고 또 달라지는 변화무쌍한 속에 우리가 놓여 있습니다. 우리의 힘, 우리의 지식으로서는 우리자신도 믿을 수 없을 정도로 그 변화에 휩쓸릴 수밖에 없는 연약한 마음, 영혼입니다. 하지만 저희들에게 믿음 주셔서 변하지 않는데서 오는 그 구원의 능력이 우리의 중심을 잡아주셔서 변하지 않는 그것이 우리를 능력으로 이끌 수 있는 그런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남은여생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예레미야 10:12-16
“여호와께서 그 권능으로 땅을 지으셨고 그 지혜로 세계를 세우셨고 그 명철로 하늘들을 펴셨으며 그가 목소리를 발하신즉 하늘에 많은 물이 생기나니 그는 땅끝에서 구름이 오르게 하시며 비를 위하여 번개하게 하시며 그 곳간에서 바람을 내시거늘 사람마다 우준하고 무식하도다 금장색마다 자기의 조각한 신상으로 인하여 수치를 당하나니 이는 그 부어 만든 우상은 거짓 것이요 그 속에 생기가 없음이라 그것들은 헛것이요 망령되이 만든 것인즉 징벌하실 때에 멸망할 것이나 야곱의 분깃은 이 같지 아니하시니 그는 만물의 조성자요 이스라엘은 그 산업의 지파라 그 이름은 만군의 여호와시니라.”
성경에서 우리가 보고 있는 대자연, 산과 강과 논과 밭, 하늘, 별, 달, 이런데서 어떻게 영적인 세계와 연계를 지을 수 있느냐? 상당히 어려운 이야기입니다. 자연세계에서 영적세계로 넘어갈 수 있는 다리 같은 것이 있을까? 옛날 사람들은 그것을 시도를 했습니다. ‘저 하늘위에 누가 계실 것이고 땅 밑에 뭐가 있을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과학이 발달하면서 ‘그래 좋다. 하늘 꼭대기에 가보자’ 해서 가 봤어요. 가보니까 구름위에 하늘이 있고 구름위에 또 하늘이 있는데 계속 로켓을 타고 올라가는 거예요. 옛날 사람들은 번개만 쳐도 구름위에 어떤 할아버지 같은 분이 계신 줄 알았어요. 그런데 구름위에 올라가 보니까 거기에는 그냥 빈 공간만 있을 뿐이에요.
옛날에는 밑에 지옥이 있는 줄로 그렇게 알았어요. 죽으면 땅 밑으로 가는 줄 알았어요. 파보자 이 말이죠. 있으니까 믿으라, 할 것이 아니라 파보면 될 것이 아니냐 이 말이죠. 파 보니까 석유 나오고 금광이 나왔습니다. 그 밑에 마그마가 있고 아예 파버리면 지구를 꽂이처럼 뚫고 지나갈 거예요.
그래서 이 자연세계에서 영적세계로 들어갈 수 있느냐, 하는 그 문제. ‘이 세상은 영적세계가 없고 별, 달, 그냥 우연적으로 생기고 진화되어서 생긴 이 자연세계 그대로 돌아간다’ 라고 이렇게 모든 것을 과학으로 단정하기에는 우리가 천국을 사모하는 이 마음, 영혼까지 달래줄 수 없거든요.
과학이 ‘우리가 죽어서 좋은데 가겠다는, 천국 가겠다’는 이 마음까지 달래줄 수가 없어요. 니고데모라는 사람은 구원받고 싶어서 예수님 찾아 왔을 때, 예수님께서 ‘육에서 육으로 건너갈 수 없다’ 고 했습니다. ‘육에서 난 것은 육이다’ 라고 했습니다. ‘네가 다시 태어나지 않으면 하늘나라를 볼 수 없다’ 하고 주님께서 단정을 했습니다.
그렇게 단정을 해버리니 이 말을 듣고 니고데모라는 사람이 또다시 육으로부터 시작합니다. 육으로는 나지 못하고 거듭나야 한다는 이 말을 니고데모는 이렇게 생각한 거예요. 다시 태어나야 한다는 그 말을 ‘내가 모태, 자궁 속으로 들어갔다가 다시 나오면 됩니까?’ 라고 기껏 생각한 것이 또 있는 육을 가지고 주물럭주물럭 해서 영의 세계로 들어가 보려고 시작하는 겁니다.
이것은 니고데모뿐만 아니라 오늘날 한국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영적세계로부터 복 받으려면 어떻게 합니까? 내가 무엇을 행하면 됩니까?’ 이렇게 나옵니다. ‘내가 무엇을 행하면 됩니까? 기도를 할까요? 한 40일 금식을 해버릴까요? 성경을 한 백독을 할까요?’ 이게 전부 다 뭐냐? 육입니다.
이 육에서 시작해서 ‘뭔가 어떻게 어떻게 했더니만, 나를 자학한다든지 금식을 한다든지 십일조를 한다든지, 주물럭댔더니만 이 몸이 영적으로 변했다’ 라는 그 방법을 이야기해 달라는 겁니다. 이게 워낙 안 되기 때문에, 불가능하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 불가능한 말에 대해서 좌절을 느끼기 때문에, ‘좌절을 느끼지 말고 실제로 육의 세계에서, 자연세계에서 진짜 하나님계시는 예수님계시는 영적세계로의 진입, 그리로 넘어가는가? 그것이 어떻게 되느냐?’ 하는 그 문제입니다.
사람들이 잊고 있는 것이 있어요. 뭘 자꾸 잊어버리냐 하면 구원받겠다, 하는 이 몸 자체를 사람이 자기가 관리한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하나님, 내 몸을 내가 어떻게 관리하면 내 몸을 천국에 집어넣을 수 있습니까?’ 출발을 ‘내 몸은 내 선에서 관리하겠습니다. 내가 다루겠습니다’ 라는 이 선입감부터 잘못된 거예요.
오늘 본문에 보면 모든 만물을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지었다, 되어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 가운데 누구를 포함시켜야 되느냐 하면, 구원받겠다고 들썩들썩 대는 우리들 자신을 내 몸까지라도 말씀이라는 그 속에 포함을 시켜놔 버려야 돼요. 그게 우선되어야 합니다. 내 몸을 말씀 속에 포함을 시켜 놓으면 그 다음에 하나님께서 이 말씀을 어떻게 다루느냐, 그 문제거든요.
제가 이렇게 이야기할 경우에 ‘하나님께서 인간의 모든 육체를 하나님의 말씀 속에 담아놓았다고 쳐도, 그러면 만약에 어떤 사람을 하나님께서 구원 안 시켜 준다면 결국 지옥 가는 것이 되잖아. 그렇다면, 인간의 힘으로서 불가능하다면 천국 갈 사람은 아무도 없겠네’라고 분명히 반발이 나와요.
그런데 오늘 본문 16절에 봅시다. “야곱의 분깃은 이 같지 아니하시니 그는 만물의 조성자요 이스라엘은 그 산업의 지파라” 되어 있습니다. 여기 ‘이스라엘’ 이라는 사람들이 분명히 나옵니다. 그 사람들, 하나님에 의해서 만들어진 구원받기로 작정된 이스라엘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스라엘사람도 눈 두 개, 귀 두개, 코 하나 있는 똑같은 인간입니다. 그리고 이방사람도 눈 두 개, 귀 두 개, 입 하나, 코 하나, 똑같은 인간이에요.
같은 인간이지만 구원된 이스라엘, 하나님의 택한바 된 이스라엘은 구원받지 못한 이방인들과 어떤 점에서 차이가 나느냐? 이걸 우리가 뽑아낼 줄 알아야 됩니다. 이걸 뽑아내면 ‘아하, 하나님께서 사람 구원하실 때, 이런 식으로 구원 하는구나’를, 그 원리를 얻을 수가 있어요.
그렇다면 한번 정리해 봅시다. ‘하나님께서는 천지를 만들었다. 사람만 만든 것이 아니고 주변 대자연도 함께 만들었다. 해와 달도 만들었다. 그런데 그 중에서 하나님에게 구원받는 사람은 어떤 식으로 만드는가?’ 오늘 본문 12절에 보면 “여호와께서 그 권능으로 땅을 지으셨고” 그 다음에 보면 이런 말이 나옵니다. “그 지혜로 세계를 세우셨다.”
과학자들은 말합니다. ‘신(하나님)께서 자연을 만들어도, 그 다음부터 자연이 어떻게 흘러가는가 하는 것은 신이 관여하는 것이 아니고 만들어진 자기들끼리 알아서 살아간다’ 라고 주장합니다. 새, 코끼리, 민들레, 코스모스, 달, 해, 이 모든 것은 새삼스럽게 하나님께서 손대는 것이 아니고 그냥 만들어놓으면 시계가 태엽 감아놓으면 혼자 알아서 돌아가듯이 알아서 돌아가니까 하나님께서 지혜로 새삼스럽게 관여할 필요가 없다고 보는 거예요.
그러나 성경은 그렇지 않습니다. 사람들이 ‘하나님이 천지를 만들었지만 만들고 나서는 손뗐다’ 는 그 말을 왜 하고 싶은가 하면, 그 만들어진 가운데 누가 있느냐 하면 인간도 있잖아요. 인간도 있으니까 하나님이 자기를 관여하고 다루는 것에 대해서 사람들이 굉장히 싫어해요.
선악과를 따먹었기 때문에 죄의 본성이 있어서 ‘하나님, 우리가 알아서 할 테니까 이것이것 하라고만 이야기해주세요. 그러면 우리가 그것 지켜서 구원받을 테니까 제발 하나님이 나한테 간섭하지 마세요. 하나님이 나를 직접 이끈다고 되어 버리면 우리는 자유가 사라지고 우리는 로봇이 되니까 그런 식으로 하지 말고 시키면 시키는 대로 할 테니까 그런 식으로 구원받도록 조치합시다’라고 이렇게 인간들은 나옵니다.
그거 엉터리입니다. 그럴 수가 없어요. 하나님의 지혜가 우리한테서 철수한 적이 없습니다. 태어날 때부터 죽을 때까지 우리한테서 하나님의 지혜가 떠나지 않습니다. 다시 이야기합시다. ‘하나님은 대자연을 만들고 거기에 인간을 포함시켰다. 인간을 포함한 대자연을 만들 때 거기에 심지 같은 것이 있다. 그게 뭐냐? 여기 본문에 보면 하나님의 지혜가 삽입이 되어 있다.’ 그래서 잠언서 8장에 보면 ‘인간들아, 너희가 지혜를 모르면 죽는다’고 했습니다.
제가 목사가 되고 신학을 하고 예수를 믿고 지금까지 오면서 제일 충격적이 이야기가 뭐냐 하면 ‘예수 안 믿으면 죽어’ 라는 그 말입니다. ‘예수 안 믿으면 죽어’ 이 여덟 글자. 이것이 제 머리에서 떠나지 않아요. ‘목사님, 교인수가 얼마 안 됩니다. 헌금이 안 나옵니다.’ 이런 것으로 혹시 고민할지는 모르지만 그 순간에도 떠나지 않는 것은 뭐냐, 교인수가 문제가 아니고 헌금이 문제가 아니라 ‘네가 지금 나(예수) 안 믿으면 죽어’ 이 말입니다.
‘하나님, 저는 40년 믿었습니다. 50년 믿었습니다’ 그런 것은 하나님 귀에 안 들립니다. 그런 것은 거부합니다. ‘지금 네가 예수 안 믿으면 죽어.’ ‘하나님, 제 자식이 있는데 그 애가 교회는 안 나갑니다. 그래도 봐줬습니다.’ 이렇게 여러 가지 핑계를 대지만, 자식이든 남편이든 아내든 하나님에게는 예외가 없어요. 누구든지 예수를 안 믿으면 죽어요.
교회에 무슨 문제가 있더라도 그런 것은 신경 쓰지 말고 본인이 예수 믿으면 안 죽어요. 예수 믿으면 안 죽고 예수 안 믿으면 죽어요. 이런 이유 때문에 교회 못나오겠습니다, 하는 그런 것은 다 쓸데없는 소리에요. 그게 바로 지혜입니다.
사람은 독자적으로 행함으로 구원받으려 하지만, 우리가 어떻게 해서 구원받는다는 것은 우리지혜이고, 지혜는 이미 확정되어 있어요. 지혜는 이미 확정되어 있고 확정된 지혜와 우리가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가, 그걸 보는 겁니다. 좀 더 쉽게 하면 이렇습니다.
마태복음 16장 21절에 보면 예수님하고 베드로하고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예수님께서 하시는 말씀이 “…내가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삼일에 살아나야 할 것을 제자들에게 비로소 가르치시니” 라고 예수님께서 십자가지는 이야기를 할 때에 베드로가 하는 말이 ‘예수님, 결코 그런 일은 예수님에게 일어나지 않습니다’ 라고 합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하시는 말씀이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사단아!’ 이랬어요.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악마야, 너는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뜨리려고 하는구나.’ 그 다음이 중요해요.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이 대목에서 충격적인 것은 사람의 일이라고 끄집어내는 것은 모조리 다 그게 무슨 일이 되느냐 하면, 그것이 예수님을 떠밀어 버리는, 예수님이 하는 일을 뭉개버리는, 그걸 취소시키고 소멸시키는 악마의 일이 된다는 겁니다. 예수님은 사람에게 떠밀렸어요. 남들 보기에는 예수님이 유대인한테 죽었다, 이래 보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여러 군데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악마에 의해서 죽었다, 이렇게 합니다. 그리고 그 악마가 들어온 사람은 가룟유다고. 가룟유다가 예수님을 팔아먹도록 마귀가 그렇게 조종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가룟유다가 떠날 때 하는 말이, ‘유다야!’ ‘예’ ‘네 할 일 해야지.’ ‘예’ 다른 제자들은 무슨 말인지 못 알아들어요. ‘네 할 일을 해야 된다’ 는 그 말이 무슨 말인지?
설교를 처음부터 다시 해 봅시다. 어떻게 육에서 영적인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가? 이것이 중요한 문제입니다. 인간은 육의 눈으로 보이는 그것을 어떻게 주물럭거려서, 이 땅에 종교를 만들고, 교회를 만들고, 이 땅에 기독교를 만들어서 그것 가지고 천국에 들어가려고 온갖 시도를 다 하고 있어요.
제가 부산강의에서 이런 내용으로 강의했지요. 신학과 성경의 차이점이 뭐냐? 신학은 어쨌든 에 사람들을 보듬어 주려고 하고, 사람들을 건져주려고 하고, 사람들의 행함, 할 수 있다는 가능성, 소망을 부여해서 ‘이 신학만 잘 하면 구원 받습니다’ 라는 안내역할 하려고 아우르고 감싸 안으려고 애쓰는 것이 신학이라면, 성경은 영적으로 썼기 때문에 구원 못 받을 사람을 쫒아내는 능력이 있습니다.
이것은 성경이 사람을 무시하는 거예요. ‘사탄아, 너는 내 뒤로 물러가라.’ 예수님이 성경 안에 앉아 있으면서, 인간이 육의 힘으로 자기 행함으로 성경을 지키려고 하는 사람을 보고 성경 안에 계신 예수님께서 대번에 큰 소리 칩니다. ‘사탄아,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구나.’ 성경을 완성시키고 지키는 분 예수님이 계신데, 사탄은 자꾸 뭐라고 하느냐 하면 “성경에 명령 있잖아. 글자 있잖아. 권면 있잖아. 지키라고 했잖아. ‘지키라 그러면 너는 구원받을 것이다.’”
자꾸 성경을 인간의 어떤 신학적인 체계로, 인간의 어떤 가능성으로, ‘열심 있는 행동을 이런 식으로 하게 되면 구원이 된다’ 하는 그런 식으로 성경을 가지고 사람들을 감싸주려는, 사람들을 위로하고 사람들을 사랑하고 얼싸안고 사람들을 무시하지 아니하고 사람들을 인정해주고, 휴머니즘이죠, 사람들의 존재를 인정해주고, ‘하나님이 너를 만들었기에 너를 구원할거야’라는 가능성을 부여해주고 보듬어주려고 합니다.
그래서 신학은 어느 정도 알면, 개혁주의 어느 정도 알고 신학 다 떼면 손 털어버립니다. 자세한 것 빼놓고는 더 이상 배울 것이 없어요. ‘너 배운 만큼 나도 공부하면 다 배우니까.’ 그런데 성경은, 말씀은 볼 때마다 계속 속에서 솟아나옵니다. ‘내가 어느 정도로 성경을 안다’ 하면 ‘안다’ 하는 그 자체가 바로 이미 껍질화, 하나의 달걀껍질처럼 이미 굳어져 버린, 또 내가 나를 우상화하는 우상화작업이 또 일어난 거예요.
그러면 다시 말씀 속에서 솟아나는 예수그리스도, 예수님께서 ‘어이, 네 주체 그거 깨버려라. 너는 지금 예수, 나를 믿는 것이 아니고 예수 믿는 너를 믿고 있어’라고 또 지적하지요. ‘그랬습니다. 제가 그랬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또 깨집니다.
성경은 아무리 간단한 말씀이라도 작년에 보는 것과 올해 보는 것과 달리 계속해서 거기서 우리를 죄로 지적하고, 죄와 더불어서 용서가 그 말씀 속에서 다시 튀어나오고, 그래서 성경은 ‘은혜위에 은혜로다!’ 성경은 ‘은혜 위에 은혜’ 이지만 신학은 책 열 대권 보고 나면 그것 다 알아버렸어요. 더 이상 볼 것이 없어요.
칼빈이 알고 있던 기독교를 다 알아버렸어요. 루터에 대해서, 바르트에 대해서 그 사람들의 책을 보면 다 알아버려요. 더 나올게 없어요. 왜? 죽은 문자니까, 생명이 아니니까. 하나님께서는 칼 바르트의 책을 들고 우리를 구원해준 것이 아니고, 칼빈의 기독교강요를 가지고 우리를 구원하신 것이 아닙니다.
성령께서는 이 말씀, 완료된 말씀을 가지고 우리를 오늘도 내일도 구원하십니다. 그것은 성경의 주인공으로서 우리의 자리를 허락지 아니하십니다. ‘너는 나에게 은혜를 받을 대상이지 네가 성경을 몽땅 독차지 할 인간이 아니다.’ 그 성경의 말씀에 피가 묻어 있고 그 피 흘리신 분은 너도 아니고 나도 아니고 오직 예수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피로 쓰신 문자가 성령에 의해서, 그 문자 안에 들어 있는 예수님의 피가, 십자가 사죄의 능력이 다시 폭발하듯이 은혜로서 말씀이 우리에게 주어집니다. 그렇다면 오늘 본문 16절을 다시 봅시다. 자, 이 모든 자연세계에서 천국으로, 영적인 세계로 가는 길은 없습니다.
더구나 인간은 죄를 지었기 때문에 인간은 항상 눈에 보이는 자연과학, 그것만 자꾸 되비쳐오지, 어떤 영적인 세계라고 지어내봐야 그것은 착각이고 상상력에 불과하기 때문에 그것은 믿을게 못돼요. 이스라엘도 마찬가지입니다. 이스라엘이나 우리나 똑같은 인간이고 사고방식이 거기서 거기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가지고 뭘 하시느냐, 하나님의 집을 짓는데 이스라엘이라는 나라를 통해서, 이스라엘 집이 아닙니다, 누구 집이냐, 하나님 자기 집을 지어놔 버렸어요. 이거 참! 보통 우리가 집을 짓는다면 콘크리트 치고 바닥 깔고 나무로 벽대고 그런 식으로 집을 짓거든요.
그러면 집을 지어 넣고 한 번 따져봅시다. 밑에 있는 콘크리트는 자갈과 시멘트, 다 자연에서 나온 것이 아닙니까? 벽체의 목재는 다 캐나다 같은 나라에서 수입한 것이고 지붕의 기와는 어디서 구워낸 것이고, 모든 것이 자연에서 나온 것으로 집을 지었어요. 그런 집에 들어앉아 봐야 그런 예배당에 앉아봐야 구원 안 됩니다.
왜? 육에서 나온 것은 육이기 때문에. 자연에서 온 것은 자연으로 돌아가면 그만이에요. 자연에서 와서 천국으로 못갑니다. 그러면 집이 어떤 집이 되느냐? 사람이 자연에서 나온 재료가지고 사람의 손으로 지은 집에서는 들어 앉아봐야 그것 다 몽땅 소용없어요. 50평 아파트, 100평 아파트 소용없습니다.
무슨 집이어야 하느냐 하면 하나님이 직접 지으시는 집안에 주님과 함께 거주를 해야, 그 집에 있어야 그것이 천국 되는 겁니다. 그러면 그 집을 누가 짓느냐 하는 문제입니다. 여기서 약간 어려운데요. 14절을 보겠습니다. “사람마다 우준하고 무식하도다 금장색마다 자기의 조각한 신상으로 인하여 수치를 당하나니 이는 그 부어 만든 우상은 거짓 것이요 그 속에 생기가 없음이라.”
제가 지금 약간 어려운 말을 하려고 합니다. 하나님이 어디 계시냐, 하는 문제입니다. 하나님이 어디 계시느냐 하면 사람들이 신이라고 만들어낸 그 신을 어떤 힘으로 그것을 부정해 버릴 때, 선지자의 말씀이죠, 하나님의 계시로 그것을 부정시킬 때, ‘아니야, 그것은 엉터리야’ 라고 부정의 능력이 왔을 때, 그 능력을 주신 분, 하나님이 그 때 나타나는 겁니다.
그러니까 우상이 나타나야 하나님도 나타납니다. 그게 어렵다는 말이지요. 하나님은 우상이 나타나야 나타는데 그러면 우상을 안 만들면 안 나타나는가? 우리 인간은 우상을 안만들 수 가 없어요. 왜냐하면 죄를 지어놓았기 때문에 신을 만들어놔야 맘이 편해요. 종교를 만들고 기독교를 만들고 교회를 다녀야 맘이 편해요. 그러니까 우리는 예배당 짓고 교회를 짓고 하지요.
그러면 주님께서 슬쩍 가서 ‘그것은 교회가 아니거든. 우리교회는 교회도 아니야. 기독교, 그것은 하나님이 만든 종교도 아니야’ 라고 ‘아니야, 아니야, 그게 아니야’ 라는 말을 하실 때, 그리고 그 말이 귀에 들어올 때, 그것이 바로 주님과 함께 있는 사람입니다.
우리는 아니야, 라는 말을 듣는 순간, ‘예, 그러면 이젠 아니고, 주님만 믿습니다’ 라고 하면서 한 50분, 한 2시간 지나가면 또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요. ‘나는 이제 구원받았다’ 이래가지고 또 하나의 우상을 또 만들어요. 그러다가 말씀을 보게 되면 ‘아, 내가 또 나를 섬겼구나’ 라고 또다시 그걸 느껴지게 합니다.
자, 그렇다면 하나님이 성전을 지으라고 할 때, 이스라엘도 우리하고 똑같은 인간이에요. 성전 지을 때 잘 지어놨죠. ‘하나님이여, 성전 잘 지어놨습니다. 하나님이 오셔서 여기서 기도도 들어주시고 잘 해주세요.’ 그렇게 솔로몬이 기도할 때, 하나님의 거룩한 영광이 와서 사람들이 깜짝 놀랐어요. 사람들이 다 죽은 듯이 되었습니다. 시내산 꼭대기에 계신 하나님이 내려와서 성전 안에 계시니까 성전 지어놓고 지은 그들이 놀래버렸어요.
실제로 계신 줄 몰랐거든요. ‘야, 이제 성전만 있으면 구원 받았다’라고 이스라엘사람들은 착각했지요. 그들은 우상과 성전의 차이점을 몰랐습니다. 그럼 차이점은 뭐냐? 우상 안은 텅텅 비어있다는 것. 분명히 솔로몬 성전은 사람이 만들었습니다. 사람이 만들어놨는데 ‘너는 그 가운데 들어오지 말라’고 그 가운데 천사들이 지키고 있습니다.
물론 옛날 그 당시 성전에 천에 자수를 놓은 천사가 있었지요. ‘실제로 들어오지 마. 1년에 한번씩 만 허락하는데 그것은 아무나 들어올 수 없고 오직 대제사장만 들어올 수 있어. 들어오지 마’ 하고 비워놓았습니다. 왜 비워놓았는가? 그것은 바로 그림자요 모형이기 때문에 비워놓았습니다.
그런데 옛날의 구약은 비록 모형이라도 그 모형과 함께 계셨고 그림자라도 그림자와 함께 계셔서 그들의 죄를 용서해줬습니다. 그런데 마지막 때에 예수님께서 그 모형도 필요 없고, 그림자도 필요 없고, 이제는 당사자, 제사장되시고 제물 되시고, 성전 되시고 그 받으시는 하나님 되시는 분이, 십자가, 사람에게 떠밀려버린, 자기를 자꾸만 우상화시키는 그 배후에 악마가 있는 인간의 손에 의해서 그야말로 사라져버린 진짜 공백, 텅텅 비어버린, 죽어버린 그 빈 무덤에서 사흘 만에 되살아나심으로 말미암아 눈에 보이지 않는 성전의 시대가 시작되었습니다.
거기서 성령이 나옴으로 말미암아 우리 몸이 바로 주님이 계시는 성전이 되면서 우리는 매일같이 우리 육체가 죄로 만들어졌음을 발각당하는 일들이 벌어집니다. 십자가능력이 오니까 우리는 ‘왜 예수님이 십자가피를 흘렸으며 왜 그 피가 주님의 진노에서부터 우리를 건질 수 있는가’를, 그 내막을 아는 사람이 된 거예요.
성경말씀 전체가 예수님의 피로 묻어있고 그 말씀 볼 때마다 우리 힘으로 못 지킨다는 것이 발각당하고. 왜 우리는 못 지키는가? 이걸 지키면 꼭 자기공로, 자기 의로 되돌아오게 되어 있어요. 이런 못돼먹은 성깔, 아주 더러운 악마적인 품성 때문에 주께서 피를 흘렸구나, 하는 것을 늘 깨닫는 그런 작용이 벌어지는 그 현장, 그것이 바로 영원한 집에 동거하고 있는 중입니다.
그래서 제가 부산강의에서 이런 얘기 했지요. ‘하나님은 어디 계시는가? 하나님은 바로 약속 안에 계신다.’ 약속 안에 계시면서 십자가약속만 바깥으로 계속 내 보내는데 그것은 ‘예수님 피가 왜 있어야 했으며 왜 예수님의 살점은 찢어져야 했는지’ 그것이 이 세상 돌아가는 모든 말씀과 더불어서 우리의 죄를 들추어내는 일과 병행해서 예수님의 피의 공로를 드러낼 때, 초대교회 교인들처럼 우리가 자랑할 것은 오직 ‘나는 십자가외에는 자랑할게 없노라’, 사도바울이 성령 받아서 했던 그 고백이 바로 오늘날 주님과 함께 있는 성전 된 사람의 고백입니다.
고린도전서 1장에 보면 이것이 세상 지혜로는 어리석다고 하지만 이것이 진짜 너희들을 육에서부터 천국으로 데려가는 진짜 하나님의 지혜라고 한 겁니다. 그 지혜가 창세기 1장부터 하나님의 형상으로 이미 들어와서 이스라엘을 건져내고 홍해를 갈라지게 하시고 유월절을 지키게 해서 우리하고 똑같은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는 그 못돼먹은 이스라엘을 건지시는 하나님께서 이제 마지막 때에 우리를 십자가의 피가 묻어있는 유월절 피가 묻어 있는 우리로 평생을 십자가 자랑만 하면서 살아가는 주의 몸 되게 하신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속에 십자가라는 하늘의 지혜가 들어왔습니다. 니고데모가 그렇게 듣고 싶었고 체험하고 싶었던 영에서 나서 영으로 태어나는 그것을 저희들이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육이 뭔지를 알게 하시고 우리가 얼마나 죄인인가를 깨닫게 하셔서 죄가 더 한 곳에 십자가의 피가 넘치고 있는 것을 세상에 증거 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첨부파일 : 20091111렘10(12-16).hwp (51.5K), Down:8
성재필(IP:118.♡.159.132)
09-11-12 06:32
수고하셨습니다. 감사합니다.설교를 글로 읽으니 더욱 새롭게 다가옵니다.
김성환(IP:119.♡.19.218)
09-11-12 10:06
저도 설교작업 다시 글로 읽게 해주심에 감사합니다^^
동영상 설교를 듣고 '성경'이란 진리가 실제로 살아 역사하셔서 십자가 피로 새창조된 영혼들 그토록 사정없이 후려파고 찔러 쪼개나 하고요!
육을 영으로 교체하는 작업이 자연의 세계에서는 불가능하기에 지금도 저주받아 마땅한 하늘자녀들에게 십자가안에서 끊임없이 작업하고 계시는 성령의 역사에 그저 고마울 뿐...
2012년 지구종말론을 마야의 달력으로 계산해서 민중들을 어수선하게 만드는 대중매체와 영화계는 이번 기회를 이용해 한 몫하고자 하는 것 같습니다(개인적 견해).
1년만 민중들의 마음을 잘 조정하여 2012년 지구종말론의 영화가 블럭버스터되면 한 해 동안 양지바른 따뜻한 휴양지와 시원한 바닷가에서 즐겁게 보낼 수 있겠죠.
영화 대박이든 당청된 로또이든 나도 그들의 마음과 본래 같은 마음이기에 부끄럽기 짝이 없습니다.
애굽의 장자를 다 죽여버린 유월절 어린양의 피!
홍해를 갈라버린 유월절 어린양의 피!
이스라엘 백성들을 시시때때로 심판해버린 유월절 어린양의 피!
가나안 땅을 심판해버린 유월절 어린양의 피!
지금도 펄펄 살아서 설쳐대는 이 피가 땅을 자신의 밥으로 알고 살아가는 나와 육신에게 찾아오심을 이 설교를 통해 깨닫게 됩니다.
결국, 이 핏자국의 흔적만 있는 자만 천국에서 영원히 안식함을...
(갈 6:17, 개역) 『이 후로는 누구든지 나를 괴롭게 말라 내가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가졌노라』
사도 바울이 부럽기도 하고...마냥 그만 부러울 수도 없고...
예수님의 흔적이 나에게도 남기를 성령께 의탁해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