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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

울산 11월 6일 출 6장 두 주체의 중간에 낑긴 틈사이의 언약 자리강의출애굽기

울산 11월 6일 출 6장 두 주체의 중간에 낑긴 틈사이의 언약 자리

이름 : 관리자(IP:124.59.85.46)

091106 진노의 자리에서 태어난 이스라엘에 덮친 약속

관리자(IP:124.♡.85.46)

09-11-07 13:18

http://media.woorich.net/신학강의/2009울산/울산091106a출6장a.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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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11-24 16:08

울산091106a출6장a

20091106a 울산강의-출애굽기6장
(강의:이근호 목사)

출애굽기 6장 초반에 하나님하고 모세하고 대화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거기에서 하나님께서 뭐라고 이야기하시느냐 하면 6절에 보면, “바로가 그들을 보내리라” 이렇게 돼있습니다. 그러면 바로 왕의 본래 뜻은 안 보내겠다. 또는 못 보낸다. 그리고 6장 1절에 보면, 여호와 하나님이 바로가 너희들을 보낸다.

바로는 죽어도 나는 너희들을 애굽에서 히브리인들을 보내지 않겠다. 바로는 명확하게 분명하게 이야기했죠. 안 보낸다, 못 보낸다. 6장 1절에서는 하나님께선 바로가 보낼 것이다. 그 틈 사이에 누가 있느냐? 모세가 있습니다. 그리고 모세가 있다는 이 말은, 모세가 틈 사이에 있을 때 이제 공부하게 됩니다만 이걸 다른 말로 하면, 모세는 언약이라는 발판 위에 서있다고 보시면 됩니다. 만약에 모세가 발판이라는 자기 언약이라는 자리를 없애버리고 그냥 모세가 서있으면 좌절합니다. 중간에 낀 내가 어떡하란 말입니까?

공장에서 무거운, 아주 덩치 큰 쇠 구조물 같은 걸 운반할 때 밑에 바퀴 달린 것을 깔지요. 이게 먼저 와서 줄로써 잡아당기면 이 위에 있는 무거운 물체도 실려서 가지 않습니까? 구원받는다, 신앙생활한다는 게 이렇게 보면 돼요. 신앙생활하는 성도 존재 밑에 언약이라는 바퀴 달린 판이 있다고 보시면 돼요. 참 쉽지요. 우리 발밑에, 우리 자리 밑에 언약인데 그게 발통이 달렸는데 그게 왜 달렸느냐 하면, 우리가 그걸 밀고 가는 게 아니고 언약을 주신 분이 솔솔솔솔 잡아당기면 우리는 그 위에 실려서 가게 되는 겁니다.

가면서 우리는 어떤 풍경의 차이를 보느냐 하면, 어떤 경우에라도 못 보낸다, 안 보낸다. 네가 천당을 가면 손에 장을 지진다. 이러한 천국 가는 모든 것이, 구원받는 게 전부다 불가능하다, 안 된다. 라고 장담하는. 쉽게 말하면 ‘너 같이 죄 많은 인간, 너 같이 하루 열두 번도 더 바뀌는 인간이 구원을 받으면 손에 장을 지질게’ 하는 그러한 내가 생각해도 바로의 지적이 맞고, 그 말이 일리가 있어 보이는 불가능성과 그리고 또 ‘네가 안 되는 걸 나는 할게. 해 낸다.’라는 하나님의 언약 틈바구니에 모세처럼 끼어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이런 이야기를 해요. 교회를 다니고 신앙생활하고 하지만 언약을 놓쳐버리면 결국 자기 용 써서 구원받으려는 그런 것 밖에 안 돼요. 언약을 놓쳐버리면 언약이라는 걸 모르게 되면 어떻게 사람이 구원받으려고 하느냐 하면, 그냥 하나님이 시키는 대로 용 써서 열심을 내서 최선을 다하여 노력하면 그것이 나를 구원해 주리라. 이렇게 오해를 하죠. 그런 식의. 오늘 아슬아슬하다. 오늘 툭툭 소리 나는데.

언약을 모르면, 하나님의 약속을 모르면, 십자가라 하는 것은 십자가는 세 자지만 그걸 다른 말로 하면 새 언약이잖아요. 내 살과 내 피로 새 언약을 세우리니. 그게 십자가잖아요. 언약을 모르게 되면 사람들은 항상 내가 어떻게 지금 행동하고 있는가를 자기 행동에 자기가 주시해서 그 행동이 마음에 들어야 만족해야 신앙생활 잘 한 것 같고, 자기 행동이 자기 마음에 안 들면 좌절하고 낙담하기 일쑤입니다. 그리고 마귀가 그걸 부추기고요. ‘치워라. 그만. 그 동안 신앙생활 많이 했다. 이십 년 다니면 됐지, 이제는 띄엄띄엄 다녀도 괜찮다.’ 이런 식으로 마귀는 계속해서 우리에게 행위에 대해서 강조하고 있습니다.

처음에 어떤 대중가요 가수가 예수 믿고 난 뒤에 난 이제부터 가스펠송과 찬송가 외에는 일체 부르지 않겠노라. 해놓고 얼레 한 삼 년만 지나면, 삼 년 이면 오래 가는 겁니다. 한 일 년만 지나면 판 내고 옛날 히트곡 다시 하고. 별이 빛나는 밤에. 분홍빛 스카프. 목사들 다 알면서도 그런 것 불러대지요.

그럴 때 그 사람이 자기 행위에 대해서 만약에 신경을 쓴다면 여전히 그 사람은 법에 안 매이고 자유로운 행동을 해서 그것으로 구원받고자 하는 시도밖에 안 됩니다. 역시 오류에요. 그것도 하나 오류가 되는 겁니다. ‘전에는 맹세했으면 지켰는데 이제는 복음을 알고 맹세 같은 것 안 해도 된다. 나는 이제 내 마음대로 살래.’라는 식으로 구원받고자 하는 것도 역시 문제가 돼요.

성도는 어디에 끼어있어야 돼요. 어디에? 이렇게 세상에서 내가 자유로우냐, 이런 식으로 행위에 대해서 주목하는 세계와 우리 밑에 발통 달려서 주께서 살살살 잡아당기면 그러한 언약판이라는 언약 위에 놓여있는 언약에, 오늘 본문 3절에 나오죠. 나는 전능하신 하나님이다. 전능하신 하나님이 전능하신 하나님으로서 행세하는 언약의 사이에 우리가 놓여있을 때 ‘이 목사님, 어떻게 행동할까요?’라고 묻지 말고, ‘우리는 뭘 믿으면 됩니까?’라고 물으면 돼요.

처음도 그렇고 마지막도 그렇고. 우리는 무엇을 믿으면 됩니까? 언약을 믿어야 돼요. 어떻게 행동할까요가 아니라 무엇을 믿으면 되는 겁니다. 어떻게 행동할까를 아무리 자유롭게 행동해도 역시 행위는 행위에요. 이래나 저래나 행위는 행위라고.

우리 박윤진 성도님이 야고보서를 거론하면서 ‘믿음이냐, 행위냐?’ 누가 질문했을 때 답변을 참 잘했어요. 믿음이냐, 행위냐 문제를 ‘주체가 누구냐’ 하는 주체 문제로 돌려버렸어요. 행할 것이냐, 믿을 것이냐 이 문제에서 이러면 주체는 누굽니까? 어디까지나 나한테 그저 매여 있잖아요. 그걸 무슨 문제로 돌리느냐 하면, 주체가 나냐, 아니면 하나님이냐? 이것은 야고보서뿐만 아니고 모든 성경이 동일합니다.

항상 언약의 주체자는 누굽니까? 하나님이잖아요. 만약에 우리가 행위로 나가면 주체자는 누굽니까? 우리잖아요. 그 싸움이란 말이죠. 그래서 출애굽기 6장이 이해되죠. 6장에 보면 하나님께서 모세를 불러놓고 하는 말이 반드시 바로가 너희들을 그 땅에서 쫓아내리라. 처음부터 주체 문제를 하나님은 모세로 하여금, ‘모세야. 이번 일에 바로가 주체가 아니고 언약의 하나님이 주체가 된다.’라고 먼저 언질을 주시고 그 다음에 모세를 바로 앞에 세우게 됩니다.

그러면 모세는 바로 앞에 만나도 바로 배후에 있는 누구를 봐야 됩니까? 우리의 만남은 우연이 아니요. 속으로 그랬어요. ‘바로야, 너하고 나하고 만난 것도 네가 좋아서 날 부른 것도 아니고 내가 좋아서 널 부른 것도 아니고 우리의 만남은 우연이 아니다.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만나게 해줬다.’라는 것은 염두에 두었기 때문에 모세는 겁 없이, 두려움 없이 바로에게 할 소리 다 해야 돼요. 그게 오늘날 우리의 신앙생활입니다.

“범사의 감사하라”고 나오죠. 모든 일의 주체는 하나님이십니다. 이것이 먼저 우리가 정리가 돼있어야 그 다음에 나오는 강의가 약간 선이해가 될 거예요. 무슨 말이냐 하면, 바퀴 달린 언약 발판 위에 모세가 놓여있으면서 모세는 바로가 하는 일과 하나님이 하시는 그 두 개를 다 같이 보는 것처럼, 언약이라는 것이 무엇이냐 하면, 이것 좀 어려워요.

우선 성경을 보시면 여기에 4절에 보면, “가나안 땅 곧 그들의 우거하는 땅을 주기로 그들과 언약하였더니” 여기에 언약 내용이 뭐냐 하면, 땅으로 돼있습니다. 가나안 땅 얻어 잡수시면 되지 뭐가 어려우냐 하는데 이게 어려워요. 왜 어려우냐 하면, 보통 땅을 받으면 땅을 소유한 게 되잖아요. 이건 어디까지나 애굽식 사고방식이고, 앞으로 이스라엘이 땅을 얻게 되면 땅을 소유하는 것이 아니고 그 땅이 이스라엘을 소유하게 됩니다.

이 땅을 저는 여기서 뭐냐? 자리에요. 나의 자리. 옛날에 애굽에 있을 때는 애굽 땅이 우리의 자리가 아니에요. 그때는 나그네였고, 객이었습니다. 그때는 나의 자리가 없으면서 내가 영원히 거할 자리가 없는 채로 그냥 우리 자체만 우리 몸만 있었어요.

그런데 가나안 땅은 남들 보기에는 보통 애굽 땅하고 다를 바 없어요. 역시 돌멩이 있고, 밭 있고, 흙 있고 똑같아요. 하지만 가나안 땅의 특징이 뭐냐? 가나안 땅이 약속의 땅으로 바뀝니다. 다른 말로 언약의 땅이죠. 이 언약의 땅에서 무엇이 솟아오르느냐 하면,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약속했던 그것이 땅을 통해서 솟구쳐 올라와요.

이 약속의 땅은 무슨 땅이 되느냐 하면,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다른 말로 하면 여기서 하는 마로 내 백성, 이스라엘을 이스라엘답게 하는 삶의 자리가 됩니다. 이 이스라엘 자리가 부합하지 않거나 합당하지 아니하면 이스라엘 사람들은 여기서 저주를 받게 돼있어요. 땅이 사람을 만든다고요. 우리는 그게 아니고 땅은 중립이라 여기고 내가 여기 있으면 부동산은 내가 소유하면 그만이다. 나는 그 땅 위에 집 짓고 살면 된다고 하지만.

약속의 땅은 그런 땅이 아니고 우리가 그냥 나, 여기 있소. 나, 이 땅에 살래. 용납하는 것이 아니고 가시방석이 되어서 만약에 이 땅에서 뿜어 올라오는 언약과 부합되지 아니하면 그 땅에서 추방되게 돼있는 희한한 땅, 그 땅을 히브리서 11장에서 천국이라 하지요. 그걸 다른 말로 약속의 땅이죠. 하나님의 언약의 땅.

옛날 땅은 가나안 땅이라면, 언약 속에 땅이라는 요소가 있다고 한다면, 새 언약에 합한 땅은 무슨 땅이겠습니까? 새 하늘과 새 땅이죠. 그런데 새 하늘과 새 땅이 되려면 새로운 인간이 돼야 됩니다. 그냥 헌 인간에다가 새 하늘과 새 땅? 죄송합니다. 못 들어갑니다. 들어갈 수가 없어요. 인간이 바뀌어져야 됩니다.

어떻게 바뀌는가? 자리를 통해서 바꿔요. 자리가 바뀌면 거기에 자리에 합당한 인간이 되는 겁니다. 자리가 인간을 만들어내요. 그러면 그 자리는 어떤 자리냐? 그건 제가 아까 언급했습니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주신 그 약속이 뿜어져 올라오는 자리.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맹세하신 그 땅을 올라오게 하죠.

그렇다면 문제가 어렵기 때문에 질문 형식으로 해보겠습니다. 여기 가나안 땅, 약속의 땅이 있다. 여기에 애굽 있습니다. 현재 성경 본문은 애굽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애굽 사람들 끄집어내어서 약속의 땅에 들어가면 그러면 약속이 이루어진 겁니까? 아니죠. 그렇다면 애굽 땅에서 약속의 땅에 가는 여정 속에서 무엇이 바뀌어야 됩니까? 약속의 땅에 합당한 어떤 인간들이 있어야겠죠.

그렇다면 애굽 땅에서 일어나는 모든 사태, 모든 사건들은 결국은 애굽에서 이스라엘 백성을 끄집어내는 것뿐만 아니고 여기 애굽에 압박을 가하는 모든 사건과 사태들은 어디서 나온 겁니까? 결국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언약에서 나오는 그러한 능력이 애굽을 조져버려야 여기서 언약에 합당한 인간이 톡 튀어나오겠죠. 눌러줘야.

‘이래도 안 나가?’ 눌러줄 때 이 눌러주는 방식, 그 내용이 어디에 합당하냐 하면, 하나님의 언약에 합당한 방식으로 애굽을 꽉꽉 눌러주면 기어이 애굽의 바로 왕은 토하듯이 누굴 토해내야 됩니까? 애굽 안에 있는 하나님의 이스라엘 백성을 토해내야 되겠죠. 그러니까 이스라엘 사람들은 자기 구원에 대해서 본인들이 염려할 필요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염려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는 왜 구원에 그렇게 염려가 많습니까?

저는 아기 안 낳아서 모르겠습니다만 산모가 아기 낳을 때 남자들은 생각하기를 때 되면 나오겠지 왜 그렇게 용을 쓰느냐 하는데, 눌러줘야 되겠죠. 그처럼 이 세상에 우리가 보통 살아가지만 우리 성도가 만나는 모든 사태와 거기에 대한 해석과 이 세상을 보는 이해는 뭘 압박으로 보느냐 하면, 하나님의 언약이 우리로 하여금 이 죽음의 지옥 같은 세상이 더 이상 우리를 가두지 못하도록 우리를 빠져나오도록 압박을 하고 밀어주는 그런 힘으로 이 세상에 작용하고 있습니다. 지금도 한국이나 미국뿐만 아니고 모든 것에 그런 식으로 꽉꽉 눌러주지요.

눌러주면 우리는 싫든, 좋든 이런 문제가 아니라 이거는 하나님의 언약의 능력으로 말미암아 기어이 우리는 이 세상에서 점점 더 나그네가 될 수밖에 없고, 우리는 이 세상에서 구원될 수밖에 없는 겁니다. 그렇게 되면 우리는 이 세상에 미련을 갖고 싶어도 못 갖도록 자꾸 조치가 사건이 벌어져요.

목사가 교인들에게 교회에 관심을 두지만 하나님께서 새 언약으로 밀어붙이면 목사는 교회를 포기해야 돼요. 교회는 주님 손에 맡기자. 이건 한 사람 왔다갔다 신경 쓰려고 하니 스트레스 받아서. 안 그래도 신종플루 유행인데. 하여튼 저를 죽여 버리세요. 이제는 교회란 말만 들어도 신경 쓰기도 싫어요. 뿐만 아니고 가정도 마찬가지고 그렇습니다. 눌러주니까 이건 안 튀어나오려야 배길 수가 없어요.

그렇다면 6장부터 지금 12장까지 하려고 하는 게 열 가지 재앙입니다. 열 재앙 내용들이 결국은 뭐에 대한 압박이다?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압박시켜서 언약대로 끄집어내서 언약적인 능력을 보여주는 게 열 가지 재앙이죠.

열 가지 재앙은 삼등분으로 나뉩니다. 1부터 4까지, 5부터 6까지, 그 다음에 7부터 10까지. 열 가지 재앙이 삼등분으로 나눠져요. 첫 번, 1부터 4까지는 생활에 불편을 주는 재앙. 그리고 다섯 번째, 여섯 번째 재앙은 직접 신체를 공격하는 것. 하지만 1부터 6까지는 일시적이에요. 7부터 10까지는 장기적으로 고통을 안겨주는 재앙이죠.

첫 번째가 나일강의 강물이 피로 변하는, 두 번째가 개구리, 세 번째가 이 또는 모기, 네 번째가 파리 이렇게 해서 생활에 불편을 주는. 다섯 번째가 독종이라 해서 가축을 공격하는 거고, 그 다음에 악질이라 해서 가축뿐만 아니고 사람 신체까지 공격하는 거예요. 그 다음 여기서부터는 장기적으로 환경을 농경시대에 농사한 것을 작살내버려요. 제일 먼저 작살내는 게 그 유명한 메뚜기로 싹 쓸어버려요. 그 다음에는 우박. 그 다음에 해가 안 비쳐요. 이거는 흑암이죠. 그 다음에 마지막에 직접 아예 그 집안의 족보를 잘라버려요. 영구적으로. 장자의 죽음.

여기에 관여하는 모든 능력들이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언약적인 능력에서 야기된 상황이 주어집니다. 결국 이것은 한 마디로 간단하게 이야기하면 뭐냐 하면, 야곱과 에서를 달리 구분하는데 좀더 자세히 이야기하면, 야곱은 축복을 받고 에서는 저주 받는 거예요. 제가 이렇게 이야기하면 ‘목사님, 여기 에서가 어디 있습니까?’ 이러거든요. 축복이라는 게 나오면 반드시 축복 받지 않는 그 여분의 모든 것은 저주가 됩니다.

여기서 여기까지 여러분들이 아신다 하고 이제부터 어렵게 해보겠습니다. 원래 우리의 자리가 뭐냐 하면, 저주의 자리입니다. 성경 한번 찾아봅시다. 로마서 5장 9절을 제가 읽어보겠습니다. “그러면 이제 우리가 그 피를 인하여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더욱 그로 말미암아 진노하심에서 구원을 얻을 것이니”

철학자들이 기독교를 연구하고 성경을 아무리 연구해도 뭘 자꾸 빠뜨리느냐 하면, ‘진노하심’에 대해서 난색을 표해요. 하나님이 인간을 만든다는 자체가 사랑이 아닌가? 그럼 하나님이 나타나는 건 사랑의 하나님이구나. 우리가 죄를 지었구나. 그러니까 빨리 우리가 죄를 회개해서 사랑을 회복해야지. 출발점이 다 사랑이에요. 그런데 로마서 5장 9절은 진노하심입니다.

그런데 왜 철학자들이나 신학자들이 진노하심에서 출발 못 하느냐 하면, 진노하심에서 출발하려면 자기 자신의 자리를 뭐로 봐야 됩니까? 저주의 자리로 봐줘야, 저주가 있어줘야 하나님 진노가 있는 것 아닙니까. 그렇지 않아요? 그러니까 우리가 저주 받아야 합당할 때 진노가 하나님께 합당하다 이 말입니다.

우리는 보통 자식 낳으면 귀엽게 보잖아요. 하나님은 그걸 진노의 대상으로 본다 이 말이죠. 그런데 부모의 아이디어에서는 머리에서는 자기 자식 놓고 ‘진노 받아 마땅해.’라는 생각이 아무리해도 나오질 않는다 말이죠. 안 나오니까 그때부터 생각하는 모든 하나님이라는 것은 이미 자기 자리를 진노와 저주의 자리로부터 출발해야 될 걸 복 받을 수 있는 자리로 여기기 때문에 성경 66권 전부다 잘못 해석할 수밖에 없는 거예요. 어떤 성경구절을 대도 전부다 잘못 해석하고 있는 거예요.

쉽게 말해서 자기가 자기를 진노의 대상으로 볼 그런 눈이 없다니까. 그런 안목이 없어요. 사람이 자기를 거울을 보면서 ‘아이고, 저주 받을 놈아.’ 이렇게 거울 보는 사람 없습니다. 사진 찍어놓고 사진 보면서 ‘아이고, 이 저주 받을 놈.’ 이렇게 볼 수 없어요. 나중에 나이 육십 넘어서 사진 찍으면 ‘아이고, 영감아. 안 죽고 이게 뭐고. 얼굴 봐라. 누가 사진 찍었노?’ 이렇게 자기 사진보고 놀라지만.

젊은 사람, 조금만 예쁜 것 있으면 자기 홈피에 올려서 이래 찍고, 요래 찍고, 저래 찌고, 잠옷 바람으로 찍고, 짜장면 먹으면서 찍고 이러는데. 자기 저주받고 진노 받은 것을 홈피에 올리겠습니까? 안 올리잖아요. 지금 소통이 안 되네.

지금 뭐냐 하면, 이 자리가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을 죄 지어서 저주받으라가 아닙니다. 저주의 자리에서 인간을 만들었다 제가 그 이야기하고 있는 거예요. 하나님의 진노하심, 저주의 자리에서 인간을 만들어놨는데 인간은 자기 자리가 저주의 자리, 진노의 자리라고 인정하지 않고 중립의 자리라고 보는 거예요.

그러니까 죄도 아니고, 의도 아니고. 앞으로 자기가 어떻게 행하느냐에 따라서 잘못 행하면 벌 받고, 잘하면 복 받는. 특히 잘하는 것 중에서 예수를 믿는 잘하는 일 하면 나라는 인간이 구원받을 수 있다 하는 거예요. 이것은 근본적으로 복음이 아닙니다. 내가 예수 믿는 잘한 일을 하면 구원받는다는 것은 이거는 복음도 아니에요. 그야말로 기독교죠. 사람들을 지옥 가게 만드는 기독교가 되는 거예요. 복음이 아니에요.

복음은 저주의 자리에서 자기가 태어난 것을 감사하는 거예요. 왜냐하면 저주의 자리에서 구원하는 것은 저주의 자리에서 인간이 아무리 용을 써도 저주뿐이에요. 진노에서 못 벗어납니다. 오직 진노의 자리, 저주의 자리에서 구원되는 것은 로마서 5장 9절에 피 밖에 없어요. 결국 하나님은 자기 피를 드러내기 위해서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진노의 자리에서 인간을 만들어놨습니다.

사람들이 자기 자리가 저주의 자리, 이거는 전에 그리심산, 에발산 이야기했죠. 산이 두 개 있는데 어느 산에 가야 복 받는다고요? 저주 산에 가야 복 받는다 이 말입니다. 같은 원리인데. 사람들이 저주의 자리에서 올라온 것을 모르는 증거가 뭐냐 하면, 사람이 뭘 기대하느냐 하면, 항상 뭘 염두에 두고 신을 부르느냐 하면, ‘나를 축복하세요. 나를 사랑해주세요.’라는 말을 하는 거예요.

그래서 교인들이 교회 올 때 뭐하려고 옵니까? 저주 받으러 옵니까, 복 받으러 옵니까? 복 받으러 오잖아요. 이것 자체가 잘못 됐다니까. 내 자리가 무엇이냐 알고 와야 되는데 그게 아니고 의당 복 줘야 좋은 하나님인 줄 알고 있어요. 그런데 진짜 복은 뭐냐 하면, 자기 자리가 자기가 태어날 때부터 진노의 자리, 저주에서 내가 태어났다는 걸 눈치 채는 것, 그게 복입니다. 그 복 외에 다른 복은 없어요. 자기 자리를 처음 아는 것, 생전 처음으로 내 자리가 진노의 자리라는 걸 처음 알고 차릴 때 이게 로마서 5장 9절 말씀이 그대로 우리 속에 들어왔을 때 생기는 현상입니다.

그런 자리에서만 뭐가 좋겠어요? 자기가 교회 다니는 걸 좋겠습니까, 자기 신앙생활하는 걸 좋아 하겠습니까 안 그러면 뭘 좋아 하겠습니까? 피. 내가 안 되는 걸 되게 하셨군요. 내가 도저히 할 수 없는 걸 되게 하셨군요. 그 피를 아까 세 자로 뭐라 했습니까? 새 언약. 그게 새 언약이에요.

교회를 그렇게 다녀도 가장 기본적인 것, 자기 자리가 무엇인 줄을 모르는 체 계속 교회 다니고 있는 거예요. 그럼 남는 건 무엇이겠습니까? 내가 처음 와서 삼 년 만에 건축헌금 냈고, 오 년, 십 년 만에 교회 주차장 넓히는데 내가 한 몫 했고, 십오 년에는 목사 쫓아내는데 내가 앞장섰고, 그 뒤에 괜찮은 목사 왔는데 내가 힘 좀 썼고. 사실은 본인은 잊었다, 그런 것 주장할 사람 아니다. 나는 하나님 은혜로 다니지 내가 한 것 뭐 있노. 말이야 줄줄 달지만 껍데기만 싹 벗기면 그 안에는 자기 과거 일이 들어있어요. 누구든지 마찬가지로 들어있어요.

그런데 그것 들어있는 걸 잊을 생각하지 마세요. 잊지를 못합니다. 다만 그것이 무엇을 야기했다? 하나님의 진노와 이래서 나는 저주 받아 합당한 존재인 것을 확인해주는 증거물입니다. 내가 이래서 저주 받아 마땅하구나.

진짜 성도라면 저주 오는 것은 반가워해야 됩니다. ‘반갑다. 저주야.’ 왜? 자기한테 오는 게 합당하기 때문에. ‘주여, 오늘도 기도하오니 저주해 주옵소서.’ 세상에 이런 기도하는 사람 못 들어왔어요. ‘주여, 저에 합당한 것은 저주가 합당하오니 저주해 주옵소서.’ 이것 아마 주일날 대표기도하면 기절초풍할 거예요.

제가 어느 날 주일 아침에 그런 설교했지요. 서울 가니까 미장원 간판에 [머리 못하는 집] 세상에. 그 이야기를 했더니만 그날 오후에 쉬는 시간에 강구만 장로님이 우리교회 이름 바꿉시다. [구원 안 되는 교회] 장난도 너무 심했다.

사실은 다른 교회들한테 제가 이름을 붙이면 구원이 안 되는 교회. 왜? 축복을 이야기하기 때문에. 저주를 이야기하고, 진노를 이야기해줘야 예수님의 새 언약, 피가 나오는데 축복이 나오니까 사람들이 피 이야기 나오면 ‘피~익’ 나는 피 그것 말고 복 달라고. 하나님이 복 주는 하나님이고, 여기 보니까 전능하신 하나님이고, 자비하신 하나님이고 그런 하나님인데.

사람들이 복 달라는 말은 뭡니까? 이미 복이란 개념을 누가 만들었다? 자기가 이미 밑에서 만들지요. 집에 가서 오늘은 어떤 걸 복이라고 만들어서 달라고 할까. 자기가 복을 만들어요. 어떤 것이 복인지, 어떤 것이 기도할 내용인지 만든다는 말은 그 기본자세가 나는 이런 복을 달라 할 수 있는 권한도 있고, 자격도 있다고 주장하잖아요.

그런 사람들이 교회 왔기 때문에 여기다 피 이야기하니까 전부다 ‘픽~’하면서 도망하면서 다른 교회 가버렸더라고. 우리교회도 우르르 다 가버렸어요. ‘나는 교회 오는 것은 교회 안 가는 사람보다 많이 받기 위해서 교회 갔는데 왜 부정적으로 이야기하느냐?’ 이래 나오는 거예요. 그렇게 돼버리면 언약을 잊어버려요.

지금 애굽에서 이스라엘 백성을 빼내가는 것은 히브리인들의 요구사항입니까, 하나님의 요구사항입니까? 하나님의 요구사항이잖아요. 그런데 애굽에 있는 히브리인들은 나갈 생각이 없어요. 여기 12절 봅시다. “모세가 여호와 앞에 고하여 가로되 이스라엘 자손도 나를 듣지 아니하였거든 바로가 어찌 들으리이까” 제가 아까 했지요. 모세는 어디와 어디 사이에 끼어있다? 주체가 하나님 되신 하나님 일과 또 다른 주체, 바로 바로라는 주체 그리고 구원해야 될 히브리인들이라는 주체의 중간에 끼어있는 거예요. 어쩌란 말인가?

하나님의 주체는 반드시 바로가 너희를 쫓아내리라 했지만 막상 현실 속에서 실제 보니까 이제는 바로뿐만 아니고 심지어 같이 나갈 백성들까지 내 말을 믿지 않을 때. 오늘날 교회 하고 똑같아요. 목사가 복음 전하니까 전부다 픽, 픽 하듯이 도대체.... 분명히 성경은 예수님의 피로 구원받는다 하고 성경은 우리가 진노 받아 마땅하다고 이야기하니까 막상 그 이야기를 퍼 담아서 이야기해주니까 교인들은 안 믿고, 다른 교회 가겠다하고. 정말 모세가 환장할 지경이죠.

왜 그렇게 해야 되느냐 하면 달라짐, 달라짐이 사람보고 ‘너, 달라져라’ 해도 소용없다는 겁니다. 달라짐은 뭐부터 달라져야 하느냐 하면, 자리가 그 사람을 달라지게 할 때만 그 사람은 달라집니다.

보통 예수님이 부활했잖아요. 맞지요. 예수님 지금 어디 계십니까? 얼굴 어떻게 생겼어요.? 누가 봤습니까? 예수님의 부활하심을 할 때 이런 걸 설명할 때 목사로서 너무너무 어려운 거예요. 부활이란 의미가 보겠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예수님 살아났다면서? 보자.’ 막상 부활 본 사람들은 알아먹었어요, 못 알아먹었어요? 못 알아먹었어요. 엠마오로 내려가는 제자하고 예수님하고 같이 이야기하면서도 못 알아먹었어요.

그걸 제가 이렇게 설명한다고. 부활 안에는 예수님의 십자가가 들어있기 때문에 십자가가 뭡니까? 십자가라 하는 것은 인간들이 예수님이 메시아인 것을 못 알아먹죠. 못 알아먹기 때문에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잖아요. 그러니까 부활은 못 알아먹는 것이 그게 안고 핵심이 들어가 있는 거예요. 그래서 부활해도 안에 십자가가 들어있는 이상은 부활체가 되어도 못 알아먹게 돼있어요. 그걸 설명하는 게 참 어렵다니까. 부활했거든요? 못 알아먹습니다.

사도 바울이 처음 예수님 부활해서 만났을 때 뭐라 했습니까? ‘예수님이시군요.’ 이랬습니까? ‘주여 누구십니까?’ 진짜 부활하신 분을 만날 때는 부활체를 만나는 게 아니고 십자가 졌다는, 요한복음 20장에 보면 나오죠. 도마한테 뭘 보여줍니까? 도마한테는 나중에 따로 보여줬고. 그전에 제자들에게 다 창자국, 못자국 공히 같이 보여줬어요. 성경에 그렇게 돼있어요. 십자가입니다. 그래서 갈라디아서 3장에 보면, 십자가가 너희들 눈앞에 보이는데 누가 꾀더냐?

부활했다는 것은 십자가가 취소되는 게 아니고, 날아가는 게 아니고 십자가가 그대로 안에 전 부활의 내용을 차지하면서 그 십자가가 살아있는 형태로 나온 게 부활의 능력이에요.

이것도 마찬가지죠. 하나님이 살아계시다. 여기 하나님이 살아계시는가 봅시다. 아까 부활이라 하는 것은 예수님의 “십자가가 눈앞에 보이거늘” 그 이야기할 때 다른 사람들은 사도 바울 미쳤다. 왜? 십자가는 이미 이십오 년 전에 끝난 사건이다. 사도 바울은 끝난 사건을 지금 사건으로 만드는 게 부활이라는 겁니다. 그게 성령 안에서 부활의 의미에요. 십자가가 과거 한 번 사건이 아니고 계속 지금 있는 사건으로 확대시키는 것이 부활의 능력이고 성령의 능력이라 이 말이죠.

그렇다면 그것이 신약에서 주의 이름으로 가능하다면 오늘 본문에서 모세와 함께 있는 하나님은 어떤 모습으로 나타나느냐 말이죠. 키가 몇 센티고 몸무게 몇 킬로냐 할 때 거기에 대해서 뭐라고 돼 있느냐 하면, 여기에 6장 3절, “내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전능의 하나님으로 나타났으나 나의 이름을 여호와로는 그들에게 알리지 아니하였고”로 돼있어요.

하나님께서 지금 살아계셔요. 과거 하나님 말고 지금 하늘에 계신 분 말고, 지금 모세와 함께 있다는 걸 뭐로 보여주느냐 하면, 키가 몇 센티, 아이덴티티가 붙어 있는 게 아니고 바로 여호와라는 이름으로 너와 함께 하겠다. 이것 또 설명해야 됩니다. 어떻게 여호와라는 이름이, 그전에는 이름이 없었어요. 여호와라는 이름으로 안 했어요. 그냥 전능하신 하나님으로 나타났다고.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한데는.

그런데 전능하신 하나님으로 계시든, 여호와 이름으로 계시든 우리 인간들 보기는 별 차이 없어요. 이름이 여호와란 것뿐이지 그 방식이나 이 방식이나 똑같은 방식인데 뭐 그게 특별났다고 그렇게 주장하느냐? 도대체 이해가 안 된다. 이름 하나 첨가한 게 큰 살아있는 것으로 되는 것처럼 어떻게 그렇게 설명될 수 있느냐? 이런 의문점을 가질 겁니다. 그걸 설명해드리겠습니다.

그걸 설명하기 전에 다시 할게요. 부활이라는 것은 눈으로 본다고 부활이 아니라 십자가의 사건이 십자가의 변화가 일어나는 그 현장을 부활이 능력이 있는 곳이다. 예를 들면 바로 사도 바울이 예수님을 만났을 때 십자가에 못 박힌 나사렛 예수 사건이 지금 본격적인 과거의 흘러가버린 한 사건이 아니고 제대로 지금 일을 벌이시려는 그 사건으로 다가왔을 때 그걸 부활의 능력으로 본 겁니다.

그러면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사적인, 가정의 문제거든요. 그런데 가정의 문제에서 여기 여호와라는 이름으로 왔다는 말은 이건 뭐냐 하면, 기존에 있는 모든 종족들에게 뭐가 있느냐 하면, 신의 이름이 있어요. 그러니까 이 이름이라는 것은 가정에 들어온 것이 아니고 집단, 단체, 공동체의 하나님으로 했을 때 그 신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한 국가로 형성이 되는 그러한 계기가 이름으로 나타납니다. 그 이유는 뭐냐 하면, 기존의 모든 국가들은 바로 신의 이름이 있기 때문에 그래요. 결국 신의 이름으로 한 국가가 형성돼있어요.

여기에 여호와라는 이름과 이름이 만나는 장터에 누가 끼어드느냐 하면, 여호와께서 자기 이름을 걸고 끼어들게 되는 겁니다. 그럼 어떤 현상이 벌어지느냐 하면, 기존에 고만고만한 이름들, 고만고만한 국가들의 바다, 다른 말로 신들의 바다에서 여호와께서 그 국가들 중에 국가, 그 국가들과 차별하는 국가, 그 국가들이 엄두가 안 나는, 그 국가들의 더러운 것과 세속 됨을 공격하는 그런 유일한 하나님이 인정하는 국가로써 여호와란 이름을 앞장세워서 건설되는 거예요.

지금 아브라함에게 뭐라 했느냐 하면, 네 후손이 하늘의 별 같이 될 것이다. 그리고 아브라함의 이름이 한 사람의 아버지가 아니에요. 많은 사람의 아버지가 되는 거예요. 네 자손이 하늘의 별같이, 바다의 모래같이 많아질 것이라고 약속을 했습니다. 그런데 그 약속에 의하면 그 많은 사람이 이루는 장소가 어디냐 하면, 그들 후손이 애굽에 갔다가 사대 만에 되돌아오는 여정을 통해서 아브라함 자손과 땅과 나라가 큰 민족을 이룰 것이다.

그냥 아브라함한테는 전능하신 하나님이 이룬다는 전능하신 하나님으로 돼있어요. 그럴 때 누가 나라의 주체가 될 수 있는 신의 이름, 어떤 신이 그렇게 했느냐고 이름이 등장해버리면 이렇게 형성된 나라는 누구의 소유가 되느냐 하면, 더 이상 인간의 이름에 소유가 안 됩니다. 아브라함의 소유가 안 되고, 이삭의 소유가 안 되고 누구 소유가 되느냐 하면, 여호와 하나님의 소유된 백성이 되는 겁니다.

이게 바로 애굽에 있을 때 하나님이 모세에게 찾아와서 하는 말이 7절에 나오죠. 너희들은 내 백성이 되고,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되리라. 여기서 인류 최초로 생긴 게 뭐냐 하면, 하나님을 임금으로 삼는 유일무이한 하나밖에 없고, 둘이 안 되는 하나님의 나라가 처음 생기는 거예요.

그러면 다른 나라는 어떻게 됩니까? 가만있다가 졸지에 저주 받아야 돼요. 저주 받아야 되고 진노 돼야 되고 누가 갑자기 뜹니까? 축복 받고 번창하고 하나님의 복을 듬뿍 받아야 될 나라가 솟구쳐 올라옴으로 말미암아 지진이 일어나듯이 모든 세상이 고만고만한 나라인데 갑자기 구멍을 뚫고 하나님의 백성의 나라가 올라옴으로 말미암아 다른 나라는 가만있는데 가만있다가 저주의 나라로 돼야 되는 겁니다.

지금 울산에서 새순교회가 하나님 나라라면 다른 교회 있잖아요. 가만있다가 지옥 가야 돼요. 그리고 그게 이론이 아니고 하나의 상상이 아니고 실제상황이라는 거예요. 그런데 그렇게 되려면 우두머리, 지도자가 있어야 돼요. 그 지도자 이름을 내 이름이라 하는 거예요. 여호와 이름이란 말은, 여호와가 직접 약속한 걸 내가 주체가 되어서 내가 반드시 이루리라.

그러니까 너희들은 누굴 믿어야 된다? 그걸 이루는 주체가 누구라고? 사람이라고요? 아니죠. 모세라고요? 아니에요. 모세 이름이 아니고 누굽니까? 여호와 이름이라고요. 아브라함 때는 아브라함 이름이에요. 아브라함을 축복하면 복 받고, 아브라함을 저주하면 저주 받지요. 이삭도 마찬가지고. 야곱도 마찬가지.

그때는 이름을 누가 지으셨느냐 하면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이 숨어있는 여호와 이름을 대신했는데 이제 모세부터는 모세 이름이 아니고 누구 이름말입니까? 모세가 이야기한 여호와 이름으로 말미암아 모세는 누구 쫄다구? 여호와의 쫄다구가 되는 겁니다. 신약에 와서는 사도 바울의 이름이 아니고, 베드로의 이름이 아니고, 요한의 이름이 아니고 누구 이름입니까?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 구원을 얻으리라.

그런데 사람은 누굴 핍박해요? 나사렛 예수의 이름을 핍박하면서 누굴 핍박합니까? 스데반 집사 죽이죠, 베드로 압박하죠, 야고보 순교했죠, 사도 바울 욕 얻어먹었죠. 그래 된다는 거예요. 결국은, 정리하고 쉽시다.

결국 여호와 이름이란 말은, 목사님 여호와 이름을 갑자기 왜 합니까? 사람이 한 게 아니고 주체가 누가 한다? 여호와가 직접 나서서 한다는 뜻에서 나도 너희들이 이름이 있는 것처럼 나도 이름이 있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인간의 이름과 여호와의 이름과 비교해봐라. 누가 이번 일의 주체냐? 사람이냐, 여호와입니까? 그러니까 다른 이름으로 구원받을 이름을 준 적이 없다고 되지요. 사람 믿지 말라는 거예요.

10분 쉽시다.

관리자(IP:124.♡.86.6)

09-11-24 16:11

울산091106b출6장b

20091106b울산강의-출애굽기6장
(강의:이근호 목사)

하나님의 나라에 백성이 있어야 된다는 아이디어가 우리 인간들 아이디어가 아닙니다. 왜냐하면 인간들은 하나님에 관심이 없어요. 인간들의 관심사는 자기가 가치 있고, 복 받고 그게 인간들의 관심사죠. ‘나 복 주세요.’라고 관심이 있어요. ‘우리 교회 합시다.’ 이것도 관심 없어요. 각자 내가 교회 했다는 걸 통해서 나 복 받으면 그만 이에요.

그러나 하나님은 그걸 가지고 그러니까 너는 저주 받아 마땅하다 이 말이죠. 왜? 관심사가 하나님이 어떤 관심을 갖고 있느냐는 없고, 사람은 태어날 때부터 저주 받아야 마땅한 존재의 티를 내는 것처럼 관심사가 자기한테 있단 말이에요.

그러니까 자기가 말하는 축복이란 것은 축복과 저주를 누가 만드느냐 하면, 내가 원하는 식의 축복과 저주를 생각하는 거예요. 그런데 이게 뭐냐 하면, 내가 뭘 갖고 있습니까? 이름을 갖고 있는 거예요. 이 이름이 무슨 이름이냐? 우리 이름은 저주 받아야 될 이름이거든요. 저주 받아야 될 이름이 축복과 저주를 내세울 때 이 축복과 저주도 저주 받아야 마땅한 거다.

이름 자리에 이러한 사고방식에 변화가 일어나요. 제일 먼저 변화가 일어난 사람이 아브라함이었고, 그 다음에 이삭이었고, 그 다음 야곱이었잖아요. 그때에는 아브람이 아브라함으로 바뀌었고, 사래가 사라로 바뀌었죠. 사래가 사라로 바뀔 때, 아브람이 아브라함으로 바뀔 때 그 사람들은 뭘 생각했습니까? 하나님의 나라가 이뤄져야 되는데? 그 생각했습니까? 아닙니다. 어쨌든 간에 아들 하나 낳아야 되겠다. 어쨌든 간에 우리 가정 복 받아야 되겠다. 그 생각한 거예요.

그리고 특히 사래라는 여자는 자기가 본처면서도 여종 하갈이 아들 낳으니까 어떻게 했습니까? 얼마나 미워하고 구박했어요. 막장 드라마 아닙니까. 그러니까 너무나 학대에 못 이겨서 불쌍하디 불쌍한 엄마 하갈은 자기 자식 안고 가출하잖아요. 왜 사라가 미워했겠습니까? 주체가 누구에요? 사래 자기잖아요. 사래란 말은 누구 이름? 나를 위한 내 이름이란 말이에요.

우리는 구원받아야 될 성도라 하면서도 실제 살아가는 것은 여호와 이름이 아니고 누구 이름? 나를 위한 내 이름의 영화, 나 잘되기 위한 그 모든 욕망의 핵심 부분을 뭐라고 하느냐? 그걸 ‘이름’이라 하자. 그들이 바벨탑 지을 때 누구 이름 내려고 했습니까? 우리 이름을 어디까지? 하늘까지 내보자. 그들이 열심히 땀 흘려 한 것이 전부다 자기들 이름 하는 거예요.

이름이라 하는 것은 자아 또는 주체의 결집을 바깥으로 표현한 그 자리가 그게 쉽게 말하면 아까 말한 내 이름 자리, 내 자리. 그 내 자리가 이제는 진짜 축복 주시는 그분이 와서 이걸 여호와 이름으로 바꿔버리면, 내가 전에 개인적으로 생각했던 축복과 저주도 바뀌어야 되겠죠.

바뀌어야 되는데 인간의 자기 능력으로 바뀌겠습니까, 안 바뀌겠습니까? 바뀔 턱이 없죠. 바뀌지 않으니까 언약의 능력으로 조지는 거예요. 압박을 가하는 거예요. ‘너희들이 생각하는 축복은 사실은 저주고, 너희들이 생각하는 저주가 사실은 축복이다.’라고 아브라함 바뀌듯이, 이삭 바뀌듯이, 야곱이 이스라엘로 바뀌듯이 바뀌어야 되는 거예요. 우리 창세기 공부하면서 야곱이 바뀌는 것 공부했잖아요. 야곱이 이스라엘로 바뀌었지요. 완전히 얻어맞지 않습니까? 깨지고 얻어맞고.

그런데 이걸 집단적으로 바뀌는 겁니다. 그 바뀔 때 야곱의 아들, 요셉 가정에 바뀌게 되는데 요셉 가정에 야곱에게 주신 하나님의 언약이 요셉 가정에서 세 식구, 네 식구가 아니고 몇 식구였습니까? 70명. 많이 불었지요. 엄청나게. 많이 분 것은 누구 덕분입니까? 그전까지는 여호와 이름으로 주체가 안 나타나고 그냥 전능하신 하나님으로 나타난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그 전능하신, 그냥 약속만 주신 하나님의 약속 속에 너희들이 이방인의 객이 되어서, 아까 창세기 14장이죠.

창세기 15장 13절에 이방에서 객이 되어서 사대 만에 돌아온다는 숨겨진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이야기했잖아요. 사대 만에 돌아왔을 때 소 식구가 아니고 많아졌으니까 이게 하나의 나라가 돼요. 그때부터 오늘 본문 출애굽기 6장 7절에 보면 그걸 ‘내 백성’이라 해요. 백성이란 말은 뭔 뜻입니까? 이미 하나의 나라로서 형성되는 거예요. 그 시점에 주님께서 그동안 안 나타낸 ‘내가 바로 언약의 주체가가 맞다’고 자기 이름을 드러내죠. 이 이름은 특정 가정을 구원하는 게 아니고 하나의 나라를 형성하기 위한 이름으로써 등장하는 거예요.

그러면 하나님이 직접 임금님 돼버리면 무엇과 차별화 되느냐 하면, 다른 나라들에게 신들의 이름이 있어요. 왕은 그 신의 이름을 대행해서 왕이 되는 거예요. 모든 민족이 다 그래요. 왜 그러냐고 물어보시면, 여러 백성들이 있을 때 백성들을 하나로 묶으려면 너나 나나 관계없이 하나의 신처럼 군림한 이름을 불러줘야 이게 단결이 돼요. 하나의 결집력이 형성된다고. 왕이 두 명 되면 곤란하잖아요.

그러면 이 왕은 뭐라고 하느냐 하면, 내가 여러분 왕이 된 것은 하나님의 역사였습니다. 대구강의에서 그런 이야기했는가요? 하나의 역사를 바꿀 때는 반드시 역사의 끝을 무엇과 연결시킨다? 묵시와 연결시킨다고 했어요. 그걸 ‘연호’라 하지요. 임금이 바뀌면 그 다음부터는 세종 몇 년 하지요. 왜 갑자기 지나온 역사를 없애버립니까? 내가 나 된 것은 하늘의 뜻이다. 그래서 지나간 역사는 지나간 것으로 청산하고 새로운 역사가 개시된다. 항상 모든 옛날의 왕들은 신의 이름과 관련돼있습니다.

이러한 민족 가운데서 주님께서 새로운 나라로 등장하면서 그 임금님으로 여호와라는 신을 등장시키면 그때부터는 이 이스라엘 나라는 자기들끼리 구원받는 곳이 아니라 이쪽이 축복이 돼버리면 자동적으로 이쪽은 저주가 되는데, 저주가 된다고 이 사람들이 섭섭해 할 이유는 전혀 없는 거예요. 왜냐하면 로마서 5장 9절에 의하면 모든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당연히 저주받아, 진노 받아 마땅하기 때문에.

그런데 저주받아 마땅함을 알면 되는 거예요. 인간들이 저주 값을 한다고 뭐라고 하느냐 하면, 저주 받을 생각은 안 하고 자기는 마땅히 축복받아야 될 거라고 생각하는 거예요. 그들의 축복을 뭐라고 하느냐? 사람들은 그걸 ‘영원성’이라. 우리나라는 영원히. 저주는 소멸하고, 축복은 영원히 계속 가거든요. 번창하고. 그런데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축복함으로 말미암아 이스라엘만 영원히 가는 거예요.

전에 가야산에서 했지요. 인자의 나라는 어떤 나라다? 영원히. 그런데 거기에 비해서 기존의 세상의 모든 나라는 바벨론 짐승처럼 되어서 나중에 바벨론에 있는데 느부갓네살 금신상 있으면 뒤에서 떠미는 힘에 의해서 넘어지고 조그마한 돌멩이 하나 와서 철과 진흙으로 섞여 있는 걸 때려 부수면 거기서 뭘 이룬다? 태산을 이루죠. 그 인자의 나라는 영원하죠. 영원하다는 말은 이게 축복이다.

영원한 축복의 나라를 위하여 이 세상 나라는 영원한 축복의 나라에게 모든 것을 내주고 저들은 저주받아야 될 나라. 이 나라는 언약이 없는 비 언약적 나라고 이스라엘은 언약의 나라다. 그래서 비 언약 나라는 개 같은 나라, 저주받아 마땅한 나라고 이쪽 나라는 언약이 있는 나라는 복 받은 나라라고 생각하는 겁니다.

이게 마태복음 8장에 보면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자손에게 이게 주어진다고 누가 생각했어요?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이 주장했는데 예수님께서는 백부장한테 들으셔서 나라의 본 자손은 다 쫓겨날 것이고 이방인 같은 사람들이 그 천국을 나라의 본 자손을 차지할 것이라고 해서 새로운 주의 이름이....

결국 인간은, 참 이게 어렵지요. 인간은 분명히 이스라엘 언약을 받고 했지만 언약을 받고 해석하는 누구 위주로? 우리는 아브라함 자손 위주로 생각하는 그것이 바로 곧 숨겨져 있는 저주성이 성경 해석하는 이름으로 바깥으로 튀어나는 거예요. 우리의 숨겨진 저주성이 성경 해석이라는 이름으로 이걸 축복으로 전환시켜놨다가 마지막에 심판주 되시는 예수님 오니까 들통나버리는 겁니다.

‘너 해석 잘못했다.’ 왜요? 너는 진노 받아야 마땅하다. 할례 하라 해서 할례 했잖아요. 표면적 할례가 할례가 아닌데. 할례 하라며? 아니야. 할례는 이면적, 마음에 할례 해야 돼. 완전히 예수님 오셔서 그러니까 우리한테 율법을 주어졌잖아요. 너, 몰랐나? 율법을 준 것은 너의 모든 것을 죄 되게 하기 위해서 율법 준 거야.

로마서 4장에 나오잖아요. 인간은 모든 것이 거짓 되돼 하나님은 참되시다. 인간은 모든 것이 거짓됨을 이야기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누굴 모델로 사용했어요? 이스라엘 나라를 모델로 사용합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그걸 몰랐지요. 자기 딴에 제대로 해석했으니까 복 받은 줄 알았죠.

그래서 결론 뭡니까? 결국은 피. 피로 구원되지 해석 잘해서 구원되지 않습니다. 인간이 성경 공부해서 구원되지 않고 오직 예수님의 피로 구원되는 이유가, 우리는 해석을 하든, 교회를 다니든 그것은 우리 내부에 있는 저주받아 합당한 속성들이 나와서 교회 다니고, 그런 저주받아 마땅한 그런 성질로 헌금했고, 그런 걸로 성경 공부했고, 우리는 다 저주받아 마땅한 것이 노출되죠. 그래서 예수의 피 앞에서 우리는 저주받아 마땅함 이 드러나는 그 관계를 가지고 ‘의’라고 합니다. 하나님 의 앞에는 것은 자기 의를 내세울 수가 없는 겁니다.

제가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이렇습니다. 그러면 저주가 오는 것이 합당한데 과연 우리에게 저주가 왔습니까? 저주가 오는 것이 아니고 성도한테는 은혜가 오죠. 은혜가 와서 뜯어보니까 그 안에 저주도 있고 축복도 있어요. 저주받아야 마땅하고 은혜가 주어지면 저주도 오고 축복도 와야 되는데 왜 저주는 안 오느냐? 은혜 안에 뭐가 들어 있느냐 하면, 이 축복이 이 저주를 제거하는 모든 저주를 대신 감당한 축복이 우리에게 주어지잖아요. 이게 긍휼이에요.

그 작업을 이제 열 가지 재앙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하시는 거예요. 주의 이름으로. 열 가지 재앙의 특징이 뭐냐 하면, 일 번부터 사 번까지는 이스라엘과 애굽 양쪽 다 재앙을 얻어맞아요. 그 다음에 다섯 번째, 여섯 번째부터는 애굽의 술객들은 못하고 모세를 통해서 나타난 하나님만 하실 수 있는 것이고, 다섯 번째부터 아홉 번째까지는 이스라엘 사는 땅에는 그런 재앙이 안 오고 저쪽에 애굽 사람에게만 재앙이 오게 돼있어요.

마지막 열 번째 재앙은 양쪽 다 와요. 그때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장자가 안 죽는 것은 그동안 나타나지 않았던 주체가 나옵니다. 어린양이 등장해요. 그때부터 이스라엘 백성의 장자는 영원히 이스라엘 소유에서 벗어나서 하나님 소유가 됩니다. 그 과정이 나라는 주체에서, 내 이름이라는 주체에서 여호와라는 이스라엘 임금의 주체로 달라지는, 변동하는 경유, 경과되는 모든 과정을 그런 식으로 열 가지 재앙을 통해서 설명을 해주고 있죠.

처음에는 뭐냐? 야, 우리는 언제 애굽 떠나노? 첫 번째부터 네 번째 들어가면 애굽 땅이 좋다, 좋다고 했더니만 살만한 곳이 못 되네. 물이 피가 안 되나. 개구리가 밥상에 다 올라오고. 아이고, 모기, 파리. 또 뭡니까? 모기 그 다음에 파리. 정나미가 뚝 떨어져. 갑시다, 갑시다. 도저히 못 살겠다. 이런 동네인 줄 몰랐네. 아직까지는 이스라엘 백성은 자기가 저주받아야 합당한 걸 몰라요. 다만 이곳에 못살겠다고 나와요.

다섯 번째부터 아홉 번째까지는 특별 대우해주시네. 세상에 고맙게도. 죽어라 애굽. 그러나 마지막 열 번째 재앙이 오니까 그렇게 우리가 좋아할 수가 없어요. 왜냐하면 ‘하나님이여, 날 구원하소서.’라고 했던 이제는 그 주체마저 새로운 어린양으로 등장하는 주체에 우리가 오히려 종속되어야 되고 예속되어야 된다는 거예요.

캥거루 새끼들 보세요. 캥거루 새끼는 엄마 품에 모여들어서 엄마가 데리고 나가는 식입니다. 언약의 주체자가 언약의 백성을 모아야 무엇의 공격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느냐 하면, 비 언약에게 주어지는 저주로부터 무사히 벗어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호와라는 주체 없이 맨 몸으로 이 저주를 통과하려면 그 사람이 저주받습니다. 히브리인들이라고 저주 안 받는 게 아니에요. 아무리 히브리인이라도 문설주에 피 없으면 그대로 그 집도 애굽인과 똑같아요.

혈통이 문제가 아니고 언약이 문제입니다. 언약이 우리를 살려요. 언약이 살리지 내 육과 혈이 날 살리는 게 아니에요. 내 열심이 날 살리게 아닙니다. 하나님의 약속에 의해서 약속된 사람이 되면 우리를 약속의 사람으로 해줬던 그 약속의 주체자 되신 주님에 의해서 우리가 구원받는 겁니다. 그것이 예수님의 피로 된 거예요.

그러면 성도가 하루하루 살아가는 것은 일기장이 있다면, 일기장에다 10월 31일 화요일. 오늘은 시월의 마지막 밤. 11월 1일, 쭉 나온다면 일기 내용은 하나밖에 없어요. 피, 피, 피. 왜냐하면 모든 것이 피로만 구원된다는 여러 가지 일들이죠. 그러면 피라는 것은 핵심이기 때문에 ‘10월 28일, 오늘은 맑음. 아침에 아내가 설거지하다가 그릇을 깼다. 해놓고 남편 탓한다. 남편이 돈 못 벌어줘서 성질나서 깼다. 어쩌면 좋아.’ 썼다고 합시다. 이 내용이 뭡니까? 한 자로 하면 ‘피’로 구원이죠. 피 아닙니까.

이게 텍스트라면, 성경이라면 성경해석은 뭐 해야 돼요? 아침에 맑음. 아침에 왜 맑을까요? 피 생각하며 맑음. 그릇은 왜 깼을까요? 새삼 남편하고 아내하고 다투었을까요? 더 이상 아내 신경 쓰지 말라고. 좋은 아내라고해서 구원받는 게 아니라고. 그릇은 왜 깼을까요? 그릇 안 깨진다고 복이 아니라고. 모든 것이 결국은 피로 되지요.

10월 3일. ‘학교 갔는데 학생이 말을 안 듣는다. 학부모 와서 따지고 있다. 사표 내버렸다.’ 일어났습니다. 이것 핵심은 뭡니까? 한 자로? ‘피’죠. 못된 애가 학교 있든 간에 피로 구원받죠. 착한 애 있다고 구원받는 게 아니고.

결국 우리는 이런 일기장을 쓴다는 것은 누구 중심입니까? 나라는 이름의 내가 생각했던 축복을 기대대로 안 되니까 내가 내 유리한 대로 축복을 생각했는데 아침 뉴스 보면 잘 안 되니까 우리는 거기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자기 주제파악을 못하고 은혜를 생각하지 못하고 하나님께 원망하죠. 원망하는데 가만 생각해보니까 그러한 저주받아 마땅한 나를 피로 말미암아 우리로 하여금 언약이 그런 못난 우리를 구원으로 인도함을 보여주기 위해서 오늘도 이런 사태들이 벌어진다는 겁니다. 그게 바로 열 가지 재앙이에요.

열 가지 재앙은 그대로 오늘날 이뤄지는 걸 보여주는 책이 바로 요한계시록입니다. 요한계시록에 그 어린양의 피가 출애굽기에는 마지막에 나오잖아요. 그런데 요한계시록은 1장부터 나와요. 피부터 나옵니다. 끝까지 나와요. 처음 1장 7절에 어린양을 찌른 자도 볼 것이요 해서 요한계시록 마지막에 어린양의 보좌가 나와요. 그래서 생명수가 나오죠.

그래서 요한계시록은 이미 열 가지 재앙이 하나의 묵시 밑에서 같은 공간에서 일어나는 아무리 시간이 흐르고 이천 년 되든 말든 간에 그 역사의 흐름 관계없이 같은 장소에서 일어나는 언약과 비 언약 된 사람의 분리작업, 주의 이름이 있는 사람과 짐승의 이름이 있는 사람과의 분리작업을 요한계시록이 보여주는 겁니다.

그래서 여기서 정리해보면 이렇습니다. 여호와란 이름이 등장한 이상은 시간은 없어요. 여호와 이름 밑에는 시간은 별 의미 없습니다. 애굽에서 몇 킬로 떨어졌는가도 별 의미가 없어요. 그걸 ‘동행’이라 해요. 애굽에 있든, 홍해 안에 있든, 광야에 있든, 약속의 땅에 있든 주의 이름에서 나오는 것은 한결같이 그 백성들을 언약으로 인도하는 하나님의 은혜가 있는 이상은 주위에서 어떤 사태가 일어나도 구원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작업을 이제는 모세가 그 속에 끼어서 이 일을 해야 되는 겁니다. 모세, 파이팅! 모세가 이 일을 할 수 있을까요? 13절 봅시다. “여호와께서 모세와 아론에게 말씀하사 그들로 이스라엘 자손과 애굽 왕 바로에게 명을 전하고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게 하시니라” 이야기해놓고 후손들을 이야기하죠.

30절 봅시다. “모세가 여호와 앞에서 고하되 나는 입이 둔한 자이오니 바로가 어찌 나를 들으리이까” 7장에 들어가면,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볼지어다 내가 너로 바로에게 신이 되게 하였은즉 네 형 아론은 네 대언자가 되리니 내가 네게 명한 바를 너는 네 형 아론에게 말하고 그는 바로에게 말하여 그로 이스라엘 자손을 그 땅에서 보내게 할지니라”

한번 물어봅시다. 수도관에서 직접 물 받으면 수돗물 되죠. 그러면 여기서 빨간 호스를 꽂아서 한 5미터 떨어진 화장실에서 그 물을 받으면 호스물입니까, 수돗물입니까? 수돗물이죠. 이게 요한계시록에 나옵니다. 사도 바울이 나는 그리스도의 종이라 할 때 참 재미있는 것은 사람은 누굴 공격합니까? 예수 이름을 빙자해서 누굴 공격하느냐 하면, 사도 바울을 이단이라고 공격합니다. 그것도 예수 이름을 빙자해서.

다시 말해서 너는 예수의 종이 아니라고 겁니다. 그 당시에 사탄의 일꾼들이. 고린도후서 11장에 나오는. 사탄의 일꾼들이 하는 말이, 사도 바울은 사도도 아니라고 그 교인들을 선동시켜서 고린도교회 교인들이 전부다 사도가 아닌 줄 알았어요. 그러니까 사도 바울이 편지 쓰기를 그리스도의 종 된 나 사울은 너희에게 문안하노라. 이렇게 나오죠.

그걸 오늘날 샌더스부터 많은 신학자들은 그 당시 사도 바울을 욕했던 것과 똑같이 욕합니다. 사도 바울의 인간성에 대해서 연구하고 있어요. 사도 바울의 인간성이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호스 꽂았다고 호스물입니까? 역시 수돗물이에요. 야고보가 이야기했다고 해서 야고보 개인의 의견이 아닙니다. 주의 말씀입니다.

심지어 사도 바울이 이건 사기니 하는 것도 누구 말씀이다? 주의 말씀이에요. 성령의 말씀이에요. 사도 요한이 적었다? 누구 말씀입니까? 주님의 말씀이고, 마가복음에 나오는 것도 복음입니다. 누가복음이라고 누가의 복음이 아니고 예수님의 복음이에요. 누가복음에 나와요. 마가복음에 나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이라”

그러면 이 대목을 통해서 다시 한번 정리해봅시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실 때 첫 번째, ‘선지자를 통해서’, ‘선지자를 사용해서’ 어느 것이 맞습니까? 선지자를 사용해서, 선지자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일하셨다. 그렇게 할 때 ‘통해서’ 하니까 이것은 무슨 관처럼 되지요. 제가 아까 수도 이야기한 것처럼 하나님의 말씀이 통이라는 걸 통해서 그냥 전달해서 그냥 나오죠.

그런데 선지자를 사용하셔서 또는 선지자 의해서 이렇게 돼버리면 하나님의 계시가 선지자를 통과하면서 누구한테 변동을 준다? 여기에 선지자에게 어떤 변화가 일어나서 그러면 같은 선지자인데 A 선지자, 변화된 B 선지자. A에서 B로 전달된 내용이 하나님 계시로 전달 될 것인가? 그런 문제가 있어요.

왜 이 문제가 이렇게 복잡하냐 하면, 오늘날 하나님이 ‘성도를 통해서’ 하느냐, ‘성도를 사용해서’ 하느냐 하는 겁니다. 만약에 성도를 통해서가 아니라 사용해서가 돼버리면 성도가 하는 모든 어떤 변화가 뭐가 되느냐 하면, 이것이 하나님의 계시가 돼요. 계시라 하면 요한계시록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고 추가적으로 하나의 계시적 의미, 남을 구원하는 의미로 추가가 되는 거예요.

그렇게 돼버리면 소위 간증집회라 하는 것, 간증하는 것도 사람을 변화할 수 있는 수단으로 개입이 돼버리죠. 간증뿐만 아닙니다. 찬양도 마찬가지죠. 찬양, 음악뿐만 아니죠. 건축도, 파이프오르간도, 샹들리에도 모든 것이 인간에 감동을 줌으로 말미암아 인간들로 하여금 하나님이 인간들을 구원하기 위한 수단으로써 적법하게 사용될 수 있다 이 말입니다.

문제는 거기서 끝나지 않아요. 성도가 운영하는 신문사, 성도가 지배하는 통일벼, 성도가 경영하는 카페, 성도가 하는 과외. 그것도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는 현장이 되겠습니까? 된다고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누구냐? 캘빈입니다. 캘빈은 소위 소명론을 통해서 성도에 있는 모든 직업과 모든 것에 대해서 하나님의 영광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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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 21,142건 중 512 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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