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전강의091029b
대전강의091029b
이름 : 이미아(IP:115.41.195.243)
아까 이야기 한 저주를 받을까 아니면 축복을 받을까가 내가 목사한테 어떤 관계와 태도를 갖느냐에 달렸다 라는 식으로 목사가 기능적으로 종속시켜 버려요. 교회 전체를 종속시켜 버려요. 그게 흔히 중세 교회라고 하는데 요새는 중세 교회보다 더 하지만. 그래서 성경 공부를 해도 같은 교회내에서만 공부하고 다른 데에서는 하지 말라는 이유가... 성경 공부가 무엇의 수단이냐면은 성경 공부라는 것은 진리잖아요. 교회에서 하는 성경 공부는 진리가 아니고 그 교회가 크는 것이 진리가 되버려요. 그 교회가 크고 그 교회 당회장에게 복종할 수 있게 하는 것이 진리가 되버려요. 다시 말해서 예수님에게 복종하는 것이 아니고 목사한테 복종하는 거예요.
보통 교회에서는 이것을 교인들에게 감추기 위해서 뭐라고 하냐면 우리 교회는 목사 위주가 아니고 주님 위주입니다 라는 말을 앞에다 딱 깔아 놓아 버려요. 깔아 놓으면 교인들이 아무리 목사의 헛점을 파내도 그정도까지 말을 깔아 놓으면 더 이상 수사가 진행이 안됩니다. 목사는 뭐가 전문가냐면 교인들이 목사의 헛점을 파내는 것을 차단시키는 막을 여러 개 갖고 있기 때문에 교인들이 아무리 덤벼 들어도 파악이 안 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만약에 어떤 목사가 말하기를 우리 교회는 목사 위주가 아니라 주님 진리 위주입니다 라고 했다가 진짜 바보 등신같은 교인 하나가 그 말을 곧이 듣고, 목사가 그 말 할 때는 뭐냐 이런 말을 하는 목사를 배나 존경하라는 식으로 뒤에 노림수를 가지고, 이런 말을 하는 목사 있으면 나와 보라고 해 얼마나 훌륭해 라는 노림수를 가지고 하기 때문에 너 다른 교회가지 말고 우리 교회 나와 이런 뜻으로 하는건데 아이큐 한 20밖에 안되는 바보 등신같은 인간이 그 말을 곧이 듣고 "그런데 목사님께서는 성경에 목사가 우선이 아니고 주님이 우선이라고 가르쳤지요?" "가르쳤습니다." "그런데 여기 보니까 방금 목사님이 하신 그것은 이 성경 말씀하고 어긋나네요." 하면 목사가 "나가!!" 우리교회 그런 분이 계십니다. 이상규 집사님이라고.
그 분 아무것도 모르고 진리에 관심있어요. 교회 부흥도 관심 없습니다. 전에 목사가 이렇게 가르치니까 "아이구 목사님 잘 배웠습니다." 그렇게 해놓고 그걸 그대로 가져가요. "목사님 가르친대로 그대로 하는가 봅시다." 이렇게 나와요. 목사가 "이 사람 등신이야 이렇게 가르치면 가르친 나는 빼돌라는 말야 이 뜻이야 임마" 그런데 그 사람 넘어가지 않아요. 왜? 성령 받았기 때문에. 다시 말해서자유라 합니다. 진리로부터 벗어난 자유는 없어요. 이 사람은 진리가 주관심사이기 때문에 교회가 말씀을 그렇게 기능적으로 가르치는 기능적으로 하는 목사가 지휘하는 말이 옳은가를 확인해 보겠다는 자유함. 그것을 말릴수가 없습니다. 그게 중요한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이 성도는 눈치코치도 없는 바보 등신같이 교인들의 눈에 보이겠지만 주님 보시기에는 그야말로 그 사람이 그 교회에 목사보다 더 뛰어난 진짜 더 위대한 보석같은 성도가 되는 것입니다. 바라기는 권사님도 그렇게 되기를 바랍니다. 교회 나오고 말고 그것이 문제가 아니라 진리가 모든 저주를 어두운 그림자를 기억들을 다 회수해 주기를 바랍니다. 십자가 복음으로서. 더이상 무서운 것, 두려운 것, 죽음 이런 것, 어두운 그림자가 없기를 바래요. 그것을 미백효과하고 하는데, 기미 주근깨...화장품 좋은 것 바르면 뭐 없어진다 그러잖아요. 깔끔하게 영원히 영원에서 침침하고 어두컴컴한 것이 없기를 바래요. 용서. 용서예요. 어느 구석에서든지 내 발끝 어느 구석에서도 용서가 다 흘러서 죄에서부터 용서 받았으면 더이상 무섭거나 두려운 것이 없기를 바랍니다. 자, 진도 나가 봅시다. 사도행전 4장 32절. 다같이 한 번 읽어 봅시다.
32절. 믿는 무리가 한 마음과 한 뜻이 되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제 재물을 조금이라도 제 것이라고 하는 이가 하나도 없더라
이 본문을 설명하는데 중요한 단어 하나 나오죠. 나의 것, 제 것이라고 하는데 제 것이라고 합시다. 제 것이 없다고 했으니까 엑스표(X)를 칩시다. 조금이라도 제 것이라고 하는 것이 없다. 이것을 라캉은 S에다 빗금을 쳤는데 제 것이라는 것이 없을수가 있습니까? 처음 오신 분들도 어렵더라도 이런 것도 있구나 하고 참아 주시고 이렇게 어려운 것도 있구나 하고 이해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열도 내렸겠다 드디어 컨디션이 돌아 왔는데 서서 해야 겠습니다. 제 것이 없다고 누가 판단합니까? 이것은 내 것이 아닙니다. 내 것이 없습니다. 여기 냉장고가 있는데 이 냉장고는 내 것이 아닙니다. 라고 누가 판단합니까? 내가 판단하잖아요. 그러면 내 것이 있잖아요.
이 문제를 현대 학자들이나 철학자들이나 과학자들이 많은 사람들이 이것을 풀어내지를 못하는 거예요.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나는 십자가를 믿는다 그러면 십자가를 믿고 있는 내가 보이죠. 십자가를 믿는 나를 바라볼 수 있는, 믿는지 안 믿는지 확인할 수 있는 나는 어디에 있습니까? 나에게 있죠. 그러니까 둘 중의 어느게 나냐 이 말이죠. 결국에 뭐냐하면 내가 이것을 앞장 세워서 나의 가치를 더 높이려는수작을 부릴 수 있단 말입니다. "목사님 믿어요. 나는 믿습니데이~ 하나님 나 잘 믿죠. 잘 믿으니까 복 주세요." 라고 하면서 복은 내가 챙기고 믿는 것 이걸 손을 내밀어 가지고 이렇게 하는 것. 과연 이것이 믿음일까? 하나의 수작이죠. 연출이고 연기다 이 말이죠.
그래서 이런 경우를 학계에서 뭘 알아 냈느냐면 '자아' 쉽게 말해서 "나" 나가 무엇이냐를 알아야 해요. 내가 무엇이냐? 내가 누구냐? 라는 것 보다 더 어려운게 내가 어디 있느냐? 입니다. 손바닥이 있습니다. 손바닥이 있는지 없는지를 어떻게 확인하느냐면 손바닥을 자르면 되죠. 자르면 손바닥 없습니다. 그러면 내가 없습니까? 있잖아요. 자 다음엔 상반신을 다 잘라 봐..어떤 일본 사람은 오체가 없잖아요. 오체가 없어도 내가 있죠. 그러면 남아 있는 부분이 어디겠습니까? 머리 부분이죠. 머리 부분을 반을 잘라봐요. 잘랐는데 여전히 나가 있어요. 내가 있단 말이죠.
이런 실험을 하면서 얼마나 실험이 어려운지. 옆에 사람이 묻는 거예요. 팔을 잘랐습니다. 아저씨 느끼거든 대답해 보세요. 아직 나가 있습니까? 있어요. 그러면 두뇌를 반 잘랐으니까 의식이 있을 때 답변해 보세요. 아직 나가 있습니까? 있어요. 두뇌를사분의 삼을 잘랐습니다. 아저씨 빨리 답변해 보세요. 나가 있습니까? 답변이 없어요. 죽었어요. 그러면 문제입니다. 죽으면 외부에서 나가 있다는 소리를 못 듣고 죽었는지 진짜 나가 없어 졌는지 어떻게 판단합니까? 모르죠. 어떤 사람이 로보트를 만드는데 로보트를 만들고 인간과 똑같은 감정과 의식과 웃음과 눈물을 다 흘리고 심지어 로보트하고 인간이 대화를 하는 로보트를 만들 때, 또 움직이는 청소하는 로보트를 만들면서 자아 의식을 가진 로보트를 만들 필요가 있느냐 이 말입니다.
우리가 필요한 로보트만 만들면 되지 의식을 가진 로보트를 만들 필요가 없잖아요. 결국은 자아 의식을 가진 로보트가 필요치 않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자아가 어디에 있는지 아무도 발견하지를 못하는 것니다. 인간은 두뇌 사분의 삼을 잘랐을 때 죽었어요. 역시 인간은 자아가 두뇌에 있는데 두뇌가 죽으니까 자아가 없어 라는 평가를 지 맘대로 내리는 것입니다. 죽은 사람한테 물어보지도 않고. 그러면 두뇌를 봅시다. 두뇌 속에 자아가 어디에 있습니까? 표면효과 라고 해 가지고 두뇌에 어떤 정보가 들어서 점점이 피어내는 이미지가 자아냐? 이미지를 자아라 한다. 어떤 사람은 전체 이미지가 아니고 특정 이미지, 신이나 믿음을 표현하는 특정 이미지가 따로 있다. 네온사인을 멀리서 보면 I LOVE YOU 라는 네온사인이 지나가면서 I LOVE YOU I LOVE YOU 라는 글자가 막 지나가잖아요.
그런데 막상 앞에 가 보면 네온사인이 지나가는 것이 있습니까? 네온사인은 지나가지 않죠. 한 쪽이 점멸이죠. 한 쪽이 켜지고 꺼지고 하는 것이죠. 하나의 기계가 켜지고 꺼지고 하는데 멀리서 보면 글자가 막 지나가고 움직이잖아요. 그런데 네온사인은 가만히 있잖아요. 네온사인은 깜빡깜빡할 뿐이고 움직이지는 않잖아요. 그래서 인간의 자아가 생각하고 이런 것이 나중에 두뇌를 조사해 보면 두뇌는 번쩍번쩍 정보를 나타낼 뿐이지 거기서 생각한다 우습다 이런 것이 안 나타난단 말입니다. 우습다, 생각한다 그러한 레벨은 물질 차원이 아니고 그것보다 다른 높은 차원에서 새롭게 구성한 이미지인데 그 이미지를 파악할 때 이미지를 파악하는 그 주인공이 되는 자아는 어디에서 만들어 내느냐 말입니다. 이 문제를 해결할 수가 없는, 교착 상태에 빠졌다고나 할까요.
이 해결할 수 없는 이 문제를 성경은 해결하는데 어떻게 해결하냐면 우선 과학은 인간이 있고 과학 외부에 있는 것을 자연이라고 했습니다. 동양 철학에서나 서양 철학에서 옛날 신화에서는 인간이 자연과 교류를 했어요. "주먹 쥐고 일어 서" "도끼 들고 하늘 봐" 인디언들이 지은 이름이거든요. 그 때는 인디언들은 인간을 자연의 아들로 봤어요. 교류가 되요. 자연은 엄마예요. 엄마. 이걸 가지고 바알 종교라고 합니다. 우상하면 다 부처한데 비는 것으로 아는데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요" 그것 전부 다 바알 종교입니다. "자연의 품으로 돌아가자" 이것 다 바알 종교에서 나온 것입니다.
자연과 교류가 되었는데 과학이 발달 하면서 자연은 뭐로 재구성이 되었느냐면 과학이라는 이름으로 구성이 되어서 이것은 과학 세계를 말합니다. 이것을 가지고 분석의 대상이라고 하고 인간은 이것을 분석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쭉 나왔으면 참 좋았는데 문제는 인간이 자연을 어떻게 봤다고요? 옛날에는 자연과 종속되었는데 자연을 분리시켜서 자연을 탐구의 대상으로 보았죠. 이제는 달나라가 어떻고 별나라가 어떻고 ..그 다음 문제는 과학 입장에서 인간을 보니까 과학이 우선이고 인간이 대상이 되겠죠. 인간을 수술해야겠죠. 수술하고 뜯어 고치고 DNA를 조작해야 되겠죠.
자아가 어떻게 되었어요? 자아가 누구한테 점령 당했습니까? 자아가 과학적인 자아에 의해서 사적인 자아가 종속되죠. 인간이 과학을 삼키려 하다가 도리어 과학이 인간을 다스리게 되버린 겁니다. 다스릴 때에 그러면 자아가 어디에 있습니까? 이 두 가지를 모두 통합하는 이 자리에 자아가 있는 것입니다. 자연과 인간마저 초월한 자아. 이게 바로 신의 자리입니다. 자연과 나마저. 쉽게 말해서 옛날에는 나는 자연의 것이다 나는 나대로 살아야지 했는데 지금은 내가 원하는 나를 만드는 거예요. 지금의 신체, 몸 이것은 내가 원하지 않기 때문에 뜯어 고쳐야 되겠죠. 이것을 쉽게 말해서 미친놈이죠. 나도 내 맘을 내 맘대로 못해. 나는 내가 뭘 원하는지도 몰라 하지만 딱 한 가지 아는 것은 지금의 나는 전혀 내 맘에 들지 않다는 것이죠.
그러면 나는 마약을 먹어야 하고 나는 나에게 마치 강아지 말 안들으면 때리듯이 나는 내가 원하는 나를 찾기 위해서 그 출발점이 나로부터 출발하기 때문에 마약을 한다든지 술을 퍼마시든지 아니면 마약과 술과 비슷한 것이 뭐냐면은 금요 철야에 가서 손바닥을 친다든지 부흥회 하든지. 내가 원하는 나를 만드는 전능하신 신이여!! 내 가정사나 내 자식이나 내 남편이나 맘에 드는 구석이 하나도 없습니다. 제발 내가 원하는 내가 되게 하옵소서!! 제발 남한테 과시할만한 내세울만한 것좀 만들어 달라고 비는 것입니다. 그러면 자아는 뭡니까? 너가 누구냐? 몰라요. 다만 지금의 나는 맘에 안든다 그 뿐입니다.
결국은 이것은 뭐냐면은 내 것이라는 것을 줏어 모으지만 내 것을 내 것이라고 할 수 있는 이것에 항상 뭐가 들어 있는지 아무것도 모른다는 것입니다. 제가 지금 설명하는 이런 현상이 왜 일어났는가? 무엇이 잘못 됐는가? 성경에 보면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결론부터 이야기 할께요. 말씀으로 사는 것이 사는 것이다. 그러면 자아라는 것은 뭐냐하면 말씀이 인간의 신체, 몸하고 말씀하고 와닿는 그것에 생기는 것이 자아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선악과를 따먹지 마라" "선악과를 따 먹지 마" 또는 "생명과를 따 먹어"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 이것을 누구보고 이야기 한 것입니까? 자아보고 이야기 하는 것이잖아요.
그러니까 자아라는 것은 말씀이 올 때 내 신체에 마주치는 그 지점에 생기는 것이 자아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이 말씀으로 사는데 말씀을 버릴 때 이 자아는 아까 이야기 한 것처럼 공백 상태가 되는 것입니다. 이 자아는 누가 채우느냐 현재 내 눈에 있는 내 몸 가지고 자아를 채우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쌍꺼풀 수술이 맘에 안들어 새로 해야겠어 이것은 뭐냐 누가 누굴 채운다? 현재 있는 나에게 손을 대 가지고.. 쌍꺼풀 수술이 나쁘다는 것이 아닙니다. 이렇게 이야기 하면 우리 교회에서 삐지는 사람이 있어서요. 나는 키가 작아서 호르몬 주사를 맞아야 되겠다 이 말은 키가 적당히 180센티미터 되는 것이 자아인데 이것을 누가 만들어 놨어요. 내가 만들어 놨어요. 성경 예레미야에 보면 "너는 키가 180센티미터 되야 구원 받는다" 라는 것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죠.
말씀이 없는 상태에서 있는 것은 신체 밖에 없는데 알 수 없는 신체 말고 외부에 뭔가 신체에 대해서 불만을 자꾸 집어넣는, 불만을 자꾸 일으킬만한 그러한 다른 어떤 세력에 의해서 만나는 지점을 자아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가지고 뱀이죠. 악령과 만나는 지점. 악령의 지대. 모든 불신자들은 자아가 있는데 그 자아는 악령과 교신하는 자점을 말해요. 제가 좀더 쉽게 이야기 하면 어항이 있잖아요. 어항이 있으면 여기 물고기 살잖아요. 물고기가 사는 어항은 물이 있어야 되요? 없어야 되요? 재아. 있어야 되죠. 물과 고기가 유리관에 있어야 어항이 되잖아요. 하나님께서는 인간만 만든 것이 아니라 인간과 더불어 말씀을 주신 거예요. "선악과 따 먹지 마" 말씀을 같이 집어 넣는데 마귀가 뭐라고 하냐면 "뛰어 나온나 말씀에 얽매일 필요 없다. 말씀만 벗어나면 너는 뭐가 된다? 너도 신이 되는거야." 라고 하는 순간부터 우리는 누구와 교신하게 되는. 악령과 교신하는 뱀의 후손이 된 것입니다.
그 때 부터 이 자아는 하나님의 말씀을 채워야 할 말씀과 교신해야 할 그 자리에 마귀가 자꾸 말씀을 기피하는 쪽으로 너가 신이야 잠자는 신을 깨워라 불교에서 그렇게 이야기 하죠.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여라 왜? "너가 신인데 뭘 믿어 누구를 믿지 마라 너는 있는 그대로가 너가 신이다" 요새 기독교도 이런 것이 있습니다. 불교하고 접촉이 되어 가지고 "예수를 믿지마라 너가 예수다" 사람들은 그런 것들을 굉장히 좋아 합니다. 왜? 자기 악마성하고 딱 들어 맞아요. "목사를 믿지마라 너가 목사다" 그러면 교인들이 얼마나 좋아 합니까? 그리고 교회 안 가고 불교 안 가도 일반 길 가는 사람한테 물어 보세요. 당신은 위대하신 분이십니다 그 한 마디만 해도 기분 좋은 굿모닝보다 더 좋은 즐거운 인사입니다. 당신은 귀하신 분이십니다. 오히려 교회에서 거드는 노래 있잖아요.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얼마나 기분 좋은지 모릅니다.
이게 뭐냐하면 있는 그대로를 긍정해 달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가지고 나온 사고 방식이 바로 긍정적 사고 방식입니다. 긍정적 사고 방식의 원조는 니체라는 사람입니다. 아까 이야기 한 "하면 된다" "잠 자는 신을 깨워라" 이 말은 자아라는 공백을 무엇으로 채워라? 눈에 보이는 너의 신체를 굴려서 너 자아에 만족스럽게 채워라 못한다고 하지 말고. 하. 면. 된. 다 I can do it. I must do it 나는 할 수 있다 나는 해야만 된다. 학원 같은데 보면 많이 있어요.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 "시작은 미약하지만 나중에는 창대하리라"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쭉 이런 것 있잖아요.
나는 할 수 있다. 이게 뭐냐하면 너는 너가 되고 싶은 것을 할 수 있느니라는 것입니다. 단 누가 도와줘서? 교회는 누가 도와 줍니까? 성령이 도와주고 성부가 도와주고 성자가 도와줘서 삼위일체 하나님이 너가 되고 싶은 욕망을 삼위일체 하나님이 할 수 있다 다만 그에 대한 댓가는 헌금으로 내라 그래야 교회가 커지니까. 교회라는 것이 결국은 무엇을 의지하는 것입니까? 어떤 것이든지 내 것을 놓치지 않도록 하는 것이 교회죠. 고착이라고 하는데 철저하게 내 것에 매달리게 하는 것입니다. 오직 내 것으로만 즐거워 하는 것.
그러면 교회가 커지면 옆에 사람이 좋아질까요? 본 교회 교인들일 좋아질까요? 본 교회 교인이 좋아지죠. 왜냐하면 내 교회이니까. 지난 청소년 축구할 때 한국하고 8강 시합을 누구하고 했습니까? 한국하고 가나하고 했을 때 한국이 졌잖아요. 누구를 응원하겠습니까? 한국을 응원하죠. 대~한민국 짝짝짝 하고 응원 하잖하요. 왜 응원합니까? 내가 한국 사람이니까 한국을 응원하잖아요. 얼마나 자연스러운 자아 채우기 입니까? 자아 채우기.
만약에 졌으니 망정이지 이기면 또 서울 광장에 난리 나잖아요. 어떤 술집은 술도 공짜로 주고. 왜 그렇게 해요? 자아 공백을 대한민국 청소년 축구팀이 그 공백을 메꾸어 주므로 말미암아 나라는 테두리가 더욱더 견고해지는, 역시 나는 나로 인하여 살만해 나로 인하여 즐겁고 기쁘다 이말입니다. 그런데 성경에는 자기를 부인하라고 말씀합니다. 자기를 부인하라는 것은 자기 교회 사람은 자기에게 투자합니다. 교회 헌금 내는 것 남의 교회 헌금하지 않습니다. 자기가 헌금한 교회, 투자한 교회 커지기를 바라죠. 왜 목사가 그렇게 목사직을 내놓기를 거부하고 장로가 장로직을 내놓기를 왜 그렇게 거부합니까? 그것은 바로 자아의 공백을 채워주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런데 어떤 경우에 쉽게 내놓냐면은 목사보다 더 좋은 것이 들어 왔을 때 쉽게 내놓습니다. 사립학교 이사장. 이것은 실제적입니다.
지금 내 공백을 채울 수 있는, 나를 키울 수 있는 그런 것이 오면 바꿔 치웁니다. 언제 또 자기 마누라를 버리느냐면 젊을 때는 마누라 최고더니 더 이쁜 마누라 오면 버릴 수 있죠. "나 너하고 사느라 고생 많이 했다 나가도" 장로가 장로직을 언제 버리느냐면 귀찮은 일 생길 때 "나 장로 안 할께. 때려 치울께 사표 낼께" 예수님께서는 메시야직을 언제 버렸습니까? 안 버렸습니다. 메시야직은 나는 대우 받으려 온 것이 아니고 나는 많은 사람을 위해서 희생하러 왔다는 것입니다. "너는 이 쓴 잔을 마셔야 한다" 자기 제자들 보고 너가 마실 잔이 있는데 뭐냐? 나처럼 내가 남을 위해 희생한 쓴 잔을 마셔야 한다. 이것은 자아를 버리는 것입니다.
아까 본문에 뭐라고 했습니까? 사람들이 제 것을 제 것이라고 하지를 않는다. 아! 이것 참, 이것이 성경에 있으니 세상에 이런 일도 있어요. 여기서 제 것을 조금이라도 제 것이라고 하는 이가 없죠. 오늘날 교회에 가서 이 본문을 가지고 설교 한다면 어떻게 설교 하겠습니까? 이 취지와 반대로 설교 하겠죠. 여러분 집 참 좋죠? 아파트 있죠? 살림살이 나아지셨습니까? 좋은 차 타시죠? 여러분들은 성경에 보니까 제 것이라고 하지 제 것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주의 전 성전 꼬라지 한 번 보세요. 이게 뭡니까? 이렇게 영적 양식을 먹이는 목사의 사택은 비가 세는데 이럴 수가 있습니까? 투자 하세요. 내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여러분들의 교회는 커집니다. 여러분의 교회가 커지면 누구 것입니까?
제 것이잖아요. 결국은 제 것이 없어진 것이 아니고 제 것이 교회라는 이름으로 확대되었죠. 이런 극단적인 사례가 재산 가족 전부 다 교단에 바치고 집단 공동체 생활 하는 단체가 대표적인 것이 박태선. 통일교. 신천지. 이제는 아예 재산 다 바쳐서 우리끼리 폐쇄적인 집단을 이루자는 것입니다. 그러한 실험 정신은 16세기 17세기에 전 세계에 여러군데 많이 일어났습니다. 뉴질랜드도 있고 호주에도 있는데 공동생산 공동소비라는 공산주의 사상을 그대로 실천에 옮기는 곳이 있습니다. 문제는 그렇게 될려면 대장이 있어야 되는데 그 단체는 누구 것 됩니까? 자기 것 되죠. 교주 하나 만드는 거예요. 대표적인 것이 김정일체제죠. 북한은 종교 단체예요. 완전히 교주예요. 왜 그렇게 미쳤는가? 그게 정신적으로 아까 자아는 독단적 자아는 없고 신체와 외부에서 날라오는 악령이 교신하는 지점이 자아가 생겨요.
그러니까 악령이 자아가 가지고 있으니까 그 자아를 신체를 통해서 악령이 자기 새끼를 만드는 거예요. 하나님께서 흙으로 인간을 만드시고 무엇을 집어 넣으셨습니까? 하나님의 입김을 불어 넣으시니까 생령, 살아 있는 사람이 되었죠. 사람이라는 것은 하나님의 입김이 없이는 죽은 자가 되는 거예요. 죽은 자가 되는데 사람들은 숨이 끊어진 것을 죽은 자로 보는 거예요. 성경은 그렇게 보지 않고 하나님과 관계가 끊어진 것, 더이상 말씀이 듣기 싫은 것, 복음이 듣기 싫고 이제는 내 공백은 내가 메꾸겠다고 나서는 것이 이걸 바로 하나님 보시기에는 이미 죽은 자로 보는 겁니다.
그러면 죽은 자가 되면 죽은 자의 징벌이 뭐냐면은 사실은 저주거든요. 일반 교회에서는 살아 있을 때 저주를 말하지만 성경에 보면 저주라는 것은 살아 있을 때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죽고 난 뒤에 지옥불에 들어 가는 것입니다. 지옥불에 가는 특징이 뭐냐? 하나님과 복음적인 관계가 끊어진 사람. 하나님으로부터 용서받지 못한 사람. 하나님으로부터 긍휼을 입지 못한 사람. 그게 바로 죽은 자가 되고 저주받은 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부터 여러분들이 아는 이야기 하겠습니다. 자아라는 것은 인간이 영적 존재이기 때문에 악령이 되었든 성령이 되었든 인간을 사용할 때, 영적 존재가 인간을 다룰 때 접선 지점에서 자아가 발생된다고 했습니다. 불신자들은 악령을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악령 대신에 빈 공백의 자아, 이것을 가지고 A라고 하죠. 라캉은 A라고 하는데 빈 공백의 자아, 빈 공백의 대상. 텅텅 비어 있는 곳에서 나를. 자꾸 나를, S 주체라고 하는데 나로 하여금 이유없이 그곳에서 그것을 쳐다보면서 다가가게 만들어서 나로 하여금 내 욕망을 채우고 거기다 향유, 즐거움을 지향하도록 만드는 것. 쾌감을 지향하도록 하는. 다가가면 갈수록 현재 내가 가지고 있는 이 주체는 다시 없어지고 다시 생기고 다시 없어지고 이 공백에 다가서죠. 하면 할수록 이 공백은 점점 더 채워지는 것이 아니고 이 공백은 점점 더 멀어지고 커지는 거예요.
여러분 달을 한 번 쫓아가 본 적이 있습니까? 손에 잡히든가요? 자꾸 가면 산 넘어 가 버리죠. 산 타고 가면 또 산을 넘어 가잖아요. 인간이 메꿀 수 없는 이 허전함은 아무리 돈이 많고 박사가 되고 해도 도무지 뭔가 텅비어 가지고 자꾸만 채워야 하는 것이 점점 더 많아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나중에 가면 내가 무엇을 원하는 줄 몰라요. 무엇을 원하는 줄 모르는데 여기서 뭐가 나오느냐면 우리가 원하는 것을 이야기 하죠. 이것이 타인입니다. 지금부터 잘 들어야 합니다.
이 타인이 무엇을 원하는 것을 요구를 하죠. 그러면 우리는 거기에 접근해 들어갑니다. 이 타인이 옛날에는 의사. 박사. 똑똑한 것. 장동건처럼 잘 생긴 것. 이것은 아주 젊을 때고. 나이가 한 오십 쯤 되면 인생을 좀 알면 이 타인이 누가 되느냐면 신이 되고 예수가 되죠. 너는 나를 본받아야 하느니라~~ 너는 이 말씀을 지켜야 되느니라~~ 그러면 우리는 자아의 가치를 상승시키기 위해서 주여 조금 기다려 보세요 제가 주님 원하는 말씀을 잘 지켜서 보란듯이 지켜서 우리 교회에서 제일 믿음 좋은 사람이 되겠습니다 하고 따라가죠. 그러면 이쪽은 뭐라고 합니까? 그래가지고는 아직도 모자란다~ 더욱 더 착해야지~~ 나오거든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이웃집 집사 신장이 하나 없어진단다~ 신장 하나 주어라~~ 예 드려야지요. 완전히 미친짓입니다.
이것을 가지고 동의. 이 사람은 신앙을 이렇게 봅니다. 산으로 봅니다. 정상은 하나이다. 불교라든지 기독교라든지 결국은 올라가면 한쪽으로 모인다. 다만 종교라는 것은 올라가는 과정에 있다.오백미터 올라간 사람은 삼백미터 올라간 사람하고 수준이 다르다 우리는 레벨을 높이자 어디까지 예수님을 본받아 예수님의 자리까지 올라가자 이게 고상한 티를 내는 교회에서 악마가 이런 소리를 합니다. 그러니까 성령이 오지 않은 사람은 항상 빈 공백이 있고 이 공백에 예수와 성령, 하나님을 집어넣고 뭘 집어 넣어도 공통점이 있는데 종교적 희열인지 해탈인지 관계없이 나의 빈 가슴을 돈이나 명예같은 시시한 것은 때려 치우고 신적인 성화, 거룩으로 채워서 내가 원하는 내가 만족스럽다는 레벨까지 올라가겠다는 시도. 악마의 짓입니다. 이것 아주 교회에서 주의해야 합니다.
이런 사람들이 많지는 않습니다. 숫자는 많지 않아요. 이런 사람들은 한국 교회를 비판합니다. 한국 교회 썩었다고. 속물이라고. 그러면 자기는 뭐고? 자기는 거룩하다고. 한국 교회 더러워서 못 보겠다고. 한국 교회 말씀대로 안 산다고. 이런 사람들의 제일 고수가 성경에 나옵니다. 바로 바리새인들이죠. 그래서 교인들은 교회 오면서 뭘 보느냐면 우리보다 레벨이 높은 분, 계급적으로 더 높은 자리에 있는 사람을 목사로 보고 그보다 한 수 아래를 부목사로 봅니다. 아이구 신학교 나온다고 얼마나 고생했노? 이렇게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신학교 나온다고 좋다고 나왔습니다. 고생 안 했습니다. 공부 안 하고 놀다 왔어요.
그러니까 그 높은 분을, 거룩한 분을 손대면 위에서 돌맹이 날아와서 저주 받는다 이렇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와 동시에 목사를 존경해서가 아니라 그 속엔 뭐가 들어 있느냐면 나도 오기가 있는데 언젠가는 그 목사가 지금 이야기 하는 레벨을 따라 붙을 용의가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이게 무슨 예수입니까? 마귀의 장난 입니다. 성경은 이렇게 이야기 합니다. 올라가지 말고 내려가라 세리와 창기 바로 너다 세리와 창기가 되어도 기생 라합이 되어도 예수님의 피는 어느 구석에도 너를 천국 보낸다 그 때 너는 면류관 벗어서 던지고 주의 은혜입니다 그것만 이야기 해라 딴소리 하지 말고. 내 한 평생 한것은 주의 은혜지 내가 누구를 본 받아서 따라 붙어서 그래서 구원 받는 것이 아닙니다.
이렇게 될 때 이 사람은 2초내지 3초 동안 뭘 느끼느냐면 "주여 내 몸이 내 것이 아니군요." 이것이 바로 오늘 본문의 내용입니다. 제 것을 제 것이라고 하지 않을 때 그 짧은 2초내지 3초 사이에 그 사람 속에 뭐가 왔습니까? 예수님의 피가 왔죠. 그러면 아까 산 사람은 어떤 사람이 산다고요? 진짜 자아는 뭐라고요? 성령이 말씀과 우리 신체가 만나는 그 접선 지점이 진짜 새롭게 성령으로 거듭난 자아가 되는 것입니다. 그럴 때 그 사람한테는 주님의 영이 들어오면 "주여 제 몸이 제 몸이 아니라 주님이 거하시는 성전이군요." 안다 이 말이죠.
그럼 그 사람은 무조건 교회 돈 내놓고 그럽니까? 아닙니다. 집에 있는 것 다 팔아서 교회 바칩니까?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이 말은 뭐냐 현재 집에 침대가 있고 냉장고가 있더라도 거기에다 붉은 딱지를 붙입니다. 이것은 차압된 것. 주님의 것. 주님은 국세청입니다. 심지어 애 머리에도 딱지를 붙여요. 애 이마에 빨간 딱지 붙이는 것이 요한계시록에 나옵니다. 그 애 이마에 주의 이름이 있다. 예수님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자기 이마에도 붙여야죠.
그런데 사람에 옛 사람이 있어서 이마에 아무리 붙여놔도 2초 지나면 다 잊어 버립니다. 내가 저 번 주에 은혜 받았는지 무엇 때문에 은혜 받았는지 모르겠다. 제 아내가 수요 예배 마치고 돌아 오잖아요. 돌아서면 한 2분 걸립니다. "오늘 말씀의 핵심이 뭐고?" 이럽니다. 은혜 안 받았다는 것입니다. 가면서 5분 동안 다시 이야기를 해 주면 "아! 그것, 아! 그렇구나!" 합니다. 5분 동안 다시 이야기 했기 때문에 기억상 한 10분 갑니다. 그래서 양식은 매일 먹는 것이 좋습니다. 조금씩 조금씩 말씀을 매일 먹는 것이 좋습니다.
만약에 사람이 복음을 안 보고, 복음이라는 것은 풍선을 가지고, 빈 새우깡 봉지 확 불면 빵 터지잖아요. 교회가 뭐냐면은 지 잘난 체 하다가 예수님 피 때문에 내가 용서 받은 것을 알고 주여 또 내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고 콱 밟아 버리는 것이거든요. 그게 교회거든요. 키우는 것이 교회 아닙니다. 그런데 복음적 교회에서 늘 들어야 되는데 한 두주 빠졌다 하면 풍선이 요만했던 풍선이 이만케 되요. 주님이여 제가 한 두 주째 교회 안 나왔지만 이유가 있었습니다 이번에 바이어 만나 가지고 큰 건수 올린 것은 다 주님의 은혜입니다 신앙 생활 잘 하고 복음을 아니까 이런 큰 복을 주었습니다 라는 마음으로 오늘 빈 손으로 오지 않고 헌금 듬뿍 가져왔습니다 하고 오잖아요. 이것 십자가 복음 앞에서 빵 터져야 합니다. 터지면 헌금 낸 것 말고 나머지 것은 누구 것이다? 내 것이 아니고 다 주님의 것입니다. 헌금 한 푼도 안 내도 집에 있는 모든 것이 다 주님의 것이고 주님의 은혜입니다.
집안의 문제, 부인으로서 가정주부로서 가장으로서 집안의 문제가 어떻게 일어나는지 잠깐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남자 여자 자식들이 있으면 전부 다 선악과를 따먹고 죄를 지었잖아요. 죄인이잖아요. 죄인이 뭐냐면은 말씀을 기피하는 것입니다. 말씀을 기피하면 자아가 어디서 생깁니까? 자아라는 것은 현재 신체와 내가 되고 싶은 완벽한 신체와의 자아와의 관계. 이 속에서 자아가 생깁니다. 라캉이라는 학자가 밝혀 냈어요. 현재 신체하고 뭔가 알 수 없는 여기 자아가 이 사이에서 늘 결핍 된 존재 빈 자리. 그것을 거세라고 하는데 자꾸 거세되는 욕망을 채우면 자꾸 거세되고 하는데 본인만 이런 것이 아니잖아요. 아빠, 자식들. 부인이 있단 말이죠. 아빠가 보기에 부인과 자식은 누구 것입니까? 자기의 빈 공백을 채우는 자기 소유가 되겠죠.
그런데 놀랍게도 부인은 어떻습니까? 남편과 자식은 누구 소유입니까? 자기 소유죠. 자식들은 아빠나 엄마는 나를 위해 존재한다고 생각을 하죠. 재아야 그렇지? 이렇게 본다는 말입니다. 처음에는 여기서 협상이 일어 납니다.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남편이 직장 생활하다가 때려 치우고 사업을 하다가 사업이 망했어요. 여보 도와줘 해서 돈을 끌어다가 사업을 했는데 사업이 잘 안되서 IMF 터져서 아까 이야기 한대로 누가 미니까. 성질 나빠서 마음씨가 나빠서 망하는 것이 아닙니다. 미국에서 미니까 망한 것입니다. 그런데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망한 사람은 무조건 나쁜 사람됩니다. 이유없이 결과적으로 죄인되요. 그러니까 세상이라는 것 참 희한하죠.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돈이 결정하니까. 미니까 밀려서 망했어요. 그러면 처음에 부인이 뭐라고 했냐면 실제로 있었던 이야기니까 하는 것입니다. "여보 내가 당신의 아내인데 결혼할 때 슬플 때 괴로울 때 함께 한다고 했죠. 여보 힘내요. 내가 있잖아. 내가 어떻게 장사라도 해서 당신 일어서게 할께." "아 고마워요" 눈물 흘리잖아요. 이거 6개월 갑니다.
왜 그럴까요? 처음에는 자식이 "아빠 힘내세요!! 우리가 있잖아요" 하지만 몇 개월 지나면 아빠 보기 싫어서 가출합니다. 왜 그럴까요? 결국 뭘 보고 기대는 것입니까? 처음에는 뭐가 형성되요? 협상이 유효하죠. 당신 잘 되면 누가 잘 된다? 남편이 사업 성공하면 나는 사모님이 되잖아요. 결국은 남편 위주가 아니었고 당신 있음에 내가 잘되기 때문에 약간의 희생과 봉사와 투자를 해요. 그게 협상입니다. "저 남자는 요번에 실수해서 한 거야. 원래 복 받을 짓을 하는데 이상하게 하나님이 개입을 잘못했어 참 교회 헌금 잘 하고 봉사 잘 하는데 다른 나쁜 놈들은 망하지 않고 아 하나님 실수 한거야 이 참에 내가 더욱더 감사 헌금을 해야지" 그래서 사업 망하고 감사 헌금을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주여 사업 망했습니다. 하지만 다시 일어설 줄 믿습니다. 하면서 감사 헌금하는 사람있습니다.
그러면 목사는 그것을 보고 욥 봐라 욥처럼 처음에는 이렇게 망해도 나중에는 복 받지 하면서 사기를 쳐 가지고 축복 한다고 손가락 벌리고 한다고요. 믿지 마세요. 믿지 마세요 해도 사람들이 그것을 믿고 싶어서 그 짓 하지만. 하는데 협상하다가 기다리다가 안 되거든요. 서서히 협상에서 협박으로 바뀌죠. "당신 너무 논다" "당신 일 좀 알아봐라" "나도 열심히 한다고 했잖아" 그 다음에 협박에서 유능한 존재로 보는 것입니다. "저 남자하고 내가 여기서 약간 버티면 나는 괜찮은데 내 뱃속에서 난 자식들은 무슨 죄고?" 여기서는 이혼을 하지 않습니다. 빚쟁이들 따돌리기 위해서 우선 형식적으로 이혼한 것 처럼 하자 당신 믿는다 하면서 잠깐 헤어지고 자식들은 크면서 엄마 믿을 수 있나? 자식은 독립하고 막장 드라마가 시작되는데 여기서 남편과 다시 만나는 것으로 되어 있는데 여자는 새로운 남자 만나서 결혼했는데 또 그 남자도 부도가 나고 또 헤어진 남편은 재벌 여자를 만나 잘 되고 그러다 이 남편이 어디에 부딪쳐서 기억상실증에 걸려 다시 찾고 만나고....막 이렇게 되겠죠.
결국 이 이야기는 어떤 인간도 남을 용서할 수 있는 위치나 자격같은 것은 애초에 하나의 변명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 정도로 인간은 자기도 모르는 죄인으로서 살아가는데 그나마도 같이 한식구가 오손도손 살아가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이 은혜가 얼마나 삼겹살처럼 두껍게 쌓여 있는 것인가를 알려면 우리가 얼마나 은혜를 모르고 살아 갔는가를 깨닫게 하는 사태가 벌어져야 그동안 주신 은혜가 얼마나 컸는가를 알게 됩니다. 너는 그 나라와 그 의를 구하라 마지막 때에 우리가 구원 받을 때 예수님 피로 구원 받습니다. 예수님의 용서로 구원 받습니다. 살아질 땐 잘 몰라요. 그러나 나중에 죽고 보면 이 피가 얼마나 고마운지 용서가 얼마나 고마운지 알게 될 것입니다.
끝으로 이 본문 말씀을 보게 되면 재물을 제 것이라고 하지 아니했다는 것은 그 다음부터 계속했다는 말이 아니고 그 순간 각자의 마음 속에 성령을 주니까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이 접촉하는 피조물로서 교회가 하나됨으로 말미암아 누구의 영광입니까? 각자의 영광입니까? 아닙니다. 제 것이 아니기 때문에. 누구의 영광이냐면 제 몸은 주님의 것으로 그냥 사용했을 뿐입니다. 내가 냉장고를 내놓았다 냉장고를 내놓아도 내 행동도 주께서 주신 능력으로 내놓은 것이지 절대로 내가 내놓은 것이 아닙니다. 내놓고 내가 했다고 자랑 할 수 없습니다는 쪽으로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여러분 가정에 혹시 어려움이 있고 자식들이 애를 먹인다든지 자식이 차 키 훔쳐서 박아 가지고..그런 일이 일어 난다고 해도 내가 그들 용서해야지 라는 그런 건방진 생각을 하지 마세요. 오늘 목사님이 예수님을 본받으라 예수님이 희생했으니까 너도 희생해야지 그렇게되면 도인됩니다. 그 때는 반대로 나가야 합니다. 주여 내가 몰랐던 내가 얼마나 이기주의인가를 깨닫게 하기 위해서 이런 사태가 일어 났습니다. 자기부터 낮추어야 합니다. "여보 당신이 부도 났는데 솔직히 말해서 당신이 부자였을 때 당신이지 부도난 남편하고 살 마음이 없다 당신 각오해라" "하나님에게서 내 몸도 내 것이 아니라고 은혜를 주면 당신은 하나님 덕분에 나하고 붙어 사는거고 만약에 주께서 그런 은혜를 주지 않으면 섭섭하지만 당신하고 헤어지고 싶고 당신은 헤어져도 나하고 내 자식 책임져라 당신은 뭐든지 해서 원상복귀해서 나를 불러달라" 그러면 남편은 "사실은 나는 내 위주로 살았다 미안하다" 이렇게 될 때 진정으로 아빠 힘내세요 이런 것 필요 없어요. 서로가 죄인인것을 알 때 제대로 처음으로 아내 값 했고 남편 값 한 것입니다. 그동안 남들이 보란듯이 남편, 아내 했지만 그것은 다 가식적이고 십자가 앞에서 우리가 진정한 죄인인 것을 드러날 때 그게 진정한 아내고 남편입니다. 요한계시록 3장 7절을 봅시다.
7절. 빌라델비아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거룩하고 진실하사 다윗의 열쇠를 가지신 이 곧 열면 닫을 사람이 없고 닫으면 열 사람이 없는 그이가 가라사대
천국 문 열고 닫고 누구 천국 넣어 주고 안 넣어 주고 하는 것이 누구의 소관이다? 주님 소관이다 라는 요한계시록 3장 7절 말씀이 우리들의 신체와 두뇌를 자극해서 지금 와닿으면 그 사람은 새로운 피조물이고 지금 죽어도 낙원에 갈 사람입니다. 그런데 이 말씀을 딱 듣고 하는 말이 "그래 좋아 열면 닫을 사람 없고 닫으면 열 사람 없다고 그러면 내 행위로 구원받는 것이 아니야 아니라고 그럼 나는 이 말씀 당분간 못 믿겠어." 이렇게 나온다면 평소에 이 사람은 말씀과 연결된 것이 아니고 악령과 연결되어 있는 바로 지옥갈 사람이라고 판정되는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성경 말씀은 지키라는 것이 아니고 확인하는 것입니다. 10월 31일 날 영장 나왔다. 갈까요? 말까요? 가 아니라 "빨리 들어와 빨리 들어와 논산훈련소에 들어와" 통과하는 것처럼 "이 말씀이 맞습니다. 내가 그동안 내 인생위주로 살았습니다. 그런데 용서에 주시다니 주님의 은혜입니다." 알면 그사람은 은혜가 가득한 새로운 피조물 입니다. 자,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남들 따라 갔습니다. 남 흉내냈습니다. 넓은 길 많은 사람이 찾는 길로 갔습니다. 잘되는 것이 복이고 못되면 저주라고 배웠습니다. 스데반 집사님은 돌에 맞아 죽었고 사도바울은 순교했습니다. 그들이 재벌된 적이 없고 그들이 가정을 가진적도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뜻이 하나님의 용서가 이 죄인을 구원했다는 것이 이제는 유일한 자랑이 되게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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