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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

광주 강의(09. 10. 23) 2강자유게시판미가

광주 강의(09. 10. 23) 2강

이름 : 서경수(IP:116.37.101.7)

광주 강의(09. 10. 23) 54-2

우리의 강건함과 허약함이 기준이 있는데, 그 기준은 법이지요. ‘이 정도 되면 강건하고, 이 정도이면 허약하다.’ 라는 법이 있고, 이 법에 대해서 판단, 심판 그리고 그 다음에 나오는 것이 뭐냐 하면, 선택입니다.

사람은 항상 선택을 할 때 자기 법에 의해서 옳은 것을 선택하고 나쁜 것은 버립니다. 반드시 그래요. 예를 들어, 소매치기가 가난한 사람의 주머니에 100만원과 부자의 주머니에 100만원이 있다면 이 사람은 반드시 착한 쪽으로 갑니다. 가난한 사람의 주머니를 털지 않고 부자의 주머니를 훔쳐요. 그런데 경찰서에서는 누구의 돈을 훔쳤든 악이 되는 겁니다.

모든 인간은 자기 기준에서 반드시 선과 악을 가려요. 어떤 선택을 할 때 반드시 선과 악을 가립니다. 판단, 심판, 선택. 이 선택을 다른 말로 하면, 자율 또는 자유라고 하지요. 이 자유에 대해서 칸트는 연구를 많이 했는데, ‘인간에게서의 자유라는 것은 선택할 수 있는 자유가 아니고 선택해 놓고 그걸 해석 할 때 그것을 자유로 해석한다.’ 라고 했어요.

인간이 자유라고 할 때는 항상 핑계를 대는데 ‘나는 그걸 내 자의로 했어.’ 라고 핑계를 대야 내가 알아서 내 자존심을 챙겨서 선택했다는 것을 이야기할 수 있고, 이렇게 자유롭게 행동할 때 그것을 자기는 옳다고 보는 것입니다.

인간은 늘 바르고 오른 쪽으로 행동을 해요. 내가 옳다고 하기 때문에 이 세상에는 혼돈이 생기고 말썽이 생기고 충돌이 생기는 겁니다. 그래서 너, 나의 옳다는 것을 묵살해 버리고 보편적으로 옳다는 것을 따로 만드는 것을 가지고 ‘헌법’이라고 합니다.

헌법은 뭐냐? 개인적으로 옳다는 것을 묵살시키는 겁니다. 예전에 그런 예를 들었지요. 축구 경기를 어떤 할머니와 청년이 보고 있어요. 청년은 축구에 취미가 있어서 너무 재미있게 보는데, 할머니는 축구에 대해서 잘 몰라요. 잘 몰라도 모르는 채 법이 동원됩니다. 축구는 즐거워야 되는데, 즐거우려면 전체 선수가 공 한 개를 가지고 놀 것이 아니라 각자 한 개씩 주어서 놀면 더 재미있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런데 아무리 봐도 공은 한 개 뿐이고 22명이 그 하나로 놀고 있어요. 그래서 할머니는 답답한 겁니다. 공을 각자 하나씩 주지 왜 저렇게 한 개의 공으로 서로 싸우고 있느냐고.

그런데 관중들이 축구를 보면서 열광하는 것은 공이 하나이기 때문에 열광 합니다. ‘저 공을 누가 빼앗아서 누가 상대 골대에 넣는가?’ 그것을 보고 사람들은 즐겨요. 세상 모든 것은 게임입니다. 게임의 특징은 공이 둘이 아니고 하나밖에 없어요.

싸움이 없으면 인간은 미칩니다. 인간은 싸움을 보고 게임을 보면서 어느 한 편에 돈을 걸 때 즐거워하고 희열을 느낍니다. 전에도 이야기했지만 ‘막장 드라마’에서 어떤 남자와 여자가 만나서 살다가 헤어졌다고 하면 시청률 떨어집니다. 꼭 여기에 기억 상실증에 걸려야 하고, 과거 부인과 현재 부인이 만나야 되고, 나중에 알고 보니 전부인과 현재 부인이 배다른 어머니에게서 난 자매간이어야 되고 ---

이것이 뭐냐 하면, 전부 다 넉넉함이 아니고 모자람인데, 그 모자람 중에서 누가 그것을 차지했다는 데서 오는 쾌감. 왜 그러냐? 자유와 선택과 심판은 항상 그 최후의 마지막 그 귀한 것을 차지할 때 가장 자유가 자유다운 거예요. 공이 여러 개가 되면 남의 공을 빼앗을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나 공이 한 개인데 그것을 차지해서 골을 넣으면 그 중에서 가장 뛰어난 자유를 발휘한 사람이 되지요.

만약 우리나라에 서울대학교를 각 지역에 여러 개를 세우면 서울대학교가 별 인기가 없게 됩니다. 인간들이 참 더러운 심성을 가지고 있지요? 우리들이 이렇게 지금 살고 있습니다. 나중에 기회가 되면 ‘자본주의가 뭔가?’에 대해서 제가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자본주의는 참 우스워요.

자본주의는 물건을 서로 교환하는 것이 자본주의가 아닙니다. 타인의 것을 가질 수 있는 권리를 모으는 것이 자본주의입니다. 그래서 아껴 쓰고, 고쳐 쓰고 하는 것은 뭐냐? 돈이란 남의 것을 빼앗을 수 있는 권한을 말합니다. 돈은 교환권이거든요. 상품이 얼마나 가치 있는가 하는 것은 그것을 빼앗을 수 있을 때만 그것이 가치가 있는 거예요. 무슨 뜻인지 알겠습니까? 모두가 탐날 때 상품이 되는 거예요.

만약 모두가 탐을 안내면 시장에 내놓아도 안 팔리니까 아무리 그것이 고귀한 가치가 있어도 시장에서는 별 의미가 없습니다. 그러니까 얼마나 이 세상이 빼앗는 것 그 자체가 내가 얼마나 인간다운가를 측정할 수 있는 하나의 표준이 되는 겁니다. ‘너는 얼마나 남의 것을 빼앗을 수 있어?’ ‘나는 아무것도 빼앗을 수 없는데’ ‘이 병신!’ 이렇게 되는 거예요.

‘너는 얼마나 남의 것을 빼앗을 수 있어?’ ‘나는 원한다면 당신 집도 살 수 있어’ 이렇게 되면 그 사람은 부러움의 대상이 되는 겁니다. 그리고 돈이란 것은, 100만원 주고 샀다고 해도 돈이 없으면 10만원 받고 팔수도 있기에 내가 돈이 없으면 90만원이 남의 것이 돼요. 지금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몰라요.

만약에 천국이 사람의 행함으로 들어간다면 이 천국은 무능력자는 못 갑니다. 지금 제가 이야기하는 것은 뭐냐? 주께서 사울을 사도바울이 되게 했습니다. 이 때 어떻게 했느냐 하면, 사도행전 9장 15-16절을 읽겠습니다. “주께서 가라사대 가라 이 사람은 내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 앞에 전하기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라. 그가 내 이름을 위하여 해를 얼마나 받아야 할 것을 내가 그에게 보이리라 하시니”

여기에서 바울이 자기의 인생을 주관하는 것이 아니고 누가 주관합니까? 주님이 주관하지요. 어떻게 주관 하는가? 그는 주의 이름을 전하기 위하여 택한 그릇이죠. 그릇인데 그 그릇 안에 바울의 옛날 것이 담겨 있을 것 아닙니까. 그런데 이 안에 든 것을 툭툭 털어내는 것이 ‘해 받는 것’입니다.

해 받는 것은 바울 본인한테는 죽을 지경이지요. 그런데 해를 받아야 된다고 이미 기정사실화 시킨 것은 바울에게 의견을 물어보고 한 것이 아니고 주님의 일방적인 결정입니다. 해를 받아야 그 안에 뭐만 담기냐 하면 ‘예수님의 해 받으심’ 즉 예수님이 십자가 죽을 때 얼마나 아프게 죽었으며, 죄 때문에 죽었다는 것이 사도바울의 해가 옆에 없고 그것이 비켜줘야 주님의 고생이 그대로 나올 것 아닙니까.

‘예수님의 죽으심이 우리를 구원하는 능력이다.’ 이것이 어디에 나오느냐 하면, 고린도전서 1장에 나오지요. 세상에서는 죽는 것이 미련한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죽어버리면 실패자로 간주합니다. 아무리 잘해왔어도 죽으면 실패입니다. 그래서 인간이 실패하는 것을 두려워하기 때문에 주께서는 오히려 실패하는 예수님으로 오셨지요. 그런데 그 십자가의 죽으심이 오히려 우리를 건져내는 능력입니다.

그런데 그 능력이 나오려면 그 앞에 얼쩡거리면 안 되지요. 예수님의 죽으심 앞에 ‘내가 고생했다. 주님도 고생했지만 나도 고생 많았다.’ 이렇게 얼쩡거리면 안 됩니다. 그러면 어떻게 합니까? 우리가 해를 받음으로 말미암아 더 이상 내가 나를, 내가 예수를 믿을 수 있는 여력마저 전부 툴툴 털어버리는 겁니다.

그러면 뭐가 남느냐 하면, 내가 예수를 믿을 수 있는 모든 여력이 같이 다 떨어져 나가지요. 그래야 예수 믿는 것이 우리한테 불가능으로 남지요. 예를 들어, 5년 전에 기도해서 암이 나았다. 그런데 5년 후에 또 암이 재발했는데 기도했지만 안 나았다. 여기서 문제는 5년 후에 왜 기도하느냔 말입니다. 그것이 잘못이죠. 그 때는 기도해서 병 나은 것이 아니고 주님께서 그냥 병 낫게 해 줬는데 ‘아하, 내가 기도하니까 응답 되는구나’하고 생각을 했지요. 이렇게 되면 이것은 ‘불가능’이 아니고 ‘가능’이 되지요.

‘예수님이 뭐라고 해도 내가 기도하면 응답이 돼.’ 이것은 예수님을 믿는 것이 아니고 자기의 기도 실력을 믿는 것이지요. 그런데 주께서는 그것을 안 들어줬잖아요. 그게 해 받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세 번씩이나 기도해도 안 되지요. 그런데 정작 사도바울이 남을 위해 기도하니까 죽은 자가 일어났잖아요. 심지어 바울은 손수건으로 죽은 자를 살아나게 했고 병이 낫게 했지요. 그러면 그 손수건으로 자기의 병은 왜 못 고칩니까?

그 희한한 손수건으로 자기 몸의 가시는 왜 못 고칩니까. 주께서 해를 받게 하심으로 말미암아 내가 믿는 것이 아니고 주께서 성령으로 믿게 하셔서 오늘도 믿게 되었다는 것을 증거할 수 있단 말이지요. 이것이 바로 그릇에 담긴 옛것을 비우는 거예요.

이제 본문 봅시다. 디모데후서 4장 17절입니다. “주께서 내 곁에 서서 나를 강건케 하심은 나로 말미암아 전도의 말씀이 온전히 전파되어 이방인으로 듣게 하려 하심이니”

여기서 ‘강건케 하심’의 기준이 뭡니까? 이것은 자기 기준도 아니고 서울의 백병원 기준도 아닙니다. 사도바울이 종합검진 받았습니까? ‘귀하는 혈압이 좀 높습니다.’ 이러면 여기서 ‘강건케 하심’이란 말을 빼야 됩니다.

여기에서 ‘강건하다’는 것은 주께서 복음 전하는데 필요한 만큼의 강건함 입니다. 그러니까 이 판단을 누가 합니까? 사도바울 본인의 자유와 선택으로 하는 것이 아니고, 새 사람을 만들어내고 있는 예수님 입장에서 강건하다고 하면 강건한 거예요.

‘온유하라.’는 말씀이 있는데, 이 말씀을 지킨다는 것은 말이 안 돼요. ‘온유하라’는 것은 우리가 생각하는 온유와 달라요. 우리가 보기에는 온유하지 않아도 주께서 온유하다고 하면 온유한 겁니다. ‘원수를 사랑하라.’고 말씀하신 주님이, 바라새인을 향해 ‘독사의 새끼들아!’ 라고 했어요.

다윗은 아내가 여러 명이었습니다. 그런데 복음서에는 한 아내를 주신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했거든요. 그러면 다윗은 지옥에 갔습니까? 모세도 아내가 여러 명입니다. 이것을 가지고 어떤 사람은 아내를 갈아치웠다고 하는데, 그러면 우리도 갈아 치울까요?

성경의 모든 일은 그 기준이 옳다, 그르다가 아니라 복음이냐, 복음 아니냐(천국에 필요한 것이냐 아니냐)로 판단합니다. 내 선에서 옳다, 그러다가 아닙니다. 내 기준으로 판단하면 안 돼요. ‘주여 이것은 나쁜 짓입니다.’ 주께서 말씀하십니다. ‘나쁜 짓은 없다.’ 천국을 증거할 것인가, 말 것인가? 이것이 중요합니다. 이미 우리 몸은 우리의 것이 아니기 때문에 내가 나쁘다, 좋다고 하면 안 됩니다.

축구공을 차다보니까 때가 묻었어요. 그러면 그 축구공으로는 골을 못 넣습니까? 때가 있어도 골 넣으면 골인입니다. 그처럼 우리라는 축구공에 때가 묻어도 주께서 차서 골 넣으면 천국으로 골인이 되는 겁니다. 왜 자기가 자기를 관리해요. 주께서 강건하다고 하시면 비실비실해도 강건한 겁니다.

다시 이야기합니다. 사람은 눈만 뜨면 자기의 가치를 자기가 측정하는 버릇이 있습니다. 케이블 TV에 ‘롤러코스트’라는 것이 있는데, 거기에 보면 성우가 하는 대사가 유행이 되었습니다. 저도 설교 시간에 다윗을 이야기하면서 그 흉내를 냈는데 교인들이 못 알아들어요. 그게 어디에서 나온 것인지 모르더군요.

거기에 보면 남자의 심리와 여자의 심리가 쭉 나오는데, 그 심리라는 것은 복잡하지 않고 아주 간단한데, 어떤 일을 벌여놓고는 그냥 돌아서는 법이 없고 차후에 반드시 ‘내가 잘 했는지, 못했는지를 측정하는 것’이 인간입니다.

주께서 공을 차는데, 주께서 차면 우리가 같이 어울리는 것이 아니고, 이 축구공에 때가 묻었는지 안 묻었는지 조사하는 것이 우리들이 하는 짓이란 말입니다. 매일같이 평생을 그 짓을 합니다. 주께서 판단 하신다는데 자기가 자꾸 ‘주님! 가만 있어보세요.’ 하고는, ‘나’라는 공이 예쁜 공인지 아닌지 확인하고 싶다는 것입니다.

여자의 심리에 보니까, 남자가 부르니까 곧 나간다고 해놓고는 30분도 더 걸리는데 화장을 하고 옷을 이것저것 걸쳐보고 야단입니다. 남자는 그것이 짜증스럽고 이해가 안 된다는 거예요.

우리는 주님 하시는 것을 이해를 못해요. 성령이 아니면. 주님께서 하시는 말씀이 ‘너는 원래 더러운 공인데’ 디모데전서 1장 13절에 나오지요. “내가 전에는 훼방자요 핍박자요 폭행자이었으나 도리어 긍휼을 입은 것은 내가 믿지 아니할 때에 알지 못하고 행하였음이라.” 이렇게 되어 있어요.

옛날에는 핍박자고 폭행자라고 했는데 사실은 살인자입니다. 사도행전 22장 4절에 보면, 사도바울은 예수 믿는 사람을 죽인 살인자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긍휼이 임하니까, 공이 무슨 공이냐 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긍휼이라는 바람이 꽉 차 있는, 주님의 용서로 가득 차있는 공으로 굴러가고 있는 거예요.

볼링으로 비유를 하자면, 주님께서 사도바울을 볼링 공으로 사용해서 긍휼과 자비를 듬뿍 담고 굴리니까 사람들이 볼링공이 굴러오는 것을 뭐로 보는가 하면, ‘저 사람은 과거에 폭행자요, 살인자다.’ 그런데 막 굴러 와서는 자기 행함을 주장하는 사람을 넘어뜨리지요. 이렇게 넘어뜨리는 것을 ‘스트라이크’라고 합니다. 전부 다 넘어뜨리지요. 그러면 10점 만점에 10점입니다. 굴러갈 때마다 전부 넘어뜨립니다. 끝까지. 그러면 퍼펙트게임이 됩니다. 300점.

사도바울이 지금 굴러가고 있는 자신을, 주님에 의해서 가속도가 붙어 굴러가고 있는 자기 자신을 그렇게 증거하는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가 택한 성령 받은 사람은 다 나와 같다.’는 것입니다. 왜 그런데 너희들은 나와 같은 것을 모르고 왜 자꾸 공에 때 묻은 것만 생각하느냔 말이지요. 굴러가는 공을 잡아서 갈고 닦고 광내고 약칠 하고 왜 그런 짓을 하느냔 말이지요. 그냥 굴러가도록 하면 되는데.

마주침이 뭐냐 하면, 주님의 긍휼과 인간의 행함(자기 선함)과의 충돌인데, 주께서 그렇게 조장한 것입니다.

디모데후서 4장 17절을 보겠습니다.

“주께서 내 곁에 서서 나를 강건케 하심은 나로 말미암아 전도의 말씀이 온전히 전파되어 이방인으로 듣게 하려 하심이니 내가 사자의 입에서 건지웠느니라.”

여기서 ‘전도’가 나오는데, 전도가 무엇인지를 분명히 해 봅시다. 전도는 전(傳) + 도(道)지요. ‘도를 전하는 것’이 전도입니다. 이 도는 ‘십자가의 도’입니다. 바울이 전에는 폭행자요 살인자였는데 하나님의 복음 전하는 긍휼의 그릇으로 만들었잖아요. 여기에 관여하는 것이 십자가의 도란 말입니다. 전한다는 말은 십자가의 도를 전하는 것입니다.

구원은 어떻게 되는가? 구원은 십자가의 도를 들음으로 믿음이 생겨요. 그러면 성경의 지식을 알면 구원 받습니까? 예수님의 제자가 12명이다. 이런 것을 알면 구원 받습니까? 아니잖아요. 이런 것을 전하는 것은 전도가 아니죠. 전도가 아니고 지식입니다. 주께서 도와줄 때는 전도할 때만 도와줘요. 우리가 성경 지식을 원할 때는 안 도와줍니다. 왜냐? 그것은 공이 안 굴러가니까.

공이 굴러가려면 우리가 긍휼의 그릇이 되어야 하고, 긍휼의 그릇이 되려면 우리는 세리와 창기(폭행자, 살인자)여야 한다. 세리와 창기의 특징이 뭐냐? 자기의 자율권을 사용할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친구들은 백화점에 가서 상품권 100만 원 짜리를 내는데 자기는 5만원 상품권이 있어요. 그러면 내놓기가 부끄러워요.

예수님 만나고 난 뒤에 세리와 창기는 ‘내 인생은 제가 알아서 살겠습니다.’라는 것을 포기했어요. 그러니까 주님이 보이는 거예요. 주님의 사랑이 많이 보이는 거예요. 자기의 것을 내놓을 수가 없는 거예요. ‘나는 전에 마귀 들렸어요. 귀신 들렸어요.’ 이렇게 나오는 사람이 자기자랑 하겠습니까?

그래서 구약에 나오는 ‘라합’이라는 여인을 신약에서 거론할 때마다 반드시 ‘기생’이라는 단어가 이름 앞에 붙어요. 마태복음 족보에서는 빠졌지만. ‘기생 라합도 주님의 은혜를 받으니까 구원받았다.’ 할 때, 기생 라합이 뭘 했습니까? 자기 자율권을 발동했습니다. “주님은 말씀만 하옵소서. 내가 말씀대로 다 행하겠습니다.” 이렇게 나왔습니까? “다윗의 자손이여 저를 불쌍히 여기소서.”

그러니까 복음 전하는 사람은 주께서 함께하시면 성경 말씀 속에서 다시 한 번 우리가 폭행자요, 살인자며, 세리와 창기인 것을 깨닫게 해서 오직 십자가의 긍휼만 내세울 때, 그것이 다른 사람에게는 구원하는 능력으로 전달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의 볼링 공으로 사용되는 거예요.

그래서 긍휼만, 주님께서 너 같은 인간도 용서하신다는 것이 증거될 때, 듣는 사람에게 성령이 함께 하시면 같은 은혜의 사람이 되는 겁니다. 에티오피아의 국고를 맡은 내시 같으면 상당한 고위층일 텐데, 그 사람이 성경 읽다가 빌립의 전도로 복음을 깨닫고는 당장 세례를 받았지요. 그 순간 내시가 고위직입니까? 고위직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자기는 죄인 중의 괴수인데. 주님 앞에서는 고위직이니 교양이니 이런 것 필요 없어요.

여기에서 십자가의 도를 알 수 있는 것은, 주께서 곁에 서셨지요. 사도바울이 있으면 주께서 곁에 섰지요. 이 주님은 손에 못자국과 옆구리에 창자국이 있지요. 그렇다면 사도바울에게 주께서 함께 계셨다는 것은 예수님의 고난 받으시고 죽으심이 사도바울을 통해서 그대로 전달되기 위해서 사도바울로 하여금 죄인으로 만들어서 ‘이 죄인도 내 십자가의 피로 구원 된다.’는 사실을 사도바울과 함께 오늘날 우리에게 전달시키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다른 사람들에게 전달되지요.

그래서 십자가 달리신 예수님이 우리와 함께 있을 때 우리가 예수님도 바라보면서 이쪽을 바라봐야지, 나는 예수님과 함께 있다고 우기면서 ‘나는 예수님만 전한다.’ 이렇게 되면 자기가 잘난 사람이 돼버려요.

십자가를 바라보면서 전하면 ‘주께서 나를 보내셨습니다. 그러나 나도 죄인입니다.’ 이렇게 나오지요. 그러나 ‘여러분은 십자가 모르지요? 내가 한 수 가르치겠습니다.’ 이렇게 되면 이 목사는 결국 예수님의 십자가 공로를 가리고 자기 실력으로 전도하는 사람이 된다 이 말입니다.

그 다음 18절에 “내가 사자의 입에서 건지웠느니라.” 이것은 설명이 좀 필요한데, 사도행전 16장 18-19절을 제가 읽어보겠습니다. “바울이 심히 괴로워하여 돌이켜 그 귀신에게 이르되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내가 네게 명하노니 그에게서 나오라 하니 귀신이 즉시 나오니라. 종의 주인들은 자기 유익의 소망이 끊어진 것을 보고 바울과 실라를 잡아 가지고 저자로 관원들에게 끌어갔다가”

여기에서 뭔가 이상한 느낌이 안 듭니까? 방금 바울이 귀신을 쫓아냈는데, 그만한 능력 같으면 체포당하기 전에 체포하려는 그 인간에게서 귀신을 쫓아내면 안 됩니까?

사도바울이 어떤 능력을 소유하고 있다고 하면, 주께서 사도바울의 곁에 있을 이유가 없습니다. 사도바울 곁에 주께서 있다는 말은 사도바울은 날마다 주 안에서 자기 능력을 죽여야 돼요. 능력이 있어도 능력이 없는 자가 되어야 새로운 능력을 받게 되는 겁니다. 그것도 늘 받는 것은 아니고 주께서 쓰실 때만 받지만.

그런데 사람들은 소위 은사라는 것을, 은사를 자기 고유로 품고 있는 어떤 잠재력, 실력으로 사람들은 자꾸 오해를 하고 있습니다. “저 사람은 은혜가 많다.” 이것을 ‘저 사람은 태권도 5단이야.’ 이렇게 들리는 거예요.

은사는 하나밖에 없습니다. 가진 은사가 항상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과 긍휼로 바뀌어지기 위한 은사만 은사고, 안 바뀌는 것은 부도수표입니다. 그것은 무늬만 은사지 헛방입니다. 그러니까 두려워하지 마세요.

누가 예언하는 은사를 받았다고 한다면 그 사람 좀 만나고 싶어요. 내가 내일 어떻게 될지 한 번 물어보고 싶어요. TV드라마에 이런 것이 있습니다. 어떤 집안에 우환이 있다고 무당이 굿을 하는데 거기에 아주 이성적인 며느리가 있어요. 팔짱을 끼고 굿하는 것을 보고 있다가 굿이 절정에 이럴 때 “무당 아줌마! 아줌마 위장병 있지요?” “어떻게 알았습니까?” “입술을 보니까 위장병이 심각한 것 같은데 내일 우리 한의원에 침 맞으러 오세요.” 이렇게 되면 무당이 계속 굿 할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무당이 녹두를 가지고 ‘귀신아 물러가라!’

지금 신종 무당들이 교회에 은사란 이름으로 설쳐요. “나처럼 기도하면 당신도 은사 받을 수 있습니다.” 다른 말로 하면, ‘나처럼 하면 당신도 무당 될 수 있습니다.’ 라는 것과 같은 말이에요. 목사들이 기도원에 가서 은사 받았다고 사기 쳐서, 교인들에게 “내가 은사를 받았는데 이번 교회 건축하는데 헌금을 해야 저주를 받지 않는다.” 이런 식으로 사기를 쳐서 헌금 강요해서 예배당 짓고 하잖아요.

은사라는 것은 상품 교환권이에요. 내 은사 죽이고 예수님의 피만 증거하는 것이 은사입니다. 방언, 통역 전부다 그리스도의 복음 전하기 위해서 바꿔치기 해야 될 것들입니다. 사람마다 은사가 다 있어요. 그런데 그 은사 중 최고의 은사는 사랑입니다. 사랑으로 나오지 않는 은사는 은사가 아닙니다. 여기서 사랑이란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나오는 사랑을 말합니다. 그걸로 다 바꿔야 돼요.

청소를 한다. ‘아이고 집사님은 청소하는 은사를 받았군요.’ ‘주님의 십자가 피가 은사입니다.’ 이렇게 하면서 청소를 하란 말이죠. 헌금하면서, 봉사하면서 “나는 주님 앞에 죄인입니다.” 라는 은사 외에는 필요가 없어요. 그 은사 중 하나가 뭐냐 하면, 바로 ‘사도바울이 옥에 갇혔는데 빠져 나갔다.’ 라는 은사라면, 아까 은사는 무슨 은사? 귀신을 쫓아내는 은사. 이번에는 옥에 갇혔는데 빠져나왔다, 그러면 여기에 옥에 가두어 두는 그런 기능을 주께서 만들어 줘야지요. 그런 무대장치를 해야지요.

그러니까 바울과 실라는 옥에 갇혀서 뭘 합니까? 찬송을 부르지요. 바울과 실라가 옥에 갇혀서 자기신세 타령하는 것이 아니고, ‘이번 시나리오는 옥에 갇히는 것이구나. 인생 참 재미있네.’ 찬송을 부르고 있는데 옥문이 열려서 풀려 나왔잖아요. 옥 터에 지진이 일어나서. 지진 일어나는 시나리오는 몰랐어요. 주께서 집어넣고 주께서 풀어주고.

선덕여왕은 지진이 일어나는 것도 미리 알았지만 사도바울은 몰랐어요. 바울이 아는 것은 ‘내가 어디에 있든지 주께서 함께 계신다.’ 이것 외에는 몰랐어요. 또 알 필요도 없고. 그렇잖아요? 왜냐, 천국을 만드는 것은 자기 소관이 아니고 주님 소관이고, 자기는 거기 건축자재로 들어가는데, 건축자재가 설계도면을 보자고 할 이유가 없단 말이지요. 건축은 주께서 알아서 하실 거니까. 자기는 건축자재로 사용될 뿐이란 말이지요.

옥 터에 지진이 일어나서 옥문이 열려 간수가 사색이 되었을 때 바울이 뭐라고 합니까? 사도행전 16장 31절에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 결국은 구원하기 위해서 누구를 사용합니까? 바울과 실라가 옥에 갇히는 그런 연출을 주께서 하신 거예요.

그 다음에 나오는 것이 뭐냐 하면, “너는 여기에서뿐만 아니고 로마에 가서도 증거해야 된다.” 로마 가기도 전에 이미 로마에 가서 복음을 전해야 된다는 그 시나리오까지 주께서 짜신 거예요.

디모데후서 4장 17절을 다시 봅시다. “이방인으로 듣게 하려 하심이니 내가 사자의 입에서 건지웠느니라.”

결국 사자를 배치한 것도 누가 알아서 배치했습니까? 주께서 하신 것이고, 건지는 것도 누구 솜씨입니까? 주님 솜씨고. 우리 인생이 이런 인생입니다. 그러니까 남의 인생을 모방할 필요 없어요. 모든 인생은 각자에게 맡기신 배역이 따로 있습니다. 다만 그것이 예수님을 증거하는데 각자의 위치에서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11월 13일에 결혼식이 예정되어 있는데, 부부가 한 몸 되었다고 해도 아내가 전할 복음과 남편이 전할 복음이 달라요. 남편이 어떤 복음을 전할 지, 아내는 어떤 복음을 전할지 본인도 모르고 그 어떤 사람도 몰라요. 이건 며느리도 모르고, 시어머니도 모르고, 아무도 모릅니다. 다만 부부로 살 수 있는 것은 뭐냐? 당신과 나를 통해서 하나님이 어떻게 천국이 있음을 증거하느냐? 그것을 보고 복음 안에서 기뻐하고 감사하면 됩니다. 우리가 긍휼을 입은 볼링공이구나 하는 것을 새삼 느낄 때 모든 부부의 문제는 다 없어지지요. 주례사 다 했습니다. 이제는 더 할 것 없어요.

그러니까 사람의 만남은 그냥 ‘너와 내가 있구나.’ 하지 말고 천국과 복음을 경유해서 바라보게 되면 다 의미가 있어요. 그런데 경유하지 않고 바로 상대를 보면 내 중심으로 상대를 이용하게 됩니다. “왜 당신은 내 말 안 들어!” 저쪽도 “왜 당신은 내 말 안 들어.” 이렇게 돼요. 그러면 주님과 함께 있는 것이 아니고 자기 안에는 자기의 옛사람 밖에 없는 것이지요.

모든 부부의 문제는 여기서 나옵니다. “왜 당신은 내 말 안 들어?” 이것은 복음을 경유해서 나온 것이 아니지요. 어떤 사람은 복음을 경유해서 이런 식으로 나오는 사람도 있어요. 십자가를 통과하면 죽어야 되는데, 통과해서 살아있는 사람도 있어요. 이러면 안 됩니다. “나는 예수 믿는단 말이야! 그러니까 너는 내 말 들어.” 이러면 안 되고, 통과하게 되면 “저는 죄인이거든요.” “저도 죄인이에요.” 둘 다 죄인이라는데 여기서 무슨 자기중심이 필요합니까?

주님을 경유하게 되면 둘 다 주께서 쓰시는 주의 종으로, 오직 주님의 종으로 우리가 지금 버티고 있다는 사실을 증거하는 거죠. 그게 바로 복음 전파입니다.

그 다음 18절에 “주께서 나를 모든 악한 일에서 건져내시고 또 그의 천국에 들어가도록 구원하시리니 그에게 영광이 세세 무궁토록 있을지어다. 아멘.”

여기서 ‘모든 악한 일’이라는 것은, 진리가 아닌 것에서부터 벗어나게 해 주셨다. 누가? 주께서. 무슨 힘으로? 우리가 구원 받는 힘은 긍휼의 힘입니다. 여러분들이 긍휼의 힘으로 모든 핀(난관)들을 다 쓰러뜨려야 돼요.

우리가 하나님께 성령 받고 용서 받았으면 다 받은 거예요. 주께서 쓰신다. 천국은 그런 식의 천국입니다.

19절에 “브리스가와 아굴라와 및 오네시보로의 집에 문안하라.”

그 당시 성도들이 몇 명 되지를 않았어요. 그래서 명단이 나옵니다. 저는 요즘도 몇 명 안 된다고 생각해요. 오용익, 구자근에게 문안하다. 몇 명 안 되니까 일일이 문안할 수 있지요.

20절에 “에라스도는 고린도에 머물렀고 드로비모는 병듦으로 밀레도에 두었노니 겨울 전에 너는 어서 오라. 으볼로와 부데와 리노와 글라우디아와 모든 형제가 다 네게 문안하느니라.”

문안할 때 뭐로 문안하겠습니까? ‘주 안에서 한 형제입니다.’ 라고 문안 하겠지요. “요즘 돈 좀 잘 버나?” 이렇게 문안하지는 안겠지요. ‘아직도 긍휼 안에 있습니까?’를 묻는 거예요. ‘아직도 당신 곁에 주님이 있습니까?’를 묻는 겁니다. 왜? 당신 자체는 아무 의미 없어요. 하지만 주님이 붙어 있으면 최고로 의미 있는 사람입니다.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막8:36).”

온 천하를 얻는다 할지라도 주님이 없으면 그것은 무가치한 인간이에요. ‘당신 곁에 아직도 주님이 계십니까?’라고 문안하는 거예요. ‘아직도 당신에게 주님의 용서가 유효합니까?’ 라고 문안하는 겁니다.

그런데 아까 이야기한 그 사람 구리 장색 알렉산더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그러한 하나 됨에서 떠나버렸죠. 그냥 떠나는 것이 아니고 누구를 욕했다? 떠나면서 사도바울을 씹어대는 겁니다. 사도바울을 욕하는 이유는 하나밖에 없습니다. 사람은 예수님의 십자가 복음을 믿음으로만 구원 받는다는 것에 대해 행함을 내세울 때는 반드시 사도바울을 욕하게 되어 있습니다.

심지어 베드로와 사도바울이 충돌이 일어났지요. 베드로가 이방인과 같이 식사를 하다가 유대인이 오니까 안 먹은척하고 나갔는데 그것에 대해 바울이 심하게 꾸중했지요. 사도바울은 참 대단한 사람입니다. 자기는 폭행하고 살인한 자였으면서 이제 와서 은혜 받았다고 큰 소리 치는 것을 보면 보통사람은 아니지요.

22절에 “나는 주께서 네 심령에 함께 계시기를 바라노니 은혜가 너희와 함께 있을지어다.”

주께서 내 안에 들어오셔서 내 속사람을 주께서 만들어 내지요. 주께서 내 심령에 오게 되면, 내 겉이 후패하게 하시는 작용도 주께서 하시고 그것으로 내 속 사람이 있음을 드러내는 작업까지 주께서 다 하십니다.

만약 우리가 하면 어떻게 돼요? 우리는 우리의 겉모습만 꾸미지요. ‘나는 신앙생활 35년 했다. 나는 목사다. 나는 책을 몇 권 저술했다.’ 우리는 겉멋만 들어서 이것이 세리와 창기보다 더 무가치한 것인데, 이것을 포기를 못합니다.

어떤 목사가 대학을 안 다녔는데 뒤늦게 대학을 다니겠다고 해요. 왜 다니는가? ‘내가 대학을 졸업해야 내 설교가 힘이 생긴다.’는 것이지요. 이게 뭐예요? 겉멋이 든 거예요. 세리와 창기가 아니에요. 세리와 창기는 자기가 내세울 자유도 없고 자기가 판단해 봤자 그것도 아무 의미 없고, 그저 주장하는 것은 ‘나 같은 인간도 예수님 피로만 구원 되더라. 그리고 주께서 사용 하시더라.’ 그러니까 성령 안 받은 사람은 사도바울을 욕할 수밖에 없지요.

‘은혜가 너희와 함께 있을지어다.’ 라고 했는데, 이 은혜는 겉 사람이 후패하는 은혜, 우리의 포장지를 벗겨내서 겉에 치중하지 않고, 내가 용서 받은 긍휼이 가득 담긴 그릇이란 것에 신경 쓰게 하는 그러한 능력이 저와 여러분에게 함께 있기를 바란다고 하면서 그렇게 끝을 맺고 있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디모데전후서를 하면서 긍휼 입은 사도바울이 천국 갈 수 있는 것처럼 저희들도 똑같은 입장으로 만들어서 긍휼을 집어넣어서, 용서를 집어넣어서, 예수님의 피를 집어넣어서 주께서 우리 안에 새사람을 만들어내는 그 놀라운 업적을 세상 사람에게 증거할 수 있도록 사용해 주심을 감사합니다. 이제부터 우리 옛사람과 새사람이 어떻게 차이 나는지를 두고두고 확인하면서 주께 영광 돌리고 감사하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2009. 11. 4. 18:12 녹취 마침)

첨부파일 : 광주 54-2.hwp (112.0K), Down:14

강구만(IP:118.♡.241.91)

09-11-06 11:28

갇힌 것도 찬미, 옥문이 열려도 찬미, 주셨다가 뺏아도 찬미, 안주셔도 찬미, 예수님 피흘려 구원하신 사랑이 증거될 수 있다면 이 겉사람은 후패되어야 하고 주시는 모든 현실은 범사에 감사의 찬미로 받으시기에 합당하시기에 그 긍휼하심만 넘쳐납니다.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딤후4:7)

이미아(IP:119.♡.119.36)

09-11-06 13:27

‘주 안에서 한 형제입니다.’
‘아직도 긍휼 안에 있습니까?’
‘아직도 당신 곁에 주님이 있습니까?’

왜? 당신 자체는 아무 의미 없어요. 하지만 주님이 붙어 있으면 최고로 의미 있는 사람입니다.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막8:36).”

온 천하를 얻는다 할지라도 주님이 없으면 그것은 무가치한 인간이에요.
‘당신 곁에 아직도 주님이 계십니까?’라고 문안하는 거예요.
‘아직도 당신에게 주님의 용서가 유효합니까?’ 라고 문안하는 겁니다.

자기 것이 많냐 적냐로 인간의 가치를 판단하는 것이 인간의 본성입니다.
주님의 피로 새로운 가족만이 이 문안 인사를 받을 수 밖에 없음에도 불구하고 늘 여전히 우리는
자기 소유의 많음을 자랑하고파 안달을 내고 타인으로 말미암아 생겨난 욕망을 채우고 비교하기에 마음이 분주할 뿐입니다.
그러나 자기 것이 없어지고 천국 복음을 경유해서 사용되어지는 도구로, 주님의 손에 들려져 굴려진볼링공이라면 퍼펙트 게임이요 스트라이크 입니다.

나라는 자체는 아무 의미 없지만...하지만 주님이 붙어 있으면 최고로 의미 있는 사람이기에...

"이는 아무 육체라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
너희는 하나님께로부터 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고 예수는 하나님께로서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속함이 되셨으니
기록된 바 자랑하는 자는 주 안에서 자랑하라 함과 같게 하려 함이니라"(고전1:29-31)

"그러나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고전15:10)

"자랑하는 자는 주 안에서 자랑할지니라"(고후1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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