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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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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애굽기 34장 주석자유게시판출애굽기

출애굽기 34장 주석

이름 : 이진용(IP:222.99.120.158)

출애굽기 34장

34:1-4

십계명의 존속에 대해서 하나님은 추호의 양보할 생각이 없이 원상복귀를 명령하신다. 이것은 말씀에 대한 세상 지배가 이미 이 세상 멸망과 동일시 된다는 점을 아울러 명령하는 바가 된다.

마태복음 24:8-14에 보면, 하나님의 심판은 이미 기정 사실화 되었으며, 사람들이 설사 십계명을 잘 지킨다고 해서 심판이 취소되거나 유보될 사항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처럼 십계명은 인간사의 멸망이 이미 결정된 사항임을 통보하는 식으로 전달된 것이다. 그런데 모세에 의해서 이 십계명이 깨어지면서부터 하나님의 말씀은 또 다른 면이 추가되어서 이 세상에 드러나게 되었다.

그것이 뭔고 하니, 십계명 돌판을 재생하는데 있어 하나님은 철저하게 모세와 다른 이들 사이에 차이를 두시는 것이다. 그 이유는, ‘돌판 재생자’는 처음 돌판이 깨어지는데 있어 관여하지 않은 사람에 의해서 재생되어야 한다는 원칙이다. 즉 비록 하나님의 거룩한 말씀판이 인간의 죄로 인해 깨어졌지만 그 돌판의 위상은 이 세상 끝까지 계속 가도록 조치하시겠다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백성들 곁에는 ‘돌판 재생자’로서의 모세의 입지가 추가적으로 동행하게 되었다. 즉 이제부터는 말씀을 못 지키는 자만 죄인 아니라 ‘돌판 재생’의 취지를 무시하는, 스스로 말씀을 완벽하게 지켜냈다고 여기는 그런 시도까지 죄가 되는 상황에 돌입되어 버린 것이다.

마치 노아 홍수 때, 하나님께서 모든 인간을 쓸어버릴 듯이 홍수를 퍼부었지만 결국 노아가 드린 희생의 효력을 새로운 세계의 기반으로 정립시키는데 활용하신 것처럼 하시겠다는 것이다. 그 때 이후로 모든 인간들은 날 때부터 생각하는 것이 악해서 하나님이 홍수 전이나 후나 기대 할 것이 전혀 없음에도 불구하고, 노아가 드린 정결한 희생물의 공로로서, 선한 자나 악한 자나 모두 은혜를 내리시겠다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여기에서 새로운 죄가 이 노아 은총에 준해서 검출된다. 즉 “하나님께서 왜 나에게만 복을 내리시지 않고 저 악랄한 옆집에도 복을 내리시는가. 참으로 기분 더럽다”라고 여기는 것까지 죄가 된다.

모세에 의해서 ‘돌판 재생’에 돌입되고 나면, 인간들의 ‘말씀 지킴’은 날이 갈수록 죄의 증가로 이어진다. 지키지도 못하면서도 지킨다고 우겨댈 것이 뻔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하나님의 백성을 구원할 수 있는 근거는, 사람에 의한 ‘말씀 지키기’에서 나올 수 없는 형편이다. 그러면 어디서 나오게 될까?

재생된 돌판이 어디에 안치되는가를 살펴야 한다. 재생된 돌판은 ‘언약궤’라는 금박으로 된 나무 상자 안에 보관된다. 이것은 또 다시 돌판이 인간 세계 안에 들어와서도 깨어지지 않고 있다는 이상한 현상을 말하는 것도 된다. 왜 두 번째 돌판은 인간 세계의 죄악 속에서도 깨어지지 않는 것일까?

그 언약궤를 덮는 뚜껑에 비밀이 있었다. 그 뚜껑을 ‘시은좌’라고 한다. ‘시은좌’란 ‘은혜가 내려앉은 좌석’이라는 말이다. 마치 예수님께서 그 뚜껑 위에 깔고 앉은 식이라는 말이다. 그런데 실제 양상은 일 년에 한 차례씩 정결한 희생제물이 된 소의 피를 시은좌에 바름으로써 하나님의 은혜를 표시하게 된다.

이렇게 되면 돌판의 존재 형국은 돌판 홀로 이스라엘 내부에 있어 동행하는 것이 아니라 희생 제사의 피와 더불어 동행하는 셈이 된다. 즉 모세의 제사법은 심판과 저주의 말씀이 내뿜게 되는 심판과 저주를 자체 내에서 해소하는 셈이 된다. 이러한 용서의 성과가 가능했던 것은 깨어진 돌판을 재생할 수 있는 재생자가 이스라엘 내부에 있었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의도적으로 모세와 타인들을 구별하신다. 그것은 돌판 재생자는 산 위에 올라가지 않은 그 어떤 누구에게도 적용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나타내 보이기 위함이다. 신약 성경에 와서 보면, 예수님은 자칭 ‘하나님이 주신 은총의 힘으로’ 말씀을 준수하고 있다는 세력과 마주치고 있다.

이들의 행위들에게 대해서 예수님은 가차없이 그들의 위선을 폭로했고, 그들은 또한 예수님을 밀어낼 때까지 밀어내었다. 그것이 바로 십자가의 죽으심이다. 이로서 예수님의 속죄의 피는, 인간들의 저항 속에서 하나님의 희생을 통해서 얻어진 것이다.

34:10-12

언약이 어떻게 출현되는가 하면은 바로 이방민족과 일치되는 마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택한 자들에 의해서 도리어 하나님이 배척 받는 과정을 통해서 이 세상에 도입되고 드러나게 되어 있는 것이 언약이다. 본문에서 하나님께서 이방민족과 언약을 맺지 말라고 하신 이유도 다 여기에 있다.

인간들의 관점과 안목으로서는 이방 민족과 결별하기는커녕 당연히 그들의 수법을 그대로 베끼기에 급급하다. 왜냐하면 너무나도 자신들에게 납득이 잘 되기 때문이다. 이 모습은 마치 야곱의 경우와 같다. 야곱은 언약의 사람이다. 그런데 이 야곱은 다음과 같이 하나님의 뜻을 오해했다.

즉 “하나님이 나와 함께 있다는 것은 곧 하나님께서 내 원하는 대로 다 들어주시는 분이다”라는 오해 말이다. 그러나 실제에 있어 ‘하나님의 함께 하심’이란 그런 의미가 아니라 그 언약의 사람 자체를 공격하는 하나님으로서 함께 하고야 말리라는 뜻이다. 야곱은 자신을 축복의 당사자로 간주했다. 그래서 막대한 부와 가족을 이룰 것을 예상했다.

그런데 얍복강가에서의 싸움에서 야곱은 하나님을 상대로 싸워야 했고, 하나님은 사정없이 야곱을 공격했다. 둘 사이에는 다른 축복관이 수립되어 있다는 뜻이다. 사람이 온 천하를 얻고도 자기 목숨을 잃으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아무리 많은 곡식이 창고에 그득하다 할지라도 오늘밤에 내 영혼을 잃으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천사는 야곱으로 하여금 다른 축복에 눈 뜨게 했다. 즉 죽어도 다시 살게 된 현실이 축복이며 바로 이 축복을 받은 자로 확정된 자가 야곱이다는 말이다. 이로서 야곱과 그 자손들은 주변 민족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당당하게 말할 수 있었다. “우리도 구원받을 수 있고 너희들도 우리의 하나님을 알면 구원된다”고 말이다.

오늘날도 마찬가지다. 우리가 곧 언약의 증거물이다. “나 같은 인간도 언약에 의해서 구원되더라. 너무 감격스럽게도 말이야”라고 증거할 수 있어야 그래야 참 하나님의 백성이다.

34:19-20

첫 것에 어떤 내용이 담겨 있다. 첫 것으로 인해 다른 것들이 거룩함을 입는 점을 알기 위해서는 출애굽기에 나오는 유월절 사건으로 되돌아 가야 한다. 출애굽기 13:1-3절에 보면, 애굽에서 탈출에 성공한 이스라엘 가정의 맏이들은 단순히 애굽이라는 인간적인 세력권에서 벗어난 자들이 아니라 그보다 더 근본적으로 무서운 하나님의 저주로부터도 살아난 자들이라는 증거를 지니게 된다. 이로서 하나님의 저주로부터도 살아남을 수 있는 종족과 그렇지 못하는 종족으로 인류는 구분된다.

그런데 이들 장자들이 살아남은 것은 장자로 출생 되었다는 그 자체가 아니라 문설주와 문지방에 발린‘어린 양’의 피 덕분에 살아난 것이다. 어린 양의 희생으로 인하여 이들은 무서운 하나님의 저주에서도 벗어날 수 있었다. 이 때부터 이스라엘은 마치 하나님의 아들과 같은 대우를 받고 또한 하나님은 이스라엘 자신의 아들의 나라라고 여겼다.

이처럼 ‘하나님의 아들’이란 하나님 쪽에서 계획하시고 실시하는 ‘희생’이 안에 상주해있어야 한다. 이 희생이 빠지면 이스라엘은 일반적인 이방나라와 다를 바 없고 그렇게 하나님의 저주 앞에서 살아남을 수가 없는 것이다. 그래서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 희생을 기리기 위해 정기적으로 유월절을 지켰고 숱하게 절기를 지켰다.

정기적으로 제사한다고 늘 하나님의 아들로서 인정받는다는 것은 크나큰 착각이다. 땅에서 얻은 소산물을 정기적으로 십일조로 하나님께 상납한다고 해서 하나님께서 그들을 기쁘게 받을 것이라고 여기는 것도 큰 오산이다. 하나님께서 진정으로 원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다. 즉 어린 양의 희생 앞에서 더욱더 자신의 죄를 알아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 정신을 이스라엘 자체를 단결하는 정치적 정략으로 써먹은 것이다. 같은 종교, 같은 의식, 같은 형식으로 되풀이하는 것에서 민족적 일체감을 갖고 긴밀한 단결을 추구한 것이다. 이런 식으로 과연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할 수 있는가? 이것이 과연 희생정신이 반영되어 있는 신앙심이라고 할 수 있는가?

이스라엘 사람들은 사실상 보조연기자들에 불과하다. 그들은 진정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라 장차 오실 하나님의 아들이 하셔야만 하는 일의 모형들이다. 성도는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라 아들 되시는 분의 영을 받은 양자들이다.

히브리서 2:10-12절을 보면 예수님께서 자기 형제라고 생각한 사람들이 따로 있다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친히 나서서 죄 용서해 주시는 역할을 하시겠다고 나서신 것이다. 세례 요한은 예수님을 지칭하기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했다. 다른 사람은 아들이 아니다. 단지 예수님께서 형제라고 불러주시는 양자들이다.

그들은 예수님이 아니라면 어디에서도 용서받을 수가 없었던 사람들이다. 예수님의 혜택을 입은 자들이다. 로마서 8:29절에 보면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로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라고 되어 있다.

참으로 하나님의 양자라면 결코 예수님의 완벽한 공로를 거부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분의 용서를 부정하지도 않는다. 모든 공로를 오직 하나님의 맏아들이신 예수님에게 돌리게 된다. 자신의 반복적인 종교 행위를 의미를 두지 않는다. 예수님은 마치 하나 밖에 없는 아들을 지사충성하며 키워내듯이 자신의 형제들을 자신의 희생의 능력으로 키우신다. 우리 성도들은 예수님의 조각품이다.

오늘날 자신의 존재를 놓고서 자신에게 찬미와 찬탄을 돌리지 말고 하나님께서 유일하게 인정하신 그 맏아들 되시는 예수님의 피로 인하여 덩달아 용서받았음을 놓치지 말아야 한다.

34:21-24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이 요구하신 대로 절기를 지키다가 적들이 그 때를 호시탐탐 노리다가 급습해 버리면 하나님이 그동안 주신 넓은 땅도 도로 적들의 수중에 들어가지 않느냐 하는 것이다.

바로 이런 점에서 하나님의 생각과 인간의 생각이 상호 다르다. 하나님의 입장은 ‘이미 너희들은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너희들 책임자는 나다’하는 것이다. 거기에 비해서 ‘하나님의 일에 열중하므로서 평소에 자신이 하는 일에 소홀히 하게 된다면 그 손실에 대해서 하나님께 꼭 보상해준다는 보장이 없다’는 것이다.

즉 하나님이 도와준다는 말 자체를 신뢰할 수 없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왜 일 년에 세 번씩 자기를 보러 나오라고 요구하시는 그 이유를 알아야 한다. 인간들은 무엇인가 일을 하게 되면 반드시 그 열매는 노동한 본인의 것으로 돌리는 경향이 있다.

그 결과가 자신의 자랑거리가 되고 자신의 위대함을 증명하는 증거가 된다. 따라서 인간들이 노동에 들어가기 전에 미리 노동의 대가에 대해서 자기 것으로 돌릴 궁리를 하게 된다. 그렇게 되어버리면, ‘일을 하나 아니하나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원칙은 깨어지고 만다. 하나님께서 자신이 사랑과 맹세와 자비로 하나님의 백성이 되게 해주셨는데, 소위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작자들이 이러한 하나님의 취지는 모르고 자신의 노동의 결과로서 자신들이 복을 얻을 방도를 사전에 궁리하게 되는 것이다. 이것은 자신의 본질이 뭔가를 모르기 때문에 생긴 현상이다.

사람은 자신의 가치와 본질을 하나님이 거저 주시는 은혜에서 찾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노동에서 찾으려 한다. 자신이 만약 인간성이 달라진다 할지라도 그 달라진 인간성의 공로도 여전히 자기 위대함의 일부라고 여기는 것이다. 이런 사람은 구태여 일 년에 세 번씩 하나님 앞에 나올 수가 없는 것이다. 나올 필요를 느끼지 않는다.

하나님의 백성이 자신의 낯을 보이려고 나와야 되는 이유는, 이미 우리 자신이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기에 제발 자신이 노동의 대가를 통해서 자신이 본질을 재정립하려고 하지 말라는 것이다. 즉 하나님 덕분에 하나님의 백성이 된 것을 가지고 새삼스럽게 자신의 노동의 결과 자신이 훌륭한 하나님 백성 된 양 여긴다면 이런 자에게는 하나님의 자비와 사랑과 맹세가 찾을 길이 없게 된다.

여기서 하나님에 의해서 시키시는 일이 따로 존재하는 것이다. 한 예를 들면, 누가복음 12장에 보면 부자 농부가 나온다. 창고에 그득하게 쌓은 곡식 더미를 보고서 기분이 너무 좋아 자기가 자기 영혼에서 걱정하지 말라고 호언장담한다. 하지만 예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다. “이 어리석은 부자야. 오늘밤 네 영혼을 데려가면 저 곡식이 누구의 것이 되겠느냐 자기를 위하여 재물을 쌓아두고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하지 못한 자들이 이와 같으니라”라고 되어 있다.

우리가 늘 하나님 앞에 나와야 될 이유는 우리의 모든 소득이 결코 우리의 노동의 대가가 아니라 우리를 하나님의 백성으로 삼아주신 하나님의 노동의 열매인 것을 재삼 확인하기 위해서 나와야 하는 것이다. 즉 세상에서 우리가 무슨 일을 해도 반드시 다음과 같은 질문을 하나님께 해야 한다. “하나님, 과연 제가 꼭 이 일을 해야 합니까?” 이 질문을 통해서 비록 우리가 우리의 노동으로 시작한다 할지라도 항상 나의 일이 아니라 하나님의 일이 될 것이고, 그렇게 하나님의 일이 된다면 그 모든 영광과 자랑은 우리 자랑과 우리 공로로 돌아오지 않게 되는 것이다.

왜 우리가 우리의 영광이나 자랑거리를 획득해서는 아니 되는가 하면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 된 것은 우리가 일을 하나 아니하나 백성이 되었기 때문이다. 일 년에 세 차례 하나님께 얼굴을 보이는 시기가 바로 갑자기 수확물이 많아진다든지 아니면 장래 자기 노동에 의해서 큰 수확물을 기대하게끔 하는 시기이기 때문에 그렇다. 자연적으로 자기 노동에 힘이 들어가고 욕심을 낼 수 있는 여건이다. 바로 이러할 때, ‘일하지 않더라도’ 백성 되게 하신 하나님의 은총을 깨닫는다.

34:29-35

모세에게 광채가 나게 된다. 이 광채는 모세의 태생이 위대해서가 아니라 모세가 담당하고 있는 역할, 즉 말씀의 역할로 인해 하나님이 주신 광채이다. 모세는 지금 말씀을 갖고 산에서 내려오고 있다. 그렇다면 모세가 담고 있는 광채란 그 말씀의 내용과 관련이 있다는 이야기이다. 즉 그 말씀의 성취성은 결국 하늘의 영광으로 이어진다는 말이다. 모세가 지니고 있는 말씀 자체에 하늘의 영광이 내포되어 있으니 그 말씀을 들고 내려오는 모세에게 영광의 빛이 나타날 수 밖에 없다.

신적 광채란 하나님이나 천사들의 전유물이라고 알고 있지만 성경을 보면 그 영광이 그대로 인간에게로 제공되는 걸로 알고 있다. 마태복음 13:43에 보면, “그 때에 의인들은 자기 아버지 나라에서 해와 같이 빛나리라 귀 있는 자는 들으라”라고 되어 있다. 즉 말씀 성취가 담기게 되면 모세뿐만 아니라 누구라도 해와 같이 빛나는 육신을 지니게 되는 것이 말씀이 우리에게 약속하신 바라는 것이다.

이 광채 앞에 산 밑에 있는 이스라엘 전부는 기가 죽었다. 그만큼 말씀의 권위에 굴복할 수 밖에 없다는 말이다. 사실 진정한 신앙의 시작은 기가 죽는 것부터 이루어진다. 기가 죽지 않은 신앙생활을 하게 되면 사사건건 성경 내용에 대해서 시비를 걸게 된다. 즉 영광이나 광채가 빛나지도 않는 주제에 감히 광채 나는 몸을 나타낸 모세의 말씀에 대해서 시비 건다는 자체가 건방진 태도다.

이처럼 모세의 광채는 단순히 모세에게 주목하자는 말이 아니라 모세가 들고 내려온 그 말씀의 가치에 주목하자는 말이고 더 나아가서 그 말씀이 성취되는 날에는 그 말씀과 연결되어 있는 자라면 누구나 그 광채에 참여된다는 것을 미리 알려주는 바이다.

그러나 모세 시절에는 우리 인간이 그 권위 있는 말씀을 지켜야만 하는 입장에 놓여 있었다. 즉 영광의 말씀을 우리 인간이 얼마나 잘 지켜내고 끈질기게 실천에 옮길 수 있느냐를 증명해야만 하는 시절이다. 그러나 요즈음은 새삼스럽게 과연 인간이 말씀을 지킬 수 있느냐 없느냐가 아니라 아예 우리 인간은 전혀 말씀을 지켜내지 못함이 확연하게 드러나는 시절이다.

그러니까 옛날 모세 시대에는 말씀의 존재 자체에서 뿜어내는 영광의 광채로 인하여 기가 죽어야 하지만, 지금은 아예 말씀 존재가 아니라 말씀에 의해서 당연히 저주와 심판을 받아야 마땅함이 확실해진 시대다. 이러한 기 죽임을 위해 예수님은 우리를 어떻게 몰아넣으시는가? 우선 변화산의 경우를 보자. 마태복음 17장에 나오는 변화산에서의 광경을 보게 되면,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은 예수님의 변화에 기가 죽었다.

그리고 베드로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주여, 여기가 좋사오니 제가 초막 셋을 짓겠습니다”라고 말이다. 즉 초막 6동을 짓겠다는 것이 아니다. 자신들은 초막에 살지 않더라도 상관없다 라는 말이다. 이들 제자 세 명은 단지 광채 그 자체에 기가 죽어있다. 그런데 그렇게 광채에 매료된 그들이 막상 예수님으로부터 그 광채가 사라지니 예수님이 체포 되는 때에는 세 번씩이나 가까운 자리에서 저주하면서 부인하고 만다.

그리고 예수님 십자가 달릴 때, 제자들은 문 꼭 걸어 잠그고 자기 살 궁리에 급급했다. 이것은 곧 예수님의 영광은 멋있지만 그 예수로 인해 자기 신세가 초라해지고 비참해지고 치욕스럽게 되는 것에 대해 자신이 도저히 용서가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 때 예수님께서는 그들 가운데 나타나시어 자신의 못박힌 손 자국과 허리에 창 자국을 보여주신다. 바로 제자들의 치욕스러운 운명마저 이미 말씀 성취자로서 다 해결 지었다는 것이다. 사람이란 그저 예수님의 낮아짐을 흉내나 내면서 스스로 학대까지 해가면서 자신을 천한 모습으로 위장하고 다닐 수는 있다.

그러나 아무리 애써도 극복되지 못하는 것은 남들에게 마음마저 치욕스러운 마음을 지녔다는 소리만큼은 듣기 싫어하는 법이다. 사람이란 아무리 가난하게 살아도 마음만큼은 유복하고 타인에게 매이고 싶어하지 않는다.

하지만 예수님은 우리보고 “너는 죄의 종이다”고 말씀한다. 이처럼 말씀 성취자로서의 예수님의 위상은 우리들의 최후 보루까지 부수고 기 죽게 하시는 능력이다. 즉 말씀을 못 지켜서 죄인인 정도가 아니라 스스로 죄인이라고 고백하는 그 의로움조차 의로움이 될 수 없음을 알게 하시는 것이 바로 독생자의 능력이다. 따라서 우리는 세상이 주는 위협에는 더 이상 기죽지 않게 된다. 세상의 위협이란 우리들의 자존심을 겨냥하고 공격한다.

즉 더 이상 ‘치욕스럽게’ 살 이유가 없지 않느냐는 식으로 우리를 회유하려 든다. 여기서 우리는 ‘여호와 하나님께서 우리의 목자 됨’을 제대로 알고 믿어야 한다. 사망이 음침한 골짜기라도 거기에도 주님께서는 계신다. 결코 주님은 우리를 혼자 내버려 두지 않고 인도하신다. 그리고 결국 예수님의 하늘에 속한 그 육체의 영광으로 우리를 변모시키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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