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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

대구 11월 2일 보편성(색출당함인가?) vs 일방성(하나되기)강의[피]

대구 11월 2일 보편성(색출당함인가?) vs 일방성(하나되기)

이름 : 관리자(IP:220.81.41.193)

091102 피13강 [자아경배]의 절대적 보편화 : 짐승

관리자(IP:220.♡.41.193)

09-11-02 13:10

http://media.woorich.net/신학강의/2009대구/대구091102피p045자아경배의보편화.hwp

관리자(IP:220.♡.41.193)

09-12-09 19:06

대구091102피p045자아경배의보편화

[09 대구강의 18] - [피 13] - 자아경배의 보편화

09,11,02 강의 이근호, 정리 구득영

◈ ‘하나(1)’에 대해서 !!

오늘은 교재 45페이지부터 살펴보겠습니다. 여기에 이렇게 ‘하나’ 라는 것이 있는데, 만약에 높은 산이 이렇게 있다고 하면, 그 ‘하나’는 산 정상에는 있고, 또한 산의 중간쯤에는 이렇게 구름이 걸려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사람들은 산밑에 있는데, 그러니 밑에 있는 자들에게는 산 정상에 있는 ‘하나’가 구름에 가리워서 보이지 않는다는 말이다.

그런데 여기서 특히 더욱 놀라운 사실은 무엇인고 하니, 그렇게 하나를 보려고 하다가 구름에 반사가 되어버리면, 각자 각자가 그만 하나가 되어버린다는 것이다. 그래서 ‘나’의 하나와 ‘너’의 하나를 비교해보면 서로가 다 다르다는 말이다. 그래서 둘 중에서 하나가 엉터리든지, 아니면 둘 다 엉터리든지, 아니면 그와는 반대이든지, 그렇게 된다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릴 때 세 개의 십자가가 있었는데, 예수님은 하나를 향해서 가셨다는 것이다. 그런데 어떤 한 편의 강도는 예수님의 그 하나를 인정하지 못하고, 예수님이 이야기할 때 도로 자기에게 와 버렸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 반대편에 있는 강도는 뭐라고 했는가? 예수님의 나라가 임할 때 자기를 기억해달라고 했다는 말이다.

◈ 성령님도 ‘하나’ 됨의 의미를 !!

그것은 바로 무엇을 의미하는고 하니, 자기가 예수님을 통해서 하나가 될 수 있는 문제를 꺾어버리고, 자기 하나를 예수님의 하나에 그만 흡수를 시키고 말았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세례인데, 이런 하나됨의 의미를 성령이라고 할 수가 있다는 말이다. 성령은 그렇게 하나됨을 뜻하는데, 그것이 에베소서 4장에 나오고 말이다.

(엡 4:1) 그러므로 주 안에서 갇힌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가 부르심을 입은 부름에 합당하게 행하여
(엡 4:2) 모든 겸손과 온유로 하고 오래 참음으로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고
(엡 4:3)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의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
(엡 4:4) 몸이 하나이요 성령이 하나이니 이와 같이 너희가 부르심의 한 소망 안에서 부르심을 입었느니라

◈ ‘나’를 위한 하나가 반드시 포기되어야 !!

그렇게 성령으로 하나가 되는데, 하지만 그 하나는 결코 우리를 위한 하나가 아니라는 것이다. 거기에는 반드시 무엇이 있어야 하는고 하니, 먼저 ‘나’를 위한 하나가 반드시 포기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렇게 ‘나’의 하나를 포기하게 만드는 작용이, 그것이 반드시 바깥에서, 즉 구름 위에서 나온다는 말이다.

그러니 하나가 되게 하는 것이 구름 위에서 나오게 되면, 우리 각자의 하나 하나가 모두가 다 거부를 당하고, 즉 ‘너’와 ‘나’의 하나가 아닌, 우리 속에 섞여있는 다른 하나에 올라가게 되어있다는 것이다. 우리 속에 섞여있는 다른 하나에 말이다.

◈ 출애굽기 3장, ‘떨기나무가 어찌하여 타지 아니하는고’ !!

이것을 조금 더 쉽게 설명하기 위해서 출애굽기 3장을 보겠는데, 방금 제가 상당히 어렵게 이야기를 했는데, 거기에는 그만한 이유가 다 있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사람들이 아무리 천국에 가고 싶다고 해도, 그것이 자기의 주장이기 때문에 구름에 반사가 되어서 튕겨서 나온다는 말이다. 즉 구름을 뚫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자기들이 가고 싶은 나라가 천국이라고 자꾸만 우기는데, 구름을 뚫지 못해서 말이다. 그러니 진짜 하나됨이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출애굽기 3장 1절에서 3절을 보면, 거기서 뭐라고 하는가? 모세가 양을 치면서 호렙산에 이르렀는데, 거기에 떨기나무가 이렇게 한 그루 있는데, 거기서 불이 붙고 있다는 것이다. 나무에 불은 얼마든지 붙을 수 있는데, 그런데 그 불의 특징이 무엇인고 하니, 분명히 불인데 나무가 타지 않는다는 말이다. 불이라고 하면 당연히 그 재료가 타서 불이 붙어야 하는데, 그런데 떨기나무는 전혀 타지도 않으면서 불꽃은 나오더라는 것이다.

그러면 과연 어떤 경우에 여기에 속하겠는가? 떨기나무에 불꽃이 가운데 있는데, 그래서 3절에 보면 “떨기나무가 어찌하여 타지 아니하는고” 라고 하는데 말이다. 즉 떨기나무는 타서 사라지지 않는데, 그런데 거기서 불은 계속해서 나온다는 것이다.

(출 3:1) 모세가 그 장인 미디안 제사장 이드로의 양무리를 치더니 그 무리를 광야 서편으로 인도하여 하나님의 산 호렙에 이르매
(출 3:2) 여호와의 사자가 떨기나무 불꽃 가운데서 그에게 나타나시니라 그가 보니 떨기나무에 불이 붙었으나 사라지지 아니하는지라
(출 3:3) 이에 가로되 내가 돌이켜 가서 이 큰 광경을 보리라 떨기나무가 어찌하여 타지 아니하는고 하는 동시에

◈ 박영선 목사의 경우에 !!

이것을 남포교회의 박영선 목사는 다음과 같이 이야기를 했는데, 지금부터 20년 정도는 되었지 싶은데 말이다. 인간이 이렇게 있는데, 여기에 하나님의 영이, 즉 성령이 임하게 되면 인간의 것을 타는 재료로 삼아서, 그것을 소실시키면서 불이 되어서 나온다는 것이다. 그러니 우리가 가지고 있는 모든 정욕과 의지가, 그것이 바깥에 하나님께서 일을 하시는 에너지의 재료로 소실이 되면서, 그렇게 밖으로 나온다고 말이다. 그래서 이것을 ‘현실’ 이라고 했고, 또한 ‘희생’ 이라고 했다는 것이다.

이것은 마치 횃불에 기름을 부으면, 기름이 소비가 되는 만큼 불꽃이 더 나오듯이, 그렇게 성도들은 하나님을 위해서 더욱 더 많이 희생을 해야한다는 말이다. 즉 성도들이 소비한 그 양이 에너지원이 되어서 하나님의 일을 많이 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면 이러한 주장이 과연 맞는가? 여기서 박영선 목사를 어떤 점에서 상당히 좋게 이야기할 수가 있는고 하니, 박영선 목사가 이런 소리를 할 때는, 그 이전에는 무엇인고 하니, 우리의 것은 가만히 있고 다른 사람의 희생을, 물론 궁극적으로는 예수님의 희생인데, 즉 다른 사람의 희생과 봉사의 덕을 보면서 하나님께 감사하는 쪽으로, 그렇게 교인들이 자기 희생은 하지 않는 쪽으로 나갔다는 것이다.

◈ ‘나’ 자신이 에너지원 ??

하지만 박영선 목사는 그것이 아니라, 적어도 교회라고 한다면 그렇게 하면 안 되고, 성령이 임하게 되면 본인이 소진되어야 하는데, 남이 아닌 자기 자신이 말이다. 그렇게 본인의 것이 소진되고 달아 없어지는, 그렇게 본인의 것을 내놓아야 그것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에너지원으로 사용이 된다고 주장을 했다는 것이다.

박영선 목사가 이런 이야기를 함으로서, 그 당시에 한국교회에 어떤 긍정적인 영향을 주었는고 하니, 이렇게 되면 나와 하나님이 하나가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만약에 자기가 희생을 하지 않고, “하나님, 저를 도와주세요. 그리고 희생은 예수님이 하세요. 그러면 저는 감사하겠습니다” 라고 하면, 즉 봉사하는 한 분이 따로 있고, 자기는 그 앞에서 그것을 관람하겠다고 한다면, 그렇다면 봉사하는 하나가 있고, 그것을 구경하는 하나가 또 있게 되니, 그러면 둘이 하나가 되는 것이 아니라 그냥 둘로 남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니 박영선 목사의 주장은 무엇인고 하니, 한국교회가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물론 처음에는 그렇게 했는데, 아무튼 그렇게 하면 안 되고, 우리가 그분의 희생에 끼어 들면, 하나님이 재료를 누구의 것을 사용하는고 하니, ‘나’의 것을 사용해서 하나님의 일을 한다는 말이다. 그러니 교인들이 그런 말을 곧이 듣게 되면 “아하, 이제는 교회에 쇼를 관람하려고 오면 안 되는구나. 이제는 교회를 위해서, 주를 위해서 나의 것을 내놓아야 하는구나” 라고 하게 된다는 것이다.

◈ ‘오병이어’로 시작되는 ‘돈 라인(?)’을 살펴보면 !!

그런데 이렇게 되면, 여기에서 응용적인 논리로 따지고 들어가게 되면 부흥사들이 좋아하는 성경구절이 나오는데, 그것이 바로 요한복음 6장에 나오는 ‘오병이어’의 기적이라는 것이다. 그렇게 5개의 떡과 2마리의 물고기를 이야기할 때 반드시 등장하는 것이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어린아이가 가지고 있었던 ‘도시락’ 이라는 말이다.

그 도시락을 두 글자로 줄이면 ‘푼돈’ 이라고 할 수 있는데, 즉 교회에 푼돈이라도 내면 주님께서는 그 푼돈도 적은 돈이라고 여기기 않고 크게 들어서 사용하신다는 것이다. 물론 이것은 교회에 푼돈을 내라는 소리가 아니라, 푼돈이라도 다 긁어서 내라는 말이다. 그러니 당연히 이 푼돈에는 목돈도 들어간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과부의 두 렙돈이 부자가 내는 많은 돈보다 더 귀하다고, 그렇게 헌금을 강조하는 쪽으로 이야기를 해버리면 어떻게 되는가? 단 동전 두 개라도 집에 두지를 말고 다 교회에 바치라고 하니, 세상에 그런 날강도들이 어디에 있느냐는 것이다.

그리고 여기서 더 나아가면 마태복음 5장의 말씀이 나오는데, 즉 보물을 땅에 쌓아두지 말고 하늘에 쌓아두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땅에다 두면 그것을 갉아먹는 몇 가지 요인들이 발생하는데, 그 첫째가 도적이 들고, 둘째가 녹이 슨다는 것인데, 그러니 도적이 없고 녹이 슬지 않는 하늘에 쌓아두게 되면, 그래서 나중에 하늘나라에 오게 되면 더 많은 액수로 찾을 수가 있다는 것이다. 즉 하늘나라에 정기적금으로 들어있게 된다는 말이다.

여기서 파생이 되어서 또 하나를 더 붙이면 그것이 소위 ‘달란트 비유’ 라는 인데, 지금 파생상품까지 나오는데 말이다. 즉 열심히 이 땅에서 교회에 봉사하면 하늘나라에서 상급이 크다는 것이다. 그러니 이런 것이 일종의 라인인데, 무슨 라인이고 하니, 저는 것을 일명 ‘돈 라인(?)’ 이라고 하는데 말이다. ‘S 라인’이 아니고 말이다(ㅋㅋ).

◈ 아예, 너의 몸을 불살라라 !!

그렇게 교회에서 헌금을 강조할 때마다 돌아다니는 성경구절들이 있는데, 그 시작이 되는 것이 바로 오병이어의 사건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박영선 목사는 여기에서 한 수 더 떠서 뭐라고 하는고 하니, 그만 출애굽기 3장에 나오는 이야기를 해버렸다는 것이다. 즉 “아예, 너의 몸을 불살라 버려라” 라고 말이다.

이렇게 출애굽기 3장의 ‘떨기나무 불꽃 비유(?)’ 라는 것이 무엇인고 하니, “너의 몸을 에너지원으로 해서 사용하면 너의 몸은 없어지지만, 없어진 너를 통해서 불꽃을 피우리라” 라고 하는데, 윤시내의 노래가 저절로 생각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불꽃을 피우리라 ♬” 라고 말이다(ㅋㅋ).

◈ 이근호 목사의 ‘서편제’ !!

그런데 만약에 저에게 그런 이야기를 하라고 하면, 저는 다음과 같은 것을 더해서 이야기했지 싶은데, 그것이 곧 ‘서편제’ 라는 것인데, 즉 “이년아, 한이 없으면 소리가 나오지 않는다” 라고 말이다. 그래서 자기 딸에게 약을 먹여서 그만 장님을 만들고 말았는데, 그렇게 눈이 멀면 장애자로서 한이 맺히게 되니 득음(得音)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아마 요즘 같으면 경찰에 잡혀가지 싶은데 말이다.

그렇게 하나님에 대해서 한이 맺혀있어야, 즉 하나님의 일은 한이 맺혀있어야만 할 수 있다는 말이다. 물론 박영선 목사는 이것을 두고서 ‘자기 부인’ 이라고 하겠지만, 하지만 과연 그의 주장이 맞느냐는 것이다. 여러분의 생각은 어떠세요?

◈ 박 목사님, 혹시 죄인을 아세요?

그런데 출애굽기 3장을 보면 분명히 떨기나무가 타지 않았는데, 그러니 그것이 에너지원은 아니라는 것이다. 에너지원이라면 당연히 에너지로 삼아서 타야만 하는데 말이다. 다만 박영선 목사의 주장이 중요한 점이 무엇인고 하니, 아무튼 하나님께서는 우리 바깥에서 일하시는데, 우리는 거기에 대해서 박수를 치는 입장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와 더불어 마치 떨기나무처럼 같이 계셔서, 그래서 우리를 통해서 일을 하신다고 박영선 목사가 주장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양반이 모르는 점이 무엇인고 하니까, 그것이 바로 우리 인간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간과하고 말았다는 것이다. 즉 하나님께서는 죄인을 소비시켜서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죄인으로 하여금 더욱 더 죄인임을 드러나도록 일을 하신다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죄인의 모습이라는 말이다. 왜냐하면, 죄인이 하나님을 일을 하면 말이 안 되는데, 그러면 죄인이 아니라는 말이다.

◈ 죄인이 되게 드러나는 것이 곧 ‘하나’ !!

그런데 저는 여기에서 이렇게 죄인이 죄인이 되게 드러나는 그것을 바로 ‘하나’ 라고 본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주님이 찾아오셔서 하나가 된 사람의 특징이 무엇인고 하니까, 미쳐 자기도 몰랐던 자기의 죄가 자기 안에 들어있었음을 깨닫게 되고, 그래서 그것을 계속해서 자기 바깥으로 자꾸만 드러낸다는 말이다. 물론 그렇게 됨으로서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넘치게 되고 말이다.

그러니 결국 에너지원은 어떻게 되는가? 우리는 소비가 되지 않고 가만히 있었는데, 그렇게 그렇게 가만히 있는 우리를 에너지원으로 사용하시는 것은 바로 우리 소관이 아니라, 하나님 소관으로 여기게 된다는 것이다. 즉 죄인 하나를 들어서 사용하심으로서 계속해서 하나님의 은혜가 나오는 식으로 일을 하신다는 말이다. 바로 그런 방식의 ‘하나’ 라는 것이다.

◈ 그런데 ‘죄인’이 아닌, ‘의인’ 이라고 한다면?

그런데 이러한 것을, 즉 죄인과 그것을 용서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로서의 ‘하나’로 보지 않고, 죄인을 그만 의인으로 바꾸어버린다고 하면 어떻게 되는가? 그러면 박영선 목사의 주장처럼 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즉 우리가 가지고 있는 ‘의(義)’를 소비한다고 말이다. 즉 “주님이 우리의 의를 사용하시니, 우리는 더욱 더 의인이 된다” 라고 하는데, 그러니 거기서 하나가 된다고 하면 자기가 곧 신이 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런 모든 문제가 도대체 어디에서 발생하는가? “나는 비록 한 때는 죄인이었지만, 그러나 이제 예수님을 믿고 난 뒤에 의인이 되었다” 라고, 그렇게 자기 스스로 의인이 되었다고 주장을 하게 되면 문제가 반드시 발생하게 된다는 말이다.

◈ 제가 이번에 한국개혁신학연구소 세미나에서 !!

지금 우리가 교재 45페이지에 있는 바벨탑의 하나됨을 살펴보고 있는데, 지금까지는 여러분이 모두 아는 쉬운 것을 했지만, 이제부터는 조금 어려운 것을 강의하도록 하겠는데 말이다. 어떻게 어려운고 하니, 우리 인간들이 하나님의 하나됨을 아는데 있어서, 그만 그 앞에 구름이 있어서 사람들마다 각자 하나를 추구하지만, 진짜 하나를 뚫지 못하고 어느 선에 가면 구름에 반사가 되어서 그만 튕겨나온다는 것이다.

제가 내년 1월에 한국개혁신학연구소에서 주최하는 세미나에서 발표를 하는데, 지난 번 십자가 마을 여름 수련회에서 한 ‘70이레’에 관한 논문을 가지고 말이다. 물론 그대로가 아니고 이번에 발표하기 위해서 논문에 새로이 다시 추가를 했는데, 그 내용이 다음과 같다는 것이다.

◈ 예수님은 ‘유다 공동체’를 어떻게 평가하셨는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실 때를 기준으로 해서 보면, 사실 구약의 말라기 이후부터 선지가가 없었다는 것이다. 그때가 BC 374년인데, 물론 다니엘은 그 이전에 활동했고 말이다. 아무튼 말라기 선지자 이후에는 하나님이 보내신 선지자가 없었던 시기였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하면, 이러한 말라기 이후부터 예수님이 오시기 이전까지의 시기 동안에는 유다 공동체가 그냥 놀고 있었던 것은 아닌데, 그들이 어떤 식으로 메시야를 기다렸으며, 또한 그 중간과정에서 활동했던 유다 공동체에 대해서 예수님은 과연 어떤 식으로 그들을 평가를 했느냐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긍정적으로 보았는지, 아니면 부정적으로 보았는지 말이다.

제가 그러한 내용을 관주로 해서 길게 삽입을 시켜놓았다는 것이다. 현재 신학자들은 거의 100%가 다 여기에 대해서 긍정적으로 보는데, 이 유다 공동체를 말이다. 왜 긍정적으로 보는고 하니까, 마태복음 1장에 보면 족보가 나오는데, 그리고 누가복음 3장에도 나오고 말이다.

그러니 예수님의 족보가 이렇게 있다는 것은, 예수님이 그냥 오신 것이 아니라, 역사적으로 자기 백성들을 마치 기차 레일처럼 깔아놓고, 그러한 약속을 따라서 예수님은 마지막 때에 구원자로 오셨다는 것이다. 그러니 예수님이 오시기 전에 이미 깔아놓은 그 레일도 인정을 해야되지 않겠느냐는 말이다. 예수님을 인정한다면 말이다.

그런 점에서 그들은 이 유다 공동체를 긍정적으로 보는데, 그런데 거기에 대해서 제가 반박을 하고 뒤엎는다는 것이다. 어떻게 그렇게 주장할 수 있는고 하니, 이 유다 공동체에 대해서 예수님은 죽음을 요구하셨는데, 저는 이것을 ‘공동체의 죽음’ 이라고 표현을 했는데 말이다. 예수님은 공동체의 죽음을 요구하셨는데, 바로 그 공동체의 대표적인 자들이 곧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이고 말이다.

◈ 과연 누가 ‘남은 자’ 인가?

아무튼 말라기 선지자 이후에는 선지자의 계시가 다 끊어지고, 예수님 당시에 세례요한이 선지자로 비로소 등장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바로 그런 사이에 있었던 그 시대의 유다 공동체에 대해서 예수님이 죽음을 요구한 이유가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그들이 무엇을 주장했는고 하니까, 자기들이 하나님의 약속에 의한 ‘남은 자’ 라고 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마지막 때에 그 모든 것이 다 끊어져도 이 마지막에는 반드시 남은 자들이 있는데, 바로 그러한 남은 자들 속에서 메시야가 온다는 말이다. 그것을 오늘날의 기독교 신학자들도 주장을 했고, 그 당시의 유대인들의 생각도 역시 그러했다는 것이다.

어떻든 간에 그들은 자기들은 ‘남은 자’ 라고 여겼는데, 이러한 남은 자들 가운데 뭐가 나오는고 하니, 묵시가 나온다는 것이다. 그것을 두고 ‘묵시문학’ 이라고 하는데, 즉 그들은 생각하기를, 비록 지금은 계시는 끊어졌지만 자기들은 여전히 오실 메시야를 기다리고 있는데, 그 오실 메시야가 어떤 식으로 이 세상을 끝장내는지, 그것을 고대하면서 기다린다는 말이다.

◈ 유다 공동체가 주장하는 ‘종말론’ !!

그러면서 그들이 묵시만 말한 것이 아니라 역사를 이야기를 했는데, 그러니 자칭 이러한 남은 자들이 끄집어낸 신학이 무엇인고 하니, 역사가 있고 묵시가 있다는 것이다. 그들이 말하는 ‘역사’ 라고 하는 것은, 스가랴서에 보면 이렇게 성전을 지어놓으면 언젠가는 감람산에 메시야가 임한다고 하는데, 그렇게 역사적으로도 노선을 밟아서 온다는 것이다.

(슥 14:4) 그 날에 그의 발이 예루살렘 앞 곧 동편 감람 산에 서실 것이요 감람 산은 그 한가운데가 동서로 갈라져 매우 큰 골짜기가 되어서 산 절반은 북으로, 절반은 남으로 옮기고

그리고 ‘묵시’ 라는 것은, 다니엘서에 예언이 되어있는 것처럼 인자가 되시는 분이 구름을 타고 하늘에서 오시는데, 그러니 땅에서도 오시고 하늘에서도 오시니, 그렇게 해서 주님은 이 땅에 지으신 성전에서 만나게 된다는 것이다. 바로 이렇게 역사와 묵시를 만나게 되는데, 그들은 이것을 ‘종말론’으로 본다는 말이다.

(단 7:13) 내가 또 밤 이상 중에 보았는데 인자 같은 이가 하늘 구름을 타고 와서 옛적부터 항상 계신 자에게 나아와 그 앞에 인도되매

◈ 하지만, 예수님은 단칼에 !!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뭐라고 하셨는가? 그들이 주장하는 이런 종말론을 죽이라고, 즉 거짓된 종말론이라고 하셨다는 것이다. 이렇게 예수님은 그들의 종말론 자체를 한 방에 엉터리라고 보는데, 그런데 유대인들은 왜 자신들을 스스로 남은 자들이라고 여기면서, 이러한 엉터리 종말론을 주장하게 되었느냐는 말이다.

물론 자기들에게는 성전도 있기는 하지만, 그런데 자기들은 이제 제사중심이라기보다는 말씀중심이라는 것이다. 이것을 다른 말로 하면 ‘예언중심’ 이라고 할 수가 있는데, 즉 유대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이룰 것이라고 하면서 철저히 연구하고 다 파헤쳤는데, 그렇게 해서 “메시야는 반드시 이렇게 온다” 라고 확정을 지어놓았다는 것이다. 물론 오늘날 우리들도 마찬가지지만 말이다.

다시 말해서, 그들은 땅에서도 역사적으로도 증명이 되고, 또한 하늘에서도 묵시가 역사의 발자국을 밟아서 온다고, 즉 인자가 그렇게 해서 온다고, 그렇게 땅과 하늘이 만나데 된다고, 그렇게 자기들의 종말론을 만들었다는 것이다.

◈ 역사의 마지막에는 반드시 ‘징조’가 ??

오늘날 요한계시록을 주장하는 사람들도 이러한 것을 연구하는데, 즉 메시야가 다시 재림을 하지만, 그러나 그 재림만 기다리지 말고, 예수님이 오실 때가 되면 반드시 역사적으로 어떤 흔적을 남기게 되는데, 그것이 바로 ‘징조’ 라는 것인데, 즉 메시야가 오실 때가 되면 역사적으로 반드시 어떤 기이한 징조가 일어난다는 것이다.

그래서 제가 관주에 뭐라고 적어놓았는고 하니, 유대인들의 종말론에 보면 역사의 끝머리에서 변동이 일어난다고 하는데, 즉 역사의 끝머리에 묵시가 묻혀서 말이다. 이렇게 묵시가 묻혀서, 세상 정치적 변화에 따라서 요동이 일어나서 그때그때마다 해석을 달리한다는 것이다.

◈ 막대사탕만 빨고 있으면 OK ??

무슨 말인고 하니, 예를 들어서 아이들이 먹는 막대사탕을 보면, 그 막대기 끝에 사탕이 있기 때문에 아이들이 그것을 빨아먹는다는 것이다. 그러니 역사라고 하는 막대기에다가 묵시라는 달콤한 사탕을 입어서, 교회의 목사들은 무엇만 이야기하면 되는고 하니, 교인들에게 “주께서 오십니다” 라고 하면서, 그냥 그렇게 막대사탕만 물려주면 된다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교인들은 사탕만 빨고 있으면, 이것이 곧 ‘이미 아직’이 된다는 말이다. 즉 “이미 왔지만, 아직 오지 않았어” 라고 말이다. 바로 그러한 사고방식이 이미 유다 공동체 안에 있었다는 것이다. 즉 그들은 인간이 천국을 바라보면서 인간이 할 수 있는 모든 것이 다 이미 끄집어내어 놓았다는 말이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것을 보고 일거에 뭐라고 하셨는가? 단칼에 그것을 거짓말로 여겨서 그만 잘라버렸다는 것이다. 예수님이 그들의 종말론을 잘랐다고 하는 것은, 오늘날 기독교 신학자들이 만든 모든 종말론도 주님이 보시기에는 그것도 다 사기이고, 얼마든지 주님에 의해서 자릴 수가 있다는 것이다. 이장림만 사기꾼이 아니고 말이다.

◈ 나라의 ‘본 자손들’은 바깥 어두운 곳으로 !!

여기서 마태복음 8장을 보겠는데, 예수님이 백부장과의 대화를 통해서 그의 믿음에 대해서 하신 말씀인데, 그런데 여기 12절에 보면, “나라의 본 자손들은 바깥 어두운 데 쫓겨나 거기서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 라고 하신다는 것이다.

(마 8:10) 예수께서 들으시고 기이히 여겨 좇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스라엘 중 아무에게서도 이만한 믿음을 만나보지 못하였노라
(마 8:11) 또 너희에게 이르노니 동서로부터 많은 사람이 이르러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함께 천국에 앉으려니와
(마 8:12) 나라의 본 자손들은 바깥 어두운 데 쫓겨나 거기서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

여기 ‘본 자손들’이 누구인가? 그러니 예수님을 만난 자들이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과 서기관들만이 아니라, 그 단체 전체가 바로 유다 공동체인데, 그들은 이것을 ‘남은 자들’ 이라고 보았는데, 하지만 여기에 보면 ‘본 자손들’ 이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예수님은 이것을 어떻게 이해를 하시는고 하니, 유다 공동체가 가지고 있는 그런 생각 자체가 사기이고 엉터리라는 것을, 그것이 인간의 한계에서 나오는데, 나중에 왜 그런 것들이 나올 수밖에 없는지도 이야기를 하겠는데 말이다. 아무튼 예수님은 인간의 한계에서 그런 종말론이 나왔다고 하는 것을 지적하기 위해서, 예수님께서는 이들이 주장한 종말론에 의해서 쫓겨나야만 했다는 것이다.

◈ 예수님은 그들에게 추방을 당함으로서 !!

다시 말해서, 예수님은 그들에 의해서 이단이라고, 즉 천국에 가지 못한다는 소리를 들어야만 했는데, 그런데 바로 그렇게 예수님을 추방시킨 그 집단에서 예수님을 무엇을 하시는가? 그들에게 약을 올리는 방식으로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을 발생시켜서, 소위 “천하가 없어도 우리는 구원을 받는다” 라는 쪽을 그만 부끄럽게 만들어버린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유대인들은 메시야를 묵시적 존재로 보기 때문에 그들은 당연히 하늘을 쳐다보는데, 그런데 예수님은 이방인들을 데려다가 그만 하늘을 쳐다보는 그들의 옆구리를 쳐버리신다는 것이다. “어이, 자네들 어디를 쳐다보는가?” 라고 하면서 말이다.

* 예 수 님 : 어이, 자네들 어디를 쳐다보는가?
* 유대인들 : 왜요?
* 예 수 님 : 내가 이미 왔어.
* 유대인들 : 당신은 누구세요?
* 예 수 님 : 내가 바로 그 메시야지.
* 유대인들 : 뭐라구요?
* 예 수 님 : 내가 너희들 곁에 이렇게 왔다니까.
* 유대인들 : ? ? ?

이게 무슨 말인고 하니, 예수님은 그들의 신학에 맞지 않다고 해서 쫓겨났는데, 그런데 놀랍게도 그들에게 예수님이 쫓겨남으로서 이미 그들 속에 천국이 시작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니 그러한 방식으로 천국이 시작되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기존의 그들이 가지고 있던 천국은 엉터리라는 것을 이야기하는 방식으로 이 천국이 온다는 것이다. 그것은 마치 아까 이야기한 출애굽기 3장의 그 떨기나무처럼, 즉 우리가 죄인이라고 하는 것을 드러내는 입장에서 하나가 되게 하신다는 것이다.

◈ 예수님은 ‘남은 자’를 거부하셨다 !!

제가 관주에서 이런 내용을 다 쓰면서, “예수님은 남은 자를 거부하셨다” 라고 했는데, 그렇게 거부를 하시고 그 남은 자를 무엇으로 바꾸었는고 하니까, 오직 ‘하나’, 즉 예수님 본인으로 말이다. 그렇게 예수님이 오시게 되면 이 말라기 이후에 비어있는 모든 것을 예수님의 오심으로 인해서, 즉 예수님에서부터 거꾸로 해서 그 내용을 다 채워나간다는 것이다. 말라기와 예수님 사이에 비어있는 그 모든 것을 말이다.

그러니 말라기와 예수님 사이에 있는 그 유다 공동체를 두고서 ‘남은 자’ 라고 하는 것은, 그런 것은 예수님에 의하면 다 사기이고, 진짜 남은 자는 바로 오직 예수님만이 ‘남은 자’로서, 그렇게 남은 자를 만들어간다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이 중간에 있는 이 긴 역사는 예수님으로 인해서 새로 시작된다는 말이다.

◈ 인간 속에 어떤 것이 들어있기에 그런 종말론이?

이것은 상당히 어렵기 때문에 나중에 하기로 하고, 일단은 무엇부터 하는고 하니, 이 유다 공동체에 있어서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연구해서 역사와 묵시를 끄집어내었는데, 그렇게 해서 자기들의 종말론을 만들어놓았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하면, 인간 속에는 어떤 것들이 들어있기에 그러한 종말론이 나오게 되었는지, 그것을 이야기하고자 한다는 말이다.

◈ 인간은 ‘주체’를 느끼는데 !!

인간은 주체를 느끼는데, 이게 무슨 말인고 하니, 우리 인간을 거울에 비추게 되면 거기서는 주체가 나오는 것이 아니라 신체가 나오게 되는데, 이 신체는 머리, 몸통, 그리고 팔다리 등으로 외부에 보이게 된다는 것이다. 물론 수술을 해서 배를 가르면 간도 보이고 위도 보이겠지만 말이다.

하지만 여기에는 무엇이 보이지 않는가? 자아나 주체 등과 같은 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어떤 배가 나온 아저씨는 보이고, 또 아줌마는 보이겠지만 말이다. 그러니 이 ‘주체’ 라고 하는 것은, 거울에 비친 어떤 신체를 가지고, “저것은 남은 아니고 나이다” 라고, 그렇게 자기가 일방적으로 해석을 했다는 것이다. 이해가 되지 않을 줄 이미 알았는데(ㅋㅋ), 아무튼 사람들은 자기가 부모로부터 받은 이 신체를 뭐라고 하는고 하니, 그것을 ‘나’ 라고 자기가 이야기를 한다는 것이다.

◈ 이 영감탱이가 누구지?

쉽게 예를 들어보면, 연세가 많은 분들은 사진을 찍는 것을 거부하는데, 왜냐하면 그 사진에 나오는 모습은 자기가 ‘나’ 라고 생각한 그 모습이 아니라는 것이다. 웬 영감탱이가 들어있으니 말이다. 그러니 그것이 도저히 용납이 되지 않는데, 그래서 “안 돼, 찍지마” 라고 한다는 것이다. 즉 자기가 봐도 자기의 모습이 아닌데, 자기가 원하는 ‘나’는 따로 있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자기 안에 신체만 있는 것이 아니라, 아주 좋은 매너나 점잖은 걸음걸이 등도 들어있는데, 그런데 자기가 만약에 빨리 걸었다고 하면, “야, 그때는 내가 왜 그렇게 빨리 걸었지? 무슨 정신으로 그렇게 했는지 몰라” 라고 한다는 것이다. 즉 원래 천천히 점잖케 걷는 것이 자기 모습이라는 것이다. 그러니 그만 자기가 원하지 않는 ‘내’가 되고 만다는 것이다.

◈ 주체란, 변화를 고정화시킬 때 !!

다시 말해서, 이 ‘나’ 라고 하는 것은 하나로 규정이 되고 고정이 될 수 없는데, 그런데 그것을 수시로 “이것은 나다” 라고 고정을 시키려고 하는, 바로 그러한 중심이 되는 정신적인 상황을 두고서 ‘주체’ 라고 한다는 말이다. 조금(?) 어렵지요?

어차피 이해가 안 되는 것 계속해서 진도를 나가보면, 이렇게 변화를 고정으로 만들 때, 여기에 개입하는 것이 바로 주체라는 것이다. 어떤 변화를 고정화시킬 때 말이다. 이 고정이 곧 하나인데, 만약에 사람이 열 명이 있으면, 이렇게 하나, 둘, 셋, 넷으로 계속해서 헤아리는데, 바로 그 하나라는 것이다.

◈ 러셀 - ‘하나’, ‘하나+하나’, ‘하나+하나+하나’ !!

그런데 ‘러셀’ 이라는 양반이 뭐라고 했는고 하니, 철학자이자 수학자인데 말이다. 하나, 둘, 셋, 넷으로 헤아리지 말고, 다음과 같이, 즉 ‘하나’, ‘하나+하나’, ‘하나+하나+하나’, ‘하나+하나+하나+하나’ 라는 식으로 헤아리자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 둘, 셋, 넷으로 해버리면 서로 차이가 나는 것처럼 보이는데, 사실은 차이가 나지 않는데 말이다.

그래서 그는 주장하기를 ‘하나’, ‘하나+하나’, ‘하나+하나+하나’ 라는 식으로 헤아리자는 것이다. 그러면 전부가 똑같은 것으로 보이니 말이다. 앞의 방식대로 하면 열 명이 되지만, 뒤의 방식으로 하면 하나, 즉 ‘1' 이라는 것이 10개가 모인 것이 된다는 것이다.

지금 제가 이야기하고도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는데(ㅋㅋ), 아무튼 그렇다는 말이다. 즉 ‘하나(1)’ 이라는 것이 10개가 모였다는 것이다. 그러니 만약에 10명이 있어버리면, 이 10명은 1명이 되고, 그것을 10명이라고 보는 ‘나’는 또 하나가 되기 때문에, 결국 두 명이 되고 만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것이 아니라, ‘1’, ‘1+1’, ‘1+1+1’ 라는 방식으로 보게 된다면, ‘나’도 거기에 들어가게 되니까, ‘나’도 역시나 ‘하나(1)’가 되고 만다는 것이다. 그러니 이것이 상당히 민주적(?)인데, 왜냐하면 “아휴, 여기에 동물이 10마리나 있네” 라고 하면 자기는 동물이 아니라는 소리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왜 이렇게 ‘1’, ‘1+1’, ‘1+1+1’ 라고 보라고 하는고 하니, 그런데 그렇게 보지 않으면 결국은 자기가 1이 되고 2가 되고 3이 되고 4가 되는데, 그러니 이 세상을 아무리 보아도 결국에는 자기가 역시 돗대가 되고 만다는 것이다. 그러니 천 명이 있고 만 명이 있어도 그 사람들의 사정은 모르겠고, 자기 몸 하나만 편하면 최고라는 것인데, 이것을 다른 말로 하면, 인간은 자기 주체만 확립하게 되면 이 세상이 온통 불바다가 되어도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말이다.

◈ 아니, 수학에서도 윤리학이?

그것이 바로 수학에서 나오는 윤리학이라는 것인데, 아마 여러분은 수학에서 윤리학이 나온다는 것은 생각하지 못했지 싶은데 말이다. 수학에서 나온 윤리가 무엇인고 하니까, 흔히들 수학에서는 윤리가 없는 줄 알지만, 그러나 수학을 하면 할수록 타인에 대한 배려, 즉 타자에 대한 존재를 생각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것이 아니라, 수학에서 그냥 일방적으로 ‘나' 하나만 고집하게 된다면, 남이야 죽던지 말던지 간에 자기와는 상관이 없어져 버린다는 것이다. 그런데 자기만 하나가 아니라 상대방도 자기와 역시 동일한 하나라고 한다면, 바로 상대방의 하나를 염두에 두면서 자기는 왜 살아야 하는지 생각한다는 말이다. 즉 “저 사람을 위해서 나는 무엇을 해야하는가?” 라고, 거기에 대한 윤리가 나온다는 것이다.

이것은 무슨 말인지 알겠지요? 그런데 자기 주체를 확립해버리면 인간은 고정되어있으니, 그렇게 ‘나’ 하나에 고정되어있으면, 즉 자기가 자기의 바깥으로 나가지 않으면 그 누구를 만나더라도 “저 놈은 나에게 어떤 유용한 가치가 있지?” 라고 해서, 자기에게 도움이 되면 그냥 두게 된다는 말이다.

그런데 만약에 도움이 되지 않으면 없애 버리려고 하게 된다는 것이다. 즉 “저 인간은 내 자존심을 건드리니 없애버릴까? 저 인간은 없어져야 내가 하나가 되는데 흠집이 조금이라도 덜 생기겠지” 라고 하게 되는데, 우리 인간은 그런 것을 매일같이 생각하게 된다는 것이다.

◈ 어느 농민 운동가 부부의 이야기 !!

오늘 아침에 오랜만 TV를 보는데, 어떤 부부가 나와서 자기들이 살아온 것을 이야기한다는 말이다. 제가 그냥 TV를 본 것이 아니라, 이것이 이 강의와 관련이 있는 내용인데, 아무튼 두 사람이 다 농민 운동가로서 만났는데, 그래서 부부가 되어서 농민운동을 한번 열심히 잘해보자고 말이다. 그런데 결혼을 하고 살다가 그만 둘 사람에게 다 우울증과 같은 것이 와서, 그래서 정신을 차려서 도대체 자기들 내부에 무엇이 있기에 그런 현상이 생겼는지 참선인 여러 가지 방법을 통해서 그것을 살펴보니까, 남편은 가정중심으로 이미 그 안에 자리를 잡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 “내 가정 하나!” 라는 것인데, 농민운동이 아니고 말이다. 즉 자기 가정을 위해서 외부적으로 농민운동을 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런 괜찮은(?) 타이틀을 통해서, 자기가 어릴 때부터 맛보지 못한 부모의 사랑을 자기 자식에게만 주겠다고 하는, 그런 자기만의 행복한 가정을 꾸미겠다고 하는 것이, 그 내면에 자리잡고 있었다는 말이다. 그것을 정신분석을 통해서 나중에 알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여자의 경우에는 그런 것을 전혀 고려하지 않고, 자기 가정을 돌보는 것이 아니라, 오직 농민운동에만 전념을 했는데, 자식은 자기가 낳고도 말이다. 오히려 아기를 낳지 않은 남편은 가정위주이고 말이다. 이 여자의 내면은 나중에 알고 보니 바깥으로 돌아다니는 것인데, 그러니 두 사람이 전혀 맞지 않다는 것이다. 물론 둘 다 밖으로는 농민운동을 하자고 했지만, 그러나 그 내부적으로는 다르다는 말이다.

이 여자의 경우에는 밖으로 튀어야 하는데, 왜냐하면 그렇게 해야만 자기 주체가 펄펄 사는데, 다른 한 쪽은 가정중심이고 말이다. 그러니 이것을 아무리 감추려고 해도 결국에는 표면화가 되는데, 그것을 두고 ‘결절’ 이라고 하는데, 왜 발뒤꿈치에 보면 각질이 점점 더 붙어서 굳어지는 현상이 있는데, 바로 그와 같다는 말이다. 그러니 부부이면서도 서로 전혀 맞지 않다는 것이다.

◈ 복음이 나의 주체성 확립에 무슨 도움이?

그러니 교회 안에서도 역시 마찬가지인데, 복음이 들어있는 사람과 복음이 들어있다고 우기는 사람 사이에는 결국에는 결절이 되고 마는데, 복음이 없는 사람은 무엇이 들어있는가? ‘하나’ 라는 것을 고집하는 주체가 들어있기 때문에, 나중에는 그렇게 복음을 아는 것이 자기 주체의 확립에 무슨 도움이 되는지를 따지는데, 그렇게 해서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여기면 그냥 버린다는 것이다.

그러니 복음을 버리는 이유가 무엇인고 하니까, 자기 안에 복음 말고 다른 것이 들어있기 때문인데, 지금 제가 그것을 이야기하고 있는데, 그것이 곧 ‘주체’ 라는 말이다. 그런데 이 주체는 ‘하나(1)’ 라고 하는 고정성을 고집하기 때문에, 아무리 하나님을 찾고 예수님을 찾아도 그것은 제2인자가 될 뿐인데, 전부가 다 자기보다는 덜 중요하다는 것이다. 예수님이고, 하나님이고, 성령님이고 간에 말이다.

그런데 그런 것이 자기 안에 가득히 들어있으면서도, 겉으로 “오직 예수!” 라고 아무리 외쳐도, 물론 남들은 속을지 몰라도, 하지만 결국에는 자기가 자기 자신을 견딜 수가 없다는 것이다. 그러니 결국 남는 것은 무엇인고 하니, “제발 십자가를 가지고 나를 건드리지 말라” 라고 한다는 말이다. 즉 이제 십자가 이야기는 그만 하라는 것이다.

◈ 하나님, 우리는 바벨탑을 싫어합니다 ??

지금 제가 왜 이런 긴긴 이야기를 하는고 하니, 아까 말한 구름 이야기인데, 즉 인간이 아무리 자기가 천국에 가고 싶어도, 즉 “하나님, 천국에 넣어주세요. 우리는 바벨탑을 싫어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나라가 너무 너무 좋아요” 라고 해도, 하지만 그런 모든 것이 다 구름에 반사가 되어서 튕겨나오게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렇게 되는 이유가 자기 안에서 잡아당기는 것이 있다는 말이다. 그렇게 자기를 잡아당기는 무엇인고 하니, 예수님이 의인이 되는 것은 싫고, 그것은 어디까지나 남의 이야기이고, 중요한 것은 ‘나’ 라고 하는 주체가 영원토록 의인으로 남고 싶어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한다는 말이 “나는 죄인이 아니고 의인이니 건드리지마. 만약에 건드리면 너를 죽여버릴 거야” 라고 한다는 것이다.

◈ 인간은, 예수님의 천국조차도 자기의 하나를 위해서 !!

그러니 우리 인간은 자기의 그 ‘하나’를 도저히 깰 수가 없다는 것이다. 오히려 예수님의 천국조차도 자기의 하나에 도움이 되는 쪽으로, 즉 더욱 더 자기의 ‘하나’를 보다 더 확고히 하기 위한, 즉 기초를 다지기 위한 용도로서 그냥 끌어당길 뿐이란 말이다. 그렇게 각자가 다 하나가 되어서 올라가니, 결국에는 다시 떨어질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바로 그것을 예수님께서는 아시고 그 유다 공동체를 사기꾼의 집단으로 보시는데, 그래서 예수님이 하시는 말씀이 다음과 같다는 것이다. 즉 “너희들이 어디를 간다고? 뭐, 천국에 간다고? 어디 말씀을 연구했다고? 역사가 어떻고 묵시가 어떻다고? 메시야를 기다릴 만반의 준비를 다 했다고? 더 이상의 완벽함은 없을 정도의 신학을 만들었다고? 묵시가 아니라 묵사발이 되려고 아예 쇼를 해라 해” 라고 말이다. 그러니 그들이 아브라함의 본 자손들이라고 우겼던 모든 것이 다 헛방이라는 것이다.

◈ 그런데 그만 그 ‘하나’에 균열이 !!

그런데 여기서 조금 더 나가보면, 이렇게 인간은 각자가 다 고정이 되는데, 그런데 여기에서 문제가 무엇인고 하니까, 이 고정된 하나 하나가 다 균열이 생기는데, 즉 갈라진다는 것이다. 왜 그렇게 갈라지는고 하니, 이렇게 하나로 묶었던 것에 대해서 자족하고 만족을 하면 되는데, 그러나 그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바로 여기에서 그만 미흡함이 생기고 결핍이 생긴다는 것이다. 그러니 처음에는 “나는 이것 하나로서 만족을 한다” 라고 했는데, 그런데 갑자기 주위에서 뭐라고 하는고 하니, 그것을 라캉은 ‘법’ 이라고 했는데, 그렇게 법이 오게 되면 인간은 어떻게 되는가?

◈ 그런데 ‘법’이 오게 되면?

지금 우리가 로마서 7장 이야기하고 있는데, 그렇게 법이 오게 되면 이 하나가 그만 법을 둘로 만들어버린다는 것이다. 즉 자기 속에 있던 마음과, 또한 하나라고 우겼던 자기 바깥에 있던 마음을 그만 갈라지게 만든다는 것이다.

그러니 바깥에 있는 이 ‘나’ 라는 것은 법을 지켜서 완벽한 의인으로서 고정되기를 원하는데, 하지만 또 자기 속에 있는 ‘나’ 라고 하는 것은, 그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그것은 법이 ‘하라’ 라고 하면 하지 않으려고 하고, 오히려 ‘하지마’ 라고 하면 그만 하려고 한다는 것이다.

(롬 7:22) 내 속 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롬 7:23)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 아래로 나를 사로잡아 오는 것을 보는 도다
(롬 7:24)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롬 7:25)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그런즉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

◈ 법이 욕망을 불러 !!

예를 들어서, “간음하지 말라” 라고 하는 법이 오게 되면, 자기 속에 있는 것은 뭐라고 하는고 하니, “간음이 무엇인지 알고서나 안 하든지 말든지 하지” 라고 하는데, 즉 간음죄가 무엇인지 알아야 자기가 피할 수가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 일단 경험을 해보고 난 뒤에 자기가 알아서 결정하겠다고 하는 생각이 든다는 말이다.

그것을 두고 “법이 욕망을 부른다” 라고 하는데, 즉 사람들은 금지를 시켜야 비로소 소망이 생긴다는 것이다. 그렇게 “안 돼. 하지마” 라고 하는 것에서 말이다. 그렇게 우리 인간은, 자기 속에 있는 것은 겉으로 나오는 것이 아니라 그냥 계속해서 속에서만 맴돌게 되는데, 왜냐하면 속에 있는 것은 겉으로 나오는 것을 싫어하니 말이다.

그래서 이 속에 있는 것은 항상 몰래 하려고 한다는 것이다. 사과도 몰래 먹는 것이 맛있다고 말이다. 이것을 가지고서 가수 김지애는 ‘몰래 한 사랑’ 이라고 하는 노래를 열심히 불렀다는 거이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사람은 이렇게 몰래 한 것이 없으면 어떻게 되는고 하니, 그냥 죽고 만다는 것이다. 즉 사람은 비밀이 없으면 죽는다는 말이다.

◈ 이 세상에 비밀이 없는 사람은 없어 !!

이 세상에 비밀이 없는 사람은 단 두 종류밖에 없는데, 정신 박약아와 정신 분열증에 걸린 사람이라는 것이다. 그렇게 아이큐가 너무 낮은 사람과, 그리고 자기도 자기를 어떻게 도저히 할 수가 없는, 그야말로 전혀 감당이 안 되는 사람, 즉 정신 분열증에 걸린 사람 외에는 전부가 다 비밀을 가지고 있다는 말이다.

이러한 두 종류만 빼놓고는 모든 사람은 다 비밀이 있는데, 그래서 자꾸만 눌려서 “너는 이 속에서만 살아” 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그런 비밀은 잠을 자다가도 꿈속에서도 튀어나오는데, 그래서 꿈을 꾸다가 자기가 놀라서 깨어서는 옆에 자는 마누라는 쳐다본다는 것이다. 아무튼 그렇게 자꾸만 발로 마구 밟는데, 심지어 교회에 와서도 “너는 튀어나오지 마. 알겠지?” 라고 한다는 말이다. 물론 그렇게 하지 않아도 목사는 다 알고 있지만 말이다.

이렇게 사람들은 남을 속이고 자기도 속는, 그렇게 속이는 것이 자기 속에 들어있기 때문에, 그래서 사람들은 희망을 가지고 살아간다는 것이다. 어떻게 말이 좀 이상한가요? 그것이 바로 정상적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이라는 말이다.

◈ 옷을 입는 것이 과연 정상인가?

어제 오전설교시간에 뭐라고 했는고 하니, 사람이 옷을 입는 것이 정상이 아니라고 했는데, 무슨 말인고 하니, 옷을 입는 것이 수치라는 말이다. 창세기 3장에 분명히 그 이야기가 나오는데, 그것을 저만 본 것이 아니라 지금까지 그야말로 수천 수억 명의 사람들이 다 보았을 텐데, 거기에는 분명히 옷을 벗고 다니는 것이 정상이라는 것이다. 옷을 입은 것이 수치이고 말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옷을 입고 다니면서 뭐라고 하는가? 자기가 지금 이렇게 옷을 입고 있는 것은 전혀 수치스러운 것이 아니라, 지극히 정상적인 것으로 보아달라고 한다는 말이다. 오히려 옷을 벗고 있는 사람이 있으면 미친놈이라고 하고 말이다. 물론 지금 저도 이렇게 옷을 입고 있지만, 아무튼 인간은 그렇다는 말이다.

◈ ‘균열’에서 역사적 종말론과 묵시적 종말론이 !!

이것이 바로 균열인데, 이러한 균열에서 역사적 종말론과 묵시적 종말론이 생긴다는 것이다. 역사적 종말론은 자기가 역사의 주인공이 되는 것인데, 즉 “하나님이여, 저를 만들기 위해서 역사가 이렇게 움직였군요. 감사합니다” 라고 하면서, 그렇게 이 세상의 모든 것을 자기 중심으로 당겨서 해석을 한다는 것이다.

◈ 인간은 ‘고름판’으로, 고르고 또 고르고 !!

이것을 가지고 ‘고름판(?)’ 이라고 하는데, 왜 씨름을 할 때 보면 한 판 씨름을 하고 나서 흩어진 모래판을 골고루 밀어서 편평하게 고르는데, 인간은 바로 그렇게 자기 자신을 편평하게 고른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 세상의 모든 변화는 어떠한가? 결코 그렇게 편평하게 고른 것이 아니라, 오히려 울퉁불퉁하다는 말이다. (‘고름판’은 사전에 없는데?)

하지만 우리는 일기장에 어떻게 써는가? 물론 대부분은 일기도 쓰지 않지만 말이다. 아무튼 그렇게 일기를 쓰면 어떻게 쓰겠는가? 모든 것을 자기 중심으로 당겨서, 즉 “오늘도 참으로 좋은 날이었다” 라고 한다는 것이다. 남들은 불이 나서 타죽던 말던 간에 자기는 무조건 고름판이라는 것이다. 마치 모래를 그냥 ‘좌악’ 밀어서 편평하게 하듯이 그렇게 해버린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인간은 이러한 방식으로 그 어떤 일이 있어도 자기에게는 반드시 고름판을 만드는데, 왜냐하면 그렇게 자기 내부에서 일어나고 있는 모든 균열을 고름판으로 그렇게 만들어주어야, 즉 변화에 대해서 고정화를 시켜주어야 자기는 자기로 인해서 살아가는 재미가 있다는 것이다. 이 세상을 살아가는 재미가 말이다.

◈ 아무리 고르게 해도, 안과 밖이 서로 맞지를 않아 !!

그런데 여기서 문제는 무엇인고 하니까, 그렇게 자기가 아무리 내부적으로 고름판을 해도 어떠한가? 그것이 자기 속에 감추고 있던 것과 맞지를 않다는 것이다. 그렇게 서로 맞지 않으니 어떻게 하는고 하니, 그것을 제대로 맞추기 위해서 하나님께 기도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인간들이 말하는 ‘기도’ 라는 말이다.

그래서 어떻게 기도하는가? “하나님이여, 내일은 제발 제가 하는 기도의 응답대로 행운이 떨어지게 해주세요. 저는 주님이 없으면 안 됩니다. 오늘은 저의 인간성이 좋아서 일단은 고르게 해놓았는데, 하지만 내일은 무슨 일이 일어날지, 제 자식이 어떤 사고를 칠지 모르니까, 주님께서는 제가 이렇게 고생해서 매끈하게 만들어놓은 고름판에 너무 상처가 되지 않도록 새로운 은혜를 베풀어주셔서, 제발 이러한 힘든 고난의 길에서 벗어나도록 해주세요” 라고 한다는 말이다.

◈ 인간의 기도가 곧 행운이 들어있는 ‘묵시’로 !!

알다시피 그것이 바로 그들의 묵시가 된다는 것이다. 그러니 묵시는 반드시 전혀 예상도 하지 못한 행운을 두고서 이야기한다는 말이다. 여기서 제가 왜 이 묵시를 행운이라고 하는고 하니, 물론 우리가 알고 있는 묵시는 행운만이 오는 것이 아니라 무엇도 같이 오는가? 축복만 오는 것이 아니라 저주도 함께 온다는 것이다.

하지만 기존의 모든 인간들이 생각하는 묵시는 무엇인고 하니, 남에게는 유황불이 떨어지든지 말든지 상관이 없는데, 왜냐하면 자기가 아닌 남과는 자기는 하나가 아니기에 말이다. 하지만 하나인 ‘나’에게 대해서는 어떠한가? 그저 내일도 축복에 축복만 오기를 소망한다는 것이다.

◈ 유다 공동체에 떨어진 예수님의 군화발 !!

다시 말해서, 축복과 저주 가운데서, 저주는 그만 삭제시키고 축복만 주어지는 묵시를 유다 공동체가 품으면서 그 사회를 고름판으로, 즉 역사를 깨끗하게, 즉 아주 매끈한 표면으로 만들었다는 것이다. 바로 이것을 들뢰는 ‘코드화’ 라고 했는데, 이것을 다른 말로 하면, 즉 구조화를 시켜서 아주 깨끗하게 만들어 놓았다는 말이다.

이렇게 인간들이 열심히 열심히 만들고 만들어놓았는데, 그런데 예수님이 오셔서 어떻게 하셨는가? 그렇게 매끈하게 만든 유다 공동체의 정성한 다한 종말론을, 그들의 그 고름판을 예수님은 이리저리 돌아다니면서 자신의 군화발로 마구 짓밟아놓았다는 것이다. 예수님 자신만의 특유의 군화발을 가지고 말이다.

◈ 세례요한의 경우에 !!

물론 예수님보다 한 발 앞서 간 사람도 있었는데, 그가 곧 세례요한이란 것이다. 그가 뭐라고 했는가? “이 독사의 자식들아!” 라고 하면서 그들의 마구 고름판을 흩트려 놓았다는 말이다. 즉 “뭐? 너희들의 고름판이 어떻다고? 너희들이 천국에 간다고? 에라이 이놈들아, 회개나 해라” 라고 하면서 나왔다는 것이다. 그래서 세례요한은 결국 목이 잘려서 죽고 말았지만 말이다.

아무튼 이 유다 공동체는 행운이 찾아오는 묵시를 기다렸는데, 물론 묵시는 오기는 오겠지만, 그러나 그런 행운이 함께 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저주가 주어지는데, 그래서 이 세상을 타작마당으로 만들어서 그야말로 불의 세례가 주어진다는 것이다. 즉 모든 것을 심판해버리는 묵시가 마구 쏟아진다는 말이다.

◈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

그래서 세례요한은 “회개하라. 이미 도끼가 나무 뿌리에 놓였다” 라고 했는데, 그러니 이때는 천국의 열매가 아니라,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어야 하는데, 이런 것이 참 어려운데 말이다. 천국의 열매는 사도바울이 로마서에서 하는 이야기이고, 지금 이 세례요한의 경우에는 천국의 열매, 즉 성령의 열매가 아니라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이야기하고 있다는 것이다.

(마 3:10) 이미 도끼가 나무 뿌리에 놓였으니 좋은 열매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지우리라

다시 말해서, “우리 자체가 잘못되었습니다” 라는, 혹은 우리 자체가 문제가 있습니다” 라는 열매를 말하는데, 바로 그러한 의미에서 이 세례요한은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다” 라고 했다는 것이다. 즉 심판의 날이 가까이 왔다고 말이다.

◈ 예수님은, 이스라엘의 종말론을 부정함으로서 ‘참 종말적’ !!

이제 이 대목은 마치겠는데, 아무튼 예수님은 이스라엘의 본 자손들을 부정함으로서 이스라엘이 만든 종말론도, 즉 그들이 말하는 역사적이고 묵시적인 종말론은 인간들의 그들 나름대로의 ‘하나’를 고집하는, 철저한 자기들의 구원위주의 종말론이기 때문에, 예수님을 그것을 군화발로 밟아서 차버렸다는 것이다.

이것을 두고 뭐라고 하는고 하니, 제가 설교 시간에 그런 이야기를 했는데, 즉 “예수님은 이스라엘의 종말론을 부정함으로서 참 종말적이다” 라고 말이다. 그런데 여기에 보면 ‘종말적’ 이라는 말도 있고, 그 앞에 ‘종말론’ 이라는 단어도 있다는 것이다. 결코 쉬운 말이 아닌데 말이다.

이것이 무슨 의미인고 하니, 보통 사람들은 종말론을 알면 종말에서 구원이 되는 줄로 알지만, 그러나 과연 그러한가? 즉 요한계시록 강의를 잘하면 그 사람이 구원을 받느냐는 것이다. 그렇게 종말론을 강의를 잘 하고, 또한 거기에 가서 배우면 과연 마지막에 다가오는 심판에서 벗어날 수 있느냐는 말이다. 전혀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아무튼 사람들은 이렇게 종말론을 붙들고 있는데, 누구를 위해서인가? 자기 속에 있는 주체의 균열, 즉 속마음과 겉마음이 다른 말이다. 그래서 철저하게 자기 위주의 구원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여기에 비해서 예수님은 무엇인가? 예수님은 이러한 이스라엘의 종말론을 부정함으로 말미암아서 그야말로 참으로 종말적인데, 즉 진짜로 종말이라는 것이다.

◈ 그런데 예수님이 색출을 !!

다시 말해서, 예수님이 오시면 “야, 이제는 정말 끝났구나” 라는 것인데, 그러면 구원은 도대체 어떻게 되는가? 구원은 이렇게 실시하시는 분이 먼저 우리에게 오셔서, 우리 속에 있는 이런 것들이 들어있다고 하는 것을 까밝히게 되면, 그것을 ‘색출’ 이라고 하는데, 즉 예수님이 그렇게 색출을 하시게 되면, 그런데 이 ‘색출’ 이라는 것이 무슨 뜻인가?

물론 우리 인간들은 계속해서 예수님을 숨고 숨으면서 피해 다니는데, 즉 “하나님, 이제는 예수님을 잘 믿을게요. 교회에 잘 다닐게요. 복음을 연구할게요” 라고 하면서 피한다는 말이다. 그렇게 하면서 계속해서 숨는데, 바로 그렇게 숨어대면서 간첩행위를 하는 우리들을 예수님이 오셔서 털썩 잡아낸다는 것이다. “야, 여기에 숨어있었네” 라고 하면서 말이다.

◈ 내 새끼, 여기에 숨어있었네 !!

이것을 박윤진 씨의 표현대로 하자면, “제가 어떻게 구원을 받을까요?” 라는 것은 생각하지를 말고, 그냥 주님께서 오셔서, “어이쿠, 내 새끼 여기에 숨어있었네” 라고 하게 되면, 그렇게 예수님이 색출하게 되면, 그것이 바로 천국의 본 자손이라는 말이다.

그것이 마태복음 8장의 이야기인데, 참 쉽죠잉? 그러니 역사적이고 묵시적인 종말론이 필요 없는데, 그러니 예수님이 오신 것은 인간들이 만든 역사의 고름판을 그야말로 뒤죽박죽으로 만들어버린다는 것이다. 즉 마구 짓밟고 구멍을 숭숭 뚫어서 내다버리는데, 이것을 다른 말고 하면, 종말의 힘으로서 몰아 내어버린다는 것이다.

그렇게 내어버린 다음에 무엇이 주어지는가? 예수님 중심의 새로운 종말이 색출을 당한 우리들에게 주어지게 된다는 말이다. 그리고 그 다음에는 아까 박영선 목사의 주장처럼 우리들을 에너지원으로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는 떨기나무처럼 전혀 타지도 않고 가만히 있는데, 그 불은 성령께서 붙이신다는 것이다.

◈ 봐라. 대식이도 구원을 받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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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 21,142건 중 513 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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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