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9 울산목양교회 특강 1 - 구원, 그 이후 - 재정리
09 울산목양교회 특강 1 - 구원, 그 이후 - 재정리
이름 : 구득영(IP:203.223.97.190)
09 울산목양교회 특강 1 - 구원, 그 이후
2009,02,21 (강의 : 이근호 목사) (녹취 : 한윤범 목사)
◈ 나는 구원을 받고야 말거야 !!
구원에 두 가지가 있지요. 하나님 입장에서의 구원과 인간 입장에서의 구원이 있다면, 여기에 '구원, 그 이후' 라는 것도, 하나님 입장의 '구원 그 이후'가 있을 수가 있을 것이고, "나는 구원이 되어야만 하겠습니다" 라는 인간의 입장이 있다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하나님의 입장과 인간의 입장이 서로 같을 것 같으면, 메시야가 다녀가도 아무 일이 없어야 되는데, 그런데 하나님 입장에 있는 메시야가 인간세계에 왔을 때 여기서 충돌이 일어났다는 겁니다. 이 충돌이 바로 십자가가 되고, 십자가 사건 이후에 비로소 본격적으로 활동을 개시하는 분이 바로 성령님이라는 말입니다.
◈ 하나님의 입장과 인간의 입장이 충돌을 !!
다시 말해서, 십자가를 지시고, 그 다음에 승천을 하셔서, 하나님 오른 편에 계셔서, 예수님의 영으로 오시는 분이 성령님이기 때문에, 즉 "하나님의 입장과 인간의 입장이 충돌을 일으켰다" 라는 것인데, 즉 서로 맞지 않는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것이 서로가 맞지 않는 걸로 끝나는 게 아니고, 성령이 오심으로 말미암아서, "하나님의 입장은 옳고, 인간의의 입장은 그르다" 라는 것으로, 즉 인간은 오류가 있다는 쪽으로 결론이 나고 말았다는 겁니다.
여기서 꼭 하나 우리들이 오해를 하지 말아야 될 것은, 이렇게 하나님의 입장이 있다고 해서 인간의 입장이 사라지는 것이 아니고, 그것이 잘못되었다는 쪽으로 계속해서 유지가 되어야 한다는 겁니다. 여기에 대해서 "아니, 그것이 잘못되었다고 하면 잘 되게 처리를 하면 그만이 아닙니까?" 라고 할지 몰라도, 그런데 이것이 처리가 안 된다는 겁니다. 무슨 말인고 하니까, 하나님의 입장을 세우기 위해서는 잘못된 인간의 입장이 계속해서 나와 주어야 된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구원에 관해서 이렇게 될 때, 즉 인간의 입장과 하나님의 입장이 서로 다르고, 그래서 충돌을 일으킨다는 말인데, 물론 충돌이 없었다고 하면, 유사성이 있고, 혹은 비슷하다고, 즉 서로 공통점이 많다고 하겠는데, 그런데 그만 여기서 십자가의 충돌로 말미암아서 서로가 적대적인 관계에 놓이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이게 무슨 말인고 하니, 인간의 입장에서 생각하는 구원관에 의해서, 하나님 입장에서 생각하는 것과는 그만 적대적 관계가 되는데, 그러니 서로가 하나의 적으로 간주할 수밖에 없는 구원관이라는 말입니다. 즉 하나님의 입장에서는 인간이 악마적이고, 그와 반대로 인간의 입장에서는 하나님이 악마적이라는 겁니다. 그러니 인간들은 여기에서 따로 여기서 뭘 만들어내느냐 하면, 인간의 입장에서 구성한 하나님 입장이란 것이 새롭게 성립된다는 말입니다.
◈ 구원은, 불가능한가? 가능한가?
그렇다면 여기서, 이 '구원 그 이후' 라는 것은 구원관에서 나오니까, 이 구원부터 먼저 설명을 해드리면, 하나님 입장은 무엇인고 하니, 예수님의 낙타와 바늘구멍 이야기에도 나오듯이, 인간은 구원이 불가능하다는 불가능성이라는 겁니다. 즉 하나님의 입장에서, 인간은 자력으로 구원이 불가능하다는 입장이고, 반면에 인간의 입장에서는 가능하다는 말인데, 그러니 "불가능한 것인가? 가능한 것인가?" 라는, 그 싸움이 벌어진다는 말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냥 불가능하다는 것으로 끝나는 게 아니고, 반드시 그렇게 불가능한 이유가 다 있는데, 즉 하나님께서 볼 때 인간의 입장이 왜 불가능하냐 하면, 그것은 창세기 3장의 에덴동산에서 인간을 추방할 때부터 내재되어 있는 것이 있는데, 즉 "인간은 선악을 아는 지식이 있기 때문에 생명나무를 따먹을 수 있는 자리에 있지 못한다" 라는 겁니다.
그러므로 인간들이 자기 입장을 고수하는 것이 왜 하나님 앞에서는 배격을 당하느냐 하면, 인간들은 여전히 선악적인 사고방식을 고수하고 있는 상태에서, 그것을 기초로 해서 구원을 달성하려고 하니 그렇다는 말입니다. 즉 선악적인 방식을 가지고서 구원을 받으려고 하니 배격을 당할 수밖에 없다는 겁니다. 쉽게 말해서, 지상에 있는 선악적인 요소를 가지고서 생명나무를 따먹겠다고 나서는 시도가 된다는 말입니다.
◈ 하나님께서는 창세기 3장을 계속해서 견지를 !!
그런데 창세기 3장 22절에 보면, 하나님께서는 생명나무로 가는 길을 의도적으로 두루 도는 화염검으로 차단을 시켜 놔버렸는데, 즉 인간이 선악적인 사고방식을 스스로 포기하지 않는 한 이 생명나무를 따먹을 수 없다는 이 창세기 3장의 입장을 하나님께서는 계속해서 견지를, 즉 견고하게 유지하겠다는 말입니다.
(창 3:22) 여호와 하나님이 가라사대 보라 이 사람이 선악을 아는 일에 우리 중 하나 같이 되었으니 그가 그 손을 들어 생명나무 실과도 따 먹고 영생할까 하노라 하시고
(창 3:23) 여호와 하나님이 에덴동산에서 그 사람을 내어 보내어 그의 근본된 토지를 갈게 하시니라
(창 3:24) 이같이 하나님이 그 사람을 쫓아내시고 에덴동산 동편에 그룹들과 두루 도는 화염검을 두어 생명나무의 길을 지키게 하시니라
그렇게 하나님께서는 생명나무를 따먹을 수 없음을 계속해서 관철하시는데, 그런데 인간은 현재 살아가는 것이 너무나도 힘들고, 결국은 죽음이 찾아오니까, 어쨌든 간에 죽어서라도 좋은 곳으로 가야만 되겠다고 하는 구원의지를 선악과적으로 이 땅에서 강력하게 발산을 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결코 이것을 허락하지 않는데, 그러니 서로 충돌을 일으킨다는 겁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낙타와 바늘구멍'을 말씀하시면서, "낙타가 바늘구멍을 통과지 못한다" 라고 하니, 제자들이 그만 주눅이 들어서 "그러면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습니까?" 라고 한다는 겁니다. 여기에 대해서 예수님은 "사람은 할 수 없으되 하나님은 하신다" 라고 하는 것입니다.
(마 19:23)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부자는 천국에 들어가기가 어려우니라
(마 19:24) 다시 너희에게 말하노니 약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 하신대
(마 19:25) 제자들이 듣고 심히 놀라 가로되 그런즉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으리이까
(마 19:26) 예수께서 저희를 보시며 가라사대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되 하나님으로서는 다 할 수 있느니라
◈ 선악과를 따먹은 자는 생명나무에는 못 들어감 !!
그러니 예수님의 이 말씀은, 구원이 없다는 말이 아니고, 구원이 있긴 있는데 뭐는 안 된다는 겁니까? 인간들이 하는 그런 선악과의 방식으로는 안 된다는 겁니다. 그러니 하나님께서 철저하게 막아놓은 생명나무를 어떻게 처리하려는 생각은 하들랑 말라는 겁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께서는 "선악과를 따먹은 자는 생명나무에는 못 들어감" 이라는 원칙은 철저하게 그 원칙대로 고수하기 때문에, 결코 그것을 철회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인간적인 방법으로는 도저히 천국에 갈 수가 없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다 하실 수 있다" 라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그것은 바로, 하나님 입장에서의 구원이 또 따로 나온다는 것입니다.
◈ 다시 정리하면 !!
강의를 시작해서 지금까지 이야기한 것이 간단한데, 즉 "인간은 구원을 받고 싶어한다" 라는 것인데, 왜 그런가요? 사는 게 힘들기 때문에 말입니다. 죽고 난 뒤의 문제가 걱정되기 때문에 구원을 받고 싶은데, 즉 에덴동산에 가고 싶고, 천국에 가고 싶고, 낙원에도 가고 싶고 말입니다. 비록 이 땅에서는 힘들게 살았지만, 죽어서라도 영원토록 좋은데서 복락을 누리고 싶은데, 그런데 문제는 이 선악적인 요소를 우리 인간들이 자체적으로 해소할 방책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하나님께서는 어떤 말씀을 주면, 그것을 무엇으로 다 이해하느냐 하면, 자기가 갖고 있던 선악적인 선입관을 가지고 그 말씀을 수용하기 때문에, 자기가 말씀을 듣고 실천에 옮기는 족족 하나하나 뭐가 나오느냐 하면, 선악적인 요소를 깔린 채로 나오기 때문에, 그것은 하나님의 입장과는 전혀 맞지를 않다는 것입니다.
◈ 너희 의가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아니하면 !!
이러한 점에 대해서는 하나님께서는 충분하게 그동안 숱하게 실험을 해왔는데 그 실험의 마지막 대표자들이 누구냐 하면, 곧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이라는 겁니다. 이 바리새인들에 대해서, 하나님의 입장에 있는 예수님이 뭐라고 표현했느냐 하면, "너희 의가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다" 라고 하셨다는 겁니다.
(마 5:20)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그러니 예수님의 그 말만 들으면, 바리새인들은 현재 이 세상의 그 누구보다도 제일 가까이 천국에 접근된 사람처럼 보이지만, 그러나 이런 바리새인들 보고서 예수님은 뭐라고 했습니까? "너희 아비는 마귀다" 라고 했다는 겁니다. 즉 마귀새끼라고 말입니다.
다시 말해서, 그 어떤 누구라도, 바리새인들도 더 의를 갖지 못하면 안 된다고 하는, 그런 명제 하나, 그런데 그 바리새인들은 마귀 자식이라서 "화 있을진저!" 라고 하면서 저주받는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다른 사람들은 말할 필요도 없다는 것입니다.
◈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 !!
그러한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을 조사해보니까, 그들은 어떤 사고방식을 갖고 있는고 하니, 이 사람들은 하나님으로부터 '토라', 즉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 관심이 있었고, 또 시편에 보면, "이스라엘아, 말씀을 들어라" 라고 하는 '쉐마', 즉 '들어라!' 라는 말씀에 의해서 순종하고, 회개하고, 또한 안식일과 십일조와 각종 율법을 다 성의껏 지키는 자들로서, 이런 사람들이 뭉쳐서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을 이루었다는 것입니다.
특히 사두개인들 같은 경우에는, 하나님이 약속한 죄를 씻어준다는 성전을 관리운영하고, 그것을 지켜내기 위해서 평생을 바친 사람들입니다. 이런 사두개인들의 열심은, 상대적으로 말씀을 제대로 몰라서 실천에 못 옮기고, 성전을 관리하지 않기 때문에 더러운 족속에 속한 여타의 계층의 백성과 더불어서 최고의 대표자가 된다는 겁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주님이 보기에 "너희 의가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못 간다" 라고 하는 대변자 역할을 한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사람들마저도 천국에 가지 못한다고 하면, 결국은 그 어떤 사람들의 금식과 기도이라도, 그 어떤 것도 하나님이 원하시는 구원의 조건을 이룰 수 없다는 말입니다.
구제요? 오른 손이 한 것을 왼 손이 모르게 할 수 있습니까? 기도요? 무엇을 이룰까 하고 기도하지 않은 적이 있습니까? 오히려 우리는 전부다 무엇을 이룰까 하고, 그렇게 기도했다는 겁니다. 금식요? 머리에다 기름을 바르면서 금식을 하지 않는 척하면 금식한 적이 있습니까? 그게 우리 마음에 되겠습니까? 여자를 보고 음욕을 안 품었다고요? 형제를 보고 미워하지 않았다고요? 무엇을 입을까 먹을까 전혀 염려한 적이 없어요? 남을 비방하고 남을 판단한 적 없어요? 그리고 정말로 좁은 길로 가려고 몸부림을 친 적이 있습니까? 넓은 길로 가려고 환장한 우리들인데 말입니다.
◈ 불가능성을 앞장세우시는 하나님 !!
그러니 하나님의 입장에서 인간은 선악과를 따먹은 이상, 하나님께서는 인간에게 일체의 생명나무의 자격을 부여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즉 하나님은 불가능성을 앞장세워서 쳐들어오게 되는데, 그래서 고린도전서에 보면, 하나님은 인간들은 이 불가능성 자체를 어리석음으로 보고 있다고, 즉 하나님의 불가능성이 인간의 지혜로서는 어리석음으로 보이지만, 하지만 이 하나님의 불가능성 속에 뭐가 들어 있습니까?
그것은 바로 충돌했던 그 십자가의 능력인데, 그것이 이 불가능성을 앞장세워서 쳐들어올 때, 인간이 이 어리석은 것을 믿게 되면, 그래서 불가능성이 그 안에서 폭발해버리면, 그 사람은 하나님 입장에서 구원을 받게 된다는 말입니다. 제가 말은 복잡하게 했지만, 사실은 아주 간단하다는 겁니다.
(고전 1:18, 개역)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 그런데, 왜 다른 인간이?
그런데 여기서 문제가 뭐냐 하면, 'A' 라는 사람이 어리석었다. B라는 사람도 어리석었다. 그런데 'C' 라는 사람은 십자가만이 하나님의 지혜인 줄 알아챘다고 하면, 그런데 여기서 문제는 이 'A, B, C'가 공히 모두 다 아담에 속한 사람들인데, 그런데 'A'와 'B'와는 달리 'C'가 다른 생각을 한다는 자체가 말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모두가 다 똑같은 아담의 속성을 입었기 때문에, 그래서 'A'와 'B'와 'C'가 모두가 다 동일한 생각을 해야 하는데, 물론 'A'가 복음을 거부하고 'B'가 거부하는 것은 당연하지만, 그러면 'C'도 거부해야만 당연하지 않느냐는 겁니다. 그런데 'C'가 거부하지 않고 영접했다고 하면, 도대체 그것이 어떻게 된 일이냐는 말입니다.
그것은 바로 이 'C'의 본래의 능력과는 관계없이 고린도전서 2장에 보니까, 'C' 라는 인간 속에 뭐가 들어가느냐 하면, 십자가에 근거한 성령님이 하나님의 깊은 지혜를 이 'C'에게만 특별히 주게 되면, 이 'C'는 그야말로 눈을 떠서 "야, 십자가가 하나님의 구원의 지혜다" 라는 것을 비로소 아는 사람이 된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 다음에는 어떻게 됩니까? 이 'C'는 'A'와 'B'로부터 격리가 되면서, 뭔가 핍박을 받고 수난을 당하는, 즉 같은 인간으로서 "내가 모르는데, 네가 왜 아느냐? 참으로 건방지다" 라고 하는 평가와 함께 자연적으로 서로 떨어져버린다는 말입니다.
(고전 2:6) 그러나 우리가 온전한 자들 중에서 지혜를 말하노니 이는 이 세상의 지혜가 아니요 또 이 세상의 없어질 관원의 지혜도 아니요
(고전 2:7) 오직 비밀한 가운데 있는 하나님의 지혜를 말하는 것이니 곧 감취었던 것인데 하나님이 우리의 영광을 위하사 만세 전에 미리 정하신 것이라
◈ 암, 고소를 해야지 !!
그렇다고 하면 이 'A'와 'B'는 뭘 고소하겠습니까? 그것은 아까 바리새인들이 고소한 그것, 즉 인간이 불가능성이 아니라 인간이 할 수 있다고 하는, 그렇게 최선을 다하는 것을 밑천으로서 해서 "우리가 선을 많이 행하면 좀 봐주소. 제발 좀 넣어주소" 라는 식으로, 그냥 그렇게 밀어붙인다는 말입니다. 즉 "성경은 성경이고, 하여튼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합니다" 라고 하면서, 대충해서 밀어붙이기 식으로 나아가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반면에 이쪽 'C' 라는 사람은, 성령을 받았기 때문에 뭐라고 하겠습니까? "우리는 못 들어가는 것을, 예수님이 대신해서 모든 장벽을 해소해서, 오직 예수님의 공로로만 우리가 들어갑니다" 라고 하는데, 그렇게 십자가가 그 안에서 다시 한번 재현이 된다는 말입니다.
◈ 예수님의 정신인가? 인간의 자기 가능성 확대인가?
이렇게 되면 어떻게 됩니까? 칠판을 지우고 다시 써보겠는데, 앞에 말한 것이 바로 사도바울이 전한 복음인데, 그렇다면 '구원, 그 이후' 라고 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하나님의 입장 같으면, 방금 설명한 이 '구원, 그 이후' 라는 것이, 우리 인간 속에 예수님의 정신과 뜻을 심는 작업, 그것이 곧 '구원, 그 이후'가 되겠지만, 하지만 인간들의 입장에서 '구원, 그 이후' 라는 것은, 그것은 곧 자기 가능성의 확대가 된다는 말입니다.
◈ 믿음 + 거룩한 생활 = 구원 ??
그러므로 이렇게 예수님을 믿는 것이 내 힘으로 믿었다면, 즉 믿는 것이 나의 자체적 선악적인 요소로서 믿었다면, 그렇다면 앞으로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의로움도 나의 선악적인 요소로서 가능하다는 말입니다. 즉 내가 말씀과 권면과 명령들을 순종함으로서, "믿음 +거룩한 생활 = 구원" 이라는 것에 이른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믿음은 한 순간에 갔지만, 거룩한 생활은 아직 미완료로 남아있기 때문에, '구원, 그 이후'에 구원받은 사람은 하나님 말씀대로, 사도바울의 권면대로 거룩에 합당한 빛과 소금의 역할을, 즉 빛의 자녀의 생활을 할 때, 그것이 결합되고 추가될 때, 비로소 구원은 이뤄진다는 입장을 고수하도록 되어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쪽 하나님의 입장은, 하나님께서 불가능성으로 왔기 때문에, 그 인간 속에 하나님의 불가능성이 계속 스며들게 되면, 하나님이 자체적인 말씀성취가 여기에서 폭발이 일어나고, 왜 우리 인간은 말씀을 지킬 수 없는가가 드러나면서, 그렇게 해서 하나님의 은혜의 능력으로 구원이 된다는 겁니다. 바로 그럴 때, 이러한 사람은 예수님의 소유로 넘어가버리고, 자기 자신도 예수님의 몸의 지체가 되어버린다는 것입니다.
◈ 계속해서 행동의 주체가 되려는 인간 !!
그러나 인간들의 입장에서는 무엇입니까? '나' 라는 주체가 여기에 있고, 하나님은 그만 대상이 되기 때문에, 물론 하나님께서 십자가를 지셨다고 하면 내가 믿는데, 하지만 그렇게 믿더라도 믿음과 거룩한 생활이 서로 결합이 안 되니, 계속해서 하나님은 하나의 대상이 되고, 나는 이렇게 행동의 주체가 된다는 겁니다.
그렇게 내가 행동의 주체가 되어서 하나님을 믿었으니, 그 믿음 능력은 내 소유가 되고, 그 다음에는 선한 일도 하나님의 도움으로 하게 되면, 나의 소유로서의 선한 일로서 계속해서 누적이 되고, 축적이 된다는 것입니다. 나의 소유로 말입니다.
◈ 하나님의 형상을 본 받는 모델은 누구인가?
이것이 어디까지 축적이 되는고 하니, 성경에 보면 "하나님의 형상을 본 받아라" 라고, 즉 예수님의 형상을 본받는 데까지 올라가게 된다는 겁니다. 그러면 그 예수님 형상을 본받은 모델이 누구입니까? 테레사 수녀? 한경직 목사? 김수환 추기경? 누구를 모델로 삼을 것이냐는 말입니다. 하지만 한경직 목사라는 모델이 있어도 소용이 없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환경이 그렇게 동일한 시간과 공간적 환경, 가정환경, 교회환경이 다 맞춰줘야만, 그래야 그 모델이 의미가 있다는 말입니다.
◈ 결국, 내가 나의 모델 !!
그렇다면 "목사님, 성경에서 모델을 찾으면 되지 않습니까?" 라고 할지 모르겠는데, 하지만 "다윗을 본받자. 아브라함을 본받자" 라고 말입니다. 하지만 다윗이나 아브라함 등은, 각자가 다 자기가 나온 상황과 그 터전이 다르다는 것입니다.
스데반 집사님의 모델은 뭡니까? 자기의 죽음이었는데, 하지만 아브모델은 무엇입니까? 자기 아들을 바치는 겁니다. 그러면 그것을 따라서 하려고 하면 엄청나게 바쁘겠지요? 아들을 바쳐야 되지, 또 돌에 맞아 죽어야 되지, 그렇게 억수로(?) 바쁘다는 말입니다. 또한 사도바울을 40에서 하나를 뺀 매를 세 번이나 맞았다고 하는데, 우리가 요즘 같은 이 세상에서 어디에 가서 그런 귀한(?) 매를 맞을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결국 그런 인물들을 모델을 삼을 수 없기 때문에, 자기의 선악적의 요소에서 모델을 삼는 것이 뭐냐 하면, 즉 최선을 다하는 "내가 곧 나의 모델이다" 라는 겁니다. 성의껏 정성을 다하고 모든 최선을 다하는, 그러한 나 자신이 바로 나의 모델이 된다는 말입니다.
◈ 이번 주제 - 성경은 '구원, 그 이후' 라는 것을 허락하는가?
그렇다면 이런 두 개의 '구원 이후'의 의식에서, 과연 "성경자체가 '구원, 그 이후' 라는 것을 우리가 생각할 필요가 있게 해주는가?" 라는 문제를 성경본문을 보면서 살펴보고자 한다는 겁니다. 오늘의 주제 본문인데, 구약성경 1286페이지의 오바댜 1장 17절과 18절을 살펴보겠습니다.
(옵 1:17) 오직 시온 산에서 피할 자가 있으리니 그 산이 거룩할 것이요 야곱 족속은 자기 기업을 누릴 것이며
(옵 1:18) 야곱 족속은 불이 될 것이요 요셉 족속은 불꽃이 될 것이며 에서 족속은 초개가 될 것이라 그들이 그의 위에 붙어서 그를 사를 것인즉 에서 족속에 남은 자가 없으리니 이는 여호와께서 말씀하셨음이니라
그리고 나중에 마치고 기도를 하겠으니, 강의를 시작하기 전에 기도를 안 했다고 저에게 시비를 걸지 마시기 바랍니다. 옛날에 마산 근처에서(진주?) 강의를 하는데, 왜 강의를 시작하기 전에 기도를 하지 하느냐고, 사상이 이상한 사람이라 하는 소리를 들었는데 말입니다. 그런데 강의가 끝나고 기도하면 안 됩니까?(ㅋㅋ)
◈ 야곱과 에서의 경우에 !!
아무튼 이 본문을 보면, 두 개의 주체밖에는 없는데, 하나는 '야곱' 족속이고, 또 다른 하나는 '에서' 족속인데, 이 두 족속에 따라서 이 세상은 종말이 온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인간들이 흔히들 말하는 '구원, 그 이후'는 무엇입니까? 어디에 속하는 문제입니까? 야곱이 아니라, 바로 여기 '에서' 족속에 속한다는 말입니다.
지금 오바댜 선지자의 예언에 의하면, 전 인류에게 멸망이 오는데, 그 이유가 무엇인고 하면, 야곱과 에서에 관계에서 멸망이 온다는 겁입니다. 그래서 "에서 족속에 남은 자가 없으리니"라고 한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계속해서 충돌인데, 그런데 그 오는 종말이 뭐였습니까? 신약 자체가 종말이니까, 곧 '십자가' 라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야곱과 에서의 갈등이 십자가로 이어지고, 그것이 이 세상이 끝나는 질적 요소로서 규정이 되는데, 여기 오바댜서 1장에 17절과 18절에서, 결국은 "야곱은 복을 받고, 에서는 저주를 받는다" 라는 것입니다. 사실 이 둘은 알다시피 서로가 형제간인데, 어머니 이름이 리브가이고, 쌍둥이 형제간인데, 그런데 여기서 에서가 저주를 받는 이유가 뭐냐 하면, 오바댜서에 보면 에서가 야곱을 괴롭혔다고 한다는 말입니다.
◈ 아브라함에게 축복하는 자는 복을 !!
창세기 12장 1절에서 3절에 보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부르시고 하시는 말이, "아브라함에게 축복하는 자에게는 복을 받고, 아브라함에게 저주를 받는 자에게는 저주를 받는다" 라고, 그렇게 저주와 복을 가름하는 기준을 곧 '하나님 입장' 이라고 하는, 그렇게 계속 이 땅에서 복과 저주를 가름하는 기준을 주셨다는 겁니다. 그것이 곧 하나님 입장이라는 말입니다.
(창 12:1)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
(창 12:2)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지라
(창 12:3)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니라 하신지라
그러니 에서가 야곱을 저주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무엇인고 하니, 야곱은 하나님의 기준을 유지하고 있는 반면에, 이 에서는 야곱이 하나님의 복의 기준이라는 그 자체에 대해서 반감을 가지고 있다는 말입니다. 즉 "나는 그것을 인정 하지 못하겠다" 라는 겁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왜 야곱이 복의 기준이냐는 말입니다.
예를 들어서, 다윗과 사울의 관계에 있어서, 우리가 다윗이 아닌 사울의 입장이 되어서 한번 생각을 해봅시다. 왜 사울이 다윗을 그렇게 미워했습니까? 그것은 바로, 하나님이 자기중심이 아니고 일방적으로 다윗중심이 되었다고 하는, 바로 그런 점이 자기 본성상 너무너무 싫다는 것입니다. 무슨 말인지 이해가 되지요?
◈ 하나님, 제가 뭘 잘못했습니까?
여기에 이 목사님도 계시는데, 예를 들어서 하나님께서는 "나는 이근호 너하고는 상대를 하지 않고, 이종호 목사하고만 상대를 하겠다" 라고 하면, 듣는 제가 몹시 기분이 나쁘다는 겁니다. 그러면 저는 "하나님, 제가 뭘 잘못했습니까?" 라고 당연히 따진다는 것입니다. 물론 상대하겠다는 것이 꼭 좋은 것인지는 모르겠습니다만(ㅋㅋ).
* 하나님 : 이종호 목사하고만 상대를 하겠다.
* 이근호 : 제가 뭘 잘못했습니까?
* 하나님 : 잘못 없다.
* 이근호 : 제가 뭐가 부족합니까?
* 하나님 : 부족한 것 없다.
* 이근호 : 그럼 제가 나쁜 짓 했습니까?
* 하나님 : 그런 것 없다.
* 이근호 : 그런데 왜 이종호 목사님을 중심입니까?
* 하나님 : 그건 내 마음이다.
* 이근호 : 참 너무 하신 것 아닙니까?
* 하나님 : 그래도 그건 내 마음이다.
* 하나님 : ? ? ?
그러니 가인의 입장에서 한번 생각을 해보세요. "하나님, 왜 저의 제사는 안 받습니까? 안 받으려면 전부 다를 안 받든지, 받으려면 다 받든지, 왜 저의 제사는 안 받고, 동생의 제사는 받습니까?" 라고 하면, 하나님은 "내 마음대로다" 라고 한다는 겁니다. 그래서 가인이 "그러면 저도 제 마음대로 죽입니다" 라고 해서, 그래서 동생을 죽였다는 겁니다. 이번에 SBS에서 '가인과 아벨' 이란 드라마가 시작되었는데, 거기서도 보면 죽인다는 말입니다.(ㅋㅋ)
◈ 내 구원은 내가 챙긴다 !!
그러니 인간이 근본적으로 자기 입장을 고수하는 한, 전혀 하나님의 입장에 접근할 방도가 없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자기 입장을 철회할 용의가 전혀 없기 때문에, 즉 "내 구원은 내가 챙긴다" 라는 것입니다. 남이 책임져준다는 것은 있을 수가 없다는 말입니다.
다시 말해서, "나는 양심이 고와서 그것까지는 안 바랍니다. 하여튼 나의 구원은 내가 챙기겠습니다" 라고, 그렇게 나서는 것이 인간이 본성이란 말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너하고 상대를 안 해" 라는 것이 그 얼마나 기분 나쁜 이야기입니까? 그런데 성도는 그런 기분 나쁨을 극복할 수 있어야 되는데, 오히려 그걸 즐거워하고 기뻐해야 된다는 말입니다.
만약에 이종호 목사님이 복과 저주의 기준이라고 하면, '얼씨구나' 라고 하면서 달려가서 빌면 되는데, 즉 "목사님, 살려주세요. 불쌍히 여겨 주이소" 라고 하면 된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얼마나 편합니까? 그런데 그게 아니라 "지가 뭔데?" 라고 하면 어떻게 됩니까?
누가 뭐라고 하든지 간에 "제발 살려 주이소. 불쌍히 여겨 주이소" 라고 하면 아무 문제도 없는 것을 가지고, "아이코, 지 꼬라지나 내 꼬라지나 뭐가 다른데?" 라고 하면서 튕긴다는 겁니다. 항상 그렇게 튕기는 것이 문제가 되는데, 소위 신앙생활을 한다고 하면서도 탁탁 튕긴다는 말입니다.
* 저근호 : 하나님, 왜 제 사업이 부도나게 합니까?
* 하나님 : 나, 너 중심으로 일 안 하거든.
* 저근호 : 그런데 저 사람은 왜 사업이 잘 되게 합니까?
* 하나님 : 나, 저놈 중심으로 일하거든.
* 저근호 : 그러면 저는 뭡니까?
* 하나님 : 너는 저근호.
◈ 나도 선과 악에 대해서 안다 ??
이와 같이, 갑자기 우리는 튕기는데, "내가 저 사람보다 못난 게 뭐가 있습니까?" 라고 하면서, 여러 가지 조건을 거는데, 아무튼 결론은 "왜 내 중심이 아닙니까?" 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사람이 선악과 따먹고 난 뒤에 후유증이 남았는데, 그게 뭐냐 하면, "나도 안다" 라는 겁니다. 즉 "나는 선에 대해서 알고, 악에 대해서 안다" 라는 말입니다.
그렇게 아니까 다음과 같이, 즉 "하나님, 저도 조금은 아니까, 저에게 막무가내로 쳐들어오지 마시고, 저와 의논해서 구원을 합시다. 저도 얼마든지 착해질 수가 있는데, 선도 알고 악도 아니까, 악한 건 버리고 선한 것은 더욱 증진시키면 되지 않습니까? 저도 그럴 용의가 있고, 양심도 준비되어 있으니, 저하고 의논해서 하나님이 지시만 하시면 제가 구원을 받겠습니다" 라는 조로 나온다는 말입니다.
◈ 하나님은 따로 기준을 제시하는데 !!
하지만 하나님께서 하시는 말씀이 뭡니까? "바로 그것 때문에 생명나무를 못 따먹게 했다. 바로 그 마음 때문에 말이다" 라고 하시는데, 그러면 우리 인간들은 "하나님, 어쩌란 말입니까?" 라고 하면, 하나님은 "내가 정해준 사람 따로 있어. 그분을 축복하면 복 받고 그분을 저주하면 저주를 받는다" 라고 한다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이 따로 기준을 제시해서 삽입시켜 놓은 것이 있다는 말입니다.
아무튼 이렇게 에서가 야곱을 미워해서 결국은 야곱은 일방적으로 당하는데, "너는 당해라. 모든 뒤처리는 내가 심판할게" 라고, 이것이 바로 오바댜 예언서의 내용이라는 겁니다. 그러니 야곱은 당하는 입장인데, 사실은 그렇게 당하는 야곱도 성질이 나는데, 왜냐하면 자기가 복의 근원인데, 지옥에게 갈 인간에게 일방적으로 당하니까 말입니다. 그러니 자기 손으로, 자기 힘으로 그것들을 손봐주고 싶은 생각이 굴뚝같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렇게 되면, 야곱 본인이 잘나서 복의 근원된 줄 알고 착각을 하게 된다는 겁니다. 즉 "나는 당해도 마땅합니다" 라고 하면 되는데, "저 날도 안 되는 인간에게 내가 당하다니 못 참겠다" 라고 나오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야곱은 그냥 당하기만 하고, 책임은 하나님이 지시고 말입니다. 즉 에서는 공격하고 야곱은 당하고, 그렇게 그렇게 해서 이 세상은 끝이 난다는 겁니다.
그러니 이러한 하나님의 입장에서 '구원, 그 이후' 라는 것은, 바로 이러한 상황, 즉 이것이 곧 하나님의 약속인데, "에서는 저주를 받고, 야곱은 복을 받는다" 라는 것이 말입니다. 이 부분이 중요하니까 제가 크게 써보겠는데, 혹시 빨간펜은 없습니까? (그러면 김을수 집사님은?ㅋㅋ)
◈ 하나님의 '증식(增殖)' !!
이제부터 오늘 강의에서 제일 중요한 부분에 들어가도록 하겠습니다. 이렇게 "야곱은 복 받고, 에서는 저주를 받는다" 라는 것을 '증식(增殖)' 이라고 합니다. 혹시 '증식' 이라고 들어보셨나요? 이것이 곧 '구원, 그 이후'에 하나님께서 하시는 '증식' 이라는 겁니다. 즉 십자가에 있었던 그 사건의 증식이라는 말입니다.
베드로전서 2장 21절에 보면,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 오게 하려 하셨느니라" 라고 하는데, 이것이 바로 십자가 사건의 증식, 즉 십자가 사건을 확대시켜 나간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야곱아 당해라. 계속해서 당해라. 죽기까지 당해라" 라는 말입니다.
(벧전 2:21)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입었으니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오게 하려 하셨느니라
요한계시록 12장 11절에 보면, "또 여러 형제가 어린 양의 피와 자기의 증거하는 말을 인하여 저를 이기었으니 그들은 죽기까지 자기 생명을 아끼지 아니하였도다" 라고 하는데, 왜 그렇습니까? 우리는 왜 이렇게 당해야만 합니까? 주님께서 증식하고자 하는 것은, 우리의 증식이 아니고, 주님의 십자가 복음의 증식이기 때문에, 우리는 늘 당하는 요소가 있어야 한다는 겁니다.
(계 12:11) 또 여러 형제가 어린 양의 피와 자기의 증거하는 말을 인하여 저를 이기었으니 그들은 죽기까지 자기 생명을 아끼지 아니하였도다
◈ 노이만 - 자동자 이론 !!
그렇다면 이 증식을 어떻게 하는지, 그 방법을 하나님이 어떻게 하는지 이야기해보겠습니다. 1948년에 '존 폰 노이만(John von Neumann)' 이라는 유대인 학자가 '자동자(自動子) 이론' 이라는 논문을 제출했는데, 이것은 물질의 증식이 아니라 '논리의 증식'이 어떻게 가능한지를, 그 방법에 대해서 쓴 논문이라는 말입니다. 첫째 시간부터 어려운 것을 해서 좀 미안한데, 하지만 어려운 것을 먼저 하게 되면, 나중에 쉬운 게 되니 말입니다.
이 사람의 주장을 보면, 어려운 용어는 빼고 쉽게 설명을 하겠는데, 여기 하나의 'A' 라는 기계가 있는데 이 기계를 제품을 만드는 기계라는 겁니다. 이 기계에 만약 팔이 있다면, 이 팔에서 'N' 이라는 제품을 만들어낼 때, 이 사람은 자체적인 'I' 라는 기술을 가지고 'N' 이란 제품을 만들어내는 겁니다. 우리는 이것을 생산이라 하는데, 즉 이 기계는 생산을 하고, 이렇게 만들어진 것은 생산물이 되는데, 이렇게 되면 생산할 것은 계속 있지만 생산한 'N' 속에는 뭐가 들어있지 않습니까? 처음에 만들었던 'I' 라는 기술이 포함이 되어있는 것은 아니라는 말입니다.
예를 들어서, 안경을 내가 만든다면, 그 만들어진 안경을 보고 "안경아, 니가 안경을 만들어봐" 라고 하면, 안경을 못 만든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만들어진 것은, 만들 때의 그 창조자의 창조기술을 내포하지 않고 있다는 겁니다. 그러면 어떻게 됩니까? 증식이 안 되는 겁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증식하고 있잖아요. 그러니 이런 논리, 즉 "하나님의 창조주이고 우리는 피조물이다" 라는, 그런 현재 교회에서 알고 있는 논리로는 하나님 뜻을 해명할 수 없다는 말입니다.
◈ 과연 증식이 되는가?
다시 말해서, "하나님은 창조주고 나는 피조물이다" 라고 하면, 하나님은 계속해서 증식해야 되는데, 그런데 "나는 피조물이다" 라고, 그렇게 해봐야 증식이 안 된다는 겁니다. 피조물 속에 하나님의 증식원칙이 들어가야 되는데, 그런데 뭐만 우기느냐 하면, "나는 피조물입니다" 라고, 다른 말로 하면, "나는 부족합니다" 라고 말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인간이 처음부터 부족한 걸 아는데, 부족했으니까 쫓겨났고 말입니다. 그런데 "나는 부족합니다. 하나님이 알아서 다 해주이소" 라고 하면서, 그렇게 아예 맡기고 논다는 겁니다. 즉 "헌금이고 봉사고 없다. 나는 부족한데 뭐" 라고 한다는 말입니다.
◈ 이근호 목사는, 뭐뭐 카더라 ??
제가 복음을 전하면서도 만날 얻어먹는 욕이 그건데, "이근호 목사는 헌금도 안 해도 된다고 하더라. 봉사를 안 해도 된다더라. 나쁜 짓을 해도 구원을 받는다고 하더라" 라고, 그렇게 매일같이 '카더라' 통신인데, 사실은 자기가 하기 싫어서 안 하면서 그렇게 핑계를 댄다는 겁니다.
그러니 하나님께서 하시는, 즉 예수 그리스도의 증식에 대해서는 이야기를 하지 않고, 자기 입장에서 자기가 편한 것만을, 그냥 놀면서 천당에 가는 것만 고르고 고르는데, 하지만 놀면서 천당으로 가면 선종을 하지 못한다는 겁니다(ㅋㅋ). 가난한 자와 소외된 자를 위해서 친구가 되어주어야 하는데 말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 궁금하면 동영상을 !!
그래서 노이만은 어떻게 했느냐 하면, 여기서 같은 이것을 '보편자' 라고 하는데, 이런 어려운 말은 빼버리고, 여기서 'A'가 자기와 똑같은 기능을 가지고 있는 'B'를 하나 만들어 넣는데, 물론 생산은 아니고 복사를 한다는 겁니다. 그 복사된 'B' 속에 'A'가 갖고 있던 원칙, 즉 기술을 하나 더 달아서 이것 전체를 'C' 라는, 즉 '자동자' 라는 것을 만들어서 결합을 시켜놓고, 그렇게 해서 기계를 돌려버리면 생산되는 것이, 앞에서의 'A, B, C' 라는 것과 똑같이 생긴, 그렇게 뭉텅이로 되어있는 전체를 'D' 라고 하는데, 그렇게 똑같이 생긴 것이 하나 튀어나온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이게 튀어나올 때 두 가지가 있어야 되는데, 먼저복제가 되어야 되고, 둘째로 번역이 되어야 한다는 겁니다. 즉 기술자체도 복제된 상태에서 번역된 것이 포함되어 있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이런 논리적인 이론을 노이만이 내세웠다는 것입니다.
◈ 잠시 이근호 생물 선생님을 모시고 !!
그런데 1953년에 '크릭(Crick)' 이란 사람이 'DNA'의 구조를 밝혔는데, 그 'DNA' 라는 것이 무엇인고 하니, 인간의 세포 안에는 핵이 있고, 그 핵 속에 염색체가 있는데, 바로 그 염색체가 마치 코일처럼 서로 말린 것으로서, 그 DNA는 이중으로 마치 지퍼처럼 꼬여있다는 겁니다.
이 DNA는 '당+염기+인산'의 구조로서 되어있는데, 이 DNA가 놀랍게도 그 다음의 DNA를 번식할 때 어떻게 하는고 하니, 먼저 복제를 하고, 그 다음에 전이를 하고, 셋째로 번역까지도 한다는 것입니다. 먼저 복제는 DNA가 스스로 하고, 그리고 전이는 m-RNA에, 그리고 번역을 할 때는 t-RNA에 한다는 말입니다.
그렇게 해서 부모와 같은 DNA를 자식이 그대로 복제를 받음으로 말미암아서, 그 자식이 부모를 닮게 되고, 또 결혼해서 그런 자기를 닮은 자식을 낳을 수가 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이게 증식이 된다는 겁니다. 물론 성경하고 관계가 없는데, 아무튼 이런 것이 있다는 말입니다. 생소하고(?) 좀 어렵지요? 그런데 이런 것은 고등학교 생물책에 다 나온다는 것입니다.
아무튼 여기서 제가 하고 싶은 말은, 이 '증식' 이라는 것이 그냥 단순히 "나는 피조물이다" 라고 하면 안 되고, 나를 만들었던 그 원리도 만들어진 그 안에 함께 담겨있어야, 그것이 바로 제대로 된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피조물이라고 할 수 있다는 겁니다. 왜 그렇게 되어야 합니까? 그래야 그것을 통해서 증식할 수 있기 때문에 말입니다.
◈ 먼저, 인간의 입장에서 !!
여기 이번 특강교재의 처음 제목이 '인간 의식의 한계' 라는 것인데, 그것이 1페이지의 '무의식의 한계' 라는 것부터 해서 나와있는데, 그것을 하기 전에 먼저 그 전제로 4페이지를 할 것인데, 그런데 이것은 현대수학에 관련된 이야기이기 때문에, 그것이 너무 복잡해서 제가 자세히는 하지 않을 겁니다. 하지만 현대수학이 왜 성경을 이야기하는데 들어가야 하는지, 그것은 설명을 해야 된다는 말입니다.
이제 인간 입장에서 먼저 살펴보겠는데, 그림으로 하겠습니다. 너무 어렵게 하면 안 되니 말입니다. 이렇게 '나' 라는 것이 있는데, 마지막에 누군가 남을 때 누가 남아야 됩니까? 당연히 '나'가 남아야 되는데, 그러니 도중에 여기서 누가 빠지면 안 됩니까? '나'가 빠진 다른 '나'가 되면, 우리는 그것을 축복이라 보질 않는다는 겁니다.
◈ 축복은, 일종의 팽창력 !!
그런데 창세기 1장에 보면 '축복' 이란 말이 뭐냐 하면, 팽창력을 말하는데, 창세기 1장에서 하나님이 매일같이 무엇을 만드시고 복 주시면 그것이 퍼진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인간은 이 '나' 라는 질적인 요소가 계속 확대될 때 그것이 축복이지, 그런데 그 '나'가 그만 빠지고 다른 사람이 들어와서 '나'를 장악해서, "야, 너 때문에 내가 컸다" 라고 하면, 우리는 그것을 축복이라고 보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오히려 기분 나쁘게 여긴다는 겁니다.
예를 들어서, 내가 우리 집 가게에 감자탕 장사를 하고 있는데 장사가 안 되는 겁니다. 그래서 남에게 세를 주었는데, 그런데 세 들어온 사람은 열 배가 남았다고 하면, 그때 집주인을 보고 "당신은 축복을 받았네요. 장사가 잘 된다면서요" 라고 하면, 그 사람은 뭐라고 하겠습니까? "지금 이것이 내 가게입니까? 에이, 기분 나빠. 내가 할 때는 안 되다가, 왜 남이 할 때 잘 되는 거야" 라고 한다는 겁니다.
그러므로 이렇게 남이 받은 축복을 축복으로 간주하지 않는 독선적인 '자아', 그것이 바로 선악과를 따먹은 후유증이 아닙니까? 예수님이 잘 되는 것도, 그것도 눈꼴이 시리다는 겁니다. 그러니 예수님이 잘 되도 소용이 없는데, 내가 잘 되어야 한다는 겁니다. 내가 잘 되어야 기분이 좋지, 나는 못 되는데 예수님이 잘 되서 하늘나라에 가 계신다고 하면, 기분이 별로 안 좋다는 말입니다.
◈ 사랑은, 넘겨주기 !!
하지만 고린도전서 16장 22절에서 뭐라고 합니까? "만일 누구든지 나를 사랑하지 않는 자는 저주를 받는다" 라고 하는데, 여기서 말하는 '나'가 누굽니까? 바로 주님인데, 그리고 이 사랑의 개념이 고린도전서 13장에는 뭐라고 되어있습니까? 사랑은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않아야만, 그것이 사랑이라고 한다는 것입니다.
(고전 16:22) 만일 누구든지 주를 사랑하지 아니하거든 저주를 받을지어다 주께서 임하시느니라
그러니 사랑이란 한 마디로 말해서, '넘겨주기' 라는 것인데, 즉 자기의 모든 것을 상대방에 몽땅 넘겨주기라는 겁니다. 여러분, 사랑을 할 때 기분이 어때요? "현숙씨, 당신을 사랑해" 라고 하면, 그 말이 무슨 뜻입니까? 다른 말로 번역하면 "내 것을 몽땅 다 가지세요" 라는 의미인데, 여러분은 저와 같은 그런 불같은 사랑을 아직도 못해 봤어요?(ㅋㅋ)
(고전 13:4)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투기하는 자가 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고전 13:5) 무례히 행치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지 아니하며
아무튼 사랑이 뭡니까? "내 것을 몽땅 다 가져가라" 라는 말인데, 물론 연애할 때만 말입니다. 결혼을 하고 난 뒤에 입을 싹 씻기는 하지만, 하여튼 사랑을 할 땐 몽땅 다 준다는 겁니다. 즉 "몸도 마음도 다 가져가라. 당신이 가져가면 내가 마음이 시원하겠다" 라는, 그것이 사랑이라는 말입니다. 그렇게 사랑은 넘겨주는, 즉 상대방에게 자기의 모든 걸 양보하는 것입니다.
◈ 데카르트 - 인간은 하나의 '점(·)' !!
그런데 인간입장은 구원받을 때, 그 구원의 주인공과 핵심은 알맹이가 내가 여전히 유지되어야, 그것을 구원이라고 간주한다는 겁니다. 그러면 그 원인이 어디 있습니까? 그 원인을 4가지로 찾을 수가 있다는 겁니다. 철학에서 데카르트가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라고 했는데, 이것이 무슨 의미인고 하면, 이걸 수학적으로 풀면 다음과 같다는 말입니다.
인간이라 하는 것은 '나' 라는 것인데, 그럼 여기서 10미터에서 보면 뭐로 보입니까? 사람으로 보이는데, 그럼 100미터에서 봅시다. 뭐로 움직입니까? 사람이 맞는데, 그럼 2킬로미터에서 봅시다. 사람이 뭐로 보입니까? '점(·)' 이란 겁니다. 그래서 데카르트라는 수학자는 사람을 비롯한 모든 사물을 x와 y의 좌표, 즉 하나의 점으로 보았다는 겁니다. 그런데 이 'p' 라는 점은 x가 4이고 y가 5라고 하면 '(4.5)' 라고 하는 하나의 좌표로서, 그렇게 모든 것을 공간을 점유하고 있는 하나의 점으로 보았다는 겁니다.
◈ 인간은, 침투 불가능성 !!
그런데 이 점(·)은 하나의 '침투 불가능성' 인데, 그래서 그때부터 인간은 무엇만 생각하느냐? "내가 앞으로 어떻게 될까? 10년 후에 내가 돈 얼마나 벌까? 우리교회는 10년 후에 교인이 몇 명일까? 아예 문을 닫을까? 다음 주는 헌금이 얼마나 나올까? 내 새끼가 이번에 행정고시를 치는데 합격이 될까?" 라고 말입니다.
인간은 그렇게 항상 자기중심으로 생각하기에, 그래서 '침투 불가능성' 이라는 말입니다. 이런 것은 꼭 외워 놓으세요. 그래서 "니가 내 마음을 알아. 알기는 개뿔로 알아. 하나님은 내 마음을 압니까?" 라고 항변을 한다는 겁니다.
그렇게 항상 인간은 자기를 하나의 침투 불가능한 점으로만 존재한다고 여기기에, 그래서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라고 했을 때는, 그것은 바로 "내가 '나' 라고 생각할 때만, 내가 '나' 라는 것을 알지, 남이 이야기해주는 그건 '나'가 아니다" 라는 겁니다. 즉 내가 '나' 라고 생각할 때만 내가 된다는 겁니다.
심지어 교회에 올 때도 마찬가지고, 기도할 때도 마찬가지고 말입니다. 사실 자기 생각을 종교적으로 포장한 것이 기도인데, 즉 평소에 자기가 생각했던 것 뒤에다가 예수님의 이름를 붙이면 기도가 된다는 겁니다. 그런 의미에서 쉬지 말고 기도한다는 것은 쉬운데, 그냥 아무 때나 빌면서 뒤에 예수님의 이름을 붙이면 되니 말입니다.
◈ 데카르트 - 모든 것은 운동한다 !!
아무튼 인간을 수학적으로 점으로 보는데, 그런데 이런 점 속에는 나의 노동, 나의 수고, 나의 희생, 나의 봉사, 나의 성화 등등, 그러니 이런 것들은 남한테 빼앗기면 안 된다는 겁니다. 즉 내가 한 착한 일을 남이 가져가면 용납이 안 된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언제나 나의 착한 것, 내가 훌륭한 것, 나의 자질이 좋아지는 것, 그러한 모든 것이 하나의 중력으로서 '나' 라고 하는 이 '점' 안에 응축이 되어야 한다는 겁니다.
그래서 데카르트는 주장하기를, "인간을 비롯한 모든 사물은 움직이는 운동으로, 즉 운동 방정식으로 설명이 될 수 있다" 라고 했는데, 그래서 인간에 있어서 '힘' 이라 하는 것은 '운동 힘' 이라는 겁니다. 'm v', 즉 '질량 곱하기 속도' 라는 것이 운동학으로 정립되었다는 겁니다. 즉 "모든 것은 운동한다" 라는 것입니다.
◈ 라이프니치 - '힘' !!
그런데 '라이프니치' 라는 사람이 가만히 보니, 이게 틀렸다는 겁니다. 왜 그런고 하니, 이렇게 운동을 하게 되면, 그렇게 운동을 하면서 서로 피해서 가버리면 뭐가 안 됩니까? 아까 이야기한 '충돌' 이란 것이 성립이 안 된다는 겁니다. 그런데 이 세상을 보면 서로 미워서 충돌하면서 싸우는 것인데, 그러니까 운동학으로는 이것이 설명이 안 되고, 이 세상을 설명할 때 충돌이 되려면, 그것이 곧 '동력학' 이라는 겁니다.
이것을 다른 말로 표현하면, 즉 "누가 더 힘이 세냐?" 라는 것으로, 그것을 한 글자로 '힘' 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렇게 힘으로 설명을 해야되는 것이지, 이것을 "내가 어떻게 움직인다. 나는 가고 싶으면 간다" 라고 하면 안 된다는 겁니다. 만약에 자기는 가고 싶더라도, 그만 힘에 의해서 "너, 꼼짝 마라" 라고 하면, 전혀 꼼짝도 못한다는 말입니다.
예를 들어서, 어린아이가 엄마를 따라서 시장에 가서는 "엄마, 이것을 좀 사줘" 라고 했을 때, 엄마는 "안 돼. 사지 마" 라고 엄마한테 꾸중을 듣는다는 겁니다. 그러니 그것은 내가 운동하는 것이 아니고, 엄마라고 하는 힘에 의해서 움직인다는 겁니다. 그러니 이 힘이 우선적이지, 내가 하고 싶은 운동이 우선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 질량이 아닌, 힘이 우선 !!
그러면 여기서 이렇게 정리가 되어야 하는데, 운동에너지는 질량(m) 곱하기 속도(v)인데, 여기서 만약에 질량을 4배로 늘리고, 그 대신에 속도를 4배로 줄인다고 하면, 그러면 데카르트에 의하면 4배를 늘이고 또 4배를 줄였으니까 똑같이 되어야 되는데, 하지만 실제로는 안 그렇다는 말입니다. 갈릴레오 갈릴레이가 피사의 사탑에서 공을 가지고 이것을 실험했다고 하는데, 실제로 실험을 했는지 증거가 없어서 모르는데 말입니다. 이런 쪽에는 하도 구라가 많아서 말입니다.
아무튼 거기서 물건을 떨어뜨려서 'v= 2gh' 라고 하는 공식이 나왔다 겁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높이라고 하는 것은, 이런 것은 골치 아프니 하지 맙시다. 어쨌든 간에 이 공식에다 집어넣으니까, 그냥 해선 안 맞고 'v ' 라고 해야 맞다는 겁니다. 그런데 이 제곱을 계속 무한대로 늘여보니, 여기서 제가 하고 싶은 이야기는 바로 이것인데, 질량이 우선이 아니고 힘, 즉 "힘이 세상을 지배하는 우선이다" 라는, 그것이 관건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인간은 하나의 '점' 인데, 즉 성경에서 말하는 '에서' 라는 인간과 '야곱' 이라는 인간이 그렇다는 말입니다. 하지만 "어이, 인간들 똑바로 해" 라고 해서, 똑바로 해야 될 문제가 아니고, 에서를 에서답게 야곱을 야곱답게 하기 위해서, 각자 배후에 뭐가 있어야 되는고 하니, '힘'이 있어야 한다는 겁니다. 바로 이러한 힘에 의해서 움직일 뿐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에서는 하나의 점이고 야곱도 점에 불과한데, 사실은 야곱 배후에 있는 힘과 에서 배후에 있는 힘에 의해서 이 세상은 충돌이 일어난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 충돌이 무엇이냐 하면, 그것이 곧 십자가에까지 이어졌다는 말입니다.
◈ 십자가는, 점이 아닌 힘과 힘의 충돌 !!
이걸 더 사회학적 논리로 들어가면, '사회' 라고 하는 것은 인간성과 인간성의 관계가 아니고, 배후에 갖고 있는 힘과 힘의 그물망, 혹은 관계망에 의해서 된다는 겁니다. 즉 "너희 집안에 청와대에 아는 사람이 있어?" 라는 것처럼, 이처럼 항상 어떤 자기 배후에 있는 힘을 동원시켜서, 즉 "나는 이러한 힘에 의해서 지금 움직이고 있는 사람인데, 너는 어떤 힘에 의해서 움직이지?" 라는 식으로, 사람들은 자기보다도, 자기가 속해 있는 힘에 의해서 운명이 결정된다는 겁니다.
그래서 이 '십자가' 라는 것은 뭐냐 하면, 바로 예수님 배후에 있는 하나님 힘과, 그리고 바리새인들이 갖고 있는 인간의 힘이, 그야말로 힘과 힘의 서로 충돌에 의해서 생긴 사건이라는 겁니다. 그렇다면 그 힘이 어디에서 나옵니까? 창세기 3장 15절에 의해서, 즉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에 의한 충돌이 일어난다는 겁니다.
◈ 점은 빠져도 괜찮아 !!
그렇다면 여기서 뭐가 빠져야 됩니까? 일개의 점에 불과한, 점의 색깔, 점의 인품, 점의 훌륭함 등등, 이러한 것은 힘에 비하면 작은 변수, 'm'에 지나지 않는다는 겁니다. 진짜는 'v ' 인데, 즉 속도가 결정하지 내가 뭘 가지고 있느냐고 하는 것은, 그런 것은 아무 것도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세리와 창기는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데, 주의 십자가 힘이 있으면 세리와 창기라도 능히 하늘나라에 가는 겁니다. 즉 외부에 어떤 힘이 지배하느냐가 중요한 것이지, 내 가정환경이 어떻고, 어떤 교단에 속했고 하는 것은, 그런 것들은 전혀 중요하지 않다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과연 지금은 어떤 힘이 여러분을 움직이고 있습니까?
10분을 쉬면서 생각해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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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폰 노이만과 폰 노이만 모델
2008-02-01 디지털타임스 강진규 기자
현대 컴퓨터의 모델을 제시한 사람, 게임이론을 창시한 사람, 인공생명체의 가능성을 연구한 사람, 원자폭탄을 만드는데 참여한 사람... 이들이 한 사람이라면 믿으시겠습니까? 존 폰 노이만(John von Neumann) 바로 그 사람입니다. 1903년 헝가리에서 태어난 그는 19살에 부다페스트 대학에서 수학을 공부합니다. 그리고 베를린, 하이델베르크대학교 강사를 거쳐 1930년 27살의 나이에 미국 프린스턴대학교 객원교수가 됩니다.
그는 자신의 전공인 수학 연구를 통해 다양한 논문을 선보이는 것은 물론 물리학, 경제학, 생물학, 컴퓨터공학 분야에 관심을 갖고 연구합니다. 노이만은 1944년 모르겐슈테른과 `게임이론과 경제행동'을 저술하여 경제학의 게임이론을 창시합니다. 그의 게임이론은 경제뿐만 아니라 군사전략 등에 광범위하게 이용됩니다.
생물학의 수학적 해석에도 관심이 많았던 그는 세포자동자(cellular automata) 이론을 통해 인공생명체와 복제의 가능성을 연구함으로써 생물학, 인공지능, 로봇공학에 지대한 영향을 끼칩니다.
그가 현대 사회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부분 중 하나는 컴퓨터분야에서 폰 노이만 모델을 정립한 것입니다. 이 모델은 현대 컴퓨터의 근간이 되고 있습니다. 그는 논문 `전자계산기의 이론 설계 서론'에서 CPU, 메모리, 프로그램 구조를 갖는 프로그램 내장 방식 컴퓨터의 아이디어를 처음 제시합니다. 프린스턴대학에서 폰 노이만은 미국에 유학 중이던 앨런 튜링을 만나 친분을 쌓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튜링의 아이디어가 폰 노이만의 연구에 영향을 미치지 않았을까 추측하고 있습니다. 폰 노이만은 1949년 케임브리지대학교의 의뢰로 자신이 주창한 프로그램 내장 방식 컴퓨터 에드삭(EDSAC)을 고안합니다.
폰 노이만 모델을 살펴보면 메모리, 제어장치(CU), 산술논리연산장치(ALU), 입/출력기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메모리는 프로그램과 데이터가 처리되는 동안 그들이 저장되는 공간이며 제어장치는 메모리와 산술논리연산장치 그리고 입/출력기를 제어합니다. 산술논리 연산장치는 계산과 논리연산이 이루어지는 곳이고, 입력기는 데이터와 프로그램을 얻는 것에 출력기는 결과를 내보내는데 사용됩니다.
폰 노이만 모델은 기억장치에 프로그램과 데이터를 넣고 차례로 불러내 처리하는 방식을 뜻합니다. 이 경우 어떤 프로그램을 기억장치에 집어넣는가에 따라서 수행하는 일도 달라집니다. 노이만의 컴퓨터는 응용 프로그램에 따라 무한히 다양한 일을 할 수 있고 오늘날 우리가 사용하는 크고 작은 컴퓨터는 모두 이 방식을 따르고 있습니다. 프로그램 중심의 컴퓨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런 컴퓨터를 우리는 노이만형 컴퓨터라고 말합니다.
반대로 비노이만형 컴퓨터는 노이만형이 아닌 컴퓨터를 통틀어 이르는 말로 데이터 처리의 고속화, 고도화를 위하여 프로그램 일부를 하드웨어화 하거나, 병렬 처리 기능, 추론 기구를 채택한 컴퓨터를 가리킵니다.
폰 노이만은 이외에도 물리학에 관심을 갖고 미국의 원자폭탄 개발 계획인 맨해튼 프로젝트와 수소폭탄 개발 계획에 참여합니다. 많은 과학자들이 히로시마의 참극에 충격을 받아 원자탄 반대론자로 돌아섰지만 그는 원자폭탄의 적극적 찬성자였습니다. 그러나 이런 그의 행동은 화를 가져옵니다. 폰 노이만은 1957년 암으로 사망하는데 아이러니컬하게도 그가 옹호했던 수소폭탄 실험에 참관한 것이 그가 암에 걸린 원인으로 알려지고 있습니다.
첨부파일 : 09울산목양교회특강(구원,그이후)(총4강)(이근호)(강의정리)--재정리완료.zip (305.0K), Down: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