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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

출애굽기 32장 – 33장 주석자유게시판출애굽기

출애굽기 32장 – 33장 주석

이름 : 이진용(IP:222.99.120.158)

출애굽기 32장 – 33장

(32장 - 40장)

앞에서 이야기한 문제점과 그 해결책을 제시해보면 모세는 돌판을 가지고 내려오다가 산밑의 백성들이 다른 형상의 여호와를 섬기자 황급히 들고 있던 돌판을 깨어버린다. 이들 이스라엘 백성들은 여호와의 이름이 놓일 자리에 피조물의 형상인 송아지의 형상을 놓고서는 모세언약식으로 번제와 화목제를 드리면서 여호와의 복을 기대했었다. 모세는 돌판이 바로 성막 가장 깊숙한 곳, 여호와의 이름을 기념하기 위하여 여호와께서 친히 임재하는 장소에 놓여지는 것으로 보았다. 이는 하나님이 친히 이스라엘 백성들 속에 기거하시는 형태이다. 그런데 막상 산을 내려와보니 그 자리를 송아지 神이 차지하고 있었던 것이다.

모세는 모세언약에 의한 이스라엘 전체의 멸망을 선포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것은 언약의 깨어짐이다. 이는 곧 이스라엘 전체의 멸망이다. 모세는 그들 가운데서 여호와 편에 설 사람을 추려 다시 한번 여호와의 은혜를 기대할 수밖에 없었다. 그들의 죄를 용서해 주기를 고대하면서 모세는 자신의 생명을 담보로 제시한다. 그때 하나님은 이스라엘은 목이 곧은 백성이라고 규정짓고 모세와의 대화만 추진한다. 그리고 하나님은 말씀하시기를 이제는 은혜 줄 자에게만 은혜를 주겠다고 나서신다. 하나님의 자의로운 뜻에 의해서만 무조전적으로 긍휼과 자비의 대상이 되는 자들이 이스라엘 내부에서 발생하게 되었다. 그 이유는 모두가 이미 범죄에 가담한 언약 파기자 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깨어진 돌판과 똑같이 지상에서 만들라고 하신다. 이는 인간쪽에서 책임져야 하는 것이다. 이제 모세언약은 새로운 장을 연다. 성막이(법궤) 없는 모세언약에서 성막이 있는 모세언약이 된다. 거기에서 도대체 하나님은 그들에게 어떠한 하나님으로 나타나는가? 이스라엘이 하나님과 함께 동행하면서도 살 수 있는 원인은 송아지의 형상이 놓인 그 자리에 자비로운 하나님의 마음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즉 돌판은 그냥 방치되지 않고 법궤라는 고운 상자 안에 놓여지게 된다. 그리고 일년에 한차례 대 속죄일에는 백성을 대표하여 대제사장이 제물의 피를 그 위에 뿌림으로 모세언약은 계속 유효하게 되는데 그 피가 뿌려지는 뚜껑을 가지고 속죄소(죄가 용서되는 장소)라고도 하고 또는 시은좌(은혜가 내려 앉는 좌석)라고도 한다.

성막 안에서 행해지는 모든 제사행위는 바로 죄용서와 관련되어 있다. 그리고 이 죄 용서함을 받은 그 정신상태를 가지고 이스라엘의 사회정신으로 고정시키려고 하는 것이다. 모든 계명과 율례와 법도의 정신은 시은좌, 또는 속죄소에서 나와야 한다. 결코 형식적 제사만이 능사가 아니다. 과연 여호와는 자비롭고 노하기를 더디 하시는 분이구나를 그들만큼은 실감해야 한다(34:6).

그러나 이러한 현실을 모르고 함부로 법궤 뚜껑을 열어본다는 것은 거룩한 분을 직접 대하는 것이 되어 사정없는 진노가 쏟아져 죽게 된다.

법궤 안에는 인간들의 범죄의 증거들이 들어있게 된다. 또는 인간들이 하나님께 이 정도까지 원망했다는 증거물이 들어있게 된다(아론의 싹난 지팡이, 만나가 들어있는 항아리와 증거판) 이는 하나님의 자비가 인간의 범죄를 극복했기에 구원이 성사될 수 있음을 보이는 것이다. 성막에서 일하는 제사장들은 행동 하나하나를 주의해야 한다. 하나님의 무서움 깊이만큼 하나님의 은혜의 깊이가 같이 더해지기 때문이다. 바로 이러한 여호와의 이름을 기념하는 곳에서 번제와 화목제를 드릴 때 이스라엘은 어떤 일이 있어도 승리하는 복을 받는다.

여호수아가 법궤를 앞장세우고 요단강 도하에 들어가는 것이 우연이 아니다. 그는 법도와 계명의 정신을 법궤를 신앙하는 신앙으로 보았던 것이다(여호수아 1:7-8). 아브라함 언약대로라면 이스라엘은 광야를 지나 약속의 땅을 점령하도록 되어있다. 무엇으로 그 땅을 차지할 것인가? 오직 여호와의 이름을 기념할 때 여호와께서 승리케 하신다. 자비의 세계, 용서와 불쌍히 여김이 삶의 법칙이 되는 세계, 그 세계가 바로 약속의 세계이다.

목회의 목적은 그리스도의 사랑의 깊이와 넓이와 높이를 보다 많이 아는데 있다(에베소서 3:18-19). 이러한 사랑을 이해하는 데는 그만큼 하나님이 무서운 분인 것을 먼저 알아야 한다. 하나님이 얼마나 죄를 싫어하는지를!

32:1-4

본문에서 전부들 오직 하나의 신에 집중하고 있다는 말은, 자신들이 전부 사는 식으로 마음을 굳혔고, 그런 마음들이 일치를 이루었다는 말이 된다. 그 일체된 마음이 진리의 신으로, 자신을 전부 살려내는 신으로 구현되어 나온 것이 바로‘여호와’라는 이름을 가진 우상이다. 우상이란 자신들의 요구와 희망을 그대로 인정해주고 달성해주는 협조할 수 있는 신을 말한다. 반대로 참된 신은 인간의 모든 요구와 희망을 부정해버리고 거부하는 신을 말한다. 우리의 소원대로 되지 않게 하시는 신이 참된 신이다. 왜냐하면 진리와 비진리의 기준을 우리가 원하는 대로 세울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들은 모두 산 밑에 사는‘산 밑의 주민’이다. 우리는 산 위에서 무슨 소리하는지 전혀 알지도 못하고 있다. 따라서 모세를 기대해야 하고 모세를 기다려야 한다. 하지만 모세는 우리 전부가 다 모세를 포기할 때까지 산 위에서 내려오지 않을 것이다. 우리 자신들 속에 솔직하고 담대하게 꿈틀거리고 있는 그 우상이라는 우리 복제물이 우상이라는 이름으로 우리 바깥으로 내뱉을 때까지 내려오지 않을 것이다.

아무리 기다려도 오직 않을 것이다. 그 대신 우리는 우리에게 적체되어 있는 기억에 의해서 상상해낸 신만이 구원의 하나님으로 신봉하고 있을 것이다. 이것은 비난하고자 하는 말이 아니다. 실상이 그렇다는 말이다. 하나님께서는 의도적으로 천상의 계시자를 피하게 만들어서 죄인들인 우리들은 도대체 어떤 죄들을 품고 있는지를 그대로 노출시킬 작업을 하나님께서 개시하셨다는 것이다.

인간은 아무리 노력해도 자신이 근원적으로 죄인됨을 모르게 되어 있다. 왜냐하면 인간을 인간이게 하는 또 다른 무엇이 뿌리 박혀 있기 때문이다. 그것이 선악에 관한 지식이다. 그렇다면 선악 지식으로 자아를 규정지을 수밖에 없다. 이것은, 선과 악이라는 지식으로는 인간을 전적인 죄인으로 몰아세울 수가 없다는 말이 된다. 선이 조금이라도 남아 있다는 것이 드러난다면 ‘전적으로 죄인’이라고 몰아세우기 뭐 하다. 그래서 인간들은 선과 악과의 비례를 따져서 정도에 따라 죄인됨과 의인됨을 구별하고자 한다.

그러나 일단 신이 제조한 마당에서는 오로지 그 신에 대한 정성과 성의문제로 ‘덜 죄인인가’아니면‘더 죄인인가’를 판가름 내겠다는 것이다.

그런데 복음적으로 봐서 이미 산 밑에 내려온 이상, 산 밑에서 무슨 짓을 해도 다 죄인이다. 마치 십자가 밖에서는 모든 이가 죄인 인 것처럼 말이다. 그럼에도 인간들은 자신이 될 수 있는 한 자신이 죄인 아니라는 점을 증명하기 위해 행동에 나선다. 왜냐하면 새로운 신을 제조하는데 있어 자신의 재물과 정성과 성의가 거기에 함유되었기 때문이다. 본문에 나오는 것처럼 산 밑에서 만들어내는 신은, 인간의 성의와 정성이 한데 뭉쳐져서 만들어낸 가짜 신이다.

사람들이 자신이 죄인 된 것을 싫어하는 이유는, 그렇게 되면 자신을 구원시킬 권리조차 그 바탕 위에서 정당한 이유를 얻어낼 수 없는 것이다. 즉 인간이 당연히 지옥을 가야함에도 불구하고 ‘지옥 가지 않는 나’를 새로운 양상으로 만들고자 하는 것이다. 그런데 인간의 의식에서는 자신을 마땅히 지옥 보낼 이유가 발견되지 않는다. 그저 일반적 존재에서 나온 하나의 평범하기 짝이 없는 ‘욕심 없는 존재자’인 것으로 족하기를 원한다.

만약에 참으로 지옥이 있다면, 그리고 지금 이 시간에도 그곳으로 몰려들 가고 있다면 그러한 상황을 말하지 않고서는 배기기가 힘든다. 바로 산 위를 아는 자들은 이처럼 산 밑의 것만 아는 자들에게 이런 과격함으로 비치고 다가설 수 밖에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산 밑은 우상공장이다. 지금도 매일 같이 제조해 낸다. 한 시도 쉰 적이 없다. 한 사람도 예외가 없다. 모든 것을 ‘자기를 위한’ 작업들이다. 타협할 여지가 전혀 없다. 용납해줄 종교라는 것은 남아 있지 않다. 인간을 위한 신이라는 관념 자체가 허구이다.

사람들은 유(有)에서 신을 창조한다. 있는 데서 가치 있는 것을 제조한다. 가치 있다고 간주하는 '있음'이 생겼다고 여기는 것은 그만큼 그런 것을 제조한 제조자 자체가 선하고 가치 있다는 것을 말해주는 증거물로 활용하기 위해서이다. 그들은 자신을 무가치하게 볼 하등의 이유를 발견치 못한다.

인간들은 자기 활동에 주목한다. 그 외에는 아예 생각도 안한다. 자기와 상관없기 때문이다. 인간은 자신이 제공한 것으로 신이 등장해야 비로소 ‘자기를 위한 신’으로 간주한다. 만약에 신이 등장했는데 자신이 그 신에게 제공한 것이 아무 것도 없다면 그 이후 그 신이 자신을 끊임없이 공격해도 자신의 권리를 주장한 정당성이 상실되어 버리는 사태가 생기기에 그런 신을 거부하는 것이다. 그래서 인간들은 신이 자신을 공격하고 심판해도 할 말이 있는 그런 신을 원한다. 그러나 실제로의 하나님은, 자신의 아들의 피에 한 방울의 인간의 피가 섞이는 것을 용인하지 않는 하나님이시다.

32:7-10

사람들이 우상을 만들면서 ‘자기를 위하여’라는 취지가 붙어 있다. 즉 인간이 죄악성이 밖으로 튀어나올 때면 반드시 ‘자기를 위한 우상 만들기’ 양상으로 튀어나오게 마련이라는 것이다. ‘자기를 위한 신’이란 곧 그 인간을 이미 절대화 시켜놓고서 그 다음으로 진행되는 ‘신 믿기’에 해당된다.

그러니까 신마저도 ‘인간의 절대화’를 위한 잠식시켜 버리는 행위를 버리는 것이다. 인간에게는 자기 영혼이 영원하기를 원하는 본심이 있다. 따라서 자기 영혼의 영원함을 위하여 신과 거래를 틀 요량이 인간에게 있다. 인간이 절대화 되면 자연적으로 신은 그저 하나의 대상으로 전락한다.

이런 식으로 사람들마다 각자 자신의 신을 만들게 되면 사람들의 신들이 다 다르게 된다. 목사가 믿는 신과 장로가 믿는 신과 집사가 믿는 신이 다 다르다. 왜냐하면 인간들은 인생 여정을 거치면서 자신의 경험과 느낌에 따라 그 때 그 때 자기를 절대화 하면서 구상한 신들을 생각해 놓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느 십자가 사건을 통해서 이런 차별을 일소에 붙인다. 그 어떤 인간의 하나님도 십자가 앞에서 다 무너져 내려야 한다는 것이다. 즉 십자가 앞에서 인간들은 자신의 하나님마저 무너져야 하고 이렇게 되면 그 인간의 자기 영혼의 절대성도 무너져야 한다. 그리고 자신의 목숨마저 하나님에게 압수 당해야만 한다.

갈라디아서 2:20에 보면, 하나님에 의해서 지배당하고 통치 당하게 된다면 더 이상 자기 절대성에 연연하지 않게 된다. 하나님은 요리사이고 우리 성도들은 그 요리사가 필요로 해서 동원한 음식 재료들이다. 어떤 음식이 나오든 간에 참으로 예수님이 살아있는 사람이라면 오로지 예수님의 공로만 자랑하게 된다.

“내가 구원된 것은 하나님이 원해서지 결코 내가 원해서 내가 구원된 것이 아니다”라는 고백이 자연스럽게 도출되게 되어 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교회에서 자기 파당이 생겨서 다른 파당과 다투는 것을 보고 다음과 같이 말씀한다. “내가 십자가에 못 박혔느냐?”라고. 즉 십자가는 오로지 성령을 통해 직접 자기 백성에게 전달되고 믿게 되기에 경유한 것에 매일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32:15-20

왜 모세는 돌판을 깨뜨릴 생각을 했나? 그 돌판이 있는 이상, 하나님께서는 그 돌판에 적힌대로 그대로 시행할 것이 분명하다. 그렇게 되면 이 백성이 저주받는 것은 시간문제다. 하나님의 엄격하신 말씀은 양보가 없고, 하지만 이 백성들은 그 말씀대로 못사는 날에는 여지없이 저주받는다는 점이 분명하고, 따라서 모세는 이 백성을 살리는 쪽으로 하기 위해서 그 돌판을 깨버린 것이다.

저주가 날아오는 그 법적 근거가 사라지면 아직은 저주가 이들에게 날아오지 않을 것이라고 여긴 것이다. 이렇게 되면 여전히 이 백성들은 모세 책임 하에 하나님의 진멸이 유보될 줄로 알았던 것이다.

즉 첫째는, 무조건 이스라엘을 하나님의 백성으로 만들어야겠다는 것이고, 둘째로는 이들이 아직 법을 지킬 만한 마음가짐이 되지 않았다는 사실에 근거해서 이들로 하여금 자신들의 죄를 스스로 반성토록 하는 일이고, 셋째로 법 실시를 일시 중단시키므로서 법 위반에서 나오는 저주를 모세가 요령껏 차단했다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모세가 하나님을 대신하여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을 한꺼번에 실시한 셈이 된다. 그래서 모세는 일단 이 백성들이 하나님 말씀에 대한 관심사가 어느 정도 있다고 판단이 될 때까지 자기 선에서 저주를 유보하면 되지 않겠느냐 하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이러한 일련의 사태가 일어나리라는 것을 다 아시고 돌판을 주신 것이다. 즉 하나님이 모세의 성격을 아신다. 성격상 돌판이 깨어질 것이라는 점도 아신다. 그 아시면서 깨어지라고 돌판을 주신 것이다. 돌판이 깨어졌다는 것이 곧 그동안 하나님에 대한 언약이 깨어진 것이라고 하나님은 생각하지 않으셨다. 그러나 모세는 달리 생각했다. 돌판을 깨뜨리면서 백성들로 하여금 자신들의 짓들이 하나님의 진노를 유발한다는 것을 모두 모세 자신이 느끼는 정도의 강도를 갖기를 원했다. 그래서 모세가 취한 조치가 바로 금송아지를 가루로 만들어 백성들로 하여금 마시게 하는 것이다.

모세의 이러한 태도는, 그동안 모세 본인이 하나님과 오랫동안 산 위에 있었다는 사실을 근거로 사실상 하나님의 일의 대행자로 간주해도 무방하다고 본인이 느낀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모세의 성격은 이번 일만 그런 것이 아니다. 전에 모세가 애굽 왕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었을 때, 의협심에 입각하여 히브리인을 괴롭히는 애굽 사람을 몰래 죽인 적이 있다. 즉 자진해서 이스라엘의 지도자로 나서보겠다는 것이었다.

뿐만 아니라 나중에 광야에서 백성들이 물이 없다고 하나님을 원망했을 때, 하나님께서는 분명히 지팡이를 가지고 반석을 가리키라고 했건만 모세는 성질이 나서 반석을 두 번이나 쳤다. 이로 인해 만인들이 보는 앞에서 지도자로서 하나님의 영광을 자진해서 훼손한 것으로 간주되어, 광야의 구세대에 해당되는 입장에서 약속의 땅을 코앞에 두고서도 그 땅에 들어가지 못하는 사태가 일어나게 된다.

모세는 자진해서 이스라엘 백성을 자기 책임 하에 두려고 한다. 즉 비록 돌판은 없지만 모세 본인이 존재한다는 것 자체가 돌판의 존재의의를 대신할 수 있을 것이라고 여긴 것이다. 그래서 그 다음에 취한 조치가 바로 하나님의 무서움으로 그들의 잘못을 가르치겠다고 나선다.

그는 우상숭배의 죄악을 더욱 철저히 하기 위해 금송아지를 가루로 만들게 한다. 그 우상의 가루를 마신다는 것은 사람들에게 심리적으로 어떤 효과를 주게 될까? 사람들은 모세가 발산하고 있는 그 분노 안에서 지금 시내산 위에서 하나님이 표출하고 있는 하나님의 분노를 짐작케 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그래서 그러한 과격한 징계 조치 안에서 백성들로 하여금 자기 잘못으로 인해 주눅들게 만들려고 한다. 금송아지가 깨어져 가루가 되어 버린 것을 마시므로서 자신들은 그 어떤 경우라도 우상 만들었다는 죄악에서 피할 수 없으며 거기에 상응하는 하나님의 언약과 별개로 존재할 수 없음을 명확히 하고자 했다.

그리고 도저히 음식물이라고 할 수 없는 금가루를 먹음으로서 그것은 마땅히 자신들이 받을 벌처럼 여겼을 것이다. 이것은 곧 모든 이가 각자 배 속에 하나님이 언약 위반사항이 어떤 식으로도 퍼져 있다는 인상을 주므로서 차후에 벌어질 하나님의 징벌에 대해서 달갑게 여기게 만들었을 것이다. 이처럼 이스라엘 백성은 언약에 울고, 언약에 웃어야 될 운명 속에 놓인 자들이다. 모세가 보여줄 수 있는 것은 인간 지도자로서 보여줄 수 있는 것을 다 보여준 셈이 된다.

그러나 그것으로 백성이 과연 진멸을 피할 수 있을까? 인간은 결코 예수님이 하시는 일을, 지도자라는 자격으로도 대신할 수 없음을 알아야 한다. 하나님은 모세마저 가르치려고 하셨던 것이다.

32:25-29

하나님의 거룩이란 새삼스럽게 거룩한 물체를 제조해서 소유하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그 거룩 앞에 자신의 모든 것을 부정하는 현상으로 나타나게 된다. 즉 거룩이란 ‘숨어있는’ 것이다. 흔히들 자연 세계의 일부를 떼와서 그것으로 거룩을 창안하고자 하지만 하나님의 거룩은 겉으로 드러나지 않고 그 자연세계를 배후에서 공격하는 식으로 전개된다.

그 거룩의 위력이 바로 ‘하나님의 이름’으로 등장한다. 하나님 이름 앞에서는, 인간이 자기 이름으로, 자기 행함으로 만든 모든 것은 뒤로 던져버린다. 쓸데없고 필요 없다는 말이다. 하나님의 이름에 섞일 수 있는 내용물이 아니라는 말이다. 하나님의 이름, '없는 데서 있게 하시는 분이요,’죽은 데서 살려내시는 분‘이다.

시편 8:1-2에 보면, 남들 보기에 어린 아이들이 무슨 전장에 나가서 승리를 쟁취할 수 있게나 싶지만, 하나님의 이름이 함께 하면 그 어린 아들을 가지고서도 하나님의 승리케 하시는 것이다.

대표적인 예가 바로 소년 다윗의 경우다. 소년 다윗은 덩치가 자신의 수 배나 되는 골리앗 앞에서도 하나님께서 숨어있는 거룩을 어떻게 발동시키느냐를 알았다. 그것은 '민군의 여호와의 이름‘으로 하나님께서 일하심을 알았다. 즉 할례 받지 못한 자는 반드시 할례 받은 이스라엘에게 패배하는 식으로 하나님께서 일하심을 믿고 나선 것이다.

이런 예뿐만 아니라 이스라엘이 약속의 땅에 들어갈 때에 갈렙과 여호수아는 분명히 장대 같은 아낙 자손들이 득실거리는 것을 분명히 보았다. 하지만 갈렙과 여호수아는 그 약속의 땅은 분명히 하나님의 자기 숙제에 해당되는 땅이기에 분명히 점령할 수 있다고 믿었다. 하지만 12:2의 숫적 열세를 극복하지 못하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 약속의 땅을 포기하고 만다.

즉 하나님의 이름으로 일하시는 것이 참 하나님의 일임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그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이름’을 앞장 세운다. 자신의 능력이나 자신이 납득이 되는 잠재능력을 하나님이 부여해주기를 원한다. 이렇게 되면 그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 우상숭배자가 된다. 신약에 와서 보면,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라고 되어 있다.

당연히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것으로 대신할 수 없다. 특정 문구나 특정 행위를 되풀이하게 되면 신기한 능력이 나올 것으로 여기는 것은 ‘주의 이름’의 능력을 완벽하게 무시하는 처사다. 하나님의 이름은 인간의 이름을 꺾고 등장한다. 어린 아이의 입을 통해서‘주의 이름’이 일을 하신다는 것은 어린 아이에게 무슨 특별한 재주를 덧입혀주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단지 그 어린 아이들의 입을 통해서 “결코 우리 어린 아이들의 능력으로 우리가 승리한 것이 아닙니다”라는 솔직한 고백이 터져 나오게 하신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를 헤맬 때, 하나님은 인간들로 하여금 당황스러운 여건들을 유발하시면서 인도하셨다. 구름기둥과 불기둥으로 인도하신다면서 가보면 물이 메말라 있고, 설사 물이 있더라도 써서 못 먹는 물이고 또한 양식이 구할 길이 없는 지경으로 몰아넣으신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런 악조건 안에서 ‘하나님의 거룩’이 올라오도록 하신다. 인간들이 자기 이름과 행함과 능력으로 가능한 모든 것을 절단시켜 버리는 능력으로 거룩은 오늘도 열심히 일하고 계신다.

모세는 이 백성들에 대하여 자기 책임을 강조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라도 놓치지 않기 위해서 애쓰고 있지를 않는다. 참 하나님을 거부한다면 친척이 되었든지, 친구가 되었든지 하나님 보시기에 결코 이스라엘 백성이 아니라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이름’의 능력만 의지해야 한다.

32:30-35

생명책’에 명단에 적힌 자만 구원이 된다는 논리다. 생명책이 분명히 있다는 것은 모세도 시내산 꼭대기에 올라가서 처음 알았던 사항이다. 생명책 명단에 의한 구원이란 지상에서 인간들이 아무리 상상해도 그것으로 구원이 성사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명확하게 말해주는 셈이 된다.

즉 지상에서 인간들이 아무리 구원에 욕심을 내 보았자 생명책에 그 명단이 없으면 헛것이 된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특징은 기존의 선입견과는 잘 부합될 수 없는 점이기도 하다. 명단에서 명단으로 이어지는 식으로 구원 작업은 전개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명단에 없는 사람은 명단에 없다는 것을 통보하는 식으로 전개될 것이다.

이것은 당연히 반발을 불러일으키게 된다. 하나님 자체에 대한 부정적인 태도를 유발하게 된다. 엉터리 하나님이고 인간들에게 공평한 구원의 기회를 부여하지 않는 불공평한 하나님이라고 말이다.

그렇다면 왜 하나님께서는 인간들로부터 이런 반발을 예상할 수 있으면서도 생명책에 의한 구원을 고수하시는 것일까? 그것은 인간들은 세상을 바라보면서 ‘과거→현재→미래’로 이어지는 식으로 파악하는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 반대로 ‘미래→현재→과거’로 이어지는 식으로 작업에 나서신다.

이렇게 되면 인간들의 세계관은 자연적으로 하나님의 작업과 충돌이 일어나게 되면 서로가 서로의 세계관을 구박하게 되어 있다.

이 둘 사이에 양보 없는 전쟁이 일어날 것은 뻔한 결과다. 인간 쪽에서는 “명단에 의해서 구원하시지 마시고, 인간의 선한 능력을 마음껏 발휘케 해서 보다 많이 선한 일을 한 자를 추려서 구원하고 나머지는 지옥 보내소서. 그래서 하나님의 정의로움에 합당합니다.”라고 말이다.

거기에 대해서 하나님은 “그 어느 누구도 완벽한 의로움을 지니고 살지 않는 자는 가차없이 생명책 리스트에서 빼버린다. 그리고 생명책에 들어간 자는 하나님이 만족하실 만큼의 완벽한 의로움을 지닌다”라고 말이다.

그러면 인간들은 이렇게 반발합니다. “죄 지었다고 명단에서 탈락될 것 같으면 무엇 때문에 애초부터 명단을 작성하십니까? 차라리 처음부터 작성을 하지 않고 선한 자만 골라서 넣어주는 것이 합리적이지 않습니까?”라고 말이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님의 작업이 ‘미래→현재→과거’로 이어지는 식으로 전개된다는 점을 몰라서 그러한 의심이 나오는 것이다. 누가복음 10:20에 보면, “그러나 귀신들이 너희에게 항복하는 것으로 기뻐하지 말고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라 하시니라”라고 되어 있다. 즉 귀신들이 제자들 주변에서 떨어져나가는 것은 바로 그 제자들이 하나님의 생명책의 명단이 들어있다는 그 위력을 유감없이 발휘되었기 때문이다.

즉 하나님은 마지막 때에 생명책의 명단은 처음부터 확정되었음을 보이는 쪽으로 대규모적인 최후의 전쟁도 불사하신다. 다니엘 12:1에 보면, “그 때에 네 민족을 호위하는 대군 미가엘이 일어날 것이요 또 환난이 있으리니 이는 개국 이래로 그 때까지 없던 환난일 것이며 그 때에 네 백성 중 무릇 책에 기록된 모든 자가 구원을 얻을 것이라”라고 되어 있다.

그렇다면 마지막 때 생명책 명단에 끼일만한 정도로 완벽한 의는 성도에게 어떻게 주어지는 것인가? 요한계시록 5:7에 보니, “어린 양이 나아와서 보좌에 앉으신 이의 오른손에서 책을 취하시니라”라고 되어 있고 7:5-8에 보면, 12지파에서 예수님으로부터 구원 통고의 도장을 받은 자의 계열이 144,000명으로 나와있고, 7:9에 보니, “이 일 후에 내가 보니 각 나라와 족속과 백성과 방언에서 아무라도 능히 셀 수 없는 큰 무리가 흰 옷을 입고 손에 종려 가지를 들고 보좌 앞과 어린 양 앞에 서서”라고 되어 있다.

이들은 바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언약에 따라서 ‘남게 된’ ‘남은 자들이다. 즉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맹세한 언약들은 인간들의 손에 의해서 성취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친히 개입하시는 능력에 의해서 성취가 된다. 그렇게 되면 이들은 비록 그들의 부실과 무능력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하나님의 언약에서 주어지는 복을 받게 되어 있다. 야곱의 11아들이 그런 자들이다.

그들은 요셉을 대단히 미워했던 자들이었으나 야곱에게 내려준 복이 요셉의 운명을 희생적 운명으로 유지시켜서 그 희생적 운명에서 나온 혜택을 입는 식으로 그들이 복을 받게 된다. 이러한 식의 축복받음은 마지막 때에 예수님을 통해서 분명하게 최종 결말이 나오게 되어 있다.

즉 예수님을 믿는 자들은 자신들의 공로가 아니라 예수님의 희생적인 의로움의 혜택으로 인해 야곱의 12아들처럼 복을 받게 되었음을 아는 자들이다. 이들이야말로 하나님의 생명책에 명단이 있는 자들이다. 이들은 요한계시록 14:4의 말씀처럼, ‘어린 양’이 어디로 인도하든지 따라가는 자들이며 하나님과 어린 양에게 속한 자들이다. 바로 이러한 하늘 나라의 내막을 알려주기 위해 하나님과 모세는 본문과 같은 대화를 주고 받는 것이다. 이런 사실을 모르는 자가 바로 생명책의 명단이 빠져 있는 자들이다.

33:7-11

하나님이 자기 성도를 친구처럼 상대한다는 것은 새삼스럽게 그 인간들에게 뭔가 바라고서 접근하시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이 친구 사이에 수립되는 것은 바로 ‘화목제물’이라는 것이다.

‘화목제물’이란 한 쪽에서 다른 한쪽을 일방적으로 상대의 허물을 다 수용했다는 의미가 담겨 있다. 따라서 일방적으로 사랑을 받는 쪽은 더 이상 자신을 위장할 이유나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자신을 가식적으로 재조정해서 꾸미고 다니지 말아야 한다. 그렇게 되면 ‘화목’의 의미가 모독 당한다.

그러니까 막 먹어도 되는 사이가 아니라 되레 황공스러운 사이이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어떤 마음으로 모세를 친구같이 상대해주시는 것인가? 그 깊은 취지는 신약 고린도후서 3장에 나온다. 거기에 보면, 성경을 볼 때는 문자로 이해하지 말고 영적으로 이해해야 한다고 되어 있다.

영으로 이해한다는 말은, 인간의 육적인 자질이나 능력으로 해석은 불가능한 것이 성경이라는 말이다. 인간의 육적인 자질로서 성경이 가능치 아니하면 인간의 육적인 지식이나 능력을 부정 당해야 하고 부인 당해야 마땅하다. 어떻게 하면 자신을 부인할 수 있을까? 인간의 ‘자기 부인’은 본인의 노력에 의해서 달성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위치 변동에 의해서 이루어진다.

감사란 자신의 위치에 변동이 일어났기 때문에 그렇다. 모세의 경우, 하나님께서는 모세보다 더 못한 자리까지 친히 낮아지셨기에 모세로 하여금 자기 권리나 자기 체면이나 자존심을 생각할 필요를 못 느끼게 한다.

그런데 구약의 경우에는 여전히 하나님과 모세 사이는 서로 다른 신체와 모양새를 갖추고 있지만, 신약에 들어오게 되면 하나님의 영께서는 더럽고 추한 우리 인간의 신체를 자신의 궁전으로 삼으시고 들어오신다.

예수님의 깨끗한 신체 안에 계셨던 그 성령님께서, 죄 투성이인 우리의 신체를 마다하지 않으시고 성큼 들어서서 자신의 안방으로 삼으시고 더러운 우리를 거룩한 나라로 인도하시는 것이다. 이렇게 되는 연유는. 그만큼 성령님께서 낮아지셔서 가능한 일이다. 이 성령님의 낮아지심 덕분은 성도는 더 이상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주특기나 장기나 자랑거리들만 골라서 하나님에게 내밀 필요가 없게 된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친구처럼 이미 우리의 사정을 훤히 다 꿰뚫고 계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세리나 창녀나 강도의 신체도 마다하시지 않고 찾아드셔서 그들을 구원해 내셨다. 바로 이 십자가의 정신을 마주대하면 우리는 자연적으로 마음이 낮아지지 않을 수 없다. 이러한 낮아짐에서 우리 보다 더 낮게 오신 하나님의 ‘친구 사랑’을 이해하게 된다. 이것이 바로 자기를 위장할 필요가 없는 진정한 자유의 생활이다.

33:12-16

모세는 지도자로서 바른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특히 그의 훌륭한 점은, 자기 앞에 있는 수십만의 백성들은 결코 자기 백성으로 여기지 않고 하나님께서 친히 책임질 백성이라고 간주하는데 있다. 즉 자신의 독자적인 권한으로 그 백성들을 가르칠 자격이 없다는 점을 분명히 한다. 이점은 오늘날 목회자들이 꼭 알아야 될 점이다.

목회자가 가장 중요한 목회 자질은, 자신은 절대로 교인들을 가르칠 자격이 있지 않다는 점을 분명히 하는데 있다. 교인들은 목사의 부하직원들이 아니다. 도리어 종이다. 섬겨야 될 분들이다. 섬긴다는 것은 상대방은 크게 보고, 자신은 상대적으로 작게 여기는 마음을 말한다.

교인들과 싸운다는 것은 말도 안된다. 교인들이 어떻게 나오든 간에 그것은 살아계신 주님에게 맡겨야 한다. 교인들이 교회 나오는 것도 기적이다. 그리고 교회를 오랫동안 안 나와도 나중에 나오게 되면 그 때 그 나옴의 은혜가 더욱 더 은혜되기 위한 그동안의 불출석이라고 보면 되는 것이다.

그런데 본문에서 모세의 취약점도 같이 드러난다. 그것은 백성들이나 모세의 개인적인 역량이나 자질을 통해서 하나님과 동행이 가능하도록 조치해달라고 하는 대목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있다는 증거물을 우리 인간 쪽에서 납득이 되도록 발생시켜 달라는 것이다. 그래야 백성들이 자진해서 모세가 하는 일에 협조를 잘해줄 것이 아니냐고 한다.

모세가 왜 이런 식으로 나오느냐 하면, 본문 16절에 보면 ‘만민 중에 구별됨’이라는 말이 나온다. 즉 다른 민족들과는 확연히 차이나는 구별됨이 있을 경우에만 우리에게 과연 하나님이 살아계셔서 함께 동행하심을 파악할 수 있겠다는 것이다.

‘구별’을 가져오는 것은 오로지 하나님의 은혜이지 인간의 행함이 동원되어야 가능한 일이 아니다. 은총만이 구별을 유발한다. 사람들의 행함이란 그냥 놔두면 나중에 그 구별점도 사라지고 동일하게 되고 만다. 교회라는 것이 세월이 흐르면 다시 세상과 하나가 되고 만다. 따라서 끊임없이 구별되는 요소가 은총을 통해 주입되어야 한다. 그래서 성경에서는 ‘남은 자’ 사상이 나온다.

이 ‘남은 자’ 사상이 하나님 백성의 특징을 잘 나타내어주게 된다. 남게 되는 자로 분류되는 능력은 인간에게는 있을 수 없다. 왜냐하면 인간의 뿌리는 한 아담에게서 나왔기에 다 같은 아담의 속성을 지니고 있다. 이 보편적이고 일반적인 속성에서 이질적인 것을 따로 찾아낸다는 것은 그것이 아담의 본성에서 아직 밝혀지지 아니하면 속성인지 아니면 진정 낯선 이질적인 것인지를 구분하는 기준을 따로 외부에서 도입할 입장이 못 된다.

그 기준마저 애초부터 아담의 본성이 이미 잠재되어 있었던 기준이라면 얼마든지 인간들인 이질적인 것으로 알았던 것도 약간의 되풀이나 숙련을 통해서 얼마든지 누구라도 재현시킬 수 있는 이질적이라서 사실 이질적이라는 말이 성립되지를 못하는 법이다. 이것을 성경에서는 ‘행함’이라고 한다.

‘행함’이란 이미 인간 속에 있는 기본 자질의 발휘를 말한다. 즉 인간의 사고방식이나 전통이나 과학적인 탐구력까지 그 어느 것 하나 인간의 근본 자질과 능력과 가능성에서 벗어남이 없다. 인간이 새로움을 추구하고 그것을 성취해내기 위해 힘쓰는 모든 시도도 이 ‘행함’이라는 범주에 해당된다.

인간의 몸으로 행사되는 모든 것이 인간 본연의 속성으로 환원시킬 수가 있다. 따라서 구태여 외부로부터 강제로 남게 하지 않더라도 인간들은 자발적으로 남은 자가 될 수도 있고 또한 그것을 철회할 수가 있다.

사람이 타인과 구별되고 싶고 남은 자 되고 싶은 것도 역시 인간의 욕심에 기초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런데 하나님의 ‘남은 자’ 만들기는 그런 것이 아니다. 인간의 행함을 배제한 상황에서 조성해내는 ‘남은 자’이다. 이로서 인간은 하나님 앞에서 여전히 쓸모 없는 자가 된다.

참으로 ‘쓸모 없는 자’가 순전히 하나님의 뒤치다꺼리로 인하여 무상으로 구원받았음을 고백하는 것, 이것이 하나님께서 인간과 함께 동행하시는 방식이다.

33:17-20

하나님은 존재만으로 계시는 것이 아니라 그 존재를 통해서부터 행위가 나온다. 그 행위가 바로 “나는 은혜 줄 자에게 은혜를 주고, 긍휼히 여길 자에게 긍휼을 준다”는 식으로 행위 하신다.

은혜와 긍휼이 오늘날 신약 시대에서는 어떠한 형식으로 나타난 것일까? 요한일서 5:12에 보면, “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고 하나님의 아들이 없는 자에게는 생명이 없느니라”라고 되어 있다.

아들이 있는 경우에만 생명이 있다는 점을 인정하더라도 그 아들이 있게 할 능력은 우리 인간의 능력 밖의 이야기가 되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하나님의 구원과 전도란 결국, ‘제대로 된 인간이 되어라’라는 식으로 능력을 배양하라는 과정을 통해 달성되는 것이 아니라 ‘누가 나의 말을 알아듣는 참 백성이냐’를 선별하는 과정이 된다.

그 내막이 요한 일서 4:4-6에 보면 나온다. 즉 예수님이 곧 생명이지 다른 것으로 생명이 없다는 사실을 알아듣는 자만이 원래부터 하나님께서 속한 자이기에 필히 나타나는 현상일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원래부터 하나님께 속하지 않는 자라면 예수님의 생명되심을 아무리 이야기해도 그것이 무슨 취지로 중요한 말인지 알지 못하고 무심하게 외면할 수 밖에 없는 현상도 필연적으로 나타난다는 것이다.

이처럼 신약 성경 전체가 은혜 받을 자와 그리고 결코 은혜가 받지 못할 것을 차별하고 구별하는 작업으로 진행된다. 누가복음 2장에 나오는 예수님의 탄생 시기에서, 어떤 목자들에게 천사가 나타나는데, 그 때 하늘에서 다음과 같은 가사를 가진 찬송이 펴져나온다. “하늘에서는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라는 가사다.

여기서 ‘기뻐 하심’이란 사람이 하나님을 보고 기뻐하는 것이 아니라 먼저 하나님께서 특별히 귀엽게 보는 사람이 따로 있었다는 말이다. 이 기쁨을 덧입은 자에게만 구원이 주어지는 것이다. 마태복음 1:21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예수’라는 이름에 담긴 기능적인 내용은, 오로지 ‘자기 백성만 구원’한다는 의미가 담겨 있다는 것이다.

모든 인간이 구원이 아니라 오직 ‘자기 백성’만 건지시는 ‘자기 백성의 메시야’로서만 예수님은 이곳에 등장하신 것이다. 그래서 자신의 구원에 대해서 차별화된 특혜라고 이해하는 자만이 제대로 하나님을 만난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지옥 갈 자들에게는 절대로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지 않는 대상임을 아울러 알고 있는 사람이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하나 덧붙여야 한다. 그것은 바로, 주님의 은혜는 보이는 실적 형태로 우리에게 제공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의 가치를 부정하는 십자가의 능력으로만 이루어진다는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하나님의 인도와 동행을 눈에 보이는 업적과 성과물로 확인하고자 하는 유혹을 갖고 있다.

보이지 않는 분을 보고 있다는 인식은 성령 안에서 주님의 사랑을 느끼는 자에게만 합당하다고 말한다. 이런 성도는 또한 죽음을 무서워하지 않는다고 했다. 왜냐하면 사랑은 두려움까지 물리치니까 말이다.

첨부파일 : 출애굽기 32장 – 33장.docx (44.6K), Down: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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