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하 2:14-17 (전쟁의 장난요소)
삼하 2:14-17 (전쟁의 장난요소)
이름 : 우리교회(IP:220.81.41.193)
본문 : 사무엘하 3장 1- 5절
제목 : 전쟁의 장난 요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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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교회
09-11-01 13:52
http://media.woorich.net/성경강해/사무엘하-2009/03강-삼하2장14-17(전쟁의장난요소)-2sa091101.hwp
이근호
09-11-01 15:37
전쟁의 장난 요소
2009년 11월 1일 본문 말씀: 사무엘하 2:14-17
(삼하 2:14, 개역) 『아브넬이 요압에게 이르되 청컨대 소년들로 일어나서 우리 앞에서 장난하게 하자 요압이 가로되 일어나게 하자 하매』
(삼하 2:15, 개역) 『저희가 일어나 그 수효대로 나아가니 베냐민과 사울의 아들 이스보셋의 편에 열둘이요 다윗의 신복 중에 열둘이라』
(삼하 2:16, 개역) 『각기 적수의 머리를 잡고 칼로 적수의 옆구리를 찌르매 일제히 쓰러진지라 그러므로 그곳을 헬갓 핫수림이라 일컬었으며 기브온에 있더라』
(삼하 2:17, 개역) 『그 날에 싸움이 심히 맹렬하더니 아브넬과 이스라엘 사람들이 다윗의 신복들 앞에서 패하니라』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주신 가나안 땅은 하나님의 희생에 의해서 만들어진 땅입니다. 사람들이 처음 이곳에 들어왔을 때는 무엇이나 고마워하고 감격했습니다. 하지만 세월지나면서 감각이 무디지고 타성에 젖은 생활을 하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실은 이 땅에 무서운 땅으로 변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오늘날 성도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에 처음 다닐 때는 하나님에게 모든 것을 다 내어줄 듯이 살지만, 교회에 장기 근속하다보면, 교회 자체를 장난이나 치는 친목계 모임 정도로 알게 되면 하나님 임재에는 관심도 없어집니다. 뭐든지 시시하게 보게 됩니다. 이러한 경솔함은 어디서부터 도출되는 걸까요?
지난 시간에 말씀드렸듯이 다윗은 하나님께 물어보고 행동에 나섭니다. 왜냐하면 인간의 사적인 원수라고 해도 곧 하나님이 미워하는 원수라고 볼 수 없기 때문입니다. 뿐만아니라 다윗이 약속의 땅에 있는 것은 하나님의 전쟁을 하기 위함이지 결코 자신의 전쟁을 하기 위함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나오는 두 패의 대장들은 사태를 이렇게 진지하게 볼 줄을 모르고 있습니다. 이들의 행위는 결국 이스라엘에 두고두고 ‘하나님의 전쟁’이 인간들의 ‘사적인 전쟁’과 맞물리면서 얽히고 설킨채 돌아가는 이유가 됩니다. 다윗패의 대장은 요압이요, 사울패의 대장은 아브넬 장군입니다.
이 두 장군이 서로 대진하고 있다고 심심하니까 여흥으로 철없는 아이들을 각자 12명을 차출시켜 장난삼아 전쟁놀이를 붙여보았습니다. 그러나 막상 아이들에게는 장난이 아니라 실제로 그들은 전쟁을 벌리고 말았습니다. 일이 커지게 되었습니다. 수습하기가 곤란하게 되었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인간들이 자아는 두 개의 서로 다른 층을 가지고 세상을 보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는 위에 있는 층인데 그것은 다름아닌 ‘게임의 층’입니다. 이 ‘게임의 층’은 자아에게 자극이 되는 일들을 그리워하는 층입니다. 즉 일단 사는데 여유가 있으면 그 다음에는 신나는 일을 찾게 됩니다.
도박과 게임에 빠지는 것이 이런 이유에서입니다. 사람은 세상을 게임하듯이 살아가므로서 자신이 이 사회에는 어느 정도로 대단하고 높은 위치에 있는지를 주위를 통해서 확인하고 싶어합니다. 그래서 만나는 사람마다 게임하듯이 상대를 하게 됩니다. 신학을 전공한 사람은 누구를 만나도 상대방의 신학이 어느 정도인지를 파악해서 자신이 그 사람을 승자로 인정할 것인지 아니면 자기 보다 못한 패배자로 취급할 것인지를 정리하려고 합니다.
이러한 게임하는 식으로 세상을 살아가므로서 자신의 위상을 날로 증강시키고자 합니다. 높다 더 높은 위치에다 자신은 안착시키고 싶어합니다. 자신의 욕망이 만족할 때까지 말입니다. 그래서 정해진 자리는 본래의 자기 자리라고 우기고 싶어합니다. 어두운 영화관 실내에서 자기 자리 찾아가듯이 이리 부딪치고 저리부딪치면 결국 내 자리는 지정된다고 여깁니다.
그러나 인간의 자아는 그 밑에 또다른 층을 갖고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생존의 자리요 생계의 자리입니다. 여유를 부릴 자리가 아닙니다. 사느냐 죽으냐가 결정짓는 다급한 자립니다.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무슨 짓도 맞다하는 자리입니다. 취미나 오락이나 게임이나 하면서 세월 보낼 자리가 아닙니다. 돈을 위해서라면 자신의 자존심도 명예도 던져버릴 마음 준비가 된 자입니다.
바로 이 자리는 죽음과 삶을 결정짓는 자리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보면, 장난으로 시작된 윗층에서 시작된 전쟁이 결국 장군들의 죽음마저 위협받는 큰 전쟁을 낳게 되어서 사울패의 아브넬 장군과 다윗 패의 요압 장군은 서둘러 수습에 나서게 됩니다. 그런데 아직도 전체를 보는 눈이 없는 요압 장군의 동생 아사헬 장군은, 이번 기회에 형들의 원수가 되는 아브넬 장군을 자기 손에서 처리하여 자기 패에서 인정받고자 나섭니다.
꼭 어른들 이야기하는데 애들이 끼어들다가 결국 애들이 앞뒤 사정도 모르고 과도한 행동으로 어른들은 난처하게 만드는 경우가 되는 일이 종종 일어납니다. 아사헬의 경우가 그러합니다. 아브넬 장군은, 자기 패의 패배를 인정하면서 전장에서 물러가면서 사태는 진정국면이 됩니다.
그런데 아직도 사태 파악을 못하는 아사헬은 형들로부터 인정받기 위해 끝까지 적의 우두머리인 아브넬 장군을 치기위해 뒤쫓아갑니다. 아브넬 장군이 적의 수장답게 점잖게 나무랍니다. 그러나 아사헬 장군을 분이 풀리지 않은 듯 계속 따라붙이면서 “나는 걸음이 빠르니 당신을 붙잡겠다”고 다짐합니다.
그러나 아브넬 장군은 말하기를, “나 말고 다른 사람을 잡아라. 내가 너를 죽이게 되면 내가 너의 형 볼 면목이 없다”고 했습니다. 그래도 말을 듣기 않자, 아브넬은 선수를 쳐서 긴 창으로 뒤따라오는 아사헬을 죽이고 말았습니다. 이로서 장난으로 시작된 전쟁이 요압 가정에 큰 불행이 불러일으킨 것이 됩니다.
이로서 하나님의 전쟁을 빙자한 사적인 복수심과 얽힌 전쟁이 다음 기회를 노리게 되었습니다. 사람의 마음이란 이처럼 겉으로는 명분을 내세워 사적이 아님을 가장하지만 막상 일을 진행해보면 그동안 잠재된 사적인 감정이 작동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진짜 하나님의 전쟁이란 이런 사적인 복수심을 갖은 그 사람이 하나님의 원수로 들통나서 싸우는 식으로 전개됩니다.
이런 복수님 앞에서 하나님도, 사물도 제대로 관계맺지 못하고 오히려 노골적으로 자기 위주로 재편성해놓고 있다. 이것이 바로 자아가 받는 스트레스입니다. 사람들이 자아가 어디서 생기는지도 모르면서 자꾸만 두뇌만 몽롱하게 만듭니다. 실은 몽롱한 것이 아니라 멍청하게 합니다. 심하면 자살도 하게 됩니다. 즉 이들은 고통을 받는 자아만 제거하면 모든 문제가 해결되리라 보고 있습니다.
자아라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응답하라고 하나님이 신체성과 더불어서 만든 자리입니다. 그래서 사람은 떡으로만 사시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살게 되어있습니다. 불신자라고 할지라도 죽은 뒤 하나님께서 호출하면 그 호출에 응답하기 위해 저주받은 자아는 죽음 뒤에도 간직되어야 합니다. 요한복음 11장에 나오는 마르다의 오빠 나사로의 부활을 생각해보면, 예수님께서 “나사로야 나오너라”고 꼭 살아있는 사람처럼 불러냅니다.
세상에 나가서 말씀으로 쓰임받는 자라면 다른 사람의 비복음적인 것을 발견하면서 믿음을 믿음의 눈으로 세상을 ‘사랑받고 사는 자’와 ‘미움받고 사는 자’를 구분지을 수 있습니다. 이런 자아로서 우리가 먹든지 마시든지 주를 위하여 살아야 합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의 자아를 우리 자신을 위해 사용하지 않게 하옵소서. 말씀 전달을 위해 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이근호
10-12-12 18:21
003강-삼하2장14-17(전쟁의장난요소)-2sa091101-(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 사무엘하 2장 14절에서 17절까지입니다. 구약성경 465페이지입니다.
사무엘하 2:14-17
“이 일로 인하여 여호와의 원수로 크게 훼방할 거리를 얻게 하였으니 당신의 낳은 아이가 정녕 죽으리이다 하고 나단이 자기 집으로 돌아가니라 우리아의 처가 다윗에게 낳은 아이를 여호와께서 치시매 심히 앓는지라 다윗이 그 아이를 위하여 하나님께 간구하되 금식하고 안에 들어가서 밤새도록 땅에 엎드렸으니 그 집의 늙은 자들이 곁에 이르러 다윗을 일으키려 하되 왕이 듣지 아니하고 저희로 더불어 먹지도 아니하더라”
방금 보았던 이 성경 말씀이 무슨 내용인지 잘 짐작이 안 되죠? 무슨 이야기냐 하면, ‘애들 시켜서 장난치게 하자’라고 한 겁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이 주신 땅에 들어갈 때, 그때 그들은 감격했습니다.‘하나님 고맙습니다.’하고 들어갔어요. 그런데 그 땅에 오래 사니까 마치 그 땅이 하나님이 안 계신 땅처럼 느꼈죠. 처음에 우리 교인들이 처음에 올 때는 교회를 상당히 두렵고 조신하게 행동하다가 교회 좀 오래 다니고 그리고 교회에 그냥 오래 다닌 것이 아니라 목사나 장로쯤 되면, 교회를 장난같이 그렇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어요.
에베소 교회 같은 경우에는 첫 사랑을 잊지 말라 했는데, 하나님이 주신 은혜가 넘치는 곳, 처음 올 때는 감격으로 받아들입니다. 그러다가 좀 오래있으면, 그 은혜는 다 사라지고, 탈색되고 그 다음에는 모든 것이 일상처럼 돼버리고 평범해져 버리고 하나님의 고마움 같은 것은 사라져 버립니다. 그러면 사라지면 자극적인 게 필요하잖아요?
그래서 이들은 요압이란 장군, 그리고 사울의 아들 이스보셋의 장군 아브넬이, 사울 쪽에는 아브넬이고 다윗 쪽에는 요압이란 장군이 심심하니까 장난을 친 거예요.ㅎ 애들은 어른들이 농담 삼아 이야기해도 애들은 진심으로 듣지 않습니까? 그래서 장군들이 심심하니까, 전군이 포진해 있다가 아무것도 모르는 애들 앞에서 숫자를 맞춰서 이쪽 12명, 저쪽 12명해서 ‘너희 중에 누가 힘센가 보자. 누가, 누가 잘하나 보자.’ 이래서 싸움을 붙였는데, 애들은 이걸 장난으로 보지 않고 진지하게 봐서 애들은 배후에 누가 시키느냐, 어른들이 시키면, 어른들 보란 듯이 애들은 목숨을 바치고 목숨을 던져서, 장난으로 시작한 일이 심하게 되고 말았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땅에서 하나님의 전쟁을 할 때는, 하나님의 지시에 따라야 한다.’ 이것은 지난 시간에 했잖아요. 다윗은 전쟁을 하더라도 물어보고 했어요. ‘하나님이여 치리이까? 이렇게 영적으로 전쟁을 생각했는데 반해서 그 밑에 있는 다윗의 부하나 사울의 부하들은 농담내지는 장난처럼 이렇게 간주하면서 거룩한 하나님의 땅에서 거룩한 전쟁을 벌인 겁니다. 여기서 이 본문이 우리에게, 인간들은 두 층이 있는데, 하나는 장난으로 살아가는 층이 따로 있고, 하나는 진지한 층은 따로 숨겨놓고 살아가고 있다. 라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먼저 장난으로 살아가는 것은 뭐냐 하면, 일단 여유가 있다는 말이거든요. 일단 배불러요. 그럴 경우에는 어떻게 하느냐, 사람은 게임을 하게 돼 있습니다. 인간의 본성은 게임 이예요. 게임이라 하는 것은, 내가 어느 정도로 센 놈이냐, 그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대충 내가 이기고 싶은 사람부터 붙어서 게임을 즐기는 것, 신학 하는 목사들이 그런 것도 많이 해요. 인터넷에서 누가 더 센가 한번 붙어볼까?????ㅎ 누가 신학 많이 했는가 한번 붙어볼까? 여호와 증인이 ‘딩동’하고 문 열 때는, 우리들보다 누가 성경 구절 더 많이 외우고 있는 사람 있는가 하고 자신 있게 문을 열죠. 그런데 그 배후에 있는 놈들이 더 나쁜 놈들이죠. 그들은 할 일없는 아주머니들 앞장 세워서 장난치죠.
장난을 친다는 것은 이렇게 그림으로 그리면 쉬운데 이런 겁니다. 선을 두 층을 만들어 봅시다. 위층에는 장난치는 층이고, 밑에는 다른 층이 있어요. 사람이 밥 먹고 사는 데 약간 여유가 생겨버리면, 사람이 짐승이 아닌 이상은 약간 배부르면 딴데 신경을 쓰게 돼 있습니다. 그게 뭐냐 하면, 게임에서 승리하는 것!!
비트겐슈타인이란 유명한 언어 철학자가 있는데, 그 사람이 이야기 했어요. ‘인간의 말발은 전부 다 게임용어다.’여자들이 수다를 떨고 말을 하는 것은, 말 중에 뭐가 있느냐 하면, 어떤 의도가 있느냐 하면, ‘어쨌든 내가 당신보다 위에 있잖아? 당신은 내 밑에 있잖아? 확인하고 싶어서 그렇게 말을 많이 한다는 거예요. ’나한테 꿇어. 빨리 꿇으란 말이야. 그런데 그건 가정 주부들이고, 바쁘면 게임(위층)이 아니고 아래층으로 내려가요. 아래층에는 뭐냐 하면, 생존인데 생존은 게임이 아니고, 진지합니다. 열심히 일하지 않으면 밥 못 먹고 사는, 나라는 존재가 아주 사라질 판에 있기 때문에 여유가 없어요. 하지만 배 좀 부르면, 문화 활동, 스포츠, 이 승엽이 안타 하나 쳤는데, 다음에는...박 찬호...양키스, 이런 것에 관심이 있는 거예요.
그런데 오늘 본문 같은 경우에는 위층에서 애들 앞에서 게임을 하려고 했는데, 위층에서 불이 번져서 아래층으로 내려와 버린 거예요. 이것은 걷잡을 수 없는 사느냐 죽느냐, 죽느냐 사느냐, 아래층까지 내려와 버린 겁니다. 싸움이 크게 번져 버렸습니다. 친구 간에 술 먹고 처음에는 농담 삼아 이렇게 하다가 한번 떠밀어 본다고, 그럼 기가 차가지고 ‘아니 이거 감히 농담이 아니잖아, 하며 더 세게 떠밀죠. ’어 해보겠단 말이지 결국? 그러면서 웃통 벗고 나오죠.ㅎ 웃통 벗고 나오면 다른 사람한테는, 웃통을 벗는다는 말은 그만큼 웃통 벗을 시간 여유, ‘다른 사람들아 말려줘‘ 이런 뜻이거든요.ㅎ 말리기를 원해요. 남자는 여자를 몰라요. 여자는 남자를 몰라요. 말리기를 원하는 겁니다. 그것도 안 말리면 다음에 보자. 하고. 말리면 싫은 척 하고 하죠.
장난 수준이 진짜 수준이 됐습니다. 자, 그러면 하나님의 전쟁이 결국은 다윗의 전쟁은 물어보고 하는 전쟁인데, 인간의 모든 전쟁은 어디서부터 했느냐 하면, 장난삼아 시작해서 안쪽으로 내려가는 거예요. 안쪽으로 내려가면 뭐가 있느냐 하면, 인간의 자존심과 관련돼 있습니다. 그 뒤의 내용이 바로 18절에서부터 29절까지 계속됩니다. 그 내용을 이렇게 보면 이렇습니다. 구약의 사무엘상, 하 열왕기상, 하 보면, 교인들이 이 대목 보는 것을 싫어해요. 이건 목사도 마찬가지입니다. 왜냐 하면, 무슨 말을 간단히 하면 될 텐데, 복잡하게 써놓으니까, ‘에이 복잡해서 안 보겠다. 하고 안 보시는데, 그걸 위해서 목사가 있습니다. 목사는 간편하게 해 주니까...ㅎ
아브넬이라는 사람과 요압이라는 사람이 장난삼아 애를 보냈는데, 전쟁이 확산되었습니다. 그때 다윗 쪽에 속한 사람은 요압의 형제가 있는데, 동생이 있어요. 18절에“스루야의 세 아들 요압과 아비새와 아사헬이 있는데, 막내가 젊다 보니까 객기가 심해요. 아사헬 앞에( 요런 말 어렵지만 쉽게 하겠습니다) 어른이 ‘얘들아 저쪽은 사울이고 우리는 다윗이야. 우리는 다윗 편이고 저쪽은 사울 편이야. 하나님이 저쪽은 접었고, 하나님이 우리 편에 섰어.’ 라고 말을 해주면, 젊은 사람이나 애들은 앞 뒤 절을 다 끊어버리고,‘하나님은 우리 편이다.하나님은 우리 편이다.’ 그거만 생각해가지고, ‘내가 하는 것은 무조건 하나님의 일이 된다.’이렇게 고만 번져요. 확대가 되요. 문제가 커집니다.
‘얘야 우리 가정이 교회 나가.’교회 나가요? ‘우리는 복 받은 거예요? ’복 받은 거야.‘ 여기서 멈추면 되는데, ’그럼 내가 무슨 짓을 해도 복이죠? 이렇게까지 나간다니까요. 사람이요. 누구나 그래요.
그런데 아사헬이란 사람은, 평소에 갖고 있던 적에 대한 복수, ‘형님, 제가 복수하겠습니다.’ 복수하려고 하는데, 저쪽의 왕초가 누구냐 하면, 아브넬이라는 사람이 왕초가 되거든요. ‘형님, 평소에 아브넬이 솜씨가 있다고, 칼싸움 잘 한다고 했죠? 형님 대신 제가 한 솜씨 보이겠습니다. 이 무림의 고수가 나가겠습니다.’라고 객기를 부린 거예요. 그런데 형들은 말리죠. ‘얘야 고수는 고수가 처리할게, 니가 나설 게임이 아니다.’‘아닙니다. 이번 차에 제가 얼마나 용감한지 적들에게 알리고, 특히 형들에게도 내 위상을, 내 존재감을 알리겠습니다.’라고 나오죠. 이래 꼭 나와요. 제가 크면서 많이 봤습니다.
어른들 이야기하는데, 애들이 꼭 꼽사리껴요. 돌아가신 할아버지가 돈 문제 때문에 사기당해 가지고 어른들하고, 당신은 도장 찍고....., 어른들이 얘기 하는데, 가만히 보니, 자기(삼촌) 아버지가 이유도 모르고 다 끊어버리고 자기 아버지가 당한 것 같거든요. 그래서 젊은 객기로‘아저씨가 우리 아버지 힘들게 합니까? 하고 횡포를 부리기 시작한 거예요. 그러면 저쪽 아저씨가 ’얘들아 젊은 애들은 끼는 데 아니다.‘ 이러면 아버지가 ’니는 끼는 게 아니야.‘ 그러면 ’아닙니다. 아버지는 제가 지켜 드리겠습니다. 이래 나오더란 말이죠. 가정에 이러한 일, 제가 말 안 해도 많이 겪어 왔고, 몸도 행하셨고 많이 했을 겁니다. 이번 차에 내가 아버지한테 얼마나 효자고 아버지께 충성하는지, 심지어 교회에서도 그런 일이 많아요. 인터넷에 글을 올려가지고, 제직회....앞 뒤 다 끊어버리고, 이야기 좀 하자 해도‘이야기 들을 필요 없습니다.’하면서 글을 올려버리고...ㅎ ‘아이고, 충성심이 오바 ,잠바 다 해놓고 충성심이 어찌 그리 많은지...ㅎㅎ
아사헬이 평소에 자기 실력이 얼마나 되는지 점검하려고 하는 거예요. 아사헬의 특징은 굉장히 빨라요. ‘고맙습니다. 감사합니다.’할 정도로 굉장히 빨라요.ㅎ그래서 아브넬이 ‘요압아, 이제 대충 정리하자. 우리가 생각도 못했는데 애들이 너무 진지하게 나가서, 농담은 농담으로 하고 이제 판 정리하자.’하고 이래 나오려 했는데, 이제 나오려고 서서히 가는데, ‘이번에는 다윗 니 편이 이겼다. 다음에는 내가 이길게.’어디까지나 본 게임이 아니고, 장난 게임으로 한 것이기 때문에, 어른들은 장난으로 한 것인데, 그것도 모르고 아사헬이 ‘아브넬, 게 섰거라.’아브넬이‘이게 어디 젊은 애가 반말을 해. 어이, 따라오지 마라. 요번 전쟁을 요거로 하자. 본 게임은 또 하나님이 열 것이다. 고만 따라 온나.’ ‘너 비겁한 인간, 안 설래?? ’어이 고만하자.‘ 그런데 아사헬이 굉장히 빨라요. ’야, 니 걸음 빠르네.‘ ’니는 걸음이 빠르지만 난 창을 잘 쓰니 조심하라.‘ 조심할 게 뭐 있노. 비겁한 인간아. 게 섰거라.’ ‘니 찔린데이’그래서 달려가면서 뒤로 창을 찔러 죽고 말았어요. 장난이 사적인 요압 가정에 복수가 됐습니다.
왜, 하나님께서 이런 일을 일으켰을까요?? 다윗은 전쟁을 할 때, 자기 원수라는 개념이 없어요. 하나님의 원수기 때문에 하나님께 자기(하나님) 전쟁에 참여시킨다는 이런 의미인데, 인간의 개인적인 주체는 ‘하나님, 하나님,’ 하고 포대기를 덮어놔도 항상 속에 있는 것은 사적인 복수심을 끊을 수가 없습니다. 특히 젊은 사람들은 복수심이 들끓어요. 그래서 무슨 사태가 일어나면 하나님을 빙자해서 사적인 복수를 이차에 같이 안 들키고 섞여서 해보려는 그런 심리가 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전쟁이 무슨 전쟁인가? 사람 전쟁이 되요. 이건 대전에서 강의한 것인데, 강의가 상당히 어려웠어요. 인간의 자아가 어디 있느냐? 문제를 던진 겁니다. 인간의 자아가 손바닥에 있느냐, 머리에 있느냐, 어디에 있느냐 물었어요. 묻고 답변 했어요. 보통 인간의 자아는 손바닥에는 없죠. 손바닥을 끊어도 ‘아야’ 하고 이야기 할 수 있으니까 손 바닥하나 없어도.. 그럼 자아가 혓바닥에 있는가. 하여 혀를 끊으면 ‘음~’ 하고 아프다고 느끼는 자아는 있다 말이죠. ‘아하, 자아는 뇌 속에 있구나. 하고 뇌를 반쯤 잘라보자. 시험을 해 보았습니다. 어떤 사람이 서부 시대에 철로 가에 폭탄이 터져서 뇌가 반 날아간 사람이 있습니다. 반 날아간 사람에게 ’이 사람아, 정신 있나? ‘정신 있다.’ 뇌가 반 날아갔는데 자아가 있어요. 근데 나중에 뇌가 반보다 더 날아가니까 그담에 사람이 죽어버렸어요. 죽어버리니까 그담에 무슨 문제가 일어났느냐 하면, 니가 죽은 다음에도 자아가 있나 없나 물어볼 수가 없네요. 사람이 죽어버렸으니까. 가만히 있으니까.
그래서 과학자들은 자아가 어디 있는지 어느 대목에 있는지 몰라요. 죽은 사람 두뇌를 해부하고 두뇌 해부해도 반짝 반짝 네온사인처럼 불빛만 반짝이지, 자아가 어느 구석에 있는지 몰라요. 왜 과학자들이 모르느냐 하면, 자아라 하는 것은 과학적으로 알 수 있는 게 아니고, 과학자들이 관찰하는 인간도 자아가 있기 때문에, 지가 보고 싶은 것만 보기 때문에, 진짜 자아는 몰라요.
근데 성경은 어떠냐? 성경은 모든 것이 하나님의 말씀대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자아라 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인간의 신체에 와 닿을 때, 말씀을 듣는 응답의 자리, 그게 자아입니다. 목사님, 근거 있습니까? 라고 물으신다면, 근거 있습니다. 죽은 자가 자아가 있느냐 할 때, 죽은 자가 자아가 있다, 없다 하는 것은 죽은 자가 판단하는 것이 아니고, ‘나사로야, 니 나흘 됐는데 나온나. 니 누이동생이 보고 싶대. ’예‘ 하고 나올 때, 주님께서 불러주면, 주의 말씀 속에 응답이 있어요. 어떤 능력이 있어요. 능력이 뭐냐, 죽은 시체를 자아로 만들어 내는 능력이 말씀 속에 있어요. 그래서 사람은 말씀으로 산다는 겁니다.
사람이 말씀으로 산다는 것이 뭐냐 하면, 자꾸 말씀이 아니고 내 힘으로 내가 살아버리면, 자살하면 그만 이예요. 노무현처럼 부엉이 바위에서 뛰어내리면 그만입니다. ‘아이고, 내 몸 죽으면 없어지겠지.’천만의 말씀!! 평생 동안 인간이 그동안 살아온 것이 하나님의 말씀의 덕택으로 살았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을 어겨버리면, 그 자체가 죽은 것이 되는 겁니다.
살아도 말씀이 안 들리면 그 사람은 자아가 없는 인간이 돼요. 자아가 없기 때문에 그 다음에 인간은 뭘 하느냐, 자아를 없애야 고통이 없어진다고 뭘 먹느냐 하면, 퇴근하고 술을 먹어요. 우리교회는 술 먹는 사람이 아무도 없지만, 술을 먹으면 사람이 몽롱하게 됩니다. 몽롱하게 된다는 말이 제가 좋게 표현해서 그런 것이고, 멍청하게 되는 겁니다.ㅎ 술을 한 잔 먹겠다고 하는 것은 자진해서 억지로 ‘나는 이번에 멍청하게 돼 볼래.’비싼 돈 주고 아침이슬 먹어가면서 멍청하게 되고, ‘이래 가지고는 덜 멍청해.’ 더 멍청해 가지고 백세주 섞어가지고 더 멍청해지고, 나중에 진짜 멍청해가지고 다리 꼬이고 혀 꼬이고 하다가 음주단속 걸려서 5천만 원 날아가고, 세상에 이런 멍청이가...ㅎ
인간이 자아가 있으니까 모든 게 스트레스 받으니까, 스트레스 없애는 방법은 자아를 멍청하게 바보로 만들기 위해 마약을 하든지 술을 먹어서 멍청하게 만들어서 멍청한 그 순간은 고통이 와도 고통을 못 느끼는 접선의 지점을 내가 삭제하고 지워버림으로 해방되고 싶은 그 몸부림!! 그게 술 처먹는 거예요. 술 처먹고 싶어서 억지로 제사지내고 응복 하면서 술 처먹고,ㅎㅎ 그 술 취하는 게 뭐냐 하면 자아가 자극받기 위함인데, 다윗은 나라 하는 것은 내가 행복하기 위해서 내가 있는 것이 아니고, ‘주의 말씀에 필요한 나’ 가 되는 거예요.
그게 고린도전서에 나옵니다. 고전10:31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니가 먹든지 마시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자아가 되라 이 말이죠. 너 자신의 즐거움을 위한 자아가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그러면 맨 날 교회 와서 기도만 하느냐, 그런 말이 아니고, 일이 파도가 치듯이, 해변에 가면 파도가 해변에 와서 치듯이, 하나님의 말씀의 고마움이 우리에게 와서 다리와 무릎을 자꾸 쳐요.
그러면 예를 들어서 택시를 타고 갈 때, 누가 이야기 하는 것을 들어보면, ‘아이고 오늘 아침에 이야기 한 것처럼 어떤 사태가 오면, ’ 아하, 믿음이 없는 사람은 저런 정죄함을 받는구나. 믿음이 없는 사람은 살아도 사는 게 아니고, 돈을 벌어도 행복한 게 아니구나.‘ 다시 한 번 말씀의 중요한 진리성과 진정성을 다시 한 번 깨닫는 거예요. 그걸 교회 와서 말씀을 정리하고 세상에 나가면, 자아가 말씀대로 사는 자아가 나가기 때문에 세상에 나가서도 어떤 재미가 있느냐 하면, 모든 것이 말씀대로 이루어진다는 것을, 전에는 안보였는데. 이제는 하나하나 보이면서 살아가는 겁니다.
여러분들이 가끔 교회나 TV 기독교 방송에 나오는 것을 보면, 뭘 느끼느냐 하면, ‘아 이단들이 왜 이단이냐, 한국교회들이 왜 이단인가 파악하는 고 재미가 있어요. 저는 TV를 잘 안 봅니다마는 연속극 이런 거 보면서 뭘 느꼈느냐 하면, 불신자들이 살아가는 한계가 ’아! 고통스런 자아를 남에게 욕설과 복수로 퍼부으면서, 막장 드라마처럼, 방금까지 애인 사귀었다가 머리 한 대 맞고 기억상실에 걸려서 ‘누구신지요’또 맞으면 옛날 본부인 알아보고 또 사귄 사람 못 알아보고, 그래서 한 번 더 맞으면, 사귀는 사람 알아보고 본부인 못 알아보고...ㅎ
그런걸 보면서 ‘아 인간의 자아가 오락밖에 모르는 게임의 승자, 나는 실패하면 안 돼. 맨 날 승자가 되고자 하는, 이 말씀에 어긋나는 주님이 승자여야 하는데, 내가 승리자가 되려는 이 비 복음 적인 것 때문에 내가 스스로 힘들게 살아간다는 것. 오늘 여러분! 이후부터는 자꾸 물어보면서 ’하나님이여, 저는 어디에 쓰이면 됩니까? 말씀으로 어떻게 굴리면 됩니까? 라고 물어보면서 인생을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하나남께서 세상만사를 만들어 놨는데, 우리 몸도 우리 팔, 다리도 다 주의 것이고, 그런데 왜 자꾸 우리는 내 것이라 여기고 알아서 스스로 서려고 합니까? 힘들고 괴롭고 고통스럽고 스트레스 받고, 다 나밖에 모르기 때문에 내 중심으로 살기 때문에 그런 줄 압니다. 아직까지 생명주시고 먹고 입을 것, 주시는 것, 하나님께 고마워하라고 살게 하시는 것인 줄 알고 세상에 나가서 복음을 알게 된 감사를 세상에 자랑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 설교 전 기도 ◈
세상만사가 다 인간 마음대로 안 되고, 참새 떨어지는 것도 다 하나님의 허락이 있어야 되는 것처럼 주님께서 우리를 성도답게 만들어 가고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자고 다 같이 기도합시다.
『하나님아버지, 내가 생각하는 선도 잘못이고 내가 생각하는 천국도 엉터리였습니다. 주께서 준비해 놓은 하늘나라, 우리가 알 수 없으나 우리가 매일같이 부딪히는 일들을 통해서 내가 하나하나 깨질 때마다 새롭게 보여지는 천국, 새롭게 보여지는 성도의 귀한 것, 예수님의 피의 고마움, 지금도 목자 되셔서 보이지 않는 손길로서 저희들이 원치 않는 좁은 길, 생명의 길로 인도하여 내시는 그 놀라운 작업에 우리가 모든 것을 다하여 주 앞에 감사와 영광을 돌릴 수 있는 여생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