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애굽기 30장 - 31장 주석
출애굽기 30장 - 31장 주석
이름 : 이진용(IP:222.99.120.158)
출애굽기 30장 - 31장
30:7-10
요단강이 갈라진 것도 속죄소의 위력이며, 막강한 여리고성이 일시에 무너진 것도 다 속죄소의 위력 때문이다. 즉 하나님은 속죄소를 앞장세우시고 이 지상에 등장하셨다. 속죄소를 앞장세움을 고려하지 않는 하나님은 참 하나님이 아니다.
지상의 모든 자연물과 인공물은 속죄소 앞에서 무너져야 하는 이유는 바로 태초의 '거룩' 앞에서 지상의 모든 속된 것은 심판 당해야 하기 때문이다. 창세기 1장에서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시고서는 "보기에 심히 좋았더라"고 하셨다. 즉 더할 나위 없이 최상의 아름다움이 피조세계에 서려있었다는 말이다. 하나님께서 대만족 상태에 놓여 있었다.
그런데 인간이 죄를 범하고 난 뒤부터는 이 아름다움이 깨어지고 말았다. 당연히 하나님은 이 세상에 대해서 불만을 토했다. 따라서 이 세상을 징벌하기 위해서는 그만한 근거가 있어야 하는데 태초의 아름다움이 '거룩'이라는 이름으로 이 인간 세계에 덮치기 시작했다. 애굽에서의 재앙이 그러하고 요단강과 여리고성 앞에서 그러했다.
거룩하지 못하고, 즉 하나님에게 만족을 드리지 못하는 그 어떤 것도 하나님의 거룩 앞에서는 사라져주어야 하는 것이다. 바로 그 거룩이 속죄소에 담겨 있고 그 거룩의 아름다움을 극상까지 끌어올리는 취지로 그 공간을 아름답게 만들기 위한 조치가 바로 향기로 충만 시키는 방식이다.
아름다움을 가지고 죄로 아름답지 못한 세상을 징벌하시는 것이다. 그러나 이미 거룩으로 동행하고 있는 거룩한 자기 백성에게서의 거룩이란 모든 죄까지 용서시키는 거룩이다. 바로 그 근거를 이 향단이 표출해야 한다.
레위기 10:1-2에 보면, '여호와께서 명하시지 않는 다른 불'이라고 되어 있다. 즉 하나님께서는 제단에서 나온 불로 지핀 향수가 아니면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충족시킬 수 없다는 말이다.
하나님 보시기에 완벽한 아름다움과 거룩은 오로지 거룩한 제물의 '대리희생'에서만 나온다. 그냥 사람들보기에 향기로운 향수로 성소를 뒤범벅 한다고 해서 하나님께서 만족해 하시는 분이 아니다. 그러한 향수를 생산하기 위해서 동원된 그 불꽃은 바로 희생 제물의 억울한 죽음에 관여한 제단불꽃이어야 한다.
물론 세상 사람들도 아름다움을 좋아하고 원하고 있다. 구약 에스더에 보면, 그 당시 세계 최고의 제국을 구가했던 아하수에로 왕이 한 일개 왕비의 미모에 녹아 떨어졌다. 하나님이 주신 아름다움으로 하나님의 백성은 구원을 받았다. 단순한 한 여인의 아름다움은 그저 당사자로 하여금 부귀영화가 보장되는 생활을 하게 만들 뿐이지 다른 이까지 구원하는데 이르지 못한다.
그러나 에스더는 삼촌 모르드개의 조언을 받아들여 자신의 미모를 '희생하는 미모'로 간주해서 "죽으면 죽으리라"고 나서게 한다. 이 '희생하는 아름다움'으로 인해 유대인을 모해해서 몰살시키려는 세력은 되레 다 죽게 되고 하나님의 백성인 유대인들은 대 제국 앞에서 버틸 수 있게 되었다.
이처럼 희생의 의미가 담기지 아니하면 하나님은 그 어떤 아름다움이나 거룩도 더럽다고 거부하신다. 예수님 당시에 어떤 마리아는 값나가는 향수병을 가져다가 일시에 예수님의 발에 뿌려서 졸지에 예수님 주변이 향수로 진동케 했다. 그 때 가룟 유다는, 예수님의 희생이 빠진 아름다움만 고려해서, "저 비싼 향수를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었더면 예수님의 가치가 드높아졌을 것이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예수님은 "저 여인의 향수는 나의 아름다운 희생 죽음을 아름답게 했다"는 것이다. 세상 사람들이 예수님에게서 창조 때의 거룩한 아름다움을 찾지 못하는 것은 예수님의 행색이 인간들이 필히 얼굴을 돌리고 싶은 모습으로 등장하셨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는 자진해서 하나님의 영광을 포기하시고 이 땅에 오셔서 밑바닥 삶의 방식을 채택하여 사람들의 종이 되셨는데 그 정도에 멈추지 않으시고 하찮은 죄인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하나 밖에 없는 귀한 목숨을 아낌없이 제공하셨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세상 영광과 아름다움이 나타나지 않는다고 주저 없이 예수님에게 얼굴을 돌려버린다.
소위 성도라고 자칭하는 이들도, 평소에 예수님에 대해서는 부담스러워하고, 귀찮게 여기고, 떼내고 싶은 혹처럼 여긴다. "안 보이고, 안 나타나고, 안 얼쩡거렸으면 좋겠다"는 의식을 가지고 예수님을 대한다. 예수님 말고 다른 것으로서 자신을 만족시키는 아름다움을 얻기를 원한다.
이로서 예수님은 소위 '성도'라는 작자들에게서마저 천덕거리가 되고 말았다. 고린도후서 2장에 보면, 사도바울은 스스로 자신이 '예수님의 향기'라고 했다. 즉 구원받은 자들이 예수님을 영광스럽고 최상의 아름다움으로 여기지 아니하면 누가 그 아름다움을 귀하게 간직하겠는가! 우리가 천지창조의 그 아름다움을 예수님의 생명 안에서 공유하게 되었음을 영광스럽게 여기자.
30:11-16
생명의 속전은 부자라고 더 내는 것도 아니요, 가난한 자라고해서 덜 내는 것이 아니라고 했다. 부자란 많이 소유한 자요, 가난한 자는 적게 소유한 자다. 그런데 이 둘 사이의 차이를 없애겠다는 것이다. 즉 소유관점으로 사람을 평가하는 것을 하나님으로서는 용납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하나님 앞에서 인간의 생명이란 부자나 가난한 자나 전혀 차이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것은 더 나아가서 인간이 자기 소유로서 자신의 구원의 유리와 불리를 측정할 수 없다는 말이다.
자신의 가진 것으로 자신의 가치를 논하는 것은 성전세를 내라는 하나님의 명령 앞에서는 그것이 통하지 않는 사고방식이라는 것이다. 그 생명의 속전이 모아져서 성전을 유지하는 비용으로 모아지게 된다. 그 성전에서는 아침 저녁 마다 흠 없는 어린 양이 희생제물로서 태워진다.
바로 이러한 반복적인 희생제사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살려주는 생명의 근원이 되는 것이다. 성전세를 내라는 것은 곧 현재 너희 전체가 애굽에서 나오고 이스라엘 나라가 세워질 때부터 원래 하나님 것이다 는 것이다. 더 이상 인간 본인들의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이렇게 되는 생명의 속전은, 인간이 구원받기 위해 하나님께 바치는 비용이 아니라, 이미 어린 양의 희생으로 구원된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하여 어린 양의 희생의 가치를 부각시키는 하나의 방식이 된다. 신약 시대의 표현으로 하자면 우리 목숨을 대신하신 메시야의 목숨 값이 반 세겔이라는 것이다.
동시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신의 목숨 값으로 반 세겔이라고 제시하므로서 자기들이 스스로 자기에게 값을 매기는 권한 자체를 하나님께서 박탈시키는 것이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생명 값이 과연 반 세겔에 불과한가? 그 해답은 요한계시록 22:17에 나와 있다. "성령과 신부가 말씀하시기를 오라 하시는도다 듣는 자도 오라 할 것이요 목마른 자도 올 것이요 또 원하는 자는 값없이 생명수를 받으라 하시더라"
여기에 보면 생명수 값은 아예 없다고 되어 있다. 그리고 베드로전서 1:18-19에 보면, '은이나 금'으로 자기 목숨을 포장한다고 해서 그것으로 자신의 목숨 값이 되지 못한다는 것이다. 성도의 목숨 값은 다른 분이 대신 치러주셔야 하는데 그 값은 바로 예수님의 '보배로운 피'다.
이것은 부자나 가난한 자가 구별 없이 동일하게 반 세겔씩 내라고 요구하시는 하나님의 취지에 부합되는 것으로서, 모두들 자기 고유의 가치는 날라가 버린 상황에서 오직 하나같이 예수님의 가치에 눈을 두어야 한다는 것을 뜻한다. 이것은 인간은 자기 자신의 가치성을 그대로 유지하면 안된다는 것을 뜻한다.
누가복음 16장 초반에 보면, 우리 인간들의 상식을 뒤엎어버리는 희한한 예수님의 비유 이야기가 나온다. '불의한 청지기 비유'다. 그 직원은 자기가 소속해 있는 회사를 위하여 일하기 위해 채용된 사람이다. 그러나 그 사람이 주인에게 밉게 보여서 얼마 안 있어 쫓겨날 처지에 놓이게 되었다.
그래서 그 때부터 이 불의한 직원은 자기 장래를 대비하기 시작한다. 그 때부터 주인의 재물에 손실을 입히면서까지 과도히 자기 살 궁리에 몰두하고 실행에 옮긴다. 그 가게와 거래하는 사람들에게 연락해서 기름 100말 같으면 50말로 장부 조작해 주기도 하고, 또는 밀 100석 같으면 80석으로 감해준다.
누가봐도 사문서 위조범이다. 자기 것도 아니면서 함부로 탕감해주어서 호의를 쌓아놓았다가 얼마 안 가서 퇴직할 때를 대비하여 도움을 청하기 위해 그런 악한 짓을 했다. 이것은 사기에다 누가 봐도 비난 받을 짓을 했다. 자기 장래를 대비하는 일이라면 뭐든지 선한 일이 될 수 없는 불의한 일은 어디까지나 불의한 일이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의 불의한 짓보다 더 불의한 것은, 인간의 현 목숨이 죽고 죄악된 목숨인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십자가 지러 오신 예수님의 가치를 제대로 못 알아보는 그들이라는 것이다. 즉 자신의 현 목숨이 정상이라고 우기는 작자들이 이 불의한 자보다 더 저주받은 자라는 것이다. 예수님의 십자가 앞에서는 여전히 자기 목숨을 정상으로 보는 것은 참으로 예수님의 심오한 십자가의 의미를 모독하는 지옥의 자식들이다.
30:17-21
민수기 19:20에 보면, “사람이 부정하고도 스스로 정결케 아니하면 여호와의 성소를 더럽힘이니 그러므로 총회 중에서 끊쳐질 것이니라 그는 정결케 하는 물로 뿌리움을 받지 아니하였은즉 부정하니라”라고 되어 있다. 이러한‘인간 정결’의 표본자로 나서야 될 자들이 우선 제사장들부터이다. 또한 레위기 15:13에 보면, “유출병 있는 자는 그 유출이 깨끗하여지거든 그 몸이 정결하기 위하여 칠일을 계산하여 옷을 빨고 흐르는 물에 몸을 씻을 것이요 그리하면 정하리니”
그런데 정결케 하는데 있어 물 뿐만 아니라 나머지 세 가지가 더 있다. 이제 이 네 가지가 어떤 곳에서 하나의 의미로 상호 유통될 수 있는지를 살펴볼 차례다. 물 외에 세 가지 중 하나가 피다. 에스겔 43:20에 보면, “네가 그 피를 취하여 제단의 네 뿔과 아랫층 네 모퉁이와 사면 가장자리에 발라 속죄하여 제단을 정결케 하고”라고 되어 있다. 히브리서 9:22에 보면, “율법을 좇아 거의 모든 물건이 피로써 정결케 되나니 피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라고 되어 있다. 따라서 물과 피가 정결케 하는 주재료가 됨을 알 수 있다.
피나 물 말고 또 정결케 하는 재료가 있다. 그것은 바로 재다. 히브리서 9:13에 보면, “염소와 황소의 피와 및 암송아지의 재로 부정한 자에게 뿌려 그 육체를 정결케 하여 거룩케 하거든”라고 되어 있다. 민수기 19:12에 보면, “그는 제 삼일과 제 칠일에 이 잿물로 스스로 정결케 할 것이라 그리하면 정하려니와 제 삼일과 제 칠일에 스스로 정결케 아니하면 그냥 부정하니”라고 되어 있다.
또 정결케 하는 것이 있다. 그것은 바로 기름이다. 레위기 14:28-29에 보면, “그 손의 기름은 제사장이 정결함을 받을 자의 우편 귓부리와 우편 손 엄지가락과 우편 발 엄지가락 곧 속건제 희생의 피를 바른 곳에 바를 것이며 또 그 손에 남은 기름은 제사장이 그 정결함을 받는 자의 머리에 발라 여호와 앞에서 그를 위하여 속죄할 것이며”라고 되어 있다.
인간대 인간과의 단절은 결국 하나님께서 나타내 보이시고자 언약적 피와 기름과 물과 재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이것이 묻혀있지 아니하면 결코 하나님은 그 사람을 인간으로 받아주지 않겠다는 것이다. 정결과 부정결 간의 구분은 노아 홍수 때도 등장한다. 창세기 7:2과 8절에 보면, “너는 모든 정결한 짐승은 암 수 일곱씩, 부정한 것은 암 수 둘씩을 네게로 취하며…정결한 짐승과 부정한 짐승과 새와 땅에 기는 모든 것이”라고 되어 있다.
부정결은 인간이 출생할 때부터 시작되는 것이다. 레위기 12:1-5에 보면,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일러 가라사대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하여 이르라 여인이 잉태하여 남자를 낳으면 그는 칠일 동안 부정하리니 곧 경도할 때와 같이 부정할 것이며 제 팔일에는 그 아이의 양피를 벨 것이요
그 여인은 오히려 삼십 삼일을 지나야 산혈이 깨끗하리니 정결케 되는 기한이 차기 전에는 성물을 만지지도 말며 성소에 들어가지도 말 것이며 여자를 낳으면 그는 이 칠일 동안 부정하리니 경도할 때와 같을 것이며 산혈이 깨끗하게 됨은 육십 륙일을 지나야 하리라“ 뿐만 아니라 인간이 거처하는 땅도 더럽다.
레위기 19:23-25에 보면, “너희가 그 땅에 들어가 각종 과목을 심거든 그 열매는 아직 할례 받지 못한 것으로 여기되 곧 삼년 동안 너희는 그것을 할례 받지 못한 것으로 여겨 먹지 말 것이요 제 사년에는 그 모든 과실이 거룩하니 여호와께 드려 찬송할 것이며 제 오년에는 그 열매를 먹을찌니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 소산이 풍성하리라 나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니라”라고 되어 있고, 레위기 11:41에 보면, “땅에 기어 다니는 모든 기는 것은 가증한즉 먹지 못할찌니”라고 되어 있다.
사람이란 죽어서도 더럽다. 민수기 19:13에 보면, “누구든지 죽은 사람의 시체를 만지고 스스로 정결케 아니하는 자는 여호와의 성막을 더럽힘이라 그가 이스라엘에서 끊쳐질 것은 정결케 하는 물을 그에게 뿌리지 아니하므로 깨끗케 되지 못하고 그 부정함이 그저 있음이니라”라고 되어 있고, 16절에도, “누구든지 들에서 칼에 죽이운 자나 시체나 사람의 뼈나 무덤을 만졌으면 칠일 동안 부정하리니”라고 되어 있다.
또 레위기 15:32-33에 보면, “이 규례는 유출병이 있는 자와 설정함으로 부정을 입은 자와 불결을 앓는 여인과 유출병이 있는 남녀와 불결한 여인과 동침한 자에게 관한 것이니라”라고 되어 있고 민수기 5:2에 보면, “이스라엘 자손에게 명하여 모든 문둥병 환자와 유출병이 있는 자와 주검으로 부정케 된 자를 다 진 밖으로 내어 보내되”라고 되어 있다.
이처럼 인간이 태어나서 머물고 간 그 어떤 장소에서도 인간 신체에서 뿜어져 나오는 더러움으로 인해 이 땅은 하나님 보시기에 더러워지게 되어 있다. 이러한 신체성은 신약에서 와서 인간의 욕망에서 나오는 죄악으로 그려지고 있다. 그래서 예수님은 우리 죄를 대신 지시기 위해 고난의 길에 들어서신 것이다. 그 예수님을 보고서 자신의 일생 전부가 죄로 얼룩져 있음을 우리는 인정해야 한다.
30:22-29
이스라엘 나라를 통해서 나타나는 약속의 실체는 자기가 찍어 놓은 자기 백성의 죄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책임지고 제거하겠다는 것이다. 그런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수행할 때, 비로소 그 제사는 하나님에게 흡족한 향기가 된다고 하시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는 이러한 제사가 신약의 예배와는 다르다는 점을 알아야 한다.
제사란 구약 때까지며 신약에 와서는 제사라는 것이 없다. 예배는 결코 제사가 아니다. 제사와 예배의 차이는 반복성 여부에 달렸다. 즉 제사란 반복으로 수행하는 것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그 현장에 임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사람들이 조상제사는 드리되 조상예배는 드리지 않는다.
사람들이 제사드릴 때 음식을 장만하는 것은 죽은 조상에게 음식으로 유인하는 방책이다. 조상님이 오셔서 후손들이 차려놓은 제사음식을 맛있게 드시고 후손들이 하는 일마다 잘되도록 행운을 보내달라는 식으로 올리는 것이 조상 제사다. 이처럼 제사란 제사드리는 그 작업이 영적 존재를 불러내는 수단으로 활용된다.
그러나 예배는 그런 것이 아니다. 예배를 드리나 아니드리나 주님은 성도와 함께 하신다. 그리고 예배란, 이미 주님께서 다 이루어놓으신 바를 기념으로 확정하고 감사하는 모임이다. 두 세 사람 모인 곳에 너와 함께 계시겠다는 약속은, 이미 평소에 주님과 함께 계셔서 주님의 활동에 의해 모임을 갖게 되었음을 그 모인 자들이 감사하고 영광 돌리는 것이다.
거기에 비해서 제사란, 인간의 제사행위를 통해서 자신의 구원을 이어나가는 의도가 강하다. 예를 들면, 성찬식 예식에 참여 못한다면 이는 구원에서 탈락된 것이라고 단정짓는 것도 제사가 갖는 의미 중의 하나다. 그리고 구약 때의 제사는 늘 제사장과 제물들이 무한정으로 동원되어야 한다. 과거에 제사를 멋있게 드렸다고 해서 그것이 그 후까지 효과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신약 성경에 오게 되면 하나님이 흡족케 하시는 향기로운 제사는 더 이상 되풀이될 필요가 없도록 예수님 한 분으로 다 이루었다. 더 이상 인간 쪽에서 하나님에게 해드리는 그 무엇이 필요치 않다는 말이다. 제사는 예수님에 의해서 드려졌고 그것이 모든 율법을 다 이룬 것이다. 더 이상 향기로운 반복적인 제사가 필요 없게 되었다는 말이다.
따라서 오늘날의 예배란 이러한 예수님의 행하심을 기념하고 기억하고 그리고 그 공로를 찬양하므로서, 이런 놀라운 변화가 전부 현재 성도와 함께 계시는 예수님의 작품인 것으로 고백하는 자리를 뜻한다. 예배 안 드렸다고 해서, 또 예배에 빠졌다고 해서, 또 성만찬을 하지 않았다고 해서 구원이 취소되는 그런 사태가 일어나지 않는다는 말이다. 그 이유는 예수님이 드린 제사가 하나님께서 만족하시는 사랑이 구현이기 때문이다.
즉 하나님은 처음부터 인간의 행함보고 구원하시는 것이 아니라 자신에게 나간 사랑으로 인간을 구원하신다. 이러한 하나님의 일이 이미 구약 때부터 예언되어 있다. 오직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자에 한해서 그 사랑의 향기가 피어나게 되어 있다. 아가서 4:10-11에 보면, 사랑의 실체는, 사랑 받는 자의 행위와 무관하게 오로지 줄기차게 일방적으로 사랑하시는 주체자의 사랑으로 인해 완성된다. 로마서 8:32에 보면,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해 내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은사로 주지 아니하시게느뇨”라고 되어 있다. 그리고 주님의 사랑으로 넉넉하게 이긴다고 했다.
바로 이러한 사랑을 받는 분이 곧 사도 바울이다. 사도 바울은 놀랍게도 지독스럽게 예수를 믿는 자를 따라다니면서 핍박을 했던 사람이다. 세상적으로 봐서 구제 불능인 사람이다. 구원과는 정반대 위치에 지내던 사람이었다. 그런데 주님의 사랑으로 인해 완전한 딴 사람이 되었다. 사도 바울은 이렇게 달라진 자신을‘예수님의 향기’라고 묘사하고 있다.
고린도후서 2:14-16에 보면, 성도들은 이 어려운 시기에 지금도 하나님을 향하여 향기 나는 냄새를 피우고 있다. 요한계시록 8:3-5에 보면, 이런 향기들이 성도의 모든 모습으로 뿜어져 나온다. 즉 성도의 향기는 세상 사람들의 윤리나 도덕으로 도저히 흉내 낼 수 없는 그런 지경에서 뿜어져 나오게 되어 있다. 이것은 사람에게 만족스럽기에‘향기’가 아니라 하늘에 계신 하나님의 뜻에 부합되기에 하나님에게 향기인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이 지상에 자신의 약속이 약속대로 성취만 되면 무조건적으로 대만족하시고 향기롭게 흠향하시는 분이다. 성도들은 자신의 조건을 염두에 두고 하나님께 영광 돌릴 생각을 말아야 한다. 자기에게 향기롭다고 해서, 혹은 자기 기분이 만족스럽다고 해서 자동적으로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것이 아니다. 즉 갑자기 자신이 착한 일을 많이 하고 양심에 합당한 일을 많이 남겼다고 해서 그것이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순전히 하나님의 약속만이 성취되면 그것으로 영광이다.
그 약속이란 바로, 우리 인간이 먼저 하나님을 사랑하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먼저 우리를 사랑하신 그 사랑만을 고집하는데 있고 그것을 증거하는데 있다.
31:1-6
브살렐과 오홀리압은 하나님의 신이 임하여 하나님의 언약궤 제작에 나서게 된다. 물론 하나님의 신이 임하지 않는 상태에서도 얼마든지 유사 언약궤를 제작해 낼 수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식으로 만들어진 언약궤는 하나님의 언약에 만족되지 못하는 것이다. 이처럼 꼭 하나님의 신이 임해야 하는 이유는, 이 땅에서 하나님께 만족이 되고 영광이 되는 자기 백성을 만들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의도 때문이다.
인간들이 죄짓고 난 뒤, 창세기 6:3에 보면, 하나님의 신은 영원히 인간과 함께 있지 않겠다고 하셨다. 그 이유는 그들이‘육체’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란다. 그런데 6:18에 보면, 하나님께서 노아와 함께 하신다. 그 이유는, 그들을 통해 언약을 구성하기 위함이다. 따라서 하나님은 언약이 없이는 절대로 인간을 구원하시지 않고 멸망시키는 분임을 나타낸다.
브살렐과 오홀리압이 제작하는 것이 다름아닌‘언약궤’라는 것을 놓치지 말아야 한다. 그 언약궤를 통해서 전달되는 하나님의 언약 안에 머무는 관계에 있어서 그 사람은 하나님 보시기에 만족스러운 천국 사람이 되는 것이다. 이처럼 하나님의 신이란, 아무에게나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자신의 언약을 드러내고자 하는 자들에게만 특별히 주어진다.
이 하나님의 신을 받은 사람들은 걸출한 재주나 지능을 소지하는 되는 것이 아니라 나중에 신약 쪽으로 접근해 가면 갈수록 점점 희생자의 모습을 보여주게 된다. 삼손이라는 사람은 하나님의 신이 임하여 큰 힘을 받게 되지만 자신은 그것으로 여성을 사귀는데 주력했다.
그의 최후에 가서 그는 알게 된다. 즉 자신에게 강한 힘을 주신 것은 그것이 대신 희생당함의 모습으로 던져져 하나님의 백성을 건져내기 위한 용도인 것을 말이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 하나님의 신의 일로 인하여 천지창조 때에 있었던 대만족을 가질 수가 있는 것이다. 즉 인간은 비록 자신의 영생불사를 꿈꾸지만 하나님의 관심사는 이 우주를 통해 마음껏 영광과 만족을 얻는데 목적으로 두시고 일하신다. 그 일은 오직 하나님의 신이 임해야만 가능하다.
이처럼 이 인간 세계는 죄로 인해 하나님께서 천지창조 때 가졌던 그 원리와 원칙을 잃고 말았다. 하지만 하나님의 속마음을 전달하시는 하나님의 신으로 말미암아 그 숨어있던 감추어진 비밀이 알려지게 된다. 하나님의 속마음은 인간의 힘으로 알아낼 길이 없고 오직 성령이 온 사람에 한해서 감추었던 원리를 알게 된다.
하나님께서 모든 자기 백성이 다 하나님의 신이 임하기를 원했다. 그래서 자기 백성들을 통해서만 하나님께서 대 만족하시기를 원하신다. 이러한 약속이 구약에 예언되어 있는데 요엘 2:28에 보면, “그 후에 내가 내 신을 만민에게 부어 주리니 너희 자녀들이 장래 일을 말할 것이며 너희 늙은이는 꿈을 꾸며 너희 젊은이는 이상을 볼 것이며”라고 되어 있다.
이것은 오직 감추었던 비밀을 아는 그런 자들이 종말 때에 반드시 하나님의 약속에 의해서 등장된다는 말이다. 그래서 창세 전의 하나님의 영광이 그들을 통해서 만족스럽게 이루어진다는 말이다.
사도행전 2:17-18에 보면 이 구약 예언이 신약 때에 그대로 이루어졌음을 알려주고 있다. 여기서 말씀하시는 예언이나 꿈이나 이상이라는 것은 하나님께서 창세 전부터 감추어놓았던 비밀을 말씀한다. 에베소서 3:8-11에 보면, 이 마지막 때에는, 성령 받은 자와 그렇지 못한 자가 확연하게 구분된다. 즉 정말 성령 받은 자는, 인간들의 학문적 노력이든지 논리로서 도저히 알 수 없는, 하나님의 감추어놓은 비밀을 말하는 사람을 말한다. 인간으로서 도저히 알 수 없고 또 나올 수 없는 소식을 전하는 자들이 참으로 성령 받은 자들이다.
그 감추어진 하나님의 비밀은 무엇을 말하는 것이며 무엇을 말씀하기에 오로지 성령이 아님을 알지 못한다는 것인가? 그 점에 대해서 고린도전서 2:7-11에 보면 곧 십자가다. 만약 사람들이 자기 지식으로 하나님의 지혜를 알고 있었다면 절대로 십자가 사건을 일어나지 않았다는 것이 하나님의 취지이다. 인간들이 죄로 인해 인간의 지혜가 너무나도 엉터리기에 일어날 수 밖에 없었던 것이 십자가 사건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그 십자가 사건 앞에서 자신을 부인하는 자들이 오늘날 기적처럼 등장한 참 하나님의 자녀들이다.
첨부파일 : 출애굽기 30장 – 31장.docx (26.6K), Down: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