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 강의(09. 10. 23) 1강
광주 강의(09. 10. 23) 1강
이름 : 서경수(IP:116.37.101.7)
광주 강의(09. 10. 23) 54-1
디모데후서 4장 14절을 보겠습니다.
“구리 장색 알렉산더가 내게 해를 많이 보였으매 주께서 그 행한대로 저에게 갚으시리니 너도 저를 주의하라. 저가 우리 말을 심히 대적하였느니라.”
이 구리 장색 알렉산더가 전에 신자였습니다. 흔히 교인이라고 하지요. 9절에도 보면 “데마는 이 세상을 사랑하여 나를 버리고 데살로니가로 갔고, 그레스게는 갈라디아로, 디도는 달마디아로 갔고”
이들이 전에는 신자였는데 이제는 신자 아니라는 말이지요. 그래서 사도바울을 떠나면 신자가 아니고 사도바울을 안 떠나면 신자라고 정리할 수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사도바울에게 성령이 함께 있고 주님이 함께 있기 때문이지요.
그렇다면 여기서 사도바울이 뭐라고 이야기했기에 사도바울을 떠나면 그게 곧 하나님께 버림받은 사람이 되고, 사도바울을 주의 종으로 인정하면 그 사람이 계속 신자가 되는 이유가 뭐냐? 쉽게 말해서 신자가 뭐냐는 것입니다.
신자란 믿는 사람인데, 여기서 더 나가면 무엇을 믿는 사람이냐? 예수님께서 그리스도의 종 사도바울을 통해서 전해준 그 내용을 믿는 사람이 신자가 되고, 안 믿으면 불신자지요. 간단하지요? 그런데 간단한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사도바울이 전해준 말씀을 여기서 어떤 사람이 ‘믿는다.’ 또는 ‘안 믿는다.’를 결정하는 것이 사도바울이 전했던 그 내용, 하나님의 계시가 이 사람에게 영향을 줘요. 즉 성령이 임하면 그 말씀을 믿게 되고, 성령을 안 받으면 아무리 사도가 전해도 안 믿습니다.
다시 반복합니다. 신자는 어떤 사람인가? 신자란 예수님께서 사도바울을 통해 전하는 말씀을 믿는 사람이 신자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사도바울을 통해서 전하는 내용이니까 이 사람은 사도바울이 없었으면 몰랐던 내용이죠. 사도바울을 안 만났으면 몰랐던 내용인데 사도바울을 통해서 계시를 받는 순간 이 사람은 신자가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이 사람이 신자가 되는 것은 이 사람의 마음가짐에 있었던 것이 아니고 사도바울이 전해준 그 말씀 내용이 이 신자를 움직였지요. 여기서 우리가 지금까지의 사고방식을 수정할 필요가 있는데 그것이 뭐냐 하면, ‘말씀만 하시면 제가 믿겠습니다.’ 라는 식의 신자는 없다는 것입니다.
그 말씀이 나로 하여금 새사람 되게 했습니다. 그 새사람은 뭐냐? 내가 새사람 되고 싶어서 된 것이 아니고 말씀을 듣는 순간 그 말씀이 나로 하여금 새사람 되게 했습니다. 그러니까 이것은 옛날 내가 있고, 새로운 내가 있는데, 옛날 나와 새로운 나의 차이점이 뭐냐? 옛날 나는 ‘내가 믿겠습니다.’ 라고 주장하고, 새로운 나는 ‘말씀이 나로 새사람 만들었습니다.’ 라고 주장합니다.
그렇다면 새사람이라고 하는 것은 사도바울의 말씀(성경말씀, 하나님의 말씀 다 같은 말입니다.)을 듣기 전까지는 옛사람이 상상도 못하는 것입니다. 들어본 적도 없는 말씀을 어떻게 상상합니까? 아프리카에 있는 토인에게 ‘혹시 명성황후에 대해서 믿습니까?’ 라고 하면, 무슨 말을 하는지 모릅니다. 그 사람은 아프리카에서 타잔처럼 살아가고 있는데, 우리나라 옛날 고전에 나오는 명성황후를 어떻게 알겠습니까?
그러면 ‘명성황후는 이렇고 이런 사람입니다.’ 라고 하면, ‘아, 그렇군요. 믿습니다.’ 이렇게 되지요. 그래서 그 사람이 명성황후를 믿는 사람이 되었다는 말은, 전의 사람이 상상을 했습니까, 상상 못했습니까? 상상을 못했지요.
그래서 성경에 보면 ‘처음 듣는 이야기네요.’ 라고 하는 겁니다. 누가? 새 신자가. 새로운 피조물이 ‘야, 이건 처음 듣는 이야기입니다. 내가 어떻게 이걸 믿게 되었지? 내가 신자 된 것은 그 말씀이 옴으로 내가 딴사람이 되었습니다.’ 라고 할 때, 그 사람이 새로운 신자가 되는 거예요.
그러면 어떤 사람이 신자라고 우기면서 사도바울을 떠난 사람이 있어요. 그 사람은 왜 떠났느냐 하면, 그 사람은 말씀에 의해서 새사람 된 것이 아니고, 말씀가운데 자기가 납득되는 것의 일부를 뽑아내서 지식으로 갖고 있는데, 사도바울이 ‘옛날 사람은 신자가 아니다’는 말을 듣고 이 사람은 화를 냅니다.
사도바울을 떠났던 사람의 특징이 뭐냐 하면, 말씀을 사랑하는 사람이 아니고 ‘나는 똑똑하기 때문에 성경 말씀도 이해할 수 있어.’ 라고 자기 똑똑함을 계속 유지하려고 하는데, 이 사람은 결국 말씀 중심이 아니고 자기중심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결국 자기본색대로 언젠가는 떠날 수밖에 없습니다.
씨 뿌리는 비유에 이런 말씀이 나오잖아요.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에 처음에는 좋아하다가 환란이 오고 세상적인 유혹이 오니까 얼른 말씀을 버리고 옛날 자기로 돌아가잖아요. 그 옛날 자기로 돌아가는 사람의 특징이 뭐냐 하면, 처음 말씀을 들었을 때에는 말씀에 관심이 있다가 돌아갈 때는 항상 나에게로 돌아갑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말씀과는 끊어진 거예요.
그러면 그 사람이 전에 말씀을 알았던 것은 자기를 포기하지 않은 상태에서, 말씀 중에 신기하고 괜찮은 것을 뽑아서 자기가 자기를 만들어가면서 스스로 자기를 신자로 우기는 거예요. 제가 보기에는 신자가 아니고 ‘교양인’인데.
기독교를 앎으로써 교양이 더 쌓이고, 질적으로 품질이 더 우수한 인격체로 성장하려는 노림수가 있지요. 신자는 ‘말씀이 나를 만들었습니다.’ 주체가 말씀이고, 하나님이고 나는 하나님의 작품이 되는 사람이 신자인데, 교양인은 자기가 자기의 작품이고 그것을 위해 말씀이 필요하다 싶어서 몇 가지를 잡아당긴 거예요. 이문열, 김동리 이런 사람들이 대표적 인물입니다.
기독교에 대해서 연구했어도 결국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고, 기독교에 대해서는 잘 아는데 예수님은 믿어지지 않는 겁니다. ‘기독교에 대해서 잘 안다. 하지만 나는 나를 믿는다.’ 이렇게 되는 겁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사도바울이 말하는 신자가 뭐냐? 방금 신자가 아닌 사람을 제가 이야기했는데, 즉 사도바울을 떠난 사람에 대해서 이야기했는데, 사도바울을 주의 종으로 알았던 진짜 신자는 어떤 사람인가? 신자는 완료된 존재가 아니라 말씀이 만들어서 이끌어가는 과정 속에 있는 인물입니다.
신자가 아닌 사람을 쳐다보면서 뭘 느끼느냐 하면, 옛날 나를 느끼고, 또 달리 만들어져 가는 또 하나의 나가 있음을 압니다. 신자는 이 두 개의 나를 익히 아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서 만들어져 가는 어떤 인물이 바로 ‘내 겉 사람은 후패하지만 내 속사람은 날로 새롭도다(고후4:16).’ 할 때, 이 새로움에 내가 관여할 수 있습니까? 없지요.
내가 관여할 수 없음이 신기합니다. 그러니까 자기가 자기를 보면서, 내 몸이 내 몸이 아닌 거예요. 이것은 주인이 따로 있어서 나를 관리하는 주님의 솜씨를 보면서 내가 좋아합니다. 내가 나를 보면서 ‘너는 참 좋겠다. 관리하시는 분이 있어서.’ 이런 생각이 듭니다. 이처럼 내가 갈라지는 거예요. 자아의 분열이 일어나는 겁니다.
그런데 불신자는 무조건 끌어당기는 거예요. 성경에 나오는 온갖 지식을 나의 것으로 삼으려고 합니다. 그래서 처음도 나만 내세우고, 중간도 나를 내세우고, 끝까지 자신을 사수해야 되는 거예요. 시집보낸 딸을 이제 내 품에서 놓아주는 것 같은 그런 자기 자신을 편안하게 놓아주는 그런 자아가 없어요.
제발 여러분 자신을 꼭 묶어두지 말고 편하게 놓아주세요. 예수님이 자신이 다루시는 새로운 피조물을 여러분이 붙들지 마시고, 어디까지 날아가는지 지켜만 보세요. 그러니까 모든 욕은 우리가 다 받고(우리는 죄인이기에 모든 욕을 다 받아야 합니다.) 그런 가운데서 떠나는 것은 두둥실 떠나는 겁니다.
우리가 우리 자존심을 위해서 자신을 붙잡지 마시고 주님 만드신 작품의 자아를 붙잡지 마시고 그냥 내 놓으세요. 그럴 때 날아가는 새로운 피조물은 주의 말씀으로 거룩하게 만들고, 여기 남아있는 옛 사람은 죽어 마땅하고. 왜? 날마다 죄만 지으니까. 겉사람은 후패하고 속사람은 우리에게서 벗어나서 훨훨 날도록.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이 속사람은 악마의 어떤 저주와 비난도 해당되지 않고 축복된 나라로 날아갑니다. 우리의 옛 사람은 그냥 이 땅에서 시들고 병들어 죽고. 그렇게 되어야 합니다. 이런 분리가 발생되는 겁니다.
우리 안에 우리의 속사람이 있는데(이것은 점선으로 표시하겠습니다.) 다시 이야기합니다. 우리는 우리밖에 없었는데 갑자기 하나님의 말씀이 날아왔다. 진리의 새가 날아와서 우리 속에 씨앗을 뿌려서 말씀의 자식을 새로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난 후에 점점 분리가 되지요. 이것을 제가 설명하려고 합니다.
우리의 옛 사람이 갖고 있는 것이 뭐냐 하면, 천국관이 있습니다. 이것을 해야 성경 전체가 설명이 됩니다. 그런데 말씀이 진짜 와서 옛 사람에서 빠져나올 때, 이 때 이 새사람이 가는 천국이 같겠습니까, 틀리겠습니까? 틀립니다. 우리의 옛 사람은 악마에 매여 있었기 때문에 이 천국관은 누구 중심이냐 하면, 바로 나 중심의, 나의 우수함을 계속 보장해 줄 수 있는 어떤 나라. 즉 선악과 중심의 나라입니다.
선악과는 자기의 선한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악을 불러들입니다. 내가 선인지 아닌지를 알기 위해서 일부러 악을 불러와야 돼요. 그래서 내가 지은 악에 대해서 내가 심하게 반성을 해야 돼요. 이렇게 반성하는 순간 나는 졸지에 선한 사람이 됩니다. 이것이 바로 성령을 받지 못한 사람들의 상식이고 교양입니다.
내가 얼마나 착하고 의로운지, ‘이러한 것은 나쁜 짓이라고 내가 나를 혹독하게 꾸중하고 있어. 그러니까 나는 전체적으로 봐서 내가 얼마나 선하냐?’ 이렇게 됩니다. 자식이 나쁜 짓을 할 때 부모가 그 자식을 호되게 꾸짖는 그 순간 비로소 그 부모는 의롭게 행한다는 것을 확인하는 순간입니다.
여자는 하루에 3만 마디 말을 해야 직성이 풀린다는데, 가정주부가 집에만 가만히 있으면 말할 상대가 없어요. 그러다가 저녁에 남편이 들어오면 들어오는 순간부터 남편의 행동 하나하나(신발 벗는 것부터 시작해서) 잔소리를 하는데, 그렇게 남편의 잘못을 지적함으로써 상대적으로 누가 의롭게 되는가 하면 자신이 점점 더 훌륭한 주부가 되어가는 거예요.
남편이 술 먹고 들어와서 행패를 부리는데, 아내가 그 남편에게 얻어맞는 순간 아내는 자신이 천사라고 착각을 합니다. 마치 십자가의 길을 가는 것처럼 생각하지요. 이게 바로 옛 사람입니다. 이 옛 사람이 어디에 많은가 하면 교회에 많아요. 교회에 지옥 갈 사람이 많은 거예요. 교회 밖에는 지옥 가는 줄도 모르고 지옥 가는 사람들이고.
제가 아까 말씀드렸지요. 옛 사람이 천국관을 갖고 있는데 그 천국은 천사를 닮아야 갈 수 있어요. 신앙도 높아져서 천사처럼 되어야 하고, 5년 믿은 사람보다 10년 믿은 사람이 더욱 천사를 닮아야 하고, 20년 믿은 사람은 더 천사에 가까워야 하고, 집사보다 목사가 더욱 천사다워야 하고.
아까 뉴스 들으니까 어떤 교회 목사가 여 성도를 10년 동안 성폭행했다고 나왔어요. 그들이 10년이 지난 이제야 고발하는 이유가 뭔가 하면, 목사는 자신들 보기에 가장 하나님 가까이 있는 것처럼 생각하기 때문에 그들에게 목사는 자신이 닮아야 할 모델입니다.
이 모델, 달리 말하면 목표라고 할 수 있는데, 이 목표가 있다는 것은 자신이 어렵고 힘든 것을 감내할 수 있는 원천이 됩니다. 사람들의 천국관이 뭔가 하면, 선과 악을 아는데, 악은 지옥 가고 선은 천국 가니까, 자기 내부에서 자기를 점점 더 선한 사람으로 만들어야 자신이 안심을 합니다. “이 정도로 착하니까 천국이 있다면 그 천국은 따 놓은 당상이다. 세상에 나같이 완벽하게 착한 사람이 천국을 못 간다면 아무도 못 간다.” 어느 정도 착하냐 하면 악한 사람한테 시달려도 그것을 계속 참을 정도니까, 이것은 완전히 ‘예수님 십자가 길을 가는 것과 같다. 그러니까 내가 바로 천사야!’ 라는 마음이 있을 때, 그 사람은 자기의 천국이라는 욕망과 부합이 되는 겁니다. 이게 바로 악마가 가르쳐준 가짜 천국의 모습입니다.
모든 인간이 이런 것을 갖고 있으니까 목사들도 이런 식으로 가르치지요. 선과 악 사이에 뭐가 발생되겠어요? ‘결핍’입니다. 이 결핍은 헌금으로 메워야 하고, 전도로 메워야 하고, 기도로 메워야 하고. 이 결핍을 메움으로써 내가 천사가 되는데 한 단계 더 올라갈 수 있는 그런 과정을 밟아 나간다고 보는 거예요.
그래서 [제자훈련]에 1단계부터 10단계까지 단계가 있지요. 이런 단계를 다 돌파하면 지도자 자격을 줍니다. 이런 단계를 주장해서 가짜 천국 유포에 성공한 사례가 바로 이만희 목사의 [신천지]가 있습니다. 이 최고 단계의 숫자가 뭐냐 하면 144,000이랍니다.
기존 교회가 이 [신천지]를 욕할 수 있습니까? 못합니다. 왜? 자기들도 똑같이 하고 있으니까. 이들은 다 인간들의 결핍을 공략합니다. 지금 여러분들에게는 결핍이 없습니까? 뭔가 미흡함을 못 느낍니까?
결핍을 채워서 구원 받는 것이 아니고, 결핍된 존재를 그냥 두고 따로 만듭니다. 여러분 속에 차이가 나야 합니다. 어떤 차이냐? 여러분이 이런 모습을 버리면 안 돼요. 이것은 평생 갑니다. 왜? 옛 사람이 있어야 해요. 옛 사람이 있어야 주께서 친히 만든 새사람과의 차이를 알고 그 차이를 통해서 우리는 예수님의 공로와 은혜를 비로소 실제로 느끼게 되는 겁니다.
그런데 이 새사람은 누가 손댄다? 우리가 손대면 안 돼요. 우리가 손대면 다시 옛 사람에게 묶이는 그런 불상사가 생깁니다. 속사람은 누구 작품인가 하면 주님의 작품입니다. 주님이 손댑니다. 주께서 우리를 고치셔서 구원 받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고물은 고물인 채 그냥 두고, 고쳐서 구원 받으려는 자는 아예 지옥으로 보내시고, 주께서 고칠 필요도 없는 완제품을 우리 속에서 키워요. 그래서 우리보고 비교해 보라고 합니다. 선악과에 의해서 만들어진 너 자신과 생명나무 씨앗으로 자라나는 새사람과 네가 한번 비교를 해보란 말이지요.
비교해서 남에게 증거할 때는, ‘나는 죄인이지만 이 죄인도 구원 받는 것은 속을 날로 새롭게 하시는 주님의 은혜입니다.’ 라고 십자가로 모든 공로를 돌리라는 것입니다. 이게 신자입니다. 간단하죠?
괜찮은 사람 하나 키우세요. 키우는데 여러분 자신이 키우면 안 되고 주님이 직접 키우십니다. 이걸 ‘성령 받았다’고 하는데, 고린도전서 3장에 이런 말씀이 있지요. “심는 이나 물주는 이는 아무 것도 아니로되 오직 자라나게 하시는 하나님 뿐이니라(3:7).” 이게 무슨 말입니까? 구원 받는 우리 자신은 누구 소관이다? 주님 소관입니다.
내가 구원 얻는 것이 내 소관이 아닙니다. 여러분 속에 괜찮은 것이 자라고 있는 것을 날마다 들여다보면서 감사하세요. 집에 금붕어, 선인장 이런 것만 키우지 마시고 여러분 속에 주께서 친히 키우시는, 여러분은 더러운 화분인데 이 속에서 새로운 생명이 움트는 것을 평생 감상하는 그런 즐거움이 있기를 바랍니다.
나라는 인간이 만든 천국관, 이것이 평생 없어진다, 안 없어진다? 안 없어집니다. 항상 생각하는 것이 ‘나같은 인간이 천국 가야지 누가 가?’ 이것은 없어지지 않습니다. 그런데 사도바울은 뭐라고 합니까? ‘내가 지옥 갈지라도 너희들이 구원 받았으면 좋겠다.’ 엄청난 이야기를 하지요. 이것은 이쪽 시선에서 나를 보는 것이 아니고 이미 주 안에서 바깥을 보니까 그런 말을 할 수 있는 겁니다.
제가 지금 하고 싶은 이야기가 뭐나 하면, 이 천국과 주님의 천국 사이에 그냥 곱게 보내고 곱게 떠나는 사이가 아니라 평생 동안 싸움이 벌어집니다. 왜냐하면 선악과의 논리가 고집이 굉장해 세요. 이것을 악마의 고집이라고 합니다. 우리 안에 괴물이 있다는 말이 바로 이런 뜻입니다.
이쪽에서 보면 우리 안에 새사람이 있다고 보고, 이쪽에서 보면 우리 안에 괴물이 있다. 우리 안에 괴물이 뭐냐 하면, 악마의 고집인데, 악마의 특징은 원망하는 겁니다. 이쪽 새사람의 특징은 감사하는 겁니다. 새사람은 감사하고 옛사람은 원망하는데 이것을 영적 차원에서 사람들이 뭐로 감추느냐 하면, 원망 혹은 감사는 살짝 감추고 앞에 나오는 것은 ‘무엇이 옳은가? 무엇이 나쁜가?’를 생각해요.
사람은 선악과를 따 먹었기 때문에 판단기준이 ‘무엇이 옳은가, 무엇이 나쁜가?’ 이것을 생각합니다.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옳은 일을 하면 자기 의가 쌓이고(점수가 높아지고), 나쁜 짓을 할 경우에는 내가 그동안 쌓아놓은 의의 점수가 약간 내려가겠지요. 감소하니까 이것을 원상 복귀시키려고 헌금을 평소보다 더 많이 한다든지, 전도를 더 열심히 하면 내려간 점수를 다시 회복할 수 있겠지요. 이 이야기가 ‘무엇이 옳은가, 무엇이 나쁜가?’를 생각하는 겁니다.
자, 그러면 어떻게 되는가를 봅시다.
제가 버스를 탔는데 광고를 보니까 이런 내용이 있어요. 열 가지 정도를 열거해 놓고 ‘이런 일이 있거든 상담하세요.’ 라고 되어 있어요. “이유 없이 몸이 아프다. 고부간에 갈등이 있다. 이사 날짜를 잡지 못했다. 혼기를 놓쳤다. 취직이 안 된다. 자녀 성적이 떨어진다.” 이런 경우에는 상담하시기 바랍니다.
그런데 이 점쟁이를 사람들이 찾아간다는 말은 그쪽만 점쟁이가 아니고 찾아가는 사람도 점쟁이죠. 그렇잖아요? 다만 기술이 저쪽은 프로고 이쪽은 아마추어라는 차이가 있을 뿐 노는 동네는 같은 동네입니다. 다시 말해서 내 집안에 우환이 있는 것은 내가 뭔가 나쁜 짓을 해서 벌을 받는 거예요. 그래서 이쪽 동네에서의 원칙은 ‘죄 지으면 벌’ 토스토에프스키 작품 중에 있지요. ‘죄와 벌’
반대편에는 ‘의와 상’이 됩니다. ‘죄와 벌’과 ‘의와 상’이 될 때, 이것이 ‘벌’이고 이것은 ‘상’이라는 것을 뭐로 측정합니까? 요한복음 5장에 보면 ‘모든 세상을 예수님이 심판하신다.’고 했어요. 그런데 인간들은 매사가 자기가 심판주가 되어 있습니다. 본인이 심판주가 되니까 심판에 대한 여러 가지 법을 스스로 정하지요. 내가 하루에 성경 3장을 읽어야 하는데 2장 읽으면 ‘오늘 하루 일과 중에서 벌 받아도 마땅하다.’ 이렇게 되는 겁니다. 이게 법(율법) 의식입니다.
그래서 법을 가지고 ‘당신은 법에 저촉되어 벌 받아도 마땅합니다.’라는 계급이 예수님 당시에 무려 일곱 단계를 정해서, 어떤 사람이 백정이나 심지어 여자로 태어나는 것도 벌을 받아서 그렇게 태어났고, 창기와 세리가 된 것도 하나님의 저주를 받아서 그렇고, 심지어 문둥병자나 귀머거리, 소경, 절름발이 이 사람들은 전부 법에 의하면 하나님의 벌을 받았기 때문에 남보다 뒤떨어지게 되었다고 보는 거예요.
38년 된 병자 이야기가 있지요. 이 병자의 생각은 ‘누가 와서 나를 들어서 베데스다 못에 넣어주면 나는 깨끗함을 받는다.’ 라는 그 생각. 또는 그 심판의 기준을 누가 정했습니까? 남들이 이야기한 것을 자기의 이성을 통해서 받아들인 거죠. 그러면 오늘날 모든 사람들이 갖고 있는 법 관념은 예수님이 주신 것입니까, 마귀가 준 것입니까? 마귀가 준 것입니다.
우리 모두는 마귀가 준 법에서 스스로 심판주가 되어서 매일같이 회개하고 반성하는데, 그것을 심지어 성경묵상하면서 회개, 반성하고 그렇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목사 입장에서 교인이 왔는데 두 달 다니다가 떠나버렸다. 그러면 목사가 반성을 합니다. ‘내가 목사로서 목사답지 못한 일이 무엇이었을까? 하나, 내가 설교준비 해야 할 시간에 SK와 기아의 야구경기를 봤구나. 목사가 야구를 좋아하다니. 이것은 교인이 떠나는 벌을 받아도 마땅해.’
그렇다면 그 다음에 뭘 느끼겠어요? 야구 중개방송을 본 죄를 지어서 받은 벌이 뭐냐 하면 교인 한 사람이 떠났다. 그러면 이 법에 의해서 이 목사는 다음부터 야구 중개를 안 보겠지요. 그러면 다시 떠난 교인이 돌아온다든지 아니면 다른 새 교인이 오면 이 사람은 뭘 확인할 수 있습니까? ‘내가 정해놓은 법을 하나님도 인정하셨다.’ 라고 생각하겠지요. 이게 바로 악마의 노림수입니다.
이 악마의 노림수가 한국교회에서는 ‘간증’으로 나오지요. 간증이 뭡니까? ‘어떻게 법을 지켰더니만 이런 복을 받았고, 어떻게 법을 안 지켰더니만 저주 받았는데 다시 어떻게 법을 지켰더니만 다시 복을 받았으니까 여러분도 이런 식으로 법 지키면 나처럼 복 받을 수 있습니다.’ 이런 것이지요.
그래서 욥기를 비롯해서 모든 성경을 이런 식으로 해석할 때 이런 교회는 많은 사람들이 들끓지요. 왜? 모든 사람이 결국은 악마의 종이기 때문에. 목사한테 반기를 들었더니만 우리 애가 교통사고를 당했다. 그래서 회개하는 마음으로 목사에게 순종했더니만 애가 새사람 되었다. 그래서 ‘이제는 절대 목사님께 반항하면 안 되겠구나.’ 라는 법을 자기가 만들어 내지요.
38년 된 병자가 ‘물이 동할 때 나를 들어 제일먼저 물에 넣어주는 사람이 있으면 나을 것인데.’ 라는 법칙이 어디에서 나왔어요? 이것은 사람들이 하는 이야기를 들은 것이지요. 그런데 예수님은 이 사람의 병을 고쳐주셨습니까, 안 고쳐주셨습니까? 이게 참 어려워요. 고쳐주게 되면 완성이 되잖아요. 주님은 이 사람의 병을 고쳐준 것이 아니고, 이 사람의 병을 계속 끌고 가면서 또 하나의 새사람을 여기다가 깔아버려요.
그렇다면 이 사람의 새사람은 뭐냐 하면, 이 사람은 예수님이 내 병을 낫게 했다고 주장하는 거예요. 그런데 밑의 것은 뭐냐 하면 예수님이 병을 낫게 한 것이 아니고 예수님이 자기를 증거하는데 이 사람이 필요했던 거예요. 이 사람은 예수님의 똘마니가 된 겁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38년 병을 하나님이 가져간 것이 아니고, 38년 된 이 병자를 예수님이 자기 공로를 증거하는데 필요한 자재로 사용한다니까.
예수님의 천국 건설에 우리가 자재입니다. 벽돌입니다. 벽돌인데 벽돌이 뭐라고 하는가 하면, 예수님의 벽돌 된 것을 생각 안하고 ‘나는 병 나았다.’고 주장하는 거예요. 이 두 개가 같이 갑니다.
예수님이 병을 고칠 때 특징이 뭐냐 하면, 병은 나았는데 예수 안 믿는 사람이 많았어요. 아마 병 낫고 예수 믿은 사람보다, 병 나은 후 예수 안 믿은 사람이 훨씬 더 많았어요. 어떤 문둥병자 열 명이 나았는데 돌아온 사람은 한 명이었어요. 10%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귀신을 쫓아내고 난 뒤에 일곱 귀신이 더 들어온다고 했지요.
예수님의 관심사는 뭐냐 하면, 예수님 자신이 누구인가를 증거하는 것인데, 우리의 관심사는 나의 결핍이 예수님 덕분에 해소 되어 천국 가게 되었다는 것을 자랑하고 싶어요. 이게 인간의 구원 욕구입니다. 이것만 생각하면 안 돼요. 이 사람은 ‘나 옛날에 병 고침 받았어.’ 간증의 문제가 이것입니다. 간증하고 천당 갈 사람 별로 없어요. 왜냐? 전부 자기 자랑밖에 모르기 때문에.
“한번 비췸을 얻고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히6:4)” 그것으로 끝났어요. 열 명 문둥병자 중에 돌아온 사람은 한 사람 밖에 없어요. 돌아온 사람은 ‘큰 소리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돌아와 예수의 발아래 엎드리어 사례(눅17:16)’했어요. 그런데 안 돌아온 사람은 ---
예수님의 병 고침을 받고도 안 돌아온 사람의 특징이 뭐냐 하면, 나는 착하기 때문에 이런 병에 안 걸려야 되는데, ‘내 착한 것을 하나님이 병을 낫게 해 줌으로 보증해 주셨다.’ 이렇게 생각해요. 그러니까 병 나은 후 예수님께 돌아올 이유가 없지요. 이런 사람은 지옥 백성입니다. 한국교회 목사님 거의 대부분이 이런 사람입니다.
‘나는 주의 종이기 때문에 주께서 기적적으로 내 등록금 대주고 목사가 되게 했다.’ 지옥 가려고 환장을 했어요. 정말 구원 받은 사람 같으면, 이것이 나의 옛 사람인데 펄펄 날아가는 게 있지요. 뭡니까? 예수님의 똘마니가 되어서 날아가는 저 새로운 피조물이 주께서 못 된 나를 통해서도 끄집어내는, 쓰레기 같은 내 속에서 장미를 키우듯이.
계속 나는 쓰레기에요. ‘나는 예수님 때문에 구원 받았어.’ 라고 하면서도 자기 자랑하는 이 못된 것이 평생 가는 속에서도 주님께 쓰임 받고 있다는 그 차이.
만약 이 사람이 병 나은 것만 주장한다면 ‘예수님 때문에 병 나았다.’고 했는데 그 다음에 또 병이 들면 어떻게 나오겠습니까? “주님이여, 옛날에 병 낫게 했는데 왜 또 병들게 합니까?” 라고 원망이 나오겠지요. 그런데 이쪽은 “주께서 또 나를 사용하십니까?” 병들었던 나를 병 낫게 해놓고, 그 다음에 또 다른 병이 걸리게 하셔서 그 병을 가지고 주님의 천국 건설 자재로 사용한 것에 대해 감사하겠지요. 그래서 ‘범사에 감사’가 됩니다.
성도는 항상 범사에 감사가 나오고 성도 아닌 사람은 항상 원망할 만반의 준비가 되어 있어요. 이제 신자가 어떤 자인지 아시겠지요?
불신자란 천국 건설의 방해자, 도움이 안 되는 사람. 신자란 천국 건설의 자재. 그래서 ‘당신 신자입니까?’ 하면 ‘주께서 이런 몸도 사용하시네요.’ 그러면 신자고, 불신자는 ‘당신 신자입니까?’ 라고 하면, ‘주께서 얼마나 기적을 베풀어 주시는지 --’
보여줘야 될 주님의 나라는 안 보여주고 자기 구원 받은 것 자랑하는 사람, 이 사람 내부에는 뭐가 들어 있는가 하면, ‘주여, 내가 이만큼 주님을 옹호하니까 주님도 내가 원하는 것을 주시면 좋겠습니다. 내가 기도를 열심히 하는 것은 주위 사람들이 다 아는데, 내 기도 응답되게 해 주셔야 예수님을 당당하게 전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러니까 내 기도 꼭 들어주세요.’ 라고 하는 사람들, 불신자입니다.
‘우리 아이 대학에 세 번 떨어졌습니다. 그래도 쓰시는 군요. 그래도 버리지 않는 군요.’ 우리 김 집사님 가끔 맛있는 ‘화과자’ 사오시잖아요. 교회에서 보면 누가 맛있는 것을 사오면 사람에게 거지건성 같은 것이 있어서 다음에 빈손으로 오면 ‘저분이 믿음이 떨어졌나?’ 사람이 쓰임 받는 것은 생각 안하고, 내가 어떤 행동을 할 때만 주께서 쓰신다고 자꾸 주님하고 흥정을 하려고 해요.
‘내가 이만큼 헌금하면 주님께서 예전처럼 복 주시겠습니까? 그러면 헌금하지요. 헌금 안했다고 삐쳐서 벌 내리고 하나님이 좀스럽기는.’ 이런 생각을 자꾸 하는 거예요. 그것도 목사가 유도해요.
이제 구리 장색이 사도바울을 떠난 이유를 알겠지요? 그 사람은 바로 감사가 나오는 것이 아니고, ‘내 잘되기 위해서 교회 왔는데 왜 남들이 안 알아주고, 하나님이 내 소원 안 들어주나. 그러면 나는 떠나겠다. 내가 원하는 천국관을 향해서 떠나겠다.’ 그래서 떠난 거예요.
10분 쉽시다.
(2009. 10. 30. 11:13 녹취 마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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