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애굽기 26장 – 27장 주석
출애굽기 26장 – 27장 주석
이름 : 이진용(IP:222.99.120.158)
출애굽기 26장 – 27장
26:1- 6
성막이나 노아의 방주 같은 것은 하나님께서 장차 오실 메시야를 보여줄 모형이 되라고 만들라고 하셨는데 오늘날 하나님께서는 아무 것도 우리에게 만들라고 하시지 않는다. 왜냐하면 현재 우리가 앉아있는 이 몸뚱이가 곧 하나님이 만드신 성막이요 성전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자신의 신체를 자기 것이라고 계속 우기고 있는데 그것은 성경적으로 옳지 않다. 성도의 몸은 어디까지나 주님의 것이지 우리 것이 아니다. 이 말은 곧 주님께서 자신의 목적하신 바 그 뜻에 따라 쓰임을 받을 몸이라는 것이다. 심지어 우리 내부에서 올라오는 우리의 죄와 욕심까지도 말이다.
성막은 하나님과 인간들이 만나는 유일한 장소다. 즉 이 말은 곳 성막 속에서 인간의 죄가 들추어지고 또한 그것을 용서하시는 기능이 장차 그리스도를 겨냥해서 벌어지는 현장이다. 따라서 이 성막은 고정된 것이 아니라 늘 이동하게 된다. 이 성막이 진행하는 광야 곳곳마다 인간은 본인들이 미처 알지도 못했던 죄악들이 폭로된다.
이 성막에는 네 개의 덮개로 덮어있는데 그것은 밖에서 보이는 성막의 모습과 안에서 바라보는 성막의 극단적이 차별성을 갖추기 위함이다. .
1) 제 1덮개(세마포의 덮개)
성소 가장 안쪽 첫 번째에 있는 것으로 총 천연색실의 천사들을 수놓은 아름다운 그림이 그려져 있는 20m×14m의 큰 앙장으로, 청색, 자색, 홍색, 가는 베실로 짜여져 있다. 성막이 세워졌을 때 이것이 성막 건물의 맨 먼저 덮는 덮개였고 나머지 덮개들은 그 위에 있었다. 이 덮개는 성막 안에서 볼 수 있는 유일한 것이다.
비록 외부의 덮개는 볼품없었지만 이 안쪽 덮개는 아름다웠는데, 오직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내부에 있을 때에만 우리가 그의 진정한 아름다움을 알 수 있는 것이다. 세마포에는 양 날개를 활짝 편 그룹의 모양이 수놓아져 있는데, 이것은 성막 안에서 여호와를 섬기는 제사장들의 위를 나르는 듯하다.
제사장들은 성막에서 섬기는 일을 하면서 위에 있는 그룹들을 보았고, 하나님이 그들을 보고 계시며 보호한다는 사실을 되새겼다. 바깥 외부의 세상은 이 아름다움이나 하나님의 손의 보호하심에 대한 상징을 도저히 볼 수 없다. 이 사실은 인간 자체가 영적으로 소경인고로 하나님의 일을 이해하지 못한다는 것을 나타내 보여 준다. 오직 중생한 자반이 영적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볼 수 있다.
2)제 2 덮개(염소털의 덮개)
이 덮개는 성만 안에서 보이는 아름다운 세마포 덮개 바로 위에 있는 것으로 염소털로 실을 만들어 짠 덮개다. 21m×15m로서 제 1덮개 위를 덮어야 하기에 가로 세로 각각 1m씩 더 크다. 양이나 염소는 가장 많이 쓰여지는 제물이었다.
3) 제 3 덮개 (수양가죽의 덮개)
붉은 물들인 수양가죽으로 만들어졌다. 이 수양 덮개나 두 번째 덮개였던 염소털 덮개는 모두 희생 제물의 희생적인 자세를 나타내고 있다. 즉 순교자로 인해 중첩되어 있는 양상이다. 화려하고 찬란한 천사가 나르는 그 영광스러운 공간을 위해서라면 바깥 세상으로부터 천시받고 서러움 받는 그 서러움조차 희생으로 대처할 수 있다는 말이다.
4)제 4 덮개 (해달 가죽의 덮개)
바깥 덮개는 해달의 가죽(물개의 가죽)으로 그 웃 덮개라고 표현되어 있다. 이것은 바깥 덮개로서 다른 것들의 맨 거죽이다. 이 덮개는 방수용이 되는 동시에 볼품없는 자태를 외부에 나타내는 의도도 갖고 있다. 그러면서 험한 날씨를 갖는 광야 여정에서 완전한 보호재 구실을 하였다.
광야의 햇빛과 바람에 낡아서 이 바깥 덮개만 보아서는 성막 내부의 아름다움을 알 길이 없었기 때문이다. 이처럼 바깥 덮개는 장차 예수님께서 사람들에게 천시받는 양태이기도 하다. 불신자들이 볼 때에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사야의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가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 그는 멸시를 받아서 사람에게 싫어 버린 바가 되었으며'라는 말씀처럼 아무런 흠모할 만한 것을 찾아 볼 수 없다.
하지만 사람이 성막의 아름다움을 보기 위해서는 안으로 들어와야 했던 것처럼 우리들의 안목은 이러한 초라함조차 안 쪽의 영광에서 나왔다는 사실을 겸해서 파악하고 있어야 한다. 이러한 덮개들은 이 지상에서 영원히 고정시키기 위한 용도가 아니라 해체해서 이동하기에 수월한 기동성을 감안한 구조다.
이처럼 하나님은 우리 자신을 예수님의 영이 거한 성막으로 사용하신다. 우리의 장래나 운명은 이미 우리 손에서 떠나있다. 인간이란 쉬지 않고 안정을 원하고 그 자리에 주저앉고 싶은 충동이 있다. 쉽게 세상에 친숙해지고 세상 풍습에 미혹 받고, 그 원리에 매료되기 십상이다.
거기에 비해서 하나님의 원리는 늘 낯설고 어색하고 거절하고픈 양상으로 찾아든다. 그러나 이러한 비참함이야말로 우리가 인위적으로 조작해내는 종교적인 경건과 품성을 죄악된 것으로 고발할 수가 있다. 우리는 세상 사람과 더불어 살기를 고대하지 말고 하늘의 아름다움에 대해 감탄하고 황홀해 해야 한다
26:15-19
성막 안에는 오직 '하나님의 이름'만 거하신다. 이것은 우리 인간의 이름, 즉 인간은 들어오지 못한다는 말이다. 조각목이란 하나님의 이름이 거주하는 곳과 그 바깥에 인간의 이름이 거하는 곳이 차단하기 위해 설치되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의 이름'이라는 의미가 생소하게 느껴지는 것은 평소에 우리가 너무나도 '우리 자신의 이름'에 집착하고 있기 때문이다.
인간의 이름은 그 자체로서 우리에게 하나님이 내리시는 운명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이름이란 하나님께서 자신의 일을 하시기 위해 활동하시는 하나님을 말한다. 마치 우리 인간들처럼 인간적인 활동을 하시게 된다. 하나님은 이 우리의 이름과 하나님의 이름을 대조시키신다.
성막이란 그 대조를 극명하게 보여주기 위해서 설치된다. 즉 하나님의 이름이 거하시는 성막 안으로는 산 채로 들어갈 수 없다는 말이다. 다시 말해서 인간의 이름이 죽어야 들어갈 수 있는 곳이 '하나님의 이름'이 거주하시는 성막이다. 이처럼 하나님께서 우리 자신들을 구원하실 때는 세상에서 내 이름으로 설치든 그 행세를 인정해주시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죽으심에 동참시켜서 주님 안에서 '산 자'라 간주해주시는 것이다.
즉 인간도 죽고 예수님도 죽는다. 하지만 인간의 죽음이란 자기 죄로 인한 죽음이라면 예수님의 죽으심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한 의로움으로 죽으신 것이다. 갈라디아서 6:14에 보면,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라고 되어 있다.
즉 십자가를 가운데서 두고 세상 사람과 사도 바울은 서로 죽은 사람으로 간주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단호한 경계선을 형성시키기 위한 성막을 모형적으로 구약 때 만들라고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지시한 것이다. 하나님의 저주를 막아내는 것은 순전히 성부 하나님과 성자 하나님 사이에 의논된 것이다. 결코 인간의 사견이 거기에 끼어들 수가 없다.
갈라디아서 1:10에 보면, "이제 내가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랴 내가 지금까지 사람의 기쁨을 구하는 것이었더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라고 되어 있다. 이것은 사도 바울이 사람을 무시하겠다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요구하는 바와는 결코 비견할 수 없을 정도로 엄청난 복과 성과가 복음이라는 이름으로 제시되었음을 주목하라는 말씀이다.
생명이란 사람에 의해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다. 성막 안에서 주님의 약속에 의해서 만들어진다. 따라서 우리는 개인적인 소원을 끊고 주님이 해내시는 약속이 무슨 내용을 담고 있는지를 보아야 한다. 그것은 전혀 우리 인간이 개입할 수 없이 하나님 홀로 이루어내시는 것이다.
이처럼 인간은 마땅히 배제되어야 하지만 마르고 황량한 광야에서 자라는 싯딤나무를 가지고 조각목을 만들라고 하신다. 사실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영광스러움이 이런 초라한 조각목 더미로 발산될 수는 없다. 하나님께서는 이 조각목을 금으로 둘러 싸라고 하신다. 싯딤나무의 입장에서 참으로 죄송스럽고 황공스럽고 미안한 것이다. 자신이 금으로 둘러 쌀 입장이 못됨이 너무나도 명백하기 때문에 그런 것이다.
또한 각 널판은 각 신자를 뜻한다고도 볼 수 있다. 널판이 한 때 광야의 나무의 일부분이었으나 성막의 부분으로 된 것을 나타내었기 때문이요 오늘날 하나님의 이름 성도들의 모임 가운데 함께 계시기 때문이다. 출애굽기 26:26-28에는 이 널빤지들이 조각목으로 만들어진 띠에 의하여 서로 고정되었다고 했다. 이것 역시 금으로 쌌다.
즉 모든 널판들은 하나로 연합되어 있다. 중요한 점은 누가 이렇게 연합케 하셨는가 하는 점이다. 이 점에 대해서는 사도행전 5:1-6에 보면 힌트가 나온다. 그 둘러싼 모임 안에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주님이 엄연히 살아계셨던 것이다. 그래서 '사도를 속임이 아니라 성령님의 속임이라"고 한 것이다. 마태복음 18:20에 보면, "두 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라고 되어 있다. 그리고 에베소서 2:21-22에 보면, "그의 안에서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가고"라고 되어 있다.
이처럼 각자 직업이나 직분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참으로 우리 안에 누가 계신가 하는 점이 중요하다. 바로 그 주님에 의해서 우리가 세상에서는 도저히 얻을 수 없는 영생을 얻은 것이다.
26:31-37
휘장 만들기부터 먼저 나온다. 휘장이 거룩한 세계와 더러운 세상을 구분 짓는 차단막 역할을 하는 것이다. 거룩으로 완전무장한 대제사장도 이 휘장 너머의 세계에는 함부로 제 집 들락날락 하듯이 할 수 없다. 휘장 안 쪽 깊숙한 곳에는 거룩한 하나님께서 자리잡고 계신 곳이다. 즉 인간의 집이 아니라 하나님의 집이다. 이 하나님의 집에는 거룩과 의로움이 독차지해 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 지실 때 이 휘장이 찢어지는 일이 벌어진다. 마태복음 27:50-53에 보면,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중심으로 참으로 희한하고 특이한 사건들이 동반해서 벌어졌다. 이런 사건들은 인간들이 두 번 다시 재현할 수 없는 특별한 동기에 의해서만 일어나는 일들이다. 그만큼 예수님의 십자가 지심은 이 우주 세계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이라는 점을 나타내어 주는 일이다.
십자가 사건을 위해서 이 우주만물은 존재한다고 봐야 한다. 그런데 그러한 특이한 사건 중의 하나가 바로 휘장이 찢어지는 것이다. 위에서 아래에서 찢어진 것으로 봐서 인간이 인위적으로 찢은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십자가 자신 업무와 어떤 관련성을 갖는 것이다. 이 관련된 내용이 히브리서 10:20이다.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롭고 산 길이요 휘장은 곧 저의 육체니라"이다.
여기서 '길'이라는 단어가 나오니 어떤 이들은 주장하기를, "이제부터 우리 인간들이 얼마든지 자력으로 천국까지 도달될 수 있는 길을 스스로 시도할 권리를 얻었다"고 주장한다. 즉 그동안 하늘 나라로 가는 길을 인간들이 애타고 찾고 또 찾으려 했지만 휘장이 도중에 가로막혀서 거룩한 구역을 감히 통과하지 못했는데, 보다 못해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을 보내셔서 하늘 나라와 인간 나라를 가로막았던 그 휘장을 철수시켰다는 주장을 하고 있다. 그래서 '새롭고 산 길'을 마주 대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해석을 잘못된 것이다. 왜냐하면 휘장 자체가 '예수님의 육체'가 되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동안 막혔던 휘장이 예수님 십자가 순종을 통해서 이제는 예수님의 육체 속으로 들어가게 된 것이다. 이것은 인간 쪽에서 주님 쪽으로 얼마든지 다가설 수 있다는 말이 아니라 예수님의 찢겨진 그 육체 속에서 놀라운 구원의 능력이 발생되어 이 인간 쪽으로 쏟아지게 되었다는 것이다.
즉 천국은 여전히 인간의 힘으로는 도달될 수 없는 곳이다. 단 휘장이 철거되면서부터 그동안 인간 세계에서는 맛도 보지 못한 하늘의 능력이 비로소 작렬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 예가 바로 마태복음 27장에서도 나온다. 십자가에서 돌아가시는 분은 예수님인데 불구하고 그 시각에 예루살렘에 있는 무덤들이 열려 죽었던 사람이 산 사람으로 활보하게 된 혜택은 타인이 입게 되는 것이다.
이것은 곧 인간이 자력으로 새롭고 산 길을 갈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육체에서 발생된 주님만의 능력을 덧입게 된 사람에게만 알 수 있는 것이 바로 '새롭고 산 길'이라는 것이다. 휘장 너머 계시던 하나님께서 휘장을 손수 찢으지고 이제 휘장 바깥에 있는 죄인들에게도 구원의 능력을 마음껏 발휘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 혜택이 누구에게 돌아가는가 하는 점을 알기 위해 휘장 안 쪽에 있는 언약궤 안에 있는 내용물 하나를 언급하겠다. 그것은 바로 '아론의 싹난 지팡이'다. 민수기 17:5에 보면, "내가 택한 자의 지팡이에는 싹이 나리니 이것으로 이스라엘 자손이 너희를 대하여 원망하는 말을 내 앞에서 그치게 하리라"라고 되어 있다.
그 당시 이스라엘 내부에서 반란이 있었는데 그 반란의 이유는 "어떻게 아론만이 제사장이 되라는 법이 있느냐?"하는 것이었다. 그 때 하나님께서는 각 지파의 족장들의 지팡이들 다들 갖고 오라고해서 오직 아론의 지팡이에서만 살구나무 싹이 피게 했다. 바로 죽은 것에서부터 살게 하시는 생명의 능력은 오직 레위지파에게서만 제공됨을 천명한 사건이다.
바로 이처럼 오늘날 이 시대에서 유일하게 구원의 능력을 제공받아 죄로 죽었던 것이 되살아 날 수 있는 혜택 자는 오직 하나님께서 친히 택한 자에게만 해당된다는 것이다. 이처럼 예수님께서는 구원의 계시를 내려주시지만 그 계시를 받고 구원 얻을 자는 '아들과 아버지의 소원대로 계시 받은 자'뿐임을 이처럼 구약의 율법 속에도 담겨 있는 것이다.
27:1-8
지금도 하나님은 일관되게 '소멸하시는 하나님'이시다. 이러한 하나님의 작업은 우리가 감짝 놀랄만한 일이 우리 자신 주변에 터졌을 때 비로소 느끼게 된다. 그렇다면 이 소멸하시는 불을 제공하는 제단이 지금 오늘날에도 있다는 말이 된다. 요한계시록 8:3에 보면, 지금의 제단은 하늘에 있다. 그 하늘은 예수님께서 구름 타고 승천하는 그 하늘이다. 그런데 지금의 지구 밖의 우주를 가지고서는 하늘이라고 하지 않는다. 영적인 세계의 하늘이다. 저 우주 밖의 아무리 먼 별에 가봤자 거기에도 또 땅이 있다. 그래서 지금의 땅이란 이 우주 전체를 가지고 칭한다. 물리적 법칙이 통하는 이 대자연 전체가 곧 땅이다.
하늘이란 거지 나사로가 천사에 받들려 올라간 그 세계를 뜻한다. 그 세계에 제단이 있고 그 제단에서 벌어지는 '소멸하시는 불'의 역할로 인해 이 대자연은 요동치게 된다. 요한계시록에 나온 바에 의하면 그것이 바로 지진이요, 태풍이요, 전염병이요 환경 오염인데 특별히 더욱 중요한 것은 교회의 타락이다. 즉 교회가 정치적 집단으로 변모해져 버린 것이다.
이처럼 제단에서 벌어지는 '소멸하는 불의 기능'은 이 세계 안에서 하나님의 거룩한 속성을 늘 보여주고 있다. 그 중의 한 사람이 바로 욥이라는 사람이다. 욥의 친구들은 욥의 신체에 일어난 변화를 보고, 차마 말로서 표현조차 못할 지경이라고 했다. 인간적으로 볼 때 완전한 파멸이요 망가짐이다.
욥 뿐만 아니라 이사야도 마찬가지다. 평소에 친숙한 성전에서 그는 거룩한 하나님을 뵈옵고 자신이 망할 백성 중의 한 일원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화로다!"라고 외친다. 이것은 마치 제단 불에서 제단 위의 제물 조각들을 하나님의 불이 핥듯이 태워버리는 것과 같다. 바로 이러한 제단불의 요소가 그대로 예수님에게 덧입혀졌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 세상의 그 어떤 분보다 하나님의 진노하심을 온몸으로 경험하면서 사신 분이다. 이 예수님을 품고 살아가는 오늘날 성도들을 통해서는 제단은 어떤 차원에서 일하게 되는가는 성도로 하여금 날마다 자신을 낮추게 하는 일을 하시게 된다. 예를 들면, 어릴 때는 자신이 천하의 실패자인 것처럼 좌절하게 된다. 하지만 좀 더 인생을 살아보면서 그 때 어릴 때 정해진 실패의 기준이 보다 새롭게 안 실패와 낭패와 견주어 볼 때 결코 실패가 아니라 축복이요 은혜인 것을 알게 된다. 이처럼 성도에게는 제단 불 되시는 주님에 의해서 자신의 야심과 교만을 낮추게 하는 일을 당하게 된다.
그래서 이 성도가 평생을 다 살고 나면 남는 것은 자기 인생 전부가, 그동안 죄만 지었음에도 불구하고 살게 하신 주님의 일방적인 은혜의 열매인 것을 알게 된다. 이런 자만이 천국에 갈 수 있는 성도라고 당당하게 말할 수 있다
27:20-21
성경은 이 등대를 교회라고 말한다. 그 근거는 요한계시록 1: 20에 나온다. "네 본 것은 내 오른손에 일곱 별의 비밀과 일곱 금 촛대라 일곱 별은 일곱 교회의 사자요 일곱 촛대는 일곱 교회니라". 교회를 가지고 빛이라고 하면 사람들은 기분좋게 인정들을 하면서도 막상 "당신이 이제부터 빛의 자녀입니다"라고 하면 상당히 부담스러워 한다. 성도가 빛의 자녀라고 불러주는 것에 대해서 부담스러워한다는 것은 뭔가 빛의 자녀에 대해서 크게 오해하고 있는 증거이기도 하다.
성경에서는 이 세상을 어두움이라고 한다. 따라서 성도는, 왜 이 세상이 깜깜한 어두움인지를 알아야 한다. 그리고 무엇이 빛인가도 알고 있어야 한다. 흔히 사람들이 빛의 자녀라고 불리는 것을 거북스러워하는 것은 어둠과 빛의 구분을 윤리적이고 도덕적인 기준에 의해서 구분되지는 줄로 잘못 알고 있기 때문에 그렇다.
마태복음 4:14-16의 선지자 이사야의 예언에 의할 것 같으면, 그동안 여호와 하나님을 모르던 이방민족이 살던 땅에도 마지막 때는 빛 되시는 여호와 하나님께서 등장하신다는 것이다. 그 여호와 하나님께서 나타나기 전의 세상을 '어두움'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두움이란 빛 되시는 분이 아직 나타나지 않는 세계를 뜻한다. 즉 빛이 없기에 어두움인 것이다.
그런데 이것은 윤리적, 도덕적으로 파악하면 마치 이방민족들은 유대인들과는 달리 온종일 나쁜 짓만 일삼는 집단인 것처럼 곡해될 수가 있다. 즉 유난히도 나쁜 짓을 더 많이 하기에 어두움이라고 간주될 공산이 있다.
이사야에 예언된 스불론 납달리 땅도 하나님 관점이 아니라 인간 관점이라면 추호도 '어두움'이라는 나쁜 평가가 받을 하등의 이유가 없다. 나름대로 반듯하게 사는데 있어 체제가 잡혀 있는 것도 이방국가 모습이다. 그런데 성경에서는 단도직입적으로 그런 이방민족 전체를 어두움이라고 지칭한다. 그것은 단지 빛 되시는 분을 알지 못하는 세계이기 때문에 그렇다. 즉 빛이 누락되면 무조건 어두움이다.
요한복음 1:1-5에 보면, 인간이 범죄하고 난 뒤부터는 빛으로부터 차단되어 있다. 인간의 윤리적, 도덕적 노력으로 빛을 붙잡을 수가 없게 되고 말았다. 빛이라고 불리는 분은 실제로 어떤 분이다. 실제로 아기로 태어난 적이 있고 실제로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분이다. 여기에는 그 어떤 수상한 구석도 없다. 종교로 왜곡시킬 하등의 이유도 없다. 이 분을 종교화 시킨 것은 예수님의 뜻이 아니라 도리어 종교집단들의 짓이다. 이들은 예수라는 유명 영웅을 이용하여 자기 집단의 세를 불리려고 획책하고 있으며 지금도 멈추지 않고 있다.
빛 되시는 분이 자기 백성에게 자신을 알리는데 그 어떤 대리단체도 필요치 않다. 직접 역사하신다. 에베소서 5:13-14에 보면, "그러나 책망을 받는 모든 것이 빛으로 나타나나니 나타나지는 것마다 빛이니라 그러므로 이르시기를 잠자는 자여 깨어서 죽은 자들 가운데서 일어나라 그리스도께서 네게 비취시리라 하셨느니라"라고 되어 있다.
이처럼 성도라는 것은, 오직 그리스도로 인하여 죽은데서 되살아났기에 세상의 그 어떤 힘에도 꿀리지 않을 것이다. 이런 자유가 곧 빛을 증거하는 빛의 자녀의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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