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애굽기 24장 – 25장 주석
출애굽기 24장 – 25장 주석
이름 : 이진용(IP:222.99.120.158)
출애굽기 24장 – 25장
(24장 - 31장)
모세언약에 있어 복의 강림은 여호와의 이름을 기념하기 위해 단을 쌓고 그 위에서 번제와 화목제를 드리는데 있다(20:24). 모세가 이해하기에는 번제와 화목제의 시행, 그 자체만으로 복의 강림이 성사되지 못하고 그 이전에 말씀에 대한 준행만이 결정적 요인이다.
번제와 화목제의 시행은 우리가 어떤 일이 있더라도 목숨을 걸고 이 말씀대로 살겠습니다 라는 헌신의 표라고 봐야 한다(24:7). 만약 우리가 이 계명에 순종하지 않으면 우리도 죽음을 면치 못할 것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위의 사실을 이렇게 이해하면 안 된다. 즉 비록 우리가 계명대로 못살더라도 우리가 드리는 이 번제와 화목제를 받으시고 그냥 넘어가게 하소서 라는 식으로 말이다.
이와 같은 의식은 바로 신상(神像)에게 번제와 화목제를 드려 복을 획득하던 이방종교의 의식과는 달리 그 신상의 자리에 계명과 율례를 갖다 놓는 것이 특색이다(20:23). 복을 따내는 데는 어떤 테크닉이 쓸데없다. 다만 자비로운 하나님의 심정을 가지고(22:27) 약자를 보호하고 이웃을 환대하는 법을 준행할 뿐이다. 만약 이러한 율례를 지키지 않고 번제와 화목제를 드리면 그것은 여호와를 모독하는 것이 되어서 복과는 상관이 없이 오직 죽음만이 찾아 들뿐이다. 이것이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과 맺은 모세언약이다.
모세는 그 희생의 제물의 피를 양푼에 담고 반은 단에 뿌리고 반은 백성들에게 뿌렸다. 그 전에 모세는 모든 말씀을 지상에서 기록했다는 것을 우리는 주목할 필요가 있는데 이러한 말씀이 실효를 거두는 세상의 건설, 이것이 모세언약에 담긴 하나님의 의도이다.
그런데 이렇게 되고 보면 흔히 신학자들이 이해하듯이 모세언약은 조건언약이 되고 만다. 많은 신학자들은 아브라함언약과 다윗언약은 무조건 언약인 것에 반해 모세언약은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오해이다. 신학자들의 이러한 결론의 도달 이유는 언약을 구약의 중심사상으로 인정치 않고 다만 그 중심사상 중의 하나로 보는 경향 때문이다. 즉 어떤 일관성 전개에 있어 원활치 못하다는 것이다.
모세언약도 은혜언약이며 무조건적이라는 것이 24:12 한절에 그 실마리가 보인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산에 올라 내게로 와서 거기 있으라 너로 그들을 가르치려고 내가 율법과 계명을 친히 기록한 돌판을 네게 주리라]는 구절이다.
이 본문에 [가르친다]는 것이 무엇을 가르친다는 것일까? 단순히 율법과 계명을 가르친다면 이것이 이미 그전에(24:4) 다 알고 있는 사실이며 이미 기록된 것이 있다. 그런데 새삼스럽게 다시 산에 올라가서 가르치기 위하여 가르침을 받을 부분이 무엇인가? 또 왜 꼭 돌판에 친히 기록해야지만 가르침이 성립되는가? 이점을 풀기 위해서는 우리도 모세를 따라 산에 올라갈 수밖에 없다.
그러나 모세가 두 번째 시내산에 올라가서 가르침을 받는 것은 율례와 계명에 관한 것이 아니다. 성막을 만들기 위한 구조를 지시 받는다. 그리고 그 안에서 행할 일을 위하여 특수한 사명을 띤 사람의 복장이라든지 하는 일을 지시 받는다(25:1-31:17) 그래 놓고 정작 산에 올라간 원래의 목적인 돌판은 내려오기 직전에 받게 된다. 그리고 그 돌판에 기록된 말씀은 성막 구조에 관한 것이 아니라 이미 알고 있는 10계명뿐이다(신명기 4:13).
왜 이미 알고 있는 10계명을 친히 돌판에 적었을까? 여기에 대한 해답을 첫째로 시내산에서 친히 모세가 들고 온 원판이 어디서 깨어지는가를 보면 되고 둘째로 그 깨어진 돌판을 대신하여 만들어지는 두 번째 돌판이 어디에서 만들어지며 세번째 모세가 산에서 말씀을 적어 가지고 온 그 둘째 돌판이 나중에 어디에 보관되는가를 아는데 있다. 즉 돌판 보관과 성막에서의 하는 일과의 상관관계를 정리해 보면 밝혀진다.
교회가 목회를 할 때 가장 주의해야 될 일은 교인들이 예수님의 피를 주술적인 시각에서 거론하지 않도록 하는데 있다. 육신의 욕심은 성령을 거스린다.
24: 3- 8
로마서 9:11-13에 보면, 창세 전에 있었던 그 사랑을 확인시키기 위해서 하나님은 야곱이라는 작자를 이 땅에 태어나게 하셨다. 이로서 야곱이란 사람은 자신의 운명 안에서 이 세상 사람들이 상상도 못하는 '창세 전의 사랑'을 품고 살아가게 된다. 12지파가 바로 야곱의 자식들이다. 따라서 그들도 하나님의 '창세 전의 사랑'을 품고 살아가는 운명체가 된다. 이러한 사랑을 보여주기 위해서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원치 않는 '애굽 탈출'을 감행시켰다.
그리고 그들로 하여금 원치 않는 행로로 인도하여 광야길을 가게 한다. 그런데 그 광야 길에서도 사람들이 원하는 것을 의도적으로 피하는 식으로 그들은 헤매게 된다. 광야의 이스라엘의 특징은, 눈에 보이지 않는 분이 계셔서 그 분에 의해서 60만이 넘는 사람들이 움직여나간다는 것이다.
모세가 결코 구름기둥과 불기둥을 만들어낸 것이 아니다. 구름기둥과 불기둥에 의해서 인도함을 받으니 그들은 물과 양식이 없는 코스로 인도받게 된 것이다. 이것은 인간들이 염두에 두고 있는 '하나님이 사랑'과는 전혀 엉뚱한 '창세 전의 사랑'을 알려주기 위한 조치다. 즉 하나님의 창세 전의 사랑을 인간들이 원하는 물과 양식에 의해서 가리워지기 싫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강제로 시내산 앞에서 소집 당한다. 그 밑에서 그들은 하나님의 약속을 대하게 된다. 그것이 바로 제물의 피로 만들어진 '언약의 피'다. 그 언약의 피는 양푼이에 담겨져 두 군데 나뉘어져서 뿌려진다. 하나는 율법책에 뿌려지고 다른 하나는 백성들 머리 위에 뿌려진다.
율법책에 대해서 백성들은 자신들이 '준행할 수 있다'고 나선다. 즉 자신들의 행함으로 율법 준수에 나서겠다는 것이다. 하지만 피는 율법책에도 뿌려져야 했다. 그 이유는, 이 율법책에 적힌 모든 내용은 장차 피를 내야 하는 그 분이 책임지고 다 준수하게 된다는 말을 뜻한다.
히브리서 10:5-7에 보면, 이 분의 죽으심으로 성도는 그냥 가만히 앉아서 거룩함을 얻게 된다. 이 거룩함 속에는 율법의 완성에서 오는 '의로움'이 담겨 있다. 또한 이 피 뿌림은 아무에게나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오로지 12지파의 머리에만 뿌려진다. 즉 이 피 뿌림이 사랑 받기로 예정된 자, 야곱에게 주어진 그 '창세전의 사랑'인 것이다. 이 사랑을 보여주기 위한 경로를 따로 이스라엘 백성들은 불기둥과 구름기둥으로 인도함을 받아왔다.
그렇다면 왜 하필이면 피인가? 쇠나, 돌이나, 금이나, 불이나, 물로 언약을 세워도 가능할 뻔한데 왜 하필이면 '피'가 되어야 하는가? 이 점을 알려주는 본문이 갈라디아서 1:4에 나온다. 여기에 보면,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곧 우리 아버지의 뜻을 따라 이 악한 세대에서 우리를 건지시려고 우리 죄를 위하여 자기 몸을 드리셨으니"라고 되어 있다.
이 본문은 두 가지를 결합시켜 주고 있다. 하나는 '악한 세대'이고 다른 하나는 '자기 몸을 드리심'이다. 바로 언약이란 이처럼 악한 세대가 짓게 되는 죄와 그리고 그 죄로 인해 망가지고 죽게 되어서 생겨난 의로운 제물의 피가 결합되어 언약을 구성한다.
창세기 4장에 나오는 아벨의 피를 예수님은 자신의 십자가와 연관시켰다. 아벨이 피가 땅에 쏟아져야 하나님은 피에 대해서 반응하는 식으로 움직이신다. 이처럼 하나님은 '언약의 피' 중심이다. 우리가 포함해서 이 악한 세대가 왜 악할 수 밖에 없는 가를 증빙하는 근거로 예수님은 이 땅에서 피를 쏟아야 했다. 따라서 누구든지 언약의 피 외에 다른 방식으로 구원이 가능하다는 소리를 못하는 것이다. "왜 나는 구원 안해주는가"하고 하나님에게 대들 수가 없는 법이다. 성도의 고백은 '앞으로 잘 할게요'가 아니라 '예수님 고맙습니다'가 되어야 한다.
24:12-18
이미 하나님은 모세에게 십계명과 각가지 규례들을 내려 보내었고 모세는 빠짐없이 그것을 백성들에게 글로 남겨서 알려준 바 있다. 그런데 왜 그것으로서 충분하게 백성을 가르치지 못한다고 보시는 것일까? 돌판이 있고 없고 가 어떤 점에서 가르치기에 차이가 나는 것일까?
그것은 인간은 여전히 자기 자신의 내막을 모르는 상태에서 하나님의 법을 지키겠다고 나서는 이러한 의식은 전혀 하나님께서 율법이 내린 의미를 모르게 된다. 하나님의 이스라엘 구원은 순전히 '사랑' 차원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율법은 그 사랑을 품고 있다. 그런데 어떤 방식으로 사랑을 품고 있는지를 그들은 알지 못하고 있음을 하나님께서 이미 아신다.
이 점을 알려주기 위해서 하나님은 이스라엘 내부에서 모세를 빼낼 필요가 있었다. 모세가 있어 그들에게 율법을 전하면 그들에게는 그저 '잔소리'로만 들려질 뿐이다. 즉 '모세 부재(不在)'의 상황이 일어났을 때, 진정 그들의 본색이 무엇인가를 모세가 함께 있을 때는 알지 못한다는 것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보시는 진단이었다.
이제는 잠시 동안 그 모세를 백성들 속에서 빼 내어가신다. 이것이 '모세 부재기간'이다. 모세는 하나님과 합류되고 백성들은 구름을 경계선으로 하여 거룩한 나라로부터 차단되어 있다. 40일 후에 모세가 다시 그들 앞에 나타났을 때에 모세는 빈 손이 아니었다. 모세의 양 팔에는 계명이 박힌 돌판이 있었다.
이제 하나님은 이 돌판의 운명이 어떤 식으로 끝장나는 가를 통해서 하나님의 언약이 어떤 식으로 백성들을 다루시는가 가 드러난다. 돌판은 백성들의 태도 앞에서 여지없이 박살 났다. 이로서 언약은 깨어져버렸다. 여기서 우리가 우리 내부의 심정을 정확하게 드려다 보는 계기를 갖게 된다.
즉 인간들이 알고 있는 신(神)은 인간들이 임의로 만들어 낼 수 있는 신이다. 각자 인간들이 품고 있는 종교심과 양심과 거룩을 쳐다보는 심성들을 끄집어내어 그것을 종합, 정리하여 '대충 이 정도로 알고 있으면 실제 하시는 신도 섭섭하지 않을 것이라'고 여긴다. 이처럼 인간들의 선입견을 가지고 신을 제조해 내는 이유는, 그래야 그 신의 이름으로 모든 사람들이 하나로 단결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일사불란하게 조직체를 움직일 때, 사람들은 그 안에서 비로소 자기 존재의 안정성을 찾게 된다. 자기를 위한 하나님, 자기를 의한 하나님, 자기의 소유의 하나님을 인간들은 얼마든지 제조해낸다. 그런데 그것은 어디까지나 '인간들의 자기 사랑'이다. 참된 여호와 하나님의 사랑이 아닌 것이다.
하나님은 참된 사랑을 가르치기 위하여 돌판은 여지없이 깨어진다. 그리고 모세로 하여금 지상에서 돌판을 다듬어 만들기를 지시하고 세 번째로 모세로 하여금 다시 하나님께로 올라가게 한다. 그렇게 해서 새겨진 돌판은 직접 백성들에게 다가서지 못하게 만든다. 왜냐하면 이미 백성들은 그들의 비언약적 속성이 만천하에 다 드러나게 되었다.
이제 이스라엘이 하나님과 연관성을 갖는 것은 모세가 새로운 받은 그 법에 의해서만 가능하다. 그 법에 보면, 그 돌판을 상자 안에 가두어진다. 그 상자 곁으로 백성들은 일체 접근하지 못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언약을 위반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여전히 하나님으로 사랑과 자비를 받을 수 있는 관계에 놓인 것은, 그 돌판을 가두어놓은 그 뚜껑에 발린 속죄 제물의 피 때문이다. 대속죄일날 정기적으로 그 언약궤 뚜껑에는 하나님의 거룩의 피가 발린다.
백성의 죄를 하나님 스스로 해결해 나가시는 방식으로 그들을 구원의 세계로 데리고 들어가시는 것이다. 그 뚜껑을 '증거궤'라고 한다. 이와 같은 은혜로의 인도하심은 마치 매번 은혜를 짓 밟는 것을 용납하는 사랑하는 배우자와의 결혼 관계와 같다. 부부라는 것은 규칙을 철저하게 지킴으로서 유지되는 것이 아니다.
남편이 제시하는 법을 아내가 다 지키고, 아내가 제시한 법을 남편이 남김없이 다 지켜내어야지만 부부가 비로소 성사되는 것이 아니다. 인간은 아무리 노력해도 '자기'와 '남'을 일체 시킬 수 없다. 상대방이 제시한 법을 다 준수해도 그 사람이 될 수 없다. 사람이 타인과 하나가 되는 경우는 '사랑뿐이다.
남편의 변치 않는 사랑이 여전히 아내를 아내로 유지시켜준다. 하나님도 마찬가지다. 하나님의 중심 되는 뜻은 곧 '사랑'이다. 그것도 집요하게 주시는 일방적인 사랑이다. 이런 사랑 앞에서 인간은 여지없이 자신의 관심사는 무색해져야 하고 희석되어야 한다. 인간의 존재란 단지 하나님 만드신 '별'과 같은 존재다. 하나님이 주신 은혜로 반짝이는 별 말이다.
그러나 인간들은 이렇듯 매일같이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찢고, 또 찢어버린다. 자신이 원하는 뜻이라는 반항심을 갖고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사랑은 이런 인간들을 끝까지 사랑하신다. 왜냐하면 '자기 백성'과 '자기 백성'이 아닌 자를 오직 사랑으로만 차별화 하기 위해서이다.
25: 1- 9
하나님께서 "내가 그들 중에 거할 성소를 그들을 시켜 나를 위하여 짓되
무릇 내가 네게 보이는대로 장막의 식양과 그 기구의 식양을 따라 지을찌니라"라고 되어 있다. 즉 성전을 짓기 위해서 갖다 바쳐라 는 것이다.
성전이란 전쟁의 용사기념관이다. 즉 하나님께서 홀로 전쟁을 진행시켜 혼자만의 능력으로 적들을 물리쳤음을 대대로 증거하는 기념관이 곧 성전이다. 따라서 이 성전을 짓기 위해 동원된 모든 물품은 인간이 노동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친히 치르시는 전쟁으로 인해 획득된 전리품으로 충당된다.
출애굽기 12:35-36에 보면, "이스라엘 자손이 모세의 말대로 하여 애굽 사람에게 은금 패물과 의복을 구하매 여호와께서 애굽 사람으로 백성에게 은혜를 입히게 하사 그들의 구하는 대로 주게 하시므로 그들이 애굽 사람의 물품을 취하였더라"라고 되어 있다.
10재앙을 거치면서 이제 애굽은 완전히 이스라엘과 하나님 손아귀에 놓이게 된다. 10 재앙 가운데서 가축이 죽는 재앙도 있었는데 애굽 사람들의 가축은 이유 없이 몰살되어야만 하고, 반대로 이스라엘 사람들의 가축은 이유를 모르는 채 멀쩡해야 한다. 이것은 애굽 가축이든 이스라엘 가축이든 모두 하나님 손에 달려있다는 것을 말해준다.
이런 하나님께서 주관 하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애굽에서 빠져나오면서 빈 손으로 나온 것이 아니라 많은 재물과 패물을 가지고 나올 수 있었다. 바로 그 재물과 보석들이 본문에서 성전을 만들기 위한 용도로 제공되는 것이다. 이로서 성전은 순전히 하나님께서 홀로 승리하신 그 승리를 기념하는 물품으로 가득 채워지게 된다.
옛 언약에서는 인간이 바친 것들 속에서 하나님께서 인간과 만나주셨지만 신약에서는 오직 예수님 몸 안에서 하나님께서 만나신다. 그리고 그 하나님의 몸이라는 것은 십자가 사건에 기초한 능력으로 작렬하게 된다.
따라서 하나님과 만난 사람은 십자가 앞에서 하나님을 만나게 된다. 그 십자가 앞에서 인간은 자기 실망과 자기 절망을 안게 된다. 더 이상 자기 자신에게 의존하지 말아야 합당함을 알 수 있다. 사람들이 여전히 '자기 것'이 있다고 여기게 되면 그런 상태에서 내놓은 헌금이란 단지 자신의 것이 침해 받지 않는 범위 안에서 동냥하듯이 헌금하게 된다.
즉 '즐거이 내는 헌금'이라는 것이 단지 자기의 것이 공격받지 않는 경계선 밖에서만 즐거이 내는 것이 되고 만약에 조금이라도 그 경계선 안으로 들어오게 되면 '즐거이 내는' 것이 아니라 강력 반발하든지 아니면 일종의 투자 용도로서 헌금에 나서게 된다. 이것은 예수님의 공로를 증거하는 성전이 아니라 인간들의 자기 요령과 기부하는 양심을 찬양하는 거짓 성전이 될 것이 뻔하다.
25:10-22
속죄소 밖의 세상에서의 죄 개념과 속죄소에서의 죄 개념이 완전히 다르다. 세상에서의 죄란 세상 질서에 위배되는 것이고 타인의 생명과 신체를 파괴하려는 것이다. 즉 인간의 존엄성과 품위를 손상하는 것을 그들은 궁극적인 죄라고 간주한다. 그런데 그렇게 보면 복음이야말로 이 세상의 안목에서 볼 때 가장 우려하는 죄악 중에 죄악이다. 예수님이 그들의 눈으로 보면 죄인 중의 괴수로 보이게 마련이다. 왜냐하면 인간의 고유의 가치와 품위를 묵사발 만들기 때문이다.
이 세상은 존재의 함성으로 가득 차 있다. 하지만 성막이나 속죄소에는 인간의 비명이 울려 나온다. 생명 있는 것들이 최후의 지점에서 질러보는 절규다. 이곳에는 더 이상 자존심이 통하지 않는 곳이다. 그저 뜨겁고 맹렬한 저주의 불길 속으로 한없이 들어가야 될 곳이다.
히브리서 12:20-21에 보면, "이는 짐승이라도 산에 이르거든 돌로 침을 당하리라 하신 명을 저희가 견디지 못함이라 그 보이는 바가 이렇듯이 무섭기로 모세도 이르되 내가 심히 두렵고 떨린다 하였으나"라고 되어 있다.
이처럼 하나님의 진실이란 이 세상에서는 오로지 죽음으로만 드러난다. 죽음의 모습이 아닌 진리는 진리도 아니다. 속죄소 밖에서 통하는 의로움이나 진리란 인류 사회 번영에 이바지하는 모든 것들이다. 소위 '공동의 선(善)'을 위해 매진하는 것이 참된 의로움이라고 보고 있다. 이런 의로움을 위해서 일하게 되면 그 인간은 참으로 가치 있는 인간으로 본다.
그러나 이러한 기준들은 속죄소 앞에서 전혀 통하지 않는다. 인간들이 내세운 '공동 선'을 위한 기준들은 하나님의 진노만 야기시킬 뿐이다. 이처럼 속죄소의 기능과 구조는 하나님의 진노가 왜 떨어져야 하는가를 보이는 장치다. 그것은 인간의 존재 자체가 하나님의 거룩을 훼손하는 요소가 되기 때문이다.
레위기 16:14-19에 보면, 이 피는 인간의 피는 아니다. 인간의 피는 도리어 진노를 유발시킬 뿐이다. 레위기 17:10-14에 보면, 하나님은 인간을 볼 때에 더러운 피, 곧 부정 타는 더러운 생명이라는 본질을 갖고 있는 존재로 간주한다. 그런데 이러한 인간이 죽고 나면 그 속에 있는 본질이 그대로 노출된다. 그렇게 되면 그에게 주어지는 것은 하나님의 무서운 진노뿐이다. 그래서 속죄소에 뿌려지는 피와 그 피를 내게 하는 불은 반드시 제단에서 제공되는 것이어야 한다.
속죄소란 어느 상자 위의 뚜껑을 의미한다. 보통 상자란 상자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내용물에 의미가 담기게 마련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인간에게 상자를 선물로 주셨다. 안의 내용물에 궁금할 수 밖에 없다. 그런데 참으로 이상한 일은 상자 안에는 아무 것도 없다는 점이다. 즉 '아무 것도 없음' 자체가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담긴 상자라고 할 수 있다. 언약궤 안에는 하나님의 거룩을 훼손시킨 인간들의 못된 악마적인 성품만 가득 들어있다.
하나님을 평소에 미워하고 원망한 증거품들이 거기에 담겨 있다. 따라서 죄를 지었다고 구원받는 것은 아니다. 문제는 흔히 포장자를 우습게 보기 십상인데 언약궤만큼은 그렇지 않다. 그 상자 속에 내용물을 덮어주는 그 뚜껑이 바로 속죄소, 즉 '죄를 씻어주는 장소'가 된다. 다른 말로 '시은좌'라고도 하는데 시은좌란 은혜가 내려앉는 좌석이라는 뜻이다.
그 위에 천사가 사수하듯이 속죄소 뚜껑을 장식하고 있다. 이것은 곧 창세기 3장에서 생명나무 자체를 보호하기 위해 천사로 하여금 파수하게 하시는 원칙이 이 속죄소 뚜껑 위에서 되풀이 되고 있는 양상이다.
이 속죄소를 만들었다고 구원받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무너져야 할 대상이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다 모형이기 때문에 그렇다. 히브리서 8:4-5에 보면, 성도는 모형의 자재로서 실체 되시는 주님으로부터 부름 받았다는 것을 잊지 말고 결코 자신의 모형적 행위가 아니라 예수님의 실체적 행위로 구원받았음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25:31-33
하나님께서 등잔대를 만들라고 하신 것은 장차 오실 메시야에 대한 모형이기 때문에 그렇다. 등잔대가 놓여 있는 장소는 평범한 곳이 아니다. 옛날 이스라엘 집단 내에는 늘 공터가 마련되어야 했다. 그 공터에는 하나님만이 거주하는 거룩한 영역이 된다. 소위 성막이라고 불리는 그 영토에는 '뜰'이라고 하는 제단이 놓인 장소가 있다. 그리고 그 뜰을 지나면 텐트가 쳐있는데 그 텐트 안에는 두 개의 지역으로 가름하기 위한 중간 커튼이 쳐있다.
제일 안쪽을 '지성소'라 해서 거기에는 하나님께서 늘 계신 곳이라는 대제사장이라고 해도 함부로 들어갈 수 없다. 오직 1년에 하루, 즉 대속죄일이 되는 7월 10일에만 들어갈 수 있다. 그 지성소 들어가기 전에 뜰에서 먼저 만나는 텐트 속이 바로 성소라는 곳이다. 그 성소 안는 컴컴하다. 따라서 빛을 밝힐 조명기구가 필요하다.
등잔대 자체가 곧 빛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 등잔대에는 제단에서 죽어간 제물의 피가 묻히게 된다. 그리고 그 등잔대의 불을 밝히는 기름은 감람나무의 열매를 빻아서 나온 기름을 사용하게 된다.
깜깜한 성소 안을 밝히는 것은 이처럼 하나님께서 친히 지정하신 그 기름으로만 가능하며 그 외의 다른 기름과 등잔대로서는 가능하지 않다. 이 등대가 놓여 있는 처소에는 제단의 제물에서 받아낸 피가 뿌려지게 된다. 거룩한 제물의 피로서만 거룩이 유지되게 되어 있다.
이 등잔대의 구조를 보면, 조립식으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하나를 금속덩어리로 연하게 쳐 늘여서 등대의 7가지까지 뻗어 나오게 한다. 이는 등잔대나 7가지의 등잔이나 결코 분리되지 않는다는 뜻이다. 그리고 그 최종 등잔대의 모습이 살구꽃 형상으로 되어 있다. 이것은 마치 하나님께서 마음껏 솜씨를 부려서 하나의 예쁜 작품으로 결실 맺는 것처럼 보인다. 그 증거가 요한계시록 1장에 나온다.
요한계시록 1:20에 보면 등잔대를 7 교회라고 보고 있다. "네 본 것은 내 오른손에 일곱 별의 비밀과 일곱 금 촛대라 일곱 별은 일곱 교회의 사자요 일곱 촛대는 일곱 교회니라"라고 되어 있다. 즉 이 일곱 교회는 오로지 한 등대 가운데서 뻗쳐진 7 가지에 속한다. 이는 주님이 교회를 장악하고 있기에 결코 교회가 망하는 일은 없다는 것이다.
이 대목에서 우리가 유념해야 할 것은 역사적 교회가 망하지 않는다는 말이 아니다. 이 역사는 늘 변하고 또 변한다. 하지만 이 변화무쌍한 역사의 위력 속에서도 주님의 선택해 있는 묵시적 교회는 결코 피해를 입는 일이 없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현재 예수님의 입장도 이와 같다.
요한계시록 1:13-16에 이 엄청난 광채를 지닌 예수님을 우리가 직접 눈으로 보지 못한다. 하지만 이 묵시적 예수님은 자신이 나타내고 싶을 때, 역사 속으로 흔적으로 드러내신다. 사도요한에게 자신의 모습을 보이신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참된 교회의 묵시적 양상도 이렇다. 교회가 있다고 생각하면 없고, 교회가 없다고 한다면 교회는 있다. 이런 식으로 역사 속에 드러난다.
그래서 요한계시록 2장-3장에 나오는 모든 교회는 이 지상에서 다 사라졌다. 하지만 주님의 손에 붙잡혀 있는 7촛대로의 7교회는 영구히 망하지 않고 죽음의 세력을 능가하는 위치에 놓여있다. 그렇다면 이런 묵시적 교회가 이 세상에서 어떤 식으로 드러나는가?
사도행전 20:28절에 보면, '하나님의 피'로 세워진 것이 교회요 그 교회만이 세상의 유일한 빛이요 소금이다. 따라서 그 교회에 속한 성도들은 자신의 교회로 인하여 즐거워하고 기뻐해서는 아니 되고, 오직 '하나님의 피의 복음'으로만 즐겁고 기뻐해야 한다. '하나님의 피'가 의미하는 바는 현재 자기가 속해있는 교회를 절대화 시켜서는 아니 된다는 말이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피를 흘리신 것은, 세상이 예수님의 복음을 가로막았기 때문이요, 이 하나님의 피의 복음을 역사적인 모든 인간들의 조직체가 반대하는 성향을 띤다. 심지어 교회가 나서서 하나님의 피를 저지하고 막아서는 광경을 보이게 되는 그것이 바로 예수님으로 의해서 정죄 당한 인류 역사의 생리다.
인간들이 복음을 가로 막는 것은 자신들이 생각한 변화를 달성하는데 있어 하나님의 복음을 이용하려 들기 때문이다. 즉 자신들만이 따로 생각해 놓은 '빛'이라는 것이 있고 그 빛을 발산하는 등대가 자기 자신이기를 원하는 것이다. 자기 조직의 영광, 또한 자기 자신의 영광이 하나님의 피를 가리게 됨을 잊지 말아야 한다. 성도는 단지 하나님의 피를 증거하는 증거 자로만 남아야 한다.
첨부파일 : 출애굽기 24장 – 25장.docx (29.2K), Down: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