렘 9:23-26 (참으로 자랑할것)
렘 9:23-26 (참으로 자랑할것)
이름 : 우리교회(IP:220.81.41.193)
본문 : 예레미야 9장23-26절
제목 : 참으로 자랑할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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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교회
09-10-28 17:39
http://media.woorich.net/성경강해/예레미야-2009/034강-렘9장23-26(참으로자랑할것)-jer091028.hwp
이근호
09-10-28 21:12
참으로 자랑할 것
2009년 10월 28일 본문 말씀: 예레미야 9:23-26
(렘 9:23, 개정)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지혜로운 자는 그의 지혜를 자랑하지 말라 용사는 그의 용맹을 자랑하지 말라 부자는 그의 부함을 자랑하지 말라』
(렘 9:24, 개정) 『자랑하는 자는 이것으로 자랑할지니 곧 명철하여 나를 아는 것과 나 여호와는 사랑과 정의와 공의를 땅에 행하는 자인 줄 깨닫는 것이라 나는 이 일을 기뻐하노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렘 9:25, 개정)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보라 날이 이르면 할례 받은 자와 할례 받지 못한 자를 내가 다 벌하리니』
(렘 9:26, 개정) 『곧 애굽과 유다와 에돔과 암몬 자손과 모압과 및 광야에 살면서 살쩍을 깎은 자들에게라 무릇 모든 민족은 할례를 받지 못하였고 이스라엘은 마음에 할례를 받지 못하였느니라 하셨느니라』
사람이 자랑한다는 것은 필히 자기를 위한 자랑입니다. 타인이 넘볼 수 없는 나만의 공을 드러내기 위한 자랑입니다. 지혜로운 자가 지혜를 자랑하는 것은 ‘나만이 지혜롭다’를 것을 전제로 한 자랑입니다. 용사가 용맹을 자랑하는 것도 ‘나만이 용맹스럽다’는 것을 드러내기 위한 자랑입니다. 부자가 자신의 부함을 자랑하는 것은 ‘자기 만이 독보적으로 부하다’는 것을 전제로 한 자랑입니다.
이런 자랑들의 문제점은 모두 사적이고 개별적이라는데 있습니다. 공통적인 것이 못되는 자랑거리입니다. 신약시대의 자랑거리는 이런 것이 아닙니다. 고린도전서 1:30-31에 보면, “너희는 하나님께로부터 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고 예수는 하나님께로서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속함이 되셨으니 기록된 바 자랑하는 자는 주 안에서 자랑하라 함과 같게 하려 함이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신약 때에는 지혜나 용맹이나 부유함이 자랑해서는 아니된다는 말이 아닙니다. 얼마든지 지혜나 용맹이나 부유함을 자랑해도 됩니다. 단 그 모든 것은 사적인 열심이나 용을 써서 획득한 것이 아니라 모두 주 안에서 주어진 것이기에 결국 ‘주님만 자랑’해야 한다는 겁니다.
이 취지를 그대로 오늘 본문에 다시 적용한다면 이렇게 됩니다. 이미 지혜가 있는 자는 지혜를 주 안에서 자랑하고, 용사는 주 안에서 그 용맹함을 자랑하고 부유한 자는 주 안에서 그 부유함을 자랑하되 모두 주 안에서 자랑해야 한다는 겁니다. 달리 말해서 하나님의 지혜와 하나님이 용맹과 하나님의 부유함만을 자랑해야 한다는 겁니다.
그렇게 되지 아니하면 어떻게 될까요? 오늘 본문에 보면, 할례 안 한 자는 할례 한 자나 모두 멸망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말씀을 해놓으시고는 그것을 취소하거나 무효화 하시지는 않으십니다. 없었던 것으로 여기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하나님은 아주 단순하면서도 단호하게 인간을 다루십니다. 예를 들면, “애들아, 내가 내어준 숙제 했어? 안했어? 그러면 멸망당해야지”라는 식입니다.
할례 했음에도 망하는 것은 마음에 할례를 행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즉 마음의 할례를 행하라는 숙제를 내어주었음에도 불구하고 안 했으니 당연히 멸망당해야 합니다. 그런데 이러한 하나님의 태도가 신약에 와서는 전혀 달라지지를 않습니다. 그렇다면 과연 어느 인간이 하나님께서 내어준 숙제인 ‘마음의 할례’를 행해서 거룩한 사람이 될 수 있겠습니까?
여기에 대해서 신약에 나타난 성도의 특이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신약의 성도는 하나님께서 먼저 ‘해답’을 주시고 문제는 자신들에 의해서 만들어지는 식으로 인생을 살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한 예를 들겠습니다. 어느 화가가 그림을 그립니다. 그리고 다 그리고 난 뒤에 “흠 만족스럽군”라고 붓을 거둡니다. 하지만 그것 뿐입니다. 그 어떤 화가도 자신이 만든 그림 속으로 뛰어들어갈 수 있는 화가는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창조주께서는 그 정도에 머물지 않습니다. 완성된 그림에 뛰어들어가시는 것이 아니라 아예 본인이 뛰어들어가서 자신을 포함해서 그림을 친히 완성시켜 나가십니다. 사람들이 자신을 십자가 죽이면, 예수님은 다음과 같이 평가하십니다. “저들이 내 목숨을 빼앗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버리노라”고 말입니다.(요 10:17-18)
이런 사실을 알아 채는 것이 ‘마음의 할례’를 받은 사람입니다. 즉 이미 해답을 하나님에게 받아버린 것입니다. 즉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서 오셔서 세상 완성에 나서시면서 그 완성될 자기 백성에게 완성자로서의 필요한 해답을 미리 제공하셨는데 그것이 바로 십자가의 피의 은혜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피’의 은혜를 아는 사람은 이미 모든 것의 해답을 아는 지혜자가 되고 용맹한 자가 되고 부유한 자가 되어져 있는 겁니다. 고린도후서 6:8-10에 보면, “ 영광과 욕됨으로 말미암으며 악한 이름과 아름다운 이름으로 말미암으며 속이는 자 같으나 참되고 무명한 자 같으나 유명한 자요 죽는 자 같으나 보라 우리가 살고 징계를 받는 자 같으나 죽임을 당하지 아니하고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고 되어 있습니다.
바로 이런 사도 바울은 예수님이 세상을 보시는 안목과 동일한 안목을 가지고 세상을 봅니다. 바로 이것이 영입니다. 사적인 애씀과 노력과 열심히 획득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선물을 주셨기에 이 선물을 분명 사도 바울 자신에게만 독점적으로 주어진 것이 아니라는 것이 분명합니다.
앞으로 성도가 살아가면서 하는 일은, 왜 십자가 복음이 최종 해답이요 진리요 길이요 생명인가를 확인해 나가는 세월 뿐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세례 요한이 선지자 중에 최고의 선지자이지만, 그렇더라도 천국에 들어있는 아이보다는 작다고 하셨습니다. 왜냐하면 성도는 벌써 주님 안에서 해답을 얻은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여러 지방을 다니면서 전도를 많이 했는지 정작 자신의 집은 없습니다. 사도 바울이 집은 십자가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에 함께 죽었기 때문에 비록 자신이 온 세상을 떠돌아다녀도 그는 주님과 함께 계십니다. 즉 사적인 자기만의 공간이 따로 필요치 않았습니다. 로마에 가도 거기에 주님이 함께 계시고 예루살렘에 가도 거기에 주님과 함께 계셨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신약의 혜택이 오기전까지 구약은 멸망의 연속이었습니다. 즉 인간의 힘으로 해답을 찾으려는 모든 시도는 결국 멸망으로 끝나게 됩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아무리해도 마음의 할례를 행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할례란 거룩함을 위해 자기 안에 불결한 요소를 잘라내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말씀하시기를 인간의 내부에서, 모든 면에서 죄가 나온다고 한다면 도무지 무엇을 따로 남기도 무엇을 따로 제거할 수 있단 말입니까? 구약에서 신약으로 넘어오면서 이스라엘은 ‘유대공동체’로 바뀌어집니다. 하지만 자칭 이 ‘남은 자’라는 이들만거 예수님을 배척하게 됩니다.
새로운 이스라엘, 새로운 공동체, 새로운 교회는 최후의 남은 자라고 할 수 있는 예수님으로부터 새로 시작이 됩니다. 그 안에 사람들에게 버림받은 모퉁이 돌이 들어있어 사도 바울처럼 어디를 가든지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성전이 되는 겁니다. 오직 주님만 자랑할 수 밖에 없을 것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자신을 위해서 죽으셨다는 의미가 사적인 자랑을 인정치 않는다는 뜻으로 알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우리교회
09-11-05 11:35
034강-렘9장23-26(참으로자랑할것)-jer091028전체녹취
20091028우리교회수요설교/예레미야 9장 23-26절/참으로 자랑할 것
(기도)
이 시간 한 마음으로 기도합시다. 사람이 살다보면 사람중심으로 사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사람중심이 아니고 진리중심으로 사셨습니다. 진리를 모르는 자는 지옥으로 진리를 아는 자는 천국으로, 양과 염소, 염소와 양을 구분시키러 이 땅에 오셨습니다. 저희들도 예수님과 같은 관점에서 사람중심 되지 말고 이 시간 ‘무엇이 진리입니까?’ 라는 관점에서 세상을 볼 수 있도록 다 같이 기도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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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아버지, 세상이 온통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가고, 사고팔고 인간들의 움직임에 집중하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 가운데 노아는 오직 8명밖에 안 되는 식구를 데리고 그 큰 방주에 들어갔을 때 기죽지 않았습니다. 진리이기 때문에 그런 줄 압니다. 많은 사람들이 찾지 않는 이 길, 찾는 자가 거의 없는 이 길, 생명과 진리의 길이기에 저희들 주저하지 않게 하여 주시고, 너무 외롭지 않게 해주시고 날이 갈수록 진리가 더 크고 넓고 깊이 보이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하나님의 말씀, 예레미야 9장 23절에서 26절까지입니다. 제가 읽겠습니다. 1066페이지입니다.
예레미야 9:23-26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지혜로운 자는 그 지혜를 자랑치 말라 용사는 그 용맹을 자랑치 말라 부자는 그 부함을 자랑치 말라 자랑하는 자는 이것으로 자랑할찌니 곧 명철하여 나를 아는 것과 나 여호와는 인애와 공평과 정직을 땅에 행하는 자인 줄 깨닫는 것이라 나는 이 일을 기뻐하노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날이 이르면 할례받은 자와 할례받지 못한 자를 내가 다 벌하리니 곧 애굽과 유다와 에돔과 암몬 자손과 모압과 및 광야에 거하여 그 머리털을 모지게 깍은 자들에게라 대저 열방은 할례를 받지 못하였고 이스라엘은 마음에 할례를 받지 못하였느니라 하셨느니라.”
하나님께서 남기신 모든 말씀이 취소되거나 무효 되지 않는다는 것이 인간들 입장에서는 상당히 큰 부담으로 다가오게 되는 겁니다. ‘내가 전에 이것을 하라고 했잖아. 안했어? 숙제를 안했다는 말이지? 그러면 너희는 멸망이야.’ 하나님의 조치가 아주 대단히 간단합니다.
본문 23절에 보면, ‘지혜로운자는 지혜를 자랑치 말고 용사는 그 용맹을 자랑치 말고 부자는 그 부함을 자랑치 말라’ 는 이 말씀에서 ‘지혜로운 자’에서 지혜로운 자도 있을것이고 지혜롭지 않은 자도 있을 것이고 ‘용맹한 자’에서 용맹한 자도 있을 것이고 용맹하지 않은 자도 있을 것이고, 덜 용맹한 자도 있을 것이니 그것을 구분하면 열 단계, 백단계도 나올 수 있겠지요.
그리고 ‘부한 자’에서, 약간 부한 자, 많이 부한 자, 보통 부한 자, 보통에서 약간 덜 보통 부한 자, 많이 있을 겁니다. 그런데 용맹한자, 부한 자, 지혜로운 자들이 자랑을 할 때 그 근거가 뭐냐 하면 사적인 자기만의 공간, 사적인 자기만의 세계를 기초로 해서 ‘나 이렇다’ 고 자랑한다는 말이지요.
자기고유의 자기만의 세계를 따로 챙기고 있는 거예요. 제가 아까 처음에 이야기 했듯이, 사람이 자기만의 세계를 따로 챙기게 되면 무엇을 잊어 버리냐 하면, ‘하나님은 이렇게 한다’ 하는 것을 자꾸 잊어버리게 되는 겁니다. 자꾸 잊어버리게 돼요. 아까 하나님이 하신 말씀을 잘 못 들으셨으면 다시 말씀드릴까요?
‘내가 너한테 숙제 내준 것 있지? 안했다고? 그래 내가 멸망할게.’ 아주 간단한 문제거든요. ‘하나님의 숙제 했나? 안했다고? 그럼 멸망밖에 없지 뭐. 죽어라! 할례 받은 자나 안 받은 자나 다 죽어라!’ 이렇게 할 때 ‘숙제가 뭐더라?’ 라고 생각하지 말고,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과 하나님의 지시와 명령이 사적으로 자랑할 만한 것보다 더 우선된다는 것을 평소에 우리가 얼마나 생각해왔던가, 그 말입니다. 그것을 한 번 되새겨 보라는 거예요.
쉽게 이야기하면 공통적인 것을 먼저 생각했느냐, 아니면 사적인 것을 먼저 내새웠느냐 하는 겁니다. 자본주의 사회라는 것이 공통적인 것은 없어요. 자본주의 사회가 발달되면서 민주주의 사회가 발달되었는데 민주주의나 자본주의나 모든 사람이 각자 표를 한 표씩 선거권을 행사하는 거잖아요. 그러니까 공통적인 것이 없습니다.
육과 영의 차이점이 뭐냐 하면 육은 사적인 것이고, 영은 공통적인 것에서 분배된다는 겁니다. 영을 독점할 수 없어요. 바람을 독점하는 것이 말이 안 되듯이 네가 받은 바람이나 내가 받은 바람이나 같은 바람이기 때문에 개인적으로 자기가 받은 것을 자랑할 수가 없는 겁니다.
고린도전서 1장에 보면 나오지요. ‘자랑하는 자는 오직 주안에서 자랑하라’ 해서 ‘이미 우리는 주 안에 들어와 있다는 사실을 서로 서로 끄집어 내놓고 자랑하자.’ 개인적으로 따로 떨어져 나와 가지고 ‘나, 부자 되었다. 나, 지혜롭게 되었다. 나, 아주 용감하다.’ 이런 식으로 개별적 행동을 해서는 안 된다 이 말입니다.
그렇다면 주께서 할례 받은 자나 할례 안 받은 자나 다 심판받았다고 하고, 이방인들은 할례 안 받았다고 심판하고, 유대인들은 할례를 받기는 했는데 마음의 할례를 받지 않았기 때문에 심판 받았다면 결국은 심판에서 면제될 수 있는 것은 뭐냐 하면, 사적인 것을 포기하고 하나님이 자기 택한 백성에게 차별 없이 제공한 그 은혜성에 들어가는 것, 그 은혜성을 부여받는 것, 그것이 바로 심판에서 면제될 수 있는 유일한 상태라 할 수 있습니다.
이제부터 설교가 좀 어려워져요. 어떤 점이 어려우냐 하면, 제가 방금 말한 대로 이야기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러면 내가 하나님의 공통적인 것을 내가 받겠습니다. 내가 어떻게 하면 받을 수 있습니까?’ 라고 나오는 것이 보통의 습성이지 않습니까?
이게 얼마나 어려운지 그게 아니에요. 예를 들면 지혜로운 자는 그 지혜를 자랑치 말라, 할 때, 이게 구약이잖아요. 그런데 신약에서는 어떻게 되느냐 하면 지혜를 받은 자는 지혜를 자랑해야 됩니다. 그리고 용맹한자는 용맹을 자랑치 말라고 한 것이 구약이라면, 신약에서는, ‘네가 용맹한 사람이 맞나?’ ‘맞습니다.’ ‘그러면 너는 용사야.’ 이렇게 되는 거예요.
지금 제가 이렇게 해도 무슨 말인지 모르겠지요? 구약에서는 ‘지혜로운 자는 지혜를 자랑치 말라’고 되어 있잖아요. 신약에서는, ‘지혜 받았어?’ ‘예, 받았습니다.’ ‘그럼 자랑해.’ 그렇게 되는 거예요. 내가 사적으로 내 행함으로 애써서 열심내서 기도 많이 해서 얻은 것, 그것은 자랑하지 말고 주께서 주신 용맹과 주께서 주신 지혜와 주께서 주신 그 부요함은 주님의 것, 주님의 주신 것이기 때문에 원 없이 자랑하라는 거예요.
그것이 주 안에서 주를 자랑하는 겁니다. 그러면 문제는 사적인 지혜와 사적인 용맹과 사적인 부함을 자랑하는 사람이, 어떻게 해서 내가 원하지도 않는 용맹한 사람이 되어버렸고 내가 기도하지도 않은 부요한 사람이 되고 말았고 내가 생각지도 않은 어떤 지혜로운 사람이 되고 말았는가? 그 절차가 궁금하고 그 경위와 과정이 궁금한 거예요. 그것은 이렇게 됩니다.
구약에서는 우리가 해답을 찾아가는 입장이라면 신약에서는 답을 먼저 제시합니다. 답을 먼저 제시하고 왜 그 답이 정답이냐를 보여주는 주변의 사건들, 사태들이 벌어지죠. ‘예수님의 십자가의 피가 우리 죄를 용서한다.’ 정답이 먼저 주어져요. 정답이 주어져 놓고, 그것을 우리가 소유용으로 하면 안 됩니다.
‘나 십자가 안다’ 그러면 안 되고 그것이 소유용이 아니고 그 십자가 복음이 우리를 소유하게 됩니다. 십자가복음이 우리를 소유하게 되면 그 다음부터 우리는 뭐냐 하면, 신약시대에 살면서도 기존의 내 돈, 내 용맹, 내 지혜 자랑하다가, ‘왜 내가 한 열심과 용맹과 지혜는 하나님한테 전혀 안 먹어주고 이미 정답은 왜 십자가 피가 정답이냐’를 찾아가는, 그것이 다시 확인되고 되새겨지는 와중에서 우리가 깨질 것은 깨져야 될 것들을 만나게 되는 겁니다.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화가가 그림을 그리는데 다 그렸습니다. 붓을 놓고 ‘아, 잘 그렸다. 그러면 내가 이 그림 속에 한 번 들어가 볼까?’ 이런 화가가 있습니까? 화가와 하나님의 차이점은 자기가 만든 작품에 못 들어간다는 겁니다. 들어가면 캔버스 찢어져 버립니다.
그런데 너무나 신기하고 놀라운 것은 ‘태초에 말씀이 계시고 그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는데, 거기까지는 사람들이 ‘아, 화가구나. 우리를 하나의 작품으로 만드신 분이구나’ 하는 것을 아는데, 그 분이 자기가 만든 작품 속에 들어오신다는 사실과 그냥 들어오시는 것이 아니고 자기가 들어오는 그 상황을 만들어가면서 같이 거기에 조성되고 있다는 겁니다.
화가가 풍경을 보고 그림을 그릴 때 ‘아, 잘 그렸다’ 하고 낙인찍어서 팔아버리면 그만이에요. 그런데 하나님이라는 화가는 어떤 분이냐 하면 그림 속에 자기가 들어가셔요. 들어가셔서 그림의 일부가 되어서 그림 속에서 사마리아여인을 구원하고, 세리와 창기를 구원하고, 마리아의 오빠 나사로도 건지시고, 그림 속으로 십자가에 죽으신 분으로서, 죽으면서도 ‘너희들이 날 죽이는 것이 아니라 내가 알아서 죽는다’고 이야기하시는 거예요.
육적인 사람이 그 말을 알아들을 수가 없는 거예요. 육적인 사람은 이렇습니다. ‘아이고, 그렇게 복잡한 소리 하지 말고, 저 하늘나라에 계시면 우리가 여기서 예물(뇌물) 드리고 찬양도 하고 그냥 섬길게요. 섬기면 복이나 빨리 던져주세요.’ 도대체 하나님이 우리 속에, 우리 가정에, 우리 사업체에 들어올 이유를 우리는 알 수가 없어요.
사도바울이나 엘리야 같은 경우에 죽은 과부의 아들이나 죽은 사람을 살리는 경우가 있었어요. 그 경우에 죽은 그 몸과 자기 몸을 같이 포개서 살게 해요. 엘리사 때에 죽은 시체가 있었는데 그 시체를 엘리사의 무덤에 던지니까 엘리사의 뼈에 그 시체가 닿자 엘리사의 시체 때문에 감염이 되었는지, 그 시체가 살아나 버렸습니다.(왕하 13:21)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을 때 무덤이 열리면서 몇몇 사람이 살아났어요. 다 살아난 것도 아니고 몇몇 사람만. 오늘날 한국교회는 교회에서 사람들 사이에 주고받는 이야기, 상식적인 이야기, 그것이 교회의 전부라고 알고 있습니다. 교회는 목사, 장로, 집사가 있어서 예배라는 쇼 보고 헌금내고 오는 그것을 교회라고 보는 거예요.
그러나 교회는 그것이 아니고 우리를 성전삼고, 우리 안에 주님이 직접 들어오는 것이 교회에요. 그래서 이 교회를 설명해도 육에 속한 사람은 설명이 안 됩니다. ‘너 헌금했나? 예배 참석했어?’ 맨 날 행함을 물어요. 그 행함을 안하면 안 된다는 거예요. 이미 들어와 버렸는데 무슨 행함을 합니까?
캥거루 새끼한테 ‘너희 엄마 찾아내라’ 하는 것과 똑같은 소리 아닙니까? 캥거루 새끼는 저희 어미 포대에 이미 담겨있는데 어디서 뭘 찾습니까? 이미 같이 있는데 어디서 찾습니까? 구원이 뭔지 알아요? 요한복음 17장에서 예수와 하나가 되는 것을 구원이라고 했습니다.
요한복음 17:21-26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같이 저희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 내게 주신 영광을 내가 저희에게 주었사오니 이는 우리가 하나가 된 것 같이 저희도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이니이다 곧 내가 저희 안에,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 저희로 온전함을 이루어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은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과 또 나를 사랑하심같이 저희도 사랑하신 것을 세상으로 알게 하려 함이로소이다 아버지여 내게 주신 자도 나 있는 곳에 나와 함께 있어 아버지께서 창세전부터 나를 사랑하시므로 내게 주신 나의 영광을 저희로 보게 하시기를 원하옵나이다 의로우신 아버지여 세상이 아버지를 알지 못하여도 나는 아버지를 알았삽고 저희도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줄 알았삽나이다 내가 아버지의 이름을 저희에게 알게 하였고 또 알게 하리니 이는 나를 사랑하신 사랑이 저희 안에 있고 나도 저희 안에 있게 하려 함이니이다.”
이미 하나 되어야 될 이유가 뭐냐 하면, 해답은 이미 받았어요. 해답은 이미 받았는데 그러면 문제는 우리가 만드는 거예요. 흔히 문제꺼리라고 안합니까? 우리가 문제꺼리에요. 우리가 얼마나 나쁜 문제들을 평생 살면서 드러내는지 그 정답하고 문제 유발자 우리하고 늘 맞춰보면 우리가 무슨 죄, 어떤 죄를 지어도 다 정답입니다. 어떤 죄를 지어도 다 정답이에요. ‘지혜라면 예수님이 지혜고 용맹이라면 예수님이 용사고 부요한 분이라면 예수님이 부요한 분입니다.’
고린도후서 6장에 보면 나오지요. ‘나는 가난한 같으나 부요한 자요 나는 죽은 자 같으나 산자요, 나는 아무것도 없는 자 같이 보이는데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 아마 사도바울의 그 말을 듣는 사람은 미쳤다고 이야기할 거예요. 쥐뿔도 없는 것이 자괴감에 의해서 오버하고 있다고 비아냥거릴 수도 있었을 겁니다.
하지만 사도바울에게는 그것이 유일한 현실이었습니다. 다른 현실을 이야기할 수가 없어요. 사도바울은 어디로 가는 것이 아닙니다. 사도바울은 3차씩 선교했다고 하지만 사실은 3차전도도 선교도 아니었어요. 사도바울은 그냥 그 자리에 있었습니다. 제자리에 주와 함께 있었습니다. 주께서 데려가면 그곳이 사도바울이 있어야 될 그곳이에요. ‘내가 네 곁에 너와 함께 있다’ 고 사도행전에 여러 번 나옵니다.
‘내가 너와 함께 있을 것이다. 내가 네 옆에 있을 것이다. … 로마로 가라. 그러면 내가 로마까지 같이 갈게.’ 사도바울의 본래의 자리는 자기가 지정한 자리가 아닙니다. 십자가가 원래 자기 자리였어요. 십자가에서 예수님 죽을 때 자기 자리도 사라져버렸습니다. 이제부터 주와 함께 다니는 것, 그 자체가 이동식 자기 집이에요.
인간시대 보면 어떤 아저씨는 집이 없어서 트럭 몰고 다니면서 그 트럭에서 자기 부인과 함께 살아요. 냄비, 프라이팬 같은 살림살이 다 싣고 다닙니다. 트럭이 그 사람의 가정입니다. 제가 그걸 보고 ‘그리스도 안’처럼 ‘트럭 안’에서 같이 산다고 했어요.
여기서 이러한 구약과 신약의 단절을 이어주는 것, 분명히 구약에서는 인간이 해답을 찾아내야 한다는 것이 구약이라면, 신약에서는 이미 모든 답을 다 줘놓고, 그 답이 왜 정답일 수밖에 없는가, 왜 그게 길이요 진리요 생명일 수밖에 없는가를 확인하는 식의 평생이 우리에게 남아 있습니다.
구약에서 신약으로 넘어오면서 어떤 경위로, 왜 이렇게 주님께서는 해답을 미리 안겨줄 수밖에 없는가? 그것을 좀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본문 26절에 보면 ‘이스라엘은 마음에 할례를 받지 못했다’ 합니다. 사람들 생각으로는 ‘할례 받지 못했다’ 고 하면 ‘할례 받지 못했구나. 다음에는 잘해야지’ 이러면 될 텐데, 하나님의 말씀은 얼마나 성질이 급하신지, 마음의 할례를 안 받으면 그 할례를 안 받은 공동체가 멸망하게 되어 있습니다.
말씀해놓고 ‘내가 언제 말했나’ 하는 식으로 치매기가 있는 그런 하나님은 없어요. 말했으면 반드시 거기에 대한 대가가 주어지게 되어 있어요. 예수님이 이런 이야기 한 것이 기억나실 겁니다. ‘너희가 광야에 무엇을 보러 나왔는데?’ ‘선지자를 보러 왔습니다.’ ‘그렇지? 선지자 중에 세례요한보다 더 위대한 선지자는 없다. 그런데 천국에 있는 어린아이라도 저 세례요한보다 낫다’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정답을 알고 있기 때문에 그렇지요. 그렇다면 그 정답을 알기 위해서 그동안 구약 전체가 인간으로 할 수 있는 것은 다 뽑아내야 돼요. ‘하나님, 거기 계셔요. 우리가 찾아 가겠습니다’ 라고 할 수 있는 모든 시도, 모든 애씀, 모든 열심을 뽑아 낼대로 다 뽑아내는데, 결국은 뭘 못 뽑아내느냐 하면 육의 할례는 되는데 마음의 할례는 어떻게 할 수가 없어요.
그래서 유대인들은 마음의 할례를 한다고 어떻게 하느냐 하면 과거에 선조들이 말씀을 어겨서 유리하고 방황하고 포로생활 했는데 그 시절에 그들은 자복하고 회개하면서 어떤 아이디어를 끄집어냈는가? 이런 아이디어, ‘이제 우리는 성전 없다. 말씀대로 살자. 이사야를 보니 우리가 마음의 금식을 안했구나. 안식일도 지키고 금식도 하면서 살자’ 하면서 구약에서 시키는 대로 문자대로 다 했어요.
쉽게 말하면 이렇습니다. ‘성경에 봐라. 하라, 하잖아. 하라, 하는 것을 하면 되잖아. 아무 문제없잖아.’ 그래서 그들은 아무 문제없다고 본 거예요. 성경에서 하라, 하는 것을 했기 때문에 ‘자 문제없지요?’ 이래 나온 거예요. 마음의 할례는 손도 안댔어요. 마음의 할례는 자기 마음을 잘라야 되는데. 할례란 말은 불결한 마음을 잘라내는 것을 할례라 합니다.
불결한 요소를 잘라내서 거룩한 것이 될 때 그것이 할례거든요. 유대인들이 법을 최고로 높여서 마음의 할례를 위해서 극단적으로 금식하고 구제하고 시키는 대로 다 했어요. 그런데 여기에 슬며시 누가 왔는가 하면 예수님이 오셨습니다.
‘그렇게 해서는 안 된데이. 간음을 안했다꼬? 마음속으로 간음한 것도 니 간음한거데이. 니가 머, 오른손가락으로만 범죄를 했따꼬? 그거 잘라야 된데이 니. 그거 안 자르면 온몸이 지옥간데이. 오른손이 범죄 하면 잘라버려라. 오른 눈이 범죄 했다고? 빼버려라.’ 주님이 약을 살살 올리는 거예요. ‘형제를 보고 마음속으로, 그것도 마음속으로 욕을 했나? 아이고, 살인자야. 구약에서 보면 맹세한대로 지키라고 했지? 내가 너한테 이야기할게. 일체 맹세하지 마라.’
유대인들이 놀래버렸습니다. 유대인들이 실시하고 있는 방식에 주님께서 무게를 더한 거예요. ‘율법을 온전히 이루어야 구원받잖아’ 라고 하면서 그 온전함을 세분화시키고 그 범주를 더 넓혀버린 거예요. 심지어 ‘원수를 사랑하라’ 했습니다. ‘속옷을 달라고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 주어라 … 남을 비판하려거든 네 눈의 들보를 빼고 비판하라.’
요즘도 한국교회는 그것 성취한다고 바빠요. 자기 속의 들보를 빼고 남의 티를 뺀다고 들보를 빼려고 하는데, 그게 들보인지 뭔지 자기가 어떻게 판단합니까? 그렇잖아요. 사람이 자기 자신을 ‘나는 이 정도로 깨끗한 인간이다’ 라고 다짐을 하면 그 다짐을 확인해야 될 자아가 또 하나 있어야 됩니다.
자아가 항상 두 개 생겨요. 하나를 없애면 또 생겨버립니다. 그 인간이 괜찮은 인간인지, 어떤 인간인지 판단할 자아가 또 생겨버려요. 그것을 자아의 분열이라고 합니다. 내 눈에 티가 있는지 들보가 있는지를 판단할 그 자아의 눈이 있어야 되는데 그 자아의 눈은 티끌인지 들보인지 어떻게 장담합니까? 그러면 세 사람 되네요.
한번 보세요. ‘내 눈에 티끌이 있다’ 라고 내가 나를 판단하는 내 눈에는 과연 티끌이 있을까, 없을까를 판단하는 또 하나의 나를 만들어 놓아야 돼요. 거울 앞에 촛불을 놓아보세요. 촛불이 몇 개입니까? 양쪽 거울 앞에 촛불을 놓으면 촛불이 무한대로 벌어져요. 예수님께서는 간단했습니다. ‘나는 너를 용서하노라.’ 얼마나 간단합니까? 해답이잖아요.
해답인데 유대인들은 어떻게 했느냐 하면, 문제를 아주 어렵게 만들어서 해답을 풀면, 그 해답을 자기가 문제를 풀었다는 행함을 근거로 챙길 수 있는 것으로 여겼습니다. 만약에 그렇게 챙겨버리면 그것은 사적인 성공이 돼요. 제가 처음에 이야기했잖아요. 세리나 창기나 어떤 사람도 자기가 만들어내지 않은, 주님이 만들어 낸 공통의 것을 받아야지, 그게 하나의 교회의 되는 것이지 자기가 애쓰고 용 써서 얻는 것 같으면 자기 것이 돼요.
그렇게 되면 이것은 자기로 인해서 자기가 자랑하니까 주님을 자랑하는 것이 아니고 자기 자랑하는 것밖에 안돼요. ‘나는 예수 믿었다. 나는 십자가 안다.’ 이것은 자기 자랑하는 것밖에 안된다고요. 우리 박 윤진 성도님께서 글을 하나 썼지요. 뭐냐 하면 ‘어떻게 구원 받는가’ 가 아니라 ‘구원을 누가 주시는가’ 가 문제라는 말입니다.
‘누가 주시는가?’ 주께서 택한 백성, ‘아나, 너희들만 알고 있어라’가 해답입니다. 해답하기 이전에는 구약의 모든 인간의 힘으로 어떻게 해보겠다는 공동체가 죽어야 돼요. 공동체가 죽는다는 것은 남은 자가 죽는 겁니다. 남은 자마저 죽을 때 남은 자는 오직 버림받은 예수님밖에 없고 그 예수님이 새로운 남은 자를 만들어내요.
성령을 통해서. 새로운 남은 자가 만들어지면 그 새로운 남은자로 새로운 공동체가 만들어지고 그게 바로 교회지요. 그 교회의 특징은 그 교회의 머릿돌로 버림받은 주님과 같은 자리를 형성하게 되는 겁니다. 사도바울이 어디를 가든지 간에 자기자리는 없어지고 주님이 자기 안에서 살아가는, ‘내 안에 내가 사는 것이 아니고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산다’는 주님의 자리, 해답을 이미 확보하면서 저와 여러분은 같이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저희들 자랑할 거리가 이미 확정되었습니다. 돈이 한 푼 있든지, 오늘도 밥 먹고 살았든지, 십자가를 알게 되었든지, 복음을 알게 되었든지 모든 것은 우리 공로가 아니었고 예수님의 공로인 것을 이제 알았습니다. 그 해답을 위해서 우리는 날마다 죽어줘야 된다는 사실까지 알았사오니 이 모든 영광을 주님께 돌리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