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애굽기 23장 주석
출애굽기 23장 주석
이름 : 이진용(IP:222.99.120.158)
출애굽기 23장
23: 1- 5
인간은 쉴새 없이 자신과 타인을 재판하게 된다. 어느 순간에든 본인이 해야 될 일이 숱하게 피어날 수가 있다. 그런데 막상 일을 실시하자면 그 중의 하나를 골라 잡게 된다. 그 하나를 골로 잡는 것은 바로 다른 사람들이 자신을 바라보는 평가를 의식해서 그것을 선택하게 되어 있다. 이 인간 사회에서 살아남기 위한 본능 같은 것이다.
인간들의 이러한 취약점에 대해서 예수님도 언급하신 적이 있다. 마태복음 6:3-4에 보면, "너는 구제할 때에 오른손의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 네 구제함이 은밀하게 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너의 아버지가 갚으시리라"라고 되어 있다.
4절에서도 마찬가지다. "네가 만일 네 원수의 길 잃은 소나 나귀를 만나거든 반드시 그 사람에게로 돌릴지며"라고 되어 있다. 이것은 주위의 사람들을 의식할 필요가 전혀 없을 정도로 우리 속에 계신 하나님 말씀 자체가 활동을 벌릴 경우에만 가능한 이야기다.
여기에 비해서 일반 나라에서의 재판은 오로지 인간 사회의 유지성과 영원성을 위하여 재판하게 되어 있다. 개개인은 소속된 나라가 국가나 사회를 유지해야 될 의미와 책임이 부여되어 있다. 전체 조직이란 소속된 구성원들이 하나 둘씩 집합해서 생성된 것이다. 따라서 구성원이 없는 조직이란 이미 조직이 아닌 것이다.
그렇다 보니 일반 나라에서의 재판은 사회를 유지하고 지탱하는데 있어 힘을 증강시키는 방향으로 재판하게 되어 있지 결코 힘을 와해시키는 방향으로 재판이 이루어지지는 않는다. 만약에 그 사회에서 유력한 사람을 재판할 때, 그 사람이 그동안 소속 사회 유지에 어떤 기여와 어떤 장애를 주었는가를 따져보게 된다.
만약에 도움 준 것이 월등하게 많다면, 그 사회는 그 유력 인사를 함부로 정죄할 수가 없게 되는 것이다. 만약 그 사람을 도태시키면 그로 인해 사회 지반에 지장이 되고 사회는 발전을 못하게 되고 퇴보하게 되면 나중에 붕괴되는 수가 생긴다. 따라서 사회 기여도에 따라 형량이 조절되기 마련이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백성으로서는 어떻게 재판해야 하는가? 성도는 이미 이 세상의 재판장이다. 고린도전서 6:2-7에 보면, 천사는 이 땅에 대해서 자유분망 하다. 결혼하지도 않고 자식도 없다. 그리고 재산도 필요치 않다. 그 어떤 것에도 억매일 필요가 없다. 이토록 자유로운 안목을 가진 것이 천사인데 바로 이러한 천사마저 재판할 수 있는 자격자가 성도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사도 바울은 '차라리 속는 것이 낫다'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하나님의 구원은 결코 재산이나 수명이나 세상의 평판으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진정한 자유란 그야말로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할 수 있는데 있다. 이 세상 그 어떤 기준이나 판단에도 거리낌이 없을 정도로 하나님 앞에 똑바로 서 있어야 한다.
남이 뭐라든, 누가 뭐라든 우리 안의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바가 뭔가를 알아서 그런 판단력으로 세상을 판단해야 한다. 그렇게 되면 다수에 휩싸이지 않을 것이다. 민주주의는 결코 하나님 나라가 아니고 하늘 나라 또한 민주주의 형식일 필요가 전혀 없다.
하나님은 우리 성도가 이 땅에서 천사와 같이 살기를 원한다. 세상 요구에 부응할 필요가 없다. 세상이 기대하는 대로 살 하등의 의무가 없다. 도리어 그 반대다. 우리가 세상을 판단하고 그 판단으로 우리는 세상을 향해 복음을 전하게 된다. 그래서 하나님 말씀에 의해서 하늘 나라가 이루어짐을 알려야 한다.
23: 7- 9
하나님께서 자신이 던지신 말씀이 인간의 손에 의해서 달성되는 것을 방치하시는 분이 아니다.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필히 하나님 본인의 능력으로만 가능하도록 되어 있다. 그 한 예로서 요한복음 13:26-27에
예수님은 사단, 즉 악마의 활동까지 관여하신다. 예수님께서 악한 일을 도모하신다는 말이 아니다. 악함까지 이용해서라도 말씀을 이루어내신다는 말이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의(義)'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의란 하나님의 모든 말씀을 홀로 다해내는 것을 뜻한다.
그 뜻 가운데는, 예수님이 해내신 의로움을 아무런 댓가도 없이 자기 백성에게만 그저 넘겨주고 그들도 또한 의롭다 함을 얻는 것도 포함된다. 죄라는 것은, 예수님께서 하신 공로가 자신에게 그저 넘겨옴을 믿지 않는 것이 바로 죄가 된다. 사실 예수님의 공로를 믿는다는 것은 인간에게는 생겨날 수 없는 현상이다.
그 대신 인간들은 자신의 옳고 그름을 자신의 선에서 결정지으려고 한다. 이런 자태가 곧 죄임을 드러내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말씀을 우리 인간들에게 주신 것이다. 즉 하나님께서 율법을 주신 것은 모든 이로 하여금 입을 막고 죄를 더욱 죄되게 드러내기 위해서이다. 따라서 악마도 다루시는 예수님께서, 이미 악마의 술책에 빠져 있는 인간들이 이 율법을 통해서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다져나겠다고 시도하는 것을 지켜보고 싶어하신다.
예를 들면, "뇌물을 받지 말라면 내가 기어이 받지 않겠다. 의로운 자를 박대하지 말라면 기어이 박대하지 않겠다"고 나선다. 그러나 실제로 뇌물을 100번을 거절한다 할지라도 하나님은 101번째의 뇌물 사건을 준비해 놓으셨다. 그리고 결국은 우리 마음속에 이미 뇌물을 원하는 마음이 태어날 때부터 있음을 깨닫게 하신다.
나그네에 관한 이야기도 마찬가지다. 인간들은 원천적으로 외로운 것을 싫어한다. 나그네로 살고 싶은 마음이 전혀 없다. 좀 외롭다 싶으면 일부로 친구를 만들고 가족을 만들고 양자까지 들인다. 그래서 될 수 있는 대로 덜 외로운 쪽으로 삶을 몰아간다. 따라서 우리보고 나그네라고 지칭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알 도리가 없다.
또 어떤 이들은 하나님의 이 말씀을 곡해해서 자진해서 나그네처럼 외로워지려고 애쓴다. 이런 사람은 성격상 장애가 있는 사람이라고 볼 수 있다. 인간은 누구나 사랑 받기를 원하며 사회 안에서 머물고자 한다. 대놓고 나그네 생활을 하고자 하는 자들은 일종의 세상에 대한 원망과 미움이 걸쳐져 있기 때문이다.
인간들은 나그네처럼 안 되는 방향으로 인생을 살고자 애쓰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성도를 대해서 '나그네'라고 하신다. 이것은 나그네처럼 살라 는 말씀이 아니라 우리 본성과는 반대로 나그네로 드러날 수밖에 없는 그런 사건을 계속 일으키겠다는 것이다. 그래서 결국에는 하나님의 능력으로만 이 모든 말씀이 성취가 됨을 알 수 있다.
인간은 이처럼 성경을 보기 전에는 무엇이 선이고 무엇이 악인인지 스스로 구분 짓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구분은 도리어 예수님의 공로를 훼손시키는 원인으로 작용한다. 이것은 하나님 입장에서 보는 의로움에 대한 고의적인 공격이 된다. 여기서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는 양보 없는 전쟁이 늘 일어난다.
여호와가 신이 되든지 아니면 내가 신이 되든지 둘 중의 하나다. 비로소 그동안 우리 자신을 알지 못했던 죄라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이 주어지는 그 현장에서 밝혀진다. 하나님의 말씀과 더불어 하나님은 끊임 없이 사건을 자기 백성 위에 터뜨리고 계셨던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인생을 우리가 책임지고 가는 것이 아니다.
그 어떤 순간에도 우리를 더욱 죄인 되게 하시는 하나님 작업에서 벗어난 적이 없다. 우리를 죄인 되게 만드시는 그것이 하나님 보시기에 '의(義)'가 된다. 따라서 우리가 의를 알고 혹은 의인됨을 아는 것도 순전히 의로우신 예수님의 업적에 그 기초와 근거가 있음을 우리가 놓치면 안 된다.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통해서 우리와 화목케 하셨다. 따라서 하나님의 화목을 알려면 우리가 어째서 하나님의 '원수'로 등장될 수밖에 없는 가가 전제되어야 한다. 이 전제를 위해 하나님께서 본문과 같은 말씀을 주신 것이다.
23:10-13
우리가 하나님의 안식을 위하여 부름을 받은 것이다. 그 하나님의 안식이라는 것은 우리들로 봐서는 대단한 고생이고 고난이요 역경일 수가 있다. 따라서 우리의 기대를 들어주는 식으로 하나님을 염두에 두어서는 아니 된다. 이 안식일 법은 우리 영혼의 안식을 위하여 주신 제도가 아니라 하나님의 안식에 자기 백성을 참여시키기 위하여 내리신 법이다.
모든 율법이 그러하듯이 이 안식일 법도 우리 인간이 지킬 수가 없다. 이 안식일 법을 지킬 수 있는 분은 따로 계시다. 그 분은 안식일의 주인 되시는 분, 즉 예수님이다. 따라서 안식일 법을 못 지키는 자로서 우리를 하나님의 안식에 참여시키려는 것이다. 우리는 지키지 못했는데 예수님의 피가 이 안식일 법을 완성시켰고 그 완성된 세계로 우리가 초청 받게 된 것이다.
그렇게 해서 참여된 자들은, 순전히 예수님의 공로덕분에 이 안식의 세계에 들어오게 되었음을 영원토록 감사하게 된다. 모든 법이 다 그러하듯이 이 안식일법도 우리로 하여금 죄인을 더욱 죄인되게 하기 위해서 주어진 것이다. 죄라는 것은 법이 없으면 아예 없는 것이 된다. 예를 들면, '탐내지 말라'라는 법이 있음으로 인해 이 법으로 인해 죄가 함께 그 자리에 생겨나게 된다.
'탐내지 말라'라는 법이 동원되지 않을 때는 그냥 남의 것을 뺏고자 하는 마음이 있었다. 하지만 남의 것을 뺏고자 하는 마음이 죄가 되려면 이 마음이 곧 '탐내지 말라'라는 법에 위배됨이 드러날 때 비로소 죄가 성립된다. 이처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법으로 들이대시는 이유는, 우리로 하여금 죄를 발생시키고 규정짓기 위해서이다.
그런데 죄인으로 드러나는 그 순간이 곧 구원이 되는 순간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우리 자신들보고 "너는 이러이러해서 죄인이라고 지적하시는 그 분'이 곧 우리의 구제주가 되시기 때문이다. 즉 죄를 지적하시고 그 죄에 대해서 용서하시는 이 두 가지 일들이 오로지 예수님 안에서 다 이루어진다.
그래서 우리 자신의 죄를 지적하는 그 행위가 옳다고 인정하고 그 하나님을 받아들이는 자는 곧 자신의 죄까지 용서하시는 분을 받아들이는 것이 된다. 이로서 이 사람은 구원을 받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성경을 통해서 늘 우리의 죄인 됨을 알게 되는 기회를 가져야 한다. 그것은 우리가 죄인으로 드러나는 그 사건이 곧 주님께서 사랑으로 우리에게 찾아오시는 사건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인간들이 자력으로 안식일 법을 지킬 수 없는 이유는, 6일 동안 열심히 노동해야 하는 것으로 인해 인간들은 자기 노동과 노고에 자연적으로 많은 점수와 치중을 하게 된다. 이것은 마지막 7째 날에 쉬어야 한다는 하나님의 취지를 인간의 노동력의 가치로 가로막게 된다. 안식일이란 단순히 쉬는 날이 아니라 하나님께 제사하는 날이다. 이렇게 되면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와 평소에 자신이 수고해서 노동하는 것, 이 모든 노동의 행위의 주인공이 인간 자신이 된다.
이렇게 되면, 하나님 홀로 노동해서 이 우주를 창조되었다는 하나님의 취지가 날라가 버린다. 따라서 진정한 안식일 준수는, 6일 동안 열심히 노동한 그 가치와 제 7일째 제사로 말미암아 희생당하시는 희생제물의 가치 앞에 무가치하게 사라져버려야 한다. 즉 하나님은 6일 동안 인간들이 열심히 노력한 그것으로 인해 안식일의 완성이라고 보지를 않는다.
마태복음 12장에 보면, 예수님은 자신을 가리켜 '안식일의 주인'이라고 하신다. 이 말씀은 안식 법이 완성이 되려면 오직 안식일의 주인 되시는 예수님의 행위에서 결정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행위는 바로 '자비의 베품'이다. 예수님은 안식법의 완성을 위하여 십자가에서 희생 제물이 되셨고 또한 안식일 날 손이 말라 비틀어져가는 병에 걸린 사람은 낫게 했다.
그렇다면 제자들은 예수님의 이러한 행위의 덕을 보는 것이다. 안식일법의 완성이란 예수님으로부터 용서와 자비를 공급받는 관계를 말한다. 즉 '안식일이 언제냐'가 아니라 '안식일이 누구냐'로 바뀌어지는 것이다. 더 이상 인간이 지킬 안식일 법은 남아 있지 않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희생의 피를 흘리는 순간 다 지켜버렸다.
이로서 성도는 예수님으로 그 혜택을 입게 된다. '다른 신의 이름을 부르지 말라'고 되어 있는데 이렇게 안식일 법을 지켜내는 신 말고 다른 신으로 인간 구원에 전혀 도움이 되지 못하는 신이다. 이렇게 해서 안식일 법이 완성되었으면 성도는 더 이상 안식일이나 절기나 특정 날로 인하여 비난 받을 입장에 있지 않고 당당해야 한다.
인간의 노동은 결코 안식일의 완성에 보탬이 되지 못한다. 오직 예수님의 희생의 피만이 안식일을 완성시킨다. 성도는 단지 자기 안식을 챙기는 자들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일방적으로 제정하고 완성시킨 그 안식의 상태에 초청받은 자들이다. 이로서 인간들은 다른 안식을 간구할 자유도 남아있지 않다. 아무런 노동도 하지 않는 가난한 자들로 하나님이 친히 제정한 안식일 법 덕에 먹을 것이 졸지에 생겨나는 것이다. 이것은 그 당시 식으로 표현된 '예수님의 자비'이다.
23:14-17
'절기를 지켜라'라고 하는 것은 인간이 지닌 약점을 드러내기 위해 이런 지시를 하신 것이다. 히브리서 7:28에 보면, "율법은 약점을 가진 사람들을 제사장으로 세웠거니와 율법 후에 하신 맹세의 말씀은 영원히 온전케 되신 아들을 세우셨느니라"라고 되어 있다. 여기에 보면, 인간 제사장과 예수님을 단호하게 대비하고 있다.
인간 제사장은 약점이 있는데 이 약점이 어떤 것이냐 하는 것은 율법대로 시켜봐야 드러나게 되어 있다. 이처럼 율법은 인간의 약점을 노출하기 위한 용도이다. 여기에 비해서 예수님은 율법 말고 따로 자신의 법을 갖고 이 세상에 나타났다. 예수님이 갖고 오신 법은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직접, 그리고 오직 본인이 지킬 수 있는 내용으로 적용된다.
이로서 '인간의 율법 지키기는' 예수님이 오시기까지의 모형과 그림자다. 히브리서 8:4-5에 보면, 절기라는 것은 오실 예수님께서 품고 있는 구원의 능력을 미리 앞당겨 전시하기 위한 모델하우스 같은 역할을 하게 된다. 따라서 이미 유대인이 아닌 이방인인 우리들에게 구약의 절기를 지킨다는 것은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다. 한 물간 옛날 종족의 문화와 풍습을 오늘날 다시 거론해서 지켜보겠다는 것은 이미 오신 예수님의 해놓으신 모든 것을 무시하는 짓거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도 여전히 교회에서 절기를 고집하는 이유가 ‘행함'으로 구원을 시도해서 교회에 자금이 유입되는데 거룩한 하나님의 말씀의 권위를 사용하겠다는 사기 심보에서 비롯된 것이다. 15절 끝에 보면, '빈손으로 내게 보이지 말지니라'라고 되어 있다. 즉 재물을 드리지 않고서 절기 지키려고 하면 안 된다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는 것이다.
만약 빈 손으로 절기에 참여하면 그것은 출석한 것으로 간주하지 않아서 축복에서 제외시키는 것이 된다는 식으로 얼마든지 융통성 있게 해석될 소지가 있다. 옛날 이스라엘의 제사 유지에는 그만큼 비용이 필요했다. 절기 때마다 재물을 모아서 그것으로 제사 의식을 진행할 수가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그럴 필요가 없는 것이 지금은 절기를 드려서는 아니 되는 시기이기 때문이다. 골로새서 2:16-17에 보면, "그러므로 먹고 마시는 것과 절기나 월삭이나 안식일을 인하여 누구든지 너희를 폄론하지 못하게 하라 이것들은 장래 일의 그림자이나 몸은 그리스도의 것이니라"라고 되어 있다.
이미 그리스도가 등장한 마당에 새삼 예고편을 상영해서 뭘 얻고자 하겠다는 것인가? 오늘날 교회에 나올 때 빈 손으로 나와도 상관없는 이유가 이미 절기 자체가 사라진 시대이기 때문에 그렇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 '빈 손으로 나오지 않고' 예물 드린 것이 된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약점을 가진 인간의 예물을 받으시는 분이 아니라 오로지 예수님의 몸만 받으시기 때문에 그렇다.
원래 절기란 유월절부터 시작이 된다. 무교절이란 유월절과 연결된 1주일을 말한다. 그 때에는 누룩을 넣지 않는 딱딱한 빵을 씹어서 하나님의 고난에 동참하는 의미를 지닌다. 유월절이란 애굽 사람과 참 하나님 백성과 구별을 지우기 위한 경계적 사건의 시발점이 되었다. 즉 '어린 양'의 피로 인하여 하나님의 저주 아래에서도 살아남을 수 있음을 명백히 보여주는 절기기 유월절이다.
민수기 28장-29장에 보면, 약속의 땅에 정착생활하고 난 이후에는 약속의 땅에 생존에 필요한 양식의 씨를 뿌리는 시기로 바뀐다.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약속의 땅 위에서는 생존이 가능함을 보이는 증표이기도 하다. 맥추절이란 밀의 이삭이 피어나고 보리가 추수가 되는 시기의 절기다. 하나님께서 정상적으로 자기 백성을 살리시고 있는 중임을 확인시켜 주는 절기다.
수장절이란 곡식을 추수하면서, 하나님께서 이 약속의 땅에서도 풍성하게 살 수 있도록 배려했음을 감사하는 절기다. 이렇게 보면, '어린 양의 피'로 시작된 절기가 양식의 축복되고 안정적인 공급이라는 차원에서 은혜로 나타난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그런데 민수기 28-29에 보면, 이 절기는 궁극적으로 '죄 용서'로 그 최종 의미가 전환된다. 즉 먹을 것이 풍성한 것보다 대속죄 축제를 통해서 의도적이든 무지중이든 본인들이 지은 죄에 대해서 일제히 탕감되는 기회를 갖게 된다.
죽어가는 사람에게 고급 음식을 대접하는 것보다 실질적인 '죄사함'이 더 근본적이고 확실한 축복이 될 것이다. 이 세 가지 절기가 모두 예수님 십자가 안에서 다 담겨있다. 예수님은 모형이 아니라 실제 절기로 오신 분이다. 그리고 하나님은 약점 있는 인간의 절기를 받으시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십자가만이 진정한 죄 용서함의 제사로 인정하신다.
예수님의 십자가 속에는, 하나님의 저주를 막아내는 희생의 피가 들어있고, 진정한 하나님의 생명을 제공하는 양식이 들어있고, 또한 부지중에 지었거나, 의도적으로 지었기에 죄 지은 것에 대한 일시적 죄 용서가 들어있다. 예수님을 믿는 자는 이 십자가 속에 있는 축복이 그대로 다 들어오게 되어 있다.
그래서 거저 구원받는 것이다. 값없이 구원받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의 완성은 예수님께서 우리 대신 담당해서 하나님 앞에 서 계시는 것이다. 우리는 원래 약점을 지니고 태어났기에 약점 없이 온전한 율법을 지킬 수가 없는 노릇이다. 예수님은 따로 자신의 법을 가지고 이 세상에 오셨는데 그 안에는 자기 백성에 대해서는 무상으로 자신의 공로로 얻어낸 모든 축복을 그저 주시는 일도 포함되어 있다.
우리는 옛날 절기를 보면, 어떤 점에서 그것들이 모형과 그림자에 불과한 가를 알아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교회를 보면, 부활적, 맥추절, 추수감사절을 지켜서 교회가 필요한 자금을 그때 그때마다 하나님의 거룩한 말씀을 근거로 해서 갹출해 내고 있다. 하나님의 말씀은 오직 예수님의 공로에만 적용되어야 될 사항인 것을 그들은 훼손하고 있는 것이다.
23:18-19
이러한 법은 그 당시 유대인들에게만 주신 법이지, 오늘날 우리 이방인보고 지키라고 주신 법이 아니다. 즉 그 당시 목축하는 유대인들의 사고방식에 부합되도록 주신 법이지 오늘날 우리가 생활 환경을 고려해서 주신 법이 아니다. 오늘날 우리들에게 주신 법은 오직 '사랑의 법' 이외에는 없다.
이것은 인간 쪽에서 무엇을 지켜서 구원되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그 사랑 안에서 구원이 확보된다는 말씀이다. 구약 때 유대인들에게 주신 율법도 이런 그리스도의 사랑을 내용을 내용으로 담게 되어 있다. 단지 법이라는 형식을 통해서 담아내게 된다. 따라서 오늘 우리가 율법을 해석하는데 있어 그 율법 안에 담긴 메시야의 사랑을 발췌해내면 율법 해석이 성공했다고 볼 수 있다.
인간은 율법을 지켜서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율법을 주신 분으로 인해 구원받게 되어있다. 그런데 인간들은 그것도 모르고 자꾸만 율법을 지킨 것으로 구원의 담보로 여기려고 한다. 이러한 오류가 나올 소지가 큰 법이 19절에 나온다. 염소와 그리고 젖과 염소 새끼가 나온다. 염소 새끼를 어미 젖으로 삶지 말라는 것이다. 이 법은 마치 염소와 젖과 새끼만 있으면 어느 인간도 다 지킬 수 있는 것처럼 보인다. '어미 젖으로 안 삶으면 법 지킨 것으로 간주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 율법 속에서도 장차 오실 메시야의 사랑의 법을 발췌해 낼 수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인간들의 선에서 이 법이 지킬 수 있는 것처럼 오해되기 일 수이다. 어미염소나 새끼 염소나 다 하나님께서 이 약속의 땅에서 난 풀을 먹고 태어난 하나님의 것이다. 따라서 마땅히 어미 염소와 새끼 염소 사이에 하나님의 은혜성이 표출되어야 한다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다.
젖이란 새끼는 없는 마당에서는 생겨나지 않는다. 젖이란 순전히 새끼를 위함이고 그렇게 해서 새끼와 어미는 생명의 관계로 이어진다. 그런데 여기에 제 3자가 끼어 들 경우에 그 생명의 관계성이 훼손될 우려가 있다.
즉 젖은 새끼에게는 죽게 하는 수단이 아니라 생명의 수단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어미와 상관없는 제 3자가 여기에 끼어 들면 생명의 수단으로서 젖의 가치가 무색해지고 하나의 양식이 되어버린다. 물론 하나님은 어미의 젖을 사람들이 맛있게 배불리 먹도록 허락하신다. 그러나 그 새끼에 있어서 어미의 젖은 단지 인간을 위한 양식으로 돌아오기 이전에 인간에게 뭔가를 알리는 역할을 하게 된다는 것이다.
약속의 땅에서의 모든 피조물은 다 하나님의 속성을 위해서 존재하기 때문이다. 즉 그동안 새끼에게 생명의 수단이 되었던 그 젖이 단지 인간에게 양식이 된다는 이유만으로 그 새끼를 죽이는 직접적인 수단으로 전환될 수는 없다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피조물에 잠겨 있는 생명의 가치가 무의미하게 된다는 것이다.
즉 약속의 땅에서 생산되는 모든 것은 하나님이 주신 생명을 위함이지 인간들이 자신의 생존 욕구를 채우기 위한 용도로 존재할 수는 없다는 말이다. 아브라함과 이삭의 관계도 마찬가지다. 아브라함에 이삭은 생명과 같은 자식이다. 그런데 제 3자 아닌 3자인 하나님이 그 둘 사이에 끼어드신다.
그것은 아브라함으로 하여금 도리어 제 3자로 만들어버리기 위함이다. 그리고 그 사랑하는 자식을 아브라함의 죄 용서를 위한 제사 제물로 삼아버린다. 이것은 이삭이라는 자식이 단순히 아브라함의 자식 복을 충족하기 위해 존재하는 자식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주기 위한 자식이었음이 분명해진다. 즉 하나님의 일이란 하나님의 법을 위해서 움직여지는 것이지 결코 인간 자체를 위함이 아닌 것이다.
이 같은 취지에 따라서 18절에 나오는 '희생의 피'와 '유교병'을 같이 드리지 말라는 법과 그리고 제사에 쓰이는 기름을 그 다음 용도로 남겨두지 말라는 것도 같이 해석된다. 피란 어떤 누구의 죽음과 관련되어 있다. 그 죽음은 억울한 죽음이다. 정작 죽어야 될 죄인은 죽지 않고 되레 죽지 말아야 될 애매한 타인이 죽임을 당하면서 발생되는 것이 '희생의 피'이다.
따라서 이 '억울함'을 함께 나누기 위해서는 그 희생의 피 앞에서 인간들이 자신의 생존 위주로 태도를 보여서는 아니 되는 것이다. 유교병이란 부드러운 빵을 말한다. 먹기 좋은 빵이다. 즉 생존을 위해 꼭 동원되는 빵을 말한다. 그런데 희생의 피 앞에서 자기 생존에 연연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도리어 무교병을 드려야 한다. 무교병이란 '고난의 떡'을 말한다.
씹어 먹으면 아픔을 느낀다. 이 고통은 우리 대신 죽은 제물의 억울함을 공유하는데서 오는 아픔이다. 바로 하나님은 이 약속의 땅에서 이런 식으로 일을 하시는 것이다. 이것 외는 '하나님의 일'이라고 볼 수 없다. 이 일로 말미암아 약속의 땅은 공간적으로나 시간적으로 거룩이 유지된다.
피를 무시하지 않고 피 중심으로, 피를 엄중히 다루면서 살아야만이 약속의 땅에서 살아남는 백성이다. 그런데 오늘날 현대인들은 희생이 우선이 아니라 생존이 우선이 되었다. 메시야의 억울함은 안중에도 없다. 마치 조상에게 제사 드리면서 문어가 비싸니까 작년 제사에 썼던 문어를 잘 보관해 놨다가 다시 제삿상에 얹는 식이다.
그래서 성경은 매일같이 기름과 피가 교체시킬 것을 당부한다. 과거의 십자가 피로만 만족할 것이라 오늘도 용서의 피에 의존해야 하고 그 주님의 억울함을 알아주어야 한다. 인생이란 이처럼 죽음이 와서 매일같이 지워나가는 식으로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이런 판국에 자기를 위한 하나님이란 애초부터 없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23:20-23
하나님의 천사가 이 지상을 찾아온다는 것은 이 세상의 일에 하나님께서 친히 관여하시겠다는 뜻이요, 이 관여는 곧 인간들에게 일을 전적으로 맡기지 않겠다는 의지 표명이다. 즉 인간들이 아무리 대단히 일을 해도 인간에게로 영광과 찬양과 공로가 돌아가게 하는 일을 일체 허락 못하겠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인간을 믿지를 않는다. 이미 인간은 하나님으로부터 신뢰성을 잃었다. 요한복음 2:24-25에 보면, "예수는 그 몸을 저희에게 의탁지 아니하셨으니 이는 친히 모든 사람을 아심이요 또 친히 사람의 속에 있는 것을 아시므로 사람에 대하여 아무의 증거도 받으실 필요가 없음이니라"라고 되어 있다. 하나님은 처음부터 인간을 안 믿는다. 도리어 인간보고 하나님을 믿으라고 하신다. 즉 하나님이 인간을 안 믿는 것처럼 인간 너도 네 자신을 믿지 말라고 하신다.
성경 전체로 볼 때 하나님의 일은 예수님이 다 하시지 천사가 할 수 있는게 아니다. 여기서 주님과 천사의 관계가 자리잡게 된다. 21절에 보면, " 너희는 삼가 그 목소리를 청종하고 그를 노엽게 하지 말라 그가 너희 허물을 사하지 아니할 것은 내 이름이 그에게 있음이니라"라고 되어 있다. 즉 '하나님의 이름'에 의해서 지배를 받는 천사만이 주님이 하는 일에서 노선 이탈이 일어나지 않는 것이다.
이로서 천사가 일한 것으로 드러나지만 실은 예수님께서 천사를 사용하신 일이다. 하나님께서 천사를 앞장 세워서 하시겠다는 일은 전쟁이다. 하나님께서 시작하신 전쟁은 인간의 협조가 있어야 승리가 되는 전쟁이 아니다. 하나님의 이름 되시는 분이 직접 나서서 수행해내시는 전쟁이다.
그런데 인간들의 종교 전쟁이란 하나님의 이름이 '자기 이름'이 담겨있는 '자기 이름'을 위한 전쟁이다. 이렇게 되면 그 전쟁의 끝은 항상 자기 명예로 쏠리게 되고 이로 인해 주님의 이름은 모독 당하게 되어 있다. 전도한답시고 벌리는 일을 조사해 보면 평소에 자신이 욕망하는 바가 전도라는 이름으로 상대방에서 전달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참된 하나님의 전쟁이란 반드시 '자기 부인'이 되는 현상이 일어나야 한다. 즉 "내가 한 것이 아니라 주님이 혼자 다 하셨습니다"라는 명백한 고백이 내부에서 일어나야 그것이 진짜 하나님의 전쟁이다. 이러한 점은 하나님께서 '예비해 둔 곳'에 관해서도 마찬가지다.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을 위해 친히 '예비해 둔 곳'이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곳이 어딘지는 인간들이 알지 못한다. 그 이유는, 인간들이 자신의 욕망을 재구성한 멋진 '예비한 곳'을 마음을 늘 담아두기 때문이다. 인간들의 욕심은 나름대로 따로 구원의 경로와 최종 상태를 다짐해 두게 된다. 그렇게 해서 자기 방식으로 그 목표점을 쟁취하기 위해 온갖 수단을 다 동원하게 된다. 이것은 결코 하나님이 지정해 놓으신 그 '예비한 곳'이 아니다.
구원받은 자의 최종 집결지로 통하는 길이란 인간의 욕망과 늘 충돌을 일으키면서 무시당하기 일수다. 길은 오직 예수님만 아신다. 천사는 그 주님으로부터 지시에 따르는 위치에 있다. 그러나 인간은 그 길을 배격한다. 왜냐하면 자신의 욕망에 의해 미리 예상한 그 길과는 너무나도 낯설고 엉뚱하기 때문이다.
물론 그 예비된 최종 집결지가 어떤 나라인가는 안다. 바로 천국이다. 하지만 그 천국으로 한데 집결될 때 거기에 도달되기 위한 경로는 사람마다 다 틀린다. 여기서 이방민족과 이스라엘 민족과의 차별대우가 성립된다. 이방민족들, 하나님의 이름이 함께 있지 않는 민족들은 자기 꿈대로 설치도록 한다. 그리고 그것이 하나님의 이름 앞에 필히 망하도록 조치한다.
거기에 비해서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이름이 함께 있기에 어떤 길이 천국으로 통하는 길인지 어떤 상태가 구원의 상태인지는 이스라엘은 모르고 오직 하나님의 이름만이 아시기에 그 어떤 방법을 다 동원해서도 그들의 뜻을 꺾어서 반드시 천국으로 인도해 내신다. 이방민족에서는 '인도하심'이 없다. 스스로 찾아나서야 될 자들이다. 시편 23편에 보면, '여호와는 나의 목자이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도다'라고 되어 있다.
인간들은 구원을 생각하면서도 평소에 자신이 품고 있는 이 세상을 포부를 거기에 결합시킨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나름대로 알고 계시는 천국을 위하여 그 일에 붙어있는 인간들의 세상적인 야심을 떨어내야 될 필요성이 있다. 바로 이러한 작업을 위해 하나님은 이방민족들과 만나게 한다.
겉으로 드러난 교리나 종교 자존심과 대결시키는 것이 아니다. 타 종교 안에 있는 요소가 이미 하나님 백성 안에서 담겨있음을 하나님 백성들을 알도록 하신다. 그렇게 해서 하나님께서 힘이 없는 자기 백성을 능히 구원 못하시는 것이 아니라 자기 백성이 포기 못하는 것들을 떨어내기 위해 시간을 지체하시는 것이다.
구원의 승리가 인간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자기들과 함께 계신 하나님의 이름에 있음을 알 때가 되면 이스라엘은 자기 내부 속에 있는 엉터리 같은 이방민족적 환상이 자리잡고 있음도 알게 된다. 이러한 결점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천사를 보냈다는 것은 다른 이방민족과는 달리 하나님의 이름이 그들과 함께 계시기 때문이다.
23:28-33
하나님이 참으로 제시하는 구원의 길에는 천국 길을 가로막는 적이 나오고 또한 왕벌도 나온다. 이것은 평소에 인간들이 구상한 그러한 천국이 아니라는 것이다. 하나님은 오로지 약속에 준해서 일하시는데 그 약속이라는 것이 인간에게는 여전히 불가능한 내용이 약속의 실제 내용을 차지하게 된다. 즉 아무리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약속을 제시해도 인간은 그 약속을 지킬 능력조차 없다는 말이다.
신명기 9:4-5에 보면, 이러한 완벽한 언약 맹세에서 나온 의로움의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는 하나님의 천사를 하나님의 '왕벌'이라고 하신다. 그렇다면 도대체 이스라엘의 구원의 길을 가로막는 적들은 어떤 특징을 갖고 있는가 하면은 하나님의 약속이라는 것이 들어있지 않다. 그리고 믿지도 않는다. 그런데 사실 하나님의 약속의 내용을 들여다보면 그 약속의 내용은 믿는다는 그 자체가 도리어 이상할 정도로 인간의 능력을 초월하는 내용이다.
이처럼 왕벌은 적군이나 아군이나 다 낯선 존재자의 출현이다. 그리고 왕벌의 출현은 현재 하나님과 동행 그 자체가 이스라엘이 전쟁 중에 있음을 말해주는 신호이기도 하다. 하나님께서는 구원받은 백성들에게 무엇이 가장 위협적인가 하는 점을 너무나도 잘 아신다. 그것은 비언약적 생각이다. 이방민족의 사고방식을 채택하므로서 하나님의 언약을 배반하면 그것으로 구원이고 뭐고 다 무효화 되고 만다.
신명기 8:19-20에 보면, 인도하시는 신이 다르면 그것은 곧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세계에 들어갈 수 없다는 것이다. 이것은 천국이란 인간이 알 수 없는 세계임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참된 신은 친히 택한 백성에게 언약으로만 자신을 알려주신 신이다. 아무에게나 다 나타내시는 하나님이 아니다. 오로지 자기 백성에게만 제한적으로 알리시는 하나님이다. 그래서 친히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주신 약속을 스스로 이루어나가시는 하나님이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내린 약속을 결코 아브라함이라는 인간과 이삭이라는 인간과 야곱이라는 인간이 해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들은 단지 자신의 능력으로 달성되지 않고 오로지 영광 받으실 분은 '주의 이름'임을 증거하는 자들이다.
신약에 와서는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바로 이러한 사실은 베드로가 물 위를 걷는 그 이상으로 주님에 대한 신앙의 관계가 나타나는 것이다. 따라서 왕벌은 우리가 요청해서 출몰한 것이 아니다. 도리어 우리가 왕벌에게 쏘이지 않도록 주의하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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