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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

출애굽기 21장 – 22장 주석자유게시판출애굽기

출애굽기 21장 – 22장 주석

이름 : 이진용(IP:222.99.120.158)

출애굽기 21장 – 22장

21:1-6

하나님께서는 유난히도 종에 주목을 하고 계신다. 그것은 종을 가지고 하실 말씀이 많기 때문이다. 이스라엘의 본질을 나타내는 데는 종이 없으면 안된다.

실제로 이스라엘에는 종이나 고아나 과부 같은 자들이 생겨났다. 그들로 하여금 노예가 되게 하신 분은 하나님이다. 하나님께서 일으키신 전쟁으로 인해 부모가 돌아가면 자연적으로 연약한 아이들은 고아가 되고 남의 집에 노예로 팔려가지 않을 수밖에 없다.

따라서 같은 사람의 입장에서는 대단히 재수 없는 인생을 가졌다고 남의 이야기 하듯이 할 수 있지만 그러나 그런 사고방식이 여호와 하나님에 대해서 오해하는 바이다. 하나님께서는 의도적으로 약자로 하여금 가진 자의 주변에 생기도록 해서 소위 강자의 입장에서 여호와 하나님을 대하면 안 된다는 점을 분명히 하신다.

만약에 약자의 배후에 하나님이 계시다는 사실을 잊고 자신은 마땅히 약자가 아니라 강자가 되어야 한다고 우기는 자가 있다면 그 사람은 여호와 하나님과 상관없는 자라고 간주하신다. 따라서 강자가 된 자들은 주변에 있는 약자를 통해, 왜 하나님은 약자의 하나님으로 함께 계시는지를 알아야 한다.

상전과 종 중에서 사람들은 거의 전부 상전으로 살고 싶어하고 종이 되기를 싫어하겠지만, 하나님은 달리 보신다. 상전이 되는 사람은 상전으로서 하나님으로부터 받는 지시가 따로 있으면 종이 된 자들은 종으로 하나님으로 지시 받는 것이 따로 있다.

그러나 오늘날 민주주의 제도로 봐서는 상전과 종으로 신분이 나뉘어져 있다는 사실을 볼 때 사실 역겨울 일이다. 그런데 바로 이러한 민주주의 사고방식이 오늘날 모든 이로 하여금 진정한 하나님의 뜻을 아는데 방해만 될 뿐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뜻에 의해서 약자로 살 수 밖에 없는 것을 가지고 마음에 탐욕을 머금고 자신으로 인해 혜택을 입었거나 이익을 받는 사람들이 자신에게 무관심하고 있다는 점을 근거로 그들에게 적개심을 가질 수가 있기 때문이다.

즉 모든 인간은 평등해야 하는데, 자기는 단지 사회의 희생물이 되고, 반면에 다른 사람은 자신이 망한 덕분에 잘 먹고 잘 살고 있으니 그 몫만큼 자신에게 돌려주어서 평등해야 마땅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사고방식이 민주주의 입장에서 대단히 정당해 보이는 공의같이 보이지만 하나님 보시기에 탐욕에 불과하다.

왜냐하면 자신으로 하여금 남보다 못한 환경을 조성한 것은 다름 아닌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결국 그 원망과 탓으로 돌리기 십상이다. 이렇게 되면 자연적으로 하나님과 원수관계에 놓이게 된다.

또한 강자가 된 자들은, 약자의 희생과 실패로 말미암아 자신이 강자 된 것을 알지 못하고 마치 자신이 당연히 하나님으로부터 축복받을 만한 능력자라도 되는 양 으스대기 십상이다. 따라서 약자든 강자든 모두 하나님의 뜻은 모르고 그저 자신들의 욕망에 준해서 세상을 살게 된다.

이런 형편에서 하나님은 의도적으로 이스라엘 내부에 형편과 처지가 좋지 않는 사람들을 생겨나게 하셨다. 이것은 소위 상전에게도 하고 싶은 말씀이 있고 그리고 약자인 노예들에게 하고 싶은 말씀이 있기 때문이다.

상전에 대해서는 노예를 6년간만 부리고 제 7년째는 풀어주라고 한다. 이것은 영원토록 그 사람을 신분적으로 노예로 부릴 수 없다는 것이다. 즉 인간이 영원히 인간의 상전 노릇을 할 자격자가 되지 못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한 인간이 다른 인간보다 더 우수한 입장에 놓이는 것이 아니라 단지 하나님께서 형편 따라 일시적으로 그것을 허용한 것뿐인 것이다.

그 다음으로 종에게도 하나님께 하실 말씀이 있다. 그것은 종이야말로 진정 이스라엘의 본질을 제대로 보여줄 수 있는 입장에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종이란 일을 해도 자기 것이 없고 자기 소유가 없으니 전적으로 주인님을 위해서 헌신 봉사하는 모습을 보이기 때문이다.

누가복음 14:33에 보면, "이와 같이 너희 중에 누구든지 자기의 모든 소유를 버리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라고 되어 있다. 즉 성도는 모두 자기 소유가 없고 다 하나님 것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런 종으로의 자세는 누가복음 17:7-10에 보면, 종이란 항상 자신을 '무익한 종으로' 여기면서 사는 것이 올바른 모습인데 이 모습이 바로 주인님에 합당의 종의 모습이다. 그렇다면 이 종이 스스로 자유를 포기하고 영원히 주인과 함께 사는 경우는 5절에 보면, '사랑'이라는 말씀이 나온다.

사랑이다. 누구든지 주를 사랑하지 아니하면 저주받는다는데, 주인과 종의 관계란 이처럼 사랑에 의해서만 유지되는 관계를 말한다. 인간의 자유란 인간에게 심적으로 부담만 가중할 뿐이다. 원래 인간은 피조물로서 자유를 가지고 어떻게 처신해야 될지도 모르는 입장에 놓여 있다. 하나님은 오직 하나님에 대한 사랑만 원하신다.

21:12-17

하나님은 죽음의 조항들을 소개한다. 전혀 인간들의 고귀한 삶을 걱정하시는 투가 아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진리성을 위해서라면 인간의 죽음도 개의치 않는다. 하나님 자신이 내세운 말씀만 고귀하게 사수하시려는 것 같다. 이 점에 대해서 하나님은 양보가 없다.

사람을 죽이는 한이 있더라도 하나님의 법은 법대로 유지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야 하나님답다라는 것이다. 인간이란 이처럼 하나님의 법과 진리를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지 결코 법이 인간을 계속 살려놓기 위함이 아니다. 인간을 살리기 위한 법이라면 '죽음의 조항'을 제시할 리가 없다.

진리가 너무나 진리답기에 진리에 어긋나는 것은 도무지 외면할 수 없다. 그런데 문제는 이 진리를 과연 범죄한 인간의 후예로서 지킬 수 있느냐 하는 점이다. 부모를 저주한 자는 반드시 죽이라고 하셨지만 긴 긴 인생을 살면서 혼자서도 부모를 원망할 가능성은 누구나 갖게 된다.

심지어 어릴 때 철이 없이 부모에 대해 노골적으로 저주할 수도 있다. 그렇게 되면 앞으로 아무리 오랫동안 세상을 살면서 부모를 저주하지 않았다 할지라도 남은 기간과 상관없이 전에 했던 저주로 인해 그 인간은 죽어야 한다. 이것이 하나님의 법의 진실성이요 현실성이다.

요한복음 8장에 보면,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힌 여인을 끌고 예수님 앞에 나타난 일단의 군중들이 있었다. 이 사람들 손에 손에는 분노의 돌멩이가 쥐어져 있다. 이 돌멩이로서 여인을 치고자 하는 것이다. 여인을 치고자 하는 것은 곧 자신들과 다른 율법 해석을 내리는 예수님을 치고자 하는 것이 속셈이었다.

그들이 손에 돌을 든 것은, 하나님의 법이 지닌 완벽한 진리성 때문이다. 그 누구도 변개시킬 수 없는 그 완벽함을 믿고 예수님에게 대들었던 것이다. 그럴 때 예수님은 조용히 땅에 앉으셔서 글씨를 썼다.

그 글의 내용으로 인해 유대인들은 여인을 치려는 돌을 하나 둘씩 놓고 도망치듯이 예수님 곁을 떠나게 했다. 그 글의 내용은 바로 그 어느 누구도 하나님의 법의 집행자가 될 수가 없음을 말해주는 진리의 글이었다.

예수님은 간음한 여인을 보고 묻는다. "너를 정죄한 자들이 어디 있느냐?"라고. 그리고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않겠다"고 하신다. 이 말씀은 곧 참으로 정죄할 위치에 있는 자는 오직 예수님 밖에 없다는 것을 분명히 하시는 말씀이다. 정죄할 수 있는 분으로부터 만약 용서를 받는다면 이 용서를 취소시킬 위인은 이 세상에 아무도 없게 된다.

이러한 용서함이 과연 무서운 하나님의 법 안에도 들어있을까? 12-13절에 보면, "사람을 쳐 죽인 자는 반드시 죽일 것이나 만일 사람이 계획함이 아니라 나 하나님이 사람을 그 손에 붙임이면 내가 위하여 한 곳을 정하리니 그 사람이 그리로 도망할 것이며"라고 되어 있다.

이 말씀의 의미는, 이 세상에서 '사람 죽인 자의 심판은 오직 하나님에게만 있지 사람에게는 없음'을 분명히 하는 말씀이다. 이 세상에서는 '하나님으로 인해 죽음을 맞이한 자'가 있게 마련이고, 그리고 이러한 하나님의 작업에 동원되어서 우연히 고의가 없이 사람을 죽게 한 자가 생겨나기 마련이다.

민수기 35:22-25에 보면, 이스라엘 땅에서 '도피성'이라는 이름의 특수 지역이 48군데 마련되어 있다. 이곳에는 제사장들이 살고 있다. 아무런 고의가 없이 사람을 죽게 되면 비록 본인의 원한이 없다 할지라도 그 죽은 자의 가족들은 평생 지울 수 없는 고통과 괴로움과 슬픔을 갖게 될 것이다. 그렇게 되면 아무리 하나님 때문에 발생된 살인이라 할지라도 자기 친족을 죽인 그 사람에게 복수하기 마련이다.

이럴 때 하나님께서 나서서 복수가 이루어지지 않도록 차단시킨다. 그 방식은 도피성으로 피신해 살다가 당대의 대제사장이 죽고 난 뒤에 그 도피성에서 나오게 되면 이 사람은 과거에 사람을 죽었다는 사실조차 성립되지 않는 말짱한 사람으로 행세할 수 있다. 만약에 임의대로 그 도피성에서 나왔다가 죽은 자의 가족들에게 걸려 복수 당하면 그 사람은 죽어도 당연하다.

이렇게 볼 때, 하나님의 법은 두 가지 점을 말해주신다. 사람을 살인해서는 아니된다는 무서운 법도 존속하고 그러면서도 살인한 자조차도 용서가 된다는 용서의 법도 그 안에 담겨 있다는 것이다.

마치 예수님께서 간음하다 잡힌 여인에게 먼저 다음과 같은 물은 취지와 같다. "너를 정죄한 자들이 어디로 갔느냐?"라고 말이다. 이 말씀은 곧 이 여인이 결코 무서운 하나님의 법에서 벗어날 수 없음을 분명히 해두는 말씀이다. 그리고 난 뒤에 그 여인에게 용서 선언을 하신다. 이것이 이 세상에서 오직 예수님만이 우리를 용서하실 수 있다는 것이다. 이로서 예수님은 무서운 법과 용서의 법을 모두 십자가 위에서 다 성취하신 것이 된다.

21:22-26

이 법은 이방 사람들보고 지키라고 주신 법이 아니다. 오로지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 백성들만 지키라고 준 법이다. 인간들이 하나님 백성 되기란 자신의 노력으로 가능한 일이 아니다. 하나님의 특별한 은총으로 아예 출생할 때부터 하나님의 백성으로 태어나야 비로소 하나님의 백성이 될 수 있다.

이 세상 그 어느 누구도 피해에 대해 상대방에서 보상을 요구할 권리가 없다. 그럴 자격도 없다. 이것을 알아야 하나님의 백성답다. 어제는 어제고 오늘은 오늘이다. 어제도 하나님께서 자비로 인도하셔서 차에 치이게 하셨다면 그 은혜는 어제로 끝나고 오늘의 은혜는 병원에 입원하라는 것이 은혜다. 따라서 직접 하나님께서 이런 식으로 은혜로 인도하는데 누가 이 은혜성에 관여하고 틀어지게 할 권리가 있단 말인가? 가해자에게도 없고 피해자에게도 없다.

임신한 여인이 낙태한 경우도 마찬가지다. 일부러 상대방의 아이를 낙태시키려고 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의해 낙태되었다면 그것 때문에 자신을 자책하거나 자신을 정죄하는 것은, 그런 인간을 구원하신 하나님의 은총을 모독하는 언사가 되는 것이다. 자신을 책하는데 주력할 것이 아니라 이럴 경우에 하나님이 원하시는 그 다음 행위가 무엇인가를 알아보고 실시하는 것이 중요하다.

본문 말씀을 이런 식으로 누가 다 지키겠는가? 이 세상에 아무도 없다. 오직 한 분 예수님 밖에 없다. 예수님은 이 보상법을 이런 식으로 설명한다. "누구든지 너의 오른 뺨을 때리거든 왼 뺨도 내놓아라"라고 말이다. 즉 진정한 말씀 성취는 오직 사랑으로만 가능하다. 신체상 피해를 본 들 우리가 받은 구원이 취소될 리가 있겠는가? 없다.

민수기 22:33의 말씀처럼, 하나님께서 이방 선지자 발람의 걸음까지 당나귀의 입을 통해서도 저지하는 것처럼, 하물며 성도들이야 말 할 것도 없다. 예상치도 못한 일이 일어나더라도 그것조차 하나님의 사랑으로 해석해야 한다. 쓸데없이 자신을 자책하는 그것이 곧 자신의 평소의 의로움을 포기 못한 데서 나온 마귀의 시험에 불과한 것임을 잊지 말자.

22:1-4

누가복음 10장에 보면, 예수님의 비유가 나오는데 거기에 '강도 만난 사람이 나온다. 강도 만난 사람의 입장에서 보면 그 피해 보상은 강도한테 청구해야 마땅하다. 그래서 제사장도 그냥 지나가는 것도 법적으로 당연한 것처럼 보이고, 레위인도 그냥 지나가는 것도 법적으로 당연한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웬 사마리아인은 강도 만난 사람을 보고 그냥 지나가지 않고 자신의 것을 가지고 그 강도 만난 사람을 돌보게 된다. 예수님은 바로 이 사람이 '이웃 사랑'을 실천한 사람이라고 보고 있다. 즉 피해자의 입장이 아니라 일방적으로 대접하는 차원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생각하는 것이다.

즉 이 사마리아인의 머리 위에는 하나님의 법이 있다. 그 법에 준해서 그 사마리아인은 사랑을 실천해 옮기는 것이다. 이처럼 피해보상에 관한 법이라고 할지라도 그 법을 완성하는 형태는 반드시 사랑으로 등장되어야 한다.

여기에 관한 예가 또 있다. 사무엘하 12:1-6에 보면, '그 양 새끼의 4배나 갚아야 된다'는 판결을 다윗 본인이 내리고 있다. 4배나 갚아주는 보상은 피해자의 '저에게 딸처럼 되었다'는 자비심에 대한 보상이다. 만약이 이 자비심을 고려하지 않는다면 단지 한 마리의 양을 보상하는 것으로도 족할 것이다.

인간은 자신의 욕심으로 인해 자비로 이루어진 가족을 깰 수도 있다. 이로서 가족이라는 것이 타 가족을 괴롭게 하는 현실적 존재가 된다. 나의 가족이 살아남기 위해 다른 가족을 희생시키는 것이 과연 하나님이 가장으로 계시는 가족같은 이스라엘에게서 용납이 되느냐 하는 점이다.

배상이란 반드시 피해자가 등장해야 한다. 보상은 피해자에게만 돌아가야 하기 때문이다. 보통 인간 사회에서의 보상이란 '자신의 것'이 손해를 봤을 때 그 손해를 입힌 측이 보상을 해야 한다. 나단 선지자가 예를 든 것에 의하면 부자는 자신의 것을 손해 안보기 위해 가난한 자의 하나뿐인 양을 대신 희생 시켰다.

만약에 양이 한 마리가 아니라 여러 마리라면 한 마리를 잃어버린 아픔이 덜 하다. 하지만 단 한 마리만 있는 양이란 온 식구가 정성과 관심과 사랑이 거기에 집중되어 있을 것이다. 따라서 그 양을 잃은 것은 그 가난한 가족의 전 재산을 상실한 아픔을 유발한다.

이러한 나단 선지자가 든 예는 율법이 자비와 관련 있는 차원에서 수행되어야 됨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 점은 솔로몬의 재판가운데서 마찬가지다. 열왕기상 3:25-26에 보면, 같이 자기 아들을 잃어버렸다고 주장하는 여인네들 가운데서 마음이 첨예하게 구분되는 것을 알 수 있다.

여기에 대한 솔로몬의 판결은 "왕이 대답하여 가로되 산 아들을 저 계집에게 주고 결코 죽이지 말라 저가 그 어미니라" 솔로몬은 부모, 자식간에는 형식법으로 이루어지는 관계가 아니라 자비로 맺어진다는 점을 알고 있었다.

법의 내부를 들여다볼 줄 아는 것이 바로 솔로몬이 가진 하나님의 지혜다. 이처럼 하나님의 완벽한 법은 오직 예수님만 이룰 수 있는데 그 이유가, 그저 주시는 사랑으로 자기 백성을 향해 퍼부을 수 있는 분은 예수님 밖에 없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는 단지 십자가 위에서 우리 죄를 위해서 대신 짊어지신 것에 멈추는 것이 아니라 그 십자가에서 다 이루신 그것을 우리에게 성령을 통해서 일일이 나누어 주심으로써 아예 우리 자신 속에 예수님의 의가 담기게 하시는 것까지 마무리 하신다. 바로 이런 일까지 하실 수 있는 분은 예수님 밖에 없는 것이다.

인간들의 하나님의 법 사용은 항상 법을 준수를 조건으로 해서, 자신을 보다 유리하게 가져가겠다는 심보로 움직인다. 베풀기는커녕 자신이 계속 강자로 남겠다는 의도를 나타낸다. 이것이 바로 자기 자신의 행함을 의지하는 불신앙이다.

22:7-9

하나님의 것이라는 점을 염두에 두지 아니하면 사실상 두 배로 갚아주라는 이 하나님의 뜻을 곡해하기 일 수 있다. 고린도전서 6:1-7에 보면, '차라리 불의를 당하는 것이 낫고 차라리 속는 것이 낫다'는 것이다.

이 신약성경의 말씀과 본문에 나타난 말씀의 뉘앙스가 사뭇 다르게 보일 것이다. 구약 식대로 한다면 악착같이 받아내라는 말씀으로 들리고, 그리고 그렇게 해야지만 하나님의 거룩한 말씀이 성취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신약성경 식으로 이야기한다면 아예 '다 줘버리고 잊으라'는 쪽으로 들린다. 성도들이 기껏 세상 문제 가지고 불신자 재판장 앞에서 재판 받을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 세상의 진정한 재판장은 오로지 성도밖에 없기 때문이란다. 이것은 세상 사람들이 신앙 안에서 살아가지 않기에 성도의 눈에 피고로 보일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판사가 도리어 피고들에게 재판 받는다는 것이 말이 안되는 논조가 바로 사도 바울이 전하는 하나님의 뜻이다. 예수님 같았으면 도적질 당한 일에 대해서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를 마태복음 5:42절에서 말씀하신다. " 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며 네게 꾸고자 하는 자에게 거절하지 말라"라고 하신다.

이렇게 되면 '사유재산' 같은 취지들은 하나님의 백성들 사이에는 허물어진다는 것을 느낄 것이다. 재산을 갖고 있어도 어디까지 하나님 말씀으로 쓰임받는 재산일 뿐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왜 본문에서 도적질 당한 것에 대해서 2배로 보상받을 권리가 있다고 말씀하시는 이유는 도적질 한 자는 이스라엘 내부에서는 남의 것을 도적질 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했다는 점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하나님에게 도적질 했다는 것에서 어떤 의미가 도출되는가?

이 점을 알기 위해서 여호수아 7:11-13에 보면, 약속의 땅을 차지하게 된 것은 사람들의 노고가 아니라 순전히 하나님의 희생 덕분이다. 하나님의 이름으로 얻게 된 여리고성 안에서 아간이라는 인간은 자기가 탐이 나는 물건이 있어서 그것을 훔친 것이다. 문제는 아간이란 인간은 하나님이 애써서 얻어진 것으로 자기는 그저 먹겠다고 덤벼든 것이다. 이것이 바로 '도적질'이다. 하나님의 공로를 마치 자기 공적의 열매를 탈취하는 것이 이스라엘 내부에서의 도적질의 본질이다.

따라서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하나님의 희생을 정신을 이스라엘 전역에 말씀을 통해 남길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도적질한 물건에 대해서 그냥 원상복귀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두 배의 가치로서 보상되어야 마땅하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왜 신약 성경에서는 '차라리 속는 것이 낫다'는 말씀을 하시는 것일까?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희생으로 오늘날 천하보다 귀한 성도들을 이 땅에서 출현하게 하셨다. 그래서 '천사보다 나은 존재자'가 되었다. 천사들이 재산 문제 때문에 서로 다투는 경우가 없다. 왜냐하면 그들은 하나님의 충실한 종들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성도들도 이런 세상적인 문제에 있어 천사보다 월등한 자세를 보여주는 것이 당연하다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천사를 위하여 희생제물이 되신 것이 아니다. 오로지 오늘날 하나님의 자기 백성들을 위해서만 희생제물이 되셨다.

따라서 주님께서는 오늘날 우리 주변에 사기와 도덕이라는 각가지 사건을 일으켜서 평소에 우리가 얼마나 하나님의 희생을 이용하고 있는지 반성하고 깨닫게 하는 계기로 삼으시는 것이다. 주님의 희생의 아픔에 동참하기 위해 성도에게도 유사한 아픔을 겪게 하신다. 그렇게 해서 세상 모든 것이 다 주님의 은혜임을 다시금 기억하게 하신다.

22:16-17

창세기 2:24-25에 보면,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 아내와 연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찌로다 아담과 그 아내 두 사람이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 아니하니라""라고 되어 있다. 즉 두 사람이 결코 두 몸으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한 몸으로 살아간다는 것이다.

이미 범죄한 이상으로 다시 이런 상태로 되돌릴 수가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미 범죄한 욕정은 마구잡이로 발휘하게 되어있다.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게 되어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자신들의 이러한 욕정들은 지극히 정당한 것으로 간주하는 버릇이 있다. 바로 이런 식으로 해서 이 사회는 각자 자기 중심으로 보는 지옥으로 변해버리는 것이다.

본문에서 처녀를 범한 남자의 문제점은, '사랑'이 빠진 상황이 유발되어 버렸다는 것이다. 물론 나름대로 사랑한다고 하면서 덤벼들겠지만 이미 타락한 이 후의 '사랑'이란 인간의 개인적인 욕정의 다른 표현일 뿐이다. 진정한 사랑이란 두 사람이 두 몸이 아니라 한 몸으로 존재해야 한다.

즉 어느 정도도 수준인가 하는 것에 대해서 두 가지 예를 보면 하나는 잠언에 나오는 내용이다. 잠언 5:15-19에 보면, 한 아내에 대한 사랑만으로도 하나님이 원하시는 사랑이 충분히 가능하다는 말이다.

문제는 이런 하나님의 말씀을 지킬 능력이 이미 인간에게는 상실되어 있다는 것이다. 남자나 여자는 자기 남편으로나 자기 아내만으로 만족감을 갖는 그런 마음을 가진 자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마지 못해 사는 것이다. 형편이 안되는 그럭저럭 지내고 있는 바이다.

신약의 예를 들면, 하나님이 원하시는 사랑의 부부가 되기에 더욱 난감하다. 에베소서 5:22-25에 보면, 참으로 어려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부부에게 이렇게 말씀하시는 이유는, 원래 하나님께서 정해놓으신 그 부부 사랑의 원칙에는 조금도 달라짐이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인간들이 이런 말씀을 통해서 아무리 이성적으로 동원해도 자신의 근원적인 죄성을 극복할 수 없음을 분명히 자인해야만 한다.

본문을 보면서, 여성의 정조를 돈으로 환산해서 갚으면 그만인 것처럼 느껴진다면 이는 자기 감정에서 나온 행동을 여전히 정당화하는 싶은 마음이 앞서기 때문이다. 여자 가정의 아픔에 처녀를 범한 남자가 동참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즉 주체 못할 자신의 감정 발산이 결국 주변사람에게 아픔과 고통을 발생시키는 식으로 이어짐을 우리가 잊지 말라는 차원에서 주신 말씀이다. 말도 안되는 변명쪼의 사랑은 하나님의 참 사랑에게 고통과 괴로움을 주는 일이다. 에베소서 5장에서 사도 바울은 가정에 대해서 언급하면서 그것을 예수님과 성도의 관계로 잇는다.

이것은 부부가 생활하면서 자신이 얼마나 남편으로서 부족하고 아내로서 부족하다는 절실하게 느껴서 예수님의 변치 않는 사랑의 가치에 마음두게 하기 위함이다. 특히 이 모세 시대에는 여성이란 경제적으로 비자립된 위치에 놓여 있다는 점을 감안해야 한다. 즉 여성으로서 피해보는 것은 곧장 경제적 어려움으로 이어지는 것이다.

이것이 오늘날 식으로 하면 십자가의 고통이다. 진정한 사랑도 모르는 채 나름대로 사랑행각을 벌리는 남성들로 인해 오늘도 십자가에서 고통이 흘러나온다. 진정한 하나님의 사랑이란 이런 고통 속에서 만남이 이루어질 때만 파악된다.

22:18-19

왜 하나님은 무당을 꼭 죽여야 되느냐 하면, 무당의 행위는 배후의 악한 영적 세력을 대변해 주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육적인 충족을 위하여 무당을 '필요악' 처럼 그냥 놔두고 싶은 것이다.

마치 경찰관들이 관내의 불온한 유해업소를 청산하려 하지만, 자신들의 그러한 고된 업무를 끝내고 쌓인 무거운 긴장을 풀 마땅한 자리가 없어 도로 그런 공간을 그리워하는 심정과 같다. 이렇게 되면 '무당은 마땅히 죽여야 하느니라'라는 하나님의 요구와 막상 무당과 더불어 사는 백성들 사이에는 견해 차이가 생기게 마련이다.

그래서 왜 사람들은 무당 없애기를 주저하는지 성경에 나오는 두 가지 예를 보면 하나는 사무엘상 28장에 나온다. 사울왕은 그 전에 강경하게 정책적으로 모든 무당들을 척결한 적이 있었다. 그런데 사무엘 선지자가 죽고 난 뒤에는 갑자기 모든 것이 허전해졌다. 일종의 우울증에 걸린 것이다.

사무엘로부터 버림받은 것이 꼭 하나님에게 버림받은 느낌을 가졌던 것이다. 그래서 사무엘과 계속적인 교제가 이루어진다면 이는 여전히 자신이 이스라엘 왕이다는 정서를 유지할 것 같았다. 그런데 죽은 사무엘을 만나기 위해 사울왕이 찾아간 사람이 바로 엔돌의 신접한 여인 무당이었다.

바로 이러한 사울의 행동은 오늘날 우리에게도 똑같이 일어날 수 있는 현상이다. 이론상 성경을, 지식으로 충분히 납득을 하고 있다고 여기지만 기분상 왠지 우울증 증세 같은 것을 가질 수 있다. 그것은 바로 우리가 원해서 관계했던 모든 것을 하나님의 뜻이라는 것을 핑계로 억지로 잘라내게 되면 그런 현상이 일어나는 것이다.

사람이란 과거에 억매여 살아가는 존재들이다. 현재를 대비하기 위해 과거에 준비했던 모든 것을 다 끊게 되면, 과거에서 꿈꾸는 그 아름다운 꿈들이 다 날아가 버리고 마는 것이다. 좋았던 그 시절, 혹은 좋게 되리라 꿈꾸는 그 꿈 자체가 사라지게 되면 사람은 도대체 무슨 낙으로 살아간다 말인가?

물론 성경적으로 보면, 하나님을 알게 된 기쁨으로 살아가라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이론상 그러하고 실제로는 내 마음에조차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고 그 자리에 세상적인 삶의 보람이나 기쁨으로 채우려는데 이것을 감히 누가 말릴 수 있단 말인가. 양심의 소리라는 것도 내부적으로 도리어 꾸지람을 듣게 마련이다. 하나님 핑계 대며 끊었던 그 모든 짓을 다시 불러모으기 위해 은근히 죄로부터 유혹 받기를 고대하는 것이 인간이다.

사울왕은 과거로 돌아가고 싶은 것이다. 그러기 위해 자기 손으로 정죄했던 무당 앞에 스스로 굴복하고 그녀의 계시에 따른다. 이처럼 사람이란 자기 자신에게 약하기 때문에, 그리고 자신의 과거에 굴복하기 때문에 그 어떤 영적 세력이든 간에 자신의 소원만 들어준다면 언제든지 복종할 만반의 마음 준비가 되어 있다. 이러한 인간이 과연 하나님의 말씀 따로 분노하심으로 무당을 죽일 수 있단 말인가!

두 번째 예로는 민수기 22장에 나오는 발람 선지자가 나온다. 이 사람은 돈만 주면 돈을 대준 사람을 위해서 뭐든지 축복하고 또 돈을 대준 사람이 저주받기를 원하는 대상이 있으면 신의 이름으로 저주를 퍼붓는 전문 무당이다. 그런데 이 무당의 등장으로 우리가 알 수 있는 무엇일까?

하나님은 바로 이런 이방 무당을 통해서도 도리어 이스라엘을 축복케 한다는 점이다. 모압의 발락왕이 이 발람 무당에게 '이스라엘을 저주하기를' 부탁했다. 발람은 당연히 그 부탁을 듣고 이스라엘을 저주하려 간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가 타고 가는 당나귀의 입을 열어서라도 발람으로 하여금 저주가 바뀌어 축복을 하도록 조치하셨다.

바로 이렇게 하시는 분이 하나님이다. 그렇다면 그런 능력을 가지신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무당을 죽이라고 지시하시는 이유는 이스라엘에게 내려지는 복은 무당 말고 다른 통로를 통해서 충분하게 주어진다는 것을 분명히 하기 위해서이다. 즉 더 이상 이스라엘 내부에서는 무당이 필요치 않다는 것이다.

오늘날 성도에게도 마찬가지다. 그 어떤 환란이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 들이닥쳐도 예수님 안에서 내리시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어지지 아니한다. 그 이유는, 무당이란 아쉬울 때만 찾게 되지만 우리 예수님은 평생을 우리와 함께 동행하시면서 사랑해주시기 때문이다.

그 증거가 바로 십자가다. 십자가 위에서 예수님은 사주팔자 책을 펴놓으시고 우리보고 점이나 치신 것이 아니다. 자신의 목숨을 아예 비천한 우리 위에 바치셨다. 이 목숨으로 인해 우리가 바라는 천국에서 영원히 살게 된 것이다.

22:20-24

여호와는 어떤 하나님이며 여호와 외에 다른 신은 어떤 신인가 하는 점을 같이 알고 있어야 될 것이다. 여호와께서는 어떤 하나님이신가 하면, '과부나 고아를 해롭게 하면 그 사람들을 죽여버리고 그의 가족들은 고아와 과부로 만들어 버리는' 그런 하나님이다.

그렇다면 다른 신은 인간들의 욕망을 충족시켜주는 신이다. 빌면 복주고, 바치면 복주고, 착한 일하면 복 주는 그런 신이다. 따라서 인간이라고 태어났으면 당연히 여호와 하나님은 찾지 않고 여호와 외의 신을 찾게 될 것이다 .

혹은 여호와라는 이름만 그럴 사하게 언급하고는 그 속 알맹이는 이방신으로 채우는 식으로 여호와 신을 관리하려고 한다. 참된 여호와 하나님을 찾으려고 한다면 그 여호와 하나님께서 '나' 자신을 늘 죽일 수도 있는 하나님이라는 점을 인정하면서 찾아야 하는 것이다. 이익 보자고 하나님 찾았다가 그 하나님에 의해서 되레 죽임을 당해도 좋다는 의식이 있을 때만 여호와 하나님을 찾을 수 있다.

하나님의 분노와 진노까지 사랑할 수 있는 사람만이 여호와 하나님을 제대로 찾고 있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그 진노와 분노의 대상으로 본인도 포함됨을 인정하고 들어가야 한다.

이 세상에 그 어떤 인간도 참 여호와 하나님을 자진해서 찾을 수가 없다는 말이다. 이사야 53:2-3에 보면, 그 누구도 예수님을 예수님으로 알아 볼 수는 능력자는 이 인간 세계에서는 없다는 말이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지금 이 자리에 예수님이 계시고 예수님께서 본인의 말씀을 하신다 하더라도 이해하고 메시야로서 알아 볼 능력자는 아무도 없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왜 오늘 같은 말씀을 하시는 것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원칙은 일체 인간의 이해력과 납득과 그들이 소망하고 기대하는 바와 전혀 다른 엉뚱하게 진행된다는 점을 분명히 알리기 위해서이다.

21절에 보면, " 너는 이방 나그네를 압제하지 말며 그들을 학대하지 말라 너희도 애굽 땅에서 나그네이었었음이니라"라고 되어 있다. 즉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계가 하나님의 눈으로 보면 애굽이며, 그 속에 놓여 있는 성도는 기껏 '나그네'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인간들은 이러한 하나님의 언질에 대해서 대단히 불쾌하게 생각한다. 그런 식의 사고방식은 자신들이 이 세계에서 사는데 하등 보탬이 되지 못한다는 것이다. 즉 이 세계에서 외롭게 나그네로 살기 싫다는 의사표시를 하게 된다. 이 세상이 완벽하지는 않더라도 불 심판으로 멸망 받을 도성이라고 생각하고 싶지는 않다는 것이 인간들의 보편적 의식이다.

만약 하나님의 말씀대로 진정 이 세상에 멸망의 대상인 애굽이나 소돔과 고모라 세상이라면 이 세상에서 벗어나지 않고 미련 버리지 않고 이 안에서 기어이 버티는 자기 자신의 노력과 가치성이 순식간에 날라가 버릴 것이 뻔하기 때문이다. 즉 '나그네'로 외롭게 살기 싫다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인간들의 이런 욕구가 팽창하든 말든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으로 기어이 이 세상이 애굽 세계에 불과하고 성도들이 나그네일 뿐임을 알려주는 식으로 일에 나서게 된다. 그 일 중의 하나가 바로, 이스라엘 내부에 고아와 과부를 힘들게 하면 그들의 원한을 듣고 하나님께서 가해자의 집안을 완전히 고아와 과부로 만들어버리겠다는 것이다.

이러한 일관된 여호와 하나님의 일을 통해서 참된 성도는 이 세상이 여전히 애굽 세계이며 자기 자신은 나그네임을 확실하게 다지게 하시는 것이다. 고아와 과부를 학대하지 말라는 이 말씀은 생각보다 지키기가 대단히 힘들고 차라리 불가능하다는 말이 적절하다. 왜냐하면 이 애굽의 세상에서는 그 어떤 조직이든 간에 강자에 의해서 주도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즉 강자들의 중심으로 조성되고 약자는 그 강자 밑에 들어가서 학대 받고 서러움 당하고 이용당하는 식이 되어야만 세상 조직이 움직이고 커지게 되어 있다.

이 세상의 그 어떤 조직체든, 약자 위주로 된 조직체는 없다. 약자라는 이유만으로 자연적으로 지배를 받아야 하는 것이 이 애굽 세계의 생리다. 야고보서 5장에 보면, 품삯을 받지 못한 억울한 노동자가 하나님에게 하소연할 때. 하나님의 대응이란 5-11절에 철저하게 자기 백성을 이 땅에서 나그네임을 의식케하고, 그리고 이 세상은 미련 둘 필요조차 없는 애굽 세상이라는 것을 알리는 쪽으로 활동하신다. 이처럼 여호와 하나님은 인간들이 기대하고, 바라고, 얻고자 하는 그 현장에서 나타나지 않는 하나님이다.

22:25-31

본문의 경우 같은 것도 이미 홍해를 건너온 사람들에게 준 말씀이다. 홍해 바다의 갈라짐은 인간의 힘으로 되는 일이 아니다. 마치 인간의 힘으로 죽음이 주는 공포에서 벗어날 수 없듯이 이스라엘 사람에게 있어 홍해바다 건넘은 마치 죽음을 통과한 경험이다.

이렇듯 죽음을 통과한 사람에 한해서 하나님은 '거룩한 백성'이라고 지칭하신다. 죽음도 통과하지 못한 주제에 하나님 말씀을 아무리 준수하고 있다고 자부해도 하나님은 그런 사람을 '거룩한 사람'이라고 간주해주지 않는다. 구약에서 홍해를 건너옴이 곧 죽음을 통과함에 해당된다면,

신약에서는 십자가의 피를 믿는 자들이 곧 죽음을 통과한 사람들이다. 고린도전서 15:55-56에 보면, 사망이 표적으로 삼기 위해 사람을 찾아다닌다. 그런데 성도에게 있어 표적이 될 만한 사람들이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성도는 이미 죽었고 예수님 안에서 부활될 자로 움직이고 있기 때문이다.

즉 율법의 저촉을 받지 아니하니 죽음조차도 성도에게는 공격할 것이 없어져 버린 것이다. 홍해를 통과한 적이 없는 사람들은 이 말씀을 보게 되면 겁이 날 것이다. 돈을 빌려줘 놓고 채권자처럼 굴지 말라고 하니 기가 막일 노릇일 것이다. 만약 이 말씀대로 살지 못하면 지옥 가는 사람으로 인식될 것이다. 그러니 차라리 이 말씀은 안 듣고 안본 것으로 살고 싶을 것이다.

그런데 이미 홍해를 건너온 사람들의 생각은 다르다. 죽음을 통과한 사람은 자기 자신마저 통과되어야 될 죽음의 일부로 간주해서 이미 자기 자신마저 극복한 사람이 된다. 따라서 이런 사람은 자기 중심적으로 사는 자가 아니라 말씀 중심으로 사는 사람이 된다.

사람은 환상을 만들어내며 산다. 늘 그렇다. 일종의 소설을 쓰는 것이다. 그러나 그런 소설은 과거에 있었던 자신의 경험이지 실제 상황은 아니다. 실제 상황이란 항상 과거 사실이 되어 시간 뒤로 사라져버린 후다.

즉 인간의 삶이란 자신이 만든 소설과 실제 상황과의 싸움이다. 이것이 자기 중심적으로 사는 자들의 모습이다. 그런데 하나님의 은혜란 자기 백성들에게는 이런 '소설 쓰기'를 그냥 방치하시지 않으신다. 반드시 현실을 깨닫게 하신다. 현실이란 다름이 아니라 이 세상은 말씀 중심인지 결코 인간 중심이 아니라는 것을 말한다.

예를 들면 이사야 40:6-8에 보면, "말하는 자의 소리여 가로되 외치라 대답하되 내가 무엇이라 외치리이까 가로되 모든 육체는 풀이요 그 모든 아름다움은 들의 꽃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듦은 여호와의 기운이 그 위에 붊이라 이 백성은 실로 풀이로다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드나 우리 하나님의 말씀은 영영히 서리라 하라"라고 되어 있다.

이것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면 이 하나님의 말씀이 죽음을 통과한 자들에게는 멀리 있는 환상이 아니라 유일한 현실로 다가오게 되고 그 안에 녹아지게 된다. 즉 복음과 말씀은 하나님의 약속 위주로 돌아가게끔 되어 있다. 이 말씀 앞에서 자기 중심적 현실관을 제거시키게 된다.

이렇게 되면 거룩이라고 하는 것은, 보다 완벽한 생활을 영위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고 오히려 세월이 가면 갈수록 자신의 숨어있는 죄가 더욱 더 까발려지는 것을 뜻한다. 즉 인간이 자기 중심적으로 살면, 자기는 늘 아름답고 곱게 살고 싶은 쪽으로 생각이 돌아간다. 계속해서 그런 식으로 매일 같이 소설을 쓰는 식으로 살게 된다. 하지만 들의 풀 같이 사그라들고 시들어야 되는 것이 인간이라는 말씀이 작용하게 되면 이런 자기 중심적 현실관이 죄악된 것임을 파악하게 된다.

모든 성경 말씀이 다 그렇다. 오늘날 우리들에 처해있는 신약에서도 성도가 되어 산다는 것은 곧 자신의 숨어있는 죄성을 더 많이 알게 되는 것을 뜻한다. 그 예가 누가복음 7장에 그 동네에서 행실이 나쁘다고 소문난 여인이 나온다. 그녀는 그 누구의 허락도 필요치 않고 들고 온 향유를 예수님의 발에 붓고 행여 발에 상처 날까 봐 부드러운 머리털로 씻고 있었다.

즉 예수님을 섬기는 방식도 참으로 원초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그런데 그 주위에 둘러 섰는 신사분들은 이런 천박한 여인의 천박하고 노골적인 행위를 비난했다. 그러자 예수님은 "가라사대 빚 주는 사람에게 빚진 자가 둘이 있어 하나는 오백 데나리온을 졌고 하나는 오십 데나리온을 졌는데 갚을 것이 없으므로 둘 다 탕감하여 주었으니 둘 중에 누가 저를 더 사랑하겠느냐"라고 하신다.

즉 누가 예수님 앞에서 죽음을 품고 행동하고 살아가느냐를 묻고 있는 것이다. 이 막달라 마리아는 이미 자신을 죽음을 그 내용으로 하여 행동하고 있다. 예수님 앞에서 그녀는 더 이상 '자기 중심주의'로 행동하지 않고 있다. 예수님만으로 족하다. 자기 죽음을 지당하고 마땅한 현실로 인정하고 있는 것이다.

인간은 온갖 변화를 겪는다. 그 때 그때마다 자신의 본성이 유감없이 발휘된다. 들에서 짐승에게 찢긴 고기도 발견될 것이고 때로는 이웃집에서 돈이 궁해 자기에게 급전을 요구할 수도 있다. 이럴 때 왜 상대방을 하나님께서 나와 만나게 해주셨는가를 먼저 생각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성도를 가지고 자신의 자비를 드러내는 수단으로 사용하고자 하신다. 즉 하나님의 자녀가 만나는 각가지 상황에서 성도는 자신이 그 자리에 없다고 여기는 것이다. 그렇다면 자기에게 돈을 빌려간 그 분은 돈 갚아 줄 주인님도 없는 것이다. 돈 받을 사람이 없다는 말이다. 들에서 짐승의 고기를 발견할 때도 마찬가지다. 그것을 먹을 사람이 없다고 여기면서 그것을 주시해야 한다.

그런데 이 모든 태도에 대해서 하나님은 '자비'라는 표현을 사랑하신다. 자비가 알고 있을 때에만 그런 일이 일어난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사랑이 없는 행위는 그 행위가 어떤 행위든 하나님의 뜻이라고 볼 수 없다. 그런데 사랑이나 자비라는 것이 오직 하나님의 법과 말씀에만 들어있지 결코 인간 속에는 나올 수 없음을 분명히 해야 한다. 이것이 우리가 처해 있는 현실이다.

첨부파일 : 출애굽기 21장 – 22장.docx (38.6K), Down: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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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