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하 2: 1- 3 (다윗의 전쟁)
삼하 2: 1- 3 (다윗의 전쟁)
이름 : 우리교회(IP:220.81.41.193)
본문 : 사무엘하 2장 1- 3절
제목 : 다윗의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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첨부파일 : 002강-삼하2장1-3(다윗의전쟁)-2sa091025-(이_근호_목사).hwp (48.0K), Down:4
이근호
09-10-25 15:42
다윗의 전쟁
2009년 10월 25일 본문 말씀: 사무엘하 2:1-3
(삼하 2:1, 개정) 『그 후에 다윗이 여호와께 여쭈어 아뢰되 내가 유다 한 성읍으로 올라가리이까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올라가라 다윗이 아뢰되 어디로 가리이까 이르시되 헤브론으로 갈지니라』
(삼하 2:2, 개정) 『다윗이 그의 두 아내 이스르엘 여인 아히노암과 갈멜 사람 나발의 아내였던 아비가일을 데리고 그리로 올라갈 때에』
(삼하 2:3, 개정) 『또 자기와 함께 한 추종자들과 그들의 가족들을 다윗이 다 데리고 올라가서 헤브론 각 성읍에 살게 하니라』
참 이상한 일입니다. 왜 다윗은 문제가 일어나면 하나님께 여쭈어봅니까? 그것은 모든 일을 자기와 관련된 일로 보지 않고 하나님께 관련된 일로 보기 때문입니다. 사실 다윗이나 우리는 조용하고 살고 싶습니다. 누구하고 원수처럼 지내면서 싸운다는 것은 우리 취향에 맞지 않습니다.
이 말은 곧 우리는 교양인이 되고 싶은 겁니다. 인격도야에 나서고 싶은 겁니다. 우리가 시간이 갈수록 우리의 내부 인격됨이 훌륭해지고 거룩해지기를 원합니다. 예수를 믿는 만큼 사람 됨됨이가 향상되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바로 이런 의도가 하나님에게 물어보지도 않으면서도 제대로 살 수 있을 것이라는 안목에서 비롯됩니다.
하나님께 물어본다는 것은, 우리 주변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이 나와 관련된 사항이 아니라 하나님과 관련된 사항이라는 점을 받아들이는데서 비롯됩니다. 하나님과 관련된 사항이라는 말은 곧 ‘나’라는 인간조차 내가 되고 싶은 내가 될 수 있었기에 여기 이 자리에 있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소나무를 옮길 때, 소나무만 달랑 옮기지 않습니다. 소나무 주변을 동그랗게 파서, 나무 뿌리가 말라죽지 않기 위한 환경도 더불어 옮겨집니다. 주변 상황이 빠진 소나무는 소나무라고 할 수 없습니다. 나무 뿐만 아니라 인간도 마찬가지입니다. 다윗이 하나님께 물어보는 것은 자기 주변에서 자신의 역할과 상황을 물어보는 겁니다.
지금 다윗에게 전쟁이 기운이 돕니다. 만약에 다윗이 하나님께 물어보지 않고 전쟁을 치르려고 한다면 자칫하면 다윗 자신이 하나님의 적이 될 수 있습니다. 사람에게 있어 적이란 자기에게 해꽂이한 세력이 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만약 하나님이 자신을 힘들게 하면 어떡하겠습니까? 아마 하나님마저 적으로 규정해서 원망하면서 달려들 것입니다.
이처럼 사람들은 자기 주변의 상화을 일방적으로 자기 의를 드러내는 유리한 상황으로 해석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주도권을 하나님에게 맡기지 않고 여전히 자기 주도권을 자신이 쥐고 싶어하는 본성이 발휘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원래 전쟁의 시작은 아담 때부터입니다. 아담의 범죄를 계기로 하여 하늘의 전쟁의 땅의 전쟁으로 확대되었습니다. 요한계시록 12장이 이 사실을 말햅니다.
문제는 이 전쟁이 사적 전쟁이 아니라 영적 전쟁이라는 말입니다. 아담이 죄 짓고 난 뒤에, 인간들은 영적으로도 죽은 존재가 되고 말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를 다룰 때, 사적으로 다루시는 것이 아니라 아담 주변을 형성하고 있는 영적 존재와 그 전쟁에 시작하면서 다루고 계십니다.
악마가 인간을 시험한 이유는 신약 때와서 밝혀졌습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나라’을 악마는 행함으로 접수하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은 그게 아니라 예수님의 공로로 인간에게 ‘선물’로 주신 식으로 천국을 이룰려고 하는데 있습니다. 바로 이 틀어짐이 영적 전쟁으로 벌어지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로마서 9:32-33에 보면, “어찌 그러하뇨 이는 저희가 믿음에 의지하지 않고 행위에 의지함이라 부딪힐 돌에 부딪혔느니라 기록된 바 보라 내가 부딪히는 돌과 거치는 반석을 시온에 두노니 저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치 아니하리라 함과 같으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악마라는 영적 존재의 사주를 받는 자들의 특징은 그 어떤 경우라도 자신의 행함을 유지하고 있다는 데 있습니다. 예를 들면, 산상설교에서 예수님이 하신 말씀, 즉 “오른 뺨을 때리거든 왼 뺨도 내어놓아라”(마 5:39)의 말씀을 기억하는 사람들은, 누가 자신의 오른뺨을 때리면 실제로 왼뺨을 내어놓든지 아니면, 이것을 소위 ‘십자가 정신’에서 도출된 포괄적 양보의 미덕과 ‘자기 비움’의 정신을 기초로 해서 적극적 의미로 전환시켜 타인을 용서하는 것으로 이 본문을 달성했다고 여기고 싶어합니다.
그런데 바로 이 정신이 악마의 정신이요 십자가로 달려들다가 깨어질 수 밖에 없는 더러운 악마의 근성입니다. 왜냐하면 스스로 자기 내부에서 영적 전쟁을 해소시켜 소멸시키려는 의도를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즉 악마는, 자신이 지금 하나님과 전쟁을 벌린 당사자인 것을 감추려고 합니다.
그러다보니 영적 관계를 삭제시키고 인간들이 행할 수 있는 그 끝을 거룩의 영역에다 접속시키려는 시도를 하게 됩니다. 아담과 하와는 본의 아니게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이라는 영적 전쟁에 휘말리게 됩니다. 그것이 바로 그들에게 ‘하나님의 형상’이 있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받았기에 그 ‘하나님의 형상’이 발휘해야만 하는 전쟁 구조에서 면제될 수 없습니다.
이제 인간은 좋든 싫든 하나님의 전쟁의 와중에 놓이게 됩니다. 그 전쟁의 구체적 속성은 창세기 4장에서부터 나옵니다. 거기에 가인이 하나님께 제사드렸다는 내용이 나옵니다. 그런데 결과적으로 가인은 화를 냅니다. 왜 화를 낼까요? 하나님께서 자기 제사를 받지 않았기 때문입니까? 아닙니다. 다른에는 더욱 더 바른 예물로 제사드리면 되기 때문이지요.
그렇다면 왜 가인이 화를 내었을까요? 그것은 바로 동생 아벨의 제사를 받았다는데 있습니다. 즉 가인에게 나타난 악마의 본성이란 자신의 행함 자체가 하나님으로부터 무시당한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받으신 제사와 비교가 되면서 말입니다. 그래서 가인은 동생을 죽이게 되는 이 살인이 곧 예수님을 사람들이 죽인 원천 동기로 작용합니다.
이처럼 인간들은 본인의 결정으로 살아가는 자들이 아닙니다. 요한복음 5장에 나오는 베데스다 못 가에서 일어난 일도 마찬가지입니다. 38년된 병자는 말하기를, 아무도 나를 먼저 번쩍 들어서 호수에 넣어주는 사람이 없기에 여태 병이 못낫고 있다고 말합니다. 즉 그 38된 병자는 평소에 자신이 세운 원칙을 그대로 고수하면서 단지 그 끝 자락에 신의 긍휼과 자비를 요청하고 있는 겁니다.
그러니까 그에게 있어 메시아의 일이란 이미 자신이 설치해놓은 ‘은혜 받을 구조’를 부정하지 않고 마저 채우는 식의 메시아여야 한다는 겁니다. 하지만 예수님을 그 방식을 완전히 무시하고 그냥 그 사람의 병을 고쳐주었습니다. 하지만 여기서 믿음의 의미는 끝나지 않습니다.
그 38년된 병자가 자신이 예수님 덕분에 구원받은 것을 자랑한다면 그도 마찬가지로 십자가 앞에서 와장창 깨어질 자에 불과합니다. 예수님은 그 사람으로 하여금 담요를 들고 ‘안식일법’으로 가득채워진 그 사회법 속을 관통케 합니다. 이것은 바로 영적 전쟁입니다. 사람들은 자기 사적 구원만으로 즐거워하고 건지면 다 건진 것으로 여깁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진짜 자기 성도를 세상의 단단히 구조로 보냅니다.
38년 된 병자의 평소 관심사는 결코 사회나 정치에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하지만 그는 예수님께서 계산해놓은 사태를 유발하는 동기에 쓰여져야 합니다. 누가복음 22장에서 베드로가, 자신은 예수님을 버리지 않겠노라가 장담하는데 이것 역시 행함에 속하는 발언입니다. 하지만 그는 자기 주변에 있는 대립되는 영적 대치기류를 읽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악마가 너를 지옥으로 데려가기 위해 청구했지만 내가 기각했다. 나 예수가 너를 위하여 기도하지 아니하면 너도 구원될 수 없던 자이다”고 말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물어봅시다. 또 무슨 사태가 기다리고 있는지를 말합니다. 그 사태 속에서 날마다 깨어지면서 그저 주신 십자가의 공로로 인한 영생에 감사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성질을 죽인다고 주의 뜻이 아니라 예수님의 공로를 위해 쓰임받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우리교회
09-10-26 13:46
http://media.woorich.net/성경강해/사무엘하-2009/02강-삼하2장1-3(다윗의전쟁)-2sa091025.hwp
우리교회
10-12-11 20:00
하나님의 말씀 사무엘하 2장 1절에서 3절까지입니다. 구약성경 464페이지입니다.
사무엘하 2:1-3
“그 후에 다윗이 여호와께 물어 가로되 내가 유다 한 성으로 올라가리이까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올라가라 다윗이 가로되 어디로 가리이까 가라사대 헤브론으로 갈찌니라 다윗이 그 두 아내 이스르엘 여인 아히노암과 갈멜 사람 나발의 아내 되었던 아비가일을 데리고 그리로 올라갈 때에 또 자기와 함께한 종자들과 그들의 권속들을 다 데리고 올라가서 헤브론 각 성에 거하게 하니라”
방금 읽었던 대목 여러분 이상하다고 느껴지지 않습니까? 야, 굉장히 이상하다, 생각들지 않습니까? 그게 뭐냐 하면, 다윗이 누구하고 상대하느냐 하면 하나님하고 상대합니다. ‘하나님이여 올라가리이까, 마리이까? 만약에 오늘날 우리가, 우리 교인들 중에 어떤 사람이 ’집사님 뭐하십니까? ‘가만히 있어 보이소.’ ‘뭐하십니까? ’하나님이여 올라가리이까, 마리이까? 하면, ‘이게 미쳤나?’ 아마 핀잔이 대단할 겁니다.ㅎ 왜 사람을 상대해야지, 왜 당신은 사람을 상대해야지, 먼저 만나 본 사람이 있느냐 말입니다.
다윗은 사람을 상대하기 전에 자기가 만나 보는 분을 먼저 만나요. 이유가 하나밖에 없습니다. 다윗에게 자기 적은 없어요. 오직 하나님의 적밖에 없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자기가 하는 전쟁은 하나님의 전쟁이지, 사적인 전쟁이 되게 되면, 이것은 오히려 그 사람이 하나님의 원수가 되는 겁니다. ‘다윗아, ’예, ‘니 왜 내 시키는 대로 하지 않니? ’제가 알아서 처리했습니다.‘ 그게 하나님 앞에서는 왕답지 못한 태도가 되는 거예요.
그래서 저는 어려운 말을 하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찾아올 때, 그 사람만 보는 것이 아니고, 그 사람의 주변과 상황을 함께 이야기해서 온다는 겁니다. 쉽게 말씀드려서 소나무를 옮길 때, 소나무만 달랑 뽑아서 옮기는 것이 아니고, 소나무 뿌리에 사방 1미터 땅을 파서 소나무를 옮깁니다. 그래야 소나무가 안 죽거든요.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 아담을 이야기할 때, 또는 다윗을 이야기할 때, 오늘날 우리에게 이야기할 때, 우리의 주변상황까지라도 하나님의 뜻의 범주에 포함돼 있습니다. 그걸 삽으로 움푹 우리주변까지 다 파버려야 돼요. 그렇게 팔 때 우리 단독으로 생각났으면, 눈에 보이는 것이 나의 적이 돼요. ‘어디 감히, 어디 감히 우리교회를, 어디 감히 누구를,’ 나의 적이 되는 겁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움푹 파버리면, 우리조차 하나님의 적이 될 수 있다는 것, 우리는 진리라고 주장했는데, 진리하고 주장하는 그것조차 하나님께 적이 될 수 있고, 오히려 반대로 우리의 적이라고 생각했던 그쪽이 하나님께서 사용하시는 하나님의 종이 될 수가 있습니다. 이런 것을 구분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거쳐야 돼요. 어디를 거쳐야 하느냐 하면, ‘하나님 조질까요, 말까요? 하지 말고, 먼저 하나님께 물어야 돼요. ’하나님이여, 어떻게 하리이까? 이래 물으면 우리는 하나님의 종이 되고, 주님은 여전히 우리의 주인이 되십니다.
다윗은 근원적으로 전쟁을 하게 되죠. 그러면 전쟁을 하게 되면 아까 제가 이야기한 중요한 점, 뭐냐 하면, 전쟁을 할 때 항상 그 주변을 파서, 주변과 더불어서 이야기한다는 것을 염두 해 두시기 바랍니다. 성경에서 전쟁의 시작은 아담부터입니다. 아담에서 전쟁이 일어나게 되면, 아담은 자기 전쟁이 아니고, 이미 일으킨 전쟁의 심부름꾼으로 동원되는 겁니다.
하나의 예를 들겠습니다. 요한복음 6장 베데스다 못가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호수의 물이 움직일 때, 첫 번째 사람에게만 혜택이 주어졌는데, 병 고치는 혜택이 주어집니다. 근데 그 곁에 38년 된 병자가 죽치고 있는데, 그 사람은 자기가 들어가려고 하면, 벌써 다른 사람이 먼저 뛰어들어서 병 낫고 이미 효과는 떠나버렸습니다. 그런지 38년 돼 버렸어요. 그럴 때 예수님이 찾아왔을 때, ‘ 너 여기서 뭐하고 있노? ’물어 하니까 ‘ 38년 병자로 그냥 있습니다.’‘ 왜 안 들어가느냐? 하니까, ’누가 나를 들어서 일착으로 호수에 넣어주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이게 바로 아까 제가 기도할 때 육적인 사고방식 이예요. 사람들은 뭐냐, 자기의 육적인 사고방식 끝에다가 예수 십자가만 붙으면, 그게 전부 다 영이 되는 줄로 착각을 하고 있습니다. 소나무를 옮길 때, 움푹 삽을 들고 주변을 다 파야 되는데, 일단 내 생각은 옳고 여기다가 프러스(+) 십자가만 갖다 달랑 뒤에다가 불어서 붙여 버리면, 그게 천국갈 수 있는 십자가 구원되는 믿음인줄 알고 있습니다. 그게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이야기할 때, ‘누가 나를 들어서 먼저 호수에 안 넣어주니까, 그래서 내가 병이 낫지 못했습니다.’라고 자기 노선을 유지하면서 다만 누가 와서 끝에 도와주기만 하면 됩니다. 이래 나오는 거예요.
그것은 하늘과 사람과 협상하는 거죠. 이런 경우는 없습니다. 예수님이 이렇게 말씀하시죠. ‘내가 왔잖아.’여기서부터 인간은 또 오해합니다. 어떻게 오해하느냐 하면, ‘아, 내가 내 힘으로 안 가는 것을 주님께서 먼저 찾아와서 나를 구원하셨구나. 아이고, 감사하다.’ 그것으로 마감됩니다. 큰 오해십니다.‘나는 예수님 덕분에 병 나았다.’이거 믿음 아닙니다. 병 나았죠? 믿음은 아니에요. 성령의 비췸을 얻고 한번 은사를 맛 본거죠. 믿음은 아닙니다. 구원 받을 수는 없어요.
뭐냐 하면, 38년 된 병자가 예수님 덕분에 나았다고 이야기 하는 거, 그건 어디까지나 자기 이득이죠. 자기 이득을 이야기하는 것이 ‘나는 예수님 덕분에 나는 병 나았다,’ 다른 말로 하면, ‘나는 예수님 덕분에 구원 받았다.’라는 것만 생각하는데, 그 믿음도 천국에 합당하지 않은 믿음입니다. 그럼 뭐냐 하면, 주님께서는 병 나은 사람을 앞장 세워 버려요.
앞장 세워 버리면, 38년 된 병자가 병 낫기 전에는, 안식일을 지키는 그것이 하늘나라에 무슨 문제가 되는 줄을 미처 몰랐죠. 왜? 자기의 관심은 병 낫는데 있기 때문에, 지금 우리가 처해 있는 사회, 안식일 법을 지켜야 하나님이 복주고 구원된다는 우리의 유대사회의 문제점에 대해서 그 사람은 자기 소관이 아니에요. 관심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관심은 누가 있느냐 하면, 주님께서 관심이 있죠. 주님께서 38년 된 병자를 고치시고, 그 사람을 어디다 사용하느냐 하면, ‘너는 안식일 날 담요를 들고 걸어가라‘고 이야기 합니다. 딱 안식일 날!! 그것도 월요일도 아니고, 화요일도 아니에요. 수요일도 아닙니다. 안식일 날 담요 들고 걸어가게 함으로 말미암아 누구 용어대로 벌떼 같이, ’니 확정된 안식일 법마저 건방지게 너는 우리를 모독할 의사가 있나보다. 왜 건방지게 너는 우리가 정해놓은 확정된, 이거는 진리하고 확정 지을 수 없는 그것을 관통하느냐 말입니다. 38년 된 병자가 말하기를‘저는요 안식일인지 모르고요. 저는요 병 나은 거만 이야기 할 뿐입니다.’
유대인이 하는 말이 ‘니가 병 낫고 안 낫고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니가 누구 덕분에 병 나은 건 좋아. 그건 중요한 게 아니고, 당신한테 시비 거는 것은 우리가 확정된, 이거는 천하 누가 와도 변경이 안 되는, 안식일을 지켜야 구원 받는다는 이 확정된, 손도 못대는 진리 세계를, 니가 38년 된 병자가 건방떨지 마라, 건방지게 나오지 마라. 어디 감히 이 법을 니가 건드려??’ 38년 된 병자가 ‘제가 아니고요.’ ‘누구야?’‘저를 낫게 하신 분이 시키는 대로 담요 들고 그냥 통과하라 합니다.’
제가 왜 이 이야기 하느냐 하면요. 전쟁이요? 우리는 전쟁 싫습니다. 우리는 다툼? 싫어요. 우리 취향에 안 맞습니다. 우리는 인격적으로 대해주고 그저 공손하게 순하게, ‘안녕하십니까. 반갑습니다.’ 우린 그거 잘해요. 세상에 공자도 그렇게 이야기 했잖아요. 사람하고 원수 지지 말라고. 공자가 이야기 안 해도 우리는 상식적으로 알고 있습니다. 왜? 교양이니까. 교양인은 교양이 철철 넘치는 거예요. 교양에 어긋났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겁니다. 그런데 그 교양 속에, 인격 속에 우리보고 빛을 뒤집어쓰고 관통하라고 합니다. 우리 혼자 속으로 예수 믿으면 아무도 욕할 사람 없습니다. 스데반 집사가 말 안 떼면 돌에 맞아 죽을 일이 없어요.
성전(요새 말로 교회죠. 예배당이죠)에 누가 하나님이 안 계시다고 누가 이야기 해? 라는 그렇게 분노하는 중간에 스데반 집사를 주께서 보냅니다. 인형 뒤에 나사를 돌려서(태엽 감아서) 보내듯이 슬며시 보냅니다. 스데반 집사가 성령이 충만해서 하는 말이‘ 너희 성전 보이지? 성전에 하나님 안 계시다.’ 예수 믿으라고 그 소리해서 돌에 맞은 게 아닙니다. 제일 오해 받는 것이, 예수 믿으라 하면, 예수 다 믿을 사람 이예요. 예수 믿으라고 해서 욕 얻어먹은 게 아니고, 인간의 행함을 건드리면 안 된다고 이야기했기 때문에 욕 얻어먹은 거예요. 사도바울이 예수 믿으라고 해서 욕 얻어먹은 게 아니고, 인간의 행함으로서는 의를 이룰 수 없다고 해서 욕먹은 겁니다.
전쟁입니다. 이 전쟁은 우리가 조성한 전쟁이 아니에요. 소나무 옮길 때 주변을 다 팝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구원할 때, ‘그래 구원 받았나? ’녜‘ 조용히 천당 가라.’이런 식으로 하시지 않고 우리 주변을, 우리가 구원 받는 순간부터 우리 주변에 이상한 조짐, 지진이 일어나요. 조짐이 일어나면서 본인이 원치 않은 것을 자기가 구원 받은 내력을 이야기를 해줘야 될 그런 입장에 처해 있습니다.
로마서 9장 32절을 제가 사도바울을 대신해서 읽어드리겠습니다. 사도바울이 있다 생각하고 들어보세요. ‘유대인아, 너희들은 어찌하여 믿음에 의지하지 않고, 행위를 의지하느냐?’ 사도바울이 이야기 한 거예요. 예수님의 성령을 입어서. ’그래서 너희들은 십자가에 박살났다. 부딪히는 돌에 깨졌느니라.‘ 십자가에 박살났다. 그렇게 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에 보면, 이사야의 인용인데요. 이사야의 예언에 의하면, ’내가 부딪히는 돌을 딱 이렇게 두겠다는 거예요. 어디? 시온에 두어서 주님을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치 않지만, 만약에 믿지 않는 사람은 머리 박살 날줄 알아라.
십자가가 뭐 하는 겁니까? 조용히 골방에 앉아서 믿는 게 십자가 입니까? 우리는 골방에서 십자가 믿을 수 있습니다. 문제는 십자가를 믿는 인간을 주께서 그냥 가만히 두질 않는다는 거예요. 저 사람 판사인데 오늘부터 교회 나간다. 그 판사, 그담부터 직장 생활하기 힘들어요. 저 사람은 우리나라에서 유명한 청와대 근무하는 사람인데, 오늘부터 예수 믿기로 했다. 이러면 조계종에서 가만두질 않습니다. 당장 사시 대라 합니다. 바로 그 일을 주의 성령 받은 사람은 그 일을 시킨다니까요. 청와대 곱게 퇴직할 때까지 있게 하는 게 아니고, ‘나 불교 조계종 원장이 무슨 소리해도, 나는 공직자로서 분명히 이야기 한다. 예수 믿는다.’ 그 소리 확인해가지고, 조기에 퇴직하도록 만들어 버립니다. 이게 전쟁입니다.
그러면 전쟁의 내력을 이야기해야 될 게 아닙니까? 전쟁의 내력이 뭐냐, 아담으로부터 시작됩니다. 아담 할 때 아까 이야기 했지만, 아담은 본인을 몰랐어요. 아담은 뭘 몰랐느냐 하면, 요한계시록 12장을 몰랐습니다. 요한계시록 12장에는 ‘하늘에 전쟁이 있었으니 미가엘과 악마의 전쟁이 있었다.’ 했습니다. 아담이 선악과 따먹기 전에는 그런 전쟁이 있었다는 것을 몰랐습니다. 그리고 알 필요도 없습니다. 착실하게 대학교 다니던 학생이 언제부터 법원 앞에서, 청와대 앞에서 데모를 하게 됐는가? 그것은 자기 아는 사람이 용산참사에 의해 죽음을 당할 때부터 데모를 하기 시작한 겁니다.
다른 사람 같으면 조용히 공부하면 돼요. 그런데 아는 사람이 용산참사에서 휘발유에 불타서 죽고 난 뒤부터는, 자기 하는 일을 걷어치우고 데모하려 나서는 겁니다. 우리 가정에 착실한 가장이 언제부터 전단지 뿌립니까? 자기애가 성폭행 당했다든지, 자기애가 실종 당했을 때부터, 혹시 ‘이 아이를 아시나요? 직장 그만두고 돌아다닙니다.
상황이라 하는 것은 우리가 결정하는 것이 아니고, 상황이 우리를 만들어 내요. 아담은 누가 만들었는가? 아담이 만들은 게 아닙니다. 아담과 하와는 주님께서 만드십니다. 그걸 가지고 뭐라 하느냐 하면, 어려운 말로 ‘하나님의 형상’이 들어있다고 말합니다. 그 안에 들어있는 하나님의 형상이 아담과 하와를 가만두질 않았어요. 아담과 하와는 창세기 3장15절에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이 싸우는 것은 아담의 후손의 취미가 아닙니다. 그것은 몰라도 되는 겁니다. 그런데 본의 아니게,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이 싸우는 전쟁터에 아담과 하와는 이미 거기에 개입됐었습니다.
아담은 죄송합니다. 흙으로 돌아가고, 여자는 그때부터 울며불며 남자 사모하다가 뒷발 차이는, 애기 낳다가 어려움 당하는 그런 비참한 저주받은 인생길을 가야 하는 겁니다. 하지만 아담과 하와의 그런 운명은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그담부터는 점점 더 어디 가까우냐 하면, 뱀의 후손과 여자의 후손의 내막에 가까이 갑니다. 그게 창세기 4장에 나옵니다. 오늘 성경 다 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창세기 4장에 보면, 그 착실한 가인이 제사 드리다가 완전히 머리가 돌았습니다. 자기 분노를 자기가 억제를 못했습니다. 왜냐 하면, ‘왜 내가 드린 제사는 안 받습니까?’하는 그런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성경이 어려워요. ‘왜 하나님은 내 제사를 안 받습니까? 그 때문에 돌아버리고 분통 터지는 게 아닙니다. 그 담에 다시 제사 잘 드리면 돼요. 그것 때문에 가인이 화난 게 아닙니다. 동생의 제사를 받은 것 때문에 그래요.
이제 어려운 말 합니다. 뱀이, 악마가 화를 낸 게 딴 게 아닙니다. 뱀은 가인과 함께 한 게 그겁니다. 인간의 행함으로 인간에게 줄 모든 천국을, 하나님의 나라를 악마는 자기 행함으로 얻으려고 하는 거예요. 그래서 하나님께 튕긴 겁니다. 천국은 예수님이 공짜로 선물로 주는 거예요. 거기에 악마가 돌아버렸습니다.
성경을 다 보셨습니까? 그렇다면 해답이 나와야 다 본거죠. 어떤 해답을 얻었습니까? 아까 로마서 9장 그대로예요. 사도바울이 이야기한 거예요.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 받는 겁니다. 그것만 이야기하면 반 토막 났죠? 반드시 뭘 이야기해야 돼요? 인간의 행함으로는 안 됩니다. 왜 안 되느냐? 행함이 부실해서? 아니에요. 성의가 없어서? 아닙니다. 그러면 뭐냐? 그 배후에 악마와 연결 돼 있어요. 인간은 홀로 있는 것이 아니라 영적 존재예요. 인간은 영적 존재의 배후조정을 받게 돼 있습니다. 반드시 인간이 뭘 행하게 되면, 행위에 대한, 속에 자기의 행함에 대해서 민감하게 돼 있어요.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해 보세요. 해 보게 되면, ‘주님, 저는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했습니다.’반드시 자기 행함을 굳히게 돼 있습니다. ‘오른뺨을 때리거든 왼뺨을 내놔라’오른뺨을 때릴 때 왼뺨 내놔 보세요. 왼뺨 한 번 더 맞아 보세요. 그리고 곱게 갔습니다. 사람이 곱게 갈사람 아닙니다. ‘주여 오른뺨 내릴 때 왼뺨 내놨습니다.’ 반드시 기억합니다. 상대방이 욕을 할 때, 저는 놀랍게도 대항하지 않고 침착하게 속으로 용서했습니다.‘ 악마의 마음입니다. 죽을 때까지 자기 착실한 행함에 대해서 포기 못 합니다. 왜? 태생이 그래요.
오늘 처음 나오신 부부 계신데, 오늘 집에 가면 생각 할 거예요. ‘우리 교회에 처음 나왔습니다.’주님께서 ‘어쩌라고? 그거하고 십자가하고 무슨 관계인데?’ 아무 관계가 없어요. 아무 관계가 없다고요. 이게 무슨 의미냐? 주께서 보내주셨습니다.‘ 말 나올 때까지.
‘주께서 보내주셨습니다‘ 물론 한 두주 나오고 안 나올 수 있어요. ’주께서 두 주만 나오게 하셨습니다.‘ ’주께서 석 달 나오게 하셨습니다.‘ ’주께서 8년 보내주셨습니다.‘ ’주께서 10년 보내주셨습니다.‘ ‘그것이 내 뜻이 아니었습니다.’ 말이 나올 때까지.
우리는 우리의 성질을 제발 죽이지 마세요. 성질대로 하시기 바랍니다.ㅎ 그런데 제가 부탁 안 해도 성질대로 합니다. 성질대로 해놓고 뭐라고 속이느냐 하면, ‘주여 성질 죽였습니다.’라고 거짓말 하거든요.ㅎㅎ 어떤 인간도 성질 죽이는 사람 없습니다. 성질 죽이는 것도 성질 이예요. 자기 성질 이예요. 인격적으로 대하는 것도 자기 성질 이예요. 남의 일이라서 침착하죠. 본인 이야기 건드려 보세요. 본인 건드려보면, 전에까지 나는 성질 많이 죽었다고요? 인간 성질 안 죽었습니다. 술 끊었다고요? 안 믿습니다. 15년 뒤에 성질나서 소주 까고 있을 거예요.
인간은 본인보고 뭘 하라는 게 아닙니다. 보이지 않는 영적 전쟁에 돌입한 거예요. 그래서 다윗은 묻는 겁니다. 누구한테? 주님한테 묻는 거예요. ‘주님이여, 다음 사태는 또 무슨 사태 입니까? 묻는 거예요. 예를 들어 봅시다. 오른뺨을 때리면 왼뺨을 내놔라 해서 때릴 때, 문득 성경 말씀이 생각나서 ’아! 그때가 그때구나. 주여 지금 지키나 안 지키나 시험하려 하죠? 주여, 한번 보세요. 때리라고 왼뺨을 내놨습니다. 그래서 ‘아하 주여 내 성질 많이 죽었습니다. 내가 성령 아니면 같이 때렸습니다. 많이 죽었다. 이 근호 많이 죽었다.’ 했죠? 주께서 다음사태를 보내는데, 귀때기 2방 때리는 사태를 보냅니다.ㅎ 그래서 2방 정도는 맞겠나. 이래 나옵니다. 그런데 그다음 차례는 이 정도가 아니에요. 욥 이야기거든요. 그 담에 내 딸애를 때립니다. ‘에이’ 못 참습니다.’ 아브라함보고 뭐라 했습니까? ‘니 자식을 바치라’ 했잖아요. 차라리 아브라함이 구원 받은 거 같으면, ‘내가 대신 죽으면 안 되겠습니까? 이래 나와요. ’ 니 말고 니가 사랑하는 독자 바쳐라‘
이게 뭐냐 하면, 인간이라 하는 것은 인간 자력으로 구원 받겠다 하는 것은 어디 소관이냐 하면, 이미 우리 속에 악마가 들어온 소관입니다. 악마가 들어왔기 때문에, ‘주님, 가만히 있어 보세요. 내가 알아서 구원 받겠습니다. 내가 알아서. 내가 예수 믿고 삼위일체 믿고 하는데, 내가 알아서 하지 뭘 주님께 물어봅니까?
아닙니다. 여러분!! 여러분들, 소나무는 여러분이 옮기는 게 아니고, 삽으로 여러분을 파서 이동하는 겁니다. 주께 물어본다는 이 대목 가지고 하나만 이야기 하고 마치겠습니다. 베드로가 하는 말이 ‘주님이여 제가 죽기까지 주를 따라가겠습니다.’요즘 선교단체나 교회에서 헌신 예배 때 손들고 하는 이야기인데요. ‘내가 주님을 배반하지 않겠습니다. 끝까지 믿겠습니다.’ 주님께서 참 성질도 나빠요. ‘수고했다, 열심히 해 보자.’이러면 인격적으로 얼마나 좋습니까? ‘ 니 내 팔아먹는다.’이야기 했습니다. ‘그럴리 있습니까? 팔아먹을 이유가 있습니까? ’ 저 누굽니까? 수제자 베드로입니다.‘ 했을 때, ’지금 너는 영적으로 안 본다. 영적으로 악마가 니가 내 사람인 줄 알고, 악마가 너를 청구하려고 계속해서 집적댄다. 하지만 니가 거기서 벗어날 수 있는 것은 너의 노력이 아니라 순교나 의지가 아니라, 내가 너를 위해서 지금도 기도하고 있다. 또 보세요. 영적이죠.
지금 우리는 소나무는 한 그루인데 양쪽에서, 악마는 나를 지옥으로, 주님은 당장에 그걸 기도로...그런데 우리는 평소에 하루 일과 속에서 주님이 언제 기도하시는 것을 발견 할 수 있으며, 악마가 나를 청구하는 걸 언제 느낍니까? 우리는 항상 매일 매일을 내가 어떻게 했나 어떻게 하느냐, 어떻게 큐티(Quiet time) 하느냐, 바르게 사느냐 맨 날 이것만 쳐다보기 때문에, 영적인 것은 삭제된 상태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놀랍게도 주께서 때때로 말씀을 주시므로 말미암아 38년 된 병자처럼, ‘내가 구원 받았다‘ 이 자랑하는 것이 아니고, ’주께서 주여 오늘은 어디로 보내시렵니까? 구원 받은 나를 어디 자리에다 배치해 놓으렵니까? 배치해 놓으면 꼭 어떤 숙제가 기다리고 어떤 사태가 기다려요.
하지만 그 가운데 주와 함께 있다는 겁니다. 마태복음 28장 20절에 “세상 끝 날까지 내가 너와 함께 있으리라”무슨 뜻입니까? ‘니는 백날 가봐야 니 자랑밖에 할 게 없지만, 내가 너를 구원할게.’ 라는 그런 약속입니다. 우리는 그 약속을 믿고서 다시 한 번, ‘제가 이런 경우에는 어떻게 해야 됩니까? 늘 물을 수 있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우리는 우리가 만든 자리만 생각했지, 영적인 방식들을 생각 못했습니다. 앞으로 내가 어떻게 행하느냐, 내가 어떻게 착실 하느냐, 내가 어떻게 훌륭해지느냐, 여기에 몰두했습니다. 하지만 말씀을 보면 볼수록 우리 힘이 아니었고, 주께서 우리를 사용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저희들 그 가운데서 이런 죄인도 구원 될 수 있다는 이 놀라운 주님의 긍휼하심만 외부로 방출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