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애굽기 20장 주석
출애굽기 20장 주석
이름 : 이진용(IP:222.99.120.158)
출애굽기 20장
(20장 - 23장)
제사의 요체는 법궤에서 벌어지는 일에 있다. 그것은 성막에서 가장 깊숙이 자리잡은 지성소 안에 모셔져 있다. 법궤 안에 들어있는 내용물과 법궤의 뚜껑에 뿌려지는 제물의 피의 상관관계에서 모세언약의 핵심은 보여지는 것이다. 20장에서 시작되는 시내산 계명의 나열은 새로운 질서의 나라를 지상에 건설하는 것에 그 목적을 둔다. 그 나라는 희생의 의미를 구현하는 나라이다.
즉 애굽에서 종 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낸 하나님의 그 심사를 헤아려야 하는 것이 이 나라의 급선무이다. 애굽에서 그들을 건져낼 수 밖에 없는 그 이유와 동기는 모세가 전하는 10계명에 낱낱이 다 들어있다.
1계명: 애굽의 神들을 쳤던 여호와이기에(12:12) 그 기능은 그 이후에도 계속된다. 최종공로가 누구에게 궁극적으로 돌아가야 하는가 하는 논의에 대해 쐐기를 박는 언명이다.
2계명: 여호와의 형상은 피조물의 그 어떤 것으로 부터로도 유출되지 아니하며 유사점이 없다. 여호와는 철저히 피조물과 구별되시는 분이시다. 따라서 피조물 그 어디에도 거룩의 의미를 줄 수 없다.
3계명: 따라서 여호와 하나님을 이방종교처럼 주술적인 도구로 이름이 남용되어서는 아니 된다. 여호와는 인간의 소원과는 무관하기 때문이다.
4계명: 여호와의 뜻은 창조의 완성에 있다. 그것은 영원한 안식이다. 오직 이스라엘은 이 목표점을 그리워하며 살아가야 한다. 애굽에서의 탈출을 안식을 향한 도약이라고 봐야 한다. 안식일을 준수한다는 것은 미래지향적인 여호와의 의지에 순종하겠다는 고백이다.
5계명: 그 교육의 역할을 가정에서 부모가 담당하게 될 때 자녀에게 돌아갈 복은 그 부모의 말씀에 순종하고 공경하는 경우뿐이다. 부모와 자식이라는 틀로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관계를 유지해야 한다.
6계명: 생명의 존엄성 파괴는 하나님의 존엄성에 대한 도전으로 간주된다. 살아 있다는 것이 오직 여호와의 배려로 된 것임을 애굽에서부터 나와 인도 받으면서 깨달아야 하는 것이다.
7계명: 부부의 사이는 여호와에 의해 마련되었다. 여호와가 제공한 신성한 관계에 그 누구도 함부로 뛰어들어서는 아니 된다.
8계명: 재물의 공급도 그들이 애굽에서 빈털터리였다는 것을 감안해 볼 때 하나님의 구원사역의 한 측면으로 보여진다. 도적질은 하나님의 은혜를 다치게 한다.
9계명: 이스라엘은 다같이 종 되었던 데서 구출 당한 민족이기에 운명을 같이 시작했다는 점에서 그 고유성을 유지시켜 나가야 한다. 거짓은 이웃 속에 또 하나의 적을 만드는 셈이 될 것이다.
10계명: 이웃은 공격의 대상이 아니라 기여의 대상이다. 탐욕이 이웃에게 다가서는 동기가 되어서는 안 된다. 마치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에게 다가서신 정신으로 이웃과 교제해야 한다.
이상의 10계명은 제단에서의 제사정신을 규정하게 하고 이스라엘 전 사회의 규범으로 자리잡는다. 그 어느 한 구석에서도 모두 다 전에는 애굽에서 종살이했다는 겸비함을 표출하지 않는 것이 없게 한다. 종교심의 발로로 피조물 안에 있는 것에 굴복하여 예배하는 행위나 과거의 자기신세를 생각하지 않는 것은 법을 어기고 언약을 어겨 죄로 간주된다.
여기서 이방민족과 이스라엘 민족 사이에 현격한 차이가 나는 것이다. 외형적으로 사회법이 얼마나 우수한가 로 차이 나는 것이 아니라 그 밑바탕에 깔려있는 근본사고의 차이 때문이다. 즉 여호와의 은혜가 등장되지 않는 윤리, 여호와의 돌보심 덕택으로 우리가 살아가고 있다는 인식이 없이 행하는 도덕은 윤리도 도덕도 아니다. 여기에 그 어떤 사회질서 차원에서 도덕이나 윤리관도 보이지 않는다. 소위 종교의 정치화하고는 거리가 멀다. 오늘날 교회와 비교해서 무엇이 차이가 나는가? 아무런 신학적인 근거나 배경 없이 인간의 양심과 사회질서 차원에서 행정해도 여호와와 관계 있는 구원의 기관이라 자청하겠는가?
20:1-3
십계명의 모든 내용은 인간들이 이 지상에서 부대끼며 마주치는 모든 정황을 고려해서 제시된 것이다. 그냥 모세처럼 하나님과 함께 영원히 함께 있다면 도저히 마주치지 않는 그런 상황이지만 모세가 만약에 시내산 밑에서 사람들 속에서 함께 산다면 항상 마주칠 수밖에 없는 상황들이다.
이 십계명은 하나님 본인이 지키라고 주신 계명이 아니라 인간의 거룩과 의가 어느 정도인가를 드러내기 위한 십계명이다. 그리고 이 십계명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어짐으로 드디어 이스라엘은 거룩에 의해 지배 받는 처지에 놓이게 되었다.
여기서 신명기 28:1-3과 그리고 15-19를 보면 이스라엘 백성은 축복 아니면 저주, 저주 아니면 축복이라는 두 속성의 지배 이외에 다른 상황은 상상도 못하게 묶이게 된 것이다. 이것은 이스라엘에게서 자립심을 제거시켜 버린 조치다. 이스라엘은 독자적으로 존재할 자격이 박탈당한 것이다.
이제 십계명 없는 이스라엘은 존재할 수 없다. 처음부터 하나님께서 이런 의도로 이스라엘이라는 나라를 만드신 것이다. 이스라엘을 위한 이스라엘이 아니라 십계명의 취지를 드러내기 위한 이스라엘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위하여 이스라엘이 존재하는 것이다. 만약에 이스라엘을 일반 민족과 같은 것으로 간주해서 공격한다면 이는 이스라엘에 뒤덮고 있는 십계명을 공격하는 것이 되기 때문에 그 민족은 저주를 받는 것이다. 동시에 만약에 이스라엘이 이 십계명에 대해서 외면한다면 이스라엘 역시 자기 하나님으로부터 저주를 받게 되는 것이다.
신약 때는 새 언약으로 축복과 저주를 가름한다. 새 언약 밖에서는 무조건 저주요, 새 언약 안에서는 무조건 축복이다. 이것은 인간의 행함으로 결정되는 기준이 아니고 오로지 예수님의 행하심으로 결정된 사항이다.
마태복음 26:26-28에 보면, 예수님이 주시는 잔과 살은 도저히 거부할 수 없는 방식으로 자기 백성에게 주어진다. 저항할 수 없는 은총으로 작렬해서 적용될 뿐이다. 외면하고 거부한다고 해서 뿌리칠 수 없다.
따라서 왜 신약 시대에 와서 인간의 행함을 묻지 않고 그저 주는가 하면, 이는 율법은 인간이 행해서 복 받으라고 준 것이 아니라 인간이란 원래 저주받을 수밖에 없는 자라는 것을 거룩의 관점에서 폭로하기 위해 준 것이다.
로마서 3:19-20에 보면, 인간은 율법으로는 의로울 수가 없다. 구원은 율법 외에 다른 의가 제공됨으로써 이루어 진다. 그것이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로 공짜로 주어지는 것이다. 이처럼 이스라엘은 십계명에 철저하게 종속된 민족이 될 때가 거룩한 민족이 된다. 그들의 행동이 거룩해서 거룩한 민족이 아니라 말씀이 거룩해서 거룩한 민족이라고 불리는 것이다.
신약 때는 예수님의 의(義)로 말미암아 거룩한 민족이 된다. 이런 이스라엘의 미래를 내다보면서 이스라엘은 애굽 민족 밑에 눌러 앉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비록 히브리민족은 애굽 나라에서 나올 마음이 조금도 없었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런 인간들의 여망을 묵살하시고 모세를 보내어 모세를 따라 하나님이 계시는 곳까지 나오도록 조치한 것이다. 이것은 강제적이고 일방적이다. 바로 우리의 하나님은 이런 하나님이시다.
왜 하나님은 일방적으로 이스라엘을 끌고 오시는 것인가는 2절에 보면, "나는 너를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낸 너의 하나님 여호와로라"라고 되어 있다. 여호와라는 하나님 이름 앞에 하나님이 친히 행하신 일이 붙어있다. 이것은 그 일을 행하신 것과 이스라엘의 존재성이 상관이 있음을 분명히 하기 위함이다. 즉 애굽에서의 종이라는 의식이 함유하고 있지 아니하면 원래 의도했던 그 이스라엘이 아니라는 것이다.
즉 '애굽의 종'이라는 차원에서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다루겠다는 것이다. 비록 '애굽의 종'이라는 신분에서 벗어났다 할지라도 그것은 어디까지 하나님과 더불어 있는 조건 속에서는 성립되는 신분이지 만약에 하나님의 손에서 벗어난다면 항상 애굽의 종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제는 '애굽의 종이 아니다'에 멈추는 것이 아니라 홀로 남으면 '애굽의 종일 수밖에 없는 존재'임을 더욱 확실히 하는 쪽으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데리고 다니겠다는 것이다. 이스라엘은 아직도 '애굽의 종'이 어떠한 처지인지를 제대로 알지 못하고 있다.
애굽의 종이란 애굽의 사고방식에 철저하게 순종해야 비로소 생존이 가능했던 속성을 지닌 자라는 것이다. 하나님은 어떤 식으로 이스라엘을 그 애굽나라에서 빼내어주신 것인가는 사랑이라는 용어가 성립하는 바탕이 있다.
사랑이란 모든 것을 제쳐두고 지독스럽게 그 대상만에게만 집착하고 전부를 거는 행위가 전제된다. 아가 5:8에 보면, "예루살렘 여자들아 너희에게 내가 부탁한다 너희가 나의 사랑하는 자를 만나거든 내가 사랑하므로 병이 났다고 하려무나"라고 되어 있다.
너무 사랑해서 병이 들 지경이기에 결코 그 사랑의 대상을 놓치지 않는다. 사랑으로 구원했다는 말은 하나님에게 있어 이스라엘은 단순한 취미나 취향이 아니라는 말이다. 하나님의 전부를 걸고 시행하시는 작업에 참여했다는 선언이다. 천국을 만드는데 있어 사랑이 동원되었다는 것은 하나님의 전부를 걸고 시작한 일이라는 것이다.
20:3
'나'라고 지칭되는 신이 나오는 반면에 또 '다른 신'이라고 불리 우는 신이 나온다. 신이 하나가 아니고 '여러 개'가 되고 마는 논리 자체가 '최고 자리'라는 신의 속성에 어긋나는 것이 아닌가? 지금 이스라엘 백성들은 약속의 땅으로 가야만 하는 입장에 놓여 있다. 그곳에 가면 온갖 민족이 살고 있으며 각 민족마다 자기 민족이 신으로부터 유일하게 인정받은 최고 민족이라는 것을 기치로 내세운 신들을 만나게 된다.
즉 신이 많다는 것은 실제로 신들이 많은 것이 아니라 인간의 죄악 된 품성으로 인해 이 세상에는 각종 신들이 등장되고 있음을 현실로 받아들여라 는 이야기다. 그렇다면 그 많은 신들 중에 어느 신이 참된 살아있는 신이겠는가?
2절에 보면 "나는 너를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낸 너의 하나님 여호와로라" 라고 되어 있다. 즉 이스라엘 하나님은 내용을 갖고 있다는 것이다. 그 내용은 바로 인간의 능력으로 도저히 있을 수 없거나 이룰 수 없는 내용이다.
하기 힘든 일이라는 말이 아니라, 인간들이 생각할 필요조차 느끼지 않았던 일을 하나님은 자발적으로 만들어서 일을 시행했다는 것이다. 인간들이 일을 하다가 버겁고 어려워 할 때, 하나님께 부르짖으니 하나님이 도와주시는 식이 아니라, 인간들의 요구가 뭐였든지 상관없이 하나님의 원래 하고 싶었던 일은 자기 백성을 통해서 시행해 버린 것이 되고 그 결과로서 나타난 것이 '이스라엘의 애굽 탈출' 사건이었다는 말이다.
즉 사람과 협상하지 않는 하나님이라는 말이다. 사람을 배제하시고 일하시는 하나님이다. 그것이 바로 '언약의 하나님'이다. 참된 신과 가짜 신은 이 '언약'으로 결정된다. 성경에서 말씀하시는 참된 하나님은, 인간들의 종교적 욕구에 부합되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인간 심판을 전제해서 활동하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그 예를 들어보면 노아의 경우다.
창세기 6:18에 보면, "그러나 너와는 내가 내 언약을 세우리니 너는 네 아들들과 네 아내와 네 자부들과 함께 그 방주로 들어가고"라고 되어 있다. 즉 노아가 구원받은 것은 순전히 '언약' 때문이고 그 '언약' 아이디어는 노아의 발상이 아님을 명심해야 한다.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나올 때도 마찬가지다. 출 4:5에“또 가라사대 이는 그들로 그 조상의 하나님 곧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 여호와가 네게 나타난 줄을 믿게 함이니라 하시고"라고 되어 있다.
그리고 다시 출애굽기 6장 2절에서 5절에 '나의 언약을 기억하노라' 라는 말을 기억해야 한다. 즉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소원을 들어주는 하나님이 아니라 자신의 언약을 완수하기 위해서 활동하시는 하나님이다. 그 언약이 신약에 와서는 골로새서 1:13에 "그가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사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으니"라고 되어 있다. '흑암의 권세'라는 것이 그 권세 안에 놓인 사람이 자력으로 빠져 나올 수 없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탈출 할 때, 결코 그들이 '여호와'라는 이름을 외쳤다고 구원된 것도 아니요, 홍해 바다 한 가운데를 친히 걸었다는 것이 장점으로 해서 구원받은 것이 아니다. 즉 구원에 동참하게 되는 그 동참 자체가 결코 자기 선행의 일부가 될 수 없다는 말이다. 왜냐하면 모든 것이 '어린 양'의 피로서 그 피에 동참하지 않는 모든 인간을 다 죽이고자 하는 심판성이 배경으로 깔린 채로 오직 언약 성취용으로만 구원되었기 때문이다.
비록 이스라엘 백성이라도 '어린 양의 피'를 거부하면 구원될 수 없다. 그 피가 곧 '언약의 피'다. 거기에 참여시켜서 그래서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구원하셨다. 이런 내용을 지녀야만 참된 신이다.
호세아 6:6에서 하나님은 다음과 같이 당부하신다.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 그 당시 사람들이 '여호와'라는 하나님의 명칭을 초청하고, 그리고 제사를 정기적으로 드려도 하나님 보시기에는 바알 종교의 재탕으로 보신 것이다.
그 이유는, 그들이 자력으로 구원될 수 없는 죄인임을 인정하지 않는 상태에 놓여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자력으로 구원 못됨'은 신약에 와서 "예수님"의 등장으로 확실해졌다.
요한복음 17:3에 보면,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라고 되어 있다. 인간들의 자기 구원에 대한 열망과 욕망은 자신에게는 무슨 선함 쪼가리라도 기어이 찾아내려고 시도하기 때문이다. 이것으로 인해 인간은 영원히 저주받아야 마땅하다. 따라서 오직 하나님께서 자진해서 보내신 예수님의 공로만을 의지하는 자가 참된 하나님을 아는 자다.
20:4-6
하나님께서 왜 인간이 그 자신을 위하여 형상을 만들지 말라고 하신 핵심은 '자기를 위한' 그 어떤 행위는 반드시 '하나님을 위한 행위'를 배격하게 되어 있기 때문에 그렇다.
인간을 위한다는 일은 항상 하나님을 배척하는 일과 동일하다. 왜 매사가 이런 식으로 나타나는 지를 인간은 도무지 모르고 있다. 왜 하나님께서 형상을 만들지 말라 하는지를 모르고 있다.
그 원인은 바로 모세가 하나님을 만났을 때 드러난다. 출애굽기 3:1-3에 인간들은 하나님의 형상을 생각할 때는 주위에 보이는 자연물의 형상을 다듬은 이미지를 가지고 신에게 접근하려고 한다. 그러나 정작 하나님은 아예 인간을 소멸하시는 하나님으로 나타난다. 이것이 하나님의 형상이다.
신명기 4:23-24에 보면, 하나님은 인간이 생각하는 모든 형상을 소멸시켜 버리고자 작심을 하고 나타나신다는 것이다. 인간이 생각하는 하나님이라면 하나님은 늘 숨어 계셔서 들키지 않는 하나님으로 존재하신다.
오늘날에도 하나님은 소멸하시는 불이요 숨어 계시는 분이다. 왜 하나님은 인간에게 '소멸하는 불'이 되어야 하는지 그 이유가 드러나 버렸다. 그것이 바로 십자가 앞에서이다. 십자가 앞에서 인간은 비로소 완벽하게 죄 그 자체임이 들통나 버렸다. 왜 하나님께서 인간을 '소멸해 버리려고 하시는지' 그 이유가 오로지 십자가 앞에서만 밝혀진 것이다.
이로서 인간은 선악체계라는 잘못된 부속품이 문제를 일으켰다는 것도 아울러 밝혀지게 된다. 부속품을 교체해야 한다. 십자가에서 흘러나오는 그 용서하시는 피로 교체되어야 한다. 잘나고 착해서 교체해주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의로 교체해 주시는 것이다. 스스로 자신을 정죄하지 말고 늘 주님의 십자가 앞에서 죄인 됨을 고백해야 한다. 십계명에서 약속하신 복은 오직 예수님을 믿음으로 얻어지는 것이다.
20:7
인간이란 하나님을 만나면 반드시 죽는다는 사실과 또 다른 하나는. 그러면서도 하나님께서는 일을 맡긴 자가 죽지 않으면서도 그 사람에게 해당되는 작업은 완수해 내는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이름을 앞장세우고 하나님의 일을 대리하는 분이 이 지상에 등장하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따라서 그 '하나님의 이름'이라는 분은, 인간과 상대하시면서 사람을 위험에 빠뜨리지 않기 위해서라도 사람보다, 그리고 그 어떤 사람보다 더 낮은 모습으로 등장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하나님께서 의도하신 모든 일은 고스란히 남김없이 다 수행해야 하는 것이다.
이렇듯 인간과 관여하시는 하나님이 바로 '하나님의 이름'이다. 그런데 막상 하나님께서 '이름'을 앞장세우면서 인간 세계에 등장해 버리자, 인간들은 그 '이름'되시는 분은 마치 본디 자기와 같은 수준에 속한 대수롭지 않는 분인 것처럼 간주하게 된다.
마치 자신들이 천하고 세속적인 것처럼 '하나님의 이름'으로 오시는 분도 그렇게 자신들처럼 마땅한 천하고 세속적인 분이라도 되는 것처럼 여긴다. 사람이란 같이 천박해야 이야기가 되고 대화가 통하는 법이다. 한쪽이 너무 고상하면 대화자체가 성사가 되지를 않는다.
사실 신의 이름이란 꼭 이스라엘 민족뿐만 아니라 다른 민족에도 고유의 신들이 다 있다. 그런데 그런 자기 민족의 신을 과감히 버리고 남의 민족의 신은 여호와 하나님을 참된 신으로 간주해야만 이유가 여호와 하나님은, 이스라엘 민족을 애굽에서 구출해냄으로서 기존의 모든 민족의 신과는 도무지 비교도 되지 않는 차원에 속한 참된 신임을 충분히 드러내셨다고 보고 있다.
이러한 정신은 이 이후에 계속된다. 시편 79:6에 보면, "주를 알지 아니하는 열방과 주의 이름을 부르지 아니하는 열국에 주의 노를 쏟으소서"라고 되어 있다. 즉 주의 이름이 자기 백성들에게는 죽음과 심판을 초래하는 이름은 아니지만 다른 민족에게는 멸망시킬 수 있는 권한을 지니고 있는 하나님의 이름이라는 것이다.
이 점은 신약에 와도 예외가 아니다. 로마서 10:13에 보면,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라고 되어 있다. 만약 주의 이름을 안 부르게 되면 멸망 받는다는 것이다. 이런 기능이 바로 '하나님 이름'이 지닌 기능이다.
인간과 관계하시는 하나님이신 '하나님의 이름'은 이런 인간들의 생각을 분쇄하면서도 그 현장에 하나님 본연의 자기 계획을 완수할 목적으로 인간에게 찾아드신다. '하나님의 이름' 안에는, 하나님과의 만남에서 죽을 수밖에 없는 인간을 살려내시는 그런 기능을 함유하고 있다. 만약에 이러한 '하나님의 이름'이 지닌 기능을 삭제하거나 무지한 채 그냥 하나님의 이름과 주의 이름을 남발한다면 그것이 곧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는 일이 된다.
어떤 이들은 주장하기를, 사람을 용서하는 것은 '주의 이름'이 하실 일이지만 그 용서하시는 이름을 부르는 것은 어디까지나 인간의 몫이라고 한다. 바로 이런 것들이 주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는 짓이다. 왜냐하면 주의 이름은 인간의 모든 행함의 능력을 배제하고 오직 '하나님의 이름'만의 능력으로 자신의 약속을 수행해 나가시는 것이다. 그 증거가 바로 사도행전 3장에 보면 나오는 앉은뱅이의 이야기다.
돈과 먹을 것을 구걸하는 이 걸인에게 베드로와 요한은 "베드로가 가로되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곧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으라" 사실 은과 금이나 주게 되면, 그것으로 양식을 사먹을 수 있을 것이다. 즉 자기 행동이 가미될 수 있는 여지가 있다. 그러나 '주의 이름'을 주게 되면 그것으로 어디다 써먹을 수가 있단 말인가?
그런데도 베드로와 요한은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주겠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주의 이름이 아예 그 앉은뱅이의 마음까지 장악해서 정복해 버리는 능력으로 작용하기 때문이다.
즉 '주의 이름'을 믿고 안 믿고도 인간이 어찌 할 수 있는 사항이 아니라 주의 이름의 역사하느냐의 여부로 결정된다. 바로 이렇듯 주의 이름이 직접 지배하고 통치함을 받은 자만이 이 세상의 모든 신을 제쳐놓고 오직 주의 이름을 거론하고 의지하며 살게 된다. 인력으로 안 되는 일이다. 앉은뱅이는 고백하기를 결코 베드로나 요한이 자기를 낫게한 것이 아니라 지금 눈에 보이지 않는 주님께서 자신을 직접 이르켰다고 한다.
20: 8-11
하나님께서 특별한 날을 통해서 보여주시겠다는 것은 창세기 1장의 창조성을 그대로 이스라엘 내부에서 이어나가시겠다는 것이다. 창세기에 나오는 그 창조 정신을 포기하지 못하겠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홀로 이 세상을 창조하셔 놓고서 손을 떼버리신 것이 아니다. 창세기 1장에서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만드신 이유와 목적에 대해서 분명히 하셨다. 그것은 인간을 복 주기 위함이다.
자신이 만든 피조물이기에 책임지고 복을 주어 이 자연세계에 충만케 하겠다는 것이다. 조건은 원래 하나님께서 천지 창조를 하신 그 정신에 부합할 경우에 한해서 그런 인간들만 가득 차게 만드시겠다는 것이다. 그 조건은 바로 하나님의 형상이 유지되어야 한다는 조건이다.
하나님은 인간을 보실 때 그냥 사람들이 자신들을 바라보는 식으로 보시지를 않는다. 하나님의 형상이 그대로 유지되느냐를 따지시면서 사람을 보신다. 하나님의 형상이 사라진다면 복이 아니라 그 대신 파멸만 있을 뿐이다. 하나님의 창조하신 세계에서 더 이상 살 자격이 없는 존재이기 때문에 그렇다.
이렇게 볼 때에 하나님은 축복을 축복답게 유지하기 위해서 필수적으로 심판과 저주를 병행하심을 알 수 있다. 이렇듯 하나님의 창조의 취지는 그 어떤 경우에도 양보 없음이 분명하다.
그런데 하나님의 형상을 지닌 인간에게 축복하면서 그 축복의 내용을 보면 창세기 1:28에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라고 되어 있다.
여기서, '땅을 정복하라, 그리고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라는 내용이 나온다. '다스리라' 는 말은 반드시 다스리게 된다는 선포이다. 사명을 감당하라는 말이 아니라 반드시 이런 식으로 존재하고 활동하게 된다는 것을 뜻한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자에 한해서 주어진 축복이다. 그 외는 아니다.
안식일에 해당되는 복이란, 남들에게 생명을 제공할 수 있는 힘을 말한다. 따라서 참으로 인간이 안식일을 지켰다면 안식일을 지키지도 못하는 타인에게 영생을 제공할 수 있어야 하는데 그렇게 하실 수 있는 분은 오로지 신약의 예수님뿐이다. 따라서 그 누구도 안식일을 제대로 지켰노라고 말 할 수 없는 입장이다.
만약에 모든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을 상실했다면 그 때는 이 축복의 수혜자가 될 수 없다. 만물을 다스리고 정복할 일을 못하게 된다. 오히려 반대로 하나님의 형상이 아닌 주제에 만물의 통치자로 나서게 될 것이 분명하다. 이것이 하나님의 형상되시는 분이 하시는 일을 되레 방해하고 거역하는 일로 실시된다.
창세기 1;28 의하면 하나님께서 친히 만드신 이 세상은 그냥 홀로 스스로 굴러가는 것이 아니라 뭔가 통치자가 있어 그 통치자로부터 다스림을 받게 되는 그런 구조로서 움직여 나간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문제는 그 통치자가 반드시 '하나님의 형상'을 입은 자에만 해당된다는 것이다. 창세기 1:26에 보면, "하나님이 가라사대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로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육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라고 되어 있다.
하나님의 형상이 어떻게 해서 '다스림'을 가능케 할까? 로마서 8:18-23에 보면, 피조물의 요망사항이 여기에 나온다. 그것은 하나님이 아들들이 나타나는 것이라고 했다. 그 하나님의 아들들의 특징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주어진 그 영광성이다.
히브리서 1:3에 보면, "이는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시요 그 본체의 형상이시라 그의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붙드시며 죄를 정결케 하는 일을 하시고 높은 곳에 계신 위엄의 우편에 앉으셨느니라"라고 되어 있다.
여기에 보면, '만물을 붙드시는' 분은 따로 계시다는 것이다. 이 분 외에 다른 자들은 만물을 붙들 수 있는 자격이 없다. 인간이 어떻게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느냐가 관권이 아니라 인간이 누구에 의해서만 새로운 피조물이 될 수 있느냐에 초점이 있다.
골로새서 3:10에 보면, "새 사람을 입었으니 이는 자기를 창조하신 자의 형상을 좇아 지식에까지 새롭게 하심을 받는 자니라"라고 되어 있다. 이렇게 성도가 새 사람이 될 수 있는 것은 '자기를 창조하신 자의 형상' 때문이다. 이 형상을 내다보면서 안식일은 다시 움직이기 시작한다.
이제 그 분에 의해서 안식일이 완성되었기에 더 이상 오늘날에는 안식일로 인한 비난이 있어서는 안된다. 골로새서 2:14에 "우리를 거스리고 우리를 대적하는 의문에 쓴 증서를 도말하시고 제하여 버리사 십자가에 못 박으시고 정사와 권세를 벗어버려 밝히 드러내시고 십자가로 승리하셨느니라 그러므로 먹고 마시는 것과 절기나 월삭이나 안식일을 인하여 누구든지 너희를 폄론하지 못하게 하라 이것들은 장래 일의 그림자이나 몸은 그리스도의 것이니라"라고 되어 있다. 주님 덕분에 안식의 복을 누리는 것을 믿게 된 자가 참 신자이다.
20:12
부모란 사실 오늘날 우리들의 행동하는 그 모든 행위가 앞당겨 시행했고, 그리고 그 행위로 통해서 구원의 하나님으로부터 간섭 받아 온 분들이다. 따라서 부모의 신앙을 생각지 않고 하나님을 생각한다는 것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이 점은 부모가 자식들을 앞에 두고 마땅한 효도를 강요할 입장에 놓여있지 못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왜냐하면 자식의 구원은 결코 이 부모의 훈계에 의해서 결정되지 않음을 본인들이 자신의 부모 앞에서 충분히 습득한 체험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공경 받을 부모의 자리는 비게 된다. 십계명에서 하나님께서 왜 부모공경을 요청하는지 알아야 한다. 출애굽기 20:2절에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부름을 받은 그들은 사실 여호와를 알기 전에는 '애굽의 종'이었다는 것이다. 이것은 누구든지 하나님에 의해서 '아들 삼기'에 포함되지 않으면 여전히 '애굽의 종'으로 살아갈 신분 자들이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의미하는 '부모'란 자식을 그냥 '애굽의 종'으로 방치해 두는 자가 아니라 본인부터 여호와 하나님으로 인해 이미 '하나님의 아들' 된 자에 한해서 요구하는 말씀이다. 이것은 누구나 자동적으로 '하나님의 아들'이 될 수 없음을 명백히 하겠다는 말씀이다.
사람이란 '애굽의 종'이 되는 것은 하나님의 법으로부터 저주받을 대상이 되는 것이 지극히 정당하고 당연한 신분이다. 그런데 유독 하나님의 아들이 될 자들만이 그 '애굽의 종'에서 '하나님의 아들'로 신분이 달라진 것이다.
바로 이 점에 개입하신 분은 혈육의 부모도 아니요, 신앙의 아버지라는 선조들도 아니다. 오로지 하나님 아버지 밖에 없다. '애굽의 종'이라는 신분은
갈라디아서 4:1-4에 잘 나와 있다. 오늘날 자연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 아님을 분명하게 보여주는 증거가 바로 그들이 율법의 저주의 대상자로서 살아간다는 데 있다. 왜냐하면 그들은 날 때부터 모친의 죄 중에 태어났기 때문이다.
그 예가 바로 다윗의 경우다. 다윗은 자신의 살인죄와 간음죄로 인해 자신이 모친의 죄 중에서 태어났음을 알았다. 그가 구원된 것은 하나님의 자비의 신이 임해서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음을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다.
바로 이처럼 그 누구도 부모가 신앙인이라고 해서 자동적으로 신앙인 되는 것이 아니라 부모를 신앙인으로 만들어주신 그 하나님의 성령이 아니고서는 누구나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고 부를 수가 없다.
흔히들 말하기를, '천지를 지으신 하나님이 인간을 만드셨기에 인간이라면 누구나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고 싶은 의식이 있다'고 하지만 이렇게 해서 불리는 그 하나님은 바른 아버지 관계가 아니다.
왜냐하면 반드시 성령을 받아야 하는데 성령이 오는 이유가, 현재 자신의 입장이 율법에 억매인 종의 신분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참으로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알고 있는 사람은, 자신은 율법에 의해 저주받은 종에 불과함을 자인하는 사람에게만 국한 된다.
바로 이러한 사실을 이미 성령을 받아서 아는 부모라면 자식에게 다음과 같이 충고한다. "히브리서 12:7-13에 보면, 징계가 없으면 우리가 사생자요 참 아들이 아니다 는 것이다"라는 사실을 일러준다. 왜냐하면 부모가 이미 하나님으로부터 많이 당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에베소서 6:1-4에 보면, "자녀들아 너희 부모를 주 안에서 순종하라"고 하는 것이다. 즉 부모의 입장에서 자신의 영의 아버지가 이런 식으로 우리를 구원했음을 자식에게 알려주라는 말이다. 바로 이런 부모를 주 안에서 공경해야 한다.
20:13
가인은 제사하면서 원했던 것이 있었다. 하나님으로부터 의로움을 받겠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러한 가인을 노리는 게 바로 그런 사고방식, 즉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지는 약속이 없이 의로워지려는 의도를 이용하는 세력이 있었으니 그것이 바로 악이었다. 곧 악마였다.
살인을 하든 아니하든 항상 약속과 상관없는 일을 하게 되면 그것이 곧 죄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약속 밖에 존재하는 자들은 약속으로부터 보호를 받지를 못하고 항상 죄의 하수인 노릇을 하게 되어 있다. 거기에 비해서 아벨은 비록 자신의 목숨은 하나님으로부터 보호받지를 못했지만 죄와 상관없는 약속의 사람이 되었다는 점에서 그는 약속의 보호를 받은 것이다.
히브리서 11:4에 보면, 인간이 어떻게 의인이 되느냐 하는 것이다. 그는 결코 사람을 상대한 것이 아니다. 늘 마음속에 하나님의 약속을 생각했고 그 약속을 믿음으로서 의인이 된 것이다.
즉 "살인하지 말라"의 성취는 '살인 안 함'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 것이다. 그렇다면 왜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 것이 '살인 안 함'의 완성이 되는 것일까? 사람이란 스스로 자신을 변화시킬 능력은 없다.
이미 인간은 처음부터 하나님의 약속을 증거하기 위해 존재하는 피조물이다. 모든 것은 약속의 구현체 되시는 예수님을 위하여 그 분으로 말미암아 이 세상에 태어난 자들이다. 아담이라든지 하와라든지 모두 진작 죽어야 되는 인물들이다.
하지만 그들은 장차 오실 예수님의 모형으로서 존속되어야 하는데 그들의 후손에는 두 계통의 인물들이 등장하게 된다. 사실 그 두 계통의 관계를 통해서 약속은 그 본질을 지상에 펼치게 된다. 그 약속 안에는 악이 장악하고 있는 세력도 나오고, 의와 거룩에 속한 세력도 나온다. 이 두 세력의 다툼이 인간들을 통해서 보여지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살인하지 말라"는 말씀은 사실 하나님의 약속을 훼손하기 위한 살인을 이미 악마 쪽에서 작정하고 있음을 폭로시키는 말씀이다. 그 어떤 인간도 살인법으로부터 자유로운 사람은 없다. 고의든 우발적이든 누구나 살인을 저지르고 자기 행위에 핑계와 변명으로 자신을 커버하려고 덤벼들게 된다.
살인에 대해서 그토록 분개하는 자도 막상 자기 자신이나 가까운 식구가 살인죄를 행하게 되면 두둔하는 쪽으로 태도가 달라진다. 즉 사람은 자기 의를 목적으로 살아가는 본성이 항상 나타나게 되어 있다.
사실 전적으로 인간 신체를 죽여서는 아니 된다는 것은 아니다. 실제로 이스라엘 내부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법에 위배했다는 이유만으로 죽어나갔다. 그것은 거룩한 법이야말로 사실 모든 인간을 죽인다는 점을 명백하게 하기 위함이다.
살인 안 한 자는 하나님을 만나 뵐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인간들이 생각해 놓고 있는 선과 악의 기준은 하나님이 제시한 기준에 근처도 안 갔으며 도리어 하나님의 약속을 무용지물로 만드는 주동자로 활약하고 있을 뿐이다.
즉 '살인 안 함', '죄 안 지었음'을 무기로 삼아서 하나님의 약속을 공격하고자 하는데 목적을 두고 살아가고 있다. 바로 이런 점 때문에 하나님의 약속 차원에서의 '살인'이라는 사건이 발생된다.
즉 죽일 이유도 없는데 단순히 하나님으로부터 사랑 받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그 대상자를 살해하고 싶은 충동이 유발된다. 즉 "나처럼 스스로의 의로움으로 살지 않고 전적으로 하나님의 긍휼하심만 의지하느냐" 하면서 공격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