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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

광주 10월 23일 디모데후서 4장 14절 분리 [신자(따로 새로 만드심) vs 떠나는 자(결핍채우기)]강의디모데후서

광주 10월 23일 디모데후서 4장 14절 분리 [신자(따로 새로 만드심) vs 떠나는 자(결핍채우기)]

이름 : 관리자(IP:124.59.85.46)

091023 신자(따로 만드심) vs 떠난 자(결핍채우기)

관리자(IP:124.♡.85.46)

09-10-24 1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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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리자(IP:124.♡.86.6)

09-11-24 15:08

광주091023a디모데후서4장14절a

광주 강의(09. 10. 23) 54-1

디모데후서 4장 14절을 보겠습니다.
“구리 장색 알렉산더가 내게 해를 많이 보였으매 주께서 그 행한대로 저에게 갚으시리니 너도 저를 주의하라. 저가 우리 말을 심히 대적하였느니라.”

이 구리 장색 알렉산더가 전에 신자였습니다. 흔히 교인이라고 하지요. 9절에도 보면 “데마는 이 세상을 사랑하여 나를 버리고 데살로니가로 갔고, 그레스게는 갈라디아로, 디도는 달마디아로 갔고”

이들이 전에는 신자였는데 이제는 신자 아니라는 말이지요. 그래서 사도바울을 떠나면 신자가 아니고 사도바울을 안 떠나면 신자라고 정리할 수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사도바울에게 성령이 함께 있고 주님이 함께 있기 때문이지요.

그렇다면 여기서 사도바울이 뭐라고 이야기했기에 사도바울을 떠나면 그게 곧 하나님께 버림받은 사람이 되고, 사도바울을 주의 종으로 인정하면 그 사람이 계속 신자가 되는 이유가 뭐냐? 쉽게 말해서 신자가 뭐냐는 것입니다.

신자란 믿는 사람인데, 여기서 더 나가면 무엇을 믿는 사람이냐? 예수님께서 그리스도의 종 사도바울을 통해서 전해준 그 내용을 믿는 사람이 신자가 되고, 안 믿으면 불신자지요. 간단하지요? 그런데 간단한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사도바울이 전해준 말씀을 여기서 어떤 사람이 ‘믿는다.’ 또는 ‘안 믿는다.’를 결정하는 것이 사도바울이 전했던 그 내용, 하나님의 계시가 이 사람에게 영향을 줘요. 즉 성령이 임하면 그 말씀을 믿게 되고, 성령을 안 받으면 아무리 사도가 전해도 안 믿습니다.

다시 반복합니다. 신자는 어떤 사람인가? 신자란 예수님께서 사도바울을 통해 전하는 말씀을 믿는 사람이 신자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사도바울을 통해서 전하는 내용이니까 이 사람은 사도바울이 없었으면 몰랐던 내용이죠. 사도바울을 안 만났으면 몰랐던 내용인데 사도바울을 통해서 계시를 받는 순간 이 사람은 신자가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이 사람이 신자가 되는 것은 이 사람의 마음가짐에 있었던 것이 아니고 사도바울이 전해준 그 말씀 내용이 이 신자를 움직였지요. 여기서 우리가 지금까지의 사고방식을 수정할 필요가 있는데 그것이 뭐냐 하면, ‘말씀만 하시면 제가 믿겠습니다.’ 라는 식의 신자는 없다는 것입니다.

그 말씀이 나로 하여금 새사람 되게 했습니다. 그 새사람은 뭐냐? 내가 새사람 되고 싶어서 된 것이 아니고 말씀을 듣는 순간 그 말씀이 나로 하여금 새사람 되게 했습니다. 그러니까 이것은 옛날 내가 있고, 새로운 내가 있는데, 옛날 나와 새로운 나의 차이점이 뭐냐? 옛날 나는 ‘내가 믿겠습니다.’ 라고 주장하고, 새로운 나는 ‘말씀이 나로 새사람 만들었습니다.’ 라고 주장합니다.

그렇다면 새사람이라고 하는 것은 사도바울의 말씀(성경말씀, 하나님의 말씀 다 같은 말입니다.)을 듣기 전까지는 옛사람이 상상도 못하는 것입니다. 들어본 적도 없는 말씀을 어떻게 상상합니까? 아프리카에 있는 토인에게 ‘혹시 명성황후에 대해서 믿습니까?’ 라고 하면, 무슨 말을 하는지 모릅니다. 그 사람은 아프리카에서 타잔처럼 살아가고 있는데, 우리나라 옛날 고전에 나오는 명성황후를 어떻게 알겠습니까?

그러면 ‘명성황후는 이렇고 이런 사람입니다.’ 라고 하면, ‘아, 그렇군요. 믿습니다.’ 이렇게 되지요. 그래서 그 사람이 명성황후를 믿는 사람이 되었다는 말은, 전의 사람이 상상을 했습니까, 상상 못했습니까? 상상을 못했지요.

그래서 성경에 보면 ‘처음 듣는 이야기네요.’ 라고 하는 겁니다. 누가? 새 신자가. 새로운 피조물이 ‘야, 이건 처음 듣는 이야기입니다. 내가 어떻게 이걸 믿게 되었지? 내가 신자 된 것은 그 말씀이 옴으로 내가 딴사람이 되었습니다.’ 라고 할 때, 그 사람이 새로운 신자가 되는 거예요.

그러면 어떤 사람이 신자라고 우기면서 사도바울을 떠난 사람이 있어요. 그 사람은 왜 떠났느냐 하면, 그 사람은 말씀에 의해서 새사람 된 것이 아니고, 말씀가운데 자기가 납득되는 것의 일부를 뽑아내서 지식으로 갖고 있는데, 사도바울이 ‘옛날 사람은 신자가 아니다’는 말을 듣고 이 사람은 화를 냅니다.

사도바울을 떠났던 사람의 특징이 뭐냐 하면, 말씀을 사랑하는 사람이 아니고 ‘나는 똑똑하기 때문에 성경 말씀도 이해할 수 있어.’ 라고 자기 똑똑함을 계속 유지하려고 하는데, 이 사람은 결국 말씀 중심이 아니고 자기중심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결국 자기본색대로 언젠가는 떠날 수밖에 없습니다.

씨 뿌리는 비유에 이런 말씀이 나오잖아요.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에 처음에는 좋아하다가 환란이 오고 세상적인 유혹이 오니까 얼른 말씀을 버리고 옛날 자기로 돌아가잖아요. 그 옛날 자기로 돌아가는 사람의 특징이 뭐냐 하면, 처음 말씀을 들었을 때에는 말씀에 관심이 있다가 돌아갈 때는 항상 나에게로 돌아갑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말씀과는 끊어진 거예요.

그러면 그 사람이 전에 말씀을 알았던 것은 자기를 포기하지 않은 상태에서, 말씀 중에 신기하고 괜찮은 것을 뽑아서 자기가 자기를 만들어가면서 스스로 자기를 신자로 우기는 거예요. 제가 보기에는 신자가 아니고 ‘교양인’인데.

기독교를 앎으로써 교양이 더 쌓이고, 질적으로 품질이 더 우수한 인격체로 성장하려는 노림수가 있지요. 신자는 ‘말씀이 나를 만들었습니다.’ 주체가 말씀이고, 하나님이고 나는 하나님의 작품이 되는 사람이 신자인데, 교양인은 자기가 자기의 작품이고 그것을 위해 말씀이 필요하다 싶어서 몇 가지를 잡아당긴 거예요. 이문열, 김동리 이런 사람들이 대표적 인물입니다.

기독교에 대해서 연구했어도 결국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고, 기독교에 대해서는 잘 아는데 예수님은 믿어지지 않는 겁니다. ‘기독교에 대해서 잘 안다. 하지만 나는 나를 믿는다.’ 이렇게 되는 겁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사도바울이 말하는 신자가 뭐냐? 방금 신자가 아닌 사람을 제가 이야기했는데, 즉 사도바울을 떠난 사람에 대해서 이야기했는데, 사도바울을 주의 종으로 알았던 진짜 신자는 어떤 사람인가? 신자는 완료된 존재가 아니라 말씀이 만들어서 이끌어가는 과정 속에 있는 인물입니다.

신자가 아닌 사람을 쳐다보면서 뭘 느끼느냐 하면, 옛날 나를 느끼고, 또 달리 만들어져 가는 또 하나의 나가 있음을 압니다. 신자는 이 두 개의 나를 익히 아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서 만들어져 가는 어떤 인물이 바로 ‘내 겉 사람은 후패하지만 내 속사람은 날로 새롭도다(고후4:16).’ 할 때, 이 새로움에 내가 관여할 수 있습니까? 없지요.

내가 관여할 수 없음이 신기합니다. 그러니까 자기가 자기를 보면서, 내 몸이 내 몸이 아닌 거예요. 이것은 주인이 따로 있어서 나를 관리하는 주님의 솜씨를 보면서 내가 좋아합니다. 내가 나를 보면서 ‘너는 참 좋겠다. 관리하시는 분이 있어서.’ 이런 생각이 듭니다. 이처럼 내가 갈라지는 거예요. 자아의 분열이 일어나는 겁니다.

그런데 불신자는 무조건 끌어당기는 거예요. 성경에 나오는 온갖 지식을 나의 것으로 삼으려고 합니다. 그래서 처음도 나만 내세우고, 중간도 나를 내세우고, 끝까지 자신을 사수해야 되는 거예요. 시집보낸 딸을 이제 내 품에서 놓아주는 것 같은 그런 자기 자신을 편안하게 놓아주는 그런 자아가 없어요.

제발 여러분 자신을 꼭 묶어두지 말고 편하게 놓아주세요. 예수님이 자신이 다루시는 새로운 피조물을 여러분이 붙들지 마시고, 어디까지 날아가는지 지켜만 보세요. 그러니까 모든 욕은 우리가 다 받고(우리는 죄인이기에 모든 욕을 다 받아야 합니다.) 그런 가운데서 떠나는 것은 두둥실 떠나는 겁니다.

우리가 우리 자존심을 위해서 자신을 붙잡지 마시고 주님 만드신 작품의 자아를 붙잡지 마시고 그냥 내 놓으세요. 그럴 때 날아가는 새로운 피조물은 주의 말씀으로 거룩하게 만들고, 여기 남아있는 옛 사람은 죽어 마땅하고. 왜? 날마다 죄만 지으니까. 겉사람은 후패하고 속사람은 우리에게서 벗어나서 훨훨 날도록.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이 속사람은 악마의 어떤 저주와 비난도 해당되지 않고 축복된 나라로 날아갑니다. 우리의 옛 사람은 그냥 이 땅에서 시들고 병들어 죽고. 그렇게 되어야 합니다. 이런 분리가 발생되는 겁니다.

우리 안에 우리의 속사람이 있는데(이것은 점선으로 표시하겠습니다.) 다시 이야기합니다. 우리는 우리밖에 없었는데 갑자기 하나님의 말씀이 날아왔다. 진리의 새가 날아와서 우리 속에 씨앗을 뿌려서 말씀의 자식을 새로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난 후에 점점 분리가 되지요. 이것을 제가 설명하려고 합니다.

우리의 옛 사람이 갖고 있는 것이 뭐냐 하면, 천국관이 있습니다. 이것을 해야 성경 전체가 설명이 됩니다. 그런데 말씀이 진짜 와서 옛 사람에서 빠져나올 때, 이 때 이 새사람이 가는 천국이 같겠습니까, 틀리겠습니까? 틀립니다. 우리의 옛 사람은 악마에 매여 있었기 때문에 이 천국관은 누구 중심이냐 하면, 바로 나 중심의, 나의 우수함을 계속 보장해 줄 수 있는 어떤 나라. 즉 선악과 중심의 나라입니다.

선악과는 자기의 선한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악을 불러들입니다. 내가 선인지 아닌지를 알기 위해서 일부러 악을 불러와야 돼요. 그래서 내가 지은 악에 대해서 내가 심하게 반성을 해야 돼요. 이렇게 반성하는 순간 나는 졸지에 선한 사람이 됩니다. 이것이 바로 성령을 받지 못한 사람들의 상식이고 교양입니다.

내가 얼마나 착하고 의로운지, ‘이러한 것은 나쁜 짓이라고 내가 나를 혹독하게 꾸중하고 있어. 그러니까 나는 전체적으로 봐서 내가 얼마나 선하냐?’ 이렇게 됩니다. 자식이 나쁜 짓을 할 때 부모가 그 자식을 호되게 꾸짖는 그 순간 비로소 그 부모는 의롭게 행한다는 것을 확인하는 순간입니다.

여자는 하루에 3만 마디 말을 해야 직성이 풀린다는데, 가정주부가 집에만 가만히 있으면 말할 상대가 없어요. 그러다가 저녁에 남편이 들어오면 들어오는 순간부터 남편의 행동 하나하나(신발 벗는 것부터 시작해서) 잔소리를 하는데, 그렇게 남편의 잘못을 지적함으로써 상대적으로 누가 의롭게 되는가 하면 자신이 점점 더 훌륭한 주부가 되어가는 거예요.

남편이 술 먹고 들어와서 행패를 부리는데, 아내가 그 남편에게 얻어맞는 순간 아내는 자신이 천사라고 착각을 합니다. 마치 십자가의 길을 가는 것처럼 생각하지요. 이게 바로 옛 사람입니다. 이 옛 사람이 어디에 많은가 하면 교회에 많아요. 교회에 지옥 갈 사람이 많은 거예요. 교회 밖에는 지옥 가는 줄도 모르고 지옥 가는 사람들이고.

제가 아까 말씀드렸지요. 옛 사람이 천국관을 갖고 있는데 그 천국은 천사를 닮아야 갈 수 있어요. 신앙도 높아져서 천사처럼 되어야 하고, 5년 믿은 사람보다 10년 믿은 사람이 더욱 천사를 닮아야 하고, 20년 믿은 사람은 더 천사에 가까워야 하고, 집사보다 목사가 더욱 천사다워야 하고.

아까 뉴스 들으니까 어떤 교회 목사가 여 성도를 10년 동안 성폭행했다고 나왔어요. 그들이 10년이 지난 이제야 고발하는 이유가 뭔가 하면, 목사는 자신들 보기에 가장 하나님 가까이 있는 것처럼 생각하기 때문에 그들에게 목사는 자신이 닮아야 할 모델입니다.

이 모델, 달리 말하면 목표라고 할 수 있는데, 이 목표가 있다는 것은 자신이 어렵고 힘든 것을 감내할 수 있는 원천이 됩니다. 사람들의 천국관이 뭔가 하면, 선과 악을 아는데, 악은 지옥 가고 선은 천국 가니까, 자기 내부에서 자기를 점점 더 선한 사람으로 만들어야 자신이 안심을 합니다. “이 정도로 착하니까 천국이 있다면 그 천국은 따 놓은 당상이다. 세상에 나같이 완벽하게 착한 사람이 천국을 못 간다면 아무도 못 간다.” 어느 정도 착하냐 하면 악한 사람한테 시달려도 그것을 계속 참을 정도니까, 이것은 완전히 ‘예수님 십자가 길을 가는 것과 같다. 그러니까 내가 바로 천사야!’ 라는 마음이 있을 때, 그 사람은 자기의 천국이라는 욕망과 부합이 되는 겁니다. 이게 바로 악마가 가르쳐준 가짜 천국의 모습입니다.

모든 인간이 이런 것을 갖고 있으니까 목사들도 이런 식으로 가르치지요. 선과 악 사이에 뭐가 발생되겠어요? ‘결핍’입니다. 이 결핍은 헌금으로 메워야 하고, 전도로 메워야 하고, 기도로 메워야 하고. 이 결핍을 메움으로써 내가 천사가 되는데 한 단계 더 올라갈 수 있는 그런 과정을 밟아 나간다고 보는 거예요.

그래서 [제자훈련]에 1단계부터 10단계까지 단계가 있지요. 이런 단계를 다 돌파하면 지도자 자격을 줍니다. 이런 단계를 주장해서 가짜 천국 유포에 성공한 사례가 바로 이만희 목사의 [신천지]가 있습니다. 이 최고 단계의 숫자가 뭐냐 하면 144,000이랍니다.

기존 교회가 이 [신천지]를 욕할 수 있습니까? 못합니다. 왜? 자기들도 똑같이 하고 있으니까. 이들은 다 인간들의 결핍을 공략합니다. 지금 여러분들에게는 결핍이 없습니까? 뭔가 미흡함을 못 느낍니까?

결핍을 채워서 구원 받는 것이 아니고, 결핍된 존재를 그냥 두고 따로 만듭니다. 여러분 속에 차이가 나야 합니다. 어떤 차이냐? 여러분이 이런 모습을 버리면 안 돼요. 이것은 평생 갑니다. 왜? 옛 사람이 있어야 해요. 옛 사람이 있어야 주께서 친히 만든 새사람과의 차이를 알고 그 차이를 통해서 우리는 예수님의 공로와 은혜를 비로소 실제로 느끼게 되는 겁니다.

그런데 이 새사람은 누가 손댄다? 우리가 손대면 안 돼요. 우리가 손대면 다시 옛 사람에게 묶이는 그런 불상사가 생깁니다. 속사람은 누구 작품인가 하면 주님의 작품입니다. 주님이 손댑니다. 주께서 우리를 고치셔서 구원 받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고물은 고물인 채 그냥 두고, 고쳐서 구원 받으려는 자는 아예 지옥으로 보내시고, 주께서 고칠 필요도 없는 완제품을 우리 속에서 키워요. 그래서 우리보고 비교해 보라고 합니다. 선악과에 의해서 만들어진 너 자신과 생명나무 씨앗으로 자라나는 새사람과 네가 한번 비교를 해보란 말이지요.

비교해서 남에게 증거할 때는, ‘나는 죄인이지만 이 죄인도 구원 받는 것은 속을 날로 새롭게 하시는 주님의 은혜입니다.’ 라고 십자가로 모든 공로를 돌리라는 것입니다. 이게 신자입니다. 간단하죠?

괜찮은 사람 하나 키우세요. 키우는데 여러분 자신이 키우면 안 되고 주님이 직접 키우십니다. 이걸 ‘성령 받았다’고 하는데, 고린도전서 3장에 이런 말씀이 있지요. “심는 이나 물주는 이는 아무 것도 아니로되 오직 자라나게 하시는 하나님 뿐이니라(3:7).” 이게 무슨 말입니까? 구원 받는 우리 자신은 누구 소관이다? 주님 소관입니다.

내가 구원 얻는 것이 내 소관이 아닙니다. 여러분 속에 괜찮은 것이 자라고 있는 것을 날마다 들여다보면서 감사하세요. 집에 금붕어, 선인장 이런 것만 키우지 마시고 여러분 속에 주께서 친히 키우시는, 여러분은 더러운 화분인데 이 속에서 새로운 생명이 움트는 것을 평생 감상하는 그런 즐거움이 있기를 바랍니다.

나라는 인간이 만든 천국관, 이것이 평생 없어진다, 안 없어진다? 안 없어집니다. 항상 생각하는 것이 ‘나같은 인간이 천국 가야지 누가 가?’ 이것은 없어지지 않습니다. 그런데 사도바울은 뭐라고 합니까? ‘내가 지옥 갈지라도 너희들이 구원 받았으면 좋겠다.’ 엄청난 이야기를 하지요. 이것은 이쪽 시선에서 나를 보는 것이 아니고 이미 주 안에서 바깥을 보니까 그런 말을 할 수 있는 겁니다.

제가 지금 하고 싶은 이야기가 뭐나 하면, 이 천국과 주님의 천국 사이에 그냥 곱게 보내고 곱게 떠나는 사이가 아니라 평생 동안 싸움이 벌어집니다. 왜냐하면 선악과의 논리가 고집이 굉장해 세요. 이것을 악마의 고집이라고 합니다. 우리 안에 괴물이 있다는 말이 바로 이런 뜻입니다.

이쪽에서 보면 우리 안에 새사람이 있다고 보고, 이쪽에서 보면 우리 안에 괴물이 있다. 우리 안에 괴물이 뭐냐 하면, 악마의 고집인데, 악마의 특징은 원망하는 겁니다. 이쪽 새사람의 특징은 감사하는 겁니다. 새사람은 감사하고 옛사람은 원망하는데 이것을 영적 차원에서 사람들이 뭐로 감추느냐 하면, 원망 혹은 감사는 살짝 감추고 앞에 나오는 것은 ‘무엇이 옳은가? 무엇이 나쁜가?’를 생각해요.

사람은 선악과를 따 먹었기 때문에 판단기준이 ‘무엇이 옳은가, 무엇이 나쁜가?’ 이것을 생각합니다.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옳은 일을 하면 자기 의가 쌓이고(점수가 높아지고), 나쁜 짓을 할 경우에는 내가 그동안 쌓아놓은 의의 점수가 약간 내려가겠지요. 감소하니까 이것을 원상 복귀시키려고 헌금을 평소보다 더 많이 한다든지, 전도를 더 열심히 하면 내려간 점수를 다시 회복할 수 있겠지요. 이 이야기가 ‘무엇이 옳은가, 무엇이 나쁜가?’를 생각하는 겁니다.

자, 그러면 어떻게 되는가를 봅시다.
제가 버스를 탔는데 광고를 보니까 이런 내용이 있어요. 열 가지 정도를 열거해 놓고 ‘이런 일이 있거든 상담하세요.’ 라고 되어 있어요. “이유 없이 몸이 아프다. 고부간에 갈등이 있다. 이사 날짜를 잡지 못했다. 혼기를 놓쳤다. 취직이 안 된다. 자녀 성적이 떨어진다.” 이런 경우에는 상담하시기 바랍니다.

그런데 이 점쟁이를 사람들이 찾아간다는 말은 그쪽만 점쟁이가 아니고 찾아가는 사람도 점쟁이죠. 그렇잖아요? 다만 기술이 저쪽은 프로고 이쪽은 아마추어라는 차이가 있을 뿐 노는 동네는 같은 동네입니다. 다시 말해서 내 집안에 우환이 있는 것은 내가 뭔가 나쁜 짓을 해서 벌을 받는 거예요. 그래서 이쪽 동네에서의 원칙은 ‘죄 지으면 벌’ 토스토에프스키 작품 중에 있지요. ‘죄와 벌’

반대편에는 ‘의와 상’이 됩니다. ‘죄와 벌’과 ‘의와 상’이 될 때, 이것이 ‘벌’이고 이것은 ‘상’이라는 것을 뭐로 측정합니까? 요한복음 5장에 보면 ‘모든 세상을 예수님이 심판하신다.’고 했어요. 그런데 인간들은 매사가 자기가 심판주가 되어 있습니다. 본인이 심판주가 되니까 심판에 대한 여러 가지 법을 스스로 정하지요. 내가 하루에 성경 3장을 읽어야 하는데 2장 읽으면 ‘오늘 하루 일과 중에서 벌 받아도 마땅하다.’ 이렇게 되는 겁니다. 이게 법(율법) 의식입니다.

그래서 법을 가지고 ‘당신은 법에 저촉되어 벌 받아도 마땅합니다.’라는 계급이 예수님 당시에 무려 일곱 단계를 정해서, 어떤 사람이 백정이나 심지어 여자로 태어나는 것도 벌을 받아서 그렇게 태어났고, 창기와 세리가 된 것도 하나님의 저주를 받아서 그렇고, 심지어 문둥병자나 귀머거리, 소경, 절름발이 이 사람들은 전부 법에 의하면 하나님의 벌을 받았기 때문에 남보다 뒤떨어지게 되었다고 보는 거예요.

38년 된 병자 이야기가 있지요. 이 병자의 생각은 ‘누가 와서 나를 들어서 베데스다 못에 넣어주면 나는 깨끗함을 받는다.’ 라는 그 생각. 또는 그 심판의 기준을 누가 정했습니까? 남들이 이야기한 것을 자기의 이성을 통해서 받아들인 거죠. 그러면 오늘날 모든 사람들이 갖고 있는 법 관념은 예수님이 주신 것입니까, 마귀가 준 것입니까? 마귀가 준 것입니다.

우리 모두는 마귀가 준 법에서 스스로 심판주가 되어서 매일같이 회개하고 반성하는데, 그것을 심지어 성경묵상하면서 회개, 반성하고 그렇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목사 입장에서 교인이 왔는데 두 달 다니다가 떠나버렸다. 그러면 목사가 반성을 합니다. ‘내가 목사로서 목사답지 못한 일이 무엇이었을까? 하나, 내가 설교준비 해야 할 시간에 SK와 기아의 야구경기를 봤구나. 목사가 야구를 좋아하다니. 이것은 교인이 떠나는 벌을 받아도 마땅해.’

그렇다면 그 다음에 뭘 느끼겠어요? 야구 중개방송을 본 죄를 지어서 받은 벌이 뭐냐 하면 교인 한 사람이 떠났다. 그러면 이 법에 의해서 이 목사는 다음부터 야구 중개를 안 보겠지요. 그러면 다시 떠난 교인이 돌아온다든지 아니면 다른 새 교인이 오면 이 사람은 뭘 확인할 수 있습니까? ‘내가 정해놓은 법을 하나님도 인정하셨다.’ 라고 생각하겠지요. 이게 바로 악마의 노림수입니다.

이 악마의 노림수가 한국교회에서는 ‘간증’으로 나오지요. 간증이 뭡니까? ‘어떻게 법을 지켰더니만 이런 복을 받았고, 어떻게 법을 안 지켰더니만 저주 받았는데 다시 어떻게 법을 지켰더니만 다시 복을 받았으니까 여러분도 이런 식으로 법 지키면 나처럼 복 받을 수 있습니다.’ 이런 것이지요.

그래서 욥기를 비롯해서 모든 성경을 이런 식으로 해석할 때 이런 교회는 많은 사람들이 들끓지요. 왜? 모든 사람이 결국은 악마의 종이기 때문에. 목사한테 반기를 들었더니만 우리 애가 교통사고를 당했다. 그래서 회개하는 마음으로 목사에게 순종했더니만 애가 새사람 되었다. 그래서 ‘이제는 절대 목사님께 반항하면 안 되겠구나.’ 라는 법을 자기가 만들어 내지요.

38년 된 병자가 ‘물이 동할 때 나를 들어 제일먼저 물에 넣어주는 사람이 있으면 나을 것인데.’ 라는 법칙이 어디에서 나왔어요? 이것은 사람들이 하는 이야기를 들은 것이지요. 그런데 예수님은 이 사람의 병을 고쳐주셨습니까, 안 고쳐주셨습니까? 이게 참 어려워요. 고쳐주게 되면 완성이 되잖아요. 주님은 이 사람의 병을 고쳐준 것이 아니고, 이 사람의 병을 계속 끌고 가면서 또 하나의 새사람을 여기다가 깔아버려요.

그렇다면 이 사람의 새사람은 뭐냐 하면, 이 사람은 예수님이 내 병을 낫게 했다고 주장하는 거예요. 그런데 밑의 것은 뭐냐 하면 예수님이 병을 낫게 한 것이 아니고 예수님이 자기를 증거하는데 이 사람이 필요했던 거예요. 이 사람은 예수님의 똘마니가 된 겁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38년 병을 하나님이 가져간 것이 아니고, 38년 된 이 병자를 예수님이 자기 공로를 증거하는데 필요한 자재로 사용한다니까.

예수님의 천국 건설에 우리가 자재입니다. 벽돌입니다. 벽돌인데 벽돌이 뭐라고 하는가 하면, 예수님의 벽돌 된 것을 생각 안하고 ‘나는 병 나았다.’고 주장하는 거예요. 이 두 개가 같이 갑니다.

예수님이 병을 고칠 때 특징이 뭐냐 하면, 병은 나았는데 예수 안 믿는 사람이 많았어요. 아마 병 낫고 예수 믿은 사람보다, 병 나은 후 예수 안 믿은 사람이 훨씬 더 많았어요. 어떤 문둥병자 열 명이 나았는데 돌아온 사람은 한 명이었어요. 10%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귀신을 쫓아내고 난 뒤에 일곱 귀신이 더 들어온다고 했지요.

예수님의 관심사는 뭐냐 하면, 예수님 자신이 누구인가를 증거하는 것인데, 우리의 관심사는 나의 결핍이 예수님 덕분에 해소 되어 천국 가게 되었다는 것을 자랑하고 싶어요. 이게 인간의 구원 욕구입니다. 이것만 생각하면 안 돼요. 이 사람은 ‘나 옛날에 병 고침 받았어.’ 간증의 문제가 이것입니다. 간증하고 천당 갈 사람 별로 없어요. 왜냐? 전부 자기 자랑밖에 모르기 때문에.

“한번 비췸을 얻고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히6:4)” 그것으로 끝났어요. 열 명 문둥병자 중에 돌아온 사람은 한 사람 밖에 없어요. 돌아온 사람은 ‘큰 소리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돌아와 예수의 발아래 엎드리어 사례(눅17:16)’했어요. 그런데 안 돌아온 사람은 ---

예수님의 병 고침을 받고도 안 돌아온 사람의 특징이 뭐냐 하면, 나는 착하기 때문에 이런 병에 안 걸려야 되는데, ‘내 착한 것을 하나님이 병을 낫게 해 줌으로 보증해 주셨다.’ 이렇게 생각해요. 그러니까 병 나은 후 예수님께 돌아올 이유가 없지요. 이런 사람은 지옥 백성입니다. 한국교회 목사님 거의 대부분이 이런 사람입니다.

‘나는 주의 종이기 때문에 주께서 기적적으로 내 등록금 대주고 목사가 되게 했다.’ 지옥 가려고 환장을 했어요. 정말 구원 받은 사람 같으면, 이것이 나의 옛 사람인데 펄펄 날아가는 게 있지요. 뭡니까? 예수님의 똘마니가 되어서 날아가는 저 새로운 피조물이 주께서 못 된 나를 통해서도 끄집어내는, 쓰레기 같은 내 속에서 장미를 키우듯이.

계속 나는 쓰레기에요. ‘나는 예수님 때문에 구원 받았어.’ 라고 하면서도 자기 자랑하는 이 못된 것이 평생 가는 속에서도 주님께 쓰임 받고 있다는 그 차이.

만약 이 사람이 병 나은 것만 주장한다면 ‘예수님 때문에 병 나았다.’고 했는데 그 다음에 또 병이 들면 어떻게 나오겠습니까? “주님이여, 옛날에 병 낫게 했는데 왜 또 병들게 합니까?” 라고 원망이 나오겠지요. 그런데 이쪽은 “주께서 또 나를 사용하십니까?” 병들었던 나를 병 낫게 해놓고, 그 다음에 또 다른 병이 걸리게 하셔서 그 병을 가지고 주님의 천국 건설 자재로 사용한 것에 대해 감사하겠지요. 그래서 ‘범사에 감사’가 됩니다.

성도는 항상 범사에 감사가 나오고 성도 아닌 사람은 항상 원망할 만반의 준비가 되어 있어요. 이제 신자가 어떤 자인지 아시겠지요?

불신자란 천국 건설의 방해자, 도움이 안 되는 사람. 신자란 천국 건설의 자재. 그래서 ‘당신 신자입니까?’ 하면 ‘주께서 이런 몸도 사용하시네요.’ 그러면 신자고, 불신자는 ‘당신 신자입니까?’ 라고 하면, ‘주께서 얼마나 기적을 베풀어 주시는지 --’

보여줘야 될 주님의 나라는 안 보여주고 자기 구원 받은 것 자랑하는 사람, 이 사람 내부에는 뭐가 들어 있는가 하면, ‘주여, 내가 이만큼 주님을 옹호하니까 주님도 내가 원하는 것을 주시면 좋겠습니다. 내가 기도를 열심히 하는 것은 주위 사람들이 다 아는데, 내 기도 응답되게 해 주셔야 예수님을 당당하게 전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러니까 내 기도 꼭 들어주세요.’ 라고 하는 사람들, 불신자입니다.

‘우리 아이 대학에 세 번 떨어졌습니다. 그래도 쓰시는 군요. 그래도 버리지 않는 군요.’ 우리 김 집사님 가끔 맛있는 ‘화과자’ 사오시잖아요. 교회에서 보면 누가 맛있는 것을 사오면 사람에게 거지건성 같은 것이 있어서 다음에 빈손으로 오면 ‘저분이 믿음이 떨어졌나?’ 사람이 쓰임 받는 것은 생각 안하고, 내가 어떤 행동을 할 때만 주께서 쓰신다고 자꾸 주님하고 흥정을 하려고 해요.

‘내가 이만큼 헌금하면 주님께서 예전처럼 복 주시겠습니까? 그러면 헌금하지요. 헌금 안했다고 삐쳐서 벌 내리고 하나님이 좀스럽기는.’ 이런 생각을 자꾸 하는 거예요. 그것도 목사가 유도해요.

이제 구리 장색이 사도바울을 떠난 이유를 알겠지요? 그 사람은 바로 감사가 나오는 것이 아니고, ‘내 잘되기 위해서 교회 왔는데 왜 남들이 안 알아주고, 하나님이 내 소원 안 들어주나. 그러면 나는 떠나겠다. 내가 원하는 천국관을 향해서 떠나겠다.’ 그래서 떠난 거예요.

10분 쉽시다.

(2009. 10. 30. 11:13 녹취 마침)

관리자(IP:124.♡.86.6)

09-11-24 15:09

광주091023b디모데후서4장14절b

광주 강의(09. 10. 23) 54-2

우리의 강건함과 허약함이 기준이 있는데, 그 기준은 법이지요. ‘이 정도 되면 강건하고, 이 정도이면 허약하다.’ 라는 법이 있고, 이 법에 대해서 판단, 심판 그리고 그 다음에 나오는 것이 뭐냐 하면, 선택입니다.

사람은 항상 선택을 할 때 자기 법에 의해서 옳은 것을 선택하고 나쁜 것은 버립니다. 반드시 그래요. 예를 들어, 소매치기가 가난한 사람의 주머니에 100만원과 부자의 주머니에 100만원이 있다면 이 사람은 반드시 착한 쪽으로 갑니다. 가난한 사람의 주머니를 털지 않고 부자의 주머니를 훔쳐요. 그런데 경찰서에서는 누구의 돈을 훔쳤든 악이 되는 겁니다.

모든 인간은 자기 기준에서 반드시 선과 악을 가려요. 어떤 선택을 할 때 반드시 선과 악을 가립니다. 판단, 심판, 선택. 이 선택을 다른 말로 하면, 자율 또는 자유라고 하지요. 이 자유에 대해서 칸트는 연구를 많이 했는데, ‘인간에게서의 자유라는 것은 선택할 수 있는 자유가 아니고 선택해 놓고 그걸 해석 할 때 그것을 자유로 해석한다.’ 라고 했어요.

인간이 자유라고 할 때는 항상 핑계를 대는데 ‘나는 그걸 내 자의로 했어.’ 라고 핑계를 대야 내가 알아서 내 자존심을 챙겨서 선택했다는 것을 이야기할 수 있고, 이렇게 자유롭게 행동할 때 그것을 자기는 옳다고 보는 것입니다.

인간은 늘 바르고 오른 쪽으로 행동을 해요. 내가 옳다고 하기 때문에 이 세상에는 혼돈이 생기고 말썽이 생기고 충돌이 생기는 겁니다. 그래서 너, 나의 옳다는 것을 묵살해 버리고 보편적으로 옳다는 것을 따로 만드는 것을 가지고 ‘헌법’이라고 합니다.

헌법은 뭐냐? 개인적으로 옳다는 것을 묵살시키는 겁니다. 예전에 그런 예를 들었지요. 축구 경기를 어떤 할머니와 청년이 보고 있어요. 청년은 축구에 취미가 있어서 너무 재미있게 보는데, 할머니는 축구에 대해서 잘 몰라요. 잘 몰라도 모르는 채 법이 동원됩니다. 축구는 즐거워야 되는데, 즐거우려면 전체 선수가 공 한 개를 가지고 놀 것이 아니라 각자 한 개씩 주어서 놀면 더 재미있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런데 아무리 봐도 공은 한 개 뿐이고 22명이 그 하나로 놀고 있어요. 그래서 할머니는 답답한 겁니다. 공을 각자 하나씩 주지 왜 저렇게 한 개의 공으로 서로 싸우고 있느냐고.

그런데 관중들이 축구를 보면서 열광하는 것은 공이 하나이기 때문에 열광 합니다. ‘저 공을 누가 빼앗아서 누가 상대 골대에 넣는가?’ 그것을 보고 사람들은 즐겨요. 세상 모든 것은 게임입니다. 게임의 특징은 공이 둘이 아니고 하나밖에 없어요.

싸움이 없으면 인간은 미칩니다. 인간은 싸움을 보고 게임을 보면서 어느 한 편에 돈을 걸 때 즐거워하고 희열을 느낍니다. 전에도 이야기했지만 ‘막장 드라마’에서 어떤 남자와 여자가 만나서 살다가 헤어졌다고 하면 시청률 떨어집니다. 꼭 여기에 기억 상실증에 걸려야 하고, 과거 부인과 현재 부인이 만나야 되고, 나중에 알고 보니 전부인과 현재 부인이 배다른 어머니에게서 난 자매간이어야 되고 ---

이것이 뭐냐 하면, 전부 다 넉넉함이 아니고 모자람인데, 그 모자람 중에서 누가 그것을 차지했다는 데서 오는 쾌감. 왜 그러냐? 자유와 선택과 심판은 항상 그 최후의 마지막 그 귀한 것을 차지할 때 가장 자유가 자유다운 거예요. 공이 여러 개가 되면 남의 공을 빼앗을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나 공이 한 개인데 그것을 차지해서 골을 넣으면 그 중에서 가장 뛰어난 자유를 발휘한 사람이 되지요.

만약 우리나라에 서울대학교를 각 지역에 여러 개를 세우면 서울대학교가 별 인기가 없게 됩니다. 인간들이 참 더러운 심성을 가지고 있지요? 우리들이 이렇게 지금 살고 있습니다. 나중에 기회가 되면 ‘자본주의가 뭔가?’에 대해서 제가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자본주의는 참 우스워요.

자본주의는 물건을 서로 교환하는 것이 자본주의가 아닙니다. 타인의 것을 가질 수 있는 권리를 모으는 것이 자본주의입니다. 그래서 아껴 쓰고, 고쳐 쓰고 하는 것은 뭐냐? 돈이란 남의 것을 빼앗을 수 있는 권한을 말합니다. 돈은 교환권이거든요. 상품이 얼마나 가치 있는가 하는 것은 그것을 빼앗을 수 있을 때만 그것이 가치가 있는 거예요. 무슨 뜻인지 알겠습니까? 모두가 탐날 때 상품이 되는 거예요.

만약 모두가 탐을 안내면 시장에 내놓아도 안 팔리니까 아무리 그것이 고귀한 가치가 있어도 시장에서는 별 의미가 없습니다. 그러니까 얼마나 이 세상이 빼앗는 것 그 자체가 내가 얼마나 인간다운가를 측정할 수 있는 하나의 표준이 되는 겁니다. ‘너는 얼마나 남의 것을 빼앗을 수 있어?’ ‘나는 아무것도 빼앗을 수 없는데’ ‘이 병신!’ 이렇게 되는 거예요.

‘너는 얼마나 남의 것을 빼앗을 수 있어?’ ‘나는 원한다면 당신 집도 살 수 있어’ 이렇게 되면 그 사람은 부러움의 대상이 되는 겁니다. 그리고 돈이란 것은, 100만원 주고 샀다고 해도 돈이 없으면 10만원 받고 팔수도 있기에 내가 돈이 없으면 90만원이 남의 것이 돼요. 지금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몰라요.

만약에 천국이 사람의 행함으로 들어간다면 이 천국은 무능력자는 못 갑니다. 지금 제가 이야기하는 것은 뭐냐? 주께서 사울을 사도바울이 되게 했습니다. 이 때 어떻게 했느냐 하면, 사도행전 9장 15-16절을 읽겠습니다. “주께서 가라사대 가라 이 사람은 내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 앞에 전하기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라. 그가 내 이름을 위하여 해를 얼마나 받아야 할 것을 내가 그에게 보이리라 하시니”

여기에서 바울이 자기의 인생을 주관하는 것이 아니고 누가 주관합니까? 주님이 주관하지요. 어떻게 주관 하는가? 그는 주의 이름을 전하기 위하여 택한 그릇이죠. 그릇인데 그 그릇 안에 바울의 옛날 것이 담겨 있을 것 아닙니까. 그런데 이 안에 든 것을 툭툭 털어내는 것이 ‘해 받는 것’입니다.

해 받는 것은 바울 본인한테는 죽을 지경이지요. 그런데 해를 받아야 된다고 이미 기정사실화 시킨 것은 바울에게 의견을 물어보고 한 것이 아니고 주님의 일방적인 결정입니다. 해를 받아야 그 안에 뭐만 담기냐 하면 ‘예수님의 해 받으심’ 즉 예수님이 십자가 죽을 때 얼마나 아프게 죽었으며, 죄 때문에 죽었다는 것이 사도바울의 해가 옆에 없고 그것이 비켜줘야 주님의 고생이 그대로 나올 것 아닙니까.

‘예수님의 죽으심이 우리를 구원하는 능력이다.’ 이것이 어디에 나오느냐 하면, 고린도전서 1장에 나오지요. 세상에서는 죽는 것이 미련한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죽어버리면 실패자로 간주합니다. 아무리 잘해왔어도 죽으면 실패입니다. 그래서 인간이 실패하는 것을 두려워하기 때문에 주께서는 오히려 실패하는 예수님으로 오셨지요. 그런데 그 십자가의 죽으심이 오히려 우리를 건져내는 능력입니다.

그런데 그 능력이 나오려면 그 앞에 얼쩡거리면 안 되지요. 예수님의 죽으심 앞에 ‘내가 고생했다. 주님도 고생했지만 나도 고생 많았다.’ 이렇게 얼쩡거리면 안 됩니다. 그러면 어떻게 합니까? 우리가 해를 받음으로 말미암아 더 이상 내가 나를, 내가 예수를 믿을 수 있는 여력마저 전부 툴툴 털어버리는 겁니다.

그러면 뭐가 남느냐 하면, 내가 예수를 믿을 수 있는 모든 여력이 같이 다 떨어져 나가지요. 그래야 예수 믿는 것이 우리한테 불가능으로 남지요. 예를 들어, 5년 전에 기도해서 암이 나았다. 그런데 5년 후에 또 암이 재발했는데 기도했지만 안 나았다. 여기서 문제는 5년 후에 왜 기도하느냔 말입니다. 그것이 잘못이죠. 그 때는 기도해서 병 나은 것이 아니고 주님께서 그냥 병 낫게 해 줬는데 ‘아하, 내가 기도하니까 응답 되는구나’하고 생각을 했지요. 이렇게 되면 이것은 ‘불가능’이 아니고 ‘가능’이 되지요.

‘예수님이 뭐라고 해도 내가 기도하면 응답이 돼.’ 이것은 예수님을 믿는 것이 아니고 자기의 기도 실력을 믿는 것이지요. 그런데 주께서는 그것을 안 들어줬잖아요. 그게 해 받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세 번씩이나 기도해도 안 되지요. 그런데 정작 사도바울이 남을 위해 기도하니까 죽은 자가 일어났잖아요. 심지어 바울은 손수건으로 죽은 자를 살아나게 했고 병이 낫게 했지요. 그러면 그 손수건으로 자기의 병은 왜 못 고칩니까?

그 희한한 손수건으로 자기 몸의 가시는 왜 못 고칩니까. 주께서 해를 받게 하심으로 말미암아 내가 믿는 것이 아니고 주께서 성령으로 믿게 하셔서 오늘도 믿게 되었다는 것을 증거할 수 있단 말이지요. 이것이 바로 그릇에 담긴 옛것을 비우는 거예요.

이제 본문 봅시다. 디모데후서 4장 17절입니다. “주께서 내 곁에 서서 나를 강건케 하심은 나로 말미암아 전도의 말씀이 온전히 전파되어 이방인으로 듣게 하려 하심이니”

여기서 ‘강건케 하심’의 기준이 뭡니까? 이것은 자기 기준도 아니고 서울의 백병원 기준도 아닙니다. 사도바울이 종합검진 받았습니까? ‘귀하는 혈압이 좀 높습니다.’ 이러면 여기서 ‘강건케 하심’이란 말을 빼야 됩니다.

여기에서 ‘강건하다’는 것은 주께서 복음 전하는데 필요한 만큼의 강건함 입니다. 그러니까 이 판단을 누가 합니까? 사도바울 본인의 자유와 선택으로 하는 것이 아니고, 새 사람을 만들어내고 있는 예수님 입장에서 강건하다고 하면 강건한 거예요.

‘온유하라.’는 말씀이 있는데, 이 말씀을 지킨다는 것은 말이 안 돼요. ‘온유하라’는 것은 우리가 생각하는 온유와 달라요. 우리가 보기에는 온유하지 않아도 주께서 온유하다고 하면 온유한 겁니다. ‘원수를 사랑하라.’고 말씀하신 주님이, 바라새인을 향해 ‘독사의 새끼들아!’ 라고 했어요.

다윗은 아내가 여러 명이었습니다. 그런데 복음서에는 한 아내를 주신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했거든요. 그러면 다윗은 지옥에 갔습니까? 모세도 아내가 여러 명입니다. 이것을 가지고 어떤 사람은 아내를 갈아치웠다고 하는데, 그러면 우리도 갈아 치울까요?

성경의 모든 일은 그 기준이 옳다, 그르다가 아니라 복음이냐, 복음 아니냐(천국에 필요한 것이냐 아니냐)로 판단합니다. 내 선에서 옳다, 그러다가 아닙니다. 내 기준으로 판단하면 안 돼요. ‘주여 이것은 나쁜 짓입니다.’ 주께서 말씀하십니다. ‘나쁜 짓은 없다.’ 천국을 증거할 것인가, 말 것인가? 이것이 중요합니다. 이미 우리 몸은 우리의 것이 아니기 때문에 내가 나쁘다, 좋다고 하면 안 됩니다.

축구공을 차다보니까 때가 묻었어요. 그러면 그 축구공으로는 골을 못 넣습니까? 때가 있어도 골 넣으면 골인입니다. 그처럼 우리라는 축구공에 때가 묻어도 주께서 차서 골 넣으면 천국으로 골인이 되는 겁니다. 왜 자기가 자기를 관리해요. 주께서 강건하다고 하시면 비실비실해도 강건한 겁니다.

다시 이야기합니다. 사람은 눈만 뜨면 자기의 가치를 자기가 측정하는 버릇이 있습니다. 케이블 TV에 ‘롤러코스트’라는 것이 있는데, 거기에 보면 성우가 하는 대사가 유행이 되었습니다. 저도 설교 시간에 다윗을 이야기하면서 그 흉내를 냈는데 교인들이 못 알아들어요. 그게 어디에서 나온 것인지 모르더군요.

거기에 보면 남자의 심리와 여자의 심리가 쭉 나오는데, 그 심리라는 것은 복잡하지 않고 아주 간단한데, 어떤 일을 벌여놓고는 그냥 돌아서는 법이 없고 차후에 반드시 ‘내가 잘 했는지, 못했는지를 측정하는 것’이 인간입니다.

주께서 공을 차는데, 주께서 차면 우리가 같이 어울리는 것이 아니고, 이 축구공에 때가 묻었는지 안 묻었는지 조사하는 것이 우리들이 하는 짓이란 말입니다. 매일같이 평생을 그 짓을 합니다. 주께서 판단 하신다는데 자기가 자꾸 ‘주님! 가만 있어보세요.’ 하고는, ‘나’라는 공이 예쁜 공인지 아닌지 확인하고 싶다는 것입니다.

여자의 심리에 보니까, 남자가 부르니까 곧 나간다고 해놓고는 30분도 더 걸리는데 화장을 하고 옷을 이것저것 걸쳐보고 야단입니다. 남자는 그것이 짜증스럽고 이해가 안 된다는 거예요.

우리는 주님 하시는 것을 이해를 못해요. 성령이 아니면. 주님께서 하시는 말씀이 ‘너는 원래 더러운 공인데’ 디모데전서 1장 13절에 나오지요. “내가 전에는 훼방자요 핍박자요 폭행자이었으나 도리어 긍휼을 입은 것은 내가 믿지 아니할 때에 알지 못하고 행하였음이라.” 이렇게 되어 있어요.

옛날에는 핍박자고 폭행자라고 했는데 사실은 살인자입니다. 사도행전 22장 4절에 보면, 사도바울은 예수 믿는 사람을 죽인 살인자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긍휼이 임하니까, 공이 무슨 공이냐 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긍휼이라는 바람이 꽉 차 있는, 주님의 용서로 가득 차있는 공으로 굴러가고 있는 거예요.

볼링으로 비유를 하자면, 주님께서 사도바울을 볼링 공으로 사용해서 긍휼과 자비를 듬뿍 담고 굴리니까 사람들이 볼링공이 굴러오는 것을 뭐로 보는가 하면, ‘저 사람은 과거에 폭행자요, 살인자다.’ 그런데 막 굴러 와서는 자기 행함을 주장하는 사람을 넘어뜨리지요. 이렇게 넘어뜨리는 것을 ‘스트라이크’라고 합니다. 전부 다 넘어뜨리지요. 그러면 10점 만점에 10점입니다. 굴러갈 때마다 전부 넘어뜨립니다. 끝까지. 그러면 퍼펙트게임이 됩니다. 300점.

사도바울이 지금 굴러가고 있는 자신을, 주님에 의해서 가속도가 붙어 굴러가고 있는 자기 자신을 그렇게 증거하는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가 택한 성령 받은 사람은 다 나와 같다.’는 것입니다. 왜 그런데 너희들은 나와 같은 것을 모르고 왜 자꾸 공에 때 묻은 것만 생각하느냔 말이지요. 굴러가는 공을 잡아서 갈고 닦고 광내고 약칠 하고 왜 그런 짓을 하느냔 말이지요. 그냥 굴러가도록 하면 되는데.

마주침이 뭐냐 하면, 주님의 긍휼과 인간의 행함(자기 선함)과의 충돌인데, 주께서 그렇게 조장한 것입니다.

디모데후서 4장 17절을 보겠습니다.
“주께서 내 곁에 서서 나를 강건케 하심은 나로 말미암아 전도의 말씀이 온전히 전파되어 이방인으로 듣게 하려 하심이니 내가 사자의 입에서 건지웠느니라.”

여기서 ‘전도’가 나오는데, 전도가 무엇인지를 분명히 해 봅시다. 전도는 전(傳) + 도(道)지요. ‘도를 전하는 것’이 전도입니다. 이 도는 ‘십자가의 도’입니다. 바울이 전에는 폭행자요 살인자였는데 하나님의 복음 전하는 긍휼의 그릇으로 만들었잖아요. 여기에 관여하는 것이 십자가의 도란 말입니다. 전한다는 말은 십자가의 도를 전하는 것입니다.

구원은 어떻게 되는가? 구원은 십자가의 도를 들음으로 믿음이 생겨요. 그러면 성경의 지식을 알면 구원 받습니까? 예수님의 제자가 12명이다. 이런 것을 알면 구원 받습니까? 아니잖아요. 이런 것을 전하는 것은 전도가 아니죠. 전도가 아니고 지식입니다. 주께서 도와줄 때는 전도할 때만 도와줘요. 우리가 성경 지식을 원할 때는 안 도와줍니다. 왜냐? 그것은 공이 안 굴러가니까.

공이 굴러가려면 우리가 긍휼의 그릇이 되어야 하고, 긍휼의 그릇이 되려면 우리는 세리와 창기(폭행자, 살인자)여야 한다. 세리와 창기의 특징이 뭐냐? 자기의 자율권을 사용할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친구들은 백화점에 가서 상품권 100만 원 짜리를 내는데 자기는 5만원 상품권이 있어요. 그러면 내놓기가 부끄러워요.

예수님 만나고 난 뒤에 세리와 창기는 ‘내 인생은 제가 알아서 살겠습니다.’라는 것을 포기했어요. 그러니까 주님이 보이는 거예요. 주님의 사랑이 많이 보이는 거예요. 자기의 것을 내놓을 수가 없는 거예요. ‘나는 전에 마귀 들렸어요. 귀신 들렸어요.’ 이렇게 나오는 사람이 자기자랑 하겠습니까?

그래서 구약에 나오는 ‘라합’이라는 여인을 신약에서 거론할 때마다 반드시 ‘기생’이라는 단어가 이름 앞에 붙어요. 마태복음 족보에서는 빠졌지만. ‘기생 라합도 주님의 은혜를 받으니까 구원받았다.’ 할 때, 기생 라합이 뭘 했습니까? 자기 자율권을 발동했습니다. “주님은 말씀만 하옵소서. 내가 말씀대로 다 행하겠습니다.” 이렇게 나왔습니까? “다윗의 자손이여 저를 불쌍히 여기소서.”

그러니까 복음 전하는 사람은 주께서 함께하시면 성경 말씀 속에서 다시 한 번 우리가 폭행자요, 살인자며, 세리와 창기인 것을 깨닫게 해서 오직 십자가의 긍휼만 내세울 때, 그것이 다른 사람에게는 구원하는 능력으로 전달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의 볼링 공으로 사용되는 거예요.

그래서 긍휼만, 주님께서 너 같은 인간도 용서하신다는 것이 증거될 때, 듣는 사람에게 성령이 함께 하시면 같은 은혜의 사람이 되는 겁니다. 에티오피아의 국고를 맡은 내시 같으면 상당한 고위층일 텐데, 그 사람이 성경 읽다가 빌립의 전도로 복음을 깨닫고는 당장 세례를 받았지요. 그 순간 내시가 고위직입니까? 고위직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자기는 죄인 중의 괴수인데. 주님 앞에서는 고위직이니 교양이니 이런 것 필요 없어요.

여기에서 십자가의 도를 알 수 있는 것은, 주께서 곁에 서셨지요. 사도바울이 있으면 주께서 곁에 섰지요. 이 주님은 손에 못자국과 옆구리에 창자국이 있지요. 그렇다면 사도바울에게 주께서 함께 계셨다는 것은 예수님의 고난 받으시고 죽으심이 사도바울을 통해서 그대로 전달되기 위해서 사도바울로 하여금 죄인으로 만들어서 ‘이 죄인도 내 십자가의 피로 구원 된다.’는 사실을 사도바울과 함께 오늘날 우리에게 전달시키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다른 사람들에게 전달되지요.

그래서 십자가 달리신 예수님이 우리와 함께 있을 때 우리가 예수님도 바라보면서 이쪽을 바라봐야지, 나는 예수님과 함께 있다고 우기면서 ‘나는 예수님만 전한다.’ 이렇게 되면 자기가 잘난 사람이 돼버려요.

십자가를 바라보면서 전하면 ‘주께서 나를 보내셨습니다. 그러나 나도 죄인입니다.’ 이렇게 나오지요. 그러나 ‘여러분은 십자가 모르지요? 내가 한 수 가르치겠습니다.’ 이렇게 되면 이 목사는 결국 예수님의 십자가 공로를 가리고 자기 실력으로 전도하는 사람이 된다 이 말입니다.

그 다음 18절에 “내가 사자의 입에서 건지웠느니라.” 이것은 설명이 좀 필요한데, 사도행전 16장 18-19절을 제가 읽어보겠습니다. “바울이 심히 괴로워하여 돌이켜 그 귀신에게 이르되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내가 네게 명하노니 그에게서 나오라 하니 귀신이 즉시 나오니라. 종의 주인들은 자기 유익의 소망이 끊어진 것을 보고 바울과 실라를 잡아 가지고 저자로 관원들에게 끌어갔다가”

여기에서 뭔가 이상한 느낌이 안 듭니까? 방금 바울이 귀신을 쫓아냈는데, 그만한 능력 같으면 체포당하기 전에 체포하려는 그 인간에게서 귀신을 쫓아내면 안 됩니까?

사도바울이 어떤 능력을 소유하고 있다고 하면, 주께서 사도바울의 곁에 있을 이유가 없습니다. 사도바울 곁에 주께서 있다는 말은 사도바울은 날마다 주 안에서 자기 능력을 죽여야 돼요. 능력이 있어도 능력이 없는 자가 되어야 새로운 능력을 받게 되는 겁니다. 그것도 늘 받는 것은 아니고 주께서 쓰실 때만 받지만.

그런데 사람들은 소위 은사라는 것을, 은사를 자기 고유로 품고 있는 어떤 잠재력, 실력으로 사람들은 자꾸 오해를 하고 있습니다. “저 사람은 은혜가 많다.” 이것을 ‘저 사람은 태권도 5단이야.’ 이렇게 들리는 거예요.

은사는 하나밖에 없습니다. 가진 은사가 항상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과 긍휼로 바뀌어지기 위한 은사만 은사고, 안 바뀌는 것은 부도수표입니다. 그것은 무늬만 은사지 헛방입니다. 그러니까 두려워하지 마세요.

누가 예언하는 은사를 받았다고 한다면 그 사람 좀 만나고 싶어요. 내가 내일 어떻게 될지 한 번 물어보고 싶어요. TV드라마에 이런 것이 있습니다. 어떤 집안에 우환이 있다고 무당이 굿을 하는데 거기에 아주 이성적인 며느리가 있어요. 팔짱을 끼고 굿하는 것을 보고 있다가 굿이 절정에 이럴 때 “무당 아줌마! 아줌마 위장병 있지요?” “어떻게 알았습니까?” “입술을 보니까 위장병이 심각한 것 같은데 내일 우리 한의원에 침 맞으러 오세요.” 이렇게 되면 무당이 계속 굿 할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무당이 녹두를 가지고 ‘귀신아 물러가라!’

지금 신종 무당들이 교회에 은사란 이름으로 설쳐요. “나처럼 기도하면 당신도 은사 받을 수 있습니다.” 다른 말로 하면, ‘나처럼 하면 당신도 무당 될 수 있습니다.’ 라는 것과 같은 말이에요. 목사들이 기도원에 가서 은사 받았다고 사기 쳐서, 교인들에게 “내가 은사를 받았는데 이번 교회 건축하는데 헌금을 해야 저주를 받지 않는다.” 이런 식으로 사기를 쳐서 헌금 강요해서 예배당 짓고 하잖아요.

은사라는 것은 상품 교환권이에요. 내 은사 죽이고 예수님의 피만 증거하는 것이 은사입니다. 방언, 통역 전부다 그리스도의 복음 전하기 위해서 바꿔치기 해야 될 것들입니다. 사람마다 은사가 다 있어요. 그런데 그 은사 중 최고의 은사는 사랑입니다. 사랑으로 나오지 않는 은사는 은사가 아닙니다. 여기서 사랑이란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나오는 사랑을 말합니다. 그걸로 다 바꿔야 돼요.

청소를 한다. ‘아이고 집사님은 청소하는 은사를 받았군요.’ ‘주님의 십자가 피가 은사입니다.’ 이렇게 하면서 청소를 하란 말이죠. 헌금하면서, 봉사하면서 “나는 주님 앞에 죄인입니다.” 라는 은사 외에는 필요가 없어요. 그 은사 중 하나가 뭐냐 하면, 바로 ‘사도바울이 옥에 갇혔는데 빠져 나갔다.’ 라는 은사라면, 아까 은사는 무슨 은사? 귀신을 쫓아내는 은사. 이번에는 옥에 갇혔는데 빠져나왔다, 그러면 여기에 옥에 가두어 두는 그런 기능을 주께서 만들어 줘야지요. 그런 무대장치를 해야지요.

그러니까 바울과 실라는 옥에 갇혀서 뭘 합니까? 찬송을 부르지요. 바울과 실라가 옥에 갇혀서 자기신세 타령하는 것이 아니고, ‘이번 시나리오는 옥에 갇히는 것이구나. 인생 참 재미있네.’ 찬송을 부르고 있는데 옥문이 열려서 풀려 나왔잖아요. 옥 터에 지진이 일어나서. 지진 일어나는 시나리오는 몰랐어요. 주께서 집어넣고 주께서 풀어주고.

선덕여왕은 지진이 일어나는 것도 미리 알았지만 사도바울은 몰랐어요. 바울이 아는 것은 ‘내가 어디에 있든지 주께서 함께 계신다.’ 이것 외에는 몰랐어요. 또 알 필요도 없고. 그렇잖아요? 왜냐, 천국을 만드는 것은 자기 소관이 아니고 주님 소관이고, 자기는 거기 건축자재로 들어가는데, 건축자재가 설계도면을 보자고 할 이유가 없단 말이지요. 건축은 주께서 알아서 하실 거니까. 자기는 건축자재로 사용될 뿐이란 말이지요.

옥 터에 지진이 일어나서 옥문이 열려 간수가 사색이 되었을 때 바울이 뭐라고 합니까? 사도행전 16장 31절에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 결국은 구원하기 위해서 누구를 사용합니까? 바울과 실라가 옥에 갇히는 그런 연출을 주께서 하신 거예요.

그 다음에 나오는 것이 뭐냐 하면, “너는 여기에서뿐만 아니고 로마에 가서도 증거해야 된다.” 로마 가기도 전에 이미 로마에 가서 복음을 전해야 된다는 그 시나리오까지 주께서 짜신 거예요.

디모데후서 4장 17절을 다시 봅시다. “이방인으로 듣게 하려 하심이니 내가 사자의 입에서 건지웠느니라.”

결국 사자를 배치한 것도 누가 알아서 배치했습니까? 주께서 하신 것이고, 건지는 것도 누구 솜씨입니까? 주님 솜씨고. 우리 인생이 이런 인생입니다. 그러니까 남의 인생을 모방할 필요 없어요. 모든 인생은 각자에게 맡기신 배역이 따로 있습니다. 다만 그것이 예수님을 증거하는데 각자의 위치에서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11월 13일에 결혼식이 예정되어 있는데, 부부가 한 몸 되었다고 해도 아내가 전할 복음과 남편이 전할 복음이 달라요. 남편이 어떤 복음을 전할 지, 아내는 어떤 복음을 전할지 본인도 모르고 그 어떤 사람도 몰라요. 이건 며느리도 모르고, 시어머니도 모르고, 아무도 모릅니다. 다만 부부로 살 수 있는 것은 뭐냐? 당신과 나를 통해서 하나님이 어떻게 천국이 있음을 증거하느냐? 그것을 보고 복음 안에서 기뻐하고 감사하면 됩니다. 우리가 긍휼을 입은 볼링공이구나 하는 것을 새삼 느낄 때 모든 부부의 문제는 다 없어지지요. 주례사 다 했습니다. 이제는 더 할 것 없어요.

그러니까 사람의 만남은 그냥 ‘너와 내가 있구나.’ 하지 말고 천국과 복음을 경유해서 바라보게 되면 다 의미가 있어요. 그런데 경유하지 않고 바로 상대를 보면 내 중심으로 상대를 이용하게 됩니다. “왜 당신은 내 말 안 들어!” 저쪽도 “왜 당신은 내 말 안 들어.” 이렇게 돼요. 그러면 주님과 함께 있는 것이 아니고 자기 안에는 자기의 옛사람 밖에 없는 것이지요.

모든 부부의 문제는 여기서 나옵니다. “왜 당신은 내 말 안 들어?” 이것은 복음을 경유해서 나온 것이 아니지요. 어떤 사람은 복음을 경유해서 이런 식으로 나오는 사람도 있어요. 십자가를 통과하면 죽어야 되는데, 통과해서 살아있는 사람도 있어요. 이러면 안 됩니다. “나는 예수 믿는단 말이야! 그러니까 너는 내 말 들어.” 이러면 안 되고, 통과하게 되면 “저는 죄인이거든요.” “저도 죄인이에요.” 둘 다 죄인이라는데 여기서 무슨 자기중심이 필요합니까?

주님을 경유하게 되면 둘 다 주께서 쓰시는 주의 종으로, 오직 주님의 종으로 우리가 지금 버티고 있다는 사실을 증거하는 거죠. 그게 바로 복음 전파입니다.

그 다음 18절에 “주께서 나를 모든 악한 일에서 건져내시고 또 그의 천국에 들어가도록 구원하시리니 그에게 영광이 세세 무궁토록 있을지어다. 아멘.”

여기서 ‘모든 악한 일’이라는 것은, 진리가 아닌 것에서부터 벗어나게 해 주셨다. 누가? 주께서. 무슨 힘으로? 우리가 구원 받는 힘은 긍휼의 힘입니다. 여러분들이 긍휼의 힘으로 모든 핀(난관)들을 다 쓰러뜨려야 돼요.

우리가 하나님께 성령 받고 용서 받았으면 다 받은 거예요. 주께서 쓰신다. 천국은 그런 식의 천국입니다.

19절에 “브리스가와 아굴라와 및 오네시보로의 집에 문안하라.”

그 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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