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애굽기 18장 - 19장 주석
출애굽기 18장 - 19장 주석
이름 : 이진용(IP:222.99.120.158)
출애굽기 18장 - 19장
이방인 제사장 이드로와 모세의 만남은 이스라엘을 보다 체계 있는 정치형태로 정착시키는데 도움을 준다. 물론 이러한 정치형태는 이미 이방나라에서 시도해 왔던 것이었다. 그것을 이스라엘에서 모방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해서 이스라엘은 국가가 되어간다. 그러나 하나님이 기대하는 국가는 그런 형식으로 정해지지 아니한다. 언약의 국가가 되어야 하는 것이다. [너희는 내 말을 잘 듣고 내 언약을 지키면 너희는 열국 중에서 내 소유가 되겠고 너희는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 이것이 이스라엘이라는 나라의 정의(定義)이다.
창세기 12:1-3에서 언급된 그 복의 근원이 이제는 국가라는 형태로 지상에 나타나게 되었다. 조건은 단 하나이다. [언약 안]이어야 한다. 하나님은 세상에 대한 약속을 성취하기 위해 먼저 복의 근원으로 선택한 자기 백성과 계약체제에 들어간다. 그러면 여호와 하나님이 생각하시는 언약이라는 것이 도대체 무엇인가? 아브라함에게 주신 언약이 있는데 왜 또 계약상태에 들어가는가? 그것은 국가를 세울만한 능력을 가진 존재를 국가 설립자로 인정하고 그분을 위한 그분의 나라로 만들기 위한 조치이다.
아직 아브라함 언약의 정신을 가진 국가는 나타나지 않았다. 아브라함 언약의 정신을 이제는 국가라는 형태로 영원히 지속시키려고 하는 것이 하나님의 언약체결의 의도이다.(창세기 17:5) 이러한 국가가 생기는 과정에서 바로라는 부정적 역할을 한 한 이방 왕이 등장되었다. 따라서 이스라엘이란 언약국가는 철저하게 비애굽적인 바탕을 하고 있어야 하며 적극적으로는 출애굽의 탈출에서 보여준 어린양의 희생과 대속정신이 또한 이스라엘의 건국 취지이어야 한다.
거룩이라는 양보 안 되는 절대 법 앞에서도 이스라엘은 모세언약에서 새롭게 도입된 거룩으로 말미암아 유일하게 생존 되는 국가로 남는다. 그 새로운 거룩이란 이스라엘과 마주서는 거룩이 아니라 이스라엘의 죄를 짊어지고 그 백성 안에서 함께 동행하는 거룩의 모습을 두고 말한다. 이것이 바로 새로운 언약 모세 언약이다. 출애굽에서 보여진 어린양의 희생을 국가의 건국이념으로 삼고 그 정신으로 거룩한 분의 동행을 가능케 한 언약이 바로 모세 언약이다.
따라서 모세언약은 다음의 두 가지 요소가 들어가 있다. 하나는 거룩한 죽음의 말씀의 기초인 10계명이요 둘째는 그 무서운 말씀의 진노를 덮어주는 희생의 피를 생산하는 제사 제도이다. 출애굽기 19장의 위치에서는 그 의미를 다 알 수 없고 이야기가 계속 진행되면서 이러한 취지가 분명해질 것이다. 간단히 요약해서 설명한다면 거룩 그 자체로서의 거룩이 아니라 그 거룩을 희생의 거룩으로 승화시키는 그 자체를 거룩의 내용으로 하고 있는 언약이다. 따라서 무슨 계명을 준수할 때도 애굽에서 종 되었을 때에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베풀어주신 그 사랑의 정신을 상실한 상태로 지키면 아무런 소용도 없고 거룩의 의미가 없어진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이 이 점을 알기까지는 광야에서 약 40년이라는 시간이 소모된다. 왜 10계명을 다시 언급해야 되는지는 그들의 실패한 입장에서 비로소 이해되는 것이다.
어쨌든 이스라엘과 언약을 맺고자 하시는 분은 더 할 나위 없이 무섭고 두려운 분이다. 감히 그 어느 누구도 접근하지 못할 분이다. 만약 접근하면 죽음을 면치 못한다. 그러나 모세와 아론은 부르심을 받아 하나님께로 나아갈 수 있었다. 이제 그들에게는 왜 여호와께서 그들은 애굽에서 종 되었던 데서 불러낸 것인가를 알려줄 차례가 온 것이다. 전에 떨기나무로 말씀하실 때는 이 산에서 하나님을 섬기기 위해 불러낸다고 되어 있다.(출 3:18)
그 섬기는 방식이 어떻게 되는가? 그것은 거룩한 하나님의 말씀과 그 말씀을 지켜야 하는 백성들 양쪽에다 모두 희생의 피 안에서 화목시키는 것이다( 24:5-8) 우리가 무엇에서 비거룩이며 우리의 어떤 행위 때문에 제물은 희생되어야 하는가 라는 점을 그들이 깊이 알고 제사를 드려 여호와를 섬겨야 한다. 이러한 시도는 결국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과 같이 거룩한 민족이 되기 위한 조치이다. 즉 애굽에서의 구원이 아니라 애굽같은 비거룩에서의 탈출을 시도하는 것이다. 그 일은 언약을 준수함으로만 가능하다.
18:1-4
모세에게 특별한 의미를 지닌 두 아들이 생겨나는 것처럼, 하나님으로 인해 성도된 자도 이 두 아들의 의미가 그대로 발생되게 되어 있다. 두 아들의 이름에 담긴 뜻은, '이 세상에서 객이 되었다'는 것이요 다른 하나는, '하나님이 도우셔서 구원되었다'라는 뜻이다.
오늘날 성도를 다루시는 하나님께서는 이런 취지가 일어나는 쪽으로 성도를 몰아넣으신다. 일단 모세의 경우에는 가족 해체가 일어난다. 전에 모세가 애굽으로 하나님의 지시를 받아가는 와중에서 두 아들과 아내와 헤어지는 일이 일어났다. 그것은 모두 모세의 '피 남편' 역할 때문에 생긴 일이다.
'피 남편'이란 모세의 진정한 사명과 연관있다. 하나님은 모세를 통해 하나님 앞에서도 구원될 수 있는 새로운 가정을 계획하셨다. 그것은 하나님의 약속의 피가 주도권을 쥐지 못하는 가정은 하나님 앞에서 죽임을 당한다는 것이다.
이 사실이 현실로 확연히 드러난 사건이 바로 유월절 어린 양으로 인한 구원 사건이다. 하나님 앞에서는 그 어떤 대단한 가정이라도, 심지어 왕의 가문이라 할지라도 소용없다. 오직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흠 없는 피'로 인해 보호받는 가정이 되지 못하면 그 가정은 저주받는다.
바로 이스라엘을 이러한 가정으로 만들어 구원하시려고 하나님은 모세를 애굽에 파견하신 것이다. 그러한 구원이 먼저 모세 가정에서부터 일어나야 했다. 출애굽기 4장에서, 모세는 한 가장의 자리에서 내려앉게 된다. 그것은 하나님 중심으로 새로 등장되는 새 가정을 위해서는 그가 먼저 피를 봐야 했다.
이 점은 모세의 아내 십보라가 고백한 대목에서 언급되고 있다. 출애굽기 4:26에 보면, "여호와께서 모세를 놓으시니라 그 때에 십보라가 피 남편이라 함은 할례를 인함이었더라"라고 되어 있다.
모세 아내 십보라의 입장으로서는 죽음을 안고 사는, 그것도 특별히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대표해서 안겨주시는 죽음을 지닌 그런 남편과 살 수가 없었다. 그는 더 이상 한 가장의 노릇을 해야 하는 것이 아니다. 모세는 하나님의 구원을 위한 충실한 사환이 되어야 한다.
피가 인도하는 대로 아니, 피가 기다리는 데로 가서 거기서 하나님이 실시하시는 구원 작업에 참여해야 한다. 구원이란 모든 것이 해체해 버리고 하나님에 의해서 새롭게 제공되어야 한다. 죄가 사라진 관계에서 말이다.
이로서 하나님의 집의 사환이 된 이상에 모세에게는 더 이상 아내도 없고 자식도 없다. 있다면 오직 하나님만 계실 뿐이다. 하나님의 백성만 생성될 뿐이요 하나님의 집만 형성될 뿐이다. 가족이 해체된 그 모세의 경험은 사실 모든 이스라엘이 함께 겪어야 될 질서이다. 모세로 인하여 생긴 하나님의 집은 앞으로 이스라엘의 운명으로 자리잡게 된다.
모세는 아내와 두 자식과 다시 상봉한다. 즉 모세 자신을 찾아오신 하나님은 스스로 남기신 계획에 준해서 빈틈없이 일을 진행시켜 왔음을 모세는 알게 된다. 모세는 더 이상 자신을 위한 계획이라든지, 자신만의 비젼 같은 것은 가질 입장이 못됨을 알았다. 그저 나그네요, 하나님 덕분에 살았음을 증거해야 될 사환이다.
이 점에 있어서는 오늘날 성도들도 마찬가지다. 성도들도 결혼을 하고 가정을 갖게 된다. 이 가정을 스스로 깨어버리라는 말이 아니다. 중요한 점은 과정, 구원되는 가정이 엄연히 있음을 증거하라고 상대 배우자를 만났다는 사실이다.
따라서 서로 서로 모세 같은 입장이 되어야 한다. 서로 서로 나그네와 순전히 하나님의 도움으로만 구원되었음을 보여주는 가정 생활이 되어야 한다. 상대방을 자기 소유를 삼아 마치 리모컨으로 체널을 자유자재로 움직이듯이 상대방을 움직이려고 해서는 안된다.
천국을 위한 봉사하라고 상대 배우자를 만난 것이다. 사람들이란 늘 이 세상에 죽치고 살고자 하는 동기가 강하다. 그러다 보면 나그네 같은 삶이나 하나님의 일방적인 도와주심 보다는, 뭐든지 내 힘으로 다 처리해서 그 생긴 것을 영원히 자기 업적으로 삼으려는 강력한 의지로 뭉쳐지게 된다.
이런 식으로 살면 너무 소소하게 작은 문제에 집착하는 경우가 많아진다. 크게 심각한 문제도 아닌데 단지 자신의 자존심과 체면을 우선시하다 보니 상대방에서 마음을 상처를 주게 된다.
이럴 때는 성도된 자가 마음을 넓혀야 한다. 고린도전서 2:2-7에 보면, 성도라는 신분 자체가 돈을 주고서는 얻을 수 없이 값진 신분이기에 이 세상 것에 대해서 양보하므로서 우리의 죄를 씻어주는 '어린 양의 피'가 소중함을 삶을 통해서 보여주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 자체가 또 한 사람의 모세가 되어 생활을 통해 남들에게 천국의 모습을 알릴 수가 있는 것이다.
18:8-12
이스라엘이 애굽 사회로부터 구원받았다고 하지만 실은 애굽 나라가 정책상 이스라엘 민족을 따로 분리시킬 필요가 있어 보내준 것을 이 이스라엘 사람들은 자신의 신앙을 합리화하기 위해서 억지로 하나님을 끌어당겨서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았다고 우긴다는 것이다.
즉 애굽 왕과 그 백성들이 마음이 착한 것을 가지고 마치 이스라엘 하나님이 애굽 나라를 공격해서 얻어낸 백성인양 여기는 것은 순전히 종교적인 자기 집착에서 비롯된 결과라는 겁니다. 지금도 세상은 이런 식으로 본문을 이해한다.
우리는 저들이 그렇게 주장하는 것에 대해서 강제로 막아서는 안된다. 왜냐하면 옛날은 옛날 사람들의 구원 사역이 있고 오늘날에는 우리들의 구원 사역 따로 있다. 여전히 불신자들에게 둘러싸여서 사는 것은 마찬가지라는 이야기이다.
구원이란 신앙이 없는 세계로부터 분리됨이라는 현상은 어제나 오늘날이나 변함이 없다. 문제는 소위 교회 다니는 사람이 먼저 이 점에 대해서 겁을 집어먹고 있다는 것이다. 즉 성경에 나오는 대화는 계속 성경 속에 그냥 박혀 있기를 원하는 것이다.
성경 속의 대화는 성경 안에서만 통하는 대화이어야 하지 절대로 성경 밖으로 튀어나와 일상적인 대화로 이어진다면 난처하다는 것이다. 이러니까 예수님으로부터 "마지막 때에 믿음을 보겠느냐"라는 소리를 듣는 것이다.
특이성이 생겨야만 신앙이다. 신앙다운 특이성이 나오지 않는다면 불신자와 같든지 아니면 남의 신앙절차를 모방한 것에 해당된다. 사람을 의식하려고 하지 말아야 한다.
사람들끼리는 '하나님의 은혜'라는 말을 사용하는 것을 금지하게끔 되어 있다. 모세와 이드로의 대화에서 '은혜'라는 말을 사용하고 있다. 그것은 그만큼 하나님 앞에서 겸손하다는 증거이다.
만약에 이들의 대화를 옆에서 듣고 빈정대거나 놀리는 자가 있다면 그 사람이 본문의 말씀처럼 '이스라엘에 대해 교만히 행한 애굽'과 같은 사람에 해당된다. 신앙이란 결코 세상과 섞여버릴 속성이 아니다.
언제, 어디서나 그 특이함을 드러내게 되어있다. 따라서 이런 점이 보이거든 이드로처럼 마음껏 하나님에게 감사하고 고마워 해야 한다. 이 신앙으로 인해 하나님의 은혜로 인도받고 있음을 마음껏 자랑하게 된다.
18:13-19
이방인 제사장인 볼 때에 사위인 모세는 요즈음 말로 하면 대통령처럼 보였던 것이다. 이것은 특정 조직이 엄연히 생겼다고 보고 그 조직 전체가 모세 개인에게 소유된 것이라고 간주될 때나 생기는 현상이다. 사람의 집합체 자체가 마치 하나의 개인처럼 인식될 때, 개인보다 더 상위에 존재하는 복종의 대상체로서 여겨진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위에는 오직 하나님만 계셔야 한다.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에 의해서 이스라엘이 진행된다. 그러나 이드로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눈에 보이지 않는 것도 눈에 보이는 것으로 전환하므로 보다 확실하게 하나님이 함께 하심을 느낄 수 있다고 본 것이다.
고린도후서 5:7에 보면, "이는 우리가 믿음으로 행하고 보는 것으로 하지 아니함이로라"라고 되어 있다. 즉 사도 바울은 보는 것으로 행하는 것 하고 믿음으로 행하는 것을 따로 구분 지었다. 믿음으로 행하는 것은 결코 보는 것으로 행하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이런 믿음이 과연 있다면 이런 믿음으로 교회라는 것을 어떻게 규정해야 하면은 일단 교회를 보이는 것으로 보면 곤란하다. 만약에 교회를 보이는 것으로 규정하게 되면, 그 교회가 커지는 것을 마치 하나님이 도우셔서 생긴 현상이라고 보고, 만약에 교회가 작아지면 아예 교회가 아닌 것처럼 생각하기 일쑤다.
복음을 아는 성도는 '많음'과 '조직'을 이길 수 있는 믿음이라야 한다. 즉 보이는 조칙체를 극복하고 보이지 않는 분의 약속을 믿는 믿음이어야 하는 것이다. 이드로가 모세에게 계급을 가질 것을 조언하는 이유는, 일단 이 단체가 모세 손에 움직이는 것을 보는 대로 보고서는 그것으로 이스라엘을 확정 지으려고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참 이스라엘은 눈에 보이는 조직체로서 유지되고 운영되는 것이 아니다.
모세가 결코 이스라엘을 만든 것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이 마치 모세가 개인적으로 전부 책임져야 될 자기 소유의 백성이라는 오해를 외부에서 가질 수가 있다. 따라서 우리는 사람이 조직체를 원하는 이유에 대해서 먼저 조사해야 봐야 한다.
성경은 눈에 보이는 교회를 추구하는 것 자체가 도리어 참된 교회, 즉 눈에 보이지 않는 교회를 핍박하는 결과를 낳는다고 알려주고 있다. 두 세 사람이 예수님의 이름으로 모인 곳에도 예수님이 계신다. 아무리 사람이 많이 모여도 복음으로만 모이지 아니하면 교회 아니요, 아무리 사람이 적게 모여도 복음으로만 모이지 아니하면 그런 작은 교회 역시 교회라고 볼 수 없다.
보이지 않는 교회는 조직이나 숫자와 무관하다. 오직 예수님의 이름으로, 또 그 이름을 위하여 모이게 된 곳이 교회다. 스데반 집사님은 혼자서도 예수님에 합류했다. 복음 이외에 다른 이유로 모이면 교회가 아니다.
19:3-6
이스라엘이 '민족'이라는 대단위로 구원이 되었다는 것은 자기네들 사이에 윤리적이나 도덕적인 차이 때문에 구원이 되고 아니 되고가 아니다.
오직 어린 양 때문에 구원된 것이다. 이것은 초월적 능력이다. 그 능력이 얼마나 대단하지 '독수리 날개로 너희를 업어 내게로 인도하였다'라고 표현하신다. 즉 인간의 능력은 조금도 가미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이러한 능력은 너무나도 초월적이고 인간의 모든 능력을 능가하는 능력이기에 이미 그 능력 속에 있는 자들은 조금도 이 세상에서 인간 정신에 패배 당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자신의 힘을 더 추가적으로 보탤 필요도 없다. 독수리란 원래 인간 손이 닿지 않는 고공을 나는 새다. 독수리 날개에 얹혀서 구원되었다는 말은 더 이상 인간에게 나올 능력 없이도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 갈 수 있는 조건이 확보되었다는 뜻이다.
과연 이러한 초월적 능력이 오직 이스라엘 받은 언약에 있음을 기생 라합이 그 대열에 합류한다. 여호수아 2:9-11에 보면, 무서운 하나님의 전쟁을 미리 앞당겨 파악하여 자신의 조상의 신과 민족을 배반하는 그것으로 기생 라합은 구원받은 것이다. 즉 참 하나님은 오직 언약대로만 실시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구원받는 자가 또 있다. 바로 룻이다. 룻은 이방 여자다. 그녀는 이스라엘 본국의 백성과 그들이 믿는 여호와 하나님 사이의 관계에 대해서 잘 보아왔다. 비록 자기 백성이라도 언약을 위배하니 가차 없이 멸망한다는 것을 보았다. 따라서 룻은 참으로 살아계신 하나님은 오직 언약대로 일하시는 여호와 하나님 밖에 없다고 확신했다. 오늘날 우리도 마찬가지다. 이스라엘의 전 역사는 하나님에 의해서 매 맞다가 결국은 자신이 믿는 하나님으로부터 멸망 당하는 역사이다.
그 정도로 하나님은 오직 언약을 방해 받지 않고 달성해 나가시는 하나님이다. 그 언약의 끝에는 언약의 완성자가 계신다. 그 분이 바로 예수님이다. 하나님은 이 마지막 때에 예수님과 맺은 언약으로 이 세상을 향하여 전쟁을 벌리고 계신다.
언약이 있는 자는 승리요, 언약이 없는 자는 패배하다. 왜냐하면 언약에서만 하나님이 원하시는 의가 나오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믿는 자에게 의인의 근거가 되시는 분이다. 그 의가 없이는 우리가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 바로 이처럼 예수님을 믿는 자가 오늘날 거룩한 제사장 나라다.
19:10-15
본문은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오직 '죽음'만이 있을 뿐이라는 점을 명백히 한다.
사실 인간들은 신에 대해서 이야기하면서 가볍게 여긴다. 있어도 그만도 없어도 그만인 존재로 간주했다. 실제로 하나님을 본 사람들이 없으니 그럴 만하합니다. 하지만 본문에 나오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도저히 그럴 수 없다.
인간들은 비로소 하나님 앞에서 죽음의 진면목을 마주한 것이다. 자신은 마땅히 죽어야 됨을 알게 된 것이다. 죽어야 될 존재로서 서는 자신은 오직 두렵고 떨림으로만 하나님과 마주 설 수밖에 없다.
히브리서 12:18-24에 보면, 하나님 앞에서 그 어떤 세상적인 요구사항도 통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저 장엄한 두려움 외에는 모든 것도 비현실적 사실에 불과하다. 죽음 외에는 아무 것도 현실일 수가 없다. 그저 환상의 조작에 해당된다. 거룩보다 더 무서운 것은 없다는 사실을 분명히 한다.
이런 처지에 놓여 있는 것이 인간임을 이스라엘 백성들은 처음으로 알게 되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보고 싶어 초청해서 생긴 현상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일방적으로 통고해서 등장하신 것이다. 이제부터 이스라엘 백성은 왜 하나님께서 이런 일을 시작하게 되는지를 알아야 한다.
사실 하나님을 얼마든지, 언제든지 이 인간 세상을 벌해버려도 무방하다. 하지만 그 무서움은 오직 자기 백성들에게는 구원을 위한 무서움으로 나타내신다. 이사야 6:1-6에 보면, 이사야 선지자에게 하나님은 역시 무서운 하나님으로 등장했다. 이사야는 얼굴이 하얗게 되었을 것이다. 그 자리에게 충분히 이사야를 죽여도 이사야는 할 말이 없을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의 그 무서움은 곧 무서운 제단 불의 사용으로 이어지는데 그 제단 불은 이사야의 죄를 제거하는 식으로 움직인다.
즉 하나님께서 인간의 죄를 제거하시는데도 여전히 엄청난 무서움이 동원되고 그 무서움을 기반으로 해야 한다는 원칙은 변동이 없다는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무서움을 제단 위의 제물이 대신 받아낸다는 원칙을 준수해야 나올 수 있는 결과다.
이 하나님의 무서움은 신약에서 전혀 다른 방식으로 전개된다. 즉 '깊은 희생적 사랑의 강도'로 이어진다. 무서운 하나님은 신약 때 와서 인간들로부터 형편없는 대우를 받고 도리어 죽임을 당하는 분으로 등장된다. 왜 그래야 하느냐 하면, '은혜 위에 은혜'로 하나님은 계시하시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움직임 하나하나에는 하나님의 무서움이 다 담겨있고 서려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러한 하나님의 무서움을 대신 희생당함이라는 일관적 정신 속으로 계속 쓸어넣고 계신다. 급기야 십자가상에서 예수님은 하나님의 진노의 진면목을 대신해서 다 보여주신다. 하나님께로부터 버림받고 저주받으신 것이다. 이러한 희생은 하나님의 무서움 없이는 일어날 수 없는 일이다. 예수님은 자기 백성을 위해 하나님의 백성에게는 더 이상 하나님의 거룩에서 나오는 저주가 전달되지 않도록 자신이 차단 막이 되신 것이다.
예수님은 십자가상에서 인간이 받을 수 있는 모든 수모를 받기 위해서 철저하게 약한 모습을 보이신다. 사람들로부터 주저 없이 뺨을 맞으시고 옷 벗김을 당하는 수치를 당하셨다. 사정없는 채찍에 노출된 육체를 맡겼다.
이것은 인간들이 평소에 인생이 힘 든다는 이유만으로 사정없이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 원망의 소리를 퍼붓는 그 교만함을 들추어내기 위해 인간의 그 어떤 수모보다 더 낮은 위치에서 인생을 살아가시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로서 그 어떤 인간도 예수님 앞에서 죄인 아니다 고 할 자가 없게 되었다. 바로 이런 죄에 대한 하나님의 무서움은 다 예수님이 당한 고통의 몫으로 되돌아오는 것이다. 이로서 구약 때의 무서운 하나님의 무서움 못지않고 신약 때의 희생적 사랑의 깊이가 더 충격적으로 성도에게 다가오게 된다.
사도는 이 복음을 증거 하는 자들인데 이들의 인생은 고린도전서 4:9-13에 보면, 이 땅에서 쓰레기 같은 취급을 받으면서 살아감으로서 하나님의 희생적 복음 원칙은 계속 우리들에게 전달된다. 과연 사도들이 억지로 이 길을 간 것이 아니다. 그들은 복음의 세계 안에 들어가 있기에 복음이 주는 기쁨이 이러한 고난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좌절하지 않게 한다. 억지가 아니라 예수님의 자비하심에 감격하면서 그 길을 간 것이다.
19:16-21
21절에 보면, "나 여호와께로 와서 보려고 하다가 많이 죽을까 하노라"라고 되어 있다. 즉 만남이 이루어진 그들에게도 하나님은 여전히 죽음의 하나님이었다. 그러니 만나나 아니 만나나 인간은 하나님 앞에서 죽어야 될 존재에 불과한 것이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이것으로 인류 역사를 끝장 내어버리지 왜 일부러 이스라엘 백성을 찾아드신 것일까?
그 이유는 말씀의 갱신, 혹은 언약의 갱신과 관련 있다. 그동안 인간은 자연 세계의 덕으로 먹고 산다. 자연 세계의 안정감에 전적으로 의존한다. 그렇게 안정감을 보이든 자연세계가 하나님의 등장으로 여지없는 흔들림을 보이고 있다. 이것은 바로 인간들이 딛고 사는 이 세계가 결코 하나님께서 최종적으로 계획하신 세계가 아니라는 말이다.
불안감은 생존의 위협이 된다. 하나님이 이스라엘과 함께 있는 공간을 흔들리게 하는 것은 현재 인간들이 의지하고 있는 모든 세계를 더 이상 의지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함이다. 이 자연세계에 뿌리를 내는 것으로 안심할 수 없다는 말이다.
하지만 인간의 입장에서는 이 자연세계에 뿌리를 박지 아니하면 달리 어떻게 할 대책이 서지를 않는다. 이 땅에서 숱한 문화와 문명이 세워지고 있다. 있는 것을 조립하고 다듬어서 새로운 문화로 이어가고 있다. 이것을 흔히들 '발전'이라고 한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은 발전하고는 전혀 상관없는 일을 하셨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은, 그동안 경계선 쳐진 이 세계를 하나로 통합해 버리는 일이다. 인간이 에덴동산에서 추방되고 난 뒤부터는 자연세계의 운명에 같이 적용될 입장에 놓여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생명나무로 살아야 될 인간이 이제는 하나님의 생명나무의 법칙에서 끊어진 상태에서 살려니 자연 이 자연의 법칙에 예속된 채 같이 움직일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 나라와 인간 나라 사이의 경계선이다.
따라서 인간의 한계는 명확해졌다. 만약에 이 자연세계가 흔들린다면 그것이 인간에게는 끝장이다. 같이 흔들려야 한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거주지를 흔들리게 하시면서 임재하신다. 이 세상은 인간들의 최후의 도피처가 될 수 없다. 더 이상 인간은 하나님의 낯을 피해 숨을 곳이 없다.
하나님께서 세상에 임재하실 때에 세상을 흔드시는 이유는, 더 이상 이 세상은 안정된 세계가 아님을 알려주기 위해서이다. 이 세상은 이 세상이 안고 있는 죄악으로 인해 불안정하다는 것이다. 노아와의 계약이 만료된 것이다. 노아 언약의 실제 체결자는 노아가 아니라 예수님이다.
사람들이 이 예수님을 밀치고 살해함으로서 세상은 더 이상 유지할 이유를 상실해버린 것이다. 시간이란 공간과 같이 간다. 공간이 깨어지면 시간도 깨어진다. 아무리 긴긴 시간 이어져왔다고 해도 공간이 깨어지면 그 순간에 느끼는 시간의 길이는 찰라에 해당될 뿐이다.
이제 강림하신 하나님 앞에서 인간은 아무 것도 허용되지 않는다. 산 위에서 울리는 나팔소리는 다른 세계의 실재함을 알려주는 신호다. 불타는 광경은 죄악된 세계에 대한 하나님의 소멸의지를 말해주시는 것이다.
하나님의 나팔소리는 하나님의 계명과 더불어 나타난다. 즉 주어진 계명에 준해서 경계선 안에 있는 인간 세계를 심판해버리겠다는 하나님의 의지 천명이다.
하나님의 계명은 일점 일획이라고 무시당할 계명들이 아니다. 마지막 심판의 기준들이다. 온 우주를 다 동원해서라도 말씀에 의한 심판을 취소시킬 수 없다. 히브리서 9:27에 보면,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라고 되어 있다.
데살로니가전서 4:14-17에 보면, 모든 것이 당연히 무너진다. 인간의 모든 질서도 다 깨어진다. 우리는 현재 우리가 당연히 무너질 세계 속에서 당연히 우리도 같이 죽어야 한다는 의식으로 살아가고 있는가? 예수님이 오시고 난 뒤에는 이제 십자가 복음으로만 심판이 이루어진다. 고린도전서 1:18에 보면,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라고 되어 있다. 여기에 보면 '멸망하는 자'가 나온다. 구원은 오직 복음으로만 이루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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