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 강의(09. 9. 25) 2강
광주 강의(09. 9. 25) 2강
이름 : 서경수(IP:116.37.101.7)
광주 강의(09. 9. 25) 53-2
디모데후서 4장 8절부터 보면,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니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니라.”고 했어요.
여기에서 ‘여러 개를 주느냐, 한 개를 주느냐?’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하나님의 구원 받는 백성이 한 사람입니까? 아니죠. 두 사람, 새 사람이 될 수 있지요? 여러 사람이 될 수 있지요? 한 사람이 아니고 여러 사람인데, 그러면 ‘의의 면류관을 여러 개 준비해 놓았는가?’
그런데 본문에 보면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 주지요. 그러면 의의 면류관이 여러 개가 되어야 하는데, 하늘나라의 특징은 양으로 안 따진다는 겁니다. 하늘나라는 죄를 양으로 안 따져요. 그러나 지상의 교도소는 죄가 가벼운 사람과 무거운 사람의 형량이 달라요. 노상 방뇨한 사람과 살인한 사람의 형량이 같을 수가 없어요.
그런데 하늘나라는 같아요. 하나님의 심판은 양으로 따지는 것이 아니라 질로 따져요. 유황불에 들어가면 조금 뜨거운 곳, 적당히 뜨거운 곳, 굉장히 뜨거운 곳 이런 차이가 없어요. 같은 유황불이에요.
김영임의 ‘회심곡’을 들어보면 형벌의 차이가 있어요. 죄의 양에 따라 달라요. 그러나 하늘나라에서는 생명책에 기록된 사람은 천국 가고, 생명책에 이름이 없는 사람은 전부 유황불에 들어가요. 유황불에 온도 차이가 나는가? 아니에요. 다 똑같아요. 질적으로 지옥은 어느 구석에 가도 동일하며, 영원히 그곳에 갇혀 있어야 됩니다.
지옥 가는 자의 목록이 요한계시록 21장 8절에 보면 나와 있는데, ‘믿지 않는 자와 거짓말 하는 자’ 등이 있습니다. 그러면 ‘믿지 않는 자’와 ‘거짓말 하는 자’의 방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천국과 지옥에는 칸막이가 없어요.
천국에서는 한 사람, 두 사람이 아니고, 오직 하나만 있어요. 질적으로 하나만 있어요. 그래서 여기서는 한 사람, 두 사람 따지면 안 돼요. 144,000 때문에 요즘 한국교회가 아주 시끄러워요. 144,000 명단에 들어가려고. 이만희 목사라는 사람이 주장하기를, 훈련을 통과한 사람만 이 명단에 들어간다고 교인들을 훈련시킵니다. 이것은 ‘여호와 증인’도 마찬가지고, ‘신천지’도 그렇습니다.
요한계시록의 144,000이 뭐냐고 하면서 엉터리 해석들이 나오는데, 144,000은 뭐로 축소가 되느냐 하면, 12 x 12 x 1,000으로 축소됩니다. 이것은 다시 12 x 12로 축소되고, 이것은 다시 12로 축소되고, 이것은 다시 1로 축소됩니다.
왜 그러냐? 1에서 나온 은혜가 144,000이 되기 때문에 그래요. 그렇다면 이 뒤에 12 x 12 x 1,000이니까 1,000이 뭐냐 하면, 모든 택한 자의 완료입니다. 그래서 이 숫자는 양적으로 퍼져도 그것과 관계없이 질은 오직 하나에서 나온 거예요. 이것이 요한계시록 1장에 나옵니다. 성전에 계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일곱 교회를 손으로 다 쥐고 있는 거예요. 오른 손으로 일곱 교회를 쥐고 있으면 어느 교회이든 관계없어요. 모든 교회는 주님의 일곱 교회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렇다면 일곱 교회, 즉 7이라는 숫자를 소급해 보면 어디에서 나왔느냐? 하나에서 나왔습니다. 창세기 1장에서 몇 일만에 창조했습니까? 칠일 만에 창조했지만, 창세기 2장에 보면 이 창조가 안식의 때에 올라가면 7일이 하나가 되어서 7의 반복은 하나를 말해주기 위한 되풀이가 되지요. 항상 안식일에는 하나님의 창조하심, 한 분이 이 모든 것을 창조했다는 겁니다.
동양철학은 하나에서 둘이 돼요. 동양철학은 전체를 태극이라고 하고, 태극에서 음과 양이 나오고, 음양에서 네 개로 또 갈라지요. 네 체질. 태양인, 태음인, 소음인, 소양인.
그런데 성경은 하나에서 둘이 나오는 것이 아니고, 모든 인간이 다수가 나와요. 왜 그런가 하면, 다수가 나와도(아무리 숫자가 많아도) 결국은 하나로 소급되기 때문에 ‘전체는 한 분 하나님에 의해서 만들어졌다.’ 예수님을 위해서 악마든 천사든 인간이든 모든 것은 한 분을 위해 만들었습니다.
하나님의 창조가 하나임을 보여주기 위해서 메시아가 한 분입니다. 그래서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요14:9)”고 하지요.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다.’ 그 하나. 인간은 전체가 다 하나로 모아지고 그 하나에서 모든 인간이 알아보지 못하는 하나에서 또 하나가 나와요.
하나에서 둘이 되는 것이 아니고 하나에서 하나가 나오는데 이것이 뭐냐 하면, 바로 성부와 성자 두 분이 의논했어요. 그래서 하나에서 하나가 나오는 것을 예수님이 뭐라고 하시는가 하면 “내가 나를 위하여 증거하는 자가 되고 나를 보내신 아버지도 나를 위하여 증거하시느니라(요 8:18).”고 했어요.
겨울 수련회에서 요한복음을 할 계획인데, 아마 이해 못할 말 많이 나올 겁니다. 이 말을 그 당시 사람들도 못 알아듣지만 지금 우리에게 설명해도 굉장히 어렵지요.
그러면 이 다수가 하나 되는 것을 알려면 어떻게 하는가? 다수를 하나로 만드는 작업을 하지요. 그 다수를 어떻게 하나로 만들까요? ‘바둑 둘 줄 아는 사람?’ 하면 다수가 나오지만 바둑 못 두는 사람이 있잖아요. 기아 타이거즈가 프로야구에서 1등을 했는데 광주 사람들이 상당히 기뻐하지요. 그러나 대구 삼성 라이온즈를 응원하는 사람은 싫어하지요. 왜? 자기 팀이 12년 동안 계속 4강에 들어갔는데 이번에 못 들어가서.
그러니까 뭐로 만들면 하나로 만들 수 있겠습니까? 이미 공통점이 우리 허락 없이 들어와 있어요. 그것이 뭐냐? 죽음입니다. 고린도후서 5장 14절.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었은즉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라.”
모든 인간은 이미 죽은 자입니다. 그래서 그것을 확인하는 차원에서 늙고 병들고 죽습니다. 중요한 것은 ‘이미 죽었다’는 것이지, 서서히 죽어가는 것이 아닙니다. ‘선악과를 따먹는 날에는 정령 죽으리라.’고 했잖아요. 선악과 따먹는 순간 이미 죽었어요. 그런데 아담은 몇 살까지 살았지요? 900살 넘게 살았잖아요. 그래도 그것은 이미 죽은 것을 표시 내는 것에 지나지 않아요.
이 세상에서 피카소가 어떻고, 아인슈타인이 어떻고, 노벨 평화상을 누가 받았고 하는데, 다른 사람이 아인슈타인을 볼 때는 하나로 보지 않고 다수로 봅니다. 무슨 말인가 하면, ‘나는 수학도 못하는데 아인슈타인은 물리학 천제구나.’ 나는 이러한데 아인슈타인은 이렇구나. 라고 하면 아인슈타인과 내가 같습니까, 다릅니까? 달라지지요. 그러면 이것은 하나가 아니잖아요.
그런데 본인이 아인슈타인이라고 생각해 봅시다. 행복할까요? 아인슈타인이 남들로부터 인정을 받고 추방을 받을 때 일시적으로 좋을지 모르지만 근본적인 아인슈타인의 문제는 수학문제를 못 풀어서가 아니라 ‘나는 왜 죽어가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공포가 모든 인간에게 있습니다.
모든 인간은 꿈을 꿉니다. 꿈은 공포입니다. 모든 꿈은 공포를 해소하려는 마음 때문에 일어납니다. 꿈에 날아다니기도 하고 하는 것은 떨어지면 죽는다는 의식 때문에 나온 것입니다. 꿈에 누구에게 폭행을 가하는 것은 평소에 미운 사람에게 복수하지 못해 한이 맺혀서 그래요.
잠을 잘 때는 의식이 중단되니까, 무의식 속에서 평소에 내가 무서웠던 것을 가릴 수 있는 자체적인 드라마를 만들어요. ‘내가 이렇게 했다면 이런 문제는 발생하지 않았을 것인데.’ 라는 식으로. 내가 현실 세계에서 채우지 못한 것을 꿈에서나마 잠시 채워봄으로 말미암아 마음의(심적인) 균형을 맞추는 것입니다.
꿈에서 균형을 맞추는 것은 괜찮은데, 이것을 현실 세계에서 균형을 맞춘다고 하는 사람은 정신 분열증 환자들입니다.
이게 목사한테 있어요. “주여, 나는 죄인입니다. 나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이렇게 나오다가 무의식 속에 목사 티를 내요. “어디 감히 평신도가 나를 무시해!” 목사라는 직분이 인간을 버려놓았어요. 왜 목사가 안 좋은가 하면, 하나를 독자적은 자기로 대체해 버렸어요.
종이가 이렇게 있으면(이것을 삶의 환경이라고 봅시다.) 주체라는 것은 종이를 밀어 올리면서 돌출되는 것입니다. 돌출 되면서 그냥 돌출되는 것이 아니라 내 주변에 이용할 만한 것을 끌어들여서 ‘이것은 나야!’라고 돌출할 때 그게 바로 주체라는 거예요.
평소에 아빠, 엄마가 이야기할 때 얘가 자고 있으면 얘라는 주체는 발생하지 않는데, 얘가 ‘응아 ~’ 하고 울면 엄마, 아빠가 ‘우리만 있는 것이 아니고 아이도 있구나.’ 하고 그 주체를 확인하게 되지요. 얘들이 왜 웁니까? 자기 주체를 알리기 위한 동물적 본성입니다.
남의 집에서는 얘가 잘 안 울어요. 왜냐하면 그쪽 환경에서 돌출될 주체가 없기 때문에. 남의 집에서는 점잖은 척해요. 그러다가 자기 집에 오면 생떼를 부리면서 난리를 쳐요. 신사분이 혼자 길을 갈 때 거지가 구걸을 하면 무시하고 지나갑니다. 그러나 신사분이 애인과 같이 갈 때는 그냥 지나치지 않고 돈을 줍니다. 주변 환경이 나라는 존재를 인정해 줄 수 있는 것인지를 탐색해서 행동에 나서는 것이 인간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그런 자기를 미워하라고 하셨잖아요. ‘너희들끼리는 통하지만 심판자인 나에게는 그런 것이 안 통한다.’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결국은 그 신사는 자기가 스스로 신사라고 착각하는 그것 때문에 누구한테 이용당했는가 하면 거지한테 이용당한 거예요. 누가 센 놈입니까? 거지가 더 센 거지요. 거지가 신사의 허위의식, 스스로 신사 되고자 하는 의식을 이용한 겁니다.
하나님이 보시기에는 전부가 아담 안에서 하나의 질인데, 인간은 그것을 용납하지 않고 독자적으로 나만이 하나고 나머지는 전부 다 하나가 아니고 나를 하나로 만들기 위한 배치물로 보지요. 이것을 가지고 ‘자기 역사’라고 합니다.
사람들이 ‘역사’라고 할 때, 실제 있는 일을 역사라고 한다고 하는데 그것이 아닙니다. 어떤 환경이 있으면 그 환경 속에 과거, 현재, 미래가 들어있단 말이지요. 그런데 이 환경에서 내 주체가 돌출되면 돌출된 위치에서 과거, 현재, 미래를 봅니다. 즉 나의 있음을 중심으로 ‘이순신은 나에게 어떤 의미이고, 안중근은 어떤 의미이고, 에디슨을 보면서 나는 과학자의 길을 걸었다.’ 이런 식입니다. 에디슨과 자신이 무슨 관계가 있습니까? 아무 관계없어요.
평소에 엄마 말 잘 듣든 아이가 어느 날 우연히 신데렐라라는 동화책을 보고 난 뒤에 밖에 나갈 때 바지를 안 입으려고 해요. 꼭 치마만 입으려고 고집해요. 왜 그렇게 되었는가 하면, 아이가 치마를 입고 어디를 갔는데 누가 자기에서 “너 신데렐라 같이 예쁘구나.”라고 했어요. 이런 소리를 듣고 나니까 그 신데렐라와 자신이 무슨 연관이 있는 줄 알고 그 다음부터는 계속 치마만 입어요. 치마 입은 자신을 보면서 ‘신데렐라 같다’는 그 소리를 듣고 싶어 하는 거예요.
이것을 ‘환상’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젊은이들에게 ‘나중에 뭐 될래?’ 라고 물으면 그 속에는 타인의 욕망이 들어있어요. 남들이 나에게 원하는 것을 내가 원하게 돼요. ‘케보이’라고 하는데, 라캉이 그렇게 말했어요. 내가 원하는 것은 없어요. 남들이 ‘너는 이렇게 되었으면 참 좋겠다.’고 이야기한 그것을 내가 원하게 되는 겁니다. ‘이렇게 하면 어때요?’ 남에게 물어보면서 살아가는 거예요.
그래서 사람들은 돈을 벌면 남에게 자랑하게 되어 있어요. 골프채를 차에 싣고 다닌다든지 해서 ‘당신들이 원하는 것을 내가 먼저 선점했다.’는 것을 보여주잖아요.
목사가 되려는 사람이 있으면 이렇게 물어봐야 돼요. ‘당신은 어느 목사가 좋게 보여서 목사 되려고 하는가?’라고. 지금 우리 십자가마을에 이근호 목사가 많이 씹히는데, 그래서 십자가마을에서는 목사 되려고 하는 사람이 없어요. 그런데 만약 제가 교인 5,000명 되는 교회를 담임하고, 연봉이 1억쯤 되고, 고급 승용차를 타고 다닌다면 십자가마을 젊은 아이들 중 목사 되려고 하는 사람이 한 두 명이 아닐 겁니다.
이것을 끊어야 돼요. ‘누구 때문에, 누구처럼’을 끊어야 됩니다. 그렇게 되면 나는 다수가 아니고 하나에 속하는데, 그 하나가 뭐냐 하면, 죄인입니다. 나는 그냥 죄인 속에 한 사람. 나는 죄인이라는 풀장에 하나의 물방울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야 해요.
그렇다면 사도바울이 받은 면류관은 뭐예요? 이 면류관은 나만 받는 것이 아니고 ‘나처럼 주님이 오실 것을 기다리는 사람은 다 받는다.’고 했는데, 분명히 숫자를 헤아리면 여러 명이지만 하나님 보시기에는 모두가 한 몸이고, 한 지체고 하나입니다.
그러면 그 하나 됨을 유지하려면 각자 서로를 비교하면 안 되고 놋 뱀을 봐야 됩니다. 십자가를 바라보며 살아가야 됩니다. 그래서 제가 십자가에서 눈을 떼지 말라고 하는 것입니다. 십자가에서 눈을 떼면 하나가 아니고 다수가 되고, 다수가 되면 그 사이에 경쟁이 생겨요.
사도바울은 말하기를 ‘면류관을 나만 받는 것이 아니고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가 다 받는다.’고 했습니다. 그러면 주를 왜 기다립니까? 이 모두가 하나 됨을, 그 원천 때문에 우리가 하나 되었다는 것을 믿는 사람이 바로 주를 바라보는 사람입니다.
제가 어제 대전 강의에서 처음 참석하신 분이 있어서 어려운 내용을 쉽게 한다고 했는데도 어렵게 되고 말았어요. 그것이 뭐냐 하면, 사람이 길게 살아도 90년 정도인데, 내가 태어나기 이전에 누가 계획해서 나를 만들었습니까? 분명히 내가 없는 상태에서 어떤 분이 나를 만들었단 말이지요.
그렇다면 내가 아는 것은 기껏 내가 태어나서 살면서 죽을 때까지 포착된 하나님만 압니다. 그러면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라면 결국, 나는 종지(작은 그릇)밖에 안 되는데 여기에 담는 하나님은 종지에 담긴 하나님밖에 더 되겠느냐는 것이죠.
하나님은 종지에 다 담을 수 없는 큰 분이잖아요. 그런데 이 종지가 다른 종지와 다툰다면 우습겠지요? 옆에 있는 종지는 하나님의 뜻이 있어서 붙여준 거예요. 너와 내가 따로(각자)인 것 같지만 따로가 아니고 하나님 안에서는 전부 하나의 뜻을 위해서 있어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나 중심으로 따로 역사를 만들고, 나 중심으로 선과 악을 논한다는 것은 너무나 일방적인, 폐쇄적인 것이 됩니다. 노무현 씨가 자살을 했는데, 자기가 기껏 몇 년을 살았습니까? 겨우 60년 정도입니다. 그런 그가 세상을 다 압니까?
자기의 역사만 고집하다보니까 무엇이 선이고 악인지를 자기가 결정해요. 그래서 이럴 바에는 차라리 죽는 것이 낫다고 생각해서 부응이 바위에서 뛰어내렸지요. 왜 자신은 종지밖에 안 되면서 그 작은데 담아서 전체를 본다고 착각하느냔 말이지요. 그래서 옛말에 ‘시간만 지나가면 다 해결된다.’는 말이 있어요.
이번에 기아 타이거즈가 1등 했지요. 광주에서도 야구에 관심 없는 사람은 ‘왜 저렇게 야단들이냐’고 합니다. 그리고 기아 타이거즈의 팬이라 할지라도 막상 자기 아이가 아플 때는 타이거즈 1등 한 것 잊어버려요. 자기 아이 아픈 것이 더 우선이 되니까. 그만큼 타인이에요.
그리고 아무리 우승을 해서 기뻐해도 시간이 지나면 다 별 것 아닙니다. 시간 지나면 물에 물 탄 듯이 별 것 아니게 됩니다. 중요한 것은 의의 면류관 주실 분을 기다려야지 ‘나 잘났어요.’ 하는 것은 시간 지나면 아무 소용없습니다. 젊을 때 미남이고 장동건이 잘생겼고 하지만, 90된 장동건을 생각해 보세요.
전도서에 나옵니다. 사람이 귀도 안 들리고 눈도 안 보이고 할 때에, 이것이 죽어가는 것이 아니고 원래 죽은 인간이에요. 육체가 흙이 되는 것이 당연한 것입니다. 시간을 거꾸로 돌려보세요. 흙에서 늙은이가 되었다고 젊어져 간다고 생각해 보세요. 그런 관점에서 젊음을 보면 젊다는 것을 자랑하거나 교만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게 정상이에요.
그런데 그 생각을 못해서 ‘내가 늙으면 안 되는데.’ 이러고 있단 말이지요. 주름살 편다고 성형수술하고 주사 맞고.
나는 결국 하나에 흡수됩니다. 흡수, 통합되는 것을 저는 ‘흐물흐물해 진다’고 했지요. 아무것도 아닙니다. 자식을 군에 입대시키고 엄마가 제일 서글픈 것은, 군에 갈 때는 상당히 젊었는데 제대할 때 늙어 보일 때 마음이 아픕니다. 자기 늙는 것은 생각도 안 하고. 시집간 딸을 오랜만에 만나면 ‘시집가서 고생 많았구나.’ 하면서 가슴 아파합니다. 세월이 지나서 늙었을 뿐인데.
그래서 하늘나라에는 남자도 여자도 없고, 아비도 자식도 없고 천사와 같아요. 시집도 장가도 아니 가고 모든 것이 하나입니다. 모세나 엘리야나 같이 살아요.
지금 하늘나라가 복잡한 것이 뭐냐 하면, 예수님이 누구 자식입니까? 다윗의 자손이죠. 그러면 예수님은 다윗에게 뭐라고 해야 됩니까? ‘할아버지!’ 이렇게 불러야 되겠네요. 그 문제를 예수님이 바리새인에게 지적했어요. ‘예수님이 다윗의 후손인데 어떻게 후손이 다윗의 주가 되느냐?’는 것이지요.
바리새인이 답변을 못해요. 왜 못합니까? 인간의 시간론 때문에. 역사는 과거로부터 흘러가면 그만이죠. 그런데 묵시에서는 시간이 흘러가는 것이 아니라 고무줄처럼 위에서부터 내려오기 때문에 사람들은 이해를 못합니다. 하나이기 때문에 그래요. 시간도 하나고 공간도 하나고 모든 것이 하나입니다. 물론 나중에 공간은 천국과 지옥으로 갈라지지만.
자, 그렇다면 이 하나 됨을 모르는 사람이 있어요. 디모데후서 4장 11절부터 보겠습니다.
“누가만 나와 함께 있느니라. 네가 올 때에 마가를 데리고 오라. 저가 나의 일에 유익하니라. 두기고는 에베소로 보내었노라. 네가 올 때에 내가 드로아 가보의 집에 둔 겉옷을 가지고 오고 또 책은 특별히 가죽 종이에 쓴 것을 가져오라. 구리 장색 알렉산더가 내게 해를 많이 보였으매 주께서 그 행한 대로 저에게 갚으시리니 너도 저를 주의하라. 저가 우리 말을 심히 대적하였느니라.”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사도직입니다. 아버지가 한 분이기 때문에 아들이 한 분밖에 없습니다. 이런 이야기는 어느 신학 책에도 안 나오지요? 왜 독생자입니까? 아버지가 한 분이기 때문에 아들이 한 분입니다. 아버지를 보여줄 두, 세 아들이 없다 이 말입니다. 한 하나님을 위해서 한 아들이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내 주에게 말씀하시기를(시110:1)” 하듯이.
그러면 아들에서 다수가 되어야지요. 이 다수를 뭐로 묶어야 된다? 아들에 이르기 위해서 하나로 묶어야 되잖아요. 그래서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아브라함은 이삭에게. 전부 하나지요. 이삭은 야곱에게서 나오지요. 이삭이 빛이라면 그림자는 누구입니까? 이스마엘. 야곱의 어두운 그림자는 에서.
분명히 이삭과 이스마엘 둘인데 하나님은 하나밖에 허락하지 않기 때문에 할 수 없이 이스마엘은 잘려야 돼요. 왜냐하면 하나를 설명하기 위해서 떨어진 것도 둘이 아니고 하나이어야만 되는 겁니다. 그래서 두 노선이 있어야 됩니다. 창세기 3장 15절에 뱀의 후손과 여자의 후손이 있듯이.
항상 하나의 노선을 이야기하기 위해서 같이 가고 싶어도 떨어져 나간 다른 하나가 있어요. 이 떨어져 나간 다른 하나는 항상 다른 하나를 핍박하게 되어 있어요. 이것이 갈라디아서 4장에 나오지요. ‘육체로 난 자가 성령으로 난 자를 핍박한다(29절).’
핍박한다는 것은 자기도 하나 되려고 붙다가 떨어져 나갔어요. 하나를 설명하기 위해서 떨어져 나간 다른 하나가 필요했다 이 말입니다. 천국이 하나임을 설명하기 위해서 떨어져 나간 지옥이 필요한 거예요. 지옥은 뭐냐? 천국 못 간 인간들이 지옥입니다.
그러면 하나에서 하나가 되려면 어떤 원칙이 있느냐? 요한복음 4장에 예수님과 사마리아 여인이 만납니다. 사마리아 여인이 몇 명입니까? 한 명이지요. 하나잖아요. 하나인데 예수님은 사마리아 여인을 뭐로 바꿔요? 하나를 둘로 만들어 놓고 하나를 발로 차버리지요. 첫 번째 사마리아 여인이 뭘 달라고 합니까? 물을 달라고 하지요. 사마리아 여인이 보는 물은 컵에 담기는 10리터, 또는 20리터. 양이 정해져 있잖아요. 그런데 이게 떨어져 나갈 사마리아 여인이 갖고 있던 물의 의미라면, 새로운 사마리아 여인이 등장하는 물은 몇 리터입니까? 이것은 아무리 퍼도 끝없이 나오는 물입니다. “네 배에서 생수가 흘러나오리라.”
그러면 우리 자신도 우리의 옛 사람과 새 사람이, 새 사람에 기 붙어서 옛 사람 차버리고 새 사람 되기 위해서 나를 둘로 잘라야 하는데, 그 일에 개입하는 것이 바로 십자가입니다. 옛 사람은 십자가에 죽었고, 예수님이 네 안에 사는 조건하에서만, 네가 살지 않는 조건하에서만 너는 새 사람이다. 다시 이야기할게요. 네 안에 네가 살지 않고 예수님이 사는 조건하에서만 너는 새 사람이다.
그러면 그 사람은 누구 힘으로 삽니까? 예수님 힘으로 사는 거죠. 예수님이 들어있는 그 하나 만들기 위해서 나만 있었던 나를 차버려야 되는 겁니다. 이게 자기부인이죠. 참 어렵습니다.
그래서 이 사마리아 여인에게 뭐라고 합니까? ‘네 남편을 불러오라(요4:6).’고 했지요. 남편이 다섯이었고, 지금도 한 명 사귀고 있지요. 지금 예수님께서 ‘남자관계를 청산하라’고 했습니까? 아니지요. 그런데 주님께서 영생을 주는 것은 남자관계를 정리하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의 영이 임하면 영생을 얻습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착해지면 구원 받는다는 것이 아니지요. 착하거나 나쁘거나 관계없어요. 오직 ‘성령으로 말미암아 죽을 너희 몸도 살리라(롬8:11).’고 했어요. 그러면 성령 받은 사람의 특징이 뭡니까? 나는 옛 사람 그대로인데, 남자관계 그대로인데 ‘주님 때문에 나는 영생 얻었다.’ 이런 고백이 나옵니다.
이렇게 되면, 옆에 최 집사, 박 집사, 김 집사가 각자 있더라도 동일한 하나가 들어가니까 다 같이 동일한 성령 때문에 한 몸이 되고, 하나의 백성이 되고, 하나의 하나님 나라 권속들이 되는 겁니다.
야곱에서 12명이 나왔지요? 그러면 이 12명의 그림자는 뭡니까? 이삭의 그림자가 이스마엘, 야곱의 그림자가 에서인데, 12 아들들의 그림자는 뭡니까? 각자 본인들이죠. 그러니까 여기서부터는 이스라엘이 이스라엘이 아니고 이스라엘은 장차 이스라엘 속에 등장할 이스라엘을 위하여 배태해야 될 하나의 자궁이 되지요. 모태입니다.
그렇다면 아까 나왔던 사도를 힘들게 했던 사람이 누굽니까? 14절에 “구리 장색 알렉산더가 내게 해를 많이 보였으매 주께서 그 행한 대로 저에게 갚으시리니”
그러면 이 사람이 사도바울을 안단 말입니까, 모른단 말입니까? 아는 사람이죠. 그런데 사도바울을 괴롭혔어요. 왜 괴롭혔습니까? 사도바울은 하나를 바라보는데 이 사람은 자기 독자적으로 자신을 생각하니까 ‘내가 네 말 왜 듣는데? 네가 뭔데?’라고 하고, 바울은 ‘우리 서로 잘났다고 하지 말고 주님 바라봅시다.’ 아까 나왔지요.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8절)”가 구원 받는다고 했잖아요.
바울은 ‘주를 바라봅시다.’ 라고 하는데, 알렉산더 같은 사람은 주는 안 바라보고 ‘너만 최고야! 너만 사도야!’ 고린도후서에 나오잖아요. 이것은 자신도 알아달라는 말입니다. 그렇게 되면 어떻게 돼요? 사도바울은 주님 증거하는데 그쪽에서는 자기 자신을 알아달라고 하는 거예요.
인생은 한 번에 훅 갑니다. 10년 믿고 20년 믿어도 소용없어요. 언제 어느 시점에 자신의 독자적인 영역을 따로 챙길 수 있고, 하나를 인정하지 않고 여럿을 인정해 달라. 이렇게 해서 여럿이 하나로 뭉치는 인간적인 방법을 가지고 뭐라고 하는가 하면, 민주주의라고 합니다.
십자가마을에 민주주의 하자. 이게 무슨 소리입니까? 인위적인 방법으로 여럿을 하나로 만들자는 뜻입니다. 거기에 대한 답변은 ‘십자가마을의 실체는 없다.’는 것입니다. 실체는 없고 복음만 전하면 다시 복음에 귀 기울이는 사람들이 모이는 거예요. 만약에 십자가마을의 글들이 복음적인 것이 없고 서로 자기자랑만 나온다면 어느 새 뚝뚝 다 떨어져나가서 나중에는 십자가마을이 관리자 혼자만 남겠지요.
그래서 하나님께서 진짜 십자가마을에 성도가 있다면 계속해서 ‘이만하면 됐다’는 것을 허물어뜨리는 성령의 역사가 여러 사람들의 도움으로 흔들기를 해 줘야 돼요. 그럴 때 다시 한 번 “이만하면 됐다고 하면서 나의 독자적인 영역을 따로 구축했구나.” 하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사람이 자기영역이 있으면 반드시 사수에 나서게 되고, 그것을 위해서 공격적이 됩니다. 주님의 것을 지키기 위해 공격적이 되는 것이 아니라 자기 것을 지키기 위해 공격적이 됩니다.
디모데후서 4장 7절을 봅시다.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라고 했는데, 여기서의 선한 싸움이 사도바울 자기를 위한 싸움입니까? 자기 영역을 사수하기 위한 싸움이 아니고 ‘믿음을 지켰다’고 하니까 자기가 믿어야 될 분, 의로운 재판장. 즉 주님의 하나 되심을 증거하기 위해서 싸운 싸움이 선한 싸움입니다.
‘주님만이 선하시고, 우리는 그분을 믿는다.’ 라는 싸움을 지금까지 해 온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에 불만을 갖고 알렉산더 같은 사람은 사도를 핍박했고, 그런 사람만 있는 것이 아니고 11, 12절에 보면 마가, 두기고 이런 사람들은 사도에게 협조를 했지요. 왜 협조합니까? 그들은 자존심도 없습니까? 이들은 멍청해서 그냥 추종자입니까? 왜 사도를 도와줍니까? 너와 내가 코드가 맞다가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고 있으니까 그런 거예요. 달을 같이 보고 해를 같이 보고 있으니까 그래요.
만약 사도바울에게 해가 사라지고 달이 사라진다면 미쳤다고 사도바울에게 협조합니까. ‘바울도 맛이 갔어! 이제 끝났네.’ 이렇게 되는 것이 당연하지요.
그러니까 복음만 전하면 같이 복음을 보는 사람들이 모이면 그게 하나가 되는데, 만약에 같이 달을 보고 있다가 ‘아저씨, 누구세요. 우리 함께 계 모읍시다.’ 이렇게 되면, 달을 보다가 갑자기 교회에 눈을 돌리게 되면, 다시 예수님의 죽으심에서 시선이 옮겨가 버리면 다른 교회와 우리교회를 비교하게 되고 또 다툼이 일어나게 됩니다. ‘화평교회가 복음적인가 우리교회가 복음적인가?’ 또 싸운단 말이지요.
김을수 집사님이 우리교회에서 예배드리니까 어떤 분이 말하기를 ‘남의 교회 교인이 왜 여기에 왔습니까?’ 라고 했어요. 그 사람은 성경에 “몸도 하나요, 주도 하나요(엡4:4)” 라는 말씀이 안 보이는 모양이라.
십자가마을도 마찬가지에요. 복음이 복음으로 나타날 때만 십자가마을입니다. 요새 십자가 없는 십자가마을도 있어요. ‘십자가를 싫어하는 십자가마을’ 이런 모순이 어디 있습니까.
끝으로 이 예를 들고 마치겠습니다. 설악산 관광을 위해 전세버스를 기다리는데, “이제 출발할까요?” “아직 몇 사람 안 왔습니다. 올 때가지 기다립시다.” 이런 모습이 세상 교회라면, 천국은 “여기 안 오신 분 손 들어보세요? 없지요. 출발!” 이렇게 됩니다.
“안 오신 분 손 들어보세요.” 라는 것이 세상에서는 말이 안 되지요? 그러니까 몇 명 안 오고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지금 있는 그 사람, 앞으로 화평교회가 몇 사람이고 십자가마을이 몇 명인가와 관계없이 있는 그대로가 미흡함도 없고 지금 자체가 하나님이 만드신 그 자체로써 완료된 복음을 아는 천국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저희들 주님만 바라보게 하옵소서. 주님 십자가만 바라보게 하시고, 주님 십자가 놋 뱀 밑에서 누가 높으냐, 잘났나 그런데 신경 쓰지 말고, 오직 복음만 외치다가, 고난 받든지 핍박 받든지 주께서 다 배치하신 하나의 사태인 것을 감사히 여기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2009. 10. 21. 15:43 녹취 마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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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아(IP:119.♡.119.36)
09-10-22 15:26
한 번에 훅 가는 것이 인생이다...추종자도 될 수 있고 협조자도 될 수 있는 것은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기에 그렇다...무엇을 해도 하나가 나올 수 밖에 없다..."우리 주 십자가 외에는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여기 안 오신 분 손 들어 보세요? 없지요? 출발!!!"
이미아(IP:119.♡.119.36)
09-10-22 16:40
40년 종지기가 뭘 알까???
그러나 50년이 되어도 60년이 되어도 70년이 되어도...종지기는 종지기일 뿐이다.
하나님이 계획대로 만드신 종지기일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