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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

출애굽기 16장 주석자유게시판출애굽기

출애굽기 16장 주석

이름 : 이진용(IP:222.99.120.158)

출애굽기 16장

계속되는 이스라엘의 원망은 그들이 기대한 것과 여호와께서 새로 제시하는 세계는 다르다는 사실을 나타내 준다. 그들은 지금 광야에서 계속 위기를 느끼고 있다. 여유 있는 양식이 마련되지도 않고 평소에 즐기던 고기를 구하여 미각을 돋운다는 것도 도저히 생길 수 없는 일이다. 어떤 희망과 기대를 제공할 환경이 전혀 못 된다. 그런데서 자기들을 여호와의 이름으로 인도한 모세에게 원망의 소리를 높이는 것은 어떻게 생각하면 지극히 정상적이다.

원망할 만해서 원망하는 것이 광야로 인도한 하나님의 뜻을 파악하는데 핵심이 된다. 성경은 여호와께서 그들을 시험했다고 되어있다.( 16:4) 시험하시는 이유는 이 백성들이 과연 이 여호와에 대하여 얼마나 완전히 신뢰하고 있는지를 타진하기 위해서 이다. 사실상 그들에게는 원망할 권리나 불평할 위치에 있지 않다. 애굽에서 종살이하던 그들을 건져내었다는 사실이 단지 장소를 달리하여 살아간다는 것이 아니라 무엇이 자신들에게 개입되었는가 가 파악되어야 이해될 문제이다. 그들은 이런 상태가 계속된다면 다시 애굽으로 돌아가고 싶다고 외쳤다.

그들은 애굽과 현재를 같은 위치에 두고 비교하고 있다. 어느 곳이 더 여유 있게 살 수 있는 곳이냐 하는 것이다. 그들은 계속 자기들의 힘에 의존하여 살려고 한다. 자기의 생존을 자기 스스로의 힘으로 해결하려고 한다. 그들은 홍해가에서 여호와의 영광을 보았다. 엄청났다. 그러나 그 일과 자기들과는 직접적인 상관이 없다고 생각했다. 그들은 계속 자기 주변의 상황을 하나님의 안목으로 보지 못하고 자기들의 기존상식으로 판단하려고 한다.

애굽사람 못지 않게 그들도 불신앙적이다. 그들에게 찾아온 하나님의 마음은 결코 그들의 선택과 무관하지 않는데 그 결과는 이스라엘 속에 하나님의 그 마음을 담아보려는 것이 하나님의 구속사역의 목표였다. 하나님이 그들에게 찾아오게 된 그 심정을 이제 이스라엘 전체의 마음으로 확산시키려는 것이 하나님의 의도이다. 그래서 그들이 원하는 음식 대신에 만나를 준다. 이 만나는 그들이 양식이 없다고 하나님께 원망했다는 증거가 되는 음식으로서의 만나이다. 만나는 그들이 애굽에서 먹어보지 않은 음식이었다. 그들은 "이것이 무엇이냐?"고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만나는 현 이스라엘을 양식을 가지고 고발한 것이요 땅의 것이 아니라 하늘의 것으로 그들의 현세적인 불신앙을 나무라고 있는 것이다. 하늘의 것은 항상 완성의 의미를 담고 있다. 이 사실로 인해 만나가 내리는 법칙을 만들게 되는데 안식일에는 주우려고 해도 찾지 못하게 되어 있는 것이다.

불완전하고 미완성을 철없이 요구하던 그들에게 완전하고 완성적인 것으로 대치하시는 하나님의 뜻은 "이렇게 은혜를 내려주고서도 원망한다면 결코 나의 장자가 아니다"라는 선언이 되는 것이다. 이 만나는 약속의 땅에서는 도저히 구경하지 못하는 이유가 여기 있는 것이다. 즉 원망거리를 고발할 필요가 거기에는 없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만나를 줌으로써 양식, 그 이상의 의미를 담아 내려보내신다. 이렇게 해도 이 하나님을 무시하느냐? 하는 것이다. 이스라엘에게 필요한 것은 양식이 아니라 여호와를 신뢰함에서 오는 영생이다. 생존문제는 자기네들이 걱정할 것이 아니라 생존마저 은혜로 극복해 주신 여호와를 찬양해야 한다.

교회가 죽음을 염려할 때, 이미 스스로 교회 되기를 마다한 것과 다름없다. 성도는 모든 문제를 스스로의 힘으로 해결하는 자가 아니라 맡기는 자들이다.

16:1- 4

백성들은 양식이 넉넉지 않다는 것 때문에 하나님을 원망한다. 자기 자신들을 마음 편하게 살 수 있도록 보장해 주지 않으면 차라리 하나님 손에 죽는 길을 택하겠다는 것이다. 이러한 원망에 대해서 하나님은 난데없이 '율법'이라는 개념을 집어넣는다. 하나님 보시기에 인간을 위해서 인간을 만든 것이 아니라 법을 구현하기 위해 인간이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제 하나님은 그 법을 이스라엘 백성에게 적용시키려 한다. 여기서 필연적으로 발생되는 것이 '죽음 경험'이다. 어째서 그러한가? 일단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유도해서 집어넣은 공간을 '가마솥'이라고 생각해 보자.

그 가마솥이 얼마나 큰지 그 어떤 사람도 하나님의 가마솥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 요한복음 5:27-29에 "또 인자됨을 인하여 심판하는 권세를 주셨느니라 이를 기이히 여기지 말라 무덤 속에 있는 자가 다 그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

죽었다고 해서 인간이 하나님의 가마솥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 신자든 불신자든, 교회에 충성하든, 충성하지 않든 인간은 누구 하나 예외 없이 다 하나님의 가마솥에서 '죽음 경험'을 하게 된다. 단 하나님의 백성에게는 그 '죽음'이 단지 우연한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인간을 줄기차게 따라온 원리임을 일깨워준다.

4절에 보면 인간들이 하나님에게 요구하는 바와는 전혀 딴 판으로 하나님 나름대로 인간에게 요구한 것이 있었다는 말이다. 사람들은 과거 아담의 일과 지금 자신의 입장과는 다르다고 알고 있다.

따라서 과거 조상이 하는 행세에 대한 책임을 현재 자신들에게 물을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분명히 선악과를 가지고 '인간이 무엇인가?'를 알리신다. 하나님은 자기규정을 한시로 잊거나 양보하거나 철회시킨 적이 없다.

여기에 비해 하나님이 원하시는 '인간 규정'으로 되돌아가는 것은 애초부터 인간으로서 가능치 않는 일이다. 그것은 원래 규정대로 돌아가는 것을 막는 세력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 세력이 곧 죄다.

로마서 5:14-17에 보면, 죄를 짓지도 않는 자들 위해서도 죄가 왕 노릇 하는 것처럼, 의를 행치도 않는 자에게 의가 임하는 그런 사태가 들이닥치게 되었다.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겪어야 하는 '죽음 경험'은 단지 그들을 죽이는데 만 급급한 것이 아니라 그들을 통해서 죽음의 진실을 공개하겠는데 있다.

그렇게 해서 출애굽기 16:1-4에서 15장의 울려 퍼지던 찬양으로 되돌리려 하신다. 흔히들 하나님을 찬양하고 있다면 더 이상 하나님에 대한 원망이 나오지 않을 듯이 여긴다. "이제부터 예수 믿고 새 사람 되었으니 나의 행위에서 나오는 것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선함, 그 자체일 것이다"라는 것이다.

따라서 예수 믿고서 나온 행위는 결코 악한 것이 아니라 선한 것이라고 봐도 좋다는 것이다. 그러나 인간은 평생, 죄의 깊이와 죽음의 깊이와 하나님의 거룩의 깊이를 다 모른다. 따라서 하나님께서는 더 혹독한 죽음 경험이 들이닥치게 하면, 예상치도 못한 죽음에 직면하고서는 평소에 자신이 하나님의 백성 됨을 근거로 하나님께서 뭔가 자신에게 잘못되게 인도하고 있다고 원망하기 마련이다.

어서 그 죽음의 재앙을 철회해 달라고 요청하거나 차라리 하나님의 손으로 죽여달라고 협박조로 말하기 일수이다. 그럴 때 하나님께서 예상치도 못한 것을 준비하고 주시면서 하나님의 관심사와 인간의 관심사가 사뭇 다르다는 점을 부각시키신다.

따라서 정말 주님을 찬양하고 있다면 반드시 왜 하나님은 우리 인간의 행위를 의롭다 여기지 않는가를 본인들이 알고 있어야 한다. 하나님을 찬양하는 사람은 자기 대신 일을 해주시는 예수님을 찬양하는 사람이다.

그리고 자신은 그 예수님 앞에서 죄인으로 보인다는 것을 인정하는 사람이다. 인간은 자기 존재 위주이기에 될 수 있는 대로 죽음을 기피하려고 한다. 하지만 하나님이 제정하신 '인간 규정'에 의하면 인간은 반드시 죽음 경험을 반복하면서 평생을 살도록 되어 있다.

자신의 행위가 결국에는 나에게 죽음을 안겨다 주는 죄악 된 것임을 평생 느껴야 하는 것이다. 그 이유는, 사람이란 자기의 사는 이유는 자기 행위에서 찾으려고 하기 때문이다. 우리 스스로를 위하여 우리가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위하여 우리가 태어났음을 감사하면서 늘 자신을 부인하여야 한다.

16:4-7

하나님께서 분명히 하나님 이 베푸시는 기적과 율법이 연관이 있음이 드러내신다. 하늘에게 양식을 내려주시는 이유는 율법을 지키나 아니 지키나 시험하기 위해서 라는 것이다. 사실 율법이란 인간에게 별로 인기가 없다. 율법이란 거추장스럽고, 부담되고 귀찮기만 한 조항들이다. 우선 살고 봐야 하는 다급한 시점에서 율법을 헤아리고 있을 한가한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인간이 다급할 때는 인간 자신의 영광의 회복이다. 이렇듯 인간의 영광을 위한 하나님만을 인간들이 염두에 둔다. 그런데 이미 하나님은 이런 인간 영광 위주가 아니라 오직 하나님 자신의 거룩한 영광을 위해 애굽 민족과의 관계에서 기적을 베푸신 적이 있다.

출애굽기 14:4에 보니, "내가 바로의 마음을 강퍅케 한즉 바로가 그들의 뒤를 따르리니 내가 그와 그 온 군대를 인하여 영광을 얻어 애굽 사람으로 나를 여호와인줄 알게 하리라 하시매 무리가 그대로 행하니라"라고 되어 있다.

하나님의 영광이란 하나님 자신의 지시에 따르지 않을 때 얼마나 혹독한 징벌이 떨어지는가를 통해서 명백해 진다. 인간들이 즐겨 해석하는 것과는 달리 하나님의 기적은 사랑하기 용도로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참혹스럽게 멸망시킬 자를 위한 기적으로도 동시에 쓰여진다는 것이다.

같은 기적으로 서로 상반되게 적용시키신다. 이로서 '기적의 율법화'가 이루어진다. 율법이란 인간의 죄를 지적하기 위한 용도다. 하나님은 기적으로서 그 율법적 용도를 실행에 옮기시는 것이다. 말씀을 이런 식으로 나타내시는 것은 인간들은 하나님의 거룩한 율법적 영광에는 관심이 없고 상호간의 영광만을 염두에 두기 때문이다.

따라서 하나님의 거룩한 율법은 이런 것을 방치거나 그냥 두고 보시는 것이 아니라 그 인간의 영광을 고발하고 벗겨낼 생각으로 실현된다. 요한복음 12:39-43에 예수님께서 이사야의 말씀을 여기서 인용하신 것은 예수님께서 아무리 기적을 많이 베풀고 설명을 해주어도 인간들의 자기만의 영광에 관심을 두는 한 결코 하나님의 영광을 맛볼 수 없다는 것을 확실히 해두기 위해서이다.

인간들은 자신의 영광성을 포기하지 않는다. 이러한 인간의 영광성이 이미 애굽 민족을 통해서 발휘되었고 그 인간의 영광성이 여호와 하나님의 율법적 영광과 마주친 결과가 홍해바다에서 참혹한 징벌로 마무리되었다.

이러한 무서운 영광의 실체가 어디서 나오는 지를 알려지게 된 것이 이스라엘 백성들과 동행하시므로 이루어진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여호와의 영광이 어떤 것을 토대로 하여 생기느냐에 대해서 무지해서는 안 되는 민족이었다.

무엇 때문에 여호와 하나님께서 애굽 민족에게 진노했느냐를 알아야 한다. 단지 민족에 대한 차별성 때문이 아니다. 뭔가 하나님께서 남기고자 하는 바가 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바로 율법의 실현이다.

율법은 거룩한 것이다. 따라서 율법의 실현은 곧 거룩의 실현이다. 하나님의 거룩한 것을 얻고자 해서 율법을 펼치신다. 율법은 타협의 대상이 아니다. 거룩의 흠이 나는 것을 용납하실 하나님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사야 6:1-5의 천사의 외침과 이사야 선지자의 외침을 상호 비교해 보아야 한다. 물론 같은 것을 보고 있기에 같은 취지의 발언이 나온다. 그런데 천사는 그냥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만 외칠 뿐이고 이사야는 거기에다 덧붙여 자신의 초라함과 더러움을 함께 본다.

이것은 즉 하나님은 자신의 거룩성을 그 어디에도 양보하신 적이 없다는 것을 말해주시는 바이다. 율법의 본질은 안식에 있다. 본문에 보면, 안식일 전날에는 하늘의 양식이 배로 주어지지만 막상 안식일에는 전혀 새 양식을 얻을 수가 없다.

즉 안식일에는 인간들이 어떤 식으로 양식을 얻어서 그 양식으로 하루를 생존하느냐에 관심을 안 두어야 되는 날이다. 또한 그러한 상태가 하나님이 원하는 안식의 상태이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을 안식의 세계에 넣어주시려고 하신다.

그 안식의 세계에서는 양식이라든지, 혹은 물이라든지 하는 것과 전혀 무관한 세계다. 그런 것 없이도 충분하고 넉넉하게 살 수 있는 세계가 그 세계다. 안식일에 양식이 주어지지 않는다는 이 말의 의미는, 안식일 날 가게 문 닫아라 는 말이 아니다.

지금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따로 있는 그 세계를 허락하시고자 한다. 물론 어떤 이들은 이런 믿음이 없어서 안식일에도 뭔가 하늘의 양식을 얻을까 밖에 나갔다가 아무 것도 얻지 못하고 돌아온 자도 있다고 한다.

안식이란 단순히 '인간이 뭘 하지 않는다'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뭘 해주신다'는 데 의의가 있다. 그 세계가 과연 있는 것인가? 이 세계에 먼저 가 본 사람이 있다. 모세다.

모세는 무려 40일 동안을 아무 것도 먹지 않고, 아무 것도 마시지 않고, 잠도 자지 않은 채 있었다. 단지 하나님의 거룩한 영광만으로도 얼마든지 살아갈 수 있었다. 따라서 세상 적인 자신의 영광을 이 거룩성 앞에서 감히 내세울 수가 없다. 예수님의 기적 속에 십자가의 피가 담겨 있음을 모르면 관심사를 엉뚱한 곳에 두어 십자가의 영광이 보이지 않고 도리어 도로 건장해져서 전보다 더욱 영광스러워진 자기 자신의 모습만 염두에 두게 된다. 기적 속에 혹은 십자가 속에 있는 완성된 영광은 이런 인간의 영광 성을 정죄하고 심판한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16:8-12

갈라디아서 1:10-11에 "이제 내가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랴 내가 지금까지 사람의 기쁨을 구하는 것이었더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내가 전한 복음이 사람의 뜻을 따라 된 것이 아니라"라고 되어 있다.

사도의 권위나 위엄을 위해 교인들과 흥정하거나 타협할 생각이 사도들에게 전혀 없다. 사도들조차도 철저하게 사람들로부터 호응이나 인정이나 대우보다는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주는 것'으로 만족하며 살았던 것이다.

심지어 복음을 전하는 사도 본인이라 할지라도 그 복음으로부터 자유로울 수가 없다. 복음을 전하는 그 내용에 의하면 복음을 전하는 그 당사자라고 할지라도 그 내용에서 위배되면 가차없이 저주가 주어지게 되어 있다. 이로서 교인들이나 사도들이나 모두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지는 것'에 종속되어 있는 것이 초대교회의 모습이다.

오늘날의 교회들처럼 인간들의 행정력으로 지탱하는 교회가 아니다. 오로지 예수님의 살과 피에 매인 교회다. 이처럼 신약의 교회는 예수님의 살을 먹고 피를 마셨는데 구약 때 광야교회는 무엇을 먹었는가?

여기에 대한 답변으로서 "그들은 그저 물과 만나를 먹었습니다."라고 말하면 충분치 않다. 왜냐하면 신약 교회 성도들은 궁극적으로 마지막 때에 영생을 얻는 먹은 것에 비해서 구약의 광야교회 성도들은 영생에 이르지 못하는 것을 먹었다면 그 광야교회 성도들을 성도라고 말 할 수 없게 된다.

영생도 못 받는 자가 무슨 성도이겠는가. 따라서 본문에 나오는 성도들이 먹은 것은 단순히 물과 떡과 고기라고 말할 것이 아니라 영생이 나오는 공식 안에서 말해야 한다. 그것이 바로 '자신의 죄와 그리고 하나님의 은혜를 먹었다'라고 해야 정답이다.

이 점은 오늘날 교회도 마찬가지다. 소위 성만찬 한답시고,

빵 한 조각과 포도 주스 한 모금을 먹는다고 해서 하나님으로부터 영생을 받았다고 말할 수 없다. 뭔가 다른 요소가 짜인 체제로 바뀌어 말해야 한다. 즉 성만찬을 행하면서, "우리는 우리의 죄와 더불어 그것 때문에 희생당하신 예수님의 생명에 참여합니다"라고 해야 한다.

그렇다면 여기서 말하는 '죄'란 바로 하나님의 영광을 보지 못하고 행동하는 모든 것이 죄가 되는 것이다. 본문에서 백성들은 함부로 모세에 대해서 원망을 해댄다. 떡과 고기를 먹게 해달라고 항의하고 있다. 그것은 모세 외에 달리 달려들 대상자가 없기 때문이요 모세가 늘 하나님의 뜻을 전달하는 입장에 서 있기 때문이다.

즉 백성들이 스스로 패 가름을 시도하고 있는 것이다. 모세를 제외하고는 모두 한 패이고, 모세와 하나님은 한 패라는 것이다. 백성들은 자기 딴에 올바른 논리와 타당성이 있다고 보았다. 하지만 그들이 모르고 있는 것이 있었다.

백성들 눈에는 초라한 모세 밖에 보이지 않는다. 모세에게는 그 어떤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만만한 것이다. 이러한 모세의 처지와 입장은 마치 예수님의 출현했을 때의 반응과 관련 있다. 예수님은 자신에게 하나님이 주신 영광이 있다고 했다.

요한복음 8:54에 보면,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내게 영광을 돌리면 내 영광이 아무 것도 아니어니와 내게 영광을 돌리시는 이는 내 아버지시니 곧 너희가 너희 하나님이라 칭하는 그이시라"라고 되어 있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 예수님에게 하나님의 영광이 담겨 있다는 것을 도저히 수용할 수 없었다. 하나님은 존경하되 예수님은 존경할 수 없었다. 그러나 예수님은 자신에 대한 영광성을 하나님의 영광과 연결시켰다.

하지만 유대인들은 예수님의 이런 주장으로 인해 더욱더 예수님을 핍박한 것이다. 본문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모세 혼자 백성들로부터 공격을 받아 궁지에 몰리게 되었다. 이 때 하나님이 직접 나섰다.

하나님의 영광이 모세가 받는 수난과 연관을 있음을 보여주신다. 광야로 백성들을 모아놓고 거기서 하나님께서 영광 중에 나타나셨다. 그리고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다. "내가 이스라엘 자손의 원망함을 들었노라 그들에게 고하여 이르기를 너희가 해 질 때에는 고기를 먹고 아침에는 떡으로 배부르리니 나는 여호와 너희의 하나님인줄 알리라 하라 하시니라"

즉 백성들은 앞으로 하나님이 주시는 떡과 고기를 먹으면서 모세를 향하여 원망한 자신의 행위를 되새겨봐야 한다. 하나님은 그들이 원망이 실려있는 그런 떡과 고기를 제공하신 것이다. 이 점은 오늘날도 마찬가지다.

우리가 돈을 달라고 해서 예수님이 돈을 주시는 것이 아니다. 이러한 우리들의 불만으로 인해 하나님의 영광이 모독 당하는 계기가 됨을 마음껏 담아낼 수 있는 방식으로 우리에게 주신다. 그것이 바로 떡도 아니요 고기도 아니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죽음과 피다. 초대 교회 성도들이 지독스럽게 외부 사회로부터 서러움을 당해도 꿈쩍도 않고 한데 모였던 것은 자신들에게 참으로 무엇이 필요한 것인지를 제대로 알았기 때문이다. 철없이 사회로부터 인정받겠다는 속셈으로 살려는 본능이 꺾어지고 그 대신 예수님의 희생의 피와 떡을 먹어야만 한다

16:13-16

'많이 거둔 자'가 나오고 '적게 거둔 자'가 나온다. 인간들은 그동안 '많이 거둠'과 '적게 거둠'에 따라 자신의 인생관을 정립해 오고 있었다. 누가 무엇 때문에 주셨는가는 안중에도 없고, 많고 거두었다, 적게 거두었다로 인간의 가치를 논해왔고 세도도 부려왔다. 여성들은 많이 거둔 자의 자식과 혼인하려고 애쓰고, 남자들도 앞으로 많이 거둘 수 있는 그런 재능이 넘치는 여성을 선호하면서 결혼 상대자로 삼고자 한다.

결코 누가 주시는가를 아는 그런 배우자를 좋아하지 않는다. 이 세상 어느 구석에 가도 많고, 적음의 내기와 시합이 빈번하다. 심지어 술집에 가도, 많이 마시는 자가 인기가 좋다. 이 세상은 단지 사람을 평가할 때 소유로 평가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달리 평가하신다. 즉 '많은 자'와 '적은 자'의 차이가 하나님에게는 전혀 소용없다는 점을 제대로 알고 사는 자를 원하신다. 왜 하나님은 인간들이 선호하는 많고, 적음을 의도적으로 인정치 않는 것일까?

마태복음 20:1-16에 보면 예수님은 천국을 설명하시면서 기존의 인간들이 알고 있는 소유형태의 생존을 모두 거부하는 식으로만 설명하신다. 분명히 먼저 온 자들에게 노동의 양만큼 많이 주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나중 온 사람도 동일한 임금을 주셨다.

그것은 천국이란 인간의 행함에 의해서 축복이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오직 주인님의 '불러주심'에 의해서 구성되는 나라이기 때문에 그렇다. 천국이 이러하니 자연적으로 기존의 세계에 마음속에 집착한 사람은 예수님의 소개하는 천국에 대해서 당연히 반발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래서 이 말씀의 제일 끝에 보면, '이와 같이 나중 된 자로 먼저 되고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리라'라는 말씀이 나온다. 예수님께서 오셔서 남기신 모든 말씀은 기존의 인간들이 갖고 있는 사고방식에 대한 뒤엎음이다.

이처럼 그들이 육체가 요구하는 음식이 아니라 그들에게 낯선 음식인 만나를 주신 것은, 하나님이 주신 '새로움'을 가지고 '구원'이라는 과연 무엇인가를 다시 생각해 보라는 차원이다. 생존의 이어짐이 결코 구원이 아니라 자신의 죄로부터의 구원이 선행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만나만 먹고 있으면 새 세계를 들어간다는 말이 아니다. '많이 거둠'이나 '적게 거둠'이나 차등이 없는데 왜 없는지 그 내막을 아는 자들의 세계가 새 세계이다. 이것은 소유에 의해서 인간의 가치가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그러면 무엇에 의해서 가치가 결정되는 가는 고린도후서 9:6-9에 보면, 즉 결코 똑같이 주셨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분명히 사람들마다 하나님께서 달리 주셨다. 마치 많이 먹는 자가 많이 먹고, 적게 먹는 자는 적게 먹도록 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남는 것이나 모자람이 없게 하셨다는 데서 새 나라의 은혜성이 드러나는 것이다.

사람을 구원하실 때 마치 만나가 모든 이스라엘에게 골고루 주시는 식으로 제공된다는 것이다. 오병이어 때처럼 다들 배불리 먹고도 남는 것이 곧 은혜라는 것이다. 어떤 과부가 동전 두 개를 헌금함에 넣은 것이 부자의 막대한 헌금보다 더 큰 헌금을 했다고 예수님께서 평가하신 것도 이런 천국의 입장에서 보면 당연한 판단이시다.

이처럼 앞으로 다가온 천국이란 결과적으로 다 같이 만족했다는 것이다. 오병이어에서 예수님께서 고기와 떡을 도로 거두게 하신 것은 그것은 개인 소유용으로 전환되는 것을 금지하기 위해서이다.

이것은 곧 예수님 세계, 곧 천국에서는 개인적인 소유 증식을 위한 인생관은 용납되지 않고 그 대신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신 하나님의 은혜를 보다 널리 증거하는 식으로 살아가게 된다는 것을 말한다. 이것이 바로 천국의 상태이다.

그 새 세계를 위하여 하나님은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만나를 주셨다. 그들은 너무나도 그런 의미가 새롭기에 "이것이 무엇이냐?"라고 솔직하게 고백하지 않을 수 없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날마다 주시는 은혜 속에서 날마다 "하나님이 과연 이런 분이었구나"를 늘 새롭게 알아야 한다.

16:21-29

안식일에 만나라는 양식이 주어지지 않는 것은, 진정 '살아 있음'은 양식보다 우선되는 것에 의해서 결정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사실을 안식일을 통해서 보여주시겠다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다. 우선 물질적인 안목으로 자신의 몸을 걱정하는 애굽 적인 인식으로 벗어나야만 한다. 안식일이란, 이 우주 천지 만물이 다 하나님께서 장래 예수님을 내다보면서 창조하셨다는 점을 기념하고 이 우주 속에 심어놓기 위한 율례였다.

법이란 제정자와 준수해야 될 사람 사이에 통치 시스템이 형성되게 되어 있다. 그것이 안식일인 것은 이 세상에는 모든 것에 최종점을 품고 존재한다는 것을 말해주기 위함이다.

즉 인간의 가치란 그 최종점에서의 의미로 결정 나게 되어 있다. 이 세상에 숱한 직업들이 있고 나름대로 자부심들이 대단하다. 그러나 안식을 잊어버리고 사는 인생은 그야말로 물체덩어리에 불과하다. 물체덩어리를 더욱더 부풀게 하기 위해서 혹은 그 기계가 작동되기 위해서 음식물을 집어넣는 것은 열량을 기계에다 부어 넣는 것과 조금도 다를 바 없는 행위다.

정작 들어가야 할 것은 하나님의 안식일의 취지이다. 안식이란 최종성을 거쳐서 달성되는 상태이다. 안식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정리될 것은 정리되어야만 한다. 안식일의 취지를 품고 있지 않는 몸들은 정리되어야 한다.

안식일의 취지는 마지막 안식을 미리 앞당겨 그 사람 속에 심어주는 것이다. 처음에 인간의 생명은 안식일을 함께 축하하기 위해서 주어진 생명이다. 하지만 마귀의 유혹으로 말미암아 안식일의 의미가 사라져버린 독자적인 노선을 갖고 인간들은 달아나고 말았다.

안식일의 의미가 빠진 채 단지 이미 부여 받은 육체성을 지탱하기 위해서 소비하기 위한 양식을 꾸역꾸역 채워 넣은 식으로 살아가게 되었다. 이마에 땀을 흘리면서 애를 써보나 결국에는 흙으로 돌아갈 흙덩어리 인 것을 그토록 애착과 미련을 갖고 몸부림쳐 왔던 것이다.

하나님과 동행한다고 믿었던 이스라엘 민족에게도 예외가 아니었다. 그들도 오직 육체의 유지를 위해 하나님을 필요로 했다. 그럴 때 하나님은 그들이 원하는 떡을 주시는 것이 아니라 안식일에 함께 참여될 수 있는 새 사람으로 창조하시려고 했다.

그래서 주신 것이 만나다. 만나는 양식이 아니라 말씀이다. 먹는 말씀이다. 안식일의 정신이 들어있다. 안식일의 정신인 안식일의 주인공이 등장해야 제대로 파악된다. 안식일의 주인공은 바로 예수님이다.

그 분은 사람들에게 생명을 주고자 하시는 분이다. 제사를 원하는 것이 안식일의 진정한 취지가 아니라 자비를 베푸시는 분이 누구신가를 알려주는 것이 안식일의 존재의 이유다. 마태복음 12장에서 예수님은 안식일에도 손이 붙어있는 사람을 고쳐주었다.

그것도 무상으로 말이다. 바로 이처럼 '안식일의 주인' 되시는 분에게서 나오는 그 자비심이 곧 진정 자기 백성을 살게 하는 영의 양식이다. 그렇다면 본문에 내리는 만나도 마찬가지다.

"만나 먹고 살아보자"라는 식으로 살아가야 될 자들이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다. 일요일날 교회 나오면 하나님께서 먹을 것, 입을 것 책임져 주신다는 것이 안식일의 의미가 아니다. 만나를 먹으면서 생명이란, 자비로 베푸시는 분에 의해서 주어지게 되어 있음을 아는 것이 안식일에 담긴 뜻이다.

이런 취지를 가지고 본문을 보면, 이상스럽게도 같은 만나인데 요일 별로 썩을 때도 있고 안 썩을 때가 있음을 알게 될 것이다. 이것은 만나라는 물질은 하나님의 손에 잡혀서 하나님의 뜻을 펼치기 위한 조치로서 변질되는 것이지 결코 인간의 손에 맡길 양식이 아님을 알 수 있을 것이다.

평일에는 온종일 놔두고 먹어도 멀쩡한 만나가 이상스럽게도 다음에 먹으려고 비축을 하면 벌레가 생기고 부패한다. 이것은 물질로서의 육체와 물질로서의 양식을 상호 연결하는 그 인식의 연결고리를 하나님께서 의도적으로 끊어놓기 위한 조치다.

매일 매일의 그날 양식을 만나를 통해 일 일분만 주시는 것은, 물질적인 육체 걱정보다는 매일 매일이 어디에 접근하고 있는가를 기억케 하기 위한 지침서 역할로 활용되기 위함이다. 즉 우리 인간은 본인이 원하든 원치 않는 말씀이 본래 의도했던 그 세계로 당겨져 가고 있음을 알리기 위한 만나이다.

이것은 인간의 몸을 단순히 물체 덩어리로 보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으로부터 생명을 부여 받을 대상이 됨을 인식시키기 위함이다. 그리고 안식일에는 이상스럽게 만나가 엄청나게 폭설처럼 쏟아져야 함에도 불구하고 아예 없다.

그 중의 어떤 이들은 종전의 버릇대로 안식일이라는 날짜보다 자신의 몸을 더 걱정해서 살고 보자 하는 식으로 만나를 채집하기 위해 광야에 나간 자도 있다. 안식일에는 만나가 없는 것은 모든 말씀의 완성의 순간이 되기 때문이다.

양식과 육체의 존속이라는 고리를 이제는 놔버려도 상관없는 그런 세계이기 때문에 그렇다. 양식 없이 사는 생명이 안식일의 취지를 담고 오실 분에 의해서 자비로 베풀어지다. 마태복음 12:7에 보면, "나는 자비를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노라 하신 뜻을 너희가 알았더면 무죄한 자를 죄로 정치 아니하였으리라"라고 되어 있다.

예수님의 경우를 보면, 양식 없이, 물 없이 그는 40일을 보낸 적이 있었다. 옆에 있는 악마가 말하기를, "산다는 것은 떡을 먹어야 가능하다"고 했다. 그럴 때 예수님은, "사람은 떡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말씀으로 사신다"고 했다.

즉 하나님과 함께 있으매. 즉 완성된 안식의 상태이기에 물질적 몸을 위해 물질적 조건이 꼭 필요치 않았던 것이다. 물론 모세도 그 안식 완성의 상태를 벗어나서 시내산 밑에 내려와서는 역시 육의 양식을 대해야만 한다.

본문에 나오는 이스라엘 백성들도 물론 육의 양식을 섭취해야 한다. 하지만 그들에게는 목적이 심겨져 있다. 그것은 바로 양식 없이도 생명이 가능한 그런 세계가 그들을 기다리고 있다.

16:31-36

하나님은 만나를 항아리에 담아 보관하라고 하신다. 문제는 그 항아리를 보관할 위치다. 그 위치는 본문에서 말하고 있다. 34절에 보면, "아론이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하신대로 그것을 증거판 앞에 두어 간수하게 하였고" 이 증거판은 출애굽기 25:16과 21절에 보면 모세가 세 번째 시내산에 올라가서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돌판인데 거기에는 십계명이 새겨져 있다. 그런데 그 증거판이 바로 속죄소가 된다는 것이다.

병에는 원인이 있듯이 죄에도 원인이 있다. 우선 하나님께서는 죄의 원인을 말해주고 그 죄를 씻어주는 식으로 처리하신다. 죄가 죄로서 드러난 것은 두 가지 점 때문이다. 하나는 인간에게는 틈만 나면 죄를 지으려는 본성이 꿈틀거리고 있다. 둘째는, 그 죄로 말미암아 외부적으로 튀어나오게 자극하는 방법이 있다. 즉 안에 잠재된 상태의 죄를 밖으로 끄집어내어 실질적으로 죄 되게 하게 만든다.

바로 이런 일을 하는 것이 하나님의 거룩한 계명이다. 이것은 일반적으로 인간들이 알고 있는 상식하고는 정반대 생각일 것이다. 일반적으로는, 비록 우리 안에 죄지을 가능성이 농후하다고 할지라도 외부에서 좋은 말씀이나 좋은 교훈이나 감동적인 이야기를 들으면 그 죄가 외부로 튀어나오지 않고 억제되어 그래서 죄가 되지 않는다고 말한다. 하나님의 거룩한 말씀은 죄를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죄를 억제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악마가 심어준 상식에 불과하다. 죄가 억제되기는커녕, '자기 의'라는 형식으로 변용되어 튀어나온다. 로마서 7:7-9에 보면, '전에 법을 깨닫지 못할 때에는 내가 살았더니 계명이 이르매 죄는 살아나고 나는 죽었도다'라는 원리를 하나님은 사도의 입을 통해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다. 그러니까 인간은 평소에 늘 '자기 의'에 충만하면서 살아가는데 언제 그 죄가 드러나는가 하면 하나님의 거룩한 말씀과 접촉하게 되면, 자기 의라는 속성을 감출 길 없어 그대로 증거되고 만다는 것이다.

온통 율법에 의해서 지적당할 수밖에 없는 죄 투성이 인 채로 말이다. 인간에게 율법을 주면 인간은 그 율법에 의해 온통 죄로 먹칠하게 됨이 드러난다. 하나님의 요구하는 것과 항상 정반대의 성향을 지니고 살아가는 그 실상이 드러나는 것이다. 이처럼 죄가 무언지를 명확히 하는 배경 속에는 하나님의 속죄의 피가 뿌려진다. 증거판이 들어있는 상자를 증거궤라고 하는데 이 증거궤는 일 년에 한 차례씩 대제사장이 대표로 지성소, 곧 속죄소에 들어가서 짐승의 피를 뿌림으로서 죄 용서가 주어지는 관계로 유지할 수 있다.

이처럼 증거 판이 증거 하는 것은 하나님에 비해서 인간은 죄인임을 분명히 해두자는 것이다. 속죄가 되려면 먼저 죄가 무엇인지 규정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속죄의 의식은 오직 죄가 무엇인지를 아는 자에게만 효력이 주어지기 때문이다. 회개 해야지만 죄 용서가 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 회개를 촉구하기 위해 하나님의 말씀이 동원되는 것이다.

만나를 항아리에 담아 보관해야 하는 것은 그 보관하는 장소에 속죄의식과 관련되기 때문이다. 만나의 취지 속에는 인간들의 원망이 담겨 있다. 즉 인간들의 불신적인 본성을 하나님 쪽에서 놓치지 않겠다는 것이다.

그 죄가 성립되려면 하나님 쪽에서 피해를 받은 증거가 확보되어 있어야 한다. 그것이 바로 증거 궤 위에 1년에 한 차례씩 뿌려지는 그 짐승의 피로서 말해지고 있다. 희생되는 제물은 흠이 없는 제물이다. 즉 죄가 없이 거룩이 거룩답게 유지된 제물이다.

그런데 그 제물은 백성들의 죄를 대신 짐으로 말미암아 죄가 들어있는 제물로 전환되었다. 이것은 하나님께 원망하며 사는 인간의 본 모습을 같이 얼싸안은 것이 된다. 자기 백성의 원망이, 즉 인간의 근본 된 죄악 된 속성이 거룩한 제물을 죽게 한 것이다.

이러한 희생을 다 누구의 잘못으로 온 것인가를 명확하게 말해주기 위해 만나가 든 항아리를 속죄소 곁에 두는 것이다. 이로서 하나님은 인간의 근본 속성에 대해서 희생이라는 방식으로 알리고 계신다.

늘 십자가 앞에다 자신을 내비쳐 보라는 것이다. 매일 거울 보듯이 말이다. 이런 상태가 회개의 상태로서 속죄소 영역 안에 놓여 있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이 항아리의 취지는 영원히 계속 이어져야 한다.

십자가 복음을 안다고 해서 버릴 내용이 아니다. 속죄하시는 희생 제물과 인간의 죄악은 항시 나란히 해서 하나님의 뜻이 전달된다. 우리는 비처럼 내려오는 모든 은혜 속에는 오직 예수님의 희생이 들어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된다. 즉 매일같이 예수님의 피로 샤워하고 있는 것이다. 그 정도로 우리는 매일같이 하나님을 원망하며 살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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