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애굽기 13장 - 15장 주석
출애굽기 13장 - 15장 주석
이름 : 이진용(IP:222.99.120.158)
출애굽기 13장 - 15장
이스라엘에서의 제사 제도는 자기들이 애굽에서 나올 때 하나님의 지시에 행했던 행동을 다시 해보는데 있다. 그 사건을 항상 현재화 시킴으로써 하나님과의 동행을 지속할 수 있다고 본다. 그 이유는 이스라엘이 다른 민족과는 달리 아브라함의 하나님 여호와로부터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여호와께서 친히 전쟁을 하셔서 획득한 노획물이 바로 이스라엘이며 지상에서 제거된 장자와 대조적으로 산 장자로 새로 태어난 것도 이스라엘이다. 따라서 이스라엘은 모든 사람이나 가축의 맏이를 따로 거룩한 것으로 구별함으로써 이러한 여호와의 취지에 호응해야 할 의무가 있다.
이러한 유월절 행사는 아브라함에게 약속한 것이 결코 인간들의 노력으로 이루어지지 않았음을 대대로 전달하려는 의도가 있는데 요셉의 해골을 이스라엘이 이동시키면서 이점을 참작해야 하는 것이다(출 13:19)
이스라엘이 애굽의 땅을 나올 때 하나님이 앞장서서 그들을 인도해 주시고 있다는 표시로 낮에는 구름기둥, 밤에는 불기둥이 동원되었다. 이러한 인도가 없었다면 그들은 필시 바다 쪽으로는 가지 않았을 것이다. 바닷가에서 애굽나라와 맞부딪힌 이스라엘은 그들이 전혀 새로운 의미를 지닌 민족임이 실감나지 않았다. 유월절의 어린양에 기초를 둔 민족이지만 그것이 어떤 자연의 능력마저 초월하는 神의 본질과 연관된 것인 것을 쉽게 납득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지금 그들 바로 뒤에는 그들을 죽이려고 바로가 막강한 군대를 몰고 들이닥쳤기 때문이다.
홍해바다의 갈라짐은 이스라엘 민족에게만 베푸는 특별한 신적인 능력의 주입으로 된 것이다. 왜 그들만이 그런 혜택을 받아야 하나? 그것은 그들이 어린양에서 출발한 유일한 민족이기 때문이다. 홍해에서 하나님은 애굽나라와 이스라엘을 철저히 구별하여 취급하고 있다.
모세가 인도하는 이스라엘 민족은 그들이 건너온 홍해바닷가에서 다음과 같은 기쁨의 노래를 부른다. 이 노래 안에 그들의 신앙고백에 다 들어있다.
"여호와는 용사입니다. 아브라함의 약속대로 현재 우리 세대에 그대로 이루어졌습니다. 주님의 이와 같은 능력이 계속 우리를 보호하신다면 우리는 그 어떤 민족도 정복할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에게 내려준 약속대로 말입니다. 우리가 그 약속을 유업으로 받을 자들입니다. 여호와를 그곳에서 직접 만나게 될 것입니다."
이제 그들에게는 어떤 목표점이 설정되었고 그 도달점은 반드시 약속을 지키시는 하나님이 이루게 될 것이라는 신앙을 찬양에 담아 싣는다.
그들은 무엇이 하나님의 원수이며 그것이 곧 자신들의 원수인지를 알게 되었다. 그것은 여호와의 언약실현을 막아서고 방해하고 도전하는 것들은 모두가 여호와의 원수인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이야기하는 그들이 곧 여호와의 원수인 것을 그들은 광야생활에 들어가기 전에는 실감하지 못했다.
광야생활로 들어서기 전부터 그들은 모세와 하나님을 향하여 여러번 원망하고 무시한 적이 있었다. 그들의 타고난 본성은 결코 애굽 사람들과 다를 바 없다. 그들 앞에 서서 인도하는 구름기둥과 불기둥이 그들을 어디로 몰아넣고 있는 지는 그들이 이해하고 있지 않았다. 그들이 얼마나 피상적으로 여호와를 알고 있는 지는 그들이 광야에 발길을 옮겨놓자 마자 들통나 버린다.
하나님은 그들을 쓴 물로 인도했다. 그들은 대뜸 불평한다. 물이 쓰다고 그러자 하나님은 아무런 상관도 없는 막대기 하나를 모세보고 물속에 넣으라고 명령하고 모세가 실행에 옮기자 물은 곧 달게 되었다. 물은 정상이 되었는지는 모르지만 광야에서 이미 이스라엘의 원망은 새겨지게 되었다.
하나님은 이 백성이 과연 나를 제대로 아는지 모르는지를 쓴 물로 인도하여서 시험하신 것이다. 여호와의 율례와 법도를 지킨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홍해바닷가에서 몰살 할 번 했으나 기적으로 도와준 그 하나님의 능력에 회의를 품지 않는 마음가짐이 우선 자리잡아야 된다.
오늘날 교회가 먼저 해야 할 것은 환경개선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처음사랑을 유지하는 일이다.
13: 1-2
한 가정의 맏이를 통해서 하나님의 구원에 대해서 설명하는 방식은 본문의 경우에만 해당되는 것은 아니다. 에베소서 5:29-33에 보면, 분명 부모를 떠나 새 살림 차리는 신랑 신부에 대해서, 마치 교회에게 이야기하는 것처럼 언급하고 있다. 이것은 단순히 신접살이 차리는 것이 아니라 성도에게는 새로운 교회를 시작하는 것으로 봐야 한다는 것이다.
교회라면 필히 그 안에 '구원에 관한 정보'가 담기게 마련이다. 남편 된 자는 아내를 사랑하기를, 예수님께서 교회를 위하여 목숨을 바치는 것처럼 하라는 것이다. 이것을 위하여 부모를 떠나 한 가정이 되었다는 것이다. 아내 된 자는 남편에게 복종하기를, 마치 교회가 주님에게 하듯 하라는 것이다. 이것을 위하여 너희들이 부모를 떠나 새로운 가정이 만들어졌다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그 가정에는 참 하나님에 의한 구원의 정보가 담기게 된다. 가정을 통해 구원정보 전달은 맨 처음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를 만들 때부터 이미 개시가 되었다. 하나님께서는 아무 것도 없었을 때, 이미 신랑과 신부를 통한 교회 만들기에 나서신 것이다.
장자를 통해 다른 사람도 구원시킨다는 이 방식이 구체적으로 나와 있다. 창세기 12:2-3에 보면,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찌라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니라 하신지라"라고 되어 있다.
하나님께서 지명하신 한 사람을 이 세상에 세우시고 그를 축복하면 복을 받고 만약 저주하면 저주받는 방식을 취했다. 왜 하나님께서 이런 방식으로 구원하시는가 하면, 인간 쪽에서 해낼 수 있는 것이 구원받는데 개입하지 못하게 하게 위해서이다.
아브라함처럼 하나님의 선택하심에 있어 절대로 인간의 의도나 소망이 첨가되지 않는 상태에서 선택이 되었다. 인간들로 하여금 자기 행위에 조금이라도 의미나 가치를 두려는 자는 아브라함에 대한 일방적 선택에 대해서 배척하게 될 것이 뻔하다.
이러한 구원방식은 아브라함 가정 안에서 대대로 후대로 전달되게 되었다. 맏이를 통해서 다른 가족이나 부모가 구원받는 이런 방식은, 아브라함 가정에서도 예외가 아니다. 창세기 21장에 보면, 아브라함의 아내의 죽은 태로부터 자식이 하나 잉태한다.
만약에 아브라함이 이 자식에 대해서 자기 소유권을 내세운다면 아브라함은 창세기 22장에 나오는 하나님의 시험을 통과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 시험이란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내게 바쳐라"이다.
이미 아브라함은 출애굽기 13장의 내용처럼, 맏이가 자신의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소유로 되돌아감을 알고 있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의 선택한 한 사람을 하나님께서 세워놓고 그 사람에게 축복하는 경우에만 구원받고, 그를 저주하면 저주받는 방식을 하나님께서 진행시킬 것이기 때문이다.
아브라함 시대에는 아브라함이 복의 근원이지만 이제 이삭이 태어나면서 이삭이 복의 근원이 된다. 심지어 아버지 아브라함의 경우라도 이삭을 통해서 구원이 되는 것이다. 이것은 이삭의 후손인 예수님까지 이어지게 된다.
결국 아브라함마저 장차 자기 후손을 통해 오실 예수님을 인하여 구원을 받게 되어 있다. 이러한 구원방식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양보한 적이 없다. 하나님의 이러한 구원방식은 창세기에 나오는 창조방식과 같다.
없는데서 있게 하시는 방식으로 창조하셨듯이 구원도 또한 그렇다. 하나님에 의해서 구원되는 축복의 중심 자는 전혀 인간의 예상을 뒤엎고 불쑥 이 세상에 튀어나오는 것이다. 만약 창세기 22장에 나오는, '아들 번제 드리기'나 아니면 출애굽기 13장에 나오는 맏이를 하나님의 것으로 소유권 전이하는 것이나 에베소서 5장에 나오는 남편과 아내 사이의 관계를 유지 이 모든 것을 인간의 능력으로 수행해서 구원받겠다고 한다면 아무도 구원받은 자가 없게 된다.
어느 것이 더 어려우냐 쉬우냐의 문제가 아니다. 성령님의 몫이다. 성령님은 오로지 하나님의 말씀대로 우리에게 적용시키신다. 우리로 하여금 아브라함 되게 하시고 우리로 하여금 출애굽 당시의 이스라엘 민족이 되게 하신다.
또한 우리 가정으로 하여금 교회 되게 하신다. 남편은 아내 사랑하기를 목숨 바쳐 하도록 하시고, 아내는 남편을 대하기를 주님 대하듯 하게 하신다. 그렇게 해서 하나님의 일관성 있는 구원의 방식을 구원될 자에게는 그 누구에게 예외 없이 다 적용시키신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민족에게 특별히 장자의 자리에다 자신을 배치시키는 것처럼 오늘날 우리들은 하나님의 장자로 이 세상 안에다 자리잡게 하신다. 장자 없이는 그 집안이 안 되는 이유는 그 장자에게는 하나님의 구원의 정보가 가득 담겨 있기 때문이다.
애굽에 사는 모든 장자들이 다 죽을 때 히브리인의 장자도 함께 죽은 것이 된다. 그 가운데 개입하신 것이 '어린양의 희생'이다. 이것은 마치 이삭이 태어날 때 이미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의 태가 죽어 사실상 자식 얻기가 막힌 상태가 되었지만 난데없는 하나님의 약속이 주어져 그 약속으로 인해 이삭이 태어난 것과 같다.
유월절 어린양이 하나님의 약속의 본질과 실체를 엿 보게 해 주는 것이다. 이런 구원의 정보가 가득 담겨있는 장자가 이스라엘 민족의 각 가정마다 자리 잡았다는 것은 각 가정마다 하나님의 구원의 정보가 다 들어가 있다는 말이 된다.
이스라엘 민족의 각 가정에서의 장자는 죽은 데서 살아난 자들이다. 이 구원의 혜택이 복의 근원으로서의 장자 역할을 충실히 하여 그 가정에게 복이 주어지는 근원이 된다. 이렇게 해서 이스라엘 가정은 유월절에 의해서 지탱되는 약속의 공동체가 되는 것이다.
13:11-16
하나님의 구원방식은 이스라엘에게 힘을 요구하시는 것이 아니라 거룩이 있느냐를 물으시는 구원이다. 하나님이 주신 말씀과 지시는 거룩을 생산케 하는 체제인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거룩'에 대해 오해하지 말아야 한다. 윤리와 도덕을 거룩이라고 보지 말아야 한다. 그런 것은 새로운 형태의 힘 축적의 방도가 될 뿐이다. 하나님이 생각하시는 거룩이란, 이 세상과의 분리요 단절이다.
거룩 된 자는 이 세상에서 분리되어야 하고 쓸쓸해야 되고 외로워야 한다는 것이다. 거룩은 어린양에게서 나온다는 것은 유월절의 핵심분야이다. 거룩이 없는 애굽 나라를 거룩이 있는 이스라엘이 이겼다는 것이다.
거룩이 어린양에서 어떤 근거에 의해서 도출되는 것인가 하면 어린양이 들어가게 되는 곳은 바로 제사하는 사건 속이다. 이스라엘의 모든 가족과 가축들은 전부 그 첫 소산물은 다 어린 양으로 교체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어린 양으로 도배되지 아니하면 하나님과의 연결고리가 깨어진다는 것이다. 거룩하지 않는 가축이나 무리는 이 죽음을 일으키는 거룩의 세계 안에서는 존속할 수 없다는 이야기이다.
구원이고 천국이고 간에 그 어느 인간도 이 무시무시한 심판을 통과치 못한다는 말이다. 이것은 '차단'이다. 그리고 '거부'이다. 인간이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거부하신다. 그것도 철저하게 적극적으로 거부하신다.
이 거부가 전제되지 않는 구원이란 모두 사이비이다. 인간들이 에덴동산에서 나올 때부터 인간에게는 조금도 거룩이 남아 있지 않고 그 대신 더러움만 충만한 것이 분명해졌다. 이러한 현실을 개인적인 성의나 감정으로 어물쩍 그냥 넘어갈 사항이 아니다.
더러움은 분명 더러움이요 하나님의 거룩은 냉정하게 거룩이다. 이 둘 사이에는 타협이나 혼합이 있을 수 없다. 이방 신 속에는 이런 단절이나 차단이나 금지가 없다. 이방민족의 신은 인간의 존재성을 긍정하고 용납하는 속성으로 자리잡고 있다.
즉 인간은 신과 사귐에 들어가므로 서 비로소 신으로부터 축복을 받을 자격이 마련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사상은 전제가 결코 인간은 신으로부터 거부당하거나 배척 당할 이유가 없다는 확신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렇게 되면 창세기 3장에 나오는 에덴 동산에서의 추방은 하나님이 잘못 내린 처방이 되고 만다. 추방하지 말아야 될 자를 추방한 셈이 된다. 하나님이 하신 모든 일이 다 실수한 것이 된다. 인간이 실수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 쪽에서 실수한 셈이 된다.
이렇게 건전하고 훌륭하고 괜찮은 인간을 괴롭게 한 신이라면 그것은 옳은 신이 아니라는 결론에 도달할 것이다. 신은 인간을 단절시킬 권한이나 자격이 없는 것이 된다. 신은 인간을 보다 잘 배려해야 마땅하다고 보는 것이다.
이 모든 사상이 이방민족 신속에 다 함유되어 있다. 인간을 위한다는 신이다. 하나님은 어린양의 희생을 가지고 이런 이방 신과의 싸움에 돌입하셨다. 즉 인간 세계에서는 결코 '거룩'이 나올 수 없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민족에서 난 맏이는 '다 내게 돌려라'라고 지시하신다. 전에는 더러움 속에 있는 자를 어린양의 죽음에 합류 시켜야지 만 그 안에서 죄 씻음이 성사되어 거룩 된 장자로서 시작된다는 것이다.
흠 없는 어린 양, 즉 하나님 쪽에서 제공된 '거룩'은 이스라엘 내에 하나님의 거룩을 생산하기 위해서 대신 죽으심으로 죄를 씻는 작업에 나서게 된 것이다. 따라서 이 통로 외에는 결코 거룩이 주어질 수 없다.
거룩이란 윤리나 도덕이나 인간의 감정이나 지식으로 획득되는 것이 아니다. 오직 거룩한 분의 희생의 효과가 주어질 때만 거룩이 생겨나는 법이다. 이사야 6:1-4에 보면, 인간의 개인적인 기분이나 감정과 전혀 별개와 완전히 단절된 채, 하나님의 거룩은 그대로 거룩 되게 현실적으로 상주하고 있다. 하나님은 이 엄청나게 무서운 거룩으로 이 세상 징벌이 나서신다.
누구든지 어린 양 안에서 죄 씻음을 얻지 못하고 그래서 거룩한 상태가 되어 있지 않으면 다 저주받는다는 것이다. 울어도 소용없는 짓이다. 마치 인간의 조상이 에덴동산에서 추방된 후 그 길목에서 운다고 해서 그 화염 검이 철거되는 것이 아니듯이 말이다.
실제로 이 어린양의 거룩이 어떻게 이 지상에서 펼쳐지는 것인가 하면은 철저한 단절과 분리로서 비쳐지게 되어 있다. 예수님도 이 세상에서 거룩한 백성이 얼마나 소수인가를 보여주기 위해서 이런 말씀을 하셨다.
"적은 무리여 두려워 말라 너희 아버지께서 그 나를 너희에게 주시기를 기뻐 하시니니라". 누가복음 12:32의 말씀이다. 이 세상이 삶은 거룩에서 힘이 나오는 것이 아니라 집단에서 힘이 나온다고 믿고 집단 결속의 힘의 대단한 기대감을 갖게 된다.
그런데 이 한 가운데 하나님의 지시가 떨어져서 하시는 말씀이, "내게 돌려라"라고 하셨다. 이렇게 되면 세상에서 거룩한 하나님께 돌려진 자들이 있다는 말이다. 이 사람은 어린양의 피와 합세하여 그 피 속에서, 그 피로 말미암아 죄 씻음을 입은 사람들이다.
이 사람들은 결코 감정이 여리거나 예민한 사람들이 아니다. 그저 십자가 안에서 거룩을 만나고 거룩을 입은 사람들이다. 결코 거룩을 윤리나 도덕으로 만들어내는 사람들이 아니다. 이로서 이들만큼은 속된 더러운 세계에서 거룩한 세계로 옮겨졌다.
이 때부터 이들은 그동안 세상 친구들이 도저히 이해하거나 납득할 수 없는 영역에 해당되기에 외롭고 쓸쓸한 인생 길을 가야한다. 마치 예수님이 가신 그 길처럼 말이다. 이로서 거룩과 비 거룩의 전쟁은 이들을 통해서 지금도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다. 십자가로 인한 거룩인가 아니면 우리 인간이 거룩을 만들어서 그 만들어진 거룩으로 구원받는가의 싸움이다.
14: 4- 9
하나님은 이스라엘 민족과 애굽 민족을 놓고 시합을 붙이고 경쟁을 붙이고 싸움을 붙이고 있다. 의도적이다. 싸움이 안 될 수 없도록 조치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시다. 이처럼 오늘날 성도도 삶의 위기에서 벗어나려야 벗어날 수 없도록 하신다.
바로 여기에서 여호와 하나님의 특성이 나타난다. 여호와 하나님은 모든 것을 전쟁하는 양상으로 몰아가고자 하신다. 이 세상은 전쟁터이다. 어느 장소이든, 어느 시절이든 악마와 하나님의 자녀의 싸움이 계속된다.
이러한 전쟁과 전투가 없이는 하나님의 뜻이 전달되지 않는 원인은 사람이 출생하는 이 세상 자체가 죽음에 의해서 점령당한 상황이기 때문에 이 상황의 실상을 모르고 '구원'의 의미도 모르게 되어 있다.
'살아있다'는 것은 성도에게 당연한 사실이 아니라는 것이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늘 생존의 위협과 마주치게 함으로서 '내가 누구인가'를 새삼 알게 하신다. 마치 해가 지면 사방에 어둠이 깔리듯이, 그리고 그 어두움은 우리 힘으로 저항할 수도 없고 어찌할 수 없듯이 그런 위세의 죽음의 땅거미는 성도를 노리고 집결하게 된다.
하나님께서 성도를 이 지경으로 자꾸 몰아세우시는 것은 '구원'의 진정한 의미를 일깨워주기 위함이다. 하나님께서는 죽음이 물러가는 식으로 인간을 건져내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반대로 그 죽음이 더 가까이해서 끌어당기면서 구원의 위력을 실감케 하신다.
일단 인간으로 하여금 자력 구원을 하지 못하게 하신다. 아예 포기하게 만든다. 죽음을 더욱 가까이 끌어 들여 죽음 속에 친히 들여다보게 한다. 그 안에 죽음이라는 블랙홀이 생겨났는지를 말이다.
이런 면에서 이스라엘은 '사람의 군대'가 아니라 '하나님의 군대'가 된다. 자신의 생존을 위해서 움직이고 일하는 집단이 아니라 하나님의 적과 싸워야 하는 임무에 차출되어 동원된 부대이다. 이스라엘이 벌리는 전쟁에서는 죽음의 실체가 드러나는 전쟁이다.
죽음이 어디서 왔으며 인간의 죽음을 놓고서 누가 주도권을 쥐게 되느냐를 밝혀내는 전쟁이다. 이스라엘을 곧장 추격해 온 애굽 사람들의 심정을 헤아리면 이렇다. 그동안 교묘한 히브리인들의 종교열성에 자기네들이 깜빡 속아 넘어갔다고 보고 있다.
우연히 발생된 자연 현상을 두고서 히브리인들은 마치 자신들을 지켜주고 지지해주는 여호와라는 이름의 신이 개입해서 의도적으로 일으킨 일이라고 주장 한 것이다. 그런데 이 막강한 애굽의 나라의 지도부가 그러한 허황된 종교논리에 속아 넘어가서 정신을 차리지 못한 사이에 히브리인들을 놔준 결과가 일어났다고 여겼다.
이렇게 되면 애굽 나라의 권세의 권위를 추락하고 연이어 소수 민족들이 독립을 부르짖으면서 바로 권세에 대항할 가능성이 있다. 따라서 이참에 확실히 본 떼를 보여줄 필요성이 있다고 다짐하게 되었다.
감히 이 대국을 섬기지 않고 말도 듣지 않고 그것도 요상스러운 지네들 종교이론으로서 속였다는 것은 도저히 용납지 못할 일일 수밖에 없다. 그래서 최강의 군단을 편성하여 급히 도망치는 히브리 민족의 뒤를 추격해왔던 것이다.
하나님은 하나님대로 일부로 이스라엘에게 죽음의 정체를 알려주기 위해서 애굽 사람을 이용하려 하신다. 저항할 수 없는 막강한 힘을 지닌 죽음덩어리가 이스라엘을 덮치게 만든다.
그래서 이스라엘로 하여금 죽음 문제는 결코 인간의 손에서 처리될 사항이 아님을 분명히 해두고자 하신다. 멀게만 느껴졌던 죽음이 이제 이스라엘 코앞에 들이닥쳤다. 이스라엘 뒤에는 참혹한 죽음을 안겨줄 애굽 군대가 진치고 있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공통적으로 간직해야 될 힘에 대한 복종을 거부하고 감히 히브리인들은 비현실적인 행위에 나선 것을 이참에 혼을 내겠다는 것이 바로 왕의 생각이다. 하나님께서는 무슨 의도로 이런 현실을 유발하셨던 것일까?
여기서 고린도전서 15: 53-56을 보면, 출애굽기에서는 그냥 민족 대 민족의 전쟁이라는 형식을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구원'이라는 것을 설명하시려고 하지만 신약에 와서 보면 '사망'과 '생명'이라는 특이한 개념을 가지고 '싸우시는 하나님 상'을 알려주고 있다.
왜 하나님께서 성도에게 연속적으로 '죽음의 위기'를 들이닥치게 하시는가 하면, 하나님이 행하신 생명의 소중함과 위대함이 그 어떤 극한 죽음 앞에서도 꿀릴 필요가 없다는 것을 말해주시기 위함이다.
출애굽에 등장하는 애굽 나라의 사고방식은 강자 앞에 약자가 굴복해야 그래야 생명이 보장받는다는 원리, 원칙이다. 그런데 감히 소수의 히브리민족은 그 이 땅의 원리, 원칙에 대항하면서 탈출이 감행된 것이다. 그것도 여호와 하나님만 믿고서 말이다.
이것은 참으로 무모한 일처럼 보여진다. 그러나 신약에 와서는 더욱 더 무모하고 차라리 허황되어 보이는 현실이 소개된다. 성도는 타인과 싸우는 것이 아니라 죽음과 싸우는 존재라는 것이다.
전에는 '사망'이 인간을 쥐고 흔들었다면 이제 성도에게는 되레 '사망' 자체의 멱살을 잡고 흔들 수 있는 입장에 있다는 것이다. 그동안 사망이 사용한 공격무기는 바로 '율법'이었다. 이 세상 신은 인간을 고소하는 자다.
인간의 양심이라는 과녁을 향해 날아가는 화살이 곧 '사망'이라면 그 화살에 에너지를 실리게 하는 것은 율법이라는 것이다. 악마는 율법의 도사이다. 예수님을 시험할 때는 악마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고 나선다.
이처럼 완벽하고 반드시 지켜야만 살 수 있는 그 율법을 가지고 세상 신은 성도에게 주어진 구원과 생명을 무효화하기 위해서 위협을 주는 것이다. "네가 그런 짓을 하면서도 감히 구원되려고 하느냐? 너는 완전하고 완벽한 이 율법에 굴복하고 복종함으로서 생명을 보장받아야 이것이 네가 살 길이다"라고 악마는 윽박지른다.
만약 어떤 사람이 옛날 애굽 식의 생활태도를 그대로 갖고 있다면, 그는 율법이 시키는 대로 굴복해서 그렇게 해서 구원받고 싶어 할 것이다. 그러고 감히 그 거룩한 법에서 벗어나서 구원이 된다는 사실을 상상치도 못했을 것이다.
인간의 구원이란 자력에 준해서 결정된다는 의식이다. 사실은 이 사고방식은 모든 인간들의 보편적 상식에 해당된다. 왠지 착한 일을 많이 했다고 여기면 왠지 하나님의 도움을 보다 강하게 받아낼 것 같은 느낌이 들고, 반대로 나쁜 일을 많이 했다고 여기면 왠지 하나님의 도움은커녕 징계나 형벌을 받을 듯한 느낌이 들 것이다.
이런데 이러한 마음가짐은 결국 그 사람으로 하여금 사망케 하는 원인이 된다. 왜냐하면 죄의 권능은 사망이기 때문이다. 즉 악마가 시키는 대로 완벽하지 아니하면 죄가 된다는 의식을 인간을 갖게 마련이다. 이 의식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 그저 주신 구원의 위력에 대한 감사는 싹 가시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애굽 나라같이 이 세상이 성도에게 노리는 바이다. 즉 "이 현실이 어떤 현실인데 감히 네가 겁도 없이 완전치도 않으면서 구원되었다는 사고방식을 갖느냐"는 주장으로 성도를 공격한다.
하지만 성도는 안다. 예수님은 부활이고 생명인 것을 말이다. 그저 주시는 은혜로 생명을 얻은 것이다. 바로 이러한 복음의 진수는 늘 성도 곁에 죽음의 위기가 들이닥치는 식으로 전달된다. 비록 눈에 보이시는 분은 아니지만 우리로 하여금 십자가의 복음을 잊지 않도록 충실히 인도해 주심을 항상 감사해야 한다.
14:10-14
성도에게 주어진 모든 복은 오직 예수님 혼자만의 공로로 주어지는 것이다. 이 공로를 인간이 도중에 자기 행함을 가지고 끼어들면 안된다. 이들은 직접적으로 적군이 바로 뒤까지 도달되어 있다.
흔히 말하는, 종교적 개념으로서의 하나님과 교리 같은 것이 전혀 소용없다. 단지 너무나도 다급한 현실성만 그들에게 들이닥쳤다. 죽음이라는 것을 이제 그들은 참으로 가깝게 느끼게 된 것이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이런 식으로 급박하게 몰아넣으시는 것은 그들이 이미 모형적으로나마 유월절 양을 통해 '하나님의 죽음' 안에서 인도함을 받는 대상이 되었기 때문이다.
멋있는 음악과 춤과 설교가 이 다급함이 주는 공포에서 벗어나게 해주는 것이 아니다. 종교는 종교일 뿐 절박한 현실은 아니기 때문이다. 이런 공포 속에서 이스라엘 사람들은 비로소 그동안 깊이 감추어 놓았던 자기 본성을 여지없이 털어놓게 된다.
즉 "우리가 하나님을 찾은 이유는, 애굽 땅에서 편안하게 살기 위함이었다. 이 점에 대해서 하나님이 너무나도 잘 알고 계시는데 비해 모세와 아론 너희들은 우리의 뜻을 너무 안 알아주는구나"라고 모세와 아론을 원망한다.
오늘날도 예외가 아니다. 사람들이 교회를 찾아오는 이유가 다 이 세상에서 잘 먹고 잘 살겠다고 찾아온 것이다. 결코 '하나님이 죽으신 이유' 같은 것을 알겠다고 오지를 않는다. 그런데 목사 입에서, 예수님과 십자가 이야기만 하면 그들은 더욱 더 삶의 무게가 주는 공포심을 더욱 더 강하게 느끼게 된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이런 식으로 인도하시는 이유는, 죽음이 가져다 주는 현실성을 미리 그들에게 안겨주어서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죽음'에 동참시키려고 하시는 것이다.
사실 애굽 땅에서 더 머물러봐야 새로운 공포가 계속 일어나게 되어 있다. 사람들의 모든 공포는 자기 창조력으로 자기를 버텨 나가려고 하지만 끝까지 죽음이 주는 공포에서 벗어날 수 없다. 왜냐하면 자기 사랑이란 원래 하나님의 창조력으로 조성된 이 세상의 현실과 맞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하나님은 자신의 창조력에 맞는 현실 속으로 자기 백성을 넣어주시려고 하신다. 그것이 바로 사랑이다. 사랑 안에는 두려움이 없다. 이 사랑은 바로 주의 종에 의해서 알려진다.
다니엘에 보면 느부갓네살 왕이 꿈을 꾼다. 그는 얼마나 그 꿈이 무서웠던지 자기 신하들을 전부 다 불러 자기가 꾼 꿈을 알아내라고 억지를 부리게 된다. 물론 남들 보기에는 그저 개꿈에 지나지 않겠지만 그 당시 최고 국가의 왕을 그토록 공포에 몰아넣는 꿈이라면 이는 그냥 일상적인 꿈이 아니라 온 우주의 주인 되시는 분의 특별한 간섭이 있었다고 느부갓네살 왕은 확신했다.
바로 이 점을 확실히 주는 자가 있었으니 그 사람이 바로 다니엘이다. 다니엘을 통해 왕은 자기 자신의 일개 짐승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된다. 본문에서는 모세가 있다.
하지만 백성들은 자신에게 주어진 두려운 현실로 인하여 모세에게 달려든다. 11절에 보면, 그들에게는 현실만 해결되면 그만이다. 먼 장래까지 생각할 겨를이 없다. 순간 그냥 목숨이 부지하는 식으로 살면 그것으로 "잘 살았다"라고 확신하고 싶어하는 것이 그들이었다.
그러나 모세는 결코 그들이 원하는 것을 들어 줄 수 없다. 왜냐하면 본질을 모르고서는 결코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할 수 없기 때문이다. 만약 하나님의 사랑을 알고 자비를 안다면 세상에 주는 그 어떤 공포에서도 벗어날 수가 있다.
자신의 본질이 하나님의 사랑, 하나님의 자기희생에 기초해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따라서 하나님의 창조력을 위해 자신의 창조력을 알아서 포기해야 하는 새로운 낯선 환경 속으로 그들은 딸려 나와야 하는 것이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이다. 오늘날에는 예수님이 계신다. 예수님은 우리의 본질을 알게 하시는 분이다. 사실상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관한 한 우리가 원하는바 아무 것도 해주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왜냐하면 이미 모든 것을 다 주시고 계시기 때문이다. 즉 세상에서 버티는 재주를 주시는 것이 아니라 세상에 대해 넉넉히 이기는 능력을 주시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날마다 자신의 본질을 되돌아보게 한다. 이제 우리의 창조력으로 환경을 자기 관리 하에 지배하려고 하지 말자. 남는 것은 지독한 실망뿐이다. 죽어도 좋다는 자유 함이 참으로 우리의 본질이다.
14:13-14
하나님의 전쟁은 어떻게 진행되고 도대체 '가만히 있기'란 무엇을 의미하는 점을 알기 위해서 역대하 20:14-19에 보면, 전쟁을 하면 칼이나 창이나 활을 들고 나가야 되는 데도 제사장은 말린다. 그러지 말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번 전쟁은 사람 대 사람으로 벌리는 전쟁이 아니라는 것이다. 하나님께 속한 전쟁이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창이나 활이 필요치 않다.
"너희가 싸울 것이 없다"고 성신을 받은 제사장은 단언한다. 그리고 도리어 찬양대를 조직하여 마치 전쟁이 모두 끝나서 이미 승리자가 된 것처럼 기쁨을 찬양을 하게 된다. 그리고 그 골짜기가 브라가 골짜기 즉 '송축의 골짜기'가 되었다.
하나님이 벌리시는 전쟁의 무기의 한 예를 들면 마태복음 10:27-32에 이 말씀은 하나님의 뜻이다. 이 말씀 자체의 효험에 대해서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이 세상에 데리고 가서 증명하시는 전쟁을 벌이는 것이다. 어떤 사람이 성도를 죽이려고 할 때, 그 사람을 향하여 무조건 살려달라고 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자기 싸움이지 하나님의 말씀을 위한 싸움은 아니다.
즉 인간은 육을 죽이는 자를 당연히 무서워한다. 따라서 하나님의 말씀대로 가만히 있지 못하고 벌벌 떨면서 나름대로 조치를 취하게 된다. 이렇게 되면 그 사람을 데리고 말씀의 능력을 보이시려는 하나님의 일은 방해 받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스데반 집사님의 경우처럼 그 순간에서도 하나님의 전쟁을 고려하면서 가만히 있어야 하는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가만히 있기'란 아무 것도 안 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살기 위한 뜻을 하나님 말씀 성취를 위하여 포기한다는 것이다.
이처럼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을 사용하여 하나님의 자기 뜻만 이 땅에 펼치시는데 관심이 있을 뿐이다. 그 한 예가 역대하 12:5에도 나온다. 보통 이스라엘 사람들은 생각하기를, 자신들은 하나님의 자녀요 백성이기 때문에 순전히 하나님께서 자신들에게 유리하도록 전쟁을 발생시키시고 이끈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이 본문에 보면 그게 아니다.
유대 나라가 도리어 하나님의 뜻을 어기니 이번에서 하나님께서 적들을 보내어 유다 나라에 붙이셔서 유다 나라는 반드시 망하고, 그 대신 평소의 유다 나라의 적이 승리하도록 조치해 버렸다는 것이다.
이것을 놓고 볼 때에 하나님의 벌리시는 전쟁은 그저 하나님의 백성 편이 아니라 순전히 하나님 자신만을 위한 전쟁이다. 적이든 아군이든 하나님의 뜻이 방해 받는 것은 하나님께서 결코 용납하지 않으신다.
그렇다면 이 구약에 있어 '가만히 있음'의 전략은 과연 신약 때에서 적용이 될까? 에베소서 6:10-17에 보면, 뭔가 큰 전투라도 벌어진 것 같다. 그런데 이 모든 완전무장 한 채 벌려야 될 이 전쟁의 양상이 본문에 나오는 '가만히 있으라'하고 같은 뜻이라는 점이다. 왜냐하면 완전 무장을 하는 기구 가운데 인간적인 것은 전혀 들어있지 않기 때문이다.
도리어 계속해서 '가만히 있어야 되, 가만히 있어야 되'를 되풀이하는 바로 그것이 악한 영들에 대해 승리하는 무기라는 것이다. 예를 들면, '하나님의 말씀을 가진다'는 의미는 인간의 개인적인 포부나 감정이나 느낌이나 체험을 얻고자가 아니라 성경 말씀 안에 들어있는 하나님의 계획은 그 어떤 경우에서도 차질 없이 진행되고 있음을 차분히 수용하겠다는 신앙심이 전제되어야 하는 것이다.
즉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 뜻대로 하옵소서"의 반복인 것이다. 이렇게 되어야지 만 이 전쟁이 인간의 사적인 전쟁이 되지 않고 하나님의 전쟁이 되는 것이다. 자기 뜻이 아니라 흉배로 사용된 하나님의 의를 위한 전쟁이요, 사적인 전쟁이 아니라, 머리에 쓴 구원을 위한 전쟁이요, 개인적인 전쟁이 아니라, 신발로 신은 복음을 위한 전쟁이기 때문에 그렇다. 이 하나님의 뜻을 위하여 성도는 뽑힌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전쟁'의 실상이다.
14:15-20
하나님께서 인간을 에덴동산에서 추방하실 때 그냥 쫓아내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을 담아서 내어 보내었다. 그 약속이 바로,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이 서로 싸운다는 약속이다. 물론 최후 승리는 여자의 후손 쪽이다.
그래서 아담은 낙원에서 추방되면서도 자기 아내 이름을 '여자'에서 '하와', 즉 '생명'으로 바꾸어 부른다. 이로서 이 여자의 후손의 원리가 담겨 있는 민족은 약속의 민족이요 이 여자의 후손의 원리가 들어있지 아니하면 그냥 보통 민족이 되고 만다.
이 둘의, 원리는 인류의 역사 속에서 계속 진행되면서 전쟁이 붙게 되어 있다. 본문은 그 전쟁의 양상 중 하나이다. 따라서 본문을 통해서 '여자의 후손'의 원리를 찾아낼 수 있어야 한다.
이 세상을 지배하는 자연스러운 원리는 힘세고 남보다 아는 것이 많고, 권위와 권세를 상대적으로 우월한 위치에 있다는 자들이 상대적으로 약자를 함부로 대하는 현상을 통해서 나타난다. 가정에서도 예외가 아니다.
남자라는 이유만으로 아내를 학대하는 그 심보 속에는 약한 자에 대해 주도권을 한껏 발휘하겠다는 의지가 자리잡고 있다. 그런데 이러한 심보는 창세기 3장에서 인간의 조상이 범죄 한 이후에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지정해주신 죄악 된 품성이다. 즉 남자는 여자를 누르고 여자는 남자를 사모하게 되어 있다는 것이다. 이것이 단순히 아담 내외 간의 문제가 아니라 전 인류의 갈등과 투쟁으로 확대가 된다.
강자가 약자를 억누르고, 약자는 강자를 흠모하는 식으로 말이다. 다시 말해서 남자의 후손은 여자의 후손을 핍박하고, 여자의 후손은 모든 남자의 후손들로부터 희생당하는 식이 된다.
여자의 후손이란 어떤 원칙에 준해서 이 세상에 나타나는가는 하나님이 예정하신 약속에 의해서 등장된다. 그것이 이스라엘에게는 언약이 되는 것이다. 이스라엘 민족은 조상들이 받았던 언약에 의해서 생존하고 인도 받는 민족이다.
그리고 모세에게 찾아오신 여호와 하나님 자체가 언약을 성취하기 위해서 찾아 드신 하나님이시다. 이스라엘은 언약 성취를 위해 동원된 여자의 후손 계열이다. 따라서 하나님은 '여자의 후손'의 존재 목적을 설명하기 위하여 이스라엘을 활동시키고 계신다.
창세기 3장에 의하면 '여자의 후손'은 그냥 구원되는 분이 아니라 이 세상을 쥐고 있는 뱀의 후손 곧 악마와 전쟁을 벌이시는 분이다. 후손이란, '뒤쳐졌다'니 '선조보다 못하다'라는 인식을 갖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후손이란, 선조를 선조 되게 하는 진정한 원동력을 품고 등장하게 되는 진정한 주인공을 의미하는 것이다. 예를 들면, 아브라함은 자기 후손인 이삭을 통해서 구원받게 되어 있다. 마찬가지로 이삭도 자기 아들인 야곱이 품고 있는 하나님의 약속이 성취됨으로 구원받을 수 있는 것이다.
선조가 후손을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후손이 선조를 지배하는 양상이다. 이것은 '후손'이라는 이름으로 성취된 약속 차원에서 구원이 성사되는 것이다. 하지만 이스라엘 사람들이라도 이러한 여호와 하나님의 계획에 대해서 항상 찬양하고 동의한 것은 아니다.
그들은 육신을 지니고 있기에 육이 안겨다 주는 생존의 동기와 본능에 묶여 있다. 뒤에서는 애굽 군대들이 추격하고 있다. 당장이라도 엄습하여 몰살시킬 기세다. 그러나 그것을 여호와 하나님께서 의도적으로 강퍅케 하신 줄 생각도 못한 것이다.
사람들은 자신을 구원해 준다고 하면 일단 자기편이라고 간주한다. 따라서 같은 편이니 같은 편을 괴롭게 만들 이유는 없다고 여긴다. 하지만 하나님의 일은 그렇지 않다. 하나님은 여자의 후손 편이지 결코 인간 편이 아니다.
인간들은 자신들의 진정한 적이 어디 있는지 무엇을 하는 누군지 전혀 모르는 상태에 놓여 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라도 마찬가지이다. 금방이라도 들이닥칠 재난에 대해서 그들은 마냥 생존 본능만 남발하고 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스라엘 적을 달리 보신다. 여자의 후손의 차원에서 적을 보니 애굽이 달리 보이는 것이다. 그들은 '뱀의 후손'이다. 바로 이 점을 전에도 모세를 통해서 일러준 바 있다.
출애굽기 4장에 보면, 모세는 그냥 하나님과 만나고 있다. 무엇 때문에 자신이 하나님 앞에 서 있는지도 모르는 채 말이다. 하나님은 모세에서 인류의 진정한 내막을 보여주신다. 그것을 지팡이를 통해서 보여준다.
그 이유는 이제 모세가 든 지팡이는 모세 개인용도의 지팡이 아니다. 도리어 지팡이에 붙잡힌바 된 모세가 된다. 보통 개인 사물은 그 주인이 원하는 바로 쓰여지기 마련이다. 이처럼 모세가 들고 있는 지팡이는 누가 뭐래도 모세 것이다.
하지만 그 때부터는 아니다. 모세가 되레 지팡이로부터 쓰임을 받게 된다. 그 이유는 지팡이 안에 하나님의 약속이 접혀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손에 들고 있는 지팡이를 땅에 던지라고 했다. 그랬더니만 지팡이는 간데없고 웬 뱀이 거기에 등장했다.
모세는 그냥 하나님만 상대하기 위해 하나님께 뽑힌 자가 아니다. 하나님이 원래 계획한 바, 즉 '뱀의 후손'과 싸워야 될 '여자의 후손' 편이 되기 위해 뽑힌 자다. 모세의 계획이 아니라 하나님의 계획을 수행하기 위해 모세가 백성들 앞에 등장된 것이다.
이로서 이스라엘 나라는 모세로 말미암아 '여자의 후손'이라는 원리에 담기게 되었고 인도 받게 되었다.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 사이에는 철저한 '단절'만 있을 뿐이다. 절대로 섞이거나 융합되거나 타협될 수 없다.
본문 마지막은 "이스라엘 진 앞에 행하던 하나님의 사자가 옮겨 그 뒤로 행하매 구름 기둥도 앞에서 그 뒤로 옮겨 애굽 진과 이스라엘 진 사이에 이르러 서니 저 편은 구름과 흑암이 있고 이 편은 밤이 광명 하므로 밤새도록 저 편이 이 편에 가까이 못하였더라"
그러니까 하나님은 여자의 후손 편과 뱀의 후손 편을 철저하게 구분하는 것에 초점을 맞추어서 자기 일을 수행해 나가시겠다는 것이다. 사실 지팡이란 평소에 인간들이 자기 능력을 마음껏 구사할 수 있는 도구이다.
그런데 이제 그 지팡이의 주인이 바뀌고 만 것이다. 이 주인 바뀜에 대해서 아직도 이스라엘 민족들은 그 취지에 어둡다. 그들은 스스로의 안목으로 사태를 파악하고자 한다. 지팡이는 언제 동원되느냐 하면, 하나님은 인간과 같은 편에 속하지 않음을 나타날 때 동원된다.
즉 모세가 지팡이를 마음대로 휘두를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지팡이가 앞장서서 벌리는 일의 혜택자가 될 뿐이다. 비록 모세가 지팡이를 쥐고 있어도 지팡이의 주장할 수 있는 권한도 없고 지팡이가 보여주는 신기한 세계 안으로 자기 마음대로 들어 갈 수 있는 자격자도 아니다. 단지 지팡이를 통해서 열려진 감추어진 세계에 참여할 뿐이다.
이제 하나님은 모세를 통해 '바다를 갈라지게 한' 그 세계로 초빙하신다. 물론 전 이스라엘 민족이 다 초청된다. 바다가 서로 한쪽으로 물러가서 벽을 이루고 그 복판에 길이 났다. 지팡이 안의 세계에는 무엇이 악마이며 무엇을 위한 전쟁이며 그 전쟁이 어떻게 치러지고 있는지 가 다 담겨 있다.
그런데 그런 전쟁은 모두 '여자의 후손'으로서 만 치러진다. 사람들은 위급한 상황이 닥치면 자신이 판단해서 자신의 능력을 발휘하고자 한다. 이것은 스스로 지팡이의 주인이 되고자 하는 방식으로서 '여자의 후손'에 의존하는 방식이 아니다.
참으로 하찮아 보이고, 누가 봐도 무시할 만한 것을 가지시고 하나님은 자신의 전권자임을 드러내신다. 그렇게 해서 이 세상에서 누가 '여자의 후손'인지, 누가 '뱀의 후손'인 지를 철저하게 구분 짓는 작업에 매진하시는 것이다.
성도가 인도 받는 길이 곧 이 길이다. 우리로 하여금 황당하고 당혹스러운 길로 인도하시면서 우리 성도로 하여금 스스로 힘으로 살지 못하게 하신다. 그리고 우리 보기에 보잘것없는 것을 통해서 크신 하나님의 은혜로우신 인도하심을 알게 하신다. 이로서 매사에 우리가 '여자의 후손 편'에 속함을 늘 깨우치게 하신다.
14:26-31
애굽 군인들을 덮은 물은 사실 그 물 배후의 세력은 따로 있다. 그 분은 바로 여호와 하나님이시다. 그래서 만약 애굽 군인들이 자기 위를 덮쳐오는 바닷물에 대해서 원망하거나 하소연하는 것은 아무 소용도 없는 일이다.
그 물을 움직이는 여호와 하나님의 심판과 구원의 원칙에 이제는 제대로 알아야 하는 것이다. 죄를 지었기에 물이 동원되었고, 그 동원된 바닷물에 의해서 그들은 죽음을 당한 것이다. 따라서 이 심판의 원칙에 대해서 감히 이 세상 어느 인간도 이의를 달 수 없는 것이다.
구원받은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력으로 자신의 죄를 이길 수 있기에 구원받은 것이 아니다. 그들도 자신의 죄를 이길 수 없는 자들이다. 왜냐하면 이미 모든 인간의 아담의 죄 안에 놓여있기 때문이다.
아담이 선악과나무 열매를 따먹을 때부터 인간의 죄악 된 욕망은 확정되어 버렸다. 보암직도 하고 먹음직하고 탐스럽기만 하는 이 욕망은 그 어떤 계명이나 절대적인 율법의 지시보다 더 강렬하다.
여기서 인간은 무엇을 사랑하는지 드러난다. 인간이 사랑하는 것은 오직 하나다. "내가 원하기 때문에 내가 해야겠다"는 원칙이 확립되어 있다. 이 세상의 모든 인간의 행동을 표현하는데 있어 이 원칙은 철저하게 적용된다.
자신의 욕망을 인간은 스스로 거부할 능력을 갖고 있지 못하다. 그러면서도 인간들은 본의 아니게 하나님이 친히 벌리시는 그 전쟁터에 던져져 있는 존재들이다. 쉴 새 없이 우리들의 눈과 귀를 향하여 날아오고 있는 각종 소란스러운 소문과 정보나 지식들은 다 무엇인가?
바로 전쟁터에서 날아 들어오는 광채들이다. 하나님에 의해서 죽임을 당한 시신들의 외침 소리이다.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살다가 하나님의 전쟁 원칙에 맞지 않아서 저지당하고 깨져버린 파편들이다.
사람들은 하나님이 벌리시는 전쟁의 소용돌이 한 복판에 놓여 있다. 각자 나름대로 살려고 하다가 죽음을 요구하시는 하나님 앞에서 살려는 방편들이 무참하게 깨어버린 경험들을 내 쏟고 있다. 각자 자기가 원하는 것을 본인이 해야겠다고 고집을 부린 그 결과로 인간들은 전부 패잔병 신세가 된 것이다.
여기에서 생에 대한 탄식이 매일같이 나오게 된다. 애매하게 조상 원망하고, 남 탓하고, 대통령 탓하고, 하나님 탓한다. 바닷물에 수장되는 애굽 병사들이 애꿎은 바닷물을 보고 그런 원망의 말을 절대로 할 수 없다. 바닷물은 그저 하나님이 시키신 대로 움직였을 뿐이다. 홍해바다는 다시 정상적으로 닫혔다. 예전처럼 유유히 바닷물은 흘러가고 있을 것이다.
바닷물은 애굽 군사들과 원수 질 일을 하지 않았다. 그저 물에 불과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시 닫혀진 바닷물 속에는 수많은 애굽의 군인들이 수장되어 있다. 홍해 바닷가에는 물에 빠져 죽은 수많은 애굽 군인의 시신들이 물결에 떠 내려와 널려있다.
분명히 무슨 일이 있었고 그 일로 인한 흔적을 홍해바다는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과연 하나님에게 있어 아군인가 적군인가? 마태복음 8:23-27에 보면, 하나님은 일부로 제자들이 바다 한가운데 건널 때 풍랑이 일어 그들로 하여금 죽음에 대해서 경험케 했다. 이것은 인간이란 결코 자력으로 심판의 상황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명확하기 위해서이다.
교인들의 고민은 자신이 너무나도 완벽하지 못하다는 점에 있다. 차라리 하나님의 말씀이 뭔지를 모르는 경우 같으면 함부로 마구 살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뭐라고 당부했는지 알고 있는 마당에서 하나님께서 요구하는 것과 자신의 욕망이 인도하는 것과 너무나도 대조되는 점을 파악하고 절망과 낙심에 잠기기 일 수다.
성경을 통해서 아무리 '돈을 사랑하는 것이 일만 악의 뿌리'라고 말씀도 하셔도 그 사랑하지 말라는 돈을 사랑하지 않고서는 사는 맛을 잃어버릴 정도다. 이 모든 것이 다 보암직도 하고 먹음직도 하고 탐스럽기만 하는 세상 것을 여전히 탐닉하도록 우리 자신들의 욕망이 발작을 일으키기 때문이다. 우리가 곧 욕망의 바다 속에서 버둥거리며 못 빠져나오는 애굽 군병들과 같다.
로마서 6:1-7에 보면, 성도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의 바탕에는 예수님의 십자가 죽으심과 부활하심의 진리가 여전히 작렬하게 된다는 것이다. 바로 이런 관점을 가지고 세상에 나서게 되면 우리는 마땅히 죽을 자인데 오로지 예수님께서 자기 백성을 껴안고 죽음에도 생명에서 늘 같이 해주신 그 덕분으로 우리가 온전히 구원됨을 알 수 있다.
절대로 우리들이 스스로 자신의 욕망을 자제해서 그것으로 새 사람 되어 구원되는 것이 아니다. 원래 타고난 천성을 우리 힘으로 바꿀 수 없다. 따라서 늘 예수님은 천국 백성으로 분류된 성도를 죽이시는 방법을 동원하여 구원하시는 것이다. 평생을 살면서 우리가 왜 죽을 죄인인가를 깊이 경험해야만 한다.
15: 1 -6
'여호와는 용사이시다'라는 말씀이 나온다. 이 표현은 앞으로 계속 되풀이된다.
이스라엘 백성 입에서 여호와 하나님이 '전쟁을 벌이시는 하나님'으로 인식된다는 것은 참으로 놀라운 고백이다. 왜냐하면 전쟁이라는 것이 일어났다면 필히 거기에 부수적으로 따져야 할 것이 많이 따라 붙게 되어 있기 때문이다.
전쟁에는 적이 있어야 되고, 전쟁에는 무기가 있어야 되고, 전쟁에는 이유가 있어야 된다. 전쟁에서의 최종 승리가 어떠한 모습으로 마무리되는가 하는 점도 같이 알고 있어야 전쟁에 관심 있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이것은 곧 인간들이 평소에 자신의 생존을 위하여 고군 분투하는 의식에서 탈피한 경우에는 있을 법한 이야기이다. 인간이 자기 일에 집착하게 되면 밖에서 전쟁이 일어나도 난리를 쳐도 별로 관심 두지 않게 된다. 오로지 자신의 생존을 위한 전쟁에만 관심 두게 된다.
실제로 교회에서 벌리는 여러 가지 기도회나 집회나 예배 같은 것이 여호와께서 벌리시는 전쟁이 아니라 이 복잡한 자본주의 사회 속에서 자신의 야망을 달성하기 위한 타인과의 전쟁을 염두에 두고 성경 구절을 이해하고 종교적인 노력을 기울이는 것을 많이 보게 된다.
하나님께서 친히 벌리시는 전쟁이 아니라 자신이 친히 벌리는 전쟁에 여호와 하나님을 끌어당기려는 심보로서 교회 다니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복음의 광채가 마음에 비치는 자들이 아니라 자신의 야망의 미래상을 자기 마음에 비추면서 살아가는 사람이다.
따라서 보통 인간들이 다 이러함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민족의 입에서 '하나님의 전쟁'에 대해 찬양이 나왔다는 것은 그들의 자질의 훌륭함이 아니라 여호와께서 친히 인도하시고 참여시킨 그 전쟁의 승리의 여파라고 바라보지 않을 수 없다.
그렇다면 여호와 전쟁에서는 필히 다음의 세 가지 요소가 수반된다. 첫째는 전쟁하는 이유에 대해서 알아야 하고, 둘째는 전쟁의 적이 누구냐 하는 것이고 셋째는 전쟁의 무기가 뭔가를 알아야 한다.
전쟁의 이유는, 하나님의 백성이라 할지라도 자기 힘으로 악마를 이길 수 없기 때문이요, 전쟁의 무기란, 선악과를 따먹은 여파로 인간에게 나오는 그 어떤 것도 실패될 수밖에 없기에 예수님께서는 힘이 아니라 도리어 자신의 희생으로서 자기 백성을 용서하는 것으로 선악 틀에 매여 있는 사람을 구출해 주셨다. 셋째는 적은 날마다 자신을 돋보이고 싶도록 부추기는 악마요 그것에 사주를 받고 사는 우리 자신들의 품성이다.
따라서 진정 여호와 전쟁에서의 나오는 전리품의 혜택을 입은 자라면 결코 하나님보다 자기 자신을 부각하지는 않을 것이다. 우상숭배란 복음의 광채가 비치지 않을 때는 항상 고개를 들게 되어 있다. 탐심이 곧 우상숭배이기 때문에 그렇다.
누가복음 7장에 나오는 그녀는 행실이 나쁜 것으로 유명하다. 주위에 있는 사람들은 그 여인을 향하여 선악적인 관점에서 악하고 더러운 여인으로 규정했다. 예수님은 이러한 악마적인 선악관점을 물리치고 "많이 용서받은 자가 많이 사랑한다"고 말씀하신다. 그 여인의 마음속에는 마냥 복음의 광채로 가득한 것이다. 용서하시는 예수님의 얼굴만으로 충분하다. 주위의 혹독한 비난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이런 여인처럼 이스라엘의 심정은 전쟁에서 승리하신 여호와 하나님에 대한 찬양만이 가득하다.
15:12-18
본문 14-16절에 보니, 이스라엘 민족이 진행하는 방향으로 마주치는 모든 민족들은 큰 위기를 맞이하게 되었다. 소문에 소문이 퍼지면서 이스라엘의 위상이 대단한 것 같다..
13절에 보면, "주께서 그 구속하신 백성을 은혜로 인도하시되 주의 힘으로 그들을 주의 성결한 처소에 들어가게 하시나이다"라고 되어 있다. 이스라엘과 함께 동행하시는 하나님은 거룩하고 정결하고 성결한 하나님이시다.
성결한 하나님과의 만남이란 그 백성도 성결해야 하는 것이다. 모압과 에돔과 블레셋과 가나안 거민들이 이스라엘 앞에서 멸망 당하고 패배 당해야만 하는 것은 그들이 거룩하지 않기 때문이다.
여호와 하나님은 거룩이라는 관점에서 세상 평정에 나서신 것이다. 거룩하지 않는 민족은 모조리 멸망이다. 기생 라합이 사는 여리고성도 마찬가지다. 기생 라합은 그런 하나님 앞에 미리 굴복하고 자기의 신을 배반하고 이스라엘에게 귀순한 식구이다.
룻기에 나오는 룻도 마찬가지이다. 시어머니 나오미가 약속의 땅을 버리고 이방인의 땅으로 이민 왔을 때, 결국 그 가문에 속한 모든 남자가 다 죽고 난 뒤에 도로 나오미는 약속의 땅으로 역 이민을 생각했다.
이 때 이방 모압 여인인 룻은 자기 나라에 그냥 남는 것이 아니라 패가망신한 나오미의 가문을 따르기로 한다. 그 이유는 단 하나뿐이다. 자기 시어머니의 일생을 통해서 그 시어머니를 친히 관리하시고 인도하시는 참 하나님을 알았기 때문이다.
즉 거룩에 대해서 일관성이 있는 신이 여호와 하나님이라는 것이다. 이처럼 이방민족 뿐 아니라 하나님의 본 자손들도 하나님과 영원히 거하기 위해서는 영원한 거룩 된 상태를 유지해야 하는 것이다.
시편 15:1-5에 보면, 주의 성산은 거룩하지 아니하면 참으로 위험한 곳이다. 죽음이 기다리는 곳이다. 과연 이스라엘 백성들이 막상 약속의 땅에 도착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