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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

대구 10월 19일 피 12강 자아구상강의[피]

대구 10월 19일 피 12강 자아구상

이름 : 관리자(IP:220.81.41.193)

091019 피12강 [자아] 라는 괴물

관리자(IP:220.♡.41.193)

09-10-19 17:27

http://media.woorich.net/신학강의/2009대구/대구091019피p042괴물.hwp

관리자(IP:124.♡.86.6)

09-11-24 16:30

대구091019피p042괴물

[09 대구강의 17] - [피 12] - 괴물

09,10,19 강의 이근호, 정리 구득영

◈ ‘나’, ‘나’, ‘나’, 그러나?

오늘은 교재 42페이지부터 살펴보자.

** 그러나 세상을 엄밀히 보면, 이 세상에는 자기 말고 엄연히 타인도 있다. 따라서 나만 고집하는 질문에는 한계가 있음을 느낀다.

지난번에 이야기한 것이 무엇인고 하니까, “나로부터 시작해서, 나로 말미암아, 나로 귀속된다” 라는 것인데, 그것이 엄연한 현실이라는 말이다. 이런 현실을 그림으로 그려보면, 여기에 이렇게 ‘A’, ‘B’, ‘C’ 라는 것이 있다면, 여기 ‘A’ 라는 사람은 자기가 하나님을 알던 예수님을 알던 성경을 보던 간에 자기 세계가 따로 구축되어있고, 반면에 또 ‘B’와 ‘C’ 라는 사람도 각각의 세계가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A’ 라는 사람이 알고 있는 이 세상의 현실은 넓어봐야 이 동그라미 안에 있다는 말이다. 그러면 여기서 이 ‘A’ 라는 사람이 ‘B’ 라는 사람의 세계를 과연 포섭할 수 있느냐는 것인데, 그것이 그렇지 않은데, 즉 포섭되지 않는다는 말이다.

만약에 된다고 해도 기껏해야 A와 B의 공통집합이 되는 정도인데, 그래서 여기 한 쪽은 기독교이고 다른 쪽은 불교라고 한다면, 이 둘의 공통점은 기껏해야 축구를 좋아한다는 정도라는 것이다. 그리고 남자지만 둘 다 연속극을 좋아하고 말이다.

그리고 성경에 있는 대로 이야기하자면, 한쪽은 바리새인이고 다른 쪽은 사두개인이라고 하면, 그들은 서로 부활에 대해서는 전혀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래서 사실 사이도 별로 좋지 않았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들이 어떤 점에서 하나가 되었는가? 그것은 바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는데 대해서는 하나가 되었다는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주님의 십자가는 모든 것을 하나로 묶을 수가 있는데, 주님의 십자가 사건은 하늘과 땅 사이에서 일어난 사건이기 때문에, 이 땅 자체에서 분리된 이 모든 것을 십자가를 통해서 하나로 뭉쳐놓고, 이 뭉쳐진 것이 하나님이 보시기에 원수가 된다는 것이다. 즉 “그날에 저희들은 적이 아니었고, 하나가 되었다” 라는 것이다.

◈ 오잉, 십자가로 하나가 ??

그렇게 예수님의 이 십자가로 말미암아서 흩어진 것도 하나가 될 수 있는데, 그러니 불교나 기독교나 천주교나 이슬람교나, 모두가 다 십자가만 들이대면 신기하게도(?) 하나가 된다는 말이다. 이 세상의 모든 종교가 다 그렇다는 말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요한계시록 3장에서 “하늘에서 주신 바 아니면 사람이 아무 것도 받을 수 없느니라” 라고 하셨는데, 참으로 결정적인 말씀인데, 그러니 이 말씀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인간 속에는 하늘의 있다는 말인가? 없다는 말인가? 전혀 없다는 말이다. 그런데 오직 예수님을 통해서 주실 때만, 비로소 하늘의 것이 담긴다는 말이다.

(요 3:26) 저희가 요한에게 와서 가로되 랍비여 선생님과 함께 요단 강 저편에 있던 자 곧 선생님이 증거하시던 자가 세례를 주매 사람이 다 그에게로 가더이다
(요 3:27) 요한이 대답하여 가로되 만일 하늘에서 주신바 아니면 사람이 아무 것도 받을 수 없느니라

그런데 사람들의 생각은 그것이 아니라, 인간 속에는 하나님의 속성이 있는데, 그것을 ‘공유적 속성’ 이라고 하는데, 바로 그 속성을 가지고서 하나님과 접촉이 가능하다고 본다는 말이다. 그것이 곧 개혁주의 신학이고, 칼빈의 주장이기도 한데 말이다.

◈ 루터 - 칼빈도 신앙이 있나?

그래서 루터는 어떤 글에서 다음과 같이 표현했는데, “칼빈은 아무리 보아도 기독교 신자가 아닌 것 같다” 라고 말이다. 왜냐하면, 그래도 하나님이라고 하면, 십자가를 통해서 나타나는 하늘의 것으로서 하나님이 되어야 하는데, 그런데 칼빈은 뭐라고 하는고 하니, 이미 우리 인간의 하나님의 존재 정도에 대해서는 알고 있다고 여긴다는 것이다. 다만 모르는 것은 그 하나님의 존재의 내용에 대해서 모르는데, 그래서 특별계시인 성경을 통해서 그 하나님을 알아가자는 식이라는 말이다.

그러니 루터 자기가 보기에는 칼빈은 신자가 아닌 것으로, 그냥 깨놓고 말해서 성령을 받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어떻게 십자가를 중간 과정에 들어갔다가 빼내는 십자가로 여기는지, 도대체 어떻게 십자가를 그렇게 바라볼 수 있느냐는 것이다.

◈ 육으로 본 십자가와 영으로 본 십자가 !!

어제 낮 설교가 무엇이었는고 하니, 십자가에는 두 종류의 십자가가 있는데, 즉 “육으로 본 십자가와 영으로 본 십자가가 있다” 라는 것인데, 여기서 육으로 본 십자가는 하나의 대상이 되는데, 즉 세상에서의 여러 가지 역사적 사건들 중에서 하나의 사건이라는 말이다. 그래서 그 사건에서 의미를 두면 그것이 의미가 되는 식으로 믿는데, 그것이 바로 육으로 보는 십자가라는 것이다.

그 다음에 영으로 보는 십자가는 무엇인고 하니까, 우리가 이 세상을 어떻게 보던지 간에, 여기 역사 속에서 튀어나와서, 하늘의 것으로 우리 속에 아예 들어와 버릴 때, 그렇게 되면 우리 기존의 것들이 다 폭발해버린다는 것이다. 그렇게 폭발이 되면서 이 십자가가 우리의 분석과 관찰 대상이 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반대로 그 십자가에 완전히 함락을 당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것을 어제 어떻게 설명을 했는고 하니까, 그것이 참 어려운 내용이었는데, 처음에 인간이 선악과를 따먹을 때는 자기가 따먹는다고 여겼는데, 그런데 나중에 보니 인간이 선악과를 따먹은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선악과가 인간에게 따먹혔다는 것이다. 그 차이점을 알겠지요?

◈ 선악과가 인간에게 따먹힘으로서, 인간은 ‘자유의지를’ !!

그렇게 선악과가 따먹혀서 인간은 그만 선악과의 징벌 안에 갇히게 되었는데, 그러니 이제는 그야말로 빼도 박도 못하는 신세가 되었다는 것이다. 마치 몸 깊숙이 낚시바늘이 걸린 것처럼 말이다. 그런 것을 두고 ‘계륵(鷄肋)’ 이라고 하는데, 일종의 닭 뼈가 걸렸다는 것이다. 닭 뼈가 목에 걸리면 개는 죽는다고 하는데 말이다. 그렇게 빼도 박도 못하고 걸려있다는 것이다.

바로 그렇게 목에(?) 걸려있는 선악과 때문에 생긴 것이 무엇인고 하니, “나도 자유의지가 있다” 라고 하는 것인데, 선악과를 따먹고 나니 비로소 그런 자유의지가 발생한다는 말이다. 그 이전까지는 전혀 그런 이야기를 할 수 없었는데 말이다. 즉 선악과를 따먹었기에 자유의지를 이야기하게 되고, 그것을 활용하려고 한다는 것이다.

◈ 총체화, 동일시, 정체성 !!

아무튼 인간은 바깥에 타인이 있던지 어떻든 간에 그것을 자기 생각으로 다시 정리하게 되는데, 즉 이것을 ‘총체화시킨다’ 라고 할 수 있는데, 이것이 어려우니 다른 말로 하면 ‘동일시한다’ 라는 것이다. 그래서 이것을 ‘정체성’ 이라고 하는데, 즉 모든 것을 다 자기 위주로 평정을 시킨다는 말이다. 물론 자기 안에서 말이다. 그렇게 이 세상에는 여러 가지 변화가 있더라도 자기 중심으로 배치를 시키는 것인데, 즉 “너는 이 자리에 있고, 너는 저 자리에 있어” 라고 말이다.

예를 들어서, 사업을 하면서 여러 사람들과 거래를 하면서, “아하, 저 사람은 우선 순위가 1번째이고, 저 사람은 3번째이고, 그리고 저 사람은 절대로 상대하지 말아야 될 인간이다” 라는 식으로 말이다. 그렇게 자기 위주로 다시 편성을 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모든 변화들을 다 이렇게 자기 위주로 편성을 하게 되는데, 그렇게 되니 아까 말한 동그라미 ‘A’ 라는 것이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살다가 보면 ‘B’와 ‘C’ 라는 사람들이 알고 있는 세계로, 그러니 ‘내’가 생각하는 것이 그만 한계가 되어서, 그 ‘B’와 ‘C’ 라는 세계로 들어갈 수가 없다는 것이다. 마치 우주에서 대기권으로 어떤 물체가 들어오면 불타버리듯이 말이다. 그런 것은 하나의 유성이 되어서 떨어지고 만다는 것이다. 물론 ‘나’의 세계로도 그들이 못 들어오고 말이다.

다시 말해서, 외부에 있던 그 어떤 것이라도 자기 영향권 안으로 들어오게 되면, 그것이 그대로 있는 것이 아니라, 일방적인 자기의 해석으로 모두가 다 변화가 되어서, 즉 자기가 좋은 대로 해석을 해서, 그것을 다 서랍에 집어넣어 놓는다는 것이다.

◈ 마누라, 서류가 이게 뭐야?

예를 들어서, 집에서 살림을 하는 주부의 경우에, 자기 집에 남편이 사업과 관련된 서류가 배달되어 왔는데, 그래서 자기는 그것을 남편의 일을 들어준다고 마음에서 분류를 해서 자기 나름대로 열심히 정리를 해놓았는데, 그런데 저녁에 신랑이 퇴근을 해서 왜 서류를 함부로 분류했느냐고 야단을 칠 때, 그때 아내는 자기의 한계를 느끼게 되는데, “아하, 내가 모르는 것이 있구나” 라고 말이다.

바로 그 한계가 무엇인고 하니까, 남이 있음으로 인해서 자기가 조정하고 자기가 분석하고 판단하는 것이 전부가 아니라고 하는 것을, 즉 그것이 진리가 아니라고 하는 것을 알게 된다는 것이다. 그것은 그냥 단순히 가정주부가 서류를 정리하는 것으로 끝이라고 하면 그것이 무슨 하자가 되겠습니까만, 조금 고생이 되어도 그냥 다시 정리하면 되는데 말이다.

◈ 이것은 선한 것, 저것은 악한 것 !!

그런데 문제는 세상에서 오는 외부적인 것들을, 우리 인간은 무엇으로 바꾸는고 하니까, 근본적으로 자기의 선악과에 의해서, 즉 의와 죄와 심판이라는 개념을 가지고 전부를 다 자기 서랍에다가 다시 배치를 해서 넣어버린다는 것이다. 즉 “이것은 선한 것, 저것은 악한 것”, 아니면 “이것은 의로운 것, 저것은 죄악된 것” 이라고 말이다.

악과 죄는 같은 말이 아니고 차이가 나는데, 악은 인간 외부에 있을 때 부르는 말이고, 그리고 죄라는 것은 그 악이 인간내부에 들어오게 되면, 그것이 죄가 된다는 것이다. 그러니 악과 죄를 같이 여기면 안 되는데, 물론 서로 섞어서 죄악이라는 표현으로 사용하기도 하지만 말이다.

다시 말해서, 악은 악마를 의미하는 것이고, 그리고 죄는 그 악마에 의해서 발생된 악한 짓을, 바로 그것을 우리 인간 속에서 죄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짐승은 죄가 없는데, 그러니 그런 죄가 없는 짐승을 위해서 예수님이 십자가를 질 필요가 없다는 말이다. 그래서 제가 언젠가 다음과 같은 질문을 한 기억이 나는데, “코끼리가 십자가의 영향을 받습니까?” 라고 말이다. 그러니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 코끼리나 코스모스나 거북이에게 해당이 되느냐는 것이다.

◈ 원숭아, 회개하라 ??

이러한 점이 왜 어려운고 하니, 피조물이 서로 같이 후패하고 썩어 가는데, 그래서 짐승의 야성적인 성질을 발휘해서 포악하게 굴면서도, 그런데 왜 그 책임이 짐승에게 있는 것이 아니고 유독 인간에게만 있느냐는 것이다. 즉 “원숭아, 회개하라" 하고 하지 않느냐는 말이다.

그것은 바로 인간 속에 하나님에 대한 책임성의 요소가 있기 때문인데, 그것을 가지고 ‘하나님의 형상’ 이라고 한다는 것이다. 이 하나님의 형상은 한 마디로 ‘대표성’ 이라고 할 수가 있는데, 이렇게 인간 속에 하나님의 형상이 있다고 하는 것은, 인간이 바로 6일 날에 태어났던 모든 짐승과 피조물의 대표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물론 다른 날도 마찬가지이지만 말이다.

◈ 하나님의 형상을 지닌 인간이 ‘대표성’을 !!

그러니 인간이 피조물의 대표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형상을 지닌 인간이 대표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하나님의 형상이 되시는 예수님이 사람이 되셔서, 즉 자신이 하나님의 형상이기 때문에, 그분이 대표로서 죄를 담당하게 되면 죄가 없어지는 것이고, 그리고 그분이 부활을 하게 되면 인간도 역시 부활하도록 되어있다는 말이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형상이란 그 속성 때문에 그러하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하나님의 형상을 예수님만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또 누가 가지고 있는고 하니까, 그것은 바로 아담도 역시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 아담이 제 아무리 새끼를 까고 또 까더라도, 그 모든 새끼들은 여전히 아담 안에 들어있다는 말이다. 즉 인간은 아무리 해도 여전히 아담을 벗어나지를 못한다는 것이다.

◈ 하나님의 형상 속에서 만들 때, 피조성이 !!

그러니 하나님이 인간을 만들었다고 해서 피조성이 아니고, 하나님이 하나님의 형상 안에서 만들 때 비로소 ‘피조성’ 이라고 말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고 그냥 창조를 했다고 되면, 그 창조했다는 이유 때문에 모든 사람들은 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야 하는데, 단지 하나님이 창조했다는 이유만으로 말이다.

사실 천주교에서 이렇게 주장을 하는데, 즉 하나님께서 만들었기 때문에 모두가 하나님의 자녀라고 말이다. 그래서 신이 만든 자녀를 왜 뱃속에서 지우느냐고 하면서 낙태를 반대하는데, 즉 하나님이 만들었는데 인간이 왜 죽이느냐는 것이다. 그래서 뱃속에 있는 아이가 하나님의 형상이 있는지 없는지, 그것을 가지고 논쟁을 하고 말이다.

하지만 성경에서 하나님의 형상을 이야기할 때는, 인간 속에 하나님의 형상이 있다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을 닮아야 한다” 라는 것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사실 이런 말도 참 어려운데, 마치 피자를 나누어주듯이, 그렇게 각자 각자에게 하나님의 형상을 나누어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형상은 하나인데, 인간이 바로 그 하나의 의미를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왜 사람이 사람을 죽여서는 안 되는고 하니까, 하나님의 형상이기 때문에, 즉 하나님의 형상을 일부 떼어서 가지고 있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형상이 되시는 분이 그 인간을 장악하고 있기 때문에, 그래서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면 죽이지 말라는 것이다.

◈ 노아언약의 경우에 !!

창세기 9장에 보면, 노아가 방주에서 나오고 난 뒤에 하나님께서 노아에게 새로운 언약을, 즉 무지개 언약을 주시는데, 그것이 곧 ‘노아언약’ 인데 말이다. 하나님께서는 이 노아언약을 통해서 무엇이라고 하시는가? 사람의 피를 흘리지 말라고 하는데, 만약에 피를 흘리면 저주가 임하게 되고, 그렇게 저주가 임하면 죽는다는 것이다.

(창 9:6) 무릇 사람의 피를 흘리면 사람이 그 피를 흘릴 것이니 이는 하나님이 자기 형상대로 사람을 지었음이니라

그러므로 “사람을 죽이지 말라. 그러면 니가 죽을 것이다” 라고 하는 것은, 사실 말의 앞뒤가 잘 맞지 않는데, 이것은 “사람을 죽이지 말라. 단 하나님이 죽이는 것은 허용이 된다” 라는 의미라는 말이다. 그렇다면 이렇게 인간이 죽이는 것은 허용되지 않고, 하나님이 죽이는 것만 허용이 된다고 하는 것은 도대체 무슨 의미인가?

◈ 하나님의 형상을 지닌 인간을 죽이면 안 돼 !!

그것이 의미하는 것은 바로, 인간 운명의 주도권은 이미 인간에게는 없고 누구에게 있다는 말인가? 그 주도권은 이미 노아언약을 쥐고서 그대로 실행하고자 하는 하나님의 형상이 되시는 분에게 주어져 있기 때문에, 그래서 그런 하나님의 형상을 지니고 있는 인간을 피 흘려서 죽이면 안 된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형상이 있기에 말이다.

지금 내용이 조금 어려운데, 이 강의가 다행히 녹화가 되니 다시 보면 되는데, 아니면 녹취를 읽던지 말이다. 어제 어떤 분이 메일을 보냈는데, 지금 아내가 추수를 한다고 아직 오지 않아서 저녁시간에 동영상을 잘 보고 있다는 것이다. 아마 그분은 농사를 짓는 땅이 조금 있어서, 지금 추수를 해야되는 모양인데 말이다.

◈ 너도 신이 될 수 있는 ‘자유의지’가 있다 ??

아무튼 의와 죄와 심판이라는 것이 이 선악과에 기초해서 있다고 하는 것은, 이것을 다른 말로 하면, 인간의 자유의지에 기초해서 의와 죄와 심판이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 이렇게 선악과를 따먹기 이전에는 자유의지가 없었다가 그 뒤에 생겨났다는 것은, 그러니 이 자유의지는 하나님만 가지고 있다는 의미가 되는데, 그래서 마귀가 이것을 알고 “너도 스스로 신이 되려고 하면 선악과를 따먹어라” 라고 유혹을 했다는 말이다.

그러니 마귀가 하는 말이, “너도 신이 될 수 있다” 라는 것에서 출발해서, 그 다음에 인간이 선악과를 따먹고 나니, 이제는 “너도 신이 될 수 있는 자유의지가 있다” 라고 한다는 것이다. 마귀가 신을 규명할 때 뭐라고 했는고 하니, 무한한 자유를 가진 존재로 보았는데, 그래서 선악과를 따먹게 되면, 신의 그 속박에서 벗어나서 독자적인 자유를 행세할 수 있다고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자유에서 나온 것이 무엇인고 하니, 놀랍게도 ‘선택권’ 인데, 이 선택권을 우리 인간 행세한다고 하면, 만약에 천국과 지옥이 있다고 하면 어디를 선택하겠는가? 당연히 천국인데, 어느 미친놈이 지옥을 선택하겠느냐는 말이다. 물론 오기로 말을 그렇게 할지 몰라도, 결국은 모든 사람이 다 천국에 가고 싶어한다는 것이다.

◈ 아니, 사랑의 하나님이 지옥을?

여기서 여호와의 증인이 등장해서 뭐라고 하는가? 하나님은 사랑이기 때문에 지옥을 만들지 않았다고 하는데, 즉 지옥이 없어야 하나님은 사랑이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지옥이 있으면서도 사랑이라고 하면, 그것은 누구의 입장에서 말이 안 되는고 하니까, 여기 ‘A’ 라고 하는, 즉 인간의 독자적인 자유의지의 입장에서는 말이 안 된다는 것이다.

그러니 이것이 무슨 말인고 하니까, 선악과를 따먹은 인간들에게 납득이 되는 하나님만 진짜 하나님이고, 그런 예수님만이 진짜 예수님이고, 그런 십자가만이 진짜 십자가라는 것이다. 그러니 인간들은 그럴 경우에만 믿어주겠다고 하는데, 그러니 믿음도 결국은 무엇인가?

◈ 결국, 믿음이 아닌 ‘행함’ !!

그러니 결국 믿음이라는 것은, 인간의 자기 자유의지가 포함되어야 하는데, 그런데 그것을 성경에서는 믿음이 아닌 ‘행함’ 이라고 하는 것이다. 그러니 이 행함에서 나올 수 있는 것은, 즉 자기가 행세한 이 자유의지는 그 행함으로 인해서, 즉 그만 ‘자기 의’ 라는 서랍에 집어넣어지고 만다는 것이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뭐라고 하는고 하니까,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서, 인간 자체에는 손을 대지 말고, 하나님이 자기들에게 권면이나 명령을 달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런 율례와 규범을 중개매체로 말이다. 그런 말씀을 달라는 것인데, 말씀이 명령으로 주어지니 말이다. 그렇게 중개매체로서 말씀을 주시면, 즉 율법이란 말씀을 주시면 자기들이 자유의지를 발휘해서, 그 말씀을 자기들이 지켜서 천국에 한번 가보겠다는 것이다.

◈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을 최고점으로 !!

바로 여기에 자기들의 한 평생을 바쳐서 열심이었던 자들이 곧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었는데, 여기에 대해서 예수님이 뭐라고 하셨는가?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라고 하셨다는 것이다.

(마 5:20, 개역)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이러한 예수님의 말씀은 무엇을 의미하는고 하니, 바리새인들이 추구하는 그 노선은, 하늘에게 뭔가 주지 않는 육적인 최고의 정점에 그들이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 이 바리새인들은 그야말로 혹뿔(?)과 같은데, 우리 몸에서 솟아난 말이다. 우리 인간들 중에서 가장 자유의지를 최고로 발휘했던, 그것도 하나님의 거룩한 말씀을 지켜서 구원을 받겠다고 하는, 그 모든 것을 대변해주고 있는 자들이 바로 이 바리새인들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바로 그런 인간들을 대변하고 대표하는 자들에게 예수님이 죽임을 당했다고 하는 것은, 결국 이 ‘십자가’ 라고 하는 것은 하늘과 땅은 절단이 되었음을 보여주는 것인데, 즉 이미 하늘과 땅은 그 자체로서 건너갈 수 없다는 말이다.

◈ 십자가는 일종의 선악과 ??

그런 의미에서 십자가는 일종의 선악과인데, 즉 인간들이 선악과를 따먹고 스스로 자기의 죄를 드러내는 것인데, 무슨 말인고 하니, “이처럼 저희들은 하나님마저도 죽일 정도로 다른 하나님을 마음에 품고 살아왔었습니다” 라는 것이 노출되고 발각된다는 말이다. 그런 계기가 바로 십자가라는 것이다.

그래서 이 십자가는 우리의 영역 안까지 침범해 들어와야 하는데, 만약에 밖에 십자가가 있으면 우리는 또 우리의 자유의지를 발휘해서, 그 십자가를 믿어주는 사람이 되고 만다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그 십자가를 믿어준 자기의 행함은 자기의 의로운 서랍에 보관이 되어있다는 말이다.

그런데 성령이 오게 되면 어떻게 되는가? ‘예수님’ 이라고 하는 새로운 타인을 통해서 이 죽음이라는 것을 뚫고 들어와서는, “의에 대해서, 죄에 대해서, 심판에 대해서 책망을 하신다” 라는 것이다. 바로 그것이 요한복음 16장에 나오는, 성령의 역할이라고 할 수 있는데 말이다.

(요 16:7) 그러하나 내가 너희에게 실상을 말하노니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보혜사가 너희에게로 오시지 아니할 것이요 가면 내가 그를 너희에게로 보내리니
(요 16:8) 그가 와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리라

◈ 이근호 목사는 행함을 몰라 ??

이렇게 성경말씀이 있는데, 여기에 십자가가 아니고, 행함도 나오고, 그리고 율법도 나온다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 대해서 뭐라고 하는고 하니, “이근호 목사는 십자가에 대해서는 제대로 잘 푸는데, 그런데 행함에 대해서는 그렇지 않는가?” 라고 하는데, 그런 양반은 어떤 입장인고 하니, 십자가의 안에 들어오지 않고 밖에서, 즉 제3자의 입장에서 서있다는 것이다.

왜 그런가? 성령을 받지 못해서 십자가를 육으로 밖에 보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 양반이 하는 말이, “이근호 목사는 왜 행함은 제대로 말하지 못하는가? 십자가는 제대로 이야기하는데, 이웃사랑은 부족해” 라고 하는데, 반야월에서 교회에 다니다가 삐쳐서 나간, 그런 분이 있다는 말이다. (누구지?)

왜 이런 현상이 일어나는가? 성령을 받지 않으니 마치 바리새인과 같이 나오는데, 이 바리새인들의 특징이 무엇인고 하니, 예수님이 다시 오면 얼마든지 또 죽일 놈들이라는 것이다. 계속해서 말이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자기 의를 치니 그러한데, 다른 것은 몰라도 그것만은 손대면 전혀 용서가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 성령은 ‘차이’를 발생시켜 !!

하지만 성령이 오게 되면 어떻게 되는가? 모든 인간들의 의와 죄와 심판에 대해서, 바로 그 자체가 죄가 되는데, 즉 인간들끼리 서로 수평적으로 얼굴을 맞대고 “죄가 무엇이지?” 라고 하는 그 자체가 바로 하나님이 보시기에 죄가 된다는 말이다.

그런데 이러한 상황에서 타인이 오게 되면, 즉 예수님이라고 타인이 몰고 온 새로운 천국과 자기가 예수님을 만나기 이전에 알고 있던 천국이 서로 비교가 되는데, 이것을 두고 ‘차이’ 라고 하는데, 이 차이성을 무산시키면 안 된다는 것이다. 그 차이는 살아가면 살아갈수록 매일같이 죽을 때까지 계속해서 그 차이를 성령께서 발생시킨다는 말이다.

◈ 지젝의 ‘시차적 관점’ !!

만약에 자기가 예수님의 십자가를 20년 동안 믿었다고 하면, 그렇게 20년 동안 믿은 십자가는 내일 믿는 십자가로 인해서 차이가 생기는데, 그것을 ‘시차적 관점’ 이라고 하는데, 지젝이 쓴 책제목인데, 그것이 무슨 뜻인고 하니, 쉽게 설명을 하면 다음과 같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서, 우리가 난로가 손을 대면 뜨거운데, 그렇게 난로가 뜨거운 것과, 거기에 손을 대면 피부는 세포로 되어있고, 그 세포는 단백질로 되어있으니 200도가 되면 탄다는 것이다. 그래서 뜨겁다고 느끼게 되는데, 그런데 그렇게 실제로 피부가 타는 것과 자기가 그것을 뜨겁다고 느끼는 것은 ‘시차적(視差的)’인 것이 있다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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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차적이란, 동일한 공간 속에 공존하는 것이 불가능한 대극이 하나의 공간, 하나의 윤곽 속에 공존하고 있음을 인식하는 관점입니다. - 이근호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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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사람이 어디 한 가지 일에 몰두하게 되면 다른 것을 그만 잊어버리는데, 그러다가 그 문제가 다 해결이 되고 나면, 그제야 나중에 “아이쿠, 이런 일도 있었구나” 라고 한다는 것이다. 새삼스럽게 그것이 느껴진다는 말이다.

이와 같이 이 세상이라는 것은 사건들이 같이 일어나는데, 그런데 사람은 자기가 보고 싶은 것만 보았기 때문에, 그래서 자기가 우선 순위를 정하게 되는데, 즉 “나는 이것부터 먼저 하고, 그 다음에는 이것을 하고, 그 다음에는 저것을 하겠다” 라고 말이다. 그렇게 순서를 정한다는 것이다.

◈ 그건 마누라, 니 생각이고 ??

물론 이것은 저의 경험이기도 하지만, 남편들이 힘든 것이 무엇인고 하니, 아내들이 자기들이 생각한 것이 있기에 순서가 있어서 “여보, 이것 이것을 좀 해놓으세요” 라고 하는데, 즉 그렇게 한꺼번에 열 가지를 퍼붓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저는 그것을 기억해서 몇 가지를 하게 되는데, 그러면 그릇을 씻으면서도 세금을 내라고 한 것을 기억하는데, 그때 마침 마누라가 와서 또 다른 것을 묻는다는 것이다.

그러면 저는 나름대로 순서를 정해서, 이것부터 먼저 이야기를 하고 그것을 대답하려고 하는데, 그러면 그때 마누라는 뭐라고 하는고 하니, “당신은 왜 제 말을 무시합니까?” 라고 한다는 것이다. 자기가 물은 것을 답변하지 않았다고 말이다. 사실은 무시해서 그런 것이 아니고, 순서가 있어서 그렇게 되었는데 말이다. 그러니 서로가 다 순서를 정하는데, 그런데 그만 그 정한 순서가 다르기 때문에, 그래서 뭐라고 하는고 하니, “그건 니 생각이고?” 라고 하게 된다는 것이다.

인간은 이렇게 자기가 감각된 것을 인식하는 사이에 차이가 나듯이, 주님이 우리를 구원했다고 하는 것과, 우리가 그 구원의 기쁨을 느끼는 것은 시차적으로 차이가 난다는 말이다. 그래서 우리는 이미 구원을 받은 상태에서 구원의 깊이를 알아 가는 여정(旅情)을 보내고 있다는 것이다.

◈ 이미 받은 구원이 얼마나 놀라운지를 !!

그러므로 ‘구원’ 이라는 것은 새롭게 받는 것이 아니라, 이미 받은 구원이 얼마나 놀라운지를 깨닫게 되는 것인데, 왜냐하면 우리는 시차적이기 때문에 계속해서 이미 구원을 받은 것을 모르기에 말이다. 그런데 그때 주님은 깨닫도록 해주시는데, 성령을 통해서 말이다.

그렇게 계속해서 사건들을 일으키는데, 즉 “예수님, 이 정도면 다 알았습니다” 라고 하면 또 일으키고 말이다. 그런데 그렇게 “이 정도면 다 알았습니다” 라고 하면 또 다시 어떤 숙제가 주어져서, 즉 어제 안 것과 새로 안 것이 서로 틈이 있어서, 바로 그 틈을 통해서 주님께서 은혜로 인도하신다는 것을 새삼스럽게 깨닫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니 이미 자기가 알고 있는 구원을 소유한 것이 아니라, 이미 그 구원에 자기가 소유된 자로서, 즉 천국에 이미 소유된 자로서, 즉 “아하, 내가 주님을 소유한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나를 소유하셨구나” 라는 것을 알게 된다는 말이다. 그래서 이 ‘타인’ 문제가 상당히 중요하고도 어렵다는 것이다.

◈ 다시 정리해보면, ‘간극’ !!

지금까지 강의한 것을 다시 정리해보면, 인간들은 아무리 외부에 타인이 있고 해도, 그런 것들이 일단 자기 안에 들어가면, 자기 나름대로 재편된 자기만의 세계 안에, 즉 그런 외부의 것들은 자기 영역의 하나의 부속품으로 다시 배치가 된다는 이야기를 했다는 말이다.

그런데 주님은 이러한 것을 가지고 새로운 타인을 만들어서, 그렇게 해서 ‘간극’을 만들어내게 되는데, 즉 ‘시간적인 간격’ 이라고 할 수가 있는데, 이 ‘간’과 ‘극’을 합쳐서 ‘차이’ 라고 할 수가 있는데, 주님은 이런 차이를 만든다는 것이다. 그러게 해서 성도로 하여금 사랑의 깊이와 높이와 넓이와 그 풍성함을 알기를 원한다는 말이다.

◈ 목사님, 그러면 어떻게 기도를?

어떤 분은 강의가 끝나면 “목사님, 그러면 어떻게 기도해야 합니까?” 라고 묻는데, 그러면 저는 “사도바울이 기도한대로 하면 됩니다” 라고 대답을 하는데, 즉 “주여, 주님의 사랑의 깊이와 높이와 넓이와 그 풍성함을 알게 하소서” 라고 말이다. 물론 여러분에게도 그런 기회가 주어지면 그렇게 대답하면 되는데, 선교단체에서 강의를 할 때도 그렇고 말이다.

그래서 결혼을 하게 되면 부부의 사랑이 더욱 더 깊어지고 풍성해지는 것이 원칙인데, 즉 주님께서 우리의 남편이 되었으면 그 사랑의 깊이와 넓이를 더욱 더 알아서 살아가는 것인데, 그러니 얼마든지 기도할 것이 있다는 말이다. 그런데 왜 기도할 것이 없다고 하는고 하니, 이미 주님의 자기의 소유가 되어서, 그렇게 소유가 되니 그만 또 하나의 장벽이 생기게 되는데, 그러면 성령이 쳐들어와서 모두 다 부수어 버리고 말이다. 그렇게 주님은 허물어서 또 관리를 하신다는 것이다.

◈ 우리는 ‘친구’ 아이가?

바로 이러한 우리 자신과 타인 사이에서, 주님은 그만 타인이 되는데, 하지만 주님은 그렇게 우리를 점령하시고 자기 것으로 삼아나가고 확인하게 하시는 타인이란 말이다. 그런데 주님이 그렇게 오셨을 때, 여기서 중요한 것은 누가복음 10장에 나오는, 즉 “누가 내 이웃이 되겠느냐?” 라고 한다는 것이다.

(눅 10:36) 네 의견에는 이 세 사람 중에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

그런데 그것을 요한복음 15장에서는 ‘이웃’ 이라고 하지 않고, ‘친구’ 라고 한다는 것이다. 즉 “앞으로 너희들을 종이라고 하지 않고 친구라고 하겠다” 라고 말이다. 그런데 여기서 친구라고 하고는 것은, 그렇게 있는 자들을 친구로 만든다는 것이지, 결코 인간들이 예수님의 친구라는 것은 아닌데, 즉 주님께서 친구로 들어낸다는 말이다.

(요 15:13)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에서 더 큰 사랑이 없나니
(요 15:14) 너희가 나의 명하는 대로 행하면 곧 나의 친구라
(요 15:15) 이제부터는 너희를 종이라 하지 아니하리니 종은 주인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라 너희를 친구라 하였노니 내가 내 아버지께 들은 것을 다 너희에게 알게 하였음이니라

◈ 서로가 죽고 못 사는 관계 !!

그러니 예수님이 그렇게 친구로 만들어낸다는 것은, 존재한다는 것 자체가 친구가 되는 것이 아니라, 여기에 새로운 것이 주어져야 한다는 말이다. 그것이 바로 새로운 계명인데, 그것이 곧 ‘사랑’ 이라는 말이다. 그런데 그 사랑을 쪼개보니 그 안에 무엇이 들어있는가? 놀랍게도 그것이 바로 ‘죽음’ 이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내가 너를 위해서 죽었으니, 너도 나를 위해서 죽어달라” 라는 말이다. 그것이 곧 친구 사이인데, 이렇게 친구 사이에는 서로가 서로를 위해서 죽음으로서, 그렇게 됨으로서 그것을 하나의 관계라고, 즉 친구관계가 형성이 된다는 말이다.

바로 여기서 유일무이한, 오직 하나밖에 없는 계명이 나오는데, 그것이 바로 “너희가 바로 내 계명을 지키면 하나님의 사랑 안에 거하리라” 라고 하는데, 그것은 바로 이제는 서로가 죽고 못 사는 그런 관계가 되었다는 것이다.

(요 15:10)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 같이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거하리라

◈ 가장 소중한 것을 달리고 하시는 하나님 !!

어제 낮에 설교를 하면서 은혜를 받은 것이 무엇인고 하니, 아브라함의 신앙은 농담도 아니고 장난도 아니고, 그야말로 자기 아들을 자기 손으로 잡아죽이라는 것인데, 그것이 곧 신앙이란 것이다. 완전히 그 중심부를 집중타를 해버리는데, 우리가 챙기고 싶고 우리가 놓치지 싫은 그 중심부를 하나님께서 직접 찾아오셔서 완전히 박살을 내버리신다는 것이다.

아브라함의 경우에, 그야말로 차라리 자기가 죽는 것이 낫지 어떻게 자기 아들을 죽이느냐는 말이다. 그러니 신앙이라는 것은 그 정도로 다급하고 긴급한 현실인데, 교회에 나가주고 헌금을 해주는 것이 아니라, 즉 신앙은 그렇게 “해주고, 해주고” 라는 것이 아니라, 그냥 일방적인 침투라는 것이다. 그것도 자기가 가장 소중하게 여기는, 즉 아무도 손대면 안 되는 바로 그 보물을 와서는 그냥 박살내어 버리신다는 말이다.

마치 옥합을 깨부수는 그 여인처럼, 자기에게 있어서 가장 귀한 것을 부수는 것인데, 그러므로 신앙은 “너에게 가장 귀한 것을 가지고 나와?” 라고 이야기 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 하나님은 그런 면에서는 참 못된 분인데, 그냥 “교회에 다녀라. 그러면 내가 구원해줄게” 라고 하면 참 좋을 텐데, 그러면 얼마나 수월하냐는 것이다. 교회에 갔다가 주는 점심을 먹고, 또 시간이 되면 월요일에는 성경공부를 하러 가면 되고 말이다.

그런데 주님은 그런 것을 받는 것이 아니라, 그런 것은 인간들이 교회에서 만들어낸 것에 불과하고 말이다. 아무튼 우리가 제 아무리 깊숙이 숨기고 또 숨겨놓아도, 주님은 기어이 찾아와서 그 숨겨놓은 것을 달라고 하신다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내놓으면, 예수님은 그것을 두고서 믿음이 있다고 여겨주시겠다고 한다는 말이다. 물론 저의 경우에는 아내가 거기에 해당된다는 것이다(ㅋㅋ).

◈ 아브라함은 어디를 쳐다보는가?

이것이 좀 어려운데, 그래도 계속해서 해보면, 예수님이 우리에게 “너에게 가장 귀한 것을 내놓아라” 라고 했을 때는 어떻게 되겠는가? 이것을 그림으로 그려보자면, 하나님은 여기에 계시고 아브라함은 또 여기에 있다고 하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아브라함아, 너에게 가장 귀한 것을 바쳐라” 라고 하면, 아브라함은 어디를 쳐다보겠는가? 다른 곳이 아닌 자기 내부를 살피게 되는데, 그런데 그렇게 해서 아들을 바치고 나면, 또 생기는 것이 있다는 것이다. 물론 걷어내면 또 생기고 말이다.

◈ 인간 내부에는 보이지 않는 ‘괴물’이 !!

그렇게 계속해서 중심부에 뭔가가 생기는데, 마치 지구의 내핵이 있듯이 말이다. 그렇다면 과연 우리 인간의 그 안에는 뭐가 있겠는가? 그것은 바로 ‘괴물’이 있다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우리 인간 속에 있는 보이지 않는 괴물인데, 그런데 그 괴물의 성격이 어떠한고 하니, 그것이 창세기 4장에 나오는데, 그것이 곧 ‘살인’ 이라는 말이다.

창세기 4장에서 누가 누구를 죽였는가? 가인이 아벨을 죽였는데, 왜 그렇게 되었는가? 그것은 바로 “살인하지 말라” 라는 법이 들어온 순간, 바로 그 순간에 사람은 눈을 돌려서 자기 내부를 바라보게 되는데, 그러면 내부에서 괴물이 “뭘 보나? 어서 살인을 해야지” 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러면 인간은 “누구를 말인가요?” 라고 하면, 그 괴물은 다시 “너에게 살인을 하지 말라고 한 그 양반을 죽여야지” 라고 한다는 것이다.

바로 그 타인을 죽이라고 하는데, 그래서 십자가라는 말이다. 즉 인간은 하나님을 살해하도록 되어있는데, 그래서 하나님이신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돌아가셨다는 말이다. 즉 우리 인간에게 율법을 주면, 우리 인간은 반드시 율법을 주신 그 하나님을 죽이도록 되어있는데, 바리새인들만 그런 것이 아니라 우리도 역시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우리 인간들이 하나님을 그만 죽이게 되었는데, 그러니 당연히 우리 인간들도 하나님을 죽인 대가로서 죽임을 당하게 되는데, 그렇게 죽은 우리 인간을 일방적으로 건져내는 것이 바로 ‘구원’ 이라는 것이다. 전혀 일방적으로 말이다.

◈ 괴물은 ‘성격’으로 드러나는데 !!

이렇게 우리 인간 속에는 악마가 있는데, 그런데 그 악마는 자기 모습이 보이지 않고, 다만 성격으로 드러난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렇게 해서 드러나는 인간의 성격이 특별하게 무엇이 나쁘다는 차원이 아니라, 그 모든 성격은 그 특징이 “나를 건드리면 죽여버린다” 라는 것이다. 그것이 이 책에도 보면 나오는데 말이다.

◈ 신은 나를 저주해도, 나는 나를 저주하지 않겠다 !!

십자가 마을에 김영완 씨가 올린 글에 보면, “신은 나를 저주해도, 나는 나를 저주하지 않겠다” 라는 것인데, 그 내용도 이 ‘피’ 라는 책에 보면 나오는데, 진도를 나가보면 나중에 만나게 되는데 말이다. 즉 신이 제 아무리 자기를 저주해도, 그렇게 자기는 저주를 받아서 지옥에 가더라도, 그런 자기 자신을 사랑하겠다는 것이다.

그러니 결국에는 지옥으로 보내신 하나님의 조치에 대해서, 그런 식으로 반박을 한다는 것이다. 물론 김영완 씨가 그렇다는 것이 아니고, 그런 자기 자신을 고발한다는 말이다.

그리고 이 ‘피’ 라는 책에 보면 예수님이 말씀하신 ‘무화과나무의 저주’에 대해서 나오는데, 즉 무화과나무가 아직 때가 되지 않았는데, 나무에 열매가 없다는 것이다. 물론 당연한 것인데, 그런데 그것을 보고 예수님이 그만 저주를 하고 말았다는 것이다.

거기에 대해서 누가 의아해했는가? 누가 당혹스러워했느냐는 말이다. 무화과나무는 오히려 덤덤했지 싶은데, 말 그대로 나무이니 말이다. 그것은 바로 함께 있었던 제자들이 당혹스러워했는데, 왜냐하면 그 무화과나무가 자기 자신들이라고 하면, 자기들도 역시 그런 입장에 처하지 않겠느냐는 것이다.

◈ 이 목사, 금반지 하나만 줘 ??

예를 들어서, 예수님이 저에게 “이 목사, 금반지 하나만 줘” 라고 했다면, 요즘 금값이 얼마나 비싼데 분위기도 파악하지 못하고 말이다(ㅋㅋ). 그런데 제가 금반지가 없어서, “예수님, 저에게는 금반지가 없습니다” 라고 했다면, 거기에 대해서 예수님은 “그렇다면 이 목사 너는 저주를 받아라” 라고 하는 것과도 같다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거기에 대해서 뭐라고 해야 하겠는가? 그야말로 예수님에게 “Why Me?” 라고 이야기할 수밖에 없는데, 즉 “예수님, 제가 도대체 무엇을 어떻게 했다고 그렇게 하십니까?” 라고 말이다. 그렇지 않은가? 그때 금반지를 가지고 있지 않은 것밖에 없는데 말이다.

거기에 대해서 예수님이 “왜? 이 목사는 저주를 받는 것이 싫어?” 라고 한다면, 차마 싫다고는 할 수 없는데, 왜냐하면 그렇게 되면 거기에는 자유의지가 들어가는 것이고, 그러면 메시야이신 주님을 모독하는 것이 되니 말이다. 그러니 자유의지가 거기에 대해서 타협을 하는데, 즉 “예수님의 뜻이니 일단 잘못되었습니다” 라고 해놓고는, 자기 겸손한 척을 한다는 것이다.

◈ 반성을 하고 회개할 줄 아는 ‘나’ !!

그것을 어제 제가 설교를 하면서, “반성을 하고 회개할 줄 아는 나” 라고 했는데, 즉 “반성도 전혀 못하고 회개도 하지 못하는 저들보다는 얼마나 더 뛰어납니까?” 라는 말이다. 설교가 어려워서 그런지 몰라도 교인들의 반응이 ‘멍’ 하게 있었는데, 노선이 어디서 어떻게 되었는지도 모르고 말이다.

사실은 십자가의 그 관계가 상당히 어려운데, 그동안 어렵지 설교하지 않은 것은 사실은 하고 싶어도 많이 참았는데, 그런데 그날 따라 성질이 나는 일도 있고 해서, 그냥 어렵더라도 나오는 대로 모두 다 내뱉고 말았는데, 가는 데까지 한번 가보자고 하면서 말이다.

아무튼 우리 인간들 속은, 그 속을 제 아무리 캐내어도 그 속에 무엇이 들어있는지 도저히 알 수가 없다는 것이다. 자기가 진짜 소중히 여기는 것은, 그것을 정작 자기가 모른다는 말이다. 정말 자기에 소중한 것을, 즉 “나는 이것을 빼앗기면 자살을 할거야” 라고 하는 것을 말이다.

그런데 막상 그것을 빼앗기고 나면, 그 뒤에 어떻게 하는가? 물론 자살을 하는 것이 아니라, “아니지, 그럴수록 더 힘을 내어서 열심히 살아야지” 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다시 살만하다고 하는 그 토대가 새롭게 생겨난다는 말이다.

◈ 미지의 X, 큰 타자(Other), 물(物), 정신 !!

그렇게 똑똑한 철학자들이 아무리 연구해도 그것이 뭔지를 모르겠다고 하는데, 그래서 라캉은 그것을 ‘미지의 X’ 라고 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것을 그냥 타자가 아니라 ‘큰 타자(Other)’ 라고 하는데, 즉 뭔가 있기는 있는데, 그것이 뭔지는 모르겠다는 말이다. 칸트의 경우에는 ‘물(物)’ 그 자체이고, 헤겔은 ‘정신’ 이라고 할 수 있는데, 명확하지 않기 때문에 그렇게 표현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사실은 그게 곧 악마인데, 그러니 철학자들은 그것이 악마라는 소리는 차마 하지 못하고, 그렇게 빙빙 돌려서 이야기한다는 말이다. 그래서 주님께서 우리에게 가장 귀한 것을 가지고 오라고 하면, 우리는 악마를 끄집어내어서 쟁반에 담아 가면 되는데, 즉 “주님, 여기 악마를 가지고 왔습니다” 라고 하면 말이다. 그러면 주님께서 한 방에 날려주신다는 것이다.

◈ 프로이드 - 죽음 충동 !!

프로이드는 이렇게 우리 인간 속에 들어있는 것으로 인해서 뭐가 생긴다고 했는고 하니, 우리 인간은 죽음을 두려워하게 되었다는 말이다. 그런데 이 프로이드가 얼마나 똑똑한 사람인지, 이렇게 죽음을 두려워하는 것을 뭐라고 했는고 하니, 놀랍게도 ‘죽음 충동’ 이라고 했다는 것이다.

프로이드가 말하는 이 ‘죽음 충동’의 의미가 무엇인고 하니, 인간이 이렇게 죽음을 두려워한다는 것은, 그 배후에는 영원히 살고 싶은 생각이 있기 때문인데, 그래서 인간은 죽음을 두려워하면서도 죽고자 하는 충동이 나오는 것을 보니, 그 뒤에 또 뭔가가 있을 것이라고 해서, 그래서 인간은 죽음을 두려워한다고 했다는 것이다.

◈ 꿈은 두려움으로 인해서 !!

프로이드가 왜 이런 주장을 하는고 하니까, 그는 인간의 모든 꿈은 두려움으로 인해서 생긴다고 보았는데, 즉 “나는 죽으면 안 돼” 라고 하는 두려움, 즉 공포에서 나왔다는 말이다. 이것을 지난 시간에 ‘타나토스(Thanatos)’ 라고 한다고 했는데, 죽음을 느끼게 하는 말이다.

아무튼 우리 인간 속에 있는 타인으로 말미암아서, 인간은 자기가 누구인지 모를 때, 자기는 점점 더 왜소해지는데, 거기에 대한 반발로서, 즉 “누가 감히 나를 왜소하게 만드는가? 니나 사라져라” 라고 해서, 그렇게 해서 죽여버린다는 것이다.

◈ 인간의 ‘살인충동’을 드러내면서 창세기가 !!

그래서 하나님은 그냥 드린(?) 동생 아벨의 제사는 받고, 반면에 정성을 다한 형 가인의 제사를 받지 않음으로 말미암아서, 가인으로 하여금 인간 내부에 악마가 들어있음을, 즉 살인충동이 있음을 드러내면서 구약의 창세기가 시작된다는 것이다. 그런 살인충동으로 말미암아서 피가 발생이 되었고, 또한 그 피가 새로운 노선을 발생시킨다는 말이다. 이 노선은 아벨 대신에 새로운 ‘셋’ 이라고 하는 가문이 등장하게 되는데, 이 셋은 결국 그 안에 아벨의 피가 들어있다는 것이다.

이 새로운 노선이 가인의 노선과 비교가 되면서 여자의 노선으로 자리를 잡게 된다는 말이다. 이것을 히브리서 11장에서는 ‘믿음’ 이라고 하는데, “아벨은 믿음으로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재물을 드렸으니” 라고 말이다. 즉 “그리스도는 이런 분입니다” 라는 것을 증거하는 차원에서 재물을 드렸다는 것이다.

(히 11:4) 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림으로 의로운 자라 하시는 증거를 얻었으니 하나님이 그 예물에 대하여 증거하심이라 저가 죽었으나 그 믿음으로써 오히려 말하느니라

◈ 질문은 누가 누구에게 하는 것인가?

이제 진도를 나가야 하는데, 그 이전에 이 강의가 너무 어렵기 때문에 다시 정리를 하면, 즉 ‘A’ 라는 곳에 인간의 내부가 들어오게 되면 어떻게 되는가? 이것이 요한복음 18장과 19장에 나오는데, 예수님이 죽기 전에 마지막으로 만난 인물이 바로 빌라도인데, 이 빌라도가 예수님에게 두 가지를 묻는데, “진리가 무엇인가?” 라는 것과, “당신은 어디서 왔는가?” 라고 말이다.

물론 예수님은 빌라도가 한 두 가지에 대해서 답변을 하지 않았는데, 왜 그런고 하니까, 그것은 바로 질문을 누가 해야 하는고 하니, 즉 쳐들어오시는 주님께서는 우리가 어떤 것을 질문해야 하는지, 그런 질문까지도 다 주신다는 것이다.

(요 18:38) 빌라도가 가로되 진리가 무엇이냐 하더라 이 말을 하고 다시 유대인들에게 나가서 이르되 나는 그에게서 아무 죄도 찾지 못하노라
(요 19:9) 다시 관정에 들어가서 예수께 말하되 너는 어디로서냐 하되 예수께서 대답하여 주지 아니하시는지라

이제 교재 42페이지를 살펴보자.

** 하나님도 타인이다. 따라서 하나님에게 질문할 때도 결국 질문자의 의도가 실리게 된다. “하나님, 제가 하나님에게 무슨 질문을 해야 하는 존재입니까?” 라고. 물론 이 질문에 하나님은 답변이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먼저 질문을 던지지 아니한 그 어떤 질문에 대해서 하나님은 답변하지 않기 때문이다.

◈ 하나님도 타인이다 ??

여기에서 “하나님도 타인이다” 라고 하는데, 이 ‘타인’에 대한 이야기를 하다보니 이만큼 길어졌다는 것이다. 사실 우리 인간이 누구에게 질문을 한다는 것은, 그 질문은 이미 자신의 의로움을 챙겨놓고 하는 것인데, 즉 “나 자신은 의로우니, 나는 손대지 마세요” 라고, 그것을 기정사실화를 해놓고 질문을 한다는 말이다.

◈ 너, 어느 별에서 왔어?

그러면 우리 인간은 하나님에게 어떻게 질문을 해야하는가? “하나님, 제가 하나님에게 무슨 질문을 해야하는 존재입니까?” 라고 해야하는데, 그러니 빌라도는 예수님에게 “예수님, 제가 예수님에게 무슨 질문을 해야 하는 존재입니까?” 라고 질문을 해야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빌라도는 그렇게 질문하지 않고, 시건방지게도 예수님에게 “너, 어느 별에서 왔어?” 라고 했고, 또 “진리가 뭐야?” 라고 질문을 했다는 말이다.

이렇게 하나님께서는 자기가 먼저 질문을 던지지 않았을 경우에는 결코 답변하지 않는데, 그렇다면 하나님은 아담에게 어떻게 하셨는가? 아담에게 “아담아, 니가 어디 있는가?” 라는 것인데, 즉 아담의 자리가 어디인지를 깨닫도록, 그렇게 다시 한번 아담의 방향을 돌아보게 하신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 인간은 바벨탑을 쌓아서 자꾸만 하늘로 올라가고자 하는데, 그래서 주님은 반대로 우리 내부를 살피게 하신다는 말이다.

◈ 하나님은 왜 우리 내부를?

하나님은 왜 그렇게 우리로 하여금 우리 자신의 내부를 돌아보게 하시는가? 그것은 바로 우리 내부에 괴물이 있기 때문인데, 즉 자기 자신을 망치고 죽게 만드는 악의 원흉이 움트고 있기 때문에 말이다. 그야말로 ‘에어리언’ 인데, 그 무시무시한 악마가 우리 몸을 인큐베이터로 삼아서 점점 더 자라나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자기 마음에 들지 않으면 교회에도 나오지 않고, 또한 사람을 함부로 죽이고 한다는 말이다. 말로서 죽이든, 실제로 죽이든 간에 말이다.

심리학자들의 연구결과에 의하면, 사람의 심리 가운데 제일 통쾌한 것이 무엇인고 하니, ‘복수’ 라는 것인데, 이 ‘복수’ 라는 것은, 자기 자신의 변화가 아니라, 바깥에서 변화가 일어나는 것을 보고 가장 즐거워하는데, 즉 “나는 손대지 말라” 라는 것이다. 그래서 모든 인간들의 기도는 쾌감을 가장 향유할 수 있도록 기도를 하게 되는데, 그 기도의 내용이 곧 “너희들이 나에게 무릎을 꿇는 것이 보고 싶다” 라는 내용이라는 말이다.

◈ 그런데 솔로몬의 기도는?

그런데 놀랍게도 솔로몬은 기도할 때 무엇을 위해서 기도하지 않았는가? 자기의 원수가 죽기는 것을 위해서 기도하지 않았고, 또한 자기가 오래 살기 위해서도 기도하지 않았고, 그리고 부자가 되기 위해서도 기도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러면 무엇을 위해서 기도했는가? 하늘의 뜻이 땅에 이루어지기를 위해서 기도했는데, 솔로몬이 그렇게 기도하니, 하나님이 다른 것도 다 채워주셨다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예수님의 기도이고 말이다.

어제 주일 낮에 중고등부 설교를 하는데, 그 내용이 무엇인고 하니까, “부자가 되기를 애쓰지 말라” 라는 것이었는데, 과연 그런 기도를 누가 하겠는가? 그런 기도를 꼭 가난한 사람들이 하게 된다는 것이다. 부자가 되게 해달라고 외치고 말이다. 이미 부자는 부자이기 때문에, 그렇게 부자가 되고 싶어서 간절하게 외치지 않는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미 부자이니 말이다.

◈ 예수님의 나타나심 자체가 곧 ‘질문 던짐’ !!

누가복음 12장에 보면, 동생이 예수님을 찾아와서 하소연을 하는데, 형이 아버지의 재산을 다 가지고 갔다고 하면서 말이다. 그러자 예수님은 뭐라고 하시는가? 예수님 자신은 재산을 공평히 분배해주는 그런 재판관이 아니라고 하시면서,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한 데 있지 아니하니라” 라고 하신다는 것이다. 그런 예수님이 오늘날 한국교회의 당회장이 되면 당장에 잘릴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눅 12:13) 무리 중에 한 사람이 이르되 선생님 내 형을 명하여 유업을 나와 나누게 하소서 하니
(눅 12:14) 이르시되 이 사람아 누가 나를 너희의 재판장이나 물건 나누는 자로 세웠느냐 하시고
(눅 12:15) 저희에게 이르시되 삼가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한 데 있지 아니하니라 하시고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나타나셨다고 하는 것 그 자체가 바로 일종의 ‘질문 던짐’ 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는데, 즉 예수님께서 “니가 이 세상을 판단하지 말고, 니 속을 보아라” 라고, 그렇게 질문을 던지는 것이라고 할 수 있는데, 바로 그런 질문의 절정이 무엇인고 하니, 그것이 곧 ‘십자가’ 라는 것이다.

유대인들은 표적은 원하는데, 여기서 표적이 무슨 의미인고 하니까, 즉 기적과 표적의 차이점이 뭔고 하니, 신기한 일을 두고 기적이라고 하는데 비해서, 표적은 그 신기한 일을 행하신 분의 본질과 성격을 드러내는 것, 즉 어떤 일을 통해서 그 일을 일으킨 분의 성격을 파악할 수 있는 것을 두고서 기적이라고 한다는 말이다.

◈ 가나 혼인잔치의 경우에 !!

예수님께서 행하신 첫째 표적이 무엇인고 하니, 기적이 아니고 말이다. 그것이 바로 가나 혼인잔치의 포도주를 만드신 것인데, 결혼식을 나오니 생각이 나는데, 이번 11월 13일에 이미아 양이 결혼을 하는데, 서울의존교회에서 성경공부 시간에 혼인예식을 올린다는 말이다. 물론 중요한 것은 성경공부이고, 결혼식은 모인 김에 하는 것인데 말이다(ㅋㅋ).

아무튼 이 가나 혼인잔치에서 물이 포도주로 변하게 되는데, 그런데 거기서 중요한 것은 아직까지는 예수님의 때는 아니라는 것이다. 그것을 ‘시차’ 라고 이야기할 수 있는데, 즉 표적과 표적의 실제 내용에는 시간적인 간격이 있다는 말이다. 그래서 그 다음에 나온 표적이 어느 왕의 신하의 아들이 병이 낫는 것이고 말이다.

(요 2:1) 사흘 되던 날에 갈릴리 가나에 혼인이 있어 예수의 어머니도 거기 계시고
(요 2:2) 예수와 그 제자들도 혼인에 청함을 받았더니
(요 2:3) 포도주가 모자란지라 예수의 어머니가 예수에게 이르되 저희에게 포도주가 없다 하니
(요 2:4) 예수께서 가라사대 여자여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내 때가 아직 이르지 못하였나이다
(요 2:5) 그 어머니가 하인들에게 이르되 너희에게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그대로 하라 하니라

그러니 이런 표적은 반드시 우리의 몸과 관련이 되어있는데, 지금 결혼식을 거행하는데, 그런데 그만 포도주가 떨어져서 손님들은 포도주를 더 달라고 하면서 난리가 났다는 것이다. 그렇게 우리의 몸과 관련되어 있는데, 그렇게 몸과 관련되어있는 이 과거와, 예수님과 관련되어있는, 그 예수님의 몸과의 시차, 그것이 바로 표적이라는 말이다.

◈ 성도의 삶은,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표적 !!

그렇다면 오늘날 성도가 살아가는 이 모든 것이 뭐가 되는가?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표적이 되는데, 왜 그런가? 자기 몸에서 일어나니 말이다. 자기 남편, 자기 아내, 자기 자식들, 자기 교인들, 그렇게 모든 것이 몸과 몸이 부딪치면서 일어난다는 것이다. 주님의 뜻이 말이다.

그러므로 진짜 표적의 실체는 누구인고 하니까, 그것이 곧 예수님의 몸에서 일어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여기 가나 혼인잔치에서 물이 포도주로 변한다고 하는 그 모든 것의 실체는 무엇인고 하니까, 물론 우리 몸에서 일어나는, 즉 신하의 아들이 병이 낫고, 또 떡을 먹고 배가 부른 것은 모두 다 표적이란 것이다. 그리고 요한복음 6장의 경우에, 마리아의 오빠인 나사로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고 하는 것은, 그것이 다 예수님의 집안 이야기라는 말이다.

◈ 중요한 것은, 예수님 자신의 피와 살 !!

하지만 예수님께서 정작 주시려고 하는 것은 무엇인고 하니까, ‘시차’를 넘어서 말이다. 그것은 바로 예수님 자신의 피와 자신의 살이었는데, 그러니 결국 이 피와 살이라는 정답을 알고 난 다음에, 그런 것을 보게 되면, 그것이 일종의 기적이 아니라 결국은 예수님이 죽어야만 산다고 하는 사실을 보여주기 위해서, 그래서 우리에게는 마치 있는 것에다 더욱 더 보태주는 기적처럼 착각하게 만드는 일들이 일어났다는 것이다. (??)

사실 진짜로 ‘복’ 이라는 것은, “나는 이제 죽어도 괜찮다” 라는 것인데, 하지만 우리는 살고 싶어서 “예수님, 포도주가 떨어졌습니다” 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신하의 아들이 죽게 되었는데, 그래서 예수님이 살려주시니 뭐라고 하는가? “야, 주님은 죽은 자도 살리시는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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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