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1006a 부산강의 : 조지래드 [신약신학]-요한계시록
20091006a 부산강의 : 조지래드 [신약신학]-요한계시록
이름 : 한윤범(IP:119.192.174.148)
20091006a 부산강의 : 조지래드 [신약신학]-요한계시록
(강의:이근호 목사)
요한계시록 시작하겠습니다. 요한계시록이 성경의 제일 마지막에 있지요. 마지막에 있다는 것은 창세기부터 마지막까지 모든 것이 요한계시록 안에 총정리 된다는 그런 의미가 있습니다.
비행기가 공중에 날 때 혼자 날지요. 그런데 격납고 들어가면 여러 비행기가 다 도착해 있지 않습니까? 활주로에 내릴 때는 손님만 내려주고 비행기는 자기 잠자리, 자기 안식처에 빠지지요. 피곤한 역사가, 모든 역사가 결국 창세기부터 이어져왔는데 그게 나중에 요한계시록이라는 격납고에 들어가 보니까 인간의 역사가 아니었고 바로 하나님의 역사였다는 겁니다.
그래서 요한계시록의 모토는 하나님의 역사 용어, 역사 관점에서 인간의 역사를 표현해내는 거예요. 그러면 하나님의 역사 관점을 빼버리면 인간의 관점에서 뭘 해석한다? 인간의 역사를 해석하는 게 되겠지요.
그런데 요한계시록에서는 인간의 역사 관점에서 인간의 역사를 보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역사 관점에서 인간의 역사를 보니까 인간의 역사가 인간의 역사였다, 아니었다? 이거는 우리의 역사라는 것은 우리 생각이고, 하나님의 역사 관점에서 봐선 ‘그리스도의 역사’였다는 것이 이제는 나타나죠.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 전부다, 모든 선지자 이야기 모두 다 그렇게 되는 겁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반발이 일어나죠. 어떤 반발이냐 하면, 인간이 평소에 봤던 인간의 역사, 이거는 요한계시록 어느 대목에 잡혀있는가, 어디에 놓여있는가? 하는 그런 이야기가 나올 수 있다 이 말이죠. 그러면 요한계시록에서 인간의 역사는 없습니까? 없습니다. 왜? 모두다 그리스도 역사기 때문에.
그러면 우리가 생각하는 ‘인간의 역사는 요한계시록의 어느 대목에 숨어있습니까?’라고 물으면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관점에서 보면 인간의 역사는 짐승의 역사입니다. 이것은 요한계시록 12장에 보면 하늘에 있는 짐승이 땅에 내려와서 짐승의 통제 하에서 벌어졌던 모든 일, 짐승의 역사죠.
그러면 하나님의 역사, 그리스도 역사, 역사가 한두 개가 아닌데 이런 것을 우리가 오늘 이 시간에 규명해야 될 텐데, 규명할 때 그리스도의 역사가 뭡니까, 하나님의 역사가 뭡니까? 할 때 현재 우리가 감 잡고 있는 것은 인간의 역사 아닙니까. 인간의 역사를 요한계시록에서 짐승의 역사로 보잖아요. 여기에 나오는 게 뭐냐 하면, 짐승의 정체성.
짐승 보고 싶어, 보고 싶어요? 이게 짐승이라고 내놓는 것, 그게 인류의 역사입니다. 인류의 역사는 짐승이 어떻게 짐승일 수밖에 없는가를 그걸 만개하고 보여주는 역사. 그러면 왜 짐승에게 인류의 역사에게 필요한가? 그거는 짐승에 숨어있는 영이 육이 될 수 있다는 겁니다.
우리가 아는 요한복음 3장에 보면 육이 뭐가 와야 영 됩니까? 성령이 오게 되면 영 되죠. 육이 영 되는 것만 생각했지 영이 육 되는 건 우리가 생각 못했잖아요. ‘육에서 어떻게 영이 됩니까?’라는 질문을 할 때 그 답변은 영에서 육 된 걸 보면 안다 이 말입니다. 영적인 존재와 육적인 존재가 어떻게 발현되는가, 나타나는가는 바로 짐승의 역사를 통해서 요한계시록에서 똑똑하게 다 보여주죠.
눈에 보이지 않는 영적 존재가 눈에 안 보이니까 없는 게 아니고 있더란 말이죠. 있는데 ‘어떤 식으로 있습니까?’라고 물으면 인간이 인간을 보는 역사관, 이게 전부가 짐승이 활약하고 있는, 열심히 분주하게 짐승이 자기 활동하고 있는 그 증거물들, 결과물들이 바로 인간이 인간을 볼 때 나타나는 그러한 짐승의 역사가 되는 겁니다.
그렇다면 방금 제가 이야기한 이 기준에서 보게 되면 요한계시록 해석할 때 기본적인 법칙이 있게 되죠. 기본적인 법칙이 뭐냐 하면, 사람이 이해할 수 있는 내용은 없다. 왜냐? 사람은 기껏 해석해봐야 뭘 이해 못하느냐 하면, 사람은 육이기 때문에 육이 해석해봐야 육으로 되거든요. 그러면 육이 해석하면 인간 세상에 짐승의 역사라는 영적 존재를 거부하게 되죠.
짐승 같은 소리하고 있네. 무저갱에서 나오긴 뭐가 나와. 무슨 용이 있어? 무슨 옛 뱀이 있단 말이야. 바다에서 올라오긴 뭐가 올라오는데? 지금 학교에서 그렇게 주장들 하죠. 지금 학교에서 역사 시간에 짐승 배웁니까? 아니잖아요. 용 배웁니까? 안 나오죠.
1800년경 프랑스 혁명 이후에 나폴레옹 배울 것이고, 1914년에는 히틀러 배울 것이고, 그전에 14세기 중세 이야기할 것이고, 그전에 봉건사회 이야기할 것이고, 기원전 50만 년 전 쪽에서는 오스트랄로피테쿠스부터 이야기할 것이고, 크로마뇽인 나오고, 네안데르탈인 나오고, 자바원인 나오고, 북경원인 나오잖아요. 자바원인 그 사람이 짐승입니까? 우리의 인류의 조상이죠. 거기서 더 나가면 원생동물부터 시작하는 진화론. 더 나가면 지구의 역사는 50억년. 더 나가면 태양의 역사, 더 나가면 우주의 역사, 빅뱅 이야기.
지금 청소년들 학교에서 배우는 것은 짐승, 용, 요한계시록 용어 하나도 안 들어가잖아요. 격정 40년, 격정 50년. 이게 열한 시 반부터 MBC 라디오에 나오잖아요. 격동기 어떻고. 해방의 격동기 나오잖아요. 김구가 짐승입니까? 안중근이 짐승을 죽인 거예요? 현재 선덕여왕이 메시아입니까, 짐승입니까?
그러니 모든 역사에서 짐승의 역사는 놀랍게도 뭘 뺀다? 모든 영적인 존재를 짐승의 역사에서는 일체 들어가면 안 돼요. 그러면 짐승 대신 인간의 영웅들이 들어가요. 선덕여왕이 어떻고, 미실이가 어떻고. 전부다 영웅들이 들어가죠.
거기에 만약에 영이 들어가고 들어가 버리면 그걸 인간 역사에선 ‘신화’라고 해요. 신화는 상징으로 돼있고, 상징은 그냥 놔두면 안 되고 반드시 역사적 안목으로 풀어줘야 된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신화, 상징은 풀리지 않는 것으로 그냥 놔두면 안 두고, 반드시 해석을 해서 해석된 상징으로 우리 코앞에 꿇어앉혀야 된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요한계시록의 해석이라고 할 때 그것은 무엇을 의미하느냐 하면, 상징으로 된 것을 그냥 상징으로 방치하지 말고 우리가 알고 있는 모든 해석을 동원해서 이걸 역사적 번역으로 통역해서 우리 코앞에, 눈앞에 꿇어앉힐 때 비로소 요한계시록은 우리 속에서 살아난다 이래 되겠지요.
그러면 그렇게 상징을 풀어 젖히고 우리 코앞에 꿇어앉혀서 ‘꼼짝 마. 네가 비밀을 섬겨도 못 섬겨. 내 앞에 다 들통 났어.’라고 할 때 그 힘은 어디서 난 지식입니까? 바로 인간은 역사적 존재로서 자기를 이해하는 자기 이해, 또는 자기 이해성 이게 진리가 되고, 앞에 비역사적이고 상징적인 것은 전부다 불러내서 역사적으로 바꿔줘야 우리가 납득이 되잖아요.
그러니까 지금까지 나왔던 모든 요한계시록 해석은 한 마디로 거짓말입니다. 그렇게 해석하고자 하는 주체가 누구냐고 물을 때 그들은 할 말이 없어요. ‘요한계시록 해석하는 너 누구야?’라고 물으면 ‘나는 역사적 존재야.’라고 하지요. 진짜로 요한계시록 아는 사람은 이렇게 해야 돼요. ‘나는 짐승이야. 짐승의 하수인이야.’ 이러면 돼요.
본인은 그렇게 이야기하는데 옆 사람이 툭 치면서 “방금 본인 보고 뭐라고 했어요?” “나는 짐승의 하수인이야.” “그러면 짐승이 뭡니까?” 또 물을 것 아닙니까. 짐승이라든지, 용이라든지 이거는 계속해서 역사 바깥에 남아있는 역사로선 수용이 안 되는 상징적으로 남지요.
남으니까 본인은 그걸 만약에 영적인 존재로 그걸 이해했더라도 전달받고 싶어 하는 제 삼자가 또 우리한테 묻기를 ‘목사님, 방금 본인이 나는 짐승이라 했는데 그게 뭔 뜻입니까?’ 또 물으면 그들이 납득할 수 있는 역사적으로 바꿔줘야 됩니다.
666할 때 지혜가 있는 자는 알지어다. 돼있어요. 지혜가 바로 개나 소나 다 이해되는 것 같으면 지혜가 아닙니다. 지혜는 다른 말로 비밀이라고. 누가복음 10장 24절에 나오지요. 네가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고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한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그 모든 말씀은 육적인 인간한테 아주 친절하게 세밀하게 풀이해주면 이건 영, 육 관계없이 ‘아, 그렇구나.’라고 깨닫는 것 같으면 그건 아예 지혜에 속하지 않습니다.
그건 약간 무지했던 사람이지, 지성적으로 약간 모자랐는데 한 수 배우고 나니까 숨통 트였다는 것이지 아예 인간 자체가 새로운 피조물, 영적인 사람으로 되는 건 아니에요. 여기서 지혜라 하는 것은 바로 영적인 사람이 되는 경우를 지혜라 합니다.
666의 숫자풀이를 해 줄 때 성경 관계없이 약간에 숫자 놀이에 흥미 있는 사람은 다 깨달을 수 있으면 그건 해석 잘못 된 거죠. 그런데 모든 주석 보면 666을 납득하도록 해석해놨어요. 그러면 그건 잘못 된 거죠.
이 지혜가 지식이 되면 안 돼요. “지혜 있는 자는 알지어다” 했는데 이 지혜는 뭐냐 하면, 바로 인간이 인간으로서 있었던 적은 없었고 반드시 육의 인간은 영적 존재인 짐승의 하수인으로써 존재한다는 것이 짐승의 역사에서만 통하는 진리거든요. 이게 인간의 역사에서는 짐승 가는 것도 배제해버리니까. 모든 역사는 인간의 역사로 보지만 요한계시록은 짐승의 역사란 말이죠. 짐승의 자기 실험, 짐승의 자기 이해, 짐승이란 이런 모습으로 등장한다는 걸 보여주기 위해서 모든 세상 역사의 인간들을 그런 식으로 배치해놨다고.
그렇다면 이 지혜라 하는 것은 뭘 공격해야 됩니까? 나는 인간이라는 자체를, 나는 이해할 수 있다는 자체를 공격하는 그러한 지혜가 되는 겁니다. 첫 번째가 뭐냐 하면, 사람이 이해할 수 있는 내용은 없습니다. 아무것도 없어야 돼요. 이해가 되지 않아야 됩니다. 그럴 경우에만 말씀은 말씀 그 자체로써 날마다 우리에게 요한계시록의 새로운 이해를 제공해주죠. 택배회사가 선물 주듯이 주는 겁니다.
요한계시록의 두 번째 원칙은, 시간이 없다는 거예요. 아까 번역 보니까 ‘묵시’로 돼있죠. 묵시라고 하면서 시간을 거론하다는 것은 앞뒤가 안 맞아요. 모순돼요. 요한계시록은 시간이 없습니다. 시간으로 풀어낼 수가 없어요. 오히려 시간으로 풀어내려는 그걸 공격하는 책이 요한계시록입니다.
그러면 시간이 없다는 말은 다른 말로 하면, 정지됐다 이 말이거든요. 인공위성 떠있는 걸 정지위성이라 하죠. 정지위성이 가만있습니까? 분명히 움직이죠. 움직이는데 왜 정지됐다고 할까요? 그것은 지구와 동일한 속도로 돌기 때문에 그 사람 위치에서 보면 똑같지요. 그러나 달이나 태양에서 보면 지구도 돌고 위성도 같이 되는데 제 삼자가 외관에서 보면 정지위성이 아니고 열심히 돌고 있는 위성이지만 막상 돌고 있는 지구상에 살아보면 위성은 늘 그 자리에 있죠. 그걸 정지위성이라 하죠.
요한계시록의 모든 하늘나라는 인간과 더불어 같이 가기 때문에 인간의 시간으로는 시차적을 찾아내면 안 돼요. 그러면 하나님의 계시가 안 변하느냐? 변하는데 그 변함은 누구 관점이냐 하면, 예수님 관점에선 변하지만 인간 관점에선 포착이 안 돼요.
사도행전에 보면 하늘나라가 언제입니까? 자꾸 제자들이 뭘 묻느냐 하면, 하늘나라를 무슨 구조 안에 설명해 달라 하느냐 하면, 시간을 물어요. 언제 옵니까? 이때입니까? 주님께서 넌 몰라도 된다는 거예요. 오늘 강의 참 어렵다. 쉽게 해봅시다.
어떤 분이 이런 이야기했어요. 도대체 하나님이 일을 어떻게 하는지 모르겠다는 거예요. 제가 이렇게 합니다. 가만있으면 하나님도 가만있고, 그 다음에 뭔가 하려고 설치면 방해해버리고. ‘그거 안 돼?’라고 다 훼방놔버리고. 그러면 삐져서 ‘그럼 나 아무것도 안 할 랍니다.’ 하면 하나님이 무슨 지시를 줘야 되는데 가만있는 거예요.
‘아이고, 답답해 못 살겠다. 이런 사업이나 하자.’ 하면 다 부셔지고. 그럼 어쩌란 말입니까? 주님은 정지위성이에요. 가만있으면 조바심 나서 뭐라도 해야 되고. 조바심 나서 뭐 하면 안 되고, 하나님 방해하고.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고. 그게 바로 묵시적 세계입니다.
다 이뤄진 속에 있는데 ‘내가 뭘 할까요, 말까요, 놀까요, 쉴까요, 아무것도 하지 말까요?’라고 묻는 것 자체가 정지위성이 자체적으로 변화를 추구하는 거예요. 변화는 누구 몫입니까? 변화는 변해야 돼요? 하나님이 변화를 해주는데 우리는 변화의 주체를 나 자신을 변화의 주체로 삼아 버리는 겁니다.
그래서 요한계시록 해석하는 사람이 이렇게, 이렇게 하시면 무사히 마지막 환란에서 벗어나서 여러분 구원에 도달할 수 있습니다. 666 조심하시고, 이러잖아요. 이게 뭡니까? 누구를 변화의 주체를 삼는다? 자기 자신을 변화의 주체로 삼는 거예요. 1992년 10월 28일에 이장림이 온다 했잖아요. 그런 주장 있고 난 뒤에 거기에 빠진 분의 친척 한 사람이 물었어요. ‘너 와 아직 안 올라갔노?’ 올라간다 했으니까 흰 한복 다 빌려갔으니까. 놀리면서.
사람이 가만있지 못하고 어떤 변화를 추구한다는 것은 그건 자기 뜻이 아니고 바로 짐승의 뜻이에요. 짐승은 변화를 싫어합니다. 짐승은 완성을 싫어해요. 다 이루었다를 싫어해요. 계속해서 뭔가 꼼지락거리고 뭔가 추구를 해야 돼요.
사람이 추구한다는 것은 나름대로의 기대가 새로 생겼다는 거예요. 목표가 있고, 목적이 있다는 말은 이것은 결국 뭘 뜻하느냐 하면, 하나님의 하신 일은 미완료적이란 말과 같은 말이에요. 하나님의 목적이 내 목적이 될 수 없고 내 나름대로의 나의 목적이 따로 있어야 된다는 말은, 지금 하나님하고 정지위성하고 지구와 같이 도는 게 아니고 따로 따로 놀겠다는 겁니다. 짐승이 그걸 노리는 거예요. 따로 놀아라. 같이 놀지 말고 따로 놀아라.
그래서 마귀가 예수님 왔을 때 뭐라고 했습니까? ‘예수여, 당신이 나와 무슨 상관있습니까?’ 했잖아요. 마귀는 지금도 악마도 모든 인류에게 예수 일하고 당신 일하고 상관없음을 이야기했다 이 말이에요. 그건 무슨 의미냐 하면, 네가 하는 짓대로 그냥 해나가라 이 말이죠. 예수 믿고 멈칫 하지 말고, 네가 평소에 잘하는 짓 있잖아. 그냥 해 가라 이 말이에요.
바리새인과 예수님이 만나면서 의사소통이 안 됐었습니다. 그 소통이 안 되는 이유가 뭐가 있을까요? 예수님께선 이렇게 이야기했어요.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한테로 갈 자가 없다. 어릴 때부터 십계명을 다 지킨 부자 청년이 왜 예수님을 떠났습니까? 떠난 이유가 뭡니까? 하나밖에 없어요. 자기 노선을 상실해야 된다는 것에 대해서 화가 난다는 이 말이에요. 자기 노선이에요.
인간의 미래 노선은 과거에 줄창 해왔던 그 노선이에요. 너는 모든 걸 버리고 나를 따르라고 예수님이 이야기할 때 그건 뭐냐? 과거를 버리라는 겁니다. 그런데 인간이 현재에 자기가 구축한 자아라 하는 것은 과거 없이는 자아가 형성이 안 됩니다. 말 어렵게 해도 여러분 잘 쉽게 들으세요.
오늘날 ‘당신 누구요?’ 하면 우리는 뭐라고 답변해야 됩니까? 지금 ‘나요’라고 말 안 하고 과거에 했던 것을 가지고 하는 거예요. ‘저 목사인데요.’ 이게 뭔 뜻입니까? 과거에 목사질 해왔다는 겁니다. ‘나는 남자입니다.’ 뭔 뜻입니까? 어제도 남자였고, 아래도 남자였다는 거예요. 사람은 내가 누구냐 하는 것은 반드시 과거의 뭉치입니다. 과거라 하는 것은 시간의 뭉치에요. 그 노선을 버리라는 말은 그 뒤에 나오죠. 아무도 하늘나라에 갈 사람 없더란 말이죠. 인간은 할 수 없다는 거예요.
생각을 해보세요. 현재는 아무것도 없어요. 과거가 쌓인 것이 현재 오늘날 나라면 그 과거를 버리려면 새로운 노선이 올 때만 그걸 버리지, 새로운 노선 위에 앉아 있으면서 과거를 버린다? 아예 자기 방석을 빼라고 해. 방석 위에 앉아 있는 자기 엉덩이를 송곳으로 찌르면서 ‘에이, 나는 옛날 엉덩이 싫어. 새 엉덩이 좋아.’라고 하면 아픈 것은 자기 엉덩이만 아프죠. 사람은 변화시킬 수 있는 대상이 자기밖에 없는 이상은 변화시키려는 주체와 변화 받을 대상 모두 다 자기밖에 없는 이상은 자기 체면 거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할 게 없어요.
어제도 그런 이야기했습니다만 물에 빠진 사람이 자기 운동화 끈을 잡아당기면 다리는 물 위에 올라오는데 다리를 잡아당기는 몸체는 어디 있다? 그냥 물 속에 있잖아요. 자기 운동화 잡아당겨서 자기를 통째로 물에서 건져낼 인간 있으면 나와 보라고 그래요. 한번 해보세요. 안 되지. 하나 올라오면 하나는 내려가게 돼있어요. 안 되잖아요. 내가 지금 거짓말하고 있는 겁니까? 다 아는 이야기를 하고 있어요. 마땅하고 당연하고 이거는 반박의 여지가 없어요. 숨기고 싶은 말이 될지 모르지만 반박의 여지는 없어요.
바리새인과 예수님 사이에서 뭐가 충돌이냐 하면,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라고 해서 함께 있어버렸어요. 그렇다면 그림으로 그려봅시다. 사람들이 자기 긴 그림자, 인간은 과거를 길게 끌지요. 여기서부터 출발해서 자기가 신발끈 잡아당겨서 하나님께 나아갑니다. 그런데 자기가 원하는 노선에서 예수님이 오셔서 하신 말씀이 하나님은 네가 추구하는 거기 있는 것이 아니고 나와 함께 있다. 나에서 건너갈 수 있는 게 없는데요? 없어요. 왜? 육으로 난 것은 육이지 육으로 난 것은 영으로 들어갈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덮쳐줘야 돼요. 덮쳐주면 뭐가 문제냐 하면, 현재가 내가 주장했던 모든 것이 죄로 이러서는 안 된다는 그런 대상이, 내용이 돼버려요. ‘아하, 내가 뭔가 착각했구나. 지금까지 엉터리로 생각했구나.’라는 것을 이걸 느끼게 된다고. 뭔가 덮치게 되면. 나는 생각한 것이 육에 불과했구나. 내 힘으로 어떤 식으로든 종교적으로 복음적으로 십자가로 아무리 포장해도 결국은 내 힘으로 내가 구원 생활하는 그런 수작을 꾸몄구나. 그것도 아주 영리하게 남한테 안 들키게 목사도 모르게 자기 남편도, 아내도 모르게 아주 교묘하게 교인들 눈치 안 채게. 그게 바로 죄였던 겁니다.
누가복음 18장에 보면 거기에 바리새인이 기도하죠.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을 하죠. 금식을 왜 하느냐 하면, 사람이 갖고 있는 지방질은 삼 개월 동안 있어도 버틸 수 있어요. 그만큼 소모될 게 저장돼있는 거예요. 인간은 음식이 들어가서 인간 됐잖아요.
그러니까 조르아스터교는 인간을 음식물 자체로 덩어리로 보는 거예요. 그래서 장례식 할 때 어떻게 하느냐 하면, 음식물이니까 지금까지 남의 음식물 얻어먹었으면 죽었으면 이제는 자연에 음식물 내줘야 되기 때문에 불에 태운다든지 묻지 말고 그렇게 되면 자아가 계속 남아있으니까 그냥 독수리, 새한테 먹이로 내주는 것이 가장 자연스럽다고 보는 거예요. 최진실 죽어서 관에 하지 말고 벌판에 내놔야 돼요. 그게 조르아스터, 배화교에요. 왜냐하면 음식물이니까.
그러면 금식한다는 말은 그동안 음식물을 소화하고 배설한다고 소비했던 모든 에너지를 음식물이 오지 암으로써 말미암아 그 에너지가 어디로 가느냐 하면, 내가 누구냐를 각성할 수 있는 자각할 수 있는, 도가 틀 수 있는 그런 에너지로 소비되기 때문에 평소에 먹고 마시고 무엇을 먹을까, 입을까 거기에 소비했던 에너지가 완전히 제대로 에너지를 자기가 해탈하는데, 도 트는데 거기에 진정 소모할 수 있는 영적 존재가 된다. 그래서 금식하는 겁니다.
금식을 바리새인이 이레에 두 번 했죠. 사람이 음식에 얽매이지 않고 에너지를 무엇을 먹고 마실까 얽매이지 않을 때 인간의 자각이 뭡니까? 내가 곧 신이라고 여기죠. 그런데 왜 인간은 신이 되지 못하고 거지같은 생활을 하느냐? 그거는 음식물 충당한다고 밥 먹고 살라고, 먹어봐야 음식쓰레기 덩어리인데. 음식쓰레기 화요일, 목요일마다 내놔야 돼요. 음식쓰레기인데 방구나 픽픽 뀌고. 그런 인간이 아닌데. 원래 인간은 신이잖아요. 영원적. 얼마나 고귀하고 고상한 종교적인 행위입니까?
그걸 보고 예수님이 금식했다고 뭐라 했습니까? 네가 지옥 간다 했죠. 보세요. 영적 세계가 인간으로서 할 수 있는 금식과 기도와 철학으로 할 수 있는 그 범위하고 다르죠. 자학하고 때리면서. 예수님이 사십 일 금식해서 깨달았다 하니까 사십 일 금식하려는 사람이 한두 사람이 아닙니다. 다이어트 겸. 그것은 주님 앞에 그것조차 죄가 되죠.
왜 주님 앞에 죄가 되느냐 하면, 음식 덩어리라는 게 자기 현재의 과거잖아요. 과거의 긴 그림자니까. 그 자기를 또 미래의 구원받는 자기로, 노선을 잇고자 하는 자체가 이것이 바로 짐승의 역사 아닙니까. 자기가 그렇게 하고 싶은 게 아니고 악마가 나는 이런 존재, 이런 본성입니다를 사람을 통해서 그걸 거기다 입힌 거예요. 악마의 속성이 사람을 통해서 드러난 겁니다.
그래서 사람은 예수님이 모든 걸 버리고 날 따르라 할 때 때려죽여도 예수님을 안 따라가죠. 심지어 어떤 제자는 못 따라가죠. 어떤 제자는 따라가려다가 “죄송합니다만 우리 아버지 죽었는데 아버지 장례식하고.” “죽은 자는 죽은 자로 장례하고 너는 날 따르라” 하잖아요.
강의 다시 해봅시다. 요한계시록은 모든 것을 총 정리하는 비행기가 내리고 뜨고, 내리고 뜨고 하다가 이제는 더 이상 비행할 필요 없이 모든 비행기가 격납고 안에 안식처를 찾아 들어온 거죠. 그러면 마지막의 모습이 다 드러나죠.
마지막의 모습을 보니까 인간들은 노리개였습니다. 인간의 육은 영적 존재들의 전쟁에서 밑에 졸병으로써 활약했던 겁니다. 하나의 영적 존재의 대체물이었어요. 인간의 역사는 짐승의 역사였습니다. 그런데 짐승의 역사한테 피 흘려 죽은 분만이 그리스도 역사가 되는 겁니다.
그래서 요한계시록에는 층이 두 층이 있어요. 하나는 그리스도의 역사 층이 있고, 하나는 짐승의 역사 층이 있는데 놀라운 것은 그리스도의 역사 층이 따로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고 바로 짐승의 역사 층 안에 들어있다는 겁니다. 들어있는데 같이 보면 같이 있는 걸로 아는데 옆에서 보면 수직적으로 떨어져있고, 수평적으로 보면 같이 있고, 이런 거예요. 섞여 있는 것처럼. 그런데 도대체 섞일 수가 없어요.
짐승이 계속 역사를 주장하고 있고, 그리스도의 층 안에 있는 사람은 다 이루었다. 다 이루었기 때문에 역사라 하는 것은 더 이상 시간개념이 필요치 않은 겁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이야기 다시 해 볼게요. 바리새인과 예수님 사이에서 충돌이 일어났고, 예수님이 바리새인 보고 너희 아비는 마귀라 했죠. 마귀의 노선의 대표자가 바리새인들입니다. 왜냐하면 십자가를 이뤄야 되니까. 이스라엘 자체가 십자가를 이뤄야 될 하나의 터가 되니까. 다른 장소가 아니라 이스라엘이라는 핏줄을 통해서 십자가 이루시니까. 다윗의 자손, 핏줄이거든요.
그래서 요한계시록에서 장소와 시간 의미는 이걸 핏줄로 보지요. 그러니까 하나님 나라에서 볼 때 인류의 역사가 아무리 길다 해도 전부다 그거는 한 핏줄, 짐승의 핏줄로 봅니다. 하늘에서 보면 장소가 어디 있거나 이 지구상의 사방팔방 어딜 가든 간에 전부다 같은 장소죠. 왜냐? 같은 핏줄이니까. 아담 안에 있죠. 시간이라 하는 건 딴 게 아니고 죽고 태어나고, 죽고 태어나고, 아무리 골백번, 천번 죽고 태어나도 그 나물에 그 핏줄. 짐승의 지배를 받는 핏줄이기 때문에 시간도 의미가 없죠.
그런데 여기서 어려운 게 뭐냐 하면, 아까 이야기한 것처럼, 어렵기 때문에 다시 해봅시다. 뭘 이렇게 하려고 하는데 주께서 훼방해버리고. 그래서 ‘안 할게요’ 하고 가만있으면 주님도 가만있고. ‘어쩌란 말입니까?’ 하고 달려들면 또 얻어맞고. 참 답답한 노릇이죠. ‘저, 뭐 할까요?’ 하면 쥐어박고 ‘가만있으라’ 하고. 가만있으려하니까 가만 못 있겠고.
그건 왜 그렇게 하느냐 하면, 하나님은 짐승의 까불락거림을 댐을 통해서 하나님이 그 순간에 드러내요. 악마의 꼼지락거림 안에서 하나님의 변화가 비로소 일어나요. 그래서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하나님도 가룟 유다 없이는 하나님 일 못한다고 했다가 이단 소리 듣고 난리 났잖아요. 가룟 유다 없이는 하나님이 일을 못한다는 이 말이 얼른 들으면 가룟 유다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 걸로, 마귀 없이 일 못한다는 이 말이 마귀한테 어떤 의미가 있는 걸로 그렇게 될 수가 있잖아요.
마귀 따로, 하나님의 일 따로 이러면 되는데, 마귀를 가지고 일한다 이러면 되는데 그 목사는 가룟 유다 공로 없이는 예수 십자가 질 수 없기 때문에 가룟 유다도 구원받았을 것이다. 이렇게 주장했다 이 말이죠. 그게 문제인 거예요.
여기서 우리가 이스라엘이라는 의미를 다시 한번 요한계시록에서 마지막 격납고에 온 입장에서 봐야 돼요. 이스라엘이 뭐냐 하면, 영적인 요소가 집결된 장소입니다. 물론 이스라엘에 십자가 있지만 다른 민족엔 십자가 없으니까. 소위 배후에 숨어있던 영적 존재가 더 이상 숨어있지 못하고 어쩔 수 없이 들통 나야 될 그 중심센터가 이스라엘이에요.
그래서 요한계시록을 저 보고 한 마디로 뭡니까? 이겁니다. 요한복음 11장에 나와요. 세상의 성전화. 이 세상 전부를 하나님의 성전으로 만들어요. 그게 요한계시록 1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어디에 나타납니까? 눈에서 불꽃이 나오고 입에서 칼들이 나오고 하면서 그게 일곱 촛대죠. 일곱 촛대가 어디 나오는 겁니까? 구약의 성전에 나와요. 그러니까 하나님은 이 세상 자체를 자신의 어린양이 거하는 성전으로 만들어버렸어요.
성전은 고정돼있어요. 시간이 필요 없습니다. 시간, 공간이 고정돼있는데 그걸 뭐라 했습니까? 핏줄. 그러니까 세상의 더러운 악마의 핏줄 속에 뭐가 피어나느냐? 다윗의 핏줄, 다윗의 자손, 다윗의 사자. 다윗의 사자가 일곱 인을 뗐잖아요. 다윗의 자손이. 또 요한계시록에 보면 그분이 문을 닫으면 열 자 없고, 열면 닫을 자 없다. 이게 뭐냐 하면, 하나님은 세상을 만들 때부터 하나님이 거하시는 영원히 안식하시는 거주지로 삼아요.
거주지로 삼는데 악마가 왜 필요합니까? 하나님은 거주지를 만들 때 그냥 만드는 것이 아니고 악마를 불러다가 악마를 때려 부수는 그 과정, 승리, 전쟁 그걸 통해서 이 세상에 하나님이 거할 거주지는 영적인 존재의 전쟁을 통해서 비로소 이 세상에 펼쳐지는 것이 하나님 뜻이란 말이죠. 전쟁하는 하나님. 악마가 필요하죠. 왜? 원수니까. 인간은 바로 그러한 영적 전쟁에 하나의 졸병들이고 대체물들이고. 자기 전쟁이 아니고 영적 전쟁이에요. 그 성전은 하나님이 거하시는 성전.
요한계시록 봅시다. 1장 12절에 “몸을 돌이켜 나더러 말한 음성을 알아보려고 하여 돌이킬 때에 일곱 금 촛대를 보았는데 촛대 사이에 인자 같은 이가” 있지요. 그러면 예수님은 어디에 등장하는 예수님이다? 바로 성전에만 나오시는 예수님이다. 인자다. 그러면 이 성전이 어디 있느냐? 이 세상 전부죠. 전부에 일곱 촛대는 배치물이에요. 일곱 촛대가 교회 아닙니까.
교회가 뭐냐 하면, 교회는 영적 존재의 아이덴티티, 정체성이에요. 예수님 몸의 정체성입니다. 모든 인간은 누구 정체성이라 했습니까? 이런 존재가 악마란 걸 보여주기 위해서 인간이 있는 것처럼, 성도는 뭐냐? 예수님이 이런 분이란 걸 보여주기 위해 성도가 있는 거예요.
요한계시록 7장 봅시다. 7장 4절 누가 읽어보세요. “내가 인 맞은 자의 수를 들으니 이스라엘 자손의 각 지파 중에서 인 맞은 자들이 십사만 사천이니” 여기에 도장 받은 사람 있죠. 이마에 도장을 받았다. 무슨 도장이냐 하면, 다윗의 자손, 하나님 도장을 맞았잖아요.
그렇다면 아까 제가 이야기했던 요한계시록이라 하는 것은 예수님의 성전화잖아요. 그러니까 구약 이스라엘은 그냥 볼 수 없고 하나님의 숫자, 생명책의 좌석에 맞춰서 이스라엘 되거든요. 그렇다면 이 예수님의 성전에 배치돼있는 백성들이 숫자로 지정됐다는 걸 알려주기 위한 방법이 뭐냐 하면, 이 세상 모든 인간은 악마에 의해서 이미 숫자로 확정됐다는 걸 통해서 악마의 숫자가 확정된 것처럼 예수님의 나라에 갈 사람도 확정됐다고 이야기해야 되는 겁니다.
결국 악마의 존재는 뭘 증거하기 위함입니까? 하늘나라 가는 숫자는 이미 지정됐다는 걸 증거하기 위해서 악마의 일도 필요하다 이 말입니다. 제 말은. 그러니까 요한계시록의 악마는 들러리죠. 악마는 지 마음대로 하질 못해요. 이쯤 되서 ‘악마야 나오너라.’ 나와야 돼요. ‘무저갱에서 나와야지.’ 나와야 된다고.
악마를 불러낼 때마다 뭘 하느냐 하면, 예수님에 들어갈 백성들이 어떤 백성인가를 확실하게 보여주기 위해서는 악마에 속한 사람들을 분명히 함으로 말미암아 ‘이런 사람은 아니고’라는 식으로 예수님에 속한 사람은 누구라고 한다 말이죠.
출애굽 할 때 열 가지 재앙이 있었잖아요. 그게 요한계시록에 계속 나오지만. 열 가지 재앙이 애굽 사람들 벌주려고 한 게 아닙니다. 그것은 계속해서 재앙 내릴 때마다 바로의 심상이 업그레이드되죠. 강퍅해지죠. 그것은 그게 수위가 레벨이 계속 높아져야 결국은 애굽 사람 중에서 진짜 하나님의 택하신 이스라엘 될 사람을 골라내는, 털어내는 그러니까 뭔가 걸러내는 방법 중에 하나가 애굽 사람들의 마음을 더욱더 강퍅케 하는 그 방법을 사용하셨고, 그것이 출애굽뿐만 아니고 역사,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 전부다 사용했던 방법이었느니라 라고 요한계시록에 와서 비로소 밝혀줍니다.
그러니까 이거는 ‘저, 구원받을게요.’ 하는 건 아니란 말이죠. 털어낼 때 남아있거든 백성인 줄 알아라 이 말입니다. 털어내는 방법이 뭐냐 하면, 악마에 인 맞은 사람이 꼭 그리스도의인 맞은 사람을 조롱하고, 핍박하고, 학대하는 방법이죠.
그 방법이 바로 누가복음이나, 마태복음, 마가복음에 보면 예수님 십자가 달릴 때 무척 그들이 조롱합니다. 싸대기 때리면서 옷 벗기고. 인간이 할 수 있는 모든 조롱을 다 하지요. 심지어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죽여보기도 합니다. ‘네가 그렇게 죽은 사람 구원했다면서? 그러면 너 죽은 것 한번 살려봐라.’ 해서 예수님을 십자가에 죽여 버려요. 살아나는가 보려고.
그런데 그것은 뭐냐 하면, 예수님은 하나님으로부터 택하신 자잖아요. 예수님 자체가. 예수님이 당한 모든 시련은 결국 누가 당한다? 하나님께 인 맞은 분 예수님처럼, 예수님한테 인 맞은 우리도 동일하게 예수님처럼 이 땅에서 심한 조롱과 핍박과 놀림을, 학대를 받게 되지요. 제일 심한 학대가 그거잖아요. 복음으로는 목회 안 된다는 것. 그것보다 더 심한 학대가 어디 있어요. 음은 좋은데 맞는데 그래서는 목회가 안 된다. 그게 바로 거짓 선지자들이 했던 거잖아요.
그러면 목회는 어떻게 하는가? 목회는 권력과 같은 겁니다. 이 세상의 권력. 누구 권력? 인간의 권력. 복음 아는 사람은 자꾸 인간을 무시하고, 인간의 행함을 무시하고, 인간의 의를 무시하고 자꾸 주님, 주님 하는데 목회라 하는 것은 눈에 보이는 인간과 결탁해야 돼요. 그래야 목회가 된다.
이게 바로 요한계시록에 바다에서 온 짐승이 땅에 있는 결탁해서 하는 거예요. 그게 배후에 뭐냐? 악마의 정체성이에요. 정체성이란 어려운 말했는데 이게 뭐냐 하면, 내가 악마가 누구냐 할 때 내가 이게 악마라고 보여주는 게 정체성이라 합니다. 지금 인간들은 묻지 않습니까? ‘목사님, 내가 누굽니까?’ 내가 누구냐 하는 것은, 예수님을 모독하면 그게 네 정체성이야. 네 본질이야. 예수님 복음을 모독하면.
복음으로 목회 안 됩니다. 그게 바로 네가 악마, 거짓 선지자. 양의 탈을 쓴 사람이에요. 그게 다른 예수, 다른 성령, 다른 복음이라니까. 복음으로 목회 될 줄 알았는데 십년 해보니까 안 되데. 그걸 본인이 확인해야 되는 거예요. 십년 동안 복음으로 목회했다는 건 뭡니까? 계속 하나님이 십년이 가도 ‘역시 목회 안 돼. 다 치워.’라고 한 사람이 분명히 있는 걸 아는데 그런 줄 알고도 복음 쥐고 있는 사람은 뭡니까? 그 사람이 훌륭해서가 아니라 하나님께 인 맞은 사람이죠.
따라서 어떤 목사가 진짜 하나님께 인 맞은 사람이라면 그 목사 주변에 뭐가 있어야 됩니까? ‘복음으로 목회 안 되지.’라는 사람이 주위에 완전히 포진돼있어야 됩니다. 그래야 요한계시록의 지혜란 의미가 인간적으로 뭘 수법을 이야기한다고 되는 게 아니구나. 이거는 타고나야 되는구나. 선택당해야 됩니다.
10분 쉽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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