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1018/우리교회주일낮설교
20091018/우리교회주일낮설교
이름 : 오용익(IP:59.3.147.38)
20091018 우리교회 주일설교/마가복음 16장 1-7절/부활의 목격자(이 근호목사)
마가복음 16:1-7
“안식일이 지나매 막달라 마리아와 또 살로메가 가서 예수께 바르기 위하여 향품을 사다 두었다가 안식 후 첫날 매우 일찍이 해돋은 때에 그 무덤으로 가며 서로 말하되 누가 우리를 위하여 무덤 문에서 돌을 굴려 주리요 하더니 눈을 들어 본즉 돌이 벌써 굴려졌으니 그 돌이 심히 크더라 무덤에 들어가서 흰 옷을 입은 한 청년이 우편에 앉은 것을 보고 놀라매 청년이 이르되 놀라지 말라 너희가 십자가에 못박히신 나사렛 예수를 찾는구나 그가 살안나셨고 여기 계시지 아니하니라 보라 그를 두었던 곳이니라 가서 그의 제자들과 베드로에게 이르기를 예수께서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시나니 전에 너희에게 말씀하신 대로 너희가 거기서 뵈오리라 하는지라.”
방금 읽었던 내용은 단지 ‘예수님이 부활하셨다’ 는 내용이 아니라 ‘우리 인생 헛살았다’ 는 겁니다. 예수님은 죽었다가 부활했는데 우리는 그냥 살고 있으니까 그렇다면 우리가 사는 이 동네가 무슨 동네냐 하는 것을 다시 보자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라는 사람을 우리 인간들이 살고 있는 이 지구상에, 현재 약 65억쯤 살고 있고 지금까지 지구상에 살았던 인구를 다 합치면 약 250쯤이 되는데 그 250억 되는 인간들 그 맞은편에 예수라는 인간을 하나님께서 보내셔서 둘 중에 어느 쪽이 인간인가를 보게 합니다.
예수님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인간이고, 부처부터 시작해서 맹자, 공자, 아리스토텔레스로부터 시작해서 똑똑하고 잘났다는 부활이 없는 인간입니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어느것이 진짜 인간이냐, 하는 겁니다. 사람들이 이야기합니다. ‘우리는 옛날부터 하나님을 섬겼습니다.’ 이렇게 주장들 합니다. ‘하나님을 섬겼습니다’ 라고 주장했던 그 대표자들이 누구냐하면 바리새인과 서기관과 사두개인들이었습니다.
하나님을 섬겼으니 이제 우리는 인간 맞습니다, 하나님말씀대로 찬양하고 예배드리고 제사를 드렸으니까 우리는 다른 사람보다 더 뛰어난 인간 맞습니다, 라고 생각했던 그들의 손에 의해서 진짜 인간이신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셨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바리새인보다 더 의가 낫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못 간다’ 했습니다.
우리보다 더 뛰어나게 청춘과 평생을 다 바쳐가면서 하나님만을 위해서 섬겼던 그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다면 우리는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을 정도로 아직까지 하나님에 대해서 자기자신에 대해서 제대로 파악도 못하고 있는 존재에 불과해요. 우리가 열심히 교회 다녀 보세요. 결국 우리는 예수님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일 겁니다.
아직까지 우리는 그 정도 레벨이 안 되었어요.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처럼 하나님말씀대로 열심히 안 살려고 애쓰기 때문에 아직까지 예수님을 안 죽이고 있는 거예요. 교회는 건성건성 나오고 하나님말씀은 일 년이 다 가도록 안본지가 오래되고. 기도 끊어진지도 옛날이고. 그저 자기 편한 것만 생각하면서 평생을 보낸 사람에게 예수님을 싫어하고 미워하고 자시고가 뭐가 있어요.
‘예수님이 누구시죠?’ 예수님자체에 관심조차 없는 입장에서는 그런 식으로 하나님을 생각한다는 것은 자기가 만든 풍선 같은 허구적인 하나님에 불과합니다. 하나님께서 이땅에 예수님을 보내신 것은 우리자신도 몰랐던 우리 진짜 본질, 우리가 지금 엉뚱한 세계, 지옥 같은 세계에 살고 있구나, 라는 것을 확연하게 다 까발리기 위해서 보내셨고, 그래서 우리가 예수님을 힘껏 밀쳐서 십자가에 못 박고 예수님은 그냥 죽고 말았습니다.
사람들은 생각했습니다. ‘당신이 메시야 맞다면 우리가 믿을만한 조건들을 충족시켜 달라. 이런이런 일을 하면 우리가 믿어줄게’ 라고 예수님을 기대했었지요. 누구든지 하나님의 아들로서 왔다고 하면 다 뿅 가잖아요. 그래서 오늘날 많은 한국교회, 그 교인들이 기적을 원합니다.
그 기적이란 ‘내가 기적이라고 할 만한 그런 내용들, 어떤 실적과 업적을 내 놓으면 내가 믿지 말래도 믿어줄게. 내가 이렇게 새벽같이 일어나서 제단을 쌓으면서 기도한대로 응답만 된다면 내가 하나님을 믿지 안 믿으려고 할 필요가 없느냐’ 라는 겁니다.
‘믿지 말래도 믿어줄테니 우리가 원하는 기적을 내놓아 봐라. 우리가 원하는 기적을! 그러면 우리가 기적을 주시는 그 하나님을 믿지 왜 다른 신을 믿고 부처에게 빌겠느냐. 진짜 하나님이 살아계시고 진짜 하나님이 인류를 사랑하시고 모든 사람이 구원받기를 원한다면 정말 우리가 기도한대로 응답을 해 봐라’ 라는 말이지요.
예를 들어서 삼촌이 믿지 않는다? ‘주여, 삼촌이 믿지 않는데 한 달 내에 교회에 오게 하옵소서.’ 우리 엄마가 교회 안간다? ‘우리 엄마 5년내에 돌아가기 전에 교회 나와서 예수 믿게 해주면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믿으면서 잘 믿겠습니다.’ 우리가 제시하는 어떤 기적들이 있어요. 그런데 그런 기적들이 있어서 그런 조건에 맞도록 애써서 믿어보려고 했던 사람들이 바로 바리새인과 서기관과 사두개인들이었습니다.
어쨌든지 백성들에게 보이지 않는 그 신, 천지를 창조하신 그 신, 모든 만물들, 코스모스 한 송이 풀 한포기까지 기어가는 바퀴벌레까지 만드신 그 위대하신 하나님을 어떻게 하든지 백성들에게 알려줘서 그들로 하여금 살아계신 하나님을 믿도록 평생을 애썼던 사람들이 사두개인, 서기관, 바리새인들입니다. 요새 같으면 목사, 장로들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습니다. 도대체 예수님에게서 어떤 것을 발견했기에 예수님을 쓸모없는 인간이라고 단정할 수 밖에 없었던가요? 그것은, 예수님께서 여러 가지 기적을 베풀었다는 소문이 돌때에 그들은 기적을 통해서 하나님의 살아 있음을 보겠다는 겁니다. 그것이 고린도전서 1장에도 나오는데 ‘유대인들은 기적을 원하고’ 라고 하지요. 그 기적이란 하나님 계시다는 표적, 그냥 기적 말고, 그것은 마귀도 행할 수 있으니까,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보여주는 기적, 그것을 표적이라고 하는데 바로 그 기적을 원했습니다.
그런데 ‘헬라인은 지식을 원하는데 우리가 너희에게 전할 수 있는 것은 바로 십자가밖에 없다.’ 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 말이 무슨 말인지를 못 알아듣는 거예요. 예수님께서 말씀하기를 ‘너희들은 나한테서 표적을 원하고 있지만 내가 너희에게 보여줄 수 있는 진짜 하나님이 살아 있다는 표적은 바로 요나의 표적밖에 없다’ 라는 겁니다. ‘요나의 표적은 너희들 속에 악마가 들어있다’ 하는 거예요. 너희들 속에 악마가 평생토록 너희들을 이끌었고 인도하고 있었다는 겁니다.
‘너희들이 말하고 있는 메시아, 성령, 삼위일체, 하나님, 이 전부가 악마가 조작해서 만들어 낸 그런 하나님이다’ 라는 거예요. 예수도 마찬가지고 교회는 물론이고. 성경에 나오는 십자가 이야기를 할 때 십자가를 해석하는 두 가지 해석이 있습니다. 육에 속한 사람들이 말하는 십자가와 영에 속한 십자가가 완전히 달라요.
육에 속한 십자가를 믿는 사람은 ‘내가 십자가를 믿으면 죽어서 좋은나라 간다’고 믿어서 십자가를 믿는 사람입니다. 그 사람은 마귀가 이야기하는 십자가를 믿는 사람입니다. 그런 십자가를 성경에서 이야기한 이 없어요. 그들은 그것을 복음이라고 해요. 그런데 고린도후서 11장에 보면 ‘다른 복음, 다른 예수, 다른 성령을 왜 그리 좋아하느냐’ 하는 거예요.
그런데 사람들이 좋아할 수밖에 없는 그것이 뭐냐를 누가 잘 전하느냐 하면 고린도후서 11장에 잘 나오는대로 사탄의 일군들이 양의 탈을 쓰고, 꼭 마귀의 일군들이 양의 탈을 써요, 그 양의 탈을 쓰고 사람들이 원하는 다른 예수, 다른 복음, 다른 성령을 전합니다. 여기서 다르다는 말을 집어넣은 것은 사도바울이 집어넣어서 그렇지 실제로 그들이 그 다른 복음을 전하면서 ‘여러분, 이제부터 제가 다른 복음을 전할테니까 잘 들어보세요’ 라고 하면서 전하지는 않을 거 아닙니까?
‘다른’을 다 빼버리고 참된 성령, 참된 복음, 참된 복음을 전하겠습니다, 라고 이야기하는데 정작 사도바울이 들어보니까 전부 다 다른 예수고, 다른 복음이고, 다른 십자가고, 다른 성령이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고린도후서 11장의 이야기가 뭐냐하면 같은 예수, 같은 십자가, 같은 성령, 무슨 고상한 용어를 다 동원해도 그게 다른 복음과 진짜 사도가 전하는 복음과 차이를 모르게 되면 그 사람은 결국 매일같이 예수님을 다시 한 번 못박아 죽이는데 가담할 수밖에 없는 전혀 구원이 된 적이 없는, 구원은 시도를 하는데 전혀 성령받은 적이 없는 사람이 되는 겁니다.
성령에 의해서 십자가를 이해하게 되면, 내 앞에 있는 십자가는 나로 하여금 뭐를 요구하는 십자가입니다. 우리가 성령을 받지 않은 입장에서 십자가를 보게 되면 ‘아, 저 십자가를 받아들이면 나는 천국 가는구나’라고 기분좋아했던 십자가인데 그 십자가가 성큼 성큼 다가와서 내 속까지 쑥 들어와 버리면 내 구원위주로 십자가를 이용하려는 것이 악마가 나로 하여금 가짜 십자가를 믿게 하려한 동기가 된다는 거예요.
쉽게 하면 이렇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뭐라고 했느냐 하면, ‘네 아들을 내게 바쳐라’ 고 했습니다. ‘믿음이 있는가 없는가 한 번 보자. 네 하나 밖에 없는 아들을 내게 죽여서 제물로 바쳐라.’ 21세기에 살고 있는 우리가 알고 있는 신앙생활이라는 것은 그런 식으로 알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일요일 날 아침에 예배 참석하는 것을 신앙생활로 여기고 있습니다.
일요일에 예배참석하고 곧장 떠나면 쉬다가 월요일에 자기직업상 하는 일에 볼일보고 놀러 갈 것 다 가고, 그 다음에 일요일 닥치면 또 낮 예배 참석하면서 이것을 가지고 신앙생활이라고 여기는 겁니다. 하나님이 나한테 요구하는 것이 없고 내가 하나님이 벌려놓은 잔치에 참석만 해주면, 이것은 쇼 관람이죠, 이 예배 쇼를 관람해주면 그게 신앙생활로 들어가는 걸로 알고 있는 거예요.
그래서 애가 일요일 날 운동회나 학예회가 있다든지 하면 교회 안 오고 거기 참석하고, 그래놓고는 그 다음주일에 헌금할 때 천원 더 얹어주는 식으로 해서 양심에 좀 위로가 되게 하고. 그런데 정작 신앙의 표준, 이렇게 해야 그게 믿음이라고 알려준 믿음의 조상인 아브라함 같은 경우에 뭐라고 하느냐 하면 ‘하나님께서는 네 아들을 내게 바치라’ 고 했습니다.
어느 교회 참석하라고 한 것이 아닙니다. 지묘동에 있는 우리교회에 참석하라, 이런 것을 신앙이라고 이야기 한 적이 없어요. ‘네 아들을 내게 바치라’ 고 했어요. 대여섯 살 먹은 자기 딸애가 미친 영감탱이에게 성폭행을 당했을 때, 나영이 사건이라고 해서 온 나라가 난리 났잖아요. 그 다섯 살 먹은 여자애가 성폭행을 당해서 평생 성불구자가 되어서 세상전체에 대해서 혐오감을 가지고 있는데, ‘저, 교회 나오시죠’ 했다가는 그 옆에 돌이 있다면 그 돌에 맞아 죽습니다.
교회 다니는 우리한테 예수님이 맞아 죽어야 되는 이유가 뭐냐하면, 우리는 이 세상 살면서 허겁지겁 허겁지겁, 돈 한 푼 벌기도 힘들어 죽겠는데, ‘내가 네 딸 성폭행 시키면 그래도 너는 나를 믿겠느냐’ 라고 나오니까 우리는 짱돌가지고 그 예수의 면상을 때릴 수밖에 없는 거예요. ‘내가 교회는 나가주는데 내 어린 딸 성폭행 하도록 조치는 하지 말아달라’ 이 말이거든요.
그러니 교회 정기적으로 나가주는 것을 신앙생활로 간주했던 거예요. 왜? 교회 나가주면 자기가 괜찮은 사람 되고 멋있는 사람 되고, 그 만큼 착한 사람 되기 때문에 그래요. 그런데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네 아들을 가출시켜라’ 그 정도가 아닙니다. ‘네 아들 위험한 일 좀 하게 해라’ 그 정도가 아닙니다. ‘네 아들을 신학교 보내라’ 그 정도가 아닙니다.
‘네 아들을 네 손으로 죽여라.’ 누구를 위해서? ‘나 하나님을 위해서 죽여라.’ 그게 신앙이라는 겁니다. 사람들은 교회 올 때 기적을 원합니다. 기적이란 말은 현재 있는 것 빼앗지 말고 현재 있는 것에다가 추가적으로 더 보태달라는 겁니다. 빼앗아 가는 것을 기적으로 여기는 사람은 없습니다. 있는 것을 채워줄 때 ‘주여, 감사합니다’ 라는 말이 저절로 나오지요.
우리교회 교인 몇 명 되지도 않는 것, 다 빼앗아가 버렸어요. 서서히 우리의 손에 드디어 이제 짱돌이 들립니다. 드디어 ‘예수 너 한번 죽어봐라’ 하면서 어떤 사람은 긴 칼, 어떤 사람은 권총, 손에 들 수 있는 것은 다 들고 예수님을 죽이려고 합니다. 하나님이 그럽니다. ‘그래가지고 나를 죽이겠는가? 그러면 조치를 좀 더 해볼까? 진짜 나를 증오하도록 만들어 봐?’
하나님께서 만든 천국은 우리가 생각하는 죽어서 좋은 나라 가는 그런 천국이 아니고 이 땅에서 죽음을 앞장세워서 우리에게 다가와요. 죽음을 앞장세우게 되면 어떻게 되느냐 하면, ‘아브라함아, 네 자식을 내게 바쳐라’ 라는 말은 ‘네가 지금은 살아도 산 것이 아니고 너는 지금 네 죄로 지옥가고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자기가 지옥가고 있으니까, 자기가 지옥가고 있음을 아는 사람만이 자기자존심을 챙기지 아니하고 나로 하여금 내가 죄인이며, 지옥가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하신 하나님에게 순종할 수 있는 겁니다. 이걸 깨닫게 했으니까.
‘나는 지금껏 내가 누군지를 몰랐었는데 하나님께서 내게 계시를 알려주고 모든 것을 알려주는 것을 볼 때에 ‘아, 나는 이게 산 놈이 아니고 죽은 놈이구나. 그냥 죽은 것도 아니고 지옥 가도록 죽어가고 있구나’ 하는 것을 깨닫게 될 때에, 그렇게 깨닫는 것부터 시작해서 지금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의 것이 되고, 하나님의 것이 되니까 내놓으라고 할 때에 언제든지 내놓을 수가 있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준비하신 제물은 세상 죄를 지고가신 어린양 제물은, 우리를 배제하고 만든 제물이 아니라 우리의 죄를 긁어모아서 만들어낸 제물입니다. 우리의 죄를 긁어모으고, 하나님 쪽에서는 죄 없는 예수님, 어린양을 준비해서 함께 섞어서 만든 것이 십자가입니다. 그래서 갈라디아서 2장 20절에 보면 사도바울이 하는 말이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혀 죽었나니 이제 내가 사는 것이 아니고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산다’ 라고 했다 이 말이죠.
그런데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 저는 건드리지 마세요. 저는 그냥 믿기만 하겠습니다. 하나님, 뭘 하면 내가 죽어서 좋은 나라 갈 수 있습니까? 십자가 피 믿으면 됩니까? 제가 그 피 믿을게요’ 이렇게 나오는 거예요. 주께서 손대려고 하니까 ‘어어? 손대지 마세요. 제가 늘 회개하고 반성하고 있으니까 손대지마세요. 남은 회개 안할 때 저는 회개하고 있고 남 반성 잘 안할 때 저는 반성 잘 합니다. 그러니까 손대지 마세요.’
주님께서 우리를 손대지 아니하면 우리는 십자가와 상관없는 인간입니다. 좀 어렵게 이야기해서 이렇습니다. 인간이 하나님을 이용하려는 심보가 생긴 것이 언제부터인가 하면 바로 선악과부터 시작했어요. 선악과나무가 상당히 신비로운 나무인데 왜 신비롭냐 하면 쉽게 허물어진 나무라는 사실입니다.
우리 같으면 선악과를 따먹지 말라, 라는 말만 할 것이 아니라 그 안에다 5000볼트 통하는 전기철조망을 해놓고, 미군부대 울타리에 써있는 것처럼 ‘접근하면 발포한다’ 라든지 ‘누구도 위험하니 주의를 요함’ 이라는 팻말도 붙여놓고 접근을 못하게 할 겁니다. 그래서 아담과 하와도 이걸 따먹으려고 시도하다가 지지직, 전기 통해서 손 뺄 수도 있는 문제인데 하나님은 이것을 따먹으면 죽는다고 해놓고도 보암직도 하고 먹음직도 하고 탐스럽게 하기도 해서 쉽게 따먹을 수 있도록 해서 쉽게 허물어져요.
똑, 하고 따먹어요. 이종성 장로님 사과 따는 것 같아요. 손만 대면 쉽게 따지는 거예요. 먹을 때도 천사가 먹지 말라고 무슨 암시를 주는 것조차 없어요. 그냥 맛있게 먹은 거예요. 사람이 선악과를 따먹음으로 말미암아 비로소 뭘 느끼는가? 인간은 자유가 있다는 것을 느꼈어요.
인간은 자유가 있다는 것을 느끼면서 그 다음부터 인간은 그 자유를 가지고 하나님의 법을 지키려고 하는데 뭐가 문제냐 인간의 모든 자유는 자기에게서 나오기 때문에 항상 그 자유는 어떤 행동을 해도 그 위신과 체면과 영광과 보람은 누가 챙겨 가느냐 하면 자기 것으로, 내 것으로 되돌아간다는 것이 문제가 돼요.
‘주여, 이렇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오직 주께 영광만을 위하여. 내가 찬양을 주님 주신 은혜로 찬양합니다.’ 멘트는 그럴듯하고 ‘하나님께 찬양, 영광, 하나님께서 주신 성령의 힘으로 합니다’ 라고 떠들 듯이 이야기를 하지만 아무리 발광을 해도 자기 오른손이 한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할 수가 없어요. 결국은 인간이 자기 자유로서 어떤 법을 지켜도 항상 뭐라고 하느냐 하면 ‘나는 내 자유로 언제든지 이 법을 어길 도 있는 자유도 있지롱!’
십년을 교회 다녔어요. ‘나는 언제든지 이 교회 안 나올 수도 있지롱!’ ‘나에게 그런 자유 있음. 그래서 나는 20년 믿어도 21년째 교회 안 나오고 예수 안 믿을 수 있는 자유를 갖고 있습니다’ 라는 것을 전제로 하고 ‘한 20년간 예수 믿어 줄게’ 가 돼요. 인간은 선악과를 따먹고 난 뒤에 자유를 알고부터 ‘어쩔 건데? 내가 따먹었다. 그래 어쩔 건데?’ 라는 식으로 되고 그 때부터 아담과 하와에게 선악과란 그냥 하나의 맛있는 과일에 해당됩니다.
뭐가 사라졌느냐 하면, 하나님이 ‘따먹으면 정녕 죽으리라’ 하는 것을 이것을 가위가지고 잘라 버렸어요. 가위인지 뭔지는 모르지만 하여튼지 잘라버리고 ‘내가 맛있으면 되는 것이고 내가 먹고 싶으면 그것을 끝난다’ 는 거예요. 왜? ‘난 자유니까.’ 목사가 ‘교회 나와 주세요. 교회 나와 주시기 바랍니다’ 하면 사람들은 뭘 로 듣느냐 하면 ‘아, 내가 가지고 있는 자유를 발휘해서 교회 나와 달라는 모양이다. 그러면 내 자유를 실행에 옮겨서 내가 교회 나와 줄게’ 하고 교회 나옵니다.
그리고는 교회 한 5년 다니다가 ‘나는 내 자유를 사용해서 오늘부터 교회 안 나오겠습니다’ 이렇게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결국 하나님의 법이라는 것은 ‘내가 지킬 수 있으면 지킬 수 있고 내가 어기면 내가 어길 수 있다’ 하는 법이 되어 버려요. 그러나 하나님의 전략이 뭐냐 하면 하나님이 법을 주신 것은 ‘너는 이미, 선악과 따먹은 선조 덕분에 이미 네가 선악과를 따먹든지 안 따먹었든지 관계없이 죽은 놈이다’ 라는 거예요.
그 죽은 놈이라는 것을 법을 앞장세워서 법에 대해서 예민하고 ‘법을 지킬까 말까, 지킬까 말까?’ 하다가 지킨 것은 ‘하나님 지켰습니다’ 하고 어기게 되면 어긴 것은 회개하고 그러면서 ‘내가 지켰을까, 어겼을까, 어겼을까, 지켰을까?’ 이렇게 생각하는 그 자체가 이미 그 사람은 지옥 가는 사람이에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실 때 사람들은 조건을 걸었지요. ‘우리가 죽일 테니까 네가 한번 살아나 봐라. 우리가 죽일 테니 다시 살아나면 믿어줄게.’ 그래서 죽인 거예요. ‘네가 십자가에서 내려오면 내가 믿어줄게’ 그래서 죽인 거예요. 사람들은 자신의 자유, 그것이 악마가 준 자유라는 것을, 악마의 유혹에 의해서 선악과 따먹고 생긴, 우리를 지옥갈 수밖에 없게 만드는, 우리를 지옥으로 끌어당기는 자유라는 것을 모르고, 자기 자유를 사용해서 천국도 가고 마음껏 구원도 받으려고 시행을 하는 겁니다.
그래서 ‘만일 당신이 우리 생각한대로 죽어서도 부활하면 우리도 그 부활 믿고 우리도 천천국 가도록 당신의 요구, 우리보고 믿으라 하는 그 당신의 요구에 따라서 당신을 믿어줄게. 예수 믿어줄게’ 라고 나온 겁니다. 주님께서는 죽고 난 뒤에 사흘 동안 아무 소식 없었습니다. 놀라운 사실은 부활하시고 난 뒤에 모든 사람에게 보란 듯이 나타나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심지어 제자들 앞에서도 부활한 예수님과 함께 있지 않고, 제자들 손에 잡히지 아니합니다. 요한복음 20장 17절에 나오지요, ‘손대지마, 손대지마라!’ 그들이 ‘주여, 보고싶습니다’ 하면 달랑 나타나는 그런 하나님이 아니라, 주님이 원할 때만 나타나시는 부활의 주님입니다. 주님이 원할 때, 그것도 원하는 사람도 택한 백성에게만 찾아가고 자기를 죽인 사람에게는 안 찾아가는 거예요.
우리 같으면 ‘네가 날 죽였지? 내가 메시야 아니라고? 자, 봐라. 부활했잖아. 봐라. 이래도 안 믿나?’ '믿습니다. 우리가 잘못했습니다’ 라는 이런 시나리오, 이렇게 하면 모든 사람이 구원받을 것 같은데 주님께서는 자기가 나타내고자 하는 사람에게만 나타내고 다른 사람에게는 나타내지를 않습니다. 심지어 나타나는 그 사람들도 ‘주님, 보고 싶습니다’ 하면 나타나주는 것이 아니고, 그들이 원한다고 해서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나타나고 싶을때만 나타나는 그 이유, 그게 뭐냐? 선악과에 있습니다.
선악과를 인간이 따먹은 것이 아니고 선악과가 인간에게 따먹힌 거예요. 그걸 예수님의 십자가 부활 때까지는 아무도 몰랐어요. 선악과가 인간에게 따먹힘으로 말미암아 드디어 악마라는 존재가 인간까지 지배할 때 악마에게 주어질 영원한 저주와 그 지옥불이 드디어 인간세계에까지 불이 붙은 거예요.
사람이 자기의 자유로 하나님을 붙잡으려고 할 때, 그 자체가 바로 원래 악마가 원했던 본래의 정신이었습니다. 우리는 그 정신을 태어날 때부터 인수인계 받아서 갖고 있었던 거예요. 주님께서 부활이 되셔서 찾아오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그 부활 안에서 예수님이 죽으신 것은 우리 자체가 우리 스스로의 힘으로 구원받을 수 없음을 확인해 주기 위해서 주께서는 십자가를 앞장세워서 찾아오는 겁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구원되고 안 되고는 누구손에 달렸냐 하면 부활해서 찾아오시는 예수님의 손에 달린 문제지, ‘주님이여, 우리가 구원받으려면 뭐 믿으면 됩니까’ 하고 주머니에 손 넣고 ‘이제 부처는 끊었고 교회 슬슬 다녀볼까 하는데 교회 와서 무슨 소리 듣고 믿으면됩니까? 행함이 아니고 믿으면 된다면서요? 뭘 믿을까요?’ 라고 어슬렁거린다고 해서 구원받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골라잡아서 구원될 수 있는 그런 자격이 없어요. 주께서 찾아와야 포착되어서 납치가 되어야 구원받는 겁니다. 부활하신 주님이 누굴 납치해 줘야 돼요. 그게 성령입니다. 제가 몇 달 전에 세 가지를 양보 못한다고 했지요. 육으로는 거듭날 수 없고 영으로만 거듭난다는 사실을 이 강단에서는 양보 못한다고 했습니다.
제가 세 가지를 이야기했어요. 그때 전부 알아듣는 척을 했지요. 이게 무슨 뜻인지를, 알아듣는 척 했지요. ‘그래, 나는 성령 받았다.’ 정말 성령 받았으면, 여러분들의 세 살 먹은 딸내미가 미친놈한테 성폭행 당해서 평생 시집도 못가고 성불구자 되더라도 감사할 수 있어야 돼요. 그게 성령 받은 겁니다. 늦게 오신 분들이 많아서 설교를 다시 해 봅시다.
설교 다시 시작하겠습니다. 십자가가 마트나 쇼핑몰에 있는 전시물이 아니에요. ‘자 상품 보여주세요.’ ‘어느 상품으로 보실래요? 부처 믿을래, 아니면 십자가지신 예수 믿을래?’ ‘나는 예수가 더 맘에 든다.’ 이렇게 골라잡아서 장바구니에 담는 것이 아닙니다. 멈춰진 십자가가 아니에요.
하나님께서는 자기아들을 십자가지게 하셔서 십자가지신 분으로 우리에게 찾아옴으로 말미암아 그 십자가 안에 ‘우리 힘으로 구원될 수 없는 그런 운명, 태어날 때부터 그런 운명 이었단다’를 통보해주는 겁니다. 그리고 이것이 ‘너는 구원에 불가능하다’ 하는 정도의 말이 아니고 ‘너는 처음부터 죄인이었었어.’ ‘주님, 제가 뭐가 죄인입니까?’ ‘네가 자유로 살려고 했다. 네 자유로 살려고.’
‘하나님, 이것은 지켰고요, 이것은 다음 주에 지킬게요. 이것은 아직 믿음이 약하고 성화가 덜되어서 못 지켰는데 이것은 좀 미루고 이것부터 먼저 지킬게요.’ 사람은 이렇게 자꾸 지키려고 하는 거예요. 사람은 뭘 지키게 되면 그 공로와 업적이, 아무리 하나님의 영광, 찬양, 해도 항상 지킨 것은 자기에게 돌아오게 되어 있어요.
‘주여, 제가 지켰습니다. 제가 믿었습니다.’ 꼭 자기를 집어넣는다니까요.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우리는 십자가는 아는데 십자가도 알고 그다음에 이웃사랑도 행해야 한다’ 이렇게 주장하는 사람이 있어요. 그 사람 눈에는 마치 성경책이 마트에 진열된 상품처럼 보이는 거예요. 십자가도 내 마음에 들면 장바구니에 집어넣는데 십자가를 장바구니에 집어넣을 때 그게 나의 자유를 사용하는 거예요.
‘주여, 보이지요? 제가 지금 행동하는 것이 보이지요? 주여, 십자가 지금 믿습니다. 사진 한 컷 찍고, 천사 잘 찍었지?’ 그 다음에 이웃사랑하면 ‘이웃사랑 지금 합니다.’ 온유하라, 하면 ‘온유 지금 합니다.’ 모이기에 힘쓰라고 하면 ‘오늘도 예배 참석했습니다. 주여, 이만하면 저쪽의 김 집사보다 낫지요?’ 이게 무슨 절간입니까?
그게 절이에요. 그게 사찰이라고요. 교회 사찰직분 말고 갓 바위 사찰. 절간입니다. 내가 골라잡을 수 있는 하나님은 그것은 마귀가 그런 하나님 상을 집어넣어서, 그런 하나님말고는 다른 하나님을 전부 다 죽여 버리라고 우리에게 사주한 거예요. 그래서 주님 오셔서 ‘너희가 나를 선택한 것이 아니고 내가 너희를 선택한다’ 고하니까 사람들이 예수님을 죽여 버린 겁니다.
‘우리가 배운 바에 의하면 당신이 알고 있는 하나님은 마귀 하나님이라요. 그래서 우리는 당신을 죽일 수밖에 없습니다. 미안합니다.’ 그래서 죽여버렸어요. 유월절의 풍습가운데 이게 있습니다. 유월절이라는 것은 어린양의 피를 문설주에 발라서 그 안에 있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저주를 피해서 구원받았다는 그 옛날 사건이 반복되는 것입니다.
그 유월절의 풍습에 이런 것이 있어요. 유월절을 기념해서 죄수 하나를 풀어주는 관습이 있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유월절을 이렇게 이해했어요. 어린양 때문에 죄수 하나가 죄값에서 해방되는 것으로 봤어요. 참 잘 봤어요. 정말 잘 본 겁니다. 그런데 문제는 유월절 때문에 풀려날 그 죄수를 빌라도가 제시를 하는데 ‘내가 예수를 풀어줄까, 바나바를 풀어줄까’ 라고 제안을 할 때에 그들은 바나바를 풀어달라고 했어요.
이야기가 그것으로 끝난 것이 아닙니다. 빌라도가 하는 말이 ‘그러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는 이 예수, 메시아를 어떻게 할꼬’ 합니다. 사람들이 ‘죽여버리라’ 고 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뭐라고 했느냐 하면 요한복음 1장 17절에서 ‘나는 세상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으로 왔다’ 고 했거든요.
이야기가 복잡해지지요? 뭐냐하면 ‘예수를 죽여 버리라’고 한 그 인간들 가운데서 예수님이 어린양 되셔서 그 죽여 버리라고 한 사람들 가운데서 찾아와주는 사람만 구원되어서 구원받는다는 그 이야기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람들에게 죽임을 당하고 부활되는 인간을 우리에게 보내줌으로 말미암아 인간내부에 홈을 파버리죠.
그렇게 홈을 파버리면 마치 수술대 위의 인간처럼 인간내부는 절개가 되어버립니다. 그래서 내부가 다 발각이 되지요. 발각이 되면서 제물 바치는 아브라함처럼 완전히 속을 다 드러내고 죽어 마땅함이 드러날 때, 그 코스, 그 길이 뭐냐 하면 우리가 앞으로 가야될 우리의 코스입니다. 우리가 가야 될 길이 양쪽을 걷지 말고 그 파여진 그 십자가의 길, 십자가로 파낸 그 홈을 따라서 우리는 걸어가야 그게 좁은 길이고 십자가의 길이에요.
자기를 긍정하면 못가는 길입니다. 자기를 부인하면서 십자가로 파야 돼요. 그 파인 곳으로 물을 부어보세요. 물이 다른 데로 새지 않고 그 홈 따라 물이 죽 내려가잖아요. 그 홈 따라 가는 것을 물로 보지 말고 예수님의 피로 보자 이 말이지요. 그 피 속에서 출렁거리면서 같이 가버리면, 거기서 무슨 인간의 자존심과 체면, 그 피안에서 그것이 왜 그리 중요해집니까?
내 어린 딸이 성폭행 당하는 그것이 핏속에서 왜 그리 중요하냐 그 말이죠. 의대에서 의사고시를 앞두고 있는 애인데 대전에서 술 먹고 친구 간에 싸우다가 떠밀었는데 넘어져서 죽었어요. 예과 2년 본과 4년 하면 의대만 6년입니다. 돈 계산 해보면 몇 억이 들어갔어요. 아들이 의사면 앞으로 며느리도 의사될 가능성이 많고 자기가 노인이 되면 생활비를 잘 타먹을 가능성이 많아지지요.
그런데 그 애가 죽어보세요. 그런 집안에 가서 ‘저 아주머니, 예수 믿으세요’ 하면 짱돌이고 뭐고 들어서 ‘애라, 죽어라. 내 아들이 어떤 아들인데.’ 그게 바로 신앙생활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부활해서 찾아온 사람의 특징이 뭐냐 하면, 부활의 능력, 죽어도 다시 사는 능력 속에 있기 때문에, ‘죽어도 좋아’가 됩니다.
성령을 통해서 십자가를 이해하는 사람은 ‘주께서 죽은 나를 살렸구나. 죽어도 좋아’ 라는 느낌이 오는 반면에 육으로써 십자가를 믿으려고 애쓰는 사람은 ‘그래, 죽으면 안 돼. 절대로 죽으면 안 되고말고.’ 용을 써요. 신앙생활 하면서 아주 용을 씁니다. 용을 얼마나 썼는지 아예 변비가 돼요. 오늘 본문이 예수님의 부활을 목격했다는 거예요.
목격할 때 이 제자들이 예수님이 부활한 것을 모르고 이왕 좋으신 갔는데 곱게 가도록 여러 가지 장례용품을 들고 만나러 갔습니다. 갔는데 거기에 웬 청년이 앉아 있지요. 천사였습니다. 천사가 앉아 있으면서 뭐라고 약을 올리느냐 하면, ‘청년이 이르되 놀라지 마라.’ 아브라함에게 ‘네 아들을 내게 바쳐라’ 할 때에 그걸 안 놀라겠습니까? 놀라겠지요.
우리가 원하는 기적은 있는 것에 더 추가되는 그것이 기적인데 내가 제일 애지중지 하는 그것을 무로 돌리려고 할 때 안 놀라겠습니까? 그런데 천사는 히죽거립니다. ‘놀라지 마라. 그게 네 주제에 당연한 것 아닌가? 왜 새삼 놀라지? 놀라는 것을 보는 내가 더 이상하네.’ 천사가 하는 말입니다. ‘놀라지 마라. 이 세상에 놀랄 일이 뭐가 있다고?’
사람은 자기한테 일어난 일은 놀라고, 예수님한테 일어난 일은 전혀 안 놀라고. 그게 육적인 구분이잖아요. 성령이 오게 되면 예수님의 일이 곧 나의 일이 되기 때문에 예수님의 일로 인해서 이미 놀라버리면 더 이상 나에게 일어난 일로 더 이상 놀란 것이 없습니다. 내가 놀랄만한 거리가 없어요.
죽었다가 살아났다는 이야기가 남의 이야기가 아니고 곧 내 이야기이기 때문에 성령이 오게 되면 나는 예수와 하나가 되고, 예수님이 죽었다가 살아났다면 나도 죽었다가 살아날 수 밖에 없는, 그럴 수밖에 없는, 그렇게 될 수 밖에 없는, 내가 원치 않아도 그렇게 돼야 되는, 내가 원치 않아도 천국 가야 되는 그런 사람이 이미 되어버린다면 더 이상 나에게 나로 인해서 놀랄 일은 없다 이 말입니다.
사람이 성경을 지키는 것은, 성경말씀을 지키겠다고 나서는 것은 자기가 놀랄일을 미리 커버하려고 하는 수작에 불과합니다. ‘주여, 이렇게 착한 나를 놀래키지 마이소. 내가 이렇게 착하게 교회 나오니까 깜짝깜짝 놀라게 하는 일은 될 수 있는 대로 우리 집안에서는 안 일어났으면 좋겠심더.’ 이런 거예요. 이게 무슨 주님과 하나입니까?
따로 노는 거지요. 이것은 따로 노는 겁니다. ‘다음 주 주일에 또 갈 테니 그때 가서 또 만납시데이. 한주일동안 내게 손대지 마이소. 내 일 요새 바쁩니데이. 성경 볼 시간 업슴미데이.’ 그것은 따로 노는 거예요. 부활하신 분이 나를 납치한 것이 아니에요. 납치당한 사람이 납치한 사람하고 따로 노는 그런 인질이 어디 있습니까?
납치범이 나를 납치 했으면 ‘나는 사나 죽으나 그리스도의 것으로 사는 것이고 죽으나 사나 내 것이 아니라 주의 것이라’ 이래 되어야지요. 그래서 성경전체가 뭐냐? 납치범에 의해서 납치된 자만 구원받는다, 그 이야기입니다. 부활하신 주님이 찾아오셔서 ‘너는 더 이상 너 자신에 대해서 걱정을 할 이유도 없는 존재다’ 이 말입니다.
‘성경 몇 절 지켰습니다. 못 지켰습니다’ 하는 그런 말 내 앞에서 하지 말라는 말이죠. ‘나는 너와 함께 있음으로 이미 구원된 자이기 때문에 뭘 지키고 안 지키고를 네 쪽에서 신경 쓸 이유가 없다’ 이 말이죠. 그걸 가지고 뭐라고 하느냐를 성경에서 보니까 ‘먹는 것 입는 것으로 족한 줄로 알고 돈을 사랑하지 않고 온유와 화평이고 형제우애고 사랑이고…’ 그렇게 표현하는 겁니다.
우리가 그걸 지켜서 그렇게 표현하는 것이 아니고, 나는 그냥 단지 주님과 함께 있을 뿐인데, 단 그것뿐인데 성경에서는 뭘로 보느냐 하면 ‘ 이지 않는 것을 믿는 사람이고, 보이는 소망은 소망이 아니매 보이지 않는 소망을 보는 사람이고, 신앙의 길을 가는 사람이고….’ 전부 다 그렇게 천사들이 우리를 평가해주는 겁니다. ‘저렇게 성경대로 행하는 사람은 처음봤다’ 고 하면서.
자기는 그냥 죽은 놈으로 주님과 함께 있을 뿐인데, 천사는 말하기를 ‘세상에, 성경 66권을 저렇게 잘 지키는 사람은 처음봤다’ 고 하는 거예요. ‘저렇게 방종치 아니하고 오직 위만 쳐다보면서….’ 여러분, 부활을 목격했다고 부활이 아닙니다. 주님한테 납치당해야 돼요. 주님이 몸소 쳐들어와야 되는데 십자가를 앞장세우고 쳐들어오게 되면 그때부터 ‘아, 나는 죄인이었구나. 나는 죄인으로서 십자가사건에 가담되었었구나. 십자가가 남의 일이 아니라 십자가가 나를 껴안고 폭발해버린 폭탄이었구나. 그게 십자가구나.’
그 때부터 그 사람은 오직 십자가만 자랑하게 됩니다. 왜? 그것이 주님의 뜻이고 하나님의 하신 일이기 때문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저희들 자신이 어디서부터 문제가 있는지를 제대로 파악도 못한 채, 그저 마트에서 물건 사듯이 하나님의 말씀을 주워 담으면 구원되는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십자가가 찾아올 때에 그것이 예수님 홀로 죽으신 십자가가 아니라 나를 껴안고 나를 죽은 자로 간주하시는, 이미 너는 죽은 자라는 것을 일깨워주시는 함께 죽은 십자가인 것을 이제 알았습니다. 이제부터 사나 죽으나 주의 것이 되었사오니 세상 것으로 놀라는 일이 없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첨부파일 : 20091018 우리교회 주일설교.hwp (106.5K), Down:15
이미아(IP:119.♡.119.36)
09-10-22 16:28
신앙생활은 멘트를 날리는 것이 아니었다...
신앙생활은 세 살 먹은 딸내미가 미친놈한테 성폭행 당해서 평생 시집도 못가고 성불구자가 되더라도 감사할 수 있어야 되고 의대에서 의사고시를 앞두고 있는 아들이 술 먹고 친구간에 싸우다가 떠밀침 당해 넘어져서 죽어도 감사할 수 있어야 되는 것이었다...
‘그래, 나는 성령 받았다.’ 정말 성령 받았으면....이게 성령 받은 겁니다.
아!!!
짱돌이 날라 올 설교다.
그런데도 짱돌이 날라오지 않는것은 왜일까???
그렇다..짱돌 던질만한 레벨도 안된다...자기 밖에는 관심이 없으니...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기는 커녕 예수님의 십자가 근처에도 가지 못하고 멀리서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박히는 구경만 하고 있는...아니 자기라는 신에 푹 빠져 확장하는데 정신없어서 구경조차도 할 수 없는...아니 예수님이 십자가 지고 갈 때에 구경꾼들 사이에 분명히 목 타는 군중들의 틈새를 노리고 술이나 팔고 돈이나 벌려는 그런 작자들의 축에라도 끼여 있을까...
십자가 폭탄이 나를 껴안고 폭파되지 않고 있는 이상엔 아무리 십자가 폭탄을 붙들고 있어도 그 폭탄이 불발탄이었다면 죽어도 좋을수 밖에 없는 부활의 능력 속에 가담되어질 수 없는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