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애굽기 11장 - 12장 주석
출애굽기 11장 - 12장 주석
이름 : 이진용(IP:222.99.120.158)
출애굽기 11장 - 12장
애굽에게 내리고 있는 재앙은 여호와 하나님이 거룩한 전쟁이라는 방편을 통해 역사 속으로 뛰어드는 한 면을 보여준다. 이것이 심판의 형식이다. 모세라는 하나님의 종을 통해서라도 이 정도라면 아마 직접 현현(顯現) 하실 때는 인간의 상상을 초월하게 될 것이다.
드디어 마지막 재앙으로 애굽을 때릴 때가 되었다. 동시에 이스라엘을 구출 시킬 순간이기도 하다. 이스라엘 백성은 끝까지 이 사태를 지켜보면서 알아두어야 할 사항이 있다. 그것은 우리를 구출하러 오신 여호와라는 神의 특성과 본질을 파악하는 일이다. 그 분이 무엇을 싫어하며 무엇을 적으로 간주하여 싸웠는지는 이스라엘의 장래의 운명과 직결되는 일이 된다.
마지막 밤. 여호와께서는 애굽 전역에 장자를 죽게 하는 재앙을 내리면서 이스라엘에게는 특별히 표적을 내린다. 그 표적은 집에서 1년 동안 같이 지낸 어린 양의 피, 바로 그것이다. 이스라엘 집안의 맏이를 대신하여 죽어야 하는 그 흠 없는 어린 양 속에서 하나님의 모습이 모두 담겨있다.
도대체 여호와의 구원이란 무엇으로부터의 구원인가? 만약 단순히 애굽으로부터의 구원이라면 이스라엘 사람들이 사는 지역에 죽음의 천사가 아예 오지도 말아야 할 것이다. 그리고 어린 양을 잡아 그 피를 문설주에 발라 죽음의 천사로 하여금 이 집에는 들리지 않도록 하는 번거러움이 요구되지 않아도 좋을 것이다. 여호와의 구원은 아무리 이스라엘이라고 하더라도 어린 양의 희생 없이는 성사되지 않을 요소가 들어 있는 것이 분명하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바로왕 같이 강퍅하지도 않았고 애굽의 술객들 모양 하나님의 이적을 모독하지도 않았다. 그런데 왜 그들에게도 피가 요구된단 말인가? 여기서 우리는 이스라엘이 단지 애굽이라는 특정 공간에서만의 구원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다른 차원에서의 구원이 적용된 민족임을 짐작할 수 있다. 그것은 하나님에 의한 죽음의 경험 안에서 그 죽음마저 극복할 수 있었던 여호와의 능력을 알게 하는 이동을 뜻한다. 여기에는 자국인이든 타국인이든 구별이 없다. 유월절 희생의 예와 고난의 떡을 먹기로 작정한 자들은 이제 모두가 여호와의 약속 안으로 들어온 하나님의 선택된 민족이다. 그들 사이에는 모두 한 공통점으로 묶여져 있는데 그것은 죽음 속에서의 회생 경험이다. 그 사건에 개입된 것이 어린양의 희생의 흔적을 자신들의 기억 속에서 지워버리지 않아야 한다. 만약 잊을 경우에는 이스라엘에서 제거되는 것이다.
여호와의 밤은 여호와께서 애굽과 이스라엘 사이에 개입했던 밤이다. 그 밤중에서 새로 탄생된 것은 유월절을 새로운 기반으로 한 새 민족이었다. 아무도 무사할 수 없었던 밤을 경험한 그들에게 어린양이 가지는 구원의 표징은 절대적 의미를 지닌다. 그것 없이는 현재의 우리가 없게 되어있다는 의식이 이스라엘이라는 국가의 실체를 형성케 한다.
이스라엘과 교회는 그 어떠한 인간의 힘이나 노력이 들어있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인간적인 방식으로 교회를 만들려는 헛된 노력을 하고 있다.
11:5-8
'어린 양'이라는 말씀이 나온다. 이 '어린 양'이라는 개념이 맨 처음 나오게 된 것은 바로 왕과 그의 나라에게 재앙을 내리는 과정에서 나오는 개념이다. 7절에 보면, "여호와가 애굽 사람과 이스라엘 사이에 구별하는 줄을 너희가 알리라 하셨나니"라고 되어 있다. 같은 나라에 살면서도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인 자와 그렇지 않는 자를 구별해 내신다.
그 기준이 바로 '어린 양'이라는 것이다. 5절에 보면, "맷돌 뒤에 있는 여종의 장자까지와 모든 생축의 처음 난 것이 죽을찌라"라는 말씀이 나온다. 맷돌 뒤의 여종까지를 꼭 들먹이어야 하는 것은 애굽 나라에서 구원될 자와 구원되지 못할 자를 구분 짓는 기준은 결코 인간의 지혜나 신분 격차를 가지고 결정 지울 수 없다는 점을 분명히 하고자 하신다.
신분적 차이나 혹은 죽음의 사자가 심판하러 집집마다 방문할 때에 그 어떤 자세나 태도를 취했는가 상관없이 '애굽 안'에 있는 자들의 장자는 다 죽었다는 것이다. 단 '어린 양'에 속한 자만은 예외가 된다.
'어린 양'이라는 기준은 인간이 만들어 낸 기준이 아니다. 양 백성을 구분 짓는 기준이 이스라엘 편에서 협의해서 나온 것이 아니다. 이것은 우리들이 현재 갖고 있는 신을 하나님이 인정해 주지 않겠다는 의지를 천명하신 것이다.
"신을 과연 바꾸었느냐?"를 묻고 계시는 것이다. 신을 바꾸었느냐 아니 바꾸었느냐는 이 지상에서 '어린 양'에 의해서 졸졸 따라다니는가 아니면 독자적으로 살아가느냐로 판가름된다. '맷돌 뒤의 여종'은 인권적인 측면에서 보면, 분명 애굽 사회의 불평등의 한 단면으로 간주될 수 있을 것이다.
오늘날 민주 사회를 구성하는데 무슨 기여를 하는가 하는 선에서 예수님을 해석할 수 도 있을 것이다. 가난하고, 소외되고, 사기 당하고, 박해 받는 자의 편에 서서 그런 자들과 함께 고난을 받는 그런 예수님이 참 예수님의 정신이기를 은근히 바라는 마음도 생길 수 있다.
그러나 이런 주장을 하는 사람은 아직도 신을 바꾼 사람이 아니다. 애굽의 신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는 사람이라고 볼 수 있다. 하나님께서 애굽 사람과 이스라엘을 구별할 때는 오직 '어린 양의 피' 외에 다른 기준은 있을 수 없다.
자신의 처지가 얼마나 형편없고 불쌍히 보이고, 가난한가 라는 정도를 기준으로 해서 구원과 구원 안됨이 결정되는 것이 아니다. 부한 자들은 부자 나름대로 교만이 있듯이, 가난한 자도 나름대로의 교만이 싹터있다. 신을 바꾸지 않겠다는 교만이다.
사회로부터 처절하게 당하고 매맞더라도 어떤 신에게 철저하게 종속되기 싫은 마음은 항상 따로 가득하게 부풀어오르기 마련이다. 특히 자신의 교회를 이상적인 교회로 만들고 싶은 교만은 어린 양의 정신이 사라지고 그 자리에 세상 기준으로 채워지기 마련이다.
교회 내의 성도는 모두 한 성령을 지닌 채 다시 태어난 자들이다. 이들의 운명과 인도하심을 각자 안에 계시는 성령님의 일하심에 따라 결정된다. 사람마다 처해 있는 환경과 배경이 다르기에 어떤 특정 한 사람의 입장을 절대적 기준으로 삼을 수가 없기 마련이다.
성도의 거룩함에 대해서는 하나 같이 같은 속성을 지녔다. 그리스도의 인도하심이다. 교회 내에서 특정 인사가 자신의 생활을 기준으로 정해놓고 타인들을 윽박지르고 그들은 구원됨의 자질을 심사하는 것은 각 사람 마음 속에서 한창 일하시는 예수님을 모독하는 바가 된다.
목사가 교인을 심사하는 저의와 목적은 이상적인 교회를 자기 정치적 역량으로 실현시켜 보겠다는 것이다. 이것은 교만이다. 교회는 인간 손에 의해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다. 만약 인간 손으로 교회를 만들겠다고 덤벼들면 거기에는 반드시 참 백성과 아닌 백성을 구별하는 기준이 반드시 개입되기 마련이고 그리고 그 기준을 마련한 목회자 당사자의 자기 인생관이 그 기준을 대신할 것이 분명하다.
하나님께서 이 '어린 양'이 제시하는 정당한 뜻은, 누구든지 자기 나름대로의 기준을 거론하지 말라는 것이다. 애굽 나라에 들이닥칠 재앙이 심각하다. 죽음의 파도가 노아 홍수처럼 애굽 나라 전역에 덮치게 된다.
"애굽 가운데 처음 난 것은 위에 앉은 바로의 장자로부터 맷돌 뒤에 있는 여종의 장자까지와 모든 생축의 처음 난 것이 죽을찌라 애굽 전국에 전무후무한 큰 곡성이 있으리라"라고 되어 있다. 이 모든 것은 어린양 기준 외에 다른 기준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다.
요한복음 1:29에서 세례요한은 외치기를,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라고 했다. 사람이란 같은 인간을 심사할 자격이 없다. 진실로 구원된 자는 어린 양을 쳐다보며 그분의 가치를 자기 존재에 있어 가장 궁극적인 것으로 인정하는 사람이다. 비록 사회 생활하면서 여러 가지로 치이더라도 그 어떤 경우에도 어린 양을 포기하지 않는 그 모습이야말로 이 땅에 같이 살면서도 천국의 백성인 사람들의 모습이다.
12:1-10
바로의 반발 강도가 더 심해지는 것을 알 수 있다. 모세를 통해서 그토록 징벌을 아홉 번씩이나 내렸으면 어느 정도 기가 죽을 만도 한데 오히려 그 반대로 도가 더 심해진다.
그것은 '새롭게 됨'은 죄악이 최고조에 달할 때나 가능하다는 말이다. 이렇게 해서 하나님의 백성들로 하여금 자신감을 못 갖도록 하시는 것이다. 하나님의 일을 곡해하면 이런 시나리오를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나님께서 미리 적들을 징벌하여 적들이 기가 팍 죽어있는 상황에서 그 뒤에 하나님의 자녀가 수월하게 행동하면 그들이 다 회개해서 하나님께서 돌아와 교회도 부흥되고 하나님 나라도 확장되지 않을까"라는 생각이다.
이런 사고방식이 왜 잘못된 생각인가 하면, 인간은 외부의 죄는커녕 내부의 죄조차도 자력으로 도저히 이길 수 없는 존재다. 죄가 왜 이 세상에서 기세 등등 하느냐 하면 죽음의 권세에 눌려 있지 않는 인간이 하나도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자기 의지로서 죄를 이겨 이 세상에서 구원될 수 있는 능력자는 아예 없는 법이다. 이러한 사태에서 '새롭게 됨'이란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저 수리하고 수선하는 것으로 마치 '새롭게' 된 것처럼 자신을 위장하고 싶을 뿐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렇지 않다. 세상 악에 대해서 갈 때까지 가겠다는 것이다. 그 최후의 결말은 '죽음' 이 외에 다른 것이 될 수가 없다. '어린 양'이 죽음의 모습으로 하나님 일에 끼어 든다는 것은, 악과의 대결에서 필히 죽음이 동반한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함이다.
극도의 악은 죽음을 유발하고 그 죽음 안에서 비로소 죽음을 극복하는 '새로움'이 탄생되는 것이다. 이것은 곧 전쟁이다. 갈 때까지 가보겠다는 것이 하나님의 의지이다. 하나님의 '새로움'이란 적어도 이 악을 이기고 죽음조차 극복하는 그 무엇이어야 한다.
이것이 맨 처음 보여진 것은 바로 하나님께서 모리아산에서 아브라함에게 번제 드릴 것을 지시한 그 때다. 거기서 이삭은 아버지 아브라함에 의해서 죽게 되는데 이 이삭의 죽음을 단적으로 말해주는 증거물이 수풀 속에서 잡혀 이삭대신 번제로 태워진 어린 양이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 번제 자체를 취소시킬 의사가 없다. 기어이 아들 이삭을 죽음의 현장 속으로 집어넣으려고 하신다. 이삭은 자신의 제물 성을 면제받지 못한다. 제물의 취지는 취지대로 유지하면서도 이삭은 결국 살아나는데 여기서 등장되는 것이 '수양'이다.
'어린 수양'은 막연하게 대신 죽어야 될 존재가 아니다. 사람들의 숫자를 담당하면서 죽어야 한다. 4절에 보면, "그 어린양에 대하여 식구가 너무 적으면 그 집의 이웃과 함께 인수를 따라서 하나를 취하며 각 사람의 식량을 따라서 너희 어린양을 계산할 것이며"라고 되어 있다.
양마다 이미 자신들이 숫자로서 함유되어 들어가게 된다. 아브라함이 이삭 대신 바친 양은 수양을 바쳐서 모든 죄를 이기는 가족으로 새롭게 출현하는 것처럼 이제부터 이삭과 그 후손은 이 수양의 취지 안에 머물려는 운명으로 확정된다.
이 말은 곧 이삭의 후손을 따라 어린양의 취지가 하나님의 속성을 대변하여 적용된다는 말이다. 이 속성을 지닌 민족과 국가의 탄생은 본격적인 영적 전쟁이 개시되었음을 알리는 것이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민족에게 새로운 시간이 시작됨을 알린다. 애굽에서 빠져 나오는 그 날이 앞으로 모든 년도의 첫 달이 되게 하신다. 그것은 이스라엘 국가의 존재 의미를 분명히 하고자 함이다.
이스라엘은 단순히 지상에서 살아 남기 위한 나라가 아니라 애굽 같은 국가와 싸워 결국에 승리한 국가로 남는 새로운 나라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기존의 시간으로서 이 취지를 드러낼 수 없고, 아예 시간 안에다 이스라엘의 존재의 의의를 실어보겠다는 것이다.
그리고 앞으로 모든 시간은 이 이스라엘이 담당하는 일에 초점을 두고 해석해야 하는 시간들이라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기존의 민족이나 사람들은 저주 받을 헌 사람들이 되고 만다. 어린 양 속으로 사라지지 않고 남아 있는 모든 이들은 전부 인간으로서 대우 받을 생각을 하지 말라는 것이다.
사람이 새롭게 되는 데에는 인간의 힘으로 가능치 못한다. 인간은 기존의 것을 고수하며 자기 딴에 새 사람 되겠다고 연초의 각가지 결심들을 한다. 하지만 그런 것은 하나님의 '새로움'에 해당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자신의 죽음을 기초로 하지 않기 때문이다.
사람이 각가지 결심을 한들 그 결심을 쉽게 꺾어 버리는 각가지 사태들이 터져 나온다. 따라서 오직 어린 양 안에 들어 있는 자들만이 그 안에서 영생을 누리게 된다. 그밖에는 모두 죽음이다. 죽음의 심판주가 왔을 때, 자신들의 행함으로 전혀 대처가 불가능하기 마련이다.
평생을 가도 어린양의 고마움 바깥으로 나갈 생각이 없다 라고 말하는 이런 사람이 구원 받은 사람이다. 진정한 새로운 피조물이란 단독적으로 존립하는 자가 아니라 어린양의 희생 안에 숨어 지내는 사람이다.
어디를 가도 그 분을 앞장세우고 그 분만을 증거 하는 자다. 그 어린 양 안에서는 새로운 시간이 흐른다. 바깥에 있는 사람하고 근본적으로 다르다. 어린 양 안에서만이 죽음의 세력이 침범하지 못한다. 과연 새로운 민족이요 새로운 하나님의 백성 이라면 이삭처럼 우리들을 위해 대신 죽으신 수풀 속의 어린 수양을 잊지 말아야 한다.
12:12-14
12절에 보면, '애굽의 모든 신들에게 벌을 내린다'는 대목이 나온다. 여호와 하나님의 속성이 여지없이 나타나는 대목이다. 다른 신의 존재를 도저히 참지 못하고 벌을 내리시는 분이 참 하나님이신 여호와이다.
십계명 제 1계명도 "나는 너를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낸 너의 하나님 여호와로라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있게 말찌니라". 참 하나님이신 여호와께서 사람들에게 나타나는 방식은 사람들 손에 의해 죽어버린 희생양의 모습으로 나타난 것이다. 그 죽은 양고기는 반드시 먹어야 하고 그 피는 문설주에 발라야 한다는 것이다. 만약에 이스라엘 사람들이 그냥 모세의 권위만 믿고 양고기를 먹는다면 그것은 하나님을 실제적으로 모독하는 것이 된다.
하나님의 뜻을 장난용으로 받아들일 수는 없는 일이다. 참된 하나님께서 오직 '어린 양'의 모습으로만 나타났다는 것을 증거 해야 하는 목회자나 전도자의 입장에서 보면 이러한 하나님의 방식에 걱정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이미 모든 사람들이 기존의 절대자로서의 하나님인 양 알고 있는데 그들을 향하여, 오직 어린양의 모습으로만 나타나는 것이 참된 하나님이라고 전한다면 누가 과연 믿겠느냐 하고 걱정이 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어린양의 피로만 구원 받는 방식을 생각하시는 것은 반드시 그 방식을 믿는 사람이 발생된다는 것을 염두에 두시고 베푸신 조치다. 따라서 전도자의 입장에서는 다른 방식으로 곁들여서도 아니 되고 오직 그것만을 걱정 없이 속 편한 마음으로 증거하면 된다. 왜 양고기를 먹어야 하는지를 알아야 한다.
이것은 양과 인간과의 바꿔 치기다. 사람이 죽어야 될 자리에 양을 밀어 넣는 것이다. 양고기를 먹는다는 것은 양의 운명과 자신의 운명을 일치되어야 함을 당연시하겠다는 것이다. 그동안 자신만의 인생이 이 양과 만나면서 멈춰야 함을 받아들이겠다는 뜻이다.
자기 인생의 종결, 흔히 우리는 죽음의 순간에서만 발생되는 일이라고 보아왔다. 그러나 히브리인들에게는 죽음의 순간은 그들에게 의미가 있다. 하나님 앞에 서있는 순간이 그들 인생의 종결을 대신해 준다.
죽음의 순간에서는 앞으로 남겨둔 계획들이 모두 소용없이 되는 것처럼 하나님 앞에서의 인간도 이렇다. 그 하나님 앞에서 나서는 순간이 본문에서는 '양고기'를 먹는 순간으로 대체된 것이다.
그렇다면 히브리인들에게 있어 하나님 앞에 있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 하면 지금까지 애굽 땅에서 살던 추억을 접어 넣어야 한다는 것이다. 애굽 땅에서 살았던 진정한 인생의 의미는 '죽어야 될 양'이 대신 말해주고 있다.
애굽 땅을 떠난다는 것은 단순히 다른 동네로 이사 간다는 것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개인을 위한 삶은 이제 끝났다는 것이다. 죽음으로서 마감된 양의 운명처럼 히브리인들의 애굽에서의 생활도 그 용도가 마감되었다.
이제 그들은 애굽 나라와 상관없이 되었다. 성도는 사실 그 세계의 출신이었다. 따라서 그 세계에서의 '죽은 자 명단'에 끼지 않고서는 결코 십자가 속에 놓여 있는 새 신분이라고 말할 수 없다는 것이다. 서로가 원수 지간이 되어 있는 위치에서 성도는 이동된 인간이라는 것이다.
그 이동을 애굽이라는 상황을 가지고 설명하시는 것이다. 이동할 때, 몸과 살림살이만 건져서 떠나는 것이 아니다. 애굽에서 살던 의식이 만약 남아 있다고 한다면 이것은 진정 애굽 나라의 청산이 아니라 도리어 애굽 의식의 이전과 확산이 될 뿐이다.
여기서 뭔가 애굽과의 철저한 단절과 헤어짐이 있어야 한다. 그 역할을 하는 것이 '양고기 먹기'이다. 양고기를 먹어야 하는 이유가 앞으로 이들 히브리인들이 가져야 될 의식은 '흠 없는 양의 희생 정신'이기 때문에 그렇다. 양은 죽었다. 애굽 나라의 의식을 제거하기 위한 죽음이었다. 영원히 애굽과는 이별하는 양식으로 애굽 땅에서 죽어야만 했던 그 양이었다.
양의 죽음 안에 동참하는 것으로 히브리인들은 애굽의 의식구조와도 갈라서야 한다. 히브리인들은 다른 애굽 사람들의 죽음과 함께 하게 되는데 그것은 양 죽음을 통해서이다.
애굽 사람들은 죽어야 마땅한 것은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벌을 내리셨기 때문이다. 그들은 여호와 하나님을 모르는 죄로 무서운 벌을 받고 있다. 히브리인들은 '양'을 통해서 여호와 하나님의 근본 모습과 대하게 된다. '죽는 양'이 곧 하나님의 속뜻이다. 자기 백성인 히브리인들의 애굽 의식을 정산시키기 위해 죄도 없는 양이 처단되는데 그 처단되는 양의 모습이 곧 성도에게 나타나는 하나님의 모습이다.
히브리인들은 양을 통해서 하나님의 본질에 합류된다. 이 희생물 밖에서 일어나는 일은 모두다 양이 왜 죽어야 하는가를 들추어내는 조치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자비이다. 자비란 무서운 징벌 안에서만 모습을 드러낸다.
왜 하나님이 자비로우신가 하는 점은 하나님을 제대로 알지 못한다는 이유만으로 처절하게 징벌 받게 되는 그 현장에서 비로소 출현되는 것이다. 히브리인들에게 있어 애굽을 떠남의 의미는, 양의 죽음이 갖는 자비가 충만한 세계로의 진입을 뜻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애굽 의식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얼마나 혹독한 처벌을 내리시고 있는지 그들은 똑똑하게 목격해야만 했다. 단지 문설주에 피를 바르지 않았다는 이유 때문에, 단지 여호와 하나님을 모른다는 이유 때문에 그들은 혹독한 처벌의 대상이 되었다.
여기서 자비는 바로 흠 없는 양의 죽음만이 자비이다. 이런 이해 속에서 히브리인들은 양고기를 먹어야 한다. 앞으로의 세상은 이 희생양의 취지만 살아남고 나머지 모든 사상과 그 추종자는 다 멸망 당하게 되는 세상이다. 십자가 외에 그 어떤 것도 하나님의 성에 차지 않는다는 것이다. 영원히 망하지 않는 것은 '어린양의 죽음'뿐이다.
12:15-20
유월절에 관한 것이다. 이 유월절 양식 속에는 인간들의 아이디어나 구원을 위한 재치나 지혜가 전혀 들어가 있지 않다는 점을 유념해야 한다. 또한 신을 달래기 위한 인간들의 재롱은 전혀 스며들 수 없다.
"왜 구원이 가능한가?"라는 식으로 생각하지 말고 "왜 구원이 불가능한가?"라는 식으로 생각하여야 한다. 유월절을 구성하는 제단 위의 무교병 제물은 "왜 구원이 불가능한가?"를 보여주는 증거품들이다.
우선 유월절이라는 말 자체가 "건너뛰었다"는 것이다. 왜 건너뛰는 것인가? 순서대로 차례차례 죽음의 저주를 내리시지 않고 건너뛰어야만 하는 것은 여호와의 명을 받은 죽음의 사자가 스스로 내린 자기 맹세에 충실하기 위해서 건너뛴 것이다.
인간과의 의견 조정이 있었던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자신이 정해놓은 그 원칙을 지키기 위해서 무교절을 지키는 가정을 건너 뛴 것이다. 자칫하면 무교병 절기를 지키는 인간들이 스스로 자신을 대견스럽게 여길 가능성이 있다.
즉 "나의 행동이 죽음의 사자가 우리 집에 침투하는 것을 막았다"라는 식으로 말이다. 이렇게 되면 인간이 하나님의 행동을 조정하고 유도하는 것이 되기에 옳은 생각이 아니다. 유월절 형식을 지킨다고 해서 인간이 달라지지는 않는다.
율법이 인간의 본질을 바뀌게 하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율법은 인간의 본질을 들추어낸다. 그 들추어 내어서 들통나는 사실 중의 하나가 구원받은 자신을 자랑스럽게 여기는 일이다. 마치 자신이 처신을 잘해서 구원된 양 자랑하는 것이다.
이런 자는 하나님의 구원을 전혀 모르는 사람이다. 하나님의 지시를 인간이 나름대로 지킨다고 지켜보지만 인간들은 그것을 통해 마치 자신이 의로워질 수 있는 수단이라도 된 양 의로운 흉내를 내기 십상이다. 실상에 있어 모든 규례와 율법은 오실 메시아의 모습을 미리 보여주는데 초점이 있다.
본문도 예외가 아니다. 편하게 "신에게 정성을 다하면 하늘에서 복 주신다"라는 식이 아니라 '무교병을 먹어야 한다'는 식으로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것은 장차 오실 구세주가 그 무교병의 속성을 지니고 출현하시기 때문이다.
무교병이란 누룩이 없는 빵을 말한다. 왜 누룩을 뺀 빵을 먹어야지 만 메시아를 보이는 게 될까? 빵이란 원래 인간의 생명을 유지시켜 주는 것이다. 따라서 사람에게 있어 빵이란 생명과 같이 간주된다. 사람들은 이 빵들을 먹으면서 죽지 않기 위해서 애를 쓰지만 실은 자신이 먹는 빵과 진실로 생명을 주시는 메시아와는 상관이 없었던 것이다. 인간이 아무리 맛있는 빵을 먹어도 죽음의 사자 앞에서 그 생명으로 버텨낼 수가 없다.
어떤 빵을 먹어야 생명이 되는가는 인간이 내세운 원칙이 거부되고 오직 하나님이 약속하신 내용만 효과가 있다. 일상적으로 인간들은 누룩이 들어있는 빵을 선호한다. 먹기에 부드럽기 때문이다. 그런 빵을 먹으면서 그 어떤 고통이나 아픔을 공감하지는 않는다. 이왕 살아가는 삶이 늘 누룩 넣은 빵처럼 보들보들하고, 가볍고 탐스럽기만 하기를 원하고 있다. 하지만 만약에 누룩이 없는 딱딱한 빵이라면 살기 위해서 먹기는 하지만 고통을 느낄 것이다.
죽음의 사자가 그냥 넘어서 지나가 버린 유월절 날에는 누룩이 들어있지 않는 빵을 먹고 일부러 라도 고통을 느껴야 함은 인간을 구원할 메시아의 진면목을 유월절 참여하는 자들이 나타내 보여야 하는 사명이기 때문에 그렇다.
고린도전서 5:6-8에 보면, "너희의 자랑하는 것이 옳지 아니 하도다 적은 누룩이 온 덩어리에 퍼지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누룩 없는 자인데 새 덩어리가 되기 위하여 묵은 누룩을 내어버리라 우리의 유월절 양 곧 그리스도께서 희생이 되셨느니라 이러므로 우리가 명절을 지키되 묵은 누룩도 말고 괴악하고 악독한 누룩도 말고 오직 순전함과 진실함의 누룩 없는 떡으로 하자"라고 되어 있다.
적은 누룩이란 바로 음행을 두고 말한다. 음행이라는 누룩을 그냥 방치하면 그것이 온 교회 안에서 두루 퍼진다는 것이다. 마치 누룩이 빵 구석구석에 퍼져나가듯이. 사도 바울은 예수님의 희생을 전면에 내세운다. 그 분 자체가 '누룩 없는 빵이시다'는 것이다. 따라서 성도도 또한 '순전함과 진실함의 누룩 없는 빵'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로 볼 때에 누룩이란,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이 담겨 있지 않는 모든 행위를 두고 말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교회 전체가 누룩 없는, 즉 예수님의 희생으로 가득 찬 빵처럼 되기를 원하시는 것이다. 그 가운데 누룩이 들어와 버리면 그 누룩은 '누룩 없음', 즉 그리스도 희생을 점령해 삼켜버리고 마는 것이다. 그렇게되면 더 이상 세속 단체가 되지 결코 교회라고 할 수 없을 것이며 이것은 죽음의 사자 앞에서 '건너뜀'의 대상 체가 아니라 아예 마구 저주를 받아야 하는 대상에 해당되는 것이다.
따라서 유월절이 '누룩 없는 절기'가 되어야 하는 데는, 예수님의 희생이 단지 그 분의 희생에만 멈추는 성질이 아니라 소위 살아남았다는 모든 천국 백성을 거기에 집합시키는 상태까지를 하나님은 원하고 계시는 것이다. 살기 위해서 살아가서는 아니 되고, 또는 자신의 노고와 고생과 괴롬을 찬양하기 위한 인생을 살아서도 아니 되고 오직 예수님의 희생만을 드높이는 그런 인생을 살아야지 만 '누룩이 빠져버린 인생'이라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왜 예수님의 희생이 누룩 없는 빵과 관계가 있는 것일까? 예수님에게 고난이 일어난 것은 누룩 적인 인간들의 요소 때문이었다. 퍼지지 말아야 할 것이 온 몸에 가득 퍼진 채로 살아가고들 있었다.
16절에 보면, 그 절기 동안에는 아무것도 하지 말라고 당부하신다. 사람들의 행위를 정지시키고자 한다. 즉 주님의 희생 앞에서 인간의 모든 활동은 무의미하고 무가치하다는 말이다. 그저 누룩만 만연시키는 행위일 뿐이다 는 것이다.
사람들은 나름대로 건너뛴다. 누룩이 없는 빵만을 골라서 건너뛰어서 누룩이 있는 빵만을 선호한다. 즐거움과 쾌락 위주로 살아가는 것은 자신이 마땅히 그런 혜택을 누릴 자격이 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예수님의 희생을 껴안고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자기 희생과 고생을 훈장처럼 껴안고 살아가고자 한다. 끊임없이 노동하고 쉬지 않고 노동하면서 얻고자 하는 나름대로 영광이 그런 것들이다. 바로 이런 인간들의 누룩 행위가 바로 예수님에게 희생을 낳게 했다.
유월절 깊은 심야 때, 애굽의 집으로부터 차례 차례로 그 집안의 뼈대라고 할 수 있는 장자가 죽어버린다. 평소에 자식들을 성실하게 훈계하고 헌신적인 부모의 사랑으로 돌봤다 여기면서 은근히 신으로부터 동정을 받으려는 그런 마음도 무서운 유월절의 밤에는 다 소용없다. 그 밤에 애굽 전역에 하나님의 참을 수 없는 심판이 휩쓸고 지나가기 때문이다.
물론 이스라엘 가정은 건너뛰지만, 그 대신 그 이스라엘 가정에 하나님은 뭔가 심어주게 된다. 그것은 하나님의 유월절 원칙이다. 무교병의 원리이다. 예수님의 희생이 담겨 있지 아니하면 누구든지 다 멸망하는 법이다. 누룩이 남아 있다는 이유만으로 망한다. 사람이 죽고 사는 것은 다 때가 정해져 있다. 이 말은 우리가 더 이상 우리 자신의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따라서 가난이냐 부자냐 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우리 속에 들어 있는 양의 희생이 어떤 식으로 발산되느냐가 중요하다.
12:24-28
유월절은 애굽 나라가 빠진 상태에서는 있을 수 없다. 적이 없는 전쟁이란 성립될 수 없다는 말이다. 이스라엘은 애굽 나라에서 무사히 빠져 나오는 것으로서 '구원'이라는 것을 설명하는 것이다.
오늘날의 애굽은 요한일서 2:15에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치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속에 있지 아니하니"라고 되어 있다. 오늘날 구원이란 이 세상의 것에서부터 벗어남이다. 이 세상 것을 사랑치 말라고 하신다. 사랑해야 하는 것은 바로 유월절을 치르는 이스라엘 민족에게서의 약속의 땅의 위치처럼 오늘날에는 하나님께서 친히 준비하신 새 하늘과 새 땅을 우리가 사랑해야 한단 말이다.
하나님께서 유월절을 지키라고 하신 이유가, '유월절을 지키는 행위' 자체로서 구원되지 못함을 말씀하시기 위해서 유월절을 지키라고 하시는 것이다. 이사야 66:3-4에 보면 아무리 그들이 제사를 번듯하게 여호와께 바쳐도 인간의 근본적인 죄악은 유월절 행사로서 처리하거나 만회할 수 없다는 말이다. 어느 누구든 유월절의 취지에 위배하면 가차없이 징벌임을 선언하고 시행된 일이다.
이러한 유월절 취지를 가지고 예수님의 '어린 양' 되심을 따져 봐야 한다. 유월절을 드려야 되는 취지는 그 유월절 안에 내장되어 있었다. 바로 '대신 죽으심'이다.
어린양의 대신 죽으심을 통해서 정말 사람이 구원받는 것은 오시는 메시야의 대신 죽으심으로만 가능하다는 것이다. 예수님이야말로 세상 죄를 지고 가시는 참 '어린 양'이다. 이전까지의 모든 '양'은 이 어린양을 지시하기 위한 반복적인 조치였다.
이 '대신 죽음'의 취지는 고린도후서 5:14-15에 보면,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도다 우리가 생각건대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었은 즉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라 저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산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저희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저희를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사신 자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니라"라고 되어 있다.
'대신 죽으심'은 하나님에게 올라오는 인간의 모든 행위의 '단절'을 의미한다. 그 '단절'이 '대신 죽으심'으로 표현하신다. 그 '대신 죽으심' 앞에서 인간은 '모두 죽었음'이 된다. 죽은 자이기에 죽은 자가 드리는 모든 유월절 행위도 하나님 앞에 인정받지 못한다.
'대신 죽으심'은 일체 가치 있는 것을 인간들에게는 묻지 않겠다는 것이다. 그 어떤 인간들의 협조나 도움을 보태어 인간을 구원하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모두 죽은 자이기에 오직 한 분, 예수님의 행하심에서만 구원의 바탕이 성립된다는 말이다.
그래서 다시 살아나심이 주어지게 되면 더 이상 자기 자신을 위해서 살 수 있는 모든 토대와 근거는 이미 상실된 상태이다. 단절을 늘 유지하라는 말이다. 애굽 사람들의 인식으로부터의 단절이다. 부모가 훌륭하기에 자녀가 본받아 구원되는 것도 아니요, 반대로 부모가 유월절의 의의를 모른다는 것이 토대가 되어 구원되는 것도 아니다.
자신의 행위로부터 단절되고 오직 예수님의 '다 이루심'만이 유일한 근거가 되어 우리를 구원하신다. 우리는 어떻게 살아도 이미 죽은 자이기 때문이다.
12:29-36
본문에 나오는 심판이란 장차 온 지구상에 임할 심판을 미리 보여주는 바이다. 애굽 사람에 대한 심판은 순전히 이스라엘 백성이 그 안에 섞여 있기 때문에 생긴 현상이다.
마찬가지로 장차 올 심판은 하나님의 백성이 실제 인류 사회에 섞여 있기 때문에 생겨나게 된다. 하나님께서 벌리시는 분리 작업은 중단이 없다. 그 심판으로 인해 애굽 나라에 큰 통곡이 일어난다.
따라서 장래 심판에도 영원토록 통곡이 있게 된다. 마태복음 8:12에 보면, "나라의 본 자손들은 바깥 어두운데 쫓겨나 거기서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라고 되어 있다. 사람이 우는 이유는 자신이 기대한 것이 충족되지 못해서 원통해서 운다. 자기 것이 있었는데 그것이 깨어졌기 때문에 운다. 자기 것만 있는 것이 아니라 그동안 지탱해 온 자기 세계마저 깨어졌기 때문에 자아를 곱게 담아 둘 기념될 만한 세계가 사라져 버렸기 때문이다.
간단히 말해서 자신이 죽어 없어져 버렸기 때문에 운다. 더 이상 '자기'라는 것이 사라져 버렸기 때문에 운다. 따라서 울지 않으려면 자신의 것은 태초부터 아예 생겨나지도 않았음을 명심해야 한다. 모든 것은 처음부터 하나님이 만드셨고 하나님의 것이다.
우리 자신들은 '하나님 것으로서 자기 자신'일 뿐이다. 하나님이 매사에 하시는데 울음으로 반응을 나타난다는 것은 아직도 하나님조차도 손 댈 수 없는 내 것이라는 것이 있다고 마음먹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세상에서 죽기 전에는 이 사실을 수납하지 않는다. 마지막 모든 것이 꺼져 버리고 모든 것이 심판대 앞에 설 때에는 비로소 평소에 하나님께서 남기신 모든 말이 진실로 만개됨을 알 수 있다.
하나님께서 맏이만 골라 죽이시는 것은 애굽 사람의 아버지는 문제성 있는 혈육에 속한 인간이지만 이스라엘의 아버지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친히 아버지 됨을 보이기 위함이다.
시편 78:51에 보면, "애굽에서 모든 장자 곧 함의 장막에 있는 그 기력의 시작을 치셨으나"라고 되어 있다. 그 집안의 장자란, 부모의 생존력이 발산된 첫 증거물로서 보는 것이다. 즉 장자는 부모를 대신해서 가문을 보존할 책임자가 자동적으로 되는 것이다.
사람들은 살아있는 그것으로도 충분히 살 가치가 담겨 있다고 보는 것이다. 부모의 존재 가치는 계속되어 인정받아야 된다고 믿고들 있다. 그 이유는 자손들의 존재함은 부모 없이 될 수가 없다고 보기 때문이다.
누구든지 자신의 가치를 포기 못한다면 그것은 곧 그런 자기 자신을 있게 하신 부모의 가치에서부터 주어져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부모는 자식 안에서 영원하고, 자식은 부모 안에서 영원을 모색한다.
부모 안에 자식이 잠재되어 있고, 자식 안에 부모가 함께 들어가 있다. 부모가 되어서 자식의 혼인을 왜 그리 독촉하느냐 하면 자신은 곧 죽지만 자식 안에서 본인들이 영존 한다고 믿기 때문이다.
자식이 결혼을 하지 않고 그냥 늙어 죽어버리면 자식의 죽음 안에서 자신도 도중에 영멸해 버리는 것이 된다. 이렇게 되면 자신의 자신됨을 어디서 찾는단 말인가? 영존 하지 못하고 시간의 흐름 따라 도중에 끊어져버린다면 그 끊어져 버린 그 시점부터 자신의 이 세상 어디에서 존재하지 않는 자가 되고 만다.
이점을 미리 당겨서 생각해보면, 현재 살아있는 자기 자신에 대해서 미리 허무해지는 것이다. 언젠가 없어질 것이 나라면 아등바등 살아봤자 무슨 소용이 있느냐고 의문을 가지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 부모 자신이 살아 있는 상태에서 졸지에 장자가 자기보다 먼저 죽는다면 그 허무의 강도는 몇 배나 더해질 것이 뻔하다. 자신의 작품이 없어진다는 것은 장자 안에 담겨 있어야 될 부모의 존재 가치가 함께서 사라진 것이 된다.
따라서 하나님의 '장자 죽임'은 장자 말고 살아남게 되는 애굽 인은 사나 죽으나 결국 죽는다는 말씀을 하고 싶은 것이다. 그렇다면 이런 선언과는 대조적으로 장자가 살아남은 이스라엘 사람은 어떠한가?
우선 이스라엘 장자를 특별히 살려주신다는 것은 모세에게 남긴 하나님의 예언 때문이다. 출애굽기 4:22-23에 이 세상의 모든 자들의 부모는 인간이 되지만 유독 이스라엘의 아버지는 인간이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이시다. 이것은 막연하고 모호한 관념에 머무는 관계가 아니라 실제상황이다. 하나님이 직접 아버지가 된다는 것은
요한복음 1:12-13에 보면,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니라"라고 되어 있다.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 바로 이들만이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나머지는 멸망의 자식으로 그 본질이 드러나게 된다. 이처럼 하나님은 사정 두지 않고 이 세상을 둘로 쪼개신다. 그렇다면 이 하나님의 자녀들이 이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성도는 오직 하나님의 뜻대로만 하나님 아들이 되었기에 자기 뜻을 포기해야만 한다. 무엇을 위한 자기 뜻 포기인가? 장자는 아버지의 명예와 아버지의 이름을 구현하면서 살아가야 된다는 말이다.
주기도문의 시작도 그렇게 된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여, 그 이름을 영화롭게 하옵시며' 하나님의 자녀는 자기를 위하는 인생을 살아갈 수가 없다. 그런 식의 인생은 허락되지 않았다. 오로지 자신을 하나님의 아들로 만드신 그분의 가치를 위해 살아가야 한다.
항상 아버지를 증거하시는 양상으로 인생을 살아간다. 아버지의 어떤 면을 증거하면서 살아가야 하면은 36절은 "여호와께서 애굽 사람으로 백성에게 은혜를 입히게 하사 그들의 구하는대로 주게 하시므로 그들이 애굽 사람의 물품을 취하였더라"라고 되어 있다.
바로 '은혜'이다. 하나님 아버지는 자기 자녀들에게 은혜를 퍼부으시는 분이다. 우리 주변에 깔려있는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인 것이다. 모든 일에 있어 하나님의 자녀에게는 예수님의 은혜로우심으로 인도함을 받게 된다.
이런 출애굽 시점에서 은혜란 원래 인간 자리로 되돌아가게 된 것이 은혜이다. 이스라엘 자손들이 애굽 인에게 받아낸 것은 결코 애굽인 것도 아니요 이스라엘 민족 것도 아니요 오로지 '하나님의 아들'이 될 자들의 몫이다.
이것은 나중에 이 우주의 모든 것이 진정한 하나님의 아드님이신 예수님의 것이라는 점으로 의미가 종착된다. 은혜란 하나님의 것이 우리 것으로 바뀌는 것이 아니다. 여기서 소위 '도움 받음'과 '은혜'의 차이점을 분명히 해야한다.
도움 받는 다는 것은 고맙게 거저 받지만 일단 받고 난 뒤에는 내 것이 되어 버리는 반면에 '은혜'란 우리 속에 있어도 여전히 우리 것이라고 할 수 없는 것이다. 하나님의 것이 우리에게 주어짐으로 도리어 우리가 하나님의 소유로 전락되고 마는 현상을 두고 말한다.
은혜란 일종의 '집게' 같은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은혜 됨에 대해 진정으로 고마워하는 사람은 평소에 "제발 내가 내 것이 안되고 그대로 하나님의 것이 되었으면 좋겠다"고 여기는 사람에게 국한 될 것뿐이다.
이러한 은혜 받음으로 인해 이스라엘 사람은 애굽 사람과 모든 면에서 분리되는 식으로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관리 받게 된다. 이것은 결코 우리 힘으로 하나님의 이름을 영광 돌리지 못한다는 사실을 말해주는 것이다.
하나님이 주신 은혜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 이 때 그 은혜를 우리 자신의 것으로 착각해서는 아니 된다. 본문에 보면,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불신자들 통해서 우리에게 은혜를 주신다.
그렇다고 해서 불신자들의 마음까지 변해지는 것은 아니다. 즉 그들이 하나님의 백성에게 감동 받아 새 사람 되어서 성도를 도와주는 것은 아니다. 그들의 강퍅은 그들이 죽을 때까지 하나님께서 유지시켜 주신다.
그런 와중에서 결국은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도움되는 방향으로 조치하신다. 이런 인도를 통해서 오늘날 우리의 아버지가 하나님이 되심을 더욱 크게 느껴지게 되는 것이다.
12: 37-42
아브라함 자손들이 맨 처음 애굽에 살던 것은 결국 탈 애굽하기 위한 개시 적 행보이었다. 창세기 15:13-16에 보면 하나님께서 약조를 미리 내리신 적이 있다. 애굽 땅에 살고자 하는 것이나 그만 살고자 하는 것이 이 모두가 직접 살게 되는 히브리인들의 소원과는 상관이 없는 것이다.
애굽 생활은 '여호와의 군대'로서 등장되기 위한 조치였다. '군대'란 원래 싸워야 될 적수가 있어야 한다. 이 우주 가운데서 하나님의 군대는 오직 아브라함의 약속에 의해서 잉태되는 민족뿐이다. 다른 민족은 하나님의 군대가 아니다. 그들은 여호와 하나님 앞에서 당해야 하는 적들이다.
4대, 즉 430년 동안 히브리인들이 애굽 땅에서 살아야 하는 이유는 아브라함에게 내린 약속에 의하면 악이 아직 무르익지 않았다는 것이다. 즉 악이 제대로 악의 면모를 보이기 위해서는 430년을 더 기다려야 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보면, 결국 이스라엘 민족이란 순전히 하나님의 약속에 의해서 죽고 사는 유일한 민족이 된다.
그렇다면 '여호와의 군대'로서 징벌해야 하는 적은 어떤 적을 뜻하는 것일까? 바로 이 점에 '430년'의 비밀이 담겨 있다. 먼저 430년 동안 이스라엘 백성들을 지배한 정신 사조가 무엇인가를 알아야 한다. 그것은 전혀 하나님의 군대와는 상관없는 세월을 살았다는 사실뿐이다.
애굽 땅을 빠져 나오면서도 왜 빠져 나와야 하는지 무슨 목적으로 하나님의 인도하시는지 전혀 알지 못한 채 단지 그들을 향한 '하나님의 군대'로의 하나님의 조치만 그들을 이끌어 내게 된다.
하나님은 오로지 약속대로만 인도하신다는 사실을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한다. 그리고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일어나는 각가지 형편은 바로 그들이 애굽 땅에 들어가지 전에 이미 아브라함에 주어진 하나님의 약속에 준해서 실행되는 현실임을 알아야 한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약속의 믿음으로 '의인'이 되는 사실에 눈을 떴다. 문제는 그 믿음의 내용이 되는 약속이 무엇이냐 하는 점이다. 이로부터 430년이 흘러가고 그 뒤에 하나님의 율법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어졌다. 그 율법은 순전히 '행위'로 가득 찬 지시와 명령들이다.
분명히 이스라엘은 아브라함 자손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약속에 해당되지 않는 율법을 그들에게 주시는 것은 이 율법이 없이는 '약속을 믿음으로 의인됨'이라는 법칙이 충족되지 않기 때문이다.
즉 '약속', '믿음', '의인' 이 모두다 여전히 인간들에게는 미궁에 빠져 있는 내용들이다. 단절된 개념들이다. 인간은 이미 선악적 사고에 따라 모든 행위를 내뿜고 다닌다. 행함에서 시작해서 행함으로 끝나기 마련이다.
따라서 인간들은 아브라함에게 내리신 하나님의 복을 모조리 자신들의 행함을 동원해서 성취하려고 들 것이 분명하다. 자기들 안에는 행함 밖에 없기 때문이다. 여기서 행함의 정체를 알아야 한다. 그리고 왜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내린 복을 그냥 주시는 것이 아니라 430년 후에 율법을 통해서 가르치고자 하느냐도 알아야 한다.
애굽의 생활은 율법으로 지적 받아야 마땅한 생활이다. 율법으로만 그 허실점이 드러나는 생활이다. 하나님은 이러한 애굽 나라 전체를 공격하셨다. 그 나라를 공격한 기준은 앞으로 하나님의 군대로서 이스라엘 민족이 받게 될 율법을 통해서 파악이 된다.
그런데 심판의 대상으로서 애굽을 비록 이스라엘 민족이 '하나님의 군대'라는 이름으로 빠져 나오지만 그들의 마음속에는 여전히 애굽 성향으로 가득 무장되어 있다. 이것을 갈라디아서 3:19에서는 '그런즉 율법은 무엇이냐 범법함을 인하여 더한 것이라 천사들로 말미암아 중보의 손을 빌어 베푸신 것인데 약속하신 자손이 오시기까지 있을 것이라'라고 설명한 것이다.
율법이란 죄를 더욱 더 활성화하기 위해서 주입된 것이다. 이런 사고방식은 선악적인 사고를 유지하고 있는 사람에게는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는 사상일 것이다. 이 점에 있어 이스라엘도 마찬가지이다.
그래서 그 뒤로 이스라엘 민족의 역사는 90% 이상이 남의 나라의 침략과 압제를 받는 종족으로 전락하고 만다. 이스라엘 주변에 있는 나라가 이스라엘 보다 덜 악해서 이스라엘을 침략케 하는 것이 아니다.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에 의해서 자기 백성을 치게 하시는 것이다.
그것은 그 어떤 경우에도 인간은 하나님의 율법을 지켜낼 능력이 없음을 보이기 위함이다. 자신의 행함으로 의를 행할 수 있는 자질이 아예 인간 속에는 들어있지 않다는 것을 분명히 드러내기 위한 조치들이다.
하나님의 군대는 무엇과 싸워야 하느냐 하면 인간들의 근본적인 행함의 가치와 싸워야 하는 것이다. 이스라엘은 오직 아브라함에게 내려준 언약에 의해서만 등장될 나라이다. 이 등장에 인간의 행함은 철저하게 배제되는 것이다. 인간은 행함을 앞장세우기 이전부터 근본적으로 죄인들이다. 이미 인간에게는 선악 체계로 무장되어 있기에 선과 악에 대한 구별이 서 있는 것이다.
인간들은 악보다 선을 좋아하게 된다. 그런데 문제는 바로 여기서 시작이 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일방적으로 아브라함에 내려준 그 계획에 인간의 행함이 나름대로 관여하는 것이다.
인간은 아예 선악적 사고체계를 가지면 아니 되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이미 알게 된 선악의 체계를 가지고 나름대로 신과 관계를 정립하고자 하는 것이다. 선을 장려하고 악을 핍박하므로 서 결국 악을 제거할 수 있다는 자체 내의 가능성을 포기하지 않는 것이다.
이것은 히브리인이든 이방민족이든 가리지 않고 다들 담고 있는 바이다. 오늘날 우리들에게도 예외가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 즉 '여호와의 군대'라고 규정한 그 집단을 통해서 인간의 내부에 뭐가 들어있는 지를 까발리는 작업에 나서는 것이다. 바로 이 작업에 주변에서 참여하는 민족들이 이방민족이다.
이때부터 이스라엘 민족을 통해서 기존의 선악적인 체계가 아닌 다른 체계에 의한 전쟁이 개시되기 시작한다. 이스라엘 민족이 자체적으로 가진 힘으로 적들과 싸우면 이스라엘은 백전백패 한다.
그러나 이스라엘 민족이 전에 아브라함을 통해 주셨던 그 약속을 신봉 하면서 자신의 힘과 의와 행함을 부정하면 이상스러운 기적들이 일어나면서 이방민족은 맥없이 무너지고 마는 것이다. 이것은 바로 인간의 행함이 아브라함 언약 성취에 무용지물인 것을 '여호와의 군대'인 이스라엘을 통해서 나타내고자 하시는 것이다.
성도들도 역시 '여호와의 군대'이다. 싸워야 될 적이 있다. 그것은 바로 '행함으로 구원받고자 하는 자'들과 싸워야 한다. 인간은 종교적이나 신앙적으로 조금이라도 자신에게 남보다 나은 것이 있다고 간주하면 그것을 놓치지 않고 '자기 의로움'의 항목에다 쌓아둔다. 그러나 바로 그것이 일방적인 약속된 사랑을 모독하는 것임을 놓치지 말아야 한다. 이런 회개와 회개를 연속하면서 살게 되는 자가 바로 성도이다.
12:43-51
하나님께서는 이 유월절의 분위기 속에는 다른 마음 가짐을 요구하신다. 인간들은 교회에 나와서 하나님을 향하는 뭔가 얻고자 하는 마음을 지닌다. 유월절이 되었든 무엇이 되었던 자신이 행함으로서 뭔가 챙길 것이 생길 것이라는 기대를 갖고 있다면 이것은 참으로 복음의 근본을 깨는 것이다.
사람을 좋게 하는 하나님의 일은 없다. 하나님은 자신이 쳐놓은 그물에 백성이 걸려드는 그것으로만 즐거워하시고 기뻐하신다. 뭔가 얻고자 하는 마음이 아니라 같이 '풍덩' 뛰어들겠다는 마음으로만 유월절 속으로 들어가야 한다.
'하나님 믿기'란 취미 생활로 전환되어서는 아니 된다. 그래서 아무나 할 수 없고 오직 초청 받은 자만이 들어가게 된다. 세상 사람들과의 전혀 다른 방식의 삶이다. 애굽 인들의 장자들은 다 죽었지만 이스라엘 장자들은 살아남았다 라는 것이 세상 적으로 봐서 큰 승리를 얻은 것으로 여겨야 한다.
"내 자식 안 죽었다"가 최종적인 승리가 아니다. 죽은 장자나 안 죽은 장자나 유월절의 의미를 모르면 다같이 기왕에 죽은 자식일 뿐이다. 그렇다면 유월절에 들어가는 원칙은 '할례'라고 되어 있다. 애굽에서 탈출해 나오는 60만 여명의 무리 속에는 '잡족' 들도 있었다는 점을 놓치면 안된다. 본토인들만 구원되는 것이 아니라 잡족, 즉 이방인들도 타국인들도 유월절에 참여할 수 있다는 점에 눈여겨봐야 한다.
이것은 혈통적인 원리와 다른 원리가 그 유월절 속에 들어 있다는 바를 의미한다. 아무리 히브리인들이라 할지라도 할례 받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백성과 상관없는 관계에 놓이게 된다.
그 유월절 원칙이란 할례를 통해서만 설명할 수 있지 달리 설명이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유월절 안에는 '내 것 의식' 때문에 희생당하심이 들어 계시기 때문이다. 따라서 유월절 안에는 '내 것 의식'을 정죄하고 그것을 용납 못할 요소로서의 유월절이다.
할례가 유월절과 연관이 있다는 말은 할례나 유월절이나 같은 취지 하에서 벌어진다는 것을 뜻한다. 그 취지는 48절에 할례 받지 못한 자는 유월절의 어린양의 고기를 먹을 자격도 못되며, 어린양의 피조차도 그들을 지켜내지 못하는 것이다. 유월절 전체 일의 진행이 할례언약의 성취와 관련되어지기 때문에 그렇다.
할례란 인간의 신체에 칼을 대는 행위로 보여진다. 사람 몸에서 피가 나온다는 것은 곧 죽음을 뜻한다. 그 인간의 자태로는 하나님으로부터 죽음을 당할 뿐이라는 것이다. 살길은 그 몸에 언약의 흔적을 지니는 것이다. 마치 어린양이 피를 흘려야 하는 것처럼 그 어린양의 고기를 먹는 구원될 자도 피를 흘려야 한다. 이렇게 해서 할례 받은 자는 어린양의 고난에 동참하게 된다.
그렇다면 어린양은 할례 받은 자의 표상으로 등장될 것이 당연하다. 어린양은 죽음의 심판 주 앞에 어떤 운명을 맞이하느냐 하는 그것이 곧 할례 받은 자는 하나님 앞에서 어떤 운명이 되느냐와 같은 이야기가 된다.
할례를 받았다는 말은 이미 육신으로 태어난 자아는 더 이상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을 뜻한다. 육신이 벗겨저 사라져 버렸다. 따라서 그 사라져버린 육신을 또다시 찾을 수는 없는 일이다.
그런데 육신의 본능은 그냥 무작정 살기 위해서 사는 것을 뜻한다. 이제 할례 받은 자에게는 그런 인생관이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 이미 자신이 죽었다는 흔적을 지니고 있는 자가 자기 본성과 합치되지 않는 태도를 취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육신이 아니라면 어떤 식으로 살게 되는가 하면 마치 어린양과 같은 인생을 살게 된다. 자기 몸에 새겨진 언약의 성취를 위해 살게 된다. 하나님의 약속을 증거하면서 살게 된다. 그 하나님의 약속이 바로 생명의 원천에 관한 것이다.
진정한 생명이란 오로지 하나님의 언약 안에서만 나옴을 증거 하는 인생을 살게 된다. 골로새서 2:11-15에 보면, '육체의 무할례로 죽었던 너희'라는 말이 나온다. 즉 언약이 담겨 있지 아니하면 그 육신은 하나님 보시기에 이왕 죽어있기에 이런 인간을 살려는 것은 그 인간은 새 언약 속으로 들어가게 하는 것이다.
새 언약에는 새로운 차원의 할례언약이 대기해 있기 때문이다. 그 대기해 있는 새 언약 속으로 들어가게 되면 예수님과 더불어 다시 살게 되는데 그 '다시 산다는 것' 그것이 바로 율법과는 상관없는 존재가 된다는 말이다.
사람이 죽는다는 것은 병들고 나약해서 목숨이 끊어지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무서운 법 앞에서 저주의 대상이 된다는 말이다. 율법은 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