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하 1: 1-10 (다윗이 보는 세계관)
삼하 1: 1-10 (다윗이 보는 세계관)
이름 : 우리교회(IP:220.81.41.193)
본문 : 사무엘하 1장 1-10절
제목 : 다윗이 보는 세계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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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교회
09-10-18 10:57
http://media.woorich.net/성경강해/사무엘하-2009/01강-삼하1장1-10(다윗이보는세계관)-2sa091018.hwp
이근호
09-10-18 15:41
다윗이 보는 세상관
2009년 10월 18일 본문 말씀: 사무엘하 1: 1-10
(삼하 1:1, 개정) 『사울이 죽은 후에 다윗이 아말렉 사람을 쳐죽이고 돌아와 다윗이 시글락에서 이틀을 머물더니』
(삼하 1:2, 개정) 『사흘째 되는 날에 한 사람이 사울의 진영에서 나왔는데 그의 옷은 찢어졌고 머리에는 흙이 있더라 그가 다윗에게 나아와 땅에 엎드려 절하매』
(삼하 1:3, 개정) 『다윗이 그에게 묻되 너는 어디서 왔느냐 하니 대답하되 이스라엘 진영에서 도망하여 왔나이다 하니라』
(삼하 1:4, 개정) 『다윗이 그에게 이르되 일이 어떻게 되었느냐 너는 내게 말하라 그가 대답하되 군사가 전쟁 중에 도망하기도 하였고 무리 가운데에 엎드러져 죽은 자도 많았고 사울과 그의 아들 요나단도 죽었나이다 하는지라』
(삼하 1:5, 개정) 『다윗이 자기에게 알리는 청년에게 묻되 사울과 그의 아들 요나단이 죽은 줄을 네가 어떻게 아느냐』
(삼하 1:6, 개정) 『그에게 알리는 청년이 이르되 내가 우연히 길보아 산에 올라가 보니 사울이 자기 창에 기대고 병거와 기병은 그를 급히 따르는데』
(삼하 1:7, 개정) 『사울이 뒤로 돌아 나를 보고 부르시기로 내가 대답하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한즉』
(삼하 1:8, 개정) 『내게 이르되 너는 누구냐 하시기로 내가 그에게 대답하되 나는 아말렉 사람이니이다 한즉』
(삼하 1:9, 개정) 『또 내게 이르시되 내 목숨이 아직 내게 완전히 있으므로 내가 고통 중에 있나니 청하건대 너는 내 곁에 서서 나를 죽이라 하시기로』
(삼하 1:10, 개정) 『그가 엎드러진 후에는 살 수 없는 줄을 내가 알고 그의 곁에 서서 죽이고 그의 머리에 있는 왕관과 팔에 있는 고리를 벗겨서 내 주께로 가져왔나이다 하니라』
오늘 본문에 두 가지 죽음이 나옵니다. 하나는 ‘기름부음을 받은 자’의 죽음과 다른 하나는 ‘할례없는 족속의 죽음’입니다. 사울왕의 죽음은 ‘기름부음의 받은 자’요, 아마렉 소년의 죽음은 ‘죽어야 될 자의 죽음’입니다. 즉 이 세상에는 죽지 말아야 할 자의 죽음이 있고 죽어 마땅한 자의 죽음으로 두 종류의 죽음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처럼 ‘죽음’을 통해서 세상을 분별하시고 보십니다. 즉 “너희들이 얼마나 잘 났느냐”가 아니라 “너의 죽음은 어떤 성질의 죽음이냐”를 물으시는 겁니다. 사람이란 모두가 죽지 않기 위해 환장을 합니다. 매일같이 자신의 양심까지 속여가면서 사는 이유가 다 ‘조속히 안 죽기 위함’입니다.
하지만 죽음의 질을 결정하는 것은 인간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만드십니다. 마태복음 8:21-22에 보면, “제자 중에 또 하나가 가로되 주여 나로 먼저 가서 부친을 장사하게 허락하옵소서 예수께서 가라사대 죽은 자들로 저희 죽은 자를 장사하게 하고 너는 나를 좇으라 하시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우리 인간들이 생각하는 죽음이란, 숨이 끊어진 자를 두고 말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렇게 보지 않습니다. ‘숨이 끊어지지 않더라도’ 죽은 자로 봅니다. 정말 산 자가 되고 싶다면 예수님을 따라가야 한다는 겁니다. 즉 예수님을 따르지 아니하면 같이 죽은 자로 분류된다는 겁니다.
여기서 우리는 왜 인간을 두고 하나님은 ‘죽은 자’로 간주하시는 지를 알아야 합니다. 사람이란 하나님의 도움으로 살아갑니다. 자기 힘으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참새가 하늘에서 떨어지는 것도 사람들의 힘도 아니요 참새 그것들의 의지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이 있어서 떨어지는 겁니다. 하물며 사람도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하지만 인간들은 자기 힘으로 생명이 유지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햇빛 주시고, 공기 주시고, 심장을 뛰게하시는 분이 하나님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 감사하거나 고마워하지를 않고 도리어 하나님을 심하게 미워합니다. 하나님을 싫어합니다. 교회마저 그러합니다. 오로지 자신의 영광과 자신의 노고를 칭찬하고 찬양해주기를 요청하는 교회가 되고 말았습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이스라엘도 같은 입장입니다. 하나님과 함께 있음에 자부심을 갖고서 망하지 않고 패배하지 않는다고 장담했던 이스라엘이 왕도 죽고 패배하므로서 도대체 하나님이 함께 계심이 무슨 뜻인지 무색케 하는 일이 벌어지고 말았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의 기름부음의 자리’에 대해서 백성들에게 그 확고한 위치성을 분명히 알려줍니다.
누구든지 이 ‘하나님께 기름부음의 자리’를 훼손하는 자는 필히 저주받아도 마땅하다는 점을 확실하게 말해주는 조치를 취합니다. ‘기름부음’을 가볍게 여겨서는 아니된다는 겁니다. 이스라엘을 이스라엘답게 살려주는 것은 다른 민족과는 달리 이 ‘기름부음 받은 자’의 존재 때문입니다.
이 자리로 인하여 이스라엘은 결코 ‘할례없는 민족’에게 패배당해서는 아니되는 겁니다. 그런데 이스라엘도 패배하고 왕과 그 왕자가 전사한 것에 대해서 다윗은 대단히 비통해합니다. 그래서 이 사실이 ‘할례없는 민족’들에게 알려지기를 않기를 기도합니다. 사무엘하 1:20에 보면, “이 일을 가드에도 고하지 말며 아스글론 거리에도 전파하지 말지어다 블레셋 사람의 딸들이 즐거워할까, 할례받지 못한 자의 딸들이 개가를 부를까 염려로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 할례 받지 못한 자들에게 이스라엘이 패배당하도록 하나님께서 조치하신 이 연유가 무엇입니까? 우리는 여기서 ‘하나님과 함께 하심’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제대로 알셔야 합니다. 로마서 5:6-10에 보면,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치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
의인을 위하여 죽는 자가 쉽지 않고 선인을 위하여 용감히 죽는 자가 혹 있거니와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그러면 이제 우리가 그 피를 인하여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더욱 그로 말미암아 진노하심에서 구원을 얻을 것이니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목되었은즉 화목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으심을 인하여 구원을 얻을 것이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여기에 보면, ‘경건치 않는자’, ‘죄인된 자’, ‘원수된 자’, 그리고 ‘진노하심’이라는 단어가 나옵니다. 즉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에게 찾아오게 되면, 자신이 이러한 용어에 해당되는 사람인 것을 알게 됩니다. 만약에 하나님을 멀찍이 바라보게 되면 졸지에 자신은 경건한 자가 되고 남보다 덜 죄인이 되는 자요, 원수가 아니라 존경받고 사랑받는 관계요, 진노하심에서는 해당이 안된다고 여길 것입니다.
하지만 막상 십자가의 피가 다가오면 올수록, 심지어 그 십자가가 우리 안에 깊이 박히면 박힐수록 우리 자신이 경건치 못하고 죄인되고 원수되고 그리고 진노하심을 받아 마땅한 자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즉 ‘할례받지 못한 자’들과 우리의 본성상 차이가 나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 이유는 우리 자신을 자생적으로 ‘죽은 자’로 여기지 아니하고 ‘산 자’로 여긴다는 겁니다. 살아있는 나를 더 산 자가 여기기 때문에 자신의 죽음을 받아들이지 않게 됩니다. 에스겔 37장에 보면, 에스겔 선지자가 받은 계시가 나옵니다. 그것은 바로 어느 골짜기에 해골이 가득 차 있는 계시입니다.
그 당시에 이스라엘은 자신의 죄로 인하여 바벨론 나라에 포로잡혀 가 있는 처량한 신세입니다. 왜 자신들이 남의 땅에서 고생하는지 그 이유를 모릅니다. 에스겔은 분명히 언급했습니다. “너희들이 우상을 숭배한 죄를 지었다”고 말입니다. 하지만 그들은 그 말이 무슨 말인지를 모릅니다.
하나님께서 해골 무더기로 데려간 것은 바로 그 해골 무더기가 곧 인간 무더기인 것입니다. 인간들이 자신을 볼 때는 마치 산 자로 여겨지겠지만 하나님 보시기에 바짝 마른 해골에 불과합니다. 하나님은 선지자에게 묻습니다. “이 해골이 어떻게 살겠는가?” 즉 “이 해골은 지금 죽어있다”는 말입니다.
성령이 임하니까 그들은 사람이 되어서 비로소 하나님의 군대가 되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이스라엘의 참모습입니다. 이를 때 하나님의 ‘기름부음’의 가치가 빛이 나는 겁니다. 즉 자신을 죽은 자로 보는 자만이 하나님이 함께 있음을 증거하는, 하나님께서 시키시는 대로 사는 참 성도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자신을 산 자로 보지 말고 죽은 자로 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이근호
10-12-08 22:07
001강-삼하1장1-10(다윗이보는세계관)-2sa091018-(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 사무엘하 1장 1절에서 10절까지입니다. 구약성경 463페이지입니다.
사무엘하 1:1-10
사울의 죽은 후라 다윗이 아말렉 사람을 도륙하고 돌아와서 시글락에서 이틀을 유하더니 제 삼일에 한 사람이 사울의 진에서 나왔는데 그 옷은 찢어졌고 머리에는 흙이 있더라 저가 다윗에게 나아와 땅에 엎드려 절하매 다윗이 저에게 묻되 너는 어디서 왔느냐 대답하되 이스라엘 진에서 도망하여 왔나이다 다윗이 가로되 일이 어떻게 되었느뇨 너는 내게 고하라 저가 대답하되 군사가 전쟁 중에서 도망하기도 하였고 무리 중에 엎드러져 죽은 자도 많았고 사울과 그 아들 요나단도 죽었나이다 다윗이 자기에게 고하는 소년에게 묻되 사울과 그 아들 요나단의 죽은 줄을 네가 어떻게 아느냐 그에게 고하는 소년이 가로되 내가 우연히 길보아산에 올라보니 사울이 자기 창을 의지하였고 병거와 기병은 저를 촉급히 따르는데 사울이 뒤로 돌이켜 나를 보고 부르시기로 내가 대답하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한즉 내게 이르되 너는 누구냐 하시기로 내가 대답하되 나는 아말렉 사람이니이다 한즉 또 내게 이르되 내 목숨이 아직 내게 완전히 있으므로 내가 고통에 들었나니 너는 내 곁에 서서 나를 죽이라 하시기로 저가 엎드러진 후에는 살 수 없는 줄을 내가 알고 그 곁에 서서 죽이고 그 머리에 있는 면류관과 팔에 있는 고리를 벗겨서 내 주께로 가져왔나이다“
상당히 긴 대목인데 내용은 간단해요. 사울이 죽음 직전에 목숨이 간당간당하고 있을 때 몸이 아프니까 지나가는 소년보고 ‘내가 내 힘으로 죽을힘이 없기 때문에, 니가 와서 나를 죽여 다오.’ 그래서 ‘죽였습니다.’ 라는 사실을 다윗한테 자랑삼아 이렇게 알렸던 그 대목입니다.
사무엘하 1장에 쭉 나왔습니다만, 그 뒤에 보면 다윗이 그 소년을 칭찬하는 것이 아니고, ‘그래 너가 임금님의 아픔을 덜어줬구나.’ 이렇게 칭찬해주는 것이 아니고, ‘너가 어디 감히 하나님께서 기름 부은 왕을 너 손으로 죽이느냐.’ ‘에라 너도 죽어라.’ 해서 아말렉 소년을 죽여 버리고, 그담에 사울과 요나단이 전사한 것을 가지고 애통해 하면서 19절을 보면, 슬픔의 노래를 부르는 그 대목이 1장에 끝나게 돼 있습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두 가지의 죽음이 있습니다. 하나는 아말렉 소년의 죽음과 또 하나는 사울과 요나단의 죽음, 이 죽음을 비교해 봐야 돼요. 왜 다윗은 사울을 죽였다고 칭찬을 받아야 될 그 아말렉 소년을 도리어 죽여 버렸느냐? 그런 아말렉 소년의 죽음 하나와 사울의 죽음 하나가 같은 인간의 죽음인데, 그게 무슨 차이가 나겠는가? 이렇게 생각하겠죠.
하나님께서 성경 전체를 보게 되면, 인간이 누구냐, 인간이 무엇이냐를 이야기하는데, 살아서 행동하는 것을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니고, 꼭 그의 죽음을 가지고 이야기 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을 가지고 세상을 다시 쫙 보게 돼 있죠. 살아서 깝죽대면서 살아서 하나님께 충성봉사 했습니다. 그런 것은 하나님께서는 별로 여깁니다. 원래 죽게 돼 있어서 죽는 건데 별로에요. 다만 죽을 때, 어떤 자로서 죽었느냐, 어떤 죽음을 보여주느냐. 이 말입니다.
인간이 죽는 것은 다 마찬가지인데, 복음을 담고 죽었느냐, 복음 없이 죽었느냐를 보여주는 겁니다. 마태복음 8장 21절에 이런 말씀이 있어요. 제자 중에 한 사람이 예수님을 따라가려고 하는데, 따라가려고 했어요. 했는데 갑자기 기별을 받고 하는 말이 ‘예수님! 예수님! ’왜?‘ ’제가 열심히 따라가려 했거든요.‘ ’그러면 따라오면 되지 뭐,‘ ’방금 우리 아버지께서 돌아가셨답니다.‘ ’그러니까 아버지 장례 치르고 그담에 예수님을 따라가겠습니다.‘ 그 뒤의 말을 우리가 모른다고 칩시다. 모른다고 친다면 그것을 당연하게 그럴 수 있다 하는데, 예수님의 말씀이 상당히 엉뚱합니다. 뭐라고 하셨느냐 하면, “죽은 자들로 저희 죽은 자를 장사하게 하고 너는 나를 좇으라”
‘죽은 자들로 하여금 죽은 자를 장례 치르게 하라’ 이게 무슨 말이냐 하면, 이 말입니다. 그 제자는 목숨 떨어진 사람을 죽은 자로 보고, 헤,헤, 아직도 목숨이 붙어 있는 사람을 산자로 본 거예요. 목에 숨 못 쉬면 죽은 자요. 숨 쉬면 산자로 보는데, 예수님은 그렇게 보시지 않고, 목숨이 붙어 있더라고 내가 보기에는 죽은 자다 이 말입니다. 모든 인간이 다.
그걸 우리가, 교인들이 이걸 안 받아 들이면, 신앙생활 못하고 종교생활 하다가 결국은 죽은 자가 되가지고 지옥 갑니다. 교회 아무리 다녀도 이것이 정리가 돼야 되요. 하나님이 보시는, 예수님이 보시는 죽음과 삶의 구분을 갖고 있어야 되는데, 우리는 뭐만 갖고 있느냐 하면, 우리가 상식적으로 알고 있는, 내 목숨 늙어서 죽으면 죽는 거고, 그 전까지는 아직도 살아 있다고 우리는 것, 그걸 살았다고 주장하는 거예요.
마치 부부 사이가 좋지 않으면, 사랑이 없으면, 사실은 그건 별거 상태거든요. 그런데 남들한테는 우사스러울까 싶어서 부부로 행세합니다. 나중에 일이 벌어지면 갈라서죠. 그러면 사랑이 이미 식어버리고, 이제는 같이 산다는 것이 괴로울 정도가 된다면, 그건 같이 살아도 힘든 상태가 되죠.
얼마 전에 인간시대인가에서 (TV 잘 안 보는데..ㅎ) 보니까, 남편과의 사이가 좋았는데 남편이 사업을 하다가 부도가 났어요. 부도가 날 때 아내가 얼마나 격려를 했겠습니까? ‘여보, 내 있으니까 당신 소신껏 해라, 당신 잘못이 아니고, 당신 보증서고 도망치고 사기 친 그 인간이 나쁘지, 당신이 나쁘겠는가.’ 한 몇 개월간은 그렇게 위로를 했습니다. 그런데 그 아내가 뭐라고 머리를 굴리느냐 하면, ‘이렇게 남편을 위해서 내가 참고 견디고 위로해 주면, 하나님께서, 또는 남편을 통해서 복이 와서 옛날처럼 원상회복 되리라.’ 라는 은근히 그런 기대를 노린 거예요.
그런데 6개월이 지나고 1년이 지나도 이제는 지가 남편을 위로하는 밑천도 다 떨어졌어요. ‘힘내라 힘, 아빠, 힘내세요. 여보, 힘내세요.’ 그 말도 하기 싫어.‘ 결국은 이혼하고 하는 말이, ’ 아무리 그동안 잘 해보려고 했는데, 기본적인 경제적인 게 바탕이 안 되니까, 둘이 살기 힘들어서 고만 갈라서기로 했습니다.‘ ㅎ그러면 그동안 남편을 위로한답시고 들어부은 위로가 진정 남편을 위해서였을까요? 아닙니다. 남편이 잘 돼야 내가 잘 되지. 결국은 자기가 잘 되기 위한, 자기가 천사되기 위한, 나는 선하게 대처했음을, 나중에 이혼하는 수가 있더라도, 잘못은 내 잘못이 아니고, ’나는 이렇게 이혼 안 하려고 남편에게 용기 불어넣고 했는데, 남편이 이리 무능해가지고 어쩔 수 없었다.‘라는 자기 의, 자기 정당성. 이게 바로 인간이 살아있으면서 죽어 마땅한 죄가 이겁니다.
성경에 보면 분명히 인간이 살아 있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살아있습니다. 참새가 죽는 거요? 그거 인간 뜻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뜻이 있어야 떨어집니다. 참새가 시장에서 팔리는 거요? 그거 참새 뜻도 아니고 인간 뜻도 아니고, 하나님이 허락해야 팔리는 거예요. ‘하물며 인간일까 보냐.’ 인간이 그동안 죽는 것도 하나님의 뜻이라 이 말은, 단지 그 뜻이 아니고, 그동안 죽기 전에 살아온 것도 하나님이 살려줘서 살아왔다는 겁니다. 햇빛 줬죠. 공기 줬죠. 지난밤에 안녕 하셨죠? 심장 뛰었잖아요.ㅎ 세상에, 공짜가 아니면서 공짜로 얻어먹은 거예요.
주님께서 애써서 은혜를 주셨는데, 지금 하나님을 노골적으로 거부하고 교회를 거부하는 사람 보세요. 전부 다 지 잘나서 했다 해서 하나님께 감사하거나 영광 돌리거나 고마워할 맴(마음)이 손톱만큼도 들어있지가 않습니다.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는 거예요. 이거는 과학으로도 설명이 안 되고, 철학으로도 설명이 안 돼요. 왜, 인간들은 자기를 살게 하신 하나님을 왜 그토록 미워할 수밖에 없는가? 안에 괴물 들었어요. 괴물!!!!!
오전에도 그런 말씀 드렸습니다만, 내가 내 자유를 사용해서 하나님께 영광 돌리겠다. 라는 이 건방짐, 죄 지어놓고 죄져서 얻게 된 그 기능을 이용해서 하나님께 영광이 되겠습니가? 죄에서 하나님의 영광이 나오겠습니까? 진짜 구원 받은 사람은, 자기에게 자유 있다는 것을 생각지 못하는 ‘내 자유는 죄만 짓습니다.’ 세리와 창기, 오히려 그들이 세리와 창기 이 사람들이 ‘주여 주의 처분대로 행하옵소서.’ ‘다윗의 자손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다른 사람은 그럴 거예요. ‘ 니 자유 있잖아, 니 자유로 영광 돌려봐라.’ 구원 받은 세리와 창기가 뭐라 하겠습니까? ‘내 자유?? 내는 입만 띄면 죈데, 무슨 영광이야? 입만 뛰면 내 잘났다 하는데, 입만 띄면 내 의가 누적이 되고 축적이 되는데, 무슨 내 힘으로 구원이 돼?? 주여, 다윗의 자손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저 이미 죽은 놈입니다.’
오전에 주일학교 설교에 그런 이야기가 나왔었어요. 포로 잡혀간 이스라엘 사람들이 거기서 학대를 받고 있는 겁니다. 그때 에스겔이 나타나서 이야기 합니다. ‘너희들 죄 때문에, 너희들이 죄인인줄 모르기 때문에 벌 받고 있다.’ 그들은 포로 잡혀 가면서도 영문을 모르죠. 하나님께서 에스겔을 어느 골짜기에(그발 강가에서 환상을 주시는데) 데려 갑니다. 뼈다귀가 가득 차 있습니다. 해골만 차 있어요. 그 뭔 뜻이겠습니까? 그 해골이 자기가 죄 지은 것도 모르고 있는 보통 인간들, 인간들하고 해골하고 똑같은 거예요.
자기가 이렇게 성형하고 보톡스 하고 하니까 자기가 해골 아닌 줄 알죠.ㅎ 뭐 젊다 해서 허벅지 자랑하고 피부 좋은 거 자랑해봐야, 그러면 자기가 해골 아닌 줄 알죠. 예수님 보시기에는 죽은 자예요. 죽은 자로 죽은 자를 장사하라 이 말이죠. 하나님이 주신 은혜를 전부 다 하나님께 욕을 돌리는 게 죽어가고 있는 이유예요. 이 해골 어떻게 하겠는가? 기가 차죠. 바짝 마른 해골인데... ‘모릅니다. 주께서 알아서 하이소.’ ‘그래 알아서 할게,‘ 그래서 하나님의 성신이 임하고 성령이 임하고 말씀이 임하니까, 그들이 힘줄이 덮이고 하더니 하나님의 군대가 됐다고 했습니다. 이 사람들은 시키면 시키는 대로 하는 거예요. 왜? 원래, 처음부터 해골이니까, 해골인데, 해골 위에 있는 피부 껍데기부터 전부 다 내 것이 아니니까, 심장, 장기, 모두 내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덮어주신 것이고, 하나님의 일하라고 추가해서 채워주신 거예요. 그런 안목, 그런 안목이 필요하다 말이죠. 그래서 그걸 에스겔은 ’이스라엘‘이라는 거예요.
오늘 본문에 나오는 이스라엘이 같은 이스라엘이 되는 거예요. 하나님의 군대는 하나님이 함께 있기 때문에 지는 법이 없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보면, 졌어요. 진 이유가 있어요. 진 이유는 사울이란 사람이 이스라엘의 왕이었습니다. 다른 말로 하면 ‘기름 부음 받은 자’ 하나님께서 기름을 발라버린 자. 기름 발랐다는 말은 뭐냐 하면, 하나님과 백성들 사이에 유일하게 연결이 가능한 통로란 뜻입니다.
예수님을 뭐라 하느냐 하면, 그리스도라 하죠. 그리스도가 기름 발린 자입니다. 하늘과 땅이 유일하게 내통할 수 있는 유일한 장구(파이프다. 이 말입니다. 그게 기름 부은 자예요. 근데 파이프가 날아가 버리면, 그건 더 이상 단절이죠. 그건 더 이상 이스라엘도 아니고 하나님도 없습니다. 그냥 죽은 자로서 그냥 죽은 자일뿐 이예요. 근데 문제는 그 바로 기름 부은 자가 적들, 아말렉 소년에 의해서 죽었다는 겁니다. 방금 다윗은 아말렉 전쟁을 승리하고 왔는데, 한쪽은 아말렉 전쟁에서 승리하고 왔는데, 현재 이스라엘의 왕이, 하나님의 통로가 아말렉에 의해서 잘리고 만 거예요. 그것이 사무엘하 1장20절에 보면, “이 일을 가드에도 고하지 말며 아스글론 거리에도 전파하지 말찌어다 블레셋 사람의 딸들이 즐거워할까, 할례 받지 못한 자의 딸들이 개가를 부를까 염려로다” ‘할례 받지 못한 자들이 개가를 부를까...,’
이것은 지난 시간에 설명했었죠. 할례라 하는 것은 사람이 하는 할례는 소용없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 내부에서 (오늘 아침에 이야기 한 것처럼) 예수님이 우리 속에 들어와 버리셔요. 십자가가 바깥에 있어서 믿어주는 십자가가 아니라, 그 십자가가 내 안에 내장된 것을 가지고 ‘믿음’이라 합니다. 하나님이 들어와 버리고, 예수님이 들어와 버리면, 나머지 모든 것도 더 이상 내 것이라고 할 수가 없어요. 내 안에 들어와 있는 기름 부은 분의 것이 되는 겁니다.
바로 이스라엘이 할례 받았다는 말은, 이스라엘은 사람의 것이 아니고, 이스라엘 것도 아니에요. 누구의 것이냐, 하나님의 것이라는 겁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것이 패배를 당했으니까, 세상 사람들한테 패배를 당했으니까, 이거는 너무 기가 차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너무 슬퍼서 울면서 노래한 장면이 뒤에 나옵니다. ‘하나님의 군사가 왜 죽었는가?’ 하는데, 자, 우리가 이유를 알아야죠.
하나님의 군사가 이렇게 죽었는지 그 이유를 알아야 됩니다. 로마서 5장 9~10절에 보면
“그러면 이제 우리가 그 피를 인하여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더욱 그로 말미암아 진노하심에서 구원을 얻을 것이니...” 여기에 예수님의 피를, 화목제물 피로 설명하면서 무슨 단어를 집어넣느냐 하면, 진노하심이란 단어를 집어넣습니다. 고 앞에 보면, 경건치 않은 자, 하나님의 원수 된 자, 이런 말이 있어요. 무슨 이야기를 하려고 하느냐 하면, 하나님의 피가 멀리 있을 때는, ‘야! 예수님의 피다. 내가 믿어줘야지.’하면, 자기가 의인 돼 버려요. ‘주여 얼마나 마음씨가 고운지, 믿음이 좋은지 예수님의 피를 믿을 수 있습니다.’ 졸지에 자기가 흐뭇하고 대견스러운 존재가 돼 버려요.
그런데 멀리 있던 예수님의 피가 가까이 오면 올수록 나는 졸지에 뭐가 되느냐 하면, 하나님의 원수 된 자가 되고, 하나님이 진노하심을 받아 마땅한 자가 되고, 전혀 경건함이 없는 경건치 않은 자가 되는 겁니다. 여기서 도망치면 안돼요. 실제로 도망치게 해 주지도 않죠. 그러니까 쉽게 말하면, 사극에서 어떤 일지매가 표창을 딱 던지면 표창이 획, 획 날아오면, 표창이 꽂히면 날아온다 싶으면 도망치면 안돼요. 그냥 표창에 꽂혀버려야 돼요. 하나님의 진노하심과 하나님이 분노하심과 경건치 않음과 하나님의 원수 된 자가 창이 그냥 꽂혀버려야 돼요. 꽂힐 때 비로소 하나님의 진노하심에서 하나님이 사랑받음으로 내부적으로 여기서 확산이 되죠.
머리 아플 때, 요새는 그런 약이 안 나오는데, 옛날에 그런 약 선전했어요. 머리 아플 때는 동그란 약을 물에 타시면 거기서 발포 산이라 해서 픽, 기체로 변하면 녹아서 마시면 머리가 말끔해지죠. 하나의 고체 된 딱딱한 약 알이 우리 내부에 와서 발포 산처럼 확~~ 확산돼야 되요. 온 피의 효력이 우리 몸 전체에 퍼져 버리면, 우리는 무엇을 알 수 있느냐 하면, 진노 받아야 될 당사자가 나며, 우리는 경건한 것이 없으며, 우리는 하나님의 원수 된 자라는 것을, 그것이 퍼지면서 더불어 겸하여 알 수가 있는 겁니다. 우리 내부에서, 기억나는 거 없어요? 기억나는 게 없다는 얼굴로...?? ㅎ 오죽했으면 주께서 피를 흘렸겠느냐 말이죠. 예수의 피가 오게 되면, 주님한테 침범을 당하는 거죠.
바로 이스라엘 나라에 아말렉이 쳐들어오고, 블레셋이 쳐들어오는 것은 이스라엘이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있어서..저 놈은 얼마나 나쁜 놈인지, 경건치도 않고 원수 된 자고, 할례 받지 못한 자고, 하나님의 진노를 받아야 마땅하다.’ 라고 생각한 것이 블레셋이고 아말렉입니다. 그런데 둘이 빠방하고 머리를 박치기를 시키는 거예요. 박치기를 막상 시켜보니까, 누가 이기고 누가 지는가 하면, 자칭 하나님과 함께 계시다는 이스라엘이 지고, 누가 개가(승리)를 부르는가 하면, 하나님과 함께 있지 않다는 아말렉과 블레셋이 승리해요. 하나님이 일부러 그렇게 하세요.
대학교 때 선교단체 다니다가 취직해서 ‘하나님, 이제는 하나님의 은혜로 직장을 주셨기 때문에,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직장생활 하겠습니다. 꼭 직장에서도 성경보고 기도하겠습니다.’ 청년들이 다짐을 하죠. 해 보세요. 되는가? 직장이 그걸 용납 하는가. 용납 정도가 아닙니다. 오늘 총 직원은 업무 끝나고 술집에 갑니다.ㅎ 그담에 2차 갑니다. 거기 뭐 예수 믿기 때문에, 수요 예배 참석해야 돼서... 안돼요. 왜 안 되느냐 하면, 거기에 참석해 줘야 업무할 때 갖고 있던 그 정보가 그 술자리에서 실질적인 정보가 그 자리에서 알려주거든요. 서로 손발이 맞는다 할까요. 직원들끼리, 착착착착 돌아가는 거예요. 하나의 팀이 구성되면, 그 프로젝트를 달성하려면, 몸과 마음과 뜻과 정성을 다하여 주문을 따낸 프로젝트를 위해서 교회고 하나님이고 예수고 다 잊어버리고, 심지어 가정도 잊어버리고 몸과 마음과 뜻과 정성을 다하여 그걸 이뤄줘야, 그 다음에 그걸 주문했던 소비자가 만족해서 또 다시 주문이 들어와서 그래서 월급이 나오고 돈 받고 갈라먹기 해서 처자식 먹고 사는 거예요. 제가 그런 글 썼어요.
만약에 내가 어떤 일을 하는데 있어서 손발이 안 맞고 내 혼자 돌아가는 일을 몰라버리면, 교회 안 다니는 다른 직원들이 힘들게 되고, 그들이 힘들게 되면, 그 직원들이 가족들이 밥 먹고 사는 데 위험을 느끼는 거예요. ‘우리 회사에 도라이 하나 왔는데, 예수밖에 몰라. 그 놈 때문에 일이 빵꾸 나서 취소돼서 요번 프로젝트 20억짜린데 그거 날라 가서 보너스 날라 가게 됐다.’ 하고 얼마나 욕하겠느냐 말입니다.
그럴 때 안에 기름부음, 성령이 없는 사람 같으면, ‘주님, 제가 열심히 신앙생활 해 볼라고 해 볼라고 해 볼라고 열심히 했는데, 하나님이 안 받쳐주네. 하나님이!!! 교회도 잘 다니고 직장생활 잘 해서 월급 받아서 십일조 하려 했는데, 십일조 할 직장마저 잘릴 입장이니, 십일조를 위해 당분간 교회 다니는 거 포기해야겠습니다.’ 목사님, 십일조 좋아하데요. 목사님 좋아하는 거 하고 교회는 당분간 못 나오겠습니다. 돈 내는 날 한 달에 한 번씩만 나올게요.‘ㅎ 이 소리 듣고 고개 끄덕이는 사람 많습니다.
이게 바로 경건치 않은 세상, 진노를 받아야 되는 세상, 그리고 하나님의 원수 된 세상에 우리를 던져 놓는 이유가 거기 있습니다. ‘뭐 하나님이 함께 있어?ㅎ 우리가 하나님을 붙잡을 수 있는 게 아닙니다. 우리는 붙잡으려고 애는 쓰는데, 그게 한계에 부딪혀요. 결국은 ’아이고, 도저히 안 되겠다. 신앙생활 못 하겠다. 둘을 하려니 둘 다 다 안 되겠는걸, 하나라도 하고 나중에 늙어서 할 일 없을 때, 그때나 교회 잘 다니지. 이렇게 젊은 날에는 교회 다니는 걸 포기를 하죠. 그건 여자뿐만 아니고 남자도 마찬가지입니다.
안 믿는 집에 가서 모범을 보여서 ‘기도만 해라, 주여, 저는 시집가는 게 아니고 선교사 임무를 띠고 삽니다.’ 말로는 이렇게 하죠. 선교사 같은 소리 하고 있네, 6개월만 지나보면, 시어머니 눈치는 핑계고, 나중에 애 때문에 교회 안 나옵니다. 지 애 유치원 운동회 있다고..ㅎ 애들 누가누가 잘하나 녹화 있다고, 피아노 경연대회 있다고 교회 안 나오죠.
그게 뭐냐 하면, 바로 하나님의 함께 있다는 말은 반드시 하나님과 나 사이에 내 쪽에서 건너갈 수 없는, 아무리 종교적 열심을 내도 건너갈 수 없는, 마치 천국과 지옥처럼, 천국과 지옥의 계곡처럼, 그 계곡이 우리 안에 있었던 거예요. 그 계곡을 우리 쪽에서 건너가는 것이 아니고, 주님께서 피를 담고 저쪽에서 건너오시는 겁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은 망해야 되고 사울 왕은 죽어야 되지만, 사울 왕이 갖고 있었던 기름부음의 자리는 그담에 다윗이 하나님에 의해서 그 자리에 들어가게 되는 거예요. 사울은 죽어도 하나님이 함께 있음은 죽지 않았다. 왜? 이스라엘 왕이 죽음으로 말미암아 그동안 너희들이 생각했던 이스라엘은 이스라엘이 아니었다는 겁니다.
그거는 내 좋아라고, 내 신앙생활 편하려고 일방적으로 상상해 낸 조작해 낸 하나님이지, 진짜 하나님은 내가 실패할 때마다 찾아오시고, 내가 경건치 않을 때마다 다시 한 번 찾아오셔서, 예수님의 피로 말미암아 니가 구원 받았다는 것을, 이 은혜를 잊지 마, 니는 껍데기야, 니는 해골이야. 니는 이미 죽은 자야. 죽은 자를 살리는 것은 너가 아니야. 내가 너와 함께 동행 하기 때문에 그렇다는 것을 알려 주는 겁니다. 그럴 때 그 사람은 어디 가서 신앙생활 잘했다고 자랑하는 것이 아니고, 오늘도 주님께서 저를 떠나지 않은 덕분입니다.‘ 라는 주님의 동행하심을 증거 하죠. 그것이 임마누엘, 하나님과 함께 있는 사람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아무리 사울은 실패했지만, 이 다윗은 결코 실패하는 법이 없다. 해서 아말렉 소년을 죽여 버립니다. ‘너희들이 하나님 없는 백성이 이스라엘을 침범하다니, 용서가 안 되는 거예요. 하지만 그동안 기름 부은 역할을 했던 사람의 죽음에 대해서는 애도합니다. 그 이유가 뭐냐 하면, 바로 이스라엘은 이렇게 기름 부은 자리를 중요시한다는, 대단히 소중히 여긴다는 것을, 백성들에게 알리기 위해서 다윗은 그렇게 한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제 힘으로 하늘나라에 건너갈 수 있는 그런 여력과 힘이 없다는 것을 저희들이 날이 갈수록 깨닫게 하옵소서. 평생을 신앙생활 하지만 그 신앙생활 한 걸로 그걸 근거로 구원되는 것이 아니라, 주께서 용서하심으로 구원된다는 사실을 늘 잊지 않게 하시고, 앞으로 세상에 나오더라도 주님의 용서하심만 자랑하면서 무슨 일을 겁 없이 두려움 없이 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