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애굽기 9장 - 10장 주석
출애굽기 9장 - 10장 주석
이름 : 이진용(IP:222.99.120.158)
9: 1- 6
다섯 번째 재앙부터 본격적으로 '죽음'이라는 단어가 붙게 된다. 죽음이란, 그 앞서서 하나님의 말씀이 있기에 그 결과로 인해 주어지는 현상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앞서 있는 하나님의 말씀을 거부하고 그 말씀의 권능을 인정하지 않기에 결국 자신이 왜 죽는지도 모르는 채 죽어가고 있는 입장이다.
선악과가 먼저 있기에 비로소, 인간 세계에 '죽음'이라는 단어가 의미를 가지게 되었다. 만약 선악과 나무를 심지 않았다면, 인간에게 죽음이란 사실도 주어지지 않는 것이다. 죽음이냐 생명이냐 하는 것은 인간 스스로 관리해서 선택할 문제가 아니라 선행되어 있는 말씀에 주목해야 한다는 말이다.
가축의 죽음도 마찬가지이다. 왜 난데없이 가축들이 죽어 쓸어지는가? 그 선행해서, "내 백성을 붙잡아두지 말고 보내라"라는 하나님의 말씀이 계시기에 필히 나타날 수 밖에 없는 현상이다.
그러나 인간들은 자기에게 일어나는 모든 현상은 자기에게 귀속되어 있는 현상으로 간주해서 어쨌든지 자기 선에서 처리하려고 한다. 누가복음 12:13-21에는 두 종류의 말씀이 연이어 나온다. 이 두 가지 이야기의 공통점은, 모두 다 생명이라는 것이 당연히 주어지는 양으로 오해하고 있다는 것이다. 일단 살아있는 것은 마땅하고, 이왕 살아있는 것 자신의 소원대로 해달라고 예수님에게 찾아온 자가 있었다.
그는 형이 독차지한 부모의 유산에 대해서 억울한 마음을 가지고 온 것이다. 사실 세상적으로 보면 참으로 억울한 일이다. 완전히 형에게 다 빼앗긴 셈이 된다. 그렇다면 그 억울함을 당한 그 동생의 생명은 원래 동생 것인가?
예수님은 여기서 이런 말씀을 하신다. "삼가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한데 있지 아니하니라". 도대체 탐심의 한계가 어디까지인가? 마땅히 자기에게 돌아올 돈을 도로 찾겠다는 것도 탐심에 해당된다는 말이 된다.
그러나 마땅히 돌아올 돈을 챙길 것이 아니라 마땅히 자기 것이 아닌 목숨에 대해서는 마땅히 자기 것으로 알고 있는 그 심보가 바로 탐심의 시발인 것이다. 생명이란 돈처럼 "내가 소유하겠다"고 해서 자기 소유가 되는 그런 것이 아님을 동생은 제대로 알아야 했다. 그런 것도 모르고 동생은 자기 소유될 것에만 집착을 보인 것이다.
두 번째 사람도 마찬가지이다. 이 사람이 가진 탐심은 다른 사람과의 관계가 아니라 혼자 있을 경우에 생긴 탐심이다. 사람이 혼자 산다고 해서 죄 안 짓는 것이 아님을 예수님은 똑똑하게 보여주고 계신다. 이 부자는 자기영혼이 자기 소유인줄로 안다.
인간의 목숨이 자기가 만들어 집어 넣은 것이 분명히 아님에도 불구하고 마치 자연적으로 원래부터 자기 것 인양 자기가 관리하겠다고 나서고 있는 것이다. 그럴 때 하나님은 그 인생의 본색을 드러내시는 것이다.
오늘 밤 네 영혼을 가져가면 이 많은 재산이 다 누구의 것이 되겠느냐"고 하신다. 인간들이 낮에는 끊임없이 자기 소유의식으로 완전 무장하더라도 밤이 되면 다 소용없다. 깊은 잠이 들면 더 이상 자기 몸은 자기 것이 못 된다. 원래 주인 되시는 하나님께서 그 영혼을 데려가 버리면 결국 자신은 이 땅에서 사라져 버린 존재가 되었다.
사실상 모든 인간은 이미 죽어 있다. 그 영혼을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없다는 입장에서 자신은 더 이상 자기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아는 자신의 몸에 종속되어 있다고 봐야 한다. 인간이란 자기에게 얹혀사는 신세이다. 자기 몸이 사라지면 자아도 사라지는 것이다. 물론 이 땅에서 말이다.
그렇다면 인간이란 도무지 나의 것이라고 할 것이 없는 입장이다. 하나님은 모세를 통해서 애굽과 히브리인들에게 죽음이 어디서 오며 어떻게 오는 가를 알려주신다. 죽음이란 여호와 하나님부터 온다. 다른 권력에서는 오지 않는다.
욥기에 보면, 악마가 욥의 신앙을 시험하겠다고 나설 때,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을 허락하되 욥의 생명만은 건드리지 못하게 하시는 장면이 나온다. 마태복음 10:29-31에 봐도, "참새 두 마리가 한 앗사리온에 팔리는 것이 아니냐 그러나 너희 아버지께서 허락지 아니하시면 그 하나라도 땅에 떨어지지 아니하리라 너희에게는 머리털까지 다 세신바 되었나니 두려워하지 말라 너희는 많은 참새보다 귀하니라"라고 되어 있다.
마귀는 이 사실을 왜곡시켜서 마치 죽음의 권세를 자신이 갖고 있는 것처럼 인간에게 겁을 준다. 인간들은 그것도 모르고 실제로 죽음의 권세를 지니신 분보다는 세상 권력에 아부하기에 급급하다. 바로 그런 류의 사람들이 애굽 사람들이요, 또한 히브리인들이다.
모세는 이미 하나님으로부터 어떤 차원에서 죽음이 오면, 어떤 차원에서 죽음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인간은 하나님 만남, 그 자체로 이미 죽음이다. 하나님 보고 살 자가 없다. 따라서 인간은 살았다 하지만 인간들끼리는 마치 산 사람들처럼 행세할런지 모르지만 일단 하나님 심판대에 선다면 이미 죽은 자임이 공개된다.
그런 죽은 자들에게 기죽고 겁내고 재산이나 권력을 가지고 비교 우위를 따질 필요조차 없는 것이다. 난데없이 애굽 전역에 있는 가축들에게 죽음이 찾아온 것은 순전히 하나님의 말씀이 그 전에 떨어졌기 때문이다.
죽음이란 먼저 주어진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 어떤 반응을 나타내느냐로 성립되는 것이다. 여호와의 말씀은 그냥 흐지부지 끝나지 않는다. 못 준수하는 자에게는 반드시 죽음으로 다가오는 심판의 말씀, 저주의 말씀으로 작용한다. 이런 하나님이 바로 모세를 보내신 하나님 인 것을 애굽 전역에 공표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 죽음에서 면제되는 부류도 있다. 바로 히브리인들이다. 그들의 가축은 죽음이 찾아 들지 않았다. 그것은 그들이 하나님의 백성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백성이 좋은 점은 죽음의 권세를 더 이상 그들을 덮치지 않는다는데 있다. 교회가 바로 그런 곳이다. 음부의 권세가 작용하지 못하는 집단이다.
그들에게는 생명이 부여된 것이다. 그런데 죽음이라는 것이 말씀에 불순종의 결과라면 생명이라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말씀답게 그들 안에서 성취를 보여주는 상태를 말한다. 즉 히브인들의 가축들이 안 죽고 살아 남았다고 해서 그들이 천년 만년 그 애굽 땅에서 편하게 짐승이나 기르면서 살기 위한 이 땅의 생명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물론 히브리인들이 훌륭해서 죽음에서 면제된 것이 아니고 그들이 대단한 능력을 가졌기에 생명이 찾아 든 것이 아니다. 창세기 32:30에 보면, "그러므로 야곱이 그곳 이름을 브니엘이라 하였으니 그가 이르기를 내가 하나님과 대면하여 보았으나 내 생명이 보전되었다 함이더라"라고 되어 있다.
그 어떤 인간이 하나님과 만났는데 거기서도 죽지 않고 버텨내었다는 것은 이미 그 사람은 누가 뭐해도 영생 안에서 사는 사람이다. 바로 이러한 생명은 오직 하나님의 친히 내리신 언약과 맹세와 약속 안에서만 가능하다. 하나님은 약속을 가지고 나타나시고 약속 안에서만 사람을 구원하신다. 이 약속이 믿어지는 자는 구원된 자다.
요한복음 6장에 보면, "누구든지 인자의 살과,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않고서는 생명이 없느니라"고 되어 있다. 옛날에는 선악과이지만 지금은 생명나무 되시는 예수님의 약속이다. 이 약속을 믿고 당당하게 살아야 한다. 우리들 입장만 생각하지 말고 죽음조차 이긴 그 약속을 믿게 된 것을 최고의 하늘의 선물인 것을 받아들여야 한다.
9:10-12
술객들은 우상 전문가들이며 보통 인간이 감히 해내지 못하는 비상한 능력과 지혜의 소유자들을 말한다. 인간의 지혜의 최고점에 위치에 있는 자들이라는 말이다. 인간들의 능력을 최고조로 발휘했을 때, 나타나는 성질들은 이 술객들이 다 보여주게 된다. 그런데 성경은 바로 이들에게도 어김없이 하나님의 징벌이 주어졌다는 것이다.
인간들로부터 본심들을 만족시켜 온 대표적인 집단인 술객들이 여호와 하나님으로부터 징벌을 받았다는 말은, 모든 인간들은 마땅히 하나님에게 징벌의 대상일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동안 인간들이 아무런 생각 없이 무심코, 상식적으로, 마음을 합해서, 서로 마음이 통한 채 단결심에서 벌려온 모든 일이 다 우상적인 일일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것은 참으로 중요한 일이다. 일반 사람들이 우상을 찾는 이유는, 우상을 섬기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기 자신을 제대로 섬기고 행복한 입장에 놓이게 하기 위해 우상과 더불어 그럴싸한 인간을 신의 중매자로 부축이는 것이다.
그러나 지금 여호와 하나님께서 창세기 3:15절에 의해서 전쟁 중이라는 사실이다. 여자의 후손과 악마의 후손은 반드시 세상 끝 날까지 전투를 벌려야 한다. 그것도 모르고 우상에 대해서 별 적대심을 갖고 있지 않다.
그것은 자기가 자신에 주인이라고 여기기 때문에 그렇다. 그런데 성경 전체를 보면, 하나님께서는 우상에 대해서 매우 단호하게 대처하신다. 온갖 저주란 저주는 다 동원해서 우상 섬기는 자에게 안기게 하신다.
하나님께서 히브리민족으로 하여금 심한 고생을 일부로 받게 하시는 이유는 한 분 계시는 여호와 하나님께서 월등하게 이기시는 분이라는 점을 드러내기 위해서이다. 결코 그들의 사적인 행복을 위해서 일하시는 것이 아니다.
오늘날에도 신약 성도들에게도 마찬가지다. 하나님의 자녀라는 이유 때문에 이 세상에서 살면서 심한 고생을 겪도록 하나님께서는 인도하신다. 그것은 그저 안일하게 세상 사람들처럼 자력으로 자기 인생을 살려는 그런 식이라면 그 안에서는 하나님 능력을 이용하려고만 하지, 진정으로 모든 것을 주 예수님에게 거는 일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모진 억울함과 심지어 거의 살기를 포기한 지경까지 예수님께서 일부로 이르게 하시는 이유는, 더 이상 우리 자신이 자신을 위한 인생일 수 없다는 것을 분명히 하시기 위함이다. 예수님은 마치 인간들이 기대하는 그런 '술객 같은' 주님은 결코 아님을 확실히 해두시겠다는 것이다.
인간은 원래 예수님을 사랑하지 않는다. 자기 자신만 사랑한다. 따라서 이들이 원하는 우상적 메시야는 예수님이 될 수 없다. 바로 이 점을 보이기 위해서 성도들은 굴욕의 세월을 이 땅에서 보내야 한다. 최후의 심판을 믿으면서.
이 세상에는 한 분 하나님과 한 분 주님만이 실질적으로 존재하시며 그 분의 전사가 되어 사는 것을 영광스럽게 여겨야 할 것이다.
9:22-26
하나님께서 우박 재앙을 내리시는 이유는, 여호와 앞에서 자기를 낮추지 않고 높였기에 여호와 하나님이 어떤 하나님인가를 분명히 보여주고자 우박 재앙을 내리신다는 것이다. 이 점은 대단히 중요하다.
하나님께서는 바로왕의 마음을 낮추는데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라 마음을 낮추지 않은 자에게 어떤 저주가 주어지는가를 보여주는데 목적이 있다는 것이다. 상대방의 마음 교정이 우선이 아니라 하나님의 하나님 됨을 보여주는데 목적이 있는 것이다.
이것이 14절과 16절에 잘 나와있다. "내가 이번에는 모든 재앙을 네 마음과 네 신하와 네 백성에게 내려 너로 온 천하에 나와 같은 자가 없음을 알게 하리라 ... 내가 너를 세웠음은 나의 능력을 네게 보이고 내 이름이 온 천하에 전파되게 하려 하였음이니라"
여기서 '너'라고 지칭되는 인물은 바로 왕이다. 바로 왕은 여호와 하나님으로부터 매맞는 역할을 하기 위해 세움을 입었다는 것이다. 같은 인간이라는 동지애 차원에서 볼 때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 얼마나 인간들의 분통을 살 일인지 모른다.
이런 하나님의 행위를 곱게 받아 드릴 위인은 아마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인간들은 자기 행위를 통해서 자신의 가치가 결정된다고 믿듯이 그것을 그대로 하늘에 계신 하나님에게도 건방지게 적용시키려고 한다.
따라서 인간들의 눈으로 볼 때에 하나님께서 너무 과하게 행위 하시는 걸로 느껴지기 마련이다. 그러나 이런 것이 바로 인간들의 '원초적 본능'이다. 그러나 그 어떤 경우에도 하나님은 자신의 일관성을 포기 하지 않으신다.
신약의 예수님도 마찬가지이다. 그 일관성은 '은혜 줄 자에게는 확실하게 은혜가 돌아가게 하고, 은혜가 돌아가지 않을 자에게는 은혜가 돌아가지 않도록 일을 하시는데' 있다.
하나님께서 우박을 내리시는 이유는, 애굽 나라를 망쳐버리기 위해서 이다. 인간들 생각에 자연이란 저절로 움직이고 저절로 조정하면서 변화한다고 믿었던 것이다. 자연의 안정적인 질서를 관찰하면서 인간은 적응하며 사는 기술을 스스로 터득했다고 확신한 것이다.
이 세상에서 믿을 것은 자신들의 판단력 외에는 없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러나 인간을 둘러싸고 있는 대자연은 사실 인간의 말을 고이 듣고 유지해 온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일관성을 실행하기 위해서 움직여 온 것이다.
본문 26절에 보면, "이스라엘 자손의 거한 고센 땅에는 우박이 없었더라"라고 되어 있다. 현재 이스라엘 자손은 마음을 낮추거나 높이거나 할 필요도 없이 우박 재앙은 떨어지지 않고 있다.
바로왕에게는 철저하게 '마음 낮추기'를 요청하신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따로 요구하는 바가 전혀 없다. 애굽 민족과는 다른 관계가 이스라엘 사이에 연결되어 있음을 말하는 것이다. 분명 하나님께서는 바로왕을 통해서 자기 자신이 어떤 하나님인 가를 알린다고 하셨다. 그 '알림' 중의 하나는 심판의 관계가 아니라 은혜의 관계도 여호와 하나님을 통해서 제시된다는 것을 애굽 땅에 살고 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알려지는 것이다.
과연 하나님의 일관성이 오늘날에도 적용이 되는 것일까? 데살로니가후서 1:7-9에 보면, 구약 바로 왕과 그 애굽 나라에 우박이 떨어진 것은 신약에 와서 예수님의 복음에 복종치 않는 자에게 떨어지는 범우주적 재앙의 예고편에 해당되는 사항이다. 국지적이 아니라 이제는 온 천지를 통해서 하나님의 저주성이 떨어지게 되어 있다.
출애굽기와 신약을 바로 연결했는데 그렇다면 그 중간에도 이런 현상이 일어났는가? 일어났다. 사무엘상 6장에서 7장의 내용을 보면 잘 나타나있다. 여기에 보면 인간들의 오해가 가득 담겨 있다.
이스라엘 측 제사장 홉니와 비느하스는 블레셋과의 전쟁에서 언약궤의 위력을 한껏 과시하고 싶었다. 언약궤가 있는 한 우리 이스라엘이 승리한다고 믿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엄청난 오산이었다. 언약궤는 언약궤대로 빼앗기고 홉니와 비느하스도 죽었다.
블레셋 민족들은 자신들이 여호와 하나님을 다곤신에 의해서 체포했다고 보았다. 그래서 언약궤를 다곤신전에 두었는데 그 때부터 다곤 신전이 엉망이 되고 말았다.
다곤신의 손목이 부러지고 다곤신의 코잔등이 언약궤 앞에 꼬꾸라지게 된다. 블레셋 사람은 이 언약궤를 감당을 못한다. 언약궤가 있는 곳, 가는 곳마다 재앙이 늘 넘쳐난다. 마치 애굽 나라에 재앙이 넘쳐나는 것과 같다.
그래서 블레셋 민족은 이 언약궤를 고이 이스라엘 측에 넘겨주게 된다. 그 뒤에도 블레셋 나라는 이스라엘을 침공한다. 이번에는 사무엘 선지자가 온 백성들을 모으고 그냥 조용하게 금식하는 틈을 타서 블레셋이 공격해 온다.
이 사실을 하나님이 아시고 하늘에서 큰 재앙이 떨어져서 즉 갑자기 우뢰가 떨어져서 그들이 대패를 했다. 이런 승리를 위하여 이스라엘이 한 것은 아무 것도 없다. 그들은 그저 자신의 무능력을 그대로 드러내는 것 밖에 없다.
여호와 하나님의 일관성으로 인해 은혜 줄 자에게는 은혜를 주고, 은혜 대신 저주가 돌아갈 자에게는 확실하게 저주가 돌아가도록 조치 하신 것이다. 이처럼 하나님은 인간에게 추호도 양보할 생각이 없으시다.
인간들이 아무리 압력을 넣고, 또 이미 신자라는 신분을 통해서 하나님의 뜻을 변경시켜 보려고 해도 하나님은 요지부동이다. 이미 확정된 일관성으로만 움직이신다. 오늘날 예수님도 이와 같다.
따라서 예수님을 믿을 때 예수님께서 어떤 입장에서, 그리고 어떤 일관성을 가지고 일하시는가를 제대로 알아야 한다. 이것도 알지 못하고 예수님을 믿게 되면 인간은 지쳐서 예수님을 포기하고 나가 떨어지게 되어 있다.
마지막 우리가 천국에 갈 때에, 결코 우리들이 남들보다 더 잘난 것이 있었다든지 아니면 우리가 확실하게 성실했다는 것이 근거가 되어 구원 받은 것이 아니라, 도리어 '이렇게 못난 인간도 구원되었음'을 온 천하에 널리 전파하기 위해서 우리가 뽑혔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9:27-30
바로 왕은 인간의 속성을 유감 없이 보여주고 있다. 본문 27절에서 바로 왕은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이번은 내가 범죄 하였노라 여호와는 의로우시고 나와 나의 백성은 악 하도다"
여기에 대한 최종 모세의 답변은 "그러나 왕과 왕의 신하들이 여호와 하나님을 아직도 두려워 아니할 줄을 내가 아나이다" 바로 왕은 스스로 자신을 악하다, 범죄 했다고 말하고 있지만 모세가 보기에 뭐가 빠진 상태이다.
여호와 하나님에 대한 경외감이 상실되어 있다고 본 것이다. 경외감이 형성되려면, 자신에 대한 방어 벽이 송두리째 날라 가 버려야 한다. 마치 뜨거운 열기 앞에서 초에 새겨진 붙어있는 장식 모양들이 무용지물이 되어 흐물흐물 녹아지듯이 여호와의 말씀 앞에 자아의 모든 것이 녹아져야 한다.
다시 돌아서서 자아의 고유성을 주섬주섬 찾아내어 조립할 생각을 아예 먹지 말아야 하는 것이다. 이래야 '경외'라는 말을 쓸 수가 있다. 우리가 교회에 자주 나오고, 신학을 공부하고, 성경 공부를 빈번하게 한다고 해서 경외감이 절로 강렬해지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여호와 말씀에 대한 경외성이 이 핑계, 저 핑계를 방패삼아 삭제해 버릴 가능성이 크다. 예를 들면, 사무엘상 2:30에 보면, 하나님이 엘리 가정에 대한 솔직한 심정 표시이다. 엘리 제사장 가정에서는 여호와 하나님에 대한 존경심이 완전히 메말랐다는 것이다. 제사장이란 사실 백성들에게 모범적인 모습과 생활을 보여주어야 될 입장에 있는 자이다.
제사장은 아무나 되는 게 아니다. 정신적으로나 신체적으로 흠이 없는 사람 중에서 뽑게 된다. 그리고 제사장 되고 난 뒤에도 제사장은 백성들의 어른으로 간주되어 백성들을 가르치는 일을 하게 된다.
하지만 그도 인간인지라 머리나 이성으로 따져서 자신을 구축하는 것이 아니라 타고난 욕망과 욕심이라는 감정에 의해서 구축되는 죄성을 절제해야 하는 처지에 있다. 자연적으로 건성과 형식으로 백성들의 눈을 가리는 위선적인 생활의 반복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더구나 제사장 가정의 철없는 자식들은, 제사장이 모범적인 생활을 해야 된다는 것은 생각하지 못하고, 제사장이기 때문에 들어오는 각가지 수혜만을 챙기기 급급했다. 바로 이런 모습이 사람들에게는 들키지 않지만 하나님에게는 용납될 수 없는 일이었다.
남들 보기에 경건을 가장한 위선적인 종교 행태가 하나님 보시기에 더 가증스러울 수가 있다. 인간이 스스로 자기를 지키려는 모든 행위는, 하나님의 손길을 건방지게 뿌리치는 교만 중의 교만의 형태이다.
모세는 그것을 지적하는 것이다. 시합에서 "졌다"고 꼬리 내린다고 해서 상대방에 대해 존경심을 갖고 있다고 보기 힘들다. 도리어 마음 내면에서 내심 복수의 칼날을 더 날카롭게 갈게 되는 시발점이 형성될 것이다.
10가지 재앙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보이고자 하는 뜻은, 인간과 하나님 사이에는, 인간들이 점차 자신의 죄성을 유감 없이 발휘된다는 것이다. 이 바로 왕의 심정은 오늘날 교회 안에서 항상 찾아볼 수 있는 심령 상태들이다.
하나님에 대해서, 일단 지옥 보낸다고 하니 인간들은 더럽지만 고개 숙이는 척을 하지만, 하나님이 원하는 존경이나 경외까지는 미치지 못한다.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하면 사무엘상 16:22에 "사무엘이 가로되 여호와께서 번제와 다른 제사를 그 목소리 순종하는 것을 좋아하심 같이 좋아하시겠나이까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수양의 기름보다 나으니"라고 되어 있다. 제사와 순종이 서로 대립되는 뜻으로 등장한다.
제사를 반복하는 것이 결코 하나님이 원하시는 존경과 경의의 모습이 아니라는 말이다. 종교적인 경건의 모습을 계속 지켜내는 것이 결코 하나님에 대한 헌신이 아니라는 것이다. 교회는 어떤 사람의 생활을 전체 다른 사람의 신앙생활의 표준으로 삼을 수가 없다. 왜냐하면 순종이라는 것은 그 시작을 사람에게서 출발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출발하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그 사람의 중심을 보시고 적절하게 순종할 내용들을 제공하는데 제 3자가 그 중간에 개입할 수는 없는 것이다. 즉 "당신은 나처럼 행동을 해주셔야 비로소 순종하는 것이고 하나님을 존중하는 것입니다"라는 말을 할 수 없다는 것이다.
시편 94:9절의 말씀처럼, 눈을 만드신 자가 보지 못하겠으며, 귀를 만들지 자가 듣지 못하겠으며, 마음을 만드신 자가 우리들의 속마음 해석에 혼선을 갖으시겠는가. 결코 그럴 리 없다. 바로 왕은 모세가 곁에 있음을 진정으로 고마워해야 한다.
스스로 자기 세계를 지키겠다는 무모함을 버려야 했다. 바로 왕은 하나님과 대결 구조에 버티고 있지 결코 순종 구조 안에 놓여 있는 것이 아니다. "졌습니다!"라고 한다고 하나님이 좋아하시는 것이 아니다.
오늘날 성도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바는 순종이다. 날마다 예수님의 순종을 보면서, 우리들이 평소에 얼마나 자기 합리화하는 여전히 세상을 쳐다보고 사는 인간인지를 절실하게 느껴야 한다. 그럼에도 여전히 순종의 구조를 가지고 우리를 덮쳐오시는 하나님께 감사해야 한다. 왜냐하면 더 이상 하나님은 우리의 타인이 아니시기 때문이다.
10: 1 – 5
하나님은 모세를 통해서 바로왕에게 "너는 왜 겸비치 아니하느냐?"라고 말씀하신다. 겸비치 않는 것은 여호와를 섬기지 않는 것이 겸비치 않는 것이다. 여호와를 섬긴다는 것은 마음이 겸손하다든지, 하나님을 섬긴다는 것은 인간 쪽에서 조작해 낼 성질의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그 개인에게 주시는 사건 안에서 비로소 '겸비'의 현상과 '섬김'의 현상이 일어나는 것이다.
인간들이 스스로 조작해내는 방식과 양식에 따라 겸비하고 섬기려는 것은 곧 자신의 겸손을 섬기는 것이요, 자신의 하나님 섬김을 겸손으로 이해하려는 소치에 불과하다. 하나님에 원하시는 겸손함과 섬김이란 하나님에 의해서 터져 버린 사건이 전제되어 있어야 한다.
그 예에 대해서 예레미야 20:7-11의 경우를 보면 하나님의 성격과 더불어 예레미야의 성격이 같이 나온다. 여기에 진정한 섬김과 겸손의 모습을 찾아볼 수 있다. 예레미야는 자진해서 하나님을 일을 하고자 한 사람이 아니다. 물론 여호와의 존재를 인정 못하겠다는 것이 아니다. 나름대로 겸손과 섬김의 형식과 유형과 예를 갖고 살고 싶어했을 것이다.
그것이 중요한 바가 아니다. 예레미야에게 하나님께서 일방적으로 쳐들어와 버렸다는 것이 관권이다. 이 때부터 예레미야는 몸부림치기 시작한다. "제가 하나님의 일을 안하겠다는데 왜 저에게 하나님의 일을 시키십니까?"라는 데서 오는 몸부림이다.
이것이 바로 인간에게 나온 겸비와 섬김이 아니라 하나님에서부터 시작한 겸손과 섬김이다. 이 예레미야의 고통과 심정은 신약에 와서 예수님에게 그대로 이어지고 사도 바울에게 그대로 이어진다.
그리고 오늘날 우리 성도들에게 그대로 이어 지게끔 되어 있다. 예레미야는 하나님으로부터 열심히 탈출하려고 한다. 하나님을 떼 내려고 한다. 그러면서도 예레미야는 이 점을 안다.
하나님이 도리어 자신을 이기고 있다는 점을 말이다. 예레미야는 결코 하나님을 하나의 자기 밖의 대상으로 바라보고 있는 것이 아니다. 자신이 처해 있는 이 현장에 침입한 하나님으로부터 알고 있다.
이로 인해 자신은 자기의 의도한대로 인생이 진행되지 않는 것에 대해서 당황해 하고 있다. 그리고 두려워하고 있다. 하지만 그런 가운데서도 그는 잊지 않고 있다. 날마다 하나님이 자기를 이긴다는 그 사실을 말이다.
이 두 현실을 다 느끼면서 살아가는 이 모습이 진정 오늘날 성도가 느끼는 상황이다. 하나님은 이런 식으로 성도에게 찾아 드시고 인도하시고, 일 시키시고 있는 것이다. "나는 안 하려고 했고, 나는 그냥 멀 발치서 하나님께 겸비하고 하나님을 섬기는 그런 평범한 신자이기를 원했지만 하나님이 나를 쳐들어왔고 나를 정복하고 덮쳐서 이끌고 계시다"는 것을 고백하게 하신다.
사도 바울의 경우도 예외가 아니다. 빌립보서 4:11-13에 보면 사도에게 생겨나는 상황은 사도가 순교하기 위하여 억지로 조작해내고 은근히 유발하기를 기대한 상황이 아니다. 그도 우리 같이 우리에게 무슨 일이 닥칠지를 전혀 예상 못하고 있다. 하지만 그는 안다. 고린도전서 10:22에 보면, "그러면 우리가 주를 노여워하시게 하겠느냐 우리가 주보다 강한 자냐"라고 되어 있다.
우리가 주님을 어떻게 해보겠다고 할 수 있는 처지가 아님을 사도는 너무나도 잘 알고 있다. 예수님은 우리에 대해서 늘 승리하시는 분이시고, 우리는 예수님에게 늘 패배 당하는 대상일 뿐이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말하기를, "내게 능력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다"고 했다. '모든 것'이란 자신이 미리 점쳐놓은 기대나 야심이 아니다. 여기서 '모든 것'이란 늘 자기를 이겨주시는 예수님이 생각해 놓으신 모든 것이다. 따라서 사도 바울로서는 도저히 엄두도 못 낼 일들이다.
결국 날마다 사도 자신을 이기시는 예수님의 능력으로 인해 자신은 그 모든 일을 다 해내는 자로서 나타난다는 말이다. 궁핍이나 환란이나 그 어떠한 불가능한 상황에서도 말이다. 바로 이것이 진정한 섬김이요 겸손이다.
자기 자신이 가진 능력이나 의지력을 아예 기대치 않는 것이다. 우리에게도 마찬가지이다. 우리는 평생을 다 가도록, 자신이 예상한대로 안 들어주시는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느낄 수 있어야 참 성도이다. 왜냐하면 날마다 그 사람에게서 하나님이 승리하심을 본인이 너무나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10: 8 -11
바로왕은 이스라엘의 자식들을 인질로 잡아두려고 한다. 그 당시의 히브리 사람들은 바로왕의 정권을 지탱해주는 인간 기계처럼 취급되었다. 만약에 공장에 기계가 빠져나가면 생산이 불가능한 것처럼 애굽 경제를 돌아가게 만드는 노동력을 제공하는 이들이 여호와 섬긴다고 빠져나가면 나라 꼴이 안되는 것이다.
따라서 국가 경영을 책임지는 책임자인 바로왕의 입장에서는 그들의 불만을 다소 해소해주면서도 동시에 그들의 노동을 계속 착취할 수 있는 관계 망을 계속 작동하려고 한다. 설마 자기네들 자식들이 위험한 지경에 처했는데 그래도 여호와만 쳐다보면 섬기지는 않겠지 라는 계산서를 빼본 것이다.
오늘날 교인들도 마찬가지이다. 자신이 하나님을 인정한다고 나서보지만 여전히 그 관계는 유동적이고 헐겁고 느슨한 관계로만 걸쳐놓으려고 한다. 왜냐하면 하나님과의 관계보다 더 확실한 관계의 끈이 따로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바로 '가족 관계이다.' 여호와 하나님과의 관계도 중요하지만 현재 자기가 만든 가족보다는 덜 중요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다니엘 5장의 말씀처럼 인간의 운명은 결코 인간의 손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다.
높이기도 하시고 낮추시기도 하시는 권한은 하나님에게만 있을 따름이다. 출애굽뿐만 아니라, 다니엘 시대뿐만 아니라 예수님이 오신 이 신약 시대에는 더 확실하게 인간들을 추궁하고 계신다.
누가복음 9:61-62에 가족한테 생이별하면서 작별인사 하는 것도 그토록 문제되는 일이란 말인가? 가족의 인연을 끊지 아니하면 지옥 보내신다는 말인가? 이것은 바로 예수님의 관계는 이 세상의 그 어떤 관계, 즉 흔히 사람들이 죽어도 못 끊는다는 가족 관계보다 더 중요하고 소중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예가 된다.
가족이란 흔히 사랑으로 똘똘 뭉쳐있다고 보고 있다. 자식을 위하여 주저 없이 헌신하고 아낌없이 목숨 바칠 부모의 사랑이 기초가 되어 구성된 조직이라고 보고 있다. 따라서 부모의 사랑보다 더 위대한 것이 없다고 상식적으로 잘 알고 있는 바로왕의 입장에서는 볼모 작전을 세워서 자기 나라 노예들인 히브리인들을 놓치지 않으려고 한 것이다. 그러나 부모, 자식간의 사랑이 전부가 아니다.
그것은 순전히 자기 자식이기에 남의 자식보다 더 사랑하는 일방적인 사랑일 뿐이다. 이 말은 곧 자기가 낳은 자식이라서 자기 몸의 연장체 라는 뜻에서 죽어도 못 버리겠다는 데서 나온 사랑이다.
만약에 자식이 독립 선언해 버리면 참으로 사랑했던 폭만큼이 아픈 가슴으로 되돌아올 사랑이다. 자기 절대성을 더욱 확고히 하는 사랑일 뿐이다. 정말 하나님의 사랑이 임하면, 그동안 자신의 절대성을 지지해 주던 모든 관계가 다 허물어지고 오직 주님의 사랑에만 온통 점령당하게 된다.
이것은 기적이 임해야 가능한 일이다. 만약 이런 사랑이 없이 하나님을 사랑하노라고 나선다면 바로 바로왕과 같은 인식으로 하나님을 생각해 주는데 머문 것이다. 진정한 하나님에 대한 사랑은 적어도 '하나님 이용하기'를 훨씬 뛰어 넘어야 한다.
누구든지 주를 사랑하지 아니하면 저주를 받는다고 했다. 그리고 이 말씀이 결코 장난이 아님을 안다. 구약 때, 무서운 하나님 앞에 굴복한다고 해서 구원이 성사되는 것이 아니다. 복종한다고 다 된 게 아니다.
이유 없고 조건 없는 사랑으로 주님을 생각해야 한다. 인력으로 불가능한 기적의 열매로서 자신이 등장되었음을 믿고 인정해야 한다. 이럴 때, 그 어떤 힘 앞에서도 굴복하지 않을 것이다.
10:13-20
하나님께서 자연을 은혜롭게 운영하시는 것은 이 은혜 성을 제대로 읽을 줄 아는 자만이 영생을 얻고 구원이 되는 자임을 분명히 하기 위해서 이다. 모세가 지팡이를 드는 것은 그냥 하나님이 시켜서 행한 일 일뿐이다.
자신이 특별히 하고 싶어서 한 행동이 아니다. 그런데 모세가 지팡이 드는 것을 신호 삼아서 하나님께서 갑자기 동쪽에서 바람이 불어오면서 메뚜기 떼가 까맣게 온 애굽 지면을 다 덮게 하셨다.
이것은 평소에 애굽 사람들이 착해서 그동안 메뚜기 재앙을 안 받은 것이 아님을 분명히 해두신 것이다. 그리고 모세가 기도하니 그 많던 메뚜기 떼가 순식간에 사라져버렸다. 이것은 여호와 하나님이 얼마나 의도적으로 이 세상을 관리하고 있는가를 보여주시는 것이다.
무지개 언약은 하나님께서 핵심적으로 일하심을 커버해 주시는 배경적 은혜가 되는 것이다. 진짜 구원시켜 주시는 은혜는 이 무지개 언약의 배경 속에서 이루어지는 것인데 그것이 바로, 인간들의 마음 돌리기 때문이다.
소위 악인이나 선인이나 모두 하나님의 은혜가 지목해서 일하시는 그 핵심적인 목적을 알지 못하고 있다. 진짜 하나님의 일은 악을 추구하는 자들이나 선을 추구하는 자들 모두에게 핍박을 받는 양식으로 진행이 된다.
소위 선인들은 자신들이 열심히, 부지런히 긴장을 늦추지 않고 선을 쌓았기에 그 대가로 자신들에게는 자연의 재앙이 안 떨어질 줄로 알고 있다. 그런데 바로 이런 마음가짐조차 획기적으로 바뀌어져야 한다.
하나님은 무지개 언약이 주는 은총 안에서 진짜 은혜의 본질을 만들어 나가신다. 예를 들면, 아브라함에게 자기 아들을 잡아 번제를 드리게 함으로서, 자식을 버려야 하는 아버지의 아픔을 알게 하고 동시에 그것이 자신의 죄를 용서할 수 있는 은혜가 됨을 알게 하신다. 진정한 은혜는 자연에서부터도 계속 흘러나오지만 그 최종적 종착지점은 하나님의 희생과 죽으심과 연결되게 되어 있다.
10:22-27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만 몰래 끄집어내면 될 터인데 함께 살고 있는 불신자들을 건드리는 것은 사람이 환경이 좋아졌다고 해서 사람 자체까지 달라졌다고 볼 수 없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생각하는 '구원'이라는 것이 항상 환경의 나아짐으로 자꾸만 정리하려고 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염두에 두시는 구원이란, '인간성 바뀜'에 있다. 인간성이 바뀌어져야 하고 달라져야 하는 이유는, 비록 구원될 자라 할지라도 그들이 그동안 지니고 있는 인간성이란 곧 구원받지 못한 자들의 인간성과 별반 다를 게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구원받지 못할 자를 치신다는 것은, 곧 그 징벌의 취지를 늘 간직하며 살아야 될 자들이 구원될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것이다. 본연의 '인간성'을 치는데 있어 왜 하필이면 온 천지를 캄캄하게 만드는 조치를 단행하는 것일까?
그것은 애굽 사람들이 그동안 열심히 태양신을 숭상해 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의 눈과 안목으로 볼 때, 자신들이 생존하는데 필요한 열량들은 모두 하늘 한 가운데 떠 있는 태양 말고는 달리 정답이 없다고 확신했기 때문이다.
태양이 우리의 목숨을 좌지우지하는 것이 된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당연히 그것밖에 모르는 상황에서 하나님은 일부로 태양이 사라지는 암흑을 만드신 것이다. 인간은 태양에만 최종적으로 관심사가 머물 것이 아니라 '도대체 태양을 만든 분은 과연 계신 다는 말인가?'에 관심 두게 하겠다는 것이다. 가만히 하늘을 유유히 떠다니던 태양이 졸지에 없어진다는 것은 태양의 소유자가 따로 계심을 천명하는 것이다.
이것보다 더 두렵고 놀라운 사실은 흑암을 만드신 하나님이 그 자신의 백성이 실제로 애굽 나라에 실존해 있다는 데 있다. 왜냐하면 그들이 살던 동네에는 광명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로서 히브리인들이 섬기는 그 여호와는 단순히 조작해낸 하나님이 아니라 영원부터 계속 유일하게 계셔왔던 그 하나님이라는 것이다.
태양의 빛이 결코 인간의 운명을 결정짓는 것이 아니다. 육신의 생존에 태양 빛이 필수적이라고 단정짓듯이 사실 인간의 운명을 단정짓는 빛은 따로 있다. 요한복음 1:3-5에 보면,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빛이 어두움에 비취되 어두움이 깨닫지 못하더라"라고 되어 있다.
사람들은 태양만이 빛이라 여긴다. 그것만이 눈에 보일 뿐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본래의 빛은 따로 있다. 마치 태양 없이 아무 것도 생존할 수 없는 것처럼 본래의 빛을 모르는 이는 죽음뿐 임을 확정 지우는 또 다른 빛이 있다.
장차 우리가 들어가고자 하는 세계는 태양이나 달이나 별 빛이 더 이상 필요치 않을 정도로 환한 신세계다. 따라서 이 빛과 관련 없는 이는 근원적으로 어둠일 수밖에 없다. 애굽의 바로 왕은 그저 태양 빛만 평생 쳐다보며 살던 사람이다.
그러나 그런 종류의 사람의 목숨은 목숨도 아니다. 태양을 만드신 그 분의 빛에 있는 자만이 참으로 생명을 가진 자라고 할 수 있다. 성도가 아직 이 어둠의 세계에서 살아야 될 이유가 여기 있다.
남한테 지지 않고 자존심을 지탱하기 위해 성도의 인생이 있는 것이 아니다. 세상 즐거움을 원 없이 즐기기 위해서 아직 살아가고 있는 것이 아니다. 어두움의 세계 속에서 진정한 빛이 되시고 생명 되시는 예수님을 알리기 위해서 아직 이 세상을 떠나지 않고 있는 것이다.
이 사실을 바로 왕은 미처 모르고 단지 히브리인들의 재산에만 탐을 내고 있다. 바로 왕은 말하기를, 가족들만 나가고 가축은 두고 가라고 한다. 옛날 고대 농경시대에 있어 가축이란 농사짓는데 필수적인 생산 수단이 되는 것이다. 그것은 재산이다.
히브리인들은 그 가축을 단순한 재산으로 보는 것이 아니다. 모세가 가로되 왕이라도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드릴 희생과 번제물을 우리에게 주어야 하겠고 우리의 생축도 우리와 함께 가고 한 마리도 남길 수 없으니 이는 우리가 그 중에서 취하여 우리 하나님 여호와를 섬길 것임이며 또 우리가 거기 이르기까지는 어떤 것으로 여호와를 섬길는지 알지 못함이니이다"
당신네들은 당신의 소유가 오로지 당신의 유익과 생존과 행복을 위하여 존재하는 것이지만 우리는 우리에게 소유된 것은 근본적으로 하나님에게 제사하고 제물로 쓰여지기 위한 것이라는 것이다.
애굽 사람들 보기에는 히브리인들에게 있어 가축이 인간보다 더 중요하게 보이겠지만 히브리인들에게는 제물이 되는 가축이야말로 자신들보다 더 큰 의미가 담겨 있는 짐승이다. 태양을 마음대로 조정하시는 여호와 하나님은 사람의 재산이나 재물을 원하시는 것이 하나님이 지정하신 제물을 원하시는 분이다.
제물이 없는 관계는 곧 하나님과의 단절이며 이는 빛과의 단절이요 생명과의 단절이다. 우리 마음 속에도 제물이 있어야 한다. 그게 없으면 안된다. 제물로 바쳐지는 짐승들은 평소에 가족들과 함께 정겹게 잘 지내왔던 가축들이다.
식구들은 안다. 인간인 자신들은 죄를 계속 지어오고 있지만 가축인 순한 짐승은 죄를 짓지 않았다는 사실을 말이다. 그동안 듬뿍 정을 주어온 관계로 그 짐승이 남은 식구들을 대신하여 죽음의 길로 들어서야 하는 것이다.
아마 그 제물을 바치는 나머지 식구들은 마음이 대단히 심란할 것이다. 그동안 정들었던 것을 생각하면 그 짐승의 죽음은 곧 자신의 죽음처럼 다가올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 성도의 마음 속에는 이런 흠 없는 짐승과의 생이별 정도가 아니다.
친히 우리를 창조하신 분의 생죽음이 마음 속에 늘 머물러 있어야 한다. 예수님의 피와 예수님의 살이 없으면 더 이상 살아있는 자라고 볼 수 없다. 제물의 죽음 안으로 성도는 같이 사라져야 한다.
성도들은 무엇이 진정 어두움이며 무엇이 진정 빛인가를 제대로 알고 있어야 한다. 예수님께서 십자가 달리실 때, 천기에 희한한 일이 일어났다. 갑자기 세상이 깜깜해져 버린 것이다.
누가복음 23:44에 보면, "때가 제 육시쯤 되어 해가 빛을 잃고 온 땅에 어두움이 임하여 제 구시까지 계속하며"라고 되어 있다. 즉 평소에 늘 규칙적으로 운행하는 자연 질서는 노아 때의 무지개 언약에 의해서 그렇게 되어야만 한다.
하지만 예수님의 십자가는 이 세상에 가장 중요한 사건이다. 대자연의 빛을 제거함으로서 이 세상이 그 자체로 어두움이라는 사실을 하나님은 아드님의 죽으심을 통해서 알리려 하셨다. 이제부터 우리도 이런 관점에서 남은 인생을 살아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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