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전강의090924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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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이미아(IP:115.41.199.184)
사도행전 4장 18-19절을 제가 한 번 읽어 보겠습니다.
18절. 그들을 불러 경계하여 도무지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지도 말고 가르치지도 말라
19절. 베드로와 요한이 대답하여 가로되 하나님 앞에서 너희 말 듣는 것이 하나님 말씀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
어떤 분이 교목으로 취직을 했는데 그 학교 재단의 이사장 되는 사람이 와서 하는 말이 "성경 이야기 많이 하지 마세요" 라고 당부하고 갔다고 합니다. 기독교 재단인데, 기독교 학교인데도 불구하고 그렇게 하는 것이 이 세상 나라 입니다. 예수의 이름으로 이야기 하지도 말고 가르치지도 말라고 하니까 사도가 하는 말이 하나님 앞에서 너희 말 듣는 것보다 하나님 말씀 듣는 것이 옳은가 판단해 보라 우리가 보고 들은 것을 우리가 말하지 아니할 수가 없다 이렇게 되어 있죠. 이 이야기가 상당히 쉬운 것 같지만 굉장히복잡하고 어려워요. 왜 그런가 그림으로 설명해 보면 사람이 여기 있다고 합시다. 만약에 이 사람이 한 40년 살았다고 합시다. 앞으로 이 사람이 언제 죽을지 모르지만 한 90에 죽는다고 합시다. 그러면 이 사람이 바라볼 수 있는 하나님의 폭이 이것 밖에 안되고 그것도 인식이 4살 5살 정도인데 여기서부터 하나님을 알았다고 치고 유아 세례도 받았다고 치고 늙어 죽을 때 까지 하나님을 알았다고 해도 폭이 이것 밖에 안되겠죠. 그렇다면은 여기서 문제되는 것은 뭐냐하면 하나님이 계시다 안 계시다 하는 판단을 이 긴 하나님의 폭이 짧은 내가 판단하는 것이 옳은가 그른가를 한 번 생각해 보는 것입니다. 이렇게 생각할 수 있거든요. 나는 살아있다. 그런데 하나님은 있을까? 이렇게 생각할 때 누가 너를 살게 했는가? 우리 형이 먼저 있을 때. 우리 삼촌이 먼저 있을 때. 우리 아버지가 먼저 태어났으니까. 그럼 아버지는 누가 태어나게 했을까? 내가 없을 때는 하나님이 없다가 내가 태어나자 마자 하나님이 새로 생겼습니까? 아니죠. 그것은 아니다 말입니다. 세 살 때 부터 하나님을 알았다면 한 살 때 부터 두 살 때 까지의 하나님은 내 심장을 뛰게 하고 나를 살게 하고 두뇌가, 몸이 점점 더 성장하게 하고 그렇게 하신 분은 누구냐 하는 겁니다. 제가 이 말을 하는 것은 뭐냐면은 우리가 하나님을 알아 차리는 것 보다도 하나님은 더 많은 것을 은혜로 이미 주셨다는 것입니다. 내가 어느 순간에 아 하나님이 계시다 알아 차렸다고 해서 그 때 그 순간 부터 우린 하나님과 거래에 나선것이 아니다 이 말입니다. 그러나 시장에 콩나물 장사 아줌마는 그렇지 않아요. 오늘 저녁에 콩나물을 먹기 싫을 때는 그냥 스쳐 지나가면 돼요. 하지만 그 아줌마 하고 이야기 할 때는 아 콩나물 먹고 싶어 콩나물 얼마입니까? 묻는 그 순간 부터 그 아줌마하고 의미가 소통이 되죠. 그러나 하나님은 그게 아니고 내가 하나님을 찾기도 전 부터 이미 하나님은 나를 키워 오고 있었고 은혜 주고 있었고 살려 주셨고 공기 주셨고 햇빛 주셨고 심장 뛰게 하셨고 부모님 살아 계셔서 기저귀 갈게 하셨고 내가 있게 한 그 부모님을 있게 한 할아버지 할머니도 하나님께서 이미 만들어 놓으셨고 나보다 목사가 나이가 많게 해서 신학을 먼저 하게 하셨고 성경을 미리 더 알게 하셨고 이 모든 것을 볼 때에 우리는 뭐냐면은 그릇은 그릇인데 작은 그릇에 해당되는 것입니다. 경상도 말로 종지기, 간장담는 그릇이라고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가 홍수처럼 쏟아져도 기껏 담는 은혜가 어느 정도냐면 종지기 밖에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요 정도 차 있는데 나는 이 정도 찰 것을 생각했는데 빗물 받아 보니까 이것 밖에 안되니까 불평이 늘어나는 거예요. 왜 하나님께서는 나에게 이것 밖에 안 주십니까? 그러면 하나님께서 묻죠. 이 그릇은? 너라는 몸체는? 너라는 두뇌는? 그것은 너가 만들어 달래서 만들어 주신 것이 아니다는 것입니다. 그걸 성경적으로 보면 이렇습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만드셨을 때 나는 거기에 관여한 바 없었다. 굉장히 중요합니다. 신직수씨가 태어나기 전에 신직수씨가 하나님 나를 이렇게 만들어 달라고 하나님께 의견을 제시한 적이 있습니까? 없죠. 그러면 하나님께선 의견을 하지도 않았는데 덜렁 만들어 버렸습니다. 나를 만들어 놓고 만들어 놓았는데 그것을 종지기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제부터 하나님을 잘 알아야지 멋지게 알아야지 해도 내가 아는 은혜는 종지기 밖에 안 되는 것입니다. 지난 가야산 수련회 때 했듯이 이런 이야기를 하면 우리 학생들이 잘 이해될지 모르지만 제가 모험을 한 번 해 보겠습니다. 조각에 보면 형체가 드러나도록 큰 사각형 대리석 같으면 이것으로 로뎅의 생각하는 사람을 만들 때 처음에 대리석 덩어리가 있겠죠. 그러면 그 안에 로뎅의 생각하는 사람이 고민하면서 앉아 있겠습니까? 없겠습니까? 없죠. 그러면 이것을 어떻게 만들겠습니까? 밑에서 부터 파내면 되죠. 하나님께서 아빠하고 엄마가 있어 가지고 나라는 것을 주변부터 먼저 있고 아빠 엄마가 주변을 차지하고 있고 아빠 엄마 때문에 내가 태어났다고 하면 결국은 나는 누가 만들었느냐 하면 하나님께서 아빠, 엄마를 배치해서 나보다 먼저 된 여러가지 배치물들이 있어 가지고 배치된 것들로 인하여 그 안에서 로뎅의 생각하는 사람처럼 나라는 것이 발생된 거예요. 파들어 가는 거예요. 파들어 갈 때 로뎅의 생각하는 조각이 자기가 알아서 팠습니까? 아니죠. 바깥에 로뎅이라는 조각가가 파주니까 이거 작품하나 생겼구먼. 하고 보니까 저와 여러분들이다 이말이죠. 파고 남아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나를 만들면서 파고 있는데 아직까지 형성되지 않은 내가 아 저기는 조금 약간 더 파주세요. 쌍꺼풀 수술 좀 해주세요. 이렇게 요구할 수 있는 입장이 됩니까? 못 됩니까? 못하죠. 방금 이렇게 구차하게 복잡하게 이야기 했는데 그것을 한 마디로 말씀이라고 합니다. 우리가 말씀을 지키는 것이 아닙니다. 말씀을 지킨다는 것이 말이 안 됩니다. 그런 거짓말이 어디 있습니까? 주님께서 말씀대로 우릴 만드신 거예요. 그러면 저 사람은 어떻게 만들었습니까? 주님께서 말씀대로 만드는데 저 사람이 끌을 가지고 파다 보니까 내가 된 거예요. 예를 들어서 우리 이종분 집사님께서는 대전에 사시고 저는 대구에 살거든요. 그래서 제가 대전에 한 번 구경해 볼까? 하고 어슬렁 거리다가 이 집을 방문해 볼까? 나미아불타불 이런 식으로 찾아 온 것이 아니고 외부에서 자극을 해서 제가 여기까지 왔잖아요. 그렇다면 여러분들이 우리 재아나 재원이가 커가는데 엄마 없이 엄마 나 이제 내 힘으로 클거야 살거야 라고 할 수 없어요. 아마 커서 나이 삼 십 되서는 할 수 있어요. 하지만 반드시 여러분들을 여러분이 되도록 도와 주는 분들이 있어요. 끌을 가지고 정을 가지고 도와 주는 분이 있어요. 예를 들어서 재아가 그런 아이는 아니지만 술을 먹고 왔다 할 때 엄마가 너 앞으로 술 마시면 죽어 이랬단 말이죠. 그 다음부터 술을 안 먹었다. 그렇다면 엄마가 끌을 가지고 정을 가지고 재아를 뭐로 만들었다? 두 번 다시 술을 안 먹는 인간으로 짤라 내었죠. 이것은 누구나 마찬가지 입니다. 어느 모든 것도. 그래서 이걸 가지고 철학에서는 사랑이라는 것은 내가 만드는 것이 아니고 환경이 만든다 세상에서는 철학에서는 환경이 만든다 하고 성경에서는 하나님이 말씀으로 만든다 이렇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좀 더 해봅시다. 여기까지 이해 된다고 하고. 좀 더 깊이 들어가 봐요. 로뎅이라는 조각가가 만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고 하자. 로뎅의 조각품이 전시되어 있다고 하자. 그런데 관람하는 사람이 물어 보는 거예요. 어이 조각품 무슨 생각해요? 묻는다고. 그러면 조각품이 말을 못하잖아요. 그러면 옆에 있는 사람이 조각품이 말 못해. 그러면 누구한테 물어봐야 해요? 만든 사람한테 물어야지. 이것이 무슨 뜻인줄 아시겠죠? 그러면 우리 누가 만들었죠? 아까 강의 새로 해봅시다. 우리 누가 만들었죠? 하나님이 말씀으로 만드셨죠. 그러면 내 인생 왜 이 모양 이 꼴 입니까? 그걸 누구한테 물어봐야 해요? 하나님한테 물어봐야지 왜 나한테 물어봐. 그런데 하나님을 절단시켜 놔버리면 그걸 누가 답변해야면 답변할 자격도 안 되는 내가 답변해야 해요. 내가 공부를 이렇게 못해서. 내가 그 때 실수를 해서. 그 때 내가 아내한테 잘해 주었으면 이혼하지 않았을텐데. 내가 그 때 선생님 말씀 잘 들었으면 수학 성적이 오르텐데...모든 것이 다 내가 행동만 잘했으면 내가 지금보다 더 나을 수 있고 내가 실수만 안 했으면 지금보다 우수할건데. 갑자기 내가 내가 내가 이것을 가지고 주체라고 합니다. 전부 다 내가 내가 합니다. 그러면 자기만 내가 내가 하는 줄 알았더니 옆에 있는 사람들도 내가 내가 내가 하고 있는 거예요. 옆에 있는 사람도 하나님하고 묻지도 않고 나도 묻지도 않고 그러면 이 둘 사이에 뭐가 생기느냐면 시합이 생기고 경쟁이 생기고 이거는 비교가 생기고 이것은 스트레스 받죠. 너가 잘 났는지 내가 잘 났는지 한 번 붙어보자. 옆에 있는 아파트하고 이쪽 아파트하고 서로 싸우고 옆집하고 싸우고 같은 직장 동료하고 싸우고 같은 직원들하고 싸우고 상사하고 싸우고 서로 싸우고 옆에 교회에서 같은 집사들하고 싸우고 목사들하고 싸우고 전부 다 모든 싸움의 이유가 뭐가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까? 내가 나를 만든다. 내가 나를 만든다의 대표적인 구호가 뭐냐면은 "I can do it" "나는 그것을 할 수 있다." 다른 말로 네 자로 하면 "하면된다." 전부 다 이것이 뭐냐면은 주체에서 나왔습니다. 주체에서 나오는데 이 주체가 어디서 나왔느냐면 환경에서 돌출된 거예요. 뭔가 판에 있으면 신문지나 종이 있습니까? 이게 환경이면 환경에서 쏙 내밀면 올라오죠? 올라오는 요것을 주체라고 해요. 그런데 올라올 때 뭘 끌고 올라왔어요? 주변에 있는 종이를 끌고 왔죠? 이 종이를 환경이라고 하고 고상한 환경의 내막을 까보면 타인의 욕망이라고 하죠. 남들이 나한테 기대하는. 우리 재아나 재원이가 남들이 나한테 기대하는, 제일 가까이 기대하는 분이 누구죠? 엄마죠. 아침에 일어났다. 말은 안 하지만 엄마 나 오늘 어떤 사람이 되야 해? 라고 묻는 거예요. 만약 아빠가 계시면 아빠 나 오늘은 어떻게 아빠 맘에 드는 아들이 될 수 있겠어? 라고 묻는 거예요. 아내 같으면 여보 내가 오늘은 당신한테 어떤 아내가 되야 해? 참 어제 당신이 나한테 이런 이런 거 원했지? 봐 당신 보란듯이 내가 이런 이런 것 해가지고 내가 얼마나 당신한테 훌륭한 아내인가 본때를 보여 주겠어. 분명히 말은 주체인데 걸려 있는 것들이 전부 다 누구냐 하면 가까운 주변 인물들이예요. 교회에 갔다. 목사님 저 어때요? 저 신앙 어때요? 이만하면 괜찮은 신앙이죠? 저 기도 어때요? 괜찮게 기도하죠? 저 헌금 액수 어때요? 괜찮죠? 전도 세 명 했는데 목사님 칭찬해 주세요. 전부 다 이유예요. 남이 없으면 내가 없는 거예요. 나는 남이 만들었어요. 그걸 가지고 사람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이라고 하는 거예요.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이 말이 얼마나 엉터리인지. 왜 자꾸 두리번 거리는지 모르겠어요. 나라는 것을 작크를 열고 쭉 쪼개보면 안에 뭐가 들어 있느냐 하면 전부 다 남이 들어 있어요. 넌 이렇게 살아야 해. 넌 이렇게 오는 거야. 예를 들면 어린 아이가 집에서 옷을 벗어요. 그런데 옷 벗고 골목에 나갈려고 하니까 엄마가 말려요. 애 바깥에 나갈 때는 옷을 입어야 해. 그렇지 않으면 다른 사람이 엄마한테 욕해. 애들 옷도 안 입히고. 그럴 때 어린 아이는 아하 내가 엄마하고 있을 때 하고 바깥에 있을 때 하고 차이가 나는구나 바깥에 있을 때는 바깥에 있는 사람들이 요구한 것을 들어주어야 하는 것을 알죠. 그 때 비로소 아이는 자아 의식, 스스로 의식이 생기는데 자아 의식은 결국 누가 요구한 거예요? 남이 요구했어요. 만약에 남이 요구한대로 되지 않으면 그 아이는 자아 의식이 상실되어서 정신병 치료를 받아야 됩니다. 나중에 그 아이가 옷을 처음 입으니까 어색할거 아닙니까? 그래서 집에 오면 홀라당 벗어 버리는 겁니다. 어떤 애는 옷을 짓밟기도 하고. 나 옷 안 입어. 심지어 여자 아이 같으면 나는 바지 안 입어 난 꼭 치마 입어 왜냐하면 치마 입고 밖엘 나가보니까 어휴 애는 꼭 백설공주 같애. 백설공주라는 타인. 동화책에서 백설공주 라는 독일의 어떤 공주 이야기를 들어 가지고 그 백설 공주의 욕망이 자기 자아로 바뀌어 버린 거예요. 그 다음 부터는 백설 공주가 되든 신데렐라가 되든 되어야 한다는 거예요. 그게 될까 의심했는데 치마 입고 밖에 나가 보니까 애는 백설 공주라는 소리를 듣는 거예요. 그 말을 애들은 곧이 듣고 진짜 자기가 백설 공주인 줄 아는 거예요. 그 때 부터 바깥에 나가면 백설 공주 소리를 들어야 하는 거예요. 그런데 하루는 치마를 안 입고 바지를 입고 나가니까 백설 공주 소리를 안 해 아하 남한테 칭찬 받는 것이 나에게 선이 되고 같은 말로 진리가 되고 나에게 욕을 하는 것이 악이 되는 비진리가 되는 이런 관계에 들어 가는 겁니다. 만약에 그 아이가 벗는 것을 좋아해 가지고 나이 20세 넘어서도 벗어가지고 삼성 그룹에 취직을 하면 취직 되겠습니끼? 어디 미친 나시족이 와 가지고 이렇게 하지 않겠습니까? 결국엔 뭐냐 회사 취직하는 것은 본인이 삼성 그룹에 취직하고 싶어도 본인 생각이고 삼성 그룹이 원하는 인간상 남들이 원하는 인간상 연주자가 연주할 때 자기는 음악에 도취되었지만 박수가 안 나오면 레파토리 좀 바꾸시지 조용필의 친구야 같은 것도 하고 클래식만 하지 말고 째즈같은 것도 하고 재원이나 재아가 어떤 인간상이 되고 싶어요? 답변할 필요는 없어요. 이렇게 물으면 본인이 되고 싶다고 생각하는 것이 가만히 보면 남들이 주변 사람들이 칭찬해 줄 것에 소망을 두고 있어요. 여기서 극단적으로 나오면 예수님께서 이 땅에 태어 났을 때 정상적인 모습으로 태어나지 않았어요. 예수님은 뭐냐면은 나는 사람들에게 미움 받음 바 되고 사람들이 나를 못 알아 보도록 나는 살아 간다고 했어요. 이사야 53장인데. 내가 사람을 구원하러 왔지만 사람들이 도저히 나를 알아보지 못할 것이다. 심지어 시장통에 같이 걸어도 같이 식사를 해도 못 알아 볼 것이다. 밥을 먹으면 뭐할 것이요, 같이 이야기를, 대화를 해도 나를 못 알아 볼 것이다. 예수라는 양반이 있다는 것을 알지만 그 분이 누군지는 완전히 감추어진 비밀로서 온 거예요. 그래놓고 우리 보고 예수님이 하시는 말씀은 너희들은 나를 본 받으라고 했어요. 누가 성경을 쉽다고 했어요? 누가? 이런 예수님 빼놓고 보통 인간의 입장에서 성경을 해석하면 성경에서 뭐만 뽑아내느냐 하면 하나님 제가 하나님 말씀을 기도해서 하나님께 복을 받기를 원합니다. 그런데 이미 제가 알고 있는 복의 내용만 주시옵소서. 복의 내용이 어떤 것이냐 하면 지금 우리 엄마나 아빠 친척들이 은근히 저에게 기대하고 있는 것을 복이라고 간주하고 싶고 저한테는 그런 능력이 부족하니까 하나님이 도와 주셔야 겠습니다. 하나님이 도와 주시면 저는 이 교회에서 주변에서 내가 아는 사람들에게 스타가 되고 내가 집중받고 부러움을 사겠습니다. 그러니 하나님이여 내가 기도한대로 주시옵소서 라고 요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실례지만 누구세요? 누구세요? 라고 했습니다. 누구세요? 라고 했습니다. 질문이 두 개 있습니다. 우리 인간들이 예수님 보고 누구세요? 라고 했어요. 그런데 하나님께서 인간보고 누구세요? 라고 물어요. 그러면 우리는 하나님 저 아시잖아요. 절 만들었잖아요. 이근호 목사님 강의에 보니까 내가 태어나기 전 부터 이미 알아서 날 들었다면서요. 조각품 깍아서 만들었잖아요. 만들었으니까 제가 이런 것 필요하니까 주세요. 보냈다는 것입니다. 너희들이 원하는 축복을 보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쪽에서 예수님을 보냈거든요. 오신 예수님 보고 사람들은 분명히 복을 주시기 위해서 왔는데 우린 예수님 보고 실례지만 누구세요? 하고 의아해 하는 거예요. 못 알아 보는 거예요. 그러니까 사람들이 원하는 것과 하나님이 사람들에게 원하는 것이 서로 사마티 아니할제 서로 안 맞지요? 맞지를 않는 거예요. 믿습니다. 나는 믿습니다. 믿습니다가 맞겠어요? 틀렸겠어요? 이것도 틀렸죠. 예수 믿습니다. 하는 것은 내가 원하는 하나님이 되어야 해 하는 일반적인 요구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이제 사도행전 4장 11절 한 번 읽어 보세요.
11절. 이 예수는 너희 건축자들의 버린 돌로서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느니라
12절.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
이 없음이니라 하였더라
지난 번에 한 번 했는 것 같은데 다시 해 보면 예수님은 사람들에게 환영 받았다? 버림 받았다? 버림 받았죠. 버림받은 돌인데요. 그런데 버림받은 돌이 12절에 보니까 사람들에게 배척받고 모욕받고 웃음거리가 된 그 예수님 이름 외에 우리가 구원을 얻을만한 다른 이름이 있다는 말입니까? 없다는 말입니까? 12절에 보면 없다는 말이잖아요. 이야기가 복잡한게 아니고 간단한데 우리가 버렸는데 버린 그 분이 우리를 그 분만이 우리를 구원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딩동하고 문 열어 보니까 거지가 왔어요. 어디서 대낮부터 거지가 어이 나가 라고 우리가 배척했는데 사실은 배척받은 그 분이 이 가정을 구원한다면 이 가정은 무슨 수로 구원을 받습니까? 목사님 다시 부르면 되지 않습니까? 불러도 마찬가지입니다. 못 알아 본다니까요. 아까 그 거지 아니야 아 역시 다시 봐도 아니야. 왜냐하면 우리 속에 들어 있는 것이 하나님이 원하는 바가 아니고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 세상 사람들이 원하는 타인의 욕망. 같은 인간들이 갖고 있는 욕심들. 그러니까 엄마가 나에게 이걸 요구한다면 엄마의 마음은 어디서 받았겠어요? 엄마의 엄마나 아빠한테 받은 마음이고 나에게 물려준 엄마나 아빠의 마음은 처음에 아담부터 물려준 모든 인간의 공통적인 보편적인 인간의 욕망과 야망같은 거예요.그것이 저와 여러분들의 가슴에 가득 담겨 있는 거예요. 그러니까 우리는 우리의 구원자를 버릴 수 밖에 없어요. 그래서 교회 가서 구원받는 것이 아니고 교회 갔더니만 나를 쫓아날 때 비로소 구원 받는 시점이 되죠. 교회가서 구원 받는 것이 아니고 그 교회에서 쫓겨난 그 시점부터 우리는 구원받는 거예요. 그러나 아무나 쫓아내는 것이 아닙니다. 진짜 모퉁이의 머릿돌이 확실 할려면 세상 사람들이 원하는 것 말고 다른 것을 원해야겠죠. 그럼 이제부터 해답을 복잡하게 했는데 간단하게 내리겠습니다. 우리속에 방금 뭐가 있다고 했어요. 나라는 것은 없어요. 나라는 것은 돌출이예요. 돌출. 그런데 툭 튀어나온 것을 환경이라고 합니다. 환경이죠. 환경에 적응하기 위해서 우리는 환경에 맞추기 위해서 이렇게 하면 마치 이 집안에서 이 사회에서 나를 인정해주죠. 예 우리 코드 잘 맞죠. 우리 의사 소통 잘 되죠. 그러니까 저를 이 공동체에서 쫓아내지 마세요. 대전의 프로 야구팀이 한화죠. 그런데 갑자기 롯데에서 돈 줄께 스카우트 했어요. 그러면 환경이 뭐로 바뀝니까? 대전의 환경이 부산 롯데 팀으로 바뀌는 겁니다. 한화가 발목을 잡으면서 가지 말라고 해도 돈이 있는데 하고 새로운 롯데팀에 가서 저 어때요? 이 롯데팀하고 딱 맞죠. 음악의 유명한 여집사가 연주자인데 아 저사람은 음악밖에 몰라 이렇게 하다가 갑자기 어디에서 이번에 한국 음악 협회 회장 좀 맡아 달라고 하니까 예 맡죠. 음악이고 연주고 다 때려치고 한국 음악 협회 회장해 가지고 국회의원 찾아다니며 로비하고 있다고. 그게 뭐냐하면 사람은 옛날에 음악만 생각했던 그게 당신입니까? 지금 한국 음악 협회 회장해 가지고 돈만 밝히는 국회의원 내다보는 그게 당신입니까? 그러면 그 사람이 뭐라고 하죠? 그때 그때 달라요~하죠. 그때 그때 다른 거예요. 그래 사람이라는 것은 내가 누구인지 몰라요. 그런데 감사하게도 여기에 보면 이걸 타인의 욕망인데 이 타인 속에 누가 끼여드는가? 다른 이름으로 구원받을 수 없는 예수님께서 여기에 들어가 버립니다. 그러면 이 그림 한 번 보면 여기 나예요. 이쪽에서는 타인, 남이 땡기고 이쪽에서는 예수님이 땡기고 누가 더 힘이 셀까요? 피조물이 힘이 셀까요? 그 피조물을 만든 창조주가 힘이 셀까요? 바로 예수님이 힘이 세면 이 사람은 어디 속하느냐 하면 바로 이 사람을 가지고 예수 믿는 사람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걸 설명하기 위해서 몇 분 걸렸습니까? 엄청 길었죠. 그래서 예수 믿는 것은 본인이 믿는 것이 아니고 어느 쪽에서 당겨 주느냐가 나 예수님 쪽에서 당겨줘 하면 그 사람은 예수 믿는다고 이야기 하고 나는 하나님 예수님 보다도 남의 눈치 보면서 살아 하면 남들에 맞는 나 남들이 요구하는 나 역시 나는 없어요. 남들이 원하는 나. 하여튼 남이 어디 있는지 몰라. 결국 이것을 가지고 불신자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아까 보았던 사도행전 4장 19절 이해가 다 되었죠. 다시 보면 이렇습니다. 내가 너희들 앞에서 판단해 보라 그 이야기 입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뭐라고 합니까? 그 당시에 베드로와 요한을 미워하는 사람들, 세상 권력자들이 하는 말이 어이 이제부터 예수 말도 듣지 말고 예수 말도 가르치지 마라 하니까 베드로가 하는 말이 하나님이 땡기는 것이 중요하냐 너희들이 땡기는 것이 중요하냐 어느 것이 내가 살 길이냐 어느 것이 내가 영원히 살 길이냐 너희들이 한 번 생각해보라. 그런 이야기를 한 것입니다. 성경의 한 마디 한 마디가 이야기 할라고 하면 굉장히 길어요. 그러면 4장 19절에 자기가 믿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땡기고 있다. 당기고 있다. 그러면 목사님 질문 있습니다. 땡긴다고 하는데 실제로 땡기는 것입니까? 괜히 지가 착각하는 것 아닙니까? 실제로 땡기는 것 맞기는 맞아요. 땡기면 어디로 땡기는데요? 그것이 또 궁금할 것입니다. 사도행전 4장 2-4절을 한 번 봅시다.
2절. 백성을 가르침과 예수를 들어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는 도 전함을 싫어하여
3절. 저희를 잡으매 날이 이미 저문 고로 이튿날까지 가두었으나
4절. 말씀을 들은 사람 중에 믿는 자가 많으니 남자의 수가 약 오천이나 되었더라
말씀을 들은 사람 중에 남자수가 약 몇 명이라고 되어 있습니까? 오 천 명 되었죠. 참 신기해요. 사도들이 뭐라고 하냐면 예수님을 예를 든 거예요. 예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했다고 했죠. 그럼 방금 질문입니다. 하나님이 당긴다고 하는데 어떻게 당기고 어디서 당기느냐 그 힘이 어디서 나오느냐 하는 겁니다. 그 때 사도가 하는 말이 어떤 특정 사람을 저나 여러분들을 당길 때 그냥 당기는 것이 아니고 무슨 힘이냐 하면 5미터 당기고 3미터 당기는 것이 아니고 죽은 자를 부활시키는 그 힘으로 우리를 당기는 것입니다. 아시겠습니까? 그럼 재아한테 물어 볼께요. 그럼 부활의 힘으로 당길려면 우리는 뭐가 되어야 해요? 죽은 자가 되어야 합니다. 공식 간단한 거예요. 아주 쉽죠. 하나님께서 우리를 찾아 오실 때는 그냥 부탁하고 사정하고 구걸해서 교회 나와 달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너는 죽었는데 나 때문에 부활되는 거야 라는 부활의 능력으로 우리를 살려내는 거예요. 아까 공부하기 전에 잠깐 이야기 한 것 히브리서11장의 내용을 한 번 봅시다.
36절. 또 어떤 이들은 희롱과 채찍질뿐 아니라 결박과 옥에 갇히는 시험도 받았으며
37절. 돌로 치는 것과 톱으로 켜는 것과 시험과 칼에 죽는 것을 당하고 양과 염소의 가죽을 입고 유리하여
궁핍과 환난과 학대를 받았으니
38절. (이런 사람은 세상이 감당치 못하도다)저희가 광야와 산중과 암혈과 토굴에 유리하였느니라
아까 시작하기 전에 이 이야기를 했잖아요. 그 때 제가 무슨 이야기를 하던가요? 세례받은 사람의 믿음이 어느 정도 믿음이냐면은 어떤 믿음이냐면은 우리가 인생을 살면서 어떤 어려움이 오더라도 하나님께서 여기 톱으로 켜는 것과 돌에 치는 것과 죽는 것이 온다 할지라도 히브리서 11장 신앙인들은 그런 것이 올지라도 믿음을 버리지 아니했다 기억나요? 그 때 그들이 뭘 믿었냐면 예수님이라고 했죠. 예수님이 그들과 함께 있어서 죽은 예수님이 안 죽고 살아계셔서 살아계신 예수님이 그들과 함께 있어서 예수님의 세계. 부활의 영이 있는 부활의 능력이 있는 곳으로 그들을 잡아 당기니까 이 사람은 톱으로 켜는 것과 돌로 치는 것과 칼로 죽는 것도 무섭지 아니한 가운데서 계속해서 예수님께 감사할 수 있었다 이 말입니다. 그 이야기가 방금 사도행전4장 2절과 3절의 말씀. 사도들을 옥에 가두었는데 그 때 사도들이 하는 말이 우리를 가두어도 소용 없어요. 왜? 하니까 우리는 죽어도 괜찮아요. 왜? 예수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셔서 예수님이 일단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능력으로 계신 분이기 때문에 우리도 예수와 함께 있으면 죽어도 다시 삽니다. 따라서 당신들이 우리를 옥에 집어 넣어도 그것은 우리에게 허물이 되지 못합니다. 라는 말을 전했더니만 그것을 믿는 사람이 몇 명 되었다구요? 오 천 명 이었습니다. 믿는 사람이 오 천 명. 아니 그것을 믿어요? 아니 그것을 믿는단 말입니까? 여기 선풍기가 있다. 믿죠. 여기 컴퓨터가 있다. 믿죠. 여기 안경이 있다. 믿죠. 그런데 우리는 죽어도 다시 삽니다. 눈에 안 보이는데 눈에 안 보이잖아 그런데 오 천 명이나 믿어요. 이것을 가지고 성령의 역사라고 합니다. 보이지 않는 예수님의 영이 사람의 마음에 오게 되면 그 때 부터 도저히 믿기지 않는 것이 믿어지는데 아무나 개나 소나 다 믿어지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에 관해서 일어난 일이 믿어지는 놀라운 기적을 거듭났다 중생이라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죽은 자로 보는 것에 대한 즐거움. 피아노를 쳤다 피아노를 치다 삑사리 났다. 아이구 이번에 연주할 때 실수해서 자살하고 싶어. 이럴 때 하나님께서는 너는 피아노를 잘 쳐도 이미 죽은 자고 못 쳐도 이미 죽은 자다. 너가 부활되는 것은 너가 피아노 잘 쳐서 부활되는 것이 아니고 내가 너와 같이 있어 주었기 때문에 부활하신 주님이 함께 있어 주었기 때문에 너는 피아노 잘 치나 못 치나 밤에 오줌 싸나 안 싸나 관계없이 이미 너는 영생을 얻은 것이다. 이걸 믿는데 몇 명 믿었다고 했어요? 오천명 믿었어요. 요즘 한국 교회보다 낫습니다. 한국 교회는 맨날 기도하면 복 받습니다. 이런 소리만 하죠. 눈에 보이는 타인의 욕망 남들이 그럴싸하게 보이는 타인의 욕망. 내가 교회가서 이만큼 성공하고 사업 잘 되었다 남들에게 보이기 위한 그런 복을 복이라고 그것 달라고 교회 오는 사람들에게 여러분 이미 죽은 자요 라고 설명할 때 과연 오천명이 믿겠습니까? 이게 어디 교회 장사 안 되게 전부 다 복 받을려고 온 사람들한테 어디서 이미 당신은 죽은 자요 인격 모독하는 인간을 무시하는 인간의 선행을 무시하는 그런 말을 하냐 대박에 욕을 할 것입니다. 한마디로 말해서 사도행전은 세상이 감당치 못한 사람입니다. 그걸 경상도 말로 다섯자로 갈도 못한다. 갈지도 못한다. 그걸 두자로 이야기 하면 자유라고 합니다.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제가 전에 이런 이야기 했습니까? 간음한 여인보고 뭐라고 했습니까? 간음한 여인이 왔을 때 예수님께서 여자보고 먼저 물었죠. 너 왜 간음했냐고 묻는 것이 아니고요. 옆에 사람들 있던데 그 사람들 뭐할려고 왔지? 저를 나쁜여자라고 지적하려 왔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들 어디갔지? 네자로 없나이다. 그래 그럼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않을께. 너는 죄가 없어. 이걸 가지고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이게 요한복음 8장 이야기이고 요한복음 8장 32절에 보면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게 하리라 너가 진리를 가진것이 아니고 진리가 너에게 덮쳐 버리면 너는 진리안에 존재하게 될 것이다. 용서함 안에 어떤 짓을 해도 이미 용서가 된 그 영역안에 너가 놓여 있게 될 것이다. 왜? 우리 속에 누가 들어 오셨기 때문에? 우리를 용서해 줄려고 아예 작심하고 들어오신 예수님이 들어 오셨기 때문에. 그럼 우린 어떻게 용서를 받는가? 예수님이 그냥 들어 오신 것이 아니고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심으로 말미암아 이 피가 우리가 죄를 지어서 받아야 할 모든 하나님의 저주를 예수님이 중간에 나서서 대신 흘리신 피가 우리 죄 때문에 주어질 모든 지옥의 형벌을 지옥의 고통을 피가 중간에서 해소를 했기 때문에 이 피가 있는 한 우리가 지옥에 갈 일은 두 번 다시 없습니다. 이것을 가지고 기쁜 소식, 복음이라고 합니다. 이 복음이 내 고집보다 더 셉니다. 타인의 욕망과 유혹보다 더 셉니다. 누가 하나님보다 더 세냐? 이 대목을 한 번 찾아 봅시다. 사람들이 이 대목을 잘 모르는 것 같아요. 고린도전서10장 22절. 다같이 한 번 읽어 볼까요.
22절. 그러면 우리가 주를 노여워하시게 하겠느냐 우리가 주보다 강한 자냐
강한 자냐 라고 물었잖아요. 우리가 주님보다 안 강해. 강하지 않으니까 우리는 주님이 이끄시면 이끄시는대로 살아가게 돼. 자 그럼 지금까지 한 것을 정리해 보면 그러면 목사님 이 이야기가 그럴싸하게 보이긴 보이는데 내가 만약에 이 사실을 안 믿으면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그것은 처음에 이야기로 돌아가면 됩니다. 내가 안 믿는다 이것이 성립이 안 됩니다. 내가 라는 말을 할 시점이 불과 길어봐야 90년이고 짧은 사람은 20살 때 죽으면 20년 밖에 안 됩니다. 그러면 내가 안 믿는다고 내세울 때 내가 있어서 안 믿는 것이 아니고 뭔가 다른 조치가 있어 가지고 아까 조각품 깍이듯이 나 안 믿을거야 라고 하는 것이 내 마음대로 결정해서 안 믿는것이 아니고 환경이 깍이다 보니까 그런 조치가 나왔죠. 그러면 내가 있기 전에 이런 환경 자체를 누가 주셨느냐면은 바로 나라는 것이 생기게큼 생기도록 하기 위해서 미리 하나님께서 이러한 일들을 사건들을 일으켜서 배치를 한 것입니다. 나라는 것이 툭 튀어나온 것이 아니고 나보다 먼저 부모님이 계시고 나보다 먼저 형이 있고 하여튼 모든 지금 나 된것은 전부 다 주변에서 작용들이 벌어졌다 이 말이죠. 내가 믿든 안 믿든간에 그런 소리 하는 것 조차도 누구 계획안에 잡혀 있습니까? 하나님의 계획안에 잡혀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만약에 이 말을 반대할려면 첫 번째 나는 내가 알아서 태어났다. 두 번째 나는 내가 알아서 죽는다 이것이 성립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그 중간에 있으니까 내 인생은 내가 알아서 한다. 태어난 것도 내가 알아서 태어났으니까 죽는 시점도 내가 알아서 고를거야. 그래서 그 중간에 것도 내가 알아서 할거야. 사람은 1번도 떼내 버리고 2번도 모르면서 그 중간것만 뭐라고 고집하느냐면 내 인생 내가 알아서 한다. 믿고 안 믿고도 내가 판단한다. 자꾸 내가 들어가기 때문입니다. 사실은 내가 하지만 내 안에는 내가 없고 남들의 요구 조건이 담겨 있을 뿐입니다. 방금 이렇게 길게 설명한 것을 성경에서는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다라고 했습니다. 은혜란 말은 무슨 뜻이냐면 무엇이 나쁘다 무엇이 옳다에서 나온 것이 아닙니다. 은혜란 말은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이 거저 주었기 때문이지 내가 나쁜짓 하고 안 하고 했기 때문에 그러한 이야기 하고는 다른 이야기 입니다. 개입이 안 되는 거예요. 만약에 제가 지금 손으로 무릎을 치면 당신이 지금 무릎을 치는 것은 오늘 뉴욕 유엔본부에서 이명박 대통령이 연설을 했기 때문에 무릎을 쳤다고 하면 제가 이걸 인정 안하죠. 이명박 대통령이 연설한 것 하고 무릎 친 것하고 아무 관계 없죠. 마찬가지로 내가 사람을 죽였어 그럼 지옥갈거야. 아니예요. 사람 죽여서 지옥가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 죽인 것 하고 내가 지옥가는 것 하고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나는 역시 교회 목사가 되어서 천당 갈거야. 아니예요. 교회 목사되고 기도 많이 하는 것 하고 천국가는 것 하고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그럼 천국가는 것은 무엇 때문에 그렇다? 하나님의 은혜. 하나님이 주체가 되어 행동해서 나로 하여금 천국에 보내 주는 것입니다. 괜히 우리는 옛날 습관이 남아 가지고 자꾸 자기 선행과 자기 악행을 여기에다 개입을 시키는 버릇들이 있어요. 이것이 타인의 욕망이죠. 안 믿던 버릇 때문에. 안 믿던 버릇이라는 말은 내 인생은 내가 알아서 한다. 천당가고 지옥가는 것은 내가 알아서 하겠다 복 받고 저주 받는 것도 내가 알아서 하겠다. 버릇이 남아 있어서 그런데 그것은 당신 착각이고 어쨌든 나중에 가만히 보면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10분 쉽시다.
송재원(IP:61.♡.38.203)
09-11-02 03:32
사도행전 4장 18-19절을 제가 한 번 읽어 보겠습니다.
18절. 그들을 불러 경계하여 도무지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지도 말고 가르치지도 말라
19절. 베드로와 요한이 대답하여 가로되 하나님 앞에서 너희 말 듣는 것이 하나님 말씀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
어떤 분이 교목으로 취직을 했는데 그 학교 재단의 이사장 되는 사람이 와서 하는 말이 "성경 이야기 많이 하지 마세요" 라고 당부하고 갔다고 합니다. 기독교 재단인데, 기독교 학교인데도 불구하고 그렇게 하는 것이 이 세상 나라 입니다.
예수의 이름으로 이야기 하지도 말고 가르치지도 말라고 하니까 사도가 하는 말이 하나님 앞에서 너희 말 듣는 것보다 하나님 말씀 듣는 것이 옳은가 판단해 보라 우리가 보고 들은 것을 우리가 말하지 아니할 수가 없다 이렇게 되어 있죠.
이 이야기가 상당히 쉬운 것 같지만 굉장히복잡하고 어려워요. 왜 그런가 그림으로 설명해 보면 사람이 여기 있다고 합시다. 만약에 이 사람이 한 40년 살았다고 합시다. 앞으로 이 사람이 언제 죽을지 모르지만 한 90에 죽는다고 합시다. 그러면 이 사람이 바라볼 수 있는 하나님의 폭이 이것 밖에 안되고 그것도 인식이 4살 5살 정도인데 여기서부터 하나님을 알았다고 치고 유아 세례도 받았다고 치고 늙어 죽을 때 까지 하나님을 알았다고 해도 폭이 이것 밖에 안되겠죠.
그렇다면은 여기서 문제되는 것은 뭐냐하면 하나님이 계시다 안 계시다 하는 판단을 이 긴 하나님의 폭이 짧은 내가 판단하는 것이 옳은가 그른가를 한 번 생각해 보는 것입니다.
이렇게 생각할 수 있거든요. 나는 살아있다. 그런데 하나님은 있을까? 이렇게 생각할 때 누가 너를 살게 했는가? 우리 형이 먼저 있을 때. 우리 삼촌이 먼저 있을 때. 우리 아버지가 먼저 태어났으니까. 그럼 아버지는 누가 태어나게 했을까? 내가 없을 때는 하나님이 없다가 내가 태어나자 마자 하나님이 새로 생겼습니까? 아니죠. 그것은 아니다 말입니다.
세 살 때 부터 하나님을 알았다면 한 살 때 부터 두 살 때 까지의 하나님은 내 심장을 뛰게 하고 나를 살게 하고 두뇌가, 몸이 점점 더 성장하게 하고 그렇게 하신 분은 누구냐 하는 겁니다.
제가 이 말을 하는 것은 뭐냐면은 우리가 하나님을 알아 차리는 것 보다도 하나님은 더 많은 것을 은혜로 이미 주셨다는 것입니다. 내가 어느 순간에 아 하나님이 계시다 알아 차렸다고 해서 그 때 그 순간 부터 우린 하나님과 거래에 나선것이 아니다 이 말입니다.
그러나 시장에 콩나물 장사 아줌마는 그렇지 않아요. 오늘 저녁에 콩나물을 먹기 싫을 때는 그냥 스쳐 지나가면 돼요. 하지만 그 아줌마 하고 이야기 할 때는 아 콩나물 먹고 싶어 콩나물 얼마입니까? 묻는 그 순간 부터 그 아줌마하고 의미가 소통이 되죠.
그러나 하나님은 그게 아니고 내가 하나님을 찾기도 전 부터 이미 하나님은 나를 키워 오고 있었고 은혜 주고 있었고 살려 주셨고 공기 주셨고 햇빛 주셨고 심장 뛰게 하셨고 부모님 살아 계셔서 기저귀 갈게 하셨고 내가 있게 한 그 부모님을 있게 한 할아버지 할머니도 하나님께서 이미 만들어 놓으셨고 나보다 목사가 나이가 많게 해서 신학을 먼저 하게 하셨고 성경을 미리 더 알게 하셨고 이 모든 것을 볼 때에 우리는 뭐냐면은 그릇은 그릇인데 작은 그릇에 해당되는 것입니다.
경상도 말로 종지기, 간장담는 그릇이라고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가 홍수처럼 쏟아져도 기껏 담는 은혜가 어느 정도냐면 종지기 밖에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요 정도 차 있는데 나는 이 정도 찰 것을 생각했는데 빗물 받아 보니까 이것 밖에 안되니까 불평이 늘어나는 거예요. 왜 하나님께서는 나에게 이것 밖에 안 주십니까? 그러면 하나님께서 묻죠.
이 그릇은? 너라는 몸체는? 너라는 두뇌는? 그것은 너가 만들어 달래서 만들어 주신 것이 아니다는 것입니다. 그걸 성경적으로 보면 이렇습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만드셨을 때 나는 거기에 관여한 바 없었다. 굉장히 중요합니다. 신직수씨가 태어나기 전에 신직수씨가 하나님 나를 이렇게 만들어 달라고 하나님께 의견을 제시한 적이 있습니까? 없죠. 그러면 하나님께선 의견을 하지도 않았는데 덜렁 만들어 버렸습니다. 나를 만들어 놓고 만들어 놓았는데 그것을 종지기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제부터 하나님을 잘 알아야지 멋지게 알아야지 해도 내가 아는 은혜는 종지기 밖에 안 되는 것입니다. 지난 가야산 수련회 때 했듯이 이런 이야기를 하면 우리 학생들이 잘 이해될지 모르지만 제가 모험을 한 번 해 보겠습니다.
조각에 보면 형체가 드러나도록 큰 사각형 대리석 같으면 이것으로 로뎅의 생각하는 사람을 만들 때 처음에 대리석 덩어리가 있겠죠. 그러면 그 안에 로뎅의 생각하는 사람이 고민하면서 앉아 있겠습니까? 없겠습니까? 없죠.
그러면 이것을 어떻게 만들겠습니까? 밑에서 부터 파내면 되죠. 하나님께서 아빠하고 엄마가 있어 가지고 나라는 것을 주변부터 먼저 있고 아빠 엄마가 주변을 차지하고 있고 아빠 엄마 때문에 내가 태어났다고 하면 결국은 나는 누가 만들었느냐 하면 하나님께서 아빠, 엄마를 배치해서 나보다 먼저 된 여러가지 배치물들이 있어 가지고 배치된 것들로 인하여 그 안에서 로뎅의 생각하는 사람처럼 나라는 것이 발생된 거예요.
파들어 가는 거예요. 파들어 갈 때 로뎅의 생각하는 조각이 자기가 알아서 팠습니까? 아니죠. 바깥에 로뎅이라는 조각가가 파주니까 이거 작품하나 생겼구먼. 하고 보니까 저와 여러분들이다 이말이죠.
파고 남아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나를 만들면서 파고 있는데 아직까지 형성되지 않은 내가 아 저기는 조금 약간 더 파주세요. 쌍꺼풀 수술 좀 해주세요. 이렇게 요구할 수 있는 입장이 됩니까? 못 됩니까? 못하죠.
방금 이렇게 구차하게 복잡하게 이야기 했는데 그것을 한 마디로 말씀이라고 합니다. 우리가 말씀을 지키는 것이 아닙니다. 말씀을 지킨다는 것이 말이 안 됩니다. 그런 거짓말이 어디 있습니까? 주님께서 말씀대로 우릴 만드신 거예요.
그러면 저 사람은 어떻게 만들었습니까? 주님께서 말씀대로 만드는데 저 사람이 끌을 가지고 파다 보니까 내가 된 거예요. 예를 들어서 우리 이종분 집사님께서는 대전에 사시고 저는 대구에 살거든요. 그래서 제가 대전에 한 번 구경해 볼까? 하고 어슬렁 거리다가 이 집을 방문해 볼까? 나미아불타불 이런 식으로 찾아 온 것이 아니고 외부에서 자극을 해서 제가 여기까지 왔잖아요.
그렇다면 여러분들이 우리 재아나 재원이가 커가는데 엄마 없이 엄마 나 이제 내 힘으로 클거야 살거야 라고 할 수 없어요. 아마 커서 나이 삼 십 되서는 할 수 있어요. 하지만 반드시 여러분들을 여러분이 되도록 도와 주는 분들이 있어요.
끌을 가지고 정을 가지고 도와 주는 분이 있어요. 예를 들어서 재아가 그런 아이는 아니지만 술을 먹고 왔다 할 때 엄마가 너 앞으로 술 마시면 죽어 이랬단 말이죠. 그 다음부터 술을 안 먹었다. 그렇다면 엄마가 끌을 가지고 정을 가지고 재아를 뭐로 만들었다? 두 번 다시 술을 안 먹는 인간으로 짤라 내었죠.
이것은 누구나 마찬가지 입니다. 어느 모든 것도. 그래서 이걸 가지고 철학에서는 사랑이라는 것은 내가 만드는 것이 아니고 환경이 만든다 세상에서는 철학에서는 환경이 만든다 하고 성경에서는 하나님이 말씀으로 만든다 이렇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좀 더 해봅시다. 여기까지 이해 된다고 하고. 좀 더 깊이 들어가 봐요. 로뎅이라는 조각가가 만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고 하자. 로뎅의 조각품이 전시되어 있다고 하자.
그런데 관람하는 사람이 물어 보는 거예요. 어이 조각품 무슨 생각해요? 묻는다고. 그러면 조각품이 말을 못하잖아요. 그러면 옆에 있는 사람이 조각품이 말 못해. 그러면 누구한테 물어봐야 해요? 만든 사람한테 물어야지. 이것이 무슨 뜻인줄 아시겠죠? 그러면 우리 누가 만들었죠?
아까 강의 새로 해봅시다. 우리 누가 만들었죠? 하나님이 말씀으로 만드셨죠. 그러면 내 인생 왜 이 모양 이 꼴 입니까? 그걸 누구한테 물어봐야 해요? 하나님한테 물어봐야지 왜 나한테 물어봐.
그런데 하나님을 절단시켜 놔버리면 그걸 누가 답변해야면 답변할 자격도 안 되는 내가 답변해야 해요. 내가 공부를 이렇게 못해서. 내가 그 때 실수를 해서. 그 때 내가 아내한테 잘해 주었으면 이혼하지 않았을텐데. 내가 그 때 선생님 말씀 잘 들었으면 수학 성적이 오르텐데...
모든 것이 다 내가 행동만 잘했으면 내가 지금보다 더 나을 수 있고 내가 실수만 안 했으면 지금보다 우수할건데.
갑자기 내가 내가 내가 이것을 가지고 주체라고 합니다. 전부 다 내가 내가 합니다. 그러면 자기만 내가 내가 하는 줄 알았더니 옆에 있는 사람들도 내가 내가 내가 하고 있는 거예요. 옆에 있는 사람도 하나님하고 묻지도 않고 나도 묻지도 않고 그러면 이 둘 사이에 뭐가 생기느냐면 시합이 생기고 경쟁이 생기고 이거는 비교가 생기고 이것은 스트레스 받죠.
너가 잘 났는지 내가 잘 났는지 한 번 붙어보자. 옆에 있는 아파트하고 이쪽 아파트하고 서로 싸우고 옆집하고 싸우고 같은 직장 동료하고 싸우고 같은 직원들하고 싸우고 상사하고 싸우고 서로 싸우고 옆에 교회에서 같은 집사들하고 싸우고 목사들하고 싸우고 전부 다 모든 싸움의 이유가 뭐가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까?
내가 나를 만든다. 내가 나를 만든다의 대표적인 구호가 뭐냐면은 "I can do it" "나는 그것을 할 수 있다." 다른 말로 네 자로 하면 "하면된다." 전부 다 이것이 뭐냐면은 주체에서 나왔습니다.
주체에서 나오는데 이 주체가 어디서 나왔느냐면 환경에서 돌출된 거예요. 뭔가 판에 있으면 신문지나 종이 있습니까? 이게 환경이면 환경에서 쏙 내밀면 올라오죠? 올라오는 요것을 주체라고 해요. 그런데 올라올 때 뭘 끌고 올라왔어요? 주변에 있는 종이를 끌고 왔죠? 이 종이를 환경이라고 하고 고상한 환경의 내막을 까보면 타인의 욕망이라고 하죠.
남들이 나한테 기대하는. 우리 재아나 재원이가 남들이 나한테 기대하는, 제일 가까이 기대하는 분이 누구죠? 엄마죠. 아침에 일어났다. 말은 안 하지만 엄마 나 오늘 어떤 사람이 되야 해? 라고 묻는 거예요.
만약 아빠가 계시면 아빠 나 오늘은 어떻게 아빠 맘에 드는 아들이 될 수 있겠어? 라고 묻는 거예요. 아내 같으면 여보 내가 오늘은 당신한테 어떤 아내가 되야 해? 참 어제 당신이 나한테 이런 이런 거 원했지? 봐 당신 보란듯이 내가 이런 이런 것 해가지고 내가 얼마나 당신한테 훌륭한 아내인가 본때를 보여 주겠어.
분명히 말은 주체인데 걸려 있는 것들이 전부 다 누구냐 하면 가까운 주변 인물들이예요. 교회에 갔다. 목사님 저 어때요? 저 신앙 어때요? 이만하면 괜찮은 신앙이죠? 저 기도 어때요? 괜찮게 기도하죠? 저 헌금 액수 어때요? 괜찮죠? 전도 세 명 했는데 목사님 칭찬해 주세요. 전부 다 이유예요.
남이 없으면 내가 없는 거예요. 나는 남이 만들었어요. 그걸 가지고 사람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이라고 하는 거예요.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이 말이 얼마나 엉터리인지.
왜 자꾸 두리번 거리는지 모르겠어요. 나라는 것을 작크를 열고 쭉 쪼개보면 안에 뭐가 들어 있느냐 하면 전부 다 남이 들어 있어요. 넌 이렇게 살아야 해. 넌 이렇게 오는 거야.
예를 들면 어린 아이가 집에서 옷을 벗어요. 그런데 옷 벗고 골목에 나갈려고 하니까 엄마가 말려요. 애 바깥에 나갈 때는 옷을 입어야 해. 그렇지 않으면 다른 사람이 엄마한테 욕해. 애들 옷도 안 입히고. 그럴 때 어린 아이는 아하 내가 엄마하고 있을 때 하고 바깥에 있을 때 하고 차이가 나는구나 바깥에 있을 때는 바깥에 있는 사람들이 요구한 것을 들어주어야 하는 것을 알죠.
그 때 비로소 아이는 자아 의식, 스스로 의식이 생기는데 자아 의식은 결국 누가 요구한 거예요? 남이 요구했어요. 만약에 남이 요구한대로 되지 않으면 그 아이는 자아 의식이 상실되어서 정신병 치료를 받아야 됩니다.
나중에 그 아이가 옷을 처음 입으니까 어색할거 아닙니까? 그래서 집에 오면 홀라당 벗어 버리는 겁니다. 어떤 애는 옷을 짓밟기도 하고. 나 옷 안 입어. 심지어 여자 아이 같으면 나는 바지 안 입어 난 꼭 치마 입어 왜냐하면 치마 입고 밖엘 나가보니까 어휴 애는 꼭 백설공주 같애. 백설공주라는 타인. 동화책에서 백설공주 라는 독일의 어떤 공주 이야기를 들어 가지고 그 백설 공주의 욕망이 자기 자아로 바뀌어 버린 거예요.
그 다음 부터는 백설 공주가 되든 신데렐라가 되든 되어야 한다는 거예요. 그게 될까 의심했는데 치마 입고 밖에 나가 보니까 애는 백설 공주라는 소리를 듣는 거예요. 그 말을 애들은 곧이 듣고 진짜 자기가 백설 공주인 줄 아는 거예요. 그 때 부터 바깥에 나가면 백설 공주 소리를 들어야 하는 거예요.
그런데 하루는 치마를 안 입고 바지를 입고 나가니까 백설 공주 소리를 안 해 아하 남한테 칭찬 받는 것이 나에게 선이 되고 같은 말로 진리가 되고 나에게 욕을 하는 것이 악이 되는 비진리가 되는 이런 관계에 들어 가는 겁니다.
만약에 그 아이가 벗는 것을 좋아해 가지고 나이 20세 넘어서도 벗어가지고 삼성 그룹에 취직을 하면 취직 되겠습니끼? 어디 미친 나시족이 와 가지고 이렇게 하지 않겠습니까?
결국엔 뭐냐 회사 취직하는 것은 본인이 삼성 그룹에 취직하고 싶어도 본인 생각이고 삼성 그룹이 원하는 인간상 남들이 원하는 인간상 연주자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