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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

대전강의090827a자유게시판사도행전

대전강의090827a

이름 : 이미아(IP:115.41.199.184)

자, 시작하겠습니다. 사도행전 4장 10절을 봅시다. 10절에서 12절을 제가 읽어 보겠습니다.

10절. 너희와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은 알라 너희가 십자가에 못박고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이 사람이 건강하게 되어 너희 앞에 섰느니라

11절. 이 예수는 너희 건축자들의 버린 돌로서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느니라

12절.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

이 없음이니라 하였더라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구원의 개념이 기존 한국이 말하는 개인 구원하고는 전혀 상관이 없습니다. 아니 이건 2000년 동안 기독교가 오해하고 있었습니다. 다른 이름으로 구원 받을 이름이 없다고 하니까 "나 살았구나!" 갑자기 개인 구원 위주로 확 바뀌어 버렸습니다. "나 살았어!!" 그런데 예수 안 믿는 옆집의 아저씨는 이젠 지옥간다. 항상 개인 구원으로 전락하고 말았습니다. 그렇다면 뭐가 없어지느냐면 구약의 개념이 있잖아요. 구약의 성전 개념, 구약의 거룩 개념은 홀라당 아무 자기하고 상관이 없고 나는 내가 예수 믿어서, 예수란 이름 믿어서 내가 달랑 구원 된 셈이 되버려요. 그러면 구약에 내려오는 그 모든 천계와 단계 모든 발전은 무용지물이 되버려요. 쓸데 없는 짓이 되고 말았단 말입니다. 만약에 오늘날 기독교도 전체 마찬가지 입니다. 기독교나 한국 교회가 잘못 생각하는 것처럼 "예수 이름 믿으면 구원 받습니다." 라는 것을 개인 구원적으로 할 것 같으면 창세기부터 사도행전 앞 까지는 다 소용 없습니다. 안봐도 되고 없어져도 괜찮고 그것은 무효며 과거처럼, 과거라는 사실 자체도 날라가 버리니까 이렇게 됩니다. 그렇다면 오늘 본문에 다른 이름 앞에 뭐라 되어 있느냐 하면 모퉁이의 머릿돌. 모퉁이의 머릿돌이라는 개념이 없이 모퉁이의 머릿돌 위한 하나님의 이름인데 "하나님이 이 이야기를 왜 집어 넣었지" "음 나하고 상관 없어" "음 그건 나는 몰라도 돼" 그건 잘라 버리고 그 뒤에 있는 것 다른 이름으로 구원 받을 이름이 없다. "나 예수 이름 믿습니다." 라는 자기 죽어서 천당가는 것 그것만 고수하고 앞에 모퉁이 돌의 의미를 잘라 버린 채 뒤에 것만 달랑 삼켜 버릴 때 그것은 오해도 보통 오해된게 아닙니다. 이게 바로 오해되니까 그 뒤에 나오는 사도행전 16장 31절도 오해되는 거예요. 버스 정류소에 보면 교회마다 천막에다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그 다음에 뭘 얻을 것이라 구원을 얻을 것이라 글쎄 구원 문제가 사람들이 생각하는 불교나 일반 종교에서 개인 구원하고 아무 상관이 없는 것입니다. 이 구원은 공간 문제입니다. 공간 문제이고 이 공간을 수요일 날 뭐라고 장로님 뭐라고 표현 했습니까? 국자죠. 국 뜨는 국자. 개미가 큽니까? 국자가 큽니까? 재아야 개미가 크니? 국자가 크니? 국자가 크지. 그러면 국자에 뭐가 담겨? 개미가 담기지. 그게 구원이예요. 예수 있고 내가 예수 믿어서 예수 믿는 어떤 카드를 내가 쥐는 것이 구원이 아니고 뭔가 담겨야 됩니다. 담기게 되면 뭐가 생기냐면 두 가지 개념이 발생되요. 안이 있고 밖이 있고 국자 안이 있고 반대로 국자 밖이죠. 국자 안에 있는 개미하고 국자 밖에 있는 개미의 운명은 완벽하게 다르기 때문에 그처럼 구원 밖에 있고 국자 안에 있는 개미는 구원 안에 있는 것입니다. 개인이 예수 믿는 실력을 발휘하는 것이 아닙니다. 푹 뜨이는 것입니다. 푹 뜨일 때 사람들은 주께서 자기만 뜨는 줄 알지만 그게 아니고 나를 구원시킨 요건들이 갖추어진 환경과 배경과 더불어서 함께 푹 뜨는 거예요. 나무 옮겨 심을 때 어떻게 합니까? 흙 탁탁 다 털어내고 나무만 덜렁 옮겨 심으면 나무 죽잖아요. 그런데 어떻게 합니까? 새끼줄 가지고 뭘 하죠? 뿌리 부분을 동그랗게 해가지고 같이 살았던 흙과 더불어서 새끼 묶어서 5톤 트럭에 실어서 한 이백 만 원 받고 심지 않습니까? 그처럼 함께 나를 구원되게 하는 요건을 가지고 뭐냐? 그게 바로 성전 이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나의 구원이 아니고 성전. 성전으로서의 구원되면 성전이라는 국자고 나는 성전 안에 있음으로서 성전 안에서 구원 받는 것입니다. 시편 84편에 나는 세상의 천 날보다도 주의 전에 한 날 문지기로 있는 것이 좋사오니 마치 뭐와 같은 신세다? 성전에 집을 짓고 사는 참새와 제비 둘 보금자리. 제비는 성전이 있음으로 덩달아 삽니다. 자기 힘으로 사는 것이 아니고 빌붙어서 그것을 생물에서 뭐라고 합니까? 기생이죠. 악어와 악어새와 같은 기생관계. 공생관계처럼 기붙어서 받는 국자 안의 개미처럼. 하나님이 성전 만드는데 거기에 들러리로 참여된 이유 때문에 구원 받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주의 이름은 나를 위한 주의 이름입니까? 성전을 이루기 위한 주의 이름입니까? 당연히 성전을 위한 주의 이름이고 그리스도의 몸을 위한 주의 이름이고 우리는 거기에 국 뜰 때 같이 뜨인 거예요. 성전 만드는 그 능력이 어디서 나왔다? 나에게 안 나왔습니다 해서 나의 이름은 소용 없고 다른 이름으로는 구원 받을 필요 없고 누구 이름이다? 주의 이름 아닙니까? 다른 이름 속에 누가 포함되었습니까? 바로 나도 포함되죠. 내 이름으로 내 결정으로 구원 받는 것이 아닙니다. 전에 주일 날 했습니까? 로빈슨 크루소에서 자기 하인 이름이 프라이데이라고 했죠. 원주민 이름이 없어요. 그 하인은 이름이 없어도 괜찮아요. 그런데 주인이 로빈슨 크루소가 "어이 이제부터 프라이데이, 금요일이라고 해라." "왜요?" "내가 너를 만날 때 금요일에 만났으니까." 그러면 그 아이를 프라이데이라고 불러도 원주민 그 아이에게는 아무 의미가 없어요. 지가 지 맘대로 불러서. 그런데 로빈슨 크루소는 그 하인을 부를 때마다 무슨 시간관을 고수하느냐면은 "아 나는 금요일 불렀어." 로빈슨 크루소에게는 금요일이 생각나는 것입니다. 이것이 호명이고 호출입니다. 호명이 되면 호명된 주체자 속에 호명 받은 사람의 모든 자기 주체는 박탈을 당하면서 어디에 흡수되느냐 하면 호명한 그 노선에 따라서 갈리게 되버려요. 그러면 호명하신 분이 만들어낸 이미지, 준비 되어진 그 세계가 있죠. 그 세계가 있을 것이 아닙니까? 그 세계속에 호명 당하면서 호출 당하면서 거기에 존재하게 되면 그 사람의 개인적 존재 의미는 의미가 없고 이것이 그물망인데 그물망 속에 하나의 포인트로 자리잡겠죠. 와 보니까 자기는 d라는 지점에 호명되서 왔는데 c라는 지점에 어떤 친구가 와 있더라는 말입니다. "야 너 교회 나왔네" "넌 고등학교 때 절에 안갔나?" "절에 갔었지" "니 엄마 보살이고" "그래 너는 술 먹었잖아?" "술 먹고 개판 쳤잖아?" "그래" 그런데 어떻게 해서 한 교회에서 만났느냐 할 때 서로의 자기 자랑하면 안되겠죠? 내 실력이 좋아서 기도를 해서 하면 안되죠. 어디로 가야 합니까? 그물 구조. 이 그물 구조의 주체를 누가 만들었느냐 프라이데이라. 프라이데이라고 호명했던, 무에서 없는데서, 없다는 말은 뭐도 없다? 이름도 없다는 말이예요. 우리 학생 이해 되겠나? 이름이라는 것은 존재하고 난 뒤에 이름이 있는 거예요. 아 고등학생에게 내가 너무 심한 말을 한다 하여튼 알아서 하세요. 그 때 이름이 없을 때는 누구만 존재했습니까? 주님만 존재했죠. 골로새서 1장 16절 모든 이름이 먼저 존재하신 분이 호명할 때마다 이름이 붙여지면서 너는 아담이야 아담은 자기 나름대로의 운명은 없어요. 없고 예수 그리스도를 위한 아담으로서 살아갈 팔자와 운명을 그냥 배급받은 거예요. 하나의 그물 구조에 배급받은 것입니다. 나중에 보니까 그 그물 구조가 창세기 3장 15절의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이 그물 구조만 있는 것이 아니라 뱀의 후손의 그물 구조도 있어 가지고 둘이 싸움을 해야 전쟁을 벌려야 할 그 그물 구조에 가담이 된 것입니다. 노아가 방주 만들 때 방주 만든다는 말은 방주를 만들어도 안 들어갈 사람들의 새로운 질서가 있죠. 노아 여덟 식구는방주에 들어갈 질서가 있죠. 언약은 구분이고 쪼개는 것이고 차별이고 양과 염소 하듯이. 그러니까 우리가 알아서 방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고 우리를 방주에 넣기 위해서 노아를 미리 앞서서 노아 만들고 방주 만들고 집어 넣고 그 다음에 집어 넣은 가운데 또 갈라지고 하는 모든 그 세분한 갈라짐은 누구의 이름입니까? 다 주의 이름에 의해서 이미 장착된 그 안에 주의 이름이 갖고 있는 풍성한 내용이 그게 우리라는 도구를 통해서 계시화 된 것입니다. 이게 완전히 현실화 될 수 밖에 없다 이 말입니다. 그러면 이 점을 쉽게 하기 위해서... 안경이 십만원 짜리인데 육만원 주었습니다. 십 만 원 짜리인데 많이 깎아서. 학개 봅시다. 학개 2장. 지금은 어렵지만은 강의 하면서 되풀이 합니다. 이게 기초기 때문에 지금은 이해 안되지만 되풀이 하면서 익숙해지도록 하겠습니다. 학개 2장 10-12절에 보면

10절. 다리오 왕 이 년 구월 이십사일에 여호와의 말씀이 선지자 학개에게 임하니라 가라사대

11절. 나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니 너는 제사장에게 율법에 대하여 물어 이르기를

12절. 사람이 옷자락에 거룩한 고기를 쌌는데 그 옷자락이 만일 떡에나 포도주에나 기름에나 다른 식물에

닿았으면 그것이 성물이 되겠느냐 하라 학개가 물으매 제사장들이 대답하여 가로되 아니니라

갑자기 이 질문을 왜 해야되는지. 다시 이야기 합니다. 사람의 옷자락에 거룩한 고기를 쌌는데 하나님께 드릴 거룩한 제물을 쌌는데 만약에 옷자락이 거룩한 제물 말고 다른 일상적인 물건과 음식에 닿았다면 그 옷자락이 거룩하겠느냐 거룩하지 안하겠느냐 하는 것을 묻는 것입니다. 이것은 초등학생도 아는거죠. 거룩한 물건을 쌌더니만 그 옷자락이 거룩한 물건을 감쌌다는 그것 때문에 그 옷자락은 거룩한 옷자락이 되었죠. 그런데 그 옷자락이 거룩한 물건을 싼 것이 아니고 어떻게 실수든 오류든간에 의도든간에 그것이 만약 일상적인 거룩하지 않은 물건을 쌌을 때 과연 그 옷자락이 거룩한 옷자락이 되겠느냐는 문제를 제기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 본문에서 중요한 것은 바로 우리가 그렇게 생각했던 율법의 핵심이 뭐냐 율법의 본질이 뭐냐를 이 이스라엘이 망해봐야 알아요. 무슨 말이냐면 사람은 율법을 어기면 자기가 잘못해서 율법을 어겼다 하잖아요. 제가 결론 내립니다. 하도 어렵기 때문에 잘못해서 사람이 율법을 어긴 것이 아니고 환경이 바뀌어서 거룩이 비거룩이 된 것이예요. 옷자락이 우리가 옷자락이 아니라니까요. 드롭포스의 반짝반짝 반짝이가 포장을 한다면 아까 떡을 우리가 샀잖아요. 떡은 우리고 떡의 포장지가 이거라면 포장지가 누구 소유냐면 율법에 맞는 포장지예요. 그러면 우리는 뭐였습니까? 떡이었습니다. 떡인데 포장지가 만약에 더러운데 묻어 있다면 그 더러운 포장지에 우리가 있다면 거룩합니까? 거룩 안합니까? 이걸 묻는 거예요. 안하죠. 그럼 율법은 우리가 지키고 안 지키고가 문제가 아니고 율법 나름대로의 거룩만 유지 된다면 우리는 그 포장지에 싸여 있기만 하다면 우리는 뭐가 되요? 거룩한 백성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느냐면 처음부터 율법 줄 때 사람들이 오해 했어요. "주여 지키겠나이다." "지켜서 내가 구원 받겠나이다." 자꾸 이 옷자락을 자기가 알아서 취득할려고 했던 것입니다. 나중에 망해 놓고 보니까 내가 옷자락을 거룩하게 유지하는 것이 아니라 세탁소 맡기는 것이 아니라 옷자락이 거룩하면 그 안에 뭐가 되었든지 간에 거룩이 되는 방식으로 이스라엘이 처음 구원이 됐었어요. 나중에 옷자락 자체가 더러워지니까 이 사람들은 "아이구 더러우면 할 수 없지" "그럼 우리 손으로 옷자락 만들지" 글쎄 너희들 손으로 안된다는 것이라니까요. 옷자락이. 율법의 완성이 우리들 손으로 안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기껏 "최선을 다해 보겠습니다." 요즘 한국 교회가 하는 것처럼. "뭐 안되지만 인간으로서는 연약하지만 그저 최선을 다해서 말씀을 지켜 볼려고 애를 쓰겠습니다." 그것은 안일한 개념, 안과 밖의 개념, 국자 개념 그 개념을 완전히 오해한 것입니다. 율법 자체가 우리를 담아내는 국자같은 기능을 하는데 우리는 그동안 부자 청년처럼 "제가 어릴 때 부터 십계명을 지켰나이다." 자기가 주체가 되는 거예요. 그러면 아까 로빈슨 크루소처럼 프라이데이가 아니고. 로빈슨 크루소가 원주민하고 함께 있을 때는 그 원주민 이름은 계속해서 프라이데이, 금요일이죠. 그런데 만약에 로빈슨 크루소가 그 섬을 떠나면 원주민 이름은 뭡니까?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지요. 없는 거예요. 그런데 사람들은 교회 가면서 뭐냐 하면은 "주께서 나보고 프라이데이라고 해줬어." 자기가 주께서 주신 호명을 자기가 쥐고 있더란 말이죠. "나 내가 예수 믿었어." 자기가 예수 믿은 것을 자기가 쥐고 있으면서 그것으로 구원 받을려고 하더란 말입니다. 그러면 주의 이름이라는 것은 결국은 누구 이름입니까? 자기 결심이었고 자기 오기였고 자기 다짐이었고 이것은 근원적으로 성경 통째로 다 오해한 것입니다. 창세기1장부터 요한계시록 22장까지 다 오해한 것입니다. 보통 문제가 아닙니다. 대전 강의에서 이걸 다 뜯어 고칠수는 없고 찬찬히 풀어 봅시다. 기초부터 해가지고 보통 문제점이 아니예요. 뭐가 잘못되도 크게 잘못된 거예요. 왜 그럴까? 바로 성전 개념이 빠져 버려서 그렇습니다. 성전 안에서 성전을 국자로 보지 않고 자기가 성전에 나와서 뭐 지키면 구원 받고 성전 내버리고. 우리는 모퉁이 돌에 합류되어 있는데 우리는 자기만 구원 받으면 "뭐라고?" 모퉁이 돌이 무슨 뜻인지 몰라요. 내가 구원 받았는데 모퉁이 돌이 왜 필요한데 내가 지금 예수 믿고 예수 믿으라매 예수 믿습니다. 모퉁이 돌이 왜 필요한데? 다시 말해서 안과 밖이 성립이 안 돼요.분명히 예수 믿었으면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 받는데 분명히 성경에서 사도 바울이 그렇게 너는 예수 안에서 예정되었고 예수 안에서 구원되었다고 반드시 액센트가 예수 안에 있는데 우리는 관심사가 자기 죽어서 천당가는 것만 급급하다 보니까 뭐가 빠졌느냐면 예수 안에서가 왜 필요하지? 내가 예수 믿고 내가 구원 받으면 되지 내 행함으로 구원 받으면 되지 예수 안이 왜 필요하지? 이렇게 나와요. 그래서 목사가 "아이구 예수님의 행위로 당신이 구원 받습니다." 하면, "글쎄요 동의합니다." "내가 다시 해보께." "내가 해보께 맞는가 보세요." "예수 안에서 내가 예수 믿어서 난 구원 받습니다." "글쎄 그게 아니라니까요." 그럼 그 사람은 "어쩌라고 내보고 시키는대로 했잖아. 시키는대로." 목사님이 답답해서 "글쎄 자기 이름을 부인하라니까요." "알았어 알았어 참 귀찮아 죽겠네 그럼 다시 할께 예수 안에서 나를 부인하고 예수 믿었습니다." "글쎄 그게 아니라니까요." '그럼 어쩌라고 시키는대로 다했는데 어쩌라고." 이 문제가 바로 여전히 자기가 어떤 그물에 걸린 금이라는 사실을 알지 못합니다. 그런데 이 그물은 누가 짠다? 우리가 짜는 것이 아니고 고마운 것은 우리가 안 짜도 이미 대전 바닥에 다 짜여있고 대구 바닥에 다 짜여 있고 모든 전 우주에 지금부터 태어나는 모든 인간에 그물 구조가 다 짜여 있습니다. 창세기 3장 15절에서 뱀의 후손, 여자의 후손 이미 그물이 다 짜여져 있어요. 짜여져 있는데 이제 배치만 남아 있죠. 예를 들어서 어떤 아파트 그물 구조에 이웃집 아파트 여기가 몇 동이죠? 104동이죠. 105동에 이사를 왔어요. 105동에는 어떤 애가 태어나서 105동에 채울지 모릅니다. 이 그물 구조는 이미 어떤 때는 구멍이 나있고 어떤 때는 채워져 있어요. 그러니까 이미 구조는 우리가 짜는 것이 아니고 우리가 예수 믿고 열심 낸다고 기도한다고 짜는 것이 아니고 이미 짜여져 있는 구조에 주께서 야곱을 창세 전에 예정하사 야곱을 태어나게 하사 여기에다 집어 넣고 그 다음에 다른 동에 가면, 지옥가는 동에 가면 그물 구조가 짜여 있어요. 그러면 에서는 어떻게 됩니까? 이것은 미움받기로 작정된 구조거든요. 에서는 여기에 들어가는 겁니다. 그래놓고 하는 말이 너희들이 야곱은 구원받기로 작정된 것은 야곱의 행함도 아니요 에서가 여기 지옥가게 된것도 에서의 악한 행함이 아니요. 이미 모든 것이 말씀에 응하려 함이니라. 인간의 행함이 아니고 말씀이 응하도록 그렇게 짜여져 있다는 말입니다. 그러면 그리스도인이 그렇게 알 때 진짜 성령받은 사람은 뭘 압니까? 이 전체를 모퉁이 돌이 된 것은 예수님이고 예수님에 의하여 이것이 하나의 성전이 되니까 "나는 성전에 가담했을 뿐입니다" 라는 말을 다른 말로 풀면 다른 이름으로 구원 받을 수 없고 오직 주께서는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우리로 하여금 여기에 가담시켰다는 것을 외부로 고백하고 증거하는 것입니다. 이게 바로 사도행전입니다. 우리 대전 강의의 주제가 되는 사도행전이 이런 구조로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 구멍에 누가 들어가느냐 하는 것은 사도 바울을 통해서 돌아다니면서 전도해보면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하고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는 방식으로 이것이 들어오죠. 그렇다면 에서 쪽에서 보면 가능성이죠. 가능성이 증거되는 쪽이라면 여기에 야곱쪽, 사도 바울 쪽에서 보면 불가능성이죠. 철저하게 처음부터 불가능성이죠. 내가 예수 믿는 것은 불가능성이죠. 제가 옛날에 했던 게임한 것에 이런것이 있습니다. 통에 장기판 핀 같은 것을 동그란데 구멍이 뚫려가지고 타넘기도 하고 빈칸에 넣는 것을 아십니까? 연세 되신 분들 알고 요새도 그런 게임이 있는 줄 모르겠습니다. 여기가 구멍을 다 뚫어가지고 누가 먼저 빨리 차지하느냐 그런 게임이 있어요. 구멍이 뚫려 있다는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구멍에 먼저 선점하고 꼽으면 되는 거예요. 이미 구조가 창세기 3장에 짜여져 있는 것입니다. 그 모퉁이 돌은 누구였다? 누가 차지했다? 예수님이 먼저 차지한 것입니다. 그걸 지금 사도 바울이 이야기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건 일단 들은 이야기지만 모른다고 치고. 한 번 들어서 이해할 수 없는 것이니까. 이걸 쉽게 제가 말씀 드리겠습니다. 성경은 영적 세계라는 것이, 영적 세계라는 특징은 말씀의 완성 세계입니다. 영적 세계 바깥은 육적 세계죠. 그러면 영적 세계에 이미 들어 온 사람의 특징은 뭐냐하면 여기는 말씀이 완성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완성되자 완성되게 하자가 아니고 이 세계는 우리의 행함과 관계없이 예수님의 행위로 이미 완성된 말씀 세계에 들어온 거예요. 이 세계에 들어온 사람은 뭘 느끼느냐면 뭘 확인하느냐면은 "내가 안 해도 일 다해 놓았네." "내가 십일조 이런 것 안 해도." 우리의 행함과 관계없이 구원 받은 모든 장치는 이미 해 놓은 것입니다. 이런 사람은 여기서 뭐가 오느냐면 보증금이 주어지죠. 이미 했음을 이야기 해주는 보증금. 사도행전 2장에서 베드로가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너희들이 구원 받은 조건은 이미 완료되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완료 되었기 때문에 비로소 주어지는 현상이 뭐냐면은 성령 세례라고 합니다. 성령세례는요. 베드로 설교에 나옵니다. 주께서 하나님의 우편에 앉아 있을 경우에만 성령세례가 아무 댓가 없이 죄인들에게 주어진다고 요엘에 예언되어 있거든요. 요엘이라는 그 말씀이 과연 완성되었는지 완성되지 않았는지 오순절 날 확인되었습니다. 오순절날 시험도 안 쳤는데 뭐 영수국 공부도 안했는데 젊은이나 늙은이나 관계없이 뭐가 옵니까? 성령을 받게 되면 그들이 성령을 받게 되면 한결같이 정답을 이야기 해요. "우리는 주의 이름으로 구원받았습니다:" 라는 정답을 이야기 해요. 요엘서에 뭐라고 되어있느냐면 성령이 오게 되면 반드시 너희 입에서 기이한 고백이 있을 것이다. 그것이 뭐냐면은 "우리는 주의 이름으로만 구원됩니다." 라는 기이한 현상이 일어나거든 그게 요엘서의 완성인 줄 알아라 이것들아! 복 받은 줄 알아라 이것들아! 그렇다면 주의 이름이 왔다는 것은 프라이데입니다. 내가 스스로 내 이름을 짓는 것이 아니고 이미 주의 이름이 와 버리면 우리 이름은 삭제되버리고 주의 이름이 내 이름을 대신하죠. 대신. 참 대신하면 대구신학교가 생각이나서 뉘앙스가 안 좋은데..대구신학교 말고. 대신하게 되면 우리는 주님 없이는 존재 의미가 없어져 버려요. 그것을 학개서는 성전 없이는, 모퉁이 돌 없이는 성전에 포함된 사람이 아니다는 말입니다. 반드시 성전에 포함된 사람은 도대체 내 거룩이 어디서 왔지 라고 살펴보니까 모퉁이 돌에서 온 거예요. 그렇니까 하는 말이 주의 이름은 어디에 위치하고 있다? 모퉁이 돌 위에 위치해 있고 모퉁이 돌에서 뿜어져 나오는 성령의 역사가 모퉁이 돌 위에 있는 모든 돌 위에 한결같이 같이 전부 다 시멘트로 싸발려 버리죠. 벽돌하고 벽돌위에 외장 공사하죠. 미장이 한 십만개 쯤 하잖아요. 벽돌이 안 보이게 포장을 해버리죠. 포장이 뭐냐 주의 이름이라는 말이죠. 여기 참 흉칙한 예까지 꼭 들어야 될지 모르겠습니다만 허벅지를 칼로 찌르면 피는 피부 안에 있죠. 바깥에는 피가 안 나오잖아요. 그런데 칼 가지고 짤라 버리면 안 쪽에 있는 피가 바깥에 나와서 바깥의 표면을 발라버리죠. 그러면 분명히 우리는 우리의 행함이 있고 우리도 지금 행하고 있고 뭐가 있는데 항상 뭐가 표면에 발립니까? 주의 이름으로 내가 먹기도 하고 주의 이름으로 자기도 하고 주의 이름으로 봉사 하기도 하리니 어디서 많이 듣던 이야기 아닙니까? 베드로전서4장에서 나오죠. 너가 어떤 일을 하든지 간에 먹든지 마시든지 주의 이름으로 하라 멘트를 날리라는 말이 아닙니다. 어떤 멘트를 날려서 위신을 세우지 말고 실제를 이야기 하는 거예요. 그러면 뭐가 필요하냐면은 뭔가 짜르는 것, 피를 내는 것이 필요하죠. 내 이름을 죽여야 내 피부에 발린 내 허벅지에 발린 모든 피 안에 뭐가 있느냐면 "너는 죽었고 나는 살았다." "너의 행위는 죄고 그 죄를 용서하는 것은 나의 행위다." 라는 것이 이게 두께를 가지고 표면에 발린다는 것입니다. 쭉 발리는 것입니다. 그러면 뭐냐하면 우리는 먹든지 마시든지 주의 이름으로 영광된다 이렇게 되거든요. 말씀의 완성 단계에서 이런 식으로 고백을 하는데 여기서 여러분들 다 아는 이야기인데 보통 사람은 어려운데 다시 한 번 해보겠습니다. 주의 이름을 얻기 위해서 아까 이름이란 존재라고 했는데 여기서 약간 어려운거 합시다. 주의 이름이 존재가 아니고 주의 이름이 존재로서 하는 기능이 있어요. 아.. 이거 토요일 날 해야 하는건데 미리 다 하네. 토요일 날에는 딴 것이 또 나오겠죠. 믿읍시다. 주의 이름의 기능을 하면 이 기능이 뭐냐면 십자가 죽으심과 부활의 기능이예요. 사도행전 4장을 봅시다. 4장 2절을 누가 한 번 읽어 보세요.

2절. 백성을 가르침과 예수를 들어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는 도 전함을 싫어하여

도의 내용이 뭐로 함축된다고요? 물론 재림도 있고 승천도 있고 온유와 화평 형제사랑 온갖 것이 있다 할지라도 그걸 모아모아서 함축을 하면 뭐예요? 뭐가 도예요? 전도할 때 무슨 도를 전해야 합니까?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났죠. 누구만 한 거예요? 우리 이름은 못해요. 누구만 할 수 있습니까? 하나님이 누구만 시켰습니까? 주님만 한 거예요. 그러면 주의 이름이라는 것은 주께서 해야만 할 기능이예요. 기능. 제가 전에 그런 예를 든 적이 있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서점에 도서 판매하는 아가씨들 있어요. 뭐 정규직인지 비정규직인지 모르겠지만. 유니폼만 입었지 밤 늦게까지 상당히 고생하는데 "실례지만 지젝의 착오된 시선 그 책 어디 있습니까?" "들뢰즈의 생성 철학이 어디 있습니까?" 물어보면 "그거요. 3D에 4번에 있습니다." 딱 지적해줘요. 그러면 아가씨가 그 책 내용 압니까? 모르죠. 지금 사람들은 지가 가능한 것만 하는 거예요. "예수 이름 믿으세요?" "믿습니다." 할머니들. "주 예수 믿습니까?" "믿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누구십니까?" '몰라. 당신이 믿으라고 하니까 내가 믿는 것 밖에 몰라." 인간속에 여기서 목사님이 믿으라고 하니까 이미 내장되어 있는 것이 뭡니까? 믿음은 어떤 것이라고 나온대로 이미 습득된 것이 있죠. 습득된 것. 학교 교육 배우면서 주위 상황에서 믿는다는 것은 고개 끄덕이면 돼. 라는 그런 어떤 습득된 과거 옛 습관이 있잖아요. 그러면 목사님이 "십자가를 믿습니까?" "예 믿습니다." 고개 끄떡이는 거예요. 그러면 "예수님 누구십니까?" "몰라" 이렇게 합니다. "들뢰즈의 책이 어디 있습니까?" "예 여기 있습니다." "아가씨 그럼 내용은?" "아 그런것 나한테 묻지 마세요. 지금 바쁜데 꺼져." 이렇게 한단 말이죠. 주의 기능이 와야 성령이지 예수 연구 하는 것은 지금 한신대 장신대 총신대 많이 잘 배웁니다. 성경 신학 이름으로. 조직 신학 이름으로. 예수 인자와 엄위가 무엇인지 시험치고 이래요. 안 믿습니다. 그거 성령받은 것 아니예요. 그거 배워서 목사로 써 먹기 위해서 배운 것입니다. 뭐 개혁주의 신학이 어떠니 조직 신학이 어떠니 할 수 있어요. 그래놓고 "내 알잖아 내 복음 안다 말이야 내가 한 번 가르쳐 볼까? 내 잘 가르친다." 가르치면 뭐합니까? 자기 존재라는 이름이 아직도 살아 있는데. 아직 프라이데이가 아니라 지금도 로빈슨크루소인데. 지가 지 이름을 지어버렸어요. 기능이 누구 기능이다? 나는 책 구해줬잖아 내가 책 찾아 줬잖아 하는 기능. "나는 어떤 손님이 와서 들뢰즈 책을 원해서 나는 책 찾아 주는 기능을 했습니다." 하면서 여직원이 할거 아닙니까? 그러면 나는 "들뢰즈를 아는 것하고 상관없습니다." "들뢰즈가 누구인 줄 알아야 들뢰즈와 상관이 있습니다." 그러면 여직원이 "나는 책이 어디에 있다는 것을 알잖아요." "책이 어디 쪽에 있는 줄 알잖아요. 그러니 들뢰즈와 연관이 있다고 말좀 해줘요." "NO." 나는 영어까지 쓰면서 NO. "당신은 들뢰즈를 몰라." 주의 기능은 성령이 와야 돼요. 성령이 와야 모든 것이 어디로 쏠린다? 어떤 성경 해석을 해도 오직 십자가와 부활의 이른 쪽으로 성경 해석이 가능하면 그 사람 뭐 받은 사람입니까? 주의 이름의 작용하는 그 기능. 그 기능이 그 사람속에 움직이고 있다는 것이 확인 되잖아요. 확인. 모든 성경 해석이 주의 기능으로 "주께서 하셨습니다." 여러가지가 아니고 딱 모아라는 말입니다. 십자가 중심과 부활. 사도행전 4장 2절에 나왔잖아요. 그러니까 말씀의 세계라는 것은, 십자가 부활이라는 천국이라는 세계는 예수님의 행위로 이미 완료된 상태입니다. 그 바깥에 육의 세계는 아직도 육이 남아 있어요. 그래서 식을 해요. 열심을 내어서, 충성을 다하여 이 세계를 뚫어 보겠다고 자기가 알고 있는 습득하고 있는 논리적 개념을 총동원 해 가지고 계속 가능성 가능성에다 심지어 가능성속에 뭐가 들어 있느냐면은 묵시도 포함되어 있고 초월도 포함되어 있어요. 놀랍지 않습니까? 철학자들이 묵시를 이야기 하고 초월을 이야기 해요. 그런데 그것은 자기가 아는 역사라는 범위 위에서 나온 반대 체제로서, 반대 명제로서 헤겔의 반대 명제로서 역사와 반대되는 초월이기 때문에 실제로 주의 기능하고 관계 없습니다. 이 사람들이 주장하는 초월은 뭐냐? 나는 나를 부정함으로 말미암아 나는 지금보다 더 월등한 신이 될 수 있다. 이거 불교죠. 그런데 성령 받은 사람은 내가 어떻게 초월하는 것이 목적이 아니고 "주여 왜 저 같은 죄인을 구원했습니까?" 주체를 내가 프라이데이라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프라이데이라고 이름하신 그 분. 보이지 않는 분. 중국에서 어떤 예술가가 배경하고 똑같은 배경을 만들어 가지고 투명인간, 투명세계라는 작품을 만든 적이 있어요. 사람 없는 것 같아요. 자세히 보면 사람이 있는데 배경하고 똑같이 해 가지고 보호막 보호색 해 가지고 다른 사람이 보면 없는데 자세히 보면 있어요. 주님께서 십자가와 부활을 하기 위해서 주님께서 이 어두운 세계에 우리로 하여금 옛날 주님이 하셨던 십자가 기능을 그대로 되풀이 하기 위해서 마치 주님처럼 있으나 마나한 존재로 보호색을 입혀놨어요. 천국색 파카를 입혀 놨어요. 미군부대 파카를 입혀놨어요. 우리는 복음을 전할 뿐인데 알아주는 사람이 별로 없어요. 그래서 한국 교회 안 알아주는게 서러워서 예배당을 크게 지었잖아요. 조용하게 살면 되는데 조용히 살 줄 몰라요. 떠벌려야 드럼치고 기타쳐야 김제동 엄마 불러야 불러줘야 티를 내야 예수 믿으면 복 받구나 투명인간이 되기 싫은 거예요. 육적인 사람들의 복에 맞추면 이게 장사가 된다니까. 예수 믿는 효과 본다는 것입니다. 그 기능에, 그 기능으로 제가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이것입니다. 육적 세계와 영적 세계는 육적 세계에서 아무리 이해해도 그 마지막 최종 해석은 나의 행함으로 전락하고 영적 세계의 특징은 어떤 해석을 해도 어디에 모인다?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에게 모이기 때문에 만약에 옆에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에게 증거되는 것은 예수님의 죽으심과 십자가와 부활만 증거될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앉은뱅이 사건이 계속 가는데 누가 저 사람을 낫게 했느냐? 가능성을 이야기할 때 베드로는 불가능성을 이야기했죠. 주께서 주신 주의 이름이 지금 투명 인간처럼 살아계신 주님께서 주님과 저 사람 사이에 인간의 행함을 집어 넣으라? 마라? 하지마라 그 이야기 입니다. 그렇게 된 것은 이미 설치되어 있는 성전의 그물 구조에 그 빈 공간에 앉은뱅이가 기입된 거예요. 드디어 빈 공간에 앉은뱅이가 구원을 얻었다 기입된 거예요. 그렇게 해놓고 하는 말이 다른 이름으로 구원을 받을 만한 이름을 준 적이 없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내 구원이 목적이 아니죠. 목적은 뭡니까? 내가 이미 확보되어 있는 성전에 내가 거기 빈 칸에 내가 거기 가담한 것으로 말미암아 성전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우리 보기에는 역사적으로 이루어진 것 같지만 사실은 묵시 세계에서 보면 뭡니까? 이미 이루어진 성전의 빈 칸이 확인될 뿐입니다. "딱 너야" 라고 지목하는 것입니다. 내가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주께서 이미 들어가게 하신 우리 자리를 우리 자리가 어떤 자리인지 확인할 뿐입니다. 그렇게 될 때 이 자리에서는 인간의 모든 행위의 자리가 끊어지는 것입니다. 문제는 이겁니다. 율법이 여기서 들어갈 수 있느냐 하는 문제입니다. 자 여기에서 육의 세계를 알리기 위해서 뭐가 주어지죠? 율법이 주어져서 죄가 넘치죠. 율법의 기능입니다. 육적인 세계에서는 율법이 왔다니까 부자 청년처럼 "제가 어릴 때 부터 십계명을 다 지켰습니다." 라고 해서 인간의 속성은 율법을 보면 환장해요. 사람은 자기가 선해질 수 있고 의로워질 수 있는 그 찬스를 절대로 놓치는 법이 없습니다. 인간의 어떤 경우라도. 이것 설명 할려면 또 몇 시간 가는데 인간은 환경이 주어지면 그 환경에 변신하는 것이 인간의 속성입니다. 인간은 그냥 껍데기고 껍데기 속에 있는 그 괴물은 인간을 환경에 맞추도록 적응하도록 그렇게 합니다. 베드로가 환경 바뀌니까 즉시로 베드로는 그 환경에 적응합니다. "나 모른다." 어떤 소녀가 "베드로 아저씨. 그 때 예수님하고 함께 있었잖아요." "너 까불래. 나 저 사람 모른다. 나 기억 나지 않는다. 아는 바 없다" 이렇게 하거든요. 사람이 아무리 복음, 복음 하지만 신학교 졸업하고 난 뒤에 큰 교회 부교역자 되면 복음 버립니다. 본인은 복음 버리고 싶지 않겠지만 본인을 장악하고 있는 괴물이 나로 하여금 새로운 인간으로 변신케 하는 것입니다. 이거는 모든 인간이....그래서 율법이 주어지면 율법은 뭐 뭐 하라, 하지 마라 하니까 절호의 찬스입니다. 나로 하여금 더 고품질의 인간으로 살 수 있는 멋진 찬스가 주어진 것입니다. 그러한 법이 오게 되면 사람은 너무 좋아합니다. 목사가 "40일 새벽 기도 연속 나오세요." 그러면 뭐가 좋은 줄 알아요? "목사님. 40일 새벽 기도 연속 나오면은 안 나온 사람보다 내가 더 의롭죠." 내가 그 찬스를 놓칠리가 있습니까? 내가 남보다 게임에서 더 착한 게임에서 승리자가 되는 절호의 찬스가 주어졌는데 내가 미쳤다고 그 찬스를 놓쳐가지고 상대적으로 악한 죄인으로 평가받을... 그것은 내 본성이 용납이 안 해요. 사람은 자기 보고 죄인이라고 하면 용납이 안돼요. 어쨌든간에 따라 잡아서 얼추 1등은 못해도 중간쯤은 의로운 대열에 서고 싶은 거예요. 그래서 갈라디아서 3장에 보면 율법은 반드시 인간의 행함이 따라 오게 되어 있어요. 율법은 뭐가 따라 온다? 인간의 행함. 이 육의 세계에서는 율법 다음에 인간의 행함이 없는 율법은 없습니다. 왜? 율법이 약을 올리거든요.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탐스럽다. 그러면 아담과 하와는 자기가 분명히 자기보다 더 위대한 신이 될 수 있는 기회를 머리속에 뱅뱅 매일 "신이 될 수 있다. 신이 될 수 있다." "아! 이러면 안돼." 백 날 그래봐야 소용 없어요. 미지의 것이 남아 있는데. 미지의 것을 삼켜야 잠을 편히 잘 수 있어요. 아직 미진한 것이 남아 있으면 사람들은 환장해요. 개들도 마찬가지지만 지금 나오고 싶어서 난릴거야. 오늘 무슨 날인 줄 안다. 사람은 미지의 것이 남아 있으면 환장해요. 율법에서 착해질 수 있다는 것을 왜 놓쳐요. 왜 빠트려요. 하지요. 율법은 좋다고 잡아 땡기는 것입니다. 하지만 가면 갈수록 자기의 내부와 외부에서 균열이 일어납니다. 철학적인 용어인데 자아의 균열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여기서 봉사하는 사람이 있어요. 정신과 의사죠. 봉합한다고 애 많이 씁니다. 물론 돈은 챙기지만. 자아 균열. 없는 사람이 없어요. 심한 사람은 병원에 오고 아니면 술로 해결하고 이러는데. 자아라고 뭉쳐 놓으면 자아 그림자가 길게 늘어져 있고 저 놈 삼키고 나면 여기 또 자아 그림자가 있고 환장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율법을 성령이 오게 되면 율법을 행한 자리에 뭐가 들어가죠? 인간의 행한 자리에 뭐가 들어가죠? 예수님의 행함이 들어가 버리죠. 그러면 율법이 어떻게 됩니까? 내 이름 빼고 주의 이름 들어와서 율법을 이루었다. 아까 율법이 뭐라고 했습니까? 거룩을 거룩답게 유지해서 그 보자기를, 그 국자를 거룩을 유지하는 것이 율법의 정신이고 그 다음에 거룩을 우리의 거룩으로 하기 위해서 이웃 사랑이라는 것을 베풀어 버리면 이미 거룩한 것에 혜택을 입으면 우리는 같이 하나님의 거룩한 성전이 되어서 문지기가 되는. 이제 감 잡히죠. 여기 예수님이 행하신 것이 뭐냐면은 바로 영의 세계입니다. 영의 세계에서 온 사람은 자기 행함이 아니고 주의 행함으로 십자가 행함이라는 것을 알죠. 문제는 그 다음부터 입니다. 여기에 율법이 필요하냐 하지 않느냐 하는 문제입니다. 이미 영 되었는데. 로케트 1단 2단은 태평양 바다에 빠트려 버리면 되는데 하나님 나라는 율법을 그대로 가져가 버려요. 왜냐하면 이것을 가져가 줘야 영적 세계에서 예수님은 계속해서 용서하는 분으로 남습니다. 그런데 육의 세계에서는 인간의 행함만 결부 되기 때문에 "아! 참 마음 속으로 간음한 것도 간음이구나" "아! 이거 안되네." "주여 죄인 맞습니다." 자기의 행함과 결부 되어서 율법의 기능을 발휘하다가 이 율법을 그대로 가져가 버리면 율법의 기능은 그대로 살아있죠. 뭐냐면은 죄를 지적하는 기능인데 이 죄의 기능은 율법의 내 행함이 아니고 주님의 행함이 있으니까 율법 뒤에 예수님 십자가 부활이 있으니까 마지막 때 심판의 기준이 뭐냐면은 "누구든지 주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를 받을지어다"(고전16:22). 그렇다면 뭡니까? 여기 죄는 확정되어 있죠. 주를 사랑하지 않는 것이 지옥갈 죄로 드러나는 것입니다. 율법이 여기에 율법적 기능을 해버리면 이 밑에서는 "내가 마음 속으로 간음했구나" "내가 기도를 안 했구나" "내가 이웃 사랑을 안 했구나" 이렇게 되지만 이쪽의 율법의 기능은 뭐냐면은 "내가 또 주님 앞에 내 의를 내세웠구나" "내가 또 주님보다 나를 더 사랑했구나" 이것이 평생 회개해야 되죠. 내 몸이 내 몸이 아니고 주의 몸이라고 했는데, 주의 행위가 있는 것을 자꾸 행위 뒤에 꼬리를 붙쳐서 예수 믿는 내 행위를 집어 넣어 버리는 것입니다. 그 때마다 율법이 있고 그 율법과 더불어 있는 율법에 붙어 있는 주님의 이름이 우리를 "이래서 죄인 맞잖아." "아유 죄인 맞군요." 3초가 되든 2초가 되든. "맞군요. 또 내 사랑했습니다." 내 몸이 내 몸이 아닌데 또 왜 내 몸을 이렇게 힘들게 하는데. 또 따지고 원망하고 불평하고 사나 죽으나 주의 것인데. "아유 내 새끼들 앞으로 우얄꼬." 또 걱정하다가 지나면 "주께서 인도할텐데." 이거 3초,2.5초 가다가 다음에 또 24시간 23시간 동안 전부 다 "야유 인간아 우에 인간 만들까" 엄마가 걱정하다가 다 마찬가지 아닙니까? 교인 한 명 떠나면 또 환장해 가지고 정신 병원에 갈까 싶고. 가든 말든 이미 구원 받았는데. 이미 성전 안에, 국자 안에 들어 있는 데. 국자 안에 있는 것이 지가 국자 노릇 할려고 하니까 기가 막힐 노릇 아닙니까? 지가 프라이데이라 주님이 안 보이니까. 그러다 주님이 오시니까 깨깽 깨깽 해가지고 "마 니가 내 없다고 주인 행세했지? " "미안합니다." 그 다음에 "뭐 할까요?" 시키는 대로 하면 되는데 시키는 대로 하지 않고 또 주인 없다고 지 맘대로 하다가 또 "뭐할까요?" 하고 묻고. 율법의 기능은 죄의 의미가 주님의 행위에 대한 반발. 육의 세계에서는 자기가 생각했던 자기의 행함에 대한 내부적인 모순. 탐을 내는 내 죄와 탐내지 않을려는 내 죄의 갈등. 이것이 육의 세계라면 영의 세계에서는 "오호라 곤고한 사람이로다." 주께서는 하신 십자가를 부정하는 그래서 영의 세계에서는 예수 안 믿는 사람이 지옥가고 이 쪽의 죄는 그것을 완벽하게 못 행한 사람이 죄가 되고. 그래서 율법의 기능은 새로운 차원에서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10분 쉽시다.

송재원(IP:61.♡.38.203)

09-10-19 02:36

국자와 국자안에 있는 개미
나의 행위를 주의 공로위에 추가시키려는 인간들의 속셈 vs 끝까지 주의 공로만을 유지시키려는 주님의 고집
죽어서 좋은데 가보겠다는 인간들의 구원받고싶은 마음 vs 예수님을 중심으로한 새로운 창조를 위한 들러리 또는 소모품으로 얼떨결에 가담하게 된 운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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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 21,142건 중 516 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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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