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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

출애굽기 7장 - 8장 주석자유게시판출애굽기

출애굽기 7장 - 8장 주석

이름 : 이진용(IP:222.99.120.158)

7:8-13

하나님은 뱀을 치겠다고 나서고 모세는 그냥 얼떨결에 그 하나님의 요구에 의해서 사명자로 불려 나온 것뿐이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뱀이라고 규정하시면서 치시겠다고 나서는 그 대상이 다름 아닌 애굽 백성들 입장에서 보면 너무나도 당연하고 상식적인 생활 태도 그 자체를 말한다. 인간의 능력의 부족을 느끼고 각가지 신에게 하소연하는 것이 뭐가 그리 죄이고 나쁜 짓이라고 여호와 하나님께서 모세를 보내어 그들을 치려고 하시려는 것인가?

흔히 교회 나오는 사람들이 하나님을 찾고, 예수님을 찾고, 성령을 찾는 이유가 본문에 나오는 애굽 백성들과 같은 인식으로 신을 생각해서 도움을 받겠다는 태도로 섬긴다면 도리어 이런 사람들이 하나님으로부터 뱀과 같은 족속이라고 평가 받아 멸망 받을 것이다.

출애굽기 4장에서 하나님은 애굽을 뱀이라고 지칭한 것은, 창세기 3장에 나오는 원래의 근본 악이 그 동안 어떤 식으로 자기 모습을 갖추고 발전해 왔는가를 보여주기 위함이다. 창세기 3:15-16에 '뱀'이 나오는데 이 '뱀'과 싸움에 나서야 되는 자는 오직 '여자의 후손'이라는 하나님의 백성들뿐이다.

다른 사람들에게 아예 뱀과 싸울 사명을 주지도 않았다. 문제는 그 뱀의 후손들이 하는 행위가 대표적으로 애굽 나라의 백성들의 행위라는 것이다. 그들은 신을 찾지만 그 신을 찾는 목적이나 이유가 전적으로 자신의 안위와 행복과 안전과 보전을 위한 행위라는 말이다.

바로 이런 뱀의 후손들을 척결하기 위해 사명을 받은 자들이 '여자의 후손'이라면 이 '여자의 후손'들이 갖출 자질이라는 것이 적어도 '뱀의 후손'과는 틀려야 되고 달라야 된다는 것이 너무나도 명확한 결론인 것이다.

사도행전 19:15에 보면, "악귀가 대답하여 가로되 예수도 내가 알고 바울도 내가 알거니와 너희는 누구냐 하며"라고 되어 있다. 이미 악마도 자신의 적이 누군지를 명확하게 알고 있다. 그리고 그 외의 사람들은 아예 괴롭히지도 않는다. 왜냐하면 가만 놓아 두어도 자기 부하들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여자의 후손들'만큼은 악마와 싸우기 위해 부름 받은 자들이 되어서 이점에 대해 악마도 단단히 벼르고 있다. 그렇다면 성도란 세상 사람들과는 결코 자신의 행복과 번영을 위하여, 살아가야 될 자들이 아니라 하나님께서부터 악마와 싸우기 위해서 전혀 다른 방식으로 살아가는 사명을 부여 받은 자라는 것을 우리가 알 수 있다.

그렇다면 그 악마와 싸울 때 무엇으로, 어떻게 싸우는가는 출애굽기 34:10-17에 보면, 하나님은 아주 단호하시다. 무엇으로 단호한가 하면, '언약'만 고수하면서 단호하시다. 언약을 모르는 것이 곧 죄이다. 십계명 제 일 계명에도, "여호와를 섬겨라"가 아니라 "네게 다른 신을 두지 말라" 이다. 이 애굽 사람들과 이 세상 사람들이 멸망 당하는 것도 오직 '언약'을 모르기 때문에 하나님에게 당해야 하는 것이다.

물론 오늘날에는 '새 언약이다. '새 언약'이란 예수님의 살과 피를 말한다. 하나님은 오로지 그 '새 언약'에만 관심 두신다. 인간들의 고민거리나 걱정거리나 괴로움에는 전혀 신경 쓰지 않으신다. 관심조차 없다. 오로지 '언약'에만 매달리시는 분이 참된 하나님이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바는 들어있지 않고 하나님께서 관심조차 없는 것으로 마음 속 가득히 품고 살아간다면, 결국 멸망 받을 애굽 사람들처럼 하나님을 자기 행복을 해결하기 위해 찾게 될 것이다. 이렇게 되면 뱀의 후손이 되는 것이다. 스스로 하나님을 이용해서 행복해지려고 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사명 받은 자로서 살며 홀가분하게 언약 중심으로 일하시는 하나님의 심정을 우리가 이해 할 수 있어야 한다.

7:14-19

7:12에 보면 이런 말씀이 나온다. "그러나 바로의 마음이 강퍅하여 그들을 듣지 아니하니 여호와의 말씀과 같더라" 즉 하나님께서는 의도적으로 바로왕의 마음을 강퍅하게 만들려고 하시는 것이다.

바로왕의 마음이 계속 강퍅함에 있어 업그레이드 될 수 밖에 없는 이유는, 여호와께서 배후에 그의 마음을 조절하고 계시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바로왕은 여호와 하나님에 손에 의해서 계속해서 강퍅해야만 하는 사명을 띠고 이 땅에 등장된 인물이다.

그 후로도 하나님으로부터 파견되는 선지자는 계속해서 하나님의 적들에게 등장되게 된다. 그것은 본문의 17절의 말씀 때문이다. "여호와가 이같이 이르노니 네가 이로 인하여 나를 여호와인줄 알리라 하셨느니라 볼찌어다 내가 내 손의 지팡이로 하수를 치면 그것이 피로 변하고"

이 말씀대로 한다면 과연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변명과 위장술에 타협할 의사가 없으신 것이다. 그대신 하나님은 인간의 위장술 뒤편을 공략하신다. 인간들이 큰소리 칠만한 요소를 붕괴시키면서. 그렇다면 인간들은 더욱더 강퍅하게 나올 것이다.

그 여파로 인하여 지속적으로 하나님 편에서 파견되는 선지자들은 더욱더 망가지는 모습이 된다. 즉 한 대 얻어맞으면 그 맞은 자리를 붙이고 나오고, 또 다른 곳을 때리면 그 자리에 또 붙이며 등장된다.

그런 식으로 계속 망가지면 나중에는 빌립보서 2:5-9의 말씀처럼 하나님께서 교회 성도에게 요구하는 것은 이 '십자가 마음'이다. '십자가 마음'이라는 것이 어떤 것일까? 인간들은 위장과 변장으로 가득한 마음을 품고 현대를 살아간다. 거기서 도출되는 것이 바로 '자기 의' 쌓기 이다.

교회 내에서의 분쟁도 다 여기서 비롯된다. "그동안 내가 주님을 위하여 이렇게 많이 봉사했다"는 것이다. 따라서 상대방보다 더 높은 공적의 탑을 쌓아서 그것으로 자아상을 대신하려고 한다. 바로 이런 현실에 대해서 우리는 자신이 공적의 탑을 무참하게 발로 밟아 허물어버려야 한다.

이것이 바로 '십자가의 마음'이다. 예수님은 분명히 하나님과 동등 되시는 분이지만, 우리들의 교만 됨 때문에 비참하게 망가진 분으로 우리에게 최종적으로 나타나신 것이다.

모세나 장차 오실 메시야는 일반 사람들에게 밉상을 받을 만한 발언과 행동을 하고 있는 것이다. 상식적인 선에서 봐서 너무 과격하고 부정적이다. 따라서 좋게 이야기하면 어느 정도 정치적인 흥정이나 협상의 가능성으로 인해 유동적인 조건을 바로왕 쪽에서 제시할 여지가 있는데 그 여지조차 모세쪽에서 아예 차단하는 느낌을 주고 있다.

그야말로 도저히 수용 못할 발언을 일방적으로 퍼부어놓고서는 그 제안에 수용하지 않았다고 해서 지팡이를 강물에 펴니 갑자기 강물이 피가 되어 버렸고, 이번에는 호수 위에다 펴니 그 호수 물을 떴던 일반 가정집 부엌에 있는 그릇에 담긴 음료수마다 모두 피가 되어 버렸다.

인권적인 차원에서 한 번 생각해 보면 고집이 센 사람은 바로왕이지 애굽의 일반 가정집에 있는 철모르는 애들이 아니지 않은가? 그런데 고통을 누가 당하는가? 바로왕 뿐만 아니라 모든 애굽의 사람들이 다 당하고 있다.

하나님께서 일을 왜 이리 확대시키는 이유는 나중에 히브리인들이 애굽을 빠져 나올 때, 애굽인들 간에 맺었던 각가지 인간적인 관계마다 여호와만의 속성이 스며들게 하기 위해서 이다.

즉 인간과 인간 관계보다 더 월등하고 근본적인 것이 여호와 하나님을 바로 아는 것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비단 모세만 알고 바로왕만 알아서는 아니되고 전 애굽 백성과 히브리인들이 다 알아야 될 사항이다.

여호와라는 이름의 하나님은 본질적으로 무엇을 기본으로 하여 일을 벌리시고 성취하는지 모든 인간들이 다 알아야만 했다. 왜냐하면 우리 모두가 다 강퍅한 존재들이기 때문이다.

7:20-25

하나님께서 피를 보이는 재앙부터 시작하신 이유는 열 재앙 모두 다 피와 관련되어 있는 재앙이기 때문에 그러하다. 마지막 재앙에는 어린 양의 피가 나온다. 그리고 출애굽기 4장에서 애굽으로 길을 떠나기 전,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보여준 세 가지를 마무리 하는 기적에도 강물이 피가 되는 기적이다.

따라서 하나님의 모든 재앙은 전부 피 안에서 이루어지는 재앙이요 심판이라고 보면 된다. 즉 하나님은 '피'를 떠나서는 일을 하시지 않는다는 말이다. 강물은 애굽 사람들의 삶의 원천이다.

하나님께서는 땅의 먼지를 재료로 삼아 인간을 창조했다고 했다. 그래서 모든 물질이 자유자재로 조절이 가능할 수 있으려면 물이 필수적이다. 물의 조절능력에 따라 인간의 신체 속의 활동은 돌아가게 된다. 곧 사람은 물을 중재로 해서 생명을 유지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생명을 유지시켜 주는 그 물의 기능을 붉은 색깔로 확실하게 보여주는 것이 피다. "육체의 생명은 피에 있다"고 했다. 단순히 관찰에 의해서만 내린 결론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계속해서 하실 생명 주심과 관련된 사항이 피에 있기에 예언조로 하신 말씀이다.

레위기 17:11에 '피가 죄를 속한다'라는 말씀이 나오는데 즉 '죄'라는 말이 나오고 '피'라는 말이 나오는데 과연 피가 죄와 무슨 상관이 있단 말인가? 이 점을 알기 위해서 창세기 4장의 경우를 생각해 보아야 한다. 거기에 보면, 현대인들이 이해하기 힘든 풀이가 나온다.

10-12절에 보면, 대지가 피를 받게 되어서 그 때부터 대지가 저주를 내뿜게 되었는데 그 결과가 인간이 아무리 노력해도 그 노력의 효과를 내지 못하고 뿐 만 아니라 그 피를 유발시킨 그 인간은 이 대지 위에서 어디를 가고 반김을 받지 못하고 거부당하는 인간이 된다는 것이다.

창세기 3장에서 인간들은 에덴동산이라는 낙원에서 추방을 당한다. 그렇다면 앞으로 인간들은 무엇을 의지해야 하면은 순전히 대지가 제공하는 혜택에만 의존하며 살아야 한다. 변화하고 움직인다고 다 살아있는 것이 아니다. 진짜로 산다는 것은 하나님이 제시한 원칙과 원리에 부합되어야 살아있는 것이다. 어쨌든 인간이 부대끼며 의지하며 살아야 될 이 대지는 그냥 무주공산, 주인 없는 대상체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그 대지마저 하나님 손에서 관리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 대지 위에서 가인이라는 사람은 죄를 남기고 말았다. 땅이 죄로 장악 당하고 덮여지는 것을 하나님께서는 방관만 하시지 않았다.

창세기 5:29에 보면, 하나님께서 노아를 태어나게 하셔서 노아를 통해서 저주 받은 대지를 정화하는 방책을 실시하여 그 결과는 땅에 평화가 찾아 드는 조치를 감행하시겠다고 작정하셨다. 노아라는 이름의 뜻이 곧 '안식'이라는 말이다. 그만큼 하나님 보시기에 땅은 노아 이전에 안식치 못했다는 말이다. 그리고 그 원인이 바로 가인이 남긴 피에 있다는 말이다. 노아 홍수 이후 그때부터 땅은 안식을 되찾게 된다.

창세기 8:22에 보면, "땅이 있을 동안에는 심음과 거둠과 추위와 더위와 여름과 겨울과 낮과 밤이 쉬지 아니하리라" 바로 이러한 대지에 대한 축복을 위하여 노아는 같이 방주를 타고 지내온 짐승 중에 정결한 짐승과 정결한 새를 잡아 하나님께 온전히 바치는 제사를 드리게 된다. 물론 하나님이 지시에 의한 행위이다.

여기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앞으로는 물로서는 다시 대지를 저주하지 않겠는데 이는 인간의 날 때부터 근본적으로 악한 존재라 기대할 것이 없지만 이 정결한 짐승의 제물을 받고서 이런 축복을 지속시키겠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런 환경에 돌입하게 되었기에 반드시 따라오게 되어 있는 죄의 규정도 새로 설정되었다. 창세기 9:4-6에 보면, 하나님께서 심도 있게 진행하시는 그 관심사에 대해서 정리해 보면 일단 생명은 피에 있다. 그리고 이 땅에서는 인위적으로 하나님께서 주신 생명에 손상이 있어서는 아니 된다.

만약 생명이 손상이 일어나 피가 바깥으로 쏟아져 땅에게 주어지면 그것을 '죄'라고 간주하겠다는 것이다. 일단 죄가 발생되면 대지는 곧장 하나님의 징벌의 수단으로 작동에서 그 죄의 원인자를 가만두지 않고 저주를 퍼붓겠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대지의 저주스러움은 하나님의 조치에 의해서 원상회복이 되는데 여기에 동원된 것이 하나님이 거룩한 희생제물의 피다. 그렇다면 앞으로의 죄에 대한 규정은 이 거룩한 의로운 피, 곧 생명을 훼손하느냐 아니하느냐로 결정짓게 될 것이라는 것이다. 이 일련이 언약 원칙은 앞으로 진행될 모든 하나님의 일의 핵심으로 자리잡게 된다.

이 땅의 모든 대지나 인간들이나 생명체들이나 모두 하나님이 확정해 놓은 언약의 법칙 안에서 죽음과 생명을 결정 받게 된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이제 바로왕에서 나선 모세와 아론도 예외 없이 이 원칙 속에서 활동하게 된다. 바로왕은 물론 이들 배후에 이러한 거대한 원리, 원칙이 움직이는 것을 알리가 없다.

그 사람은 아예 여호와 하나님을 무시하고 들어가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바로왕 앞에서 어떤 식으로 여호와의 개성을 나타내 보이게 되는가 하면 여호와 하나님에게 의해서만 생명이 유지됨을 보이기 위해서라도 앞으로도 계속 그들이 생명에 위협이 되는 환경들을 유발시킬 것이다.

하나님은 인간들이 육신적으로 어디를 의지하며 사느냐를 다 아신다. 또한 인간들의 신선한 물의 공급이 자기 생명과 직결됨을 알기에 적절한 이름을 붙여서 강의 신들에게 예배하고 경배했다.

그런데 자기네들이 붙인 신은, 여호와 하나님의 심판 앞에 무용지물이 되고 말았다. 방어할 그 어떤 방도도 없다. 마치 해독제 없는 독물을 마시게 하는 것과 같다. 애굽의 바로왕과 백성들은 그들이 의사와는 전혀 상관없이 이미 그들은 여호와의 세워놓은 언약의 법칙 안에 들어와 있다는 것을 알아야만 했다.

이것 때문에 모세와 아론을 그들 앞에 파견 시킨 것이다. 하지만 약간의 숨통을 찾아내면서 그들은 기어이 버티며 더욱 더 강퍅해졌다. 오늘날 우리들은 여전히 매사에 하나님께 불만과 불평으로 일관하지 않은가?

하나님의 원리는 나 몰라 하고 자기 고집과 원칙을 앞장세워 하나님을 압박하고 있지는 않은지? 원래부터 악한 우리를 하나님께서 이만큼이라도 이끌고 계시다는 그 은혜를 알아야 한다. 그리고 더 나아가서 은혜를 모독하는 그 죄조차 씻어버리게 하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난 시대를 우리가 살아가고 있음도 알아야 한다.

하나님은 이 세상에 그 어떤 티끌 같은 죄가 있더라도 봐주는 법이 없다. 따라서 우리는 이미 하나님의 심판 안에 들어와 있다. 심판 받아야 마땅하고 고생해야 마땅하다. 이 대지가 우리의 원대로 잘 따라주지 않더라도 우리는 할 말이 없는 그런 입장에 놓여 있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희망이 있다. 바로 '언약의 피'다. 히브리서 9:22에 보면, "피 없이는 사하심도 없다"고 했다. 히브리서 13:20에 보면, "예수님을 영원한 언약의 피로 죽은 자 가운데서 이끌어 내신 분이 하나님이라"고 되어 있다.

바로 이 피가 오늘날의 새 언약이다. 이 새 언약 안에 머물러 사는 길만이 하나님이 무서운 심판에서 면제된 사람이다. 교회의 정의는 사도행전 20;28절에 보면, "너희는 자기를 위하여 또는 온 양 떼를 위하여 삼가라 성령이 저들 가운데 너희로 감독자를 삼고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를 치게 하셨느니라"라고 되어 있다. 하나님께서는 피만이 여전히 선포되는 곳만을 교회라고 간주하신다. 모든 것이 피로 시작해서 피로 끝남을 알아야 하며 예수님의 피만이 전부인 것을 알아야 한다.

8: 1-7

하나님께서 일을 한꺼번에 처리하지 않으시는 것은 그 틈바구니에 끼어 있는 모세와 히브리인들에게 하나님의 힘의 깊이를 제대로 경험해 주시려 하기 때문이다. 모세는 늘 아슬아슬한 지경을 보내고 있다.

바로는 더 거세게 나오고 있고, 하나님도 일체 자신의 뜻 관철에 양보할 기색이 보이지 않으신다. 바로와 모세가 정치적으로 양보해서 적당선에서 타협할 그 어떤 여지도 하나님께서는 허락하지 않고 있다. 무조건 '내 백성을 보내라'이다.

이로서 하나님과 바로왕 중간에서 처신하기 힘겨운 입장에 모세는 놓여 있다. 아무리 일주일 전에 하나님께서 놀라운 기적을 베풀어 주셨다 할지라도 그 때는 그때이고 지금은 또 새로운 난처하고 위기 상황을 맞이해야 하는 것이 모세이다.

모세에게는 순간 순간이 위기의 연속이다. 오늘날 성도의 입장이 그렇다. 교회 와서 설교 말씀 들을 때면 천하의 모든 진리를 다 깨닫고, 앞으로 어떤 사태가 터진다 할지라도 어느 시, 어느 곳이든지 장렬하게 죽을 각오로 무장되었다고 하지만 막상 세상에 나가보면, 여전히 차갑게 불어오는 것은 겨울 바람이다.

여전히 혼자라는 생각이 우선 자신을 장악하게 된다. 너무나 두렵고 무섭고, 걱정되어서 간절히 겸손한 자세를 취하여 기도를 해보지만 마음의 안정은 커녕, 이 기도가 이러한 난관을 해결하는데 무슨 도움이 되겠느냐 참 부질없는 헛 짓을 하고 있다는 생각이 전면을 장식하게 된다.

바로 하나님께서 이런 식으로 성도를 인도하신다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아무리 가롯 유다와 여러 제자들이 예수님 곁에서 많이 기적을 목격했고, 또 실제로도 자신들이 기적을 베풀었지만 막상 자기 신앙에 위험이 닥쳐올 때는 본능적으로 움직이는 것이 인간이다.

신앙생활을 그 동안 도 닦은 테크닉으로 해결하려고 하지 말라는 말이다. 아무런 테크닉도 소용없다. 그 때 그 때마다 하나님의 말씀의 현실성을 확신케 하시는 성령의 인도하심이 아니면 어느 누구도 천국까지 건너갈 수가 없다. 자력으로 구원되는 수는 없다.

수 년간, 수 십년간 교회 봉사하고 헌금 한 것도 지나보면 현재의 신앙을 갖는데 있어 소용없는 짓이다. 현재 신앙은, 현재 성령께서 어떤 은혜를 주시느냐에 따라 얻어지는 것이다. 매일같이 주님만 의지하면서 인도함을 받는 수 밖에 없다. 신학을 통달했다고 해서 신앙생활에 있어 유리하다고 장담하지 말아야 한다. 지식도 역시 하등 소용없다.

도리어 지식이 자신의 믿음 없음을 감추는 장식품으로 등장될 뿐이다. 지식은 지식이고 신앙 없음은 여전히 신앙 없음 그대로이다. 하여튼 모세는 하나님께서 시키시는 대로 지팡이를 들이댈 뿐이고, 그리고 똑같은 요구조건을 바로왕에게 제시할 뿐이다.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만 밤에 몰래 데려가면 그만인데 왜 이처럼 애굽 전역에 재앙을 내린답시고 분란을 일으켜야 하는 것은 애굽 사람을 위함이 아니라 이스라엘 자기 백성을 위함이다. 애굽에서의 구원은 앞으로 그들이 정착해야 될 가나안 땅의 구원 전쟁과 같은 것이다. 양쪽 다 절대로 인간의 힘을 의지하지 말아야 할 전쟁이다. 상대가 더욱 거세게 나오면 나올수록 인간적인 도피를 생각지 말아야 한다.

두 번째 재앙은 개구리 재앙이다. 개구리란 큰 강이 있을 때 서식하는 동물이다. 가나안 땅에는 개구리가 유명하지 않다. 애굽 땅에서만 유명하다. 개구리는 애굽 나라를 보여주는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개구리 재앙이 주어지기 전에는 개구리는 강가에 살았을 것이고 애굽 사람들은 따로 각자 자기 처소에서 편안하게 구분지어 살았을 것이다.

물론 바로왕은 왕국에서 살았다. 그런데 갑자기 이런 구분이 깨어지고 온 애굽 나라 전체가 개구리 판이 되었다. 이것은 혼돈이다. 순식간에 질서의 무너짐을 애굽 사람들은 직면하게 되었다. 분명히 바로왕이 단호하게 모세와 여호와라는 신에게 대들고자 하는 것은 믿는 구석이 있어서 그렇다.

그들이 믿는 것은 인간의 힘에 의한 국가라는 질서체제이다. 그 중에서 가장 소중하고 은밀한 처소가 바로 왕이 거처하는 왕궁이다. 이것이 그들이 내세우는 인간들만의 질서 세계이다. 감히 일반 백성들이 출입도 못한 깊숙한 공간이 왕궁이다.

이런 체계 있는 권력 체제가 그 동안 이 애굽 나라를 튼튼한 강대국으로 키워왔다고 자부하는 차이다. 따라서 이런 탄탄한 배경을 믿고 그들은 설마 이 강한 질서 구조에 혼란이 생길 것은 꿈에도 생각 못했다.

그동안 바로왕은 자기 권력을 바탕으로 히브리 민족을 못살게 굴었다. 애굽인들에게는 자유와 자율이 주어졌지만 히브리인들에게는 바로왕에 의해서 언제든지 질서가 파괴될 수 밖에 없었던 엉성한 집단으로 취급받았다.

노예라는 것이 원래 그런 것이다. 종은 함부로 주인이 사는 방에 들어갈 수 없지만 주인 뿐만 아니라 주인집 아이들과 개까지도 언제든지 함부로 종의 은밀한 방에 들어가도 흠이 되지 않는다. 마치 마당에 있는 개 집을 마음대로 부수고 허물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히브리인들의 운명은 주인인 바로왕의 마음에 따라 허물어질 수 밖에 없는 처지에 놓여 있었다.

그렇다면 과연 히브인 민족은 애굽 사람의 종이 되어야만 마땅한 하등 종족인가? 아니다. 히브리인들 배후에는 여호와 하나님이 계신다. 그 여호와 하나님이 명령 한 마디로 나일강 가에서만 서식해야 될 개구리들이 온 애굽 사람들의 집을 수색한다.

심지어 아무도 함부로 들어갈 수 없는 바로왕 개인적인 거처까지 엉망진창으로 만들어 놓게 된다. 이것은 곧 하나님에 의한 무장해제와 다를 바 없다. 과연 누가 노예며 누가 이 나라의 질서를 쥐고 있는 주인이라는 말인가? 심지어, 화덕이나 떡 반죽에도 개구리들이 올라와서 활개를 치고 있다.

사람의 권위라든지 질서 의식이라는 것도 스스로 권위를 가질만한 자질이 있다고 자부심을 가질 때나 가능한 이야기이다. 그런데 사람이 주인이 되어야 될 나라가 온통 개구리가 사람의 모든 거처를 점령하고 말았으니 이는 여호와 하나님 보시기에 이 애굽 나라는 개구리 나라에 불과하다는 이야기에 해당되는 것이다.

물론 사람에 따라, 이것은 자연적인 가능성에 의해서 생길 수 있는 우연적인 일이지 결코 배후에 있는 여호와 하나님의 의도적인 실행의 결과가 아닐 곳이라고 보는 애굽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그것이 바로 강퍅이다.

출애굽기 8:12-14에 보니 그런게 아니고 "모세와 아론이 바로를 떠나 나가서 바로에게 내리신 개구리에 대하여 모세가 여호와께 간구하매 여호와께서 모세의 말대로 하시니 개구리가 집에서, 마당에서, 밭에서 나와서 죽은지라 사람들이 모아 무더기로 쌓으니 땅에서 악취가 나더라"

모세의 기도에 의해서 그 많은 개구리가 일시에 죽었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이것은 그동안 개구리의 침공이 자연적으로 우연히 생겨날 수 있는 무원인적인 사태가 아니라는 것이다. 애굽 나라 질서의 원상 회복은 더 이상 바로왕의 손에 달려있지 않다는 것이다.

오직 여호와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다. 바로왕은 끝까지 대들고 버틴다. 왜냐하면 자기 나라 술객들도 그런 이적을 일으킬 수 있다는 점에서 애써 여호와 하나님의 존재를 자기 기억에서 지워버리려고 한다. 바로 이것이 강퍅이다.

오늘날 성도들은, 자기를 비롯해서 모든 이들이 다 하나님 앞에서 종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에베소서 6:5-6과 9절에 보면, 하나님의 이름만 우리 속에 담겨 있다면 그것으로 우리의 소원은 달성된 것이다. 신명기 12:5에 보면, 우리가 아무리 절망적인 상태에 있다 할지라도 하나님은 그것을 문제 삼는 것이 아니라 "네가 과연 그런 상황 속에서도 이 하나님의 이름의 공로를 인정하느냐?"를 물으신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공로만 드높아지는 쪽으로 일하신다는 이 일관성만 깨우친다면 온통 바로왕 같은 사람들만 득실거리는 이 세상에서 나서도 조금도 두려울 것이 없을 것이다.

8:16-19

죽음의 흔적이란 아무리 위대한 마음과 고상한 품위를 유지한다 할지라도 신체적 아픔에 굴복하고 얼굴을 찡그려야 한다. 죽음의 흔적이란 비현실이 아니라 엄연한 현실이다. 죽음이란 그저 눈만 한번 감으면 될 문제가 아니다.

숨만 끊어지는 것만이 죽음이 시작이 아니다. 숨이 끊어질 때까지 인생의 전부가 죽음이 주는 고통으로 충만하게 되어 있다. 이처럼 비록 사랑하는 자녀라 할지라도 죽음의 흔적이 충만한 이 세상에서 자유로울 수가 없다.

본문에 보면, 하나님이 내리시는 이 재앙은 애굽 사람들만 당하는 것이 아니라 애굽 땅에 같이 사는 이스라엘 사람도 당한다. 왜 아무런 잘못도 없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이 주신 재앙을 같이 받아야 하는 것일까?

그것은 죽음의 흔적을 맛보지 못한다면 하나님이 주신 은혜가 얼마나 귀한 것인 줄을 모르게 된다. 예수님께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인자는 머리 둘 곳도 없다"고 말이다. 예수님께서 하늘의 말씀만 하시는 분이라고 해서 결코 세상에 충만한 죽음의 흔적으로 자유로울 수가 없었다. 하늘의 좋은 말씀을 하시면 될터인데 왜 이 세상 고통에 흠뻑 젖으셔야 하는 것인가?

그것은 인간의 구원이라는 것이 신체성은 내 팽개치고 정신적인 구원으로 진행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실제로 예수님은 공생애 처음으로 그 임무를 부여 받게 된다. 마태복음 4장에서 예수님은 성령님의 의도적인 작전에 의해서 광야에서 40일간 금식하게 된다.

그리고 악마와 마주치게 된다. 여기서 악마는 세 가지 유혹을 제시하는데 그것이 곧, 생존문제와 과시욕과 소유욕이다. 이것이 이 세상에 죽음의 흔적을 충만하게 남기게 한 원인이다.

이 생존과 과시와 소유는, 보통 평범한 인간들이 이 세상을 살아가는 재미요 보람이요 축복이라고 여기는 것들이다.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 생의 자랑거리 없이 무슨 낙으로 세상을 산단 말인가!

흔히들 자칭 하나님의 자녀이니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특별 대우를 해주셔야만 한다고 우기는 그 내막에는 실은 생명의 흔적이 아닌 죽음의 흔적들에 대해서 부푼 꿈을 안고 하늘의 복을 고대하고 있는 것이다.

무슨 말인고 하니, 정작 하나님이 주시고자 하는 축복을 하나님의 자녀에게 주시기 위해서는 하나님께서 의도적으로 하나님의 자녀들로 하여금 얼마나 자신들이 요구하는 것이 실상은 죽음의 흔적 물들인가를 절실하게 깨닫게 하는 과정을 거친다는 것이다.

소위 하나님의 자녀들이 이 세상에서 당한다는 고통과 괴로움은 그 원인이 실은 자신들이 여전히 죽음의 흔적을 열심히 찾고 있는 그 정신상태에 있었던 것이다. 바로 이것이 하나님께서 신자들 불신자들 같이 고통을 겪게 하시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자녀에게는 어떤 식으로 변화시키시는가 하면 열왕기하 5장에 보면, 나아만 장군이 나온다. 세상적으로 출세한 사람이다. 그런데 갑자기 문둥병이 걸렸다. 곧 자기 자신의 본질을 드러내는 죽음의 흔적이다.

겉으로는 세상 사람들이 부러워하는 장군이라는 치장이요 실제로는 죽음의 세력에 의해서 마구잡이로 허물어져 가는 일반인에 불과하다. 본질과 겉 모습의 엄청난 차이를 나아만 장군은 보여준다.

그 때 그는 엘리사 선지자를 소개 받는다. 그러나 그는 정작 엘리사의 얼굴도 보지 못하고 지시만 받는다. 요단강 물에 7번 들어가서 몸을 씻으라는 것이다. 나아만 장군이 요단강가에 서는 순간 그는 너무나 실망했다. 왜냐하면 요단강물은 자기 나라 아람의 다메섹 강물보다 더 더러웠기 때문이다.

"깨끗한 물이 자기 몸을 깨끗케 하는데 유리하다"는 이 인식의 문제점은 과연 무엇인가? 만약 몸만 낫겠다고 나선다면 이는 '생존-과시-소유'라는 죽음의 속성의 일부일 뿐이다. 즉 "어서 몸이 나아서 살아야겠다"라는 의식이 그대로 남아 있는 이상 그는 여전히 죽음의 사슬에 그냥 묶인 인간이다.

그러나 나아만 장군은 종들의 간청을 듣고 엘리사의 지시에 따른다. 이것은 곧 더 이상 자기 몸은 자기 것이 아니라 말씀을 내리는 분의 소유라는 것으로 전환된 순간이다. 병이 들었던, 병이 나았던 상관없이 더 이상 내 몸은 내 것이 아니라 자기 신체의 소유권은 하나님에게 있음을 인정한 것이다.

바로 이러한 전환이 곧 죽음의 흔적으로 충만한 이 세상에서 발생될 진정한 하나님의 축복이다. 오늘날 교회가 이런 입장에 놓여 있다. 요한계시록 2-3장에 보면, 하나님께서 이상스럽게 일을 하신다. 일방적으로 교회라고 불러놓으시고서는 천사를 보내어서 지시사항을 주시고, 만약에 이 지시에 따르지 않은 촛대를 옮기겠다는 것이다.

처음부터 교회를 시작케 하신 분은 하나님이신데도 불구하고 촛대를 냉정하게 옮기시는 분도 하나님이시다. 어째서 앞 뒤가 잘 연결이 안되는 일이 일어나야 하는가? 그것은 우리들의 모든 소유권이 우리 자신에게 있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전달되는 도구가 되기 때문에 그렇다.

하나님은 모든 일을 반드시 이렇게 하신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 백성들과 함께 하나님이 내리시는 재앙을 받아야 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과연 우리가 진정 하나님의 뜻을 나타내는 종이 맞는지?"를 다시금 생각해 봐야 한다.

데살로니가전서 1:9-10절에 보면, '하나님이 전 인류에게 노한다'는 내용이 나와있다. 우리들은 그저 평범한 소시민일 뿐이다. 크게 남을 해친 적도 없고, 해치고 싶은 의사도 없고, 남을 괴롭히면서까지 생존에 나서고 싶은 생각도 없다.

그저 조용하게 열심히 평생을 소리 없이 자세를 낮추면서 겸손하게 사는 자들이다. 죄가 있다면 이 세상에 태어나서 존재한다는 죄 밖에 없다. 그런데 그런 평범한 우리를 향하여 하나님께서 장차 분노하시는 때를 정해 놓으셨다는 것이다.

그만큼 우리는 우리 주변에 있는 죽음의 흔적들과 너무 안일하게 친밀을 유지하면서 그 덕으로 살아오고 있는 중이다. 예수님의 십자가 고통도 이런 우리들의 무지 때문에 당하신 것이다. 이제 우리는 그런 고통을 당할 차례이다. 하지만 이 고통을 통해서 이미 우리는 하나님의 축복을 받아, 우리 자신이 더 이상 우리 것이 아님을 발견한 그 즐거움을 지니고서 남은 여생을 살아야 하며 모든 것이 우리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위한 소품인 점을 놓치지 말아야 한다.』

8:20-24

본문 21-22절에 보면 차별이란, 손해 보는 사람 입장에서는 있어서는 안될 악한 상황의 원인이지만, 이익 보는 사람들에게 왠 횡재인가 하고 즐거워하게 만드는 원인이다. 하나님에 의해서 차별이 구체적으로 진행되는 그 현장에 바로왕과 애굽의 술객들과 애굽 백성들과 이스라엘 백성이 함께 놓여져 있다.

그런데 유독 바로왕 만큼은 아직도 여호와라는 신의 뜻을 거역할 수 있는 입장에 자신이 놓여 있다고 여긴다. 그는, 인간들이란 그냥 그렇고 그런 자들이라고 보고 있다. 특별 나게 신으로부터 차별 대우 받을 사람이 없다고 여긴다.

이 점에 대해서는 애굽의 술객들도 마찬가지이다. 그들은 나름대로 남들보다 많은 지식을 갖고 능력이 있다고 자부하는 사람들이다. 지팡이가 뱀이 되는 일이라든지 물이 피가 되는 일이라든지, 개구리를 불러모으는 일에 대해서 그들도 어느 정도 따라 했다.

애굽의 술객들이 비슷한 결과를 내어놓으니 바로왕이 강퍅해 질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자기 앞에서 굽신거리는 술객들도 그 정도의 능력을 갖고 있다고 한다면 그 술객보다 더 높은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자신으로서는 히브리인의 술객인 모세와 아론에게 굴복할 이유가 전혀 없는 것이다.

인간들 사이에 있어 진정 차이 나는 대우와 존경을 받을 자는 저 모세나 아론이 아니라 바로 바로왕 자신이라는 점을 더욱 분명히 하고자 했을 것이다. 자기 빼놓고서는 모든 인간들은 다 자기 밑에 굴복 당해야 될 대상에 불과하다고 보고 있다.

바로 이것이 바로왕 자기 입장에서 생각하는 차별성이다. 여호와로부터 보냄을 입었다는 자들보다 자신이 더 우월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바로왕은 착각하고 있다. 히브리 민족은 뭔가 그런 일반적인 종족이 아님을 알아야 한다.

진실로 유일하게 살아계신 하나님이 직접 관여된 민족이라는 점을 알고 사실 경악해야만 한다. 물론 요셉 때 있었던 선배 바로왕은 이 점을 안다. 그래서 그 왕은 히브리인들에게 특별 우대를 해준 것이다.

그러나 후대에 넘어와서 사정은 역전되었다. 자신의 분수를 모르고, 세상의 뿌리가 어떻게 수립되었는지 관심도 없는 왕이 등장해서 자기 밑에서는 히브리 민족에게 주어졌던 특혜는 여지없이 제거되었고 오히려 다른 민족보다 더 차별적으로 구박을 받도록 조치한 것이다. 즉 새로운 질서로 재편 시키겠다는 것이다.

바로 이런 정책으로 인해 하나님의 복으로 인도함을 받는 히브리민족 속에서 고통의 신음 소리가 울려 나왔고 그것이 하늘에까지 상달 된 것이다. 이 부르짖음의 결과로 나타난 인물이 모세요 아론이다. 모세는 지금 바로왕 앞에서 하나님 같은 역할을 하고 있다.

바로왕의 술객이나 졸개들이 바로왕 대신 나설 때는, 모세도 직접 자기가 나서지 않고 아론을 대신 내세워 기적을 수행했다. 바로왕의 부하들이 어느 정도 하나님의 기적을 따라 할 때까지만 그렇게 한다.

이번 파리 재앙에 와서는 드디어 애굽의 술객들이 당황한다. 모세와 아론이 베푸는 기적은 결코 인간들의 능력에서 나올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애굽의 술객들은 비로서 자신의 분수를 알게 되었다. 자신들이 감히 나설 자리가 아님을 파악한 것이다.

그리고 자기 왕에서 이런 부질없는 무모한 대결을 계속하지 말도록 종용한다. 이처럼 애굽의 술객이 손을 들자, 비로서 나타나는 현상은 이 파리재앙부터 애굽 나라 내에서도 차별이 일어난다. 애굽 백성들에게는 재앙이 내리는 그 순간에 히브리민족이 사는 지역에서는 재앙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 전까지 애굽인이든, 히브리인이든 구별 없이 모든 재앙이 다 주어졌다. 하지만 이런 재앙들이 그냥 우연한 자연 현상이 아니고, 그렇다고 사람들의 손에 의해서 일어날 수 있는 일이 아니라는 점이 확연하게 드러난 이상, 하나님의 재앙은 본격적으로 차별적으로 감행이 된다.

하나님의 백성 된 자와 그렇지 않는 자가 확실하게 구분된다. 이것이 바로 인간들 사이에 일어나는 거룩과 속됨의 차이이다. 사람들의 상식으로는 거룩과 속됨이 윤리적이고 도덕적인 행위로 구별된다고 보지만, 정작 하나님께서는 그런 식으로 거룩과 속됨을 구분하지 않으신다.

오로지 하나님께서 내미시는 차별적인 사랑의 은총 여부를 가지고 거룩과 속됨이 갈라진다. 인간은 어디까지나 피조물이다. 적어도 애굽 사람들 가운데 신앙심이 있는 자라면, 왜 히브리인들에게는 파리 재앙이 떨어지지 않는지 그 내력을 윗대를 거슬려 추적해 봐야 한다.

진짜로 살아계신 하나님께서 일을 어떤 식으로 진행시키는가에 대해서 제대로 아는 것이 시급한 문제임을 눈치채야 했다. 히브리인들이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이 되는 원리나 애굽 사람들이 하나님 백성이 못되고 속된 악마의 백성이 되는 원리가 오직 하나님의 자기 언약에 준해서 실시된다는 것을 알아야 했다.

히브리인들도 마찬가지이다. 자신이 구원 받은 것이 자신의 선택에 의해서 일어난 일이 아님을 확실히 알아야 한다. 파리 재앙을 비롯해서 각가지 재앙이 떨어지지 않는 것이 당연히 자기에게 주어져야 한다고 여기는 것을 이 역시 큰 오산이다.

"우리가 잘 섬기는 하나님은 마땅히 우리에게 재앙을 내려서는 아니 된다"고 생각해서는 아니 된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차별성은 성도들 입장을 고려한 차별성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일방적으로 차별을 하실 만한 그만한 자격이나 권리가 있음을 증거하기 위한 입장에서 행하신 차별이기 때문이다.

저주 받아 지옥 가는 것은 하나님의 특별한 기적으로 이루어지는 일이다. 따라서 우리는 우리의 위치를 제대로 알아야 한다. 하나님의 차별성이 우리들에게는 좋은 쪽으로 제공되었기 때문에 우리가 구원 받은 것이다. 하나님이 제시한 차별을 우리가 즐겁게 반겨야 한다.

8:25-32

바로 왕은, 히브리인들이 왜 '희생 제사'를 드려야 하는지 이유는 모르는 채 그저 그것을 허용한 것 조차 왕인 자기에서 나온 배려와 은총이라고 간주하고 싶었던 것이다. 여호와께서 히브리인에게 나타나신 이유도, 그리고 바로왕에게 여호와 이름으로 다가서는 이유도, 다 지금 이 세상이 누구 덕분에 유지되고 있는가 하는 점을 분명히 해두고자 함이다.

예수님은 우리들에게 자신의 목숨을 가지고 나타냈다. 돈을 가지고 나타나시는 분이 아닌 이유는, 현재 우리가 사는 것은 하나님이 주신 돈 때문에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피 때문에 사는 것을 알려주시기 위함이다.

전에 하나님께서는 7년 큰 풍년을 준비하셨고 또한 7년 큰 흉년을 연이어 준비하셨다. 일반적으로 생각하게 되면, 잘되면 당연한 일이고 못되면, 하나님 탓으로 돌리기 십상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요셉을 보내어 결코 그런 것이 아님을 나타내 보였다. 7년 대풍년이 주어진 것도 하나님 마음대로요, 7년 대 흉년이 오는 것도 하나님 마음대로인데 그 모두를 하나님의 은혜로 여기고 감사하는 마음으로 대비해야 한다는 것이다. 요셉이 이를 위하여 보내심을 받았다.

과연 요셉은 감사한 마음으로 대비했다. 애굽이 최고의 부국이 된 것은 결코 7년 대 풍년 때문이 아니라 그 풍년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은혜로 여기며 감사하는 마음으로 받았기 때문이다. 이 사실은 7년 대 흉년을 통해서 더욱 더 그 풍년의 은혜에 대해서 고마워할 수 있었다.

오늘날 우리들도 마찬가지이다. 몸이 건강하면 당연하고 아프면, 하나님 탓으로 돌리기 쉽다. 건강할 때도, 자신이 죄 안 지어서 건강하다는 생각을 하지 말아야 한다. 죄를 지었음에도 불구하고 건강한 것은 그 도중에 예수님의 십자가의 용서해 주심이 은혜로 작용하고 있었다고 봐야 한다.

바로 이런 마음가짐이 있을 때 설사 나중에 몸이 아프더라도 하나님 탓으로 돌릴 것이 아니라 나의 본질에 비해서 이런 아픔은 너무나도 지당한 것으로 곱게 받아드릴 수가 있는 것이다. 본문을 통해서 히브리인 민족은 장차 전 인류를 대표해서 하나님께 나아가는 제사장 역할을 해야 될 민족인 것이 더욱 분명하게 드러내고 있다.

하나님은 은혜로 다가 오시는데 그 은혜성이란 반드시 희생을 면전에 세우고 나타나게 되어 있다. 사람이 하나님께 희생하여 재앙을 사전에 제거하는 방식은 이방종교에서나 행하는 제사이다. 하나님의 희생은 사람이 제물로 바쳐진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니다.

왜냐하면 인간이란 뭘 바쳐도 하나님께 영광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희생 제물의 첫째 원칙은, 제물에 '흠 없어야 된다'는 점이다. 이것은 동물이 바쳐져서 사람이 사는 방식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일단 반대로 사람들이 뭘 바치고 아무리 많이 바친다 할지라도 하나님께 만족을 드릴 수 없다는 점을 분명히 하기 위해서이다.

사람들이 짐승을 바치든, 곡물을 바치든 그 바치는 것으로 인해 사람들이 복을 받는 것은 아니다. 그 희생의 자리에는 사람 말고 사람을 대신할 완전한 분이 위치할 자리이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이처럼 자꾸만 희생을 드릴 것을 요구하시는 것은, 이 세상 만사가 모두 이 여호와께 바쳐지는 희생 사건에 초점을 두고 진행되고 있음을 말하기 위해서이다.

이것은 기존의 모든 국가와 모든 사건과 모든 인간의 노고나 지혜가 몽땅 하나님의 은혜를 도리어 저주하고 미워하고 싫어한 그 괴로움이 누적이 되어 되돌아온 증거물로서의 희생물이다. 여기에 바로 하나님의 본심을 드러낸 것이기도 하다.

인간은 하나님을 생각할 때, 먼저 자신이 선함과 성실함을 주섬주섬 모아서 하나님께 드리면 그만이라고 여긴다. 그러나 이러한 사고방식 속에서는, 하나님의 덕택이라든지, 하나님의 덕분 이라는 요소가 자기 속으로 밀려 들어오는 것에 대해서 거부하고 싶은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사랑은, 은혜 받은 인간들의 비난마저도 도로 용서함과 불쌍히 여김으로 되갚아 주시는 요소가 담겨 있다. 그것이 바로 '희생'이라는 모습으로 등장된다. 하나님을 염두에 둘 때는, 십자가로 나타나시는 하나님을 먼저 연상해야 한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궁극적으로 원하시는 것은 그 사랑을 받는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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