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애굽기 5장 - 6장 주석
출애굽기 5장 - 6장 주석
이름 : 이진용(IP:222.99.120.158)
출애굽기 5장 - 6장
(5장-10장)
모세와 아론이 바로 앞에 섰을 때 그들은 그들의 神의 이름으로 섰다. 이는 모세가 여호와 신과 바로와 바로 맞부딪치게 하고 자신을 관망자로 사태를 지켜보고자 하는 의도가 있다. 또한 神에게 있어 인간의 필요는 오직 그 神에게 예배를 드리는 일밖에 없음을 나타내는데 바로는 인간의 효용성을 노동생산성에 두고 있어 모세가 요구한 것과 매우 대조가 된다.
바로는 여호와 신에 대한 모멸을 생산성의 극대화로 실행에 옮기려고 하는데 그것은 적은 재료의 투자로서도 전과 같은 양을 생산할 것을 여호와의 백성들에게 요구한다. 이 노골적인 학대는 고대 여호와 신에 대한 학대를 선언한 셈이 된다.
모세 일행은 그들의 입장이 대단히 난처해졌는데 바로가 노리는 것이 바로 이점이었다. 그들이 바라보는 그 대상으로부터 오히려 배반을 당해 스스로 낙심에 이르기를 바랬다. 그 낙심의 배후에는 바로 왕은 흔들릴 수 없는 권력의 소유자라는 것을 새삼 실감해서 나온 결과로 돌려지기를 기대하면서. 그 누구보다도. 또 여호와라는 신보다도 위대한 바로왕의 이미지를 조성하고 싶었을 것이다.
모세일행은 소외되어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그래서 다시 여호와께 항변한다. 여호와 때문에 우리 백성이 더 심한 고생을 하게 되었다고 그럴 때 하나님은 애굽과의 전쟁을 선포하신다. 이스라엘 전체가 하나님의 군대가 되어 애굽의 군대와 싸움을 전개하겠다고 하신다. 그러나 모세는 그들의 현재 입장이 너무나 애굽의 힘에 예속된 상태이기 때문에 설득해도 소용없다고 걱정을 늘어놓는다. 이는 이번 전쟁에 있어 인간의 힘은 전적으로 소용없음을 모세가 스스로 자인하고 들어간다. 하나님은 내가 큰 권능과 재앙을 내려 그들 손아귀에서 내 군대를 빼내겠다는 것이다. 다만 모세는 하나님이 시키는 대로 움직일 따름이다.
이 전쟁은 자기 백성을 원하는 여호와 하나님과 그 하나님의 백성을 주지 못하겠다고 버티는 싸움이다. 그래서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군대라고 하지만 직접 참전할 성질의 군대가 아니라 어느 편이 최종적으로 승리했는가를 보여주는 노획된 전리품의 성격을 지닌다. 따라서 만약 전쟁의 승리가 여호와에게 돌아간다면 이스라엘 민족 전체는 여호와의 소유가 되어버린다.
이러한 전쟁형식은 앞으로 약속을 성취하신다는 여호와 신이 개입된 전쟁에서 비쳐지는 전형적인 모습이 될 것이다. 세상에 매여있어 세상의 종으로서 살아가야 하는 인생들 중에 누가 진정 여호와 군대라 불리어 질 수 있는가 하면 그것은 하나님의 사랑의 능력에 의해 얻어진 노획물로 신분이 바뀐 그들이 바로 진정한 이스라엘이 될 것이다. 동시에 무엇이 여호와라는 신에게 징벌의 대상이 되는가도 아울러 이번 전쟁에서 밝혀진다.
그것은 바로 강퍅이었다. 목이 곧은 상태이다. 그 강퍅을 대변하는 목소리는 바로[여호와가 누구관대?] 이다. 여호와를 알지 못하는 민족이 망하는 이유는 바로 하나님의 약속이 여호와라는 이름으로 좌우되기 때문이다. 구원의 의미는[여호와 이름]이 안고 있는 비밀에 있다. 여호와 이름은 여호와께서 이 지상에 하는 일과 관련 있다. 하나님은 일개의 목동의 지팡이를 통해서라도 일하실 수 있다. 양에게나 위협이 되는 지팡이를 가지고서도 전 애굽을 떨게 했다는 것은 하나님의 전지전능성이 그 비천한 목동의 지팡이로 인하여 상대적으로 더욱 더 강조되고 있는 것이다.
10가지 재앙 중에서 애굽의 술객들도 흉내 낼 수 있는 기적까지는 모세가 직접 나서지 않고 그 일을 아론에게 맡긴다. 그러다가 바로왕으로 하여금 자기네 술객들의 한계를 넘어서는 역사임을 알게 되자 그때부터 모세가 바로의 神 입장에서(출 7:11-12) 직접 징계자의 모습으로 나서고 또한 이스라엘이 사는 지역과 애굽사람이 사는 지역으로 구별되어 징벌이 내려진다. 즉 이것은 하나님의 이번 사역은 이스라엘을 구출하기 위하여 애굽에 내려지는 심판이라는 것이다.
5: 1-2
왜 하나님께서 성도에게도 불신자와 동일한 고생을 시키시는 것일까? 환난이나 고생이 없이는 감추어진 소망이 성도 안에서 현실화되지 않기 때문이다. 본문에 나오는 모세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남들 보기에 하나님의 뜻도 잘 알고 하나님으로부터 막중한 임무를 띠고 세상에 나서니 참으로 신날 것이라고 여길 것이다.
그러나 막상 하나님께서 어떤 자들 만나게 주느냐 하면, "여호와가 누군데?"라는 자들과 만나게 된다. 전혀 모세 말이 먹힐 수가 없는 자들을 만나게 하신다. 이럴 때 성도는 좌절을 느낀다.
성도는 자신을 좌절케 하는 그 불신자의 말을 처음에도 아주 강하게 부정하게 된다. 그러나 그런 경험을 자주하게 되면, 비로소 자신이 서있는 현 위치에 대해서 다시 생각을 해보게 된다.
바로 이런 전환을 위해서 하나님께서 일부로 성도로 하여금 불신 세계 속에 집어넣으시는 것이다. 철없이 하나님의 말씀만 대할 때는, 누가 뭐래도 자신은 하나님이 말씀만을 순종하는 천하의 경건한 자인 줄 알고 자신의 토대는 누가 뭐래도 하나님과 한편으로 같이 서 있는 것인 줄 알았는데 막상 세상에서 불신자들을 전도하는 사명을 감당하면서 무수한 좌절과 실망과 욕설과 비웃음에 직면하다 보면, 은근히 부화가 나는 것이다.
희희낙락하는 식으로 천국 가는 것이 아니다. 모세도 그러하다면, 예수님도 그러하다면 오늘날 우리들이야 말 할 것도 없다. 그런데 여기서 더 나아가면 어떤 사태가 벌어지는가? 바로왕의 답변이 참으로 솔직하다. 너무 솔직해서 신자로 하여금 간담을 서늘하게 만든다. 어쩌면 가짜 신자 노릇 하는 사람의 근원을 완전히 뒤집어버리는 답변일 수도 있다. 바로왕은 말하기를, '간다', '못 간다'가 아니라 대뜸 하는 말이, "여호와가 누군가 내가 그 신의 말을 들어야 하는가?"는 것이다.
물론 바로왕의 대꾸는 오늘날 모든 불신자들이 신자들보고 하는 이야기이다. 그런데 바로 자칭 신자라고 우기고, 평생을 버텨왔던 사람에게는 심금을 울리는 정곡을 찌른 발언이다. 사람은 누구와 대화할 때는 일단 상대방이 속셈을 알기 위해서라도 잠시 그 사람 입장이 되어보게 마련이다.
그런데 그 순간 소위 신자라고 자처했던 본인이 평생 자신을 속여왔다는 솔직한 깨달음의 순간을 맞이하게 되는 것이다. "나는 근 40년간 착각의 늪에 빠져 있었어. 그동안 자신도 모르고 매주 교회라는 데를 나가서 스스로 마약을 맞고 싶어했어. 그래 그렇다. 여호와가 누군데? 여호와라는 단어 자체가 나에게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내가 여호와라는 신에게 무슨 혜택을 받은 적이 있는가 말이다. 그렇다. 이제 정신 차려야 한다. 여호와라는 신을 안 믿더라도 아무런 상관이 없는 것을! 내가 스스로 내 마음에 자물쇠를 채운거야. 한국 국민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불신자의 말이 진리였어.
역시 다수의 말이 합리적이고 진리에 가까운 법이야. 그래 여호와라는 무거운 짐, 기독교라는 무거운 짐, 유령처럼 달라붙은 예수라는 가상 인물의 짐에서 이제는 벗어나는 거야 벗어나 보니까 이렇게 아무렇지도 않을 것을 말이다. 그래 나는 할 수 없어. 아예 처음부터 모르는 거라고 여기자. 이제 큰 소리칠 수 있어.
여호와가 누구야! 있으면 나와보라고! 이 가짜 허상아! 그 덕분은 지난 세월 동안 나쁜 짓을 줄일 수 있었지만 하지만 계속해서 죄어오는 여호와의 족쇄의 무게보다는 덜 무거웠을 거야!" 라고 말이다.
아마 어떤 사람이 너무 좋아서 사흘 밤낮을 엉엉울기도 할 것이다. 마치 신자 처음 될 때 예수님을 몰랐던 죄 때문에 사흘 밤낮으로 엉엉 우는 것과 같이 말이다. 우리는 이런 사람의 입장에 서 봐야 한다.
그래도 예수이면, 예수님 영을 받은 사람임에 틀림없다. 왜냐하면 이유도 없이, 조건도 없이 예수님뿐이기 때문이다. 성경은 바로, 자칭 신자라고 여기는 사람들로 하여금 인간이 불신할 수 있는 모든 경우와 그 가장 깊은 한계성까지 다 소개하고 있다.
따라서 우리가 진정 신자라는 것이 판명되는 상황, 그런 회의의 깊은 자리까지 이해될 때뿐이다. 요한복음 11:49-50절에 보면 이런 말씀이 나온다. "그 중에 한 사람 그 해 대제사장인 가야바가 저희에게 말하되 너희가 아무 것도 알지 못하는도다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어서 온 민족이 망하지 않게 되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한 줄을 생각지 아니하는도다 하였으니"
즉 예수님의 말이 옳고 그르고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예수라는 그 존재로 인하여 로마의 밉상을 받게 되면 국가 전체가 핍박을 받게 되니, 예수를 제거하는 것이 온 민족이 망하지 않게 하는 당연한 조치라는 것이다. 바로 이러한 집권자의 마음과 심정을 우리가 확실하게 이해를 해주어야 한다.
그 자리에서 다시금 예수님의 십자가를 생각하라고 하는 것이 성경에서 요구하시는 바이다. 바로왕은 현실 속에 있는 자이다. 결코 비현실을 꿈꾸는 자가 아니다. 따라서 소위 성도라는 자도 현실을 무시할 수 없다.
우리가 다니엘서를 보면, 강력한 현실이 자꾸만 성도를 덮치는 것을 보게 된다. 일정한 기간 내에 바벨론 신 이외에 그 어떤 신에게도 기도 못한다는 법령을 정했어도 다니엘은 보란 듯이 동쪽 창문을 열고 기도하는 것이 나온다. 금 신상에게 절하지 않는 자는 용광로 불에 들어간다는 것을 국가법으로 정해졌음에도 불구하고 금 신상에 절하지 않는 다니엘의 세 친구를 보게 된다.
이처럼 살아있는 소망은 환란 가운데 더욱 실제적 힘으로 작용케 한다. 우리는 자신의 신앙의 원천을 불신자를 통해서 의심하고 공감하는 것 가운데 이 실제 현실 속에서 하나님께서 어떻게 활약하고 계신가를 알아야 한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바로왕 앞에 보내신 것은 하나님의 일은 항상 없는데서 있게 하는 방식으로 움직이시기 때문에 그렇다. 즉 이 애굽 통치라는 현실 속에 천국다움이라는 것이 없었는데 그 가운데 '국가 이스라엘'을 창설하므로서 새로 생겨버린 천국으로 인해 이 기존의 현실이 지옥인 것을 비로소 들통나게 하시려는 것이다.
그런데 천국과 지옥을 가름하는 기준은 딴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여호와가 누구관데"가 기준으로 작용한다는 것이다. 이 기준을 찾아내기 위해서라도 모세는 바로왕 앞에 가서 하나님의 계획을 일방적으로 전해야 했다.
히브리 민족, 즉 야곱의 후손이 되는 히브리민족은 그 출현부터가 타민족과는 차별된 목적을 갖고 있다. 이사야 45:15에 보면, "구원자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여 진실로 주는 스스로 숨어 계시는 하나님이시니이다"라고 되어 있다. 즉 구원자 하나님은 다른 민족에게는 나타내시지 않고 계속 숨겨진 하나님이시다.
그러나 이스라엘만큼은 그 하나님은 유일하게 나타내시는 것이다. 그것은 모든 인류들이 다 죄로 인해 하늘 나라와 단절된 상태에 놓여 있지만 하나님은 자신의 창조에 담긴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 특별히 사전에 계획 하에 인간의 핏줄과 무관한 민족을 이 지구에 심어놓으신 것이다.
그러니까 없는데서 있게 된 민족이요, 죽은데서 살아난 민족, 즉 하나님의 창조 능력이 고스라니 담겨 있고 보이게 되는 민족이 바로 이스라엘 민족이다. 이제 과연 계속 바로왕의 입장에 그대로 머물러 있어야 할지 이제는 모세와 더불어 고난 받아야 할지는 우리들의 몫으로 던져졌다. 즉 새로 생긴 천국의 사람으로 살면서 그 여호와 하나님을 인정해야 할지 아니면 그 이스라엘 나라마저 비현실적으로 부정해야 할지, 스스로 판단해 보아야 한다.
5: 14-18
바로 왕에게 찾아간 인물이 그냥 보통 사람이 아니라 이 우주를 창조하신 당사자 하나님으로부터 특별히 명을 받은 선지자들이다. 그렇다면 감히 일개 피조물에 지나지 않는 바로 왕은 당연히 이들 선지자 앞에 무릎을 꿇든지, 아니면 죽임을 당하게 하든지 할 때, 진정 하나님의 살아계심이 표시 날 것처럼 우리는 예상한다.
그런데 기가 죽어야 될 악의 무리가 도리어 하나님이 선지자와 백성을 앞에서 더 기가 살고 갈수록 살기 등등해 진다. 당황스러운 것은 믿음도 없이 자칭 하나님이 백성이라고 여기는 사람들일 것이다. 하나님이 있으나 마나 한 존재 자체를 다시 고려하지 않을 수 밖에 없을 것이다.
큰 회의와 의심이 밀려들 것이 분명하다. 바로 이럴 때, 하나님의 말씀을 좀 더 깊이 보게 한다. 하나님은 말씀을 주실 때, 사람들이, 심지어 자기 백성이라는 작자들까지도 그 말씀을 얼마나 안일하고, 건성으로, 대수롭지 않게 취급한다는 것을 너무나도 잘 알고 계신다.
그것은 비록 자기 백성이라도 이미 이 세상의 풍습과 의식에 물들 때로 물들었기 때문에 그저 자기 위주로 모든 것을 해석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바로 이런 인식에다 말씀을 주니, 사람들은 그 말씀 속에 품고 있는 장차 오실 메시야의 고난과 영광을 제대로 읽어낼 수가 없는 것이다.
여기서 베드로전서 1:10-11에 선지자들의 모든 말씀 속에는 장차 오실 메시야의 고난과 영광이 미리 다 들어가 있었던 것이다. 장차 오실 메시야는 고난 없이 영광을 나타낼 분이 아니시다. 그러나 선지자 시절의 하나님의 백성이나 사람들은 고난 없는 영광을 학수고대 하고 있었던 것이다.
물론 오늘날도 마찬가지이다. 즉 하나님이 백성이요 성도이기에 메시야의 고난에 참여 할 수 밖에 없고, 그런 고난에 참여되는 것으로 이미 성도되었음이 확인되는 기쁨과 즐거움을 가져야 되는데 이게 안되는 것이다.
로마서 8:17에 보면, "자녀이면 또한 후사 곧 하나님의 후사요 그리스도와 함께한 후사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될 것이니라"라고 되어 있다.
빌립보서 1:29-30에 보면, "그리스도를 위하여 너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다만 그를 믿을 뿐 아니라 또한 그를 위하여 고난도 받게 하심이라 너희에게도 같은 싸움이 있으니 너희가 내 안에서 본 바요 이제도 내 안에서 듣는 바니라"라고 되어 있다.
베드로전서 2:21에 보면, 참으로 확실하다.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입었으니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 오게 하려 하셨느니라" 그러니까 그리스도의 고난의 자취를 따라 밟을 수 있게 허용된 자만이 신자요 그렇지 아니하면 신자가 아니라는 것이다.
성도는 예수님이 가신 길을 답사하므로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얼마나 큰 아픔과 괴로움과 고생을 하셨는지를 되풀이해서 우리 심성에 담기기를 원하신다. 이것이 바로 사랑이다.
예수님을 남남이라고 간주하지 말라는 것이다. 그 분은 우리 성도들을 위하여 자기 생명도 아낌없이 헌신했는데 우리 성도가 도리어 예수님을 기피인물로 취급한다면 어떻게 거기서 사랑이 나오겠는가 말이다. 이제는 오히려 우리가 사랑하는 예수님으로 인해 고난 받는 것을 기쁘고 즐겁고 영예스러운 일이라고 여겨서 하나님의 찬양하는 성도의 길로 가야 한다. 예수님과 더불어 살고 함께 고난 받는 것을 영광스러운 신분으로 여겨야 한다.
5:19-23
히브리인들은 자기 딴에 순수한 심정으로 여호와 하나님께 호소해 왔었다. 오직 애굽인들과는 다른 종교를 믿는다는 이유 때문에 학대와 핍박을 받고 있기에 이차에 하나님께서 나서서 자신에게 주어진 고통을 완화시켜 주셔도 하등 이상한 것이 없이 그냥 자연스럽게 될 일이라고 보았던 것이다.
과연 그들의 기도가 응답되어 하나님 쪽에서 누군가 보냄을 받게 되었다. 모세와 아론이다. 모세와 아론이 자신이 받은 계획을 히브리인들에게 알려주었을 때만해도 분위기가 괜찮았다. 더구나 모세와 아론이 직접 바로왕을 만났다고 하니 뭔가 큰 성과를 기대했을 것이다.
살아계신 여호와 하나님으로 인해 바로왕의 기세가 한 풀 꺾이기를 기대했다. 그러나 돌아온 결과는 도리어 사태가 더욱 악화 되었다. 본문 21절에 보니,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우리로 바로의 눈과 그 신하의 눈에 미운 물건이 되게 하고 그들의 손에 칼을 주어 우리를 죽이게 하는도다"라고 되어 있다.
지금 여호와 하나님 때문에, 아니 히브리인들은 모세와 아론 때문에 그들은 전보다 더욱 바로왕의 미움을 한 몸에 받게 되었으니 참으로 기가 막힐 노릇이다. 혹 떼려다 혹 부친 결과다. 히브리인들은 사태를 곰곰이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일방적으로 고통을 당하는 약자인 자기 자신에게는 별 문제될 것이 없고, 또한 여호와 하나님에게 문제가 있다는 것은 말도 안되는 소리고, 남은 것은 하나님 편에서 왔다는 모세와 아론의 잘못으로 돌릴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모세와 아론에 대해서 제대로 평가하시고 제대로 징계를 내려 교정시켜 달라"고 기도를 올리게 된 것이다. 과거에 망쳐 버린 자기 인생이나 현재 당하고 있는 괴로움을 해소하고자 하는 차원에서 하나님을 부르면 그것은 백발백중 엉터리 하나님이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예수 믿고 난 뒤에 고통이 완화되는 것이 아니라 더 악화되었을 때, 분명 그동안 다른 하나님을 염두에 두고 살았다는 것이 다 들통나기 때문이다.
본문에 나오는 모세 일행이나 이 모세 일행을 욕하는 히브리인들이나 모두 참된 하나님이 본질과는 거리가 멀다. 그렇다면 참된 하나님은 어떤 식으로 나타나는가는 사도행전 9:5에 보면 사울이라는 사람은, 그 당시 누구보다도 하나님 섬기는데 있어 뒤지지 않는다고 자부하던 사람이었다. 하나님의 살아계심에 대한 확신뿐만 아니라 그 하나님이 어떤 하나님이시며 어떻게 일하시느냐 하는 점까지 철저하게 파악하고 있다고 여겼던 사람이다.
그러나 그가 예수 믿는 사람들을 체포하기 위해 다메섹 길로 내려가다가 벼락과 함께 하나님으로부터 직접 음성을 듣게 되었다. 그 때 그가 한 고백이 "주여 누구십니까?" 그러니까 그는 그 전까지 하나님에 대해서 알았던 모든 것이 100% 몽땅 거짓 하나님이다 는 사실을 그때야 비로소 알았던 것이다.
이런 물음에 대해서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대답하신다.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라"라고 말이다. 사도 바울은 정말 제대로 하나님을 대해서 알게 되었다. 그래서 그의 고백은 고린도전후서를 비롯해서, 로마서, 에베소서, 갈라디아서 등등의 편지로 전해졌다.
우리가 이런 편지들을 대할 때면 그 심정은 사도 바울의 심정으로 돌아가 있어야 한다. 즉 "주여 누구십니까?"라는 식으로 말이다. 평소에 자신의 한 맺힘이나 이용하고자 여겼던 하나님은 그 자체가 거짓된 하나님이다 는 고백을 가지고 사도 바울의 글들을 읽어야 한다.
이와 같은 사람이 또 있다. 이사야 6장에 보니 선지자 이사야가 나온다. 그는 평소처럼 아무런 생각 없이 성전에 들어갔다. 갑자기 진짜 하나님께서 자신의 모습을 그에게 보여주게 되었다. 그 때는 그는 이렇게 탄식한다. "하나님, 저는 죄인인 주제에 거룩한 하나님을 대면하게 되었군요"라고 말이다.
사람이란 남들하고 비교할 때는 항상 자신의 장점이 크게 느껴지는 법이다. 그러나 진짜 살아계신 하나님 앞에서는 그게 무슨 소용이 있는가? 하나님 앞에서 그 어느 인간이든 자신이 극도로 심각한 죄인됨을 알게 된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나를 위하여 누가 갈꼬?"했을 때 이사야가 두 말없이 자신이 가겠다고 나선다. 물론 하나님께서는 예고 하시기를, "네가 알고 있는 하나님과 말씀으로 도리어 배척을 당한다"는 사실을 함께 일깨어 주신다.
그러나 이사야에게는 그게 문제될 것이 아니었다. 옳은 하나님을 알게 되었다는게 최고의 축복을 받은 것이다. 이사야의 이런 외침은 곧 이어 비난과 미움과 핍박으로 돌아온다.
본문에서 모세와 아론을 미워하는 히브리인들처럼 말이다. 이 와중에서 이사야 선지자는 '상한 심령'이 된다. 그렇다면 인간들이 잘못된 하나님을 선호하는 이유는 그들이 목숨을 다하여, 뜻을 다하여, 마음을 다하여, 정성을 다하여 지키고 싶은 것이 있다. 그것이 바로 '자기 의(義)'이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나타나실 때는 반드시 그 '자기 의' 사수를 도리어 공격하는 방식으로 나타나신다. 인간은 자기 의 앞에서는 모든 인간이 적이 되는 것이다. 정 지킬 수 없다면 자살이라는 극단적인 방법까지도 서슴치 않고 사용하려 한다.
여기에 대해서 하나님은 '예수님의 의(義)'를 들이밀면서 자신을 나타내신다. 사람들은 극구 예수님의 의를 짓밟게 될 것이다. 여기서 십자가 사건이 터지고 예수님은 '상한 심령'이 되는 것이다.
로마서 10:2-3에 "내가 증거하노니 저희가 하나님께 열심이 있으나 지식을 좇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를 복종치 아하였느니라" 참 하나님을 만나고 난 뒤에 사도 바울에서 나온 고백이다.
비록 기적적으로 자연 현상 안에서 하나님을 만나는 경험은 없다 할지라도 이 말씀 앞에서, 자신이 전적으로 죄인이었다는 사실을 절감하여야 한다. 이것 모르고서는 이사야처럼 하나님에게 헌신 할 수 있는 친 백성이 될 수 없다. 그동안 자신의 한 맺힘에 입각해서 하나님을 알던 것을 버리고 죄인 됨 에서부터 새로 시작해야 한다.
6: 1-7
출애굽기 5:2에서 바로왕이 말하기를, "여호와가 누구관대 내가 그 말을 듣느냐"라고 강하게 나온다. '여호와'라는 하나님의 이름을 모르는 것이 그토록 저주 받을 중죄가 되는 것은 그 이름 안에는 하나님이 하고자 하는 하나님만의 기능이 있기 때문이다. 오늘날 우리 민족에게 신(神)이란 개념은 그 용어 하나로 다 통한다. 천지를 창조하신 조물주도 되고, 날마다 복을 주시는 분도 되고, 사람이 죽고 난 뒤에 그 사람의 행업에 따라 상과 형벌을 차별 지어 내리시는 분도 된다.
따라서 '신'이라는 용어 하나만으로 충분하다. 또 그 신의 이름이 무엇이냐에 대해 궁금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하나뿐인 신은 신 그 자체가 그 분의 이름이 되는 것이다. 이름이란 이름을 부르는 쪽의 이해성 정리를 위함이다. 만약에 자식이 하나 밖에 없다면, '내 자식'이라는 표현만으로 곧바로 지칭된다.
그러나 여러 명의 자식을 거느렸다면, '내 자식'으로 부족하고, '누구 누구'라는 이름을 따로 불러야 한다. 이름이란 차이성을 분명히 하는 데서 발생된다. '저 신, 그 신'이 아니라 '나의 신'이 되기 위해서는 따로 '나만의 신'에게 붙이는 이름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사람이 이름을 지을 때는, 그 대상의 기능성을 염두에 두게 된다. 창세기 2장에서 하나님께서는 아담에게 동물들의 이름 짓기를 위임한 적이 있다. 이 때 아담은 그 대상 안에서 하나님의 창조성의 구별을 기준으로 해서 속성을 파악해 내게 된다.
그런데 아담이 동물들의 이름을 짓고 부르면서 하나 느낀 점이 있었다. 여기서 갑자기 아담은 외로움을 느낀다. 하나님께서 아담이 독처 하는 것이 좋아 보이지 않아서 아담이 잠든 사이에 또 한 사람을 창조해 내신다.
여기서 아담은 그의 이름 짓기의 특기가 발휘된다. 자기 아내를 '여자'라고 부르게 된다. 자기 몸의 일부가 연장되어서 하나님께서 여성으로 만든 것을 아담은 인정한다는 뜻이다. 그래서 따로 떨어져 있는 두 개의 객체라도 한 몸이 되는 것이다.
이처럼 아담은 곧, 인간은 '이름 부르기'를 통해서 자기와의 관계성을 만들어 나간다. 이로서 '여성'은 '남성'을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다. 이름을 지어준 자의 세계를 위하여 이름을 지음 받은 자가 존재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 '여자'라는 이름이 '하와'라는 이름으로 바뀐다. 즉 '생명'으로 바뀐다는 말이다. 이 이름은 남편 되는 아담이 지어준 이름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직접 지어주신 이름이다. 따라서 '여성'은 남성 관리 하에 놓여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관리 하에 놓이고 또한 그 이름에 담긴 기능을 중심으로 하여 하나님께서 일하시게 될 것이다.
오늘날에 있어 예수님은 성도의 신랑이다. 그리고 우리 성도는 신부이다. 우리 성도들이 '주의 이름'을 부르는 순간, 우리들은 주의 이름이 벌리는 그 기능으로 인하여 구원을 받게 되는 것이다. 예수님의 신부가 갖게 되는 영광성이란 땅에서 차려지는 것이 아니라 하늘에서 차려져서 내려오게 되어 있다.
요한계시록 21:2에 보면, "또 내가 보매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니 그 예비한 것이 신부가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것 같더라"라고 되어 있다. 이름이란 그 고유의 기능성을 품고 있으며 그 기능성은, 그 이름을 부르는 관계로 인해 실시되게 되어 있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이름을 제공하신다. 이것은 인간이 신의 이름을 부를 때 비로소 하나님이 되는 것이 아니라, 아예 하나님 자신이 만든 이름 자체를 인간에게 던져주심으로 말미암아 인간으로 하여금 그 이름에 종속되게 하시고자 하신다.
즉 인간이 자의로 제정한 신의 이름이 아니라, 신께서 자의로 제시한 이름이기에 인간이 오히려 그 이름이 갖는 기능이 적용되어야 될 대상이 되어 버리는 것이다. 물론 인간의 경우와 하나님의 경우는 반대이다. 사람이 지어준 이름이 아니라, 그 이름으로 불려질 것을 요구하는 식으로 하나님께서 다가오셨기에, 인간들이 그 이름을 불러줄 때면 이미 그 이름을 부르는 인간들은 하나님에게 의미 있는 인간이 되는 것이다.
즉 하나님께서 인간을 지으시고, '아담'이라고 부를 때만 인간으로서 관계되는 것이 아니라 더 나아가서 하나님께서 지정해주신 하나님의 이름을 부를 때, 인간은 더 이상 자신만의 세계는 사라지고 이 때부터 하나님께서 친히 일하시는 그 체계 안에 참여 되는 것이다.
그 이름에 담긴 기능은 본문 3절에 보면, "내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전능의 하나님으로 나타났으나 나의 이름을 여호와로는 그들에게 알리지 아니하였고"라고 되어 있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하나님은 어떤 식으로 자신의 전능하심을 드러내었는가 하면 바로 언약에 의한 실시이다. 예를 들면 아브라함의 자식은 반드시 아브라함의 육이 그 한계성이 드러나는 것을 통해서 성취되어야 한다. 즉 이삭은 아브라함의 자식이 아니라 언약, 즉 하나님의 약속의 자식이 되게 하시는 것이다. 아브라함이 가는 곳마다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면서 제단을 쌓은 것을 알 수 있다.
'하나님의 이름'을 불렀다고 해서 갑자기 아브라함에게 초능력이 생겨나는 것을 뜻하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정반대이다. 있는 자신의 능력도 무너지고 기대감도 무너져야 한다. 이스라엘 백성들도 마찬가지다. 신약에서 마리아의 오빠 나사로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이다. 예수님께서 무덤 밖에서 "나사로야 나오너라"고 이름을 부르면 본인의 의사와 관계없이 무덤 밖으로 살아서 나와야 하는 것이다.
즉 성도가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순간, 더 이상 그들 고유의 일은 사라진다. 하나님의 이름으로 벌이시는 일만 그들에게 덮치게 된다. 그렇게 되면 그들은 자신이 생각한 이름이 아니기에 모든 면에서 불가능함과 절망감을 느끼게 된다.
바로 그 때의 하나님의 이름을 불러야 그 취지의 의미가 생성되는 것이다. 하나님의 이름은 오직 언약 성취에만 관심을 두고 일하신다. 그 언약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의 만남에서 이미 주어진 바 있다.
만약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이름을 불렀는데도 아무런 변화가 없으면 하는 그런 걱정은 안 해야 한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자신의 이름을 자기 백성에서 알렸을 때는, 이미 일이 벌어졌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즉 새삼스럽게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지시에 따를 때만 하나님의 일이 성사되는 것이 아니라 그 하나님의 이름이 지니신 능력에 의해서 자기 이름을 부르는 이스라엘 백성을, 완전히 통제하게 된다.
왜냐하면 그 이름은 곧 전능하신 하나님의 위력이 실려 있는 이름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이름'으로 하신다는 말은, 인간들이 하나님이 이름을 불러서 일 한다는 말이 아니라, 하나님의 이름이 직접 일하는데 인간들이 그 이름을 부르면서 일하게 되었다는 말이다.
만약 이스라엘 민족들이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지 않으면 이는 하나님의 전능하심으로 일 하심의 내용이 되는 언약 밖에 존재하는 것이 되어 그 전능하심에서 오는 저주와 징벌을 받게 되어 있다. 이처럼 오늘날 우리 성도들도 하나님의 이름에 의해서 내부가 장악 당하고 침투 당했다.
이제 우리네 인생이라는 것은 따로 없다. 오직 주의 이름으로 해놓으신 그 공로와 업적을 온 우주에 증거하기 위해서 살아야 하는 것이다. 이제부터는 자기 앞에 놓인 세계를 빈 공간으로 간주해서 주님께 받은 그 사랑으로 마음껏 채워나가는 식으로 살아가야 한다. 그래서 '나의 것'이 없고 모두 하나님께서 사명을 발휘하라고 마련해 주신 마당으로 여겨야 할 것이다. 하나님 이름으로 하나님의 일이 시작하고 끝맺음을 알아야 한다.
6: 7 -9
본문에 나오는 이스라엘 백성들도 자칭 여호와 하나님을 믿는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9절에 보면, 이런 말씀이 나온다. "모세가 이와 같이 이스라엘 자손에게 전하나 그들이 마음의 상함과 역사의 혹독함을 인하여 모세를 듣지 아니하였더라"
분명히 모세는 하나님의 명을 따라 하나님의 계획은 백성에게 전했다. 그런데도 백성들은 이 하나님의 계획에 마음 두지 않고 있다. 그렇다면 여호와 하나님에 대해서 백성들이 제대로 하나님을 안다고 할 수 없을 것이다.
인간들이란 피조물이기 때문에 기껏 한다는 것이 유에서 유로 변신하는 것밖에 못한다. 즉 있는데서 있는 것을 조립하는 수준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수준은 있는데서 있게 하는 것이 아니라 없는데서 있게 하는 수준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기 딴에 하나님의 전능하심의 솜씨를 믿는다고 자부하기에, 그 놀라운 능력으로 자신의 소원을 들어 줄 것을 고대했었다. 그런데 모세를 통해서 들려오는 하나님의 소식은 그 내용으로 봐서 뭔가 조금씩 틀려지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고통을 제거해 달라"라는 점을 요구하고 있다. 바로왕을 쳐부수라는 말이 아니라 바로왕에게 귀여움 받으면서 이 애굽 나라에서 편하게 살게 해달라는 이야기이다. 그러나 애굽 나라에서 나가야 한다는 것은 백성들의 아이디어가 아니라 하나님의 아이디어이다.
왜 이스라엘 백성들이 고생을 꼭 해야만 하는가? 왜 하나님께서는 일부로 이스라엘 백성을 고생시켜야지만 하나님다운 것인가? 창세기 15:13-16의 내용에 의하면 아브라함의 자손들은 필히 애굽이라는 나라에 가서 고생을 해야만 하고, 1대도 아닌, 2대도 아닌, 3대도 아닌, 꼭 4대가 되어야 비로소 그 이방 나라에서 나와야만 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왜 이런 희한한 제안을 하시는 것일까? 그냥 아브라함 자손으로 하여금 그 어느 민족도 감히 건드리지 못하게 하시면 안되는가? 안된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관심사는 약속의 내용만을 역사 속에 펼치는 것이지, 결코 아브라함 자손의 사정을 들어주는 것이 주관심사가 될 수 없기 때문이다.
구원될 자의 개인적인 희망 사항들은 전혀 하나님의 약속 속에 들어가지 못한다는 말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연적으로 하나님이 약속에 대해서 무관심하고 무지할 수 밖에 없다.
교회의 가장 큰 문제점은, 하나님의 약속에는 어둡고 자기 사정에는 밝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계획 보따리 속에는 죄라는 것이 들어 있다. 하나님이 전능하심은 이 죄와 관련되어 있다. 죄라는 것은, 여호와 하나님에 대해서 모르는 것을 뜻한다.
정작 구원 받아야 될 이스라엘 백성들도, 여호와에 대해서나 죄에 대해서 모르고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순전히 자신들의 사정과 연관시키는 것에서 그 속마음이 드러나고 말았다. 여기서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을 따로 관리하게 된다.
즉 죄를 죄로 드러내기 위한 작업에 나서신다. 그렇다면 어떤 식으로 하면 죄가 죄로 드러나는가? 갈라디아서 4:28-29에 보면 "형제들아 너희는 이삭과 같이 약속의 자녀라 그러나 그 때에 육체를 따라 난 자가 성령을 따라 난 자를 핍박한 것 같이 이제도 그러하도다"라고 되어 있다. 왜 성령으로 따라 난 자가 꼭 육체로 따라 난 자로부터 핍박을 받아야만 하는가? 핍박을 안받고 따로 관리해서 조용하게 지내다가 천국가면 안 되는 이유가 무엇인가?
그것은 죄라는 것을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을 가지고 세상에 보여주기 위해서 이다. 세상은 여호와 하나님에 대해서 모른다. 하지만 마냥 모르고 있도록 허용하지는 않는다. 수시로 자기 백성을 그 세상 가운데 심어놓는다.
그리고 세상은 그 하나님의 백성을 두고서 자기네들의 속성을 유감없이 발휘한다. 핍박을 하게 만드는 것이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그들에게 보인 것은 오직 하나님의 약속된 복음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상 사람들은, 그 하나님의 계획이라는 것이 몹시 귀에 거슬리기에 사정 두지 않고 핍박을 감행하게 된다.
이로서 세상의 정체는 탄로 났다. 문제는 그 다음에도 계속 이어진다. 하나님께서는 마냥 자기 백성이 핍박의 대상이 되도록 그냥 방치하지는 않으신다. 그들을 건져 내신다. 하지만 그 시기는 세상의 죄가 제대로 숙성하고 관영 할 때까지 기다려야 할 문제이다.
여기서 소위 하나님이 백성들이라고 자처한 사람들의 여호와 하나님에 대한 무지성도 함께 드러나게 된다. 하나님에 대한 반발과 원망과 아쉬움과 실망감도 연이어 일어나게 된다. 그런데 바로 이 점이 하나님의 백성들이 그동안 몰래 품고 있었던 죄악 덩어리들이다.
그들도 자기의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알아야 한다. 핍박 받는 것을 즐기고 좋아할 사람은 이 세상에 아무도 없다. 다만 하나님이 백성은 자신의 괴로움을 구원의 하나님에게 호소하게 마련이라는 점이 중요하다.
그렇게 되면 그 성도는 하나님으로부터 새로운 차원의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알게 된다. 고린도후서 1:19-20절에 보면, 하나님의 약속이 예수님 안에서 '얼마든지 예'가 된다는 말은 예수님을 통한 하나님의 약속 이루기가 지금도 제대로 성취지고 있다는 말이다. 결코 실패라든지, 실수라든지, 저지당함이 도무지 있을 수 없다는 말이다.
바로 이 점을 제대로 모르는 것이 죄이다. 죄라는 것은 기본적으로 윤리적, 도덕적 죄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자기 기준을 가지고 불신하는 것을 뜻한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애굽이나 이스라엘 양쪽의 그 어느 누구도 감히 생각지도 못한 내용을 가지고 다가오신 것이다.
모든 인간들이 감히 생각지도 못하고 감히 성취될 내용인지 짐작도 못하는 것을 가지고 죄를 지적하시는 것이다. 이로서 우리 성도들은 인생을 살면서, 걱정이나 근심이나 염려할 자격이 아예 없다.
만약에 염려 걱정을 한다는 것은 곧 자기 것, 곧 자기 사정이나 하나님 앞에 늘어놓고 떼를 쓰는 꼴이 된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약속의 땅이란, 결코 인간의 반항이나 항변이나 원망 같은 것들이 일체 나타나지 않아야 될 세계이다.
모든 것이 '예'가 된다는 이 사실에 입각해서 우리가 평소에 얼마나 죄인 노릇을 해 왔는지를 절실하게 느껴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전능하심으로 인도함을 받는 것을 감사해야 한다.
6:10-12
새 것이라고는 없는 이 세상에 새 것이 이미 마련되어 있음을 통보하기 위해서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사용하신다. 모세도 마찬가지이다. 모세는 이 사실을 모르는 채, 자기의 입이 둔하다는 핑계로 하나님의 일 하기를 주저하고 있다.
사람이나 세상이란 자신의 능력 여하에 따라 하나님께 인정 받고 아니 받고가 아니라 애초부터 사람 외곽에 놓여 있는 그 어떤 세력에 의해서 운명이 결정되어 있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바로 왕에 내세우는 것은 모세의 능력을 과시하기 위함이 아니다. 그런데 모세에게는 잘못된 선입견들이 들어 있었다.
우선 하나님의 뜻이 제대로 전달되기만 한다면 바로왕이 군말 없이 하나님의 백성을 풀어줄 것이라는 생각을 갖고 있다. 모세 자신이 정확한 하나님의 뜻을 못 전달하게 되면 상대방 바로왕이 하나님의 뜻을 제대로 못 알아 들었기에 하나님의 백성을 안 보내줄 경우를 생각해 볼 때 그 책임은 모세 자기에게 돌아올 것을 걱정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큰 오산이다. 모세는 지금 애굽 왕을 설득해야 하는 차원이 아니라 그들이 하나님이 다스리는 이 우주의 처지를 제대로 모르고 있다는 것을 가르치고 훈계해야 될 입장에 놓여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애굽왕은 지금 하나님의 언약에 의해서 심판 대상이다. 모세는 바로왕 앞에 체포영장을 갖고 서 있는 것이다. 여호와 하나님을 몰라본다는 죄명으로 말이다. 출애굽기 5:2에서 바로왕은 분명히 이렇게 말한다. "바로가 가로되 여호와가 누구관대 내가 그 말을 듣고 이스라엘을 보내겠느냐 나는 여호와를 알지 못하니 이스라엘도 보내지 아니하리라" 물론 바로왕의 입장에서는 모세의 말을 거역하는 것이 죄가 된다는 생각은 추호도 갖지 않을 것이다. 너는 너고 나는 나다는 생각뿐이다.
오늘날 우리 성도들도 이런 모세의 위상을 갖고 있다. 세상 사람들을 상대로 예수님을 증거 하는 검사 역할을 하게 된다.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은 그들은 새삼스럽게 하나님의 사람 만들겠다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 아니다.
왜 이 세상 사람들은 지옥에 가야만 하는지를 통보해 주는 것이다. 체포영장을 지니고 서 있는 것이다. 세상 사람들은 자신들의 죄를 인정치 않을 것이다. 그러나 상관없다. 그들은 이미 악마의 영에 장악 당해서 살아가는 자들이기에 그들의 죄를 모르는 것이 당연하다.
두 번째로 모세가 모르고 있는 점은, 모세가 전하는 바에 의해서 바로왕이 비로소 자신의 본색을 유감없이 드러내면서 동시에 모세 자신과 하나님의 백성의 실체로 같이 공개된다는 점이다.
즉 애굽과 이스라엘은 서로 다른 기초를 갖고 있음을 바로왕의 관계성에서 서서히 드러나게 되어 있다는 점이다. 그런데 모세는 그 점을 모르고 여전히 그는 인간의 지혜에 대해서 미련과 아직도 긍정적인 생각을 유지하고 있다.
보통 전도라는 것을 할 때는 누구나 예상되는 전도 상황을 마음 속에 그리게 마련입니다. 사람이 전도가 실패했다는 감이 들 때, 그 원망을 하나님에게 하게 마련이다. 이로서 전도 받는 사람뿐만 아니라 전도하겠다고 나선 자신에게도 무슨 문제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전도란 오직 하나님께서 하신다. 복음을 전할 때는 복음 전달하는 방식까지 복음적으로 실시되게 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시다. 즉 복음을 전했다는 공로를 빌미 삼아 복음 전하는 자가 자신의 은근한 노림수를 따로 챙기지 못하게 하시는 것이다. 모세는 이런 점을 몰랐기에 그저 자기 편한 것만 생각한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지혜뿐만 아니라 인간 자체를 공격하신다는 점을 모세는 알아야 했다. 고린도전서 1:19-21에 보면, 인간의 지혜와 하나님의 지혜가 첨예하게 대립되고 있다. 추호의 양보도 있을 수 없다. 반은 인간 지혜요 반은 하나님의 지혜로서 하나님이 구원이 성사되는 것이 아니다.
계시의 전부를 하나님의 지혜로 점령당해야 하고 계시 속에는 조그마한 인간의 지혜가 포함되는 것도 허용될 수 없다. 인간의 지혜는 배척 받아야 한다. 즉 말 재주로 구원하시는 것이 아니다.
고린도전서 2:4-5에 보면, "내 말과 내 전도함이 지혜의 권하는 말로 하지 아니하고 다만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으로 하여 너희 믿음이 사람의 지혜에 있지 아니하고 다만 하나님의 능력에 있게 하려 하였노라"라고 되어 있다. 인간의 지혜가 스며들어가지 못하게 막는 이유는, 하나님은 논리로 구원하시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직접 일하심의 능력, 그것으로 사람을 구원하시기 때문이다.
그래서 고린도전서 1;28-29의 말씀이 있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 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이는 아무 육체라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 아무도 인간의 능력이 가미되어서 구원되었다고 소리를 못하게 막으시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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