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 강의(09. 9. 25) 1강
광주 강의(09. 9. 25) 1강
이름 : 서경수(IP:116.37.101.7)
광주 강의(09. 9. 25) 53-1
디모데후서 4장 6절부터 보겠습니다.
“관제와 같이 벌써 내가 부음이 되고 나의 떠날 기약이 가까웠도다.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니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니라.”
여기에 천국의 속성이 나오는데, 첫 번째 공간이라는 것, 두 번째는 의롭다는 겁니다. 의롭다는 말은 죄와 관련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냥 의롭지만 인간은 죄인이기 때문에 인간에게 의라는 것은 죄인에서 예수님의 의로 바뀌는 그 과정도 의가 돼요.
그러니까 죄인이 예수님처럼 의인되려고 시도하게 되면 이것은 죄가 되고, 주님이 죄인을 용서해서 오면 이것은 의가 됩니다. 그러면 우리 내부에서 발견되는 죄라는 것은 우리가 지은 죄뿐만 아니라 죄인이 의인되려고 하는 것도 죄가 된다는 것입니다. 이런 것이 어려워요.
그냥 주님 하시는 방식에 맡기면 되는데, 혹시 구원에 탈락될까 싶어서 내가 나에게 손을 대요. 내가 나를 다듬어요. 긴장하면서 나를 관리하고, 절제하고 ---
제가 최근에 쓴 댓글에서 이와 유사한 것이 하나 있어요. 손양원 목사 이야기 같은데, 자기 아들을 죽인 사람을 양자로 삼았다는 것이지요. 제가 여기에 대해 뭐라고 썼는고 하면, 인간의 본심은 양자 삼은 것이 본심이 아니고 자기 아들 죽인 자를 죽이고 싶어요. 이것이 본심인데 그 본심은 숨겼어요. 그러나 없어지지 않아요. ‘내가 예수 믿으니까 너 같은 놈을 살려두지 내가 교회 안 다녔으면 너 같은 놈은 벌써 죽었다.’ 이런 마음이 양자를 삼고도 여전히 미운 감정이 잠재되어있지 사라지지 않습니다.
베드로가 예수님께 묻기를 ‘몇 번 용서할까요?’라고 하는데, 천 번 만 번을 용서해도 끝까지 용서가 안 되는 것이 인간입니다. 그냥 남들 눈을 의식해서 그냥 용서하는 척하지요. 하지만 그 일을 잊을 수는 없어요. 진짜 용서가 되었다면 그 일(사건)마저 잊어야 되는데 잊을 수가 없어요. 바쁘게 살다보면 생각이 안 나지만 그 집 앞을 지나가면 또 다시 그 일이 떠오르고 화가 치밀지요.
어떤 사람은 빨간 차에 치었는데, 그 후 빨간 차만 보면 화가 난다고 해요. 얼마나 용서가 안 되었으면 그렇겠습니까? 자신을 친 차도 아닌데 색깔이 빨갛다고 전부 싫어해요. 어떤 미친놈은 여자한테 속았다고 모든 여자에게 적개심을 품고 길가는 여자에게 염산을 뿌리는 사람도 있어요. 불특정 다수에게 분노를 표출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정신과 용어로 ‘사이코 패스’라고 합니다. 남에게 분풀이를 해야 자기 정체성이 유지가 되는, 분풀이할 대상이 없으면 견디지를 못하는 반사회적 정신장애지요.
인간은 누구나 다 병들었어요. 모두 환자입니다. 여기에 성령이 오게 되면, 성령께서는 우리가 병든 사람이기 때문에 환자에게 필요한 것은 환자가 환자를 고치는 것은 안 됩니다. 병들었다고 여기면 의사를 찾아가야지요. 그러면 성령은 뭐하는 분이냐 하면, 의사를 바라보게 하는 겁니다. ‘성령이 의사를 바라보게 하고 가는 것은 우리가 가야 하는가?’ 그것이 아니고, 이미 성령이 왔다는 자체가, 성령은 예수의 영이니까 예수님께로부터 와서 우리를 낚아채서 우리를 고치십니다.
우리를 의인되게 하기 위해서 의사되시는 분에게 잡아당기는 이 작업도 예수님에게서 나왔다는 사실을 알 때 이 사람은 천국 백성입니다.
이제 진짜 어려운 것을 해 봅시다. 여러분들이 어떤 공간을 생각할 때 특정 공간이 있어야 내가 누구인가를 생각하는 그런 것이 인간입니다. 예를 들면, 추석이 되면 고향에 갑니다. 왜 그렇습니까? 자신이 어린 시절 자란 고향에 가면 어머니, 아버지 무덤이 있습니다. 현재 아무리 고향과 멀리 떨어져 살아도 그 무덤이 있는 곳이 본향이라서 늘 그곳으로 돌아가고 싶어요.
인간은 어떤 특정 지점이 없으면 내가 누구인지 몰라요. 아까 차에서 집사님과 이야기를 나눴는데, 집사님이 손에 돈을 쥐고 4Km를 이동하면서 계속 돈을 찾았다는 거예요. 그 이유가 무엇인가 하면, 돈은 항상 어떤 특정 공간과 더불어 돈이 있어야 되는데, 지금 그 공간에 돈이 없으니까 돈이 없다고 여기는 겁니다. 설마 내 손이라는 공간에 돈이 있을 줄은 생각을 못했지요.
돈은 항상 어떤 특징 지점과 더불어 있는 거예요. 저기 TV위에 개 인형이 있는데 이것을 제가 손에 쥐고 있으면 쥐고 있으면서 개 인형을 찾게 돼요. 왜? 개 인형은 늘 TV위에 있었기에 그곳에 없으면 찾게 되지요.
사람이 내가 누구인가를 아는 것은 나를 봐서 누구인가를 아는 것이 아니고, 현재 내가 있어야할 자리에 있을 때 그 공간과 더불어 나를 이해합니다.
그런데 천국을 설명할 때 이 두 가지로 설명해야 돼요. 하나는 죄 문제로 설명해야 되고, 그리고 공간문제로 설명해야 되는데, 만약이 이렇게 설명하지 않으면 어떻게 되는가? 이 경우를 먼저 설명하겠습니다.
‘내가 여기에 있다. 천국은 내 위에 있다. 나는 여기에 살다가 나중에 죽어서 천국에 간다.’ 천국은 이렇게 갈 수는 없습니다. 이런 식으로 천국 보내달라고 하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 지실 때 바리새인들이 뭐라고 했는가 하면, ‘예수여, 당신이 지금 십자가에서 내려오면 당신이 죽음을 이기는 사람으로 믿겠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후에 ‘나 봐라. 부활했잖아!’ 하고 왜 동네방네 광고 안 합니까? 자기를 조롱하고 놀린 사람들에게 보란 듯이 찾아가서 확인시켜주면 그들이 잘못을 뉘우치고 믿을 것인데 왜 이런 방법을 사용 안 했을까요?
사람들이 예수님의 죽음을 생각할 때 자기가 죄인이란 생각을 안 하는 거예요. 하여튼 ‘내가 뭔가 몸이 아프다. 병들어 죽는다.’ 이것만 생각했지 ‘나는 천국이 있다고 인정하니까 넣어주세요.’ 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모텔에 들어갔는데 201, 202, 203호가 쭉 있어요. 자기는 202호에 들어갔는데 영 마음에 안 들어요. 그래서 201호에는 어떤가 싶어서 201호에 노크를 합니다. 안에서 사람이 나와서 “왜 문 두드립니까?” “나는 201호가 존재함을 믿습니다. 그러니까 넣어주세요.” 이게 말이 됩니까? “나는 천국이 있음을 믿습니다. 그러니까 넣어주세요.” 똑같은 이치에요. 이건 말이 안 됩니다.
한국교회가 이렇게 가르칩니다. “여러분, 죽으면 좋은데 갑니다.” 정작 천국에는 의가 있어야 되고, 의는 죄인이 만들 수 없어요. 죄인이 의를 만들려고 하는 그것이 바로 죄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가만히 있어도 죄고 의롭게 되려고 해도 죄고 이러나저러나 죄입니다.
수요일 설교에서 그런 이야기 했습니다. 노상방뇨해도 죄고 안 해도 죄고. ‘나는 이 짓이 나쁘다.’ 라고 여기는 이 자체가 주님 보시기에 나쁜 거예요. ‘내가 나쁜 놈이다.’ ‘그래서 어쩌라고?’ ‘역시 나는 착한 자야.’ ‘그래서 어쩌라고?’ 내가 나쁘다거나 착하다고 여기며 나에게 신경 쓰는 그것이 죄가 되는 겁니다.
사람은 혼자서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고 주위에서 만들어줘서 내가 되는 겁니다. 나의 엄마 됨은 내가 엄마기 때문에 엄마가 아니라 자식들이 있기 때문에 내가 아들에게 맞는 엄마로 변화되어 가는 겁니다. 주님이 배치하신 자식들로 인해 만들어져 갑니다. 아이들이 없었으면 이런 엄마가 안 될 텐데 하나님께서 그 아이들을 배치하므로 나로 하여금 이런 엄마가 되도록 하신 것입니다. 모든 것이 그래요.
그래서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라고 하잖아요. 자, 여기서 한 번 봅시다.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지요. 여기에서 이 ‘은혜’를 좋다, 나쁘다로 판정하지 말고 그냥 은혜입니다. 그냥 주신 거라니까요. 주신 것을 받고 좋다, 나쁘다고 하면 안 됩니다.
어떤 사람이 이 집에 냉장고를 선물 했는데 ‘아, 냉장고 너무 좋다.’ 좋다고 하지도 마세요. ‘어, 냉장고가 구 모델이네.’ 그런 소리도 하지 마세요. 그냥 주셔서 여기에 있을 뿐입니다. 나라는 인간은 주께서 창세전에 만들어져야 될 인간으로 여기 도착한 것뿐이에요. 도착한 물건은 주님의 은혜인데, 이것을 내가 ‘나는 나쁜 놈이야, 나는 좋은 놈이야.’ 지가 뭔데 입맛을 다시고, 간을 보냔 말이지요. 자기 것도 아닌 몸을.
내 몸이 내 것도 아닌데 내가 왜 간을 보냔 말이지요. ‘나는 괜찮은 놈이야, 아이고 나는 형편없는 인간이네.’ 왜 이런 식으로 ---
하여튼 사람들이 천국을 이해를 못해요.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라는 말은, ‘이제는 제발 너 자신에게서 손을 좀 떼라.’ 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마귀는 ‘하나님, 인간은 손 못 됩니다.’ 라고 나옵니다. ‘내가 기계장치를 해 놓아서 어떤 인간도 자기한테 긴장을 푼다든지 자기에게 관심을 안 두는 사람은 없습니다. 정신병자 이외에는 없습니다.’ 라고 장담을 하는 것이 마귀에요.
그러니까 하나님이 ‘욥을 봐라. 욥은 안 그렇거든.’ ‘아니요. 안 그런 인간은 없습니다. 인간은 자기 것에 손대면 하나님도 원망합니다.’ 그래서 초반에 하나님께서 자식 10명 죽이고, 재산 다 태우니까 욥이 뭐라고 했습니까? “주신 자도 하나님이요 취하신 자도 하나님입니다.” 라고 했어요. 사단이 놀랐어요. 분명히 그런 인간이 없다고 여겼는데 있는 거예요.
왜? 하나님이 그렇게 만든 거예요. 하나님께서 욥 하나 만들기 위해서 마귀를 배치해 놓은 거예요. 마귀를 배치해서까지 욥의 믿음은 하나님이 주신 것이라는 것을 확인시켜 주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마귀가 어떻게 나오는가 하면 ‘직접 몸에 손대 보세요.’ 라고 했어요. 그 때 마귀가 새로운 제안을 하지요. ‘직접 몸에 손대면 원망할 것입니다.’
여기에 대비해서 배치된 준비물이 누구냐 하면 욥의 세 친구들입니다. 그 때 세 친구가 욥을 위로하기 위해서 찾아오는데, 이 친구들은 마귀의 대변자 역할을 합니다. 개뿔도 하나님도 모르면서 하나님은 이런 분이라고 주장합니다. ‘시작은 미약하나 나중은 창대하리라.’ 이런 식으로 인간이 조작해낸 하나님을 내세우게 해서 진짜 고난 받는 욥에게 나타난 하나님을 대비시키지요.
누가 이깁니까? 욥이 이기지요. 그런데 어려운 것은 욥이 분명히 이겼는데 본인이 이긴 것이 아니고 이겨버렸지요. 이겨버렸으니까 욥은 모르는 거예요. 왜 내가 저 인간들한테 이겨야하는지를 모르는 거예요.
쉽게 설명하면 이렇습니다. 세리와 바리새인이 성전에서 기도할 때 바리새인은 자기가 의롭다고 했지요. 세리는 자신을 죄인이라고 했어요. 그런데 주님은 바리새인보다 세리는 의롭다고 하셨어요. 그런데 정작 문제는 당사자(세리)가 왜 자신이 의로운지를 모르는 거예요. 욥도 바로 이런 식입니다.
그러니까 지옥 간 놈은 나는 지옥에 오면 안 된다고 펄쩍 뒤고, 천국 간 사람은 웬 은혜입니까? 라고 하는 거예요. ‘나는 분명히 죄인인데 내가 왜 천국에 와 있지?’ 그래서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라고 했지요. 심령이 가난하다는 것은 마음속에 아무것도 없다는 것입니다. 가난은 자신이 가진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아무것도 없으니까 몽땅 다 주님의 것이고 주님이 주셔서 도착한 냉장고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자신이 자신에게 감동하고 ‘나는 괜찮은 인간이야.’ 또는 ‘나는 나쁜 놈이야.’ 이럴 필요조차 없다니까요. 늘 자신을 나쁜 놈이라고 하는 것은 가장된 회개이고 가장된 위선입니다. 주께서 용서하셨다는데 “너를 정죄하는 자가 있느냐?” “없습니다.” 정죄하는 사람도 없고 주님도 정죄하지 않는데 자신이 스스로를 정죄하고 있으니 ---
[개그콘스트]에 보면 이런 것이 있어요. ‘내버려 둬!’ 라는 것이 있어요. ‘그냥 내버려 둬.’ 우리가 우리 자신을 그냥 좀 내버려 두세요. 주님께서 다루시게 내가 나를 간섭하지 마세요.
천국은 바로 죄와 관련되어 있고, 죄와 관련되어 있기 때문에 천국에서 오신 분은 항상 하나님의 의를 가지고 우리에게 찾아옵니다. 그 의가 뭐냐? 용서하는 것도 주님의 의에 포함된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를 용서하는 것이 주님의 자기 숙제입니다. 우리가 주님의 용서를 찢으면 안 됩니다. ‘나는 내가 착해서 구원 받을래요. 나는 그냥 용서해서 구원 받는 것은 내 자존심이 허락지 않아요.’ 이런 사람은 지옥 갑니다.
용서 자체가 있어야 우리는 주님의 숙제물이 돼요. ‘예 보세요. 창녀인데 제가 건졌잖아요.’ 주님이 우리를 보면서 자랑하실 수 있도록 제발 좀 나를 내 버려두세요. ‘노태진도 내가 구원 했잖아.’ 라고 주님이 천국에서 아버지 하나님 앞에 자랑할 수 있도록 나를 내가 관리하려고 하지 마세요. 내 몸 주님의 것입니다.
그 다음으로 어려운 것이 공간 문제입니다. 사람은 본향을 중심으로 아무리 공간이 멀어지고 확대 돼도 고향에서 규정된 인간입니다. 이것을 성경에서는 ‘창조’라고 합니다. 창세기 1장부터 보면 하나님이 칠일 만에 천지를 창조하셨다고 나오지요. 이것을 보면서 사람들이 생각하기를 ‘이제 창조는 끝났구나. 그러니까 창조된 우리는 우리 방식대로 살면 된다.’ 이렇게 나옵니다.
‘하나님, 창조하신다고 수고 했습니다. 창조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제는 창조된 내가 내 방식대로 살겠습니다.’ 하고 손 털어버려요. 이제 간섭하지 말라는 거지요. 자녀들과 부모님의 대화도 이렇지요. 부모는 자식에게 ‘내가 너를 낳았고, 먹였고, 길렀다.’ 라고 하면서 간섭하려고 하면, 자녀는 ‘예, 잘 압니다. 그러나 이제 나도 컸으니까 내가 알아서 내 할 일 합니다. 이제 더 이상 간섭하지 마세요.’
큰 아이가 이렇게 나오면 둘째 아이도 따라서 그렇게 하지요. 심지어는 일곱 살 막내도 자기가 알아서 한다고 나옵니다. 그런데 그 자식들이 나이 40이 넘어서 부모 찾아와서 보증 서달라고 오는데 그것은 어떻게 된 것입니까? 간섭하지 말고 그냥 내버려두라고 해놓고 이제 와서 왜?
창조라는 것이 창조되었으니까 이제는 손 털고 빠이빠이하는 그 관계가 창조관계가 아니에요. 창조라는 것은 본향, 다시 돌아가야 돼요. 원상복귀 되어야 합니다. 이것을 통일교나 지방교회에서는 ‘회복’이라고 하는데 이것은 엄청나게 잘못된 것입니다. 회복이 아니고, 에덴동산으로 회복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형상으로 회복합니다.
하나님의 형상은 예수님인데, 그러면 예수님 사는 동네, 즉 공간이 있겠지요. 골로새서 1장 16절에 보면, 하나님 사는 공간에 하나님의 형상되시는 예수님이 계시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창조했지요. 창조했으면 고무줄과 같아서, 창조했다는 말은 항상 끈끈한 연결이 되어 있어요. 로마서 8장 35절에 나오지요.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오.”
여기에 고무줄이 두 개 있어요. 하나는 예수님에게서 나온 사랑의 고무줄이 있고, 다른 하나는 하나님이 미워하기로 작정한 것이 있는데, 이것은 지난 대전강의에서 했는데 여기서 다시 한 번 말씀 드리면, 집이 두 채가 있어요. 하나는 사랑의 집이고, 다른 하나는 미움의 집입니다. 사랑의 집에는 앞에다 ‘사랑의 집’이라고 써 붙였어요. 미움에 집에는 ‘미움의 집’이라고 썼어요.
사랑의 집은 특징이 뭐냐 하면, 항상 죄가 용서되는 현상이 일어납니다. 그런데 미움의 집은 항상 의가 죄가 되는 작용이 일어납니다. 무슨 일을 해도 반드시 죄가 되게 하는 그런 일이 일어나고 있는 집이 미움의 집입니다.
사랑의 집에 식구가 3명이라면 이 3명이 머리를 쥐어박고 미워하고 싸워도 문패에 붙은 ‘사랑의 집’이라는 것 때문에 그 안에서 떠져 나오는 모든 죄가 용서가 됩니다. 이런 집을 누가 지었어요? 우리 예수님이 지었습니다.
“목사님이 우리를 위로하기 위해서 지어낸 이야기 아닙니까?” 라고 묻는 사람이 있을 텐데, 이것이 바로 유월절입니다. 사랑의 집에 어린 양의 피가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요1:29).”라는 이 피를 집 입구에 발랐어요. 그러면 그 집은 사랑의 집이 되는 겁니다.
이 집 문설주에 발린 피 때문에 그 안에서 어떤 일을 했어도 그 피를 보고 넘어가는 집입니다. 이게 바로 복음, 진짜 기독교입니다.
만약 사랑의 집만 있다면 이것은 기독교가 아닙니다. 왜냐하면 우리를 사랑하기 위해서 하나님이 만든 것이 아니고 예수님이 갖고 있는 두 가지의 속성을 전하기 위해서 만들었어요. 그래서 사랑의 집만 만들면 반쪽 예수님이 되겠지요. 왜냐하면 예수님은 심판주니까.
마태복음 25장 33절에 보면, 양만 있는 것이 아니고 염소도 있어요. 마태복음 13장에 보면 가라지와 알곡이 있고, 나쁜 고기와 좋은 고기가 있이요.
사람은 예수님께서 처음에 어떤 목적을 위해서 만들었는가를 보여주기 위해서 있습니다. 이 둘을 가지고 하나님의 모습(형상)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모습은 어떤 면이 있습니까? 사랑할 자를 사랑하는 모습이 있고, 또 미워할 자를 미워하는 모습을 가지고 있어요.
사람은 사랑의 하나님만 좋아해요. 하지만 사랑이 사랑답기 위해서는 미움이란 것이 있어야 합니다. 전체가 다 사랑이라면 사랑이 사랑이 아닙니다. 이것은 불교입니다. ‘신은 모든 것이 공평하다. 모든 것을 사랑한다.’ 이렇게 되면 예수님이 십자가 질 필요도 없어요. 하나님께서 독생자를 주셨고, 독생자가 십자가에 달리고, 놋뱀을 쳐다보듯이 쳐다보는 자는 구원 받고 이런 복잡한 절차가 필요 없지요.
다들 그렇게 생각하고 싶어 하지요. 하나님은 사랑이라서 우리가 무슨 짓을 해도 용서되기를 바라지요. 이게 바로 사랑의 집을 배제하고 ‘우리가 지어낸 멋진 구원의 방식을 밀어붙이자’는 미움의 집에서 만들어 낸 것입니다. 이 미움의 집에는 피가 없어요.
제가 문제 하나 냅니다. 축복 산(그리심 산)과 저주 산(에발 산) 중에서 여러분은 어느 쪽에 서야 됩니까? 저주 산에 서야 됩니다. 여러분은 여러 번 강의를 들어서 잘 알고 있지요? 왜 저주 산에 서야 되는가 하면, 하나님의 피가 저주 산에 있습니다. 그리고 축복 산은 자기가 축복 받는 것이 아니고 상대방을 향해 축복해 주는 역할을 하는 것이 축복 산입니다.
이걸 모르고 축복 산에 서면 저주 산에서 저주가 날아옵니다. 왜 하나님께서 이렇게 저주 산에 제단을 쌓았는가 하면, ‘너희들은 저주 받아야 마땅한데 용서함으로 그것이 바로 너희들의 행함과 무관한 하나님의 일방적인 사랑이다.’ 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그렇습니다.
우리로 하여금 우리 스스로 사랑받을 짓을 안 했다는 것이 충분히 드러나는 가운데 하나님의 사랑은 고스란히 우리에게 덮쳐집니다. ‘많이 용서받은 자가 많이 사랑한다(눅7:43).’고 했습니다.
그런데 일반 종교와 교회는 어떤 차이가 있는가 하면, 사랑의 집이 아니고 미움의 집을 스스로 뜯어 고쳐요. 문패에 ‘사랑의 집’이라고 새기고 힘을 쏟는데 이것을 공로로 내세웁니다. 교회가 사랑의 집이 된 것은 예수님이 피로 만들었기 때문에 집안에 있는 사람들이 뭘 보탠 것도 없고 도와준 것도 없고 그냥 천사가 와서 사랑의 집 간판을 걸었단 말이지요.
주님께서 일방적으로 사랑의 집을 만들었기 때문에 그 집안에 있는 사람은 모든 죄가 용서로 전환되지요. 그러나 미움의 집에서는 자기 공로를 내세우기 때문에, 인간의 공로를 의라고 여깁니다. “나도 이만큼 했다.” 그런데 그 의가 주님 보시기에는 죄입니다. 미움의 집 안에서는 이 인간의 의가 죄로 규정되는 일이 늘 벌어집니다. 계속 미움 받을 짓만 합니다.
사랑의 집에서는 뭘 해도 사랑받을 짓만 합니다. “주여, 저는 죄인입니다.” 라고 하니까 “아이고 귀여운 것.” 이렇게 되고, 저쪽 동네에서는 “주여, 저 열심히 했습니다.” 라고 하니까 “그래. 너는 지옥 가라.” 이렇게 됩니다.
그러니까 인간이란 것은 원래 고향인 하나님의 형상이 고향이고, 그 고향에서 파생된 것이 바로 창조입니다. 이걸 칼 바르트는 ‘창조의 사건’이라고 했고, 그 다음에 창조의 사건에서 나온 ‘은혜의 사건’이라고 이야기했습니다. 바르트가 그렇게 이야기한 이유가 있어요. 왜냐하면, 묵시적 차원에서의 사건들이 많기 때문에 일반 사건으로서는 해명이 안 돼요.
세례 요한이 예수님을 소개하면서 “내 뒤에 오는 사람이 있는데 나보다 앞선 것은 그가 나보다 먼저 계심이라(요1:30).”고 했는데, 이것은 해명할 수 없습니다. 또 예수님께서 “너희 조상 아브라함은 나의 때 볼 것을 즐거워하다가 보고 기뻐하였느니라(요8:56).”고 하셨는데, 이것은 역사적으로 설명할 수 없잖아요. 역사 말고 다른 층이 있어야 이게 해명이 됩니다. 그래서 역사 층 말고 다른 층에서 이것을 해석해야 된다는 것이지요.
디모데후서 4장을 봅시다.
자, 그렇다면 천국이 뭐냐 하면 공간으로 본향을 간다. 우리가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고무줄이 있어서 고무줄이 당겨주면 우리가 고향으로 가는 거예요. 갈 때 우리는 사랑의 집이 되어서 가는 겁니다.
그러면 이런 질문이 나올 수 있는데, ‘미움의 집에서 사랑의 집으로 이사 가면 안 됩니까?’ 라고. 그런데 사랑의 집은 사람 먼저 만들고 사랑의 집이 있는 것이 아니고, 사랑의 집부터 먼저 만들어 놓고 거기에 맞춰서 집어넣습니다. 사랑이 먼저 있고 사랑 받을 야곱을 나중에 만듭니다.
야곱 만들어 놓고 ‘하는 짓을 봐서 구원해 줄게’ 이런 것은 다른 종교에는 있지만 복음에는 없습니다. “그 자식들이 아직 나지도 아니하고 무슨 선이나 악을 행하지 아니한 때에 택하심을 따라(롬9:11).” 야곱은 사랑하기로 작정하시고 만들었고, 에서는 미워하기로 작정하시고 만들어 놓은 자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우리를 채찍하거나 닦달해야할 이유가 없습니다. 이것이 바로 수고하고 무거운 짐이 날아간 것입니다.
예수님이 원하시는 것은 어린 아이가 집안에서 옷을 벗고 있다가 밖에 나가면 엄마가 말리지요. “애야 밖에 나갈 때는 옷을 입고 나가야 돼.” 라고 해서 옷을 입히지요. 그러면 아이는 옷이 거추장스러워요. 옷이란 것은 내가 원치 않는데 일반 사회에서 원하는 것입니다. 사회에서 원하는 대로 맞춰주지 않으면 그 사람들이 나에게 욕을 하게 될 것이고 나는 졸지에 나쁜 놈이 되고, 미친 놈이 됩니다.
그러니까 주님께서 “어린 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마18:3).”는 말씀은, 네가 네 몸에서 뜯어내야 될 것이 뭔가를 한 번 살펴보라는 것입니다. 이 이야기가 어떻게 나왔는가 하면, 제자들이 질문하기를 “천국에서는 누가 크니이까?” 라고 물을 때 답변으로 나온 말씀입니다.
“누가 더 높으냐?”는 것은 어디에서 배운 행세입니까? 이 세상에서 배운 행세지요. 그러면 우리의 고향은 어디입니까? 우리의 고향은 이 세상이 아니고 천국이란 말이죠. 천국에서는 ‘누가 더 높으냐’는 것이 성립이 안 되고, ‘누가 더 세상 것을 홀랑 벗었느냐’ 그 싸움입니다. 어린 아이처럼.
어떤 사람은 나체족으로 살아야 된다고 하는데, 이것도 인위적입니다. ‘나 봐라. 세상 눈치 안 보잖아. 나는 자유를 마음껏 누린다.’ 이건 어린 아이의 마음이 아닙니다. 저는 머리카락을 이상한 색으로 염색하고 이런 사람들 보면 너무 인위적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어린아이는 옷을 입으나 안 입으나 별 신경을 안 써요. 그런 아이처럼 되란 말이지요.
원래 여기 도착한 냉장고처럼. 원래 하나님이 주신 그 냉장고처럼. 죄 지으면 죄 지은 대로 그냥 냉장고. 까불면 까부는 대로 그냥 냉장고. 인위적인 것을 벗겨내야 됩니다. 그것을 벗겨내는 방법은 자기를 미워하는 겁니다.
‘자기를 미워하라.’라 했지만 안 미워지지요. 그러니까 옆에 가족을 붙여주지요. 그래서 서로서로 싸우게 합니다. 시어머니가 며느리와 싸우고. 아비가 자식과 싸웁니다. “내가 온 것은 사람이 그 아비와, 딸이 어미와, 며느리가 시어미와 불화하게 하려 함(마10:35)”이라고 했어요.
“아비나 어미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어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마10:36)”하다고 하십니다.
그동안 우리의 가족이란 것이 그냥 주신 가족이 아니고 나의 가족이 된 것이 문제지요. ‘내 자식’이란 것이 문제잖아요. 주님이 주신 자식이 아니고 내 자식이란 것이 문젭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엄청난 것을 요구했지요. ‘이삭을 나에게 번제로 드려라.’
드리면 뭐가 없어져요. 조금 전까지는 내 자식이 있었는데, 드리면 내 자식이 없지요. 내 자식이 없어지는 순간 나도 없어지는 거예요. 결국 인간은 두 개의 나(에고)가 있는데, 그냥 ‘나’와 나에게 주어진 것을 내 소유물로 간주해서 만들어낸 ‘가짜 나’가 있습니다.
부부가 이혼하면 그냥 헤어지면 되는데, 그냥 헤어지는 것이 아니고 재산을 서로 차지하려고 합니다. “집도 내 것, 가구도 내 것, 당신 목에 있는 목걸이도 내 것.” 그 때는 이렇게 하세요. “다 당신 것이면 내 몸 자체도 가져가라.”
나와 나 사이가 있는데, 그냥 나는 나도 누군지를 몰라요. 왜냐하면 내가 소유한 껍데기가 나를 둘러싸고 있기 때문에 이것에 가려서 진짜 나를 몰라요. 그런데 주님께서 이것을 살짝 치우면 ‘아하, 나는 하나님의 은혜로 된 자구나.’하고 하나님의 은혜로 된 나를 발견합니다. 잠시잠깐. 그리고는 다시 내가 가졌다고 여기는 나로 덮어버립니다.
이렇게 내가 가진 것으로, 내 노력으로 치장된 나를 데리고 사회로 나가는데, 그러면 상대방도 무장을 하고 나옵니다.
놋뱀을 쳐다보면 쳐다보는 그 순간 시선이 어디로 갑니까? 너도나도 시선이 다 놋뱀으로 가지요. 그러면 그 순간은 너와 나를 잊어버리고 놋뱀에서 말하는 진정한 나가 누구냐 하는 것이 새롭게 다가오겠지요. 그래서 놋뱀을 쳐다보라는 겁니다. 즉 십자가를 보라는 거예요.
십자가에서 눈을 떼면 자신의 잘난 곳에 시선이 가기 때문에 ‘내가 높으냐, 네가 높으냐?’ 경쟁에 돌입합니다. 그래서 제가 십자가마을에 리플을 달 때 ‘놋뱀을 쳐다봐야지 너와 나를 비교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누가 더 신학적으로 실력이 있는가?’ 이런 것을 따지지 말라는 것이죠.
주님께서는 십자가마을이 예수님만 쳐다보고, 예수님 하신 일만 증거되길 원하지 여기서 누가 더 뛰어나고 하는 그런 것은 원치 않는다는 것입니다.
죄인인 것 같으면, 사랑의 집 앞에 뭐가 있습니까? 피가 있지요. 그러면 피를 이야기해야 될 텐데, 저주 받은 집안에서는 피가 없기 때문에 바라볼 피가 없고, 그러니까 자기의 의로움을 봅니다. 그러니까 “나를 무시하지 마라.” 이렇게 나옵니다.
어떤 사람이, 자기 장모와 처형을 죽였어요. 왜? 자기를 무시한다고. 딴 건 다 용서해도 날 무시하면 용서가 안 돼요. 축구할 때 선수가 경기에 신경 써야지 골 못 넣었다고 야유하는 관중들 보면서 흥분해서 관중들과 싸움을 벌이면 됩니까? 관심을 어떤 일에 몰두해야 될 텐데 자기 무시당하지 않기 위한 조치로 일을 하면 그것은 제대로 일이 안 됩니다.
특히 사도바울 같은 경우에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딤후4:7)”라고 했는데, 사람을 보고 갔습니까, 뭘 보고 갔습니까? 하늘나라, 자기의 본향, 주님 주신 사명만 쳐다보고 간 거예요. 의의 면류관이 예비 된 곳으로.
하나님의 의가 예수님을 통해서 우리에게 주어지면 ‘아하, 내가 나를 닦달하고 손댈 필요가 없구나.’ 왜? 나는 사랑의 집에 있었기 때문에 나는 뭘 해도 죄라는 것을 알고, 미움의 집에서는 뭘 해도 ‘나는 최선을 다해 남에게 꿀리지 않는 인간이 되겠다.’ 왜? 믿는 것은 자기뿐이기 때문에.
이런 사람들은 교회에 가도 교회 간 자신을 믿고, 예수 믿어도 예수 믿는 나를 믿고, 놋뱀을 쳐다보지 않고 항상 자기를 쳐다봅니다.
5-6절을 봅시다.
“그러나 너는 모든 일에 근신하여 고난을 받으며 전도인의 일을 하며 네 직무를 다하라. 관제와 같이 벌써 내가 부음이 되고”
관제가 뭡니까? 일종의 제사제도입니다. 마지막 하이라이트로 붓는 것이죠.
그러니까 사도바울은 뭘 생각합니까? 신문지상 구석진 한 곳에 ‘사도바울 드디어 갔다.’ 라는 것을 자기가 먼저 광고지 빈 칸에 스스로 자기 이름을 쓰고 “나는 이미 갔어.” 이미 죽었다고 생각하고 현재를 살아가고 있는 겁니다.
‘나는 달려갈 길을 다 달렸다. 잘 있거라. 타향아. 나는 고향으로 간다.’ 이게 나그네의 삶이지요.
10분 쉽시다.
(2009. 10. 13. 11:17 녹취 마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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