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자 크기
화면

이근호 목사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

출애굽기 2장-4장 주석자유게시판출애굽기

출애굽기 2장-4장 주석

이름 : 이진용(IP:222.99.120.158)

출애굽기 2장-4장

복에 대한 공격은 복의 성격이 무엇이며 어디서 왔는가 하는 것도 동시에 보여 주는 계기가 된다. 고된 노동과 육체적인 피곤도 자녀생산에 차질을 가져 다 주지 않자 태아선별을 통해 노골적으로 남아(男兒) 살해정책을 펴기 시작한다. 이는 종족 자체를 지상에서 말살하려는 시도였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이러한 고난 속에서 새로운 이스라엘로 변신한다. 즉 하나님께로부터[불쌍히 여김을 받는 상대로서의 이스라엘]이다. 이 일에 레위지파가 동원된다. 레위지파 중의 한 남자 아기가 애굽의 공주로부터[불쌍히 여김]을 받게 된다. 그래서 죽음의 자리로부터 회생된다. 이스라엘 운명을 지켜보시는 하나님의 관심은 이 한 남자아기의 운명 안에 집약된다. 물에서 건져내었기에 비로소 존재하는 아기의 운명은 만약 그 아기가 이스라엘의 지도자가 될 경우가 생긴다면 분명 그가 경험한 것에 이스라엘 전체가 모아질 가능성이 있는 운명이 된다.

그러나 그가 성장하면서 꿈꾸어 왔던 이상은 그의 충동적인 행위 때문에 실패로 돌아선다. 동족의식은 있었으나 동족에 대한 애정이 자신의 잘못 사용한 폭력 때문에 빛을 잃어 버렸다. 히브리인들은 모세에서 또 하나의 애굽기질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그와 같은 자는 히브리인의 지도자나 재판관에 부적합하다. 미디안 광야로 도망친 모세는 이방인으로서의 생활에 들어갔다. 그는 민족의 해방과 아무런 상관없는 생활을 하게 된다. 양을 치는 평범한 목동이 되었다. 그러나 그런 목동 앞에 우뚝 서서 그의 일을 민족의 해방에 동원시키시는 분이 있었다. 하나님이시다.

모세 앞에서 하나님은 떨기나무에 붙은 불의 모습이었다. 차단된 거룩한 세계가 자진해서 이 땅을 방문한 것이다(출 3:4). 더럽던 그 장소가 졸지에 거룩한 자리가 되었다. 모세는 신발을 벗게 되었다. 다른 세계에 들어온 것이다. 그리고 그는 종으로서 복종만 해야 될 처지에 놓이게 되었다.

이스라엘의 해방문제는 모세의 문제가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과 하나님 사이의 문제였다. 그들은 조상의 하나님께 부르짖었고 하나님은 그 부르짖음을 들으시고 이제 모세 앞에 나타나신 것이다. 하나님은 모세가 도망쳐 온 이 자리를 하나님이 건져내어 새로운 국가를 형성시키시는 자리로 일방적으로 작정해 버린 것이다. 따라서 모세로서는 자신으로는 직접 관련이 없다고 여겨져서 이번 일에서 빠져 보려고 노력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모세의 그런 의사를 받아주지 않으신다.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기를 불신할 것이 분명하므로 자기를 애굽에 보내시는 신(神)의 이름을 알기를 원했다. 그 때 하나님은 여호와라는 이름을 제공함으로 선조들에게 영원한 약속을 한 바로 그 하나님임을 강조하신다. 그리고 모세를 보낸 것은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약속한 것이 이루어질 때가 되었기 때문이라는 것도 아울러 말씀하였다.

모세로서는 대단히 입장이 난처해졌다. 왜냐하면 사적인 일로 그들에게 다가서지 않는다는 증거가 있어야 했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뱀을 잡는 시늉과 문둥이 환자를 고치는 시늉과 그리고 강물이 피바다가 될 정도로 처참한 심판의 전쟁을 나타내는 시늉을 하게 하셨다. 이와 같은 기적들은 애굽의 지도자와 히브리인들로 하여금 전쟁(뱀 잡음)을 통한 이스라엘 구출(문둥이 환자의 회복)을 암시하도록 도와줄 것이다.

비천한 목자와 지팡이, 그러나 그는 이제 혼자가 아니라 배후에 어떤 낯선 신이 함께 있었다. 마치 모세가 지팡이를 쥐고 있듯이 말이다. 형과 단촐한 가족들을 데리고 모세는 여호와의 사명을 위하여 길을 떠난다. 그러나 길에서 그는 여호와 하나님을 만나 죽을 뻔했다. 아마 문제는 모세보다 모세의 아내인 십보라에게 있었던 것 같다. 그녀는 남편의 사명이 아브라함의 언약인 할례언약과 연관되었음을 소홀히 보고 자식에 대한 하나님의 지침을 시행하지 않았던 것 같다. 진정한 하나님의 아들은 누구인가? 피를 거치지 아니하면 누구라도 진정한 하나님의 아들이 될 수 없다. 이 십보라 사건은 앞으로 전개되는 애굽에서의 모든 사건의 기초가 된다.

2:1-10

본문에 보면, 출생부터 참으로 실패라고 간주할 수 밖에 없는 한 분이 나온다. 그의 이름의 모세이다. 우선 모세는 그 당시 분명 죽어야 될 신생아이다. 뿐만 아니라 모세의 생모는 결국은 모세 키우기를 포기한다.

기적의 시작은 여기서부터 이다. 하나님께서 일을 하실 때는 인간이 그동안 추진해 온 일에 꼬리를 계속 이어 붙이는 식으로 일하시지 않으신다. 인간의 기초를 닦아 두면 그 다음에 하나님께서 수월하게 그 일을 이어받아 마무리 짓는 그런 식으로 일하시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인간이 미완성적인 일을 시작하면 하나님께서 그 인간의 일을 완성시켜서 그래서 그것을 가지고 '하나님의 일'이라고 부르시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인간들로 하여금 맥이 빠지지만 절망케 하고 힘이 빠지게 한다. 그것은 곧 그 인간의 실패이다.

신약적으로 말해서 그것은 십자가 속에 들어간 셈이다. 과연 인간이 손을 떼어도 하나님의 일이 성사될 수 있을까? 갈라디아서 4:26를 보면 " 오직 위에 있는 예루살렘은 자유자니 곧 우리 어머니라" 참으로 난해한 말씀이다.

왜냐하면 예루살렘=자유자이기 때문이다. 이 갈라디아서에 나오는 하나님의 말씀은 곧 하나님께서 히브리인들을 데리고 성취하려는 그 목표점이다. 즉 자유를 주시고자 하신다. 그러나 현재 히브리인들은 이 목표점을 달성하는데 하등의 도움이 되지 못한다. 모세라는 아들 하나를 몰래 키우는 것도 석달이 한계였다.

모세는 물론 레위지파이다. 레위지파란 야곱이 축복한 12지파 중의 한 지파이다. 따라서 레위지파의 운명은 하나님께서 책임지시는 것이다. 그런데 그 레위지파의 아들이 악한 애굽의 세력에 의해서 무산될 판이다. 이것은 곧 하나님의 축복이 공격 받는 것이 된다.

하나님께서 여기서 기적을 베풀되 우선 인간의 모든 힘을 끊어버린다. 모세의 운명은 생모의 손에서 떨어져 나간다. 그러면 모세를 누가 키운단 말인가? 갈라디아서 4:26에 보면. '위에 있는 우리 어머니'라고 되어 있다.

본문 10절에 보면 이런 말씀이 나온다. "그 아이가 자라매 바로의 딸에게로 데려가니 그의 아들이 되니라 그가 그 이름을 모세라 하여 가로되 이는 내가 그를 물에서 건져 내었음이라 하였더라"

바로의 딸은 강에 떠내려온 아이의 이름을 짓는데, 일방적으로 자기가 짓는다. 이 아기가 누구의 아이이든 상관 없는 자신이 '물에서 건져낸 아이'라는 것이다. 즉 죽은 자 가운데서 불쌍히 여겨서 건져내었다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생모인 레위지파의 여인은 모세의 운명에 전혀 관여하지 못한다.

이로서 모세의 운명을 놓고 바로의 권세와 레위지파에게 축복을 주신 하나님의 권세가 상호 충돌하게 되었다. 히브리인들은 이 싸움에서 뒤로 빠지고 만다. 하나님이 모세를 보호하느냐 아니면 바로의 권세가 모세를 보호하느냐의 싸움으로 정리되었다.

그 당시 히브리인들은 아이들이나 어른이나 날 때부터 원치 않는 권력의 통제 아래에 놓이게 되었다. 이 권력은 히브리민족을 말살하려는 목적으로 제정된 것이다. 그런데 히브리민족을 말살하겠다고 덤비는 것은 결과적으로 히브리민족을 축복하신 하나님의 뜻을 무효화하려는 짓이다.

이것은 곧 권력과 권력의 싸움이다. 모세는 일종의 애굽 권력의 볼모가 된 셈이다. 여기서 하나님의 힘은 세상적으로 볼 때 참으로 권력자답지 않는 낯선 모습으로 다가온다. 즉 실패자의 모습이다. 성공여부가 완전하게 불가능하게 보인다.

모세의 어머니로 하여금 어린 자기 아기를 포기하게 만들게 한 상황도 이런 상황이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것도 이와 같다. 예수를 믿으면 구원될 것 같기에 믿는 것이 참 믿음이 아니다. 그것은 또 하나의 자기 시도이다.

힘을 빼는 것이 아니라 '예수 믿기'라는 또 하나의 힘을 사용해 보는 것이다. 하나님은 그런 식으로 자기 백성을 구원하는 것이 아니다. 예수님에게 맡기면 무슨 일이 일어나게 되어 있다. 마치 모세의 어머니가 모세를 포기해도 모세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는 것처럼 말이다.

구원은 더 이상 히브인들의 노고나 시도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들의 힘 사용은 이미 상관없는 것이 되고 말았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작용하는 그 힘으로 다른 히브리인들도 구원하신다. 왜냐하면 진정한 히브리인들의 어머니는 하늘에 계시기 때문이다.

그 힘은 모세라는 이름에 담겨 있다. 모세란 '물에서 건짐을 당했다'는 말이다. 그토록 히브리인들을 괴롭혔던 애굽의 권력도 자기의 언약 백성을 건져내려는 하나님의 이용물이 될 뿐이다. 모세를 물에서 건져내듯이 모든 히브리인들도 물에서 건짐을 받을 것이다.

이것은 곧 애굽의 막강한 권력보다 모세를 살려내시는 하나님의 일관된 언약의 힘이 더 세다는 것을 뜻한다. 오늘날 우리들의 '예수 믿기'는 우리 소관이 아니다. 차라리 우리는 손을 떼야 한다. 모세와 같은 십자가 지신 예수님께서 자신의 죽음에서 탈출 시킨 그 힘으로 우리를 구원하신다.

우리 인간에게는 실패하는 것이 있지만 예수님에게는 죽음조차도 실패가 아님을 알아야 한다. 바로 이 기적에 하나님께서는 초청하신다. 자기 힘으로 구원 받으려고 애쓰는 사람은 결국 불 신앙쪽으로 기우러 질 수 밖에 없다. 우리 안에 계신 이가 이미 세상을 이긴 분이다. 그 이기신 능력의 기적 안에 들어왔기에 실패가 곧 자유함의 증거로 삼아야 한다.

2:11-15

우리는 모세가 위대하다고 여긴다. 그러나 모세는 하나님의 은혜로 살아간 사람이다. 하나님의 은혜는 인간보다 더 세다. 비록 모세에게 각가지 오류가 있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은혜는 그를 무사히 천국으로 인도해 내었다.

우리들이 모세를 볼 때는 그의 오류보다 그의 위대한 점을 부각하기 마련이다. 사도행전 7:22-23에 '그 형제 이스라엘 자손을 돌아볼 생각'이라는 대목에 주목해 봐야 한다. 모세의 오류는 여기서부터 시작이 된다. 상식으로 보면, 지극히 당연한 인간의 본성이 가족주의에서 모세가 사명감을 끄집어 내었다는 것이 잘못의 시작이다. 그리고 모세뿐만 아니라 어느 누구도 가족주의에서 벗어날 위인이 없다.

이런 의미에서 모세의 잘못은 우리 모두가 저지르게 되는 잘못을 대변해주고 있는 것이다. 사람이 하나님을 찾고 초월적인 분을 찾지만 그러면서도 중요할 때마다 그의 발목을 잡는 것은 추상적인 신이 아니라 가까운 가족 챙기기이다.

이 세상의 모든 국가나 사회는 그 밑바탕은 가족주의가 깔려 있다. 교회도 마찬가지이다. 예수님 따라 모인 것 같지만 그 터를 조사하면 각각 일가 친척들로 구성되어 있음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이 가족주의를 시발로 해서 발전하게 되며 종족주의, 민족주의가 되는 것이다.

'민족'이란 큰 '가족'을 뜻한다. 가족이란, 죽어도 같이 죽고, 살아도 같이 살아야 될 동일한 운명공동체처럼 느껴지기 마련이다. 없는 식구들이 자기들의 생식 능력에 의해서 출현했기 때문에 어디까지 자기 울타리 내에서 안 벗어나는 존재들이라는 인식이 있는 것이다.

모세의 오류는, 인간의 본성상 숨길 수 없는 타고난 요소라고 봐야 한다. 사람에게 있어 유혹이란 자신의 본성을 정당화하는 것부터 시작이 된다. 인간은 자신의 과거와 세상의 미래를 서로 연결시켜 보려는 유혹을 받게 된다. 그렇게 되면 자신의 변화가 곧 세상의 변화가 된다는 해석이 내려질 것이 뻔하다.

그러나 하나님의 일이란 그 모든 인간들의 마음을 낮추고 또 낮추는 식으로 진행된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일의 중앙부에 인간이 들어서는 것을 용납하시지 않기 때문이다. 자신의 화려한 과거 이력이 결코 하나님의 일을 할 요건이 되지 못한다.

남다른 인생살이가 결코 하나님께서 들어 쓰시는 좋은 재료가 되지 못한다. 그런 것들은 자기 인생을 화려하게 장식해 보려는 유혹일 뿐이다. 모세의 인생이 하나님의 일과 결합이 될 경우는 오직 하나, 죄로부터 출발해야 했다. 은혜란 죄를 회개하는 식으로 진행되는 것이다.

인간은 자신이 하나님의 일에 부적절함을 깨닫는데 성공할 위인이 없다. 하나님이 나서야 할 문제이다. 따라서 하나님의 일이란 가시적인 외부의 실적으로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내부적인 일로 진행된다. 안에 계셔서 벌리시는 하나님의 일이, 실적 위주로 일을 벌리는 인간의 일을 공격하는 식으로 이루어진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소위 모세의 '정의로움'을 자극시키신다. 그러나 사람에게는 나올 수 있는 것은 죄 밖에 없다. 자신의 죄를 모르게 되면, 자기 정의감에 대한 긍정, 자기 사명감에 대한 긍정감만 고취될 뿐이다.

모세는 자기 중심적 민족심으로 무장해 있다. 그리고 그것이 힘으로 작용했다. 그는 자기 동족을 괴롭히는 애굽인을 몰래 쳐죽여 모래 밑에 숨겼다. 그러나 이러한 민족심은 같은 민족끼리 다툴 때 같은 동족으로부터는 동의를 얻어내지 못하고 말았다.

모세가 그들을 말리려 할 때, 같은 동족이 이와 같이 말한다. "그가 가로되 누가 너로 우리의 주재와 법관을 삼았느냐 네가 애굽 사람을 죽임 같이 나도 죽이려느냐"라고 대들었다. 그러자 모세는 자신의 행동이 탄로난 것임을 알게 되었다.

결국 그의 모든 행위가 결코 하나님으로부터 자동적으로 인정 받는 일이 아님을 알았다. 자신의 일은 결코 탄로나서는 아니 되고, 자신의 일은 하나님의 민족인 자기 민족을 위한 일이고, 자신의 일에 대해서는 다른 동족들이 모두 공감을 표하고 협조해야 하고, 자신에 대해서는 자기 동족들은 법관으로 권위를 부여해야만 한다고 여겼다.

그런데 이런 '자기 절대화'는 하나님은 동조해 주시지 않았다. 여기서 우리는 어떤 식으로 우리의 가족주의의 본성을 접해야 하는 것인가? 욥기 1: 18-21절에 누군들 자식이 귀하지 않는 사람이 있겠는가? 욥에게도 마찬가지이다. 모두들 하나 같이 사랑스러운 자식이었다. 그런데 다 죽었다. 이런 일을 통해서 우리는 욥의 고백을 봐야 한다. '주신 자도 하나님이요 거두신 자도 하나님이라는 것'이다.

흔히들 매일같이 상상의 세계를 펼치면서 살아가고 있다. 그것은 하나님이 주신 비전이라고 간주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런 식으로 일하시는 분이 아니다. 아예 우리 마저 장악해서 우리 가운데서 일하시는 분이다. 더 이상 우리 인생은 우리 것이 아니다.

가정 주부는 가정 주부로서 꿈이 있다. 가장으로서는 가장으로서 꿈이 있을 것이다. 목회자는 목회자로서, 장로는 장로로서 꿈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마저 하나님 중심주의로 교체 해야 한다. 가만 놔두어 버리면 수시로 자신을 괴롭히는 정신적 응어리가 된다. 이 교체가 바로 은혜이다.

2:16-25

모세는 자기 딴에 새로운 인생살이를 시작한다. 결혼을 하게 된다. 그런데 그것도 이방종교인의 가정과 결혼하게 된다. 이것은 하나님이 주시는 새로움이 아니다. 그는 출생해서 지금까지 애굽인의 도움을 받았고 이제부터는 이방인의 도움을 받는다. 이것은 하나님이 주신 새로움이 아니다.

모세는 새로운 사람들을 만난다. 원래 '새로움'이란 과거와 달라지는 것을 뜻한다. 물론 모세는 새로운 환경에 잘 적응했다. 이 결혼 생활이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기대했던 ‘새로움’은 아니다. 모세는 분명히 구사일생으로 인생을 출발해야 했던 사람이다. 그렇다면 그에게 새로움이란 이런 죽음마저 초월하는 그 '새로움'이어야 하는 것이다.

결혼이 과연 인간성까지 변하게 할까? 물론 결혼이란 새로운 가정이 창조된다는데 있다. 그래서 처음에는 생소하고 신기하고 놀랍고 기쁘기만 하다. 새로운 경험이다. 문제는 상황이 바뀌었다는 것이지 그 속에 있는 인간 자체가 달라진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모세가 민족적 해방감에 충만해서 독립지사 노릇을 할 때, 그는 그 속에서 나름대로 진리를 규정하려고 했을 것이요, 참된 새로움이 뭔가를 탐구하고 노력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제 그 총각 때의 그런 작업은 모조리 압수 당했다.

이제는 여느 사람과 다를 바 없이 되었다. 과연 총각 시절 때와 새 신랑 시절 중에서 어느 시절의 모세가 참된 모세의 본질인가? 둘 다이다. 세상 일에 열중할 때나 가정을 꾸미고 조용히 살 때나 모세에게 있어 달라진 점은 아무 것도 없다. 양쪽 다 모세의 본 모습이다. 그리고 둘 다 하나님의 일이 아니기는 마찬가지이다.

하나님은 여기서 하나님의 약속의 자녀들이 얼마나 세상 사람과 조금도 다를 바 없는 보통 인간인 것을 절실하게 보여주신다. 즉 모세조차 하나님께서 먼저 다가서지 아니하면 오십보 백보에 지나지 않는 인물이라는 것이다. 사람이 평범하게 살아간다는 것이 결코 하나님 앞에 의로운 삶이 아니다.

그런다고 해서 요란하고 화려하고 찬란한 인생을 산다고 해서 결코 특별히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은 아니다. 도무지 하나님의 일이란 인간의 노력으로 재현될 수 없다. 하나님의 일은 인간이 어떤 자세로 삶을 영위하든지 간에 자꾸만 그것을 뒤엎는 식으로 전개되기 때문이다.

또한 하나님께서 뒤 엎어진 인생이라고 해서 그것 또한 자동적으로 하나님의 일이 되는 것도 아니다. 동전은 앞면이나 뒷면이나 모두 같은 동전일 뿐이다. 앞에서 뒷면으로 뒤집었다고 동전 아닌 딴 것이 되는 것이 아니다. 인간이 아무리 몸부림쳐도 거기에서 거기이다.

모세가 광야에서 객이 되어 평범한 목부로서 살았다고 해서 하나님의 일을 위해 대기 상태에 놓인 것이 아니다. 단지 그는 그 객, 즉 나그네가 무엇을 의미하는 지를 알았던 것이다. 모세의 원래의 자리란 애굽도 아니오 광야도 아니다. 처음부터 그의 자리는 물이다. 곧 죽음이었다. 그는 죽음 속에서 태어난 자이고 건져냄을 당한 자이다.

그렇다면 그는 어디를 가든 그는 나그네일 따름이다. 인생이라는 것이 이런 것이다. 내 것이라고 할만한 것도 없다. 그것은 내 목숨조차 태어나면서부터 죽음이 잉태하고 죄 속에 잉태되었기에 당연한 결과로서 죽음의 세력은 우리 곁에 머물게 되는 것이다. 만약 죽음을 경험하지 않는 장소나 공간이 있다면 그것은 천국일 것이다.

하지만 그런 천국은 이 땅의 세계에서는 존재하지 않는다. 어릴 때는 바로의 세력에 이해서 비호 받고 자라났고 이제 장년이 되어서는 미디안이라는 이방 민족의 도움을 받고 살아가고 있다. 과연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친히 축복으로 약속하신 그 후손을 이처럼 내팽개치실 것인가? 레위지파가 받았던 하나님의 축복은 휴지조각이 되는 것인가?

하나님은 모세를 위한 모세는 아니다. 하나님의 계획 잡아 놓은 바를 위한 모세이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나라를 위한 이끌어 오심이오 살림이다. 이 관계성이 바로 진리와 영생이다. 모세는 이미 구원 받고 일을 시작하는 중에 있었다. 혼자서 자신을 돌아보면 모든 것이 실패인 것 같지만 사실은 하나님과의 관계 안에서 모든 것이 성공이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 직접 나서시면 어떤 경우나 상황에 있든지 그것이 곧 성공이다.

3:1-4

하나님이 먼저 모세에게 다가 서신다. 이러한 접근은 창세기 3장에서 아담에게 먼저 다가오시는 하나님의 사랑의 반복이다. 그 때 아담 부부나 모세나 둘 다 하나님의 실체를 접하고서는 너무너무 큰 두려움에 어쩔 줄을 모르고 있다.

요한계시록 1장에서도 사도 요한은 예수님을 만나고서는 너무 큰 두려움으로 납작 엎드렸다. 마치 죽은 자처럼 말이다. 우리들이 일상적인 생활 가운데도 이처럼 하나님의 현존을 크게 느끼면서 살아간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세상에서 겪는 온갖 돈 걱정, 건강 문제, 가정 걱정, 미래 걱정도 하나님의 현존 앞에서 참으로 무의미한 찌꺼기에 불과하다. 정작 인간에게 중요한 것은 그 하나님으로부터 어떤 사명과 지시를 받았는가 하는 점뿐이다. 이사야 6장에서 이사야가 하나님으로부터 사명을 받고, 사도행전 9장에서 사도 바울이 예수님으로부터 사명을 받는 것처럼 말이다.

인간이 하나님 만나고 난 뒤, 하나님으로부터 받는 사명과 그렇지 않고 하나님을 만나기 전에 이러이러한 사명을 가졌으면 좋겠다 하는 그 사명과는 엄청난 차이가 있다. 사명조차 인간들은 조작해 내려고 한다.

하지만 진짜 사명은 자신의 죄인 됨을 감추려 하지 않는 반면에, 가짜 사명은 그 사명으로 자신의 죄인 됨을 감추려 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오늘날 주의 종을 빙자한 가짜 설교자들의 본질이다. 교회나 목회나 인간 편에서 봐서 중요한 일이 아니다. 오직 하나님 편에서 볼 때만 중요한 일이다.

바로 이점을 지적하기 위해 하나님은 모세를 찾아오게 되신다. 모세는 하나님과의 만남을 그 전에 학수고대한 것도 아니다. 일부로 초청한 것도 아니다. 그냥 하나님 편에서 알아서 모세를 찾아오신 것이다. 그만큼 모세에게 맡길 일이 모세쪽에서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쪽에서 중요하다는 사실을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본문에 대해서 다음과 같은 해석이 있다. 하나님께서 떨기나무 불꽃으로 모세를 만난 것은 모세의 앞으로의 역할이 이 떨기나무처럼 되어야 하기 때문이란다. 즉 이 떨기나무에 분명히 불은 붙었으나 그 불이 계속 꺼지지도 않고 또한 손상이 가지 않았는데 이는 모세가 받은 사명이 하나님이 주신 불 같은 능력이라서 아무리 일을 해도 모세에게 손상이 되는 일이 없다는 것이다. 마치 떨기나무가 타지 않는 것처럼 같아진다는 것이다. 그래서 교인들도 모세와 같은 하나님의 능력을 받아서 교회를 위하여 지상충성을 하여야 하는데 그래도 조금도 피곤할 줄 모르는 대단한 초인적인 능력가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설교를 하게 되면 교인들은 스스로 자신이 믿음이 얼마나 대단한지, 그리고 자신이 받은 신의 능력이 얼마나 끈질긴지 시험하려 들 것이다. 그래서 몸이 부서지도록 교회에 충성해 볼 것이다. 이 시대와 자기 교회에서 위대한 모세가 되어보기 위해서 이다.

이것은 신앙이 아니라 불신앙의 대표적인 양상이다. 영웅주의이다. 이 영웅주의는 하나님의 하신 일을 믿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행한 일을 통해서 하나님의 신앙을 측정하려 든다. 이런 일은 악마가 인간을 가지고 노는데 주로 적용시키는 악마의 주특기이다.

마태복음 4장에서 예수님은 악마에게 시험을 받게 되는데 그 시험 중의 하나가 '초인적인 능력자 되기'에 집중된다. 하나님의 일은 하나님 혼자서 해내신다. 우리들은 아무 것도 도와드릴 수가 없다.

본문에서 하나님이 불로서 나타나신 것은 하나님의 거룩을 가감 없이 드러낸 것이다. 신명기 4:34에 보면, "네 하나님 여호와는 소멸하는 불이시요 질투하는 하나님이시니라"라고 되어 있다. 즉 거룩되지 못한 것은 소멸될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바로 하나님 앞에서 모세가 무엇을 더 요구할 수 있겠는가!

우리가 하나님의 능력이 임한다고 해서 하나님의 일이 더 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능력을 시험하는 셈이 된다. 하나님께서 먼저 모세에게 찾아오신 것이다. 모세가 하나님의 능력 받고 싶어하는 상태에 있는 것이 아니다.

모세가 자신에게 능력이 없이 애굽에 있는 자기 백성들을 못 살려내고 있다고 한참 양심의 가책을 느끼고 있는 중에 있는 것이 아니다. 애굽에 있는 자기 백성에 대해서는 모세는 완전히 나 몰라라 하는 상태에 있다. 그런 와중에 하나님께서 모세를 찾아오신 것이다.

하나님은 위대하지 않는 모세를 위대하게 사용하시는 것도 아니요, 위대한 모세를 위대하게 사용하시는 것도 아니다. 위대하지 않는 모세를 위대하지 않게 사용하시는 것뿐이다.

모세가 능력 받아 일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모세를 떠나지 않겠다는데 초점이 있다. '미리 정하신 자를 부르시고, 부르신 자를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이를 영화롭게 하시기' 위하여 하나님은 성도를 떠나지 아니하시고 모세를 떠나지 않으시는 것이다.

따라서 모세 입장에서는 큰 능력을 하나님으로부터 인수 받았다는 느낌보다는 오히려 하나님이 자기를 떠나지 않는다는 사실이 더 긴장되고 황공스러울 뿐이다. 모세 자신이 가진 능력이 다른 인간들의 능력보다 더 세기 때문에 우쭐댈 그런 여유조차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허용하지 않는 것이다. 도리어 모세라도 여차하면 본인도 죽을 판이다.

출애굽기 4:24에 보면, "여호와께서 길의 숙소에서 모세를 만나사 그를 죽이려 하시는지라"라고 되어 있다. 즉 어느 한 순간이라도 모세는 하나님에 의해 죽을 수도 있는 대상으로 동행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모세에게는 더 이상 인간이나 세상이 두려울 리가 없다. 단지 그들의 불신앙과 인간적인 사고방식이 귀찮고 성가실 뿐이다.

모세는 지금 조용히 살고 싶다. 그러나 모세를 이 땅에 태어나게 만든 근거가 따로 있다. 그것은 언약이다. 6절에 보면, "또 이르시되 나는 네 조상의 하나님이니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니라 모세가 하나님 뵈옵기를 두려워하여 얼굴을 가리우매"라고 되어 있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모세는 결코 끊어지지 않는 사이라는 것이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내린 언약은 필히 성취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도중의 무산될 성질의 약속이 아니다. 물론 모세 입장에서 "하필이면 저입니까?"라고 묻고 싶겠지만, 아브라함 자손 전부가 하나님의 일을 담당해야 될 종들이다.

따라서 종의 입장에서 자신에게 일이 덮치지 않기를 원할 그 어떤 입장에 놓여 있는 것이 아니다. 모세의 할 일에 대해서 히브리서 3:5에 보면, "또한 모세는 장래에 말할 것을 증거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온 집에서 사환으로 충성하였고"라고 되어 있다.

출애굽기에서는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내리신 하나님의 먼저 번 약속을 이루기 위해서 모세를 찾아왔다고 했는데 히브리서는 과거의 약속이 아니라 '장래에 말할 것'을 증거하기 위해 모세는 일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언약이라는 것은 모세를 중간 다리로 사용하여 장차 오신 예수님에게 와서 완성을 꽃을 피운다는 뜻이 된다. 모세가 받은 모든 사명은 단순히 모세의 자기 민족을 애굽에서 해방하는 일이 아니라 장차 오실 메시야가 어떤 일을 이 땅에서 하게 되느냐를 미리 보여주는 일을 하는 사람인 것이다.

3:6-12

하나님의 일은 인간들이 평소에 생활하는 가운데 아쉬운 점하고는 전혀 무관하게 이루어진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나타났을 때, 모세는 아쉬운 점이 없는 자기만의 생활에 열중하고 있었다. 그는 하나님의 일을 하고 싶어하지 않았다.

그런데 바로 그런 모세에게 하나님께서 찾아 오셨다. 이것으로 우리는, 하나님의 일에 참여 된 자들에게 어떠한 변화가 일어날 수 있는지를 알게 한다. 즉 하나님의 뜻에 의해서 인간이 어떻게 쓰여지느냐를 우리는 알아야 한다.

참 하나님을 만난 사람은 참으로 당황하게 된다. 왜냐하면 지금까지 꿈꾸며 살아왔던 생활 패턴은 송두리채 포기해야 될 지경에 빠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모세는 발뺌을 한다. 바로에게 가고,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는 것은 전혀 모세 본인의 의사가 아니라는 말이다.

이 세상에서는 누가 누구에게 일을 시키더라도 상대방이 납득이 되고 호응이 되는 상태가 되어야 한다. 그런데 하나님의 일하시는 방식은 그렇지 않다. 하나님이 찾아 들면, 그 사람은 지금까지 자기를 사랑하는 그 태도부터 완전히 바뀌어져야 한다.

즉 자기가 자기를 사랑하는 것조차 금지가 되어야 한다. 그 인간 자신의 계획표가 무너지게 된다. 모세는 이제 평안한 여생을 꿈꿀 나이이다. 단란한 가정도 이루었다. 이제 하나님 없이도 아쉬울 것이 없는 처지이다.

바로 그런 판국에 무작정 하나님은 모세에게 물어보지도 않고 모세 인생에 침범해 들어오셨다. 모세는 자기 남은 여생을 탈취당한 기분이 되었다. 우리는 왜 하나님께서 이런 식으로 일하셔야만 하는지 그 이유를 알아야 한다.

그 이유는 12절에 나온다. "하나님이 가라사대 내가 정녕 너와 함께 있으리라 네가 백성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낸 후에 너희가 이 산에서 하나님을 섬기리니 이것이 내가 너를 보낸 증거니라".

여기서 '이 산에서 하나님을 섬기리니'라는 말이 나온다. 오늘날 자본주의 사회에서 인간들이 품고 있는 꿈은 거의 대부분 같은 것이다. 돈 잘 벌고 호의호식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상식화되었다.

이 점은 모세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다. 우선 자기 자신부터 챙기고 싶어한다. 그런데 아무리 인간들이 이런 생각으로 단단히 무장해서 살아간다 할지라도 하나님 나름대로의 생각은 결코 중도 포기될 수 없다. 인간들의 그런 생각을 고려해 줄 마음이 추호도 없다.

이미 모세를 찾아들 때부터 하나님의 생각은 확정되었다. '하나님의 섬길 자'를 이곳 모세와 대화하는 이 산까지 데리고 오는데 있다. 그리고 영원히 하나님만을 섬기게 만들고야 만다.

모든 인간들이 자신만을 섬기는데 거기를 비집고 들어와서 '인간 사랑하기'를 금지시키고 오로지 하나님만을 섬기는 자로 만들려면 여기에 특별한 일이 벌어져야 한다. 그 중의 하나가 인간들로 하여금 스스로 자기 자신에게 실망케 하는 것이다.

본문 7-9절에 '부르짖음', '학대', '우고'라는 말 표현들은 그만큼 애굽에 있는 하나님 백성들이 더 이상 버틸 수 없는 상황에 처해 있다는 것을 말해준다. 스스로 자기를 사랑해도 아무런 대책이 서지 않다는 것을 알게 하시는 것이다.

만약 여호와 하나님께서 구원해 주신다면 전적으로 여호와 하나님만을 섬기겠다는 다짐을 할 수 있는 입장에 놓이게 하시는 것이다. 더 이상 자신의 능력이나 지식에 의존해 봤자 소용없는 지경을 허락하는 것이다. 그래야 인간이 '자기 자신 섬김'을 그만 두게 된다.

인간들이 스스로 자기를 구원할 수 없고 멸망해 가는 것을 절감하게 만드는 타이밍을 하나님은 놓치고 싶지 않는 것이다. 그 경우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오로지 자신만을 섬기는 백성을 만들고자 하신다. 그런데 이런 백성 만들기에도 설계 도면이 먼저 있다.

3:6에 보면 하나님께서는 자신을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으로 소개하고 계신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조상에서 맹세한 바를 지금 실시하겠다는 것이다. 출애굽기 4:22-23에 보면 '이스라엘은 내 장자, 곧 내 아들'이라고 되어 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 내린 맹세로 '아들'을 만들어서 아들의 신분으로 하나님만을 섬기는 목표를 갖고 계셨던 것이다.

아브라함에게 있어 이삭이란 결코 자신의 혈육적인 아들이 아니다. 이미 자기 아내 사라가 태가 죽었음을 확정 지은 후에 그 죽은 태에서 자식이 태어났다. 이것은 사라의 혈육적인 능력의 열매가 아니다. 하나님께서 일방적으로 내려주신 약속의 능력이다.

즉 하나님의 약속이 아니면 이 세상에 '하나님 아들'이 생성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혈육으로서는 그 어떤 식으로 하나님의 아들이 태어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아브라함에게 있어 이삭의 탄생이란 마치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실험실로 이용해서 신제품 하나 얻는데 성공한 사례로 만드신 것이다.

이제 모세 때 와서는 그 하나님의 아들을 '대량 생산체제'에 돌입하려 하신다. 아브라함의 경우에는, 단지 사라의 태가 죽으면 그만이었다. 그러나 모세 때에 와서 이 죽음의 경험을 집단적으로 느끼게 하는 것은 죽음을 유발시킨 세력이 이미 이스라엘에게 덮어 쓰게 하는 경험이다.

출애굽기 4:21에 보면, '바로의 마음'이 일부로 하나님에 의해서 강퍅케 됨을 알 수 있다. 이 강퍅으로 인해 애굽에 있는 히브리인들은 심한 고생을 하게 된다. 하나님의 아들 만들기란 이처럼 마치 대학 실험실에 신제품을 하나 만들어서 실제 공장에서 대량 생산체제에 들어가는 식과 같다.

아브라함에서 이삭 생기는 것이 '하나님의 약속 아들 만들기'의 샘플이라면, 모세 때에 와서는 그 샘플이 생기는 방식으로 대량 '아들 만들기'를 가능케 하겠다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다. 죽음에서의 부활이요, 없음에서의 있음이다. 이런 약속의 아들만이 진정한 하나님의 아들이다.

3:13-15

여호와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다. 그리고 모세의 하나님도 되고 노아의 하나님도 된다. 하나님이 먼저 찾아와서 모세가 단독으로 만났다는 사실은, 모세 이외의 사람들은 참 하나님을 아는데서 배제되어 있다는 말이다. 노아가 혼자서 방주를 만들고 있다는 것은, 다른 사람들은 노아가 알고 있는 하나님에서 배제되어 다른 엉터리 하나님을 알고 있다는 말이 된다.

이런 경우는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하나님께서 특별히 친히 찾아온 자들은, 그들 시대에 있어 그 사람에게만 하나님에 대한 참 진리를 알고 있는 것이 된다. 이처럼 하나님께서 특별히 누구를 찾아오는 것은, 장차 하나님께서 보내실 메시아가 사실상 하나님에 대해서 모든 것을 제대로 알고 계신 분이라는 점을 미리 알려주는 모형들이기 때문이다.

구약의 인물들은 일종의 지도 위에 그려진 지명이라고 할 수 있다. 거기에는 대구도 있고 서울도 있지만 실제, 대구도 아니요 서울도 아니다. 그저 표시이지만 이와 마찬가지로 다윗으로 인해 예언된 시편 143:11의 말씀에 나오는 '주의 이름'이나 '주의 의'라는 것도 인간들이 제대로 알고 부를 수 있는 주의 이름이나 주의 의가 아니다.

아브라함이든 이삭이나 모세든 다윗이든 간에 그들의 말이나 행위를 아는 것은 예수님 입장에서 볼 때만 비로소 밝혀지는 것이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바로 그들이 예언된 '주의 이름'이시기 때문이다. 오늘날도 유대인들은 여호와만이 주라고 보고, 따로 하나님의 이름이 필요치 않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시편 110:1에 보면 분명히 거기에 주님이 두 분 나온다. "여호와께서 내 주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네 원수로 네 발등상 되게 하기까지 너는 내 우편에 앉으라 하셨도다"라고 되어 있다. 그러니까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예언을 성취시킬 주님으로서 누구를 실제로 보내셨는데 그 분이 바로 이 땅에 '주의 이름'으로 오신 분, 곧 예수님이다.

요한복음 8:29에 보면, "나를 보내신 이가 나와 함께 하시도다 내가 항상 그의 기뻐하시는 일을 행하므로 나를 혼자 두지 아니하셨느니라"라고 되어 있다. 즉 여호와 하나님과 예수님을 결합시키지 아니하면 진짜 여호와 하나님에 대해서 전혀 모르는 무지한 사람으로 남는다. 마치 사울이 예수 믿는 자를 핍박하는 양상과 같은 것이다.

그렇다면 시편 143:11의 말씀이 어떻게 성취가 되는지를 살펴 보자. 흔히 구약 성경을 존중히 여기서 지켜서 구원을 얻겠다는 자들은 '주의 이름'을 자신들이 부르게 되면 그것으로 자신이 구원되는 걸로 여긴다.

그러나 사울의 경우처럼 이미 자신의 마음 속에, '주님'에 대해서 엉터리 견해를 지니고 살고 있기에 아무리 입으로 '주의 이름'을 부른다 할지라도 구원되지 못한다. 즉 바리새인들이 지옥 가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이들은 구약에서 '성전'에 관한 말이 나오면 그들이 지었던 성전에 대해서 언급하는 것인 줄 안다.

그러나 요한복음 2장에 보면, 구약 때의 성전은 신약 때에 예수님의 몸을 두고 말한다. 이러한 대 전환은 그들은 모른다. 그러면 어떤 자만이 제대로 주의 이름을 부르고, 주의 의로 구원될 수 있을까?

바로 시편 143:11의 말씀의 성취 자는 인간이 아니라 따로 계신데 그 분이 바로 예수님이시다. 예수님이 자신이 성취한 말씀 성취를 가지고 하나님 백성에게 선물로 넣어주게 되면 그 때 비로소, 성도는 '주의 이름'을 제대로 불러서 구원을 받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 성도는 고백하기를, "내가 예수님이 주님을 아는 능력이 저에게는 일체 나타날 수 없고 순전히 주님 되시는 예수님의 선물로 인해 얻어진 믿음입니다"라고 고백하게 된다. 그러므로 성도는 자기 자신의 자질에 대해서 대견해 할 필요가 없다는 말이다.

성도의 자질로 믿어진 것이 아니라 주님으로 살아계신 나사렛 예수님의 능력이 임해서 그 사람은 '믿음'이라는 선물이 생긴 것이다. 마치 다마섹에서 사도 바울이 받은 선물처럼 말이다. 이로서 성경 말씀대로 하나님의 이름을 만난 모세처럼 구원 받은 자가 생겨나게 되었다. 이들만이 하나님의 백성이다.

3:18-22

애굽에 들어갔다가 나오지 않는 히브리인들로서는, 하나님의 군대라는 이름으로 불리우는 이스라엘로 탄생되지 않는다. 하나님은 애굽에 볼 일이 있으시다. 자기 백성을 데리고 하실 일이 있으시다. 그것은 애굽 나라가 하나님의 백성을 괴롭히는 것을 통해 하나님은 진정한 인류의 적을 확실하게 폭로 하시려는 것이다.

본문을 보면 몇 가지 이상한 점이 눈에 띠일 것이다. 이상하다는 것은 일반적인 인간 중심의 구원관으로 볼 때 납득이 되지 않는 면이 있다는 것이다. 히브리들이 애굽 사람들로부터 핍박을 받을 것 같으면 능력 많으신 신께서 그들 히브리인들 만큼은 몰래 밤 중에 빼낼 수도 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아예 자신들이 나간다고 바로왕에게 광고하라는 것이다. 두렵고 떨리는 이야기이다. 무소부재로 권력을 행사하고 있는 바로왕 앞에 가서, "우리 히브리인들 이제 나갑니다. 안녕히 계세요"라고 인사하는 것은 상대방의 권위와 자존심을 건드리는 것이 되어 진노를 불러 일으키는 원인이 되는 것이다.

또 나가면 곱게 나가지 왜 애굽왕에게 허락을 얻어내어서 나가겠다고 시도해야 하는 이유가 어디있는가? 그렇지 않아도 히브리인들을 학대하지 못해 안절부절하고 있는 악독한 왕에게 허락을 얻어 내겠다는 것이 과연 가당한 일인가? 도저히 있을 수 없는 불가능한 일이다.

그런데 왜 하나님께서는 일을 복잡하게 만들어서 히브리인들을 탈출 시키려고 하시는 이유는 히브리인들의 의식구조를 모두 알기 때문에 내린 조처이다. 고통을 당하는 사람들은, 자신의 사명은 잊어버리고 단순히 지금 주어진 고통만 해소된다면 악마에게도 복종할 만반의 준비를 하면서 살게 마련이다.

고통 당하는 인생을 살아간다는 것은 창피스럽고 부화가 치미는 일이다. 누구라도 항의하고 싶을 것이다. 만약 이런 마음가짐을 갖고 있는 사람을 건져내봤자, 그 구원자에게 감사할 리가 없다. 왜냐하면 자신에게 고통이라는 피해를 준 신이 원래 상태로 자신을 그 고통에서 끄집어 내어 주는 것은 지극한 마땅한 일을 했을 뿐이지 거기서 여분의 감사가 나올 여지가 없다.

고통을 준 당사자가 책임져야 될 문제에 대해서 피해자인 자기들이 새삼스럽게 감사할 이유가 없다고 보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렇게 보지 않으신다. 히브리인이나 애굽이나 모두 한 통속으로 보고 있다. 둘 다 하나님으로부터 심판 받을 짓을 하면서 사는 인간들로 보고 있다.

단 히브리인들은, 왜 우리가 심판 받아야 될 자인지를 알게 하실 자들이고, 애굽왕과 애굽인들에게는, 이 사실이 감추어지게 되는 사람들이다. 히브리인들은 애굽의 권력을 숭배하고 있다. 부러워하고 있다.

인간들이 범죄하고 난 뒤, 인간들은 선과 의로움 보다는 영웅을 원하고 있다. 선이 되었던 악이 되었던 영웅만 된다면 모든 것을 용납해주려고 한다. 영웅이란 남이 갖지 못한 것을 가진 자이다.

그 당시 히브리인들은 자신들에게 너무나 힘이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이는 동시에 힘을 가진 세력을 동경하고 부러워한다는 이야기도 된다. 그래서 어떻게든 세력을 가진 자에게 잘 보여서 그 분이 가진 힘 덕분에 자신이 덜 고통스러운 가운데 생존할 수 있기를 노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런 동경의 대상인 바로왕에게 나아가서, "이제부터 당신과는 결별이요. 우리는 이제 다른 신을 섬기기로 했소. 더 이상 당신을 섬기는 일을 하지 않을 것이요."라고 말한다면 이는 전쟁을 하자는 선전 포고에 해당될 일이다.

그렇지 않아도 바로왕의 성질을 건드릴까봐 노심초사 매사에 조심스럽게 움츠리고 사는데 거기에다 그런 요청을 하고 허락을 얻기를 원하는 것은 불 난데 기름을 붓는 것과 같을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에도 애굽왕이 '허락치 않는다'고 분명히 못박고 있다. 허락지 않을 줄 뻔히 아심에도 불구하고 히브인들을 그 앞에 보내고 싶어 하는 이유는 여호와 하나님에게 대항하는 원초적 세력이 그동안 애굽 나라를 장악하고 있음을 알려주시기 위해서 이다.

그리고 그 악한 세력을 확실하게 들추어 내어서 단호하게 심판 하시겠다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다. 하나님께서 고통 받는 히브리인들을 통해서 하나님께 대드는 원초적 힘에 대해 시비를 걸고 나서시는 것이다. 그리고 언약에 의해 탄생된 히브리인들은 이 영적 전쟁에 참여하는 하나님의 군대로서 뽑힌 것이다.

본문 19-20절에 보면, 여호와 하나님께서 직접 애굽을 치시겠다고 작정하고 나서신다. 이처럼 하나님의 구원 작업은 하나님의 심판 작업과 병행해서 진행된다. 따라서 심판 받을 자를 가지고 억지로 구원 시키려고 시도해서는 아니 되는 것이다.

하나님은 택한 자의 고통을 통해서 인간들이 터잡고 있는 그 밑바닥의 세계를 들추어주고 있다. 인간은 그 피조성으로 볼 때 마땅히 창조주의 말씀만 듣고 살아야 한다. 하지만 선악과 과실을 따먹을 때부터 이미 인간들은 따로 노는 존재로 달라져 있다.

이 인간들이 따로 놀게 되면 순전히 영웅을 우상시하는 경향을 나타내게 되어 있다. 본문에서 히브리인들에게 특별한 사명이 부여되고 있다. 그것은 바로 여호와 하나님을 섬기는 일이다. 이러한 사명은 히브리인들에게 낯선 것이다. 히브리인들도 역시 영웅을 고대하고 숭배하고 싶어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하나님을 대신하겠다는 심보일 뿐이다. 하나님의 구원작업은 바로 이러한 숨겨진 내막들을 속속들이 노출시키는 과정이다. 하나님은 이 애굽같은 세상에서 더욱 더 고생시켜, 세상에 대해서, 그리고 불신자에 대해서 진저리칠 정도로 싫어지도록 하신다. 그 대신 우리의 생명책을 더욱 더 사랑하게 하시고, 땅의 것보다 위에 것을 사모하게 하시고, 보이지 않는 소망을 두고 살게 하신다.

성도는 영적 군사이다. 이 군대는 자기 힘으로 된 게 아님을 안다. 로마서 9:16-18에 하나님의 특별한 뜻이 있어 강퍅케 하는 편에 소속되지 않고 하나님의 긍휼을 입는 편에 속했음을 아는 자들이다. 이 긍휼의 힘으로 살아가는 자들이 성도이다.

4:1-9

모세는 애굽에 있는 자기 백성들을 겁내고 있다. 그들은 그들 나름대로 판단력을 지니고 있다. 그들의 판단력에 의해서 모세가 과연 참 하나님이 보내신 자인지 아닌지가 판가름 되는 것에 대해서 모세가 걱정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하나님께서는 백성들의 의견을 완전히 거부한다는 식의 기적을 모세에게 내리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구원이 되는 쪽으로 일이 진행됨을 보이는 기적을 내려주신다. 끝으로 애굽 나라의 반대도 고려해야 했다.

따라서 그 애굽의 세력에 대한 조치를 기적으로 모세에게 보여주게 된다. 이렇게 해서 세 가지이다. 구원을 줄 수 있는 근거란 구원 받는 자를 완전히 배제한 채 이루어진다.

구원 받는 자의 견해는 거기에 포함되지 않는다. 그 이유가 첫 번째 기적에서 드러난다. 본문에 나오는 기적은 각기 한 가지 특징을 보여준다. 하나는 뱀이요, 다른 하나는 문둥병이요 다른 하나는 피다.

뱀이란 현재 히브리인들이 자력으로 구원 받지도 못하고 또한 그들의 견해가 전혀 구원에 반영되지 못하는 이유에 대해서 설명하는 것이다. 뱀의 지배를 받는 자들의 입장에서 무슨 적절한 제안을 하나님에게 제시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 이유를 첫 번째 기적으로 보여주신다. 모세는 백성들에게 보내지는 하나님의 종이다. 따라서 모세는 곧 현지에서 구원되어야 될 히브리인들을 대표한 샘플이 된다. 백성들은 현재 뱀, 곧 악마와 함께 살고 있다. 모세가 늘 지팡이를 쥐고 살 듯이 말이다.

하나님은 이 실체를 보여주기 위해 모세보고 들고 있는 지팡이를 던지라고 했다. 땅에 던졌더니 뱀이 되었다. 모세가 가야 할 땅, 그리고 구원되어야 될 백성이 사는 땅은 뱀이 지배하는 세계이다.

따라서 그 땅에 사는 어느 인간도 뱀의 위세로부터 탈출 할 수 없다. 누가 뱀보다 더 셀 수 있을까? 그런 자는 하나님으로부터 보내심을 입은 자에게만 해당될 사항이다. 모세는 이 현실성에 경악한다.

황급히 뒤로 물러난다. 하나님은 모세보고 뱀의 꼬리를 잡으라고 한다. 뱀의 꼬리를 잡으니 뱀의 세력은 손아귀에 잡힌 지팡이처럼 모세에 의해 장악될 수 있었다. 모세는 백성 구출에 앞서 뱀의 앞잡이들과 싸워야 한다. 그리고 완벽하게 그들을 장악해야 한다.

물론 모세가 하는 것이 아니라 모세와 동행하시는 하나님이 하실 것이다. 이것이 모세가 자기 백성으로 보내지는 위상이다. 구원될 백성들이 보지 못하는 것까지 볼 수 있어야 한다. 이렇게 뱀만 장악한다면 구원은 끝난 것이나 다를 바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기적이 이 첫 번째 기적으로 종결되지 않고 왜 두 번째 이적이 필요한가? 고린도후서 11장에서 보았듯이 뱀에 지배를 받는 인간은 '마음의 부패'라는 모습으로 살고 있다. 단순히 아무런 변화 없이 그저 뱀에게만 묶여 있는 것이 아니다. 뱀에 대한 장악은 필연적으로 자기 백성의 마음의 변화까지 이어져야 한다.

두 번째 기적은, 구원되어야 될 자기 백성의 본질과 그 변화를 보여주는 기적이다. 하나님은 모세보고 손을 품에 넣어 보라고 했다. 멀쩡한 손이 모세 품 속에서 갑자기 하얗게 문둥병의 손으로 변화되고 말았다.

현 하나님의 백성은 썩어있다. 애굽과 같이 저주의 마음으로 살고 있다. 하지만 모세가 뱀의 세력을 장악함이란 곧 그들이 정상적인 백성으로 달라질 대상이 된다는 것이다. 물론 모세와 더불어 함께 해야만 가능하다. 저주의 대상이 축복의 대상이 되는 것이다.

세 번째 기적은 애굽 나라에 대한 기적이다. 어차피 그들은 구원의 대상이 아니라 저주의 대상이다. 따라서 그들이 거주하고 있는 땅의 속성을 하나님께서 알릴 필요가 있다. 그리고 왜 하나님 백성이 그 땅을 떠나야만 하는지 그 이유를 알릴 필요도 있다.

그것은 여호와에 대한 반발의 댓가 이다. 모세가 강물을 퍼서 그 땅에 뿌리게 되면 그 강물은 곧 피가 된다. 애굽 나라의 젖줄이 되는 강물은 하나님으로부터 저주 받는 죽음의 강으로 변하게 될 것이다. 이로서 애굽 나라는 자신의 본색을 유감없이 드러내게 될 것이다.

성도가 구원 받는 그 환경은 그냥 그대로의 모습으로 진행되는 것이 아니라 그 와중에서 지독하게 악한 모습으로 자기 정체를 드러내게 될 것이다. 따라서 성도는 자신이 그토록 애지중지 하던 이 세상에서 내쫓아 버리시는 하나님의 조치가 결코 무모하고 냉정한 일이 아니라 사랑의 극치인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 구원이란 바로 이런 여러 가지 요소를 포함하면서 진행된다.

4:10-17

모세는 오해하기를 하나님이 자기의 말하는 솜씨를 요구하는 것처럼 여겼다. 그러나 하나님은 원하시는 것은 모세의 말씀 솜씨가 아니라 그저 지팡이다. 하나님께서 모세가 아니라 모세의 지팡이를 지목하는 것은, 모세가 하나님의 일을 하면서 "결코 제 능력으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를 지속해서 고백케 하기 위해서이다.

모세와 더불어 아론이 함께 등장하는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아론이 모세 대신 말을 하는 것도, 모세로 하여금 "이번 일은 결코 내가 주체가 되어서 하는 일이 아닙니다"를 대외적으로 알리기 위함이다. 하나님은 모세의 그 어떠한 불평이나 불만이나 핑계도 다 들어주신다. 왜냐하면 어차피 모세의 힘으로 하나님의 일이 실시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모세는 하나님에게 있어 그저 지팡이에 불과하다. 우리들도 마찬가지이다. 지금 우리에게는 예수님의 일생이 덮쳐져 있다. 우리의 구원은 우리의 행함이 아니다.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선행을 생색내려고 하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뭘 해도 그것이 하나님의 일은 아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하나님의 일인,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임"을 분명히 하는 것이다.

4:19-23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애굽으로 내려가라고 하신다. 이는 하나님께서 장차 예수님을 이 세상에 보내시는 차원으로 생각하면 된다. 악한 세상 애굽으로 모세를 보내는 것과 애굽은 무슨 세계인가? 애굽은 바로 '있음'의 세계이다.

'있음'에서 '있음'을 키우는 세계이다. 그 애굽에 모세를 보내시는 것은 하나님의 일을 하시기 위함이다. '있음'의 세계를 '없음'의 세계로 확실히 하기 위해서 간다. 애굽 나라는 모두들 '있음'에 대해서 자부심을 갖고 산다.

어떻게 해서 하나님은 모세를 통해 애굽을 '없음'의 세계로 전환시키는가 하면은21절에 보면, 하나님께서 친히 키우시는 강퍅이 넘치는 곳이 바로 애굽이다. 강퍅이란 항상 '있음'에 대한 집착에서 비롯된다. 이 세상의 모든 과학이나 학문을 하나님께서 계속해서 키워나가신다. 강퍅을 격상시키시는 것이다. 강퍅 안하고 싶어도 소용없다. 하나님께서 친히 키우신다.

바로왕이 열번씩이나 매서운 재앙의 맛을 본 것을 알 수 있다. 왜 열번씩이나 당하는가 하면 배후에 하나님께서 친히 바로왕의 강퍅의 강도를 키워오셨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키우지 않으시는 강퍅은 없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시는 이유가 무엇일까?

23절에 보면 하나님께서는 바로 왕이 강퍅을 키우시되 그 아들, 그 장자를 죽이는 지점까지 끌어올리려 하신다. 자기 장자가 죽어도 바로왕의 입장에서 할 말이 없는 지경까지 끌어올리겠다는 것이다. 모세가 지팡이를 가지고 바로왕 앞에 던지니 뱀이 되어버렸다. 보통 때 같으면 바로왕은 기겁을 하고 곧바로 모세의 요구에 귀를 기울일 것이다.

바로왕 밑에 있는 술객이 모세와 비슷하게 지팡이로 뱀이 되게 하자 그만 마음이 바뀌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업 그레이드 되는 강퍅이다. 이런 식으로 지속되어 나중에 자기 아들을 죽이는데까지 판이 커지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이런 식으로 유도하시는 것은 진정한 하나님의 아들의 '있음'을 깨닫게 하기 위함이다. 하나님의 아들 만들기는, '있음'에서 '있음'으로 생겨나는 것이 아니다. 모두다 당연히 죽어있어야 될 자들 속에서 '있음'의 기적이 피어난다.

다른 쪽은 강퍅을 키워오시지만 하나님의 아들 될 자들에게 '긍휼'과 '자비'가 떨어지는 것이다. 어떤 이들에게 긍휼의 대상이 되고 어떤 이들은 그 '있음'을 더욱 더 '있음'으로 키워지는 강퍅의 상대자가 된다. 이렇게 해서 신자로 하여금 진정 긍휼의 위대성을 깨닫게 하는데 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아들의 나라로서 시작하는 순간은 제일 마지막 재앙인 열 번째 재앙이 실시되는 그 유월절의 밤이었다. 모두들 당연히 죽어야 하는데도 불구하고 살아남은 장자가 있는 경우는, 애굽 가정이든, 히브리 가정이든 가리지 않고 누구든지 어린양의 피로 문설주에 피 바른 가정은 모두 하나님의 무서운 심판으로부터 면제 받았다.

히브리인이라고, 혹은 자기 선조가 아브라함이요, 이삭이요, 야곱이라고 으시대면서 자랑해도 그것조차 하나님께서 '있음'의 일부로 간주해 버린다. 진정한 '있음'은 어린 양이 피 뿐이다. 그래야 하늘에서 보시기에 구원 받을 수 있는 '의' 있음이 되는 것이다.

로마서 9:15-18에 보면, 어느 누구의 모든 '있음'은 항상 강퍅의 재료가 될 뿐이다. '있음'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스스로 극복하고 긍휼을 받아내는 위인은 이 세상에 아무도 없다. 사람들은 자신 존재의 '있음'을 근거로 해서 달음박질도 할 것이요, 부르짖으면서 애타게 요구할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긍휼에게는 전혀 반영되지 않고 도리어 그런 것들이 종교적 '강퍅'에 업 그레이드 되는데 기여할 것이다. 누구에게도 다 마찬가지이다. 어디까지 높아지는가 하면 세상 죄를 지고 가시는 어린 양의 피가 크게 보일 때까지 말이다.

가롯 유다처럼 자신도 예수님을 거추장스럽게 간주해서 차라리 팔아버리고 살해해 버리고 싶은 강퍅으로 가득 찰 정도까지 말이다. 우리는 우리

목록으로

이근호 목사 · 21,142건 중 516 페이지

번호 구분 제목 분류 날짜
8,267 자유게시판 대전강의090924a 사도행전 최고관리자 09-10-16
8,266 자유게시판 대전강의090827b 사도행전 최고관리자 09-10-16
8,265 자유게시판 대전강의090827a 사도행전 최고관리자 09-10-16
8,264 자유게시판 출애굽기 7장 - 8장 주석 출애굽기 최고관리자 09-10-15
8,263 자유게시판 후원금 문의 - 최고관리자 09-10-15
8,262 자유게시판 20091014/우리교회수요설교녹취 예레미야 최고관리자 09-10-14
8,261 우리교회 [일반] 실시간동영상 [일반] 최고관리자 09-10-14
8,260 우리교회 렘 9:10-11 (황폐한 예루살렘) 예레미야 최고관리자 09-10-14
8,259 자유게시판 20091009-(2) 서울강의녹취 : 빌립보서 제 6강 빌립보서 최고관리자 09-10-14
8,258 자유게시판 20091009-(1) 서울강의녹취 : 빌립보서 제 5강 빌립보서 최고관리자 09-10-14
8,257 자유게시판 출애굽기 5장 - 6장 주석 출애굽기 최고관리자 09-10-14
8,256 자유게시판 광주 강의(09. 9. 25) 1강 디모데후서 최고관리자 09-10-13
8,255 우리교회 [일반] 신앙생활이 어려운가? [일반] 최고관리자 09-10-13
8,254 묻고답하기 신앙생활이 어려운가? - 최고관리자 09-10-13
8,253 자유게시판 어제 밤 늦게 국정감사 재방송을 보는데... 이사야 최고관리자 09-10-12
열람 ➜ 자유게시판 출애굽기 2장-4장 주석 출애굽기 최고관리자 09-10-12
8,251 자유게시판 20090929b 울산강의-출애굽기4장1절 출애굽기 최고관리자 09-10-12
8,250 자유게시판 20090929a 울산강의-출애굽기4장1절 출애굽기 최고관리자 09-10-12
8,249 우리교회 [일반] 복음을 모르는 자들 [일반] 최고관리자 09-10-12
8,248 묻고답하기 복음을 모르는 자들 [신학] 최고관리자 09-10-12
8,247 묻고답하기 부활 : 자아상실의 증폭 마가복음 최고관리자 09-10-11
8,246 우리교회 [주보] 나를 잊게 하는 부활 (사랑과의 사귐 = 늘 용서 뿐임의 증식) 마가복음 최고관리자 09-10-11
8,245 우리교회 삼상 31: 1- 6 (사울의 죽음) 사무엘상 최고관리자 09-10-11
8,244 설교 마가복음 15장42-47절 제목 : 당돌한 요셉 마가복음 최고관리자 09-10-11
8,243 우리교회 막 15:42-47 (당돌한 요셉) 마가복음 최고관리자 09-10-11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