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0929b 울산강의-출애굽기4장1절
20090929b 울산강의-출애굽기4장1절
이름 : 한윤범(IP:119.192.174.148)
20090929b 울산강의-출애굽기4장1절
(강의:이근호 목사)
4장 20절에 보면, “모세가 그 아내와 아들들을 나귀에 태우고 애굽으로 돌아가는데” 그 다음에 뭐라고 돼있지요? 그냥 지팡이가 아니고 ‘하나님의 지팡이’라고 돼있습니다. 하나님의 지팡이를 잡고 애굽으로 내려가거든요. 가서 뭐한단 말이냐? 여러분이 모세입니다. 가서 뭐 할 겁니까? “여러분, 저 하나님이 보내서 왔습니다.” “그래서 어쩌라고?” “나갑시다.” 그런 이야기를 할 수가 없어요. 이게 미쳤나 합니다. 왜냐하면 못 나갈 게 뻔하니까.
모세가 누굴 만나야 하느냐 하면, 바로와 만나야 돼요. 개인한테 나가자, 나가자 이래서 될 문제가 아닙니다. 이게 뭐냐? 예수님께서 마귀하고 이야기가 돼야지 개인적으로 어이, 가자. 이런다고 될 문제가 아닙니다. 하나님 나라라는 것은 오셔서 마귀를 묶고 마귀 속에 있는 우리를 데려가는 방식으로 그렇게 구원하시지, 우리에게 감정적으로 호소하고 ‘피 봐라. 아프잖아.’ 이런 식으로 호소해서 가는 게 아니라 진짜 미혹의 영, 악령을 떠나보내는 성령의 능력이 없이는 어느 누구도 하늘나라 볼 자 없어요. 성령의 역사가 아니면 우리는 육에서 못 벗어납니다.
그래서 가는데 그 다음에 22절에 보면, “너는 바로에게 이르기를” 다시 이야기해봅시다. 모세가 누굴 만나는 게 아니다? 히브리인들을 만나는 게 아니고 바로를 만나요. 히브리인들은 영문도 몰라요. 모세가 온 줄도 모른다고요. 나중에 알겠지만. 모세가 바로 왕을 만남으로 말미암아 바로 왕에게 무슨 이야기를 하느냐 하면, 여호와 하나님이 보냈다고 해요.
요즘 같으면 어떻습니까? 지금 내 백성들이 하도 어려워서 내가 백성들 말 듣고 왔다. 그게 아니고 내가 여호와 하나님의 명을 받고 왔다 할 때 바로가 뭐라고 하느냐 하면, 여호와가 누구지? 요새 개나 소나 대단한 신들이 많아서 헷갈린다. 여호와 누구지? 하잖아요. 모세가 여호와가 누군데 내 백성 보내느냐 이 말입니다. 말하는 모세도 황당하고, 듣는 바로도 황당하고, 애굽에 빠진 이 사람도 황당하고, 전부다 황당한 겁니다.
더욱더 황당한 게 하나님의 아들이라 해요. 나오죠. 22절. “너는 바로에게 이르기를 여호와의 말씀에 이스라엘은 내 아들 내 장자라” 이것은 제가 아까 했죠.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언약을 이룰 때 아들 부분이 어느 쪽일까요? 아들 부분은 아브라함과 이삭의 관계에서 하나님의 아들은 이스마엘이 아니고 이삭이라는 그 대목이 처음 나오죠. 그때 아들 나올 때 처음에 아브라함과 이삭 나오면서 아들 이야기하면서 나오는 언약이 ‘할례언약’입니다.
그러면 아들은 할례언약을 통해서만 아들이 나오고 할례언약이 없으면 아들이 못 나오는 겁니다. 할례가 뭐냐 하면, ‘내 육은 포기했습니다’는 뜻이거든요. 골로새서 2장에 보면, 할례를 세례라 하고 십자가라 했습니다. 하나님의 십자가 없이는 아들이 나올 수 없는 겁니다. 나중에 바로 뒤에 보면, 하나님께서 모세를 죽이죠. 뭘 알려주기 위해서 죽이느냐 하면, 할례언약과 아들의 관계의 연관성을 알려주기 위해서 모세를 죽입니다. 그걸 눈치 cos 모세의 부인, 십보라가 모세를 어떻게 하는 게 아니고 우리 아들, 할례를 안 했구나. 아들 할례를 g행해버리니까 모세가 산다. 모세가 산다는 건 이스라엘을 아들 만들기 위한 사명이 순조롭게 드디어 다시 연결되었다 그 뜻입니다. 그러니까 언놈이 내 아들 만드는데 누가 방해해. 이런 뜻이에요.
어떤 사람 묻기를 목사님, 모세한테 일을 시키면서 모세를 숙소에서 죽이려고 합니까? 하나님의 아들 만들기는 모세가 아니라 우 모세라도 하나님의 아들 만들기는 모든 어떤 방해도 주께서는 심판으로 죽여 버리죠.
여기서 아브라함에 있어서 이스마엘이 태어났는데 이스마엘은 없어지고 그 자리에 모세가 등장했습니다. 이스마엘은 아들이 아니다. 나면서 팔일 만에 할례한 사람이 이삭이죠. 이삭이 태어나면서 할례를 통해서 진짜 아들이 얻어진다는 것을 먼저 아브라함 언약을 통해서 보여줬습니다.
그 아브라함과 이삭의 언약이 그대로 모세에게 먼저 주어지고, 모세에게 주어진 그것이 모세를 따라야 될 히브리인들에게 그 언약이 주어져서 집단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개념이 형성됩니다. 단 뭐냐? 할례를 행해야 돼요.
출애굽기 12장 봅시다. 12장 48절 누가 읽어보세요. “너희와 함께 거하는 타국인이 여호와의 유월절을 지키고자 하거든 그 모든 남자는 할례를 받은 후에야 가까이하여 지킬지니 곧 그는 본토인과 같이 될 것이나 할례 받지 못한 자는 먹지 못할 것이니라”
유월절 지킬 때는 앞으로 유월절 행사가 반복되는데 반드시 유대인은 물론 할례를 받았고, 이방인들이 그냥 유월절 지키면 안 되고 할례를 받은 후에야 유월절 지키게 되는데 만약에 할례를 받지 못한 자는 먹지 못할 것이니라. 유월절 참석을 못한다 이 말이죠.
그러니까 예수님 당시의 유대인들이 이방인들이 구원받으려면 두 가지를 해야 돼요. 하나는 반드시 할례를 행해야 되고, 또 한 가지는 예레미야나 에스겔에 보면, 안식일은 영원하라 했거든요. 그래서 안식일을 지키고자 했어요. 안식일 지키고 할례를 행하면 이방인이라도 저 밑자리에 하나님께서 용서해 준다고 그렇게 했습니다.
그런데 로마서 2장에 보면, 사도 바울이 합니다. 내가 할례 받은 사람 중에 있지만 마음에 할례를 행해야지 그저 외형적인 할례는 할례도 아니다. 그러면 진짜 할례는 뭐냐? 마음의 할례는 어떻게 하느냐? 골로새서 2장에 보니까 육의 껍데기, 몸을 벗는 것을 할례라 하는 거예요. 세상에 그런 과장된 해석이
보세요. 분명히 남성의 생식기 끝을 까는 게 할례로 알고 있는데 골로새서 2장에서는 우리 몸의 피부조직을 벗겨버리는 거예요. 사람 죽습니다. 손톱 조금만 까져도 아픈데 머리부터 모든 피부를 십자로 그어서 바나나 껍질 벗기듯이 벗겨보세요. 그게 됩니까? 안 되지요. 죽어라 이 말입니다.
결국 아들 만들기는 육체적인 할례, 율법 그것 말고 십자가로 승리했느니라. 십자가 있으면 구원되는데 지장 없다 이 말입니다. 이미 구원받은 사람이, 이미 합격한 사람이 여유가 있어야지. 합격해놓고 벌벌 떨면서 십일조, 벌벌 떨면서 안식일. 이게 무슨 합격한 사람의 여유입니까?
남자들은 알아요. 군 제대 해놓고 꿈속에 또 군대 가라 해서 벌벌 떨어요. 깨보니까 꿈이었구나. 제대 못해서 막 애쓰다가 깨보면 맞아. 제대했지. 한번 제대하고 난 뒤에 자기 부대를 찾아보세요. 느긋합니다. 중대장 나와. 선임하사 나와. 고참 나와. 고참해도 지 쫄병이야. 그런 여유를 가지고 이 세상 살자는 거예요. 죽어도 사는. 그래서 이미 죽은 자 같으나 이미 사는데 합격한 자의 여유. 아무리 죽여도 죽지 않는 여유. 그것이 바로 십자가 때문에만 피 때문에 생긴 거란 말이죠. 할례언약, 피 때문에 생긴 거다 이 말이죠.
그 다음에 봅시다. 출애굽기 4장. 아들 만들기 작업에 할례언약 행하고 피 흘릴 때 그것이 나중에 유월절까지 이어집니다. “내가 네게 이르기를 내 아들을 놓아서 나를 섬기게 하라 하여도 네가 놓기를 거절하니 내가 네 아들 네 장자를 죽이리라”(23절)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언약이 그때만을 위하여 만들어진 것이 아니고 앞으로 모든 역사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이 언약성취를 위해서 이런 반대되는 세력도 만반의 준비를 하고 대비상태에 있는 겁니다. 오고 오는 모든 세월에.
그래서 어떤 자들은 강퍅해야만 하고, 바로 같은 사람은 방해해야만 하는 거예요. 그래야 이쪽이 죽어줘야 이쪽의 삶을, 생명을 이야기할 수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스마엘이 태어나줘야 이삭이 이스마엘과 완전히 다르다는 것을 알죠. 한쪽은 언약에 의해서, 한쪽은 육체에 의해서. 그 가운데 할례언약.
그래서 이 세상의 모든 것은 짝이 있습니다. 아까 이야기했잖아요. 빛은 어둠이 있어야 되고, 어둠은 빛이 있어야 되고, 천국은 지옥이 있어야 되고, 지옥은 천국이 있어야 돼요. 양은 혼자 있으면 양이 아닙니다. 반드시 염소가 있어줘야 양이 양 값을 하는 겁니다. 양이, 괜찮다. 양이 괜찮은 것은 염소 때문에 그런 거예요. 성경 공부하는데 위에서 해줘야 얼마나
여기서 어려운 것은 뭐냐 하면, 하나님의 아들 만들기가 이론상, 계획은 나와 있어요. 할례언약을 행해서 아들 만든다. 아들 만들 때 그냥 만들지 않고 반드시 아들 만들기에 반대되는 세력이 있어줘야 아들이 아들을 안다. 이론은 맞아요. 이게 실제로 적용이 된다면 뭘 포기해야 되느냐 하면, 이게 하나님의 언약이잖아요.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언약이잖아요. 이삭 언약 아닙니까.
그러면 현재 비 언약에 속한 사람이 누구입니까? 바로 우리잖아요. 우리가 언약이 오는 순간부터 죽었다고 각오해야 됩니다. 언약 앞에 어쩔 수 없어. 언약과 비 언약의 만남은 죽음이에요. 그게 어디 나오느냐 하면, 숙소. 24절. “여호와께서 길의 숙소에서 모세를 만나사 그를 죽이려 하시는지라” 실컷 부려먹겠다고 아직 개시도 안했는데 개시 차에 죽여 버리면. 마치 박카스에서 주최하는 전국대학생 국토 순례하는데 부산 해운대로 발 Ep는데 해운대에서 죽여 버리면 국토 대순례 안 되잖아요. 그런데 모세 발 떼서 부산 해운대 와서 죽이려 하니까 도대체 하나님 계획에 차질이 있을 것 아니냐 말이죠.
이게 뭐냐 하면 바로, 이건 칼 바르트 할 때 해야 하는데 할 수 없이 미리 해야 되겠다. 비 언약이 나름대로 뭘 갖고 있느냐 하면, 육의 역사. 육의 역사의 중심부는 우리 가정, 내 가족. 아버지 같으면 가장 중심, 내 중심의 역사가 이어집니다. 그걸 흔히 족보라 합니다.
여러분들이 상당히 어려운데요. 다윗의 집안, 다윗의 족속 또는 다윗의 가문, 다윗의 집안에 사람이 몇 명이죠? 여러 사람이 나타나죠. 거쳐 가는 여러 사람이 있는데 거쳐 갈 때마다 다윗의 집안을 자기 집안으로 연결되죠. 거쳐 갔기 때문에. 난 다윗과 외사촌이다. 난 다윗과 아는 사람이다 하잖아요.
그런데 막상 성경에 보면 다윗의 집안은 예수님 집안이에요. 이 말이 뭔 뜻이냐 하면, 예수님 강의할 때 뒤에서 마리아 오니까 누가 내 모친이며 누가 내 동생들이며 누가 내 형제냐? 하나님 말씀을 듣는 너희들이 내 모친이요, 내 형제요, 내 누이라 했거든요. 그러면 천주교에서 마리아만 모친이 아니고 누가 모친이 돼야 됩니까? 천주교에선 마리아만 예수님 모친이라 하는데 잘못된 거죠. 성경 본문에 누가 모친이에요? 그 자리 있던 아줌마들. 아줌마들 다 모친입니다.
다윗 집안의 특징이 뭐냐? 어떤 집안을 구성할 때 우리가 아는 역사가 완전히 파괴됩니다. 할아버지, 아버지, 아들 이런 관계가 깨져버려요. 언약이 갖고 있던 역사가 새롭게 여기에 주입됩니다. 그러면 차이점이 뭐냐? 비 언약적인 역사에선 주인공이 시조, 경주 이씨 무슨 파. 시조가 조선시대 때 정승을 하고. 정승을 한 시조 중심의 역사가 있어서 그 중심으로 너는 사촌관계 하는데 이거는 할례언약을 통해서 피바다 돼요. 심판 피 속에 사라집니다.
피 안에서 나온, 피 안에서 나왔다는 말은, 무효 되는 것이 아니고 피 안에서 나왔으니까 이 언약이 살아있는 한 인간의 육은 전부다 피바다 돼야 됩니다. 언약이 살아있는 한 인간 육의 역사는 용납이 안 됩니다. 이 피로 말미암아 새로운 역사가 등장하게 되면 이 안에서 엘리야하고 모세하고 같은 시대에 악수하고 같이 밥 먹고 하거든요. 인간의 시간이라는 걸 초월한 어떤 것도.
그래서 칼 바르트는 이걸 그리스도 역사라 합니다. 성경 여러 대목을 이야기하면서 그리스도 역사는 인간의 육의 역사와 달리 시간을 초월한 거다. 그걸 묵시라 하죠. 이건 보통 역사라 하죠. 그런데 이걸 초역사 이야기했는데 여기 용어상 오해될 소지가 많아요. 바르트가 오해될 수밖에 없는 용어들 몇 개 사용한 게 있어요.
어쨌든 언약에 의하면 피에서 나오는 역사가 되죠. ‘그러면 피에서 나와도 역사는 역사잖아요.’라고 할 것 아닙니까. 피에서 나온 역사는 인간 역사가 될 수 없는 것이, 인간 역사는 그냥 용도에 불과해요. 용도에 불과해서 개인적인 가치가 밑에서 전수 될 수 있는 것을 일체 허용을 안 해요. 그 대표적인 것이 ‘에게서’ 라합에게서, 룻에게서, 다말에게서 그 다음에 마리아에게서. 마태복음 1장에 나오죠. 이게 다 이방여인이죠.
왜 이방여인을 넣습니까? 이게 바로 언약적 역사에서는 이방여인을 집어넣어서 인간 유대의 역사, 다윗의 역사, 아브라함의 역사를 인간 아브라함의 역사로 전환되는 것을 주께서 차단시켜버립니다. 그러면 라합 역사가 있잖아요. 라합 역사란 말은 안 돼요. 라합이 하나님의 언약을 이룰 후손을 낳자마자 라합으로서는 자기 할 일 다 했어요. 용도폐기 됐어요. 이걸 모르고 천주교에서는 마리아를 그리스도 엄마라 해. 하나님 엄마. 마리아는 용도폐기된 사람이에요. 아까 했잖아요. 그런 식으로 하면 여러분들이 마리아에요. 아줌마들.
하나님의 언약에서는 어떤 특정 인간의 공로가 안 들어가게 돼있어요. 스데반 집사가 훌륭하다. 스데반 집사 아들도 당회장 돼야 됩니까? 아니에요. 그냥 돌아 맞아 죽는 그 용도, 단회성, 일회성으로 끝나 버려요. 한경직 목사 기념회, 주기철 목사 기념관, 손양원 목사. 웃기고 있네. 그거는 안 됩니다. 설사 그 사람들이 성도라 하면 그 사람 그걸로 자기 역할 다한 것뿐이죠. 그런 기념관 같으면 새순교회 교인들 하나하나, 사모님 기념관 전부 다 해야 돼요. 황 전도사님 기념관. 기념관 한두 개가 아닙니다.
방금 이러한 인간 역사를 죽이는 역사를 가지고 인간 이름이 아니고 주의 이름. 주의 이름을 부름으로써 구원받고 주의 이름으로 기도하는 이유가 역사가 주님이 주체가 되어서 인간을 용도로 사용했던 역사가 언약의 역사라는 겁니다. 그러니까 ‘모세야 네가 하려고 하지 말고 너의 지팡이를 봐라. 지팡이 시키는 대로 해라.’ 하나님과 동행해서 이제는 모세는, 자기가 뭘 해야 될 지를 생각할 필요가 없는 거예요.
그런데 강의를 제가 이렇게 하고 난 뒤에 ‘그럼 목사님. 앞으로 우린 어떻게 할까요?’ 그거는 본인이 알아서 하세요. 본인은 본인 나름대로 하나님이 주시는 게 있습니다. 교회에 오백만원 바치든지. 본인이 주고 싶으면 주고, 말고 싶으면 말고. 그거는 제 삼자가 어떻게 할 수가 없어요. 본인이 하고 싶다는데 하든지 마음대로 하세요. 장로임직 받고 다 하세요. 그건 어떻게 잘했다 제 삼자가 관여할 수가 없어요. 다만 그런 식으로도 하나님께서 사용하신다는 겁니다.
그런데 사용했다는 것을 잘했다고 하면 안 됩니다. 성도는 나쁘다, 잘했다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를 알아야 돼요.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 은혜였다. 그래서 피라는 것을 알고 십자가 믿고 어떻게 살까요? 하면 그것은 피가 알아서 할 문제가 남 흉내 낼 필요는 없단 말이죠. 흉내나 모방은 또 하나의 위선이니까. 각각 개인마다 달리 다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개인적인 능력을 쳐다보면 안 되고 그런 것을 모아서 어디로 몰고 가느냐? 그걸 보셔야 되죠.
25절에 봅시다. “십보라가 차돌을 취하여 그 아들의 양피를 베어 모세의 발 앞에 던지며” 발 앞에 던진다는 말은, 발이 어느 쪽이냐? 발을 하는 것이냐 아니면 사타구니를 이야기하는 것이냐? 그런 건 안 중요한 문제입니다. 하여튼 던지니까 “당신은 참으로 내게 피 남편이로다”
그러면 십보라의 남편은 누굽니까? 모세입니까, 피입니까? 피가 되죠. 이거는 십보라는 황당한 사건을 당한 거예요. 남편을 잃어버린 거예요. 사실은 육의 남편을 잃어버리고 언약적 남편을 찾은 거예요. 당신은 피 남편이다. 따라서 모세 때문에 모세 가정이 언약의 영향을 받는 영향력 아래 놓이게 겁니다. 모세 가정 자체가.
이러한 방법으로 앞으로 하나님께서 모세를 이끌 겁니다. 이제는 모세 가정뿐만 아니고 모세가 인도해야 될 히브리인 전체에 있어서 피의 영향력, 하나님의 아들 만들기 할 것이며, 거기에 반드시 뭐가 등장해야 되는가? 방해꾼. 이걸 성경에서 강퍅. 강퍅해야 되는 그런 사람이 등장하는 겁니다.
5장 봅시다. “그 후에 모세와 아론이 가서 바로에게 이르되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에 내 백성을 보내라 그들이 광야에서 내 앞에 절기를 지킬 것이니라 하셨나이다 바로가 가로되 여호와가 누구관대 내가 그 말을 듣고 이스라엘을 보내겠느냐” 이 이야기를 ‘여호와가 누구관대’ 이걸 저는 개인적으로 성도들 이사 갈 때나 ‘시작은 미약하나 나중은 창대하리라’,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그런 것 좀 하지 말고 ‘여호와가 누구관대’ 이걸 액자에 붙여 놓는 거예요.
왜 그걸 붙이느냐 하면, 목사 생활 십년, 이십년 한다고 믿음 있는 줄 압니까? 어느 순간 눈 뜨면 예수가 누구지? 없잖아. 죽었잖아. 그동안 예수 팔아먹고 장사 잘했다만 있는지 없는지 나도 모르겠어. 다만 사람들이 복 준다 하니까 좋아했지 예수 이야기 안 한지 오래됐는데 사실 나도 의심스러워. 예수가 과연 살아있을까? 예수가 누구지? 이것이 하루에도 몇 번씩 드는 거예요. 목사뿐만 아니고 모든 사람이 다 들어요.
특히 집안에 만약에 애가 죽었다. 교회에 잘 나가는데 죽었다. 대번 생각이 뭘 들겠어요? 집사님, 예수 믿고 힘을 얻어야죠. 예수가 누구시죠? 예수가 살아있다면 내 애를 죽입니까? 항상 뭔가 이 바로가 있어줘야 돼요. 그래서 ‘예수가 누구지?’라고 욕하는 그런 교인들이 있어줘야 됩니다. 새순교회의 비극은 그거죠. 다 신앙 좋다는 것. 지금 비비꼬는지 모르겠습니다만.
목사님 설교하면, ‘목사님 예수님 봤습니까?’ 그런 인간들. 두 번 쓰다가 용도폐기하고 다가든지 그 마음 다른 사람 오든지 하다가. 자꾸 뭔가 ‘진짜 예수 믿는 것 맞아?’라고 쑤셔대고 흔들어대는 요소가 있는 게 정상입니다. 이게 성도가 좁은 길로 갈 때 정상적인 거예요. 이런 게 없으면 자기는 자연스럽게 예수 잘 믿는 사람인 줄 착각하게 돼요. 너무너무 잘 믿어. 그런데 푹푹 송곳으로 쑤셔줘야 사람은 뭔가 당황스럽고 도대체 내가 교회 가도 즐겁지도 않고 왜 그런지 몰라. 스스로 자기를 되돌아볼 수 있어요.
사람이 장사하기 바쁘면 몸이 있는 줄 없는 줄 몰라요. 언제 몸이 있는 줄 아느냐 하면, 자기 몸이 아플 때 ‘몸이 있었지’ 그때 알아요. 마치 우리의 신앙도 있는지 몰라요. 그런데 ‘당신은 불신앙 맞지, 그렇지? 솔직하게 이야기해봐라. 위선하지 말고. 네가 의심하면서 믿지.’라고 누가 쑤셔줘야 ‘아, 있구나. 그게 아니거든.’ 이렇게 이야기한단 말이죠. 하나님께서 좋으신 바로 같은 분을 항상 우리 곁에 두신다는 것을 명심해주시기 바랍니다. 그게 언약을 할 때 비 언약, 반대 언약이 그림자처럼 동참하면서 하는 거예요.
그렇게 하니까 여기 5장 그냥 쉽게 넘어갑시다. 5장 5절에 보면, “또 가로되 이제 나라에 이 백성이 많거늘 너희가 그들로 역사를 쉬게 하는도다” 하고 그 다음에 10절에 보면, 간역자들에게 이야기해서 이 게으름뱅이 백성에게 짚을 얻을 곳을 가르쳐주지 말고 그러면서도 제품의 실적은 줄이지 말고 그대로 전에처럼 그렇게 제품을 생산하라고 그들에게 이야기해줬습니다.
그렇게 하니까 15절에 쭉 나오죠. 히브리인들이 뭐라고 합니까? 왜 갑자기 태도가 살벌합니까? 물으니까 그때 애굽의 감독자들이 뭐라고 합니까? 이것은 누구 때문에 그렇게 했다? 모세가 바로 만나서 우리의 형편을 힘들게 했다는 소리를 듣고 그 다음에 20절에 보니까 모세와 아론이 있는 걸 보고 백성들이 달려들지요.
뭐라고 하느냐 하면, 21절이 재미있습니다.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우리로 바로의 눈과 그 신하의 눈에 미운 물건이 되게 하고 그들의 손에 칼을 주어 우리를 죽이게 하는도다” 이게 뭔 뜻이냐 하면, 구원이 그만큼 수월해졌습니까, 구원 받기가 힘들어졌습니까? 하나님이 만드는 상황은 구원받기가 더욱더 힘들게 되었지요. 이게 하나님의 가시는 코스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삼년동안 교육받았다. 흔히 선교단체에서 그렇게 가르치는데 교육받았으면 좀더 나아져야 되지 않습니까? 그런데 삼년동안 교육 실컷 받은 결과가 뭡니까? 목자를 치니까 양들이 튀어버리잖아요. 심지어 베드로는 세 번씩이나 부인했지요. 꼴좋습니다. 교육받은 성과가 기껏 그겁니까? 그로 말미암아 구원받기가 더욱더 힘들지요.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신앙이라 하는 것은, 우리가 교회 다니는 업적이라든지 그런 것을 신앙에 포함이 안 된다는 걸 보여주기 위해서 내가 교회 다니는 것, 헌금한 것, 기도한 것, 순종한 것, 남에게 좋은 평판 받은 것, 장로투표 된 것 전부다 그것이 구원받는데 아무짝도 소용없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이 오게 합니다. 서로 남에게 좋게 지내려고 애쓰는 것, 기왕이면 큰소리 안 내고 평화롭게 하려는 모든 애씀이 전혀 구원받는데 도움이 되기는커녕 구원받는데 더욱더 힘들게 하는 하나의 요인으로 작용하는 거예요.
그래서 제가 뭐라고 하느냐 하면 신학이 아니고, 신학을 해서 구원받는데 좋은 게 아니고, 그것이 오히려 신학의 더 뒷면, 그 뒷면 그게 궁금한 거예요. 인간의 지혜는 어디까지? 그것 하다보니까 뭐가 멀어집니까? 단순한 거예요. 피로 구원받는데 다른 것에 신경 써버린 거예요. 그런데 우리는 입에선 피로 구원받는다 해놓고 피에는 관심이 없고 자기가 할 수 있는 것들이 있다 말이죠. 그래서 이것을 깨기 위해서 더욱더 혹독하게 구원받는 조건을 힘들게 하기 위해서 이 힘들게 하는 작업을 누가 하느냐? 바로 바로 같은 사람들이 강퍅케 하는 겁니다.
아까 출애굽기 4장에 하는 말씀처럼 바로는 놓아주기를 거절함으로 내가 바로의 아들을 죽이겠다. 여러분 하나 물어봅시다. 바로의 아들 죽은 것 하고 하나님 아들 되는 것 하고 무슨 관계있지요? 그것은 제가 아브라함 언약, 이삭 언약했지요. 이스마엘을 내보내야 이스마엘은 이삭과 함께 살 수 있다, 없다? 없고 결국은 이삭만 하나님 약속의 자손이지 이스마엘이란 육의 자녀가 있어줘야 약속의 자녀가 있는 것처럼 바로의 아들이 죽는 걸 봐서 내 자식은 내 것이 아니고 하나님 것이라고 바칠 수 있는 겁니다.
그런데 그 점에 대해서 설명을 해야 되는데 아까 설명을 하려하니까 너무 어려워서 미뤘는데. 제가 문제 하나 낼게요. ①아들이 한 명이다. ②여럿이다. 몇 번입니까? 한 명이죠. 왜 이스라엘 백성이 오십만 되어서 한 명이냐? 이게 언약 역사 가운데 일어난 상황입니다. 666이 뭐냐 하는 겁니다.
666은 숫자지요. 숫자는 사람한테 해당되는 게 아니고 숫자는 짐승에 해당되는 겁니다. 네가 지혜 있는 자는 깨달으라. 짐승의 수는 이것이니 곧 666이다. 여기서 지혜라 하는 것은 666을 풀 수 있는 그 지혜는 그야말로 자신이 할 수 있는 어떤 이성적인 능력을 완전히 그것과 무관하게 알아야 지혜겠죠. 무슨 뜻인지 아시겠습니까?
666을 알 수 있는 방법에 인간들의 수학 등이 동원되면 그건 기술이지 지혜가 아니죠. 그럼 666이 짐승의 숫자임을 알려면 본인부터가 어떤 방법으로도 666이 짐승인 것을 몰랐습니다가 돼야 그게 지혜가 된다 이 말입니다.
그 당시 독재자 어떤 글자가 있다면 숫자로 풀이하면 666됩니다. 이것은 믿는 사람, 안 믿는 사람 다 풀이하면 다 돼요. 이거는 성명학으로 다 되는 겁니다. 그게 666이 아니고, 지혜라는 것은 본인이 예수 그리스도에 예속된 사람이라는 것, 그러니까 예수님이 볼 때 사람으로 보지 않고 짐승으로 볼 경우에만 이들이 666 숫자로 표기된다는 걸 아는 거예요. 이 표기는 사람이 하는 게 아니고 진짜 지혜로운 예수님이 일방적으로 정한 거죠. 어렵다 했지요.
666이라는 것은 뭐냐 하면, 육백육십육 명을 두고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고 한 명, 한 명 개체 자체가 집단, 무리입니다. 우리 보기에는 한 명, 한 명 다 다르잖아요. 그러나 예수님의 언약의 시대에는 사람을 개인으로 안 봐요. 집단으로 봅니다. 하나님의 아들들이 백 명이고 천 명이 됐든 간에 전부다 한 아들이 되는 집단이 되는 것처럼 반드시 맞은편에 있는 저쪽도 숫자가 천 명이고 만 명이 됐든 하나의 짐승이 돼버려요. 하나의 집단 무리가 되는 겁니다.
그래서 이걸 달리 이야기하면 인간이 ‘내가 누구냐?’고 하는 것을 하나님께서 ‘너 누구냐?’고 묻지 않고 ‘너 어디에 속했어?’라고 묻는 거예요. 짐승에 속했느냐 아니면 아들에 속했느냐? 아들에 속했으면 아들이고, 짐승에 속했으면 짐승에 속하는 거예요. 아들에 속했다고 ‘아들들’이 되는 게 아닙니다. ‘아들’입니다. 관심사가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는 것이 아니고 아들 되는 그리스도 몸에 관심이 있기 때문에 ‘저, 어때요?’가 아니라 ‘너, 어디 속했는데?’를 묻는 겁니다.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제가 교사 생활할 때 수학여행을 따라가 봤는데 애들이 말을 안 들어요. 자꾸 혼자서 놀려고 해요. 차는 와서 출발해야 되는데 딴데 보고 기념품 사고 하는 거예요. “야, 너 몇 반이야.” “2학년 2반.” “2학년 2반 차 타.” 걔 가정환경, 아버지 뭐 하시고 이런 것 안 물어요. 현재 용도가 지금 기념품 살 용도가 아니고 2학년 2반 버스 타고 출발해야 될 용도가 되는 거예요. 어디 예속돼있는 겁니다. 그걸 주님께서 일곱 별, 일곱 교회, 칠(7)이란 숫자에다
짐승의 인을 박은 것만 이야기하면 안 되고, 어린양의 인을 먼저 박았다고 먼저 나와 있어요. 이마에다 예수의 인을 박았다는 말은, 이쪽만 이마에 뭔가 박는 게 아니고 저쪽도 이마에 예수 인이 안 박힌 사람은 그냥 남아있는 것이 아니고 저쪽은 반드시 짐승의 인을 받게 돼있어요. 둘 중에 하나에요. 양이든 염소든, 염소든 양이지 중간이 없어요. 예수에게 인박히든 안 그러면 짐승의 인박히든. 다른 말로 하면 성령의 인을 박히든 짐승의 악령이 박히든 둘 중에 하나밖에 없습니다.
사도 바울처럼 이런 관점을 갖고 있다는 자체가 이걸 지혜라 하는 거예요. 이거는 세상에 서울대학 수학과 나와도 몰라요. 본인부터가 예수 그리스도의 인이 직접 박혀있기 때문에 이거는 개인으로 보는 게 아니라 집단으로 본다는 것을 본인부터 지혜에 속해야 지혜로 보이는 겁니다. 그래서 666 자체가 복음이에요.
아들이라는 말은 아들들이 성립 안 됩니다. 그러면 아들이라 하면 뭐가 돼요? 여자니까 아들이라 하지 말고 딸로 하자. 이게 바로 사십 년 전부터 있었던 여성신학하는 거예요. 왜 하나님을 아버지라 하느냐. 이게 바로 유명한 유월절 가르치는 이단, 안식교에서 나온 안산홍. 안산홍은 왜 자꾸 아버지만 알고 어머니는 모르느냐 이것 아닙니까. 세상에 아버지, 어머니 그런 문제가 아니고
왜 이스라엘이 아들이냐 하면, 이스라엘은 집단이기 때문에 이스라엘의 성별을 문제 삼지 않고 이스라엘을 아들로 만든 중간에 계신 분이 아들이기 때문에 아들이에요. 이스라엘은 어디 속했습니까? 아들에게 속했기 때문에 아들인 거예요. 그때는 모르고 나중에 나오지만 그 아들이 피를 흘리면 이스라엘은 아들에 속했기 때문에 아들이 되는 겁니다. 신약에서 십자가 피죠. 아직 십자가 안 나왔으니까 이들은 무슨 언약? 할례언약해서 피 남편.
이렇게 되면 개인적으로 나가도 그 빈자리를 다른 사람이 채우면 그만 이에요. 광야에서 하나님께 대들다 죽잖아요. 그러면 나머지는 하나님이 채우면 되는 겁니다. 차례가 중요하지 인간이 중요하지 않습니다. 참 이런 말 교회에서 헌신예배에서 하면 교인들 아마 차비도 안 줄 겁니다. 당신들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생명나무의 자아성이 중요하다고요.
예를 들겠습니다. 보통 우스운 소리할 때 여기 안 온 사람 손들어보세요? 이게 말이 안 되지요. 안 온 사람이 손듭니까. 그런데 하늘나라는 그것만 생각해요. 안 온 사람 손 들어보세요? 안 왔어요. 그럼 출발. 이렇게 됩니다. 있는 사람만 있어요. 안 온 사람은 그 자체로 탈락된 걸로 간주한다는 거예요. 안 온 사람 손 들어보세요? 아무도 없지요? 그럼 출발이 되는 거예요. 이 말이 더 어렵다. 그냥 안 온 사람은 없는 거예요. 과거에 십년, 이십년 믿었던 그건 무효에요. 매일같이 하나님께서 아들과 함께 같이 있을 때만 그게 되는 겁니다.
그럼 목사님 어제까지 믿었고 오늘 안 믿으면 어떻게 됩니까? 어제까지 믿은 것이 예수님이 함께 하셔서 믿었다면 오늘도 예수님이 함께 있으면 믿게 합니다. 그런데 어제까지 믿은 것이 자기 힘으로 믿었다면 오늘은 끝난 거예요. 자기 힘으로 천국 못 들어갑니다. 다윗의 자손이 열면 닫을 자 없고, 닫으면 열 자 없습니다. 열쇠요? 없습니다. 열쇠는 주님이 갖고 있어요. 우리는 없어요. 닫았다 하면 문 열어 달라 해도 열리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아들이기 때문에.
아들은 아들이 책임지지 아들이 날 구원하려고 있는 게 아닙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아들 됨을 위해서 용도로 사용되고 있는 것뿐이에요. 나 같은 창녀도 아들 됐다. 그것 하려고 창녀를 구원시켜준 것이지 창녀 짓한다고 구원해주는 건 아니네요. 우리에게 어떤 조건을 달지 맙시다. 어떤 조건도 달면 안 돼요. 그렇게 되면 예수님이 마치 날 구원하기 위해서 있는 것처럼 여겨집니다. 이걸 반야월 가서 헌신 예배해야 되는데.
그래서 아들들이 아니고 아들이라 했고, 그 아들의 짜 맞추기는 아들 되기 위해서는 버릴 때는 버리고 들락날락하는 거예요. 가라면 가고 뒤돌아보지 마. 너 없어도 아들 있으니까 만들어 채우면 되고. 어쨌든 아들만큼은 계속 유지하는 겁니다.
요한계시록에 보면 일곱 교회 있지요. 일곱 교회밖에 없어요. 교회 많은데 일곱 교회밖에 없다고요. 그 교회는 들락날락 뭐 망하고 해도 역시 일곱 교회는 쥐고 있는 거예요. 이제 무슨 뜻인지 아시겠습니까? 왜냐? 우리는 숫자에 불과하니까. 왜냐? 우리 존재는 없고 우리 이마에 주님의 일곱 교회라는 인이 박혀있으니까. ‘너는 일곱 교회야’ 박혀있으면 우리는 내가 구원받는 것이 아니고 주님의 교회의 자격으로 예수님 때문에, 예수 이름으로 구원받는 거예요.
그러면 지옥 간 사람들은 이마에 짐승이 있으니까 짐승을 보니까 무리에요. 얼마나 많은지. 666이라. 하나의 집단이 전체가 짐승을 보여준다. 전체 집단이 짐승 집단이에요.
그래서 어떤 사람 말하기를 목사님 물어봅시다. 히브리인들이 고생했다면서요. 그것 때문에 여호와께 부르짖었다면서요. 그렇다면 여호와께서 그들을 쉽게 빼내주면 될 텐데 왜 자꾸 이렇게 힘들게 합니까? 그들을 구원하는 게 목적이 아니고 그들이 힘들다는 걸 통해서 이참에 아들을 만들어보겠다고. 하나님의 언약의 아들을 만들기 위해서 그들을 여러 가지 사건을 깔아놨습니다. 그냥 데려가면 아들 아닙니까? 아닙니다. 왜 아들 아닙니까? 아들은 핍박하는 쪽이 있어서 어린양의 피, 그들을 대신해서 죽었던 그들이 아들입니다.
그리고 피를 바른 그 사람은 어린양의 피 때문에 살기 때문에 그들은 자기 아들을 아들로 여기지 않고 하나님의 자식이라고 갖다 바치는 거예요. 나머지 사람은 할례를 행하기 때문에 이 육은 아니고 이 육은 하나님 겁니다. 어린양의 아들, 그분의 아들이,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양이다. 그 아들을 위하여 히브리인들이 피를 흘렸던 거예요.
그래서 그 다음부터는 유월절을 되풀이하면서 할례를 행하면서 이스라엘을 위한 하나님이 아니라 아들을 위한 이스라엘 되기 위해서 그렇게 했다는 것이 유월절이라고 나오죠. 그 다음에 약간만 더하고 마치겠습니다. 견뎌줘서 감사합니다.
그래서 21절에 보면 기도를 하죠. “여호와는 너희를 감찰하시고 판단하시기를 원하노라” 여기 너희가 누구냐 하면, 모세와 아론입니다. 히브리인들이 여호와를 거론하면서 ‘우리 하나님께서 모세와 아론의 잘못을 지적해주기를 바랍니다.’라고 히브리인들이 요청하고 있잖아요. 모세와 아론은 때려죽이고 싶지요. 자기를 구원하려 왔는데 이렇게 매몰차게 반대로
그래서 모세와 아론이 돌아와서 “주여 어찌하여 이 백성으로 학대를 당케 하셨나이까 어찌하여 나를 보내셨나이까”라고 너무 답답해서 하소연하죠. 이게 바로 교회입니다. 목사님들이 복음 전하면 칭찬해줄 줄 알죠. 아예 우리를 죽이려고 작정했구나. 오해를 해서 얼마나 많은 핍박하는지 몰라요. 하여튼 사람들은 사람 좋아하는 것 전하면 좋아하고 복음 전하는 건 다 싫어하고. 그게 바로 모세와 아론이 갔던 길입니다.
그래서 더 이상 백성들하고는 의논 상대가 안 되지요. 6장에 들어가 보면 2절에. “하나님이 모세에게 말씀하여 가라사대 나는 여호와로라 내가 아브라함과 이삭의 야곱에게 전능의 하나님으로 나타났으나 나의 이름을 여호와로는 그들에게 알리지 아니하였고 가나안 땅 곧 그들의 우거하는 땅을 주기로 그들과 언약하였더니” 이것만 하고 마치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언약을 내려줬으나 이름이 여호와로는 알리지 않았다 이 말 아닙니다. 계속해서 알리지 말지 왜 이제 와서 여호와를 알려주느냐 말이죠. 이것은 여호와란 뭔 뜻이냐 하면, 전쟁을 위한 신이에요. 여기서 하나님의 전쟁을 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여호와의 적이 도출돼야 돼요. 나와야 돼요.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서는 개인적인 가정에 있지만 아직 하나님의 적은 집단화되지 않았어요.
그런데 여호와란 신이 등장하게 되면 전쟁을 벌이려면 여호와 신에 대해서 대적하는 다른 신을 위한 국가 대 국가의 전쟁이 일어나는 겁니다. 출애굽기 12장 봅시다. 41절. “사백 삼십 년이 마치는 그 날에 여호와의 군대” 이것은 히브리인들의 아이디어가 아닙니다. 그들은 군대 되고 싶은 마음도 없어요.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여호와를 뭐로 보느냐 하면, 군대로 만든다고. 군대는 어떤 때 필요해요? 전쟁하는 거예요. 여호와는 전쟁하는 신이에요.
전쟁하려면 적이 있어야 되죠. 적은 누굽니까? 언약을 모르는 모든 게 적이 되는 거예요. 결국 이건 신약에 보면 하늘에서 전쟁이 일어났습니다. 하늘이 땅을 지배하는 보이지 않는 세상 신과 하늘 신 예수님이 대판 전쟁을 벌이는 것이 요한계시록 아닙니까. 우리는 장사하고 싶지 전쟁 통에 말려들고 싶지 않아요. 하지만 그건 니 생각이고. 어쨌든 하나님은 우리를 영적 전쟁으로 몰아넣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칼을 갈까요, 활을 갈까요? 할 필요 없어요. 전쟁은 여호와가 하기 때문에 우리는 그냥 뒤따라가면서 줍기만 하면 되는 거예요. 이게 뭐냐 하면, 알아본다. 믿음인데. 히브리서 11장에 보면, 모세가 바로의 공주의 아들 됨을 거절하고 이스라엘 백성과 고난 받기를 즐겨 하사. 이게 뭐냐 하면 여호와를 제대로 알아보는 거예요.
오늘 강의 끝내면서 한 마디만 하겠습니다. 우리는 딴 것 할 것 없고 예수님이 누구신가 알아보시기만 하면 됩니다. 그분이 피 흘려서 용서받았다. 그 다음부터 다루는 문제는 다음에는 나와. 이건 누구 소관이냐 하면, 주님께서 우리를 어떻게 다루는지 그 문제지 누구 따라하지 마세요. 각자각자 달라요. 그 사람 용도에 따라 다르기 때문에 그것까지 우리가 미리 당겨서 걱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냥 집에 가만 계세요. 주께서 또 어떻게 무슨 사건이 터져서 ‘난 예수만 믿어요. 예수 피만 믿어요.’ 그러기만 하면 되는 겁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이미 구원받은 천국에 합격된 사람의 여유를 가지고 일부러 나서서 종교적인 티를 내지 말고 하루하루 주시는 것 감사하면서 날마다 하나님의 지시를 따르면서 범사에 감사하고 항상 기뻐하면서 주님 앞에 자신을 드리기를 게을리 하지 않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첨부파일 : 20090929b 울산강의.hwp (56.5K), Down:17
송재원(IP:61.♡.38.203)
09-10-14 02:49
십자가복음을 아는자는 반드시 사건이 터져서 십자가지신 예수님만이 부각되게 되어있는 길을 가게된다.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