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애굽기 1장 주석
출애굽기 1장 주석
이름 : 이진용(IP:222.99.120.158)
출애굽기 1장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 머물게 된 것은 그들의 소원에 의해서 된 일이 아니다. 따라서 왜 그들은 스스로 화를 자초하여 고생하는가 라고 원망할 문제가 아니다. 아브라함의 언약에 의해서 민족 단위로 약속의 의미를 제공하기 위하여 그들은 거기서 대기하고 있게 되었다.
갇힘→고통→투쟁(전쟁)→승리→약속된 복을 상속 받음. 이와 같은 약속의 틀을 조성시킬 목적이 주어진 대단위의 민족이 바로 그들이다. 따라서 약속의 완성 점을 복의 제공에 있다면 그 주어진 복이 공격을 받고 와해될 위기에서 새로운 차원의 약속이 주입되어 일을 원만하게 마무리하게 된다. 모세언약과 아브라함 언약과의 관련성이 여기에 비추어진다.
각 씨족별로 엄청나게 불어나게 되는 기간이 애굽에 기거할 때이다. 이것은 아브라함의 복의 결과이다. 그런데 그 복이 직접 공격의 대상이 된다. 이 복의 민족에 도전하는 집단은 자기들 나름대로 힘의 체계를 지니고 있다. 그 반대편에는 하나님의 언약에 의해 유지되는 체제가 있다. 이 둘의 힘의 쟁투에서 약속의 본질이 그 정체를 드러나게 된다.
한쪽은 자기들의 힘의 논리에서 이 쪽을 점검하고 평가한다. 그 결과, 이들 이방민족(이스라엘민족)은 자기들 힘 안에서 아무런 후원자도 없이 그냥 방치되어 있는 민족으로 보였다. 그들이 이스라엘 민족을 자기네들 국가발전에 필요한 노동력이나 제공할 수 있는 노예로 부려먹을 수 있으리라 여겼다. 이러한 바로 왕의 편견을 성경은 간단히[요셉을 모르는 왕]이라는 표현을 쓰고 있다. 이것은 그 왕이 하나님의 약속에 대하여 무지하다는 말이다. 이스라엘 민족이 믿는 하나님 덕분에 애굽나라가 강대국이 되었다는 과거사를 무시하고 하나님도 빼버릴 때 남는 것이라고는 그들을 이용하면 나라가 부강하게 되겠다는 그들의 정치 원리로 해석한 잘못된 결과를 낳기 십상이다.
출애굽 기록에서 독자들이 신경을 곤두세워 찾고자 하는 것은 이스라엘 민족이 왜 빠져 나와야만 하는가? 하는 점이다. 그 동안 아무 탈없이 400년간 지금 이 시점에서 왜 쫓겨나가야 하는가 하는 점이다. 그 계기가 된 것이[요셉을 모르는 왕]의 등장이라면 결국 출애굽이란 요셉을 모르는 세계와는 영원한 투쟁관계 내지는 결별선언 같은 의의가 담겨 있을 것이다.
고대에서 전쟁에서의 승리는 진 편의 것을 아울러 가진다는 것이다. 그러나 출애굽사건의 경우에는 애굽의 것을 가진다는 의미는 극히 미미하고(애굽에서 가져온 단장품이 성막 건립에 사용된 예 같은 것) 오히려 꼴 보기 싫은 양 그 곳에 미련 없이 떠나 딴 곳에 가서 사는 것으로 되어 있다.
지금 이스라엘이 애굽을 떠나 영구정착지로 잡은 땅이 애굽과 직접적인 관련성이 없다.(가나안 땅이 애굽과 마찬가지로 함의 자손의 땅이라는 사실 빼놓고) 바로왕이 그곳까지 통치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다른 왕이 지배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그 원인을 찾기 위해서는 아브라함 언약까지 거슬러 확인해야 될 필요성을 여기서 갖는다.
이스라엘 고통을 들으신 분도 아브람의 하나님이요 찾아 오셔서 건져내어 주신 분도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시다. 따라서 그분은 오셔서 딴 일은 못하시고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 언약하신 그 범주 안에서만 구원사역을 하신다.
4대만에 다시 아브라함 자손을 불러내겠다는 그 약속을 이제 지킬 때가 된 것이다(창 15:13, 16) 이스라엘 백성에게는 해야 될 일이 있는 것이다. 그 일을 악한 바로 왕이 붙잡아 방해할 것은 못 되는 것이다. 그는 이스라엘을 가두어 두려고 했다는데 대하여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된다.
그들 나름대로의 힘의 논리에 의하여 이스라엘은 도저히 자기 손아귀에서 빠져나갈 수 없도록 되어 있다. 그들은 언약의 힘의 강대함을 모르고 있다. 하나님이 한번 약속한 일은 어떠한 장애와 힘에 의해서 중도에 소멸되는 일이 없음을 보여준다. 출애굽, 그것은 새로운 힘의 위력을 국가적인 위치에서 시행됨을 보여주는 기록이다. 단순히 정복의 의미가 아니라 거룩한 심판을 행사하는 대행자의 출현을 알리는 전쟁의 시작이다.
1:1-7
창세기와 출애굽기가 어떤 점에서 다른가는 창세기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을 가지고 언약이라는 것을 만든 이야기이다. 거기에 비해서 출애굽기는 그 언약의 실천을 알리게 되는 선지자가 등장한다. 그 사람이 바로 모세이다. 출애굽기를 보게 되면 나중에 창세기를 잊어버리게 된다. 그저 모세만 위대하다고 따질 것이다. 하지만 모세는 그저 언약의 종일 뿐이다. 선지자는 하나님과 백성 사이에 있는 자이다.
그래서 모세는 시내산에서 하나님과 독대한 것이다. 물론 산 밑에서는 많은 백성들이 모세에 대해서 대들었다. 하지만 여기에 대해서 모세가 그들 사정을 들어 줄 입장이 못된다. 그는 그냥 선지자일 뿐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선지자를 통해서 언약에 대해 소개하고 있다. 만약에 선지자의 말을 우습게 보면 곧 그것은 언약 자체의 힘을 거부하는 것이 된다. 중요한 것은 모세가 아니라 모세로 하여금 강제로 그 길을 나서게 만드는 언약의 힘에 있다. 이 언약은 창세기에서 형성된다.
본문에 나오는 인물들을 보면 그냥 소수 민족에 속한 식구들처럼 보일 것이다. 그러나 요한복음 1:12-13의 말씀은 신약 시대에 성도가 되는 이 원칙이 창세기에서나 출애굽기에서도 여전히 동일하다. 본문에 나와있는 명단들도 그렇게 해서 생긴 사람들이다. 그렇다면 창세기에서 만들어진 약속이란 어떤 약속인가?
창세기 3장부터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창세기 6장부터 시작하여야 한다. 왜냐하면 거기에 보면 노아 홍수라는 큰 세상 변혁이 나오기 때문이다. 왜 홍수라는 거대한 심판이 생긴 것일까? 노아 홍수가 있기 전에 노아와 다른 가족들 사이에는 별 차이가 없었다.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사고, 팔고 하면서 더불어 살아오고 있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노아를 통해 갑자기 방주라는 것을 만들라고 지시할 때부터 친구라고 여기고 친척이라고 여겼던 자들 사이에도 모두 금이 가기 시작했다. 여기서 우리는 사람의 혈통이 아니라 '하나님에게로 난 자' 만의 씨가 따로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씨'는 오직 언약을 성취하므로서 분류되어 나온다는 것도 알 수 있다. 이 세상 어느 사람도 자진해서 하나님의 약속된 씨가 될 수 없다. 아브람도 마찬가지요, 사래도 마찬가지이다. 아브람은 아브라함으로 바뀌어야 하고 사래도 사라로 바뀌어야 한다.
아브라함도 이스마엘이라는 자기 혈통적 자식을 가진 적이 있다. 하지만 그 자식도 잘려 나가야만 한다. 그 빈 자리에 하나님께서는 인간으로서는 있을 수 없는 자식인 이삭을 새로 만들어서 채우신다. 이 모든 일은 일방적으로 언약의 힘에 의해서 가능하다.
언약에는 '희생'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우리는 창세기 3:15을 보아야 한다.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너의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여기에 보면, 언약의 중심에는 여자의 후손이 있고 이 여자의 후손은 뱀의 후손과 전쟁을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 여자의 후손은 뱀의 후손으로부터 발꿈치에 상처를 입는다. 하지만 치명적인 것은 아니다.
치명적인 타격을 받는 것은 오히려 뱀의 후손이다. 여기서 우리는 언약의 내용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정리해 볼 수 있다. 첫째, 인간은 본인이 원치 않는 전쟁에 휘말려 들어가 있다. 둘째, 성도는 이 전쟁에 있어 하나님 편에서 제공한 미끼이다. 이 미끼를 통해서 교묘하게 숨어있는 하나님이 적들을 발각시키는 기능을 하게 된다. 셋째, 하나님의 미끼가 된 성도는 자신에게 날아오는 적을 절대로 자신의 힘으로 이길 수 없다는 원칙이다.
로마서 12:19에 보면, 세가지 원칙을 뿜어내면서 언약은 인류 역사를 이어나가신다. 사람들은 이 세가지 원칙 모두를 거부한다. 첫째, 이 세상의 역사는 악한 영과 선한 영의 싸움터가 아니라 인간대 인간의 싸움이다고 보고 있다. 인간 이외에 그 어떤 영적 존재로 인정하지 않으려 한다. 둘째로, 신이 인간을 미끼로 삼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자신에 취향에 맞는 신을 선택한다는 것이다. 그것도 필요할 경우에만 말이다.
따라서 어떤 의미에서 이 세상의 주도권은 신이 쥐고 있는 것이 아니라 신을 사용하는 인간에게 여전히 주도권이 있다고 본다. 셋째가 참으로 귀한 법칙이다. 왜냐하면 자칭 성도라고 우기는 사람들이 이 세 번째 법칙을 이행하고 싶어하지 않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왜 하나님의 이름으로 복수하기를 좋아하는가 하면, 정당화 될 수 있는 살인이기 때문이다. 자기 행위가 정당해지면서도 속에 있는 본성을 유감없이 마음껏 발휘할 수 있는 것이 복수할 수 있는 기회이다. 전쟁이란 위험하다. 치열하다. 나쁜 일처럼 느껴질 것이다.
하지만 힘들면 힘들수록 그 맛을 들여놓으면 이제는 시시한 일상이 권태롭기만 할 것이다. 정의로운 하나님의 전쟁이라는 복수극에 나선다면 비로소 자신이 살아있다는 맛을 느낄 것이다. 하지만 이런 악마적인 품성으로 인해 언약의 두 번째 원칙인 '희생'이라는 것이 생겨 나게 마련이다.
동생 아벨을 죽인 가인의 심정이 이런 심정이요, 아무런 잘못도 없는 요셉을 죽은 자로 만들어서 아버지에게 보고 했던 형제들의 행동이 그러하다.
여기서 우리는 출애굽기에 나오는 홍해 갈라짐에 대해서 생각해 보자.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씨는 따로 있다. 홍해 바다의 갈라짐은 그 점을 분명히 해준다. 하나님의 군대라고 히브리인들은 부름을 받는데 이는 언약의 첫 번째 원칙, 즉 성도와 인간들은 할 수 없는 영적 전쟁에 휘말려 있다는 점을 보여준다.
이 하나님의 군대에게만 홍해 바다는 길을 허용했다. 물론 애굽 군대의 눈으로 봐서는 이런 언약 주장은 터무니 없이 보였다. 왜냐하면 히브리인들만 두 다리가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자신들도 두 개의 튼튼한 다리를 갖고 있었다. 그들도 히브리인들이 건너갔던 코스대로 건널려고 했을 때, 홍해바다는 바닷길을 허용하지 않았다. 물줄기는 가차없이 도로 합쳐지고 말았다.
홍해바다가 하나님의 군대라는 히브리인들에게만 허용된 것은 그들에게는 '어린 양의 희생'이라는 언약의 코드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히브리인들이 애굽인들에게 수모를 당하는 것도 다 이 언약의 내용을 세상에 알리고자 하는 미끼였다. 그래서 세상은 언약대로 철저하게 징벌받게 한다. 하나님에게 피해를 입혔다는 죄목으로 말이다.
우리는 절대로 세 번째 법칙을 잊어서는 아니된다. 하나님의 이름이든, 자신의 이름이든, 그 모든 피해보상은 하나님께서 적절하게 갚아주신다. 심판을 하나님께 맡겨야 한다. 그런 자들의 출현이 곧 본문에 나오는 명단처럼 언약의 씨의 출현이다.
1:8-14
성경에 보면, 생명책이라는 것이 있다. 그 생명책에 있는 명단은 인간이 먼저 생기고 그 다음에 생긴 명단이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다. 명단이 먼저 있고 그 다음에 그 명단에 맞추어서 사람이 창조된 것이다..
생명책에 이름이 기록되지 않는 자들의 운명은 무엇 때문에 있는 것인가 하면은 하나님이 은혜 됨을 알리기 위한 등장 인물들이다. 요셉을 알지 못하는 애굽 왕이 등장했다는 것이다. 이것은 곧 하나님의 은혜를 모르는 자의 등장이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은혜의 시발점은 요한계시록 20:15에 보면, "누구든지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자는 불 못에 던지우더라"라고 되어 있다. 은혜가 출발하는 지점은 하나님의 생명 책이다. 그 생명 책에 기록되어 있는 자를 건지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시는데 어떤 식으로 주시는가 하면, 언약을 통해서 주신다.
그 언약이 바로 '요셉의 존재함'이다. 요셉을 제대로 아는 왕이 있을 때에는 애굽 나라에서 이스라엘은 고통 당하지 않았다. 애굽이 유지되고 아니되고가 결코 인간들의 힘에 의해서 진행되는 것이 아님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요셉을 모르는 왕이 등장함으로서 그 때부터 이스라엘에 대한 핍박이 감행되었다.
생명책에 기록된 자는 반드시 이 땅에 창조되어야만 하고 그 창조된 자는 은혜를 아는 자로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생명책에 기록되지 않는 자는 반드시 은혜를 모르는 자로 만들어져서 살아가야 한다. 이 은혜를 모르는 자는 무슨 종교를 갖든지 간에 모두 자신의 선택이나 결정에 의해서 가능하다고 믿게 된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는 이점을 또 알아야 한다. 생명과 비생명, 빛과 어두움은 결코 사이좋게 잘 지낼 입장이 못 된다는 것이다. 요한복음 1장에서의 어두움이란 단지 빛이 덜 비치는 공백 지역을 두고 말하는 것이 아니고 빛 되시는 분에게 대들고 공격하는 세력을 표현하는 말이다.
예수님을 모르는 자들은 어두움에 소속되어 있기에 자연적으로 빛 되시는 분에게 대들도록 되어있는 그런 인생을 산다는 것이다. 여기서 참으로 무시무시한 인간들의 근원적인 면을 엿볼 수 있다. 그 누가 봐도 어질고, 순하고, 공손하고, 친절하고, 예의 바르고, 온화한 성품을 지닌 자라도 예수님과 무관한 자라면 본성상 예수님에 대해서 극도의 반감을 갖고 욕하게 된다는 것이다.
과연 그런가 하는 점은 빛 되시는 분인 예수님이 오셔서 어두움 세력에 사로잡혀 있는 이 세상에서 어떤 대우를 받았는가를 살펴보면 될 것이다. "다같이 한 하나님 밑에서 사이좋게 지내자'라는 논리는 가당치도 않다. 왜 그런가 하면, 예수님 안에 있는 자들은 모두 동일한 적으로부터 동일한 방식으로 공격을 같이 받고 있는 입장에 있기 때문이다.
지금 이스라엘 사람은 사적인 이유 때문에 애굽의 공격을 받고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들의 적을 통해서 과연 우리의 형제인지를 가려낼 수 있다. 불신자들이 신에게 불만이 그득한 이유는 그들은 하나님으로부터 은혜를 받지 못해서 그러한 것이 아니고 그들에게는 의도적인 그 무엇이 있다. 숨길 수 없는 어두움의 속성에 의해서 움직이는 자들이다. 마태복음 5:45에 보면,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취게 하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리우심이니라"라고 되어 있다.
천하장사라도 사람은 햇빛과 빗물이 없이는 못살게 되어 있다. 그리고 신자나 불신자도 가리지 않고 햇빛과 빗물 없이 못산다. 무엇을 받았다는 점에서는 다 똑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른 점이 있다. 그것은 악한 자들은 뭐든지 자신의 선택 행위와 결정 행위를 빼놓고 생각하지 않는다는데 있다.
자기에게 주어진 일에 대해서 자기 외에 분의 결정을 용납하지 않는 것이 악의 속성이다. 만약 하늘에 누군가 계신다고 한다면 의도적으로 그 분을 조롱한다. 하지만 신자는 기본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로만 산다는 것을 안다. 자기의 판단과 결정 이전에 다른 분의 판단과 결정이 우선되어 있음을 안다. 이것은 논리로 따져서 아는 것이 아니다. 속성상 알게 되어 있다.
따라서 이 두 부류의 사이에는 끊임없는 다툼이 일어나게 되어 있다. 단순히 사이좋게 지내면 되는 사이가 아니다. 서로 마음에 맞는 취미생활로 하나가 될 수 있는 사이가 아니다. 이 점을 우리가 심사숙고 해야한다.
위에서 이미 생명과 저주로 나누어진 사이이기 때문에 밑에서 아무리 악수를 하고 얼싸안아도 소용없는 일이다. 속성과 결합이 불가능하다. 이것을 요한복음에서 빛과 어두움의 관계라고 말한다. 이 은혜를 망각했을 때 그 다음에 나올 수 있는 태도는, 신에 대한 조롱과 핍박과 전면적인 공격이다.
신자가 불신자와 사이를 좋게 하기 위해 그들에게 복음 이외에 다른 면에서 충실하고 성의 있게 대한다고 해서 그들과의 관계가 호전되는 것이 아니다. 본문에 보면 이스라엘 백성이 압제를 받는데 그들이 누구의 이름으로 고난을 당하는가 하면 개인적으로 나쁜 짓 했다고 해서 그 특정 개인만 애굽 관리로부터 압제를 당하는 것이 아니다.
단지 출신 성분이 요셉의 후예라는 이유 때문에 애굽의 권력자로부터 압제를 당하는 것이다. 차기 왕들에게 있어서 애굽이라는 나라는 요셉의 가족과 무관하게 원래부터 강한 나라인 줄로 알고 있다. 따라서 요셉의 존재가 별 가치 없다고 여겨진 것이다.
이것은 요셉이 믿고 있는 하나님을 별 볼일 없는 것으로 취급하는 태도이다. 애굽이라는 나라의 주도권이 요셉의 하나님으로부터 애굽의 왕의 나라로 전환되면서 이제는 요셉 민족을 지켜주려고 하지를 않는다. 적으로 보일 뿐이다.
여기서 우리는 은혜 없이 자기 가문, 자기 핏줄 위주로 나서는 것이 얼마나 비진리적이며 곧 하나님을 공격하는 마음인 것을 절실하게 느껴야 한다. 은혜를 떠나면 남는 것은 요셉을 모르는 바로왕과 같은 마음이 된다.
생명 되시는 분의 고마움과 은혜를 망각하면 그것은 어두움 세력이 배후에서 시키는 대로 따랐다는 결론에 도달될 뿐이다. 자신의 근본이 하나님의 은혜로 깔려 있다는 사실을 모르는 죄이다. 생명 되시는 분을 모독하지 말아야 한다.
1:15-22
믿음에도 사기성이 있다. 하나님 믿어준다고 마냥 좋아라 할 문제가 아니다. 사기성 있는 믿음은 이익을 바라고 믿는 믿음이다. 이런 믿음은 결국에는 환란이 올 때 다 자빠지는 믿음일 뿐이다. 제대로 된 믿음은 환란이 오든 즐거움이 오든 자신이 믿는 하나님과의 관계에 그 어떤 관련도 없다고 믿는 믿음이 참된 믿음이다. 자기 몸에 병이 난 것도, 살아계신 하나님 믿는 것하고 아무런 상관도 없는 것이다.
그런데 주위에서 가만두지 않는다. "하나님 믿는 당신에게 이러한 불행한 일이 덮쳤으니 당신의 신앙을 점검해 보라"는 등 말이다. 여기서 우리는 주의해야 한다. 우리의 믿음으로 환경을 이길 생각을 말아야 한다. 만약 자기가 가진 믿음으로 환란도 이긴다고 장담하다가는 더 큰 환란을 악마가 준비해 두고 있다.
자신에게 손해가 온다고 여기면 걷어치우는 믿음은 사기성 있는 믿음이다. 누가복음 18:3-8은 뭐든지 떼쓰면 하나님께서 다 들어주신다는 뜻이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의 말씀이다. 이 세상에서는 떼를 쓰면 다 되지만 하나님에게는 아무리 떼를 써봤자 믿음은 그것과 상관없다는 말이다. 즉 이 세상에서는 자신이 떼 쓴 만큼 실적으로 기대하고 떼를 쓰지만 신앙인은 오직 이 땅에서 실적을 얻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인자의 오심을 고대하게 되는데 그런 믿음이 마지막 때에 과연 있겠느냐 하시는 말이다.
예수님은 신자를 볼 때에 마치 이 세상에서 억울한 일을 당한 사람들로 보고 있다. 그래서 원한이 생기게 마련이고 그 원한은 예수님께서 다시 오실 때에 갚아주겠다고 하신다. 이 땅에서 스스로 억울한 일을 당했다고 여기는 사람이 한 둘이 아니다. 거의 모든 사람이 남들로부터 피해를 보았고 혹은 출생시부터 잘못된 가정에서 태어나는 억울한 평생을 보내고 있다고 여기고 있다.
따라서 여기서 생기는 원한과 분노를 예수님께서 다 갚아주시겠다는 것이 아니라, 진정 '인자의 오심'을 믿고 그것을 믿는 재미로 사는 사람이 과연 있겠느냐 라는 것이다. 즉 억울한 일을 당하는 것하고 예수님의 말씀을 믿는 것은 별개라는 말이다.
야고보서 5:4-11에 보면, 하나님께서는 인간 세상에 일어나는 모든 불행한 일과 불상사에 대한 해결책으로서 예수님의 재림을 제시하신다. 그것은 불행한 일을 당한 자를 구원코자가 아니라 예수님을, 말씀을 믿는 자만을 구원코자 하시기 때문이다. 억울한 일을 당한 '자'가 하나님에게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억울한 일을 당한 '신자'를 중요하게 보신다.
그것은 하나님의 관심사가 따로 계시기 때문이다. 왜 심판주가 최후로 등장해야 하는가를 세상이 제대로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불신자가 생각하는 억울한 일이란, 순전히 자기 의로움에 대한 기대했던 보상이나 결과가 없다고 불평하는 형식이다. 왜 하나님은 자기편이 안 되어주느냐에 대한 불만을 갖게 되는 계기가 된다.
그러나 신자에게 있어 억울한 일이란, 곧 심판주에 대한 인내만 증가시킬 뿐이다. 믿음에는 하등 영향이 없다. 본문 17절에 보면, "그러나 산파들이 하나님을 두려워하여 애굽 왕의 명을 어기고 남자를 살린지라"라고 되어 있다.
이 본문에다 오늘날 우리들의 형편을 대입시켜 보자. 즉 '애굽 왕'이라는 자리에게, 부장, 사장, 목사를 집어 넣어보면, 오늘날도 우리의 신앙이 사기성이 아닌지를 시험해 오는 각가지 경우를 만나고 있음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이럴 경우에 절대로, 자기 신앙의 힘으로 상대방을 감동시켜서 문제를 해결할 생각을 하지 말아야 한다. 그런 것은 어디까지나 하나님 소관이다. 우선 성도는 하나님을 두려워해야 한다.
눈에 안 보이는 하나님은 저 멀리 계셔서 이 현장의 일에 무관심하다고 간주하는 경향이 있다. 따라서 눈에 보이지 않는 존재인 하나님이나 예수님에 대한 신경보다 그저 눈에 보이는 직분과 직분의 권력 다툼에 더 예민해져 있다. 바로 이런 모습이 사기성 있는 신앙들이다.
히브리인들은 애굽의 권력자로부터 혹독한 핍박을 받게 된다. 이유는 단 한가지, 식구가 불어난다는 것이다. 히브리민족의 인구를 줄이기 위해 출생부터 강제 진압에 나선다. 산파를 통해서 국가법으로 조치했다.
그런데 그 중에서도 십브라라는 산파와 부아라는 산파는 그저 자기 식대로 히브리 아들을 받았다. 성경은 21절에서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다. "산파는 하나님을 경외하였으므로 하나님이 그들의 집을 왕성케 하신지라"라고 되어 있다.
여호와를 경외한 이유는 그냥 여호와 하나님을 믿었기 때문이다. 주변 환경이나 상황이 좋다거나 나쁘다는 것이 결코 이 차에 신앙을 버릴거냐 유지할 것이냐를 갈등하게 만드는 요인이 되지 못하는 것이다. 교회는 억울한 일을 당한 자가 오는 곳이 아니라 예수님을 믿는 것이 당연하다고 여기는 자들이 와야 하는 곳이다.
그들은 하나님에게 잘 보여서 하나님께서 속히 이 시련의 시절이 지나가기를 원하는 입장에서 착한 일 한 번 해보겠다는 식으로 히브리인 아들을 살려둔 것이 아니다. 애굽 왕의 지시는 그 쪽 세계의 지시이고, 이쪽 하나님의 세계에서의 뜻은 하나님의 지시가 따로 있기 마련이다. 이 사실을 분명히 구분하고 있었다.
그들이 그 후로 애굽 관리들에게 체포되어 처형당한다 할지라도 그 순간에 여호와를 경외하는 마음이 달라질 필요조차 없는 것이다. 즉 하나님은 결코 억울한 일을 해결하시는 분이 아니라 신자의 억울함에 관해서만 심판주를 보내셔서 처리하신다. 하나님께서 일을 아주 간명하게 처리하신다. 지금 우리는 어디에 고개 숙이고 사는가 돌아보아야 한다.
첨부파일 : 출애굽기 1장.docx (27.2K), Down: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