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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

창세기 46장 -50장 주석자유게시판창세기

창세기 46장 -50장 주석

이름 : 이진용(IP:222.99.120.158)

창세기 46장 -50장

약속의 땅, 가나안 땅을 뒤로 하고 요셉이 있는 곳으로 이동하는 야곱의 마음에 걱정이 생기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이때 하나님은 야곱에게 나타나서 염려 말고 가라고 하신다. 거기에서 비로서 국가형태를 갖출만한 큰 민족을 조성하려고 하시는 것이다.

만약 이 다음에 다시 거기서 나온다면 씨족 형태가 아니라 국가형태가 될 것이며 만약 그 와중에서 충돌이 발생되면 국가 대 국가의 충돌이 된다. 이 모든 일은 이미 아브라함에 언급된 바 있다(창15:13-14).

야곱에게 허락하신 언약을 이루시되 요셉을 통해 이루시는 하나님의 뜻은 요셉의 고난을 새로운 언약의 나라의 원리로 삼기 위해서이다. 팔려간 자를 하나님이 주로 삼았다면 이스라엘의 모든 가족이 그 고난을 마다할 수가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이 주가 되는 유일한 길이기 때문이다.

죽은 줄로 알았던 요셉을 산 채로 다시 만나게 되자 야곱은 한동안 계속 울기만 한다. 음부에서나 만날 줄 알았던 것이다. 요셉이 아버지를 바로 왕에게 소개한다. 야곱은 그에게 축복한다. 그만한 위치에 있음을 야곱 스스로 알고 있기 때문이다.

기근이 계속 극심해지자 다투어서 주위의 나라가 땅을 팔고 애굽나라에 귀속된다. 이제 애굽나라는 은혜의 나라라는 인식으로 알려졌다. 이 모든 것은 그 중심에 요셉이 있기 때문이다.

야곱이 죽을 때가 가까이 오자 요셉을 부른다. 그리고 이때까지 자신을 인도하신 하나님의 그 마음이 그대로 요셉 가문 대대로 이어지기를 바라면서 두 손자에게 축복한다. 그들은 험난하게 걸어온 야곱의 언약 성취를 위해 주어진 하나님의 선물이요 성취의 증거였다. 야곱은 언약의 특징을 그들 위에 분명히 남기고 싶었다. 흔히 장자라고 여겨지는 먼저 태어난 아이를 동생으로 돌리고 나중에 태어난 동생을 장자의 위치에 올려 놓았다.

이삭이 몰랐던 부분을 이제 야곱은 알고 있는 것이다. 섬기는 자가 장자 된다는 원리를 모르고 야곱은 그 동안 얼마나 험난한 세상 길을 살아왔던가! 신약 히브리서 11:21에서 요셉의 아들에게 축복하는 장소를 침상이라하지 않고 야곱의 지팡이라고 기록해 놓고 있다(히11:21).

얼마나 신앙의 실체를 제대로 보여주었는가! 실패의 일생이 바로 하나님의 승리였던 것이다. 자기의 탐욕을 제거하고 그것을 조절하고, 심지어 가장 사랑했던 자식마저 잃은 것으로 사태를 몰아넣는 하나님은 이제 야곱이 죽을 지경에 와서 어긋맞게 축복할 수 있는 인간으로 세워놓으셨다. 이제 인생을 알고 하나님도 제대로 안다는 뜻이다. 야곱의 한 축복의 내용이 무엇인가? 한마디로 말해서 어긋맞게 축복할 줄 아는 안목을 뜻한다.

이제 이러한 희생의 힘으로 이스라엘의 후손들은 약속한 땅으로 거대한 나라가 되어 올라가게 될 것이며 그리고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미리 약속의 땅이라고 사놓은 매장지에 드디어 같이 묻힐 때에, 사람들은 이스라엘이 진정 하나님이 선택한 복의 근원의 민족임을 알게 될 것이라고 야곱은 말하고 있다. 그리고 야곱은 12아들을 모두 불러 모아 그들의 행실과 삶의 태도를 근거로 하여 장래 될 일을 일러준다.

장래의 인류 역사는 야곱이 예언한대로 될 것이다. 그 인류의 역사는 이스라엘이 중심이 되어 움직여 나아가고 그 속에서 12지파가 각기 어떠한 역할을 하는 지를 유언으로 남기고 있다. 인류가 죽고 사는 것은 이제 이스라엘에게 달려 있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기존의 인간 세력권에 언약의 나라라는 새로운 민족을 앞장세워 일하시고 또한 침투하셨다. 여기에는 치열한 투쟁이 전개될 것이다. 그러나 그 가운데서 하나님이 약속한 구원의 약속은 치밀하게 성취되어 간다.

야곱의 탐욕을 극복하여 등장된 그 공동체는, 그 탐욕을 극복시킨 힘으로 이제는 세상을 극복할 것이다. 그 힘은 다름이 아닌 사랑의 힘이다. 그리고 용서의 위력이다. 그리스도께 돌아오는 자는 이 건짐의 능력을 맛보게 된다.

하나님이 스스로 계시하지 않는 한 우리 인간은 하나님을 알 수 없다. 여기서 하나님을 우리가 모른다는 말은 神의 존재를 두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神(절대자)의 존재성 문제는 성경과 아무런 상관 없는 문제이다. 성경에서 하나님을 모른다고 말하는 것은 그야말로 하나님이 누군지를 모르는 것을 말한다. 즉 그분의 마음을 모른다는 것이다.

이스라엘 민족은 이 지상에 남겨지는 하나님의 사역을 통해 비로서 하나님을 알게 되는 유일한 민족이었다. 그들이 생각하는 창조관도 남 다르다. 그냥 神이 세상을 만들었다는게 아니다. 우리 이스라엘을 구원하신 그 구원의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했지 이방나라에서 섬겨지는 神에 의해 창조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따라서 창조 행위 자체도 이스라엘의 구원과 연관시킨다. 구원은 마지막 안식을 내다보는 구원이며 그 안식이야말로 거룩하고 이 세속과 구별된 개념으로서 이상향이다. 그 안식에로의 참여는 하나님의 형상으로 되돌아 가야하고 그 돌아가는 방법은 하나님의 구원의 약속을 신뢰하는데 있다.

그런데 그 약속은 언약이라고 하는 구체적 표현과 형태로 주어지는데 그 언약 안에는 하나님이 인간을 구원하는 그 마음에 담겨 있고 그 마음에 대하여 일치된 마음을 또한 이스라엘이 지니고 있어야 이스라엘은 복의 원천이 된다.

그렇다면 그 언약 속에 담겨 있는 마음은 어떤 마음인가? 이 마음은 철저하게 타락된 아담의 마음과는 배타적인 마음이라서 하나님이 친히 함께하여 조절시키지 않는 한 지닐 수 없는 마음이다. 아브라함과 이삭 야곱과 그 가족들도 모두 이 마음에 미흡하여 실패할 뻔 한 자들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과 함께 하여 그들의 부족을 보상하고도 남음이 있는 제3의 존재를 대기시키셨는데 여기서 언약의 가족들에게 믿음이라는 것이 요구되었다 믿음이란 믿는 자의 열심에 가치를 두고 있는게 아니라 믿을 내용이 되는 분이 과연 어떠한 분인가가 핵심을 좌우한다.

그 분은 늘 인간들의 과오로 인해 고통 받는 분의 모습을 지닌다. 인간들의 욕심과 교만과 야욕 속에서 애매하게 버림받고 조롱 받는 존재. 이유 없이 죄 없이 죽어야 하는 존재로 등장한다. 하지만 그 존재를 의지하는 길만이 진정 우리의 살길이라고 믿는 믿음이 참된 믿음이다.

창세기는 바로 이러한 원리에 따라 많은 등장 인물이 잠깐 역사 속에 나타났다가 사라지곤 했다. 우리들은 그러한 역사의 갈등 속에서 자신의 죄악이 무엇인가를 발견해야 한다.

믿는다는 행위를 결코 윤리나 도덕차원에서 이해 되어서는 안 된다. 그것은 교만으로 처리된다. 믿음이란 나의 탐욕과 이기주의로 인해 죽은 자를 찾아 나서서 그와 삶을 함께 하는 결단을 말한다. 창세기에서 우리는 미리 그분의 활동을 보게 되었다. 그것은 모두 여호와라는 神에 의해 조정됨을 안다.

신약을 해석하면서 구약의 정신을 빼놓고 해석하면 거짓말이 된다. 특히 예수 그리스도를 이해할 때는 더욱 더 중요한 원리로 작용한다. 구약을 모르고 어떻게 예수 그리스도를 알 수 있단 말인가! 그리스도께서 지향하신 바도 구약의 정신이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를 짊어지고 갔다고 신약에 기록해 놓고 있지만 거기서 언급하는 죄악이 도대체 어떤 죄질인지를 구약이 아니면 알 수 없는 것이다. 왜 신앙이 윤리나 도덕 차원을 넘어서야 하는 가는 구약을 통해 보다 분명해진다. 죄악이란 여호와를 모르고 자기 세계에 그냥 눌러 앉아 있는 것이 죄인 것이다.

오늘날 교회가 하나님을 아는데 목회의 촛점이 모아지지 않고 이 세상에서의 성공을 기원한다면 하나님도 모르는 채 우상의 하나님과 우상의 예수를 모시는 사이비의 한 단체가 될 것이다. 세상의 평가보다 성경에 맞춰 살아가야한다.

50장에서 요셉이 죽어서 다시 약속의 땅으로 간다. 요셉은 아브라함이 있는 곳을 자기의 본향으로 여기고 그곳으로 간다. 막벨라 굴에 묻어달라고 유언하여 죄로 말미암아 죽었던 죽음이 의로 말미암아 이삭처럼 부활할 것을 믿었다.

46:1-7

그동안 이야기의 대부분은 요셉에게 일어난 일들에 관한 것이다. 하지만 그 일들은 요셉이 의도적으로 기대했던 세월은 아니었다. 오히려 야곱이 기대했던 일들이었다. 그러나 야곱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약속에서 당사지인 야곱은 철저하게 배제되어 있다. 야곱은 그저 요셉이 고생을 통해 얻어진 결과에 대해서 아무런 행한 것도 없이 참여하는 입장에 있다.

현실적으로 야곱은 자신의 모든 기대치는 하나님에게 깡그리 빼앗긴 상태이다. 야곱의 본인이 가지고 있는 능력으로서 하나님의 약속을 이룰 그 어떤 여지도 남아 있지 않다. 하나님께서는 야곱이 그런 상태를 되기를 진작 원했던 바이다.

물론 과거에 야곱이 열심히 하나님 곁은 떠나지 않으려고 애쓴 것을 하나님도 알고 계신다. 그러나 과거의 행동을 근거로 해서 지금의 야곱에게 그런 축복을 주시는 것은 아니다. 과거에 잘 나갔던 못 나갔던 상관없이 지금 야곱을 데리시고 해야 할 일이 또 남아 있었다.

이 일을 위하여 하나님께서는 야곱을 버리지 않으시고 애굽까지 동행하시겠다는 것이다. 그 일은 곧 야곱보다 먼저 앞장 서서 선발대 형식으로 요셉을 다루시던 그 하나님께서 이제는 야곱과 함께 동행하시려고 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알곡이요, 하나님의 은혜이다.

알곡이란 스스로의 힘으로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자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성립하는 신분이다. 그런데 여기서 말하는 하나님의 은혜란 결코 그 사람이 평소에 원했던 상태를 뜻하는 것이 아니다. 앞서 하나님께서 다 장만하시고 완성해 놓은 그 은혜의 세계로 초빙되는 과정에 놓여 있다.

이것은 성도들이 상상한 바를 초월할 정도의 세계이다. 지금 야곱이 요셉이 어떤 모습으로 있는지 상상도 잘 안된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먼저 동행했던 요셉의 여정을 야곱에게 소개해 주려고 하신다. 왜냐하면 그 세계가 바로 야곱의 약속이 약속대로 성취된 축복의 상태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버지 야곱은, 그가 사랑했던 자식 요셉이 얼마나 힘든 희생과 수고의 인생을 보내었는지 다 알아야 하는 것이다.

이것은 오늘날 성도들에게 마찬가지 현상이 일어난다. 예수님의 영이 성도에게 임하는 그 순간부터 성령께서는 성도와 동행하셔서 그토록 힘들고 힘든 예수님의 십자가의 길로 초빙하시는 것이다. 그런 과정을 통해 성도는, 자신이 그동안 세상을 살면서 꿈꾸는 가라지 같은 포부나 비전 같은 것들은 다 포기하게 만드시고 오직 예수님의 십자가 공로로 이루어진 새 하늘과 새 땅의 찬란함에 경탄하게 만드신다.

오늘날 우리 주위에 교회라는 종교단체가 풍성하다보니 사람들은 예수님의 세계를 그리워하는 것이 아니라 주위 교회의 모습을 가지고 나름대로 조립하여 그것을 탐하는 식의 기도와 목회를 원하고 있다.

그런 것들은 가라지를 전문적으로 요리하고 유혹하고 지옥으로 빼돌리는 악마의 주특기이다.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것도 아님에도 불구하고, 단지 내가 원하고 주위 일가 친척들이 요구가 있었다고 해서 세상적인 영광을 추구하는 것은 차라리 악마의 종으로 행세하는 편이 솔직한 모습일 것이다.

오늘도 성도는 무엇을 할지, 어디로 갈지를 모른다. 결코 우리의 남은 여생이 빈 광주리가 아니다. 우리가 따로 채울 것은 없다. 다만 은혜로 가득 채워진 상태에서 우리에게 날마다의 광주리를 우리에게 넘겨주신다. 우리는 그 광주리 안에서 예수님의 시련과 아픔과 승리하심을 찾을 수 있어야 한다.

47:7-9

야곱은 바로왕에게 축복을 한다. 축복이라는 것은 인생과 오는 세상에 대해서 제대로 아는 자가 하는 것이다. 그저 행운이나 듬뿍 찾아오라고 축복하는 것은 상대방에 대한 아부이지 결코 실효성 있는 축복이라고 할 수 없다. 진정한 축복이란 이 사람에게는 앞으로 하나님의 뜻이 듬뿍 적용되기를 기원하는 것뿐이다.

목사가 성도를 위하여 기도하는 것도, 상대방의 개인적인 희망사항의 성취가 아니라 단지 하나님이 생각해 놓으시고 기뻐하시는 그 뜻이 도리어 이 사람의 장래를 지배해 주기를 기원하는 의미로 해야 한다.

사람을 좋게하기 위해 기도하고 심방하고 목회하는 것은, 차라리 점집이나 차려 영업하고 나중에 자기 고객들과 함께 지옥으로 가는 것이 솔직한 미래의 모습이 된다. 왜냐하면 전혀 하나님의 심정을 고려하지 않는 종교 태도이기 때문이다.

야곱이 바로왕에게 축복하는 것은, 오늘날 조찬기도회 차원이 아니다. 권력의 맛을 보았기에 계속해서 권력층의 비호를 갈망하는 아부적인 몸짓으로 왕에게 축복을 비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야곱이 애굽 나라에 들어옴으로 말미암아 단지 야곱 자신의 몸만 들어온 것이 아니라 야곱의 몸을 앞장 세워서 언약적으로 일하시는 하나님의 입성이라고 봐도 좋을 것이다.

그렇다면 야곱이 바로왕에게 자기를 소개하면서, '험난한 130년 세월을 보내었다'고 소개하는 것은 자신의 험난한 세월로 인해 이 애굽 땅에 기여한 여호와 하나님의 축복에 대해서 말하고 싶었던 것이다. 즉 야곱은 단지 바로왕 밑에 기어들어와 어찌했던 생계를 꾸려가기 위한 치사한 행동을 하는 것이 아니다. 도리어 지금이 애굽나라의 번창은 모두 야곱 자신에게 내려준 하나님께서 자신의 예정하는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성립된 환경이라는 것이다.

시편 105:21-24에 보면, 하나님께서 의도적으로 이스라엘 민족의 조상이 되는 야곱을 함의 땅인 애굽에서 살게하신다. 창세기 9장에 보면, 하나님께서 노아에게 내려준 언약이 나온다. 여기에서 함이 족속인 가나안은 반드시 셈의 족속의 종이 되어야만 한다. 그들이 원하든 원치않든 상관없이 필히 그렇게 되도록 역사는 흘러갈 것이다. 셈을 기쁘게 하기 위해서가 아니고 단지 하나님께서 자신이 내려준 약속이 성취되면 그것으로 흡족해 하시고 대 만족하시는 분이다. 이것뿐이다.

따라서 하나님 자신이 내려준 축복이기에 세상을 그런 식으로 몰고 가시는 것이다. 이런 차원에서 하나님께서 야곱에게 따로 내려준 축복은 바로 아버지 이삭이 야곱에게 내려준 축복이다. 창세기 27:29에 보면, 만민이 너를 섬기고 열국이 네가 굴복하리니'라는 말씀이 나온다. 분명히 야곱이 살던 세계는 온 민족의 주가 되는 나라는 함의 족속인 애굽나라이다. 심지어 야곱의 가정까지 그 애굽 나라의 덕을 봐서 생존하기 위해서 굴욕적으로 양식 구하려 간 처지에 놓여 있었던 것이다. 누가 봐도 만민이 섬기는 것은 애굽 나라이요 그 우두머리는 바로왕으로 보인다.

그러나 야곱의 생각은 다르다. 똑같은 인간이요 똑같은 신체구조를 가진 야곱이지만 그는 그 당시 세상을 달리 보는 눈이 있었다. 이 모든 현실 세계가 하나님의 약속 실현용으로 진척되고 있음을 파악한 것이다. 그리고 그 약속이라는 것도 구체적으로 야곱 본인에게만 내려준 언약에 준해서 진행되는 것이다.

그 증거가 바로, 야곱이 도리어 바로왕을 축복한다는 이 사실에 두고 있다. 현재 바로왕이 누리고 있는 세력은 사실 야곱에 내려준 축복의 결실로 생긴 현상이다. 뿐만아니라 그 바로왕의 풍족함조차 시편 105:24의 말씀처럼, 야곱의 후손들이 크게 증식시키는 온실 기능을 하기 위함이다.

그것도 그냥 증식되는 것이 아니고 여호와 하나님은 이 세상의 그 어떤 권력자보다 강하다는 것을 인식하면서 증식된다. 이로서 야곱의 후손들은, 하나님의 축복 말씀하신 대로 반드시 함의 족속은 셈의 족속 밑에 종이 된다는 것을 확신해야 한다. 그 정도로 하나님은 자신이 축복 하신 이에 대해서는 강하게 일하시는 분이라는 인식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던지신 그 언약대로만 빈틈없이 성취하는 식으로 세상을 다스리신다. 따라서 앞으로의 야곱 후손의 운명은 이런 하나님의 강함을 그 어떤 환경에서도 의심하지 말아야 한다.

그런데 이런 축복의 중심에 놓여 있는 야곱이 험난한 세월을 보내야만 한 이유는 하나님의 언약이 분명 야곱에게 주었지만 그것은 야곱 개인의 번영을 위해 주신 것이 아니다. 야곱 안에는 장차 오실 예수님의 모습이 담겨있다.

따라서 야곱의 일생은 곧 장차 오실 메시아의 고생담이 미리 실려 있는 것이다. 그 고생을 요셉이 했고 또한 야곱이 했던 것이다. 야곱은 오로지 하나님의 약속만 사모하며 그것을 믿다가 형으로부터 미움 받아 쫓기는 신세가 되었다. 그 때부터 험난한 세월이 시작된 것이다. 형으로부터, 그리고 부모 곁으로부터 홀로 된 채 떠나올 때, 야곱과 함께 하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오로지 하나님만이 그와 함께 하셨다. 하나님은 밤중에 야곱에게 나타나 사다리를 보여주시면서 다음과 같이 선언하셨다.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며 너를 이끌어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할찌라 내가 네게 허락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신지라"

그러나 다시 이 약속의 땅으로 돌아온다는 약속은 야곱이 해골이 되어서 성취된다. 하나님께서 진정 최후로 약속하신 것은 해골조차 영생으로 다시 변화되는 그런 세계를 두고 말씀하신 것이기 때문이다. 단지 지리적으로 애굽나라와 가나안 지역 간의 차이만을 두고 약속하신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야곱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야곱의 험난한 세월은 곧 이 죄악 된 세상의 혼돈과 서글픔을 표현한 말이다. 쉽게 말해서 하나님 자녀가 살만한 곳이 못 된다는 이야기이다. 성도가 살아야 될 곳은 따로 존재한다. 그곳은 하늘 나라이다.

문제는 하나님께서 떠나지 않고 언제까지나 함께 하셔서 허락하신 것을 다 이루어 주시는 자에게만 그 나라의 입성이 가능하다. 성도가 비록 이 남의 나라에서 험난한 세월을 산다 할지라도 성도의 곁을 늘 떠나지 않으시고 언약대로 몰고 가시는 그 하나님의 동행을 기뻐하시면서 그 분의 계심을 증거 해야만 하는 것이다.

47: 20-26

처음에는 가진 돈을 주고 요셉에게 와서 양식을 샀다. 그러나 이제 그 돈마저 떨어지자 농사지을 때 꼭 필요한 가축마저 끌고 와서 양식과 바꾸어 갔다. 그런데 이제 팔아야 될 가축조차 남지 않자 남은 것은 자신들의 몸과 토지뿐이다.

자신의 몸을 판다는 것은 스스로 가축 같은 노예라도 되겠다는 지경이다. 그래서 그들은 토지를 팔아서 요셉에게 양식을 사게 된다. 이렇게 되니 나라 안의 모든 토지가 자연적으로 왕실의 것이 되고 말았다.

왕의 권세는 더욱 강화되고 모든 백성들은 어쩔 수 없이 왕의 노예가 될 판이다. 25절에 보면, 그들이 이런 말을 한다. "그들이 가로되 주께서 우리를 살리셨사오니 우리가 주께 은혜를 입고 바로의 종이 되겠나이다" 이제 바로왕은 요셉의 지혜 덕분에 가만히 앉아서 전 국토의 생산물의 5분지를 일을 상납 받게 되었다.

이들은 바로왕에게 자신의 모든 것을 빼앗긴 입장에 놓여 있어도 도리어 바로 왕의 은덕으로 살게 되었다고 감지덕지 한다. 그리고 자신해서 종이 되겠다고 한다. 이렇게 해서 이런 판국이 되면 애굽의 사회 구조는 극단적으로 한 사람에게 철저히 묶인 그런 모습을 하고 있다.

물론 제사장의 토지는 왕도 어찌 할 수 없다. 그것은 제사장이란 단순히 양식을 벌기 위해 사는 자들이 아니기 때문이다. 즉 자신의 양식을 위하여 토지를 함부로 처분할 수 있는 권리가 제사장에도 없다.

오직 왕에게 철저하게 복속되어 왕 위에 있다는 신을 위하여 봉사해야 하는 자들이다. 따라서 이러한 제사장제도의 취지를 확대한 것이 본문에 나온 사태이다. 즉 이 애굽 나라의 모두가 오로지 제사장처럼 왕을 위해 종사해야 한다는 것이다.

애굽 나라 체제가 이렇게 돌변해 버린 것은 모두 요셉 하나가 등장해서 생긴 현상이다. 그리고 요셉으로 하여금 애굽에서 그런 지위를 차지하도록 하신 분은 다름아닌 하나님이시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요셉을 데리고 다니시면서 궁극적으로 의도하신 바는 이런 체제였다.

천국의 실체가 요셉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미리 보여주신 것이 된다. 그런데 우리가 본문을 통해서 보았듯이 이런 체제가 가능하려면 우리의 가진 모든 것이 주님이 되시는 예수님에게 몽땅 다 빼앗겨야 한다.

눈에 보이지 않는 주님에게 다 빼앗겨야 한다. 그러면서도 불만스러워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감지덕지하고 고마워하고 게다가 자진해서 예수님의 종이 되겠다고 감사해야 한다. 그래야 천국이다. 그렇지 아니하면 천국백성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일부러 일으킨 7년 대 풍년과 7년 대 흉년은 그 어떤 인간들의 결집력과 지혜로도 감당치 못한다. 이러한 대 격변이 지나고 난 뒤에 하나님은 애굽 나라의 사회 체제를 재편성하셨다. 그 이유는 애굽 나라 안에는 야곱, 즉 이스라엘 후손들이 살고 있었다. 그들은 여호와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를 보여주어야 될 입장에 있는 자들이다. 축복을 받은 자녀와 그렇지 못한 자녀들 사이에 어떠한 현격한 차별이 있는지를 하나님께서는 보여주시고자 하신다.

이스라엘 후손들은 빼앗기는커녕 전에 가나안 땅에서 흉년 때문에 잃어버린 모든 것을 이 애굽 나라에서는 넘치도록 보상 받고 있는 중이다. 사람이란 끝이 좋아야 한다. 끝이 될 때 그 사람의 모든 실상이 드러난다.

우리들은 이 땅에서 가난하게 산다고 내심 부끄러워한다. 그러나 가난한 것은 수치스러운 것이 아니다. 정말 부끄러운 것은 여호와 하나님과 무관하게 사는 사람이다. 이 사람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최종적으로 생각해 놓은 사회를 모른다. 그 사회는 예수님 혼자 주님이 되시고 다른 사람들에게는 더 이상 '자기 것'이라는 것은 전혀 없으면서도 도리어 주님의 종이 된 것을 감지덕지 하는 그런 나라이다. 따라서 성도는 자기 가진 재산을 자랑하는 자가 아니라 이미 주님이 되시는 분을 알고 있다는 것을 축복으로 자랑하게 된다.

거기에 비해서 불신자들은 자신의 재주와 재산과 힘 되는 것을 자랑한다. 그러나 그런 것들은 인류 역사 최후의 변란이 찾아 들면 다 무너져 버릴 것이다. 마치 모래 위에 지은 집처럼 말이다. 그들에게 아무 것도 자랑할 것도 없이 끔찍한 파멸만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48:8-14

본문에서 야곱은 요셉의 두 자식을 발견한다. 그리고 그 자식은 곧 하나님께서 야곱, 자신에게 복을 내리신 그 결과로 주어졌음을 잘 알고 있다. 야곱은 그 복이 오게 되는 내력을 자신의 손자 둘에게 실으려고 한다.

야곱이 잉태하기 전에 하나님은 라브가에게 이런 복을 내리신 적이 있으시다.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 바로 이 복이 결코 인간들의 노력으로 달성할 수 없음을 야곱은 알았다. 그렇다면 이런 식으로 주어지는 복을 그대로 후대에 전수해야 될 사명이 야곱에게 있다.

큰 아이 므낫세를 오른쪽에 세우고, 작은 아이 에브라임을 왼쪽에 세운다. 손이 있는 그 자리에서 안수하면 먼저 태어난 나이 순에 따라 므낫세는 장자가 되고 에브라임의 차자가 된다. 그러나 놀랍게도 손을 어긋맞게 놓고 축복해 버린다.

이렇게 되면 큰 자가 작은 자를 장자로 인정해서 섬겨야 되는 것이다. 즉 복의 근원자가 바뀌게 되는 것이다. 결코 에브라임이 므낫세보다 더 휼륭하다든지 자질이 뛰어나든지 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과 아무런 상관이 없다.

단지 그들이 담아내어야 될 인생 내용이란, 축복권은 하나님의 고유 권한임을 증거하는 일이다. 옛날 야곱은 하나님의 축복에 대해서 힘대로 따내면 되는 줄 알았다. 그러나 도리어 그런 심보로 인해 그는 하나님에게 얻어맞았고 그로 인해 다리를 절게 되었다.

그러나 그런 와중에서 야곱은 진정한 축복의 내용을 실감할 수 있었다. 신약성경 히브리서 11:21에 보면, 야곱의 이런 믿음에 대해서 이렇게 나온다. "믿음으로 야곱은 죽을 때에 요셉의 각 아들에게 축복하고 그 지팡이 머리에 의지하여 경배하였으며" 여기에 보면 분명히 '지팡이' 머리에 의지하여 경배했다고 되어 있다.

창세기 본문에서 침상 위에서 축복했다고 되어 있다. 나이 많아 육신을 가누기조차 힘든 상황이기에 야곱은 침상에서 축복했지만 그 실내용은 바로 지팡이 의지면서 남은 일생을 살게 하시는 하나님의 본 뜻에 있었다. 인간의 야심으로 인해 복의 근원자인 야곱은 다리를 절게 되었다.

야곱이 이스라엘로 바뀌기 전, 야곱은 자신의 완력의 힘으로 스스로 살아가던 자였다. 그러나 그가 하나님의 축복을 받고부터 그는 지팡이를 짚어야 살아갈 수 있는 사람이 되었다. 이 지팡이 안에 하나님의 축복의 내용이 담겨 있다. 즉 자신의 힘으로 살아가는 자는 하나님의 축복에서 제외된 자라는 뜻이다.

이런 지팡이 축복에 후손들이 참여 되기를 원했던 것이다. 하나님의 축복을 빙자해서 거기서 얻은 힘으로 스스로 살아보려는 자는 하나님이 원하는 사람이 아니라 천국 바깥에 존재하는 사람이요 참된 축복을 받아본 적이 없는 사람이다. 야곱이 어긋맞게 축복하는 그 식대로 나중에 예수님은 오신다.

인간적인 축복을 기대하는 자들은 천국에서 제거되고 반대로 하나님의 은혜 없이는 못살겠다는 자에게 예수님은 아주 천한 모습으로 그들과 만나신다. 우리가 흔히 쓸데없다고 천하게 여기고 차버린 그들이 실은 우리의 실상에 합당한 은혜인 것을 알아야 한다. 다리를 절면서 비로소 하나님을 제대로 알게 된 야곱처럼,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것이 진정한 우리의 본 모습인 것을 받아드리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49:1-7

야곱이 지금 12아들에게 축복을 하려고 하는 것은 원래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내려준 그 장래 일을 자식에게 언급하고 있는 바이다. 그렇다면 왜 아브라함이 전수해 준 축복으로 완결되지 않고 새삼스럽게 야곱이 나서서 또 아들들에게 축복을 해야 하는 것일까?

그것은 날이 갈수록 장차 만나게 될 메시아의 모습이 보다 많이 후손들의 일생을 통해 담기게 되기 때문이다. 로마서 11:22에 보면, 하나님에게는 인자하심과 엄위하심이라는 두 가지 속성이 있는데 이 두 가지 속성이 지난 이스라엘 역사를 지배해 왔다는 것이다. 축복이든 저주든 결국에는 축복과 저주를 하신 당사자를 만나게 되어 있는데 그 분께 가까이 접근하는 과정을 통해서 그 분의 속성을 실리면서 끌리게 되어 있다.

사사기 17장에 보면, 미가라는 가정이 나온다. 이 가정이 여호와 하나님을 믿는 방식은 오직 축복을 얻어내고자 하는 식이다. 그리고 이 방식을 보다 효과 있게 하기 위해 떠돌이 레위 지파의 한 소년을 데려다가 사적인 제사장으로 삼는다. 그 당시 신앙이 파산상태에 있기에 자기 토지를 갖고 있지 못한 레위지파들은 어떤 식으로도 살아남아야 했다.

그 살아남는 방식이 사적인 축복을 제공하는 댓가로 생계를 유지하려는 것이다. 결국 하나님의 축복마저 자기 소유물로 삼아서 보따리 들고 돌아다닐 뿐이요 하나님마저 개 목걸이 걸어서 달고 다닐 것이 뻔하다. 이처럼 실제로 축복을 받지 못하고 마치 축복받은 양 여기는 사람들의 특징은, 여전히 자기 운명은 자신이 개척하기 나름이라는 생각을 갖고 있다.

고정되고 확정된 운명을 그들이 부담 된다고 자기 위에서 철거하고자 시도할 것이다. 그렇게 해서 자기 마음 먹은 대로의 인생을 따로 설계해 나가려고 한다. 여전히 자신이 자기 인생의 주인공이고 싶어한다.

우리의 미래상은 누가복음 21:32-35에 보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이 세대가 지나가기 전에 모든 일이 다 이루리라 천지는 없어지겠으나 내 말은 없어지지 아니하리라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 그렇지 않으면 방탕함과 술취함과 생활의 염려로 마음이 둔하여지고 뜻밖에 그 날이 덫과 같이 너희에게 임하리라 이 날은 온 지구상에 거하는 모든 사람에게 임하리라"라고 되어 있다.

이러한 사실을 미리 알고 믿어진다는 것 자체가 축복이다. 왜 하나님께서 인류의 미래가 이런 식으로 마무리 되게 하실까? 창세기 49:28에 '각인의 분량대로 축복'했다고 했다. 본문은 이 축복의 분량에 관한 것이다. 즉 어떤 마음 상태가 장차 오실 예수님의 유사하며 어떤 마음 상태가 예수님의 마음과 거리가 먼 것인가가 소개되어 있는 것이다.

본문은 첫째부터 셋째 아들까지의 장래에 대해서 야곱이 예언하고 있다. 첫째 아들은 르우벤이요, 둘째 아들은 시므온이요, 셋째 아들은 레위이다. 과연 이들은 얼마만큼의 축복을 할당 받을 것인가? 다른 말로 하면 이들은 어떤 식으로 장차 오실 심판주의 마음을 표현해 줄까이다. 르우벤에 관해서 창세기 35:22에 "이스라엘이 그 땅에 유할 때에 르우벤이 가서 그 서모 빌하와 통간하매 이스라엘이 이를 들었더라" 빌하라는 여자는 야곱의 아내인 라헬의 여종이다.

이 빌하라는 여종은 야곱과 동침하여 단과 납달리 라는 자식을 낳은 적이 있다. 즉 야곱의 자식을 낳은 여인이다. 그런데 큰 아들 르우벤은 이 빌하라는 여종과 통간해 버렸으니 이는 야곱의 아내를 뺏은 것이 되고 야곱의 침상을 대신 차지한 셈이 된다. 이것은 자식을 하나님의 축복으로 여긴 야곱에게 큰 마음의 상처를 준 것이 된다.

하나님의 축복의 노선에 인간의 죄악이 침범한 바가 된다. 과연 이런 짓을 한 르우벤에게 어떤 식으로 심판주의 모습은 본문 3-4절은 이렇게 나와 있다. "르우벤아 너는 내 장자요 나의 능력이요 나의 기력의 시작이라 위광이 초등하고 권능이 탁월하도다마는 물의 끓음 같았은즉 너는 탁월치 못하리니 네가 아비의 침상에 올라 더럽혔음이로다 그가 내 침상에 올랐었도다"

여기에 나오는 '초등'이라는 어려운 말 뜻은 '드높다'는 뜻이다. 성서 공동번역에는 이 대목을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내 힘, 내 정력의 첫 열매라, 너무 우쭐하고 세차구나 터져 나오는 물줄기 같아 걷잡을 수 없는 홍수 같아. 끝내 맏아들 구실을 하지 못하리라" 결국 예수님의 마음은 걷잡을 수 없는 정력으로 일하시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르우벤을 지적하시면서 나타내신다.

물론 이 세상에서는 이런 성품이 영웅다울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보실 때는 축복에서는 너무나 먼 품성이다. 남에게 지기 싫어하고 넘쳐나는 힘으로 사는 것이 장자다운 모습은 야곱이 축복받기 전의 심성이다. 이것은 낮아지고 또 낮아져야 될 성품이다.

두 번째와 세 번째 아들에 대해서는 5-7절에 보면, "시므온과 레위는 형제요 그들의 칼은 잔해하는 기계로다 내 혼아 그들의 모의에 상관하지 말찌어다 내 영광아 그들의 집회에 참예하지 말찌어다 그들이 그 분노대로 사람을 죽이고 그 혈기대로 소의 발목 힘줄을 끊었음이로다 그 노염이 혹독하니 저주를 받을 것이요 분기가 맹렬하니 저주를 받을 것이라 내가 그들을 야곱 중에서 나누며 이스라엘중에서 흩으리로다"라고 되어 있다.

이들은 34:25에 보면, "제 삼일에 미쳐 그들이 고통 할 때에 야곱의 두 아들 디나의 오라비 시므온과 레위가 각기 칼을 가지고 가서 부지중에 성을 엄습하여 그 모든 남자를 죽이고"라는 대목이 나온다. 시므온과 레위는 자신의 잔인성을 마음껏 발휘하여 복수에 나선다.

이러한 심성은 예수님의 마음과 정의로움이 아니다. 자신의 분노한 성질대로 움직인 것이다. 즉 이 순간 두 사람은 자기 자신의 행동에 조절을 못하고 있는 것이다. 성질대로 상대방에서 퍼붓는 것이다. 참음이라는 것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 이런 면이 예수님과 많이 다른 점이다. 이렇게 볼 때 하늘의 축복이란 것은 바로 예수님의 심성을 닮는 것이다. 이런 축복만을 사모해야 한다.

49:8-11

유다 지파에게 내린 축복이 결코 유다 지파에게만 국한 될 사항이 아니다. 오늘날 우리 성도에게도 해당되는 것이다. 오늘날의 이스라엘은 우리들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본문에 나오는 유다 지파의 축복은 남의 이야기가 아님을 알아야 한다. 그 축복의 내용은 11-12절에 온통 포도주, 포도밭 천지이다. 하나님의 약속의 땅을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라고 했다. 이는 하나님께서 그 땅을 축복의 상태로 보신다는 뜻이요, 땅이 축복 받는 것은 그 지역에 사는 사람들이 복 받을 만한 사람이다는 뜻이다. 유대지파의 거주하는 땅이 축복을 받을 이유는

그 지파에서 누군가 특이한 분이 나타나기 때문이다. 그 분이 바로 이스라엘의 영원한 왕이시다. '홀이 유다를 떠나지 아니한다'고 했다. '홀'이란 임금이 갖게 되는 지팡이를 말한다. 즉 '일시적인 왕'이 아니라는 말이다. '영원한 왕'이 있는 이상 그 지파는 영원한 축복상태에 돌입해 있는 것이다.

이 왕이 나타나는 지역을 본문에 보니 '실로'라고 되어 있다. 따라서 어느 지파가 나중에 진정한 장자가 될 것인가 하는 점을 우리가 짐작해 볼 수 있다. 유다 지파에 최후의 장자가 돌아가야 하는 것은 시편 78:55-72에 하나님께서 이미 마음 속에 요셉의 장막을 싫어 버리고 오직 유다 지파를 사랑하시기로 마음을 정해놓으셨다. 그런 다음 왜 유다 지파 외에는 장자가 아니 되는가 하는 점을 나타내 보이시기 위하여 그들의 육적인 행위를 허용을 하신 것이다. 그리고 그 죄악의 증거들이 하나님께서 유다 지파의 왕을 세우실 때까지 계속되게 하셨다.

그렇게 해야지만 하나님의 선택의 은혜성과 인간들의 죄악성이 병행해서 다 함께 대조적으로 드러나기 때문이다. 특히 인간의 죄악성이 확연하여 드러나는 지점이 '실로'라는 장소이다. 거기에는 하나님의 이름으로 장막이 처음으로 세워졌던 장소이다.

예레미야 7:12에 보면, "너희는 내가 처음으로 내 이름을 둔 처소 실로에 가서 내 백성 이스라엘의 악을 인하여 내가 어떻게 행한 것을 보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시편 78:60에 보면 "실로의 성막 곧 인간에 세우신 장막을 떠나시고"라고 되어 있다.

즉 실로라는 장소를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더 이상 인간적인 행위를 더 이상 묵과하지 않고 거부하겠다는 것이다. 여기에 보면, '실로가 오시기까지'라는 말씀이 나온다. 마치 '실로'라는 것이 지명이 아니라 어떤 인물의 이름으로 거론된다.

이것은 하나님에 의해서 유다 지파를 통해서 하나님의 이름으로 오실 진정한 지도자가 등장한다는 뜻이다. '실로'란 하나님의 이름이 머무는 최초의 장소였다. 그런데 이제는 장소가 아니라 어떤 인물에 담겨서 나타난다는 것이다. 그런데 왜 하필이면 이스라엘의 지도자요 왕의 역할을 유다 지파에서 나와야 하는가?

그것은 하나님의 축복은 하나님의 올바른 속성을 담고 있어야 한다. 그런 면에서 볼 때 르우벤은 탈락이다. 유다 지파를 논하기 전에 첫째 아들 르우벤, 둘째 아들 시므온, 셋째 아들 레위, 모두 하나님의 뜻을 제대로 담지 못하고 있다. 르우벤 지파에 대한 예언은 르우벤이 행한 행동과 연관 있다. 그리고 시므온과 레위 지파에 내린 하나님의 예언도 시므온과 레위가 저지른 행동과 관련있다.

르우벤은 아버지 침상에서 아버지의 처와 통간했다. 그래서 장자로서의 자격이 박탈당했다. 시므온과 레위는 그들의 잔인한 본성을 유감없이 보여주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그들은 온 이스라엘 전체에다 뿔뿔히 흩어져서 살게 하신다. 그런데 유다는 그렇지 않다. 그것은 유다의 지난 행동 가운데서 하나님의 마음과 본질을 제대로 보여주는 면이 있었기 때문에 그러하다.

그 내용이 창세기 43:9에 보면, "내가 그의 몸을 담보하오리니 아버지께서 내 손에 그를 물으소서 내가 만일 그를 아버지께 데려다가 아버지 앞에 두지 아니하면 내가 영원히 죄를 지리이다"

지금 그 자리는, 막내 동생을 인질처럼 애굽의 총리대신 앞에 데리고 가야 될 시점에서 유다가 아버지 앞에 하는 이야기이다. 만약 이 막내 동생을 무사히 아버지 야곱 앞에 데리고 오지 못한다면 자기 자신이 동생 대신 죽겠다고 한다. 참으로 장렬한 생각이다.

인간은 누구나 자기 생존이 우선이다. 우선 자기가 살아 남아야 그 다음에 타인도 도울 수 있다고 여긴다. 그런데 자신은 죽고 대신 남을 살린다는 것은 아무리 형제 지간이요 부모 지간에서도 어려운 일이다. 이런 마음 자체는 야곱의 육적인 본성의 열매는 아니다.

분명 이 마음의 근원은 딴 데 있다. 사실 유다라 할지라도 다른 형제들과 별로 다를 바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창세기 39장에 보면, 유다는 자기 며느리 다말로 통해서 하나님에 대해 새로운 면을 발견하게 된다. 즉 유다는 자기 기분대로 행동했던 사람이다.

자기 아들들이 죽자 그 죄악의 책임을 며느리인 다말에게 뒤집어 씌운 사람이다. 희생 정신과는 전혀 상관없는 정반대가 되는 사고방식의 소유자였다. 이처럼 유다의 죄로 인해 그 피해가 엉뚱한 자에게 가도록 하나님은 조치했던 것이다. 다말은 이 시집의 잘못된 생각을 바꿔 축복의 가정이 되기 위해 자기가 희생하기로 마음 먹게 된다. 며느리 다말은 창녀의 모습으로 시아버지 앞에 나타나야 했던 것이다.

이로서 그 유다 가문은 죽음의 가정에서 축복의 가정으로 바뀌게 된다. 그 와중에서 유다는 하나님의 축복 방식을 알게 되었다. 그것은 다름아닌, 희생자로 인해 다른 사람을 살리는 방식이다. 그리고 이 축복의 원칙 아래 이미 자기와 자신의 집안 전체가 놓여 있음을 알았다. 따라서 유다의 입장에서는 무슨 일이 터질 때마다 이 원리를 적용시키게 된다. 이것은 다른 형제들 간의 차이점이다.

이 정신에 입각해서 유다 지파를 통해 메시야가 오신다. 실로에 오신다. 하나님의 이름을 갖는 왕으로 오신다는 말씀이다. 따라서 우리가 장차 누릴 천국 축복은 우리의 덕택이 아니며 오신 왕의 거룩한 희생의 열매인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이럴 때 우리는 이미 장래가 보장된 자들이다. 더 이상 아무 것도 걱정하지 말아야 한다.

49:13-21

이스라엘의 12지파가 나오고 그들이 거주하게 될 지명을 축복하는 식으로 미리 알려준다. 12지파의 배후에는 하나님의 축복이 있다. 이 축복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 따라 내려오고 있는 축복이다. 그 축복의 결과는 '땅 차지하기'이다.

그런데 이 땅은 보통 땅이 아니다. 이스라엘이 거주하는 땅은 사람 이름이나 혹은 지파 이름을 두기 위한 땅이 아니라 '하나님의 이름'을 두기 위한 땅이다. 따라서 만약 지파들 가운데서 이 '하나님의 이름'을 모독하는 일이 일어나면 그 지파는 이 약속의 땅에 추방되어야 한다. 축복이라는 것은 우리 자신은 그 축복을 소유하기 위함이 아니라 도리어 하나님의 이름이 우리를 지배하는 상태를 두고 말한다.

주기도문에도 나오듯이 '하나님의 이름'을 거룩히 여기는 사람이 된 것 자체가 아무나 누릴 수 있는 혜택이 아니다. 또한 지파가 땅을 갖는다는 것은 거기서 많은 수의 자식을 낳고 키울 수 있는 환경을 장만한 셈이 된다. 바로 이렇게 되어야 하는 것이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주신 축복이다.

야곱에게는 두 아내가 있었다. 서로 자매지간인 이 두 아내는 위가 레아이고 아래가 라헬이다. 그들에게는 각각 여종이 딸려 있다. 레아의 여종은 실바요, 라헬의 여종의 이름은 빌하이다.

자식을 가지게 된 순서는 우선 레아가 먼저요 그다음에 라헬의 여종인 빌하요 그 다음의 레아의 여종인 실바요, 그 다음이 또 다시 레아요, 마지막에 라헬에게 두 자녀가 생긴다. 레아의 자식은 르우벤과 시므온과 레위와 유다이다.

그 다음의 야곱이 가진 자식은 라헬의 여종인 빌하를 통해서 가진 자식이다. 이름이 단과 납달리이다. 그 다음에는 언니인 레아의 여종인 실바를 통해서 갖게 되는 자식이 낳게 되는 갓과 아셀이 있다. 그 다음으로는 언니인 레아를 통한 두 자식, 잇사갈과 스불론이 있다.

마지막으로 라헬을 통해서 가진 자식, 요셉과 베냐민이 있다. 그런데 나중에 약속의 땅 분배에 들어가면 요셉 지파가 두 배나 가지게 된다. 그것은 요셉을 통해서 낳은 손자, 에브라임과 므낫세가 아들과 동등한 반열에 끼어들게 된다.

땅 분배가 총 13지파로 나뉘어지겠지만 레위지파는 각 지파 속에 뿔뿔이 흩어지게 된다. 따라서 땅 분배는 동일하게 12등분으로 나뉘게 된다. 이들 12지파가 어디 어디에 거주하고 있는가 하는 것은 축복의 분량만큼 땅이 넓게 되고 땅이 넓다는 것은 그만큼 하나님께서 많은 자식을 허락했다는 사실을 말하는 것이 되어 역시 축복 분량의 근거가 된다.

하나님이 자비의 속성을 보다 많이 보여주는 지파는 보다 더 넓은 땅을 차지하는 것이다. 이스라엘이 차지한 약속의 땅, 가나안 지역은 요셉지파와 유다지파 중심으로 양분된다. 결국 이스라엘이 둘로 쪼개 질 때에도 이 두 지파가 핵심이 되어 나뉘어지게 된다. 다른 지파들은 이 두 지파의 들러리 역할을 하게 된다.

이 배치도를 보게 되면 한 가지 특징이 나타나 있다. 그것은 다름아닌 야곱의 본 아내인 레아와 라헬 출신의 출신 지파들은 가나안 안 쪽에 옹기종기 모여 있다. 르우벤과 시므온과 유다와 요셉과 베냐민이 그런 지파이다.

거기에 비해서 여종 출신의 지파들은 모두 멀리 떨어져 있거나 아니면 적들과 인접해 있다. 저 위로 단지파가 그러하고 납달리, 갓지파와 아셀 지파가 그러하다. 이런 지파들이 수명이 짧다. 수명이 짧다는 것은 호시탐탐 적들로부터 먹이감이 되고 침략을 수시로 받는 받아서 일찍 망하는 지파들이라는 말이다. 이 이방민족에 인접해 있는 지파들은 늘 전쟁에 시달린다.

그러나 그러한 멸망의 날이 임한 것은 결코 외부 족속들이 강해서가 아니다. 도리어 하나님의 이름이 계시다는 이 약속의 땅에 사는 12지파들이 모두 하나님을 무시하며 살았기 때문에 생긴 결과이다.

사사기 2:20-23에 하나님은 자신이 친히 축복하신 족속을 그 가나안 땅에 두신 것은 주변의 인간들의 힘보다 이 이스라엘 민족이 지니고 있는 언약의 힘이 더 우수하고 월등함을 보이기 위함이다. 아무 것도 없는데도 불구하고 뭔가 신이 계시고 왕이 계셔서 그 보이지 않는 분의 초월적 능력으로 유지되는 특이한 나라가 이 지구상에 등장한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이 세상에 보이려는 축복이라는 것이다. 순전히 하나님의 언약에서 나오는 힘만으로 진정한 생명을 얻을 수 있음을 보이려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거룩한 하나님이 없는 민족과 거룩한 하나님께서 계신 민족 사이를 차별하려는 것이다.

오늘날 우리 성도들도 마찬가지이다. 눈에 보이지 않는 분의 지시만 따르고 눈에 보이지 않는 분만 의지하면서 살기를 원하신다. 그러다가 소위 성도라는 자들이 세상 사람들과 같이 눈에 보이는 인간적인 힘에 의존한다면 그 순간부터 대기해 있는 세상의 세력이 성도를 괴롭히게 될 것이다. 그러한 관계 속에 놓여 있다는 그 자체가 이미 하나님으로부터 축복을 받고 있는 증거인 것이다.

49:22-27

12지파에 내린 축복의 내용들을 조사해 보면, 하나님께서 전사 같이 키우시려는 경향이 뚜렷하다. 전사는 전쟁하는 군사를 말한다. 싸움을 잘하게 된다고 칭찬하는 것이 축복의 내용으로 들어가 있다.

보통 우리들이 생각하는 축복이란, 가진 재산을 말하지 개인적인 취향의 바뀜을 두고 말하지는 않는다. 얼마를 많이 모았느냐를 가지고 측정하지 결코 하고 싶은 일이 바뀐다는 것을 가지고 축복을 받았다 아니 받았다 말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하나님의 축복이란 인간 자체의 변화를 겨냥한다. 시편 1:1-2에 나오는 말씀과 같다. 그런데 율법을 묵상하게 되면 사람이 어떻게 달라지는가 하면 전쟁을 잘하는 전사가 된다는 말이다. 아예 '이스라엘'이라는 이름 자체가 '싸움꾼'이라는 뜻을 갖고 있다. 왜 이스라엘이 이런 속성을 지녀야 하는 것인가?

그것은 출애굽기 6:2-4에 보면, "하나님이 모세에게 말씀하여 가라사대 나는 여호와로라 내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전능의 하나님으로 나타났으나 나의 이름을 여호와로는 그들에게 알리지 아니하였고 가나안 땅 곧 그들의 우거하는 땅을 주기로 그들과 언약하였더니"라고 되어 있다.

축복을 내리신 분이 여호와 하나님이라면 그 여호와 하나님의 속성과 일치되는 축복으로 이스라엘을 휘감게 될 것이다. 그 여호와 하나님이라는 분은 참으로 큰 특징을 갖고 있다. 다름아닌 '언약'을 던져놓고 그 '언약' 성취에 대해서 일말의 양보도 없다는 것이다. '전능하심'이라고 표현하고 계시는 것이다.

축복이란 다름아닌 바로 이 언약 성취의 뒤에서 밀어주는 능력을 의미한다. 하나님의 언약은 일방적으로 이 언약대로 온 우주가 진척될 뿐이다. 이런 여호와 하나님이 전쟁을 벌릴 수 밖에 없는 이유는, 이 세상 인간들이 그런 언약 성취에 대해서 용인할 마음의 자세가 아니기 때문이다.

언약 말고 다른 것을 여호와 하나님에게 요구했다가는 여호와로부터 징벌 당할 준비를 아예 해야 할 것이다. 여호와 하나님의 전쟁이란 비언약에 대한 징벌 차원에서의 전쟁이다. 이 언약 외에 다른 것은 절대로 신경 쓰지 않으신 분이 여호와 하나님이시다. 언약의 내용 말고 딴 것을 얻고 싶다면 여호와가 아닌 우상에게 빌어야 한다.

이미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던져진 언약대로 수행에 나서시기 위하여 하나님은 사다리를 통해서 많은 수의 천사들을 파견하여 야곱의 곁을 떠나지 않게 하셨다. 이로서 모든 사태가 야곱 중심으로 돌아간다. 그러나 결코 야곱이 원하고 있는 바대로는 돌아가지 않는다.

야곱은 결국 자신이 원치 않는 일의 중심인물로 쓰여지고 있는 입장이다. 야곱만 그런 것이 아니다. 야곱의 12자식에게도 동일한 운명의 체계가 주어지게 된다. 여기 12지파에 주어진 축복을 다시 하나로 뭉치면 야곱에게 내린 하나님의 축복이 될 것이다.

하나님이 보낸 수호천사는 아무에게 늘 달라붙는 것이 아니다. 오직 언약 안에 놓인 자만 보호한다. 그래야지만 언약만 증거되기 때문이다. 야곱의 12아들은 아버지 야곱이 만난 하나님이 전쟁을 하기 위한 하나님이신 줄 잘 모르고 있는 형편이다. 아버지 야곱이 그 여호와 하나님만을 만나고 난 뒤에 이름이 이스라엘로 바뀐 것도 모두다 이스라엘은 전시체제를 대비한 군대로 만들기 위한 언약적 차원의 조치였던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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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 21,142건 중 517 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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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