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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

창세기 42장 - 45장 주석자유게시판창세기

창세기 42장 - 45장 주석

이름 : 이진용(IP:222.99.120.158)

창 42장 - 45장

세상에 있는 모든 주도권이 자기에게 있음을 안 요셉은 이번 가뭄 기간을 통해 애굽에서 벌어진 하나님의 사역은 모두 다 이스라엘 가문을 위한 조치라는 것을 아버지 야곱과 형제들에게 알려주고 싶었다.

이 사실을 모르는 형제들과 야곱은 단순히 생존의 차원에서 양식 얻으러 애굽에 내려가고자 한다. 그러나 요셉의 입장에서는 그들이 요셉 자신이 경험한 하나님을 같이 알고자 한다면 자기가 당한 버림의 수난을 그들도 체험해야 한다고 보았다. 그들을 옥에 3일 동안 가두어둔다. 그리고 그 중의 한 사람을 다른 사람을 대신하여 계속 옥에 남아 있도록 조치한다. 그리고 그 사람을 건지기 위해서는 여기 오지 않은 말째 동생을 데려와야 한다고 밝히고 있다.

르우벤은 사태가 이렇게 난처하게 된 것은 요셉을 죽인 피 값이라고 해석하고 있다. 그리고 요셉은 그들이 돌아가는 길에 그들이 가져온 양식 값을 도로 집어 넣었다. 요셉은 이번 형제간의 일은 양식을 파는데 의의가 있는게 아니었다는 사실을 형들이 알기를 원했다. 즉 양식 문제가 아니라 한 사람을 건지기 위해서는 우리는 어떤 결정을 내려야 하는가 하는 문제로 형제들을 유도하기 함이다.

야곱의 입장에서 양식이 문제가 아니라 요셉을 잃고 난 뒤 이제는 시므온까지 보이지 않아 두 아들을 잃은 것이 큰 일이었다. 뿐만 아니라 사랑하는 베냐민까지 잃어버려야 될 지경에 빠진 것이다. 르우벤은 자기의 두 아들을 담보로 내어 놓으면서 시므온을 찾아오자고 제안하지만 야곱은 베냐민의 죽음을 요셉과 같이 여기기에 완강히 그 제안을 거절한다.

기근은 계속되고 가져온 양식도 없어지자 유다는 새로운 결단을 갖는다. 어떤 일이 있더라도 베냐민 만큼은 유다가 책임지고 보호한다는 조건으로 그는 아버지의 허락을 얻어 두 번째로 애굽으로 내려간다.

두 번째로 형제들을 대한 요셉은 계속 자기의 정체를 숨기고 형들이 자기 동생 베냐민을 어떻게 처리하는 가를 지켜 보고 있다. 왜냐하면 베냐민에 대한 태도가 곧 라헬 자식에 쏟는 아버지 사랑에 대한 형들의 마음 자세를 엿볼 수 있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아버지 야곱의 마음에 크나큰 상처를 준 형들의 태도가 달라지지 않는 한 그들은 진정한 형제로 대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야곱이 요셉에게 편애를 한 것처럼 요셉도 그들 보는 앞에서 그에게 5배의 음식을 특별히 부여한다. 그리고 그들이 양식을 얻고 떠나는 길에 베냐민 자루에만 요셉의 은잔을 일부러 넣어 도둑으로 몰아서 그를 다시 인질로 잡아 두면서 다시 형들의 태도를 면밀히 살핀다.

여기서 유다는 베냐민과 아버지의 목숨이 직결되어 있기에 이번 일로 베냐민과 아버지 야곱에게 미칠 재해를 자신이 요셉의 종이 되는 한이 있더라도 발생되지 않기를 간절히 요구한다.

여기서 형들이 자식을 잃은 아버지의 마음을 헤아린다고 파악한 요셉은 더 이상 견딜 수 없어 자기의 요셉됨을 털어놓으면서 그 동안의 내력을 설명한다. 그리고 되어진 이 모든 것은 다 아버지와 형들을 살리기 위한 하나님의 섭리라고 밝힌다. 그러니 나를 이곳에 팔아 넘긴 일에 형들은 조금도 두려워할 것이 없다고 위로하고 있다.

기근. 그것은 흩어진 이스라엘 가족을 다시 한 자리에 모으기 위한 하나님의 뜻이었다. 이들이 다시 만날 때 결코 그 동안의 세월은 허송세월이 아니었다. 요셉을 통해서 그리고 사랑하는 자식을 졸지에 잃어버리고 탄식과 한숨으로 지새운 아버지가 다시 한자리에 모임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 언약의 가족을 이끄시는 원리를 배우게 된 것이다. 그들이 미워하고 죽이도록 싫어한 그를 통해서 오히려 학대한 그들을 살려 내는 이 섭리는 바로 조상에게 나타난 하나님의 마음을 보여준 일이 되는 것이다.

하나님이 세상을 건지기 위해서 나타나실 때는 꼭 이런 모습으로 나타나실 것이다. 우리가 싫어하는 것이 무엇인가? 우리가 가까이 하고 싶지 않는 사람들이 누구인가? 우리가 사정없이 배척하고 싶은 자가 누구인가? 우리는 오히려 그들 속에서 함께 기거하시는 주님을 함께 배척하는 일은 없어야 한다.

42:1-7

요셉의 형들과의 만남에서는 양식이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하나님이 축복하신 그 내용을 그들에게 전달해야 하고 또한 그들을 통해 고향에 있는 아버지 야곱에게 전달되어야 한다.

그 전달 방법은 요셉이 버림받은 상황을 다시 그들 가운데서 새삼스럽게 되풀이 하면서 일으키는 것이다. 자식이나 동생이 하나 빠진 것에 대해서 그들이 어떤 마음을 갖고 있는 지를 파악하는 것이다.

창세기 42:22에 요셉의 형들이 애굽으로 왔을 때, 그 형들은 설마 동생이 총리대신까지 승진할 줄은 몰랐다. 종으로 팔려간 자가 단시간 내에 최고의 자리에 앉을 가능성이란 전무하기 때문이다.

단지 그들은 애굽이 갖고 있는 권세에 복종하여 그 권세의 혜택을 얻고자 온 것뿐이다. 그러나 요셉 입장에서 주려는 권세는 단순히 양식을 내놓는 권세가 아니라 원래 아버지 야곱이 하나님으로부터 축복받은 그 권력을 주려고 한다.

요셉은 지금 형들보다 훨씬 세상을 넓고, 높고, 길게 보고 있다. 따라서 형들도, 그리고 아버지 야곱도 이런 안목을 가질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요셉의 목적이다. 그렇게 하려면 하나님은 죄에 대해서 어떻게 처리하시고 그것을 축복으로 전환시키는 지를 그들도 알아야만 한다.

요셉은 형들을 억류하고 형들을 볼모로 잡아 배후에 계시는 아버지 야곱까지 요셉 쪽을 끌어오려고 했다. 하지만 모든 사실을 그들에게 알려준다고 될 문제가 아니다. 형들이 스스로 자기 자신의 죄에 대해서 기억하고 있어야 한다. 그것을 점검하기 위해 전에 요셉이 당했던 상황을 되풀이한다.

요셉은 형들에게 "정녕 너희들은 간첩들이다". 그러자 형들이 당황해서 극구 부인한다. "아닙니다. 우리들의 배경은 분명합니다. 고향에 아버님이 계시고, 거기에 동생이 함께 있는데, 그런데 한 동생은 어디로 갔는지 잃어버렸습니다."라고 했다. 요셉은

"그렇다면 과연 너희들 말이 얼마나 신빙성이 있는지 확인해보자. 그것을 위하여 너희들 중에 한 사람을 붙잡아 두고 나머지 사람들은 다시 고향으로 되돌아가서 마지막 동생을 이 앞으로 데리고 오라. 그 대신 양식을 가져가거라" 라고 한다. 바로 이런 방식으로 인해 형들 사이에 큰 괴로움이 덮치게 된다. 마치 옛날 요셉을 내다버린 그 아픔이 되돌아온 것 같다.

예수님에게 무엇을 더 얻겠다고 한다면 벌써 예수님을 차버릴 수 밖에 없는 것이 우리 인간들이다. 그러나 성도에게는 그렇지 못하다. 자신이 얻고 싶어하는 그 세상을 것을 챙기기 위해 예수님을 찾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십자가로 인해 자신이 얼마나 세속적인 존재인가를 지적 받기 위해 예수님 앞에서 떠날 수가 없는 것이다. 예수님 앞을 훌쩍 떠나버리면 진정 자신의 죄인 됨과 부족함을 알 길이 없는 것이다.

비신앙적인 자들이 교회에 나와도 진정 자신의 죄가 무엇인지를 알고자 함이 아니라, 도리어 예수님 앞에서 겸손하고 회개해서 그 대가로 주어지는 세상 것이 탐이 나서 계속 예수를 이용해 먹고자 예수님을 들먹이는 것이다. 참으로 교활한 태도이다. 이런 자에게는 결코 영생이 축복이 전달되지 않는 법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요셉도 그러하다. 요셉은 형들이 당황하면서 자기네들끼리 주고 받는 이야기를 통역 없이 그대로 듣고 있다. 그들의 대화 가운데, 요셉을 버린 죄에 대해서 깊이 인식하고 있는지를 점검하고 있다. 요셉이 가진 권세의 혜택은 이런 절차를 통해서 전달되는 것이다.

오늘날도 하나님은 성도에게 뭔가 자꾸만 우리가 귀하게 간직하고 있는 것들을 빼버리신다. 그러면 우리들은 순간적으로 하나님을 원망하게 되고 대들기 까지 한다. 하지만 참된 성도는 이런 과정 속에서도 그동안 예수님의 십자가 고통을 너무 잊고 있었는데 예수님께서는 그 영생의 원천을 다시 깨닫게 하시는 것을 깨닫고 자신의 마음을 되돌리게 된다. 바로 이런 우연적인 일을 성도에게 자꾸만 발생시키게 하시는 것이 예수님이 가진 권세이다.

이런 십자가 아픔을 사이에 놓고 우리는 오늘도 예수님과 만나게 된다. 다른 길로서는 만나지 않는다. 이처럼 축복이란 그 내용물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심령이 달라지는데 있다. 요셉에게 이미 현실화된 이 진리를 이제는 야곱의 가족 전부의 것이 되어야 한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야곱에게 내린 축복의 본질이다. 우리들은 세상의 눈치를 살펴 볼 필요조차 없다. 모든 경우나 상황이 결국에는 성도에게 영생이 돌아오도록 조치 되어 있음을 저 높은 하늘 나라의 안목에서 다시 내려보아야 한다.

43:1-5

야곱은 자식에 대해서 애착을 가진다. 모든 것을 잃는다 할지라도 심지어 자신의 목숨이 위태로울 지경에 와 있으면서도 자식을 놔주기를 주저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야곱에게는 다른 인생관이 있었기 때문이다.

야곱은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내려진 축복을 믿고 있었다. 그 축복은 자식과 관련되어 있다. 만약 자식을 잃게 되면 하나님의 축복에 위기가 초래한다고 알고 있었던 것이다. 창세기 35:10-15에 보면, 야곱이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축복의 내용과 거기에 대한 야곱의 확신에 찬 행동이 나온다.

그런데 그 가뭄 속에 놓여진 이 현실은 가장 사랑했던 자식, 요셉은 이미 저 세상 사람이 되어버렸고, 갑자기 가뭄이 찾아들고 시므온마저 양식사러 갔다가 볼모로 억류되어 있고, 그리고 또 애지중지 하는 막내 아들 베냐민마저 양식과 바꿀 처지에 놓여 있다.

특히 베냐민은, 야곱이 젊은 청춘을 다 바쳐 얻었던 사랑하는 아내 라헬이 죽어가면서 낳은 자식이다. 사랑하는 아내의 목숨과 맞바꾼 자식이다. 따라서 다른 아이는 몰라도 이 베냐민 만큼은 아버지로서 생명을 다하여 지켜주고 싶었던 것이다.

왜 하필이면 현재 야곱이 가장 아끼는 그 자식을 바쳐야 양식을 얻을 수 있단 말인가. 다른 자식도 많은데 말이다. 야곱은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그 내막을 알지 못하고 있다. 하나님께서 의도적으로 주신 축복이 자꾸만 훼손이 되고 있다.

아브라함이 사랑하는 자식 이삭을 산채로, 그것도 자기 손으로 하나님에게 불타는 제물로 바쳐야 하는 순간을 맞이한 것처럼 야곱에게도 이런 순간이 찾아온 것이다. 왜 축복받은 신앙인에게는 이런 어려움이 꼭 주어져야 하는 것인가?

그것은 축복은 그 다음 계속되는 축복으로 채워져야 하기 때문이다. 인간들의 '축복 사랑'과 하나님의 '축복 사랑'이 전혀 달리 이루어지는 것이다. '빼앗김'이 없이는 '하나님의 축복'에 담겨 있는 진정한 뜻을 모르게 된다.

마치 사라의 태가 죽어야 이삭의 탄생의 의의가 제대로 살게 되는 것과 같다. 하나님은 자신이 축복한 자들을 제대로 살리려고 하시는 것이다. 왜 요셉은 형들에게 말하기를 베냐민을 데려오기 전에는 양식을 주지 않겠다고 했을까?

그것은 양식보다 하나님이 주신 축복의 취지를 그들에게 전달해야 된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양식이란 먹고 또 먹어도 사람을 살려낼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러나 축복으로 말미암아 생긴 자식은 연속되는 축복에 의해 인도받아야 한다.

그저 세상 사람들처럼 양식으로만 인도받는 자라면 축복 밖의 인물로 간주된다. 참된 축복된 자는 축복의 이어짐 속에 놓여 있음을 믿어야 합니다. 그런데 야곱이 이 점을 알았다 하더라고 가뭄 속의 그의 입장에서는 속수무책이다. 자신으로서는 어쩔 도리가 없다.

이러한 형편은 하나님께서 일부로 조성하신 것이다. 하나님의 축복이 인간의 손에 의해서 유지된다든지 달성되는 것이 아니다. 인간이란 그저 그런 생각조차 하나님에 의해서 빼앗기고 번복되어야 한다.

축복이란 사람이 지킨다고 지켜지는 것이 아니다. 또한 사람들이 방해한다고 방해 받는 것이 아니다. 요셉의 형들은 요셉이 지닌 축복을 방해했다. 그러나 거기에 대해서 요셉이 취한 행동은 보복차원이 아니라 새 축복 속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그들 생각의 밑둥치를 흔들어놓는 방식을 사용하는 것이다.

야곱의 허락 하에 형들은 막내 베냐민마저 데리고 요셉 앞에 등장시킨다. 형들에게는 그저 양식을 구해서 빨리 그 자리를 피하는 것이 소원이었다. 그러나 요셉은 형들에게 자신이 할 수 있는 최대한의 호의를 베푼다. 그러나 그 때까지도 형들은 자신들의 기존의 사고방식을 고수하고 있었다.

자기 쪽에서 약속을 지키고 자신들이 간첩이 아닌 것을 솔직하게 밝혔으니 총리대신이 그 성의를 인정하고 후대하는 것으로 여겼다. 그러나 요셉의 호의는 곧 '악으로 선을 갚은 꼴'이 되겠금 요셉이 조치하기 위한 작전이라는 것을 그들은 눈치채지 못했다.

이제 형들 앞에서 나올 말은 전혀 없다. 이유를 막론하고 그들은 은혜를 악으로 갚은 배은망덕한 존재자들이 되었다. 요셉 앞에서는 고향에서 가지고 온 야곱의 귀한 선물과, 성의도 다 무용지물이 되었다. 모든 가치를 몰수당한 셈이 된 것이다. 이제 살리고 죽이고 하는 것은 완전히 요셉의 손으로 넘어와 버렸다.

바로 하나님의 축복이란 이런 형편에 있을 때만 그 완성에 대해서 제대로 와 닿는 것이다. 지식으로, 종교적 치장으로 아무리 하나님께 영광돌리고 찬양을 해도 그런 것은 은혜를 아는 모습이 아니다.

진정한 은혜를 아는 자는, 자신이 전적 무능력한 자이며, 축복 주시는 분의 자비심이 아니면 도저히 용서되지 못할 자라는 것을 절감하며 살아가는 것이다. 바로 이 점이 성도가 사는 이유이다.

나름대로 열심히 하고, 잘나고, 뛰어나게 노력하는 모든 공적이 다 하나님에 의해 강탈당해야 하고 자기에게는 아무 것도 남지 않는 빈털터리가 되게 할 때, 비로서 이미 하나님이 준비하신 축복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가를 감탄 할 것이다. 이 '빼앗김'의 축복을 받은 자만이 제대로 된 축복의 대상자이다.

시편 23편에 '내 잔이 넘치나이다'라는 대목을 우리 유심히 생각해야 한다. 이 땅에 살면서 우리가 수시로 축복을 받는다. 그 축복과 행운을 입었다고 여길 때마다 우리는 그것으로 족하다고 여긴다. 하지만 사실 우리에게 죽음이 찾아들면 그것마저 몽땅 회수당해야 한다.

죽음의 시점에서는 모든 것을 압수당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잔이 가득 넘치는' 이유는 천국 자체가 바로 우리의 잔에 넘치는 축복이기 때문이다. 사도 바울은 차라리 장막 옷을 벗고서 새로운 축복의 장막 옷으로 갈아입고 싶다고 한 것이다. 이 세상에 살면서 좋은 것 있더라도 그것에 마음 빼앗기고 연연하지 말자. 그것도 다음 축복을 위해 잃어버릴 것들이다.

44: 1-7

요셉이 누리고 있는 권세가 육의 사람들에게는 대단한 것 같지만 당사자인 요셉은 그 자리를 영적 입장에서 이해하고자 한다. 그러기 위해서 형들의 육적 사고방식을 다 제거할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그 작업이 바로 그들 모두다 다 졸지에 악한 죄인으로 만들어버리는 것이다.

요셉은 길을 떠나는 베냐민의 짐 보따리에다 몰래 은잔을 집어넣도록 하인에게 시켰다. 그리고 난 뒤에 그 절도죄를 구실삼아 형들을 붙잡으려고 한다. 즉 형들은 될 수 있는 한 높은 권세자인 요셉 곁을 벗어나려고 한 반면에 요셉은 도리어 총리대신의 자리를 영적으로 이해해서 현재 육적인 사고방식에 사로잡혀 있는 형들에게 육적 사고방식의 한계를 깨닫게 하려고 한다.

아무런 이유도 없이 요셉 자신의 종으로 팔리도록 조치를 한다. 어떤 부자 청년이 예수님에게 와서 하는 말이, 영생을 얻겠다는 것이다. 자신은 어릴 적부터 모든 율법을 다 준수했다고 했다. 예수님은 "너의 모든 재산을 다 팔아 가난한 자에게 주고 그 후에 나를 따라 오너라" 라고 하신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그 사람의 육의 한계를 잘 아시고 졸지에 죄인으로 만들어 버리려는 작전이다. 즉 어떤 인간도 자신의 공로로 거듭 태어나는 것이 아님을 분명히 하기 위한 말씀이다. 마치 요셉이 일부로 형들을 절도범으로 모함한 행위와 같다.

육의 관점에서는 선과 악의 차원에서 세상을 보는 것을 뜻한다. 그러나 모든 것이 죄인이라면 더 이상 선과 악의 구분은 무의미하게 되는 것이다. 그 부자 청년은 영생도 못 얻고 근심하며 돌아갔다고 했다.

구원이란 우리들의 소망에 따라 하나님께서 부응하는 형식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우리 인간들은 아예 구원 받을 염치도 없는 죄인임을 분명히 하시는 과정을 통해 하나님께서 임의로 원하시는 자에게만 구원이 돌아가는 것이다.

그런 사람들에게 하나님쪽에서 계속 놓치지 않고 그 사람을 인도하게 된다는 점이 구원의 있어 관권이다. 또한 예수님께서 부자 되기를 그리워하는 사람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부자가 천국 가는 것은 마치 낙타가 바늘 구멍으로 들어가기 보다 어렵다"고.

이 말씀은 결코 바늘 구멍을 통과할 수 있는 낙타와 같이 스스로 훈련하고 신앙적으로 단련하라는 말씀이 아니다. 아무도 자신의 희망사항에 의해 구원되는 법은 없다는 것이다. 이 불가능한 일에 대해서 하나님은 영의 세계쪽에서 택함 받은 쪽으로 다가서시는 것이다.

구원 받을 자가 아무리 내빼고 거부해도 결코 저항할 수 없는 은혜로 말미암아 본인은 전적으로 죄인 됨을 고백하면서 구원 받는 자가 되고 마는 것이다. 요셉도 이런 방식을 사용한다. 요셉이 베냐민의 짐 보따리 속에 집어넣은 것은 다름아닌 은잔이었다. 이 은잔은 점을 칠 때 사용하는 도구이다.

요셉은 형들 앞에서 하나님처럼 다른 차원에 속한 인물, 즉 육에 속한 자에게는 감히 따질 수도 없는 세계에 속하는 인물로 등장하려고 한다. 형들로 하여금 자기네들이 알 수 없는 하나님 같은 권세, 즉 애굽의 총리대신의 권세에 붙잡히게 된 현실을 인정하게 한다. 육적으로 따져 봤을 때 형들은 참으로 억울하다. 결코 그들은 선을 악으로 갚을 마음조차 먹지 않았다.

그러나 어떻게 되었든 벌어진 사태는 그들로서는 도저히 저항해 볼 도리가 없는 사태이다. 과연 우리가 무엇을 잘못했고 무엇을 잘했는가를 가지고 그 총리대신 앞에 나아가 따져 볼 이유까지 사라져 버린 것이다.

오늘날 우리가 하나님 손에 잡혀 있을 때의 입장이 이러하다. 선악적인 차원에서 우리가 무엇을 잘했고, 무엇을 못했고를 하나님 앞에 따져본다는 것은 아무런 의미도 없는 일이다. 하나님께서는 얼마든지 우리로 하여금 흔히, 우리들이 실수다 혹은 죄다고 여길 수 밖에 없는 경우를 당하게 할 수도 있다.

마치 요셉이 형을 죄수들로 몰아세우기 위해 일부로 일을 꾸민 것처럼 말이다. 그러면서 중요한 사실은 그런 것을 가지고 하나님은 우리를 따지시는 것이 아니라 "왜 너희들이 하나님의 종이 되었음을 느끼지 못하느냐"를 가지고 따지신다.

흔히 성도에게 있어 징계란 선악 차원에서의 죄를 따져 물어서가 아니라 영적 차원에서 관계를 무시하거나 놓치면 그 관계를 회복시키는 차원에서 징계를 하신다. 징계를 통해서 완벽한 인간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징계를 통해서 완벽한 주인과 종인 신자의 관계를 유지시키도록 인도하시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성도가 갖는 자유다.

나쁜 짓을 하기 위한 자유가 아니라 이러한 관계를 증거하기 위한 사명 수행을 위한 자유다. 형들은 자신의 장래는 망쳐버린 상태이다. 애굽의 총리대신과 관계를 마감하고자 했던 그들이 영문도 모르는 체 졸지에 종이 되는 신세가 되었다. 하지만 그 가운데서도 그들은 아버지 야곱으로부터 받은 사명을 놓치지 않았다.

막내 동생을 무사히 아버지에게 데려가서 아버지 야곱으로 하여금 편히 눈감고 돌아가시게 하는 일을 말한다. 유다는 점 잘 치는 하나님 같은 애굽의 총리대신에게 사정을 한다. 차라리 자신이 베냐민 대신 종이 될 터이니 그 베냐민을 석방시켜 아버지와 재회하게 해 달라고 한다.

오늘날 성도도 이러해야 한다. 우리는 어차피 하나님의 종이 된 입장에 있다. 이미 구원 받았다. 우리 마음대로 죄짓고 살아가는 것이 우리의 사명이 아니라 이렇게 일방적인 은총으로 구원해주신 그 사랑을 증거 하는 것을 놓쳐서는 아니 된다. 물론 이제부터 더 이상 자기 자신을 위한 삶이란 성립되지 않는다. 몽땅 예수님에게 다 빼앗긴 입장이다.

45: 1-5

요셉의 일생은 처음부터 끝까지 한 번도 자기 원대로 된 적이 없다. 하나님은 요셉의 일생을 휘 젖고 다니신 것이다. 하나님은 하나님 나름대로 요셉에게 사명을 내려주었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들은 모르게 말이다.

본문 5절에 보면 두 가지 면이 나온다. 하나는 형들이 요셉의 정체가 드러난 마당에서 자신의 과거의 죄와 잘못에 대해서 후회하면서 거기에 대한 보복을 두려워한다는 것이다. 또 새로운 예상치도 못한 일로 인하여 형들은 불행을 느끼면서 동시에 공포에 직면해 있는 것이다.

그러나 다른 면도 있다. 요셉은 도리어 형들을 위로한다. 단순히 위로차원이 아니고 실제 차원이다. 실제로 하나님께서는 형들의 목숨을 구하기 위하여 먼저 요셉을 애굽으로 보낸 것이다. 형들은 나름대로 세상을 보는 눈이 있었고 그리고 누구 못지 않고 자기 생명을 부지하기 위해 몸부림쳐 왔다.

그러나 형들의 생명은 형들 본인들의 노력과는 전혀 무관하다. 그것을 성사시키기 위해 하나님은 요셉을 만인의 주가 되게 한 것이다. 모든 인간은 하나님의 뜻에 준해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생각해 둔 행복의 요건을 찾아서 살아가려고 몸부림치고 있다.

이것은 사명이 아니라 불행의 씨앗이다. 따라서 그 어느 인간도 구원에 성공할 자는 없는 것이다. 요셉이 형들에 대해서 주가 되고, 예수님이 오늘날 모든 자의 주님이 되시는 것은, 그 어느 인간도 인간의 자기 관리로서 구원될 수 없음을 분명히 보여주기 위함이다.

교회는 주님께서 머리 되시고 주인이 되신다. 다른 인간들은 결코 주인 노릇을 하면 안된다. 그것은 차라리 예수님을 추방해버리고 그들만의 놀이터를 만든 꼴이 될 것이다. 그런데 이 요셉이 주가 되는데 있어 형들의 교만과 질투가 원인제공이 되어 있었다.

즉 일단 한 사람에게 하나님의 뜻을 담아두신다. 그러면 그 사람을 중심으로 주위 사람들의 어리석음과 짧은 한계성으로 인해 그 사람을 욕하고 핍박하고, 구박해서 배척하게 만드신다. 이럴 때 그 주위의 어리석은 사람은 하나님의 뜻이 담긴 사람을 그 사회에서 강제로 제일 천한 자리로 전락시켜 버린다.

따라서 그 어떤 인간적인 힘으로도 본래의 상태로 회복이 불가능하도록 만든다. 그리고 난 뒤 주위의 어리석은 자들은 만사가 잘된 것처럼 안심하게 된다. 그런데 이상스럽게 세상 일이 갑자기 예상치도 못할 일이 생기게 된다.

하나님의 뜻을 담을 사람을 성공리에 제거했다는 자들이 자신들의 지혜와 능력으로서 그 문제를 해결해 보려 하지만 뜻대로 될 리가 없다. 그럴 때 사람들은 자신들의 지혜 이상을 찾게 된다. 이 때 하나님께서 그동안 사람들에게 잊혀지고 버림받은 자를 세상에 등장시켜 그를 믿고 따르는 자에게 한해서는 생명과 축복을 주는 그런 방식으로 세상을 인도하신다.

하나님께서 이런 식으로 일을 하시면서 얻고자 하는 것은 원래부터 이 세상은 인간이 주인이 아니요, 그리고 주인공도 아님을 확실하게 해 두자는 것이다. 우리는 이미 예수님의 소유된 자로서 살아간다는 사실을 놓치지 말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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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